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은 의젓한 아들로서의 구원이니
우주만물을 상속 받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위의와 영광으로서
사람되신 독생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속자인즉(롬 8:17)
주인 의식에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주인이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노예 근성으로 일관하는 자를
만물의 주인으로 삼기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야 누구나 통하는 상식.
때문에 천국은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마 11:12)이라 하셨고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해 들어간다(눅 16:16) 하셨으니
싸워 이기는 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쓴다는 바로 그 말씀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구원받는 자를 "이기는 자"로 명명했다.
고로 겁약하여 사람들 눈치만 보고 주저주저하는 "두려워하는" 자는
거짓말 등 모든 죄를 저지르는 자와 함께 멸망밖에 없다(계 21:8).
이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살리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이건만
지금까지 사탄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사람의 교훈, 가르침, 지어낸 이야기만 따르게 했으니
이런 행티는 당시 유대인을 상대해서나 오늘날 "교회"를 상대해서나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막 7:7)
하심과 같으니 변함 없는 속이는 자 사탄의 상투적 특기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법칙이 바로 사랑의 법칙 곧 '둘의 하나됨'인 이유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 위하는 자아중심이란 바로 그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우치지 못하는 한 사랑이 있을 까닭이 없다.
우리 구원이 "은혜"가 되는 까닭은
나는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오로지 일방적으로 나 위하신 사랑으로 나 위해 당신 자신을 다 바쳐
장장 6시간에 걸친 극한 수모와 고통을 당하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시니 그 고통 감히 우리가 가히 측량할 수 있으랴).
그 십자가 앞에서 서라, 당신은 목석보다도 못하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이 사랑은 머리로서의 솔선 수범의 성격이라
이와 같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신 이상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으시다.
사랑의 본질적 성격은 양면성의 동시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를 나타내줄 것"(요 14:21)이라
하신 대로 사랑은 반드시 사랑으로 화답하는 길 외에는 없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나타내어주시지 않는다. 결단코, 영원히.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리고, 찾는 자만이 찾고 구해야만 얻는다.
그와 같이 영원불변의 말씀으로 약속하셨기에 이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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