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6일 화요일

★이병철 상성 회장 24개항 질문 (5)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5)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


이 세상은 '악령' 용(龍)이 "이 세상 왕",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직접 지배하는 세계

실상을 말하면, 성경을 믿는다는 거의 전부의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는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악신[고후 4:4] 또는 악령(惡靈)이 천하 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내게 절하는 누구에게든지 준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소개하고 있다[눅 4:5,6]. 다시 말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 인간을 대적(對敵)하는 자라는 뜻]이 이 '인간 세상'의 왕[王]인 것이다[요 14:30]. 이 인간 세계의 통치자 곧 지배자라는 뜻이다.


앞에서 영원한 이분법(二分法)이라는 말을 했거니와, 우리가 이러한 세상 신의 활동을 인정할진대, 성경과 반대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그 어떤 종교 경전도 그것이 아무리 최고의 선을 표방하고 있어도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선'을 주장해도 실제는 '위선'인 것이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머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로 입증할 수 있으니, 그 하나뿐인 머리와 '다른 말'을 할 때는 무조건하고 진실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상 그렇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부터 다시 따지고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반드시 인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계시는 법이요 그 말씀은 일정 형태를 지니면서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것이어야 하므로, 이에 반하여 각기 다른 내용으로 진리인 양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은 거짓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이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하에 그렇게 됨은 쉽사리 결론 지을 수 있음이다.


세상 영광과 권세를 보이며 "이것을 네게 주겠다"[눅 4:7] 하는 것 역시 대단한 속임수다. 그가 실제 줄 수 없는데도 준다고 하니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시적 생명인데, 그래서 그런 세상 권세니 영광이니 하는 것도 그런 하루살이 같은 인생들이 연쇄적으로 엮여져 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는 것을 간신히 얽어놓은 것에 불과한데, 마치 인간이 영원한 생명체인 것처럼 그래서 그런 것들이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과시하고 있으니 그런 것이 바로 흉악한 속임수라는 뜻이다.


이런 나약하기 짝이 없고 내일도 그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고난 받아 죽어지는 의미밖에 없는 처량하고 초라한 몰골인즉, 단 오늘만 목숨을 지탱하더라도 떳떳이 당당하게 옳은 도리를 따라 올바른 일을 하다가 그 때문에 그렇게 고난 받고 죽는 것 외에 이렇다 할 가치가 전연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현재 온 천하를 속이고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계 12:9/고후 4:4].


떳떳하고 당당한 일이라는 것은, 인간 삶이 본시부터 '한 몸'을 이룬 공동체적 성격에 있는데 여기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하는 것 즉 그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여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을 말함이니 이 외에 또 무엇이 있을 수가 없다. 한 몸 체제에서 자기 이웃[상대]을 위하는 것은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엡 5:28].


자기를 위하되 직접 '나' 자신을 위하는 쪽으로 향하지 않고,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웃에게 방향을 틀어[고후 5:15] 그래서 그 방향이 최종적으로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지게 함으로써, 각자가 전체 '우리' 모두를 위하는 삶의 지혜를 말함이다. 무한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양팔이 있다고 가상한다면 그 두 발을 자기 쪽으로 뻗지 않고 나 외의 모든 이웃 그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도 뻗음으로써 이를 다포용한 다음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 '한 몸'되고 '하나됨'의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으로서, 처음부터 자기를 중심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팔은 자기 쪽이 아닌 상대방 쪽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자기 부인"[눅 9:23]이라 한다. 이렇게 더 큰 것을 멀리 내다보는 지혜 없이 눈 앞의 이익만을 챙겨 무조건 자기 쪽으로 팔을 뻗는 것만 고집하니, 자기 이외의 남의 것을 샘내고 욕심 내고 빼앗으려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선수(先手)를 쳐 서로 싸우고 그 중의 하나가 독재(獨裁)를 하고 남을 억압하고 그러면 상대는 절치부심하여 복수하기를 벼르다가 뒤집어엎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난장판이 이 세상인 것이다.


자기 쪽으로 뻗는 팔은 상대방중심의 '사랑'의 팔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사사로운 욕심'의 팔이다. 세상은 모두가 이런 자기중심 일색의 체제로 되어 있다. 남이 그러하니 나도 자연 그리 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도리어 잃는다.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요 12:25] 하신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정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무하고 무의미하기만 한 것을 마치 대단하고 의미 있는 양 슬쩍 보여 주며, "이것을 네게 주겠다"고 유혹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하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우리 인간의 대표[하나님이시지만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 되셨으니까]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물러가라!"는 호통으로 그 가증스러움을 통렬히 꾸짖어 물리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니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거룩한 천사든 아담 손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회장과 같은 진정한 구도자에게는 결정적인 해답이 될 수 있기에, 여기서 밝히거니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는 그 '자체 증명'에 있다. 외부적인 그 무엇 예컨대 과학적인 어떤 증거가 있어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따위에 성경은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답게 그 자체의 내용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물론 각자 스스로 성경을 반드시 읽는 데에서만 이는 확인될 수 있는 일이나,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이므로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없음과 같이 아무나 그런 자체 증명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여기서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이지만, "이 한 가지만 해도 그 자체 증명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예로 든다면, 무릇 거짓말, 속임수, 꾸며대고 지어내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반드시 현실 세계를 겨냥하고 목표하는 것이지 미래를 두고 그런 거짓을 말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거짓말의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 그 거짓이 탄로 나기 때문에 '당장의 이해 관계' 또는 '이 세상에서의 득실'을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현세의 어떤 이득(利得)을 위함이 모든 속이는 것, 이 세상 모든 거짓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면 반론할 것이다, "불교 경전은 그러면 세상 이득을 목적하는가? 오히려 인간사 세상사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니 욕심을 버리라고 역설하지 않는가?". 그러면 이에 대해 우리가 반문하는 것은, "불교도들이 이 세상에서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도 한결같이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 미리 경고한 적이 있던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자 또는 지배자[王, 임금-요 14:30]가 악신(惡神)으로서 인생들을 노예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 적이 있던가?" 하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또 그 답이기도 하다.


진실과 거짓의 공방(攻防)


원래 첫 사람 아담이 그러했다. 에덴낙원에서 영물(靈物)들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이들 영물들이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2:18,19].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이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아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지식면으로는 영물들의 보좌를 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머리 역할을 한 것이니, 영계의 모든 존재의 시작점(始作點)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에덴 낙원이라는 영계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여타의 지식은 원래부터 영계로서의 에덴낙원 출생인 영물들에게 뒤졌지만, 이는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 우열(優劣)을 다투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의 배려에서 나온 것] 그 아래 자연계에 속하든 영계에 속하든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통할하는 위치였었다. 그러므로 아담은[당시의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게 말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3:1-5]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대응하여 꾸짖었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르는 결과가 되니 오늘날과 같이 모든 인간이 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들게 되는 실마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추종하는 자는 마땅히 그 지배 아래 들게 되어 있음이다.


이와 대조되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대면하여[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시험하는 때에만 접근한다] 시종일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셨으니, 곧 "기록되기를, '주(主)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 하였다" 하신 것이다[눅 4:8].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한 몸 체제를 이룬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으로 친다면 '여자[처음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그와 같이 물리쳤어야 마땅했던]'의 위치가 오늘날 교회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하고 물리치고 제압할[약 4:7]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엡 6:17] 이 외에는 없고 이 외에 달리 무엇을 사용하든 그것은 필패(必敗)의 원인이 됨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렇게 물리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조종하는 바 이 세상에서의 온갖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핍박과 탄압[마 10:28]을 그와 같이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그렇게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번번이 물리치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손에 잡혀 죽으신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심지어는 얼마든지 우리 생명까지 끊어놓을 수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할[욥 2:6]은 시험하는 자로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시험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뜻을 따라[즉 악인(끝내 죄를 회개할 의사가 없는)을 걸러내고 추려내고 솎아내시는-마 13:49]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고난이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그리스도 교회의 수난사(受難史)인 것이다. 죽음의 위협을 가하고 실지로 이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권력이 바로 이런 시험 차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철통 같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완전 해방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가 시험하는 것이다. 다시 자기 손아귀 안에 움켜쥐려는 시도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실물[실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공기를 우리는 보지 못하나 그 존재는 인정함과 같다. 앞에서 사물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을 했듯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이 보이는 자연계에서의 가시적인 생명체와 대립되는 존재다. 첫 사람 아담이 이 양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만 국한되어 존재하는 자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되어진 불가피한 현상임을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때문에 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음으로 양으로 인간 생활과 불가분성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를 제쳐놓고는 거의 어떤 일도 논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진실과 거짓의 대립 국면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도 첫 사람 아담을 속인 것처럼 현재도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로서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논함에는 그가 쳐놓은 함정과 그물로서의 거짓 것도 부득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모든 거짓의 장본이요 배경이 되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사탄"이라고도 하나 성경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따름]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금방 온 세계에 동영상과 함께 퍼뜨려지는 상황이므로, 소위 ufo식의 이런 모든 기괴한 것들의 배후, 배경을 밝힐 필요가 있는데, 이런 것은 모두 악한 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티다. 악령들의 짓거리인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 장악하고 인생들을 철저히 노예화하고 있는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음이니, 과거에는 이것이 강력히 제지되었으나 지금은 때가 되어 그 제지력이 해제된 까닭이다[살후 2:7].


고로 인간사, 세상사로서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연관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때문에 무조건 반대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 하고 "악령" 탓으로 돌리는 상투 용어 또는 수법이라 오해할까 하여, 미리부터 이 실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좌지우지하니 그대로 사실을 밝히는 것이 도리이지 억지로 우회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요 16:11/14:30]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인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악령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실정은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악령들과 인간들[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아] 간의 전쟁 양상의 무대가 이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 친히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우리 인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의 선봉에 서 계시는 것이니 이로써 우리는 영적(靈的)인 군대(軍隊)를 구성하고 있는 형태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전장(戰場)인 것이다.


악령들이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니[그러나, '전적으로 볼 수 없는' 시대는 이제는 지났으니 ufo식의 형태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전투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완전무장해 있을 것을 경고하고[엡 6:11-18]. 군인으로서의 고난 받음을 당연지사로 가르친다[딤후 2:3]. 군인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4]. 전투가 분명하되 우리의 싸움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임을 매양 역설하여 방심하지 않도록 경계심을 고취시킨다[고후 10:3-6].


단 유의할 것은 전쟁 양상이라는 것은 그의 지배력을 벗어나 있는[구원을 받음으로써]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일 뿐, 그 나머지 인생들은 철저히 그의 관장 아래 놓여 있으므로 완전히 그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노예로서의 처지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키는 대로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들도 애초에는 그 장중에 놓여 억압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가리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함"[눅 4:18]이라 하였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포로되어 있던 자[비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만 아니라 죄의 육신에 얽매여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롬 6:6]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하여 자유해방이 되면 당연히 이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맞서는 자유의 전사(自由戰士)가 되는 것이다. 이 전쟁은 일진일퇴의 모습이라기보다 초전(初戰)과 종반전의 구별이 뚜렷하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처음에는 발뒤꿈치를 물렸다가 나중에 그 머리를 박살 내는 그런 상황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창 3:15].


그러므로 시초에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 악령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탄압의 표적과 그 대상이 됨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은 현세에서의 삶의 낙 일체를 부정하고 있음은 당연하니, 왜냐면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역에 속해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삶의 낙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세의 창달을 꾀하지 않는다는 의미만 아니라, 악령이 관장하고 있는 이 세상 자체와 적대적(敵對的)이 됨을 인하여 그로 인해 받는 환난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영적(靈的)인 전쟁이므로 이 세상의 전쟁처럼 무력으로써 정복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福音, 복된 소식, 희소식)과의 차이


세상 어느 종교도 이 세상과 적대적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은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이 또한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과의 차이, 따라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의 가장 확실한 차별이 된다. 물론 이 '세상 종교' 중에는 "기독교"도 포함된다. 성경대로 믿으면 그들은 결코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데도 현저히 세상 삶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니 그렇게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악령(惡靈)이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 통치자요 신(神)이라는 사실을 성경만이 밝히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마왕(魔王)은 '신(神)'인데 우리는 '육체'에 불과하니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바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것을 성경은 예고하고 이에 대비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 어느 종교도 이런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거짓일 수 없고 진실일 수밖에 없는 가장 ‘확정적인 증거[내용상으로 나타나는 자체 증명]’ 가운데 하나가 된다. 우리 각 사람은 한 국가에 소속되어 국법에 매여 있다. 한 국가의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한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살리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및 통치와는 별개 문제다. 이 세상은 말하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다. 왜냐면 우리 인간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악령의 소행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철저한 제재를 받는 것이야 당연하다[욥 1:12]. 이 경우, 긴 안목에서 그렇다는 뜻이고, 바로 코앞의 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런 코앞의 권력을 악령이 행사한다는 그 뜻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직접 지배하는 권력과 적대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는가, 현세적인 이욕(利慾)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하면 당연히 '없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에서 현세적인 아무 욕구도 취할 수 없는 데에서, 성경을 일부러 거짓으로 지어내고 꾸며대고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만을 말해도 믿을까 말까 하는 판에 거짓말을 한다고 믿겠는가. 진실이기 때문에 믿으려고 할 사람까지도 오히려 그런 거짓말 때문에[만일 성경이 거짓말이거나 거짓이 섞여 있거나 할 때] 믿지 않을 것이니, 무슨 이유로 감히 거짓말을[성경이] 지어내겠는가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정체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요한 계시록(啓示錄)에 나오는 대로, 4 생물, 24장로 및 그 수가 "천천 만만"인 천사들을 지으셨다[계 5:11]. 먼저 "그룹"[cherub]과 "스랍"[seraph]을 지으셨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다음에 천사[영물(靈物), 자연계의 각종 짐승들과 대칭을 이루는]들을 지으셨는데, 인간을 위해 지으신 이런 영물[천사]들 가운데에서 그들 스스로의 선택[악을 좋아하든 선을 좋아하든 자기 자유에서]에 의해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구분되어졌으니 인간 중에서도 의인(義人, 善人)과 악인이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악령들 중의 우두머리 격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 인간[첫 사람 아담]을 거짓말로 속여 죄를 짓게 함으로써 인간을 죽음에 빠뜨리게 하여 그 결과로 오늘날의 인간 불행[죽음을 위시한]이 초래되었고, 또한 그 여파로 현재 이 인간 세상에서 그 지배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영물들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으나 악령의 말을 따라 범죄함으로써[창 3:1-6] 인간[아담]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향[지배권]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빚어졌으니 말하자면 세상이 뒤집혀진 꼴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하면 일종의 왕위(王位) 찬탈이라 할까. 이는 인간의 위치를 탐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자기의 범죄 행위에다 끌어들임으로써 자기와 한 패거리가 되게 하여 자기 처지를 방어하고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 손위인 인간을 시기하여 미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이 악령[및 그 영물 일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의 악연이 맺어지고[:15] 인류 역사로 수놓아진 이 세상은 그 전쟁마당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즉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전쟁 터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성경이 경고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직시(直視)이다. 성경 외에 그 어느 무엇도 이 사실을 인류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니,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전적으로 이 악령의 지배 아래에 있으므로 사실대로 알린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좌시하고 방치해 둘 리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손을 못대어 그런 것이다.


이 전쟁 양상(樣相)은,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 천하무적의 하나님의 아들들[구원 받은 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과 영물들의 일부[즉 거룩한 천사들을 제외한] 곧 악령들과의 '힘 겨루기'이므로, 쌍방이 서로 상대[호적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위치가 일시 "약한 자"[고후 13:4]로 격하되어 오직 그 신념, 결의가 얼마나 공고하여 요지부동인가 하는 그 여부로만 그 강약(强弱)과 승패가 저울질되는 터라, 그래서도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의인(義人)들로서 받는 고난, 고통, 불이익 등은 필연이요 필수라 하는 것이다.


우리[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의인(義人)이 되어 있는]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이 신념에서 악령들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악령들로 하여금 악령들이 되게 한 그 원인[범죄]에 절대로 보조를 맞추지 않고 그와 항상 반대로 나가는 것이 우리의 당당한 깃발[旗幟]이므로 곧 우리의 강함이요 승리가 됨은 당연하다. 즉 한 몸의 이치에서 자기 부인[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마 22:36-40]으로 일관되게 나가고 자기 중심[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을 한사코 배격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요 승전(勝戰)의 무기(武器)인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어 그야말로 그의 노예가 되어 있으나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이들은 천사의 호위 속에서 막강하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맞수가 되어 악령들과의 전쟁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 기록에서 그리스도께 관련되어 천사들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친히 구원 얻은 우리 모두의 '대표'이시므로 이는 곧 나와 관련된 천사들의 활동을 상징하여 나타내는 의미이다[히 1:1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使者, 천사)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자기 자신 사람이심을 그렇게 표현하여 강조하셨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요 1:51] 하심도 그 뜻이요. "광야(曠野, 荒野)에서 40일을 계셔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 들었다"[막 1:13/마 4:11] 함도 그러하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역시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눅 22:43] 하였다.


"삼가 이 소자들[小子. little ones]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저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마 18:10] 하심 그대로다.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내[구원 받은] 안에 계신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있는 나의 육체 주위로 막강한 천사들이 둘러 싸고 있으니,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 예언자) 엘리사를 불 말(火馬)과 불 병거(火兵車, chariots of fire)가 산에 가득하여 둘렀던 사실 역시 그러하다[왕하 6:17].


"불"은 영(靈)의 속성을 말한다. 즉 영물(靈物)들이니, 천사들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군대들이 그와 같이 엘리사를 둘러쌌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주님을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陣)치고 저를 건진다"[시 34:7] 하였다. 악령들은 이러한 천사들과 맞수이다. 인간[아담]은 애초 이런 영물들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위치였었다. 그러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속아 죽음에 이른 뒤로는 '죽은 자'로서의 인간이므로 영물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으나 "거룩한[악령들과 달리 범죄하지 않은] 천사"들만은 사람을 보좌하는 그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여 그렇게 "사람을 섬기고"[히 1:14] 있음이다.


그러나 이들 천사들은 악령들과 직접적으로는 아무 원수진 것이 없다. 오직 우리들 사람을 중심하여 사람을 위해 그렇게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고[단 10:13-"바사국군(國君, the kings of Persia)"이 이런 악령들을 가리킨다] 지금은 악령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상태다. "하늘에서의 전쟁"[계 12:7]이 끝났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설명이 될 것이다. 요즘 인터넷 상에 보면 소위 UFO들의 현상을 보이며 "이런 초월 문명의 존재들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는 이 우주에서 결코 외롭지 않다"는 표제를 내걸고 있는데 너무 어리석고도 유치한 소리다.


자기를 속박하는 악령들을 가리키며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 성경을 믿지 않음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무지의 현실이다.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와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완벽한 "결코 외롭지 않은" 그래서 든든하고 넉넉하고 푸짐하고 느긋한 복된 사람 삶의 가치를 누릴 것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고후 5:20] 호소하는 일이다. 물론 "외롭지" 않다. 그러나 이 이웃이 우호(友好)적인 선린(善隣)이 아니라 시초부터 인간에게 적대적인 악령들인 것이다.


이 세상 곧 자연계 자체가 홀로[홑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겹[重疊]으로 되어 있으니 곧 영계(靈界)와 짝을 이루어 병존해 있음이다. 따라서 보이는 인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음이니 단 그들과 사이 좋게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억압당하고만 있는 이 비극적인 냉엄한 현실에 가장 우선적으로 눈떠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악령들과 대립되는 거룩한 천사들이 대등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과 이웃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향면에서 그들 악령들에 비해 못하고 덜한 것은 없으나 거리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악령들은 근접하여 우리와 이웃하고 있고 거룩한 천사들은 비교적 원거리로 격하고 있다는 차이뿐이다[단 9:21/10:13]. 그러나 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 이후부터의 활동에 천사가 등장하여 출현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요 1:51/눅 4:39/22:43/마 28:3/행 1:10]. 이들은 영계의 "각종 짐승들"[창 2:19]이다.


그리고 인간[아담]은 영계의 특정 식물의 열매를 먹은 결과로 이런 육체가 되어 버려 그런 악령들이 우리에게는 신(神)처럼 현재는 되어 있는 것이다. "짐승"들이라 함은 그들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19]. 아담은 원래 이들 신(神)들 위에 군림해 있는 신(神)이었던 것이다. "신"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으니, 이들 영물들과 마찬가지의 신령한 몸으로 그들 위에 위치하여 그들을 비롯한 당시의 온 세상을 "다스리고"[1:26]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가리켜 성경이 "우리가 신의 성품(性品)에 참예한다"[밷후 1:4] 함과 같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고후 4:4]이니까 신령한 몸을 입은 인간이 신이라고 해서 괴이하게 여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이와 같이 신[영]으로 창조되었지만 신의 세계[또는 영계]의 식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서 이 모양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러한 비극적 실상과 위치를 우리가 미워하고 슬퍼하는 것이야 당연하니 그래서 이 세상 삶[의 낙]을 혐오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그 낙을 즐기려는 것은 한낱 짐승[자연계에 속한]으로 남기를 바라는 그래서 이 썩는 육체로서의 삶으로써만 자기 생애가 끝나기를 바람과 같은 "미친 마음"[전 9:3]이기 때문이다. "이제 웃는 자에게 화가 있고 이제 우는 자는 장차 웃을 것이라" 하심이 이 때문이다[눅 6:21,25].


 따라서 이 세상과 이웃하여 한 세상[그나마도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뿐이지만]의 찰라 같은 시간을 두고 웃고 즐기는 쪽을 선호할진대, 이 세상 신(神)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운명을 같이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다. 그렇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과 스스로를 차별화시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스스로 만들어 격리할 때 그래서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때 악령들이 들어가는 곳과는 영원히 분리되는 생명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예수님 사랑[JESUS LOVES YOU]", "예수님 구원[JESUS SAVES]" 등과 같은 표어를 좋아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것이 결코 인생을 구원하지 못하고 되레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오직 목적인 것처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이 악령이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회개하지 않는 한 믿음도 사랑도 구원도 모두 헛구호이고 빈말이고 속이는 일일 뿐이다. 믿어 구원 얻는 것은 반드시 "회개"를 전제한다[행 2:38]. 즉 "악행을 버려야"[3:26] 하는 것이다. 그렇게 회개하여 악을 버릴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위의 구호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는 회개하라는 말은 없이 무조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으면 영생한다는 의미만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이어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티를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되면 그 추악함과 가증스러움에 메스꺼움을 금치 못한다. 소위 "UFO"니 하는 그들의 짓거리가 모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지 흉물스러운 것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 자신도 그 마음 쓰는 것이 악해서 그렇지 하나님 애초 지으신 대로의 외양(外樣)은 아름다운 것이다. 마귀라고 해서 흉악스럽게 생긴 마물(魔物)이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악령들이나 악인들이 만들어내고 꾸미는 것은 그 악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흉물스럽고 메스꺼운 면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이 그 마음의 쌓은 악에서 악한 말과 행동을 분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 12:35]. 그래서 상대적으로 "거룩함"[聖, holiness]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에덴낙원 등에 관한 기타 상세한 설명도 추후에 있게 될 것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부연해 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기록되어 있는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고전 4:6/15:54]. 기록은 후대에까지 남겨지는 증거로서 가장 안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반드시 "기록되었기를, 기록하기를"이란 말로써 시작함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라"[요 12:48]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식언(食言)하심이 없고 한번 말씀하시면 그것이 곧 법이 된다.


이 기록의 중요성은 모세가 시내 산[Mt. Sinai]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 친히 돌 판에다 쓰신 것으로서[사람과 상관하시는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천사를 통해서다] 받은 사실로도 확증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말씀[약속]의 불변성을 말하고 확실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한번 내신 말씀이나 이루어진 모든 내용은 향후 일절 변경됨이 없음을 확증하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나타나고 그리고 한번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충분하며, 새로이 그 어떤 것도 첨가되거나 삭제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위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무한하신 사랑과 자정(慈情)이 담겨 있으니,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차마 우리를 심판하시지 못하시는 심정이시더라도 그 말씀은 영원한 원리원칙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법질서 차원에서 너희가 조처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함유함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요일 4:8]이심과 동시에 "소멸(燒滅)하는 불"["a consuming fire"-히 12:29]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즉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그 엄정, 엄격하심을 나타내심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형용할 수 없는 어버이 자정을 피력하심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시 2:11] 함과 같고, "두려움과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 함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2:12/4:4]고 거듭거듭 강조함과 같다. 그러므로 원리원칙[하나님은 그 원리원칙의 근원이시고 근본이시니]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항상 평안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초대(初代) 교회가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로 진행하였다"[행 9:31] 함과 같다. 만사를 우리는 양면성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이 양면성으로 이해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예가,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간[왜냐면 그렇게 교회에 경고했고 또한 교회에 대하여 자기를 본받으라 했으니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 남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없으므로] 표본 인물인데도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함이니 이것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바"[롬 9:1-3]라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자기의 구원밖에는 관심을 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임이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 말씀이 유대인 지배 권력 계층의 비위를 상하게 했으므로 항상 그를 잡고자 했으나 번번이 그에게 손을 대는 일을 못하고 그를 포박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밝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습니다"[요 7:44-46] 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종교 경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이 기록한 서책 가운데 성경처럼 그렇게 말하는 내용은 없는 것이다. 내용만 아니라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로한 사람들은 기억력 증진을 위한 시도로 무엇을 외우기를 힘쓰는 방법이 있는데 이 성경 구절 외우기를 한다면 가장 유익한 방법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만 발췌하여 그렇게 외우도록 하면 좋다.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성경이 진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인간이 지어낸 거짓말 또는 속임수라는 뜻이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에는 목적이 있다. 무조건 모든 사람이 그 거짓을 믿게 함에 있다. 그 목적이 선하고 악하고는 논외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는 한 가지만 해도 성경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편견과 무지(無知)에 사로잡혀 있는 졸렬하고 조잡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무엇이든 비판하는 경우에는 그 대상을 알고 비판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대상의 옹호자들 이상으로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성경이 그런 거짓말과 속임수와는 천만리 밖이라는 증거를 그 자체 내용 중에 확고히 간직하고 있음을 가리켜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성경은 처음부터 성경의 핵심 사실을 과연 누가 믿었느냐, 믿느냐, 믿겠느냐 하는 의문사(疑問詞)로부터 시작하는 데에 있다. 즉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실을 예언하면서 이사야서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던가("Who has believed our report[message]?)"[사 53:1] 한 것이다.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것이 신약의 다음 사실이니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대중들 앞에서 가르치실 때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그 이유를 가리켜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낼 것이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무릇 있는 이는 받아 넉넉하게 되나 없는 이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누구든지 있는 이는 받겠고 없는 이는 그 있는 것까지(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 나라[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되어 모든 것을 비유로 하는 것이니,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막 4:12,25/마 13:12,13].


즉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셨다"[마 13:14,15] 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이 전파되고 그들이 믿는 것은 사실이나 가난한 이라면 모두가 다 구원 얻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가난한 이건 부한 이건, 강한 이건 약한 이건 일반적으로 절대 다수가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일반 대중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이 때문이다. 오직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여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개별적으로 그 말씀의 뜻을 여쭐 때 자세히 풀어 설명하신 것이다. 이로 보아서도 누구든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만 진리의 문이 열리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자에게는 평생 가야 진리에 들어올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진리 말씀도 성령께서 친히 각 개인에게 가르치신다는 말씀대로 직접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에만 한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인위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에만 의존하고 전혀 그런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없을 때 평생 가야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성경 읽는 것은 외면한 채 남들이 써놓은 신학 서적만 뒤적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성경의 핵심이 되는 대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고 그 이끄심을 받지 않으면 아무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 사실이 바로 그러하다[요 6:44,65]. 그동안 그리스도를 따랐던 많은 제자들이 중도에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要諦)를 듣고는 왕창 떨어져 나간 것이다. 12제자들에게까지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실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서든 혹은 지역에서든 믿는 자는 항상 소수 때로는 극소수를 이루는 것이다. 절대로 다수가 되어 있는 역사가 없기 때문에 "적은 무리들아[Little flock],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생들에게 "회개하기를 명령하시는데"[행 17:30]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 하심과 같다. "너 바로 네가 이 너의 날을 당하여 네 평안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눅 19:42] 하시며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던 것과 같다. 회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함을 버리기를"[행 3:26]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이는 이전처럼 자기중심 그대로 나가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이는 몸과 머리로 한 몸 체제를 이루고 있는 생명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므로 그 선택한 대로 죽음을 거두는 결과밖에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려고"[눅 5:32]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람이 되시어 오셨으니 죄를 회개할 의지 없이 악인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욕심만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걸러내시고 솎아내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그러한 성향을 나타낸 영물[천사]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진 상황에 있고 그 영향을 받아 자기중심으로 나간 아담 역시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렸으므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시다.


따라서 이런 악령들과 아담의 전철을 밟고자 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결단코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시는 것이 바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심이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셨고 실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일정 기간을 지나면 자기의 자기중심을 고집함으로써 그 곁을 떠나간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악함을 버림인데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는 악을 버렸으나 중도에 다시 자기중심으로 선회하게 되면 악함을 버리지 않음이 된다. 개가 그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그 씻었던 몸으로 다시 진창에 드러누운 것이다[벧후 2:22]. 그리고 이러한 숫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함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는 사실로 나타나고 일반 대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도 비유로만 말씀하심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심은 일종의 경고라고도 할 수 있으니 즉 스스로 찾고 구하고 두드릴 정도로 진리를 알기 원하지 않는 한 그래서 자기중심의 폐해를 알고 선과 의를 따라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이는 절대로 영생에 들어올 수 없음을 나타냄이다.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고로 "들어가기를 힘써야"[눅 13:24] 함을 경계하심이다. 천국은 침입을 당하고 침입하여 스스로 빼앗아 차지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심도 같은 의미다[눅 16:16/마 11:12]. 그런즉 거짓말로 속여 많은 사람 가능하면 전부를 거짓말로 속여 믿게 한다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도 모른 채 비판을 위한 비판이 성경에 대한 모든 비판인 것이다. 이런 내용을 가진 성경이 무엇에 쓰려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속이기까지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하겠는가. 강제로 끌어 모으지도 않지만 스스로 믿음으로 들어온 경우라도 자기 스스로 나가게 되어 있다[요 6:64].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사람들의 마음 눈을 가릴 수가 있는 것이다[살후 2:11,12/고후 4:4].


그러므로 성경을 거짓말로 지어내어 만든 꾸민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멀쩡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당치도 않는 논리로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게 또한 성경을 진정으로 분설해보지도 않고서 기분 내키는 대로 성경을 거짓말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 결코 이성적인 인간 스스로에서 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위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소위 국교로 삼는 나라들 역시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행하는 처사다. 오랜 역사의 전통과 권위를 입에 답지 말 일이다.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 역사가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로 군림해 있다. 따라서 인간을 속이고 거짓말로써 속여 인류를 멸망시키려 나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로 말하면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소위 "역사와 전통"보다 더 오래고, 그런 오랜 역사를 "권위"로 삼는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보다 더 크고 오래 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의 하나되어 있는 한 몸 관계로서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의지가 없는 이는 아예 영생을 바라다보지도 말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요 가르치는 요지다. 그리고 이런 성격으로 볼 때 절대 다수가 믿지 않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세상은 믿지 않는 이들의 세계인즉 항상 외톨로 따돌림을 받아 온갖 수모와 고난과 죽음까지도 각오하지 않는 한 영생에 들어올 수 없음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눅 9:23]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사형 받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이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봉자들은 거의 전부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생명으로 들어가건만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는다. 진상을 밝혀주어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현상을 지적하시어 "이 세대[아담 이후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눅 7:31,32]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양면성의 원리다. 만상은 짝의 개념으로 되어 있고 우리는 만사를 이 양면성의 원리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했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함과 같이 "평안"과 "기쁨"[요 14:27/15:11/16:33]이 넘쳐 나는 것은 양면 중의 일면일 따름이다.


왜냐면 그 다른 면이 있으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5-27] 하였고 이렇게 경고한 즉시 바울 사도는 옛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울로 삼으라 한 것이다[10:1-12].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으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1-5] 하였고, 또한 그 자신 "내가 복음을 전하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함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거침없이 교회를 향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이다. 바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사도라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으로 아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저주를 "꺼리지 않고"[행 20:27] 말한 "눈물"[빌 3:18/행 20:31,19/고후 2:4]의 사도다. 일방적으로 기쁘기만 한 것이면 바울이 눈물로 임할 까닭이 없다.


생명과 동시에 멸망이 놓여 있는 양자간의 선택에서 이를 지켜 보면서 양떼를 먹이던 하나님의 목자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불가피한 것이었다[빌 3:18,19].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 severity, sternness)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함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 일변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소멸하는 불"[히 12:29]로서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인자 안에 거하는 것은 한번 믿은 것으로써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면성과 동시성에서 '함께 움직이는 사랑'인 것이다. 때문에 거듭 강조하여 경고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할 것이다"[요 15:2,4]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몫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 많다. 여기서 보듯이 명령하신 것이다. 이는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행 17:30]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을 버리고 몸의 각 지체로서 항상 머리를 위해서만 사는 삶이 '구원 얻는 믿음'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한다" 하셨으니 이는 갑이 먼저 을을 위했으니 을이 이 본을 따라 갑을 위하게 되면 다시 갑은 을을 위하게 되는 순서다. 이렇게 갑과 을은 쌍방이 동시에 움직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를 그에게 나타낼 것"[요 14:21]이라 하심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계명을 지킴 그 말씀을 지킴으로써 나타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21,23].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순수하게 나의 몫이지 주님이 대신하시는 법이 없다. 주님이 대신하신다면 그것은 주님 스스로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므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되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갑을 사랑하는 것은 을이요 을을 사랑하는 것은 갑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계명이 도대체 무엇일까. 계명은 마땅히 할 본분을 말씀하심이다. 아들로서의 본분은 무엇인가. 사랑의 법칙 곧 3위1체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사시는 것과 같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사는 것이다.


아들께서 아버지만을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시지 않는 이것이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계명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12]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서로 사랑함은 같은 머리를 모시고 있는 조직체이기에 머리를 위함은 머리의 지시를 받음이요 그 지시가 곧 그 말씀 즉 계명이니 그 계명 따라 지체 상호간에 서로 사랑함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는 말씀이 그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가 되어 계시어 그렇게 아버지의 계명을 받고 비키고 계시니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의 구원인데 내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것이 그와 하나됨을 유지 존속하는 나의 책무인 것이다. 내 스스로 하는 나 자신의 생명에 관한 일이니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6] 하심 그대로다. 즉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제해 버리시는 것이다[:2]. 이는 바울 사도가 "너도 아끼지 않으신다, 찍어 버리신다"[롬 11:20-22] 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시험 무대에 있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는 한은 항상 생명과 사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생명에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양상은 탄탄히 생명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산 자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니 시험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 여부가 저울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렇게 저울에 달아 모자람이 발견되어 죽은 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같았으나 저울에 달려 그 스스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길을 택한 고로 멸망에 처해지지 않았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다"[요 15:5,7,8] 하신 대로, 우리를 구원하심은 열맬 맺도록 하심이다. 열매 맺지 못하면 "제해 버리시고" 그러면 "불 사름"이 된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말하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기를,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십시오' 하였다"[눅 13:6-9] 하심과 같다. 이와 같이 생명과 사망의 기로에 서 있건만 이 사실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그 종말이 어떻게 되랴.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같이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 것임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함이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긴다"[벧후 1:10-13]고 사태의 심각함을 알려 경고한 것이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5] 했으니 성경을 읽지 않는 자의 결말이 어떠할 것임을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다"[롬 15:14,15] 함이 모두 같은 경고인 것이다. 유다도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니, 주님께서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유 1:5]고 이를 명백히 한 것이다.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얻었지만 계속 얻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 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여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빌 3:8-11].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온전한 데에 나아갈 수 없다. 보어는 빛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입자성 하나만 고집하였으므로 그 두 사람의 논쟁에서 "아인슈탸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개 일방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성경이 양면을 다 말하고 가르치고 명백하게 일러주었건만,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말에만 경청한 관계로 그 옛날 아담 부부의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친히 하신 말씀보다 피조물의 말을 더 믿은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너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기보다 사람이 지어낸 신학 서적을 더 의뢰하는 것이다. 심각한 사태이건만 이 심각성을 모른다. 멸망하는 자가 그 스스로 멸망 길에 들어선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비극이다[마 7:22,23/25:44-46].


"그러므로 너희가 스스로를 일깨워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고 한 바울 사도와 같은 이들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그 외의 모두는 가짜요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일 수밖에 없다. 삯꾼이다. 보수만 바라는 이들이니 양도 제 양이 아니다[요 10:12]. 이런 황무지에 몸을 의탁하지 말고 성경에로 돌아와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은 3위1체 원리에 의한 사람 사는 법이다. 3위1체의 법칙이 나타내는 것은 인과율로서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양자 관계를 명시할 뿐 아니라 갑과 을이 서로 위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양면성에 의한 동시성 운동 또는 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갑이 을을 위함과 동시에 을 역시 병[둘이 하나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을 통해 갑을 위함이다.

사람의 신체가 좌, 우 대칭으로 되어 있고 팔이든 다리든 둘 즉 짝 다시 말해 양자(兩者),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니 예컨대 좌, 우 두 다리의 보행시(步行時)의 작용[운동]을 말한다면 두 다리 중 하나[갑]가 앞으로 나가면 반드시 나머지 다리[을]가 그 본을 따라 역시 앞으로 나간다. 을아 가만 있으면 아무리 갑이 계속 나가고자 해도 나갈 수가 없다. 을이 그 순서를 따라 혹은 뒤를 이어 앞으로 나가주어야 갑 역시 다시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을 역시 갑이 계속 나가주지 않는 한 연속해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갑이 움직이면 을이 뒤이어 움직이고 을이 움직인 후에는 다시 갑을 움직이고 그리고 순서를 따라 을이 역시 움직이는 등 갑과 을이 짝을 맞추어 걸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보행법(步行法)이다. 옛 시절 증기 기관차 시대에는 열차를 끌고 갈 때 기관차는 연통을 통해 칙칙푹푹 연기를 뿜어올리며 달렸다. 그렇게 움직여 나가는 소리를 "칙칙푹푹"으로 묘사했는데 다시 말해 "칙칙푹푹, 칙칙푹푹" 하고 가는 것이지 연속적으로 "칙칙" 소리만 내는 것도 아니었고 "푹푹"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칙칙"과 "푹푹"을 번갈아 연속해서 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사람이 양 다리로 걷는 동작 역시 왼발과 오른발을 연속해서 바꾸어가면서 내밀며 걷는 것과 같이 사람 사는 법은 어떤 것인가. 사람 홀로 있지 않고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에 의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써 생겨났으니 하나님과 인간[혹은 피조물(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격성을 갖춘)]의 양자 관계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머리와 몸의 구조로서 머리[하나님]는 몸[피조물]을 위하시고 몸의 각 지체는 저마나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머리를 위함, 곧 '머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머리께서 사는 법으로서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써 피조물을 위하시면 피조물 즉 몸의 각 지체된 자는 그 본을 따라서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피조물의 생활 방법이다. 사는 방법이고 생존하는 법칙이다. 그래서 이는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법질서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친히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그 지으신 피조물을 위하시듯이 피조물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우리 인생의 구원은 과거 홀로 생겨나 혼자 살 듯이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죽은 자로서의 "악함을 버리고"[행 3:26] 오직 영생의 법, 정상적인 삶의 원리인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온 것을 말함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해주셨다고 또는 죽음 가운데서 살려 주셨다고 그 길로 내처 영원히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삶의 법대로 살아야 함이다. 애초 이 삶의 법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비극 즉 인간고가 왔으니[롬 5:12] 이는 당연 귀결이다. 이 삶의 법을 처음부터 지키지 않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죽음과 죄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고후 4:4)이 되어 있음 역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조만간에 망하게 되어 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고전 7:31]. 구원 받아야 할 사람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런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만 이 세상의 존속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제 그 마지막은 다가오고 있음이다.

영원히 사는 법도 모르고 어찌 영원히 사는 세계로 들어가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이 영원한 법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영적 존재들]들에게 나타내신 바다. 그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물[천사]들 중에 이 법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역시 과거 한 때에는 거룩한 천사들이었다. 이 거룩한 천사들은 영원히 사는 법대로 따르고 그 법을 사랑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법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거룩한 천사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은 이 법을 알고 있었던가. 법은 다름아니라 앞에서 설명했듯이 머리로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좀루을 친히 위하심을 알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곧 머리의 지시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마 4:4]. 이는 법으로 논하는 것 이전에 상식 차원의 이야기다. 아담은 이 생명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행동함에 따라, 악령들이 범죄한 것처럼 역시 범죄하여 스스로 생명을 걷어차 버리고 죽은 자가 된 것이 오늘날의 인생 참극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셨으니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과 일체의 것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니 그 결과가 나를 위해 죽으시는 십자가 고난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법칙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와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산다는 사람 삶의 기본 도리를 다라 하나님께서도 존재하심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사랑이 바로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사는 것을 말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사랑의 상대 곧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바로 이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롬 5:8]. 나를 위해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사심을[갈 2:20] 이와 같이 본으로 보여 주셨으니 당연히 나는 이 본을 따라 사랑을 알았으므로[요일 3:16] 머리께서 분순하신 지시 즉 그 계명대로 순종하여 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임하게 되어 있음이다[:16/요 13:34].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은 바로 이 계명을 싫어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이웃을 위해야 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낀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었다. 이 미련함은 역설 같지만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미련하지 않고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머리의 지시를 감히 무시한 것이므로 역설 같다 한 것이나, 즉 머리가 영리하면 이 모든 진리를 사랑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 반대 쪽을 생각했으니 똑똑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 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욕심이 그 화근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것도 자기 그리고 모든 영물들이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그 누구보다 먼저 창조된 선재자(先在者)로서] 아래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런 "악한 자에게 속했다"[요일 3:12]고 요한이 설명한 가인 역시 아벨을 순전히 시기심 하나로 무참히 살해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아담]을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의 정상에 두시는 대신 지식 면으로는 영물들의 보좌를 받게 하시어 어느 쪽도 필요없이 교만해지거나 우쭐대지 않도록 미리부터 조정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은혜를 모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 욕심대로 행하여 인간을 자기 욕심대로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이와 같은 불상사가 나게 마련이다. 서로가 이런 마음을 품는다고 가정할 때 피차간의 살육이 진행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모두가 함께 망하는 것이다. 욕심은 이런 한 치 앞의 일도 미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기가 최고 정상에 올라 만인지상이 된다고 자부하고 그것을 멀리 내다보는 지혜라 하나[롬 1:2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무슨 지혜가 있으리요[잠 9:10].

그러므로 우리의 은혜로 받는 구원,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명백히 설명하면서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등의 심각한 경고를 빗발치듯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을 선포하는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저주"의 선언하는 사도인 것이다. 언제나 이와 같이 양면성을 띠는 것이니 내 스스로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인자이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엄위(嚴威)만이 있는 것이다[롬 11:22].

다시 말해 왼발 오른발 양쪽 다리를 동시에 번갈아 내딛는 것이 두 다리를 가진 모든 피조물의 보행법인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자체가 머리와 몸의 체제가 되어 있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데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의 그 첫 걸음을 나를 위해 떼어놓아 주신 것이다. 즉 첫 한 발짝을 디뎌주신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여기서 시동(始動)이 걸려 나 역시 그리스도의 본을 보고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여 내딛는 첫 걸음이 곧 믿음이요 회개다.

믿음의 첫 시작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행 2:38].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후 모든 인생들에게 명령하시는 분부는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믿으라" 또는 "믿기만 하면 영생하니 그리스도를 믿으라"가 아닌 것이다. 즉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게?ㅆ다는 하나님 아에서의 약속이요 지금까지 행한 ㅗ든 악으로부터의 180도 전환인 것이다. 때문에 삭개오처럼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며 뉘 것을 부당하게 징수한 일이 있으면 그 네 배나 갚으렵니다"[눅 19:8] 하는 결의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이런 삭개오의 회개를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다"[눅 19:9,10]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주님 역시 반응하심이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는"[요 15:2] 것이다. 때문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14:21] 하신 것이다.

우리의 반응이 없으면 아무리 만인간을 위하신 구원이지만 그 반응 없는 자에게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영생이라도 그 무의미함이 저 목석과 같은 것이다. "제해 버리신다". 오직 그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아닌 "엄위"만이 있을 따름이다[롬 11:22].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한 발 내디디시면 그 다음은 내 차례로서 내가 나의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것이 "복종함"이다. 그러면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효하고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즉 그리스도께서 내디디시는 그리스도의 다음 발걸음이시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12] 것이다. 왜냐면 내가 나의 발을 내딛지 않으면 주님도 다음 발걸음을 내디디실 수가 없다. 걸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걸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걸음이 정지되고 마침내는 쓰러지듯이 구원이 정지되는 것이요 그리고 "넘어지는"[마 16:23/고전 10:12] 것이다. 이것이 양면성의 원리요 양자 간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작용이요 때문에 알기 쉽게 '좌우 교차 운동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양면성, 양자 관계니까 좌우로 표현해도 무방하니 앞서의 설명처럼 좌우의 양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좌와 우는 항상 '둘로서의 하나'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입자성과 더불어 파동성이 함께 작동해야 빛이라는 존재가 비로소 부각되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면 빛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양면 또는 양자가 함께 작동되어야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신 말씀이 바로 여기서 연유된다. 우리는 비록 주님을 부인해도 주님은 우리를 부인하시지 않는다고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네가 나를 선대하면 나도 너를 선대하고 네가 나를 박대하면 나도 너를 똑같이 박대할 것이라" 하는 보통 인생들의 평범한 이기주의 곧 자기중심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하고 놀랄지 모르나 바로 이런 생명과 사랑의 원리를 따라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원리를 따르시지 않음이 없으시다.

3위1체 원리에서 큰 자로서의 갑이 작은 자로서의 을을 위하는 것은 당연하나 을이 갑을 위할 때는 하나됨[병]을 인하여 갑을 위하게 됨이니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되어 이제는 몸이 없이 머리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이다. 다시 말해 몸과 하나된 머리가 아무리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전체를 위해 몸의 각 지체에게 지시를 내려도 그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의 무의미하고 머리든 몸이든 존재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을이 갑을 위하는 것을 가리켜 주인 의식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몸이 머리가 되어 있음과 같은 형상이다. 사랑은 각자가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니 일방적으로 위하고 위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님과 같다.

바로 이런 사랑의 주인 의식, 주체 의식, 적극성과 능동성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되 침입하여 들어가고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말씀하심이다[눅 16:16/마 11:12].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이라 하니까 피동적으로 받는 것으로만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는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리 이해하기 혼돈스러운 것도 아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이 핵이고[요일 3:16]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 차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적극성에서 "하나님의 율법" 곧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즉 새 계명을 지켜 복종하게 됨이다.

자연계가 먼저 생긴 후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이 생겼으니 영계와 자연계 어느 것이 갑이고 을이냐 하겠는데, 물론 영이 크고 육체는 작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육체인 인간을 견주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인과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즉 갑은 항상 원인이고 을은 항상 결과만 되는 것이 아니고 3위1체 원리에서 둘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갑이 을을 위함으로 그치지 않고 을 역시 갑을 위하는 체제이므로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이 머리를 위하듯이] 을이 원인이고 갑이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순서를 엇바꾸어 연속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를 굳이 이름하여 인과(因果) 순환의 원리 또는 인과 역순(逆順)의 원리라고도 한다. 이는 양면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 양면이 서로 작용하여 하나로 존재하고 활동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양면이 일방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상호 교차하여 엇바꾸어 인과 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영계와 자연계가 그러하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니 곧 자연계로서 전자가 원인이시고 후자는 그 결과다.

그러나 이 자연계를 기본형으로 하여 그 대칭 꼴인 영계가 창조되니 이번에는 후자가 결과요 전자는 원인이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나 남자가 인(因)이요 여자는 과(果)이다. 그러나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오니[고전 11:12] 원인과 결과가 뒤바꾸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인'이요 나는 '과'이나, 내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하시고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 역시 나를 부인하실 것이므로 이 경우 내가 '인'이요 주님은 '과'에 해당되신다.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간다"[눅 16:16] 하셨으므로 피동적으로 들어갈 줄로 아는 이는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줄로 알아야 할 것이다[요 6:44,65]. 그러면 행함으로써 들어가는가, 은혜이고 믿음으로 얻는 의라는 것과는 어찌 되는가 할 사람이 있겠지만,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전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심으로써 즉 우리가 다시 출생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니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 노력도 애씀도 힘씀도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가 창조인 것이다.

한 손가락도 움직일 필요가 없음이니 아담이 창조될 때 혹은 여자가 창조될 때 아담이나 하와나 그 스스로 움직여 하나님의 창조를 도와드림으로써 창조되었던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우리가 창조되었음이다. 그리고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죄인으로 창조하셨던가. 아닌 것이다. 창조된 후 아담 스스로가 범죄함으로써 죄인이 되고 죽은 자가 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새로 창조를 입었으니 의인으로 창조된 것이지 죄인 그대로 창조된 것이 아님이다.




★이병철 상성 회장 24개항 질문 (4)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4)



1. 창조신의 실존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


뭉크의 "절규"에서 주인공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보니 남녀 불문의 모든 인생의 실상을 표현하려 함인 것 같다. 옆의 두 행인(行人)은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불명인데 하나는 머리 부분이 분명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은 하체가 그러하니, 말하자면 사람[이웃]은 있으나 없는 것 같고 실상이 아닌 허상처럼 되어 있어 주인공의 철저한 무원(無援) 고립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황혼 속에서 외따로 홀로 떨어져 있음의 공포와 불안과 좌절. 이제 곧 '불확실한 미래'의 깜깜한 밤은 기필코 온다는 전조(前兆)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절규이니 더욱 처절하고 처연(悽然)하다.


모름지기 사람은 현실을 직시할 일이다. 죽음, 고난, 불행의 인간고(人間苦)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된다.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도망 가다 지쳐 커다란 덩치의 몸뚱이는 바깥에 그대로 드러낸 채 작은 머리만 모래 속에 수월하게 들어간다고 박아놓고 잘 숨었다고 안심하는 것과 같은 무의미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래 속에 눈을 묻었으니 포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인데, 잊는다고 또는 인식을 달리 한다고 해서 그 현실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대로 엄연한 현실이다. 특정 종교에서 아무리 "마음 수양"을 한다고 해도 포수의 손이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현실은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


‘죽음과 고통과 불행’의 포수는 다가오고 있다. 정면으로 난국을 돌파하여 타개하는 것이 ‘짐승이 아닌 사람’의 이성(理性)으로서 마땅한 바다. 가능하면 밝고 명랑한 면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사람 목숨이 오직 이생뿐일 때 한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영원한 파멸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올바른 지도가 아니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 된다.


각자가 현재 생사(生死)의 갈래 길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엄숙한 순간도 없다. 어두움을 모르고는 빛이 찾아지지 않는 것처럼 죽음과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고는 생명 길로 접어들 수가 없다. 어두움을 모르면 빛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무턱대고 밝고 명랑하고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라는 것은 그릇되게 안내함이다. 때문에 "지금 웃는 자가 화가 있고 지금 우는 자가 장차 웃을 수 있게 되니 복이 있다" 하신 것이다[눅 6:21,25].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푸라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우중충한 죽음의 측면만 나타내는 그림은 바람직하지 않고 동시에 생명의 밝은 표현도 함께 어울려야 하는 고로 한 쪽으로 이지러진 느낌이 없지 않다. 항상 양면성을 고루 갖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죽음의 양상을 강조하면 동시에 생명의 측면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생명[영원한 생명]이 엄존(儼存)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너무 생명[영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시한부 목숨] 일변도로만 만사를 인식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기피하여 한 쪽으로 기형적으로 쏠려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뭉크의 작품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덮어놓고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있다고 하여 이 세상의 죽음의 현실을 간과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소명(召命)을 따라 제대로 그 보내신 일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양면성의 평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뭉크의 그림을 소개하는 뜻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오직 유일하고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조선(救助船)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선의 의미에 대해 다음 예닐곱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고자 하고 궁금히 여기는 사항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다.


1. 창조신(創造神)의 실존(實存)
2. 인류에게 주시는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3. 삶의 기본 구조
4. 만물의 생성과 존립의 원리[삼위일체의 원리]ㅡ생략
5. 삼위일체 원리를 증명하는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ㅡ생략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ㅡ생략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9. 21세기의 바울 사도





1. 창조주(創造主)의 실존(實存) 




이회장의 질문 내용을 다루던 신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충분히 나타내시면 인간이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양면성에서 그 일면만을 설명하는 것이니, 선악에 따라 엄중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심과[마 3:11,12]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서의 양면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멸(燒滅)하는 불"["a consuming fire"-히 12:29]이심과 동시에 "사랑"[요일 4:8]이시라는 이 양면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주눅든다든가 자유가 박탈당한다는 것은 이 양면에서 전자 쪽을 말함이다.


위압하면 당연히 무조건 굴종(屈從)이므로 선택의 자유는 없다. 그러나 그런 엄위(嚴威)와 동시에 똑같이 평형되게 인자(仁慈)가 있으시니[롬 11:22], 이 경우 너무 자유를 주시는 듯이 되어 하나님마저도 없다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오늘의 실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양면성은 우리 인간으로 치면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의 조화이다. 사랑 앞에서는 자유가 박탈당하기커녕 오히려 최대로 신장(伸張)된다. 왜냐면 사랑의 본질이 자유 의지에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로 계신다고 해서 아버지께서는 엄부(嚴父)와 같으시고 아들께서는 자모(慈母)와 같으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시니, 특성(特性)의 양면성이 아니라 존립(存立)의 양면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특성면에서는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 가운데 아버지 친히 시종일관 동참하셨던 것이다. 즉 아들로 말미암아 나타내지고 "확증된"[5:8] 아버지의 사랑이신 것이다.


그리고고 또 아들을 가리켜 재판장[the Judge]이시라 했으니 이를 다시 표현하여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이라 한 것이다[고후 5:11]. 이 때는 말 그대로 "어린 양의 진노"[계 6:16]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조물주로서의 본질적 특성은 사랑이시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랑으로써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성을 부여하여 만드신 피조물 곧 인간이나 영물[靈物, 에덴낙원에서의 "식물"보다 "동물" 즉 천사류(類)를 말함이다]들은 그 완전히 보장된 자유를 구사함으로써 선악간에 따른 행동이 나타날 것이 필연이므로 질서 확립 차원에서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라는[11:22] 양면성으로 나타나지심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후 차츰 설명이 되겠지만, '그룹'과 '스랍'과 같은 영물들은 "6일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고 그 그룹들 중의 하나가 타락했음을 성경[구약]은 밝히고 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대로 "천사[여기서 말하는 영물]"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기준하여 창조의 순서를 말하면 '아담-영물-여자'로 나간다. 이는 우리의 경우, '마지막 아담-천사-교회'와 같은 순서다. 천사[영물] 창조 후 여자가 지으심 받았으므로 여자의 긴 머리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게"[고전 11:9] 된다).


즉 범죄자에게는 무자비하시고,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법대로 행하여 애초 만유를 창조하신 뜻에 일치하고 부합되게 처신하는 의인에게는 무한 자비하시니 그들에게는 사랑밖에 없으시다. 즉 사랑에는 사랑이요 자비요 은혜이나 그렇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역시 반대 방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심이다. 이것이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마 10:33]이라는 말씀의 뜻이다.


범죄자라도 고의성이 있을 때 그렇게 엄위뿐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므로 즉 피조물 스스로 악을 버릴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관계로 이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사랑과 같은 은혜가 얼마든지 임하시고 풍성하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작정 무한정으로 기다리시거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니, 고의성이 입증될 정도로 끝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가차없는 처단 곧 등을 돌리시는 비극적 사태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잘 설명하고 미리 경고하는 상징적 의미가 바로 "광야 교회"[행 7:38]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행보다. 즉 이집트로부터의 자유 해방의 구원을 받은 숫자가 20세 이상의 남자가 무려 60만 이상이었지만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숫자는 겨우 갈렙과 여호수아뿐이었음을 성경은 경고하여 "그들 다수(多數)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다"[고전 10:5]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의 배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하지 말라"[3:18,19]는 것이다. 자유는 특권과 동시에 책무가 부과되는 양면성을 지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신 까닭은 삶의 요체가 바로 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축되기커녕 버릇없는 아이가 할아버지 수염 잡아당기는 식 정도로 되어 있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가장 먼저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정의부터 내릴 필요가 있다. 단순히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죽었던 것이 이제 생명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애초 창조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여 그 기대하셨던 바를 온전히 이루게 되어 있는 것", 이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사 43:7] 처음부터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함은 하나님은 그 만드신 피조물을 전적으로 위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의미다.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는' 이치를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날부터 결단코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고 오직 피조물을 위하시는 존재로서 당신 자신을 영원히 굳히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를 위하시니 당연히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뜻을 따라 역시 그 동료 피조물을 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나 아담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망령된 생각을 하게 되어 생명[하나님이 생명이신데]에서 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 죄가 도대체 어떤 본질인지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왜 구원을 받으면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된다. 왜 복종이 생명이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상 궤도로부터 이탈을 해 온 인생들인지라 자기중심으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해 왔는데, 이 "구원을 이루라"는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나,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그러므로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 함은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함[고후 5:15]이 아님 즉 자기 구원을 위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개신교]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화석화(化石化)는 이를 분간 못함에 연유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랑"과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이 극(極)과 극의 양면성의 조화를 알아야 하는데 개신교는 후자를 무시해 버린다. 창공에 빛나는 ‘별들[天體]’과 인간 내부의 ‘양심(良心)’이라는 이 두 가지 경이(驚異)와 신비에 찬탄을 금하지 못한다고 평소 말하던 철학자 칸트는 그래서 "요청적 유신론"을 말했지만,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순수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 탓에 무한한 실재로서의 신을 인식할 수 없다" 했으니 이는 모순되는 말이다.


마치, 빛은 입자(粒子, particle)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던 아인슈타인이 보어가 그의 ‘상보성(相補性) 원리’로써 입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다른 성질로서의 파동(波動, wave)이기도 한 빛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고 끝을 맺었던[그러다가 아인슈타인은 죽었으니까] 그런 것과 같다. 신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하여 화합될 수 없는 특수 여건 속에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조화 일치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음을 칸트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 둘의 조화가 수긍되지 않는다고 끝내 고집을 부린 것이다.


무엇이든 편협하게 자기 인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과학적 자세가 아니며 그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지름길이 된다. 오늘날 거의 전부라고 할 많은 사람이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항상 전제하고 이 문제도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정밀한 장치의 시계가 어김없이 시간을 지키며 돌아가듯이, 그 거대하고 광대하고 잡다한 개체로 구성된 우주 천체가 한 치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섭도록 일사불란하게 운행해 나가는 것 자체가 "조물주가 과연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고 입방아를 찧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인간의 양심도 그렇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있는 것으로서, 선(善, 여럿이 사는 사람 삶에 좋은 것)과 악(惡, 반대로 그 나쁜 것)을 엄정하고 정확하게 판별해 주는 작용을 하고 있음이다. 역시 천체의 운행과 같은 일사불란한 엄격한 논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 스스로 악이 좋아서 악을 행하고도 예외 없이 이 양심의 가책은 받는 법이니, 이는 이 기계적 작동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로 인간의 의지(意志)와는 전혀 별개다. 인간 외적(外的)인 요인이 개입하여 인간 안에 이와 같은 분명한 도덕적 기준을 삽입해서 장치해 놓은 것임이 드러난다. 모든 인간에 내재된 이 양심의 소리는 한결같은 통일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중심을 배격하는 '한 몸으로서의 이치'대로 사는 삶의 윤곽을 어김없이 가리키고 있음이다. 이 한 몸의 체제에서는 머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다. 조화 통일을 위한 필연적 요소다.


공동체 의식


칸트가 소위 "요청적(要請的) 유신론(有神論)"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경이’가 어찌 ‘천체’와 ‘양심’으로만 한정되랴. 우리 영혼이 집으로 삼고 있는 신체(身體)를 보라. 우주 천체의 신비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세포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면 천체보다 더 하면 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신묘막측한 구조와 체제다. 공동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한 몸의 체제를 말함이다.


공동체 의식을 집단주의, 국가지상주의, 전제주의로 착각하는 이가 많다. 독재자들이 이런 공동체 의식을 표방했기 때문에 오는 말의 혼잡이다. 그래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을 마치 일제(日帝)의 잔재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독재자들이 그런 명분으로 국민을 기만해 온 탓이다. 공산주의가 이상은 좋으나 여지없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도 기인한다. 공산주의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다 걸고 독재자들이 자기 사욕을 채우는데 악용한 까닭이다.


비단 머리된 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다 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이기주의를 따르므로 그런 공산주의는 국민들의 나태만 조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고 처음부터 태어난 것이다.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감내하는 데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활발해진다. 물론 그 종착역은 삶이 풍요함과 더불어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부조리만 독버섯처럼 피어나 마침내 그 풍성함을 허(虛)와 무[無]로 되돌려 버린다.


그러니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으로 나가지 않는 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 경제도 그 어떤 이상주의도 안심하고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싹수가 노랗다. 희망이 없다. 개개인이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영원한 인간 삶의 법질서로서의 뼈대인 줄 자각하고 그래서 그런 정신으로 나가도 어느 사회든 그렇지 않은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므로 그런 좋은 정신을 알아 주기커녕 도리어 따돌리기를 예사로 한다.


그 좋은 예가 평생 철저히 공동체 의식으로 일관했던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불우함이었다. 임금이 잘 났든 못났든 한 집단, 한 나라의 머리로 인식하고 충성했던 이공에 비해 왕도 조정도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기 한 몸 보신책에만 급급하여 전쟁 중인데도 그를 귀하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전쟁이 지나간 다음에는 시기하는 무리들의 참소(讒訴, a false charge)가 반드시 있을 것을 예상하였으므로 차라리 욕을 당할 바에야 전투 중에 죽기를 자원하여 자기의 생애도 전쟁과 더불어 끝나기를 바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는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 지휘를 할 정도였다.


당연히 총탄은 그의 몸을 겨누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이 세상의 생리요 속성이다. 충무공(忠武公)이라 하면 무인(武人)으로서의 위업만 찬양할 뿐이니 이는 옳은 역사 인식이 아니다. 그의 인간성 곧 생활 철학으로서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그런 결과를 낳았으므로 그가 만일 행정가나 정치인으로 나갔다면 의당히 주공(周公) 단(旦)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주공을 '주단'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이순신 정신을 함양한다는 점에서 '이공'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장(武將)으로서의 용맹과 전략만이 그를 임진란의 구국 영웅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 명량해전이 이를 입증한다. 그의 일기인 난중일기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자체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해둔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사례로써도 이 세상이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요 죄와 죽음의 세상이요 결코 생명의 세계가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공동체로서의 '한 몸' 체제가 생리적으로 어울리지를 않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양심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 수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온 세상이 자기중심 곧 각자가 머리가 되려는 잠재적 욕망 때문이다. 온 세계 인간 세상의 머리는 그 어느 인간이든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되실 수 있다 함이 이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시더라도 강제로 이 한 몸됨을 이룰 수 없으니 왜냐면 사랑으로써야 이룰 수 있는 한 몸의 체제이므로 "자기 부인"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와 상대를 이루는 즉 머리이면 몸, 몸이면 머리를 위함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평균되게 살 만한 삶을 영위하면 살아봄 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세상을 "고해(苦海)"[사실은 성경대로 하면 사해(死海)라고 해야 적절하다]라고 했듯이 절대 다수의 인생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벌써 이것 하나만 해도 답은 나와 있는 것이다. 즉 사람 살 데는 못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소수로서의 은전(恩典)과 은택(恩澤)을 받아 한 세상 편안하게 산다고 해도 이는 우리의 양심이 결코 편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왜냐면 고통 중에 허덕이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까닭이다.


원활한 인간 관계로 상호 간에 아끼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산다고 가정해도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자체가 우리의 영혼과는 달리 영원성을 지니지 못하므로 이 시간 후 어찌 될지도 모르는 지극히 불확실한 실체다.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못한다. 이런 삶을 두고서 마치 본능적인 동물들처럼 눈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정신 팔리고 이런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한 그 근원적 원인을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무관심으로 지낸다는 것은 차라리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단정해도 지나친 곳 판단은 아니리라.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떳떳하게 그야말로 순수한 평안과 즐거움 속에 살자면 모두가 다시 말해 죄를 지어 명백히 허물이 드러난 이들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을 바에야 내 홀로 아무리 유복하게 살아도 그것이 "복"으로 진정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이런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인간이 보통 양심은 이 세상을 절대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자신의 건강한 생명 유지를 목적하여 일사불란하게 마치 시계처럼 어김없이 돌아가는 신체의 구조처럼,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는 머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절대 복종은 자기 중심이어서는 안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가운데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에는 머리로서 우리 모두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칸트의 소위 "요청적 유신론"처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와 같이 창조하심으로써 이런 구조와 체제로 나가지 않으면 삶이 불가능하도록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기 때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즉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데에서 모든 것이 논해질 수 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서는 그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정밀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삼라만상

이런 우리의 신체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몸이 우리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가?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작동시켜서 되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계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아 타고 나는 것이다. 우리의 이지(理智)와 의지(意志)로써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님이다. 우리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 스스로 움직인다. 비단 인간의 신체만 아니다. 생물들이 생존하는 양상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도 정밀한 기계들이 아닌가.


가령 거미 한 마리가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쳐놓는 거미줄 하나만이라도 상상해보라. 먹이를 속이는 그 기지(機智)하며 바람에 날리지 않고 끊기지 않고 큰 먹이의 무게에 아무쪼록 뭉개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일구어놓는 그 건축술에 나타나는 그 지능(知能)을 보라. 인간을 오히려 뺨칠 정도다. 인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도의 능력 과시다. 그런데 이런 천재성을 지닌 거미지만 다리가 긴 어떤 종류는 자기에게 사람이 다가서는 시늉을 해 보이면 위협을 해서 쫓아내기라도 할 듯이 자기 몸을 난폭하게 흔들어 힘을 과시한다.


바로 이것이, 그 천재성이 자기 이지(理智)에서 난 것이 아니라 타(他) 이지(理智)에서 단지 기계적 작용으로 삽입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난 것이라면 "이 인간은 나로서는 불가항력인즉 몸을 흔들어보아야 소용이 없다" 하고 죽은 듯이 잠자코 있을 것이다. 오히려 몸을 흔드는 바람에 자기의 위치가 탄로가 나 사람의 손이 자기를 해코지할 수도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단지 위협적이 것이 오면 무조건 몸을 흔들도록 기계 장치가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만 순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찮은 모기 한 마리도 그렇다. 사람의 피를 빠는 것은 암컷인데 알을 낳는데 필요한 것을 사람의 피 속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필요한 것을 모기란 천재(天才)가 과학 실험을 통해 발견해내기라도 했던가? 그런 것이 거미나 모기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양심이나 우리의 신체 구조와 같이, 똑같은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갖가지 이지적인 작동이 가능하도록 기계적 장치를 만든 '근본 요인'일진대, 그 자체로는 그런 이지[적 현상]들의 여러 갑절이나 되는 아니, 무한정의 이지(理智)를 갖춘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그 정도의 이지력을 발휘하는 존재라면, 그런 동일한 성격의 이지를 나타내는 우리와도 똑같은 존재일 것이니 다시 말해 지, 정, 의를 겸비한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는 안된다.


이 우주 하나만을 두고 보자. 너무 방대하여 우리는 이 우주를 부부적으로만 볼 수 있을 따름이지 전체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은 당연히 이 우주보다 크실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또는 피조물처럼 일정한 형체를 지니셨다고 전제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가. 우주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보겠다는 것인가.


대칭 원리


하나님은 봄으로써 즉 우리의 감각 기관[五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인지하고 확인한다는 말이 옳다. 오관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된다. 즉 우리의 이 오관은 자연계에 속한 것인즉 자연계에 속한 것만 인식할 수 있으니 아주 한정적이다. 이 '자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우리의 이지(理智)이다. 이는 영혼의 분야다. 자연계 생물로서 인간 외에는 이 영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오관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알 수 있다 함이다[롬 1:19,20].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 인간들처럼 일정 형태를 유지하고 계신다 해도 위의 지적처럼 우리가 인지 불가능이고, 그런 '형체[형태]'의 '본질'로서의 영(靈)이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라고 하셨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다"[딤전 6:16] 하였다.


결론은, 하나님은 '실체'이시고 그 창조물[피조물]'은 '형체'인 것이다. 우리가 형체를 보고 실체를 아는 것이니, 실체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보려는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밝힌 것이다. 인간은 "좀 똑똑히 나타내시라"고 요구하지만 그렇게 형체로써 아주 똑똑히 나타내시고 있지 않는가. 그 이상으로는 비록 우리 인간이라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고로 무리한 비이성적 요구다. 오관으로 즉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니 그것은 피조물이 되어 달라 또는 인간으로서 나타나 달라는 것이므로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있게[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형체로 존재하셔서 자기와 같은 인간을 생기게 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제조" 또는 "생산"이지 "창조"가 될 수 없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으로서 별개를 만드시는 것이 '창조'이니, 그래서 이로부터 양면성의 원리[혹은 대립(對立, 對稱) 원리]가 생겨난 것이다.


전혀 상반되는 별개의 것이지만 근원은 하나이니 곧 창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곧 이어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삼위일체의 법칙'이다. 따라서 그 만드신 것을 형상 또는 형체라 한다.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보이실 수 없는 '실체 또는 본질로서의 당신 자신'과는 별개의 것 즉 '볼 수 있는 형체'를 만드시니 이것이 "창조"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자기 고유의 형체가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니 그 만드신 형체들로 이루어진 바 만유(萬有) 안에[in]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through] 계시고 만유 위에[above] 계시는[엡 4:6] 실질, 본질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수 없는 실질과 볼 수 있는 형체와의 대칭[對稱, 相稱]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대칭 관계에 있는 것이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요 또한 자연계와 영계(靈界)이다. 영혼은 볼 수 없다. 영계의 물질[형체임에는 분명한데도] 역시 볼 수 없다. 영혼과 대립되는 육체는 볼 수 있고 영계와 대칭되는 자연계는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영계에 속한 육체라면 얼마든지 영계에 속한 것을 볼 수 있다. 영혼은 육체에 대하여 실질 격이고 육체는 그 형상 격이다. 자연계는 영계에 대해 그 형체 격이고 영계는 자연계에 대해 실체 격이다.


이 이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나타내셨으니, 즉 이전에는 우리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부활하신 후에는 볼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볼 수 없게도 되는 영계(靈界)에 속한 신령(神靈, 고전 15:44)한 몸이셨던 것이다. 아담 이후[왜냐면 아담이 이런 양면의 이중(二重) 구조로 창조되었으나 에덴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그 신령한 몸을 상실한 까닭에] 인류 최초로 이런 특이한 몸을 나타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으로서, 범죄하기 전 상태의 아담의 몸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부활하신 몸을 어떤 때는 친히 나타내심으로써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나 어떤 때 즉 친히 그렇게 나타내시지 않고 숨기려 하실 때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시는 것이었다. 앞에서 "인류"라고 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여기서 당연히 제외된다. 아담은 현재의 우리 인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연계에 국한된 육체이나 아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육체로 한 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 한다.


아담이 원래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기서 간단히 미리 말해 두는 확증의 한 가지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롬 5:12]는 성경의 증언이다. 여기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일치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신령한 죽음"이라는 언급이 전연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영생할 수가 없고, 기껏 살아야 노아 당시까지의 인류의 수명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었던 것이다.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아야 죽지 않게 되는 까닭이다.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면 에덴낙원 자체가 영계라는 뜻인데 그 증거는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그 식물 가운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더더욱이 생명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증거를 가지고도 에덴낙원이 자연계라고 우긴다면 창세기의 기록을 일종의 신화(神話, a myth)로 취급해야만 가능하다. 당신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 또는 설화로 대접하려는가?


이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우리가 보통 "천사"라 부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포함해서]들이 바로 그런 신령한 육체로 되어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이런 피조물 세계에서도 양면성의 이치에 따라 역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로 나누어지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으냐 하는 그 뜻이다.


에덴낙원[영계]의 동식물은 자연계의 동식물과 '실체'와 '형체' 관계가 된다. 사람 역시 그런 형체와 실체가 있으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혼이 실체요 육체가 그 형체다. 단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와 영계를 모두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 양 세계에 똑같이 속한다는 의미에서 한 생명체 안에 그 두 가지 면을 다 갖춘 유일한 존재이니 그래서 영혼[영계에 속한]과 육체[자연계에 속한]의 이중 구조이다.


처음부터 이런 이중 구조로 창조된 까닭에 이 이중 구조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얻는 새 창조에서도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으로 인한 '영혼'[그리스도의 영, 성령]과 '육체'[자연게에 속한 육체로서의 나 자신] 관계로서의 이중 구조가 되는 것이다. 사람만이 이런 자연계와 영계 양면에 속한 이중 구조인 것은 자연계 생물 창조의 정점(頂點)이요 동시에 영계 창조의 시발점(始發點)이 되는 까닭이다. 에덴낙원이 인간[아담]의 영혼이 조성된 다음에 창설된 이유다.


이 우주 전체가 자연계인데 이와 맞먹는 영계라면 영계 역시 그만한 규모로서 단지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뿐으로, 실상 영계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가 없지만 단지 그 실존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에 의하여 만물 만상 만사가 예외없이 양면성의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윤곽 정도는 이미 주역을 통해 알려졌으나, 이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서양에도 일정 부분 사실로서 소개된 것이 겨우 1927년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통해서였으니, 너무 일천(日淺)한 지식이다.


지식이라 할 것도 없으니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만 알면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이미 오래 전부터 밝혀 왔으나 사람들은 이를 확신하지 못해 막연하고 애매 모호하게만 천국이니 천사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니 또는 그룹, 스랍 등으로 해서 인식해 왔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온갖 지식과 능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인류를 기만하려고 드는 때에 이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악령이라고도 하고 마귀(魔鬼, devil)라고도 하는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대칭 원리에 의해서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다. 같은 원리에 의해 인간도 악인과 선인[또는 의인]으로 구분되는 것과 같다. 자연계와 영계가 대립되어 있으므로 자연계에 생물이 있듯이 영계에 역시 생명체가 있어 그 중의 일부가 바로 우리가 천사들이라 하는 부류이고 그 중에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물들은 본시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상세한 설명은 곧 이어 있을 것이다.


대칭[대립]되는 세계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영계(靈界)가 있다는 증거다. 앞에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이런 악령들에 상칭(相稱, 대칭, 대립)하는 존재가 "거룩한 천사"[마 8:38]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靈)"이라는 것은 "신(神)"을 말한다. 그래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성경은 명백히 했다. 거룩한 천사들은 "인간을 섬기라고 보내시는 하나님 부리시는 영들"[히 1:14]이다. 따라서 인생들을 해칠 목적인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 대치되는 선신(善神)들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런 대칭성으로 영(靈)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자율성으로 움직이도록 이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자유를 따라 스스로 택해서 악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 그렇게 된 결과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밝히는 것은, 이 세상은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원수되어 인간을 해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악령들 및 인간을 위하는 천사들의 복합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상호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인간사, 세상사를 논함에서 이들의 존재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거룩한 천사들보다는, 인간사를 주도하고 훼방하는 악령들을 더 주목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지배자요 신으로서 인간을 조종하고 통할하는데 종교쯤이야 못만들어 내겠는가. 종교의 교조(敎祖)들이 무슨 이상(異象)을 보았다, 환상(幻像)을 보고 계시(啓示)를 받았다 하는 따위가 바로 그런 증거다.


이 세상 신의 마수(魔手)에 걸려 들어 홀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흉내 냄이다. 우리는 어느 특정 종교를 비방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종교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 옳지 않음 다시 말해 인류가 구제될 수 없음에도 그 구제 방안이라고 선전하는데 대해서 그 거짓됨을 알리는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진리 아니면 거짓이다. 흑 아니면 백이다. 빛이 아니면 일체가 어두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지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세상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많은 사람이 자기네 종교를 '그 방법'이라고 잘못 믿기에 이에 대해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말하는 것뿐이다. 종교든 무엇이든 세상 전체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죄뿐이니 왜냐면 모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죽은 자요[마 8:22] 따라서 선인도 의인도 없음을[롬 3:10] 가장 먼저 아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원 얻는 첫 단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고로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할"[행 17:30] 것 즉 이런 "악[행]을 버릴"[3:26]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그런즉 이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요 7:7] 잘 알고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임하고 있는 터이다. 올바르게 살아 영생을 취(取)하라는 옳은 소리를 성령 충만하여 외치다가 오히려 군중의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뒤를 따르려는 것이다[행 7:59]. 이를 가리켜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름"[빌 3:10,11]이라 했다.


세상 사람들이여, 내가 믿는 종교가 나의 분신(分身)은 아니지 않은가. 종교가 내가 아니고 내가 종교는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하는 것이라 하기에 즉 내게 관련된 일이라 하여 흥미를 가졌고 때로 심취했을 뿐이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安息日)이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셨듯이[눅 6:5/막 2:27] 종교든 또는 그 무엇이든 사람 곧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자도 동의하실 것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피조물을 만드신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역할이 바로 그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시어 그 피조물들을 위하심에 있는 까닭이다.


단 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을 위주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영물이 있어 당분간은 필요악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 세상 인생들을 시험하는 역할을 하여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기에, 그런 거짓말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범람하고 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상식으로 알아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종교도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일 따름이지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거기에 어긋나는 그 무엇이든 겉으로는 다 나를 위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그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 모든 다른 내용들은 당연히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진리는 하나다. 진리는 우연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선하신 즉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하시기만 하는[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내용이 단 하나이지 여러 갈래로 나타날 리 없다는 사실 역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이 실상(實相)을 토대로 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곧 사람 삶에 대한 '진리'의 골자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시고 죽으신 것이 모두 나를 위하심이라는 것, 이 얼마한 흐뭇한 진실인가, 이 자체가 진리다. 그런즉 진리로서의 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일체의 세상 종교가 진리가 아닌 속임수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세상 종교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여러 내용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들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음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각자로 하여금 다시 출생하게 하시는 즉 새로이 창조하시는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각자와 하나 되는 데에만 있음을 명시하기 때문인데, 이런 내용으로 가르치는 종교는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이른바 기독교라 하더라도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영생만을 탐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가르치는 것을 교리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까닭에 세상 종교로서 일괄 취급되는 것이다.


진정 어느 것이 나를 위하는지 각 사람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어느 것이 합리적인지 그래서 이치에 맞고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택할 일이다. 이것이 '자유'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것이 옳고 네 것이 나쁘다" 즉 "내 종교는 진리이고 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이지적으로 판단하여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지 그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을 수용할 일이다.


성경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과는 달리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퍼뜨리기 때문에 그들을 우리는 종교 취급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야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내세워도 그들이 나타내는 열매가 "아니다" 하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3:8,9/7:16]. 진리와 거짓이 병존함을 인하여 혹자는 이에 대해 혼돈과 혼동을 느낄 것이기에 미리 지적해두는 것이다.


창조주를 입증하는 3운법칙


첫 사람 아담이 영계에서 살다가 이 자연계로 추방되었다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추방되었는지 그런 것을 두고 왈가왈부 논할 필요는 없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되어 있는 우리 처지에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어나는 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알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삼위일체 원리'가 '3운(運)법칙'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모든 과학적 법칙[자연법칙]의 근본이 되고 원류(源流)가 되는 것이 이 삼위일체의 원리요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 trini homo]이다. 과학 좋아하는 사람은 상보성 원리의 닐스 보어가 이미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이에 유의함"이 지혜다. 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인간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시대를 첨단 과학시대라 하니까 하는 애기다.

이 3운 법칙의 의미를 곧 이어 ①, ②, ③, ④, ⑤, ⑥, ⑦로 나누어 설명하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삼위일체의 원리를 확실히 증명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과학적 법칙[일반으로 자연계에 속한 원리들을 말한다]은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그 진실성이 입증되지만, 자연계만 아니라 그 대칭 구조인 영계(靈界)까지 통할하는 이 '삼위일체 법칙'만은 그 특성답게, 자연법칙을 입증하는 수단으로는 증명되지 않고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과의 절충이라 할 수 있는 이 특이한 3운 법칙의 구조의 형성 자체로써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3운법칙은 인간의 한 생애에서 그 활동과 생사(生死)를 관장하는 법칙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실존과 인간 사회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관장(管掌)이 증명되고 있다. 인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들 외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완전히 조종당하여 진리와 진상을 알지 못하고 "눈을 뜨지"[행 26:18]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마지막 때에 이 때를 위하여 준비해 두신 것이 이로써 마침내 드러나진 것이니, 따라서 정히 때는 마지막 때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요 9:4]이 도래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3운법칙이라는 이 과학적 사실이, 과학자로 말미암지 않고 성경을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배운 결과로 알려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니, 이것이 당신에게 함정, 덫,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즉 그리스도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세상에 전파하게 될 막중한 책임을 진 열두 제자 중 단 한 사람도 당시 쟁쟁하던 성경[구약성경]학자들 중에서는 끼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傳道)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는 말씀이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매양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눅 6:26] 하심과 같고,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함과 같으며,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냐"[:18-20] 함과 같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함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우월한 지위와 환경에 있음에 연연하지 말 것은 이런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에 일차적 걸림 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멸망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이런 것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중(掌中)에 있다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눅 4:7]. 매양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 들먹인다"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인간과의 불가분성이 아니라 온갖 나쁜 의미에서 인류는 이들 악령들과 결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글을 세상에 발표함으로써 온 세상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를 받아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22] 하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다. 무신론자, 무종교인,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들에 의해 스데반처럼 돌팔매에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아무 영광도 기대하지 않고 목적하지도 않는다. 오직 북한 교회 형제들과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단지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요 15:20] 구원 얻기로 작정된 이들은 경청할 것이다[행 13:48].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여기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행 20:27]고 자부하기만을 바라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26]고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님과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32] 한 바와 같이, 여기에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실 것을 믿고 "주님과 그 말씀께 모든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살아 계시어 우리 인생들과 성령으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이 인격을 갖추신 분이기에 우리와 같은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을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피조물로서 인격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 역시 우리와 다름없는 인격성을 갖추신 분임을 증명함이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지, 정, 의[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의 측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과 사귈[교제, 교류] 수 있음이다.


이는 다시 무슨 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인생들은 아예 그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병철 회장이 "과연 창조신이 존재하느냐" 물었지만, 하나님은 인생들을 상관하실 때 차별하여 대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실상 그렇게 하시고 있다. 어떤 인생을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경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멸망에 처해지고 아담처럼 죽음에 직면해 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니 구원이 무용지물이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알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인데 구원이 소용 없게 될 바에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또 하나 이유는 구원의 방법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므로 악인들도 얼마든지 그 방식대로 하면 구원될 것인즉 아예 처음부터 악인들을 구원으로부터 차단시키실 수밖에 없음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회개시킴으로써 구원하시려는 것이지 죄 그대로 있어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악인을 구원하시려 함이 아닌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범죄했다고 해서 아담이 죽을 리도 없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영원 멸망에 처해 있을 리도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선례에서 확인되듯이 그런 악인[악인과 죄인을 여기 이 대목에서 구분하는 것이 좋으니, 악인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이고 죄인은 불가항력으로 범죄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들은 죽음과 멸망밖에 태일 몫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들이 '산 자가 되는 구원'의 대상일 리가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구원해보아야 즉 산 자로 만들어보아야 역시 범죄하여 죽고 말 것이니  그런 무의미한 일을 하실 리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 하든가, 무신론자로 자처할 때는 똑똑한 척 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하지만 실제는 하나님 친히 그렇게 무신론자가 되도록 버려두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므로 그를 아예 무신론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그 뜻이다. 일괄적으로 그렇게 하신다기보다 그렇게 얼마든지 하실 수 있고 또 실제가 그렇다는 이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릇 모든 무신론자는 처음부터 그렇게 취급된다는 것은 아니니, 혹 생각이 짧아 잘못 판단하는 것이 대개 인간이므로 그렇게 고집하다가도 나중에 회개하고 믿음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끝내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이들을 지칭함이다. 억지로 "믿으라, 믿으라" 하시지 않는다. 무작정 "나를 알라, 왜 나를 모르느냐" 하시지 않으니, 이상과 같이 성경은 명백하게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


이 내용을 성경은 그대로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들에게 이루었으니 기록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頑惡, 완고하고 거만함)해져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다"[마 13:14,15/요 12:40/행 28:26,27/사 6:9,10]. 이와 같이 차별하시는 이유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임을 명백히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심이지 그런 악인을 의로운 자로 삼으시거나 인정해 주시고자 함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치는 오만한 사람은 아예 하나님께서는 접어 두시고 내치심으로써 상대를 아니하시고 그런 미망과 혼미 가운데 또는 무지(無知) 가운데 그냥 방치해 두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양면성의 이치 그대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버리신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대칭[양면] 원리의 동시성(同時性)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킬 수 있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든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줄 착각하기 쉬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해석을 하게 된다.


"우리의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니 그 중에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고후 4:3,4]이라 했는데, 감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차단한다는 말인가 하겠지만,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벌써 그런 악인들을 버리셨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버리심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생명은 한 몸의 이치에 있으므로 머리를 인정 않음은 한 몸의 이치대로 전개되어 가는 삶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서 이탈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생명의 한 몸 체제에 들어올 수도 없고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인간으로서 '자기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이 아닌 인간이 없는데 그러한 인간을 차별하시면 누가 구원 얻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회개(悔改,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믿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여 그 뜻에 절대 복종함이니 그의 나 위한 죽으심을 통해 내가 그와 하나되어 있는 것을 믿음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를 구성함이다. 사랑의 원리에서 주인[종의 섬김을 받음]과 종[주인을 섬김]의 관계를 형성함이다. 갑과 을의 사랑에서 둘은 '섬기고' '섬김을 받는' 일을 동시에 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섬기시는 위치에 계시는 것이다[눅 22:27].


즉 머리는 몸을 섬기고[위하고] 몸은 머리를 섬기는[위하는] 관계다. 다만 몸이 머리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나 자신을 위해 살던 것을 회개함으로써 머리로서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음을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아니할 때 천하 없는 구원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 이들 및 처음에는 회개했으나 중도에 마음을 바꾸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은 제외되고 탈락되는 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특질이다.


아무리 죄를 태산 같이 지어도 악인이 아닌 사람이 있고, 겉보기에는 성현 군자 같아도 죄인이 아닌 악인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지 '악인'에게 영생을 선물로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구원]을 왜곡(歪曲)되게 세상에 알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 역시 그렇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람마다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리는"[행 3:26] 것이 회개다. 다시 말해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믿으라는 말부터 먼저 하니 순서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면 죄를 회개할 마음부터 우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면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으시기에 만든 까닭이다. 인간[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음[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함-고후 5:15]으로써 이런 죽음과 고난의 불행이 닥쳐져[롬 5:12]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이제 구원 받으려면 당연히 죄를 버려야 한다는 그 뜻이다.


이는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니 당연한 것이다. 과거에는 그 악함을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인데[행 17:29]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앞에서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것은 이 회개하라는 명령에 귀 담아 듣지 않는 경우를 말함이다. 그래서 성경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하였으니, 그런 사람들은 믿지 못하도록 하나님 친히 유도(誘導)하시는 까닭이다.


이는 그만큼 "믿는다"는 것이 삼척동자라도 능히 가능할 정도로 간단명료하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그렇게 간단한 방법대로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속말로 꼼짝없이 그 악인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 뜻이 되는 까닭이다. 차별하실 정도의 악인이라면 그냥 즉결로 심판해 버리시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누가 감히 혀를 놀릴 것인가 마는, "유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리원칙대로 하시는지 그에 대한 증명이 된다. 전지전능을 내세워 마음대로 하심 즉 전단(專斷)하시는 일이 일절 없으시다는 증거다.


끝까지 불복종하여 회개 않고 버티는 악인도 얼마든지 즉결처분하시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누가 감히 버티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된다. "믿는" 사람 믿는다고 해서 축복하시는 것도 간섭이 되지만, 회개하지 않는 이를 회개 않는다고 당장 심판해 버리는 일 역시 강제다. 구원 얻는 일은 철두철미 사랑과 관계된 일이므로[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심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으므로-갈 2:20]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일절 간섭이나 강제가 배제되는 것이다.


가장 첫째 가는 '하나님' 증명


나의 "영생 얻는 믿음"은 바로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나 자신 사랑으로 화답하고 대응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 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일하신다는 것 자체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가장 첫째되는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라 판단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되는 이유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배경에 이와 같이 확고 부동한 영원한 법질서의 확립과 집행이 서릿발처럼 서려 있음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거짓이나 속임수로 꾸며내고 지어내는 것이 한 치도 용납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철두철미 원리원칙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그려낼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거짓말 자체가 원리원칙을 벗어나 자행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고로 그 어떤 강심장도 '양심'과 동의어(同義語, 同意語)로 인정되는 '원리원칙'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지적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함에서 십자가 고난 받음으로써 설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특정 종교 의식만 충실히 따르면 구원 얻어 영생한다고 말을 꾸미지, 범죄의 결과가 죽음이니까 기어이 그 죽음의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들을 위해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는 생리적으로도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인간 구원의 기조(基調)로 삼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발자취를 따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 세상 중에서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도 설정하지 않는 법이다. 왜냐면 거짓말은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이기주의의 발로이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고 고난 받아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해서 약한 자가 되고 한 생애 끝까지 그러해야 된다는 것은 본성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까닭이다.


자기중심 곧 이기주의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강하고[남을 억압해서라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형통하는 것을 목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기주의[사사로운 욕심]나 집단 이기주의[종교의 우월성 또는 종교를 빙자한 세계 제패]나 마찬가지다. 이런 자기중심의 거짓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요 6:35-66]라는 말을 절대로 지어낼 수 없다. 물과 기름 사이다. 자기중심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진리가 아니고 사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기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뿐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진실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자체 증명하는 데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어떤 힘을 빌어 그것을 통해 증명되기를 바라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것은 유동적이고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므로 그런 권위를 유지할 수 없지만, 그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이렇게 확증할 때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일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우리처럼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느니 어떻다느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면 볼 수는 없을지라도 그 음성도 듣고 기타 방법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자연계와 영계(靈界)의 현격한 차이 중 하나다. 그만큼 우리는 불리한 여건 속에 있다 하겠다. 이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우리가 모두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자연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지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지적(知的)이고 이성적인 판단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어 이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표현하면 그 자신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요 3:19,20] 나타내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양심상으로는 끊임없이 단죄를 받으나 그 스스로 "나는 악인이라" 하는 이는, 사마천(司馬遷)이 말하는 바 도척(盜拓)과 같은 인간[공자 앞에서 호언장담한]이 아니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이 인격적 존재를 하나님, 하느님, 천주, 신, 창조주, 조물주, 창조신 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좋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심하여 나타내는 명칭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식별(識別) 또는 구별을 위함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 신약 시대에는 통하고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 시대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어진 적이 없다. 오직 구약 성경이 인용될 때에 한해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 공통으로 나타내신 이름이시니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의 일을 지적하면서 "여호와"라 할 때는 아버지를 가리키심이다. 이런 경우는 이사야 53장에서 엿볼 수 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당시 통해진 까닭이다. 오늘날 하나님이시라 하면 대체적으로 아버지를 지칭함과 같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 적이 없다. 아버지는 단지 그냥 "아버지" 또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롬 15:6]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 피조물임을 인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호칭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우리가 특별히 존경할 만한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생존 인물에 대해서는 각별히 경어를 쓰고 더구나 그 면전에서는 당연히 그러함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우주 만물에 충만하신 영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니 지금 이 자리에도 엄연히 임해 계시는데 어느 존전(尊前)이라고 감히 "신(神)이니 어쩌니" 하겠는가.


조물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의당히 그 이지적(理智的) 피조물인 인생들에게 자기 뜻을 알리실 필요가 있고 그 매개체가 있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혼잡스럽게 여러 종류가 있어서도 안되고 단 하나이어야 함도 사리에 옳다. 그리고 처음부터 말씀하여 오신 것도 당연한 것이니 그래서 인류 역사상 그 정도의 오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자처해 온 것이 있어야 함은 말하나 마나이다.


이로서는 유일하게 구약성경뿐이고 또 여기서 신약성경이 성립되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요건에도 맞는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가가 기원 70년에 이미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 멸망한 후 온 세계 지면에 흩어졌고 "유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갖은 핍박의 표적이 되어 세계의 유랑민(流浪民)으로 떠돌다가 1948년 나라를 재건하기까지 거의 20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디어 내고 불사조(不死鳥)처럼 우뚝 서 있는 사례는 온 세계에서 유일하므로 엄연한 하나의 기적이 되어 있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성경의 권위[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를 증언하는 명백한 증거 중 하나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그렇게 멸망당한 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구약 성경 자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 내지 진실성도 소멸되다시피 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종교는 많다. 그래서 유대 민족의 구약성경만큼은 오래지 않아도 그들나름의 경전(經典)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실이 아니고 다 거짓이란 말인가 할 것이다. 또 거짓이라 한다면 왜 혼잡스럽게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지금까지 세계 각처에 뿌리 내리도록 하시는가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럿이 있을 수 없음이 분명한 까닭에, 성경과 대립 각을 세우고 있을 때 이는 진리일 수 없음은 자명(自明)해진다. 그러면 세상의 종교가 성경과는 대치되어 있는 형국이 되는데, "그리 되면 하나님과 대립해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결론이 되지 않는가" 할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과 적대적인 대등한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우주 만물을 관장하는 자연법칙의 일사불란함을 강조했는데 이 '하나'로서의 통일성은 다름아니라 그 법칙의 주관자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가 아닌 복수 또는 다수라면 그런 통일성을 나타낼 리가 없다. 고로 대립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또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니까 자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인간이 다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게 되어야지 왜 어떤 이는 무신론자이고 오히려 무신론자가 더 많으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앞에서 일부분 설명되어진 바 있다].


피조물의 자유 의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이 인간을 인간 로봇처럼 하나의 기계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주 독립성을 갖춘 자유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성경과 대립되는 종교 경전이 생겨난데 대한 답이다. 자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왜 자유 즉 자유 의지에 따른 자유 선택이 필수이냐 하면, 삶에는 사랑이 그 핵심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요체이기 때문임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 한편 생각할 때, 자유로우니까 좋기는 한데 그 자유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선택이 분명하므로 선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는 대로 악인도 있음이니, 그 악인이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그 악을 통제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만하다. 이것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절대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 대신, 그와 같은 악을 통제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는 결론이 된다.


그 방법이란 다름아닌 ‘미리 아시는’ 능력 즉 예지(豫知, foreknowledge)이다. "특별하신 능력"이라 할 것은 없으니, 우리 인간도 무엇을 제작하거나 제조할 때는 그 성능이 어떠하고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미리 내다보고 이를 전제로 하여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에 그렇다. 만일 부정적인 결과를 내는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만들어 내지를 않을 것이다. 다만 차이는, 우리는 물질에 속한 것을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자유 의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인격성을 지닌 생명체를 만들어내심에 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게는 이와 같은 ‘예지’를 따라 당연히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이 가능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권이 없다면, 예지라는 것은 아예 필요 없이 예정으로만 모든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고로 ‘예지에 의한 예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절대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유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고 성경과 대립되는 무슨 언행이든 완전 자유다. 그래서 성경과 대립되는 종교들이 있는 것이고 무신론자도 얼마든지 있게 된다. 착한 사람도 있고 악인도 얼마든지 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종교를 부추겨 만들어내었다 해도 그 역시 자유다. 앞에서 사물의 양면성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웠거니와 이 역시 그런 양면성의 하나다. 양면성이라는 것은 평형과 균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와 더불어 이와 병행하여 형평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자주 독립성이다. 둘이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완벽하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것은 성경이 거짓말을 하느냐 않느냐, 여기에도 달린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믿고 성경이 그 말씀인 줄 믿어도 오늘날 여러 종교가 있어 많은 사람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마치 무신론자들처럼 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진실성이 입증된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현실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