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21세기의 바울 사도 (3)ㅡ이병철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3)ㅡ이병철 질문



9.  ‘21세기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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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유


그러므로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희망]을 가진 이마다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요일 3:3] 하였고 이 "깨끗하게 함"이 무슨 뜻인지를 밝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함이니 죄는 불법이라"[:4] 하였으며,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5] 하였고, "우리 죄를 없이 하신다"는 말을 다시 강조하여 "그 안에 거하는 이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범죄하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6]고 단정한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육신 가운데 있음으로 인하여[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인 것이다] 죄를 지어도 죽 죄인으로 있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을 따르는 이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여[물론 당시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것을 가르친 거짓 선생과 사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후 11:13],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일 3:7] 하였다.

현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를 행하니까"[:7]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그런 특정 사실을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요 3:16]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하여 과거의 나의 죄가 용서되었음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되지 못한 것은 과거의 죄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과거 죄 청산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모든 지은 죄가 청산되지 못해 죄 용서가 되어 있지 못한 바탕 위에서 죄를 아무리 짓지 않아 보아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이다. 이를 또 사람들은 혼동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익하다 하여 자멸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다. 모세 율법은 그 실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해 그림자로서, 그런 그림자 역할의 모세 율법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만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죽음을 당했느니, 이를 가리켜 성경은 "땅에서 경고한 자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시는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 12:25] 하였고, 그래서 "너희는 삼가하여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하였다[:25].

그리고 연이어 경고하기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28] 하였고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구원 얻은 이들이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은 생명의 율법이니[그리스도 친히 우리 생명이시므로-골 3:4/요 14:6]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로서 아담처럼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행위다. 고 "새 계명"[요 13:34]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 하신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자기를 다 바쳐 선물로 주심으로써 사랑하셨으니 즉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이요 자기를 위해 사시지 않음[고후 5:15]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이는 또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으로서 둘이 연합하여 하나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할 것을 명령하셨고 거듭 이를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눅 9:23/14:2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이 사실부터 주지시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기 부인의 삶이니 이를 각오하고 있는지 그 여부부터 따질 것을 명령하신 것이니 곧 망대 비유이다[14:28-3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 즉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없이 구원되고자 하는 일체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앞서의 지적대로 과거 죄의 청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자기 부인이 밑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일체의 순종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도 하나님 앞에서 이룰 수가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부터 먼저 받아야 그 순종이 자기 구원이 목적이 아니므로 자기중심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구원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율법을 지키는 행위 곧 순종은 자기 구원이 목적일 수밖에 없으므로[왜냐면 구원을 받지 못했기에]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은 자기를 위함이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서 영락없는 자기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런 복종의 "행위"라면 아무리 산더미 같이 쌓아 올려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리가 없다. 여전히 죄인인데 어찌 "너는 의인이라" 하실 수 있는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으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구별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엉뚱한 의미로 "말씀을 혼잡하게 만든"[고후 2:17] 이들의 말을 교리를 삼아 더 믿으니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 있어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이다. 이런 혼돈 속에서 수백년 아니 천년 넘게 지내온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런 소위 "지식[올바른 지식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지식]"에 의존하는 이들은 구원 받지 못한 반면 일정한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혹은 그런 "지식[사람이 "구원 얻는 지식"이라고 하여 스스로 만든]"이 있어도[잘못 배워 잘못 인도를 받은 탓에], 자기 양심을 따라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한 이들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고전 8:3] 넉넉히 그동안 구원되어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지식은 하나님 사랑으로 유도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올바른 지식이 아닌 사람이 만든 것으로 지식을 삼고 거기 의존하니 그 기댄 것이 썩은 나무 울타리[인간이 만들어낸 교리]라 곧장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세반석인데 그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놀아난 결과다. 항상 이와 같이 인간의 가르침에 놀아나는 것이 화근이다[마 15:9]. 이렇게 되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기를, 마음은 내게서 멀다"[:8] 하시는 단죄를 면할 길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①과거의 죄 청산이 안되므로, ②순종의 행위[선을 행함] 자체가 자기중심[자기 구원을 목적하는]이므로, ③정작 순종은 자기 부인[일절 자기를 위하지 않음]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래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을 터인데, 자기 부인이 불가능한 이유의 하나로서 둘이 하나를 이루어 줄 수 있는 상대 즉 자기를 위해주는 짝이 없어서, ④그리고 그 이유의 나머지 하나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육신도 함께 죽는[롬 6:6] 것인데 죽지를 않아 여전히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므로 그러한 것이다.

이는 세상 종교의 특징 바로 그것이다. 선행 또는 종교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다. 위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진리의 구원에 비하면 그들 모든 종교의 구원관(救援觀)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의 유치한 발상이고 엉성한 짜임새의 논리인가. 오늘날 거의 전부의 소위 "기독교" 교리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세상 지배자요 신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술(操縱術)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다지도 변색(變色)시켜 놓았는가, 아니,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는가,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교묘한가. 생명을 유지 보전하게 되는 핵심 골자가 되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율법을 마치 모세 율법처럼 멀리 던져놓게 만든 것이다. 똑같은 "그림자" 취급을 하여 거들떠보지도 않게 만든 그 기술은 가히 놀랍고도 놀라운 것이다. 그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런 거짓에 [성경에 그렇게 분명히 밝혀놓고 있음에도] 놀아나는 인생의 어리석음이 더 놀랍다고 할 것인가. 왜냐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자체 증명하는 것 빼고는 가장 강력하게 그 진실성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다지도 악착 같이 악랄하게 "말씀을 혼잡하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완전히 인생들로 멸망하게 만드는 교리요 완전히 별다른 종교로서의 "기독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짜를 믿는 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종교보다 가장 세력이 있는 것으로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개입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시지만, 사람이시므로 나만을 위하심이 진실 그대로이니 왜냐면 사람은 육체인지라 한 곳에서 한 사람만 상대하면 다른 곳의 다른 사람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의 의미'를 모든 사람에게 적응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에[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실 수 있지 육체 곧 사람으로만 계신다면 내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것], '나만을 위하심'이 사실이고 말로만의 표현이 아닌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로서의 육체인지라 한 사람 또는 몇 사람만 상대할 수 있지 동시에 여럿 또는 전부를 상대할 수 없음이다. 더구나 내 안에 친히 임하여 계시니 완전한 '나의 소유'가 되어 주시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모든 믿는 사람에게 그러하시니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시어 이와 같이 완전무결한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십자가에 나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즉 내 안에 계시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이시고 내 안에 계시는 '내용'으로는 '사람'이시라고 이해하면 정확하다. 사람이 '내용'이라는 것은, 본시부터 사람은 육체이므로 한 사람과 관련을 맺으면 다른 사람은 제외되고 무관하게 되어 오직 그 관련된 사람과만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떤 사람과 상대하면 그 외의 사람과는 상대할 수 없다는 그 뜻이다. 바로 그런 관계에서 내 안에 계시므로 오직 나만을 위하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한 날 한 시 그 어느 곳에서든 모든 믿는 사람과 나와 똑같은 관계로 믿음의 형제들 모두와 함께 하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 오시어 계시지 않고는, 열두 제자와 함께 하시면 니고데모와 같은 제자와는 함께 하실 수 없음이다. 요한과 함께 하시면 예수님의 심부름을 나가 있는 마태와는 함께 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계시면 그런 제약과 한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나 혼자여서 부득불 내가 나 자신을 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영락없는 죽음이요 죄였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 창조된 새 생명의 구조에서 주님과 내가 둘이 하나된 관계이므로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는 그런 영원한 구조요 체제다. 둘이 함께 하나로 있으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도 없거니와 위해서도 안되니, 내가 나를 위함보다 주님이 나를 위하심이 더 완벽하고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 서로 대할 때 갑이 갑 자신을 볼 수 없으나 을은 갑을 더 잘 볼 수 있어 더 잘 위할 수 있다는 바로 그런 이치다. 더군다나 주님은 친히 나를 지으셨으므로 그리고 모든 것을 더 잘 아시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한도 없이 나를 더 잘 위하실 수 있음이다. 여기서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조건은 내가 일절 나 자신을 위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비록 어떤 것이 내게 생명과 관련된 것처럼 보여 '내가 나를 위해' 그 생명처럼 보이는 것을 택할 때, 이미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된다.

왜냐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오직 나의 생명이신[골 3:4]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면 그것이 곧 생명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는 자기는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고 판단하여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음과 같다. 그런즉 비록 내게 해가 되고 죽음 그 자체로 비쳐질지라도 나 자신을 위해 내 스스로 그것을 기피하려 하면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버림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뜻이면 비록 십자가 죽음이라도 우리는 흔쾌히 이를 따르고 이 뜻에 순종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지 않고는 그렇게 행동할 수 없지 않은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해당됨이니, 아브라함이 그렇게 해서 이 믿음의 특성을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명과 같은 이삭을 바쳐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으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이삭을 죽여도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복종했던 것이다[히 11:19].

그러므로 믿음은 복종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님을 성경은 이와 같이 명백히 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은 항상 믿음을 지키라는 뜻이다. 왜냐면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므로 복종하지 않음은 믿음 없음이요 믿음 없음은 구원 없음이다. 믿으면 구원된다 해서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으신 것만 알면 된다고 착각해서 그렇게 믿는다는 증표만 나타내면 전부인 줄 아는데 이는 착각이니, 그 증표가 평안할 때 교회당에나 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에 있음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셨으면 아브라함처럼 내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은 능히 죽은 이삭을 살리실 줄로 믿고 자기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당시의 사정과 같이 사형수로서 사형장에 나가는 것과 같은] 자세를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취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이 외의 그 어떤 의미로든 "믿음"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한 것이요 그 예로써 이 아브라함의 실례를 들었던 것이다[약 2:21].


아들께서도 아버지와 바로 이런 관계에 계심으로써 즉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심에서 오직 아버지를 위하시는 위치이시므로, 광야 시험을 당하실 때, "몹시 시장하니 하나님[의 아들] 능력으로 돌을 가지고도 당장 떡이 되게 하여 시장기를 면할 수 있지 않으냐" 하는 시험을 단연코 물리치신 것이다. "사람이 먹는 것["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으로써 일축(一蹴)하셨다[눅 4:4].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이 시험을 당하신 것이니 우리의 시험도 꼭 이와 같은 내용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이런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생사의 운명을 가름하는 기로(岐路)를 만드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경우,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지 않고 자기 육체의 요구[뜻]대로 하시어 우선 당장의 허기나 면하자는 생각을 하셨을 경우, 나중에 십자가 고통을 맛보실 때 그 고통에서 우선 면해보자는 생각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판이라도 나면 우리 인간의 구원은 끝장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자기중심으로 나간 결과가 인간의 자멸로 귀결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살인행위로 직결된 것과 같은 의미다.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듣기를 거절하였으면 그 살의가 성공하지 못했겠으나 속아 넘어가 그 말대로 했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굶어 죽는 한이 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돌로써 떡을 만들어 먹든 무엇을 하든 그런 생각을 아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지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돌로 만들어 먹도록 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한 내용은 그가 왜 악령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힌 셈이다. 즉 죄를 짓는 것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여 소경 같음"[벧후 1:9-"nearsighted", "shortsightedness, even to blindness"]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도리어 우둔하게 되는[롬 1:22] 교만이 바로 그런 것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을 우습게 여긴 것이 "네 스스로 네 자신을 위해 살라"["시장하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너를 위하신다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마 4:3,5].

그리고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눅 4:5,6] "얼마나 좋으냐? 한번 부리고 누릴 만하지? 내게 절하면 다 주마" 한 것이니, 그가 바로 그렇게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 앞에 놓인 이익, 불이익에만 좌우됨으로 인하여 범죄한 것이다. 즉 당장 자기가 머리가 되지 못한데 대한 한(恨)을 품은 것이다. 인간[아담]이 당시의 모든 영물들의 머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우는 눈앞의 불이익이었고 우리의 경우 코앞의 이익에만 눈이 뜨이도록 하는 것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 서로 하나가 됨으로써 모두가 다 좋고 평등하고 마치 머리 같이 되는 삶의 최고도의 지혜를 누리게 될 것은 느긋하게 기다리는 마음이 없이 그저 당장 머리가 못되는 것에만 불편을 느끼고 불평을 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당장 나타나는 편함과 안락함만 생각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게"[요 12:25] 함으로써 멸망으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이 북한 형제의 "먼저 기도로 아뢰어 보고" 가부간에 결정하되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고후 10:5] 것이었고, 한 발짝만 내어 디디면 북한에서의 극한 상황에서의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는 절호의 기회이었음에도 감연히 그 기회를 박차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장한 결단으로 결론내려진 것이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일이기는 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일이 아니라 나와 하나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아직 "하와"라는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었다]는,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선과 악을 모르면 모르는 것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는 살 수 없다고 판단했어야 허영에 들뜬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름으로써 결국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반면에 이 북한 형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생명이므로, 당장 죽음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 죽음을 취하는 것이 생명인 줄 제대로 평소에 파악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극한 상황에서의 결정적 순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런 극적 장면으로 나타나는 실례(實例)는 임진왜란 당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예처럼 자주 목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막중한 교훈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렇다고, 이 북한 형제에게 탈북할 것을 권유한 북한선교 관계자가 이 형제를 잘못된 길로 유도하려 시도했던 시험하는 자 역할을 한 것으로 오해한다면 그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누구나 그런 경우 그렇게 했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라고 할 수도 없다. 만일 그 북한선교 관계자가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권유를 하지 않은데 따른 주님의 책망을 반드시 듣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죽음의 북한 땅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은 오직 그 북한 형제에게만 적용되고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

"우리가 육체 가운데에서 생활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것이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陣)을 파(破)하는 강력(强力)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이니 우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불복종을 응징하려는 대비 태세를 갖춤이다[being ready to punish all disobedience when your obedience is fulfilled/to be ready to punish every act of disobedience, once your obedience is complete/after you have proved your complete loyalty, we will be ready to punish any act of disloyalty]"[고후 10:3-6] 한 대로, 우리의 전장(戰場)은 우리 마음[생각]의 영역이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 마음에 넣어 주는 생각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3:2/행 5:3/대상 21:1].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함과 같다. 가룟 유다의 그 끔찍한 범죄의 화마(火魔)를 당긴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생각이 그 도화선(導火線)이었던 것이다[요 13:2]. 우리가 구원 얻어 산 자가 되는 인간 개벽 또는 새 창조도 "마음에 믿음"["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으로써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 일체의 모든 생각은 마음에 떠오르는 족족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내용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무조건 메치고 내리쳐 일격(一擊)에 박살을 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안되면 즉 단박에 해치워지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 그 때는 이 '21세기 바울 형제'처럼 기도로써 반드시 보고를 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사로잡아 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기로 명성이 높았던 중국의 "시셩모" 즉 "석승마[席勝魔, "마귀를 이기는 석목사"라는 뜻]"가 그러했고 "성녀(聖女) 앤"[Holy Ann]이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프레스턴[Miss Ann Preston]이 그러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그와 같이 생각을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략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즉결 처분을 당하게 되는 범죄 행위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행 5:3]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가룟 유다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음에 넣어 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범죄 행위가 이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처음 발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전(初戰) 박살이다.

이교수의 수필

이어령 교수는 "네 잎의 클로버"라는 수필에서, "나는 단 하나 행복과 같이 있는 사람, 행복과 손잡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시골의 기독교인이었다"고 운을 뗀 뒤, "새벽마다 설화산 둔덕에 있는 황새 바위에 올라가 기도하였고 얼굴은 항상 "온화한 희열"을 머금었고 부모에게 극진한 효를 행하니 동네에서는 "산 부처"로 통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했고 그 입에는 언제나 샘물처럼 찬송가가 흘러나왔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전쟁 중 공산군이 휩쓸고 가면서 이 사람을 몽둥이로 내리쳐 백치가 되게 만들어 놓았다. "신(神)을 믿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 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한 결과였다. 이렇게 40대 초에 기억상실증에 전신마비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은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머리를 무작정 연방 끄덕이고 가끔 가다 멋없이 벙실거리며 햇볕 바른 양지만 찾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 이름 없는 "시골 기독교인"이나 "21바울 형제"나 공통점이 있다. 그 인생이 둘 다 두 겹의 이중(二重) 존재라는 것이다. 앞에서 누차 설명한 대로, '육체[그 사람]'와 '영혼[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양면 구조다. 이상 예에서, 하나의 육체는 망가졌었고 다른 하나의 육체는 죽음의 동토(凍土)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영혼' 즉 그들의 "생명"[골 3:4]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 자리에 그대로 건재하시니 영원불변이시다.

아담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그 영혼에 부합하게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된 것처럼, 이 "영혼[그리스도]" 따라 그들의 "육체[그들 자신]" 역시 때가 되면 영광스러운 능력의 신령한 몸으로 "구속(救贖-롬 8:23)"될 것이 약정(約定)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아버지]과 둘이 하나되어 계신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이런 이중 구조로 된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몸과의 차이를 세상 사람들이 구별해 볼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 네 잎 클로버에 나오는 40여세의 인생이나 북한 사회라는 도가니 속에 갇혀 있던 그 79세의 인생이나 자연계에 속한 몸과는 별도인 신령한 몸을 따로 구비하고 있었음을 사람들이 알 리가 없다. 그냥 "그 인생 불쌍하다"고만 여겼을 뿐이다.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오, 그러면 믿겠소이다"[마 27:42]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운명하시기 전에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니 죄인들의 손에 당연히 잡히실 리도 없고 그 어떤 해를 입으실 리도 없고 십자가에 달리실 리도 없다는 것쯤은 상식 정도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 잡히시고 죽으신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자기의 유익되는 것만 추구하였으므로 그런 사실에는 눈이 가려 제대로 보지를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고하신 대로[요 6:27] 썩는 양식에만 마음을 쏟아붓고 썩지 않는 양식에는 관심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치신 말씀[비유를 통해 하신]이 마음에 들어올 리도 없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알 수가 없었으니 모두 자기 탓이다. 오히려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친히 보내신 선지자라면 왜 저렇게 힘없이 나약하게 죽겠는가" 하는 그것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믿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자기 스스로 해석한 대로 빗나간 것이니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지 못한다"고 한 경고와 예언이 그대로 통한 것이니, 이런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인데 이를 알지 못하니 어이 하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다. 이를 스스로 깨닫지를 못한다.

초대교회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서, 아무 이유도 될 수 없는 그런 이유로 해서, 다시 말해 가인이 아벨을 까닭없이 죽인 것처럼 되어 무참한 박해를 받아 끔찍한 인간 만행의 대상이 되고 표적이 되어 왔던가.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토록 처참하게 죽어 나가도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왜 저들을 저토록 버려두고 방관하고 구제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기 잘난 맛으로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여 멸망에 이르는 이들 역시 부지기수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 상에서 중죄인으로 처형되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인해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까닭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의 형태와 같은 것으로 모든 믿는 이들의 육체에 미치는 고난임을 세상이 알 까닭이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는 숭고한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는 사실을 저들이 이해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이해하리요. 이런 것이, 회개하여 믿고 순종할 사람들만 구원하시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 즉 애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종하지 않을 사람들은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함정이요 덫이요 올가미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런즉 앞으로 믿을 사람들은, 왕년의 그 믿음의 형제들처럼 같은 모양으로 같은 행색으로 비참한 죽음으로써 [세상이 보기에] 합류(合流)함으로써 한 동아리 즉 "만물의 찌끼"[고전 4:13] 같이 될 것이니, 이를 미리 내다보고 이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 것이다.

이런 종이 곽[case]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더 이상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것으로 알아 아무 가치도 영광도 두지 말 것이며 귀하게 여기지도 말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성전임에는 분명하니 자기 몸을 거룩하게 간직하기만을 힘쓰고 선을 행함으로[롬 6:13] 무장(武裝)할 것이다. 우리가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여전히 옷 입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한 목적 하나밖에 없음을 성경으로써 충분히 인식하여 대비하고 있을 일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한한 수모(受侮), 부끄러움, 창피함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런 모멸의 표적이요 대상이 아닌가. 인간이 범죄하여 된 결과다[5:12]. 죄인으로서의 모습이니 이런 육체에다 이 육체에 걸맞게 온갖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바로 이런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 이런 몸을 현재 우리가 갖추고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어"[사 53:11]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12] 한 그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기"[골 1:24] 위함이다. 이런 몸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나를 죽여라, 나를 한껏 욕되게 하라, 얼마든지 학대하고 구박하고 멸시하라, 모두 감내(堪耐)해 주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를 내가 오히려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고 대놓고 외치는 것과 같은 모양새인 것이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대로의 '그리스도의 창피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그 몸된 교회로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증거다. 믿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기로 결심하여 함께 고난 중에 그 뜻을 행하기로 결의한 사람들이므로 이런 사실을 믿기 전에 충분히 주지시킴이 필요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눅 14:25-33].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외의 의미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경계하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그 둥지가 있되 나는[인간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따라서 모든 인간]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신 것이다. 이로써 모든 인간은 "저주 받은"[창 3:16-19/갈 3:13]"죽은 자"[:60]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죽은 자에게 무슨 귀천이 있다던가.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요 그래서 그 이끄심을 받는 것이다[요 6:45,65].

이렇게 진실과 진상을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아무나 누구나"[:65] 그리스도께 올 수 없는 것이다. 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미암아[첫 사람 아담을 꾄] 그리고 인간[아담]의 어리석음을 인하여[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속은] 이와 같이 파탄이 난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가증스럽게 보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다. 이 세상 삶이 진정 사람 사는 것인 양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쪼록 볼품있게 위신을 세워가며 살아야 한다고 거짓말로 꼬드기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부추김을 미워하는 것이요 가증스럽게 여겨 경멸하는 것이다[12:25].

진정 고상하게, 고귀하게 위신을 세워가며 사는 삶의 모습은, 자기 신념대로 살아 그 어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굴욕에도 고난에도 죽음에 임해서도 요동하지 않고 대쪽 같이 충성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수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나 역시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똑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꼭두각시로 춤추어 왔던 것이니, 오히려 무한한 연민과 애정으로 대하여 그들 역시 마침내는 진리에 이르도록 전력을 기울임에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일심추월, 사면춘풍"(一心秋月 四面春風) 혹은 "사면춘풍, 일심추월"이다. 마음은 휘영청 높고 광활한 밤 하늘에 오직 차가운 맑은 가을 보름달 하나만 떠 있는 것처럼 대쪽 같이 매서운 충절의 마음이나, 뭇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이른 봄의 훈훈한 기운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그런 인품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다. 바로 아래 그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만은 이어령 교수의 "네 잎 클로버"가 상징하는 행복은 미래도 과거도 아니고 영원한 현재다. 미래는 현재의 연속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들은 이상향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런 '곳[topia]'은 아무데도 '없다[u]'는 뜻으로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만들어내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함을 우리는 이 양면성의 삶의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항상 내포, 함유하고 있는 단어다. 이런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우리는 너무나 일방적인 사고방식에만 젖어 있어 그래서 절망하고 탄식한다. 마치 불교에서 세상을 "무상하다"고 단정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자연계만 볼 뿐이니, 영계라는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는 지혜는 왜 없는가. 단순히 영계가 있다고만 인식할 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원리' 측면에서 제대로 궁구(窮究)해보는 지혜를 말함이다. "영원"이란 의미가 '영원한 오늘'의 의미이기에, 사람들은 오늘만을 살면서도 마치 영원을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영원히 존재하여 영원히 사는 생명체로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죽은 자가 되어 죽음에 처해 있어 내일도 장담 못하는 비극적 현실에임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오늘을 보내고 있으니, 과거의 에덴낙원에 거처하던 아담의 영광에 비할 때, 오늘날의 형편을 가리켜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참경[慘景])"이라 해도 좋다. 영원의 흔적만 남아 있어 내일을 예단 못하는 지경에 빠져 있으니 눈물 없이는 못볼 참상이 아닌가.

영원의 흔적만은 지울 길이 없어 영원히 살지 못하는 것만 못내 아쉬워하고 죽음의 고통은 슬퍼하면서도 영원성을 되찾는 길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곧 복된 좋은 소식을 알림이, 목숨을 걸고라도 알려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인간된 본분이 아닌가. 도대체 이것 외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보람찬 일에 신바람 내며 달려들고 있는 마당에 죽음이면 어떻고 평생토록 고난을 당하면 그 어떠리.

그러면 말하기를, "그 무명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 기독교인"이 그 때 당시 핍박을 받을 때 차라리 절명했더라면 '순교자의 죽음'으로서 산뜻할 터인데, 왜 그런 죽음보다 못한 추하고 흉한 꼴로 남아 있게 하셨는가? 도대체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할 것이다. 이 물음에서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 답이 된다. 즉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인간 육체가 흉하고 꼴사나운 누추한 죽음의 잔영(殘影)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를 통해 만천하에 계속 강조하시고 증명하심이다.

그 실질적인 '증거'로서의 사명을 그 기독교인은[이미 그는 안식에 들어갔지만-히 4:10]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21바울 형제"가 우리에게 자기 부인의 본이 되어 있음과 같다. 다시 말해 몇 번 몽둥이질의 물리적 압박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덧없는 육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 "이런 육체를 끌고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 소위 삶의 낙을 꾀하고 꿈꾸는가, 인생들이여" 하고 그의 허물어진 육체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 불 속에서 고뇌하는 부자와는 달리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정도로 되어 있던 처지라면, 살아 생전에 그 거지로서의 고통에서 풀어 주실만도 한데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골 기독교인"을 그와 같이 남겨 두신 것은 나사로를 거지 그대로 남겨 두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사람은 당장 눈앞, 코앞의 일에 매달려 일우일희한다. 양면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자연계와 대칭인 영계가 있고 이 세상과 대칭이 되는 오는 세상이 있을진대, 이 세상에서의 부유와 영달은, 영원한 세상에서의 고난과 고통이라는 양면이 있음을 꿰뚫어 보아야 함을 가리켜,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눅 6:24] 하신 경고 그대로,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고민과 고통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나타내 보여 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너무 무자비한 것이 아닌가" 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현재의 인간 실상이 그러함을 어찌하랴.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실상(實相)을 덮어두시는 법이 없다. 덮어두어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영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야로 인한[마 1:6] 다윗의 간음과 살인 행위를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성경이다. 그렇게 드러내어져야 이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 인간 구원이라는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실도 '무자비'가 아니라 '죽음의 육체의 적나라한 실상'으로서 이 세상이 존속하는 유일한 의미가 인생 구원임을 명시함인 것이다. 동시에 이런 연약한 육체의 세상 삶을 절대로 사랑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종(警鐘)이심을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악한 자가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였다면 의미는 전혀 남다른 바가 없었을 것이다. 악인이 그렇게 죽으면 누구나 이를 보는 사람마다 당연지사로 여겨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그럴진대, 그래서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돌 무더기에서 죽었을 때는 그런 경고의 무게는 한층 더할 수밖에 없다. 지만, 마땅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의미는 메가 톤 급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 보호를 아니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믿는 것을 강제하시지 않고 오직 양심의 판단과 이성적 결론으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생들이 나아오기를 바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하나님과 그 말씀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상향을 세우겠다는 각오와 목적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요 20:21,22] 이들이다. 천국 건설이라는 이상향에의 꿈의 실현이다. 이미 세워진 이상향인 천국에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그래서 공짜로 영생을 얻었으니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다. 내 스스로 세우는 것이요 그렇게 공동으로 세우는 일에 나 역시 한 몫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됨의 마땅한 의미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의미이다.

꿈을 가지고 꿈을 펼쳐라

꿈을 꾼다는 것은 소망[희망] 가운데 즐거워함을 말하는 것이다[롬 12:12]. 그러므로 얼마든지 환난 중에 참을 수 있음이다[:12].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도 많으나 우리는 실제적인 사실, 현실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요 그리고 그 꿈을 나의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 이루는 또는 그 꿈에 동참하는 보람에 가득찬 나날인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실은 우리가 꿈꾸는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찬란하고 풍성한 것임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필자는 성경을 20여년간 하루 5시간 이상 읽기로 작정했으나 결코 충실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남달리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으면 전혀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운 맛으로 읽게 되니 모름지기 성경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읽어야 하는 것이요 또 성령께서는 나 자신의 학습 진도를 따라 지도하시기 때문에 먼저 배울 것과 나중 알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가르치시므로 그러하다. 똑같은 구절이라도 어제 오늘 읽은 것이 다른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니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성경을 마땅히 가까이 할 일이다.

우리는 이웃들을 구원해내어 천국 백성들을 만들고자 하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있을 뿐이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여,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펼쳐라.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새 사람되고 새 피조물되고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된다"[행 2:18]고 했다. "꿈", 이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여기에는 청춘의 미래와 패기만이 있을 따름이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사람마다가 아니고 믿는 모든 이의 육체리는 뜻이니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한두 곳이 아님)에게 부어 줄 것이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행 2:17) 함과 같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늙은이들이 젊은이가 되어 새록새록 꿈을 꾸니 말 다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니 이전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이전의 것은 일체가 "지나간" 것이다. 지나갔다는 것은 다시 더 있지 않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의 잔재, 육신의 압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악, 죽음 곧 멸망을 앞두고 바라보던 것 등 모든 것이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모든 것이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육신" 아래 있어 "오호라, 이 괴로운 인생이여!" 하던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도 여전히 논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구원의 본질을 바로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또는 에덴낙원에서 영물들을 창조하실 때 죄 짓는 자 혹은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시고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깨끗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움뿐이었다.

창조된 다음에 인간이나 영물들 자신이 그 스스로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를 따라 스스로 선택하여 거룩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 선하지 않고 악한 행위를 함으로써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청산하여 척결하고 문자 그대로 다시 출생하게 하여 새로 출발하게 하심에 있다. 새로 창조하셨으므로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이라고 해서 이전 아담 창조와 달리 특별한 장치를 해서 아담과 차별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면 아담을 지으실 때 /더 이상 손 댈 필요가 없는 완벽한 것/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불완전한 것으로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피조물의 그런 잘못된 행각(行脚)의 범죄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의 새 창조도 아담 창조의 완벽함과 같이 완벽한 것이다. 단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우리는 이 새롭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친 아들들로 창조되었으니,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각자의 영원하신 한 부분 곧 구성(構成) 인자(因子)로 계시는 구조로 우리가 창조된 까닭이다.

즉 아담이나 영물들 창조와 똑같은 수준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담이나 영물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이 범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고 그래서 그들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공명정대 공정공평 차원에서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영원히 죽지 않는]에 들어와 있으나, 아담이나 영물[악령]들이 그 생명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버리고 그 반대의 것을 취함으로써 그 상칭[대립, 대칭]이 되는 죽음을 초래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위험에 들 수 있으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아담이나 영물들은 첫 창조에서 자기 생명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나 지키지 않아 그리 되었고, 우리는 아담의 범죄 후 죽음으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마당에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므로, 아담에게는 "네 생명을 지키라" 즉 "네 스스로 죽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가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루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는 경고로 나타나져 있는 것뿐이다.

의미는 같으니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네 생명을 지키라, 네 스스로 그 생명을 버림으로써 스스로 죽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구원을 통해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는 단지 이 차이뿐이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게 되어 있는 과정은 우리가 몸의 구속을 받음으로써 종료하게 되고 완결되는 것이므로, 그 후로는 다시는 이런 "구원을 이루는" 일이 없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원히 변함 없는 상태로 정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히 12:2]라 한 것처럼, 우리의 이러한 믿음의 본이 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같은 보조로 행하면 그것이 믿음이니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2]고 했다. 우리도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눅 9:23] 행보이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분명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목표한 것이니 이는 곧바로 자기중심 즉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나, 이것은 말을 들어도 잘못 알아듣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나의 즐거움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경우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여 이루어놓으신 즐거움을 바라보신다는 그 뜻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명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모든 것이 실은 아들을 위하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셨으니 그 모든 하시는 일이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하심과 똑같은 원리다. 이것이 생명과 사랑의 법이다. 즉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삶의 이치다.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어 있어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상대를 위함이니 곧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만을 위하는 관계다. 고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명령하시어 행하라고 하신 아버지의 뜻도, 온전히 이루라고 맡기신 아버지의 일[요 4:34]도, 모두가 아들을 위하심이니, 아들을 위하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일이 이루어지고 뜻이 행해질 때에는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들에게 반드시 즐거움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아들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줄을 알고 그것을 속셈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고 아버지의 일이 그러하니, 아버지를 위해 즉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차원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그 차이다. 이것이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각각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면 자기에게 행복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을 모르실 리 없다. 그래서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즐거움이 원동력이 되어 그 부끄러움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되셨다는 말도 아무 하자가 없다. 아들 스스로 그 즐거움을 목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누리시는 즐거움이니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은 것이다. 즉 내가 스스로 취하고자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리스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주시는 즐거움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취하는 것'과 '내게 주시는 것을 내가 받는 것'과의 차이니 이로써 둘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일 아버지를 위하여 움직이심이 없으면 그 즐거움 역시 없는 그런 성질이다. 동시성이고 양면성이다. 움직임이 있어야 즐거움도 있다. 우리의 순종이 있어야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순종의 십자가가 없으면 구원의 즐거움도 없다는 뜻이 바로 "항상 복종하여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다. 

"결국 내가 그 시키시는 일을 하면 그 순종의 대가로 즐거움[행복]의 결말[賞, reward]을 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이 없어도 나는 얼마든지 그 상을 탈 목적으로 순종하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여기서 차이는 무엇인가"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갑도 을도 이기적인 것이 된다. 즉 갑은 을이 갑의 시키는 대로 하니 상을 주는 것이요 을도 갑이 주는 상을 목적하여 움직이니 그런 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심으로써 본을 보이신 것이니, 이것이 이상 질문에 대한 확답이 된다. 즉 갑이 움직일 때 자기 자신을 중심하고 위주하고 본위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라면 우리 위해 죽으시는 방법이 아닌, 그 엄청난 고통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나아가실 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 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 만일 할 만하시거든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제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고 제게서 옮겨 주십시오"[마 26:39/막 14:36/눅 22:42] 하시지 않았던가. 오죽하시기에 그런 기도를 하셨겠는가. 결국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몸이 머리를 따르는 것이지 머리가 몸을 따르는 법이 없다. 이것이 먼저 있고[존재하고] 나중 존재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고 차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면 만유가 다 짝으로 되어 있어 대소, 주종, 인과(因果) 관계를 이룸이니 대등한 관계가 아님이다. 먼저 본을 보이면 작은 것[대소 관계]은 이를 따르게[주종 관계]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어 자신을 주심과 같이 자기 부인이시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심이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그러므로 앞에서의 설명처럼 "둘 다 이기주의다" 하는 말이 전제가 될 수 없다.

"둘 다 이기주의다"라는 말이 아니라면, 둘은 서로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그러면 "둘 모두가 이기주의"가 아니라는 의미다. 즉 하나는 이기주의지만 다른 하나는 이기주의가 아닌 것으로써는 '둘로 하나될' 수 없는 까닭이다. 같은 색깔, 같은 보조(步調)라야 하나가 될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 역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그대로 행한다 즉 따른다 하셨다[요 5:19]. 이미 설명해온 대로 자기 부인은 이와 같이 하나는 본을 보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본을 따르는 대소, 주종, 인과(因果) 관계가 아니고는 절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창조가 아니고 저절로 생겨난 데에서는 절대로 자기 부인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면 자기중심, 위주, 본위로 나가는 것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은 공동의 파멸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죽이고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중심 일색인 이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권 발동에 의해 가까스로 억지로나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증거다. 이 증거 중의 하나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3운 법칙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고 근원으로 해야 그래서 친히 본을 보이시고 실례(實例)를 보이심으로써 모두가 이 본을 따르게 되어 있어 자기 부인이 가능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계셨고 그 누구의 힘을 입지도 빌리시지도 않고 그 스스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자기를 부인하신다고 해서 부인되시지 않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자기를 아무리 부인하셔도 부인되시지 않는 이께서,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자기 부인을 하도록 만드실 수 있으니 왜냐면 친히 자기 부인을 하시어 전적으로 그 피조물을 위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근거로 즉 자기가 틀림없이 위해진다는 것을 앎으로써 모든 피조물은 비로소 자기를 부인할[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지 않을] 수 있게 됨이다.

이러한 삶의 법칙을 미리 강구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많은 피조물이든 단 한 분의 독자(獨子) 하나님이시든 만들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만드시니 독자 아들이 존재하시게 된 것이고, 이렇게 창조된[아버지께서 낳으신] 아들께서 역시 자기를 소재로 하여 피조물을 만드시니 비로소 만물[피조물]이 생성된 것이다.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법질서도 이런 순서를 따름이니 곧 내리받이인 셈이다.

이 세상이 관계와 관계 속에서 얽히고 설켜 있어 엄밀한 법칙과 원리 속에서 상호 작용을 통해 질서 정연하게 나갈 때는 반드시 이상 설명과 같은 갑을 을이 위하고 을을 갑이 위하는 가장 중심이 되는 법질서를 따름이니 이 기존 질서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위의 설명과 같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 우주 천제가 우주 중심을 두고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 친히 자기 모습을 따라 그렇게 중심을 두고 움직이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제 멋대로 중구난방 식으로 홀로 독립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벌써 충돌해서 엉망이 되어 버렸을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견디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홀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그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하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시는 자기중심이 된다]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위치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니, 아들과 아버지는 불가분이신 까닭이다.

그래서 그 즐거움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동시성'의 의미요 즐거움, 양쪽이 똑같이 함께 하여 나누는 즐거움이니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일 수가 없다. 즉 아들만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역시 함께 움직이심이다. 그래서 마치 아들 혼자 움직이셔서 그런 즐거움을 십자가를 통해 스스로 얻으시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됨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심과 같다. 이는 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0-12] 함과도 같다.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살리시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음의 고난을 당함으로써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그 원인에 그 결과다.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기 위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음의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예한다 했으므로, "참예" 즉 동참이라는 것은 이미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원인'으로 하여 나는 나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그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스스로 만든다는 의미로서 곧 그 '결과'인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한다"[롬 7:14:7-9]고 한 대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주님을 위해 죽고 주님을 위해 살아난다는 것으로서[롬 14:7=9],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사람들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음이요[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렇게 주님을 위해 고난 받았다가 죽는 것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고 살아나야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므로[왜냐면 주님은 항상 나를 위하시고 나의 행복을 원하시지 불행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부활에 이른다" 함이다.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삶의 원리가 항상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임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님을 위해" 나 스스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불변이다. 다시 말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위의 그림과 같이 다시는 나 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이중 구조다. 그리스도 역시 그러하시고 또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니 역시 둘이 하나됨에서 이중 구조이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중 구조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창 1:25/11:7/요 14:23]라 하신 것이다. 즉 앞서의 설명대로 그리스도께 관해 논하든 나 자신에 관해 논하든 '나' 또는 '너'로서의 홀로 존재하는 단수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의 이중 구조로 항상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는 것은, 그리스도 혼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아버지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우리' 및 그리스도와 나[또한 우리들 모두]로서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는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다시는 나 홀로로서의 이기주의, 자기중심으로 이해할 일이 아닌 것이다. 국면과 상황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우리 의식, 한 몸 의식, 하나 의식, 공동체 의식에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이 개입될 여지가 일절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 할 때는 우리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관행으로 인하여 나 자신을 위함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성경의 용어 그리고 그 의미는 항상 이러한 '우리'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여, 그대는 찬란한 꿈을 가지고 다시 출생한 자이다. 그 꿈을 가지고 꿈을 펼쳐라. 이 서글프기 한이 없는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의 화려한 목적이요 의미이다. 세계 최고로 지능 지수가 높은 민족으로 판별 난 대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이런 양면을 보는 안목이 열려 있어 만물 만상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주변의 그 어느 민족보다 인간 사후의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으로 예로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꿈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성경에 보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난다, 태양과 같이 비췰 것이다"[마 13:43/단 12:3] 등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읽게 되고, 또 별에 대한 말씀이[일곱 별, 새벽 별 등-계 1:16,20/2:28] 비교적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시(詩)와 같고 음악과 같고 그림과도 같은 동심(童心)의 세계를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이런 천진난만(天眞爛漫)하고도 무구(無垢)한 '어린 아이' 같은 데에서는 꾸미고 과장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그런 음험한 '어른' 같은 것이 배겨 날 수가 없다. 이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점 거짓이나 속임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신데도 그 말씀에서 이런 동심의 세계를 명백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이 또한 보통으로 음미할 '진실(眞實)'이 아니다. 말 그대로의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성이 단연 돋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늘의 별들을 지으실 때도 차디찬 이성의 판단으로 불가결의 필요성에서 창조하심만 아니라 아주 낭만적인 동심의 세계를 설계하시려 함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성경이 반짝반짝 빛나는 "별"의 표현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비극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황장엽씨가 가족을 남겨 두고 남쪽으로 탈출한 뒤 70대가 되어도 동화책을 읽은 후에야 밤잠을 청했다는 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엄마 품속의 아기'가 우리 모두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향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엄마의 "품속"[요 1:18]이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그와 같이 죽음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새 세계의 시작쯤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정과 불법의 현실에 개의치 않고 올바르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위주했기 때문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평도 들었다. 때문에 공자도 이 나라에 와서 살아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 되는 이 양면성의 이치가 바로 나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뼈대이므로, 현재의 나의 구원은 말 그대로 구원 곧 생명 얻음 즉 "새 생명"[롬 6:4]으로 "다시 출생함"이니,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이 썩을 육체는 또한 동시에 영원하신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을 이미 내 것으로 향유하고 있는 의미의 영광스러운 양면성을 지님이다. 높다고 할 때는 반드시 낮다는 상대적인 개념을 동시에 떠올려야 이해가 바로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의 의미요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고 나서야 몸의 구속을 받는다든가 영생에 이른다는 뜻이라기보다, 현재의 이 썩어질 육체[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않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생을 받아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 풍성함 가운데에서 일하는 것이다. "몸의 구속"[롬 8:23]은 단지 이 양면에서 그 나머지 감추어진 면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것뿐이다[골 3:3,4].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영생하는 방법을 여쭙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대답을 듣고 청년이 근심이 가득하여 물러가는 것을 보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라 마지않으며 "그러니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마 19:25/막 10:26/눅 18:26] 했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현재의 부자만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부자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의미로 제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부자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만 아니라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사람 역시 "세상에서 이미 위로를 받아 버렸다"는 의미로도 통하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어 버린다"[요 12:25]는 경고 말씀 그대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으니 오직 전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함이요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4:34]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 자체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20:21,22].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그 피[寶血] 값으로 사심[買入, 買收]으로써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인 까닭이다[롬 14:7-9]. 우리가 주님의 종인데 주인되시는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고 어찌 "주님[주인, 소유주라는 뜻]"이라 부를 수 있으며 구원 받았다고 하겠는가[행 2:21].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 하심과 같다. 즉 순종하지 않는 종. 다시 말해 보내신 뜻과 하라고 명하신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종이 아니니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되어 그 믿은 바 구원이 허사가 됨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49]. 주인의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종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임을 그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a]과 을[b] '둘이 하나 됨'으로써 '병[c]'의 모습 곧 '하나된' 모습을 이룰 때는, '갑의 의미와 동시에 갖는 을의 의미'이다. 또는 '을의 의미와 동시에 나타내는 갑의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인 것이다. 이 핍박 받은 "21바울 형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생을 소유한 자이면서도[갑] 그런 고난 가운데 있었고[을], 그 "무명의 시골 기독교인" 역시 육체는 그와 같이 망가진 채로 있었어도[을] 실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함께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갑].

당시도 그러했고 현재도 당연히 그러하고 영원히 그러하다. 현재 내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이지만 동시에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모습'[갑]을 함께 보유함이다. 이는 물론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의 내 생명을 미워하여"[요 12:25] "죽은"[골 3:4] 모습으로 있을 때에 한한다. 아무리 믿는다 하고 과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어도[마 7:22], 현재 자기 생명을 사랑함으로써 "죽은" 모습이 되어 있으면 그 생명 역시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요 12:25].

그런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강하심을 동시에 함유(含有)하는 것이 된다. 순서대로 나타나게 되는 까닭에, 지금은 '약함'이고 나중에야 '강함'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또한 지금 아무리 믿음 있다고 해도 죽은 자 다시 말해 약한 자, 천한 자, 없는 자로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지 않는 한, 그래서 강한 자, 있는 자로 자처하고 있는 한, 최종 결론으로 나타나게 될 것은 약함, 천함, 아무 것도 없음의 영원한 고난과 고통뿐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경고대로 "위로"[눅 6:24]가 다시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세상은 일방적으로만 생각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자연계만 의식하고 영계를 알지 못함도 그 한 예이다. 피조물만 인식하고 그 짝을 이루시는 조물주를 생각하지 않음도 마찬가지다. 무릇 만사를 양면으로 동시에 생각해야 함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현재의 내가 나타내는 것은 형상으로서의 '나 자신'이지만 실제의 실체는 내 안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나의  현재의 모습은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시는 몫이다. 곧 하나님 우편에 앉아 모든 권력과 권세 위에 군림해 계시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약하신 모습, 눌리시는 모습, 일방적으로 당하시는 모습[털 깎는 자 앞에서 양이 잠잠히 있는 것과 같은-행 8:32]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니 곧 "죽음"[골 3:3]이요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3,4] 있음이다.

곧 핍박 받는 '21바울 형제'의 모습, 핍박 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 "이름 모르는 시골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이 경우 내가 만일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거나 나타내려고 할 때 그리스도 역시 나의 모습을 나타내실 수가 없게 된다. 나의 '구원'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나를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모습이 되실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 될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이니 이는 자연스러운 순리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계에 속한 영원한 존재인 영혼'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이라는 유한성(有限性)과 그리스도라는 무한성(無限性)의 이중 체제로 된 존재이다. 앞에서 우리는 영원하지 못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요 비정상이라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선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고통이고 약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현재 내가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중 구조를 따라 장차 나는 이 일시적인 세계가 끝나면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하고 정상적인 영광과 생명을 누리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서와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현재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10] 함과 같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짐이라 하심"[:9]과 같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9]이라 함과 같다. "21바울 형제"가 "나의 자랑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밖에는 없소" 한 그대로다. 이러므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 4:12]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고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라는 우주 천상천하 유일의 보배를 자연계에 속한 나 자신이라는 질그릇[겉면이 테석테석하고 윤이 없는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그릇]에 담아 있는 현재의 이 희한한 이중 구조 덕분이다[고후 4:7].


비록 흙의 몸이지만 금덩이나 금강석보다 더 찬연한 것을 감추고 있음이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함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니"[:8-10],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10]이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 함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thorn-육체적인 면에서의 모든 여의치 못한 것들을 대표하기도 하는]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자"[고후 12:7]를 두고 있어도 이상과 같이 정확한 사리 판단으로 요지부동할 수 있었다. 그런 육체에 있는 가시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자"라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고후 4:4)이요 따라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히 2:14] 자로서, 고난과 고통이 죽음의 영역인즉 "죽음의 권세를 잡은"[히 2:1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약함이 곧 강함의 상징이라는 역설적인 현실 앞에서 흔희작약(欣喜雀躍-기쁨으로 까치처럼 깡충깡충 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양면성의 구조에서의 특징은, 내 자신 멸망할까 싶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 되어 계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기쁘시게"[롬 3:8/고전 7:32/고후 5:9/살전 2:4/4:1/골 1:10/엡 5:10/히 11:5,6,28] 해드리려 하고 결코 "근심하게"[엡 4:30] 해드리거나 그 뜻을 "소멸하지"[살전 5:19] 않으려 하는 데에 있다.

목적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멸망할까 싶어서 죄를 안지은 것이라기보다, 멸망 여부는 차치하고 죄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했었다. 그래서 행함으로, 순종으로, 내 노력으로, 힘쓰고 애씀으로써, 내 구원을 이루려 한다 해도 이룰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니, 구원 받음 즉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데에 있음이다.

내 이웃을 위하는 것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함에서 자연적,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일 뿐이다. 본류(本流)는 '머리와 몸' 관계다. '몸의 각 지체 상호간'의 관계는 그 지류(支流), 분류(分流)다. 머리 없이는 몸 자체의 존재가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서나 현재에서나 무릇 죽음과 멸망의 특색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데에 있다.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세상 종교는 자기 스스로 구원 얻고자 함에 주안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서 영생하고 못하고의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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