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5)
2.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 -----------------------------------------------------------------------------------------------------------------------
이 세상은 '악령' 용(龍)이 "이 세상 왕",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직접 지배하는 세계
실상을 말하면, 성경을 믿는다는 거의 전부의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는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악신[고후 4:4] 또는 악령(惡靈)이 천하 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내게 절하는 누구에게든지 준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소개하고 있다[눅 4:5,6]. 다시 말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 인간을 대적(對敵)하는 자라는 뜻]이 이 '인간 세상'의 왕[王]인 것이다[요 14:30]. 이 인간 세계의 통치자 곧 지배자라는 뜻이다.
앞에서 영원한 이분법(二分法)이라는 말을 했거니와, 우리가 이러한 세상 신의 활동을 인정할진대, 성경과 반대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그 어떤 종교 경전도 그것이 아무리 최고의 선을 표방하고 있어도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선'을 주장해도 실제는 '위선'인 것이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머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로 입증할 수 있으니, 그 하나뿐인 머리와 '다른 말'을 할 때는 무조건하고 진실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상 그렇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부터 다시 따지고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반드시 인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계시는 법이요 그 말씀은 일정 형태를 지니면서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것이어야 하므로, 이에 반하여 각기 다른 내용으로 진리인 양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은 거짓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이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하에 그렇게 됨은 쉽사리 결론 지을 수 있음이다.
세상 영광과 권세를 보이며 "이것을 네게 주겠다"[눅 4:7] 하는 것 역시 대단한 속임수다. 그가 실제 줄 수 없는데도 준다고 하니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시적 생명인데, 그래서 그런 세상 권세니 영광이니 하는 것도 그런 하루살이 같은 인생들이 연쇄적으로 엮여져 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는 것을 간신히 얽어놓은 것에 불과한데, 마치 인간이 영원한 생명체인 것처럼 그래서 그런 것들이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과시하고 있으니 그런 것이 바로 흉악한 속임수라는 뜻이다.
이런 나약하기 짝이 없고 내일도 그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고난 받아 죽어지는 의미밖에 없는 처량하고 초라한 몰골인즉, 단 오늘만 목숨을 지탱하더라도 떳떳이 당당하게 옳은 도리를 따라 올바른 일을 하다가 그 때문에 그렇게 고난 받고 죽는 것 외에 이렇다 할 가치가 전연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현재 온 천하를 속이고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계 12:9/고후 4:4].
떳떳하고 당당한 일이라는 것은, 인간 삶이 본시부터 '한 몸'을 이룬 공동체적 성격에 있는데 여기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하는 것 즉 그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여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을 말함이니 이 외에 또 무엇이 있을 수가 없다. 한 몸 체제에서 자기 이웃[상대]을 위하는 것은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엡 5:28].
자기를 위하되 직접 '나' 자신을 위하는 쪽으로 향하지 않고,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웃에게 방향을 틀어[고후 5:15] 그래서 그 방향이 최종적으로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지게 함으로써, 각자가 전체 '우리' 모두를 위하는 삶의 지혜를 말함이다. 무한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양팔이 있다고 가상한다면 그 두 발을 자기 쪽으로 뻗지 않고 나 외의 모든 이웃 그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도 뻗음으로써 이를 다포용한 다음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 '한 몸'되고 '하나됨'의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으로서, 처음부터 자기를 중심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팔은 자기 쪽이 아닌 상대방 쪽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자기 부인"[눅 9:23]이라 한다. 이렇게 더 큰 것을 멀리 내다보는 지혜 없이 눈 앞의 이익만을 챙겨 무조건 자기 쪽으로 팔을 뻗는 것만 고집하니, 자기 이외의 남의 것을 샘내고 욕심 내고 빼앗으려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선수(先手)를 쳐 서로 싸우고 그 중의 하나가 독재(獨裁)를 하고 남을 억압하고 그러면 상대는 절치부심하여 복수하기를 벼르다가 뒤집어엎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난장판이 이 세상인 것이다.
자기 쪽으로 뻗는 팔은 상대방중심의 '사랑'의 팔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사사로운 욕심'의 팔이다. 세상은 모두가 이런 자기중심 일색의 체제로 되어 있다. 남이 그러하니 나도 자연 그리 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도리어 잃는다.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요 12:25] 하신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정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무하고 무의미하기만 한 것을 마치 대단하고 의미 있는 양 슬쩍 보여 주며, "이것을 네게 주겠다"고 유혹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하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우리 인간의 대표[하나님이시지만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 되셨으니까]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물러가라!"는 호통으로 그 가증스러움을 통렬히 꾸짖어 물리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니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거룩한 천사든 아담 손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회장과 같은 진정한 구도자에게는 결정적인 해답이 될 수 있기에, 여기서 밝히거니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는 그 '자체 증명'에 있다. 외부적인 그 무엇 예컨대 과학적인 어떤 증거가 있어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따위에 성경은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답게 그 자체의 내용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물론 각자 스스로 성경을 반드시 읽는 데에서만 이는 확인될 수 있는 일이나,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이므로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없음과 같이 아무나 그런 자체 증명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여기서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이지만, "이 한 가지만 해도 그 자체 증명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예로 든다면, 무릇 거짓말, 속임수, 꾸며대고 지어내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반드시 현실 세계를 겨냥하고 목표하는 것이지 미래를 두고 그런 거짓을 말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거짓말의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 그 거짓이 탄로 나기 때문에 '당장의 이해 관계' 또는 '이 세상에서의 득실'을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현세의 어떤 이득(利得)을 위함이 모든 속이는 것, 이 세상 모든 거짓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면 반론할 것이다, "불교 경전은 그러면 세상 이득을 목적하는가? 오히려 인간사 세상사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니 욕심을 버리라고 역설하지 않는가?". 그러면 이에 대해 우리가 반문하는 것은, "불교도들이 이 세상에서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도 한결같이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 미리 경고한 적이 있던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자 또는 지배자[王, 임금-요 14:30]가 악신(惡神)으로서 인생들을 노예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 적이 있던가?" 하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또 그 답이기도 하다.
진실과 거짓의 공방(攻防)
원래 첫 사람 아담이 그러했다. 에덴낙원에서 영물(靈物)들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이들 영물들이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2:18,19].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이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아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지식면으로는 영물들의 보좌를 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머리 역할을 한 것이니, 영계의 모든 존재의 시작점(始作點)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에덴 낙원이라는 영계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여타의 지식은 원래부터 영계로서의 에덴낙원 출생인 영물들에게 뒤졌지만, 이는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 우열(優劣)을 다투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의 배려에서 나온 것] 그 아래 자연계에 속하든 영계에 속하든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통할하는 위치였었다. 그러므로 아담은[당시의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게 말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3:1-5]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대응하여 꾸짖었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르는 결과가 되니 오늘날과 같이 모든 인간이 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들게 되는 실마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추종하는 자는 마땅히 그 지배 아래 들게 되어 있음이다.
이와 대조되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대면하여[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시험하는 때에만 접근한다] 시종일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셨으니, 곧 "기록되기를, '주(主)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 하였다" 하신 것이다[눅 4:8].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한 몸 체제를 이룬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으로 친다면 '여자[처음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그와 같이 물리쳤어야 마땅했던]'의 위치가 오늘날 교회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하고 물리치고 제압할[약 4:7]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엡 6:17] 이 외에는 없고 이 외에 달리 무엇을 사용하든 그것은 필패(必敗)의 원인이 됨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렇게 물리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조종하는 바 이 세상에서의 온갖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핍박과 탄압[마 10:28]을 그와 같이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그렇게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번번이 물리치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손에 잡혀 죽으신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심지어는 얼마든지 우리 생명까지 끊어놓을 수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할[욥 2:6]은 시험하는 자로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시험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뜻을 따라[즉 악인(끝내 죄를 회개할 의사가 없는)을 걸러내고 추려내고 솎아내시는-마 13:49]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고난이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그리스도 교회의 수난사(受難史)인 것이다. 죽음의 위협을 가하고 실지로 이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권력이 바로 이런 시험 차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철통 같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완전 해방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가 시험하는 것이다. 다시 자기 손아귀 안에 움켜쥐려는 시도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실물[실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공기를 우리는 보지 못하나 그 존재는 인정함과 같다. 앞에서 사물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을 했듯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이 보이는 자연계에서의 가시적인 생명체와 대립되는 존재다. 첫 사람 아담이 이 양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만 국한되어 존재하는 자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되어진 불가피한 현상임을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때문에 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음으로 양으로 인간 생활과 불가분성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를 제쳐놓고는 거의 어떤 일도 논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진실과 거짓의 대립 국면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도 첫 사람 아담을 속인 것처럼 현재도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로서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논함에는 그가 쳐놓은 함정과 그물로서의 거짓 것도 부득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모든 거짓의 장본이요 배경이 되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사탄"이라고도 하나 성경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따름]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금방 온 세계에 동영상과 함께 퍼뜨려지는 상황이므로, 소위 ufo식의 이런 모든 기괴한 것들의 배후, 배경을 밝힐 필요가 있는데, 이런 것은 모두 악한 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티다. 악령들의 짓거리인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 장악하고 인생들을 철저히 노예화하고 있는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음이니, 과거에는 이것이 강력히 제지되었으나 지금은 때가 되어 그 제지력이 해제된 까닭이다[살후 2:7].
고로 인간사, 세상사로서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연관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때문에 무조건 반대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 하고 "악령" 탓으로 돌리는 상투 용어 또는 수법이라 오해할까 하여, 미리부터 이 실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좌지우지하니 그대로 사실을 밝히는 것이 도리이지 억지로 우회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요 16:11/14:30]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인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악령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실정은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악령들과 인간들[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아] 간의 전쟁 양상의 무대가 이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 친히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우리 인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의 선봉에 서 계시는 것이니 이로써 우리는 영적(靈的)인 군대(軍隊)를 구성하고 있는 형태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전장(戰場)인 것이다.
악령들이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니[그러나, '전적으로 볼 수 없는' 시대는 이제는 지났으니 ufo식의 형태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전투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완전무장해 있을 것을 경고하고[엡 6:11-18]. 군인으로서의 고난 받음을 당연지사로 가르친다[딤후 2:3]. 군인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4]. 전투가 분명하되 우리의 싸움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임을 매양 역설하여 방심하지 않도록 경계심을 고취시킨다[고후 10:3-6].
단 유의할 것은 전쟁 양상이라는 것은 그의 지배력을 벗어나 있는[구원을 받음으로써]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일 뿐, 그 나머지 인생들은 철저히 그의 관장 아래 놓여 있으므로 완전히 그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노예로서의 처지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키는 대로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들도 애초에는 그 장중에 놓여 억압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가리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함"[눅 4:18]이라 하였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포로되어 있던 자[비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만 아니라 죄의 육신에 얽매여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롬 6:6]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하여 자유해방이 되면 당연히 이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맞서는 자유의 전사(自由戰士)가 되는 것이다. 이 전쟁은 일진일퇴의 모습이라기보다 초전(初戰)과 종반전의 구별이 뚜렷하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처음에는 발뒤꿈치를 물렸다가 나중에 그 머리를 박살 내는 그런 상황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창 3:15].
그러므로 시초에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 악령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탄압의 표적과 그 대상이 됨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은 현세에서의 삶의 낙 일체를 부정하고 있음은 당연하니, 왜냐면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역에 속해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삶의 낙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세의 창달을 꾀하지 않는다는 의미만 아니라, 악령이 관장하고 있는 이 세상 자체와 적대적(敵對的)이 됨을 인하여 그로 인해 받는 환난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영적(靈的)인 전쟁이므로 이 세상의 전쟁처럼 무력으로써 정복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福音, 복된 소식, 희소식)과의 차이
세상 어느 종교도 이 세상과 적대적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은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이 또한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과의 차이, 따라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의 가장 확실한 차별이 된다. 물론 이 '세상 종교' 중에는 "기독교"도 포함된다. 성경대로 믿으면 그들은 결코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데도 현저히 세상 삶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니 그렇게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말하나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악령(惡靈)이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 통치자요 신(神)이라는 사실을 성경만이 밝히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마왕(魔王)은 '신(神)'인데 우리는 '육체'에 불과하니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바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것을 성경은 예고하고 이에 대비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 어느 종교도 이런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거짓일 수 없고 진실일 수밖에 없는 가장 ‘확정적인 증거[내용상으로 나타나는 자체 증명]’ 가운데 하나가 된다. 우리 각 사람은 한 국가에 소속되어 국법에 매여 있다. 한 국가의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한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살리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및 통치와는 별개 문제다. 이 세상은 말하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다. 왜냐면 우리 인간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악령의 소행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철저한 제재를 받는 것이야 당연하다[욥 1:12]. 이 경우, 긴 안목에서 그렇다는 뜻이고, 바로 코앞의 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런 코앞의 권력을 악령이 행사한다는 그 뜻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직접 지배하는 권력과 적대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는가, 현세적인 이욕(利慾)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하면 당연히 '없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에서 현세적인 아무 욕구도 취할 수 없는 데에서, 성경을 일부러 거짓으로 지어내고 꾸며대고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만을 말해도 믿을까 말까 하는 판에 거짓말을 한다고 믿겠는가. 진실이기 때문에 믿으려고 할 사람까지도 오히려 그런 거짓말 때문에[만일 성경이 거짓말이거나 거짓이 섞여 있거나 할 때] 믿지 않을 것이니, 무슨 이유로 감히 거짓말을[성경이] 지어내겠는가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정체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요한 계시록(啓示錄)에 나오는 대로, 4 생물, 24장로 및 그 수가 "천천 만만"인 천사들을 지으셨다[계 5:11]. 먼저 "그룹"[cherub]과 "스랍"[seraph]을 지으셨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다음에 천사[영물(靈物), 자연계의 각종 짐승들과 대칭을 이루는]들을 지으셨는데, 인간을 위해 지으신 이런 영물[천사]들 가운데에서 그들 스스로의 선택[악을 좋아하든 선을 좋아하든 자기 자유에서]에 의해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구분되어졌으니 인간 중에서도 의인(義人, 善人)과 악인이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악령들 중의 우두머리 격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 인간[첫 사람 아담]을 거짓말로 속여 죄를 짓게 함으로써 인간을 죽음에 빠뜨리게 하여 그 결과로 오늘날의 인간 불행[죽음을 위시한]이 초래되었고, 또한 그 여파로 현재 이 인간 세상에서 그 지배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영물들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으나 악령의 말을 따라 범죄함으로써[창 3:1-6] 인간[아담]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향[지배권]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빚어졌으니 말하자면 세상이 뒤집혀진 꼴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하면 일종의 왕위(王位) 찬탈이라 할까. 이는 인간의 위치를 탐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자기의 범죄 행위에다 끌어들임으로써 자기와 한 패거리가 되게 하여 자기 처지를 방어하고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 손위인 인간을 시기하여 미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이 악령[및 그 영물 일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의 악연이 맺어지고[:15] 인류 역사로 수놓아진 이 세상은 그 전쟁마당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즉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전쟁 터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성경이 경고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직시(直視)이다. 성경 외에 그 어느 무엇도 이 사실을 인류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니,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전적으로 이 악령의 지배 아래에 있으므로 사실대로 알린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좌시하고 방치해 둘 리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손을 못대어 그런 것이다.
이 전쟁 양상(樣相)은,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 천하무적의 하나님의 아들들[구원 받은 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과 영물들의 일부[즉 거룩한 천사들을 제외한] 곧 악령들과의 '힘 겨루기'이므로, 쌍방이 서로 상대[호적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위치가 일시 "약한 자"[고후 13:4]로 격하되어 오직 그 신념, 결의가 얼마나 공고하여 요지부동인가 하는 그 여부로만 그 강약(强弱)과 승패가 저울질되는 터라, 그래서도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의인(義人)들로서 받는 고난, 고통, 불이익 등은 필연이요 필수라 하는 것이다.
우리[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의인(義人)이 되어 있는]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이 신념에서 악령들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악령들로 하여금 악령들이 되게 한 그 원인[범죄]에 절대로 보조를 맞추지 않고 그와 항상 반대로 나가는 것이 우리의 당당한 깃발[旗幟]이므로 곧 우리의 강함이요 승리가 됨은 당연하다. 즉 한 몸의 이치에서 자기 부인[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마 22:36-40]으로 일관되게 나가고 자기 중심[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을 한사코 배격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요 승전(勝戰)의 무기(武器)인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어 그야말로 그의 노예가 되어 있으나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이들은 천사의 호위 속에서 막강하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맞수가 되어 악령들과의 전쟁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 기록에서 그리스도께 관련되어 천사들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친히 구원 얻은 우리 모두의 '대표'이시므로 이는 곧 나와 관련된 천사들의 활동을 상징하여 나타내는 의미이다[히 1:1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使者, 천사)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자기 자신 사람이심을 그렇게 표현하여 강조하셨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요 1:51] 하심도 그 뜻이요. "광야(曠野, 荒野)에서 40일을 계셔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 들었다"[막 1:13/마 4:11] 함도 그러하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역시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눅 22:43] 하였다.
"삼가 이 소자들[小子. little ones]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저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마 18:10] 하심 그대로다.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내[구원 받은] 안에 계신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있는 나의 육체 주위로 막강한 천사들이 둘러 싸고 있으니,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 예언자) 엘리사를 불 말(火馬)과 불 병거(火兵車, chariots of fire)가 산에 가득하여 둘렀던 사실 역시 그러하다[왕하 6:17].
"불"은 영(靈)의 속성을 말한다. 즉 영물(靈物)들이니, 천사들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군대들이 그와 같이 엘리사를 둘러쌌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주님을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陣)치고 저를 건진다"[시 34:7] 하였다. 악령들은 이러한 천사들과 맞수이다. 인간[아담]은 애초 이런 영물들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위치였었다. 그러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속아 죽음에 이른 뒤로는 '죽은 자'로서의 인간이므로 영물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으나 "거룩한[악령들과 달리 범죄하지 않은] 천사"들만은 사람을 보좌하는 그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여 그렇게 "사람을 섬기고"[히 1:14] 있음이다.
그러나 이들 천사들은 악령들과 직접적으로는 아무 원수진 것이 없다. 오직 우리들 사람을 중심하여 사람을 위해 그렇게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고[단 10:13-"바사국군(國君, the kings of Persia)"이 이런 악령들을 가리킨다] 지금은 악령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상태다. "하늘에서의 전쟁"[계 12:7]이 끝났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설명이 될 것이다. 요즘 인터넷 상에 보면 소위 UFO들의 현상을 보이며 "이런 초월 문명의 존재들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는 이 우주에서 결코 외롭지 않다"는 표제를 내걸고 있는데 너무 어리석고도 유치한 소리다.
자기를 속박하는 악령들을 가리키며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 성경을 믿지 않음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무지의 현실이다.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와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완벽한 "결코 외롭지 않은" 그래서 든든하고 넉넉하고 푸짐하고 느긋한 복된 사람 삶의 가치를 누릴 것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고후 5:20] 호소하는 일이다. 물론 "외롭지" 않다. 그러나 이 이웃이 우호(友好)적인 선린(善隣)이 아니라 시초부터 인간에게 적대적인 악령들인 것이다.
이 세상 곧 자연계 자체가 홀로[홑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겹[重疊]으로 되어 있으니 곧 영계(靈界)와 짝을 이루어 병존해 있음이다. 따라서 보이는 인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음이니 단 그들과 사이 좋게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억압당하고만 있는 이 비극적인 냉엄한 현실에 가장 우선적으로 눈떠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악령들과 대립되는 거룩한 천사들이 대등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과 이웃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향면에서 그들 악령들에 비해 못하고 덜한 것은 없으나 거리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악령들은 근접하여 우리와 이웃하고 있고 거룩한 천사들은 비교적 원거리로 격하고 있다는 차이뿐이다[단 9:21/10:13]. 그러나 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 이후부터의 활동에 천사가 등장하여 출현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요 1:51/눅 4:39/22:43/마 28:3/행 1:10]. 이들은 영계의 "각종 짐승들"[창 2:19]이다.
그리고 인간[아담]은 영계의 특정 식물의 열매를 먹은 결과로 이런 육체가 되어 버려 그런 악령들이 우리에게는 신(神)처럼 현재는 되어 있는 것이다. "짐승"들이라 함은 그들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19]. 아담은 원래 이들 신(神)들 위에 군림해 있는 신(神)이었던 것이다. "신"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으니, 이들 영물들과 마찬가지의 신령한 몸으로 그들 위에 위치하여 그들을 비롯한 당시의 온 세상을 "다스리고"[1:26]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가리켜 성경이 "우리가 신의 성품(性品)에 참예한다"[밷후 1:4] 함과 같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고후 4:4]이니까 신령한 몸을 입은 인간이 신이라고 해서 괴이하게 여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이와 같이 신[영]으로 창조되었지만 신의 세계[또는 영계]의 식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서 이 모양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러한 비극적 실상과 위치를 우리가 미워하고 슬퍼하는 것이야 당연하니 그래서 이 세상 삶[의 낙]을 혐오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그 낙을 즐기려는 것은 한낱 짐승[자연계에 속한]으로 남기를 바라는 그래서 이 썩는 육체로서의 삶으로써만 자기 생애가 끝나기를 바람과 같은 "미친 마음"[전 9:3]이기 때문이다. "이제 웃는 자에게 화가 있고 이제 우는 자는 장차 웃을 것이라" 하심이 이 때문이다[눅 6:21,25].
따라서 이 세상과 이웃하여 한 세상[그나마도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뿐이지만]의 찰라 같은 시간을 두고 웃고 즐기는 쪽을 선호할진대, 이 세상 신(神)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운명을 같이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다. 그렇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과 스스로를 차별화시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스스로 만들어 격리할 때 그래서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때 악령들이 들어가는 곳과는 영원히 분리되는 생명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예수님 사랑[JESUS LOVES YOU]", "예수님 구원[JESUS SAVES]" 등과 같은 표어를 좋아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것이 결코 인생을 구원하지 못하고 되레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오직 목적인 것처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이 악령이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회개하지 않는 한 믿음도 사랑도 구원도 모두 헛구호이고 빈말이고 속이는 일일 뿐이다. 믿어 구원 얻는 것은 반드시 "회개"를 전제한다[행 2:38]. 즉 "악행을 버려야"[3:26] 하는 것이다. 그렇게 회개하여 악을 버릴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위의 구호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는 회개하라는 말은 없이 무조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으면 영생한다는 의미만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이어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티를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되면 그 추악함과 가증스러움에 메스꺼움을 금치 못한다. 소위 "UFO"니 하는 그들의 짓거리가 모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지 흉물스러운 것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 자신도 그 마음 쓰는 것이 악해서 그렇지 하나님 애초 지으신 대로의 외양(外樣)은 아름다운 것이다. 마귀라고 해서 흉악스럽게 생긴 마물(魔物)이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악령들이나 악인들이 만들어내고 꾸미는 것은 그 악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흉물스럽고 메스꺼운 면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이 그 마음의 쌓은 악에서 악한 말과 행동을 분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 12:35]. 그래서 상대적으로 "거룩함"[聖, holiness]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에덴낙원 등에 관한 기타 상세한 설명도 추후에 있게 될 것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부연해 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기록되어 있는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고전 4:6/15:54]. 기록은 후대에까지 남겨지는 증거로서 가장 안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반드시 "기록되었기를, 기록하기를"이란 말로써 시작함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라"[요 12:48]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식언(食言)하심이 없고 한번 말씀하시면 그것이 곧 법이 된다.
이 기록의 중요성은 모세가 시내 산[Mt. Sinai]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 친히 돌 판에다 쓰신 것으로서[사람과 상관하시는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천사를 통해서다] 받은 사실로도 확증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말씀[약속]의 불변성을 말하고 확실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한번 내신 말씀이나 이루어진 모든 내용은 향후 일절 변경됨이 없음을 확증하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나타나고 그리고 한번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충분하며, 새로이 그 어떤 것도 첨가되거나 삭제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위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무한하신 사랑과 자정(慈情)이 담겨 있으니,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차마 우리를 심판하시지 못하시는 심정이시더라도 그 말씀은 영원한 원리원칙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법질서 차원에서 너희가 조처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함유함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요일 4:8]이심과 동시에 "소멸(燒滅)하는 불"["a consuming fire"-히 12:29]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즉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그 엄정, 엄격하심을 나타내심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형용할 수 없는 어버이 자정을 피력하심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시 2:11] 함과 같고, "두려움과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 함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2:12/4:4]고 거듭거듭 강조함과 같다. 그러므로 원리원칙[하나님은 그 원리원칙의 근원이시고 근본이시니]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항상 평안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초대(初代) 교회가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로 진행하였다"[행 9:31] 함과 같다. 만사를 우리는 양면성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이 양면성으로 이해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예가,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간[왜냐면 그렇게 교회에 경고했고 또한 교회에 대하여 자기를 본받으라 했으니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 남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없으므로] 표본 인물인데도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함이니 이것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바"[롬 9:1-3]라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자기의 구원밖에는 관심을 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임이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 말씀이 유대인 지배 권력 계층의 비위를 상하게 했으므로 항상 그를 잡고자 했으나 번번이 그에게 손을 대는 일을 못하고 그를 포박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밝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습니다"[요 7:44-46] 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종교 경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이 기록한 서책 가운데 성경처럼 그렇게 말하는 내용은 없는 것이다. 내용만 아니라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로한 사람들은 기억력 증진을 위한 시도로 무엇을 외우기를 힘쓰는 방법이 있는데 이 성경 구절 외우기를 한다면 가장 유익한 방법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만 발췌하여 그렇게 외우도록 하면 좋다.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성경이 진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인간이 지어낸 거짓말 또는 속임수라는 뜻이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에는 목적이 있다. 무조건 모든 사람이 그 거짓을 믿게 함에 있다. 그 목적이 선하고 악하고는 논외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는 한 가지만 해도 성경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편견과 무지(無知)에 사로잡혀 있는 졸렬하고 조잡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무엇이든 비판하는 경우에는 그 대상을 알고 비판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대상의 옹호자들 이상으로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성경이 그런 거짓말과 속임수와는 천만리 밖이라는 증거를 그 자체 내용 중에 확고히 간직하고 있음을 가리켜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성경은 처음부터 성경의 핵심 사실을 과연 누가 믿었느냐, 믿느냐, 믿겠느냐 하는 의문사(疑問詞)로부터 시작하는 데에 있다. 즉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실을 예언하면서 이사야서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던가("Who has believed our report[message]?)"[사 53:1] 한 것이다.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것이 신약의 다음 사실이니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대중들 앞에서 가르치실 때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그 이유를 가리켜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낼 것이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무릇 있는 이는 받아 넉넉하게 되나 없는 이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누구든지 있는 이는 받겠고 없는 이는 그 있는 것까지(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 나라[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되어 모든 것을 비유로 하는 것이니,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막 4:12,25/마 13:12,13].
즉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셨다"[마 13:14,15] 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이 전파되고 그들이 믿는 것은 사실이나 가난한 이라면 모두가 다 구원 얻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가난한 이건 부한 이건, 강한 이건 약한 이건 일반적으로 절대 다수가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일반 대중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이 때문이다. 오직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여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개별적으로 그 말씀의 뜻을 여쭐 때 자세히 풀어 설명하신 것이다. 이로 보아서도 누구든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만 진리의 문이 열리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자에게는 평생 가야 진리에 들어올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진리 말씀도 성령께서 친히 각 개인에게 가르치신다는 말씀대로 직접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에만 한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인위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에만 의존하고 전혀 그런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없을 때 평생 가야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성경 읽는 것은 외면한 채 남들이 써놓은 신학 서적만 뒤적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성경의 핵심이 되는 대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고 그 이끄심을 받지 않으면 아무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 사실이 바로 그러하다[요 6:44,65]. 그동안 그리스도를 따랐던 많은 제자들이 중도에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要諦)를 듣고는 왕창 떨어져 나간 것이다. 12제자들에게까지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실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서든 혹은 지역에서든 믿는 자는 항상 소수 때로는 극소수를 이루는 것이다. 절대로 다수가 되어 있는 역사가 없기 때문에 "적은 무리들아[Little flock],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생들에게 "회개하기를 명령하시는데"[행 17:30]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 하심과 같다. "너 바로 네가 이 너의 날을 당하여 네 평안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눅 19:42] 하시며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던 것과 같다. 회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함을 버리기를"[행 3:26]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이는 이전처럼 자기중심 그대로 나가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이는 몸과 머리로 한 몸 체제를 이루고 있는 생명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므로 그 선택한 대로 죽음을 거두는 결과밖에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려고"[눅 5:32]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람이 되시어 오셨으니 죄를 회개할 의지 없이 악인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욕심만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걸러내시고 솎아내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그러한 성향을 나타낸 영물[천사]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진 상황에 있고 그 영향을 받아 자기중심으로 나간 아담 역시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렸으므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시다.
따라서 이런 악령들과 아담의 전철을 밟고자 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결단코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시는 것이 바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심이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셨고 실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일정 기간을 지나면 자기의 자기중심을 고집함으로써 그 곁을 떠나간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악함을 버림인데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는 악을 버렸으나 중도에 다시 자기중심으로 선회하게 되면 악함을 버리지 않음이 된다. 개가 그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그 씻었던 몸으로 다시 진창에 드러누운 것이다[벧후 2:22]. 그리고 이러한 숫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함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는 사실로 나타나고 일반 대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도 비유로만 말씀하심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심은 일종의 경고라고도 할 수 있으니 즉 스스로 찾고 구하고 두드릴 정도로 진리를 알기 원하지 않는 한 그래서 자기중심의 폐해를 알고 선과 의를 따라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이는 절대로 영생에 들어올 수 없음을 나타냄이다.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고로 "들어가기를 힘써야"[눅 13:24] 함을 경계하심이다. 천국은 침입을 당하고 침입하여 스스로 빼앗아 차지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심도 같은 의미다[눅 16:16/마 11:12]. 그런즉 거짓말로 속여 많은 사람 가능하면 전부를 거짓말로 속여 믿게 한다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도 모른 채 비판을 위한 비판이 성경에 대한 모든 비판인 것이다. 이런 내용을 가진 성경이 무엇에 쓰려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속이기까지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하겠는가. 강제로 끌어 모으지도 않지만 스스로 믿음으로 들어온 경우라도 자기 스스로 나가게 되어 있다[요 6:64].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사람들의 마음 눈을 가릴 수가 있는 것이다[살후 2:11,12/고후 4:4].
그러므로 성경을 거짓말로 지어내어 만든 꾸민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멀쩡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당치도 않는 논리로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게 또한 성경을 진정으로 분설해보지도 않고서 기분 내키는 대로 성경을 거짓말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 결코 이성적인 인간 스스로에서 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위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소위 국교로 삼는 나라들 역시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행하는 처사다. 오랜 역사의 전통과 권위를 입에 답지 말 일이다.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 역사가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로 군림해 있다. 따라서 인간을 속이고 거짓말로써 속여 인류를 멸망시키려 나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로 말하면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소위 "역사와 전통"보다 더 오래고, 그런 오랜 역사를 "권위"로 삼는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보다 더 크고 오래 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의 하나되어 있는 한 몸 관계로서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의지가 없는 이는 아예 영생을 바라다보지도 말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요 가르치는 요지다. 그리고 이런 성격으로 볼 때 절대 다수가 믿지 않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세상은 믿지 않는 이들의 세계인즉 항상 외톨로 따돌림을 받아 온갖 수모와 고난과 죽음까지도 각오하지 않는 한 영생에 들어올 수 없음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눅 9:23]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사형 받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이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봉자들은 거의 전부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생명으로 들어가건만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는다. 진상을 밝혀주어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현상을 지적하시어 "이 세대[아담 이후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눅 7:31,32]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양면성의 원리다. 만상은 짝의 개념으로 되어 있고 우리는 만사를 이 양면성의 원리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했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함과 같이 "평안"과 "기쁨"[요 14:27/15:11/16:33]이 넘쳐 나는 것은 양면 중의 일면일 따름이다.
왜냐면 그 다른 면이 있으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5-27] 하였고 이렇게 경고한 즉시 바울 사도는 옛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울로 삼으라 한 것이다[10:1-12].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으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1-5] 하였고, 또한 그 자신 "내가 복음을 전하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함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거침없이 교회를 향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이다. 바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사도라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으로 아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저주를 "꺼리지 않고"[행 20:27] 말한 "눈물"[빌 3:18/행 20:31,19/고후 2:4]의 사도다. 일방적으로 기쁘기만 한 것이면 바울이 눈물로 임할 까닭이 없다.
생명과 동시에 멸망이 놓여 있는 양자간의 선택에서 이를 지켜 보면서 양떼를 먹이던 하나님의 목자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불가피한 것이었다[빌 3:18,19].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 severity, sternness)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함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 일변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소멸하는 불"[히 12:29]로서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인자 안에 거하는 것은 한번 믿은 것으로써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면성과 동시성에서 '함께 움직이는 사랑'인 것이다. 때문에 거듭 강조하여 경고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할 것이다"[요 15:2,4]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몫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 많다. 여기서 보듯이 명령하신 것이다. 이는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행 17:30]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을 버리고 몸의 각 지체로서 항상 머리를 위해서만 사는 삶이 '구원 얻는 믿음'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한다" 하셨으니 이는 갑이 먼저 을을 위했으니 을이 이 본을 따라 갑을 위하게 되면 다시 갑은 을을 위하게 되는 순서다. 이렇게 갑과 을은 쌍방이 동시에 움직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를 그에게 나타낼 것"[요 14:21]이라 하심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계명을 지킴 그 말씀을 지킴으로써 나타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21,23].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순수하게 나의 몫이지 주님이 대신하시는 법이 없다. 주님이 대신하신다면 그것은 주님 스스로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므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되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갑을 사랑하는 것은 을이요 을을 사랑하는 것은 갑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계명이 도대체 무엇일까. 계명은 마땅히 할 본분을 말씀하심이다. 아들로서의 본분은 무엇인가. 사랑의 법칙 곧 3위1체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사시는 것과 같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사는 것이다.
아들께서 아버지만을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시지 않는 이것이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계명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12]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서로 사랑함은 같은 머리를 모시고 있는 조직체이기에 머리를 위함은 머리의 지시를 받음이요 그 지시가 곧 그 말씀 즉 계명이니 그 계명 따라 지체 상호간에 서로 사랑함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는 말씀이 그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가 되어 계시어 그렇게 아버지의 계명을 받고 비키고 계시니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의 구원인데 내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것이 그와 하나됨을 유지 존속하는 나의 책무인 것이다. 내 스스로 하는 나 자신의 생명에 관한 일이니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6] 하심 그대로다. 즉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제해 버리시는 것이다[:2]. 이는 바울 사도가 "너도 아끼지 않으신다, 찍어 버리신다"[롬 11:20-22] 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시험 무대에 있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는 한은 항상 생명과 사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생명에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양상은 탄탄히 생명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산 자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니 시험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 여부가 저울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렇게 저울에 달아 모자람이 발견되어 죽은 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같았으나 저울에 달려 그 스스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길을 택한 고로 멸망에 처해지지 않았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다"[요 15:5,7,8] 하신 대로, 우리를 구원하심은 열맬 맺도록 하심이다. 열매 맺지 못하면 "제해 버리시고" 그러면 "불 사름"이 된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말하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기를,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십시오' 하였다"[눅 13:6-9] 하심과 같다. 이와 같이 생명과 사망의 기로에 서 있건만 이 사실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그 종말이 어떻게 되랴.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같이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 것임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함이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긴다"[벧후 1:10-13]고 사태의 심각함을 알려 경고한 것이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5] 했으니 성경을 읽지 않는 자의 결말이 어떠할 것임을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다"[롬 15:14,15] 함이 모두 같은 경고인 것이다. 유다도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니, 주님께서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유 1:5]고 이를 명백히 한 것이다.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얻었지만 계속 얻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 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여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빌 3:8-11].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온전한 데에 나아갈 수 없다. 보어는 빛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입자성 하나만 고집하였으므로 그 두 사람의 논쟁에서 "아인슈탸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개 일방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성경이 양면을 다 말하고 가르치고 명백하게 일러주었건만,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말에만 경청한 관계로 그 옛날 아담 부부의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친히 하신 말씀보다 피조물의 말을 더 믿은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너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기보다 사람이 지어낸 신학 서적을 더 의뢰하는 것이다. 심각한 사태이건만 이 심각성을 모른다. 멸망하는 자가 그 스스로 멸망 길에 들어선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비극이다[마 7:22,23/25:44-46].
"그러므로 너희가 스스로를 일깨워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고 한 바울 사도와 같은 이들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그 외의 모두는 가짜요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일 수밖에 없다. 삯꾼이다. 보수만 바라는 이들이니 양도 제 양이 아니다[요 10:12]. 이런 황무지에 몸을 의탁하지 말고 성경에로 돌아와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은 3위1체 원리에 의한
사람 사는 법이다. 3위1체의 법칙이 나타내는 것은 인과율로서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양자 관계를 명시할 뿐 아니라
갑과 을이 서로 위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양면성에 의한 동시성 운동 또는 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갑이 을을 위함과 동시에 을 역시 병[둘이
하나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을 통해 갑을 위함이다.
사람의 신체가 좌, 우 대칭으로 되어 있고 팔이든
다리든 둘 즉 짝 다시 말해 양자(兩者),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니 예컨대 좌, 우
두 다리의 보행시(步行時)의 작용[운동]을 말한다면 두 다리
중 하나[갑]가 앞으로 나가면 반드시 나머지 다리[을]가 그
본을 따라 역시 앞으로 나간다. 을아 가만 있으면 아무리
갑이 계속 나가고자 해도 나갈 수가 없다. 을이 그 순서를
따라 혹은 뒤를 이어 앞으로 나가주어야 갑 역시 다시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을 역시 갑이 계속 나가주지 않는 한 연속해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갑이 움직이면 을이 뒤이어 움직이고
을이 움직인 후에는 다시 갑을 움직이고 그리고 순서를
따라 을이 역시 움직이는 등 갑과 을이 짝을 맞추어 걸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보행법(步行法)이다. 옛 시절
증기 기관차 시대에는 열차를 끌고 갈 때 기관차는 연통을
통해 칙칙푹푹 연기를 뿜어올리며 달렸다. 그렇게 움직여
나가는 소리를 "칙칙푹푹"으로 묘사했는데 다시 말해
"칙칙푹푹, 칙칙푹푹" 하고 가는 것이지 연속적으로
"칙칙" 소리만 내는 것도 아니었고 "푹푹"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칙칙"과 "푹푹"을 번갈아
연속해서 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사람이 양 다리로 걷는 동작 역시 왼발과 오른발을
연속해서 바꾸어가면서 내밀며 걷는 것과 같이 사람 사는
법은 어떤 것인가. 사람 홀로 있지 않고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에 의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써 생겨났으니
하나님과 인간[혹은 피조물(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격성을
갖춘)]의 양자 관계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머리와 몸의 구조로서
머리[하나님]는 몸[피조물]을 위하시고 몸의 각 지체는 저마나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머리를 위함, 곧 '머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머리께서 사는 법으로서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써
피조물을 위하시면 피조물 즉 몸의 각 지체된 자는 그 본을
따라서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피조물의 생활 방법이다.
사는 방법이고 생존하는 법칙이다. 그래서 이는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법질서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친히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그 지으신 피조물을
위하시듯이 피조물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우리 인생의 구원은 과거 홀로 생겨나 혼자 살
듯이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죽은 자로서의 "악함을
버리고"[행 3:26] 오직 영생의 법, 정상적인 삶의 원리인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온 것을 말함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해주셨다고
또는 죽음 가운데서 살려 주셨다고 그 길로 내처 영원히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삶의 법대로 살아야 함이다. 애초 이 삶의 법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비극 즉 인간고가 왔으니[롬
5:12] 이는 당연 귀결이다. 이 삶의 법을 처음부터 지키지 않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죽음과 죄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고후 4:4)이 되어 있음 역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조만간에 망하게 되어 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고전 7:31]. 구원 받아야
할 사람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런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만 이 세상의 존속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제
그 마지막은 다가오고 있음이다.
영원히 사는 법도 모르고 어찌 영원히 사는 세계로
들어가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이 영원한 법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영적 존재들]들에게 나타내신
바다. 그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물[천사]들 중에 이 법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역시 과거 한 때에는 거룩한 천사들이었다. 이 거룩한 천사들은
영원히 사는 법대로 따르고 그 법을 사랑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법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거룩한
천사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은 이 법을 알고 있었던가. 법은 다름아니라
앞에서 설명했듯이 머리로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좀루을 친히 위하심을 알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곧 머리의 지시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마 4:4]. 이는 법으로 논하는 것 이전에
상식 차원의 이야기다. 아담은 이 생명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행동함에 따라, 악령들이 범죄한
것처럼 역시 범죄하여 스스로 생명을 걷어차 버리고 죽은
자가 된 것이 오늘날의 인생 참극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셨으니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과 일체의 것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니 그 결과가
나를 위해 죽으시는 십자가 고난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법칙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와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산다는 사람 삶의 기본 도리를 다라 하나님께서도
존재하심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사랑이 바로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사는 것을
말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사랑의 상대
곧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바로 이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롬
5:8]. 나를 위해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사심을[갈 2:20] 이와
같이 본으로 보여 주셨으니 당연히 나는 이 본을 따라
사랑을 알았으므로[요일 3:16] 머리께서 분순하신 지시 즉
그 계명대로 순종하여 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임하게 되어 있음이다[:16/요 13:34].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은 바로 이 계명을 싫어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이웃을 위해야 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낀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었다. 이 미련함은 역설 같지만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미련하지 않고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머리의 지시를 감히 무시한 것이므로 역설 같다
한 것이나, 즉 머리가 영리하면 이 모든 진리를 사랑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 반대 쪽을 생각했으니 똑똑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 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욕심이 그 화근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것도 자기 그리고
모든 영물들이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그 누구보다
먼저 창조된 선재자(先在者)로서] 아래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런 "악한 자에게 속했다"[요일 3:12]고
요한이 설명한 가인 역시 아벨을 순전히 시기심 하나로
무참히 살해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아담]을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의 정상에 두시는 대신 지식 면으로는 영물들의
보좌를 받게 하시어 어느 쪽도 필요없이 교만해지거나 우쭐대지
않도록 미리부터 조정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은혜를 모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 욕심대로 행하여 인간을 자기 욕심대로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이와 같은 불상사가 나게 마련이다. 서로가 이런 마음을 품는다고
가정할 때 피차간의 살육이 진행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모두가
함께 망하는 것이다. 욕심은 이런 한 치 앞의 일도 미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기가 최고 정상에 올라 만인지상이
된다고 자부하고 그것을 멀리 내다보는 지혜라 하나[롬
1:2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무슨 지혜가 있으리요[잠 9:10].
그러므로 우리의 은혜로 받는 구원,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명백히 설명하면서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등의 심각한 경고를 빗발치듯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을 선포하는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저주"의
선언하는 사도인 것이다. 언제나 이와 같이 양면성을 띠는
것이니 내 스스로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인자이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엄위(嚴威)만이
있는 것이다[롬 11:22].
다시 말해 왼발 오른발 양쪽 다리를 동시에 번갈아
내딛는 것이 두 다리를 가진 모든 피조물의 보행법인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자체가 머리와 몸의 체제가 되어
있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데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의 그 첫 걸음을 나를 위해 떼어놓아 주신 것이다.
즉 첫 한 발짝을 디뎌주신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여기서
시동(始動)이 걸려 나 역시 그리스도의 본을 보고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여 내딛는 첫 걸음이 곧 믿음이요 회개다.
믿음의 첫 시작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행
2:38].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후 모든 인생들에게
명령하시는 분부는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17:30].
"믿으라" 또는 "믿기만 하면 영생하니 그리스도를
믿으라"가 아닌 것이다. 즉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게?ㅆ다는
하나님 아에서의 약속이요 지금까지 행한 ㅗ든 악으로부터의
180도 전환인 것이다. 때문에 삭개오처럼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며 뉘 것을 부당하게 징수한 일이 있으면
그 네 배나 갚으렵니다"[눅 19:8] 하는 결의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이런 삭개오의 회개를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다"[눅 19:9,10]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주님 역시
반응하심이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는"[요
15:2] 것이다. 때문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14:21]
하신 것이다.
우리의 반응이 없으면 아무리 만인간을 위하신
구원이지만 그 반응 없는 자에게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영생이라도 그 무의미함이 저 목석과 같은 것이다.
"제해 버리신다". 오직 그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아닌
"엄위"만이 있을 따름이다[롬 11:22].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한 발 내디디시면 그 다음은 내 차례로서 내가 나의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것이 "복종함"이다. 그러면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효하고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즉 그리스도께서 내디디시는 그리스도의 다음 발걸음이시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12] 것이다. 왜냐면 내가
나의 발을 내딛지 않으면 주님도 다음 발걸음을 내디디실
수가 없다. 걸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걸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걸음이 정지되고 마침내는 쓰러지듯이 구원이 정지되는
것이요 그리고 "넘어지는"[마 16:23/고전 10:12] 것이다.
이것이 양면성의 원리요 양자 간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작용이요 때문에
알기 쉽게 '좌우 교차 운동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양면성, 양자 관계니까 좌우로 표현해도 무방하니
앞서의 설명처럼 좌우의 양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좌와 우는 항상 '둘로서의 하나'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입자성과
더불어 파동성이 함께 작동해야 빛이라는 존재가 비로소
부각되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면 빛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양면 또는 양자가 함께 작동되어야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신 말씀이 바로 여기서 연유된다.
우리는 비록 주님을 부인해도 주님은 우리를 부인하시지
않는다고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네가
나를 선대하면 나도 너를 선대하고 네가 나를 박대하면 나도
너를 똑같이 박대할 것이라" 하는 보통 인생들의 평범한
이기주의 곧 자기중심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하고
놀랄지 모르나 바로 이런 생명과 사랑의 원리를 따라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원리를 따르시지 않음이 없으시다.
3위1체 원리에서 큰 자로서의 갑이 작은 자로서의
을을 위하는 것은 당연하나 을이 갑을 위할 때는 하나됨[병]을
인하여 갑을 위하게 됨이니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되어 이제는
몸이 없이 머리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이다. 다시 말해 몸과
하나된 머리가 아무리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전체를 위해 몸의
각 지체에게 지시를 내려도 그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의 무의미하고 머리든 몸이든 존재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을이 갑을 위하는 것을 가리켜 주인 의식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몸이 머리가 되어 있음과 같은 형상이다. 사랑은
각자가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니 일방적으로
위하고 위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님과 같다.
바로 이런 사랑의 주인 의식, 주체 의식, 적극성과
능동성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되 침입하여 들어가고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말씀하심이다[눅 16:16/마
11:12].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이라 하니까 피동적으로 받는
것으로만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는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리 이해하기 혼돈스러운 것도
아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이 핵이고[요일 3:16]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 차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적극성에서 "하나님의 율법" 곧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즉 새 계명을 지켜 복종하게 됨이다.
자연계가 먼저 생긴 후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이
생겼으니 영계와 자연계 어느 것이 갑이고 을이냐 하겠는데,
물론 영이 크고 육체는 작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육체인 인간을 견주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인과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즉 갑은 항상 원인이고 을은 항상 결과만
되는 것이 아니고 3위1체 원리에서 둘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갑이 을을 위함으로 그치지 않고 을
역시 갑을 위하는 체제이므로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이 머리를
위하듯이] 을이 원인이고 갑이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순서를 엇바꾸어 연속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를 굳이 이름하여 인과(因果) 순환의 원리 또는
인과 역순(逆順)의 원리라고도 한다. 이는 양면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 양면이 서로 작용하여 하나로 존재하고 활동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양면이 일방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상호 교차하여 엇바꾸어 인과 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영계와 자연계가 그러하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니 곧 자연계로서 전자가 원인이시고
후자는 그 결과다.
그러나 이 자연계를 기본형으로 하여 그 대칭
꼴인 영계가 창조되니 이번에는 후자가 결과요 전자는 원인이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나 남자가 인(因)이요 여자는 과(果)이다.
그러나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오니[고전 11:12] 원인과 결과가
뒤바꾸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인'이요 나는
'과'이나, 내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하시고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 역시 나를 부인하실 것이므로
이 경우 내가 '인'이요 주님은 '과'에 해당되신다.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간다"[눅 16:16] 하셨으므로
피동적으로 들어갈 줄로 아는 이는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줄로 알아야 할 것이다[요 6:44,65]. 그러면 행함으로써 들어가는가,
은혜이고 믿음으로 얻는 의라는 것과는 어찌 되는가 할 사람이
있겠지만,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전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심으로써
즉 우리가 다시 출생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니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 노력도 애씀도 힘씀도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가
창조인 것이다. 한 손가락도 움직일 필요가 없음이니 아담이 창조될 때 혹은 여자가 창조될 때 아담이나 하와나 그 스스로 움직여 하나님의 창조를 도와드림으로써 창조되었던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우리가 창조되었음이다. 그리고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죄인으로 창조하셨던가. 아닌 것이다. 창조된 후 아담 스스로가 범죄함으로써 죄인이 되고 죽은 자가 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새로 창조를 입었으니 의인으로 창조된 것이지 죄인 그대로 창조된 것이 아님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