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4일 일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1)


과거의 정리되지 못한 글이라 오타도 많고 문장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다듬어갈 생각입니다. 반복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공감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고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에 임종 직전에 제기한 저 유명한 24개 항 질문에 대해 답변 형식으로 써 둔 글부터 올리겠습니다.


이병철 회장, 그는 참 구도자(求道者)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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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회장, 그는 참 구도자(求道者)였었네


저 산너머 아득히
머얼리에

행복이 있다기에

나도야 따라갔습네

.....................
눈물만 글썽인 채
돌아왔습네


아직도 사람들은 말하지만

산너머 더 멀리에
행복이 있다지만



ㅡKarl Busse(1872-1918)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1910-1987]은 2년간의 폐암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하기 전 자기의 죽음을 예감했던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교실업인(實業人)으로 살아 생전 불자로 계속 알려졌으나[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성대히 거행되었음은 물론이다], 신[하나님]과 영생 등, 사후(死後)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하는 절박한 심경이 되어 천주교 모 신부에게 긴급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다는 사실이 24년 뒤에야 알려졌다.


세상을 마감하기 직전 남긴 그 영혼의 절규라는 점에서, 위의 칼 붓세의 시상(詩想)처럼 우리의 심금을 한없이 울리고 있다. 이 때 그 신부는 "그냥 대화하면 초점을 맞추기 어려우니" 묻고자 하는 요점을 먼저 글로 적어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회장은 처음에는 40가지 질문을 만들었다가 이를 대폭 줄여 24개 문항으로 요약한 다음 보내오면서 뒤이어 신부와 만날 일자를 정했다. 타계하기 1달 전이었고 당시 이회장은 몹시 다급한 듯이 서둘렀다고 한다. 무척 서둘러 날짜를 잡아놓고 만날 날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 갑자기 이회장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던 것이 마지막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렇게 소원하던 만남을 이루지 못한 채 타계한데 대한 허탈감으로 그 신부는 이후 그 질문서를 두 번 다시 대하지 않은 채 그도 타계했는데, 24년만인 2011년에 이르러야 동료 신부들에 의해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24년 만에 알려질 24개 질문만 남겨놓고는 그 답을 영원히 듣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한 구도자(求道者) 이회장, 일국의 최고 갑부로 유한 없이 생을 마쳤다는 만족감으로 평안히 임종할 시간만 기다렸음 직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죽는 판인데 생전의 부와 명예가 다 무엇이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평소 느꼈던 모양으로 우리 나이 78세의 고령이 나타내는 인생의 완숙과 총결산의 최종 결론이듯, 우리 모든 남은 인생들에게 최대 선물로 남긴 유산(遺産)이듯, 이 24개 질문을 남기고 떠난 이화장. 그답게 줄기차게 구도의 정신을 버리지 않다가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쫓기듯이 다급하게 구조 신호를 보냈던 그 절절한 심정으로 묻고자 했던 내용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자연인 이회장에 대한 추억과 함께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 의미라 할 것이다.


'이회장과 24개 항목의 질문', 이는 가히 한 권의 철학서의 가치가 있다 하리라. 아니,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철학적 담론 중의 압권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개인적 판단이다. 모든 철학적 이론은 그 자체가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고 문제 제기일 뿐이다. 외견상 아무 유한(遺恨)이 없을 만하다고 할 한 생애의 종결을 앞두고도 영원한 한(恨)을 진솔하게 토로한 결정(結晶)이 이회장의 질문서이기 때문이다. '이회장과 그 질문'이 우리에게 이토록 뼈에 사무치도록 친근히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질문을 나열시키고 있다.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어 주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 하는데 그 창조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4. 언젠가는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결국 부인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예를 들면 히틀러, 스탈린, 갖가지 흉악범 등]을 만들었는가?
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있는가?
11. 종교의 종류와 그 특징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가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는가?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이 99%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고 왜 세계의 모범 국가가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폴란드 등 동구제국과 니카라과 등] 왜 공산국이 되었는가?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이회장의 질문과 관련된 것이 월간 조선[2012. 2월호]에서 기사화되었는데 그보다 먼저 중앙일보 지면[2011.12.17]에 1면으로 처음 소개되었었다. 그리고 "Story section"에서 장장 5면에 걸친 지면 할애로 대설특필하듯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생애가 끝나면 결국 한 줌 흙으로 남고 재[ash]로 남음과 동시에, 생각 있는 자라면 최후로 남개게 되어 있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을 바로 이회장이 폭탄선언하듯 터뜨렸으니 뉴스 중의 뉴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위의 질문들을 '신의 존재', '죄의 실체', '성경의 의미', '영혼의 실상', '종교', '선과 악', '마지막 심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증명되지 않는 것이 신의 본질"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것은 무신론보다 더 바람 잡는 말이다. 모 신부는 "신이 자신을 실지로 드러냈지만 인간은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고 단지 그 편린만 보는 것뿐이다. 신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존하기 위한 신의 섭리라 하겠다. 이는 힘 있는 사람이 얼쩡거릴 때 부담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 뜻을 모르고 인간은 덮어놓고 신을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한다"는 취지로 말했으나, 이는 세상 만상, 인간 만사의 양면성이 '하나님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는 데에서 오는 잘못된 지적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도[요일 4:8] 하고 소멸하는 불이시기도[히 12:29] 하니, "하나님의 엄위"[11:22]만 말하고 "하나님의 인자(仁慈)"[:22]는 간과하는 '소경 코끼리 만지기'가 되는 까닭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


이회장이 만일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희소식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이승을 마감한 것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저승[내세(來世)가 아닌]에서도 들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조심스러운 견해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고 그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18-20] 했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요 11:25]이라 하셨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26] 하셨다.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에서는 어찌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 한하겠는가. 구원의 복음(福音, 복된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한 인류가 그리스도 오시기 전 그리고 오신 직후에도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그 동반구(東半球) 쪽에 얼마나 많았던가. 공자도 있고 석가도 있고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명정대하고 공정공평한 기회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다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을 들을 것이니 바울 사도(使徒)처럼 애써 전도(傳道)할 필요가 무엇인가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전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사람 삶의 도리를 다하는 의미이므로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 사는 도리를 따르는 것이기에 이를 따르지 않는 이에게는 화가 있다[고전 9:16] 함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단순히 영생을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올바르게 살도록 하려 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람답게 즉 올바르게 사는 것이냐.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구조에서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함이니 곧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여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함이다. 이 자기 부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으로서 그래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그리스도와 이같이 하나됨이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생명이시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그 결과는 영생이다.


이와 같이 순서를 따라 제대로 구원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은 반드시 올바르게 사는 즉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불가분인 것이다. 그냥 영생만 받아 챙겨 누리면 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많은 사람을 속여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구원커녕 멸망의 지름길인 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영생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요,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필연적으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신"[히 1:9] 그리스도를 따라 나 역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이 필연이라 죄 짓고는 영생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앞으로 성경 중에서 바울[Paul]이라는 사도[apostle]의 글을 많이 인용하게 되는데, '사도(使徒)'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하신 일들을 직접 곁에서 모시며 3년간 함께 기거하면서 듣고 보고 한 12명의 제자들을 주로 가리킨다.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이들을 적극 탄압에 나섰다가[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뵌 후로는 순수하게 성경[구약]을 통해 성령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으로[3년간 아라비아로 물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음으로써 사도로 인정된 인물로 남달리 성경에 능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 믿기를 차일피일하고 미룬 사람도 여기 해당되는가 하면, 여기서 제외됨은 당연하다. 기회를 얻지 못해 믿지 못한 사람과는 달리, 결단을 미루다가 믿지 못한 이들 혹은 임종시에 가서나 믿기로 계획하는 이들은 고의성이 명백하므로 이런 사람들은 알면서도 범죄하는 이들과 동류(同類)로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그런 재차의 기회가 주어지는지는 모든 사람과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소관사(所關事)이지 인간 스스로가 논할 바는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은 이미 구원될 기회를 방금 지적한 대로 넘겨 버린 것이니, 고의성으로 간주되어 영원히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실상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있는 때에는, 이 세상에서 믿지 않으면, 믿을 기회를 영원히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면 인간 60[환갑을 맞는 나이] 평생은 삶의 낙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장차 임할 본격적인 '삶' 아니면 '죽음'을 스스로 가름하도록 하여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 하신 한정된 기한이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는 길다면 길지 짧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인간 생애의 기간이면 충분하다고 판단되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즉각 반응을 보여 영생에 들어갈 일이지 결코 차일피일할 문제가 아니니, 인생은 내일 일을 모르지 않는가. 이회장의 경우도 그 속 사정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므로 우리가 이렇다저렇다로 판단할 일은 아니고 사후(死後)에라도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이라 함은 오직 일반론을 말한 것뿐이다.


찾아야 찾아지시는 하나님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하시기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눅 11:9-11] 하셨으므로 찾는 자는 찾게 되어 있고 찾지 않는 자는 아무런 기회가 없을 것은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은혜의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성경대로 말함이 아님은 위의 약속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심도 사실이고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양면성(兩面性)이요 동시성(同時性)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어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행 17:26,27] 했고 이는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기"[:27] 때문이라 한 대로, 손을 뻗으면 맞닿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다는 말씀과 같이[막 2:17] 구원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그런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하실 까닭이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1]고 성경이 단정하고 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65] 하시지 않았느냐 한다면, 찾는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 친히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이끄시는 것이요, 이는 다시 "선지자의 글에 '저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것이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요 6:45] 하심과도 맞물린다.


우리의 구원을 정의(定義)하면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the year of the Lord's favor]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한 대로, "눈을 떠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케 된 이들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들로서의 상속을 받는"[행 26:18]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한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음 눈을 어둡게 하므로"[고후 4:4-"to blind the mind"]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의 범죄로써 모든 인간의 심성(心性)이 완전히 구제 불능의 상태인 죄성(罪性)으로 변한 것[total depravity]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억압되고 "육신"[롬 7:14-8:13]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bondage] 일어난 불가항력의 결과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전자의 경우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기만이 되고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구원은 이 속박에서부터의 자유 해방을 말함이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이는 하나도 없는[롬 3:11] 비참한 실정에 이르렀으므로, 하나님께서 여러 의인[선지자]들을 통해 이 실상을 깨닫게 해 주려 하셨으니 아브라함을 일으켜 한 민족을 세우게 하시어 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그 뜻을 나타내신 것도 그 일환이다.


하나님에게서 가르치심을 받아 배운 자가 그리스도께 온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하신 것처럼 가르치심을 받아도 배우기를 거부하면 그리스도께 오지 못한다. 즉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의 진실 그대로를 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믿으면 반드시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인데 자기의 병든 것을 알게 해 주어도 의사를 찾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다. 목 마른 자는 물을 찾게 되어 있다. 갈증을 느끼지 않으므로 물을 찾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치우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비극적 실상을 은혜로 타개해 주시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으나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하나님의 그 모든 은혜가 무용지물이다.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는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순응하여 배운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공정하게 똑같이 가르치시지 사람을 차별하시어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제외하시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 "차별"을 각자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철저히 보장된 자유로 인하여 아담은 범죄하여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 악령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자유"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predestination]은 그와 같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것을 미리 아심[foreknowledge]을 근거로 하여 그와 같이 그 믿음대로 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해 주시는 데에 뜻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4,65]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인들만 처음부터 구별하시고 차별하셔서 특별히 그 사람에게만 구원 얻는 지식을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수용하여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자유 선택이 작용함은 물론이다. 즉 그렇게 가르치심을 받아도 여전히 자기 자신 "불의를 사랑하고"[살후 2:12] 있다면 자기의 포로됨을 알 리가 없다. 포로되어 눌려 있다는 것은 죄 그리고 죄의 화신처럼 되어 있는[왜냐면 처음부터 범죄하여 첫 사람 아담을 범죄에 몰아넣은 직접 원인이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그렇게 매여 있다는 것이고 죽음에 포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죽음은 죄로부터 나온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죄에서의 구원"[마 1:21]이라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도 많은 이들이 착각하여 자멸에 이르고 있다. 즉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 잘못 성경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 즉 부득불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굴레에서 벗겨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인데 벗겨 주시더라도, 죄를 짓지 않고 오직 복종하리라는[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롬 14:7-9] 결심을 하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로"[히 1:9] 작정하여 회개하는 자에게 한하는 구원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음"이다. 찾지 않는 자에게도 주시는 영생이라면 만인(萬人) 구원 즉 인생이라면 누구나 다 "믿게" 하시고 영생을 주실 것이 아닌가.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말고 다시 말해 성경을 해석했답시고 나서는 인간의 가르침을 수용하려 하지 말고 반드시 성령의 계시로 인한 가르치심을 앙망하여 부지런히 스스로 성경을 읽어 머리 속에 입력해 두기를 힘쓸 일이다. 그런 이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참고 정도로 하고 핵심적으로 매달릴 것은 성경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비록 능력 있는 바울의 말씀 전함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도 그냥 그대로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반드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확인함으로써 믿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함과 같이[행 17:11,12] 그래서 성경이 이를 칭찬하여 "더 고상한"[:11-"more noble, more fair-minded"] 것으로 평가한 것처럼 반드시 성경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려고 힘쓸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부하는 이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나 한결같이 성경을 교과서로 삼을 일이다. 성경을 읽기 시작함으로써 진리에의 문을 두드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미리 선언하셨다.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 그리고 아들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 외에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하신 것이다[마 11:27].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음을 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아무도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으니[마 16:22-27/눅 9:22-26/14:25-33]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도 구원은 된다고 믿는 이는 무조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경우다.

나는 아무리 주님을 안다고 해도[마 7:22/25:44/눅 13:24] 주님 친히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때는[마 7:23/25:12눅 13:25] 나 역시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는 내가 주님을 부인하니까 주님도 나를 부인하시는 것 그대로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 하시는 것이다[고전 8:3]. 말로만 사랑한다 한다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모든 말씀을 지켜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고 그 외에는 일제가 거짓말로서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된다[요일 2:3,4/3:22-24/5:2,3/15:10/요 14:15,21,23/15:10,12/13:34/계 12:17/고전 7:19/롬 13:9].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은 한 의미요 같은 뜻임을 명심할 일이다. 따로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즉 여전히 이전처럼 자기를 위해 살면[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데' 어찌 '믿으리요'.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所出)이 풍성하므로 심중(心中)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 곡간을 헐어 더 크게 지어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꾸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터이니 그러면 네 예비(豫備)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눅 12:16-21]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를 뿐 아니라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재물'과 '하나님'을 동렬(同列)에 두고 비교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재물은 재물이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부유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유치 못하다고 밝힘으로써 '하나님 일'이 '사람 일'과 하나도 다름이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가 되심으로 인하여 내게 재물이 되시고 건강이 되시고 일체의 부귀영화가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되니 이는 하나님 지으신 일체의 모든 것이 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우리가 구원 받았으므로 ] 나의 소유(所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소유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의 소유가 되신다. 그러면 "세상 재물"은 완전히 별도로서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물론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하나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마땅히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무엇이든지 일단 우리에게 한번 주신 것은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고 더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평공정, 공명정대하심 또는 일사부재리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번 주셨다가 다시 뺏어[환수해] 가시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무엇이든 받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받은 것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는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강제로 취하시는 일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내 것이라 하여 내 스스로 움켜쥐고 있는 한에는 '흐르는 물'이 안되고 '고이기만 하여 썩는 물'이 된다는 뜻이다. 중동의 염호(?湖) 즉 염분이 많아 생물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 the Dead Sea)가 그 좋은 예다. 물이 흘러갈 데가 없어 그렇게 된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대조다. 다시 말해 '받는' 족족 '주어야' 그것이 곧 생명이다. 받기만 하고 주지를 않을 때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하신 것이다. 생명의 복이다. 복과 반대되는 개념은 불행이니 곧 죽음이다. 생명은 순환의 원리다. 정체는 죽음이다.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이 정체인 것이다. 이런 데에서는 순환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받는 재물은 남에게 주기 위함이니 내 스스로 혼자 누리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남에게 줌으로써 모두가 다 똑같이 평균되게 부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남에게 끊임없이 줌으로써 나 역시 끊임없이 받게 된다. 이것이 흐름 곧 순환의 원리다. 자기를 비우면 계속하여 연달아 채워지게 마련이다. 이 자기를 비우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가리켜 성경은 "자기 부인"[눅 9:23]이라 한다. 위에 말씀하신 그 부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이다. 그래서 남에게 줄 생각은 없이 자기 혼자 마르고 닳도록 안락하게 먹고 마시고 즐길 목적으로 위해 창고를 지어 올리자고 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다시 이웃들에게 주라고 하심이다. 홀로 자기 것이라고 하여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부자의 존립 이유가 여기에 있음이다. 이것이 곧 한 몸의 원리다. 이 한 몸 구조는 생명의 체제이다. 하나님은 머리이시고 우리 피조물 각자는 그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각 지체(肢體)들이다. 눈, 코, 다리, 팔 등 지체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생존하지도 못한다.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는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를 따라 사는 이치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각 지체(肢體)된 자는 마땅히 머리를 위하고 자기와 같은 동료 즉 함께 지체를 이루고 있는 이웃을 위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에 그 핵심이 있다. 그래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만 오직 의미가 있다[고후 5:15].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야 그것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내일까지도 기약할 수 없다. 오늘 바로 이 시간 후의 일도 사람은 모른다. 오늘 이 시간 모든 것 손놓고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래서 위의 부자와 같이 '이 세상 재물에 부유한 것'과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것'을 구별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다는 것은 이상과 같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함을 가리킨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즉 한 몸을 이루어 피가 순환하듯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몸의 어느 구석에서든 피가 정체하면 그 몸은 곧장 죽음으로 통한다.


'이 세상 재물에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함'의 차이는 그러므로 정체와 순환, 죽음과 생명의 차이가 된다.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 지으신 만유의 주인으로서 모두 차지하여 누림을 뜻하나 스스로 움켜쥐고 홀로 누림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순환 원리를 따라 '흘러' 받고 '흘러' 줌으로써 다 함께 행복해지고 함께 살고 함께 형통하는 공동체 삶이 된다.


머리로서 함께 하나를 이루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하시니 그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영원히 살 수밖에 없으므로 영원히 그 모든 것을 누리게 된다. 그런 반면 전자는 이 생명의 법질서를 벗어나 반대 방향으로 나가 자기 홀로 외톨이가 되어 있으므로 그 생명 한번 끊어지면 그가 가진 모든 것도 불가불 다 손놓아 버린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내 스스로 머리가 될 수는 없다. 내 스스로 머리가 될 수 있다는 망상이 불교의 교리다. 부처가 따로 있지 않고 각자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그런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가 분명해지려면 하나님[조물주]과 피조물 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모두가 우연히 저절로 생겨졌다고 하면 몸의 각 지체가 결국 머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아 허공에 뜬 논리가 된다. 몸이 머리가 될 수 있다면 머리와 몸 관계는 영원히 존립할 수가 없다.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지 못하면 상호 알력과 쟁투로 영원히 공존하지 못해 공동 파멸뿐이다. 철저한 공동체 의식과 그 결말을 훌륭히 구현한 본보기가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다.


공동체 의식의 특징은 그 주인 의식에 있다. 적극성과 능동성으로 움직이고 절대로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인간이나 천사와 같은 영물(靈物]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주인 의식으로 살도록 하려 하심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완전 자유이냐 하면 스스로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도록까지 하심이다. 악령들이 그들의 범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현재 활동은 하고 있는 것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 처해 있는 상태가 그 증거다.


사랑은 본시부터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다. 생명 곧 영원한 삶은 사랑이 그 주축이 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이 이치를 따름이다. 한 몸의 원리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할 때 몸도 머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 상대인 몸 또는 머리를 위한다.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했거니와 바로 이것이 공동체 의식에서 그런 주인 의식을 표방하는 것이다. 즉 의식적으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주인 의식의 적극성, 능동성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천주교는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되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몸과 머리로서의 상호 교류가 아닌 일방적인 흐름으로서 잘못 인식하기 때문에 "마리아"라는 중보[중재, 중개]를 두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데도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서는 그 본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만 강조하는 데에서는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주인 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영생에만 관심이 있는 종속적이고 피동적인 따라서 소극적인 자세만 될 것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식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당당히 구원 받아[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얼마든지 아니할 수 있는 경우 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면 영생 하나만을 바라는 피동적인 삶을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천주교와 똑같은 까닭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이와 같이 오해하는 데에서는 차이가 없으니 불교와 마찬가지의 세상 종교다. 그래도 불교는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강조하니 마치 일방적으로 독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오직 피동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천주교나 개신교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똑바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당치도 않게 오해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헛되게 믿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항상 주인 의식의 적극성, 능동성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여전히 있으면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은 불가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구원은 받는다는 이런 피동적인 자세에서는 그 어떤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말하자면 영생 하나만 욕심 내는 것뿐이니 이런 욕심이야 세상 모든 사람도 없는 사람이 없으니 다 영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단순히 영생하기를 바란다고 영생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는 구원 받았다 하지만] 자명하다.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자들만 위한 것이라고 명백히 하고 있다.0pt;">[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때문에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셨다. 사랑을 가장 잘 아는 연령이 "어린 아이"다. 엄마의 무조건적인[본성적인] 사랑의 품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확언하기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니,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다"[고전 8:1-3] 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도도 성경을 읽을 일이요 천주교 또는 개신교 신자도 성경을 다시 읽을 일이다. 이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리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성경의 내용을 깨달으라는 것이니 절대로 인간의 해석[주석, 풀이]에만 좌우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권위로 그런 말을 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계시 요 ">6:44,45,65/ 16:12-15 /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로 말한다 할 것이요,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고 다시 묻는다면 맨 앞의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이라는 '자천(自薦, self-recommendation)의 글'을 다시 읽으시기를 권한다.

성경에 가장 비중 있는 사도로 인정되고 있는 바울 사도는 처음에는 교회를 포악하게 핍박하던 자였다. 그 손에 죽음을 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은혜가 베풀어진 것은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진리를 몰랐기 때문"[딤전 1:13]이다. 모든 것을 알고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 똑같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알게 해 주셨으니 내가 지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태도, 자세 여하에 달린 것이다.


이 글은 처음부터 생각할 수 있는 근거와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생애를 주관, 주장하는 3운법칙의 존재다. 누구나 스스로 검증할 수 있도록 그 구조[짜임새] 자체가 경탄할 정도로 간단명료하여 초등학교라도 셈할 줄만 알면 누구나 직접 스스로 살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충분한 시간을 내어 밤을 새어서라도 자신의 영원한 운명부터 해결하라. 이 운명은 우리 각자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니 이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종교 중 예를 들면 불교처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비과학적인 말은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하나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구원하신다는 그 뜻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는 분명한 인과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현재의 죽음과 불행이라는 '결과'과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원인이 인간 스스로가 사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리 되었으므로 이 법을 지키고 않고 하는 것은 순전히 각자 자신에게 달려 있음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역시 '결과'다. 그 '원인'이 있는데 문제는 잘못된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저질렀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하되 올바르게 선택하면 만사가 형통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츰 설명이 되어질 것이다.


율곡과 이병철


이병철 회장은 유교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평소에 논어(論語)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직원을 다룰 때도 잘못에 대해서는 아량을 베풀었으나 거짓말과 속이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여 거짓을 싫어했다. 유교적인 인생관을 유지하다가 중도에 불교로 전향하였으니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음이 이상 질문서로써 드러났다 하겠으므로 이율곡이 연상된다. 이회장은 불교실업인의 대표 격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던진 질문이 아니고 죽음을 예감하면서 아주 다급한 심경이 되어 그와 같이 천주교 신부를 만나려 했다니까 불교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었던 그 마음 속에 서려 있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피(加被)" 덕분으로 국내 일등 부자로 지내왔다고 믿어 버리면 간단하고 속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회장의 구도자적 정신으로서의 이성(理性)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율곡[李珥, 1536-84] 선생은 12세 때[1547] 이미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그 후 과거 시험을 9번 보고 번번이 장원을 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했다. 그러나 어린 율곡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가 가장 존경했던 어머니 신사임당[1504-51]의 별세였다. 이로써 율곡은 극심한 정신적 시련을 당했다. 어머니의 3년 상(喪)을 마치는 동안 철학적 사색으로 고민 방황하던 끝에 어떤 승려의 안내를 받아 마침내 1554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했다.


인생이 무엇인지, 왜 죽어야만 하는 것인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등등을 어린 마음에 알기를 갈망했고 이 모든 것을 깨달아 참으로 진리인 줄 알면 거기에 전 신명을 바쳐 평생 그 진리만 광포(廣布)하리라 작정하고 입산(入山)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어머니 가신 유명(幽明)의 갈림 길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사후(死後)의 행복을 빌어 주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리라는 지극 정성이기도 했다.


겨우 5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석류가 빨갛게 익은 것을 보고 즉흥으로 한시(漢詩)를 한 수 지어낼 정도의 천재적인 두뇌였던 그는 불교의 모든 이치를 다 섭렵했다고 생각한 끝에 더 배우기를 자청하여 찾아 간 좌선 중의 고승(高僧)으로 하여금 선(禪) 문답 끝에 깜짝 놀라 자취를 감추게 만들고,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며 불교에 대한 명강의(名講義)로 스승으로서의 대우까지 받았으나, 불교에서는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유교의 논어를 집어 들고 읽다가 홀연히 깨친 바 있어 하산해 버리니 나이 20세 때였다.


돌아가신 이후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대한 효심이 지극한데다 혈기 방장한 한창 나이의 열 아홉에 진리라면 바위라도 뚫고 들어갈 의욕에 넘친 그였건만, 명석한 두뇌에다 열화 같은 진리 탐구에의 불길마저 타올랐는데도 왜 불교로부터는 영원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일까.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느 종교를 두둔하고 어느 종교를 폄훼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점에서의 우리의 주장과 선언은[미리 말하지만], 천주교나 개신교도 불교와 똑같은 수준의 세상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불교가 나쁘다거나 기독교가 옳다거나 또는 더 낫다거나 하는 그런 지엽적인 것이 아니니, 이회장의 질문에 우리가 단호하게 주는 대답은, 천주교도 불교도 개신교든 그런 것을 믿지 말고 세상의 그 어느 종교든 거기 의탁하지 말고 오직 성경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내가 믿고 우리가 믿는 종교이니 무조건 옳다'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를 배격한다


소위 기독교를 위시해서 무슨 종교든 종교라는 것을 일절 배격해야 한다.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다고 그것을 종교라고 착각하는 선입관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가 날 때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낫다. 그럼 인류의 첫 부모는 어디서 났나? 둘이 한꺼번에 생긴 것이 아니다. 순서를 따라 나온 것이다. 이 순서를 따라 나온 것을 과학적 원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곧 이어 상세하게 설명하게 될 삼위일체 원리요 3운법칙이니 삼위일체의 원리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다시 말해 만물은 대칭을 이루어 둘로 하나를 이루어 있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남녀도 한꺼번에 동시에 생긴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남자가 났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든 둘 중 하나다. 어느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가? 여자의 태(胎)에서 모든 인류가 생성되니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런 것이 선입견이다. 남녀는 당연히 대칭(對稱) 관계다. 대칭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둘이 하나를 이루어 조화됨을 말함이니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기본 특성이다.

그러면 조화와 평형을 이루어 있음이 만물의 기본이니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왔다면 일방적이므로 여기서 어긋난다. 대칭 원리는 이런 일방적인 것을 배격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가 계속 인류를 생산시키니까 첫 여자만은 첫 남자에게서 나와야 옳다. 그래야 형평을 이루게 된다. 과연 성경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자[母]가 인간 자식을 생산할 때 그 스스로 낳는 법은 없다. 남자[父]의 힘을 받아 낳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이를 가리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다"[고전 11:12]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첫 남자 역시 여자를 낼 때 즉 여자가 나오게 할 때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없고 또 하지 않아야 이상 사실과 조화 일치가 된다. 여기서의 '조화 일치'는 '시종 일관성'과 같은 말이다. 이는 법질서의 확립 개념에서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처음 행동은 향후 연속적으로 이어질 모든 행동의 시범이 되고 원형이 되고 그래서 반드시 닮은꼴을 형성하는 법이다. 고로 여자가 자식을 낳을 때 그 스스로 낳지 않고 남자로 말미암아 낳는 것처럼 첫 남자에게서 첫 여자가 생겨날 때 남자 스스로 여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자기 외의 다른 누구로 말미암아 첫 여자를 생성시켰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른 누구'가 누구인가.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서책(書冊)이다. 이렇게 밝히는 것은 유일하게 성경밖에 없다[눅 3:38-"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 그러므로 다른 증거도 허다하지만 이것만 해도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뿌리로서의 근본이심이 당장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그런 줄로 아는 것은 기본 지식일 뿐이지 이를 어찌 종교라는 테두리 속에 가두어 놓은 일인가.


그런즉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사는 것, 살아가는 것, 매일 생활하는 것 이상은 없다. 이것이 '올바르게 사는' 의미이다. 그러면 왜 종교라는 것이 생겨났나? 인간의 원수가 되어 있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그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의 짓거리인 것이다. 즉 그의 획책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니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인간고(人間苦)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이런 인간고[죽음, 불행]로부터의 해방은 올바르게 사는 데에 있음이니 왜냐면 올바르게 살지 못한 결과로서의 모든 인간 불행이요 그리고 직면하고 있는 죽음의 오늘날 인류 현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가장 긴급하고 절실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함정이 각종 종교이기 때문에 이를 단호히 배척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성경의 내용까지도 조작하여 종교를 만들어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잠정적인 허용 아래 되어지는 일이다.


무신론자/진화론자에게


모든 법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자연법칙도 마찬가지다. 자연법칙이 있게 된 것은 현재와 같은 상태로 만물이 존속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법칙이 먼저  세워지고 그 법칙으로 인한 결과는 나중에 나타나진 것이다. 이런 순서를 밟아가야 제대로 된 사고방식이 되어 합리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현재 나타나 있는 모든 현상과 구조와 체제는 그와 같은 특성의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사전(事前) 기획, 고안, 설계의 산물(産物)인 것이다.


그런 지성적이고 이지적인 활동으로서의 제일 원인을 무시하고서는 그 어떤 결론에도 합리성을 보장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현재 이 시간에도 급속도로 진화해 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그러면 그 상당 기간에 걸쳐 생물체가 진화하려면 낳고 낳아지는 과정이 숱하게 반복되어져야 한다.


암수의 생식 작용에 의해 그 첫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암컷과 수컷은 동시에 생겨나야 한다. 그래야 그 후대를 생산해낼 수 있다. 생겨나되 암컷에서 수컷이 나든, 수컷에서 암컷이 나든 대칭형으로 생겨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동시에 생겨나는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생식, 증식을 위함이다. 그 스스로 그런 의도하에 스스로를 암컷과 수컷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을 위시해서 거의 모든 생물체가 이런 양성 생식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먼저 수컷을 만든 다음 그 닮은꼴로 암컷을 만듦에는 반드시 그런 생식, 증식을 위한 목적으로 사전 기획, 고안, 설계한 주체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아주 평범한 사실 하나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진화론을 신주 위하듯이 모셔 온 것이 장장 150년 여에 걸쳐 흘러 온 소위 문명 세계의 인류 역사다. 얼마나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례인가. 인간의 이지 작용이 겨우 이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지성적 활동이 악령, 악마, 마왕(魔王), 인류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해 철두철미 조종당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다.


그러므로 이런 뼈아픈 선례를 남기고 있는 소위 "과학적 사실", "과학적 발견", "과학적 증거"이니 이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150여년간 속아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한번 더 속으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은 그 자체의 내용으로써 증명되고 있다. 그런 자체 증명이 읽는 대목마다 흠씬 묻어 나고 있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진화론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성경에 배치되는 내용으로서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해 올 때 이를 "과학"이라고 하여 이의 없이 수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진화론에서와 같은 "과학적 권위"의 맹점(盲點)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원리와 3운법칙 등 가장 기본이 되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성경이 나타내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발견임을 명심할 일이다. 다른 그 누구도 어느 무엇도 설명하지 못하고 증명하지 못한 것을 성경 홀로 밝혀낸 것이다. 왜냐면 모든 원리 원칙을 세우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러한 것이다.


불자(佛子, 佛者)들에게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다. '이것'은 인(因)이요 '저것'은 과(果)다. 현재의 모든 만물 만상은 모두 '과'이고 이를 있게 한 '인'이 있게 마련이다. 무상(無常) 곧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음은 '인'이 아닌 '과'이다. '무상'과 대립되는 것이 '상주함'이다. '상주함'에서 '무상'이 파생(派生)한 것이다. 그래서 '상주함'은 '인'이요 '무상'은 그 '과'이다. 이것이 정확한 인과율이다.


'무상'만이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라 '상주함' 역시 똑같이 현존하는 실체다. 양면을 두루 고찰해야 정답이 나온다. 두 손바닥 마주 쳐야 소리가 나지 한쪽 손만으로 아무리 흔들어보아야 소리는 나지 않는다. '무상'만을 두고서 아무리 씨름해보아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뿐이다. '과'에 대한 숙제를 풀려면 그 '인'을 잡아내어 살피면 금방 풀어진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간고(人間苦) 역시 '과'이지 '인'이 아니다. '인간고'는 '인간고가 아닌 것'으로부터 연유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율에서 대칭[상칭, 대립] 원리 혹은 짝의 원리가 나온다. 낮이 있으니 밤이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높음이 있은즉 낮음이 있다. 자연계가 있으면 영계(靈界, the spiritual world, the celestial world)가 있어, 자연계가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면 영계는 생멸 전변(生滅轉變)이 없는 상주(常住)함만이 있는 세계다. 따라서 이 자연계를 관장하는 자연법칙대로 하면 인생 삶은 육체로서 이 세상 한번 죽어 그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면 끝이다. 다시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이 자연계의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 위치하면서 인간  스스로 자신을 영생하게 한다든가 제도(濟度, 중생을 고해로부터 건져 극락세계로 건네어 줌)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고 현실성이 없으니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고는 그리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을 무시하면 그런 "제도 운운"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칙을 고려하지 않는 생각은 현실일 수가 없으므로 망상의 범주에 드는 수밖에 없다.


유일한 해법은 영계에 들어가는 것인데 현재 인생들이 이 자연계에 처해져 소속되어 있으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라는 비극적[인간고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현실을 '과'로 보고 그 '인'을 찾으면 된다. 따라서 방법은 명백하다. 인과 법칙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계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영계에 속해야 초자연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고 인생도 그 육체가 썩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됨이다.


그러므로 '인'과 '과'를 제대로 제 자리에 놓고 판단을 해야지, 엉뚱한 데에다 놓고 그 인과 관계를 규명하려니까 꼬이기만 하고 혼돈만 오는 것이다. 절대로 답이 나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영생한다는 것으로만 모든 것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살되 또는 영생하되 그 사는 법도(法度)가 있다. 이 찰라 같은 현재의 인생 삶도 사는 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인간고 외에도 인화(人禍) 즉 인간 재앙이 판을 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서로 미워하여 살상하고 괴롭혀 세상을 나락(奈落)으로 만든다. 이 문제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으니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생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영생커녕 이 짧은 생애마저도 지겨워 자살하는 이들이 속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사람 삶의 방법은 모든 인생들이 다 아는 대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곧 '한 몸' 의식에 있다. 한 몸을 이룸에는, 우리의 신체가 작용하고 있는 그대로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몸[이 각 지체(肢體)]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에 있어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그 핵심이 있다. 그 누구든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함으로서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만을 위하니 여기에서는 서로 위함만이 있고 남을 해치거나 남에게 불리한 짓을 덜대로 하지 않게 되니 이보다 더한 선은 없다. 악은 도무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이상 세계가 구현된다.


요컨대 모두가 철저히 그렇게 하는 데에 있다. 그 중 단 하나라도 자기 자신을 위하면 완벽한 행복을 기할 수가 없다. 이럴 경우 머리가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룬 각 지체의 각 부분을 속속들이 알아야 머리가 될 수 있고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위하는 일에 솔선 수범하여 몸의 각 지체가 자기[머리]를 충심으로 따르도록 해야 한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각 부분은 절대 다수인데 이를 하나 같이 사랑하여 위할 수 있는 머리[단 하나이어야 하므로]는 초능력자라야 한다.


그런 머리 역할은 초능력자라고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냄으로써 자식을 위하는 어버이 자정(慈情)을 나타내어야 하므로 만물의 창조신이라야 한다. 인간의 자식 사랑, 동물의 새끼 사랑이 이 창조주의 사랑을 대변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도록 친히 그와 같이 장치하여 작동되도록 한 까닭이다. 인간이 아니므로 신(神)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능력자이니까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위치해 있음은 당연하다.


석가(釋迦)가 만일 이런 어버이로서의 사랑으로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하나님과 이런 한 몸의 체제에서 친히 그 머리가 되시는 인생 삶이 구조를 알았다면 당연히 이 방법대로 살도록 당시 사람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인도교가 성행하여 인간의 수보다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지경으로 많은 신들의 인간 지배로부터 자주 독립하는, 인간의 존엄성부터 먼저 찾아 주는 것이 과제였고 그래서 그것을 급선무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신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라 판단하여 불도(佛道)를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한 몸 체제에서의 사람 사는 도리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으로 일관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구조는 불교도(佛敎徒)만 아니라 천주교도(天主敎徒), 개신교도(改新敎徒) 모두에게 낯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현실이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개신교는 어떻게 하는가, 영생을 공짜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스스로 믿고 마냥 좋아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자 여러분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공짜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들의 비아냥거림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천주교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여성을 내세워 그 도움에 의존하기에 급급하다. 다시 말해 몸과 머리 관계로서의 가장 친숙하고 친밀한 관계로 창조주를 인식하지 않고, 감히 크고 두려운 조물주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나 전전긍긍해 하고 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역시 인간의 존엄성과 자주 독립성을 금과옥조로 삼는 이들에게는 의타성을 키울 뿐이라 하여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한 몸 체제에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의 자주 독립성을 말한다. 왜냐면 손톱 하나라도 온전한 신체 구조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니, 손톱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손톱 하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 있는 고로  그 손 톱 하나라도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가 다 끔찍이 위해 주기 때문이다. 손톱 발톱 하나라도 절대로 무가치하게 여겨 박대하거나 소홀히 여김이 없으니, 마치 머리나 된 것인 양 위함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가 평등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영생[혹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어 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갈 2:20]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머리로 모시고 나는 그 몸의 지체가 되어 있음을 알고, 또한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믿어 동일하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들을 나의 지체로 알아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자기를 위해서는 절대로 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을 말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 인간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하시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미 확증하신 것이다[롬 5:8].


그런데도 개신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이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내가[또한 우리가] 하나된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 살 생각은 전연 없고 마치 영생이 무슨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또는 그 엄청난 선물[그리스도 자신께서 선물이시므로 그래서 구원을 "선물"이라 하는 것]을 감히 받아 가지기에는 너무나 염치가 없는 것처럼 주저주저하고 중간에 사람을 넣는 등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취하니, 아예 하나님은 없다 하는 불교도들에 견주어 하나도 나은 것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 하거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거나, 무식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천주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써 되는 구원이니 그리스도를 아버지 품속에 있다고[요 1:18] 표현한 것처럼 어머니가 와서 아이를 품속에 거두어 들이는 것이지 아이가 직접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니 왜냐면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엄마 잃은 아이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명백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들께서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다고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이 인간과 아무 차이도 없고 다르지 않으심을 나타낸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표현이다. 성별(性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그런 것이 없다. 아담이 벌거벗은 것을 알았을 때 얼른 몸을 가린 곳이 아랫도리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그렇게 가린 것이 아니다. 같은 피조물이지만 천사들 앞에서 창피스러움을 느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인간이 이를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보아서도 천국에서는 더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신체적 특징을 지니지 않을 것이 분명함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그렇게 가리고 감추려 하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서 일종의 고통이요 불만이요 열등감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시라 함은 그런 성별과 관계 없이 단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신다는 사실을 대표적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것뿐이다.


고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겸전(兼全)하심이니 곧 아버지 같으시고 어머니 같으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니 똑같으신 품성을 지니심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그 사랑으로 말하면 자모(慈母)와 같으시고 심판하실 재판장으로서 나타나실 때는 엄부(嚴父)이시라기보다 그 때는 하나님으로서의 "소멸(燒滅)하시는 불"[히 12:29]이시라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이 된다. 왜냐면 부모자식간이 아니라 숫제 남남이니 하나님께서 그런 자식을 두실 리가 만무한 까닭이다.


무갈 제국의 영걸 아크바르[Akbar]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처럼 하시기에 아들이 생겨날 수 있느냐 했지만, 이는 피조물과 조물주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피조물인 양 착각한 불찰이다. 하나님은 그 친히 만드신 것 중에 인격성을 띠고 자유 의지를 행사할 줄 아는 것은 모두 "아들들"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낳고 낳아짐을 통해 생성되는 생물체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욥기에 나오는 천사들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까지 포함해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아들 친히 만드신 것으로서 즉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러한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아버지 친히 아들을 친히 만드셨는데 이 아들께서 그런 하나님의 아들들을 포함한 만물을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친히 지으신 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자[독생자, 외아들, the only begotten Son]이시라 하는 것이다. 이 독생자 하나님은 아버지 친히 자기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그룹[cherub]이나 스랍[seraph]이나 천사들이나 이런 것은 모두 아들께서 만드신 것이고[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신], 아들은 아버지 친히 자기의 형상[고후 4:4]으로서 만드신 것이므로 형상은 하나뿐이지 여럿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독생자(獨生子)이신 것이다. 아들 하나님께서 생명체는 물론 모든 물질을 만드시니 그런 물질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영물(靈物)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피조물[따라서 인격성을 지닌]을 만드실 때는 그 피조물 스스로가 자기를 새로 다시 만드는 양(樣)으로서 나타나도록 하심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의 자유"가 그런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도대로 하심이 아니라 피조물 스스로 자기를 선악간에 주물(鑄物)처럼 만들어 내도록 하신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라는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鑄型]에 부어 굳혀서 만든 곧 주조(鑄造)해낸 물건이 영물(靈物)인 경우 거룩한 천사이기도 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이기도 하고,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악인이기도 하고 의인 또는 선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인간은 모두 남자 아니면 여자이므로 성별을 아니 갖추실 수 없어 하나님을 아버지시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아담[나중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된]을 기준하여 인간의 대표성을 인정하는 까닭에 남자로 오신 것일 뿐이지 실상대로 하면 남녀 성을 모두 갖추었던 또는 그런 성별이 필요가 없는[현재의 천사들처럼] 첫 사람 아담의 모습 그대로가 현재의 부활하신 몸인 것이다.


아담이 처음부터 남자의 육체였다면 반드시 여자도 함께 동시에 창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먼저 영혼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조성된 이후에도 여자는 창조되지 않았다. 에데낙원부터 먼저 창설되었다. 그 에덴낙원이 조성되어 아담이 거기 들어가 살게 되면서 비로소 말씀하시기를 "사람[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 짝을 맞추어 주겠다" 하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에덴낙원의 짐승들을 지으신 것이다. 각종 들짐승, 날짐승 등을 다 지으신 다음 그리고 아담이 그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어 주는 것을 보시고 난 다음에도 성경은 다시 이를 설명하여 "아담에게 짝이 없다"[창 2:20]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적합한 짝으로서 여자를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더불어 말벗도 되고 항상 한 몸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랑의 짝을 만들어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그런 영물[천사]들을 만드신 것이다. 그 중에서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있으면 그가 곧 아담의 짝이 되는 것이나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의 눈 높이에 드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담이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들을 그 '기괴하게' 생긴 모양대로 불렀다는 뜻이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아담과 똑같은 닮은꼴이 그 짝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의 암수[雌雄] 구별을 하는 방식으로 여자를 만드실 수밖에 없었다. 이는 원래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지라 자연계의 생물처럼 남녀로 만드실 의향이 없으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루는가 하겠는데, 아담은 당시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럼에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생성되었으므로 생식 능력은 있으니 주변 천사들의 막강한 능력의 도움으로 얼마든 자기 닮은꼴들을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 친히 그 어느 인간으로서의 자모(慈母)보다 더 월등하시고 완벽하신 그야말로 인애(仁愛)와 자정(慈情)의 화신이시라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의 혹은 모성(母性)으로서의 그 어느 인간도 그리스도께는 대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우리가 나아간다는 명목으로 어느 여성이든 모성이든 중간에 넣어 우리의 중보자 역할처럼 내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고아"[요 14:18]와 같은 우리에게 엄마로서 찾아 오시는 것이지 아이가 엄마를 찾지 않는다고 명백히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더러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았다. 모든 여성을 대하실 때 사용하신 일반적인 호칭으로 "여자여"[Woman]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다가 [앞서의 설명대로 아버지께서 낳으셨으므로] 마리아의 태(胎)를 빌려 사람이 되신 것뿐이다. 성경이 "예수님의 모친"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므로 사람의 태에서 나신 것은 분명한데 이를 밝히지 않고 어정쩡하게 표현한다면 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그러면 그리스도를 사람이 아니라 하고 단지 한 때 사람으로 변형하신 것뿐이라 할 것이니 사실을 왜곡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필요 없는 문제를 성경이 야기시키려 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마리아더러 "여자"라고 부르신 사실을 밝힌 것은 오직 요한이다. 요한으로 말하면 예수님 떠나신 후 마리아를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자기 친모처럼 모신 장본인이다. 다른 사람은 다 밝히더라도 그만은 이 일에 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했을 만한 그런 처지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그만이 말할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임이 분명하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영생은 한 몸 체제에서 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 몸 체제로서의 삶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서로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이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러므로 이 자기 부인에 그 특징이 있는 고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롬 14:9/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살도록 하려 하심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 구원의 특징을 지적하시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신 것이다[눅 9:23].


"영생"을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를 말씀하신 것은 인생 구원은 영생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곧 한 몸의 원리에서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없으며 몸 역시 머리를 위할 뿐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 없는 자기 부인에 있는 까닭이다. "나를 따르라"는 점을 강조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친히 이러한 머리가 되어 계시는 이치를 말씀하심으로써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이 우리의 몸의 위치를 밝혀 말씀하심이다.


"몸의 위치"라는 것은 머리 없이 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생존과 관계되는 것이니 사활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명백히 한 대로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동안은 믿음 혹은 구원 또는 영생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롬 8:2] 한 대로 우리가 더 다시 "육신"[롬 7:14-8:13]에 매여 있을 수 없으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죄의 몸이 멸해졌기[to be destroyed]"[6:6] 때문이다.


새 창조는 말 그대로 이전 창조에서 비롯된 악영향[아담의 죄와 죽음-롬 5:12]을 말끔히 불식시키고 말소시킨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창조" 더군다나 "새로운" 창조라고 할 리가 없다. 그리고 "육신"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이니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부터 죄 짓도록 만드셨다고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요컨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0pt;">[롬 6:3-8/갈 2:20/5:24,25/6:14/골 2:12,13,i-font-family:한양견명조;font-size:15.0pt;">20/엡 2:5-7/딤후 2:11,12]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나도 함께 죽었다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또 함께 죽은 것이라면 대신 죽으셨다는 말이 통할 수가 없다. 대신이라는 것은 내가 죽을 것을 대신하였다는 의미이므로 나는 그 대신 죽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되는 까닭이다. 이 점만 명확히 하면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眞髓)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얻는 도리는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인 것이다.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게


영생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죽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첫 창조는 망가졌으므로 새 창조에 의해서만 인생이 영생할 수 있다.  새 창조에 의해 다시 출생하게 하는 것 즉 성령으로 받음으로써 즉 영[spirit]으로 나는 것으로써 이 새 창조를 이루셨다. 이전에는 육[flesh]으로 난 것이어서 육으로서 난 것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받음으로써 새 창조가 되는 것이니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하는 것이다. 왜냐면 새 창조를 통해서만 인생이 구원되어 이전 아담의 창조 당시처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분법(二分法)


성경은 이 세상을 인간의 원수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성경에 어긋나는 그 어떤 내용이든 모두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임을 확언하고 있다. 철저한 이분법 아래 있으니 그 중간 지대는 없다. 어찌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성경은 물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과 거짓[또는 속임수]과의 대치이므로 단순한 견해 차이가 아닌 것이다. 단순한 견해 차이라면 다양한 관점을 무시하고 자기의 견해만을 옹호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자멸 행위이기 때문이다.


장차 때가 올 것인데[실상 코앞에 박두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자"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조종하는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되면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한꺼번에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 악한 자 스스로 하나님이라 자칭하여 온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단일 정부 아래에서의 소위 현대식 신정(神政) 체제를 강제로 실현시킬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 악한 자에 의해 모든 종교가 단일화가 될 것이니 자기 종교에 더 이상 연연해할 때가 아니다. 가장 객관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여기에만 집착할 때다.


'나'라는 존재는 천하보다 귀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이 그 뜻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다고 유대인들이 힐난했을 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人子, 사람)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막 2:27,28/마 12:8] 하심과 같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기와 똑같은 [어떤]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종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면 종교 자체가 사람을 위해 생겨났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천주교에도 불교에도 개신교에도 그 어느 종교에도 매여 있지 않은 자주 독립된 존재다. 세상 모든 종교를 지어내어 인생을 속이고 있는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인 악령(惡靈, 惡神)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도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오직 우리를 만드심[창조하심]으로써 당신의 분신(分身)으로서 사랑하시는 그래서 친히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께만 매인 것이니 이는 당연한 사리(事理)요 귀결이다.


 이 "매임"도 앞에서 지적한 '한 몸' 체제에서, 머리는 당연히 몸에 매여 있고 몸 역시 머리에 매여 있는 그런 상호 관계를 말함이다. "하나님"이라 하면 무조건 일방적인 통치, 통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착각이다. 사랑은 상호 관계이지 절대로 일방적인 강제나 간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 상호 관계는 '둘이 하나됨'을 말한다.


이 '둘이 하나됨'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에서 오는 것인 바 이는 창조의 원리요 만유 존속의 원리 따라서 그 운용의 원리다. 이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앞으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는 대칭 원리[또는 양면성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 지으신 삼라만상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이 원리를 보고 동북아시아 권에서는 음양이론을 전개시켰다. 그러니 이 이론의 근본은 캐내지 못했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계시되어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성도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심을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 이 둘은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극과 극의 대립처럼 보이나 그러나 실은 완전한 하나로 조화되어 있음이니 이것이 삼위일체 법칙의 요체이기도 하다. 성경만이 모든 것을 말하고 밝히고 있다. 천주교나 개신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도 그리고 성경을 그 말씀이라 인정한다고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어서 겉과 속이 다르다.


불교는 그래도 겉과 속이 같다는 평이나마 듣는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 끼치는 '종교의 해독'으로 따지면 불교보다 언필칭 하나님을 믿는다는 소위 기독교가 더 심하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강제로 매여 있음을 밝히는 것뿐이다. 악령들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비극이다. 무지한 까닭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오해하여 창조주에게 매여 있음을 한사코 싫어하여 창조주의 존재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은 인생들이, 현실적으로는 이와 같이 악령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조종당하는 현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니 실로 아이러니요 얼마나 큰 비극인가.


생명 아니면 죽음이요 진리 아니면 거짓이다. 두 대립되는 개념 외에는 없다. 그래서 "영원한 이분법"이라 한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의 양면성[또는 대칭성] 혹은 동시성(同時性)의 원리에서 확증되는 것이다. 인체 하나만을 보아도 좌, 우 대칭으로 되어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양팔, 양손에다 양쪽 발로 우뚝 선다. 눈도, 귀도, 콧구멍도 모두 둘로 구성되어 있다. 입은 하나이냐 하면 아래 위로 이빨이 건재하여 양면성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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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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