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3)
노르웨이 출생의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30세에
발표한 “절규(絶叫, 비명, The Scream, the cry)”라는 그림이
위의 것인데 이 세상의 참 모습, 그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20세[1883년] 젊은이로서 그는 "나는
사랑과 죽음을 다룬 그림 연구에 몰두해 있다"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을 수 있는 심각한
소재 또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세상에 그대로
묻혀 그 심성과 이지력은 점차 마비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일찍 사별한 의사이지만 과도한 이상 성격자인데다, 그 자신까지 병약했던 환경 속에서 몸부림친 뭉크. 이 그림에서 그는 철저히 고독한 자의 처절한 비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리 위로 무심코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배경이 인상적입니다. 그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아예 철저히 무시해버리는지 아니면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지, 철저하게 주변으로부터 외면 당한 절해고도(絶海孤島) 속의 고독과 그 절규를 드러냅니다.
짙은 황혼(黃昏)은 이 영혼에게는 불[火] 속의 답답함처럼 미칠 듯한 단조로움의 경악(驚愕) 일색(一色)입니다. 이 “절규” 또는 “비명”이야말로 곧 닥칠 한밤중[죽음의 멸망]을 앞둔 "고해(苦海)", 사해(死海)로서의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단적이고도 대표적인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상쇄시키는 것으로서 본능적으로 "사랑"의 주제를 생각한 것인데, 사랑은 그 본질이 생명이요 생명의 핵심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하다-Love is as strong as death"는 성경 아가서(雅歌書-사랑의 시)의 결론[8:60]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 위하여 죽어 주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시어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다음에는 당신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살게 하셨으니 이 분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그 뜻을 따를 때 당신은 비록 죽어도 결국 살아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살 것이니 이것을 믿느냐”[요 3:16/11:26]하는 것이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앞에 소개한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는 이 아가서는 성경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성경의 중심 내용이 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적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상징하는 글로서 성경의 기본 사상이므로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렇게 성경 중앙[그러나 거의 정(正)중앙에 위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시편 119편]에 위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인식되는 듯했지만 이제는 외아드님으로 계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심[바로 예수 그리스도]으로써 극히 현실적이고 구체화된 것입니다.
한 말기 암 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이 그림을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바로 이러한 실상(實相)으로 보지 못할 때 그리스도께 누구든 나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병든 자가 의사를 찾고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고된 노예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쉬기를 구하는 자가 그런 절규의 주인공들입니다. 불 뱀[fiery serpent]에게 물리기만 하면 죽는 판에 그렇게 물려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모세가 놋[brass]으로 뱀을 만들어 쳐들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역사적 실례를[민 21:4-9]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그 놋 뱀을 높은 장대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다” 하심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요 3:14].
죽음은 절해고도 속의 고독입니다. 영원한 불 못에서는 바닷가의 모래 같이 수다한 사람과 그리고 악령들이 있으나 철저히 자기 혼자만의 외로움뿐입니다. 생명[영생]은 창조될 때부터 즉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뜻하신 하나님 사랑의 품속에서의 요람입니다. 사랑스러운 대가족의 영원한 일원으로서의 환희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면서부터 죽음의 고독입니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린 아이 때의 천진난만이 있기는 하나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한낱 꿈이요 오히려 영생 길에 장애만이 되는 함정, 덫, 올가미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속임수입니다. “온 천하를 꾀는”[계 12:9] 이 세상 지배자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만이 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을 잡아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가두어 놓은 것처럼 철저히 통제된 상자 속의 유폐된 생애에 불과한 것이 이 세상의 인간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어 곧 인간 생애의 법칙[트리니 호모]입니다. 따라서 오직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때"[고후 6:2]임을 보여 주는 이 외의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참히 죽어 가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의 형상으로 나를 상징하여 나를 대표해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과 함께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세상의 그와 같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이런 무지(無知)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행 20:21]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이런 실상을 드러낸 것인데 이를 믿지 않음으로써 빈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있으니 당연합니다. 세상 어느 종교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남은 평생 동안 고난 받기를 가르칩니까. 고난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임을 가르칩니까. 저주 받은 자로서 고난의 죽음이 이 세상 질서라고 가르칩니까. 이 세상을 직접 관장하는 자가 악마, 악령, 마귀라고 가르칩니까. 온통 공중에는 그런 악령들이 포진하고 인생들 옥죄고 있다고 가르칩니까.
그들 역시 세상을 고해(苦海)라고는 해도[실상 이는 누구나 생각 있는 자에게는 그대로 비쳐지는 현실] 그 고난의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데 해결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선행을 하면 낙원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실상을 진실 그대로 정직하게 수용하고 믿는 것이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 그대로를 알리려 하는 것이 성경인데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해서 믿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거짓말을 하고 속인다고 말해서 도대체 무엇을 목적한다는 것입니까. 거짓말로 꾸며대고 속이는 것은 억지로 믿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이상 설명과 같은 내용의 성경과 억지로 믿게 하는 것과는 '기름'에 대한 '물'과 같은 차이일 뿐입니다. 조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주도면밀하고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강조하여 이를 생명으로 삼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런 인간의 사악한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스며드는 것을 용납하실 리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고난은 진실 그대로를 함유한다는 증거입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고난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거기에는 진실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약하고 소수(少數)이고 그렇게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 말씀이 세상에서는 부끄러워할 수 있는 충분한 대상이 된다고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하나님 친히 부끄러워하시는 대상이 된다는 경고에서 거짓말은 깃들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 친히 창피하게 여기시는 그런 사람이 구원될 리 만무합니다. 죄 짓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하게 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하기를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는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그리스도께서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와 함께 하나를 이룰 수 없음은 자연스러운 당연 귀결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뭉크의 절규는 이회장의 절규처럼 여겨져서 먼저 이 글부터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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