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21세기의 바울 사도 (6)ㅡ이병철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6)ㅡ이병철 질문


9.  ‘21세기의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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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류(溪流) 교회[stream church]


그리고 이 ‘21세기 바울’ 형제를 보고 내리는 또 한 가지 결론은, 우리가 판단하기에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준다는 데에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교회 건물은 당연히 없고 교역자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는 가족들 아니면 극소수의 인원이 모인 자리에서 교회는 훌륭히 구성되어 있고 제 구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말씀 그대로임을 이미 지적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시면 아버지 또한 함께 계시고 바로 하나님 계시는 자리가 성전(聖殿)이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이는 완전한 교회다.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 핍박을 받던 초대(初代) 교회가 바로 이런 형태로 시작하여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게 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옛 소련 체제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핍박과 탄압 속에서 역시 그랬다. 북한과 같은 지구 최악의 환경에서 그런 21세기 믿음의 본보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교회’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의젓하고 구김살 없는 본연 그대로의 교회로 당당히 들어가면서 순절(殉節)한 것이다. 즉 핍박 속에서는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 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고전 16:19/롬 16:5]"가 정상이요 최상의 형태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지금 이 시대는 특별히 더욱 핍박 와중에 있는, 오히려 초대(初代)교회보다 더 심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의 교회를 예상해야 옳다.

그런 까닭에 ‘집에 있는 교회’ 또는 ‘집에서 모이는 교회’로서 성경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왜 북한 땅 밖으로 나가 자기가 체험한 그와 같은 귀중한 믿음의 도리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보내심 받아"[요 20:21]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데에서 본이 되는 여기에, 그로서의 사명 완수는 다해진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목적을 표방하고 한국으로 나올 것을 택했다고 치자. 그가 79세의 나이에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뜻이면 죽음도 불사하고 자취(自取)한다는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산 표본을 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본을 나타냄이 중요하고 더군다나 북한이라는 사지(死地)에서 그런 자유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핵심인데 이는 북한 밖으로 나와 전도하여 복음의 일을 하는 것 이상으로 수천 수만 배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기에 그는 그렇게 순종한 것이다. 이로써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교회를 격려하는 데에 큰 이바지를 한 것이다.

앞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①피동성과 ②능동성의 양면성을 설명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신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 함이 ①이다. ②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15]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데도 이미 강조한 대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지고 전파해야 할 사람들이 완전히 곁길로 들어 말씀을 전달하는 대신 세상종교화하여 ②를 버리고 ①만 자기 입맛대로 선전하는 전반적인 "배도(背道-살후 2:12)"의 상태에 있다. 이런 잘못된 '이탈 상태'를 뜻 있는 자들에게 바르게 시정해 주는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한데, ‘21바울 형제’는 바로 이 핵심 구실을 차질이 없도록 유감없이 나타내어 담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 밝혀졌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이 영원한 기준으로 지체 없이 돌아올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원천적으로 북한과 같은 지하(地下) 교회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再臨] 때까지는 이는 일관되게 그러하다. 즉 ‘집에서 모이는 교회’다. "종교의 자유"니 해서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핍박을 하지 않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손댈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세상 종교로 거의 모두가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지하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항상 정착함이 없이 이동하는 교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체하면 고이게 되어 썩는 물이 된다. 팔레스타인의 염해(鹽海) 곧 사해(死海)처럼 되어 버린다. 끊임없이 흐르게 되어 있는 교회로서 때문에 강제로라도 흩어 버려야 하는 당위성에서 그래서도 핍박이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산지사방으로 불똥처럼 튀어간 것이 그 좋은 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시범적으로 나타내셨으면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여 말씀을 전파하라"[마 10:23] 하신 대로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하신 대로 따르면 되는데, 기어코 고집을 부리고 한 곳에 정착해 살고자 하는 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요 12:25] 하나님의 말씀 전파가 더디게 진행된 것이다. 천주교에 의해 핍박을 받던 왈도파[Waldensians] 사람들이 그런 예가 되었다.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복음전파에 주력하려 하지 않고, "우리가 그 누구보다 충실한 시민 노릇을 하고 있는데 왜 조용히 살도록 못해 주고 핍박을 받도록 하느냐" 하는 탄원서를 당국자에게 올리기까지 했다니, 이는 기어이 그 산 좋고 물 좋아 경개 좋은 자리에 눌러 앉아 정착하려 한 집착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는다고 경고하신[:25]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 북한 형제가 남한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그것이 그렇게 관심을 둘 만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그의 선택은 죽음과 생명의 선택이 아니었으니 세상은 똑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어 하나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남한도 필요하면 내일이라고 핍박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단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핍박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고로 이 세상에서는 그 어디를 가나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더 나은 환경과 여건이 있을 수 없고 똑같이 죽음의 고난의 세계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의 무대인 것이다.

물론 그 형제에게는 당장은 이 남쪽이 자유로우므로 찬송도 실컷 부를 수 있고 전도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모이는 것도 자유자재로 하여 누가 간섭하지 않으니 가히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생명 같이 보이는 것이라도 오직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일보다 더 중시하지 않았다는 데에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 있다는 그 뜻이다. 그 형제는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이 있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직접 주님께 기도로 여쭌 사실에서 이는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 세계가 있고 특별히 핍박 받는 그런 지역으로 이 세상은 결코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당장 하나님은 불공평 불공정하다는 지적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누구는 편안하게 믿음 생활을 하고 누구는 죽지 못해 저 고생을 하는 등 그런 일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유 세계에서는 핍박 받는 지대보다 더한 위험에 처해 있고 오히려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비극적 상황일 수도 있다.

핍박 받는 그 북한 쪽이 오히려 더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분명 자유와 억압의 차이이므로 가히 생명과 죽음의 격차로 벌어짐은 당연하나 영적으로 말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언하는 것이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逸樂, pleasure)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5,6] 함과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 보답하심[reward]을 바라봄이다.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니 곧 보이지 아니하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은 것이다"[히 11:24-27] 함과 같다. 바울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분토[dung]와 같이 여김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끊임없는 부단히 계속되는 이런 양자 택일이 필수이고 중요한 것이니 솔로몬은 그와 같은 크나크신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지혜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어 후세에 성경 중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 택일을 소홀히 하여 그가 멸망을 당했는지 어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회개했다는 언급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가 되고 능력을 행하고 귀신까지 복종하여 그 앞에서 꼼짝 못하게 쫓겨나는 큰 일을 했다 하더라도 '현재'는 멸망인 것이다[마 7:22,23].

"그렇게까지 불확실한 것이면 세상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은혜로 얻는다고 할 수 있는가. 자기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나, 왜 불확실한가. 도대체 자기 자신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자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멸망당하는 아나니아 부부에게 "네 것을 두고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가!"[행 5:4] 하고 한탄조로 말한 그런 비극적 상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한 것이다. "항상 복종하기를"[:12] 두렵고 떨 정도로 하면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솔로몬이나 아담이나 과거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하고 두렵고 떪이 없기 때문에 그런 비극적 결과를 낸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고를 받고 교회는 "크게 두려워하기"[:5,11]를 배운 것이다. 오늘날은 이 "두려워함"이 없어 "배교(背敎)"[살후 2:2]의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있다행 9:31/롬 11:20-22/고후 5:10,11/7:1,15/골 3:22/엡 6:5/히 4:1/12:28/ 딤전 5:20/벧전 1:17/2:17/ 3:15].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자유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제해서 구원 얻게 만들고 끝까지 천국 가게 하신다면 인간 로봇이 아닌가. 아무도 이런 로봇이 되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셔도 불만, 인간 로봇으로 만들어 주신다 해도 불만이니 이런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만족을 못하는 법이다. 자기중심으로 나가려는 핑계와 구실에만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 왔지만, 언제든지 무엇을 하든지 또 어떤 경우에서나 자기 구원을 의식하여 목표하면 그는 한 마디로 구원 얻지 못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혹은 세뇌시켜 만든 "구원의 확신"일 뿐이다.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 구원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기쁨과 평안과 사랑 속에 살기 때문이니 왜 공연히 그런 헛된 생각을 하겠는가. "구원을 이루라고 하니까 구원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냐" 하려는가.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을 스스로 보전하라는 것이니[아담이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전 못해 잃었으므로] 구원의 양면성, 동시성에서 나의 할 몫을 하라는 뜻으로서 나의 할 몫은 나를 위하지 않고 오직 나의 상대[서로 마주 대하여 보는]이신 그리스도를 위함인 것이다. 구원 받음은 단지 생명을 얻어 챙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 받음 즉 생명이 있는 것 자체가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리킴인 것이다. 고로 이 경우 잘못된 선입견[구원에 대한]부터 불식시킴이 급선무다.

그런즉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대로만 잘 따르면 아무 문제될 것이 있을 수 없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 했으면 그렇게 경고하는 대로 받아들여 두렵고 떪으로 복종하면 즉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모든 일에 그 방향으로 스스로 선택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시험이라는 것이 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쪽을 택하느냐 아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하느냐 그 양자 택일인 것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암시를 주는 대로 너무 시장하시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우선 허기를 채우는 쪽을 택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그 선택인 것이다. 성전에서 뛰어내라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판단을 옳다고 여겨 그가 암시하는 대로 그런 일을 하느냐 아니면 그런 생각을 아예 물리치느냐 그 양자 택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함으로써 우선 스스로의 신변 보호를 시도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니, 사람이 되신 이상은 약한 사람이실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임금]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어긋나고는 여차한 경우 세상에서 비참한 꼴이 되는 것이야 불문가지다.

아담 역시 여자가 내미는 선악과를 받아 먹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따름으로써 어떤 경우에서도 선악과를 입에 대지 않는 쪽을 택하느냐 하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던 것이다. 여자 역시 "뱀"[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영계에서는 "용"으로도 불린다]이 그렇게 말할 때 그의 말을 따르느냐 아니면 이를 단호히 물리치느냐 하는 양자 택일이었던 것이다. 또는 스스로 단독으로 결정해서 하느냐 아니면 일단 이 사실을 아담에게 알려 둘이 서로 의논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르든지 말든지 할 것이냐 그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삶이라는 것은 자기 신념을 따라 끊임없는 양자 택일의 연속이다. 여기서 잘못하면 영원을 두고도 후회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영원한 운명을 망쳐 버리게 되니 어찌 두렵고 떨리지 않을 일이랴. 아담이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넣고 씹게 될 줄이야 이전에는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그런 도저히 상상도 못했을 일을 현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를 보는 우리가 어찌 아니 두려워하고 떨림이 없으리요.

이 세상 편안히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지 강제의 의해[비록 그것이 핍박으로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강압적으로 일을 시키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핍박이 일어나는 것은 그와 같이 흩어지라는 신호인데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면 하나님은 이를 강요하실 수 없다. 이런 잘못된 인도 아래 있었으므로 당시 천주교처럼 그들 역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품기까지 했고 믿음과 행함을 제대로  분간 못해 영적인 방황을 했던 기록을 남기기도 했던 것이 아니랴.

그래서 자진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정착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썩은 물의 웅덩이가 되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착민이 아니라 유랑민 곧 "나그네"[히 11:13/벧전 1:17]라고 한 것처럼, 항상 구원의 희소식을 들고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박한 환난을 인해서도"[고전 7:26]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6]는 경고를 했다. 다시 말해 "천국을 위하여 고자(鼓子)가 되는"[마 19:12]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든지 권장하신 것이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모여’ ‘헤쳐’를 반복해야 하는 ‘이동하는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의 모습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전투하는 교회이므로 전선(戰線)을 따라 이동하므로 정처가 있을 수 없다. 군대는 침투성, 결속력, 기동성이 뛰어나야 하므로 이를 가리켜 세포 교회[cell movement church]라고도 할 수 있다. 집 교회가 그런 형태다. 초대(初代)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 양식을 따랐음을 다시 강조한다.

한 곬에 머물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계류(溪流) 교회[stream church]’ 개념이라 할까. 이는 ‘물의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서, 바다로 흘러가서는 이것이 다시 증기로 그리고 비나 눈으로 모양새를 바꾸어 온 지구를 적시는 것과 같이 그리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희소식은 지구 곳곳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종래의 덩치 큰 건물 속에서만 안주(安住)하는 세속화한 종교 형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표현은 불가불 필요한 상황이다.

한 마디로, 한 곳에 고이기만 하여 썩은 물이 되어 있지 않는다는 그런 뜻으로 충분하다. 소위 "대형교회화"하여 아들 손자 대대로 물러줄 듯 하는 직업화한 오늘날의 병폐를 해소시키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처음부터 성경에서 명시해놓은 교회 개념 또는 구성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같이 확정해 주신 것이다. 즉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19,20] 하심이다.

아들 계시면 아버지 계시고 하나님 계신 그 곳이 성전이다. 집을 지어놓고 이것이 성전이라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음을 다시 강조한다. 들에서나 바다에서나 하늘에서나 두 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따라서 성전이다. 물론 오늘날은 사이비 교회, 사이비 교인이 너무나 많으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미 우리가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대비하여 이와 비슷한 것들을 모방하여 모조품을 많이 만들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이들만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것이니[롬 14:7-9/고후 5:15] 그런 사람들이 "교회로서"[to come together as a church-고전 11:18, KJV] 모여야 하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미 되어 있는 신분에 부합하게 올바르게 사는 삶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이지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또는 이 세상에서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세상 종교와는 다른 것이다.

고로 말씀을 전하더라도 바울 사도가 구체적으로 본을 보인 대로 즉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한 그대로의 말씀 전파자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으니 이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이 세상의 지혜"가 아닌]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3-6] 한 바울의 본을 따르는 이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오늘날의 비극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이니 분명히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 3:7,8]이라 함과 같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사실상 그러하므로, 그 지식[말씀]을 전달할 때에도 오직 그것으로만 충분하고 다른 것을 곁가지로 곁들일 때는 말씀의 가치와 중요성을 퇴색시키고 손상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아주 간명하다. 누구나 듣고 깨달아 충분한 말씀의 전문가가 될 수 있게 되어 있다. 글을 알던 모르던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듣고 인도와 안내만 받으면 충분히 그렇게 복음에 정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세세한 참고 정도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요 그런 것은 한번 들으면 그뿐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세상 지혜, 지식을 찾는 바람에 능력이 빠져 나간 아무 의미 없는 빈 꽹가리 소리로 전락한 것이다.

필자의 가형(家兄)은 신학에 뜻을 둔 후 굳이 일반 대학 철학과를 고생스럽게 나온 후 신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앞두고 같은 기숙사의 졸업반 학우들에게 "도대체 믿음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고 심각하게 질문한 후 그 해댭도 듣지 못하고 며칠 후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다니던 교회 학생회 지도를 하고 있던 중이라 학생들과 강에서 수영을 하던 중 졸지의 익사 사고였다. 직업 청소년 학교를 세운다는 목표 아래 모금 중에 그런 불시의 변을 당한 것이다. 신학 교육이 이 젊은이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여 이 구원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성경대로, 자기 이웃에게 먼저] 전하고 그렇게 해서 믿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다. 믿을 때에 세례 받고 모일 때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의식(儀式)의 전부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이 주축을 이루므로 그 필요성에 따라 초대 교회는 매일 모인 것이다[행 2:48/히 3:13].

단 둘이 모여도 교회요 수천 명이 모여도 교회다. 단 둘이 모여도 교회라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복음을 전달하여 함께 믿는 이들을 모아 수를 불려 나가는 것이 교회의 생명이다. 덩치 크게 몸집을 불리면서도 반드시 세포 분열처럼 쪼개어 나가는 것이 사도 행전에서 보인 대로의 "집 교회"의 특징이다. 일상적으로 모이기는 집에서 모이나 그 숫자가 합쳐서 또 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류 교회"라고 한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냇물, 골짜기 물이 받은 대로 흘러 보내는 우선 보기에는 가냘픈 교회 형태를 말함이니 곧 주로 집에서 모이는 교회다. 일부러 집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서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그마한 교회가 모여 필요한 경우 큰 교회를 이루고 또는 즉시 분산되어 확장해 나가는 등의 일을 되풀이하는 신축(伸縮) 작용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다.

기도의 무한(無限) 동력(動力)의 인력(人力) 자원

우리가 이회장의 24개 질문에 유달리 관심이 가는 또 하나 이유는 고 정주영[1915-2001] 현대 회장에게 전도 목적의 친필 편지를 꾸준히 보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 말 김대중 정권 초까지에 걸쳐 자택으로 보냈었는데 더 이상 쓸 내용이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편지도 끊었지만 물론 일절 답장은 없었다. "물론"이라 하는 것은 대개 부자들은 그런 경우 돈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에 우선 사로잡히는 공통된 약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미국의 억만장자 신문왕(新聞王) 허쓰도 좋은 여자를 구하려 했지만 모두 돈을 바라고 달려든다는 선입감을 떨쳐 버리지 못해 말년을 고독하게 지내다가 죽었다. 이것을 "부자의 고독"이라 한다. "천석군은 천 가지 걱정, 만석군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는 옛 말도 있듯이 "부자의 불행"이라 해도 좋다. 돈 때문에 형제간에 불화하여 원수가 되는 등 인간 관계가 험악해지는 상황을 볼 때 그리 허튼 말은 아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회장이 피력한 대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선입관이 있어 처음부터 그 누구도 그런 부자들을 전도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구원의 희소식(喜消息)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는 판단 아래 그 기회를 제공해 주어 보자는 것이 첫째였다.

다른 하나는, 혹 그가 이 기회를 잡아 회심(回心)하기라도 하면 "이 세대에 부자들을 명(命)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유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딤전 6:17-19]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경우 세상에 그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편지를 끊을 때 우리 역시 ‘돈[錢]’ 소리를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편지 쓴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자는 마음이야 없었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돈[정신 나간]’ 소리로 그에게는 들려졌을 것이다. 평소의 관심이었으므로 연로자들을 위한 조그만 복지시설을 세우는데 필요한 ‘돈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이런 시설을 생각한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나이든 이들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단지 내세 준비만 해 주면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소모품’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나, 알고 보면 큰 자산(資産)이니 그 ‘생산력’은 무지무지하게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등한히 여기는 것 중의 하나다. 이는 얼마나 "교회"가 기도를 중시하지 않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즉 성경에 다음 대목이 있으니, "참 과부인 과부를 받들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이는 하나님께 소망(所望)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쾌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이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이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했거나 성도들의 발을 씻기거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했거나 모든 선한 일을 따랐던 자라야 할 것"[딤전 5:3-10]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위하고 세계를 위한 기도의 보고(寶庫) 역할이 나이 많은 이들의 몫이다. 이 필요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나이 많은 이들이 가장 충실히 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다. "나이 매우 늙었으니 그가 출가(出嫁)한 후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聖殿)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晝夜)에 금식(禁食)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침 이 때[마리아가 생후 8일 되신 그리스도를 안고 할례 받게 하려고 성전에 나왔을 당시]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 한 것이다.

그의 충성스러운 기도자(祈禱者) 역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증거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영접하려고 나온 몇몇 손가락으로 꼽을 축복 받은 이들 중 하나로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가 이런 큰 영적 자산(資産)을 소홀히 하고 낭비하고 있음을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철저한 믿음으로 무장시켜 기도의 '특별 기동 타격대'로 운용할 수 있건만 그 전략 전술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너무 성급한 마음이 되어 아직 열매가 ‘여물기도 전에 따려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 구원이 시급한데 돈 소리 꺼내다가 사람까지 놓친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그 양로원 설립 이야기를 편지에다 씀으로 해서 정회장 역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했을 것이다.


생존경쟁이라는 치열한 각축장이라 하여 바락바락 애쓰는 인생들이여, 당신네는 시간을 허송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허락되어 있는 시간들은 모두 구도(求道)를 목적하는 데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누리라고 주신 한 평생의 시간들이 아니다. 득도(得道)하였으면 다른 사람들도 득도할 수 있도록 제자를 삼아 진리를 가르치는 데에만 목적이 있고 거기에만 의미가 있으니 곧 전도(傳道)이다.

득도에는 자기 노력에 의해 스스로 얻는다고 착각하는 자력(自力) 구원이 있고[단지 그렇게 생각할 뿐 실제 구원은 불가능이다],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라고 인식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예의 데레사 수녀는 자기 종교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경우다. 불교 신자도 마찬가지다. 세상 구원을 위해 입산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부터 스스로 깨닫고자 함이니 이 깨닫고자 하는 의지는 자기를 위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남을 위한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이가 누가 있다는 말인가?" 할 수도 있다. "구원을 욕구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닌가?"-옳은 말이다. 말의 진의(眞意)는, 스스로 구원을 욕구한다고 그 욕구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밝힘에 있다. 그렇게 욕구해서 그 결과로 구원이 되었다, 만사 문제 해결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데에 정작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든 열두 사도든 모두 자기 자신의 구원을 목적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그렇고 예외가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진리를 몰랐고 따라서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구원을 목적했다고 바리새파(派) 사람들처럼 그 한 가지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생업에 충실하여 살고자 하고 운이 좋으면 부자되기를 소원하는 등의 몸부림 자체가 자기 구원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잘 안된다고 즉 영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신이 없다고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반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생업을 일삼기보다 전적으로 이런 일에 시간을 집중시키고 열심도 있어[롬 10:3] 어느 정도 스스로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다시 말해 "자기 의를 세우려고"[:3] 안간힘을 쓴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모든 세상 종교인들의 양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한다고 스스로 구원을 이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열두 사도를 비롯한 평범한 생활의 보통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안 다음에는 그래서 진리를 안 다음에는 일체의 자기중심을 버린 것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그렇게 구원을 목적하다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진리[왜냐면 모름지기 생명 세계에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할 수 없고 위해서도 안되니까]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배워 대오각성하고[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는 소위 "대각(大覺)"이 아닌], 우리를 창조하신 분[머리로서 위치해 계시는]의 새 창조를 수용하게 된 까닭이다.

구원을 욕구하는 것 그 자체에 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욕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말함이다. 산 자로서 누구나 죽지 않으려 하는 욕구는 자연스럽고 또 죽은 자임을 자각했을 때는 산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스스로 자기 구원을 목적하여 그 구원을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가 됨이니, 왜냐면 그것은 순수한 자기 기만이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는 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나 자신을 구원했다고 착각하나 성경의 진리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닫게 해 주고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서는 안되기에 처음부터 하나님 친히 구원을 해 주셨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 자기 구원을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되는 사랑과 생명의 원리[법칙]로써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하나님 정하신 생명 곧 삶은, 영원히 자유 의지를 따라 살고 행동하는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있으니 갑은 을을 위할 뿐이요 을은 갑을 위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이룬다"는 의미를 놓고 볼 때, '구원'은 죽음과는 상관 없는 오직 생명, 사는 것과만 직결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룬다' 함은 내 스스로 움직여 결과를 낸다는 의미이니 내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나타내는 행위다.

즉 산 자로서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왜냐면 갑은 을만을 위하고 갑은 을만을 위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 되어 이 경우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는 내가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를 이루어 갑과 을의 관계로 되어 있으니까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일관된 평소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고후 5:15].

이렇게 일관되게 나간다는 의미를 달리 표현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난데없이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든가 또는 생명과는 무관하게 엉뚱한 "상급(賞給) 타기 운운"하는 식으로 해석하지 말 것이다. 아담으로 치면 일단 생명을 받았으니 "자기 생명을 지킨다"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로서는 구원을 받음으로 생명에 들어왔으니 "자기 구원을 지킨다"는 뜻이기에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지키되 그 지키는 방법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롬 2:7-10] 데에 있으므로 내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필수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무슨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가능한가. 더군다나 시험하는 자가 눈에 불을 켜고 덤비려 드는 마당에[벧전 5:8] 이는 당연하지 않은가. 영역으로는 "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이다.

즉 "일함"[to work]이다.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의 일을 함이요 산 자로서 일하지 않으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냄이니 즉 스스로 죽은 자이기를 선택했으니 죽은 자로 분류되는 것뿐이다. 자기 운명 자기가 정한 대로 되는 것일 따름이다. 과거에는 내 스스로 아무리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려 하나 그 결과가 결단코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그럴 능력도 실제는 없거니와 그렇게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 자체가 지가중심으로서 그 자체가 악이요 죄였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는 항상 죽음뿐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새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만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너희 인생들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도 모두 죄인들이요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하시고 세상을 모두 악하다고 규정하시므로 이에 반발했던 것이니 왜냐면 그들 자신은 그들이 이제까지 쌓아 올린 선행과 의로 말미암아 구원이 가능하다고 딴에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는데 죄인일 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듯 그런 증오가 아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형편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미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남에게 일러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확연하게  알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니 불교의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삶의 진리가 있는가, 있으면 무엇인가 하고 수도(修道)에 들어갔었다. 생로병사의 인간고(人間苦)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여부를 살피려 함이었으니 그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이야 얼마든지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찾았다"고 하는 것이, 다름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판정이 되어 나올 수밖에 없으니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처음부터 부정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에 만족하고 태평이었다면 그런 고행을 시작했을 리 없다. 자기 구원을 위해 처음 시작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소기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니 그 자체를 두고 논할 때, 자기를 위함이었으므로 즉 뿌리가 자기를 위함이었으니 그 열매 즉 결과도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그 뜻이다.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로 도로 돌아와 버린 '다람쥐 쳇바퀴 도는' 형국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죄악과 고통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만번 옳은 말이나 자기중심의 타파는 자기 부인에 있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진퇴양난의 진실을 직시하라는 그 소리다. 뿌리가 그러하니 나무도 그렇고 나무가 그러하니 열매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있다 하니 모순이요 자가당착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는데도 자기 자신을 위함에서 시작했다가 그 결과로 목적을 달성했다 하나 그 목적 달성이 애초 자기를 위함에서 시작한 그 연장선에 불과하므로 한 색깔이요 변화라고는 전연 없지 않으냐 하는 그 뜻이다.

자기를 위함에서 진리 탐구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실상을 알고 보니 자기를 도무지 위하지 말아야 생명의 일이 풀려진다는 이치가 분명하므로 즉 자기가 멸해져야 그래서 이 도리에 순응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버려야 제대로 되는 순서인데, 기껏해야 "나는 없다" 하는 정도로만 결론을 내렸으니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있음"으로 시작한 인생인데 스스로를 "없음"으로 인식하려 하니 이것은 보통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다.

내가 없으니 인간고도 없다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인간고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말도 얼마든지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하나만 말할 줄 알고 둘은 말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에는 순서를 따져야 한다. 인간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내가 번민, 번뇌하였고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은 나중에 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없으면 번민, 번뇌 자체가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실컷 번뇌하던 끝에 "내가 없다" 하게 되면 그런 모순과 자가당착이 없다.

처음에 번뇌했던 것은 내가 없음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라 할 것인가. 그래서 뒤늦게 깨달았으므로 이제는 부질없이 번민, 번뇌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얻는 결과가 자유의 경지라 한다. 이 자유를 그들은 "열반"이라, "해탈"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고로부터의 자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인정하니 '인간고'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인간고를 인정하니 '나'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즉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없으면 인간고도 없다고 한 바로 그대로, 자유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니 자유의 경지니 어떠니 하는 말 자체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유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인간고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니 "인간고로부터의 자유 해방"이 아닌가. 인간고를 인정하니 나 역시 인정되어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을 "자유"라는 말 자체가 넉넉히 증명하고 있음이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기에 "자유"라는 말을 쓰는가. 자유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해탈", "열반"이라는 의미를 설명할 때는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를 밑바탕으로 깔고 하는 소리다. 그렇게 해놓고는 말로만 아무리 "내가 없다" 한다고 해서 그 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허공에 뜬 메아리만 되어 울려 나와 나를 조롱하고 있을 따름이다.

불교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이 된다고 한다. 부처를 신이라 여길 때에 그렇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반에 이르고 해탈한 몇이라도 과연 그런 신으로서의 능력과 모습을 이 세상 중에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는 아무도 없다.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을 가리켜 해탈이라, 열반에 이르렀다 한다. 죽기 전 살아 생전에 부처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신으로 화한 인간의 실제 실물은 한번도 나타낸 적이 없다. 나타내질 리가 없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망상이고 실제 현실은 아니니까. 이 논리가 정확하지 않은가. 사람이 부처가 되고 신이 되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가능하다면 그 실제 본보기를 보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못할진대 이것은 바로 속임수가 아닌가. 죽고 나서 가능한 것이라면, 죽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을 누가 믿겠는가.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누가 확신하겠는가. 막연히 미래에 대비하여 각종 보험에 들어 두는 것과 같은 속성일 뿐이다. 보험에 드는 것은 막연한 예상이나 기대에 의존함일 뿐이다. 말하는 요점은 그런 모든 것에 대하여 명확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모든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밝혀 온 대로 설명이 일목요연하다. 불교에는 그런 설명이 없는 것이니 왜냐면 실제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막연한 인간 공상과 추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요일 3:1]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대라고 할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남아 있음을 성경은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죄인으로서의 죽은 자가 받는 현재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을 함이다.

현재 인생이 모두 죽은 자인데 그 죽게 된 그래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이유 또한 성경은 논리 정연하게 밝히고 있다. 죽은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보기만"[to look at] 하면, 즉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창조의 역사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골자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즉시로, 구원되는 사람은 구원되는 것이다.

전도자 두 사람[바울과 실라]이 빌립보라는 곳에서 전도하다가 전도한다는 이유로 붙들려 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을 때 한밤 중이지만 기도하고 기쁨으로 찬송[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덕을 찬양하는 노래]을 부르자 옥 터가 움직이고 거기 갇혔던 모든 죄수들의 쇠고랑이 다 풀리고 옥문들이 열리는 등 이변(異變)이 일어났다[행 16:26]. 자다가 깬 간수(看守, 교도소장, jailor)가 놀라 죄수가 다 도망친 줄로 착각, 자결하려 할 때 바울이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소!" 하고 외치게 된다.

교도소 사람들은 허겁지겁 등불을 들고 다니며 주변을 원상대로 정리해놓느라 바빴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서워 떨며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하여 뛰어 들어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덜 소란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기가 바쁘게 던진 첫 마디가, "선생님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이었다. 이에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고 주님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했다.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믿은 간수는 밤 그 시간에 저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식구가 다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저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구원을 받았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완료된 구원이다. 이전에 이 간수는 하나님도 알지 못했고 성경은 물론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오직 그 날 밤에 실로 벼락치기로[옥 터가 움직이는 등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하나님을 알았고 그리스도도 알고 구원도 알게 되었고 그 즉석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본 것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주인[소유주]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배운 것뿐이었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기적적인[초자연적인 즉 자연법칙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모든 현상 다시 말해 자연계가 아닌 영계의 현상 또는 영물(靈物)인 천사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적"이라 한다] 사태가 일어난 결과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실존을 믿든 보지 않고 믿든[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다고 하셨다-요 20:29], 믿은 결과에 의해 그와 같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 구원의 '완료'임을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혀진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실을 "어린 아이" 같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그 간수가 할 수 있는 전부였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믿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요 따라서 오직 그에게 복종할 뿐임을 깨닫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라[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행 16:31] 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든 성경에 대해서든 전연 사전(事前) 지식이 없는 간수에게 "주님[주인, 소유주]"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말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절대 복종할 때 구원이 된다는 뜻을 당연히 함유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음을 크게 오해하고 있으니, 단순히 특정 사실을 사실로 시인하는 정도를 '구원 얻는 믿음'이라 착각한다. "주님"이라고 했듯이 "믿음"은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 복종을 의미하는데 이를 멋대로 무시하고 간과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이신데[갈 2:20] 어찌 절대 복종하지 않고 배길 것인가. 왜 복종해야 되는지 그 이유만 알면 충분한 것이다. 그것이 구원 받는데 필요한 유일한 요건이다. 이유를 알면 이제는 복종하기로 작정하면 그것이 구원이다. 왜 복종하는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칠 정도이시니[갈 2:20] 그가 내게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하시지 않음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야 아이[철든]라도 얼마든지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그래서 "회개"[행 2:38]가 반드시 전제된다. 회개는 이렇게도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으니 이것도 모르고 철없이 나 자신만을 위하여 행동했던 모든 것을 뼈아프게 뉘우치고 이제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화답하여 영원히 내게 지시하시고 말씀하시는 뜻대로만 살리라는[왜냐면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이므로] 즉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당연한 결단이요 약속인 것이다.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명령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내가 복종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자기중심이 아닌가" 할 것인가. 이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바로 자기를 사랑함이라"[엡 5:28] 한 그대로인데 그러나 아내를 위하면서 이는 나 자신을 위함이다 하고 이를 의식하면서 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위하는 것이요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사실만 아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자기중심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함께 우리를 위한다'는 생각이 없고 자기 자신만이 관심사일 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롬 10:17] 하는 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면 이와 같이 구원 받는 일은 하룻밤 몇 시간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즉 성령을 받음으로써 얻는 구원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알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니 그리 되면 죄 용서가 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음이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內侍) 역시 빌립 집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노중(路中)에 수레를 타고 가면서 전도를 받고 불과 한 시간[아니라면, 수시간] 안에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구원 받은 기쁨으로 돌아간 것이다[행 8:27-39].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한 순간에 맞은 것이다. 이 세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 지내졌음을[골 2:12/롬 6:3,4] 내 스스로 확인하는 '서명 날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로 잠기는 의식을 행할 때의 이 물은 노아 홍수 당시의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인간이 수장(水葬)된 것을 나타낸다[벧전 3:20:21].

그리고 다음 순서로 성령의 세례다. 이는 그렇게 회개의 세례로써 죽고 난 다음 그래서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된 후의[죄의 대가는 죽음인데 죽어 버렸으니까 죄의 청산이다-롬 3:25/히 9:15] "다시 출생함"[요 3:3], "성령으로 출생함"[:5,8]을 가리킨다. 이는 "육으로 나는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인데, 우리가 아담의 육체를 부모를 통해 물려받음으로써 "육으로 나" 아담의 닮은꼴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물려받아' "영[성령]으로 나니"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닮은꼴이 됨이다.

첫 여자[하와] 역시 아담의 닮은꼴이기는 하나 그 스스로 여자를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자가 났기 때문에[아담의 육체를 받아 났기는 하지만] 자식이 안되고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지는 결과가 되었지만, 우리는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음으로써 그러하니 그리스도의 닮은꼴이라 함은 인간의 '육체와 성령'으로 합성된 영원한 이중 구조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영혼과 육체로 된]이 아담 당시의 '육체'처럼 되고 성령께서 바로 그 '영혼' 격이 되어 계시는 이중 구조임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이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의 의미가 해당된다]의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가 되어 계시는 모습이므로 아버지의 영이시기도 함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의 모습이시므로 아들께서 이제는 그러한 영원하신 이중 구조[사람의 육체와 하나님의 영]로 계시니 아버지의 모습 또한 그러하실 수밖에 없어 그러므로 나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닮은꼴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 아들께서는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아들께서도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는 변함이 없으시고 아버지께서도 그러하시니, 하나님을 우리가 영원히 볼 수 없으므로 오직 사람되신[아들께서]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사람이지만 우리와 함께 사람이 되어 계시는 아들을 기준으로 하여 엄연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출생함이니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베푼 후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按手, 머리 위에 손을 댐)함으로[행 19:6] 성령 받음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 함과 같이, 같은 "세례"[행 11:16/요 1:33]라도 여기서는 ‘물’이 아니라 ‘성령’이신 것이다. 물[회개의 세례]은 죽음을 상징한다면 성령[성령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선물을 받음]은 생명을 상징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배[腹, 사람은 그 육체의 기력(氣力) 또는 중심이 배꼽 아래 단전(丹田)에 있다고 하며, 영역으로는 "belly"(KJV), "heart"(NKJV), "within him"(NIV)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다]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rivers of living water]이라 하셨다[요 7:38]. 계시록에도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river]"[계 22:1]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여기서의 영적인 의미의 물은 자연계에 속한 물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과는 달리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어 성경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사 12:3/43:20/44:3/55:1]. 그러나 자연계의 물의 양면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생명체를 죽이게도 하지만[물로 인하여 질식당해] 살리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명일 경우 현재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70%의 물로 채워져 있는 사실을 기준으로 하여 나타낸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물[노아 홍수]만 아니라 방금 설명과 같은 생명의 물일 수도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성령을 불로 상징하는 데는 없다. "불"은 피조물로서의 영계의 영물 또는 신령한 몸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살후 1:7/히 1:7].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할 때의 불은 심판의 불 못을 가리킴이다[마 3:11,12].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은, 120명 가량의 다중(多重)일 때는[행 1:15]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행 2:3]이라 했으니 그 형상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령 받으실 때의 "비둘기 같음"[마 3:16]과 동일한 것이다.

고로 우리가 구원되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지는 것이 세례 받음으로써 상징된다[:21].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 받음은 한 성령 속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고, "한 성령을 마시게"[고전 12:3] 됨을 말함이니,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도 하지만 물 없이는 못사는 생명[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다. "회개의 세례"는 '죽음의 물'이었지만 "성령의 세례"는 '생명의 물'로서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난 받으심을 가리켜 "내가 받을 세례"[눅 12:50]라 하셨고 또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하셨으므로, 물 세례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와 관련시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구원과 관계된 일체의 일은 빌립보 간수에게 그 밤 시간에 다 이루어진 것이다. 왜냐면 이 모든 '우리의 구원 작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미 완벽하게 완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정(旣定) 사실에 내 스스로 믿음으로써 일치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이요, 그리고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일체의 과정이 완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로부터 벗어나 산 자가 됨이다. 여기서부터는 천국에 들어가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느냐 여부로 좌우되니[마 7:21] 즉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세례 의식(儀式, 禮式)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 스스로 우리 모두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겠다는 작정이 되어 있을 때 거기 부합되게 형성되는 것이지, 이런 실질적인 변화[오로지 복종하겠다는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의지 표명-고후 5:15] 없이 형식만 아무리 갖추어본들 그런 것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슨 나의 노력이 필요한가. 하루도 아닌 한 밤중에 그것도 불과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새 창조"[고후 5:17]요 "다시 남"[요 3:3]이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이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실천이요 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니 곧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고전 9:27] 노력,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노력이니 곧 "거하든 떠나든[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씀"[고후 5:9]이다. 영원히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삶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주느냐 할 때, 바로 나를 존재하게 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나를 위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리에 들어가고 영생에 들어가고 구원에 들어가는 첫 관문인 것이다. 나를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처음부터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므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할 필요도 없고 위해서도 안되는 것이니 그렇지 얺으면 상호 충돌이 불가피하여 순리(順理), 순류(順流)로 되어 나오지 않을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조물주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조물주를 위하고, 그래서 조물주를 위하는 차원에서 각기 자기 이웃[같은 피조물된]을 위하는 것, 이거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 통일인가. 곧 지금까지 설명해 온 한 몸의 체제 속에 영위되는 삶이다. 반면, 개신교는["개신교"라 할 때는 성경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교회와는 동일시되지 않고 별개로 즉 세상 종교로 여기서는 취급한다] 자기의 노력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거의 나태(懶怠)와 방종(放縱)에 가까운 종교가 되어 있다.

"선을 행하고 의롭게 행동하라"는 말만 해도 이에 대한 민감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되어 있을 정도로 완전히 세뇌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런 소위 "기독교"[여기서는 성경과는 차별을 두는 것이니 성경과는 어긋나게 가르치는 까닭이다] 교리는, 세상의 비방 거리와 조롱 거리가 되고 있다. 왜냐면 사람은 당연히 선을 행해야 함을 마땅한 도리로 여기는 일반 상식과는 전연 딴판으로 무조건 하나님에게 기대는 타율적인 것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먹칠을 해놓은 것으로 성경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방하는 이들도 완연한 허물이 없지는 않은 것이니, 스스로 성경을 읽을 생각은 않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만든 인위적인 교리만을 헛되이 붙잡고 흔들어대니 무슨 건더기가 나올 리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성경을 다 아는 양 조리도 없는 비판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제대로 알고 나서야 희다고 하든 검다고 하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의 인간 생활에서 노력하거나 힘쓰는 것도, 나의 의지를 발동시켜 무조건 '하면 되는' 것이 있고 그 반면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나 여의치 않거나 어려운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의 순종을 위한 힘씀은[눅 13:24/행 1:14/2:42,46/24:16/롬 12:12,13/14:19/고전 15:58/16:10/살전 4:1/골 4:2/엡 6:18/4:3/빌 4:3/딛 3:8,14/딤후 2:15/4:2/벧후 1:5,10/3:14/유 1:3/히 4:11/] 오로지 전자에만 속한다. 그리스도의 막강하신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된 이웃끼리 "서로 사랑함"[요 13:34]에 있으니, 그런즉 남을 위함이요 이웃을 위함인 고로 이것이 "선을 행함"[요삼 1:11]이고 "의를 행함"[요일 2:29]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선행이 없다. 이 세상에서라도 이런 식으로 모두가 살면 이 바로 이상향이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인간 삶의 묘안이 없는 것이다.

"참고[자기중심 일변도의 이 세상이므로] 선을 행함"[롬 2:7/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이 우리에게 영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9/고후 5:15]에 부합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예수 그리스도]을 받으면 되는 것이기에 즉각 이루어지는 일이다. 각고면려 뼈를 깎는 수행이나 수양 끝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장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일상생활로 돌입할 수 있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는 당연히 진리를 받는 처음부터의 자세가 중요하고 제대로 된 안내를 받는 것이 강조된다. 잘못된 인도를 받기 때문에[잘못 전도되거나 성경적이 아닌 가르침을 받아] 어떤 이는 그런 올바른 자세를 갖추기에 수년 또는 수십 년이 소요되는 일도 있지만, 원래는 이상 빌립보 간수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듣게 되면 하룻밤 사이라도 구원 받아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밤 사이의 시간'이라도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정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니, 알아야 무엇이든 믿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지금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했으니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에 살아 오면서 움직여 온 것은 죽은 자로서의 뒤척임이었고 이제는 산 자로서 움직이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다르다. 즉 죽은 자로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었는데 이제 산 자로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고후 5:15].

상황이 정반대이다. 과거는 '자기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자기 부인'이다. 이렇게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한 상태가 되어 있으니, 천국에서 사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나 살아 움직이는 본질적 양상은 같은 것이니 곧 자기 부인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15]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천국에서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을 미리 입증함이 된다.

그런 사랑의 나라[천국]에서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취하는 행동이란,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 부부를 죽음에 몰아넣는 그런 불상사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니, 그런 제2, 제3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천국에 들여보내시겠는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담을 에덴낙원에서 추방하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마 7:21].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천국에서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는 무슨 그런 지침을 주셨던가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죽은 자들로서의 이 세상에서 살자니까 자연스럽게 '죽은 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배척당하고 "나그네"[벧전 1:7]로서의 핍박과 환란이 필연적이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게 된다[골 1:24]. 그래서 선을 행하되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인내로 이룸이다[히 10:36].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내가 일부러 그 고난을 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그 고난이 내게 닥치게 되어 있음이다. 순종하고자 할 때 그 순종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수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마당인데 유독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을 죽음의 권세를 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히 1:4] 좌시할 리가 없다. 이런 경우, "의를 위해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되고 또 그에 대한 약속 또한 명백하지만[눅 6:22], 하나님께서는 더욱 은혜스럽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주신 것이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심도 내 마음에 오심이다[고후 1:22/엡 3:17/벧전 3:15]. 내 안에 계시는 위치가 내 신체의 어느 부위도 아니고 '나의 마음'이라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이 점을 명심할 일이다. 마음이란 것은 스스로 다잡지 않고 의식적으로 확고한 의지로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지 않으면 느슨하게 풀어져 아주 이상하게 되어 버리는 특별한 데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하였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도 이 마음 하나 잘못 먹어 하나님의 말씀보다 피조물의 말이나 느낌이나 인상을 더 믿은 까닭이다. 그래서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히 3:13]이라 경고하고 있다. 악심 곧 올바르지 못한 마음은, 생각을 잘못하여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원흉이다. 이런 나의 마음이 향하는 향방 여하에 나의 생사가 달려 있음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마음을 지켜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심한다고 말들을 하나,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으니 내가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지키고 있을 때 한한다. 다시 말해 "범죄는 인간이요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가 아니라, "의지는 나의 것이요 그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즉 마음 먹은 대로 되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은 죄 짓는 것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인간의 생각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식에서 여전히 하는 말이다.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면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기로 작정할 때는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이요 변화이다. 나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나의 의지(意志)요 복종이고 믿음이요 따라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고, 그리스도의 측면으로 보면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요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막강한 능력이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갑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을을 안은 모습이나 을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갑을 업은 형상임과 같다. 어느 일방적으로만 해석하거나 인식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나의 복종은 쌍쌍이 불가분으로서, 열차가 달리는 평생선의 철도 레일과 같다. 능력과 복종이라는 두 가닥으로 항상 평행이 되어야 구원의 차가 달리는 것이요 천국이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지 한 가닥 레일 위로는 평생 가야 그 어느 가닥도 제 구실을 못한다.

그리스도의 "우심"[눅 19:41]을 상상해보라. 이는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하나님께서 우시는 것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시어 능치 못하심이 없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유일하게 불가항력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의지(意志)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복종하고자 하는 의지 이 영역은 영원히 손대지 못하시는 무서운 현실이다, 어찌 두렵고 떨릴 일이 아니리요.

구원하시는 능력은 넘쳐 나건마는 구원의 열차는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니 이런 참담함이 또 있으랴. 여기서 문제 삼는 마음이란 것은 '사랑의 의지'를 말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내 마음을 지켜 주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내 마음을 강제하시고 조종하신다는 것이니 그런 일은 이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이 우주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홀로[나의 공로나 공덕이 개입함이 없이] 나를 구원하시나[나를 새로 창조하시므로] 동시에 내 스스로 나를 구원해야[내 스스로 믿어야 하므로] 하는 것이다[딤전 4:16]. 상반된 듯이 보이나 실은 상보성(相補性)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잘못 읽어 미리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미리 택하셨으면 우실 리가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믿지 않고 멸망을 자초하므로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어 우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 멸망의 대상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 그들 스스로 회개하는 길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으시기 때문에 이를 슬퍼하신 것이 아닌가.


§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눅 16:25]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내에서의 믿는 형제간의 일이 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나,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당시는, 모세 율법 시대에 속하니 아직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명하시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눅 16:16] 하셨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16] 하셨다.

요한이 죽던 때부터 율법과 선지자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때부터가 그리스도의 시대이니 그 전에는 아직 율법과 모세 시대이다. 이 사실을 왜 지적하는가 하면 율법과 선지자 시대에서의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 형태였다.

때문에 율법 지키기를 이스라엘에 명령하면서 모세가 말하기를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을 것이다"[신18:15/행 3:22,23] 한 것이다. 모세의 성격이 이로써 명백히 된 것이니 즉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범죄한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명령 곧 자기 부인으로써 형제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어기는 자는 모두 구원의 대열에서 낙오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회중(會衆, a congregation)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었으므로 성령으로 스데반은 "광야 교회"[행 7:38]로 규정했는데 여기서 탈락한 것은 교회 중에서 걸러지고 솎아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는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가운데에서의 부자와 가난한 자 곧 "지극히 작은 자"[마 25;45]를 두고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의 멸망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45]으로 단죄하시는 것에 해당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이 없음을 인하여 받는 살인죄로 심판 받음이니[요일 3:10,14,15]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판"[히 10:30/벧전 4:17/고후 5:10,11]에 해당되는 것이다.  

머리와 몸

한 몸의 구조는 반드시 머리가 필요하고 이 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지으시고 그 첫째 원인이 되시고 그리고 어버이가 되시는 조물주 하나님만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위치요 역할이다. 세상 종교에서 아무리 이를 모방하여 머리와 몸 관계를 설명하려 해도 피조물 스스로가 이 머리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으니 허공에 뜬 메아리일 뿐,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요 진실이 아니요 공론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진리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일절 없다. 만일 자신을 위하다가는 한 몸으로서의 구조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와해 소멸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든 짐승을 지으시든 머리와 몸의 구별을 엄정히 하신 것이 이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머리만이 사물을 살펴 판단하는 기능을 할 수 있지 그 외 몸의 어떤 지체(肢體)도 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지 않은가.

이로써 무엇이 선이고 의인지 충분한 설명이 된 것이다. 왜 첫 사람 아담이 사람이라고는 자기[남자]와 여자밖에 없어도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죄목(罪目)이 형성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하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왜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불러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머리]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는지 이유가 드러나는 것이다[마 7:21].

자살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목숨 끊는데, 그리고 그렇게 할 완전한 자유를 일단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어리석음[이는 곧바로 악함으로 통한다]을 제지하실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세상 삶은 장차 오는 본격적인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각자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므로 이렇게 3운법칙으로 통제해 놓으신 것이다.

아무리 악인이 악을 행해도, 다른 사람들의 이상과 같은 '영원한 운명 결정권'을 방해까지 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인 같은 사람이 아벨 같은 사람을 죽여도 그 '아벨'이 충분히 구원 받을 만한 기회를 얻은 다음에야 죽이면 죽이도록 해야지, 그런 기회를 채 얻기도 전에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가인'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 두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제약의 의미가 3운법칙에서 입증되는 바와 같은 인간 통제인 것이다.



성경 장절을 인용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베뢰아 사람들은 더 고상하여(noble) 바울의 능력이 따르는 설교를 듣고도 그것을 액면대로 수용하지 않고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므로 믿는 이들이 많아졌고 한 대로 직접 확인하고 직접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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