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0일 월요일

바울사도가 로마서 서두에서 "믿어 의롭게 된" 자가 영생에 들어간다 하지 않고 "참고 선을 행한" 자가 들어간다고 한 이유를 모르면 당신은 아직도 구원되지 못하였고 영생에 들어갈 수도 없음을 아시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은 의젓한 아들로서의 구원이니

우주만물을 상속 받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위의와 영광으로서

사람되신 독생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속자인즉(롬 8:17)

주인 의식에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주인이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노예 근성으로 일관하는 자를

만물의 주인으로 삼기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야 누구나 통하는 상식.


때문에 천국은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마 11:12)이라 하셨고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해 들어간다(눅 16:16) 하셨으니

싸워 이기는 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쓴다는 바로 그 말씀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구원받는 자를 "이기는 자"로 명명했다.

고로 겁약하여 사람들 눈치만 보고 주저주저하는 "두려워하는" 자는

거짓말 등 모든 죄를 저지르는 자와 함께 멸망밖에 없다(계 21:8).

이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살리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이건만

지금까지 사탄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사람의 교훈, 가르침, 지어낸 이야기만 따르게 했으니

이런 행티는 당시 유대인을 상대해서나 오늘날 "교회"를 상대해서나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막 7:7)

하심과 같으니 변함 없는 속이는 자 사탄의 상투적 특기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법칙이 바로 사랑의 법칙 곧 '둘의 하나됨'인 이유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 위하는 자아중심이란 바로 그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우치지 못하는 한 사랑이 있을 까닭이 없다.

우리 구원이 "은혜"가 되는 까닭은

나는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오로지 일방적으로 나 위하신 사랑으로 나 위해 당신 자신을 다 바쳐

장장 6시간에 걸친 극한 수모와 고통을 당하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시니 그 고통 감히 우리가 가히 측량할 수 있으랴).


그 십자가 앞에서 서라, 당신은 목석보다도 못하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이 사랑은 머리로서의 솔선 수범의 성격이라

이와 같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신 이상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으시다.

사랑의 본질적 성격은 양면성의 동시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를 나타내줄 것"(요 14:21)이라 

하신 대로 사랑은 반드시 사랑으로 화답하는 길 외에는 없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나타내어주시지 않는다. 결단코, 영원히.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리고, 찾는 자만이 찾고 구해야만 얻는다.

그와 같이 영원불변의 말씀으로 약속하셨기에 이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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