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과 3위1체 원리가 세상에 알려진 까닭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생명이시다. 사랑과 생명은 불가분이다. 사랑이 무엇이냐, 그저 좋아하는 감정인가?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먼저 답을 얻어야 한다. 생명은 머리와 몸(의 각 지체)의 한 몸 체제에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때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는 위치에서 그리고 피조물은 그 몸된 형상으로서 미리 정하시고 창조에 임하신 것이다. 자연계 생물의 신체 기능을 보면 자동적으로 즉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향유하는 인간으로 보면 그것은 엄연한 법칙의 역할이다. 즉 정해진 규례를 따라 살아야 사는 것이 된다. 반드시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규범이 있음이다.
그 규범은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하나처럼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이 다름아닌 머리와 몸으로서의 하나 즉 한 몸으로 사는 것인데 여기서 사랑이 핵심이다. 사랑은 "머리"와 "몸"에서 보듯이 양자간 관계다. 다자간(多者間)이 아닌 양자 관계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양자(兩者) 즉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계시기 때문에 여기서 생명, 사랑이 출발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여기서 모든 사물을 통할하는 3위1체 원리가 태동된다.
이 원리는 만유 창조의 원리요 그렇게 창조된 만물의 존속 법칙이요 인간 삶에 미치면 삶의 법칙이 되게 마련이다. 사랑이 생명의 핵심이기 때문에 사랑의 법이기도 하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그것이 행복한 삶의 최대 요건이 된다. 이와 같이 간단 명료한 것이니,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위한다. 그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왜냐면 양자 관계에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서로 상대를 위해야 하는 필연성을 어기고 자기를 위하게 될 때, 그것이 자아중심이 되어 행복한 삶이 아닌 그 정반대의 불행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선의 개념이다. 선한(좋은)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의로운) 것이기도 하다. 이 의(義)와 선(善)이 행복한 삶의 기조가 된다. 이에서 벗어날 때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 멸망, 고난과 고통을 초래하는 죄와 악이 위치하게 된다. 처음부터 악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행복의 절대 전제가 되는 선에서 이탈하는 자가 생김으로써 악이 왔고 따라서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이 온 것이다. 생명이 법칙으로서 인식되기 때문에 생명과 반대되는 현상을 일으키는 요인으로서의 죄, 악을 불법( the transgression of the law-요일 3:4), 불의(不義)라고도 한다.
죽음은 인간을 기준하여 생긴 개념이다. 예컨대 식물이나 동물은 그 개체의 생명이 끊어져도 그 씨는 계속되어 그 종류는 창조 당시나 현재나 별반 차이가 없다. 바꾸어 말해 개 또는 고양이는 그 종류를 따라 지금까지 개체의 노폐(老廢) 후에는 반드시 그 생식 작용에 의한 새 생명 탄생이라는 되풀이되는 신진대사 작용을 따라 영물들과 똑같은 수명을 지금까지 이어 온 셈이나 유일하게 인간만은 다르니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죽음 즉 생명의 세계에서 단절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정의를 성경은 명확히 내리고 있으니 즉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 했은즉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것임이 명백하다. 자연계 육체의 수명은 이런 정도의 목숨을 허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노쇠하여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처음부터 이런 자연계 몸이 아닌 초자연계(성경 표현으로 하면 "신령한") 육체로 존재했음이 명백해진다.
범죄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그러한 초자연계 몸으로 있다가 자연계 몸이 되니 문자 그대로 "죽음"이 초래된 것이다. 범죄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죽음의 개념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제는 처음부터의 자연계 육체인 것처럼 자연계 존재가 되어버리니, 현재는 별 수 없이 자연계 동물과 같은 수준이 되어 있는지라 자연계 동물들도 인간을 따라, 이전에는 죽음으로 보지 않던 것을 이제는 새삼스럽게 "죽음"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 그런 사연이다.
성경에서 의와 선을 행하기를 강조하는 것이 다름아니라 사람답게 살라, 즉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은즉 그 행복의 길을 따라 행하라는 것인데, 바로 그 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영물(靈物)들 중에 악령이 생겨나 그 중의 하나가 첫 인간 아담을 죽음에 몰아넣었고 인간은 인간대로 머리로서의 하나님 지시를 어김으로 오늘날의 인간고, 인생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든 악령은 현재의 이 인간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있고 인생들은 그 압제에 시달리는 것이나 아담 자신에게 또한 이에 대한 반분의 책임이 있으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지시에 불응한 불찰이기 명백하기 때문이다.
인하여 하나님은 이 악령의 불법 행위와 인간의 불복 행위를 당분간 동일선상에 놓고 다루시게 되어 있다. 인간들을 괴롭힌다고 하여 악령들을 지금 당장 처벌하셔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악령들보다 낫게 대해주셔도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불변이므로 현 상태를 전화위복되게 하시어 활용하시는 것이니 오늘날의 세상 세태가 그러하다.
그런즉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올바른 것)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신 대로 선과 의를 행하여 서로간 삶이 최대 행복을 꾀하는 일이다. 우리가 구원 얻음도 이와 같이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법(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함이 그 목적인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곡식을 되던 옛 기구) 아래 두지 않고 등경(들불을 올려놓는 받침대)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함이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3-19).
선한 행실을 강조하시면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 하셨으나, 그 말씀하신 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구원 받았다고 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도록 사탄이 유도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일반적인 실상인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 14: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15:10)하고 명명백백하게 그리고 거듭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를 다시 경고하여,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 하였고,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으니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아는 것이다"(요일 2:3-5) 하였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계 12:17) 등의 말씀으로, 이에 관한 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한 마디로 구원을 모르는 자요 구원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면 위의 말씀부터 부정해놓고 볼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마 22:37-40) 하신 그대로다. 다시 강조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그렇게 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7)라고도 하셨다.
아주 쉽게 풀이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가 이렇게 한다면 거기가 곧 이상향이지 유토피아가 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상식 차원에서 능히 이해하여 헤아릴 수 있는 일을 왜 여지껏 못했던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죄의 얼을 극복하지 못했고 또한 상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상대가 나를 위해 주리라고 셈을 따지는 순간 그것은 자아중심이 된다. 그런 대가를 바람 없이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상황이 180도로 달라진다. 상대는 내게 악을 행해도 나는 선을 고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성경은 명령한다. 왜냐면 나의 삶의 상대(내가 위하는)가 나 자신도 아니요 내 이웃도 아니고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함에는 아무 이상(異狀) 상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나의 상대로서의 위치에 계심을 그리스도 친히 이미 십자가 사실로써 확실히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는, "새 계명"이라 하신 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이다. 어떻게 사랑하셨는가ㅡ사랑이 무엇인지 본을 보이신 대로이니, 곧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은즉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그대로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으로써 시종일관하는 사랑이다.
"나 자신처럼 사랑함"은 공동의 머리로 주님을 모시는 한 몸의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한 몸에 붙은 눈이나 입으로서 손이나 팔더러 너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합과 같다. 모든 지체가 바로 눈과 팔의(눈이나 팔의 기준으로 볼 때) 또다른 자기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이웃"의 개념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은 이 체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 복된 생명의 원래의 체제 속으로 복귀할 수 있으므로 잠정적인 내 이웃들인 셈이다.
그러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니, 그런 국외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필요하면 목숨까지도 버릴 것이로되 정작 그리스도 안에 있어 내 믿음의 형제가 되어 있는 경우 바로 나 자신인 까닭이다. 따라서 그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은 곧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 하지 않은 것"(마 25:46)이 되므로 영벌에 들어가는 사유에 충분히 해당된다고 하셨다. 머리를 위하지 않는다 함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니, 믿음으로 구원 얻는데 믿음에 관한 한 배신이 되니 무엇으로 구원을 얻으리요.
근원적으로 이와 같이 자기 부인(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 절대적 요건이 됨이니, "유대인(종교인)에게나 헬라인(무종교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2,33) 함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명시하기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는 오역)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는 오역)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대신하여"는 오역}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4,15)이라 한 것이다.
이것이 "새 피조물"(:17), 즉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요 3:6,7)의 의미이다. 과거 또는 현재의 경력이 어떻든 간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살아왔음을 양심적으로 판단한다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이 성경의 권위로 입증되었으니 다시 새롭게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으니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소유물)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고 단정해고 있다.
"아무도 없다"이다. "있다면" 그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이 사이비다. 그럼에도 왕청스럽게 아주 엉뚱한 인위적인 교리가 도입되어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의 율법을 마치 모세 율법처럼 취급함으로써 자기도 물론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까지 "지옥 자식(the child of hell)"(마 23:15)이 되게 해 온 것이다. 모세 율법이 왜 생겨났느냐ㅡ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사전 교육 차원에서 마치 본격적인 정규 교육 과정에 들어가기 전 유치원에서 배우는 유치원생들을 다룸과 같은 성격으로서의 임시 방편 조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재출생, 신창조라야 비로소 지킬 수 있는 생명의 법칙을 단지 형상 또는 윤곽 정도로만 맛보기로 알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사전 지식이 또한 필요하므로, 그러나 그동안이라도 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그리스도 오신 다음에야 그 구원이 완전히 되는 것이지만)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겠기에 모세 율법이 세워진 것이다. 모세 율법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나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나 "믿음과 순종"이라는 본질적 차원에서는 양편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로서 1년 365일이 하나님(머리가 되심으로써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므로)만 섬기는 것이어야 하지만 7일 중 안식일 단 하루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한 것이며,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것이지만(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몸된 우리의 소유가 친히 되어주시어 우리를 위하시므로) 수입의 1/10만 십일조로 바치도록 명한 것이 모세 율법이다.
주님께서 "십일조도 지켜야 한다"(마 23:23)는 말씀을 하신 것도 아직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이라 여전히 상태는 모세 율법 아래에 있는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시대가 시작되기 전인즉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모든 양상은 그대로 유지 존속되어야 함이다. 이는 모두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전개되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유치원 교육(갈 3:24/골 2:8)인 것이다.
그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 대신에 십계명 정도로만 맛보기로 보여주신 차원이었던 것이 모세 율법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리하여 친히 우리의 머리로서 전적으로 그 몸된 우리를 위하심을 본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도 온전히로 하나님(머리되시는)을 위해서만 살도록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짜여져 있는 다음에야 그런 유치원 수준인 모세 율법에 머물 필요가 없음은 당연하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 성령으로 행하는"(갈 5:25) 시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롬 8:2)이라는 의미의 전부다. 그런즉 아직도 모세 율법의 잔재로서의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히 여기는"(바울 사도가 지적한 바와 같이ㅡ롬 14:5) 등의 일에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런 종교 형식을 여전히 붙들고 늘어지게 한 것이 사탄의 교회 유린의 한 계략이었다. 이렇게 한 날을 중히 여김에서 오는 결과가 무엇이냐. "살아도 주님 위해서 죽어도 주님 위해"라는 본연의 또는 최고의 삶의 슬로건을 무색하게 만들고 희석시키는 부정적 결과밖에 거두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내 것이라고 해서 단 1%라도 허용하고 인식하는 한에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대로 그 1%가 실제는 100% 전부인 것이다. 빙산 일각처럼 겉으로는 말로는 극소미량이라 하지만 실제는 전체가 나 자신을 위함으로 응집되어 있음이다. 그런 상태에는 그리스도의 전부를 내 것으로 소유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전부를 내 소유로 알고 믿고 그대로 살아감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천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 선물이지 내 것이 처음부터 있었던가. 내가 창조될 때 내 것이란 게 존재했었던가.
우리의 구원의 본령은 종교 의식, 체제와 같은 특정일, 특정 장소, 특정 의식, 특정 직위 등등에 있지 않다. 삶 곧 일상생활에 있다. 때문에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자가 없다"는 선언이 있지 않았는가. 마귀는 이런 본래적 의미를 망실하게 만드는데 일단은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그 뜻을 행하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무조건 구원 얻는 데에만 뜻을 두는 교묘한 자아중심이 되도록 인식시킨 것이다.
자아중심으로써는 천하없어도 구원되지 못한다.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짐"을 강조하신 이유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 까닭은(그 아무리 순종을 잘한다 해도) 그 모든 순종이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는 자아중심이므로 원천적으로 죄밖에 짓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지금까지 세상 모든 종교가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이유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처음부터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의 선고를 받고 있는 죄인 인간이므로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고 난 다음에 생명의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본론적인 의미도 당연히 있지만 이 자아중심의 측면 역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모든 미망(迷妄)의 원인은 성경을 읽지 않는 데에 있다.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신다"(눅 10:21,22)는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말이야 근사한 말투로 사랑한다, 섬긴다, 예배한다고 했지만 마음은 멀고도 멀었던(마 15:8) 것이다. "사람의 계명(인위적인 교리)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9)는 말씀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악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을 의미)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2) 하셨으니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한 절대로 생명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능력에는 접속되지 못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위로만 아니라 경고가 충만해 있다. 오히려 경고 쪽의 비중이 더 크다. 불신자에게 주는 경고일 리가 없다. 모두 믿고 구원 얻는 자로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취지다. 그런데도 구원만 받으면 태평이라고 가르쳐 왔으니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현재 나락으로 떨어져 있으랴. 그러나 50%는 각자 탓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구가 없이 자기 욕심만 앞세웠기 때문이니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첫 사람 아담이 죽음에 이른 것은 사탄의 거짓말과 속임이 그 첫째 동인이지만 아담 부부 자신에게도 50%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함께 저주를 받은 것과 같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로 일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19-23).
이만 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경고를 무시한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도 "항상 복종하여...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를 빗발치듯 해야 함에도 도무지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일절 설교 강단에서 언급이 없다. 이는 설교자 자신이 구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알고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이 경고를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급"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렵고 떪으로써 대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이런 성경에 무지한 문외한들은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서의 성경을 세상에다 대놓고 선전하는 꼴이 되어 있으니 세상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소위 믿는다는 자들이 설명해주고 해석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을 세상이 얕잡아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혀를 찰 정도이다. 이런 성경을 감히 양식 있는 자로서 누가 믿으려고 하리요.
위의 말씀에서도 분명히 믿는 자들이 대상이다. 선지자였었고 능력도 행했고 귀신들도 물러갈 정도로 믿음이 있다고 주님 친히 증언하시고 있다. 그러나 그 믿음도 내가 어느 듯 자아중심으로 변질될 때에는 속수무책이 된다. 그리 되면 믿음 자체가 소거(消去)되어 버린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이다.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마 7:21)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증거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 사라졌다는 뜻이다.
본인은 그러나 옛 그대로의 사랑이 있다고 자부하여 "처음 사랑이 떨어진"(계 2:4)것은 모르고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영생에 대한 자신이 만만하다. 때문에 심판주이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변명하기에 당당하다고 하셨으니, 이 사실을 놓고 어찌 두렵고 떪이 없으랴.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눅 6:46) 하신 대로, 뜻은 행하지 않으면서 구원 받았다고 자기를 속이고 있는 현상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예외가 없다. 바울 자신도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고전 9:26,27)이라고 했다.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 함은 자아중심에 대한 부단한 경계심 즉 주님을 사랑함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 편달이다. 천국에서는 시험하는 자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 시험을 거쳤으므로 이러한 경계가 필요치 않으나 지금은 악령들과 싸우는 때로서 언제든 그들의 그물에 걸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보우하심을 믿으나 사랑은 동시성과 양면성이다. 동시에 양쪽이 움직이는 특성을 말한다. 한 쪽이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쪽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하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하게 된다"(눅 12:8,9)는 경고를 주신 것이다. 바울은 그 경고 직후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고전 10:1) 하는 말로써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를 예로 들었다.
결론은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어 도중에 멸망했다"(:5)는 사실에 있다. 이런 경고를 지금까지 설교자들이 하지 않았으니 무엇을 가르쳤던가. 아무 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는 결론밖에 없다. 초대 교회는 이 양면성을 철저히 그대로 지켰다. 즉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행 9:31)이다. 오늘날 교회는 주님을 경외함을 먼저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위로부터 먼저 말하는 정도가 아니다. 애시당초 성령의 위로뿐이다. 주님을 경외함은 눈 씻고 찾아 보려도 볼 수가 없다.
적과의 대전에서 경고를 하는 마당에 지휘관이 대원들에게 경고를 하지 않고 생략한다는 것은 이적행위다. 적보다 오히려 폐해가 크다. 왜냐면 대원들은 그런 지휘관을 무조건 신뢰하고 있으므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돌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설교자들은 그런 이적행위만을 감행하여 본의 아니게 사탄이 편을 들어 온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면 은혜로 얻는 구원에 배치된다고 하여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기 도취에 빠진 것이다.
이는 "은혜로 얻는 구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주신 것을 가리켜 "은혜"라 한다. 은혜로 구원받아 내가 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신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하도록 하시지 그런 것까지 하시면 간섭, 강제가 된다. 그리고 사랑의 특징은 언제나 "현재" "오늘" "이 시간"이다. 그 이상의 미래도 과거도 아니다. 오늘 내가 사랑으로 살지 않으면 과거 또는 미래의 일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미래는 오늘을 근거로 하고 과거는 오늘을 위해 존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은 내일에는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경고다.
처음 사랑이 떨어진 것을 잊은 채 또는 유의하지 않은 채 구원 얻었다는 욕심 하나만으로 "믿는" 줄 착각하는 것을 미리 경고하시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하다"(마 7:24-27)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중심과 자기 부인의 차이를 인식하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한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자기 구원만 의식한다면 도리어 자아중심이 되어 역효과가 남과 마찬가지다. 올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지은 자기 죄로 죽은 아담이나 영원 멸망에 처해 있는 악령들처럼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두려워하라는 것이니 교회 초창기부터 일벌 백계로 그러한 경우를 응징하신 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다(행 5:1-11). 그들이 회개 없이 죽었은즉 악령들처럼 되는 운명이어서 "모든 교회가 다 크게 두려워했던"(:11) 것이다.
먹고 마시는 등 자기(의 몸)를 위해도 내 몸이기 때문에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으로서 위한다는 인식의 차이가 명백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이 삶이다. 주님의 것으로서 위하므로 내 이웃(믿음의 형제들) 역시 똑같은 주님의 것인즉 나를 위해야 하는 것처럼 위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 몸에 속해 있어 머리를 위함이 되는 고로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음"(마 25:45)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능히 영원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으니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어찌 두렵고(벧전 1:17) 떨지 않으리요.
베드로는 그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이 "외모(과거에 행한 행적으로 쌓아진 명성이나 내게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등)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오늘 내가 사랑의 자기 부인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자아중심인지의 여부)대로 판단하시기"(:17) 때문이라 했다. 과거 행적으로 선지자로 일했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모든 큰 능력을 행했어도 그 사실 자체가 오늘의 나를 보장,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과거는 오늘의 내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게 하는 터전이 된다는 의미뿐이고 내가 오늘 자아중심으로 변질된 경우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마 7:22).
"불법을 행한다"는 말씀의 뜻이 이 자아중심 곧 자기를 위함이니, 이것이 모든 죄와 악의 밑 뿌리 그 온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교회에 경고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고후 13:5)라고 했다.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알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안다"고 한 것이 아닌가. 교회에 충실히 나가는 것으로써 그것을 진단하는가? 아니다.
양면성과 동시성에서 나와 주님은 사랑 가운데에서 똑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신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내가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경우에 한해서 주님 또한 나를 위해 존재하시고 움직이신다는 차원에서이다. 믿을 때 "회개하는"(행 2:38) 것은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갈 2:20) 주님을 위해서만 살리라는 결단이자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인 것이다(고후 5:14,15). 만일 이러한 마음이었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새로 다시 회개에 임할 일이다.
우리의 그러한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주시어 성령을 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과 하나되어(엡 2:5,6) 구원 얻는 것인데, 아직 한번도 그렇게 되지 않은 관계로 구원은 받았다고 자처해 왔지만 실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친히 나 위해서만(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죽으시고 사신(갈 2:20) 기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렇게 양면성/동시성으로 하지 않았으니, 구원은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다름아닌 양자간의 쌍방간 동시성 움직임의 사랑을 말함인데, 나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 위해서만 삶>으로서의 내 사랑을 나타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난데없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그리스도", "다른 영"(고후 11:4)에 혹해 있어 구원 얻은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도 속이고 남들도 속여 온 것이다. 스스로 성경을 읽지 않고 사람의 가르침에 무조건 의지하는 습성은, 하나가 잘못되면 그런 습성의 모두가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수백년도 좋고 수천년도 좋아 일제히 무너뜨려져 오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이 무서운 현상을 차단하는 일은 각자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 외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말씀하시기를,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고후 6:1,2). 고로 기회는 이 세상밖에 없고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인생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는 오늘 이후, 이 시간 이후의 일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니(약 4:13-16), 모든 사람은 이 엄중한 경고를 들으시라.
3운법칙이니 3위1체 원리니 DPA pix(악령의 실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게 하신 것)니 하는 것도 사람의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동떨어져 있으므로 이 최첨단의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이르러 최후의 난장판을 벌이기 전에 구원의 말씀을 "혼잡"(고후 2:17/4:2) 없이 바로잡아주어 구원 얻을 자를 제대로 불러 모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하라는 것밖에 없다.
그 동안의 배도(背道)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살후 2:3). 이런 배도의 현상은 적그리스도 출현의 전조, 전주곡임을 바울 사도는 명백히 하고 있다(:3). 필자는 과거 시대의 모세의 위치에 있지도 않고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는 있을 필요도 전혀 없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은,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출 4:1)에 있다.
오늘날 전반적인 "교회"(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칭하는)가 가르치는 것과 성경의 내용이 너무나 상치되므로 이를 바로잡아 말씀을 전달할 때, 당시 사도들로 하여금 "주님께서...표적과 기사(奇事)를 행하게 해주셔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는"(행 14:3)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할 때, 당시처럼 기적은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때다. 왜냐면 적그리스도의 속임수와 거짓이 주장 기적을 통해(거짓된 것까지 합세하니 일견 그 위세가 대단할 것임을 성경은 사전 통보를 해주고 있다ㅡ살후 2:9-11)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가능하다면 택한 자들까지 미혹할" 것이라 하신 그대로 악령의 기적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 외에도 타종교에서 일어나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기현상이 괄목할 정도로 팽배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분명히 알 것은 지금은 기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가 악령 사탄 곧 용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니, 초자연계에 속한 영물들은 모두 초능력을 보유하여 "신(神)"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상대적 의미로서 인간(아담)의 범죄로 인간 스스로 그 고유의 초자연계적 실상을 상실해버린 결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인 위세로써 악령들이 신으로 위치해 있을 리가 없다. 즉 인간의 자연계 실상이 너무나 초라하여 영물들의 위상이 부각되어 그렇게 된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위력"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으니 기적 자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 편에서의 거룩한 천사들의 기적적인 활동과 역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니 믿는 자에게는 변함없이 나타나는 은혜로서 변함이 없다.
악령들의 능력이 천사들을 능가할 리가 없지만 나타나지는 현상만을 놓고 볼 때 "능가하는" 것으로 착각할 만치 되어 스스로 창조주로 행세할 만큼 되므로 자아중심을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는(살후 2:12) 확실한 무대가 되어 있는 것이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한 때다. 그러므로 왕년의 기적을 대신하여 주신 것으로서의 "모세의 지팡이"(출 4:2) 역할이라 믿어도 좋을 정도의 실상 대단한 것이 3위1체 원리와 이를 검증하는 3운법칙인 것이다. ("삼위일체"란 단어가 성경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보았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이 이미 익숙한 단어가 되었으므로 이를 원용하여 그냥 갖다 붙인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각자 판단에 따르는 일이요 오직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마지막 경고임은 믿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웬만하면 다 아는 내용이라고 아예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 오늘날이다. 그러나 성경은 베뢰아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시의적절한 경고를 주고 있으니, 거역할 수 없는 능력으로 나타난 바울 사도의 막강한 말씀 전달에도 불구하고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므로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행 17:11,12)고 한 것이다.
성경 읽기를 외면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장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성경을 백독 천독을 해도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사람들을 잘못 가르쳐 오고 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라는 경고 없이 구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도 무작정 동전의 한 면만을 고집하니 동전으로서의 화폐 가치를 상실한 지가 이미 오래다. 필자로서는 성경을 제발 부지런히 읽으라는 의미 외에 달리 전달하는 것이 없다. 단지 읽을 때에 그 윤곽만을 대체적으로 정해주어 곁길로 빠져드는 위험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 이상으로 하는 것이 없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고전 4:6)으로만 한정해서 가르치시며 계시하시고(왜냐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안전판으로서 지혜의 집약이 되므로) 그 이상으로는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누구냐 한다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는 이 한 마디로 대만족으로 여기는 자이다. 필자는 선생도 아니니 선생은 오직 마지막 아담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도 아니니 지도자는 그리스도 외에 달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마 23:8-10). 우리 각자는 이 시대에 임하여 다시 세상에 오시는 주님에 대비하라고 외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사명을 자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구 누구에게든 필요한 만큼의 적절한 "모세의 지팡이"를 주실 것이다.
성경은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까지도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 3:15)가 된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성령의 검(劍)"으로서 매일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매양 이에 대한 채비를 해야 하는 까닭이다.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성령께서 그 때 그 경우에 따라 적절히 풀어주시지 않는 한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가르치심은 "일용할 양식"이라 하심과 같이 한꺼번에 펼쳐 보여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식으로 필요한 만큼만 계시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전부를 가르치신다 해도 우리로서는 수용할 능력 자체가 없는데다 항상 사랑과 믿음은 동시적인 움직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왜냐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함께 사시므로 내게 지혜가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고전 1:30). 앞서 지적한 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히 3:13) 베푸시는 양식이므로 매일 수시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 것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 아니면 백 천독을 해도 성경을 읽는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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