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임마누엘"에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에 있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다. 나를 기준해서 그렇다. 나를 기준하지 누구 다른 사람을 기준해서 내가 살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명백히 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to gi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갈 2:20)고 한 것.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오신 것도 나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제각각이 이렇게 '나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가 되는 것. 사람들은 이를 항상 뒤바꾸어 생각한다. 뒤바꾼다기보다 아예 '나'라는 것은 빼어 버린다. 이것은 겸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지의 소산이다.
내가 모든 것의 기본이건만 나를 빼어 버리니 실속은 부여잡지 못하고 항상 언저리에서만 맴돌게 된다. 그저 막연하게 우리 위해 죽으셨다,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인식하게 되니 제대로 사랑이 자리잡을 틈이 없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다. 육체로 된 사람이라 본래가 그러하다. 여럿을 상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갑이라는 사람과 마주 대하면 그 사람과만 대화가 가능하고 옆에 을이라는 이가 있어도 그 둘 중의 하나와 상대하면서 시선을 번갈아 바꾸게 마련이다.
둘이 있다고 해서 갑도 을도 아닌 허공에다 눈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육체의 한계다. 이 "한계"는 부자연스럽고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이라는 것이니 무릇 피조물은 자기 형체가 있어 이 점에서는 영물로서의 천사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친히 이런 피조물 중의 하나처럼 친히 되어주셨다는 데에 있다. 내가 육체인 사람이므로 육체를 가진 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주셨다는 사실에서 모세 율법과 구별 지을 수 있는 가장 첫째되는 차이다.
모세 시대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예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 형상 즉 육체로 나타나심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앞서의 설명처럼 나를 위해서. 이 사실이 핵심이다. 자연스럽게 이 관계는 사랑으로 직결된다. 사랑은 둘만의 관계이지 다자간에 형성되는 일이 아니다. 부모가 여러 자식을 두어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양자 관계다. 하나님께서 많은 피조물을 만드셨지만 사랑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양자 관계다. 이것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구원 얻는 믿음의 뼈대다(갈 5:6).
모세 시대에는 단지 모든 것을 형상 또는 상징으로써만 나타낼 수밖에 없었으니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고 그러나 사전 교육 차원에서 기본되는 것은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것은 실질적으로 그리고 정상으로 나타나 가동된 것이다. 그 나타난 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 관계가 중심이 되어 있으니, 때문에 나의 죽음을 (나와 함께) 죽으신 것이고, 내 이름으로 즉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셨고 따라서 현재 내가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권능 위에 군림하여 앉아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둘의 하나됨"이니 이 표현은 아무리 자주 해도 물리지 않고 싫증이 없다. 이것이 나의 구원이요 영생이요 따라서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를 지으시고 소유하신 분이시므로 만유가 내 안에 들어 와 있음이니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통틀어 나의 소유가 되어 내 안에 있음이다. 그리스도 친히 나의 소유가 되시어 말 그대로 바로 내 안에 계시지 않는가!
그래서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고전 3:21-23)이라 한 것이다. 먼저 나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 다음에 즉 친히 나의 소유가 되어주신 다음에 나를 소유하시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강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주님께 나 자신을 바침으로써 된 아름다운 관계이다.
그래서 믿는 자만이 구원되는 것이다. "믿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가 되어(나 자신 스스로 원하여 기쁨으로 드린) 있기 때문에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니 곧 나의 소유자님, 주인님이란 뜻이다. 덮어놓고 부를 명칭이 아니다. 때문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눅 6:46) 하신 것이다. 이런 믿음과 사랑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느니 일방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은혜가 된다느니 하는 등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짝사랑은 없듯이 사랑은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이런 기본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비록 육신대로 다시 말해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은 된다는 망발을 하게 된다. 나의 전체 소유권이 주님께 있다는 여기에 나의 구원이 성립되어 있는 것. 왜냐면 이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예배를 일상생활이라 하는 것이다. 특정일, 특정 장소에서 일정한 예식을 따라 거행하는 행사가 아닌 것이니 그것이 예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종교 의식이다.
물론 우리가 모일 때 그런 의식을 행하는 것이야 흠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 곧 하나님 섬김의 전부라 착각할 때 그것이 종교 행사로만 남는다는 그 뜻이다. 구원의 증거는 일상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니 종의 신분으로서 육신의 주인을 섬겨도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김이라 한 이유다(골 3:24).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섬김이 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듣지 말 것이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는 현재의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루어져 있어야 함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주님께서 이 땅에 그 육체로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고(부활하신 후) 하늘에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이 되신 아담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그 초자연계 몸으로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늘에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현재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계심이 과거 제자들과 육체로 계셨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요 양상이지만 말 그대로 "내 속에 계실 수 있기"(요 14:17) 때문이요, 나만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와 똑같이 그렇게 계실 수 있음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그가 계시는 곳이면 그 어디든 아버지 친히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으로서의 면모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삶은 나의 영혼, 제2의 나 자신으로 계시는 가장 아름다우시고 사랑스러우시고 가장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우신 주님과의 간단없는 동거동락동고 동행으로 함께 사는 삶이요 말 그대로의 이중 구조(영혼과 육체의)의 삶인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하나됨이라면 속박이지만(그런 사이가 하나될 리도 없지만) 사랑하는 사이의 하나됨은 그 자체가 막강한 권능이요 생명력인 것. 환희요 평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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