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5일 수요일

살려고 발버둥치는 데에서는 아무런 해답도 우러나지 않고 오직 "죽음" 앞에서만 서서히 정신이 돌아든다 아담의 범죄/죽음으로 모든 인생은 이세상 폭군 악마 앞에서 광대춤만 추기 때문이다


한 첵코 화가의 대표작 "집에서의 살해"/"Murder in the House"
by Jakub Schikaneder (1855-1924)



드보르작의 진혼곡





설명 추가

인간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하지 않다.  

이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애기하고자 했는가. 

대신, 대답해보리라. 한 젊은 여자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가지각색이다.

어떤 이는 사자의 명복을 비는 듯이 경건히 손을 모으는가 하면 

한 소녀는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있다.

마치 어떤 물건이나 짐승의 사체를 구경이나 하는 듯이. 

이 세상 왕이요 지배자인 마귀는 지금까지 속여오기를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젊어서 죽는 것도, 참혹하게 타살되는 것도.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는데 저렇게 피를 쏟는 것도.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답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여 가르치셨는가.

죽음을 "망함, 멸망"(눅 13:3,5)이라 정의하셨다.

사탄의 말대로 하면 인간을 처음부터 멸망자로 만드셨다.

있을 수가 없는 말인데도 그렇게 속여 온 것이다. 

주님은 이 망하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명시하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이라 하시어 이를 명백히 하셨다.


죄를 지어 죄가 있으니까 회개하는 것이 아닌가. 

빌라도가 길에 있는 아무나 잡아다 죽여 그 피를 제물로 썼다.

이를 확인하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보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한 술 더 뜨셨다.

우연히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는데 그 예까지 드신 것. 

즉 특정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죽음을 설명하신 것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망하는 것", 이것이 인생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망하는 자로, 죄인으로 만드실 리 있는가.

인간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초래된 죽음이다.

아담의 범죄로 생겨난 모든 인간의 죽음과 인간고이다. 

 더 이상 마귀의 거짓말에 놀아나지 말 것이다. 정말 망한다.


첫 사람 아담이 양면성을 지녀 범죄 전과 후가 다르듯이

"마지막 아담"께서 그런 양면성을 띠실 수밖에 없어

"죽은 자인 죄인"의 모습(육체)으로서 처음 세상 오셨고

그렇게 <우리 위해> 죽으신 후 <우리 위해> 또 살아나시어 

그 다시 사신 몸으로 다시 세상에 오셔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양면성을 지녔으니 "옛사람", "새사람"이다.

함께 죽은 옛사람이요, 현재 함께 살아 있는 새사람이다.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
(요 3:6)으로 짝의 법칙대로다. 

육으로 났으니 명백히 아담의 육체와의 한 몸됨이다. 

이제는 성령으로 계시는 "마지막 아담"과의 "한 영"(고전 6:17)

둘이 하나됨은 육신으로 남녀 한 몸됨과 이치가 같으니(고전 7:4)

남자 몸은 여자의 것, 여자 몸은 남자의 것, 이렇게 바꿈이다.

이같은 서로간의 바꿈은 한 영에서도 당연히 적용되어

'몸'된 나는 '머리'이신 주님의 소유, 주님은 나의 소유다.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그 부활이 내 부활.

그래서 내가 지금 살아 있으나 이전과는 차이가 현격하다.

이전에 "산다"고 살았을 때는 나 위함이요 실제는 죽음,

이제 '삶'은 몸인 내가 머리이신 주님만 위함이니 생명의 법칙.

생명(영생)의 영위(營爲者)즉 산 자는 오직 몸-머리 관계에서

상대를 위하고 자기를 위함이 없다(고후 5:15,롬 14:7-9).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변동이 없다.

그러나 양자 선택의 자유의지를 누리는 자주독립성은 불변.

그래서 내 임의로 지금이라도 자아중심이 얼마든지 될 수 있으니

인간은 로봇(기계)으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  

성경에 "믿음으로 산다"는(갈 3:11/롬 1:17)것이 이를 가리킴이다.

즉 옛사람은 죽은 것이라고(골 3:3)성경은 명시한다.

이렇게 죽은 것으로 알고 이 사실 위에 행동함이 "믿음"이다.

또한 믿음에서 파선했다, 믿음을 배반했다는 등의 성경 표현은

이 죽은 사실을 토대로 하지 않고 여전히 자아중심일 때다.

자기가 죽지 않았으니까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다. 

자기 부인은 자기가 죽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주님과 함께 죽어)"(갈 5:24)것.


자기 부인은 자아중심으로 인해 생겨난 상대적 용어다.

아담의 범죄, 죽음으로 우리 육체가 자연계 육체의 

땅의 동물들의 본능적 작용에 포로되어 자아중심으로 일관해

이런 육체는 죽음으로써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롬 6:6).

아담 범죄 전 초자여계 육체는 이렇지 않았다.

오직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자아중심이 되는 것이었으니

영물들이 그러하여 악령이 되었고 아담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믿음 여부로 사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사실을 믿으니까 사실대로 되는 것이요

사실이라도 믿지 않으니까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

믿음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원은 상호작용이기 때문.

즉 둘의 하나됨을 통해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생명의 박동이 자아중심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음이다. 

생명은 생명의 법칙대로 함이요 생명의 법칙이란 것은

둘이 하나됨 즉 짝의 법칙에 의한 양면성의 동시성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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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요결을 진정 이제서야 알게 되었네

아래 링크는 1908년 퉁구스카 관련 해설ㅡ https://blog.naver.com/trinia/221494304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