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5일 월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2)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2)




일련번호 60 이상으로 연속되는 글이나 맨 끝 부분을 먼저 올리며, 다음부터 순차적으로 이회장의 질문 따라 엮어지겠습니다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의 마지막 답변 및 결론 중 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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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말하는 도척




사마천이 "천도(天道)"를 의심한다고 하면서 즉 하늘의 법이 있는가 다시 말해 인간 세계를 관장하는 최고 신, 최고 법이 있는가 의심한다면서 예를 든 것이, 공자의 친구(柳下惠) 동생으로서 "도척"이라는 악명 높은 한 악한의 흥왕(興旺), 창성(昌盛)이었다. 군대처럼 9천명이나 되는 부하를 거느리며 남의 재산 약탈은 물론 매일이다시피 무고한 목숨을 뺏는 등 야수(野獸)로서의 행각을 벌이고 제왕처럼 호강을 누리고 게다가 편안히 천수(天壽)까지 누리고 갔던 인물이다. 이를 가슴 아파 하는 그 형의 권유를 받고 공자가 그를 만나 타이르려고 갔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러했다.


"사람 목숨은 백년도 닿지 못해, 병들면 파리해지고, 남 죽으면 문상이나 가고, 걱정 근심 고통으로 보내는 시간 다 제하면 입 벌려 웃을 시간 한 달에 4,5일이나 족히 될까, 천지는 무궁하나 때가 되면 사람은 죽어야 하니, 자기 욕심 억누르고 제 목숨 하나 건사하지 못함은 결코 도통(道通)일 수 없다. 당신이 말하는 도(道)는 내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버린 것이니 더 이상 속이는 말을 말라".


"도에 통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하늘이 사람을 내었을진대 사람을 잘 살도록 만드는 것이 하늘의 도(天道)일 터인즉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도가 되느냐 하는 그 뜻이다. 도척의 이 말에 공자의 대답이 궁했다는 것은 공자의 입에서 나왔다기보다 도척 형제의 입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해졌을 개연성이 높다. 공자가 정확히 어떤 답변을 했는지는 모르나, 사람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도(道)"라면 나의 행복만 아니라 남의 행복도 함께 생각해 주는 것이 도리다.


남의 불행을 담보로 해서 나와 내 집단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강도(强盜)의 심보"라고 이해시키려 했을 것이나 그 말이 도척의 귀에 들어갈 리 없다.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강도도 자기 합리화가 있다. 도척이 말한 삶의 도리는 저네끼리 의리 지키고 공동체 생활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비슷한 강도 떼로서 러시아의 스텐카 라친은 약탈하던 중 인질로 잡아둔 페르시아 공주를 가까이하다가 저들 간의 불화와 반목의 원인이 된다 해서 볼가강에 공주를 던져버려 그런 심보다.


자기 패거리에게는 좋고 따라서 의리가 있고 다 옳다. 그러나 그 공주는 그렇게 죽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이 자아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의 악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기주의의 특성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석가가 가르친 것이, 살아도 그냥 짐승처럼 피동적으로 ‘살아지는’ 것으로 살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올바르게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 주체 의식으로 ‘살아 가는’ 것이 옳다 함이니 양심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면 행복해지느냐 하면 공자가 촉망하던 제자 안회(顔回)는 어질기는 말할 수 없어도 30전후의 젊은 나이에 영양불량으로 머리가 하얗게 센 채 굶어 죽었다. 그러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런 사람을 죽도록 버려두시는가" 할 것도 없는 것은, 이미 성경은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이고 결코 생명의 세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대로, 안회의 그같은 비극적 죽음도 바로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심하실 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저승에서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벧전 3:19). 그러나 도척 같은 인생은 이미 살아 생전에 악을 즐긴다는 것을 그 스스로 입증한 터이므로 그럴 가망성은 전혀 없으나, 죽은 이들의 일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더 이상 괘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데에 무심하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려면, 모든 인간을 당장이라도 영생하도록 하셔야 하고 첫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악마부터 제거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 공정공평과 일사부재리의 하나님이신지라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니 그렇게 하실 '때'가 있는 법이다. 마지막 심판 때다. 우리가 앞에서 '이공'과 '나'원균을 대조해서 조명해보았지만, 도척과 공자 역시 대조가 되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았던 동시대의 인물이란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할까. 도척은 현실주의자(이상은 다 집어치우고 현실적인 악의 흐름을 따라 살겠다는)요 공자는 이상주의자(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양심을 따라 원리원칙주의로 살고자 하는)라는 차이다.


공자의 이상주의가 당시 세도가(勢道家)들에게 먹혀 들 리가 없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현실적으로 정치 권력을 내놓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 역시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그렇게 유세(遊說)하고 다녔지만 하나도 들어주는 자가 없음을 알고 낙담한 채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만 공을 들이다가 생을 마쳤다. 그런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당시로서는 어느 편을 더 두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는 구원하시는 이 그리고 심판하시는 이로서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알지 못하던 시대"로서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다"(행 17:30) 함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히 그리스도의 시대로서, 공자가 살아 생전의 장유(長幼) 유서(有序) 부모 공경이 죽은 뒤에도 적용된다 하여 조상 숭배를 가르친 것도, 석가가 인간의 자율적인 존엄성과 고귀함을 강조하여 당시 어지러이 위하던 잡신(雜神)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가르친 것도, 이제는 시대에 뒤처진 옛 시대의 유물이요 골동품으로서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실상을 다 밝히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세상 인간과 관련을 가지며 어정거리는 법이 없음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명백히 하셨음이다(눅 16:19-31). 귀신(악령의 소생들인 "네피림"의 죽은 영혼들)들이 조화를 부려 죽은 자의 혼백인 양 행세하는 것이므로 조상 숭배는 악령 숭배의 또다른 형태다. "네피림"에게나 해당되는 소위 "전생, 윤회, 환생" 등을 모든 인생들에게 다 적용되는 것처럼 속이는 속임수의 일환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석가도 그 가르침에 당시는 일리가 있었다 하겠으나 모든 사람이 이제는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오늘날, 여전히 그런 가르침의 잔재(조상 숭배, 창조신에 대한 부정 등)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더불어 완악함과 자아중심의 죄와 악,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다시 말해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고 길(방법, 문제의 해결책)이 되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두 옳지 않은 비진리로 간주되고 마땅히 버려야 하는 사이비로 통해진다.


모세 율법이 가르치던 하나님의 율법은 영존하나 이를 그림자로써 나타내던 모세 율법 자체만은 폐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다. 불교의 석가는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강조하고 이생의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일깨워 주었고, 그리고 공자는 인간 삶의 중심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역설한 점에서는 공로가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이전의 평가이지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인생 구원의 걸림 돌만 되어 있을 뿐이다.


전자는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자기의 육체도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 하니 허황된 말이고, 후자는 죽은 자로서 산 자와의 일체 인연이 끊어진 조상을 참배하게 만듦으로써 역시 하나님을 부정하니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 정신의 본으로서 이공 순신이나 중국의 주공 단을 거론해도 공자는 제외시키는 것이다. 공동체 삶의 그 지혜에서는 공맹(孔孟)의 도는 귀 기울여 들을 만하고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이기에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인정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배경으로 하여 제대로 된 토대가 다져져 있는 상태에서 유의할 만하여 실천 가능할 뿐으로, 그렇지 않고는 공허뿐이니 그런 이상론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이제는 사라진 때문이다. 주공 단도 그런 공동체 정신을 정치의 제일의적 덕목으로 정하여 시종일관해서 실천했다는 점에서 상찬할 만하다는 것이고, 이공 순신의 경우 그런 공동체 정신의 결과물이 역사적 실례로서 아주 선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자주 거론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결과가 그 자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사/인간사는 아니다. 그런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그늘 속에 사그라져 간 사례야 부지기수다. 어쨌든 그렇게 실증(實證)이 되어 나타났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따라서 공자의 이상주의도 도척의 현실주의도 모두 그 깃발을 내리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복종해야 하는 시대가 오늘날이다. 왜냐면 공자의 이상주의도 그 이상이야 아무리 좋다 한들,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배경과 바탕 위에서 실시되는 '현실적인 자기 부인'을 도외시하는 것이면, 이제는 모두가 공리공론에 불과하기 때문.


그러므로 오직 거추장스러운 장애만 된다. 창조신을 부정하고 자기 스스로 깨달아 현재의 인간고를 벗어나겠다는 불교 역시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의 구태 의연함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제는 한낱 자아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연의 악을 고집하는 것일 뿐이라 인생 구원에 역시 장애요 방해만 될 따름이다. 다시 여기서도 강조하지만 아주 가까운 장래에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모두 자기 종교의 간판을 내려놓을 때가 다가 오고 있다. 모든 종교를 흡수 통일시킬 것이다. 그 단일 종교는 성경에도 적(敵)이다. 그러므로 그 전에 모든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진리로 모름지기 돌아올 일이다.


이공(李公)의 공익 정신을 우리가 높이 기리지만, 그 정신으로 이 세상 살면 아닌게아니라 처자식 굶겨놓기에 딱 좋은 것이라는 세인의 평을 듣게 마련이니, 당시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고 달라져 있을 까닭도 없다. 이공은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조상 전래의 토지가 있어 의식(衣食)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자의 젊은 제자 안회처럼 무진장 고생이었을 것은 명백하다.


이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즉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삶의 낙을 누리지 않고서 사는 방법이 있는가? 없다. 그러니 아예 살려고 하지 말고 오직 사람 살리는 일을 하며 수고하기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안회처럼 굶어 죽을 정도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할 것인가.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즉,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 '살 수 있는' 힘을 베풀지 아니하시나(사람들 스스로 무리하게 그런 힘을 얻고자 하여 각종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 필요한 힘을 반드시 베푸시는 것이다(마 6:30-34/고후 9:10).


사람 도리를 따라 살려던 안회가 굶어 죽은 것은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저주 받은 이 죽음의 세상에서 일상 일어나는 죽음의 한 단면이었을 뿐이다. 세상에서 최고 권세를 누리려던 알렉산더도 33세로 요절하지 않았던가. 그는 페르시아 대국을 정복한 후 인도의 인더스 강변에 이르자 그것이 세상의 끝인 줄로만 알고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면서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했던 인물이다.


내로라하며 배부르게 먹고 살다가 죽었든 허기진 배를 움켜쥐면서 죽었든 죽음에는 평등이고 그런 종잇장 같은 차이가 그리 대수로운 것도 아니다. 알렉산더의 배포가 큰 것도 아니다. 그는 정복욕으로 삶의 낙을 누리려고 했을 따름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이런 죽음의 세계에서 시한부라는 한계를 실감하면서 공통으로 느끼는 좌절과 비탄의 고통일 뿐이다.


이 좁은 땅 덩어리에 불과한 영역(각종 야심을 품음으로써) 넓히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천국 영토 확장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질 일이다. 천국 영토 '넓히기'라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게 될 구성원 숫자를 늘이는 사업 즉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 일에는 천사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눅 15:7/벧전 1:12). 이런 존귀한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이들만이 하는 일이다. 결국 이 사람 구원해내는 일은 장차 천국에서 상호간 사랑하면 누리게 될 나 자신을 한 사람 더(한 사람을 건져내면) 확보하는 일이다.


탐관오리들만이 득실대던 조선 시대에(어느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청백리로 이름을 올린 재상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비가 오는 날은 지붕이 새서 천장에서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고 전해오지 않는가. 가난한 나라의 관료들로서 정상적인 급료가 절대로 후할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현실'을 도척은 공자 앞에서 호기당당하게(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도척 역시 오늘날 그리스도 앞에서는 더 다시는 그런 정당성을 내세울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순신 정신'을 말하는 것도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라면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무리(無理)"-세상 사람이 말하는 대로-일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그러한 정신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을 백 번 강조해도 좋은 것이니, 이는 마땅한 사람 사는 도리요 이치로서 창조 이후 처음부터 확립되어 오고 있는 삶의 법질서인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런 저런 모든 비정상적인 궤도 이탈을 막을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터이다.


이공의 행적으로 대표되어 나타난 철저한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체제로서의 삶의 이치는 이미 누차 설명한 대로 하나님 창조 당시부터의 삶의 영원한 법칙이니 그 가치는 일관되게 훼손됨이 없다. 그 무한한 효율성의 역사적 증거가 이공의 생애에서 드러난 것임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신립과 같은 유력자들이 적극 반대하고 국가에서는 일절 후원이나 보조가 없었지만 스스로 그런 주인 의식으로써 자력으로 거북선 3척이나마 만들어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 것이 그 증거다.


다시 명량해전에서는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의 잿더미 위에서 불사신처럼 일어나 더구나 의기소침한 패잔 병력 12척을 이끌고도 그 몇 십 배의 의기양양한 적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영원히 패퇴시켜 버린 것이 또한 그러하다. 그의 정신은 그의 난중일기가 그 증명이 되어 있다. 그는 남다른 효심에다 형제 우애가 돈독하여 아버지 없는 조카를 친자식처럼 거두었다. 이 모두 인간 양식과 양심에 충실했던 결과물이다. 범상한 것이요 비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공을 우리의 본으로 삼는다.


공동체 의식으로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그런 거짓말은 성경이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그 대가로 고난을 지천으로 받아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지"(눅 4:7) 않는 것 그래서 그를 이기게 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구원 받음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데에서 즉 올바르게 살면서도 그 대가로 죽음의 고난을 받음에서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시종일관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기(재림)까지는 이 세상은 악령 곧 "이 세상 지배자(왕)",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불의의 세계다. 세상 권력과 영광을 보이며 "내게 절하여 나의 방식대로 즉 자아중심으로 살라, 그러면 이런 것을 네가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악마의 세상이다. 대체적으로 개신교가"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는 인간의 교리를 앞세우는 것도 결국 도척의 논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 곧 아버지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일절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요 14:24).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요 12:25) 하심이다.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요일 2:15). 때문에 바울은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 하였다(고전 7:1-40). 세상에서 살려는 마음을 착실히 접고,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단념하라는 것이다. 결혼하여 살게 되면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너희를 아낀다"(고전 7:28)고 하였다. 이는 믿음을 저버리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의미이니 그렇게 되면 "멸망"(빌 3:19)밖에 없다.

'사는(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힘쓰고 애써 수고하며 '일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 자체가 물론 삶의 낙의 한 측면이기도 하나, 우리의 일함은 세상의 특성상(마귀가 그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 있어 우리가 마귀와 대결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전쟁마당에서 전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하는 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자기 부인은 또한 '사즉생 생즉사'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이 세상 살고자 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함으로써 불의에 굴복하고 타협해서 산다고 치자. 즉 부정한 돈을 먹는 일에 가담하였다고 하면 이공과 같고 공자와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을 경우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전도의 길이 막히게 된다. 내가 이 세상 있는 목적은 사람 살리는 구원 사업에만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이런 경우 전도를 못하게 되면 나는 나의 생존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니 이는 나로서는 바로 자살행위다. 나 자신의 구원과도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목적이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리는 데에 있으므로, 내가 고기를 먹음으로써 형제가 실족하게 되어 나 때문에 "망하게 되면" 이는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것이 되어버린다(고전 8:11).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를 네 지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1) 함과 같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나는 술에 강하여 술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술에 약한 이가 있어 나의 술 마시는 행동에 고무되어 습관적으로 음주하게 되고 술이 그를 망치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음이다. 고로 애당초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미련을 끊음이 지당하다.


이 세상 사는 것을 극력 경계할진대, 성령 충만한 바울의 경고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좋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는 것일진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낙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는데 바울이 어떻게 하였던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자세를 말함이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자랑 중에 말함과 같다.


인생이 또 비록 살려고 해도 내일 어찌 될지 모른다. 내일도 없는데도 굳이 이 세상 살겠다니 "미친 마음"(전 9:3)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옳다. 사람 수명이 백년이면 백년으로 누구나 똑같고 한결같게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면야 그런 차원에서 보지 않고 달리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인간 생명이 어디 그런가. 내일을 기약 못하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쉴 새 없이 증명해 주시는 격이 되어 있음이 갓 태어나 죽고 10, 20대에 죽는 인생들이 아닌가.

그러면 젊어 죽는 인생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인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나도 내일이면 죽을 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낙을 누리는 것이 정상이라면 그런 죽음들을 두고 불공정 불공평이라 하겠지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진대, 따라서 오직 세상과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구원 얻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즉 그런 "불공평하다"는 불평은 더 다시 정당한 판정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연히 길 가다가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한(빌라도 총독이 자기가 바치는 제물에 사람의 피를 섞으려고 그렇게 잡아 죽인 것) 사람의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질문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는 한마디로 충분한 답변을 하신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이 "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생이 그렇게 망하게 되어 있는 현실이므로 회개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거기에 유일한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이런 모든 사태를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 생명을 두고 삶의 권리 찾고 그래서 인권 찾는 둥 해서 소위 "사회 구원"이라 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 구원에만 바칠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는 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현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도 받았을 리 만무하다. 내일도 과연 있을지 없을지 장담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 육체가 자연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육체는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죽음의 모습이요 '죽은 자'로서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도록 창조하실 때 그 몸은 초자연계(신령한) 몸이었다. 그래서 죽음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다(롬 5:12). 장차 죽도록 처음부터 만드신 것이 아님을 이로써 밝히고 있음이니,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그런 영생이 불가능하므로 처음부터 신령한(초자연계)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고로 이 자연계에 속한 자기 육체를 의식할 때마다, 혹은 그런 몸을 끌고 쏘다니는 모든 인생 군상들을 볼 적마다 '죽은 자', '죽음'이라고 속으로 탄식하는 것이 진리를 알아 "눈을 뜨고 있는"(행 26:18) 정확한 안목(眼目)이다.


이런 육체는 애초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의 육체이지 사람의 육체는 아닌 것. 하늘이든 바다 속이든 우주 공간이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고 피곤할 줄 모르고 병균에 감염되지도 않고 한마디로 자연법칙에 일절 구애받지 않는 육체가 인간 고유의 육체 곧 초자연계, 신령한 몸이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아담의 육체이므로, 말벌 한 마리에게 쏘이기라도 할 양이면 속절 없이 죽어 나가는 것으로서 만드실 리가 없음이다. 성경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처음부터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으니 "육의(자연계) 몸으로 심고 신령한(초자연계)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다"(고전 15:44) 하였다.


우리가 지금 천박한 짐승의 육체에 갇혀 있는 처량함과 처절함의 현실에 "눈 떠야" 하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양면성의 이치 곧 3위1체의 법칙이 바로 이런 현실을 뒷받침한다. 즉 자연계가 있으면 영계(초자연계)가 있고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이 있으면 그런 영계의 짐승들이 있으니 곧 영물(靈物)들이며,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있으면 그런 신령한 육체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일깨워 온 것이 성경이다(고전 15:44).


이 3위1체 법칙 또는 그 확증(3운법칙에 의한)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확이라고 여겨 마땅한 것. 왜냐면 지금까지 인간은 이러한 양면성의 이치를 하나의 철칙(법칙)으로는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어렴풋이나마 그런 양면성이 실존한다고만 여겼지 그것이 원리 또는 법칙으로 확립되지는 못했었다. 수 천년 역사를 지내오면서 음양조화의 이치가 널리 선전되어 왔기는 하지만 그 실재를 입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대 과학계의 태두(泰斗)라고 할 만한 아인슈타인도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납득하지 못해 수년간 네가 옳거니 내가 옳거니 하며 다투다가 끝장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 바로 엊그제와 같은 오늘이다. 인류 최대의 과학 법칙은 자연계의 영역인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밝혀진(계시된) 것이다. 핵심은, 이 원리가 3운법칙의 절묘한 구조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원리의 발견은, 지금 이 시대가 이미 자연계에 한정되던 때를 벗어나 바야흐로 초자연계가 그 본령(本領)이 되는 정상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리하여 악령들이 이런 때를 이용하여 영물로서의 위세를 한껏 과시하다가(인간을 속여 멸망시킬 목적으로), 그 무대가 걷힌 다음에는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위세와 영광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시게 됨으로써 그런 시대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3위1체의 법칙을 바로 인간 생애의 법칙인 3운법칙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으니 실험 도구를 통해서 증명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확증된 것이다. 사람의 생애를 주관하는 법칙이므로 실험을 통해서는 입증될 수 없는 까다. 계시(啓示)로 말미암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기막힌 구조가 되도록 즉 3운법칙의 짜임새가 그런 모양새가 되도록 미리 짜놓으신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도척의 말대로, "사는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1달에 겨우 4,5일밖에 없다"면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닌데, 왜 굳이 살려고 죄를 짓기까지 해야 하나. 사람에게 이성이 있는 것은, 그런 경우 왜 이렇게 사는 날이 없도록 비참한 인생인가 그 원인 규명에 나서서 죽을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 해결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이 아닌가. 동물들처럼 자기 배만 부르면 제일이라 생각하도록 되어 있는 인간 구조는 아니다. 양심까지 곁들어져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죽든 살든 고난을 받든 아니 받든 그런 것에는 상관 없이 무엇이 옳은가를 따져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려 하여 상식 따라 살다가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도척과 같은 삶은 '자포자기'의 유형이다. 숫제 짐승이 되겠다는 '하루살이 목숨'의 마음 씀이다. 사람은 상식대로만 행동하면 되는 것인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성경이 말한 대로 자기 욕심과 어리석음에 끌려 그 건전한 상식적 판단마저 훼손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또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어차피 살기 위해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일관되게 여겨 왔었다. 양심에는 걸리지만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이었다. 양심에는 걸리지만 양심대로 하다가는 죽겠으니, 사람이 살고 보는 것이 최고 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리가 있는 것이라 스스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의 생명'으로서 오신 후로는 살고 보겠다는 구차한 생각은 더 다시 그 타당성을 잃었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그런 구차한 것으로부터의 완전 자유 해방이다. "진리를 알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하신 그대로다(요 8:32). 사자처럼 담대하여(잠 28:1) 오로지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 자기 신명을 유감 없도록 바치게 되는 일대 삶의 혁명, 인간 내부의 '천지개벽'이 시작된다. "주님은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함과 같다.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가는 것이다"(:18).


양심은 누구의 것인가. 나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기에 내가 이를 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다. 내게서 난 것이라면 절대로 그런 양심 이탈이 생길 리 만무하다. 나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천도(天道)이다. 하나님 주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양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 천도를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현실을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성문율이 있게 하심으로써 죽은 자로서의 인간 실상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율법 없는 이방인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롬 2:14) 했으니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어" 있음이다. 즉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냄"(:15)이었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가 이런 양심을 보고 그리고 하늘의 기이한 천체(天體)의 질서 정연한 운행을 보고 이를 불가사의라 한 것처럼, 옛 사람들 역시 천도(天道)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나 안회 같은 인물들은 천도를 따라 행하기로 결심했던 이들이고 도척 같은 무리들은 ‘천도’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일에 급급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오셨다. 과거와 같은 변명과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오셨다고 해서 세상이 확 달라졌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요 3:19,20)고 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기"(:20) 때문이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18) 하셨다. 이미 심판을 받는 자리에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은 그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 한 구원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도 양면성이 있으니, 그렇게 회개하여 구원 얻는 자에게는 구원하시려 오심이나(12:47) 스스로 악을 좋아하여 믿지 않을 사람들은 심판하려고 오신(9:39)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그 이후에 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천도가 명확하게 구체화하여 인간 중에 나타났으나 그럼에도 도척과 같은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세상 종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사람이 구원은 받지 못하더라도 천도를 지키려는 인간 본연의 노력마저 포기하면 안되므로, 소크라테스나 공자, 고타마 싯다르다(釋迦) 등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그런 최소한의 노력을 하기 위한 개개인의 의지만은 살아 있어야 함을 가르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었다. 공자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에서 그 혼백까지 위하라 한 것은 석가가 창조신마저 부정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아주 빗나간 처사이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다 "알지 못하던 시대"(행 17:30)로서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지만"(:30),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의 시대인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30)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이 "구원", 구출, 탈출, 자유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변화를 무슨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한 머리(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아래에서 공동체 의식으로 살면 그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천도’다. 따라서 이 천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뿐이니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 심판을 주관하시는 재판장이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이 ‘머리’ 구실은 반드시 몸의 많은 지체(肢體)를 짝의 원리에서 동시에 상대해야 하므로, 지체 중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임을 앞에서도 설명을 했다. 왜냐면 다수(多數)를 평등하게 ‘하나처럼’ 상대하는 것이어서 그 다수와 일대일이 될 만큼 그 다수와 맞먹는 역량이 있어야 하는 까닭에, 반드시 그런 역할은 그 다수를 생산해낸 즉 창조해내신 창조주만의 몫이기에 그렇다. 그 다수를 내었으므로 그 다수 전체를 상대로 하는 '일대일'이 됨과 동시에 그 다수를 구성하는 개개인에게 또한 충분히 '일대일'이 되시고도 남는 까닭이다.


이렇게 두루 통하고 원활히 할 수 있는 역할은 그 어느 인간도 할 수 없는 것.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도 머리가 그 어떤 지체보다도 여러 중추적 기능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이런 한 몸의 원리에서는 머리는 반드시 몸을 위하고 몸은 오직 머리를 위하는 것이 필연이고 기본 질서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삶의 법질서(天道)이다. 다시 말해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 육체의 영혼처럼 되어 계심으로 나와 ‘둘이 하나 되는’ 양면성의 이치(짝의 원리)로 불가분이 됨으로써 이제 얼마든지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짝’으로 모셨으니 나도 이제 나의 ‘짝’으로 인하여 영원히 살 수 있게 됨이다. 과거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창조되었던 것이나 다음 단계로 영원성을 지니는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몸도 신령한 육체가 되어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변환된 것과 같다. 우리 역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장차 신령한 몸으로 변환하게 될 것이니 곧 "몸의 구속(救贖-롬 8:23)이요 양자(養子) 됨"(:23)이다.


과거에는 나 홀로 존재하고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은 자’였으므로 살기 위해 즉 어찌하든 삶의 낙이나 맛보고 죽는다는 욕구에서 자아중심이 아니 될 수 없었으니, 비록 하늘의 도리를 따라 산다고 하여도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나 홀로 되어버린 존재로서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있는 ‘죽은 자’로서, 더 이상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하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은 이스라엘 민족만은 당시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림자로서의 의미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런 율법조차 없는 이방인들과 같은 양상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완전하게 되도록 정해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대조(對照)된 삶에서 에서는 도척을 대표하고 야곱은 공자를 대표한다고 할까. 오늘날 인생들도 여전히 같은 두 유형의 삶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이는 변하지 않는다. 공자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사람이고 이스라엘에 대칭되는 이방인(異邦人)이기에 그 해답을 몰라 도척과의 잠시 토론에서 궁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원무궁 확고한 해답이시다.


고타마 싯다르다(釋迦) 역시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이므로 그런 정도밖에는 생각(그의 소위 "大覺")이 미치지 못함이 필연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천상천하의 모든 비밀을 알리시고 하나님 친히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심이 되어 더 이상 인류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마천도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하늘의 도가 있다면 과연 있는가 없는가)" 하고 이제는 부르짖을 필요가 없게 된 것.


성경 속의 인물들도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悖逆, 인륜에 어긋나고 순리(順理)를 거스름)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데 어찌하여 궤휼(詭譎, 교묘하고 간사스러움. 또는 교묘한 속임수)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 주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魚族) 같게, 주권자(主權者) 없는 곤충 같게 하십니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dragnet, 底引網)으로 모으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저인망) 앞에 분향하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입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이어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습니까"(합 1:13-17)하고 불평, 원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불평 불만이 어떤 정당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나왔던 것이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전 7:15) 하였으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시 73:3) 말하기를 "저들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으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들의 목걸이요 포악함이 저들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들의 눈이 불거져 나오며 저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치며 저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하게 말하며 저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저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구나"(시 73:3-9) 한 것이다.


개인 간에도 그렇고 국가 간에도 야수들의 약육강식인지라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앎이 있으랴' 하는구나. 보라,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한다"(시 73:10-12) 하였고,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後代)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눈앞에서 그러하다.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회초리)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을 내보냄이 양 떼 같고(자식 복도 많음을 가리킴)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小鼓)와 수금(竪琴)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임종시에는) 자는 듯이 간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天道) 알기를 즐겨하지 않소이다‘ 하고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욥 21:7-15) 한 것이다.


성경이 세상의 이런 모든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소상히 말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이니 성경이 만고(萬古)의 진실 그대로의 기록인데 이런 것을 외면할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천도 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하늘의 도가 있다면 과연 있는가 없는가)"를 말함과 동시에 천도지사 필귀정(天道之事必歸正-하늘이 정한 사람 사는 도리는 당연히 구현되어 나타나게 마련)을 함께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이 "천도(天道) 운운" 할 때는 하나님 주신 양심을 가리켜 하는 소리이므로, 양심을 내장(內藏)시켜 만들어놓으신 인간이 저지르는 소행이므로 이를 반드시 심판하시지, 묵과하실 리 없다. 단지 적기적소(適期適所)를 가리심이니, 모름지기 이 때(이생)와 이 장소(이 세상)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 앞에서 제법 잘난 척하고 펼친 도척의 논리는 일면으로 보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세상사 그리고 만물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 구조다. 자연계라는 이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짝으로서의 초자연계가 잔뜩 벼르고(선악을 따라 포상 또는 보응하기 위해) 온 세상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함은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 있어야 하는 선결 요건이 따른다. 그러므로 제1차 다음에 제2차 즉 마지막 단계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안다면 절대로 이 세상에서 도척처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양 세계가 이처럼 맞서 도사리고 있을 때는 똑같이 살고 죽는 것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별개로 구분됨으로써 한 쪽만이 진정 살거나 죽는 것이 되고 그 다른 한 쪽은 반드시 그러한 생사를 스스로 갈음하는 의미밖에 될 수 없음을 우리의 선천적인 양심과 양식이 판단해주는 것이다. 즉 하나는 본격적인 것이요 그 다른 하나는 이 본격적 상태를 위한 오직 준비기일 따름이다. 그래야 양면의 세계가 병존, 병립될 수 있음이다. 똑같이 삶과 죽음이 논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은 상식 수준이다. 그래서 인식 전환, 시각 차이가 강조됨이니, 정반대되는 현상끼리로만 조합되어 하나를 이룸이다.


태초(太初)에 땅이 공허하고 혼돈이요 흑암이었던 것이 빛이 생기며 "6일 창조"로 완전 정비되었었다(창 1:2).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고 그 전에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던 영물들 중에 일부가 범죄하여 영원 멸망에 처해지면서 다시 세계는 혼돈과 흑암에 이르게 되자, 새 창조의 완전한 정비 사업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가지 진행 중에 있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그 종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본격적인 생명이나 죽음의 세계는 이 세상 다음에 오는 것으로서 그 세상을 기준하면 이 세상은 전생(前生)이다. 짝의 원리에서, 이 세상 이전의 세상은 없다.


철저한 '전생'으로서의 의미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악인은 악인대로 형통해야 하고, 의인(선을 행하는)은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천도(天道)가 사람 사는 마땅한 이치요 도리이기 때문에 한사코 이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고 또 그것이 입증되어야 하므로, 당연히 이 세상(전생이 되는)에서 의인은 고난을 지천으로 받게 되어 있다. 악인이 형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악인을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함정, 올무, 덫이 되는 까닭이다.


만일 사마천이 말한 대로 악인이 그 악에 대한 보응을 받고 의인이 그 선행에 대한 보답이 된다면 세상 인간 중 누가 악을 행하겠고 의를 행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강제, 간섭에 의한 인간의 선행을 원하시지 않는다. 어떤 난관과 불이익이 돌아오더라도 의를 행함이 올바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을 보기 원하심이다.


그래서 의인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하고 악인에게는 ‘반드시’ 형통하고 창성하고 흥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왜냐면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운명을 각자 스스로 가름하는 전생으로서의 의미만이 있고 따라서 그 의미가 막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별(選別) 작업은 영원을 통해 두 번 다시는 없는 까닭이다. 고로 앞서의 지적과 같이 혼돈과 혼란의 인생 부조리(不條理)인 듯해도 실상은 질서 정연하게 사필귀정으로 흘러가는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 인간사, 세상사는 정밀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한 치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음이니 엄정히 운행되는 자연법칙과 같다. 인간 생애를 이와 같이 어김없이 관장해 가는 그 증거가 3운법칙(trini homo)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실상과 실체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이 세상이 전생임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이 죄악으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①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영역이니 곧 새 창조다. 그러나 ②죄로부터의 탈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와 더불어 나의 확고한 의지(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가 반드시 동반, 융합되어야 함이니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완전한 존재로 만드셨으나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니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것과 같은 이치다.

②죄로부터의 탈출은 ①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 전제되어 있는 바탕에서 물론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①을 "구원 받았다" 하고 ②를 가리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고 하는 것이다. ①은 피동적이요 ②는 단연 능동적인 측면이다. ①은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 친히 하신 것이다. 그러나 ②는 반드시 내 스스로 이루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 이것이 우리 구원의 양면성으로서의 능동과 피동의 차이다.


엄격한 양면 구조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가 아닌 세상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개신교의 경우 ①만 편식(偏食)하고 ②는 거들떠보지 않는 데에 있고, 천주교는 대략 ①은 도외시하고 ②에 치중하여 난데없이 "마리아"를 만들어 우상으로 삼고 있음이다. 불교 역시 ①은 무시한 채 아예 생각해보려고도 않고 ②에만 역점을 두는 것이다. ②라는 점에서는 불교와 천주교가 동일하다 하겠으나 불교는 자율적인데 반해 천주교는 완전히 타율적이니 "마리아"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개신교나 천주교나 불교나 모두 이런 ①, ②의 양면성을 함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치명적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이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셨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행 10:35) 함과 같이, 이런 세상 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는"(요 3:21)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행 17:27)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들은 이 "악하고 음란한"(마 12:39) 세상에서 빛과 소금 구실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것은 남녀 한 몸이 되어 있는데도 한 쪽이 다른 이성(異性)을 상대함으로써 범죄가 되듯이,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들이 하나 관계에 있는데도 이 하나 관계를 이탈하여 자아중심으로 나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앞에서, 성향 자체가 자아중심이면("불의를 좋아함"으로써-살후 2:12) 그것이 '악'이고, 단지 그 결과가 악행으로 나타나는 것(육신에게 포로되어-롬 7:24)은 '죄'라고 대체적으로 구분해서 정의(定義)를 했으나, "짐짓 죄를 범하는"(히 10:26) 경우 용서가 없는 것이니 완전히 악으로 돌아섰음이다.


악인은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믿어도 단지 자기 필요에 의해서(자기 이득을 위해) 또는 영생에 대한 욕심이 나서 믿는 경우이므로 이런 사람은 믿음에 오래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도 반드시 사이비(似而非)를 만들든지 또는 그 쪽으로 합류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아예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고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무리 가운데 얼마든지 끼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배반할 가룟 유다를 처음부터 아시면서도 열 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킴으로써 예시(豫示)하여 경고하신 바와 같다.

고로 나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죄일진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죄를 짓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롬 14:7)라고 하였다. 고로 죄를 짓느냐 않느냐 하고 논쟁할 필요 없이 내가 주님 위해 사느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만 자체적으로 진단하면 된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때 그 사람은 온전하고 거룩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데에는 도가 통한 자이므로 이런 여러 가지 말을 만들어 내지만, 죄를 짓느냐 안짓느냐 하는 것은 접어두고, 오직 내가 주님 위해 사느냐 여부,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느냐 여부만 스스로 진단하면 되는 것이니,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가름됨이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다"(고후 13:5,6) 했으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5:15) 줄로 알고 있을 때 나는 믿음에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이다. 반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닐진대 나는 버림 받은 자임을 충분히 스스로 헤아려 판단할 수 있다. 고로 즉시 그리스도께 회개하여 나올 일이다. 지금까지 구원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스스로의 진단이 불가능하다면 "스스로 시험하여 확증하라" 할 리가 없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경우가 오늘날 거의 전부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까닭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리만 받아들여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해 왔음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버림받았다"기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을 몰랐다고 스스로 진단하는 것이 옳고, "회개하라"(행 17:30)고 명령하시는 대로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마음을 다질 일이다(고후 5:15).


첫 사람 아담이 올바르게 살지 못하여 현재와 같은 인간고(人間苦) 즉 이회장이 지적한 대로 죽음과 고통과 불행에 빠졌으므로, 전도는 그런 당연한 사람 삶의 제일 첫 과제이니, 자기가 물 속에서 건짐을 받았으면 자기와 같은 환경에 놓인(물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리는 일이 시급하고 가장 먼저 해놓고 보아야 하는 양심의 지상 명령이니 이는 상식이다. 사람이 이 상식과 양식을 따라 행동하면 대체로 대과(大過)가 없다. 성경에 그래서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하였다. 


"미친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고, "악"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 다 그냥 두고라도 나만은 어찌하든 살겠다는 욕심이다. 살자고 하니 모쪼록 잘 살아야 하고 잘 살자니 한정도 없이 잘 살아야 사는 것 같으므로 그래서 욕심은 끝을 모른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아예 살고자 하지 않고 손 털고 마음 털고 일어서는 것이 지혜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운 몸 하나, 마음 하나로 지내는 것이 진정 자유인이다. 인간은 자주 독립성이 그 생명이다. 진정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득도라는 것은 이 자유인 됨에 있다. 자유의 '의미'를 아는 데에 있다. 돈, 권력, 명예, 욕심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데에서 자유인이 된다. 자유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극기(克己)가 가능해진다. 자유는 자아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야 처음으로 한 몸의 이치대로 사는 진정한 공동체의식 아래 공동체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요, "선"이다. 이공 순신이 드러낸 공동체 의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자유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건마는, 그럼에도 그런 혁혁한 위업을 이루었으니, 공동체 의식에서 우러난 행동의 긍정적인 의미의 그 실증(實證)이라는 점에서 그 막대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 의식 즉 '우리' 의식에서는 머리를 몸이 위하고 몸은 머리가 위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이기(利己)가 아닌 철저히 이타주의다. 그러니 인화(人禍)로 인한 불행의 소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죽음이나 병듦이나 자연재해보다 더욱 이 '인간 재화(災禍)'로 인해 인간 사회가 이다지도 고되고 슬프다. 이순신 정신 즉 공동체 의식을 그래서 우리는 선양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한 몸 구조로 이루어져 사는 데에는 그 가장 이상적인 형식이 부모 자식 관계다. 엄마 품속에 든 아기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아늑한 사람 삶의 위치요 자세다. 다시 말해 머리와 몸의 관계는 이 '어버이 사랑'과 '자식의 순종'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구조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밤낮 없는 싸움질만 계속된다. 인류 사회의 모든 불화와 전쟁이 바로 이 머리되려는 북새통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가 머리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어버이가 있어 그 어버이 위치에서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부득불 창조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논리에서 철학자 칸트의 소위 "요청적 유신론(要請的有神論)"이 나온 것이다. 달이 있으니 밤이 어둡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밤이 어둡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에 달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요청적 유신론"은 달이 있어야 한다는 그 소리요 이는 달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그러나 아는 이가 너무나 적다는 데에 현실적 비극이 있다. 칸트 자신이 이러한 비극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오늘날은 마지막 때로서 최악으로 악령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과 속임수가 횡행하여 판을 치는 시대다. 그러므로 거짓과 참을 제대로 정확히 판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앞에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유의할 것을 주문하였지만, 그것도 그렇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 기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어떤 하자라도 있었던가 하는 점을 이 자리에서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도 완벽한 것임이 드러났다. 오직 우리가 처한 이 세상이 악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에 있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경우 죽음의 고난을 위시한 각종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는 불가피하고 어느 면으로는 당연한 것이니, 이지적인 인간으로서 이런 것에 좌우된다면 이는 그 이성에 반(反)하는 일이므로, 따라서 이같이 스스로 이성적이지 못함을 드러내는 인생들이 걸러지는 단계가 이 세상인 것이다.


거짓과 참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성경이라는 기준이 서 있으니, 이 기준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면 우리의 구원 받음에 아무 지장이 없다. 그 어떤 신기하고 기이하고 엄청난 속임수가 갖가지 기적과 소위 최첨단의 지식으로 임하더라도 이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무조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면 거짓으로 낙인 찍어 무방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 그렇지 않고 여기서 흔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되, 그 무너짐은 시간문제다.

생로병사의 인간고에 대한 답은 이런 '결과'를 빚어낸 근본적인 '원인' 규명에 있다. 즉 영혼을 지닌 인간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는 비극에 있다. 같은 육체의 자연계 동물들은 생로병사의 동물고(動物苦)를 논하는 법이 없다.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고만 있다. 인간고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처음부터 인간과 동물의 이 차이에 착안해야 했었다. 동물은 죽음에 임하여 고통은 느낄 수는 있어도 슬퍼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고뇌도 없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유별(有別)한데 영혼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육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나 하고 최소한 따져보려고 해야 사리에 옳다. 진화로서 생겨난 것이라면 양면으로 생겨나야 하니 하나는 영혼의 진화, 다른 하나는 육체의 진화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진화론이 말도 되지 않는 인간 망상임이 금방 드러나는데도 인간은 지금까지 이를 인간 지성(知性)의 대표적 상징이나 되는 양 알뜰히 품어 왔으니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도대체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즉 처음 창조되었던 상태로 도로 돌아와버린 것이 오늘날 인간고의 비극적 결말로서, 그리하여 저주를 받을 때도 여자는 해산의 진통을,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인간이 산고(産苦)가 없으면 자식 생산이 안되고 수고하여 일하지 않으면 한시적인 생명이나마 유지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이 육체가 원래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웅변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weaving, 동식물의 섬유를 가공하여 피륙을 짜내는 작업)도 아니하나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화로 입은 옷도 이 꽃 하나만도 못했다(마 6:27-30). 이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그 둥지가 있되 인자(人子, 사람)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20) 하신 바로 그 뜻이니, 인간의 원래의 삶의 터전은 영계(초자연계)이고 이 자연계가 아니었기에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내심이다.


자연계에 처음부터 속한 동식물은 수고하지 않아도 먹고 입을 수 있어 이를 위해 별도로 일하는 수고가 필요치 않은 것이나, 인간은 자기 고장인 영계(초자연계)에서는 당연히 그런 수고가 있을 턱이 없지만, 범죄의 결과로 이런 자연계에 처해졌기 때문에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는 대목이 있다. 해마다 온 지구상을 통틀어 적지 않게 기아(飢餓)로 죽는 자가 속출하는 이 세상이다.


"오늘"이라 하셨으니 사람 목숨이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수고한다고 입에 들어갈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지 않으면 꼼짝없이 인간은 굶어 죽는 판이다. 그래서 참으로 절박하게 "오늘 먹을 양식"이다. 여자의 해산도 만일 범죄하지 않았다면 영계에서 출산했을 것이요 따라서 결코 이런 산고가 없었을 것이나 자기 고장이 아닌 자연계이기 때문에 자식을 낳느라 죽을 변을 치르는 것인데 이를 모르니,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 얼마나 비극적인가. 손으로 집으면 집어질 수 있는 한 마리 곤충에 불과한 말벌에 쏘여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 목숨 경각간에 잃는다. 사람 잡는 진드기까지 있어 여기에 물리면 심지어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도 생겨났다. 곤충 정도가 아니다. 현미경으로나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겨우 눈에 들어오는 병원 균에 의해 목숨을 잃는 너무나 허망한 인간 목숨이 아닌가.


수명도 영원하지 못하거니와 이와 같이 육체 자체가 너무 허망하여 내일 목숨도 보장 받지 못하는데 이런 몸을 끌고 어떻게 감히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감히 품는다는 말인가. 미친 마음이 아니고 정상적인 마음인 다음에야 감히 그런 허망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오직 사람 건져내는 일에만 분골쇄신 전심전력을 다해야 당연한 도리요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닌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명백히 나타나시는 것이다.


즉 그 하나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허망함을 알 만한 이들에게는 아주 철저히 알리시는 차원에서의 이따금 들려오는 인간 생명의 사고 소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기를 바라시되 누구든지 아무나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는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어이없는 죽음이나 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모두가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은 100년이라도 살 수 있듯이 착각할 정도로 대부분 나이 많을 때까지는 정정하다.


그래서 인간의 허망함을 실감하지 못하도록 환경 여건이 그렇게 조성되어 있다. 이는 악인은 절대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조처다. 악인들을 걸러내는 함정이요 올무 역할이다. 죄가 무엇이냐, 행복하게 사는 법의 위반이다. 생명의 법을 범한 것이다. 사람을 지으시되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그런 행복한 삶을 위한 한 요소일 뿐이다. 불행하게 살 바에야 영생이 무슨 소용이냐 하는 그 뜻이다.


행복하게 사는 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있는 체제를 이루어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하고 그리함으로써 함께 지체된 자기 이웃을 위함,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자아중심'과 '자기 부인'으로 갈라진다.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범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생하게 되기에 앞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우선시된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것이 우리 구원의 목적임을 성경은 명시한다(롬 14:9/고후 5:15).


즉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는 누구나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요 6:45).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이상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 사는 법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즉 한 몸 구조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절대로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회개할 수 있는 자에게만, 이 사람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 외에는 가르쳐 주어보아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계시되어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왜냐면 그런 지식이 있어도 그 지식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대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오만함이 그 특징이다.


인간이 현재의 비극에 처하게 되어 구원이 필요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사람 사는 법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인간고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 그 다시 살아나심을 나의 생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의롭게 생활하는 데에 있다(요일 3:7-10).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오직 이 구원의 희소식을 알려 "회개하라"(행 17:30)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있다.


결단코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다. 이 자연계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서식처이니, 사람은 영원한 초자연계 몸으로서 초자연계(영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엉뚱한 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하니 그래서 '생로병사의 인간고"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인생이 겪는 네 가지 고통이니,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런 사고(四苦)는 자연계에 한정되는 것.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기에 쇠퇴하여 병들어 죽느라고 늙는 것이다.


영원 세월이 흘러도 신령한 초자연계 몸은 창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이팔청춘(二八靑春, 16세 무렵의 젊은이)이다. 인간은 앞서 지적한 대로, 생겨난다는 것(生)부터가 그 어머니의 죽을 변을 치르는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범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런 저주를 하셔서가 아니라 영계에서 살다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가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총괄 아래 되어지므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셨다"는 표현을 쓰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만을 보고 여기서 해방되는 것을 자유라 하여 거기에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명칭을 붙이는 불교의 관점은, 만물의 생성 및 유지 보전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에 따르는 엄연한 양면성(영계와 자연계,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 무상(無常)함과 상주(常住), 영원불변한 것과 일시적인 것 등)은 보지 못하고 오직 한 쪽 면에서만 매달리니 이는 동전의 양면성의 이치를 무시하는 것이라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반(反)과학적 사고방식이라 단정 짓기에 주저하지 않음이다. 생멸 전변(生滅轉變)은 자연계에만 속한 일로서 초자연계(영계)에는 그런 것이 없는데도 이를 간과하는 일대 치명적인 오류이다.


결론


이상 모든 내용을 요약하면 무엇이냐. 현재의 인간 삶이 원래의 모습을 떠난 비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삶은 죽게 되어 있지도 않고 따라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삶도 물론 아니다. 자연계와 대칭(상칭, 대립)인 영계에서 영적인 몸 곧 신령한 몸이 되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구조에서 각 지체 역할을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각자 자기 이웃을 위해(몸은 머리를 위해 머리는 몸을 위해 그리고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각자 자기 이웃을 위해) 삶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요 삶의 원리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 계명으로서 곧 행복한 삶의 비결이다. 현재와 같이 비정상 상태에 인생들이 놓이게 된 것은, 이런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를 위해 삶으로써 생명과는 정반대 쪽의 길을 택한 까닭이다. 역시 그런 한 몸 또는 하나 되는 이치를 따라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靈物)들 중의 하나가, 자기를 위하는 악한 길(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와 이웃을 위하는 것이 선이다)을 택하여 범죄자가 되었고, 그런 동기에서 인간을 꾀어 인간 역시 범죄하도록 거짓말로 속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것으로서, 때문에 그 결과로 이 악한 자가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인간을 관장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이다.


이렇게 인생들은 이중 삼중으로 속박되어 있으니 자유 해방을 얻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이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게 됨으로써 우리가 다시 출생하게 되니, 이런 비극적 속박에서 자유 해방되게 하시는 것이므로 이보다 더한 "복된 좋은 소식"(福音)이 없다. 곧 그리스도의 구원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우리가 다시 출생하는 방법은, 이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아담)을 애초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창조하신 대로 역시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새로이 우리 각자를 창조하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즉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만드시고 나중에 영혼을 조성하신 것과 같이, 현재의 나 자신을 아담을 창조하시던 때의 그 '육체'로 보시고 그 '육체'에 대한 '영혼' 조성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영원히 계심이다. 즉 나는 '육체',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혼'으로 영원히 홍길동(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이라는 존재를 구성하여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새 이름"(계 2:17)이다.


즉 당시 아담이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이었던 것과 똑같이 현재의 내가 '나 자신'과 '그리스도'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이니, 그 때의 아담으로 말하면 나는 그 '육체' 격이요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혼' 격이시다. 이래서 아담의 창조 때와 똑같이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다. 이렇게 이중 구조로써 이 홍길동이가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당연히 없다가 이제는 이런 구조로 된 존재가 새로 생김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사람되심으로써(나 위하여 죽으셨고 그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심으로써-갈 2:20) 그래서 내게 주시는 영원하신 선물로서 성령으로(그래서 "성령의 선물"이시라 한다-행 2:38) 내 안에 영원히 사시게 됨으로써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 영원히 되어 계시니 이를 "새 창조"라 하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라 하면 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나라고 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하게 나타내 보이셨으니 곧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이다. 숨을 내쉬신 이 동작은 당시 아담의 영혼을 조성하실 때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셨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이 바로 나(나를 아담 당시 즉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기 전의 그 '육체'로 간주한다면)의 '영혼'으로 오심이다.


내가 현재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지마는, 이 새 창조에서는 '나'(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된)라는 전체를 '영혼'이 조성되기 전의 '육체'로 보심이다. 그래서 '영혼' 없는 '육체'만의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해 주신 것처럼, 이 새 창조에서 나에게 '영혼'을 조성해 주시는 의미가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이다. 그래서 새 창조다. 왜냐면 아담을 창조하실 때처럼 그래서 '영혼'이 없던 아담의 육체에 '영혼'을 조성해 주셨던 것처럼, 내게(영혼 없이 육체만으로 처음 만들어져 있었던 아담의 육체로서 현재의 나를 인정하시고) '영혼'을 조성해 주셨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셨으나("God breathed into Adam's nostrils the breath of life."-창 2:7) 이 새 창조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즉 나를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숨을 내쉬셨으니(to breath), 이 형용은 성령이 아버지의 영이심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 다시 말해 아버지이심과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나타내심이니 즉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심을 말씀하심인 것. 말씀하신 대로 "고아(孤兒)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요 14:18) 어버이처럼 되돌아오시어 우리 각자를 거두어 들이심이다.


또는 이미 설명한 대로 '영혼'과 '육체' 혹은 '머리'와 '몸'의 관계를 이루심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이시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체제가 되어 있으니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구조다. 이런 진상을 알고 진리를 알고 있는 다음에야 누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 삶에 연연하겠는가. 오히려 이런 자연계로 전락해 있는 비극적 현실을 미워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그렇고 우리의 목적도 그렇고 오직 이 비극적 현실을 하루 빨리 벗어나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만드신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으로 모두가 되돌아가는 것 이외로 관심을 둘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지체 없이 이 세상은 종료된다고 확언해 주셨으므로 오직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구원의 진리 가운데로 다가와 '산 자'가 될 수 있도록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없다. 이 세상 삶 즉 자연계에 속한 삶을 사랑하여 여기 집착되어 있으면 이 자연계에 속한 한시적, 일시적 삶을 선호한다는 그 뜻이 된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대로 죽음밖에 없다. 그런 자세가 되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영생하게 될 리도 없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려야 이 세상 삶을 누리는 것이 되는데, 이 세상은 악마, 마귀 즉 애초 인간을 꾀어 죽음에 빠뜨린 악한 영물(惡靈)이 좌지우지하므로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여전히 범죄자가 되어 생명과 대립(대칭, 상칭)이 되는 죽음밖에 없는 것(고후 4:4/롬 8:13). 부귀영화 없이 무슨 맛으로 삶을 향유하려는 꿈이나 꿀 것인가. 모순이요 자가당착이 아닌가.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이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한 마디 결론밖에 없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임을 스스로 폭로함이다.


세상의 부귀 영화를 누리지 못할 바에야 애당초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그래서 사랑하지 말라 즉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성경은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요 12:25). 우리가 구원 받음도 사람들을 이런 속박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는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내시는" 방식이 되어 있음이다(요 20:21,22). 이것이 우리가 위치해 있는 현실의 의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얻어 있는 "믿음"이다.


자유 의지를 구사할 수 있도록 창조된 피조물(가장 먼저 창조된 스랍과 그룹과 같은 영물들이나,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들이나 또한 인간들이나 모두 똑같이)들은 자기의 자유 의사의 결정대로 어느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니 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따라 영원 운명이 결정되어진다. 이미 영물들은 그렇게 분류가 되었고 인간이 그러할 차례인데, 첫 사람 아담부터 그런 자유 선택으로 생명 아닌 죽음에 함몰해 버림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인간고(人間苦)에 휘말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수명(壽命)은 이런 시험 무대에 올려져 악인은 악인대로 의인은 의인대로 선별되어지는 의미만을 위해 있는 것. 이런 일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요 좌가 아니면 우, 바로 가지 못하면 거꾸로 가는 그런 양자택일의 의미로만 통한다. 따라서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하지 않으면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요 4:34)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므로 곧장 멸망으로 직결됨이니 이를 자각하는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


여기서 순종과 불복종이 가름되어 영물들이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나누어진 것과 같이 악인과 의인이 분류되는 것. 이 세상에서 각자는 좋고 나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 짓게 되니 세상이야 비록 짧지만 영원 세계와도 맞먹는 막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요 따라서 밤잠을 설쳐서라도 정확하게 어긋나지 않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결단의 시점(時點)들인 것이다. 이런 금 쪽 같은 시간들을 소위 "세상 사는" 데에 허비, 허송한다는 것은, 이 자체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니랴.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단 짝의 의미가 되신다 했거니와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이니 이는 가장 가까운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동기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등 모든 인간적인 사랑을 모두 한데 묶은 것과 같은 의미다. 하나님과 그 피조물 간의 사랑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이 짝으로서의 사랑인데, 짝이라 하면 남녀 관계로만 생각하여 후대를 이어 가기 위한 방편으로만 의미를 한정하고 있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으니 둘이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둘이 하나 됨'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름이다. 사랑의 근본은 이와 같은 하나님 계시는 모습에서 비롯되는 것. 성경에 왜 아가서(雅歌書, song of Solomon)와 같은 연가(戀歌)가 끼어 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남녀 사랑이 어디서나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드는 것이 인생사이기이에 심심파적으로 끼워 넣은 것은 물론 아니다. 심오한 인생 삶의 진리로서 그렇게 사랑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역대 유명 작곡가의 사랑의 멜로디를 남녀 사랑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의미를 대입(代入)한다면 그것이 곧 찬송이 아닐런가. 사랑이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여 미추(美醜)가 없다. 인생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사랑할 때라고 하는데 엄마와 아기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한다"(엡 5:19) 했는데 영역은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로서 아름다운 사랑의 가락을 울려낸다는 뜻이다.


다윗이 친구 요나단을 가리켜 "여자의 사랑보다 더 나은 사랑"(삼하 1:26)이라 했듯이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느 인간의 사랑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 하신 그대로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니 이 세상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반드시 구분되므로 남자가 되셨으나,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대표성을 따름이실 뿐이니 첫 사람 아담이 여자가 생길 때 남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 세계에서는 다시는 낳고 낳아지는 일이 없고 모두 이 세상으로써 끝났으니까 남녀 구별도 영원히 없다. 이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동시에 남자 같고 여자 같을 뿐이다. 그렇다고 중성(中性)이라는 뜻은 아니니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완전한 사람으로 처음 창조된 아담(여자가 생기기 전에는 남자가 아니었다)과 같은 모습일 따름이다. 인간사에서 각종 차이를 융합시킬 수 있는 기준 다시 말해 대표성은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인 것이다.


아담이 창조될 때 즉시 여자가 창조되지 않고 먼저 아담에게 영혼이 창조되었고 그리고 초자연계 곧 영계인 에덴낙원이 창설되었고 거기서 영적인 초자연계 동식물 즉 영물들이 창조되었고 그 후에야 다시 말해 영물들 중에 아무도 아담에게 짝이 될 자가 없기 때문에 자연계의 거의 모든 생물체처럼 암수(雌雄) 개념으로 여자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는 더 다시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곧 신령한(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생명체와 같은 방식으로 짝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 의도하신 바가 아니니 왜냐면 비록 육체적으로 근본은 자연계이기는 하지만 이미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가 되고 이 영혼을 따라 육체도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 세계에서는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을 기준으로 하게 되어 있을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육체에 계실 때도 인간은 반드시 남자 아니면 여자로 되어 있는 관계로 남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여 마지막 아담이 되신 관계로 원래는 아담이 남자가 아니었으나 이후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된 까닭에 이 아담을 기준하여 남자가 되셨다고 바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한 완전한 인간으로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兩性)이셨다 해야 할 것이나(굳이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서 육체로 계실 때는 현실상으로 불가능하므로 부활하신 후에야 그와 같은 상태를 이루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남자로 계신다면 여자에게는 상당히 불합리한 차별 대우일 수밖에 없다. 이런 차별은 영원 세계에서는 필요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으니 폐해져야 마땅하다. 여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때는 여자가 친히 되어주셔야 한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


생식과 번성을 위한 양성 개념은 이제는 종료된 터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 종료된 것이니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오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생육하라, 번성하라"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을 위해 혼자 지내는 것도 있으니 누구든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9:12) 하셨다. 끝이 왔으니까 더 이상 처음의 의미가 적용되지 않음이다. 끝이 왔다고 해서 당장 세상에 어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것은 사정을 보아 신축성 있게 하나님 친히 마무리를 하시게 되어 있다. 다만 시대적 구분으로서 끝이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기자기한 남녀 성애(性愛)가 없으면 천국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 할 것이나 이 아기자기한 맛은 남녀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무릇 '둘이 하나됨'에서 오는 것이니, 남자와 여자 관계도 이 '둘이 하나됨'에서 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새 창조를 입었으므로, 육체로 하나되는 것도 알고 있지만 영으로 하나되는 것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어 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과도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다.


천국에서는 이런 새로운 차원에서의 '둘이 하나 됨'의 낙이 전개되는 것이니, 육체로서의 하나됨보다 더 완벽하고 때문에 우위에 있어 실체가 되므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써 하나됨은 그에 비하면 단지 실체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다. 지금은 이런 하나됨에 대한 실감을 못하는 때이다. 우리가 초자연계 몸이 되어서야 만끽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한 마디로 '너 없이는 나는 못산다'는 것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그 하나됨의 황홀함이야 오죽하리요.


이는 그렇게 둘이 되어 있는 것이 원래 하나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수박 겉 핥기'라고 말하게 된다. 처음부터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인데 이 법칙을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전혀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3위1체의 법칙이 바로 이런 근본으로 말미암아 확립된 만유 존립의 이치이자 창조의 원리이기도 함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풀이하면 말 그대로 '일시(一始) 이원(二元) 삼위(三位) 일체'(一體)다. 만유는 대칭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 법칙(trini homo)의 기기묘묘한 구도이다. '구도(構圖)'라는 말 그대로 하나의 도형(圖形), 도식(圖式)으로 되어 있음이다.  


행복은 없었노라 산너머 하늘 아래 저 멀리 어디에도
하지만 찾았노라 내 본향 에덴낙원 이 마음 속에서도
아버지 품속의 보금자리 사랑의 둥지 만들어 주셨나니
그 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 아주 또 아주 없나니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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