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40)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ㅡ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 마지막째ㅡ"지구 종말은 언제 오는가?"

 (40)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ㅡ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 마지막째ㅡ"지구 종말은 언제 오는가?"


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12. 용[龍]의 정체 - 악령(惡靈) 사단  13. 조선 실록에 나타나 있는 영귀(靈鬼) 현상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



폭군 사단

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용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잘난 체 하며 가볍게 말하지만, 사단이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 정체가 드러날까 하여 더욱 몸을 사리고 전속력으로[배로 기어 다녀도] 전력을 다해 움직임으로써 인간의 눈에는 어찌하든 띄지 않도록 죽을 고생도 불사하는 편이 낫지,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극력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주선"이라는 포장(包裝)술을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 인식시켜 놓았으니 비교적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1908년 이전 즉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도 사단은 처음부터 이 인간 세상 중에 거하면서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닌다"[욥 1:7] 한 대로 지금과 똑같이 활동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지상에서만 그 거처가 한정되었다 해서 특별히 그 활동에 달라진 것은 없으나, 성경에 "분 내어 지상으로 내려 갔으니 화가 있다" 했으므로 세상만은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배전(倍前)의 경각심을 요하는 때다. 

다니엘이 예언한[단 12:4] 과학 문명의 발달도 퉁구스카 충돌 전후로 이루어진 20세기 전후였다는 사실임에 우리는 주목한다. 결론은 현재의 이 세상은 일관되게 마왕(魔王)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 용을 마귀 곧 이 세상 신이라 했고 또 이 세상 임금이라 하셨으니 "마왕"이라는 표현은 성경적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히기 위해 이런 용어도 때로는 필요하다. 어쨌든 경고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살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허황된 꿈에서는 일찌감치 깨어날수록 좋다.

마왕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말 그대로 그를 임금으로 섬기는 의미밖에 없다[눅 4:7]. 신화나 동화에서 나옴 직한 그런 마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마왕이다. 마귀의 생김새는 당연히 사람이 아니니 사람의 모습은 고귀한 모습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것이다. 이러한 형상과 모양은 그 어느 피조물도 갖출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고로 새로 창조되어 있는 사람답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처신하고 행동할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인간에게 나타날 때 반드시 사람의 형상 외에 다른 형태로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처음에 인간[아담]을 위해 그들이 창조되었으므로 비록 현재는 인간이 자연계에 속하여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으나 왕년의 손위인 인간에게 대한 예우(禮遇)로서 반드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혹 필요하면 인간의 모습을 띠기는 하나 그들의 고집대로 짐승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는 인간에게 그릇된 인상, 인식을 심어놓기 위해 그들 스스로 흉물스러운 형상으로 변장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들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꾸며서 인간에게 나타내는 소위 도깨비[일반적으로 말하는 귀신("네피림-창 6:4"의 죽은 혼)들과는 다르다]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도깨비 역시 사람들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악령들이 인간을 속이기 위해 별도의 그런 악신(惡神)들이 있는 것처럼 변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조실록과 같은 권위 있는 사기(史記)에도 궁중을 중심으로 이런 도깨비 출현이 빈번했다고 기록해 두고 있다. 항목을 달리 해서 그 역시 소개하게 될 것이다. 악령들은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 변장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변장이 아닌 원래의 모습은 빛이 찬란한 신령한 몸이다. 그들은 또 거룩한 천사들의 모습[이들 역시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 날짐승" 등이니 곧 영물들이다]을 가장하기도 한다. 즉 빛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변장하는 경우다.

또 악령들은 능력이 있으므로 짐승의 형상에다 사람 얼굴이나 상반신을 입히는 등 온갖 짓도 자행하게 된다. 이집트를 비롯해 다른 고대 국가의 전설 또는 신화에 나오는 수면인신(獸面人身) 또는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신(神)"들이라 하는 것 모두 악령이나 "네피림"과 관계된 것이다. 소위 난생설화(卵生說話)도 개중에는 "네피림"과 관계되고 악령들과 관계된 것이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네 조상을 신성화(神性化)하기 위해 갖다 붙인 즉 만들어낸 설화일 수도 있다.

자기네 조상을 그렇게 신성시하는 것 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거니와, 또 그렇다고 해서 그 후손들이 모두 "네피림"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는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을뿐더러 그 방면의 유전(遺傳) 인자(因子) 관계도 순수한 육체의 경우와는 다를 것이므로 영물과 인간의 튀기인 이상 그것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는 터라 우리의 관심사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한가한 현재 우리 인간의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의 현재 구조와 체제를 보면 신들[사단을 비롯한 악령]과 육체들[인간]의 복합체다. 그러나 이 신은 창조주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피조물인 영물(靈物)로서의 악한 폭군(暴君)들이다. 이 폭군을 사람들은 창조신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처럼 이기적인 존재로 여겨 그 때문에 창조신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속박당하는 것과 같은 동의어 정도로 여긴다. 창조신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의도가 주장 여기서 비롯된다.

사단이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마왕의 압제 아래 놓인 인생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임을 모든 사람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단은 영이고 우리는 육체라 해서 반드시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힘의 불균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영물은 인간[아담] 아래에 있었다. 단지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깨어진 형평성이요 빚어진 불균형이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인간을 위하는 거룩한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어 사단의 그와 같은 일방적인 압제를 상쇄시켜 버리는 터라 마치 우리는 악령들의 활동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사람의 대표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던 것처럼 우리도 단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힘쓰면 되는 것이다. 약령들도 함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천사들도 그러하여 마치 양편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양상을 이루어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그 결과 인간들만이 이 지구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악령들이 발호하는 때로서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다름을 앞에서 지직했다. 지금은 악령들의 "때"이다.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기본적 차이 하나는 전자는 형체가 없으신 반면 후자는 형체를 갖춤이니 자연계에 예속되지 않는 영물(靈物)도 형체를 갖추기는 마찬가지로서 사단도 예외가 아님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형체가 있으므로 인간 속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한다. 영이라야 한다. 그래서 귀신은 들어갈 수 있다. 영은 육체만 없다 뿐이지 인격체다. 사람이나 영물들이나 인격체가 되어 있는 것은, 영혼 또는 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에 마귀 즉 사단이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가룟 유다에게 넣어 준[요 13:2] 다음 나중에는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는데[:27] 이는 어찌 된 일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속에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다"["to fill your heart"-행 5:3]고 한 베드로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또 베드로더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로서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는 뜻으로 그 아래에 모든 악령들과 귀신들과 인생들이 총동원되어 움직이는 판이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지시를 받아 행동할 때 그렇게 동원된 귀신들이 모두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사단이 실제 들어갔다면 "가득하다"는 말로 나타낼 리가 없다. 사단의 명령을 받아 인간 속에 귀신이 들어갔다고 표현해도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가득하다"고 했으니 이는 그런 사단이 "넣어 준 생각"[요 13:2]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다. "사단"은 여기서 자기중심적인 일체의 생각들, 욕심 기타 그 무엇이든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사단은 또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넣어 줄 수 있느냐 하면 사단의 직접 지시를 받고 귀신들이 행동할 때 그것이 귀신 스스로의 의도가 아니고 사단의 지시를 따른 것일 때 "사단[마귀]"이라 할 수 있음이다. 베드로더러 "사단아 물러가라"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실 때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제자들이 알고자 하여 그 점을 여쭙자 "내가 떡 한 조각을 주는 그 사람이다" 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주시니 유다가 그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요한이 표현한 것도 같은 뜻이다.

그 조각을 받는 유다의 마음에 즉각 반응이 아니 올 수 없다. 반발심이라 할까 하는 그런 마음이 끓어오르는 순간 그 때까지 유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신[들]이 즉각 유다의 속에 들어가 유다를 사로잡아 망설임 없이 유다가 애초 마음 먹고 있던 바를 결행하도록 충동했다는 뜻이 되겠다. 따라서 사단도 일정 형체를 갖춘 피조물이니, 영이지 않고는 자기와 똑같은 피조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귀신'일 때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말하는 것으로서 "네피림"[창 6:1-6]의 영이므로 얼마든지 인간 속에 들어갈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러면 이 글에서와 같이 퉁구스 사건으로 사단의 정체가 탄로 난 판이고, 또 사단이 그런 자기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면으로 [감추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면 앞으로도 이런 적극적 노력을 감행할 것이야 뻔하다. 그는 인간 세상의 제왕(帝王)이니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그래서 아닌게 아니라 그 시베리아 퉁구스카 인근 지역에 괴상한 'ufo'식 기호 또는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음을 2007년에 발견하게 되었다고 인터넷에 보니 소개되어 있다.

요즘 영국, 러시아 기타 등지에서 태양과 비슷한 것이 해가 뜰 때 또는 질 때 나타났다고 하여 "두 개의 태양"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유포되고 있는 모양인데, 역시 퉁구스 사건 당시 두 형제가 현장에 있다가 증언한 대로[앞서 이미 소개한]의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희석시키기 위한 사단의 얕은 수작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멀지 않아 그에 대한 이른바 "과학적" 설명을 사단은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그것이 모두 ufo였다고 얼버무릴 수도 있다. 악령 사단은 그런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항상 유념할 일이다. 

그 퉁구스 충돌 지점 인근에 초자연계에 속한 ‘ufo’식의 그 무엇이 이런 것을 새겨놓았다는 점만은 확인이 된 모양으로, 퉁구스카 충돌이 우주선의 추락 폭발이라는 뜻의 해명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는 내용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이 사단과 관련된 일이므로 당연히 사단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시도하는 조작이라고 이미 결론 내렸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여 더 이상 살펴볼 흥미는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즉 "사단이 이 세상 왕이고 당신 역시 이 세상에 사는 일개 인간인데 감히 ‘왕’을 거역하는 이런 폭로가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왕이기는 하나 절대자는 아니지 않은가. 인생들에게 진상을 밝혀 주어 인생 구원의 일을 돕자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역시 따름이다. 감히 누가 막을 것인가. 사단이 이런 일까지 직접 막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활동은 이와 같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진리와 진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무쪼록 ‘믿지 못하게 하는’ 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얼마든지 전파되는 것이지만 이것을 믿는 것이 정작 중요하므로 믿지 못하게만 하면 모든 것은 성사되는 셈이다. 위협을 하든 회유를 하든 속이든 어쨌든 이 목적만 달성하면 사단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사단은 이런 자신감에 넘쳐 있는 자다. 물론 그는 능히 복음(福音,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곧 복된 좋은 소식) 전파자를 죽일 수도 있고 고통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의인(義人)들을 죽이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위협하는 데에 목적이 있어, 이런 죽음과 고난을 통해 협박함으로써 믿음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서 발을 빼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위협의 수단으로서 죽이고 고난을 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이 이렇게 의인의 죽음을 통해 인생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변경될 수 없는 진리일진대, 그런 모든 고난과 죽음이 실질상 하나님의 뜻이므로 사단 역시 죽이는 데에는 목적이 없고 오직 위협 차원이다. 그러나 죽이지 않고 고난을 가하지 않는다는 뜻은 또한 아니니, 실제 죽어가고 고난을 받음이 이루어져야 겁을 집어먹고 믿음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고로 그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치라도 어찌할 수 있는 권한은 그에게 일절 부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성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리적 힘은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단과 그 악령 일당의 독무대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거룩한 천사들과의 양립[대립] 형태다. 사단이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이기는 하나 인생 구원에서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만은 손댈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인생 구원의 말씀을 손댈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한계는 언제나 분명하다.

이런 원칙에서 법질서 유지 역할을 하는 것이 거룩한 천사들의 '경찰(警察)' 업무다. 의인이 죽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을 따름이고, 또 악령들은 그를 죽일 권한이 있으나 이 세상 지배 차원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인다고 해서 사단 자신에게 득 될 일은 없으니 그 의인은 영생과 영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단지 증오심을 충족시켰다는 것이나 그것이 대수가 아님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고로 협박 차원에서다. 따라서 천사들도 이런 일은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13. 조선 실록에 나타나 있는 영귀(靈鬼) 현상

인터넷 기록들을 훑어보니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전후로 괴이한 광채가 공중에 걷히지 않았다" 하는데 이렇게 사건 이전에도 나타난 광채는 무엇일까. 극지방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오로라가 야단스럽게 펼쳐졌다 한다. "이전 것과 다르다" 했으니 오로라가 아니라 별개의 것일까. 계시록에 있는 대로 "하늘의 전쟁"이니 땅의 전쟁 이상으로 그 기간이 장기간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순간적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걸쳐 전개되었음이 명백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참패에 이르자, 사단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이미 지상으로 쫓겨 내려오는 판이었고 사단은 [그런 엄청난 충격 여파를 감안한다면] 그 우두머리답게 그래도 한사코 버티다가 최후의 일격에 그냥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일거에 지상으로 곤두박질해 내리 꽂혔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그 지상 충돌 이전에 보였던 기괴한 광채들은 지상으로 내리 쫓기는 사단의 추종자들의 추락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역시 부질없는 생각들이고 그에 대한 설명을 못한다고 해서 퉁구스 대 충돌의 사건 진상이 흐려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 실록에 기록된 대로 하면, 태조 이후 왕실의 인물들[왕을 비롯한]이 영귀(靈鬼) 현상[도깨비, 귀신 등의 출몰]에 아주 예상 밖으로 많이 시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어찌 조선조 때에만 한정된 일이겠는가. 그래서 왕실에 참변이 일어나거나 왕이 운명할 때 혹은 기타의 경우에 왕실 공중에 괴상야릇한 빛이 감돌 때가 흔했고 또는 도깨비들이 횡행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불교 사찰 주변에 그런 이상한 빛이 감돌 경우가 있는 모양인데 진실을 모르는 이들은 그것을 무슨 서기(瑞氣)처럼 착각하나 이미 그 당시 왕궁 주변에 비쳐졌던 요괴 현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악령들의 소행임이 드러난다.

이 도깨비로 가장한 것이 다름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 악한 영물들의 변신술(變身術)인 것이다. 때로는 개나 말의 형상으로 때로는 형체도 없이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예로부터 "도깨비"라고 이름 지어진 괴물들이 바로 그런 악령들의 조화이다. 세종대왕도 예외 없이 그런 것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흥미 끌만한 그들의 특색은 오늘날 소위 UFO가 나타날 때의 현상을 그대로 재연(再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쉬이잇" 하는 바람이 이는 것과 같은 소리, 그리고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때쯤 되면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말들이 광란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는 등의 괴변(怪變)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ufo가 나타날 때의 특징으로 세계 곳곳에서 증인들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실록에도 꼭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 있다. 개나 말들이 그렇게 날뛰거나 짓는 것은 사람들과 달라 그들의 눈에 이런 악령들의 형체가 드러나 본능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동물의 눈에는 보여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은 16세기 정도에 해당되는 때다. 그러므로 오늘날 악령들이 인간들을 속이고 있는 것처럼 "외계에서 오는 외계인의 소동"이 아니라, 악령들이 옛적부터 자행해 오는 짓거리들임이 이로써도 뒷받침되어 증명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조선왕조 실록의 가치는 크다고 보겠다.
 

7.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대 홍수 이전에 노아가 당시 세상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경고에 유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세상에서 구출된 사람은 오직 노아의 직계 가족 8명이었으니 노아 부부와 아들 3형제와 자부들이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던 전날 밤 롯이 그 사위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 주었으나 그들은 롯이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경고는 받았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해버리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오늘날도 노아 때와 같으리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미리 경고하셨다[눅 17:26]. 이 경고 역시 "종교에 미쳐"[그들의 말대로 하면] 정신 나간 것쯤으로 취급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날 이 경고도 온 세상에 알려지지만 이에 유의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리고 "역사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망한다"는 음산한 이 경고가 스스로에게 적응되지 않도록 각자 깨어 있을 일이다.

천사의 역할은 악령들의 지나친 간섭이나 강제나 무리한 행동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어 그리스도의 예에서도 보듯이 기도할 때에도 힘을 돕고[눅 22:43] 시험 받는 때 외에는 항상 떠나지 않고[막 1:13] 보필한다[요 1:51]. 그래서 천사가 우리 각자를 둘러 진(陣)을 치고 있다 하는 것이다[시 34:7]. 믿는 각자에게 천사가 배당되어[마 18:10] 있어 섬기는 것이다[히 1:14].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당해야 하는 것에까지 개입하여 돕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각자 스스로가 남김없이 다 채우게 되어 있는 것은 철저히 우리 스스로가 채우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추호도 손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여 행동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이들 악령들의 존재와 활동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소위 "외계인"이라 하여 악령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므로 그 정체는 알아두어야 하겠기에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다시 새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알지 못할 때의 행동거지와 알았을 때의 언행과 사고방식이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부르짖고 스스로 정의한(正義漢)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다 그리스도께 나오라. 인간 개혁, 사회 개혁은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스스로 올바른 길을 따르고 선을 행할 때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옳고 바른 것]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배부를 수 있는"[마 5:6] 시대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시대다. 세상에서는 그런 정의란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낱 장밋빛 꿈이기 때문이다. 허송 세월하지 말고 진정한 싸움 곧 악령들과의 대결에서 이겨 영원한 생명의 세계 설계(設計)에 이바지할 일이다. 즉 그 나라 그 세계의 구성원들을 여기 이 세상에서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이 시한부 세상에서 남보다 더 빨리 뛰어 생존경쟁에서 아무쪼록 이기는 것을 생의 미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도, 이제는 그런 세상 술에 취한 잠에서 깨어나 홀연히 잠에서 깬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돌아와 더 이상 신기루를 뒤쫓는 일을 고집하지 말 것이니, 모든 것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뒤로 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 새 삶의 가치를 찾을 때가 바야흐로 이른 것이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람은 선하지도 않고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아름다우나 이미 인간은 그 스스로를 더럽혀 죽은 송장처럼 되어 있는 것이요 세상은 그런 이들의 집결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만이 밝은 미래요 결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 모든 세상 인생들이다. 누구에게나 문호는 개방되어 있다.

오직 그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구조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인 줄 확신하고 이를 근거로 영원히 살기를 바라지 않는 한, 이 영생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눈이 앞에만 위치해 있는 것처럼 상대를 보고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순리다.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이 결단코 사람 사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되던 때부터 모든 피조물[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구사하고 향유하는]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상호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영원한 삶의 구조다. 머리의 지시를 받는 것이 곧 순종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영생이다. 사람 사는 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공동체 의식으로 생을 일관한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생애와, 이런 극소수에 한하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의 삶과는 대조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특징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나'원균과의 삶을 견주어 보면 명확히 이해가 가게 된다.

바로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의 이치이다. '나'원균의 삶의 유형(類型)이라고 하면, 당시나 지금이나 이공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이런 사람들은 항상 극소수이기에] 우리 모두가 똑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선조(宣祖)를 위시해서 당시 조정 중신들 대다수,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당시 원균의 위치에 갖다 놓았다면 거의 예외 없이 원균처럼 행동했을 것이기에 하는 얘기다.

원균은 당시의 특수 상황에서 이공과 대조적 위치에 마침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색다른 이름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가 원균이다. 그래서 '나'원균이라 하는 이유를 앞에서도 설명했다. ‘이순신 정신’ 즉 공동체 의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람 사는 도리[의(義)를 행하고 선(善)을 행함-요일 2:29/행 10:35/요삼 1:11/롬 2:7,10/요 5:29]’의 핵심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다. 전란(戰亂) 이전의 이공의 불우했던 반생(半生)에서 보듯이 그러한 정신을 따라 자기 신념껏 살기를 작정하는 사람은 악령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한다. 이것은, 믿든 아니 믿든 무관하게 그렇다. 매양 음지(陰地)로만 맴돌았던 이공의 전쟁 전의 경력(經歷)이 그 증명이다. 대쪽 같은 그의 절조 있는 생활 이념에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있던 소인배들의 시기와 농간이 그로 하여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도무지 햇볕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나 오늘이나 세상은 같고 하나도 변한 적이 없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오죽하면 '애꾸눈 원숭이' 우화(寓話)가 생겨났을까. 어떤 원숭이가 길 잃고 산중을 헤매던 끝에 어디인가 갔더니 원숭이 동네이기는 한데 웬걸 모두가 애꾸눈이다. 정상적인 눈을 가진 자기를 모두 별종(別種)이라 놀리고 상대를 해 주지 않고 핍박이 자심하여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자기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었다는 그런 얘기다.

이른바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게" 되어 있다는 얘기다. 고로 이와 같이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양심대로 살기를 선호하는 이들은 성경을 믿든 안믿든 하나님을 믿든 안믿든 무조건 이 악한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응달에 처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형통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의인들의 삶은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이공도 그런 미증유의 국난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미련 없이 사라져 버렸을 인물이다.

이 같은 막중한 인생 교훈을 위해 그가 모든 인류의 본으로서 우뚝 선 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로 돌리리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해독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강조하는 삶의 법질서를 지키는 올바름[義] 그리고 선[善, 좋은 것]의 결과가 어떤 위업(偉業)을 이루는지 역사적 실례로써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베푸신 배려라고 확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왜냐면 이런 사례(事例)가 온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이처럼 이상적인 무대(舞臺)와 배역(配役) 설정으로 극적으로 부각되어 연출되기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와 같기 때문이다. 아마 유일한 예일 것이다.

동방으로 빛[진리를 상징한다고 믿어]을 찾아 말 달려온 기마 민족의 정신이 이와 같은 결정(結晶)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까. 빛을 상징하는 흰 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장례식을 어느 민족보다 성대하게 치른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세 신앙이 강했다. 왜냐면 이지적으로 생각해도 내세는 명백히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호도 처음 "조선(朝鮮)"이라 한 데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 사는 도리를 아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중국인들이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런 민족이기에 이와 같은 진귀한 역사적 교훈을 수확한 것이니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의미는 막중하다. 인간 불행과 고통과 죽음이 바로 이 공동체 의식대로 살지 못해 비롯되는 것이므로[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첫 사람 아담이 무시함으로써], 이 사람 사는 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완연하게 나타난 것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 질풍노도의 큰 대열을 이루자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진리를 찾아 동으로만 나아가려던 발걸음이었다면 이제는 방향을 왕년에 왔던 쪽으로 되돌려 일로(一路) 전진(前進) "말 달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지리적으로 정히 세계 중심[팔레스타인]을 택하셔서 사람이 되셨다. 이제 마지막 때를 당하여, "빛은 동방에서"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의 전파 면에서나 지구의 움직임에서 보나,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서의 영원한 삶의 이치를 땅 끝까지 달려가 알릴 소명(召命)이 우리 각자에게 부과되어 있다.

사단이 어떤 존재인데 얼마나 속임수에 능통한 자인데 가짜를 아니 만들겠는가. 거짓말에 한계가 없듯이 가짜를 만드는 데에도 제한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참으로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추려내고 솎아내고 걸러내는 작업에 역(逆)으로 활용하시는 터이므로[살후 2:11,12], 사단의 이러한 활동[세상 종교 즉 가짜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하게 하려는]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再臨] 날까지는 제지하실 이유도 없다.

따라서 사단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런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인생들에게서 하나님 대신으로 경배나 받는 따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사단은 오직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만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의 존망(存亡)과 직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원 얻는 이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일정한 숫자에 미달하면 할수록[계 6:11] 그가 이 세상과 더불어 무한정 남아 있을[다시 말해 마지막 심판을 지연시킬] 확률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관심은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데에 있다.

이슬람교는 그 교리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강압적으로 포교를 해 나가는 종교로서 정평이 나 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것이 아니다. 사랑은 강제와는 상극(相剋)이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마리아 숭상(崇尙)을 반대하는 것이면 무조건 이단시하여 때때로 박멸해온 것으로 역시 이름이 나 있다. 그러면 개신교도들은 말하기를, "개신교가 세력화하지 않으면 천주교 등쌀에 살아남기라도 했겠느냐?" 하고, 천주교도들도 말하기를, "콘스탄틴 황제로 인하여 기독교가 국가의 강력한 비호를 받지 않았다면 나중에 이슬람교를 감히 막아낼 수 있었겠느냐?"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리다. 초대(初代) 교회 이후 300년간 각종 핍박을 받았지만 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도"들이 곳곳에 넘쳐 나 없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는 법이다. 핍박을 당한다고 끊기는 것도 아니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다고 해서 창성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인생 구원 사업이기에 그렇다. 사단을 위시한 악령 일당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이나,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통제 아래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불변의 현실이다.

사단과 대등한[지금은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이후 절대적 우세로] 천사들의 대군단(軍團)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모두 인간에 대한 적법하지 않은 악령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제지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단 12:1]. 이와 같이 악령들이 이 세상에서 득세(得勢)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공정공평성과 공명정대하심, 원리원칙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인생들을 위해서나 영물들을 위해서나 결단코 편파주의로 나가시지 않는 까닭이다.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악령들의 소행이 가증스럽다고 해서 결코 무리하게 압박하시지 않는다. 이 때문에라도 악령 사단은 위에 설명한 대로 자기 계획이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지금까지 판단하고 있는 터이지만, 오직 그의 결점은 오만(傲慢)함에 있기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다소곳하게 믿지 않는 것을 마치 똑똑한 것처럼 착각함이니[인간도 마찬가지다], 믿어야 마땅하고 또 얼마든지 믿을 수 있건만 그의 오만함이 그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시인한다 해서 구원의 전부가 아니다. 그 말씀을 자기 구미에 맞도록 비틀어 억지로 해석하게 되면[벧후 3:16] 만사휴의요 도로무공이다. 이 역시 모두 오만(傲慢, 驕慢)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자만심[haughtiness, arrogance, pride]이라고 하는 것은 악령 사단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니, 멸망의 앞잡이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다.

개신교의 또 하나의 불신(不信,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형태는 미리 택하신 자가 구원된다는 허황된 억지 해석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제, 간섭에 의한 인생 구원이라고 선전하는 꼴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하나님을 편당, 편파주의라고 세상에 대하여 악선전하는 꼴이니 어찌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런 개신교나 천주교 등 소위 "기독교"가 들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부정할 수 없는 대체적인 현실이 되어 있다.

미리 택하셔서 우리를 구원 얻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를 사랑하고 죄 곧 불법을 미워하게 될 줄을 미리 아시고 그 믿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해 주시는 것이 미리 택하심의 의미이며,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음 즉 성령을 받은 권능으로써[행 1:8]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복음 전도 즉 그리스도의 증인이 됨에 있으니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이 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바 육신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음을, 믿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까지 가르친다. "성령도 없고"[유 1:19] 당연히 구원도 없는 사람이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이 로마서의 "육신"을 통해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롬 8:2].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었는데 왜 여전히 육신에 포로되어 있다고 하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해 주심을 통해 알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학문처럼 취급하는 데에서 오는 결정적 폐단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불교는 말하기를, 내가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가 나 때문에 있다고 한다. 왜냐면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인식되기 때문이라 하니,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억조(億兆)의 세계가 존재한들 무슨 의미가 있고 필요한가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나’만 아니라 ‘남’도 실존(實存)하니 공존(共存)의 세계다. 그러면 서로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 하니 그 결과야 뻔하다. 마찰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대립하니 불행이 끊이지 않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제압하려 하다가 드디어는 상호 파괴행위로 치달아 그래서 종국적으로 모두가 살인자가 되어 공멸(共滅)하게 된다.

진리에 터전해 있지 않으니 논리가 이와 같이 짜임새가 없고 엉성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만 아니라 남도 나를 없앨 수 있으니 결국 다 함께 죽음이요 멸망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저쪽이 선수(先手)를 쳐서 나를 해치는 경우를 대비해 저쪽도 결코 무사하기 않도록 내가 지닌 각종 보화에다 감쪽같이 폭발장치를 미리 해놓았다 할 때, 그래서 저쪽이 나를 없앤 후 이제는 주인 없는 재물이라 하여 그 보화에 손을 대는 순간 저쪽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할 때,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러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교가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존재하기는 하되 실제적으로 그 ‘나’라는 것이 ‘나’일 수가 없다는 고작 그런 멋적은 억지 논리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므로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바로 이것이 그 ‘나’가 실제 내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덧없다"[無常] 하고, 덧없는 데에서 인간고(人間苦)가 있으니, 결국은 ‘나’라는 것이 실제의 ‘내’가 아니라는 기상천외의 논법을 내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치고 메어치기를 해도 정상 논리는 아니다. 자기 세뇌(洗腦)에서만 통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므로 이런 인간고가 '없어야' 당연한데도 엄연히 '있으니',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는 ‘내’가 아니기에 그렇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이다. 이런 말 장난에도 넘어가 "과연 그런가보다" 하는 인생들이 없지 않아 있기에 그런 말도 통해지니 누가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라 했던가. 어리석고 둔하기가 동물만도 못하다.

이른바 사람이 사람된 소이(所以)로서 언어(言語)를 사용한다면서 언어의 혼탁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내가 있으니 있다고 하는 것이지 멀쩡한 내가 왜 없다고 하는가. 내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는 것이라는 바로 이것이 ‘연기(緣起)’인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고로 세계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하기 위한 말', '말을 만들면 말이 되는 말'의 논법이다.

모든 것이 연(緣)하여 일어나는 연기생(緣起生)인데, 고로 나라는 것이 실제는 없기 때문에 이런 인간고가 있는데, 따라서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움직이니 이것이 무명(無明)이요 미망(迷妄)이라는 당치도 않은 논리를 그들은 내세운다. 실상[내가 없는데도]이 아닌 허상[내가 있는 것처럼]만 붙들고 있기에 그러하므로, 자기가 없음을 인식하게 될 때 욕심이 일어날 리 없고, 욕심에서 해방되니 자유를 만끽하고 평안이 오고 희열이 따르고, 결국 일체의 괴로움이 소멸된 안락의 세계를 이루니, 이것이 열반(涅槃)이요 해탈(解脫)이고 깨달음[覺]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유'가 해탈의 본질이며 속성이라는 것이다. 나만 아니라 모두가 그런 인식을 하게 될 때 세계 평화는 오는 것이요, 내가 있어야 영생 극락도 찾게 되고 지옥 멸망도 기피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나라는 존재부터가 있지 않으니까 그런 저런 갈망이나 갈등이나 공포에서부터도 해방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전제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니 결론도 제 멋대로다. 순수하게 자기 세뇌(洗腦), 자기 최면이다.

이런 논리가 억지가 되는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라는 "연기(緣起)"일진대, 그러면 우선 나 자신이 어째서 생겼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그러면 그 위로 또 위로 자꾸 올라가 최초의 부모는 어디서 생겼느냐 할 때 바로 나에게서 곧 이 나 자신에게서 생겨났다는 결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과 관계에서 반드시 그 첫째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첫째 원인을 부정하게 되면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는 순환(循環)만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머리도 꼬리도 없다. 그런 논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일원인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제일원인을 시작점으로 해서 연기(緣起)가 작동되는 까닭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전제했지만, 동시에 ‘나’만 아니라 ‘남’도 엄존(儼存)함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만 아니라 그 남이란 것이 어디서 떨어졌고 솟아났다는 것인가. 그 최초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으니, 그러면 방금 지적한 대로 내가 남이고 남이 곧 나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남을 비롯해 온 천하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덧없음을 한탄할 것도 없고 말 것도 없다.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분명히 인간고(人間苦)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할 수 없는 까닭에 이를 탈피하려고 그런 억지 논리라도 내세우고 있지 않는가.

제일원인으로서의 창조주를 억지로 외면하려 들기 때문에 첫 단추 잘못 끼운 바람에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혼돈이다. 논리의 혼돈, 더 정확히 말하면 모순이요 자가당착이다. 모순이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자체 증명이다. 원인은 외면하고 장차의 전망(前望)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채, 현재의 결과만을 놓고 인과 관계를 억지로 꿰어 맞춘 엉성함이니 이런 것이 반(反) 논리다.

그러면 첫 단추부터 바로 끼운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라.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그런 관점에서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독존[獨尊]이 아니라 독존[獨存]도 좋다. 나라는 개성(個性)은 우주 천하 유일하게 오직 나뿐이기에 그렇다. 나 외에 또 다른 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나’ 그리고 ‘개성’이, 나만 아니라 세상에 부지기수다. 색깔이 제각각이니 모두가 별개로서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고로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도 나 개인의 '세계 중심'임을 유지 보전하는 비결은, ‘한 몸’의 체제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임과 동시에 또한 말 그대로 여러 개체가 조합하고 조화하여 통일되게 움직이는 이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대별(大別)하면 머리와 몸 관계다. 머리는 몸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존재하니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이다.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할 뿐이지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자기를 위하려 해도 위할 수가 없으니, 위하는 경우에는 이 ‘한 몸’ 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부적으로 살필 때, 몸을 이루고 있는 구성 인자 중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각 지체(肢體) 각 부분은 그 나름의 엄연한 자주 독립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한 몸'이라는 세계에서 '자기'라는 개성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아무리 작고 미미한 존재라도 그 한 몸 구조 속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구성 인자인지라 당당히 칙사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

그 중요성은 머리의 중요성만큼이나 인정된다. 왜냐면 한 몸 구성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로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당당히 그러하다. 다시 말하지만 한 몸을 이룬 구조는 그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체제다. 머리도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모든 지체 각 부분을 위하는 위치다.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각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 보듯이 세포 하나라도 그 중요성은 온 몸이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그래서 그런 세포 하나라도 자기 개성이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몸의 구성 인자’라는 위치에서는 충분한 자주 독립성을 구가함이니.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나[그 세포 또는 그 지체 등 어떻게 표현해도 가하다]'를 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비로소 여기에서 ‘세계가 바로 나이고 내가 세계’라는 등식(等式)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근거에 의해 성립된다.

왜냐면 나를 위하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세계에서 주인이요 나머지는 나를 위하고 섬기는 종이다. 머리를 포함해서 그렇다. 사랑으로 하나 됨이요 사랑은 서로 간의[피차간의] 종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당연히 그러하니 즉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 각 부분에게 종이 되어 섬기며 그들을 위함은 물론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요 동시에 주인이 되는 오묘한 삶의 지혜가 바로 이 '한 몸되어 있는' 삶의 체제다.

따라서 나의 색깔은 파랑이지만 주위의 모든 색깔을 형형색색으로 다 골고루 그리고 충분히 내가 원하는 대로 누리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이상적이냐. 누가 내 마음대로 못한다더냐. 주위의 모두가 내 마음대로 하도록 각자 스스로를 그렇게 기꺼이 나를 위해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강제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진해서 나를 섬기는 터이니, 내가 어찌 내 마음대로 못하리요.

단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따른다. 절대로 나 자신 나를 위하지 않아야만 그렇게 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나 전체를 몽땅 털어 비우듯이 남김없이 줌으로써, 내 자신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까지 충만히 채워지는 비법, 비결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그대로다.

때문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하신 것이다. 방법은 오직 이 하나밖에 한 몸의 체제로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더 없다.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하려 하니 그와 같이 말도 되지 않는 억지 논리로 자기를 기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못하는 현실이니 실제 내가 없는 것이다"-이 얼마나 과장되고 허황된 바람 잡는 말이냐. 내가 왜 없다는 말인가.

내가 그것을 탐할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 "나는 당신의 것으로서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니 더 할 말이 무엇인가.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러하니, 내 스스로는 무소유(無所有)이면서도 만유(萬有)를 소유하는 것이다. 즉 만유의 주인이다. 나[自]라는 존재는 엄연히 있으면서도 남[他]들과는 일절 충돌 없이 도리어 그 모든 남들을 내 것으로 순리적으로 삼을 수 있는 삶의 최고도의 지혜다. 이런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공동체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결코 낯설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진리일 뿐이다.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작동되기 시작한 삶의 기본 원리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타(他)의 간섭이나 강제가 없이 스스로 즐겨 하는 데에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아니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이니 똑같은 일이지만 남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리 속박으로 비쳐지더라도 내가 그것을 즐김으로써 기뻐서 자진해서 하니 내게는 분명히 자유이다. 가치 기준을 외부의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두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는 또한 주관적이 된다. 악인 또는 죄인도 자기가 하고 싶은 악행을 마음대로 하니 똑같은 자유의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렇게 자유를 행사해서 억압 받지 않고 마음껏 움직인 결과가 무엇이냐 할 때 상호간의 살상 파괴다. 왜냐면 나만 아니라 남들도 나와 똑같은 자유를 행사하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내가 자기 마음에 안들면 나를 미워하여 압제를 하거나 없애 치울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다시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마음대로 한다고 진정 자유가 아니고 행복이 보장되지 않으니 나를 포함해 모든 이에게 행복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스스로 자진해서 하는 행동이 진정 자유라는 것이다. 일정한 테두리가 정해져 있는 자유다. 그러면 그 일정한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한 몸의 구조와 체제 내에서의 자기 부인인 것이니 이렇게 한정된 의미를 정한 다음에 비로소 자유를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자유, '산' 자로서의 자유다. 이 자유는 어디까지나 행복한 삶과 연계되어 있다. 행복한 삶과 연계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살인 것이다. 내 것이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 못하니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세계 중심이므로 모두가 내 것이 되어야 하고 내 것이면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게 못하니 내 것이 아닌 것이요, 내 것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내 것이 아니라면 내 자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렇다-이런 미숙한, 지능도가 말도 못하게 낮은 추리는 불교 외에는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아주 어렵다. 상식이 통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우주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전제를 다는 것 자체가 엉망이고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나 외에 나와 같은 인간이 부지기수다. 그러면 '세계 중심'이 그 숫자만큼이나 많다. 내가 중심이라는 것부터가 전혀 근거가 없는 허공을 움켜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면 아예 입밖에도 내어서는 안될 말이다. 왜 현실을 무시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사색(思索)을 하는가. 그런 공상(空想)은 백해 무익이다.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까 무리(無理)가 만장(萬丈)이다. 나만 아니라 모든 이가 제각기 '세계 중심'이 되어 있으니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기커녕 처음부터 내 것이라는 것은 그 중에서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느니,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느니 하는 설정(設定)부터가 소아(小兒)만도 못하게 유치한 것이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소위 "어른"의 어른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다.

내가 가졌으니 무턱대고 내 것인 양 떼를 쓰는 철부지 아이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순자의 성악설, 맹자의 성선설만도 못하니 왜냐면 이 사람들은 인간 심성을 두 가지로 놓고 구분해볼 줄은 알았는데 그런 상식조차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 '나'란 것[主體]이 악인가, 선인가 하는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빼먹은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현실성을 완전히 무시한 탁상공론이라는 증거이다.

악이냐 선이냐 하는 이것부터 가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것"이라느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느니 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악은 무조건 세상의 일체를 자기 것인 양 덤비는 욕심이 특징이고 선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대립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가지로 처음부터 설정해야 함이다. 그런데 그냥 일률적으로만 처리하려 하니 상식에서도 벗어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 체제, '자기 부인'과 같은 훌륭한 해결책이 없다면야 그런 불교의 논리도 솔깃해져 들을 만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이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 정연한 성경의 가르침에 비하니 자연스럽게 이런 소리가 아니 나올 수가 없다. 길을 두고 뫼로 가겠는가. "내가 없다", "없어야 한다"로 구두점(句讀點)을 찍은 것은 일단 충분히 공감이 가는 바다. 모든 악과 불행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부인으로써 해결할 일이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 자신을 "없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배 고프고 목이 마르면 왜 밥 그릇에 손이 가고 물 그릇에 입이 가는가. 내가 살아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짓 없는 진실된 증명이 아닌가. 그런 허황된 전제를 깔아서는 그 어떤 논법으로든 정상적인 결론에 이를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내가 그것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면 그것은 분명 내게 속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을 결단코 원하시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아도 즉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해도,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스스로 알아 판단하여 행하는 것을 원하신다. 죽인다고 협박을 해도[강제], 또는 별별 것으로 회유를 해도[간섭], 거기 개의치 않고 오직 내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 인생 구원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주장하듯이 생명[영생] 하나만을 주시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자를 만드심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고후 5:15/롬 14:9]. 이 공동체에서 머리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 된다. 여기서 "유신론"과 "무신론"이 나누어진다. 왜냐면 인간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서 '머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무신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될 일이 아니다. 이 머리 역할은 너도 해서는 안되고 나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서로 머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싸울 수밖에 없다. 너와 나를 생성시킨 제일원인이 그 머리 역할을 하는 법이다. 인간 삶의 행복과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창조신의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데에서 칸트의 소위 '요청적 유신론'이 나온 것이다. '필요성'에서다. '바람 잡는 것이 아닌 당당한' 논리적 귀결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필요성은 그와 같이 되도록 처음부터 짜여져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런 삶의 결과가 되도록 작정하시고 이 의도하에 피조물[자연계에 속한 기계적 생명체가 아닌 '지, 정, 의'를 구사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인격성을 지닌]을 만드신 것이다. 피조물을 시종일관 사랑하여 위하심으로써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려는 의향이 없이 피조물을 만드실 리 없다.

자기가 낳았다는 단순히 그 사실 때문에 헌신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이 바로 이 창조주의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창조주의 마음을 피조물은 본성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처벌하실 리 없다. 이를 따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한 몸의 이치대로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으니 피조물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각 지체 상호간 위하게 되어 있는 그런 이치를 말한다.

이 이치가 당연히 생명의 법질서가 되어 마땅한 것이다. 즉 머리를 위하고 이웃 지체들을 위해야 하는데 이 이치를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니 범법(犯法) 행위다. 알면서도 어기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 까닭에 용서가 되지 못한다. 한 몸 체제에서 그런 것은 암적(癌的) 존재이므로 암세포는 제거하지 않으면 주위로 전이(轉移)가 되고 몸 전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그래서 부득불 절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또는 멸망이 지니는 의미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명한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이상과 같은 불교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滅)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 "연기(緣起)"의 논리라 한다면, 바로 그 논리대로 할 때 이렇게 된다. 즉 "조물주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존재하고, 눈에 보이는 피조물이 존재하니까 당연히 조물주가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이고, 조물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조물주를 내 마음 가운데서 없애면[멸하면,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도 생명의 세계에서 사라지는[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결론을 설명상 "연기2"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면 ‘연기론’의 내용과 본질에서는 분명히 똑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1"은 "멸한다"는 데에만 논리를 집중시키고 이 결론만을 도출하기 위한 편법이다. 무엇을 멸하려 했던 것인가 하면, 생로병사의 인간고를 멸하려고 처음부터 시작했었다. 그래서 거기에만 외곬으로 편협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만사 대칭 원리로서 인과(因果)가 분명히 있는 법인데도 즉 원인이 있은즉 결과가 있는데도, 원인은 완전히 접어두어 젖혀놓고 결과만을 가지고 그 인과관계를 규명해 내려 하니 그렇게 엉뚱한 데로 나가 버려, "연기1"만 생각하고 "연기2"는 정작 생각하지 못한 불찰이다. 동(東)과 서(西)가 분명 양립하여 존재하는데도 동쪽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리고 뒤로 돌아서서 서쪽을 볼 생각을 않으니 더군다나 동쪽 외에는 없다고 고집하고 있으니 서쪽이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서쪽을 볼 수가 없다 해서 서쪽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꼴이다. 따라서 서쪽은 분명 존재하건만 그렇게 고집 부리는 사람에게는 서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전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과 같다.

앞에서 우리가 대칭[대립] 원리 즉 삼위일체 원리부터 설명하고 강조한 것이 이 때문이다. 만사 양면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이 엄연한 원리로 이제는 나타나 입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3운법칙의 구조가 그 증명이 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알기 쉽도록 되어져 나타나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짝의 원리’를 무시하니, 모든 설명이 방향 감각을 잃고 "어려워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고매한 진리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이 되어 버렸으므로 요령부득이 되어 이해 못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하니 알아듣지를 못해서 "어렵다"고 하게 되어 있다. "멸한다"는 의미만을 놓고 보아도 양면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멸해서 '긍정적인 면'이 있고 '부정적인 측면'이 반드시 있음이니, 한 쪽만을 보면 절대로 진리일 수 없고 외려 엉뚱한 오류로만 계속 흐르게 마련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논쟁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빛의 한 가지 특성만을 고집하면 안되는 일이었다. ‘입자’라는 특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파동’이기도 하다"는 보어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어야 마땅한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외고집'이 되어 있다. 멸해서 생기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무엇이냐 하면, 생로병사의 인간고는 멸해야 하고 죄는 멸해야 하지만 생명까지 멸하고 행복까지 멸해서는 안되는 바로 그런 뜻이다.

"연기1"은 바로 전자에 위치해 있다고 자부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후자와 전자 모두에 걸쳐져 양면성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음이다. 다시 말해 인간고를 멸함과 함께, 생명과 행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까지 "멸해"[없애] 버리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멸한다고 해서 멸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따라서 ‘생명을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간단히 말해, "연기1"로 해서 인간고를 해결하는 것과 "연기2"로 해서 인간고를 해결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또 나은지를 비교해 볼 일이다. "연기1"은 현존(現存)하고 있는 자기를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억지로 둘러대는 자기 최면, 자기 세뇌에 있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 또는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는 궤변(詭辯)만 연이어져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게 된다. 마음이 사람됨을 정하고 마음 하나에 행복감과 비탄지심(悲嘆之心)이 뒤바꾸어지는 것이야 누가 모르랴. 그래서 "마음 잘 먹는다", 혹은 "마음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생겨난다. 그러나 "일체"는 아니니, 마음이 관장(管掌)할 수 있는 그 특유의 ‘일체’가 있어 거기에만 한정되어 적용될 뿐이다. 모든 것을 통틀어서의 ‘일체’는 아닌 것이다.

마음[情神, 靈]의 영역이 있고 그와는 반대되는 영역[肉體, 物質]이 양립하여 양면으로 존재함이다. 따라서 양면을 헤아림이 없이 일방적, 일변도(一邊倒)임이 여기서 드러나진 것이니, 이래 가지고는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런 논변(論辨)이 진리일 수도 없다. 사람의 존재라는 것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二重) 구조 즉 양면성의 존재임을 왜 기억 못하는가. 영혼만이 대수가 아니다. 육체라는 그릇에 반드시 담겨져야 할 내용물이 영혼이다.

연기론(緣起論, 불교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과론이다)대로 하면,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마음에 공중을 나르고 싶다고 공중을 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비행기 등 날 것을 발명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즉 그런 용어가 애용(愛用)되는 근거가, ‘마음에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내 마음에 ‘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겨나 있는 결과물이던가? 아닌 것이다.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없는 것이 '연기(緣起)' 식 논법이다. 육체는 죽어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되어 있는데, 마음은 그러면 어디에 가 있다던가? 마음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목표한 바 "멸(滅)해짐"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고로 육체가 없어지니 영혼[마음이 작동하는]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그대로 남되 제대로의 기능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은 영혼은 원래 영원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육체는 시한부 생명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어도 저것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둘은 별개다. 별개가 아니라 동일하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만 관찰하려 드는 오류를 범한다. 이런 것이 '아인슈타인의 외고집'인 것이다. 무상한 것은 자연계이지 영계는 무상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다. 양면성을 무시하는 절대 오류 속에서 그런 망상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시한부 육체와 영원성의 영혼을 뒤섞어 꿀꿀이죽으로 인간을 창조해놓으실 리 만무하다. 이런 사실 때문에라도 이른바 "과학자"들은 영혼 자체를 부정한다. 왜냐면 영원성(永遠性)과 일시성(一時性)[또는 유한성(有限性)]이 함께 진화(進化) 또는 저절로 생겨날 수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진화’ 또는 ‘우연(偶然) 생성’이라 할 때는, 이와 같은 극과 극의 양립(兩立) 속에서의 조화 통일[영혼과 육체로 인간이 구성된]로 보지 않고, 이를 전적으로 무시하여 반드시 단일체(單一體)로서만 인정해야 하는 까닭이니, 여기서도 진화론, 무신론의 형편없는 맹점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불교 교리도 이런 모순 속에 갇혀 있어 요동도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주장하는 환생, 윤회, 전생 등은 영[혼]을 인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육체는 이전의 그 육체가 아니던가. 육체가 같아야 환생(還生)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육체가 전혀 다르고 복제(複製)가 아닌데도 ‘환생’이라 하니, 이는 ‘영’과 ‘육체’가 별개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래도 이지적이어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관성이나 있다 하겠으나, 불교는 그런 고집도 없는 맹목적인 미신이라 하는 것이니 환생, 전생, 윤회만은 한사코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존재와 영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이 육체와는 별도임을 알면서도 주장하기로는 육체의 측면만 말하고 영혼 또는 영계의 실존은 부정하는 논리의 모순 속에 있어 그 맹목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육체는 변천 무쌍하여 상주(常住하지 않고 무상(無常)하나 영혼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의 말대로 "환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는 것은 육체가 속한 자연계의 현상일 뿐이다. 그와 대립되는 세계인 영계에 속한 영혼은 "생멸(生滅)의 변화가 없이 늘 그대로 있음"이다. 같은 동양이라도 중국 땅에 있는 사람들은 만물을 음과 야이라는 이원으로 나누어 볼 줄 알아 삼위일체 원리에 가까운 것을 말했는데 왜 이 사람들의 인도 철학은 그렇게 만물을 살펴 보는 지혜가 없었던가.

성경은 인간이 원래 상주하여 영계에 있다가 범죄하여 오늘날과 같은 무상의 세계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하여 죽음의 고통과 불행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도 시인하는 인간고가 이래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상태로 즉 무상하지 않은 여상(如常)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왜 현재의 이 비정상 상태에만 머물러 죽쳐 지내면서 무상만을 두고서 이렇다 저렇다 입방아만 찧고 있으니 한없는 어리석음이 아닌가. 스스로 이다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어찌 감히 남들을 가르치고 인생을 제도(濟度)한다는 큰 소리만 치고 앉았는가. 앉아 있지 말고 감연히 일어나서 사면팔방 진리를 찾아 헤매어보아야 찾든 말든 결판이 날 상황이 아닌가.

악신이 인간을 속이기 위해 전생이니 환생이니 윤회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네피림"[악령의 후손으로서의 인간 별종(別種)들]에게만 해당된다. 이미 설명한 대로 "네피림"이 죽은 다음에 지상을 방황하는 혼백들이 귀신들이다. 자연법칙에 원래부터 구애 받지 않는 영물들이므로 그 후손들인 네피림은 비록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인간들이 되었지만 엄밀히 자연법칙에 얽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 귀신 중 어느 누구든 인간 육체의 모태(母胎) 속으로 들어갔다가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면 인간이 되는 까닭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 나름의 질서는 있을 것이다.

영원성과 시한(時限)성은 본질이 다르므로 따로따로 창조됨으로써 조합되고 조화 통일되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영혼[영계에 속하여 영원한]이 조성된 것이 그 예이고 증거다. 그런 창조의 결과로, 시한부 생명은 시한부 생명에서 나온다. 즉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가 낳고 낳음으로써 생육 번성한다. 그러나 영원성을 띤 것은 이미 영원한 존재로부터 나왔으므로 그 존재는 항구적이고 육체 식의 낳고 낳아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영원성을 띠는 존재는 반드시 영원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즉 영원하신 조물주에게서 나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다[히 12:9/사 57;16/슥 12:1]. 그래서 이런 두 가지 양립 현상[영원성과 유한성, 영혼과 육체]은 창조가 아니면 절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함이다. 같은 것이 자기 닮은꼴을 내지 않는다면, 개가 가끔 가다가 소를 낳을 수도 있고 사람을 낳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영혼이기 때문에 영혼만은 불멸이다.

반면에 육체는 항상 존재하지는 않는다. 없어진다고 해서 인멸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단지 형태의 변천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에너지 불멸의 법칙(energy 不滅 法則)을 말하게 된다. 그래서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흙의 성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육체라는 형상만 소멸된 것뿐이다. 그래서 이런 소멸되는 성질의 것은 영원한 영적(靈的) 동인(動因)을 얻게 되면 영원한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가 있음이다.

아담이 처음에는 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그 속에 영혼이 조성되고 연하여 영계인 에덴낙원이 창설되면서 거기서 그 몸은 신령한 몸을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이 인간의 육체 곧 죽은 자로서의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육체지만 과거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었던 것처럼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면 아담처럼 당당히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몸의 구속"[롬 8:23]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사리를 따라 인생 구원을 설명해야 되는 것이지 덮어놓고 "있는 것도 없다, 없는 것도 있다"는 식으로 궤변을 토해내니 자기가 생각해도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하고 도저히 납득 불능이라 그토록 심산유곡에 들어가 수련을 해도 이지적으로는 도가 깨우쳐질 리가 없다. 때문에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나누어져 이 나라는 선종이 득세(得勢)하고 있는 판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유수한 이지적인 민족인지라 교종으로는 발붙일 틈이 없고 선종이 그나마 나은 까닭이다.

시한성을 띠는 것도 하나님께서 애초에 친히 만드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연계가 먼저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육체를 물려주고 물려받음으로써 존속한다. 그러나 영혼은 불멸이다. 각기 특유의 개성과 고유의 독립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말 그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독존(獨尊)을 독존(獨存)이라 해석해도 좋다. 우주 천하에 그만의 개성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 우주에 '나' 외에 다른 '나'는 없기 때문이다.

쌍둥이라도 육체는 엇비슷하나 영혼은 별개인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영은 하나님 친히 지으심에 속한다 하여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시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혹 인면수심(人心)이 아닌 ‘인면수체(人面獸體)’ 또는 수면인체(獸面人體)가 있다면 그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의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악령들의 장난에 의한 조화술(造化術)일 뿐이다. 이렇게 불교 교리는 모순이 분명하다.

불교만 아니라 성경을 믿는다는 기독교[천주교나 개신교] 역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지 않고 인간이 만든[혹은 사단의 조종에 의한]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 그 내용 역시 바로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리가 아니니 모순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바꾸면, 진리는 그 자체 내에 모순을 담고 있지 않다. 무릇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진리가 아니라는 자체 증명임을 명념해 둘 일이다.

불교에 선종이 있고 교종이 있듯이 선승(禪僧)이 있고 학승(學僧)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는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주 유치한 것이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선(禪)이기 때문이다. 이 선도 다름아닌 자기 세뇌(洗腦) 혹은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 논리로는 요령 부득이니 그렇다면 석가가 믿은[깨달은] 대로 그래서 설파한[포교(布敎)한] 그대로를 답습하여 자기 자신도 같은 과정을 거쳐 그런 경지에 들어가자는 참으로 한심한 강단(剛斷)인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라는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따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없기 때문이고, 내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번민하고 고뇌하여 왔던 것’ 자체가 ‘실제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스스로에다 강다짐으로 욱여 넣기를 한도 없이 되풀이하게 됨으로써[또 그렇게 하니] 진짜 그런가보다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어 있다.

착각은 실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허상이다. 이것이 선(禪)의 실상이다. 즉 자기 자신을 그런 사고방식의 반(半) '인간 로봇'으로 스스로 만드는 작업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 번뇌에 사로잡혀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등의 일우일희(一憂一喜)를 하지 않으니 "해방되었다" 하고 "자유"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난데없이 영원성에다 갖다 붙인다. 그 영원성이 어디서 연유되어야 한다는 그런 논리적 설명도 없다. 그냥 무시해 버리고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연결해놓기만 한다.

마음으로는 그리고 말로써야 무엇인들 못하랴.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돌고’ ‘우물 안 개구리’와 같으니, 왜냐면 ‘자기 내부’에서 자기 스스로가 만든 자기의 정신적 세계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찻잔 속의 손오공일 뿐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주관성(主觀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불교가 시작한지 2500년이 흘러도 내처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입산수도를 되풀이한다. 진리의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그 고유[특유]의 정칙(定則, formula)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객관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그 법식(法式)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달에도 가고 하는 것은 화성에도 우주선을 띄우는 것은 진리[이 경우 자연법칙]의 객관성 및 일관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진리의 객관성에다 토대를 두게 되면 개인마다 저마다 항상 뿔뿔이 새로이 시작하는 것처럼 입산수도, 정진할 필요가 없다.

과거에 밝혀진 혹은 발견된[스스로 깨달아(覺) 알게 된] 법식대로 하여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진리는 항상 평범한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니 만유 자체가 그런 진리덩어리로서 진리를 따라 만유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처처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므로 그렇다. 그런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마다 그 스스로 과거 석가가 하던 그 양식대로를 되풀이해 가려고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자기를 속이려 드니, 남도 아닌 자기를 속이려는 작업인데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달랠 것인가, 협박을 할 것인가. 무척이나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따라서 다시 묻노니, ‘인간고’를 ‘멸하는’ 방법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되는 이치로써 그런 인간고를 해결하는 것과 나 자신을 ‘없는 것’으로 그와 같이 자기 세뇌를 통해 이루었다는 그런 해방감으로써 해결하는[해결되었다고 믿는] 것, 어느 쪽이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가?

‘인간고’ 해결이라는 목표[목표의 성취 여부는 차치하고라도]에서는 차이가 없다. 불교에서는 그 해결했다는 것을 두고 "해탈"이라, "열반"이라 하고 그것을 자유의 경지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바울 사도(使徒,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거나 깨달아 전파한 증인[證人])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자기 '자랑'[boasting]을 두고 단언한다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다. 자진해서 즐겁게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했으니 그 이상 가는 '자유'의 경지가 있는가?

이것은 비명(悲鳴)이 아니라 환성(歡聲)이요 탄식이 아니라 승리의 개가(凱歌)다. 사람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죽는 것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으니, 모든 인간고가 이 죽음의 영역인데 죽음 자체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날마다 즐긴다는 뜻이니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 비결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심으로 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서야 비로소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안에 계시는 이유가 자기를 제압하고 억제하고 조종하기 위함인가? 그 반대다. 자기를 사랑하시되 ‘죽도록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즉 자기 전부를 다 바치시고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그 사랑으로[갈 2:20] 내 안에 나와 함께 사심이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으면 살아나신 후에는 어디에 계시겠는가. 의당히 나와 함께 계시고 영원히 함께 사시지 않겠는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실 정도의 사랑이시니, 그가 내게 명령하시는 그 무엇이든, 그 뜻이라면 그 무엇이든,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왜 날마다 죽는가,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 안의 교회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밑거름으로서의 나의 죽음의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골 1:24/고후 4:12]. 도대체 이 죽음과 고난의 세상에 구원 받은 우리를 그대로 남겨 두실 까닭이 없다. 오직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우리 위한 희생 제물로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친히 세상에 보내심이다[요 20:21,22].

하나님 앞의 제사장으로서 기도하고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고 하나님의 양떼들을 충실히 먹이는[21:15,17] 등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하도록 하심이니 그래서 우리가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구원자의 역할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이신데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가 되어 머리의 일을 대행(代行) 함이다. 그러나 우리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머리는 불가분이므로 머리 친히 우리 각자와 함께 일하심은 당연하다[고후 6:1].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한신학/한과학 (2)ㅡ3운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