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계 11:3-13)은
이 땅의 주인되신 이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役事되는 모든 것을 총칭함이다.
스가랴서에 이미 소개되어 있는 것을(슥 4:1-14)
요한 계시록에 인용된 것뿐인데 스가랴는 이를 설명하여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슥 4:6)이라 하신 말씀을
소개한 것을 보아,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계시록에 "저희 주"(11:8)로 우리말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두 증인(선지자)을 <두 명의 사람>으로 보기 쉽다.
"땅의 주인이신 이 옆에 모시고 서 있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는 것.
Biblegateway에 보니 "저희"가 43, "우리 주" 또는 그냥 "주"가 16.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the Lord of them"의 이 "them"의 관점이다.
"their Lord"이라 하지 않고 왜 "the Lord of them"이라 했는가.
그 둘만 아닌 비특정 다수를 말함이라고 판단한 것이 후자이고
비특정 다수(모든 구원 받은 자)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전자이다.
이 "두 증인"은 그렇게 "예언"하다가 "적그리스도에게 죽임 당한" 후
"부활하는" 것으로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판가름 난다.
즉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만 구원 받은 자들이 부활하므로
(주님 부활 때 많은 사람이 부활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승을 떠난 이들)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는 특정 개인을 지칭함일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네피림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아담("마지막 아담")의 지배하에 있어
예외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인데 처음 세상에 오신 후부터 그러하다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경우는 메시야 오시기 전의 일인 것).
두 증인에 대해 굳이 사족/蛇足을 달자면 왜 "둘"이냐 하겠는데,
이 대목과 관련된 스가랴서의 내용(4장)이 마지막 때를 겨냥한 예언임을
요한 계시록에 그대로 인용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마지막 때" 관련 예언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
곧 "한 때, 두 때, 반 때"로 이 역시 계시록에서 인용되고 있으니까
다름아닌 성경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짝의 법칙의 등장을 나타냄이 아닐까.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의 "천사가 가진 복음"(14:6) 전파자로서의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갖가지 핍박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특징을 갖추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로서의 상식이다.
소위 "성소수자" 보호라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기괴망측한 명분 아래
차별금지법(평등법)을 만들어 남색하는 자들을 비방 못하게 법을 만들어
기독교 물을 먼저 맛본 서방 "기독교국가"들이 앞장 서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것이 무슨 선진국의 개화된 문화인 양 착각하니
이 땅에서도 자칫하면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하다가는 옥살이할 판이다.
주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음"과 같이
영생 구원은 죄를 모르던 이들에게 죄됨을 지적하고 깨우쳐주어
회개하도록 함에 있는데 성경에 "남색"을 분명 죄라고 규정 명시했으므로
그런 행위를 바로 일러주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전도자로서의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전보다 더 기막힌 핍박/탄압이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고로 초대교회 때 교회 기둥 같은 야고보, 성령 충만한 스데반 등이
순교를 당한 것과 같이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고 변함이 없다.
바울 사도처럼 온갖 수모와 고난 고통을 무릅쓰고서야
제대로 된 전도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의 세상이다.
사망(및 이에 수반되는 모든 인간고)의 권세를 쥔 자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 고통이 메시야 우리 주(인)님의 십자가와 연계되어
남은 사람들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 몸에 채움"(골 1:24)이 아닌가.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초래된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써만 종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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