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불교의 싯달다가 "인간고/苦"라 이름 붙이고
이 고통에서의 해탈 즉 해방됨을 최종 목표로 정했을까.
믿음의 사람들만 세상에서 모진 고난의 대상이 됨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모든 세상 사람이 동일한 고난 고통이다.
단지 믿는다는 <이유>가 그런 고통 고난(핍박)일 뿐이다.
빌라도 로마 총독이 유대인을 마구 잡아 죽여 흘린 피를
자기 신에게 바치는 제물 위에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상에 이런 불의를 하나님이 두고 보십니까 투의
항의라 할 수 있고 또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회의론격이다.
그런데 주님은 한 마디로 답하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죽음이 죄와 연계되지 않고는 "회개"란 단어가
나오실 수가 없다. 한 술 더 뜨셨다. 망대에 치어 죽은 죽음.
똑같은 평을 달아주신 것이니, "회개"와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죽음을 회개와 연결 지으실 때에는
오직 열쇠는 하나다. 아담의 죽음이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사람이 장수하든 단명하든 무의미다.
억을한 죽음이든 불의의 사고사든 또는 아니든 의미 없다.
노아시대처럼 천년 가까이 살든 사산아로 죽어 나오든
전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새가 날아 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비통해 한 싯달다.
인간의 죽음과 일반 생물의 죽음을 동일시한 잘못된 해석.
그런 생물은 이성이 없다. 이성은 영혼과 결부된다.
영혼의 이성적 판단으로 사는 사람에게 죽음이라니!
아직 죄도 짓지 않은 아담에게 죽음과 썩음의 육체라니!
그래서 죄를 짓고 나니 "영적 죽음"이라는 해석을 붙이는가!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라 하는데 하나님이 어찌 사랑이냐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즐기는 것인가ㅡ그래서 무신론이다.
그대들 신학자들이여, 무신론을 키운 것은 당신네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두고도 설왕설래 왈가왈부만 무성 뿐
변죽만 울렸다ㅡ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WCC, WEA 따위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성경만이 만세반석이다. 성령께서 가르치시면
동일한 대목을 두고도 오늘 어제 가르치심이 다르다.
새로운 맛의 별미다. 눈이 뜨이는 정도가 다르다.
내용을 다 안다고 덮어두는 성경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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