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21세기의 바울 사도 (2)ㅡ이병철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2)ㅡ이병철 질문



9.  ‘21세기의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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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그가 그 칼을 갈으심이니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준비하고 계신다. 죽일 기계를 또한 준비하심이니 그 만든 살[arrow]은 화전(火箭, 옛날 싸움에서 불을 붙여 쏘던 화살. 또는 화약을 장치한 화살; 이 구약성경이 수 천년 전에 기록된 것임을 감안해야)이다"[시 7:11-15] 한 대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요 그리스도께서는 재판장이심이다. 이스라엘의 공략(攻略) 이전에 가나안 거주민들이 태평하게 지낸 것은 "가나안 땅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임을 성경[구약]은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이 이방인들의 죄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막대기[쳐서 벌을 내리는] 역할을 한 이스라엘은 무사했던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범죄할 때는 어김없이 징계를 받았고[이방 민족의 침입을 당함으로써]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파괴되고 완전히 쑥밭이 되기도 했다. 즉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회장이 질문했던 인간고 즉 죽음과 고통과 불행은 죄의 결과 곧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그 응분의 결과로 임하게 되어 있는 죽음의 결과가 곧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분노(忿怒)"[롬 2:8,9]인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거세(去勢)를 당하여 고자(鼓子)가 되어 버리자 그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한다. 성경에도, 악인은 흥왕하고 창성하는데[합 1:13-17] 의인은 항상 ‘매 꾸러기’와 같다고[시 73:13,14] 하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 대목이 있다. 사마천이 "天道是耶非耶[천도시야비야-하늘의 뜻이 옳은 것이라면 과연 그런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외친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인간사(人間事)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것이다. 즉 악인의 형통은 이 세상 지극히 짧은 한 때뿐이요 영원히는 아니라는 것이다[시 73:18-20/합 2:3]. 짧은 한 때뿐인 이유가 당당히 있으니 악인들로 하여금 거기 스스로 빠지게 만드는 함정, 올무, 덫으로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미끼를 넣어두어야 동물이 그 덫에 걸리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악인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맛에 불의를 좋아하는 그 버릇을 버리지 않게 됨으로 인하여 스스로의 악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영물들이 악과 선으로 분류되듯이 이와 같이 하여 악인이 분류되는 것이다. 반면 의인은 이렇게 세상이 온통 자기중심이어서 자기중심으로 나가야 형통하는 까닭에 이와 반대로 나가 의를 행하고 선을 따르면 갖가지 역경에 처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것을 한사코 따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을 증명함이 된다. 즉 "거룩한 천사"들처럼 의인으로 분류됨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의 잠깐이나마 참아야 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 살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합 2:4]. 악인을 걸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인 역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히스기야 왕을 시험하셨듯이 다루어 보시는 의미임은 물론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시험이다. 그러나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 범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그리고 의인은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이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에 의인은 없다.

구원 얻는 것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일이요 구원 얻고 끝까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요일 2:29/요삼 1:11] 것도 당연히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그러하다. 따라서 의인으로서의 "선을 행했다"고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것을 다했다"[눅 17:10]고 해야 옳다 하신 것이다.

악을 행해도 그 악에 대한 보응이 즉각 실행되지 않음은 물론이지만 의를 행해도 그 보답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위의 설명처럼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 강제가 아니 되고 순수한 우리의 자발적인 의사와 의지에 의한 것임을 입증함과 더불어, 악을 좋아하는 자들은 다 여기서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 내어지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이나 히스기야를 시험하신 것은 비록 당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지만 이러한 의미의 하나님 시험임을 미리 그림자로 나타내어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요 따라서 죽음의 영역인 고난·고통·불행 일색이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비정상이므로 거기 따라 모든 것이 비정상이지 정상일 수도 정상일 리도 없다는 사실 역시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도 악인이 흥하고 잘 되며 반면에 의인은 가인에게 참살당한 아벨처럼 되는 것이니 세상 구조가 그런 것이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이 신이요 지배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구원 받을 사람은 받고 그리고 의인과 악인을 분류해내는 의미 외에는 없다.

이 세계 자체가 죽음의 비정상이므로 이 세상이 종막을 고해야 생명과 정상적인 것이 비로소 제 자리에 들어 차게 되어 사필귀정이 된다.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부유해지는 등의 일은 순리를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에게 절하면 즉 죄를 짓는 등의 자기중심으로 살면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이 억지로 무리하게 강탈하듯이 해서 향유하는 이른바 세상의 "위로"[눅 6:24/16:25]인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 역시 "보내심 받는 것"이라 함이니 정상 상태의 하늘["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엡 2:6]에서 비정상 상태의 이 세상으로 파송(派送)되었다는 뜻이므로, 우리 육체도 보내심을 받은 의미 그대로 이런 비정상 상태의 육체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이다. 그런즉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계 21:1]이 전개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죽음의 비정상 상태는 지속된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죽게 되어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니, 인간[아담]이 그 자유 의지로 생명의 법[창조된 생명을 스스로 유지 보존하도록 되어 있는 방편,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법]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니까 그 반대되는 것 즉 생명 아닌 모든 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이다. 그래서 생긴 죽음이고 고통이니 이른바 "인간고"다.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된 결과이지만, 그렇게 먹은 동기가 바로 자기중심이니 곧 머리로서의 하나님 지시를 어기고 버린 것이다.

하기야 만유 양면성의 원리에서 생명을 창조하셨고 또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어 스스로 자유로이 선택하게 하셨으니, 생명과 반대되는 것이 애초부터 창조되어 있음과도 같은 의미이기는 하다. 그러나 ‘처음부터’가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따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스스로 택한 죽음과 고통, 불행이 이제는[창조 당시에는 없었으나] 엄연한 현실이 되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것이 일시적인 것일 수가 없어[영혼을 지닌 영적(靈的)인 피조물 자체가 영원하므로] 영원한 까닭에,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고 또한 "영원한 멸망의 형벌"[살후 1:9] 또는 영원한 "불 못"[예 20:14] 또한 그러하다.

우리의 자유 선택에 의해 구원도 되고 멸망도 되니, 우리 스스로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정한다 함에 아무 하자는 없다. 또한 이 "죽음"은 우리의 육체처럼 죽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대칭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니, 현재의 나의 이 육체는 썩어 없어지나 내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는 생명의 부활로든 "심판의 부활"[요 5:29]로든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지금은 영원히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죽은 자로서의 첫 사람 아담의 시대였으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이나, 지금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어 계시므로 모든 인간은 이제 비로소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복구되어 있는 상태로 전개된다. 그래서 의인은 생명의 부활, 악인은 심판의 부활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아담만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런 신령한 몸 그대로 모든 인류는 에덴낙원에서 생산되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 신령한 몸 그대로 악인이든 의인이든 분류되었을 것이요 그리하여 영물들이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분류된 것처럼 되어 악인과 악령들은 함께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자신이 범죄함으로써 모든 인생들이 모두 악인[죄를 벗어날 수 없는지라]의 운명이 될 처지에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인한 비정상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 상태로 되돌아와 이와 같이 생명을 누리는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 악인들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이 가능하게 됨이다. 생명이든 죽음[멸망]이든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법질서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사랑'이라는 것도 둘이 하나 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함도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정한 법질서 개념에서의 사랑이다.

왜냐면 생명 자체가 둘이 하나 됨 즉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하는 한 몸됨에 있도록 처음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까닭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 머리의 위치에 계시므로 그 피조물들에게 이 생명의 원리의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본을 보여 주신 대로[머리로서] 모든 피조물 즉 그 한 몸을 이룬 각 지체 각 부분이 행하기를 바라심이다. 따라서 이제 새 창조에서도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그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신 그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한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나 너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라"[롬 11:22] 하였으니 이 엄위가 곧 하나님의 "노(怒)와 분(忿,憤 )"[2:8]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지금 이 세상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므로 비록 죽음의 세상이기는 하나 맛보기[장차 영원히 갈라져 나타날 생명과 죽음에 대한] 정도로만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영원성에 비하면 찰나적인 삶의 낙[이는 악인들이 악용하여 독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걸러내는 함정의 역할]과 죽음의 고통[의인들을 연단하는]이 서로 뒤섞이고 교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음에 반해, 영원히 계속될 본격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것이 뒤섞여 있지 않고 죽음은 죽음대로 생명은 생명대로 별도의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순수한 고통이므로 이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런 죽음, 고통, 불행의 양상과는 전혀 다르고, 순수한 생명이므로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삶의 낙은 비교할 수조차도 없다는 그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끝나면 영원한 본격적인 ‘생명’과 역시 같은 비중으로 ‘죽음’이 인생들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간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를 보게 된다. 일시적인 맛보기에 불과한 죽음[의 고난] 또는 생명을 침소봉대하여 확대 해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시적인 "죽음"의 맛보기인데도 그것이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인상을 주어 의인들에게 겁을 주며 선과 의를 버리도록 위협하며 유도하려 하고, 일시적인 "생명"의 빈약한 맛보기에 불과하건만 이를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만들어 이를 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미 확정되어 있는[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새로이 준비하시는 일이므로 "새 창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 차원에서의 단독 행위[사람되시어 이루시고 당하신 십자가의 저주와 죽으심]로 마련해놓으신 생명을 '내 스스로' 받는 것이 구원이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의지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인류가 다 자동으로 구원되게 하셨을 것이다.

"믿음" 유무로 사람을 차별하실 리도 없다. 따라서 내 ‘스스로 받을’ 때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과 약속이 선행되는 것이 당연 사리다. 바로 그런 약속을 하는["회개"로써] 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구원의 선물"[엡 2:8] 또는 "성령의 선물"[행 2:38]이다.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므로 가장 먼저 "회개하라"[행 17:30] 명령하시는 것이다. 첫 단계부터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1]고 그리스도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도 외쳤고, 그리스도 친히 또한 그렇게 전파하셨다[4:17].

"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하셨을 때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의미냐 하면,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뜻이므로 그가 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진실이고 진리인 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니 그것이 바로 순종인 것이다. 그 말하는 대로 따르고, 계명을 주면 그 계명에 절대로 복종함이다. 그래서 믿는 것을 "제자(弟子) 됨"이라고도 한다.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이 아닌 '인간의 성경 해석'으로써 교리를 삼고 있는 천주교나 개신교로 구성된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기이하나, 이 기이함[a wonder]은 악령이 이 세상 신이고 사람의 마음 눈을 어둡게 하고[고후 4:4] 천하를 속인다는[계 12:9] 성경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면 더 이상 기이함이 되지 않고, 응당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훌륭히 입증하는 증거가 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됨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사람마다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서 보듯이, 반드시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고 굳은 다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하나님의 새 창조를 믿음으로써 스스로 회개하여 그 창조하신 뜻을 이루리라는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리라는"[고후 5:15] 결심을 하게 되고,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새 창조가 구체적, 실질적,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회개를 통한 우리의 약속을 액면대로 수용해 주심으로써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니, 이로써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으로 결착(結着)된다. 따라서 이렇게 약속을 하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구원이므로 만일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그 처음 "믿음을 배반"["to deny"-딤전 5:8] 또는 "그리스도를 배반"["to grow wanton, to break one's first pledge"-:11]할 때는 당연히 이 '약속으로서의 구원'은 해약, 해지 또는 폐기되는 것이 당연함을 이미 지적했다. "배반"의 뜻 그대로다.

나는 나의 약속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나를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양자(養子)가 되게 하심이다[롬 8:23]. 나와 및 하나님과의 쌍방간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 아닌 것이다. 내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요일 3:1,2] 구원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약속을 능히 지킬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베푸심에 뜻과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래서 향후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그냥 영원히 그대로 확정하시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님을 이상의 말씀들로써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면 약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간에 "그리스도를 발로 짓밟고"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히 6:6/10:26,29]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처음에["다시"라는 말에 대응하는] 못박았다는 것은 나의 죄가 결국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죽으시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그 죄를 또 지음을 말함이니, 다름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 즉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다.

따라서 이는 기필코 "멸망"[:19]이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스스로 죽여 없앴으니 그 살인한 자에 관한 한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심판하시는 재판장으로서의 그리스도뿐이다. 이 설명을 듣고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네 교리와는 전연 반대이니까 당장 "이단"[자기가 믿는 것 외의 도(道), 또는 전통/권위에 반항하는 설 또는 이론, 시류에 어긋나는 사상 및 학설]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대로 말할 뿐이다. 물론 모든 사이비 이단들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러면 무엇이냐,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설명을 따를 일이다. 그것을 못하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미리 못박아두시기를 영생에 이르는 길은 좁고 문도 비좁다 하셨고 그래서 그 길과 문을 찾는 이가 적다고 확언하셨다는 사실이다[마 7:13 ].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셨다. 혹자가 "구원을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23] 여쭈었을 때 "적다" 혹은 "많다" 하시지 않고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려 해도 못들어가는 이들이 많다"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누누이 되풀이해서 강조하여 설명한 것을 곰곰이 반추(反芻)한다면 모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히 알아질 것이다.

‘求道者’-‘得道者’-‘傳道者’

인생들이여, 세상 살고자 하지 말 것이다.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다. 내일 일도 기약 못하지 않는가. 나와 다름없는 똑같은 인생들인데도 갓 나서도 죽고 10, 20대에 죽어 나가는데 나는 무엇이라고 그렇게 죽지 말라는 특권이 있다던가. 그런 요사(夭死)의 사례는 인생이 원래부터 그런 것임을 진작부터 알라는 경고다. 그런즉 7,80년도 너끈하게 살아온 나라면 특별한 복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경고를 받고 그래서 ‘求道者’로서 전력을 다하라는 의미였고 ‘得道者’가 되었으면 오직 ‘傳道者’로서 나머지 생애를 보내라는 뜻이었다.

그 ‘道’는 사람 삶의 도리, 올바르게 사는 도리를 말함이다. 득도(得道)는 내 스스로 이루는 자력(自力) 구원일 수 없으니 오직 새 창조 그래서 "다시 출생함"[요 3:3]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나는 것이 '득도'이다. '도' 즉 진리시요 길이시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음, 받음, 내 안에 모심이다. 그리스도를 획득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어떻게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느냐 한다면,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유일무이의 사람이신 것이다.

사람은 육체이므로 육체로는 하늘에 계심이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으로는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심이다. 이는 영[하나님]과 육체[사람]로 분리되시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으로서 내 안에 계셔도 사람으로서 계시고 또 사람으로서 하늘에 계셔도 하나님으로서 계심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특성이시다.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와 사람으로서 하나되어 계시는 것이지, 사람으로만 계시면 문자 그대로 나와 하나이실 수가 없다. 또 하나님만으로 계시면 하나님과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로 '사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으로 인한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내 안에 하나님으로 계셔도 사람으로서 계시는 것이고, 하늘에서 사람으로 계셔도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나도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엡 2:6]. 왜냐면 내 안에 하나님으로[성령으로] 계시는 모습은 바로 하늘에서 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바로 그 모습이시기도 한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고 그래서 모든 믿는 이들 안에 계심으로써 현재 이 세상에 계시되 사람으로서 다시 말해 '보이시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시는 것이다. 이 무한히 복된 사실을 마음에 깊이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되어 있으니 영원히 '나라'는 존재가 복합(複合), 두 겹[twofold, double]의 인간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한 사람으로서의 두 사람'이니 영혼과 육체의 불가분성과 같고 세상의 그 어느 인간과의 관계[부모 자식 관계, 부부 관계 등]에서도 이처럼 이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없다. 진정한 짝의 개념이다. 이런 구조의 인간 삶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나[병, c]를 구성하고 있는 갑[a]과 을[b]은 철저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구조이고 체제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면 그리스도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으므로 그래서 죄를 짓고는 하나님 앞에 의인될 수 없으며 구원이 불가능이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믿으라" 하시지 않고 "회개하라" 명령하심이다[행 17:30]. 세례 요한도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 복음 전파의 핵심이었던 것이요 "믿으면 영생한다"는 의미의 강조가 아니었다.

바울의 편지에서 믿음을 강조한 색채가 농후했던 것은 당시의 사정 때문이니 즉 믿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나 모세 율법을 동시에 지켜야 구원된다고 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했으므로 이런 사이비를 걷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했던 이와 같은 강조는, 오늘날에 와서는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영생만 욕심 내는 이들을 걸러내기 위한 수단 방편이 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함정, 덫, 올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땅히 유의할 일이다. 이상과 같은 바울 사도의 강조를 잘못 알아 들으면 그렇게만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편견과 선입견 없이 읽으면 절대로 그런 치명적인 오류에 물들 리가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런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이런 결론이 아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죄가 무엇이냐, 사는 법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는 데에는 사는 법이 있는 것이다. 그냥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이 살아가는 데에는 자연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그냥 욕심대로 먹고 마시고 아무렇게 아무 것이나 입에 집어 넣어도 아무 탈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는 운동도 않고 편안하게 방 안에만 뒹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건강 수칙을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계의 생물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니까 하나님께서 그 내부에 장치하신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그뿐이나, 인간이나 영물 등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인격성을 지닌 존재는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대로 스스로 행동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는 법이라는 것이 다름아니라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이니, 여기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핵심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첫째로 위하며 따라서 그 머리의 지시를 받아 그 다음 둘째로는 자기와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해서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양심을 따라 판단해도 이는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는 최고로 옳고[義] 좋은(善) 일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善)을 행하고" "의(義)를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는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라 즉 뉘우쳐 돌이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기로 작정하고 그 작정한 대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뿐이니까 명령하시는 모든 것이 결국 나를 위함이다. 이 뜻대로 즉 명령[계명,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니까 이를 불법이라 하고 불의라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니까 악(惡)이라 하는 것뿐이다. 이를 통틀어 죄(罪)라 하는 것이다.

선하고 의로운 것에다 모든 언행(言行)을 일치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빗나가고 어긋나니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 나가야 하는데 도리어 그 반대 개념인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최대 행복을 기약하는 삶의 좋고 옳은 도리를 따라 살지 않는데 그런 사람 살려 주어보아야 무슨 덕이 있다고 살려놓겠는가. 그래서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고 복종 않으면 살았어도 마땅히 죽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모든 경고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두렵고 떨라"는 것은 이미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의 선례(先例)가 있어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 사는 자로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셨다는 사실을 밑바탕으로 하여 내리시는 명령이요 경고인 것이다. 죽어 있는 자에게는 절대로 이런 명령이나 경고나 해당이 되지를 않는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우리 구원을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다. 새롭게 하셨는데 이전 첫 창조의 범죄와 죽음의 구닥다리 잔재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것은 구경도 할 수 없어야 새 것이라는 말이 통하고 더군다나 창조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런데, 옛 창조의 죽음과 범죄의 온상(溫床) 역할을 하던 "육신"[롬 7:14-8:13]을 묵사발로 만드셨다 했는데[6:6], 어째서 육신 타령을 하여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언사를 감히 하나님 앞에서 농(弄)한다는 말인가.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의 세계다. ‘정상’과 ‘비정상’의 대칭에서 그 ‘비정상’이다. 이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때문에 세상에 오신[사람되시어] 하나님[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이 세상에서] 웃는 자는 화가 있고 부유한 자가 화가 있고 지금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눅 6:20,21] 하셨다. 죄와 죽음이 첫 사람 아담에게서 왔으니[롬 5:12]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자로서만 창조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니 ‘하나님의 구원’을 ‘영생 주시는 것’으로만 착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죄에서의 구원" [마 1:21] 이다. 죽음에서의 구원도 아니니 죽음 이전에 범죄를 하였으므로 죄가 죽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은 혹자 오해하는 것처럼 죄 자체를 말살하여 죄의 의미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함이다. "육신"[롬 7:5-8:13]으로 인해 불가항력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 육신의 "죄와 사망의 법"[8:2]으로부터의 "자유·해방"[:2]을 말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 다시는 죄에게 종이 되지 않는다 했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죄 짓는 그리고 죄 짓게 만드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요일 3:8] 하심이라 하였다. "죄의 몸이 멸하고" "마귀의 일을 멸하는" 등 모두가 한 가지 뜻으로서의 멸절(滅絶)을 말함이다. 마귀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아담은 그렇다는 것 즉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으로서 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생들이 어떻게 사는 것을 보시고 잘 하면 영생, 못하면 멸망으로 하나님께서 가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명과 선(善, 모든 좋은 것), 의(義, 올바름), 거룩함에서 벗어나 죄, 악, 불의, 불법 가운데에서의 죽음을 초래함으로써[롬 5:12] 온통 세상이 이러한 죽음과 죄 가운데 있는 현실이므로, 이에서 벗어나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의(義, 사람 사는 올바른 길을 따름)와 생명과 거룩함[자기 부인이 온전히 되어 있음]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이 우리 구원이다.

그리고 과연 그렇게 사는지 여부를 다루어 보심이요 여기서 탈락하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니 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아예 믿지 않음으로써 벌써 탈락되어 있는[요 3:18] 이들과 동류(同類), 동종(同種)으로 취급됨이다. 처음부터 불의를 좋아하는 자나 중도에 변심하여 불의를 좋아하는 자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선천적이 아니라 단연코 후천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오직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는데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차이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피조물의 자기 창조 또는 재창조(再創造)라 할까. 창조는 과거에 없던 것을 이제는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선하게 만드셨는데 그 스스로가 자기를 악하게 다시 손질하여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이 '자유 의지'가 갖는 엄청난 의미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만드신 것을 스스로가 들어 생명 아닌 죽음으로 만들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 실례(實例)를 아담에게서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에게서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피조물 인간들이 자기를 선하게든 악하게든 스스로 다시 손질하여 만들어 놓게 되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만 존속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선과 악을 따라 선한["좋은"-벧전 3:10] 세상 곧 천국과 악한[나쁜,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상 곧 불 못[lake of fire, 火湖]으로 영원히 갈라져 장차 들어가게 된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그렇게 '악'으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를 철회하고 마음을 고쳐 먹어 자기를 선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애초 선하게 자기를 새로 창조하신 뜻을 단지 따른다는 의미요 스스로를 다시 선하게 만들 필요는 물론 없다 하겠으나, 악인들처럼 악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선택권이 있어도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원하여 즉 자기 선택으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로" 결단했으므로 자기를 '선'으로 만들었다 해서 그리 큰 하자는 없으리라.

이런 사람들은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자기를 복귀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귀시켜 주신 것이나 자유 의지의 특성상 그 스스로 그렇게 자기를 복귀시킨다는 것 역시 동시성, 양면성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복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이 우리의 구원이니 곧 '산 자'가 되게 하심이다. 복귀하려는 의사(意思)와 의지(意志)는 우리에게 있으나 능력은 하나님의 것임이다. 이 복귀하려는 의지는 당연히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옴으로써 우리가 구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지가 있는 자에 한해서 구원이 베풀어짐은 당연하다. 복종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없는데도 구원하심은 아니기 때문에 "회개하라" 명령하시는 것이다[행 17:3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행악자[行惡者-눅 23:39] 중 하나는 회개하여 그 즉석에서 구원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눅 23:43]에 들어갔는데, 이 사람은 그렇다면 그런 "의사와 의지를 나타낼"[세상에 살면서] 기회가 없었는데도 어찌 구원이 되었느냐 할 것이다. 이 사정(事情)의 전말(顚末)을 보면 그 답이 나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허약하게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도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은 그의 믿음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여기서 잠시 곁들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날 낙원으로 가신" 것과 "밤낮 사흘을 땅 속에 계신"[마 12:40] 것과의 차이다. 3일 주야를 땅 속에 계셨으면 낙원으로 가실 리가 없고 그 회개한 강도와 함께 낙원으로 가셨다면 땅 속에 가 계실 리가 없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다. 이 역시 양면성으로 고찰해보아야 해답이 나올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과 사람되신 두 가지 측면이다.

사람이심과 하나님으로서, 우리 각자와 개별적으로 하나되어 계시는 까닭에 회개한 강도와도 하나되어 계심이다. 그렇다면 그 강도가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 있는데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은 낙원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하신 그대로다[눅 16:22]. 그렇다면 회개한 강도와 하나가 되셨으니 그 회개한 강도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신 것이다.

만일 그 강도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낙원에 들어가지 않으셨을까. 들어가실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땅 속에 계셨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죄인과 함께 되시어 죽으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아니시지만 죄인으로서[사 53:11,12]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의인으로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범죄자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어" 죄인으로서 죽으셨으니 당연히 죄인의 처지에 걸맞게 땅 속에 계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육체[사람이 되셨으므로]로는 하늘에 앉아 계시고 그 영[하나님은 영이시므로]으로는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계심과 같이, 당시에도 한편으로는 그 회개한 강도와 함께 낙원에 또한 동시에 땅 속에 계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낙원에 가셨다가 다시 땅 속으로 오셨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원에 가신 것은 그 회개한 강도를 위함이셨고 거기 내처 계신 것은 아니니 왜냐면 부활하신 다음에 하나님 우편에 계셔야 하는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셔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야유하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 한 것과 같이, 그 '회개하지 않은 그의 동료'도 이에 덩달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으니, 이 두 악행자들 역시 그리스도께 대한 것을 충분히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행악자의 태도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있으니, 그 분기점은 "그리스도께서 허약하게 잡혀 사형을 당하시는" 현실에 있음이다.

다시 말해 영생에만 욕심이 있을 뿐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중심이 되어 위세당당하게 나가면 거기 빌붙어 덕[영생 등]을 볼 줄 기대했는데 그런 기대에 반하여 허무하게 무너지므로 실망하고 분노[마치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아]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완전히 무익한 존재라고 버리는 순간이 그 시점이었던 것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많은 군중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선동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회개한 사람은 그와는 달라, "우리는 우리의 악행에 대하여 응분의 보응을 받지만 이 분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하고 상대방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을 꾸짖은 후,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가실 때에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하여 "옳은 일을 하셨다" 했고 "당신의 나라"라 분명히 말했으니 그리스도이신 줄 알고 믿은 것이다.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시는지는 알 듯 모를 듯하여 자세히는 모른다고 치더라도 까닭은 분명 있을 것이라 믿어 그리스도시라는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스도이신 줄 믿는다면 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마땅함을 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그 "의사와 의지"이다. 오직 관건은 그 한번 정한 "의사와 의지"를 변치 않음에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회개한 사람이 그런 변치 않음을 입증해 보일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변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시는"[to foreknow-롬 8:29/벧전 1:2] 터이므로 그와 같이 구원하신 것이다.  

반드시 우리의 "의사와 의지"를 실제 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에 핵심이 있지 않고 그 "의사와 의지"가 '변함이 없어야' 하는 데에 주안점(主眼點)이 있다.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지[요 20:21/4:34] 않으면 안되는 것을 주안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음 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핵심 요점으로 삼는 것을 중시하여 다루어 보게 되는 이 차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things hoped for]의 실상[substance, realization]"[히 11:1]이니, 이 바라는 바람 곧 "소망[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은즉 보이는 소망[hope]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랴"[롬 8:24].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진대 참음으로 기다리는"[:25] 것이 당연하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things not seen]의 증거[evidence, confidence]이기 때문이다[히 11:1]. "우리의 돌아보는 것[to look at, to fix our attention, to fix our eyes]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고후 4:18].

이 세상은 현재 볼 수 있는 보이는 것이다. 바라는 것의 대상이 아니다. 참고 기다림 곧 인내가 필요하니 이것이 믿는다는 즉 믿음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온갖 불이익과 탄압, 핍박을 받는다. 그래도 기어이 이 믿음 버리지 않을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는 것이다[계 2:7,11,17,26/3:5,12,21/12:11/21:7].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는 가장 완벽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라 할까. 이 목적에서만은 그렇다는 얘기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러한 멀리 내다보고 기다리고 희망을 지니고 바라보고 하는 것이 없이 그냥 조급하게만 군 것이다. 몸과 머리가 상호간 위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다리는 그런 여유가 없는 것이 교만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즉 보이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눈앞의 일에만 관심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를 거짓말로 꾈 때도 당장 눈앞에 나타나 있는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함[이생의 자랑]"[창 3:6]이었다. 우리로 치면 세상을 본 것이다[요일 2:16].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의미와 동일시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시험하여 다루어보는' 데에 있음이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일 자체에 있지 않다. 즉 우리가 이룬[보내신 과업을 수행하는] 공로, 공적 유무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 시종일관 변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세 여부로써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가름이다[:23].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고[선지자로서] 과거에 큰 능력을 행했다 하더라도 현재 그 뜻을 행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그 뜻이다[:22].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는 경우와 같은 것은 특수한 것이고,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의사와 의지가 변함이 없음을 입증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이렇게 입증하는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각자의 육체에 채우면서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사람 살리는 일을 겸하여 수행하게 하심이다. 이 기회는 한번 있으면 되는 것이고 두 번 거듭해서 있을 이유도 없다. 이 한번 기회로서 수십 년 세월[이 세상 지내는 한평생] 정도면 되었지 그 이상도 사실은 필요치 않다.

이 세상 삶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있는 것은 이 인생 선별 작업[영물들의 선별 작업은 이미 끝나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서 현재 영구적으로 구분되어 있어]을 위해 이 세상이 굴러가는 동안은 질서가 잡혀져야 하고 먹고 살자니까 또한 그렇고 그리고 이 세상이 정상적인 인간 삶인 것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단장해놓기 위해서는 그런 여러 가지 메뉴를 갖추어 인생들을 유인해 들일 필요가 있으므로 갖추어진 것일 뿐이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자 가인의 씨[後孫]들 중에서 악기 만드는 자가 처음 생긴 것도 유의할 만하다[창 4:21]. 이는 상징성을 띠는 것으로서 즉 장차 멸망당할 악한 자일수록 이 세상을 보다 즐겁게 살고자 즉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특성이 강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권세 있고 부유한 층에서 대개 음악을 즐겼고 그런 재주꾼들을 위시해서 음악가들은 자기 재능으로 그 돈 많은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음악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니 원래부터 삶과 사랑 자체가 하나의 즐거운 노래요 음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에서는 삶 자체가 노래요 음악일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항상 "마음으로 노래하는"[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다. 이는 그렇게 당연히 기뻐하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찬송, 찬미는 그런 사랑과 감사, 평안과 기쁨의 자연스러운 발로다.

기뻐하라고 한다 해서 기쁘지도 않은데 꼭두각시처럼 기뻐할 사람은 없다. 당연히 기뻐하게 되어 있으니 그 당연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으로서, 그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어디인가 흠이 있어 그럴 것이니 자기 자신을 추스려 보라는 경고의 의미에서 하는 명령이다. 자진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사랑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기쁨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단지 인생고의 현실을 무시하고 무작정 이런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음악이 맹목적이라는 그 뜻일 뿐이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cage]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지배자 또는 왕을 상징]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창 37:28]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한다"[암 6:4-6] 함과 같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라 하여 그가 삶의 낙을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장차 멸망당할 자로서 현재로 저주 받은 고통에 시달리는 점에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다. "삶의 낙 운운"은 어디까지나 '낙인 줄 착각하는'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이 세상을 마치 사람 삶의 본고장쯤으로 착각하는 인생들이다. 이런 마음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것이라면 그것이 좋은 것[선]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리에 앉으신다는 것은 ‘왕’ 곧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는 것은 '한 몸으로서의 머리'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또 한 몸을 이룬 전체가 머리와 똑같이 하나이므로 함께 영광과 복락(福樂)을 누린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의 권세자와 오는 세상에서의 왕들과의 이런 차이를 그리스도께서는 다음 말씀으로 설명하셨다.

"이방인(異邦人,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지배층이 국민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자(人子, 하나님이시나 사람되어 계심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그렇게 표현하셨다)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다"[마 20:25-28].

하나님께서 친히 머리가 되시지 않으면 같은 피조물인 사람들끼리 서로 머리가 되고자 하여 알력, 분쟁, 음모, 증오, 살인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함께 망한다고 앞에서 설명했거니와,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한 몸 관계에서 머리는 그 몸[의 각 지체]을 어버이가 자식 다루듯이 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대하지 않아야 즉 권위 있는 위치에 있어야 이 머리 역할을 제대로 하는 필수 요건이 되어 있음이다.

한 어버이에게서 났으니까 그 아래 모든 몸의 지체들은 서로 동류의식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저절로 생겨나 뿔뿔이 자기 독립성을 주장하게 되면 아무리 많아도 바다 가의 모래알일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 머리의 지배를 받으면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그 한 사람의 조종 아래 움직이게 되니 이런 영원한 종살이를 반기는 자는 아무도 없고 모두가 기회만 있으면 어찌 하든 머리된 자를 쓰러뜨려 자기가 머리되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또 머리가 되어 있는 자는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 머리되려는 자를 무자비하게 꺾으려 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악의 고리는 언제 가도 끊겨질 리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넌지시 이런 사고방식을 여자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맞먹게 해 준다는 허영심을 부추긴 것이다.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말을 따른 것은 명백한 판단 착오다.

이런 일이든 기타 무슨 어떠한 일이든 반드시 남자[아담]와 상의해서 해야 하고 아담 역시 하나님께 여쭙고 무엇이든 했어야 하는데 모두 자기 독단으로 함으로써 천추의 한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두고 여쭙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이미 선악과를 먹어 버렸는데 그리고 먹으라고 자기에게도 주는데 이를 어찌해야 좋겠느냐 하고 여쭈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서 들은 대로 "하나님께서 과연 거짓말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고 여쭈어야 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여쭈어볼 필요도 없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선악과를 먹다니 하고 당장 여자의 권유를 거절했으면 되는 일이나, 여자의 말을 따랐으니 그렇게 따르려고 했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일단 여쭙고 했어야 사리에 옳다는 그런 의미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 그래서 "당신네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막고자 하셨다" 할 때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서로가 머리되려는' 경쟁 의식을 엉뚱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다 갖다 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마치 피조물 중의 하나가 되신 양으로 너무나 친근히 즉 마치 같은 피조물이나 되신 것과 같은 위치에서 인간과 상관하셨기 때문이니 이는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부모 자식과 같은 살가운 관계임을 이 사건으로써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마치 동류(同類) 의식과 같은 착각에 빠져들 만한 것이니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하기를 하늘과 땅처럼 소원하게 느낀 이들은 이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겨 하나님을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일이다.

물론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을 통해 확증된 사실이지만 이를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우리가 경계로 삼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접근법(接近法)이다. 아주 그럴싸하게 우선 듣기에는 아주 그럴 듯하게 논리를 전개한다는 뜻이다.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머리되기 경쟁 의식' 따위다.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럴 듯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가리키는 쪽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준 사고방식을 따라 선악과를 쳐다보니 역시 그럴싸했다. 지혜롭게 해 줄 만큼 또 먹음직하게 아주 탐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최면술에 걸려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암시에 걸리면 즉 그 암시를 일단 따르는 순간 그 후로는 내처 급전직하요 결코 발을 빼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생각을 넣어 주는 대로 그것을 가지고 잠시라도 노닥거리면 반드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낚시 미끼를 삼키게 되어 있음이다[요 13:2]. 그러므로 벌겋게 달아오른 화로나 난로 또는 전열기(電熱器)에 손이 닿는 순간 "어마, 뜨거!" 하고 당장 손을 빼내야 하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듣기는 속히 함"[약 1:19]이다. 가장 신속한 행동을 요하는 부분이다. 베드로의 일견(一見) 동정 어린 위하는 척하는 말에 즉각 대처하신 주님의 신속한 반응을 우리는 마땅히 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막 8:33],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고후 10:5] 것이 이를 가리킴이다. 여기서 "파(破)한다"[to pull down]는 것은 앞뒤 잴 것 없이 즉각 일격으로 쓰러뜨리고 밀어뜨리고 자빠뜨리고 메어치는 것을 말함이다. 신속한 즉결처분이다.

그래서 이런 경쟁 의식 속에 소용돌이치는 세상은 항상 반목과 증오와 음모와 살인으로 얼룩져 날이 새고 지게 된다. 이런 세계는 영속하지도 못하고 잠깐 보이다가 소멸하는 것뿐이다. 이런 북새통의 이 세상이[여러 세월을 두고 흘러온 인류 역사가 그 증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지탱해온 것은, 오직 인간 구원만을 목적하여 하나님께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강권으로나마 질서를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3운법칙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는 인간 구원의 목적만 최종적으로 달성되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곧장 사라지게 되어 있다. 바로 그 최종 시각이 오늘날은 바로 눈앞에 이른 때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이 머리의 중요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조자 하나님의 머리되심이 아니고는 이 인간사회가 부지할 수 없음을 보임이니 이는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시어 머리로 계시기 때문에 이런 피조물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불교의 고타마 싯다르타는 자기 스스로 홀로 소위 "도(道)"를 깨쳤다는 주장이니 이미 그 자체가 결코 진리일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함이다. 왜냐면 혼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부터 신이었던가? 신이라면 그렇게 고행을 거듭할 필요가 없이 단박에 모든 진리를 깨치고 있어야 한다. 깨치려고 서성댈 필요도 없다. 머리에 번개 같이 떠오른 진리에 대한 감지력으로 그것을 간파한 다음 벌써 다음 순간에는 그 진리를 설법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신(神)이다.

그가 그런 험난한 고행을 했다는 것은 그 역시 인간임을 인정함이다. 그런 나약한 일개 인간이 그렇게 혼자서 여러 수십 억의 인간을 상대하여 그들을 능히 제도(濟度, 중생을 고해로부터 건져 극락세계로 건네어 줌)할 수 있는 진리를 깨쳤다는 것은 한 마디로 황당한 언어도단임을 앞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 자체가 이미 모순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다. 그렇다면 그 주장의 뜻은 자기 하나가 그 여러 수 억, 수십 억의 인간보다 수백 억 갑절이나 월등하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초월적 존재다.

우리 각 사람은 결코 그런 초월적 존재가 아니니 이로써도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왜냐면 자기처럼 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도를 깨쳤으면 그 발견한 도를 단지 전달하기만 간단히 끝나는 일인데 사람마다 그 스스로 그렇게 자기처럼 도를 깨치도록 노력하라는 데에 요점을 두고 있으니 그런 결론이 아니 될 수가 없다. 말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 말로 나타낼 수가 없는 "도 깨침"이라면 그것을 어찌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구현(具現)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평범한 무식꾼으로서의 필부(匹夫) 필부(匹婦)라도 듣고 제도가 되어야 그것이 진리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는 쉬운[단지 염불만 하면 되는 등] 불교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차별이고 불평등인가. 그렇다면 다 우열을 가릴 것도 없이 그런 것을 처음부터 의식 못하도록 다시 말해 자기는 쉬운 불교를 통해야만 되는 낮은 백성이라는 열등감을 품지 않도록 배려하여 모든 인생들이 그 쉬운 불교를 통하도록 통일을 시켜야 자비의 인간 도리가 아닌가. 그런 차별을 두는데 어찌 진리이리요.

성경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을 믿어 향후 그 모든 지시와 말씀에 절대 순종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주인을 모시고 따르는 종처럼 주인과 종이 불가분으로 한 덩치가 되어 살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뿐이다. 더군다나 그 주인이 거꾸로 종이 되시어 종된 나를 주인처럼 현재 섬기고 계시는[눅 22:27] 본보기를 따름이라 할 때에는, 이 이상 가는 "쉬운" 사람 삶의 진리는 없다.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했으므로[벧전 3:19,20] 석가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던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다. 원래 하나님은 그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만 계시되신 것이었다. 이제는 성경이 천하에 번역 출간되어 처처에서 마음만 있으면 구해다 읽을 수 있다. 내가 가르친 것의 핵심은 만유의 인과(因果) 관계를 말하는 연기론(緣起論)이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성경이 밝히는 대로의 제일 첫째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느냐".


§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상에서는 고난 받는 자는 그 당연한 결과[스스로의 선택]를 따라 받는 것이므로 그들이 고난 받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리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 것이 없다. 더 다시는 한 몸의 원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두 세계는 대칭 관계이다. 그 대칭 관계가 그 때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다. 단지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분명히 그런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만 해도 현재의 우리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직 그런 확정된 세계가 아니기도 하지만 이 세상 나름의 하나 된 상태를 이루고 있는지라, 이웃은 여전히 재앙 가운데 즉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여 삶의 낙을 누리려 하는 것은 이성적(理性的)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자세로는 이웃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도 없다. 동류(同類) 의식에서라야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데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안락한 삶이냐" 하는 식의 반발을 유발하여 전도의 말씀이 먹혀 들지 않게 됨은 당연하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7:20,21]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그것을 반납하고 종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 있는 목적이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일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즉 종으로서 같은 종으로서의 환경에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같은 종이라는 동류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이와 같이 인생 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종 그대로 눌러 지내는 옳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종의 신세를 벗어버리고 자유인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 구원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가령 매춘 행위를 하던 사람이 믿은 후에도 그런 매춘을 하라는 것은 아니니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직업을 가지라"[엡 4:27] 함과 같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함과 같다.

그리고 앞에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하지 않는다" 한 대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믿음의 형제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북한 땅에서와 같이 고난 받는 것이 필연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죽도록 고난 받고 나는 이 자유 세계에서 부유함을 자랑하며 삶의 낙을 누린다면 그러면 나와 그 북한 형제들은 한 몸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주님 친히 그런 고난 받는 형제들과 한 몸을 이루어 그 머리가 되어 계실진대 나는 명백히 그 한 몸과는 남남이고 당연히 그리스도와도 남남이다.

한 몸됨은 고난도 함께 영광도 함께 함에 있다[고전 12:26]. 성경에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했으니, 이를 따르면 절대로 하나님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생각은 완전히 성경을 무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는데, 그렇다면 바울처럼 고생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살려는 것은 바울과도 한 몸이 아니다.

또 바울이 충성으로 섬긴 그리스도와도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라면 우리의 본으로서 바울은 절대로 고난 받지 말았어야 하고 당대의 최고 갑부로 호강을 누렸어야 마땅하다. 언제나 '한 몸' 된 체제에서 판단할 일이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요삼 1:2]는 것과 같은 몇몇 구절에만 매달려 "건강하고, 사업에 형통하고, 영혼의 구원도 받는다"는 기복(祈福) 사상에 전반적으로 젖어 있는 개신교인들은 일면으로는 항상 이와 같이 그 생각하는 바가 유치(幼稚-철부지하여 하나만 생각하는)하다는 느낌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이 번창해도 그 이윤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줌이 목적이지[엡 4:28] 내 스스로 축복 받은 증거라 하여 호의호식하며 그것을 누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하늘을 원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만일 하늘의 뜻[天道]을 따라 이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면 죽음도 없어야 하고 죄도 악한 것도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미워하고 한탄했던 불의, 부정이 아예 발붙일 틈도 없다.

죽음과 죄로 뭉쳐진 비정상의 세계인데 이 세상에서의 정의의 확립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쉽게 이른다. 고로 이런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 "하나님 진노" 아래 있는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부터 탈출했듯이, 왜냐면 하나님의 진노가 아담의 범죄에서 기인하므로]만이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만 일방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니, 이런 편견은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사랑'으로만 이해하려는 것과 똑같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심판주 곧 재판장이시다.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로서 우리와 같은 피조물 인간이 되시어 그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것은 그 사랑을 100프로 증명하신 것이므로 항상 이런 평형성에서 논할 일이다.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소멸하는 불, 구세주이시면서도 마지막 심판 때의 재판장이시다. 극과 극의 대립이요 조화다. 높다고 할 때는 항상 낮음을 동시에 떠올려 함께 생각해야 높다는 의미가 제대로 확인된다.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죽음부터 없애야 하고 이 세상 악(惡)의 지배신(支配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부터 없애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죽음, 악[그 성향 자체가 올바른 것을 원치 않는 것], 죄[단지 그 결과만을 볼 때 악으로 나타나는 것]와 혼연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이 없어지려면 세상도 함께 없어져야 할 것인즉 따라서 각자의 구원만이 유일무이하게 의미가 있을 따름이다. 이 '죽음과 고난과 악의 세상'은 대칭 개념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물론 없어지나 그런 세계만은 영속되는 것이니 곧 영원한 "불의 못"[火湖, lake of fire]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그래서 악령들과 악인들이 거기에 집결된다. 그들 역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영원한 고통과 환난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거기서는 강함도 존재하지 않으니 상대적인 개념의 약함밖에 없다. 모두 자업자득 곧 자유 선택의 결과다. "그런 영원한 고통을 누가 좋아한다기에 자유 선택이라 하느냐?" 하겠지만, "불의를 좋아함"[살후 2:12]이 바로 그 자유 선택인 것이다.

"불의"의 결말이 죽음이요 저주인데도 이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했으니 자기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면 무엇인가. 왜 믿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경고했으나 하나님도 믿지 않고 또 양심이 이를 경고했으나 이 역시 묵살했고 인간의 이지적인 판단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건만 자기 욕심이 앞을 가리워 그 판단을 따르지 않은 결과다. 이렇게 스스로 영원한 자기 운명을 결정하도록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주신 양심이 저마다 내장(內藏)되어 있으므로 그 양심을 따라 양식(良識)이 발동하여 좋고 나쁨을 아는 까닭에[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인간을 심판하시겠는가] 그 어떤 종교도 양심에 거역하여 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외없이 다 선행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종교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양심의 소리만은 거역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의 의지로써 하나님을 부정하면 그뿐이지만, 양심은 기계적인 작동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다 양심의 소리는 듣게 되어 있음이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선행" 그리고 이회장이 말한 대로 종교가 없는 이라 하더라도 또는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친히 장치하신 양심 따라 행하려는 것이므로 이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고 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양심의 역할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는 데에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착한 양심을 사람 마음에 두시지 않았음에도 그런 착한 마음을 일으켰다면 높이 평가할 일이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고 하나님 친히 설정하신 자동 장치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와 같이 그런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양심의 가책은 못이겨 그가 욕심 냈던 은(銀) 30개를 팽개쳐 버리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만치 냉혹하고 엄정한 양심의 소리는 피할 수가 없다.

사람마다 이렇게 야심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묵살할 수 있어 스스로를 마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일단 떠나면서부터는 이 양심의 무자비한 채찍질로부터도 영구적으로 해방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가치는 그렇게 기존(旣存)의 양심을 따라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죽음]으로 나타나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임으로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먼저 '산 자'부터 됨에 있다.

그리하여 나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삶의 되를 본으로 보여 주신 대로 그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즉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고후 5:15] 그와 같은 양심에 부합하게[행 23:1/24:16/딤전 1:5,19/3:9/4:2/딤후 1:3/롬 2:14,15/요일 3:20-22] 하나님의 말씀[계명, 율법-고전 9:21]에 순종함으로써 "선을 행하는"[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 데에 있다. 여기서 비로소 그 선행은 가치가 있게 되며 영생이라는 결실을 맺게 됨이다[롬 2:7,10]. 그 때 비로소 양심의 가치가 드러남이니 이 차이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그런 선행을 할 겨를도 없이 죽는 가령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그 "회개한 강도"[눅 23:42,43]의 경우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런 사람은 그들대로 그렇게 선행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영생이다.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행의 결과를 나타내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그러면 어떤 이는 그런 기회가 있고 어떤 이는 없다면 불공평이 아니냐 하겠으나,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豫知, foreknowledge]에 있는 것이니 즉 선행의 열매를 맺을 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구원이 되도록 "미리 택하신[豫定, predestination]"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양심적으로 살라"는 교훈에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하여 세상 사람은 "종교는 다 똑같다"는 말을 하는데, 양심은 인정하면서도 그 양심을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니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고 종교 통합을 감히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구원의 측면에서 논하면 앞의 설명처럼 하늘과 땅의 차이다. 양심의 소리는 기계적인 것이므로 다 똑같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스스로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알아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한 몸 의식 아래 자발적으로 그 한 몸의 이치를 따르는 생명의 법칙[하나님의 율법, 계명]을 지키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다.

기독교 역시 이 세상을 죽음과 죄 일색(一色)의 암흑천지로 보지 않는 데에서는 세상 종교와 똑같다. 심지어는 개신교 중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얼빠진 생각에 매달려 있는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니 더욱 그렇다. 북쪽의 사지(死地)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같은 믿음의 "형제[그들도 이렇게 부른다]"들을 코앞에 두고도 그런 망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서는 세상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나 이들 기독교인이나 똑같이 무지한 것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양심대로 행해도 새로 창조하심을 입고 다시 출생한 다음에야 그 선행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한 몸의 체제 속에서의 삶이 구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머리 없는 '한 몸'이 어디 있다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여 절대 복종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인 것이다.

절대 복종은 이미 밝힌 대로 주인에게 대한 종의 자세다. 주인의 소유인즉 죽든지 살든지 오직 주인에게 매여 있음이다. 이런 철저한 상하 관계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사랑과 생명의 법칙대로 되는 것이어서 일방적일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섬기시는 위치에 영구적으로 계시니 그 섬김은 엄마가 그 품속의 아기에게 종이 되어 있음과 같다고 누차 설명하였다. 마치 아기를 상전처럼 위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기의 마음과 필요를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위치에서 우리 위해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나의 주인, 소유주]은 나를 위하시고[엄마로서 아기에게] 나는 주님을 위하는[종으로서 그 상전에게] 이 관계의 중화(中和)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친구"[요 15:14,15] 관계다. 동반자요, 인간으로 치면 평생 해로하는 부부에 해당된다 할까. 

그래서 '짝'의 개념으로도 표현된다. 또는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도 통한다. 사람으로서 '나와 가장 가까우신 사람'이신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자기 부모 처자를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 10:37] 하셨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하신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기본 관계를 말씀하심이요 삶의 제1차적 기본 원리를 가르치심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니 왜냐면 둘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없음이다[마 6:24]. 돈[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심이 이런 이치를 말씀하심이다[마 6:24].


§  혹자 묻기를, "복음이 처음부터 유럽 쪽을 중심하여 전파되었고 아시아 쪽으로는 다다르지 않았는데 그런 아시아 쪽의 사람들은 어찌 되는가"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후 부활하시기 전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벧전 3:19]는 사실이 그 답이다. 그러면 또 말하기를, "그렇게 저 세상에서 믿게 되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음으로써 영광 중에 들어간다고 했는데[롬 8:17]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영광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차별이고 불평등이 아닌가" 할 것이다.

저 세상에서도 혹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기회가 있는지는 모르나 없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다. 그리고 그런 수가 있어도 이 세상에서 전연 복음을 듣고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 한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충분히 믿을 기회가 있음에도 믿기를 지연시키고 차일피일하는 이들은 물론 해당되지 않는다. 또 그런 "주님 위해 고난 받는" 기회가 있는지 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물론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이들은 해와 같이 비치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반드시 유념할 것은 그런 모든 것이 그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는 한 몸됨에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뭉쳐진 이 세상처럼 개인적인 자랑이나 영광이 일절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자기 부인뿐이므로 '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 있을 뿐이다.

한 몸 구조에서는 이미 설명한 대로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사랑 안에서 피차간 종 노릇이므로[갈 5:13] 바로 나를 섬기는 나의 종이므로 '전체 우리'가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영광스럽게 "해와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비치고" 있을 때 그 누구든지 그를 가리켜 "저 해와 같이 빛나는 형제는 바로 나 자신이다", "저 별과 같이 빛나는 형제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또다른 나 자신'이다" 하고 얼마든지 진심으로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이 없음과 같으니 오늘날의 공산주의와 같이 획일주의가 아닌가? 각자의 개성미(個性美)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파랑, 빨강, 노랑 등의 독특한 자기 고유의 개성은 그대로 지녀 자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한 몸으로서의 통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도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손은 손대로 다 자기 역할을 하고 있음이니 다시 말해 각자의 개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떨어져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고 전체 한 몸을 가리켜 각자가 즉 다리도 팔도 손도 모두가 다 이 전체 몸을 가리켜 "우리"라 하기도 하고 "나"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머리를 포함해서 그러하다. 그러니 어느 누구에게 종속됨이 없이 철저히 자유하면서도 제각기의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중 누가 특이하게 높이 되어도 그가 나 자신일 때는 그래서 그가 나를 섬기고 있는 이상 내 스스로 그와 같은 높은 자리에 있으려고 할 필요도 욕구도 없게 된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영구적으로 확정된 의미로 못을 박으신 것이다. 단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어떤 형제는 해와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빛나고 하는 등의 차이는 있다.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부정하시지 않았음과 같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몸에 머리가 있고 몸이 있어 구분되어지는 역할로서의 의미뿐이다. 모두가 다 팔일 수 없고 모두가 다 머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머리되신 그리스도 친히 "내가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눅 22:27]고 영원히 선언하신 이상 이 사실은 영원하고 확고부동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 친히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계셨다. 그래서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교만해지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어겨보겠다는 방자한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그 확증이 아닌가[롬 5:8].

고로 '나' 중심이 아니고 '너'를 의식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너'가 합쳐진 '우리' 의식이 공동체 의식이요 '하나' 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나'도 '우리'요 '너'도 '우리'이므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우리'만 있는 것이다. 이 '우리' 속에서의 '나'를 찾고 '우리' 속에서의 '너'를 인식하는 것이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또다른 나'가 되어 계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모든 '너'가 바로 '또다른 나'가 영원히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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