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6일 화요일

★이병철 상성 회장 24개항 질문 (4)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4)



1. 창조신의 실존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


뭉크의 "절규"에서 주인공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보니 남녀 불문의 모든 인생의 실상을 표현하려 함인 것 같다. 옆의 두 행인(行人)은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불명인데 하나는 머리 부분이 분명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은 하체가 그러하니, 말하자면 사람[이웃]은 있으나 없는 것 같고 실상이 아닌 허상처럼 되어 있어 주인공의 철저한 무원(無援) 고립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황혼 속에서 외따로 홀로 떨어져 있음의 공포와 불안과 좌절. 이제 곧 '불확실한 미래'의 깜깜한 밤은 기필코 온다는 전조(前兆)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절규이니 더욱 처절하고 처연(悽然)하다.


모름지기 사람은 현실을 직시할 일이다. 죽음, 고난, 불행의 인간고(人間苦)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된다.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도망 가다 지쳐 커다란 덩치의 몸뚱이는 바깥에 그대로 드러낸 채 작은 머리만 모래 속에 수월하게 들어간다고 박아놓고 잘 숨었다고 안심하는 것과 같은 무의미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래 속에 눈을 묻었으니 포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인데, 잊는다고 또는 인식을 달리 한다고 해서 그 현실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대로 엄연한 현실이다. 특정 종교에서 아무리 "마음 수양"을 한다고 해도 포수의 손이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현실은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


‘죽음과 고통과 불행’의 포수는 다가오고 있다. 정면으로 난국을 돌파하여 타개하는 것이 ‘짐승이 아닌 사람’의 이성(理性)으로서 마땅한 바다. 가능하면 밝고 명랑한 면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사람 목숨이 오직 이생뿐일 때 한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영원한 파멸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올바른 지도가 아니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 된다.


각자가 현재 생사(生死)의 갈래 길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엄숙한 순간도 없다. 어두움을 모르고는 빛이 찾아지지 않는 것처럼 죽음과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고는 생명 길로 접어들 수가 없다. 어두움을 모르면 빛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무턱대고 밝고 명랑하고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라는 것은 그릇되게 안내함이다. 때문에 "지금 웃는 자가 화가 있고 지금 우는 자가 장차 웃을 수 있게 되니 복이 있다" 하신 것이다[눅 6:21,25].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푸라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우중충한 죽음의 측면만 나타내는 그림은 바람직하지 않고 동시에 생명의 밝은 표현도 함께 어울려야 하는 고로 한 쪽으로 이지러진 느낌이 없지 않다. 항상 양면성을 고루 갖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죽음의 양상을 강조하면 동시에 생명의 측면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생명[영원한 생명]이 엄존(儼存)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너무 생명[영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시한부 목숨] 일변도로만 만사를 인식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기피하여 한 쪽으로 기형적으로 쏠려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뭉크의 작품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덮어놓고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있다고 하여 이 세상의 죽음의 현실을 간과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소명(召命)을 따라 제대로 그 보내신 일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양면성의 평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뭉크의 그림을 소개하는 뜻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오직 유일하고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조선(救助船)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선의 의미에 대해 다음 예닐곱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고자 하고 궁금히 여기는 사항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다.


1. 창조신(創造神)의 실존(實存)
2. 인류에게 주시는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3. 삶의 기본 구조
4. 만물의 생성과 존립의 원리[삼위일체의 원리]ㅡ생략
5. 삼위일체 원리를 증명하는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ㅡ생략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ㅡ생략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9. 21세기의 바울 사도





1. 창조주(創造主)의 실존(實存) 




이회장의 질문 내용을 다루던 신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충분히 나타내시면 인간이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양면성에서 그 일면만을 설명하는 것이니, 선악에 따라 엄중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심과[마 3:11,12]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서의 양면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멸(燒滅)하는 불"["a consuming fire"-히 12:29]이심과 동시에 "사랑"[요일 4:8]이시라는 이 양면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주눅든다든가 자유가 박탈당한다는 것은 이 양면에서 전자 쪽을 말함이다.


위압하면 당연히 무조건 굴종(屈從)이므로 선택의 자유는 없다. 그러나 그런 엄위(嚴威)와 동시에 똑같이 평형되게 인자(仁慈)가 있으시니[롬 11:22], 이 경우 너무 자유를 주시는 듯이 되어 하나님마저도 없다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오늘의 실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양면성은 우리 인간으로 치면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의 조화이다. 사랑 앞에서는 자유가 박탈당하기커녕 오히려 최대로 신장(伸張)된다. 왜냐면 사랑의 본질이 자유 의지에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로 계신다고 해서 아버지께서는 엄부(嚴父)와 같으시고 아들께서는 자모(慈母)와 같으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시니, 특성(特性)의 양면성이 아니라 존립(存立)의 양면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특성면에서는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 가운데 아버지 친히 시종일관 동참하셨던 것이다. 즉 아들로 말미암아 나타내지고 "확증된"[5:8] 아버지의 사랑이신 것이다.


그리고고 또 아들을 가리켜 재판장[the Judge]이시라 했으니 이를 다시 표현하여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이라 한 것이다[고후 5:11]. 이 때는 말 그대로 "어린 양의 진노"[계 6:16]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조물주로서의 본질적 특성은 사랑이시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랑으로써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성을 부여하여 만드신 피조물 곧 인간이나 영물[靈物, 에덴낙원에서의 "식물"보다 "동물" 즉 천사류(類)를 말함이다]들은 그 완전히 보장된 자유를 구사함으로써 선악간에 따른 행동이 나타날 것이 필연이므로 질서 확립 차원에서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라는[11:22] 양면성으로 나타나지심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후 차츰 설명이 되겠지만, '그룹'과 '스랍'과 같은 영물들은 "6일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고 그 그룹들 중의 하나가 타락했음을 성경[구약]은 밝히고 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대로 "천사[여기서 말하는 영물]"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기준하여 창조의 순서를 말하면 '아담-영물-여자'로 나간다. 이는 우리의 경우, '마지막 아담-천사-교회'와 같은 순서다. 천사[영물] 창조 후 여자가 지으심 받았으므로 여자의 긴 머리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게"[고전 11:9] 된다).


즉 범죄자에게는 무자비하시고,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법대로 행하여 애초 만유를 창조하신 뜻에 일치하고 부합되게 처신하는 의인에게는 무한 자비하시니 그들에게는 사랑밖에 없으시다. 즉 사랑에는 사랑이요 자비요 은혜이나 그렇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역시 반대 방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심이다. 이것이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마 10:33]이라는 말씀의 뜻이다.


범죄자라도 고의성이 있을 때 그렇게 엄위뿐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므로 즉 피조물 스스로 악을 버릴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관계로 이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사랑과 같은 은혜가 얼마든지 임하시고 풍성하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작정 무한정으로 기다리시거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니, 고의성이 입증될 정도로 끝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가차없는 처단 곧 등을 돌리시는 비극적 사태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잘 설명하고 미리 경고하는 상징적 의미가 바로 "광야 교회"[행 7:38]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행보다. 즉 이집트로부터의 자유 해방의 구원을 받은 숫자가 20세 이상의 남자가 무려 60만 이상이었지만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숫자는 겨우 갈렙과 여호수아뿐이었음을 성경은 경고하여 "그들 다수(多數)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다"[고전 10:5]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의 배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하지 말라"[3:18,19]는 것이다. 자유는 특권과 동시에 책무가 부과되는 양면성을 지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신 까닭은 삶의 요체가 바로 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축되기커녕 버릇없는 아이가 할아버지 수염 잡아당기는 식 정도로 되어 있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가장 먼저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정의부터 내릴 필요가 있다. 단순히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죽었던 것이 이제 생명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애초 창조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여 그 기대하셨던 바를 온전히 이루게 되어 있는 것", 이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사 43:7] 처음부터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함은 하나님은 그 만드신 피조물을 전적으로 위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의미다.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는' 이치를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날부터 결단코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고 오직 피조물을 위하시는 존재로서 당신 자신을 영원히 굳히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를 위하시니 당연히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뜻을 따라 역시 그 동료 피조물을 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나 아담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망령된 생각을 하게 되어 생명[하나님이 생명이신데]에서 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 죄가 도대체 어떤 본질인지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왜 구원을 받으면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된다. 왜 복종이 생명이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상 궤도로부터 이탈을 해 온 인생들인지라 자기중심으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해 왔는데, 이 "구원을 이루라"는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나,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그러므로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 함은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함[고후 5:15]이 아님 즉 자기 구원을 위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개신교]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화석화(化石化)는 이를 분간 못함에 연유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랑"과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이 극(極)과 극의 양면성의 조화를 알아야 하는데 개신교는 후자를 무시해 버린다. 창공에 빛나는 ‘별들[天體]’과 인간 내부의 ‘양심(良心)’이라는 이 두 가지 경이(驚異)와 신비에 찬탄을 금하지 못한다고 평소 말하던 철학자 칸트는 그래서 "요청적 유신론"을 말했지만,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순수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 탓에 무한한 실재로서의 신을 인식할 수 없다" 했으니 이는 모순되는 말이다.


마치, 빛은 입자(粒子, particle)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던 아인슈타인이 보어가 그의 ‘상보성(相補性) 원리’로써 입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다른 성질로서의 파동(波動, wave)이기도 한 빛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고 끝을 맺었던[그러다가 아인슈타인은 죽었으니까] 그런 것과 같다. 신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하여 화합될 수 없는 특수 여건 속에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조화 일치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음을 칸트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 둘의 조화가 수긍되지 않는다고 끝내 고집을 부린 것이다.


무엇이든 편협하게 자기 인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과학적 자세가 아니며 그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지름길이 된다. 오늘날 거의 전부라고 할 많은 사람이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항상 전제하고 이 문제도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정밀한 장치의 시계가 어김없이 시간을 지키며 돌아가듯이, 그 거대하고 광대하고 잡다한 개체로 구성된 우주 천체가 한 치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섭도록 일사불란하게 운행해 나가는 것 자체가 "조물주가 과연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고 입방아를 찧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인간의 양심도 그렇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있는 것으로서, 선(善, 여럿이 사는 사람 삶에 좋은 것)과 악(惡, 반대로 그 나쁜 것)을 엄정하고 정확하게 판별해 주는 작용을 하고 있음이다. 역시 천체의 운행과 같은 일사불란한 엄격한 논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 스스로 악이 좋아서 악을 행하고도 예외 없이 이 양심의 가책은 받는 법이니, 이는 이 기계적 작동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로 인간의 의지(意志)와는 전혀 별개다. 인간 외적(外的)인 요인이 개입하여 인간 안에 이와 같은 분명한 도덕적 기준을 삽입해서 장치해 놓은 것임이 드러난다. 모든 인간에 내재된 이 양심의 소리는 한결같은 통일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중심을 배격하는 '한 몸으로서의 이치'대로 사는 삶의 윤곽을 어김없이 가리키고 있음이다. 이 한 몸의 체제에서는 머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다. 조화 통일을 위한 필연적 요소다.


공동체 의식


칸트가 소위 "요청적(要請的) 유신론(有神論)"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경이’가 어찌 ‘천체’와 ‘양심’으로만 한정되랴. 우리 영혼이 집으로 삼고 있는 신체(身體)를 보라. 우주 천체의 신비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세포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면 천체보다 더 하면 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신묘막측한 구조와 체제다. 공동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한 몸의 체제를 말함이다.


공동체 의식을 집단주의, 국가지상주의, 전제주의로 착각하는 이가 많다. 독재자들이 이런 공동체 의식을 표방했기 때문에 오는 말의 혼잡이다. 그래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을 마치 일제(日帝)의 잔재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독재자들이 그런 명분으로 국민을 기만해 온 탓이다. 공산주의가 이상은 좋으나 여지없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도 기인한다. 공산주의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다 걸고 독재자들이 자기 사욕을 채우는데 악용한 까닭이다.


비단 머리된 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다 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이기주의를 따르므로 그런 공산주의는 국민들의 나태만 조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고 처음부터 태어난 것이다.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감내하는 데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활발해진다. 물론 그 종착역은 삶이 풍요함과 더불어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부조리만 독버섯처럼 피어나 마침내 그 풍성함을 허(虛)와 무[無]로 되돌려 버린다.


그러니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으로 나가지 않는 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 경제도 그 어떤 이상주의도 안심하고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싹수가 노랗다. 희망이 없다. 개개인이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영원한 인간 삶의 법질서로서의 뼈대인 줄 자각하고 그래서 그런 정신으로 나가도 어느 사회든 그렇지 않은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므로 그런 좋은 정신을 알아 주기커녕 도리어 따돌리기를 예사로 한다.


그 좋은 예가 평생 철저히 공동체 의식으로 일관했던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불우함이었다. 임금이 잘 났든 못났든 한 집단, 한 나라의 머리로 인식하고 충성했던 이공에 비해 왕도 조정도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기 한 몸 보신책에만 급급하여 전쟁 중인데도 그를 귀하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전쟁이 지나간 다음에는 시기하는 무리들의 참소(讒訴, a false charge)가 반드시 있을 것을 예상하였으므로 차라리 욕을 당할 바에야 전투 중에 죽기를 자원하여 자기의 생애도 전쟁과 더불어 끝나기를 바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는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 지휘를 할 정도였다.


당연히 총탄은 그의 몸을 겨누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이 세상의 생리요 속성이다. 충무공(忠武公)이라 하면 무인(武人)으로서의 위업만 찬양할 뿐이니 이는 옳은 역사 인식이 아니다. 그의 인간성 곧 생활 철학으로서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그런 결과를 낳았으므로 그가 만일 행정가나 정치인으로 나갔다면 의당히 주공(周公) 단(旦)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주공을 '주단'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이순신 정신을 함양한다는 점에서 '이공'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장(武將)으로서의 용맹과 전략만이 그를 임진란의 구국 영웅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 명량해전이 이를 입증한다. 그의 일기인 난중일기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자체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해둔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사례로써도 이 세상이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요 죄와 죽음의 세상이요 결코 생명의 세계가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공동체로서의 '한 몸' 체제가 생리적으로 어울리지를 않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양심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 수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온 세상이 자기중심 곧 각자가 머리가 되려는 잠재적 욕망 때문이다. 온 세계 인간 세상의 머리는 그 어느 인간이든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되실 수 있다 함이 이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시더라도 강제로 이 한 몸됨을 이룰 수 없으니 왜냐면 사랑으로써야 이룰 수 있는 한 몸의 체제이므로 "자기 부인"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와 상대를 이루는 즉 머리이면 몸, 몸이면 머리를 위함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평균되게 살 만한 삶을 영위하면 살아봄 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세상을 "고해(苦海)"[사실은 성경대로 하면 사해(死海)라고 해야 적절하다]라고 했듯이 절대 다수의 인생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벌써 이것 하나만 해도 답은 나와 있는 것이다. 즉 사람 살 데는 못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소수로서의 은전(恩典)과 은택(恩澤)을 받아 한 세상 편안하게 산다고 해도 이는 우리의 양심이 결코 편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왜냐면 고통 중에 허덕이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까닭이다.


원활한 인간 관계로 상호 간에 아끼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산다고 가정해도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자체가 우리의 영혼과는 달리 영원성을 지니지 못하므로 이 시간 후 어찌 될지도 모르는 지극히 불확실한 실체다.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못한다. 이런 삶을 두고서 마치 본능적인 동물들처럼 눈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정신 팔리고 이런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한 그 근원적 원인을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무관심으로 지낸다는 것은 차라리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단정해도 지나친 곳 판단은 아니리라.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떳떳하게 그야말로 순수한 평안과 즐거움 속에 살자면 모두가 다시 말해 죄를 지어 명백히 허물이 드러난 이들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을 바에야 내 홀로 아무리 유복하게 살아도 그것이 "복"으로 진정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이런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인간이 보통 양심은 이 세상을 절대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자신의 건강한 생명 유지를 목적하여 일사불란하게 마치 시계처럼 어김없이 돌아가는 신체의 구조처럼,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는 머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절대 복종은 자기 중심이어서는 안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가운데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에는 머리로서 우리 모두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칸트의 소위 "요청적 유신론"처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와 같이 창조하심으로써 이런 구조와 체제로 나가지 않으면 삶이 불가능하도록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기 때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즉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데에서 모든 것이 논해질 수 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서는 그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정밀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삼라만상

이런 우리의 신체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몸이 우리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가?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작동시켜서 되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계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아 타고 나는 것이다. 우리의 이지(理智)와 의지(意志)로써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님이다. 우리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 스스로 움직인다. 비단 인간의 신체만 아니다. 생물들이 생존하는 양상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도 정밀한 기계들이 아닌가.


가령 거미 한 마리가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쳐놓는 거미줄 하나만이라도 상상해보라. 먹이를 속이는 그 기지(機智)하며 바람에 날리지 않고 끊기지 않고 큰 먹이의 무게에 아무쪼록 뭉개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일구어놓는 그 건축술에 나타나는 그 지능(知能)을 보라. 인간을 오히려 뺨칠 정도다. 인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도의 능력 과시다. 그런데 이런 천재성을 지닌 거미지만 다리가 긴 어떤 종류는 자기에게 사람이 다가서는 시늉을 해 보이면 위협을 해서 쫓아내기라도 할 듯이 자기 몸을 난폭하게 흔들어 힘을 과시한다.


바로 이것이, 그 천재성이 자기 이지(理智)에서 난 것이 아니라 타(他) 이지(理智)에서 단지 기계적 작용으로 삽입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난 것이라면 "이 인간은 나로서는 불가항력인즉 몸을 흔들어보아야 소용이 없다" 하고 죽은 듯이 잠자코 있을 것이다. 오히려 몸을 흔드는 바람에 자기의 위치가 탄로가 나 사람의 손이 자기를 해코지할 수도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단지 위협적이 것이 오면 무조건 몸을 흔들도록 기계 장치가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만 순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찮은 모기 한 마리도 그렇다. 사람의 피를 빠는 것은 암컷인데 알을 낳는데 필요한 것을 사람의 피 속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필요한 것을 모기란 천재(天才)가 과학 실험을 통해 발견해내기라도 했던가? 그런 것이 거미나 모기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양심이나 우리의 신체 구조와 같이, 똑같은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갖가지 이지적인 작동이 가능하도록 기계적 장치를 만든 '근본 요인'일진대, 그 자체로는 그런 이지[적 현상]들의 여러 갑절이나 되는 아니, 무한정의 이지(理智)를 갖춘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그 정도의 이지력을 발휘하는 존재라면, 그런 동일한 성격의 이지를 나타내는 우리와도 똑같은 존재일 것이니 다시 말해 지, 정, 의를 겸비한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는 안된다.


이 우주 하나만을 두고 보자. 너무 방대하여 우리는 이 우주를 부부적으로만 볼 수 있을 따름이지 전체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은 당연히 이 우주보다 크실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또는 피조물처럼 일정한 형체를 지니셨다고 전제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가. 우주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보겠다는 것인가.


대칭 원리


하나님은 봄으로써 즉 우리의 감각 기관[五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인지하고 확인한다는 말이 옳다. 오관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된다. 즉 우리의 이 오관은 자연계에 속한 것인즉 자연계에 속한 것만 인식할 수 있으니 아주 한정적이다. 이 '자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우리의 이지(理智)이다. 이는 영혼의 분야다. 자연계 생물로서 인간 외에는 이 영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오관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알 수 있다 함이다[롬 1:19,20].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 인간들처럼 일정 형태를 유지하고 계신다 해도 위의 지적처럼 우리가 인지 불가능이고, 그런 '형체[형태]'의 '본질'로서의 영(靈)이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라고 하셨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다"[딤전 6:16] 하였다.


결론은, 하나님은 '실체'이시고 그 창조물[피조물]'은 '형체'인 것이다. 우리가 형체를 보고 실체를 아는 것이니, 실체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보려는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밝힌 것이다. 인간은 "좀 똑똑히 나타내시라"고 요구하지만 그렇게 형체로써 아주 똑똑히 나타내시고 있지 않는가. 그 이상으로는 비록 우리 인간이라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고로 무리한 비이성적 요구다. 오관으로 즉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니 그것은 피조물이 되어 달라 또는 인간으로서 나타나 달라는 것이므로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있게[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형체로 존재하셔서 자기와 같은 인간을 생기게 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제조" 또는 "생산"이지 "창조"가 될 수 없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으로서 별개를 만드시는 것이 '창조'이니, 그래서 이로부터 양면성의 원리[혹은 대립(對立, 對稱) 원리]가 생겨난 것이다.


전혀 상반되는 별개의 것이지만 근원은 하나이니 곧 창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곧 이어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삼위일체의 법칙'이다. 따라서 그 만드신 것을 형상 또는 형체라 한다.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보이실 수 없는 '실체 또는 본질로서의 당신 자신'과는 별개의 것 즉 '볼 수 있는 형체'를 만드시니 이것이 "창조"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자기 고유의 형체가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니 그 만드신 형체들로 이루어진 바 만유(萬有) 안에[in]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through] 계시고 만유 위에[above] 계시는[엡 4:6] 실질, 본질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수 없는 실질과 볼 수 있는 형체와의 대칭[對稱, 相稱]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대칭 관계에 있는 것이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요 또한 자연계와 영계(靈界)이다. 영혼은 볼 수 없다. 영계의 물질[형체임에는 분명한데도] 역시 볼 수 없다. 영혼과 대립되는 육체는 볼 수 있고 영계와 대칭되는 자연계는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영계에 속한 육체라면 얼마든지 영계에 속한 것을 볼 수 있다. 영혼은 육체에 대하여 실질 격이고 육체는 그 형상 격이다. 자연계는 영계에 대해 그 형체 격이고 영계는 자연계에 대해 실체 격이다.


이 이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나타내셨으니, 즉 이전에는 우리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부활하신 후에는 볼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볼 수 없게도 되는 영계(靈界)에 속한 신령(神靈, 고전 15:44)한 몸이셨던 것이다. 아담 이후[왜냐면 아담이 이런 양면의 이중(二重) 구조로 창조되었으나 에덴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그 신령한 몸을 상실한 까닭에] 인류 최초로 이런 특이한 몸을 나타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으로서, 범죄하기 전 상태의 아담의 몸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부활하신 몸을 어떤 때는 친히 나타내심으로써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나 어떤 때 즉 친히 그렇게 나타내시지 않고 숨기려 하실 때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시는 것이었다. 앞에서 "인류"라고 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여기서 당연히 제외된다. 아담은 현재의 우리 인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연계에 국한된 육체이나 아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육체로 한 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 한다.


아담이 원래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기서 간단히 미리 말해 두는 확증의 한 가지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롬 5:12]는 성경의 증언이다. 여기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일치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신령한 죽음"이라는 언급이 전연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영생할 수가 없고, 기껏 살아야 노아 당시까지의 인류의 수명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었던 것이다.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아야 죽지 않게 되는 까닭이다.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면 에덴낙원 자체가 영계라는 뜻인데 그 증거는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그 식물 가운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더더욱이 생명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증거를 가지고도 에덴낙원이 자연계라고 우긴다면 창세기의 기록을 일종의 신화(神話, a myth)로 취급해야만 가능하다. 당신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 또는 설화로 대접하려는가?


이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우리가 보통 "천사"라 부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포함해서]들이 바로 그런 신령한 육체로 되어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이런 피조물 세계에서도 양면성의 이치에 따라 역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로 나누어지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으냐 하는 그 뜻이다.


에덴낙원[영계]의 동식물은 자연계의 동식물과 '실체'와 '형체' 관계가 된다. 사람 역시 그런 형체와 실체가 있으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혼이 실체요 육체가 그 형체다. 단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와 영계를 모두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 양 세계에 똑같이 속한다는 의미에서 한 생명체 안에 그 두 가지 면을 다 갖춘 유일한 존재이니 그래서 영혼[영계에 속한]과 육체[자연계에 속한]의 이중 구조이다.


처음부터 이런 이중 구조로 창조된 까닭에 이 이중 구조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얻는 새 창조에서도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으로 인한 '영혼'[그리스도의 영, 성령]과 '육체'[자연게에 속한 육체로서의 나 자신] 관계로서의 이중 구조가 되는 것이다. 사람만이 이런 자연계와 영계 양면에 속한 이중 구조인 것은 자연계 생물 창조의 정점(頂點)이요 동시에 영계 창조의 시발점(始發點)이 되는 까닭이다. 에덴낙원이 인간[아담]의 영혼이 조성된 다음에 창설된 이유다.


이 우주 전체가 자연계인데 이와 맞먹는 영계라면 영계 역시 그만한 규모로서 단지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뿐으로, 실상 영계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가 없지만 단지 그 실존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에 의하여 만물 만상 만사가 예외없이 양면성의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윤곽 정도는 이미 주역을 통해 알려졌으나, 이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서양에도 일정 부분 사실로서 소개된 것이 겨우 1927년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통해서였으니, 너무 일천(日淺)한 지식이다.


지식이라 할 것도 없으니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만 알면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이미 오래 전부터 밝혀 왔으나 사람들은 이를 확신하지 못해 막연하고 애매 모호하게만 천국이니 천사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니 또는 그룹, 스랍 등으로 해서 인식해 왔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온갖 지식과 능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인류를 기만하려고 드는 때에 이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악령이라고도 하고 마귀(魔鬼, devil)라고도 하는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대칭 원리에 의해서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다. 같은 원리에 의해 인간도 악인과 선인[또는 의인]으로 구분되는 것과 같다. 자연계와 영계가 대립되어 있으므로 자연계에 생물이 있듯이 영계에 역시 생명체가 있어 그 중의 일부가 바로 우리가 천사들이라 하는 부류이고 그 중에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물들은 본시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상세한 설명은 곧 이어 있을 것이다.


대칭[대립]되는 세계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영계(靈界)가 있다는 증거다. 앞에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이런 악령들에 상칭(相稱, 대칭, 대립)하는 존재가 "거룩한 천사"[마 8:38]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靈)"이라는 것은 "신(神)"을 말한다. 그래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성경은 명백히 했다. 거룩한 천사들은 "인간을 섬기라고 보내시는 하나님 부리시는 영들"[히 1:14]이다. 따라서 인생들을 해칠 목적인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 대치되는 선신(善神)들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런 대칭성으로 영(靈)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자율성으로 움직이도록 이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자유를 따라 스스로 택해서 악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 그렇게 된 결과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밝히는 것은, 이 세상은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원수되어 인간을 해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악령들 및 인간을 위하는 천사들의 복합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상호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인간사, 세상사를 논함에서 이들의 존재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거룩한 천사들보다는, 인간사를 주도하고 훼방하는 악령들을 더 주목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지배자요 신으로서 인간을 조종하고 통할하는데 종교쯤이야 못만들어 내겠는가. 종교의 교조(敎祖)들이 무슨 이상(異象)을 보았다, 환상(幻像)을 보고 계시(啓示)를 받았다 하는 따위가 바로 그런 증거다.


이 세상 신의 마수(魔手)에 걸려 들어 홀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흉내 냄이다. 우리는 어느 특정 종교를 비방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종교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 옳지 않음 다시 말해 인류가 구제될 수 없음에도 그 구제 방안이라고 선전하는데 대해서 그 거짓됨을 알리는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진리 아니면 거짓이다. 흑 아니면 백이다. 빛이 아니면 일체가 어두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지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세상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많은 사람이 자기네 종교를 '그 방법'이라고 잘못 믿기에 이에 대해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말하는 것뿐이다. 종교든 무엇이든 세상 전체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죄뿐이니 왜냐면 모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죽은 자요[마 8:22] 따라서 선인도 의인도 없음을[롬 3:10] 가장 먼저 아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원 얻는 첫 단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고로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할"[행 17:30] 것 즉 이런 "악[행]을 버릴"[3:26]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그런즉 이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요 7:7] 잘 알고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임하고 있는 터이다. 올바르게 살아 영생을 취(取)하라는 옳은 소리를 성령 충만하여 외치다가 오히려 군중의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뒤를 따르려는 것이다[행 7:59]. 이를 가리켜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름"[빌 3:10,11]이라 했다.


세상 사람들이여, 내가 믿는 종교가 나의 분신(分身)은 아니지 않은가. 종교가 내가 아니고 내가 종교는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하는 것이라 하기에 즉 내게 관련된 일이라 하여 흥미를 가졌고 때로 심취했을 뿐이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安息日)이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셨듯이[눅 6:5/막 2:27] 종교든 또는 그 무엇이든 사람 곧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자도 동의하실 것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피조물을 만드신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역할이 바로 그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시어 그 피조물들을 위하심에 있는 까닭이다.


단 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을 위주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영물이 있어 당분간은 필요악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 세상 인생들을 시험하는 역할을 하여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기에, 그런 거짓말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범람하고 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상식으로 알아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종교도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일 따름이지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거기에 어긋나는 그 무엇이든 겉으로는 다 나를 위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그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 모든 다른 내용들은 당연히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진리는 하나다. 진리는 우연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선하신 즉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하시기만 하는[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내용이 단 하나이지 여러 갈래로 나타날 리 없다는 사실 역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이 실상(實相)을 토대로 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곧 사람 삶에 대한 '진리'의 골자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시고 죽으신 것이 모두 나를 위하심이라는 것, 이 얼마한 흐뭇한 진실인가, 이 자체가 진리다. 그런즉 진리로서의 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일체의 세상 종교가 진리가 아닌 속임수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세상 종교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여러 내용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들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음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각자로 하여금 다시 출생하게 하시는 즉 새로이 창조하시는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각자와 하나 되는 데에만 있음을 명시하기 때문인데, 이런 내용으로 가르치는 종교는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이른바 기독교라 하더라도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영생만을 탐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가르치는 것을 교리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까닭에 세상 종교로서 일괄 취급되는 것이다.


진정 어느 것이 나를 위하는지 각 사람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어느 것이 합리적인지 그래서 이치에 맞고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택할 일이다. 이것이 '자유'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것이 옳고 네 것이 나쁘다" 즉 "내 종교는 진리이고 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이지적으로 판단하여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지 그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을 수용할 일이다.


성경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과는 달리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퍼뜨리기 때문에 그들을 우리는 종교 취급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야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내세워도 그들이 나타내는 열매가 "아니다" 하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3:8,9/7:16]. 진리와 거짓이 병존함을 인하여 혹자는 이에 대해 혼돈과 혼동을 느낄 것이기에 미리 지적해두는 것이다.


창조주를 입증하는 3운법칙


첫 사람 아담이 영계에서 살다가 이 자연계로 추방되었다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추방되었는지 그런 것을 두고 왈가왈부 논할 필요는 없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되어 있는 우리 처지에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어나는 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알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삼위일체 원리'가 '3운(運)법칙'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모든 과학적 법칙[자연법칙]의 근본이 되고 원류(源流)가 되는 것이 이 삼위일체의 원리요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 trini homo]이다. 과학 좋아하는 사람은 상보성 원리의 닐스 보어가 이미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이에 유의함"이 지혜다. 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인간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시대를 첨단 과학시대라 하니까 하는 애기다.

이 3운 법칙의 의미를 곧 이어 ①, ②, ③, ④, ⑤, ⑥, ⑦로 나누어 설명하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삼위일체의 원리를 확실히 증명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과학적 법칙[일반으로 자연계에 속한 원리들을 말한다]은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그 진실성이 입증되지만, 자연계만 아니라 그 대칭 구조인 영계(靈界)까지 통할하는 이 '삼위일체 법칙'만은 그 특성답게, 자연법칙을 입증하는 수단으로는 증명되지 않고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과의 절충이라 할 수 있는 이 특이한 3운 법칙의 구조의 형성 자체로써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3운법칙은 인간의 한 생애에서 그 활동과 생사(生死)를 관장하는 법칙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실존과 인간 사회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관장(管掌)이 증명되고 있다. 인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들 외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완전히 조종당하여 진리와 진상을 알지 못하고 "눈을 뜨지"[행 26:18]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마지막 때에 이 때를 위하여 준비해 두신 것이 이로써 마침내 드러나진 것이니, 따라서 정히 때는 마지막 때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요 9:4]이 도래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3운법칙이라는 이 과학적 사실이, 과학자로 말미암지 않고 성경을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배운 결과로 알려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니, 이것이 당신에게 함정, 덫,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즉 그리스도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세상에 전파하게 될 막중한 책임을 진 열두 제자 중 단 한 사람도 당시 쟁쟁하던 성경[구약성경]학자들 중에서는 끼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傳道)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는 말씀이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매양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눅 6:26] 하심과 같고,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함과 같으며,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냐"[:18-20] 함과 같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함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우월한 지위와 환경에 있음에 연연하지 말 것은 이런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에 일차적 걸림 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멸망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이런 것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중(掌中)에 있다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눅 4:7]. 매양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 들먹인다"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인간과의 불가분성이 아니라 온갖 나쁜 의미에서 인류는 이들 악령들과 결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글을 세상에 발표함으로써 온 세상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를 받아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22] 하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다. 무신론자, 무종교인,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들에 의해 스데반처럼 돌팔매에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아무 영광도 기대하지 않고 목적하지도 않는다. 오직 북한 교회 형제들과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단지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요 15:20] 구원 얻기로 작정된 이들은 경청할 것이다[행 13:48].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여기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행 20:27]고 자부하기만을 바라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26]고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님과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32] 한 바와 같이, 여기에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실 것을 믿고 "주님과 그 말씀께 모든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살아 계시어 우리 인생들과 성령으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이 인격을 갖추신 분이기에 우리와 같은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을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피조물로서 인격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 역시 우리와 다름없는 인격성을 갖추신 분임을 증명함이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지, 정, 의[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의 측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과 사귈[교제, 교류] 수 있음이다.


이는 다시 무슨 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인생들은 아예 그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병철 회장이 "과연 창조신이 존재하느냐" 물었지만, 하나님은 인생들을 상관하실 때 차별하여 대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실상 그렇게 하시고 있다. 어떤 인생을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경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멸망에 처해지고 아담처럼 죽음에 직면해 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니 구원이 무용지물이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알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인데 구원이 소용 없게 될 바에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또 하나 이유는 구원의 방법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므로 악인들도 얼마든지 그 방식대로 하면 구원될 것인즉 아예 처음부터 악인들을 구원으로부터 차단시키실 수밖에 없음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회개시킴으로써 구원하시려는 것이지 죄 그대로 있어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악인을 구원하시려 함이 아닌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범죄했다고 해서 아담이 죽을 리도 없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영원 멸망에 처해 있을 리도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선례에서 확인되듯이 그런 악인[악인과 죄인을 여기 이 대목에서 구분하는 것이 좋으니, 악인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이고 죄인은 불가항력으로 범죄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들은 죽음과 멸망밖에 태일 몫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들이 '산 자가 되는 구원'의 대상일 리가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구원해보아야 즉 산 자로 만들어보아야 역시 범죄하여 죽고 말 것이니  그런 무의미한 일을 하실 리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 하든가, 무신론자로 자처할 때는 똑똑한 척 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하지만 실제는 하나님 친히 그렇게 무신론자가 되도록 버려두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므로 그를 아예 무신론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그 뜻이다. 일괄적으로 그렇게 하신다기보다 그렇게 얼마든지 하실 수 있고 또 실제가 그렇다는 이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릇 모든 무신론자는 처음부터 그렇게 취급된다는 것은 아니니, 혹 생각이 짧아 잘못 판단하는 것이 대개 인간이므로 그렇게 고집하다가도 나중에 회개하고 믿음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끝내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이들을 지칭함이다. 억지로 "믿으라, 믿으라" 하시지 않는다. 무작정 "나를 알라, 왜 나를 모르느냐" 하시지 않으니, 이상과 같이 성경은 명백하게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


이 내용을 성경은 그대로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들에게 이루었으니 기록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頑惡, 완고하고 거만함)해져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다"[마 13:14,15/요 12:40/행 28:26,27/사 6:9,10]. 이와 같이 차별하시는 이유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임을 명백히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심이지 그런 악인을 의로운 자로 삼으시거나 인정해 주시고자 함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치는 오만한 사람은 아예 하나님께서는 접어 두시고 내치심으로써 상대를 아니하시고 그런 미망과 혼미 가운데 또는 무지(無知) 가운데 그냥 방치해 두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양면성의 이치 그대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버리신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대칭[양면] 원리의 동시성(同時性)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킬 수 있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든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줄 착각하기 쉬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해석을 하게 된다.


"우리의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니 그 중에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고후 4:3,4]이라 했는데, 감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차단한다는 말인가 하겠지만,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벌써 그런 악인들을 버리셨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버리심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생명은 한 몸의 이치에 있으므로 머리를 인정 않음은 한 몸의 이치대로 전개되어 가는 삶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서 이탈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생명의 한 몸 체제에 들어올 수도 없고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인간으로서 '자기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이 아닌 인간이 없는데 그러한 인간을 차별하시면 누가 구원 얻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회개(悔改,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믿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여 그 뜻에 절대 복종함이니 그의 나 위한 죽으심을 통해 내가 그와 하나되어 있는 것을 믿음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를 구성함이다. 사랑의 원리에서 주인[종의 섬김을 받음]과 종[주인을 섬김]의 관계를 형성함이다. 갑과 을의 사랑에서 둘은 '섬기고' '섬김을 받는' 일을 동시에 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섬기시는 위치에 계시는 것이다[눅 22:27].


즉 머리는 몸을 섬기고[위하고] 몸은 머리를 섬기는[위하는] 관계다. 다만 몸이 머리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나 자신을 위해 살던 것을 회개함으로써 머리로서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음을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아니할 때 천하 없는 구원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 이들 및 처음에는 회개했으나 중도에 마음을 바꾸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은 제외되고 탈락되는 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특질이다.


아무리 죄를 태산 같이 지어도 악인이 아닌 사람이 있고, 겉보기에는 성현 군자 같아도 죄인이 아닌 악인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지 '악인'에게 영생을 선물로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구원]을 왜곡(歪曲)되게 세상에 알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 역시 그렇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람마다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리는"[행 3:26] 것이 회개다. 다시 말해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믿으라는 말부터 먼저 하니 순서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면 죄를 회개할 마음부터 우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면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으시기에 만든 까닭이다. 인간[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음[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함-고후 5:15]으로써 이런 죽음과 고난의 불행이 닥쳐져[롬 5:12]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이제 구원 받으려면 당연히 죄를 버려야 한다는 그 뜻이다.


이는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니 당연한 것이다. 과거에는 그 악함을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인데[행 17:29]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앞에서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것은 이 회개하라는 명령에 귀 담아 듣지 않는 경우를 말함이다. 그래서 성경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하였으니, 그런 사람들은 믿지 못하도록 하나님 친히 유도(誘導)하시는 까닭이다.


이는 그만큼 "믿는다"는 것이 삼척동자라도 능히 가능할 정도로 간단명료하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그렇게 간단한 방법대로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속말로 꼼짝없이 그 악인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 뜻이 되는 까닭이다. 차별하실 정도의 악인이라면 그냥 즉결로 심판해 버리시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누가 감히 혀를 놀릴 것인가 마는, "유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리원칙대로 하시는지 그에 대한 증명이 된다. 전지전능을 내세워 마음대로 하심 즉 전단(專斷)하시는 일이 일절 없으시다는 증거다.


끝까지 불복종하여 회개 않고 버티는 악인도 얼마든지 즉결처분하시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누가 감히 버티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된다. "믿는" 사람 믿는다고 해서 축복하시는 것도 간섭이 되지만, 회개하지 않는 이를 회개 않는다고 당장 심판해 버리는 일 역시 강제다. 구원 얻는 일은 철두철미 사랑과 관계된 일이므로[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심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으므로-갈 2:20]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일절 간섭이나 강제가 배제되는 것이다.


가장 첫째 가는 '하나님' 증명


나의 "영생 얻는 믿음"은 바로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나 자신 사랑으로 화답하고 대응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 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일하신다는 것 자체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가장 첫째되는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라 판단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되는 이유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배경에 이와 같이 확고 부동한 영원한 법질서의 확립과 집행이 서릿발처럼 서려 있음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거짓이나 속임수로 꾸며내고 지어내는 것이 한 치도 용납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철두철미 원리원칙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그려낼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거짓말 자체가 원리원칙을 벗어나 자행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고로 그 어떤 강심장도 '양심'과 동의어(同義語, 同意語)로 인정되는 '원리원칙'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지적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함에서 십자가 고난 받음으로써 설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특정 종교 의식만 충실히 따르면 구원 얻어 영생한다고 말을 꾸미지, 범죄의 결과가 죽음이니까 기어이 그 죽음의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들을 위해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는 생리적으로도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인간 구원의 기조(基調)로 삼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발자취를 따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 세상 중에서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도 설정하지 않는 법이다. 왜냐면 거짓말은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이기주의의 발로이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고 고난 받아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해서 약한 자가 되고 한 생애 끝까지 그러해야 된다는 것은 본성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까닭이다.


자기중심 곧 이기주의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강하고[남을 억압해서라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형통하는 것을 목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기주의[사사로운 욕심]나 집단 이기주의[종교의 우월성 또는 종교를 빙자한 세계 제패]나 마찬가지다. 이런 자기중심의 거짓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요 6:35-66]라는 말을 절대로 지어낼 수 없다. 물과 기름 사이다. 자기중심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진리가 아니고 사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기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뿐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진실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자체 증명하는 데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어떤 힘을 빌어 그것을 통해 증명되기를 바라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것은 유동적이고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므로 그런 권위를 유지할 수 없지만, 그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이렇게 확증할 때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일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우리처럼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느니 어떻다느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면 볼 수는 없을지라도 그 음성도 듣고 기타 방법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자연계와 영계(靈界)의 현격한 차이 중 하나다. 그만큼 우리는 불리한 여건 속에 있다 하겠다. 이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우리가 모두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자연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지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지적(知的)이고 이성적인 판단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어 이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표현하면 그 자신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요 3:19,20] 나타내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양심상으로는 끊임없이 단죄를 받으나 그 스스로 "나는 악인이라" 하는 이는, 사마천(司馬遷)이 말하는 바 도척(盜拓)과 같은 인간[공자 앞에서 호언장담한]이 아니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이 인격적 존재를 하나님, 하느님, 천주, 신, 창조주, 조물주, 창조신 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좋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심하여 나타내는 명칭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식별(識別) 또는 구별을 위함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 신약 시대에는 통하고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 시대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어진 적이 없다. 오직 구약 성경이 인용될 때에 한해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 공통으로 나타내신 이름이시니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의 일을 지적하면서 "여호와"라 할 때는 아버지를 가리키심이다. 이런 경우는 이사야 53장에서 엿볼 수 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당시 통해진 까닭이다. 오늘날 하나님이시라 하면 대체적으로 아버지를 지칭함과 같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 적이 없다. 아버지는 단지 그냥 "아버지" 또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롬 15:6]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 피조물임을 인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호칭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우리가 특별히 존경할 만한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생존 인물에 대해서는 각별히 경어를 쓰고 더구나 그 면전에서는 당연히 그러함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우주 만물에 충만하신 영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니 지금 이 자리에도 엄연히 임해 계시는데 어느 존전(尊前)이라고 감히 "신(神)이니 어쩌니" 하겠는가.


조물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의당히 그 이지적(理智的) 피조물인 인생들에게 자기 뜻을 알리실 필요가 있고 그 매개체가 있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혼잡스럽게 여러 종류가 있어서도 안되고 단 하나이어야 함도 사리에 옳다. 그리고 처음부터 말씀하여 오신 것도 당연한 것이니 그래서 인류 역사상 그 정도의 오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자처해 온 것이 있어야 함은 말하나 마나이다.


이로서는 유일하게 구약성경뿐이고 또 여기서 신약성경이 성립되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요건에도 맞는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가가 기원 70년에 이미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 멸망한 후 온 세계 지면에 흩어졌고 "유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갖은 핍박의 표적이 되어 세계의 유랑민(流浪民)으로 떠돌다가 1948년 나라를 재건하기까지 거의 20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디어 내고 불사조(不死鳥)처럼 우뚝 서 있는 사례는 온 세계에서 유일하므로 엄연한 하나의 기적이 되어 있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성경의 권위[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를 증언하는 명백한 증거 중 하나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그렇게 멸망당한 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구약 성경 자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 내지 진실성도 소멸되다시피 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종교는 많다. 그래서 유대 민족의 구약성경만큼은 오래지 않아도 그들나름의 경전(經典)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실이 아니고 다 거짓이란 말인가 할 것이다. 또 거짓이라 한다면 왜 혼잡스럽게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지금까지 세계 각처에 뿌리 내리도록 하시는가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럿이 있을 수 없음이 분명한 까닭에, 성경과 대립 각을 세우고 있을 때 이는 진리일 수 없음은 자명(自明)해진다. 그러면 세상의 종교가 성경과는 대치되어 있는 형국이 되는데, "그리 되면 하나님과 대립해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결론이 되지 않는가" 할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과 적대적인 대등한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우주 만물을 관장하는 자연법칙의 일사불란함을 강조했는데 이 '하나'로서의 통일성은 다름아니라 그 법칙의 주관자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가 아닌 복수 또는 다수라면 그런 통일성을 나타낼 리가 없다. 고로 대립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또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니까 자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인간이 다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게 되어야지 왜 어떤 이는 무신론자이고 오히려 무신론자가 더 많으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앞에서 일부분 설명되어진 바 있다].


피조물의 자유 의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이 인간을 인간 로봇처럼 하나의 기계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주 독립성을 갖춘 자유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성경과 대립되는 종교 경전이 생겨난데 대한 답이다. 자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왜 자유 즉 자유 의지에 따른 자유 선택이 필수이냐 하면, 삶에는 사랑이 그 핵심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요체이기 때문임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 한편 생각할 때, 자유로우니까 좋기는 한데 그 자유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선택이 분명하므로 선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는 대로 악인도 있음이니, 그 악인이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그 악을 통제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만하다. 이것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절대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 대신, 그와 같은 악을 통제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는 결론이 된다.


그 방법이란 다름아닌 ‘미리 아시는’ 능력 즉 예지(豫知, foreknowledge)이다. "특별하신 능력"이라 할 것은 없으니, 우리 인간도 무엇을 제작하거나 제조할 때는 그 성능이 어떠하고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미리 내다보고 이를 전제로 하여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에 그렇다. 만일 부정적인 결과를 내는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만들어 내지를 않을 것이다. 다만 차이는, 우리는 물질에 속한 것을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자유 의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인격성을 지닌 생명체를 만들어내심에 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게는 이와 같은 ‘예지’를 따라 당연히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이 가능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권이 없다면, 예지라는 것은 아예 필요 없이 예정으로만 모든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고로 ‘예지에 의한 예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절대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유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고 성경과 대립되는 무슨 언행이든 완전 자유다. 그래서 성경과 대립되는 종교들이 있는 것이고 무신론자도 얼마든지 있게 된다. 착한 사람도 있고 악인도 얼마든지 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종교를 부추겨 만들어내었다 해도 그 역시 자유다. 앞에서 사물의 양면성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웠거니와 이 역시 그런 양면성의 하나다. 양면성이라는 것은 평형과 균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와 더불어 이와 병행하여 형평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자주 독립성이다. 둘이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완벽하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것은 성경이 거짓말을 하느냐 않느냐, 여기에도 달린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믿고 성경이 그 말씀인 줄 믿어도 오늘날 여러 종교가 있어 많은 사람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마치 무신론자들처럼 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진실성이 입증된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현실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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