2019년 12월 27일 금요일

극도에 달해 있는 "말씀의 혼잡"(고후 2:17/4:2)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고후 5:10)이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자아중심("당을 지어"는 오역)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심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니...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니...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다"(롬 2:7-10). 

모든 인생은 3운법칙으로 확정된 기간 내의 수명을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채운 후, 이 세상을 떠나간 다음 창조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세상 살았을 때 각자가 행한 선악간의 결말을 따라 영원한 행, 불행의 운명으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 이 짧은 인생의 총결산이다. 물론 성경에 명시한 바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이제 곧이어 닥칠 적그리스도의 하나님 교회 상대의 학살극 와중에 죽임을 당한 순절자들은 마지막 심판을 거치지 않고 의인의 부활에 참여하므로 둘째 사망이 그들을 관여하지 못한다(계 20:6).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성경이 "선악"을 논하는 것은 옛 사람 즉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은 재출생, 신창조의 과정을 거치기 전의 인생 행보를 말함이 아니니, 그 상태에서는 오직 죄와 멸망뿐이요 선악을 논할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악을 따지는 것은 선을 행하는 바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재출생, 신창조된("구원받은") 이후의새 사람되어 있음을 말함인 바, 믿고 구원받으면 선을 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의에 따른 선택으로 말미암는 것인즉 "믿는다"면서 악을 행하는 경우 그 악을 따라 심판의 대상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꼭 교회를 상대로 바울 사도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피력한 것이다. 즉 선과 악에 대한 판결이요 그에 따른 선악간의 보응이다. 선의 대칭어는 악이요 의와 짝이 되는 개념은 불법, 불의, 죄이다. 영물들 중 복종을 잘한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이고 고의적으로 자기 취향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을 때 악령으로 풀린 것과 같다. 인간도 당연히 그렇게 해서 악인과 의인으로 분류되는 것이야 물론인데 불행히도 이들 모두를 심판할 아담 자신이 범죄에 빠져 이런 죽음과 고통의 장본인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믿지 않아 구원될 기회를 놓친 사람이 심판 대상자됨은 그 믿지 않음을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아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 악을 좋아하여 믿지 않음으로써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데 대한 형벌인 것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요 3:20)이다. 고로 심판은 바울 사도가 천명한 대로 "선악간에 행한" 것을 근거할 따름이지 "믿어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 결코 아님. 아담은 우리처럼 구원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도 선악을 따라 죽음의 처벌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 영물들이라고 인간과 차별이 있을 수 없어 선을 행하여 순종했기 때문에 거룩한 천사가 되고 그렇지 않고 자아중심으로 나간 탓에 악령들로 구분된 것임은 방금 지적한 바와 같다. 

우리의 구원은 범죄 전 아담의 위치로 복귀, 환원되는 것이기에 "영생"(범죄 전 아담이 영생하는 즉 죽지 않는 몸이었으니까)이지, 아담이나 영물들과 차별화된 특혜를 입어 선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시험해볼 것도 없이 곧바로 천국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주의를 요한다. 그런 특혜를 입을 아무 근거가 없으니 만일 그런 특혜를 입는다면 아담이나 영물들과는 차별화가 되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무릇 피조물이면 모름지기 모두가 공평공정하게 처리되는 것이지 특별히 더 봐주시는 것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외모로 취하심이 없음"을 되풀이 강조하는 것. 즉 죄지으면 죄지은 그대로 처벌 대상일 뿐 과거 전력을 따져 특별히 봐주고 참작하는 것이 없다는 뜻. 과거 아무리 태산 같은 선을 행해도 지금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에 대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다(겔 3:20/18:24). 곧이곧대로 죄값이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 이치로 악인이 회개하여 선을 행하기(사랑으로 순종하기) 시작하면 과거의 태산 같은 죄라도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자 메시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다. 우리가 아담으로 인하여 "육으로 난" 것은 아담의 육체와 둘이 하나됨 즉 한 몸됨인 것. 그래서 아담의 육체가 내 육체이고 내 육체가 아담의 육체. 아담과 대칭되는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나와 한 몸이 아닌 "한 영"(6:17)되심으로 내가 구원되는 것이니, 이것이 "육으로 남"과 대칭이 되는 즉 짝이 되는 "영(성령)으로 남"이다. 아담과 내가 육체로 한 몸이 되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남녀 "한 몸"됨을 살필진대, 아담의 육체(갈빗대 하나)로써 여자가 탄생했기 때문에 실상 그와 같이 여자도 아담의 몸에서 났기 때문에 한 몸인데, 이 한 몸됨을 잘 정리한 것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라는 것이다(7:4). 

한 영됨도 마찬가지로 나의 삶은 주님의 것, 주님의 삶은 나를 위하신 것, 나는 주님 위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는데(고후 5:15/롬 14:7-9) 죄가 발붙일 틈이 없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데(약 1:15) 무슨 죄가 가능한가. 모든 악은 나를 위하는 이기/利己주의에서 생기는 것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요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한 몸됨이 와해됨을 말한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선을 행함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악이니 곧 자아중심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다. 짝의 법칙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일 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다"(약 4:17). 사람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행하는데 자기를 위하든 남을 위하든 둘 중 하나다. 자기를 위하지도 남을 위하지도 않는 것은 없고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함이다. 내가 모든 행위의 주체이니까 자연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란 뜻이다. 

거듭 강조하는 되풀이 말이지만, 은혜와 율법을 혼동하는 이가 거의 전부다. 잘못 배웠고 잘못 가르치기 때문이다. 율법은 "마지막 아담(줄여서 "마담")"으로써 다시(거듭) 나지 않은 상태에서 각종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주님 오시기 전에는 그것을 선으로 간주했지만, 오신 후로는 완전히 달라지고 정상으로 회복된 상태다. 선의 가치가 변경되었다는 것이 아니니 산 자가 아닌 죽은 자가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것을 선으로 간주되지 않아 다시 말해 영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함이다. 원래 뜻이 이렇지마는 주님 오시기 전이니까 잠정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치부했다는 뜻이다. 원래는 정상적인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자 역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의식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오랜 관습에 젖어 이 상태로 그냥 안주하려 한 것이니 결국 따지고 보면 자아중심이다. 그래서 율법 행위(모세 율법을 위시해서)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바울은 편지마다 강조한 것인데, 당시는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된다는 사이비 무리가 횡행했기 때문에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 당시 바울 사도의 편지였건만, 오늘날 잘못 읽으면 마치 선한 행위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가치 없고 별무소용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누가 오늘날 모세 율법을 언급이라도 하는가. 그런데도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제 자리로 걸쳐두지 않고 엉뚱한데 걸어두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무식이 도를 넘는 것을 본다. 가장 주된 요인 중 하나가 세상 삶에 대한 안일한 생각이다. 세상 삶의 낙에 대해 마치 금식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도 전연 그런 것이 없다. 이 세상이 마귀의 관장 내지 지배 아래 있는 것조차 마음에 두지 않는 정신적 해이가 도를 지나쳐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세상이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막연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태평세월이다. 그래서 교회당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래야 영광이라도 돌리는 듯이 크게 지어 올리는 것이 유행이다. 일종의 바벨탑인 줄 짐작도 못하는 저질의 수준이다. 이러고서 무슨 하나님의 뜻을 알아 교인들을 제대로 구원으로 인도하겠는가.     

마틴 루터가 그런 피상적 생각으로 즉 사람이 원천적으로 선을 행하기가 어려운데 자기 부인이 어려운데(자기 부인은 인간이 얼마나 죄악으로 찌들어져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 말씀하셨을 뿐이라는 것) 그런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 나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믿어 그것을 칭의 또는 이신득의로 알았다면 로마 카톨리 못지 않게 민생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자각을 주는 것으로는 주님 이전 율법으로 충분한 것이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한 것이요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의 육신이 죽어 깨뜨려지기 전의 상태를 탄식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함께 죽어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 처치된 다음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는 원도 한도 없는 완전한 영생이다. 구원받으려고 또는 구원 못받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것도 없이 따놓은 당상관으로서의 영생이다. 이것은 영원불변이다. 

고로 이렇게 은혜로 선물로서 믿음으로써만 영생을 얻었으니 당연히 지금부터는 아무 두려움 없이 즉 세상 목숨 끊어지면 끊어지고 말면 말고 나는 영생할 터이니까 오로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일편단심 순종밖에 없어 그래서 얼마든지 주님 위해서만 살 수 있게(즉 나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살려고 함이 없이) 된 것을 가리켜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아래 있다 하는 것이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갈 5:25) 함이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난데없이, 성경은 "자유(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자유로 육체(죄지음, 자아중심, 나 자신을 위함)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했음에도 이를 완전 무시하고, "구원받았으니까 내가 나를 위해 살아도 구원받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며 영적 정신적 해이가 말도 못할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게 누구의 복음이요 가르침인가. 루터의 복음이고 깔벵의 가르침인가? 

"나를 위해 죽으심, 그 죽으신 사실"을 믿으라 하시지 않았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믿으라"(요 3:16) 하신 것이다. 발음이 헷갈리지 않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비슷하지 않다. 확연히 다르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심을 믿는다는 뜻이다. 나를 친히 위하심을 그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으로 확증하신 것을 믿음이다. 나를 위하시니까 당연히 나는 나를 위하지 않는다. 나를 위할 공간이 없다. 꽉 차게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고로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오직 순종하는 삶만이 내 생명인 줄 알고 일편단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여(고후 5:9/고전 7:32) 주님만 위해 사는데 왜 그것이 선을 행함이 아니고 의를 행함이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내가 내 욕심을 부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니까 악행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자기 부인"은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에 충분히 요약되어 있다. 원수 사랑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 내게 미치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영적 안위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는 이스라엘 내 민족의 구원"(롬 9:3)이라 하지 않았는가. 

칭의/稱義에 관한 바울 사도의 말은 믿는다면서 어찌하여 바울의 행한 바는 따르지 않는가. 바울의 말을 따름도 아니다. 바울의 말도 베드로의 말도 아니고 주님의 말씀은 더더욱 아니고 어디서 배운 못된 내용을 익혀 바울의 교훈인 양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이고 있는가.  바울 사도가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바울의 교훈이 다르고 주님의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의 교훈은 그 때 당시 상황에 맞추어 쓴 서한문에 불과하다. 바울이 평생 정력을 기울여 쓴 복음 해설서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아닌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말씀으로서 이해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으니, 다른 편지, 또는 복음서 등에 다 유감 없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져 보충,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소위 "칭의" 문제로 다시 말해 "오직 믿음" 대신 "믿음에다 행위"를 가미시키기 때문에 소위 "종교 개혁"을 했다면 초신자에게는 실족 거리가 될 만한 심각한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물론 카톨릭의 행위라는 것은 "교회" 권위 위주다. 일반적으로 성경이 역설하는 바 "선을 행함"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에서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바 "선을 행함"까지 포함시킨 것이라면 그 루터와는 영원 결별하는 것이 옳다. 카톨릭의 사이비성은 그 마리아 위함이 중심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 하나로써 반성경, 반하나님, 반메시야적임일 만천하에 입증되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 아니라 "오직 메시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야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 곧 구원의 희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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