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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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삶]의 법질서
천국은 삶의 법질서를 따라 운영되는 세계다. 법질서는 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몸' 의식, 하나 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변함없는 삶의 방법이요 질서이다. 그러면 천국에서도 그 법질서를 어기는지 여부를 물어 형벌을 주는 일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왜냐면 그렇게 정신을 못차려 자기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전부 가려지고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 생명의 법질서를 지킬 의사가 없는 이들은 아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법이고, 또 설혹 처음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순응하여 믿음에 들어 왔어도[눅 8:13-"잠깐 믿다가"] 그래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다가도 시험을 받아 그 자세를 바꾸고 과거와 같은 자기 중심으로 나갈 수도 있어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 벌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서 벌 받을 사람은 미리 솎아지게 되어 있다.
오직 회개할 것을 성경[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이니[행 17:30]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하니,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우리가 영생하지 못해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어 구원 얻는 것이므로, 이제 구원 얻는 사람은 당연히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처럼 범죄하지 않는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회개이다.
그것뿐이다. 어떤 종교적인 요건도 제시함이 없다. 염불을 만번 천번 외우라 하는 것도 없고 교회당이나 불당[절]에 출석하고 참예하라는 요구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영생하는 자로서, 단지 지금은 수고하며 일하는 때인지라[사람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여] 일하는 자답게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새를 갖추는 것 외에는 없다. 일하는 자가 어찌 편안히 살기를 바라서 삶의 낙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필요해서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모이는 것이다[히 10:25]. 필요했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매일"[행 5:42] 모인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할 때의 복종하는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뜻 즉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이 뜻을 그대로 지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요 율법이요 뜻이요 요구 사항이요 명령이다. 즉 자기 부인을 견지함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애초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영생]인 것이다. 즉 구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올바르게 살지 못해 우리가 죽은 자가 되었고 현재 우리가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은즉 이는 당연하다. 우리가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잘못도 아니고 오직 우리 인간의 잘못인즉 그 잘못한 것을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구원이 해당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조처다.
범죄함으로써 죽은 아담을[롬 5:12] 다만 다시 살려 주시는 일은 해결책이 아니다. 왜냐면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데에서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죽음과 함께 하시어 죽으셔야 했으니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실 터이므로, 죽으실 때 나와 하나되시는 관계에서 죽으셨으니 살아나실 때에도 나와 하나되시는 관계에서 살아나시는 것이므로, 비로소 내가 죽을 것은 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 있는[다시 출생하여 또는 새로 창조되어] 것이 나의 현재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의 위치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친히 말 그대로 나와 하나되시는 의미에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으로써, '육체'와 '영혼' 사이로서 영원히 내 안에 계시는 고로 실현된 것이다. 즉 구체화하고 실제화한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이러한 하나 됨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나와의 불가분으로 계시는 구조적인 것이니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바로 '영혼'과 '육체' 사이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있는가. 영원한 불가분이다.
그래서 옛 사람으로서의 나의 죽음은 영원불변의 사실이었고 따라서 새 사람으로 새 창조 가운데에서 살도록 다시 출생한 것도 영원 불변의 역사적 사실로 엄연히 존속된다. 이러한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사람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 가능하고도 남는다. 나와만 이런 관계가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과의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관계에서 그러하시니 문자 그대로의 한 몸 체제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이다.
자상스러우신 하나님의 말씀
이러한 한 몸의 체제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비로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 당시부터 바로 이러한 관계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 체제로부터는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영원히 격리되었던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물론 이전 체제 안에 그대로 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터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새로운 체제의 적용이 사실상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만은 일단 죽었기[범죄로써]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이같은 새로운 관계 즉 새 창조가 필요하게 된 그 차이다.
그래서 모일 때에 필요해서 성찬식[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도 거행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온 세상에 전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은 살고자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을 온 세상에 알려 나머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요 유일한 소관사이다.
이렇게 필요해서 하는 일들이니 우리 자신의 구원을 목표로 함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세상 종교와의 차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 그대로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것인데 단지 이 세상에서는 일하면서 사는 것, 일하는 형태로서의 삶, 따라서 수고하면서 일하는 것이므로 삶의 낙을 누릴 여가도 여지도 없다는 것뿐이다. 세상 종교는 자기 구원, 자기의 영생이 목적이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 혼자만 영생하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함께 영생을 목적하자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든 홀로 하는 것이든 목적은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현재의 삶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니 즉 이미 구원 받아 영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새 생명은 과거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바로 그 생명이요, 그 생명의 법질서를 말하는 것으로서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한 몸 체제에서 머리[하나님]를 위하고 그래서 그 지시에 순종함으로써 한 몸을 이룬 이웃을 위하고 서로 사랑함이다. 아담이나 영물[사단을 위시한 악령들]이나 하나님[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음에 이른 것이니 곧 범죄다.
아담 부부는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말씀]를 따르지 않은[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는 필연적으로 이웃을 해치기에 이르는 것이니 사단이 인간을 속여 죽게 만듦으로써 이를 입증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또한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그러니 범죄 행위는 여하한 경우에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생명의 세계의 적(敵)인 것이다. 생명과는 반대가 되니 죽음이다. 그들 모두 처음에는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나 그들 스스로가 죽음을 불러들인 것이다.
삶[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생명의 세계에서 탈락된 경우다. 아담은 이미 추방되었고 영물[악령]들은 당시는 추방당하지 않았으나 이제 끝 날에 이른 오늘날 영원히 그 곳으로부터 추방당해 있는 상태다[계 12:7]. 시베리아 퉁구스 충돌 사건에서 이 사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성경에 말하는 "하늘"은 영계(靈界)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천국"[하늘나라, the kingdom of heaven]도 마찬가지다. "새 하늘과 새 땅"[계 21:1/벧후 3:13]이라 함은 현재의 "하늘과 땅"에 대칭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것도 없다. 우리가 영적인 몸["신령한 몸"-고전 15:44]이 되면 자동적으로 다 알아지게 될 것을 굳이 알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이렇게 성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자상스러우니, 상식 수준에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 구태여 말씀하시지도 않을 일을 너무나 친절하게 마치 두 번 세 번 일깨워 주려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섬세하심으로 모든 말씀을 하시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을 것이요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는 말씀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감히 이런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는 데에는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대양 한 복판에서 난파선을 탄 선객들이 구조[구원]를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다. 구조선이 보트를 보내 주어 그렇게 구조를 받으면 더 이상 그 난파선에는 미련이 없다. 만일 그 난파선에 머물러 있을 형편이라면 아예 구조를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구조선에 옮겨 탈 때에는 난파선에 대한 일체의 상념을 떨어 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 난파선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일체의 미련을 두지 말고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은 나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영생 얻고자 하는 열심이 아닌 것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 위해 그 목숨을 버리시기까지[나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그 전부를 아낌없이 나에게 주시기까지] 하심으로써 나를 구원해 주신[갈 2:20]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는 모든 열심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자진해서 기꺼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함이다[:20].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고후 3:17/요 8:32/사 61:1/갈 5:1]의 의미이다.
자신을 송두리째 내게 주셨으니, 나를 위해 죽으심도 그렇고 그 부활하심도 나 위해서고 그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높이 앉으심도 나 위하심이고 오늘날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심이 내 편에서 보면 확고부동한 사실로서의 "나 위해서"다. 즉 나라는 존재의 삶을 살고 계심이다. 그러니까 나는 자기 부인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이 "자기 부인"은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남김없이 드리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신 자신을 주셨으니 그 본을 받아 나도 나 자신을 전부 드림인데 여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힘에 부치는 일도 아니고 무리한 일도 아니고 억지도 될 수 없다. 오직 이 사실을 믿느냐 아니 믿느냐, 믿으면 나도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만 좌우될 따름이다. 사랑하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내도 나도 나 자신을 그와 같이 드리는 것이다. 이 드리는 것이 나로서는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시어 나 위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심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 피로 사셨다 했는데 많은 사람이 여기서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들이신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사랑 관계다. 사랑에서는 철저히 자유 선택이 핵심이고 그 의지로써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요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행위가 순종으로 사랑으로 나타나고 자기 부인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랑에서는 이와 같이 자기 의지(意志)로써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래서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의지만은 내 고유의 것으로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일단 주었다가도 마음이 변하여 도로 거두어 갈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의 작용이다. 그리고 순종, 믿음, 사랑은 모두 의지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종이나 믿음, 사랑이 내 것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맞지 않는 궤변으로만 그칠 뿐이다.
그렇지 않고 어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할 수 있는가. 갑은 을을 사랑하고 을은 갑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스스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만일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실 수 없다. 왜냐면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는 관계가 일방적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그 하나됨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신다 함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그런즉 갑과 을의 이 둘이 하나됨은 왼발 오른발 내디디면 걸음을 걷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외 발로는 걷지 못한다. 둘이 하나됨이 바로 이와 같다. 즉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 그대로다. 왼발과 오른발은 갑[a]과 을[b]이다. 그리고 걸어가는 것은 병[c]이 된다. 왼발이 움직이면 그에 맞추어 오른발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먼저 움직인 발이 여기서 '갑'이다. 그리고 따라 움직이는 발이 '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순종하지 않아도 또는 덜 순종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순종을 못해도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으로 인한 우리 구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15]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자가 순종하지 않고 덜 순종하는 따위의 말을 감히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이라는 말도 통할 수 없다. 왜냐면 의(義)는 순종으로 되어지는 까닭이다.
내가 순종을 해야 "내가 가지는 의"가 됨이다[빌 3:9]. 그러나 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9]다.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함은, 무조건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연계시킨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내가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한 일체의 것을 말함이다. 그런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의가 될 수 없고 오직 죄일 뿐이니[순종하는 것 자체가] 왜냐면 내가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내가 나를 위하는 것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함이다. 이유는 나를 하나님 친히 의롭다 하심으로써 시작된 의이기 때문이다. 시작이 그러하니 끝까지 그 시작했던 바로 그 모습을 유지시킴에 불과한 것이다. 새로이 다른 의가 개입될 여지가 없음이다. 그러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 하셨는가. 과거 나의 모든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그 죄 값이 모두 청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더 있다. 그것은 내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음이니 이 둘이 하나되는 관계는 갑이 을을 을이 갑을 동시에 위하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왼발, 오른발의 원리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을 십자가 고난을 통한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입증해 주셨으니, 다음에는 내가 그런 사랑을 표명하는 차례로서 그리하여 나도 당연히 "주님을 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주님[나의 주인, 나를 소유하신 소유주]"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의미요 회개인 것이다.
이렇게 내가 "주님의 종이 되어 이제는 저의 주인님이 되심으로써 내리시는 모든 지시와 명령과 뜻에 절대로 구김 없이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하는 마당인데 어느 누가 이 약속을 퇴짜를 놓으며, "믿을 수 없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수용할 수 없다" 하겠는가. 일단 믿어 주는 것이 도리다. 사리에 맞다. 믿고 안믿고, 수용하고 않고 하는 것은 차후에 두고 볼 문제다. 지금 당장 그것을 거절하는 단계는 아닌 것이다. 아무리 미리 알고[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을] 예측을 한다 해도 현재는 물리치지 못하는 법이다.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이 우리의 회개함을 따라 우리의 약속을 수용해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근거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를 가리켜 "죄인"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의인이라 할 것인가. 이미 과거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행 2:38] 용서되었다. 그리고 향후 죄를 짓고 안짓고는 두고 볼 일이다. 두고 본다고 해서 "어디 어떻게 행하나 보자" 하시지 못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까지는 나의 몫이나, 그 회개한 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산 자로 만드셔야 가능한 일이다.
죽은 자로 여전히 있는데 능력도 주시지 않으면서 순종하나 아니하나 보자고 하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 자부터 만드시고 난 다음 그 생명력 즉 새 생명으로 순종 여부를 다루어 보셔야 그것이 제대로 된 순서다. 이제까지 죄 짓고 순종다운 순종을 하지 못한 것은 죽은 자가 되어 있어 순종할 수 있는 생명력이 내 안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던"[행 17:30]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가능해졌으니 바로 그 가능하도록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는 조처가 곧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니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문자 그대로 임하여 오심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완연히 산 자이다. 성령 친히 내 안에 계시는데 누가 이를 두고 죄인이라 하리요. 산 자이니 곧 의인이다. 의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이다. 왜 의롭다 하시는지 그 의미를 성경대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향후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게 되어 있고 그래서 반드시 그리스도께 철저히 순종함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나 역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지"[히 1:9] 않는 한 그래서 이 관계를 스스로 지속시키지 않는 한 절대로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락없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멸망"[빌 3:18,19]밖에 없다. 초점은 여기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가 죽었는데 또 무슨 내가 있다기에 나 자신을 위해 산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어 갑과 을의 관계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또 무엇이 부족하고 불만이어서 내 스스로 나를 위해 살려고 하겠는가. 이 역시 믿음에 속하는 일이다. 즉 내가 나를 위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을 믿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그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다 주셨으니[갈 2:20], 그러면 나 역시 주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다 드림이 당연 순서요 논리다.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므로 "내게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빌 1:26]이니, 나 위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는 말하나 아니하나 당연한 귀결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는 사실을 왜곡되게 이해하지 말 것이다. '대신 죽음을 통한 구원'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나를 대하실 때 "육신대로 사는"[롬 8:13] 나 자신으로 대하시지 않고 나 대신 그리스도로서 인식하신다는 식의 아전인수 격 해석으로 자멸에 이르지만,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님"[갈 2:20]을 명백히 전제하고 있는 까닭에 오해할 여지는 전연 없다.
내가 죽었는데 그래서 "죄의 몸이 멸해졌는데"[롬 6:6] 무슨 육신이 또 남아 있다던가. 이제 나는 "새 사람"이지 "옛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6].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의미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6]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데 무슨 죄를 또 짓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찌하여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8:13] "자기를 위해 산다"[고후 5:15]는 말인가.
사단은 이와 같이 사람들을 아주 바보로 만드는 일에 능수능란하다. 그렇지 않다면 "죄에게 종 노릇한다"는 말은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다지도 혼돈과 착각 속에 헤맬 이유가 없다. 그래서 베드로의 믿음을 가리켜 "사단이 밀[wheat, corn]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했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였다"[눅 22:31,32] 하신 것이다. "까부르다"는 것은 키를 위아래로 흔들어 잡물을 날려 보내는 것을 말하고, "키"는 곡식 따위를 까불러 고르는 기구로서, 이런 표현을 쓰신 것은 사단이 식은 죽 먹기로 할 수 있다는 그 뜻이다.
앞에서 '자유'라고 했지만 자유가 무엇이냐, 당장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다. 목숨이 아깝다고 하여 스스로 원치 않는 것을 부득불 할 때는 자유인의 면모는 아니다. 자유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사는지 어떤지 그것을 시험해보는 것이 이 세상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의미 중 하나다. 왜냐면 이 자유가 생명[영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을 때는 사랑의 삶을 의미하셨고 사랑에는 자유 선택, 자유 의지가 필수이므로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것만큼이나 필연적이고 또 중요한 것이다.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은 육신 아래 있어 "죄와 사망의 법"[:2/7:24]에 얽매여 있음이니 자유인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2]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요 8:32]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갈 5:1] 하였고, 우리 구원의 희소식[福音]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함"[사 61:1]이라 했으니 우리의 구원은 자유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육신에 처해 있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롬 7:19,20]는 탄식을 내가 여전히 하고 있다면 나는 마땅히 내가 믿음에 있는가 나 자신을 시험하고 나 자신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후 13:5]. "주님은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하였는데 나는 아직 그와 같이 자유롭지 못하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고로 나는 버림 받은 자일 수밖에 없다[13:5].
그러면 처음부터 그런 부자유와 속박을 느끼지 못한 자 즉 악이 좋아서 행하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니까 역시 자유인이다. 물론 자유의 개념이 다르다. 그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유이고, 우리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여"[히 1:9] 선을 행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행하므로 자유다. 전에는 "선을 행하기를 원했으나 도리어 악을 행했으므로"[롬 7:19] 자유가 없었으나 지금은 그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8:2].
따라서 그렇게 자기가 좋아서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하는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부자유를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따르는,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심이 바로 이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요 3:18-21].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같은 악을 행해도,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과 '진리를 따라 악을 행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로마서에서 죄와 사망의 법을 설명하고 있는 대로 원하지 않으나 육신 때문에 악을 행했으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시면 다시는 죄[악]을 행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고후 5:15] 것이다.
'종'이 되고 '자유인'이 되고 하는 이런 문제는 다음 사실에서 다시 확인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전에 너희가 너희 육체를 부정과 불법에 사용되도록 하여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육체를 의에게 종이 되도록 사용하여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함이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이 영생이다"[롬 6:16-22].
영생은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죄에게서 해방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름으로써 그 열매가 영생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신데[골 3:4] 단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영생이 아니라, 모시기 전에 즉 성령을 은혜의 선물로 받기 전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겠다는"[고후 5:15] 약속으로 회개했기에 받은 것이므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또 그와 같이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으면 당연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원리가 적용되어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데 나는 그리스도를 적적으로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게 된다면 당연히 이 하나됨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음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때문에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 일방적으로 움직이시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을 베푸시든 은혜를 주시든 그 무엇이든 그렇다.
반드시 쌍방[나 자신과 그리스도]에게 반분(半分)의 역할과 책무가 지워지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가 몸을 위하면 몸도 머리를 위해야 한 몸의 역할이 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움직여서는 한 몸이 될 수가 없다. 나를 지으신[인간이 자식을 "낳는다"는 개념보다 더 강력하고 강렬한 의미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이것이 원래부터의 사랑의 특성이므로] 이유는, 나를 구원하시어 내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니 다시 말해 친히 나의 생명이 되시고자 함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 나심이니 다시 살아나신 후에는 당연히 나와 함께 계셔 나와 떨어져 계실 수가 없다. 그래서 영원히 나의 '영혼'처럼[나 자신이 '육체'라 한다면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를 다시 이루시어-첫 사람 아담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새 창조로써] 되시어 나와 불가분이 되어 계심이다. 그러면 이렇게 되어 계심은 하나님 일방적이신 조처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나대로 나의 생명이시니까 다시 말해 나는 육체요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영혼이시니까 나[육체]는 오로지 나의 영혼[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여 일일이 그 뜻을 여쭙고 그 뜻만을 행하는 것이 생명이 되는 줄로 알아 기쁘게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드시 기도로 여쭙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함은 당연하다. 즉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또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제도화하고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우리 구원의 구조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까 그러한데[고후 5:14],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나의 죽음에 그리스도 친히 함께 하심[동참]이다. 다시 살아나실 때는 나와 이미 죽음에서 하나되어 있으신 까닭에[나 위하신 죽음이 그 확고한 증거다] 그 함께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역시 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내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믿어야만 구원이다. 회개해야만 믿는 것이 된다[행 2:38]. 회개는 "돌이켜 악함을 버림"[3:26] 곧 죄 짓지 않음이다. 모두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믿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내가 원치 않고 하기 싫으면 그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고로 여기서 피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면 나의 구원에서 피동적이었던 측면은 하나님 친히 이루어놓으신 것으로써 이미 한 단계 지난 것이다.
고로 믿음으로써 되는 일이니 이는 분명 피동적인 측면이다. 내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룬 행위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했듯이 내 스스로 이를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내게 이루어지는 구원은 아닌 것이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인생들이 다 예외없이 자동적으로 구원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내 스스로 믿어야 하고 순종하기로 작정해야 함이니 여기서부터 나의 능동적인 측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로 엄밀히 말하면 피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과의 양면성이 처음부터 동시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 적극성과 능동성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섬김을 받을 때는 피동이고 스스로 섬길 때는 능동이다. 주인일 때는 피동이고 종일 때는 능동이다. 사랑은 종이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이기도 하다. 섬김과 동시에 섬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엄격히 말하면 나로서는 즉 나의 의지력(意志力)으로는 항상 능동성을 띠고 나의 상대를 섬기는 자세다. 나의 의지로써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상대를 강제해서 나를 섬기도록 만들지는 아니한다.
나의 상대는 자기 의지력으로 즉 자기 스스로 자진해서 나를 섬기는 위치에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다.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의 특성이다. 피차간 상대를 믿는[신뢰하는] 것이다. 서로가 똑같이 상대가 자기를 위할 줄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 가운데서 각자는 전적으로 상대를 위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정하신 대로의 사람 사는 법,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법이다.
처음부터 즉 첫 창조부터 그러했고 이제 새로이 창조되어 구원을 받은 우리 역시 그러하다. 에덴낙원에서 그러했고 지금 이 세상에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 때에는 누구나 예외없이 그러하다. 영원히 변함없는 삶의 도리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죄이고, 이 죄를 버릴 때 그것이 곧 회개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우리의 경우,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왜냐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니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된 결과다. 따라서 내 스스로 이제부터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여 약속하는 것이 회개이고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주시는 영생이라고 하여 거저 받아서 챙기기만 하면 되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본래부터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랑 치고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런 미적지근한 사랑은 대번에 배척을 당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님[나의 주인, 나를 소유하신 임자]으로 모셔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여 오직 그리스도[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 내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회개가 나의 결심, 다짐, 약속 등의 의미가 아니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은 구원 받기 위해 그렇게 하라 하심은 물론 아니고 이 세상에서 있을 때에만 한해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도 아니고 그것이 진정 영원히 사는 방법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렇게 살라는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이다. 정상적인 삶 자체,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 부인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중심은 사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생명 아닌 오직 죽음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게 된 것도 아니고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영물들을 지으실 때부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살도록 정하셨음이다. 이 자기 부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나 아담이나 범죄하게 되고 결국 오늘과 같은 불행한 비극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오늘날까지 자기 부인 일색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상 상태로 되돌아온 이상 의당히 이 자기 부인은 우리 삶 곧 새 생명의 핵심이 되어 있음이다.
그렇게 내 스스로 결심하여 앞으로 살고자 하는데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하므로 과거 그렇게 살아온 전력(前歷)이 전혀 없어도 지금부터는 의당히 그렇게 살 것이라는 충분한 예상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회개함으로써 나의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수용하시어 내가 세례 받을 때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령의 영원하신 선물을 받아 모시게 된다. 이 성령을 받음 역시 일방적이 아니고 나의 수동적인 자세만으로는 이상 설명과 같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일방적이고 그리고 나의 수동적인 자세로 충분하다면야 한번 받아 모신 성령은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것이니까 성령과 나와의 결별 사태가 결단코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즉 나는 적극적으로 내가 원하기 때문에 즐거이 하는 순종이므로 만에 일이라도 억지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때로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될 때 그 때는 내 스스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이니 곧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끔찍한 일을 자행하게 됨이다[히 6:6/10:26,29].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하나님만의 일방적인 것으로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자멸행위다. 자멸이라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믿지 않음이다. 믿지는 않고 스스로 성령 받았다 또는 구원 받았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는 경우가 오늘날 거의 전부다. 이렇게 성경과는 전연 딴 방향으로 나가니까 성경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러고도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거짓말이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인간 삶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로서의 자세대로 사는 자유, 그른 것은 한사코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인 곧 생명의 사람, '산 자'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내가 생명을 얻은 것은 피동적인 것이었다. 피동적이므로 무엇이든 내가 능동적으로 한 것이 없는 것은 그 이전에는 내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의 경우다. 새로이 창조된 나의 경우에도 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 해당되는 것은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창조되었다는 것 자체가 피동적인 것이니, 이것이 능동적이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원해서 나 자신을 창조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친히 나를 만드시니, 내가 만들어졌으므로 피동적이다. 그러나 일단 생명을 얻은 다음에는 영원히 일방적이지 않고 피동적이지 않다. 왜냐면 내가 받은 생명은 영원한 자유인으로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주인 의식, 내가 기뻐서 스스로 움직이는 즉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그 조건 아래에서만[왜냐면 이 자체가 생명이기에 생명을 기뻐 아니할 자가 없으므로] 내가 향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자비 기타 모든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의 동시성(同時性)이니, 갑을 중심으로 볼 때는 분명 을을 안은 것이나 을을 중심해서 보면 갑을 을이 업은 것이다. 높음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낮음의 상대적 개념을 동시에 떠올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자라 할 때는 반드시 여자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임과 같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이다. 그래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시라 하는 것이니 만일 "어머니"라 하면 반드시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하게 되지만, "아버지"일 경우 여자가 생기기 전 아담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상태에 있었고 여자가 생기면서 남자가 되었기에 아담을 기준으로 하는 말로서 현재 아담이 남자이므로 그 대표성[전체 인간에 대한]을 따름이라는 의미로서 완결되는 것이다.
이제 이회장이 질문한 1에서 24까지를 총 정리하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를 다시 간추려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이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으로 이제는 영원히 되어 계신 사실을 말함이다. 물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람되신 분은 아들이시고 아버지는 그대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아들께서 비록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심에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아들께서 '사람'이신 되신 사실을 강조하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쓸 때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들께서 우리처럼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으므로 사람이시니, 사람[여자]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이요 그래서 영원히 사람이시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친[아담이 그 원조(元祖)]의 씨로서 태어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성령[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계심을 성령이시라고도 하므로]으로 인간[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와는 아주 다르시기에, 세상 모든 인간 중에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단 한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모든 인간이 적용되는 3운법칙[trini homo]에 해당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해도 옳은 말이다.
그러나 친히 우리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영원히 되어 계심으로써 자신을 유감없이 나타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하나님은 실상(實狀, 實相, 實像)이신데 반해 허상(虛像)이시라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 피조물처럼 일정한 모습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의 "형상"을 갖추시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실 수밖에 없고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나 그것은 '하나님 차원'에서의 형상이시라는 뜻이지 우리의 기준에서 말하는 형상은 아니신 것이다. "하나님 차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영원히 우리 오관으로서는 인지할 수 없는 "영"이시라는 의미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의 그 일면이시다.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신데 그 사랑의 측면이다. 장차 마지막 심판 때 재판장으로 앉으실 때는 "소멸하는 불"로서의 측면을 나타내시게 되어 있다[고후 5:10,11].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통해 충분히 확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먼 이방인 대하듯이 할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가까우신 '한 사람'으로서 똑바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나 이제는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이 '너무나 가까운 사람'로서의 의미는 한층 더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방대한 우주를 지으셨으므로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한 인간으로 압축시키셔서 형상화하셨다고 하면 될까.
압축이 되셨으니까 단지 일개 인간의 모습이신지라 "작으시다"는 것뿐이지 원래 계신 그대로의 모습[모습이 없으신 영이 아니시고 모습 즉 형상을 갖추셨다고 가정할 때]이신 것이다. 더 이상 나타내 보이실 것도 없고 감추신 것도 없고 우리가 더 이상 알아야 할 것도 볼 것도 없다. 세상에 나타나셨던 그대로가 '하나님'이신 것이다. 단 그 때 당시에는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아담으로서의 모습이셨다. 이제 또다시, 범죄하기 전 아담의 영광스러웠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니 곧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다.
생명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에 있다. 범죄는 이 이치를 벗어남에서 생긴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왔다[롬 5:12]. 그렇지 않다면 구원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영생하고 있는데 무슨 구원이겠는가. 따라서 이 생명[영생]은 이 한 몸 구조를 충실히 유지해 나가는 데에 있으니 이것이 행복한 삶의 요건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이 '한 몸' 의식에서의 행복을 보장하고 영원한 생명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복한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생 얻는 이 구원 얻음이 이 생명의 법질서를 준수하는 것과 불가분으로 연계되어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요한은 "믿음"과 "계명"을 불가분으로서 설명하였다[요일 3:23]. 성경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선을 행함"과 직결시키는 것이 이 때문이다[롬 2:7-10]. 선은 좋은 것이요 의는 올바른 것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모두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것처럼 이 선을 따르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또한 의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치 않게 하시기를 우리가 구하니...오직 우리[바울 자신과 같은 사도들]는 버려진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함과 같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께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8] 하는 말도 그 뜻이다. 야고보가 말한 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함이 바로 이런 선행을 가리킴이다.
이 세상은 전쟁하는 마당이요 시험하는 때다.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때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엄중한 경고요 아직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의 모든 악행 곧 자기 중심으로 살던 것을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이다. 회개한 다음에는 다시 이상과 같은 엄중한 경고가 계속 뒤를 따르게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시험하는 자에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사람들은 시험하는 때에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고 그릇되게 믿고 있다.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면 시험하는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다. 주님의 광야시험에서 아버지의 성령이 함께 하셨지만 아버지께서 간섭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시험은 인간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받으신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똑같은 내용의 시험임을 성경은 명시한다. 세상 사람은 사단의 장중에 있으므로 사단이 시험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천사들이 사단의 시험이 다 끝난 이후에야 나타나 수종 들었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는 철통 같이 에워싸 우리를 보호하는[시 34:7] 천사들도 일시 물러나 오로지 냐 혼자서 시험을 당하도록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하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삼위일체 원리의 동시성에 해당되어 일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음이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는 경우에 한하는 구원의 능력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바꾸어 말해 아무리 내가 정신을 차리고 순종을 잘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서 난 의가 아니라 즉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3:9]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주시는"[마 6:13] 능력이 배경이 되어 계심으로 인한 당연 결과인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 능동성과 피동성이 양면성이다. 천사의 막강한 도움을 받으니 피동성이나, 내 스스로 나의 의지로 순종하겠다는 결의 여하로써 천사의 보호하는 능력이 좌우되어 나타나니 명백한 나의 능동성이다. 애초 우리의 구원 받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완결되어 있지만 내가 스스로 회개하여 악을 다시는 범치 않기로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고후 5:14,15] 작정하여 믿지 않는 한 오직 그림 속의 떡, 먹지 못하는 떡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를 구원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악령이나 악인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처사가 아니시니, 그와 같이 피조물들이 '악'을 선호하고 즉 "불의를 좋아하고"[살후 2:12] "의를 사랑하지 않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 없는 즉 의와 선을 버린 결과물이다. 이와 같이 영적 피조물 즉 이성이 있고 인격성을 지닌 인간이나 영물들에게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내 판단에는 이것이 좋은 것이라 여겨져 하고 싶고 또 즐거운 듯 싶어도 반드시 나의 '머리' 되시는 다시 말해 '영혼' 되시는 주님께 기도로 여쭙는 것이 마땅하다. 사사건건 모든 일에 그러하다. 이는 나의 의지의 작용 즉 능동성을 나타냄이다. 이 능동성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이든 받는 은혜의 피동적인 측면이 수반되지를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에덴낙원에서의 범죄 사건 때 여자가 남자와 상의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뜻은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마땅한 일이니, 한마디로 상대의 의중을 물어 그 뜻대로 행하겠다는 결의 즉 '둘이 하나됨'을 기꺼이 지속시키겠다는 의사 표시요 의지 표명인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나 상대가 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접고 상대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자유인가, 속박인가. 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때 이를 '자유'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판별은 사랑의 관계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사랑이 아닐 때 속박이다. 사랑일 때는 내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것이니까 자유에 속하는 의미다. 그래서 사랑에 반드시 따라 붙는 말이 자유 선택,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선택으로 나타나는 '의지'다. 나의 일시적인 기분으로는 이 방향으로 가고 싶은데 나의 의지는 저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다. 기분과 의지는 다르다.
전자는 일시적 판단 잘못으로 잘못된 것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지는, 그런 기분이나 감정에 좌우됨이 없이 오직 스스로 옳다고 믿는 대로 나감이다. 비록 그것이 고난이고 죽음일지라도 스스로 그 올바른 길을 선택함이다. 그러니 앞에서처럼 자유냐, 속박이냐 물을 필요도 없다.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의지 작용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그 원리원칙의 진리됨과 절대성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법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여 내가 내 몸을 쳐[to beat] 복종해야 하고"[고전 9:27], 그러므로 "음란[fornication/sexual immorality]과 부정[uncleanness/impurity]과 사욕[passion/lust]과 악한 정욕[evil desire(s)]과 탐심[covetousness/greed] 등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골 3:5]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to put to death/] 살 것이라"[롬 8:13] 했으니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라"[갈 5:25] 한 대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했으므로, "성령으로 행함"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불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령의 검(劍, 칼)"이라고 한 사실과 일치한다[엡 6: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 즉 십자가에 못박혔음은, 오직 그러한 진실을 가르치고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이니 이는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것이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으로서, 모든 이론을 파(破, 깨뜨림)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고후 10:3,4] 것을 말한다. 마음의 영역이고 의지력의 분야다. 따라서 솔로몬의 잠언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함과 일치한다.
마음 먹기[왜냐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까"-롬 10:10] 여하에 달린 일이니까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골 3:8] 등을 "벗어버리는"[:8] 것 즉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는"[:9] 것에 해당되고 이는 다시 "새 사람을 입는"[:10] 것 곧 "그리스도를 입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함과 같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안다. 독사의 후예들이여,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단죄함을 받을 것이다"[마 12:33-37] 하심과 같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마 15:11,17-20] 하심도 같은 뜻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 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에 따른 원리원칙을 고수 또는 사수(死守)하는 우리의 의지력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이는 다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막 8:33] 순간,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대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33] 하고 우리의 심령으로 호통을 칠 수 있는 것과 맞물린다. 사단이 그런 "생각을 넣어 주었기"[요 13:2]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었다. 죽었으므로 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4,15]",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어 이제 나를 위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시고 나 자신이 아니므로 나도 이제는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뿐이다[:15/롬 14:7-9]" 하는 이 두 가지 원리원칙 아래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 이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해 들이지 않는 결의에 찬 신념의 삶으로 시종일관함이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이다.
과거에는 "육신"[롬 7:14-8:13]이 나를 지배하여 나를 종으로 부려 그 채찍질에 내가 꼼짝도 못했으나 이제는 국면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내가 채찍을 들고 육신을 후려치며 길들이게 되어 있는 상황이 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받은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 함이다. 힌두교의 소위 성자들이 자기 몸을 학대하는 그런 채찍질이 아니라 위의 설명과 같이 내 영혼의 의지력이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막강하신 능력으로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갈하고 호통치고 무자비하게 육신을 다루는 것이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나 이전 버릇대로 또는 시험하는 자 사단의 부추김을 따라 반역의 기미를 보일 때 그와 같이 잔혹하게 다루는 것이다. 그 하나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함"[요 12:25]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내 몸에 채우며[골 1:24]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이다[고후 4:10]. 이러한 것은 바울 사도의 예에서 보듯이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는 등 하나님 사업에 충성을 다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게 가해지는 것이다. 내가 일부러 이런 고난을 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내게 베푸시는 확실한 은혜이기 때문이다[빌 1:29].
'이 세상'이라는 현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음의 고초를 스스로 달게 받고자 하는 이치는, 과거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남긴 조선시대의 한 재상(宰相)이 집에 들어오면 낡은 초가 지붕에 비가 새어 낙숫물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보다 낮은 지위의 이웃들은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사는데 그는 바보이기에 그렇게 살았던가? 이공 순신처럼 신념의 사람이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 스스로 그것이 옳다고 여겨 그렇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가혹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육신도 마찬가지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삶의 형극(荊棘)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니 이런 것은 만세불역의 본(本)이 되고 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 신분과 위치야말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와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불의한 세상과 이웃할 수 없고 오직 사람들을 건져내는 과업 수행이 절실하고 급박하기에 이런 죽음의 고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런 절개의 인물로는, 중국의 백이(伯夷)숙제(叔齊)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의젓하고 당당한 고려말 조선 초의 원천석(元天錫)이 있다. 어릴 때의 태종을 가르쳤던 인연이 있어 태종이 위에 오르자 그를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응하지 않았다. 실로 원주(原州) 원씨(元氏) 가문은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선물한 몇 안되는 소중한 집안 중 하나이니, 하나는 원균으로서 다른 하나로는 원천석을 배출하여 양극(兩極)의 의미로 균형 있게 우리 후대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살 수 없는 곳[이 세상을 가리킨다]에서 무엇 때문에 굳이 고집하여 억지로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어깃장 놓는 일이 아닌가. 고난 받을 때는 당당히 고난 받고, 살 때가 이르러 사는 곳에서는 떳떳하게 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소수의 사람들이 시대마다 사회마다 구석구석에 박혀 있기 때문에 썩은 고목나무처럼 금방 위태위태한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게 하는 인간 사회의 실질적 버팀목 구실을 하는 것이다[창 18:32]. 성경에 말씀하신 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마 5:13,14]으로서의 역할이 이런 사실을 두고 경고하심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게 된다 하셨고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 하셨다[요 12:25].
천사의 역할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영물들의 창조는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사람을 보좌하여 그 통치 역할을 돕게 되어 있는 영물들인데 사단을 비롯하여 일부가 이에 반역한 것이다. 하나님 세우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그 대리자에 대한 반역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으로 통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미는 피조물 간의 불화요 싸움이다.
정의 대 불의의 전쟁 상황인 것이다[창 3:15]. 그러므로 악령들의 적대적 활동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일개 피조물들로서 "하나님께서 부리심"[히 1:14]에는 변함이 없다. 때문에 욥의 시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욥 1:6] 중의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우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인간들처럼 낳고 낳아짐으로써 생겨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뜻이다.
우리 역시 새 창조에서는 모두가 성령으로 나고 그래서 다시 출생하는 터이므로 하나님 친히 만드시는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새로운 우리 존재로 구성 인자(因子)가 되어 계시므로 즉 "하나님의 씨"[요일 3:9]가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 차원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물들은 이렇지를 않은 것이다. 그 대신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그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사단과의 전쟁 상황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과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천사들과는 어떤 관계이냐 하면. 천사들은 하나님 부리시는 영들임에는 똑같으나 악령들과는 달리 마지못해 즉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그냥 일개 피조물들이므로 명령에 순응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으로써 자진 자발적으로 움직인다는 차이는 물론이지만, 원래 창조된 뜻을 따라 인간을 보좌하는 역할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악령들과의 관계에서는 인간처럼 특별히 원수진 것은 없는 것이다. 단지 악령 사단이 아담 부부를 살해하여 죽은 자로 만들어 버렸으므로[아담은 그 자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함으로써 야기된 합작(合作)이지만] 인간을 "섬기게"[히 1:14] 되어 있는 그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총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섬겨도 이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근본되시는 하나님을 섬김이 됨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니 곧 머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섬김이 피조물의 본분인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 친히 모든 피조물 각자를 위하시는 위치에 항구적으로 위치해 계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천사들은 인간을 위해 모든 활동을 하다보니 인간에게 적대적인 악령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대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에 대한 악령들의 압제나 조종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도를 넘지 않도록 즉 지나침이 없도록 항상 감시하고 제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등 하나님 친히 부리시는 즉 하나님의 손발 역할을 대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실이 다니엘서에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단 10:13]. "바사국(國) 군(君)"이라 함은 "the prince of Persia"로서 페르샤 나라의 임금[君]이라는 뜻으로 세상 나라들의 각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악령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천사장(天使長, archangel) 미가엘은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임금으로[단 10:21]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사단도 원래 이런 천사장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가 범죄할 때 자기 소속의 천사들 역시 함께 휩쓸려[물론 타의적이 아닌 그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따라 된 것이지만] 함께 악령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반드시 소속별로 되어 있다고 할 것은 없고 모든 영물들 중에 사단과 동조하는 자들이 있어 그렇게 악한 영물들이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천사장은 다수가 아니고 몇몇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군장(君長)들 중에 사단이 끼어 있었으므로 그 아래 범죄한 영물들을 통솔하게 되어 있다는 그 뜻일 뿐이다[계 12:7].
그러므로 이 세상은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간의 각축장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영물들 간의 싸움이니 한 편은 인간을 해치려 하고 다른 한 편은 인간을 호위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의 그런 전쟁은[:7,8] 종료되었고 천사들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사단을 위시한 악령 일당은 전부 이 지상으로 추방되어 있는 상태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곧 설명하게 될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단 등 악령들이 일방적으로 천사들에게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하늘의 영역에서는 그러하지만 이 인간 세계는 여전히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과 악령들이 대등한 위치에 있지는 않고 천사들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처음부터 악령들이 월권 행사는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자기 분수를 따라서만 행동하도록 모든 것이 되어 있고 그런 통제 역할을 천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 않다면 하늘에서의 그런 전쟁이 처음부터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또는 의미로 되어졌는지 우리로서 알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 제한된 육체를 벗어나 신령한 자유의 몸이 되면 모든 것이 죄다 알아지기 때문이다[고전 13:12]. 그 때 알아도 충분한 것이다. 오직 지금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만 알도록 되어야 혼란이 없게 된다. 왜냐면 사단이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그런 지식들을 역으로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간단명료할수록 좋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우리 스스로 놀랄 정도로 간명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이를 체계적으로 대충 간추릴 수 있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임을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원리를 몰랐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명료해지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은 사단의 극악하고 교묘하기 짝이 없는 거짓 속임수를 대대적으로 전개시킬 것이기에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져 있을 뿐이다.
그런즉 영물들의 거창한 양대 세력이 이와 같이 대치하여 일종의 상쇄(相殺) 작용을 함으로써 균형을 잡고 있으므로 마치 이 세상에 인생들 홀로 존재하는 양 그렇게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니 인생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이 세상이 이렇게나마 지탱을 하고 있는 터에 오직 인간의 자유 선택에 의해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도록 함이다.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나 이러한 자유 선택만은 절대로 손을 못대는 것이다. 오직 인간 각자 개기인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불의를 좋아하는 경우에만 한해서 그런 방향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등의 일로 인간들을 당시에도 조종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를 핍박하고 탄압하고 위협하고 유혹하는 등의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기울여 시험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이나, 한도에 지나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 천사들이 항상 감시하고 경계하여 그런 방자한 것은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한 것이다.
오늘날 두드러지게 마치 일방적인 독무대인양 악령들이 설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지와 허락 아래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인생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1,12] 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한 치 오차없이 틀림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이니 그런 저런 일에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우리가 과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자주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결단코 악령들에 의해 맥없이 꺼둘리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3운법칙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인간 생애의 철통 같은 하나님의 통치와 간섭과 강제는 이 세상 생애에 한하는 것으로서 질서 확립 차원에서다. 하나님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 삶은 이런 법칙에 의해 관장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은 인간[아담] 범죄 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발동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후속 조처인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면 이런 규제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완전한 자유다.
왜냐면 모두가 모두에게 종이 되어 상대를 위하기만 할 뿐이므로 규제니 통제니 간섭이니 하는 따위가 전적으로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영물들을 창조하실 때 애초 의도하셨던 삶의 양상인 것이다. 곧 사랑으로 하나되는 축복 받는 삶이다. 3운법칙과 이러한 영원한 각자 운명의 스스로의 결정은 차원이 다르다. 궤를 같이 하지도 않는 전연 별개의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삶을 오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원 세계에 비할 만큼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니 왜냐면 영원한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것을 바로 이 세상에서 각자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라고 해야 좋을까. 무의미하면서도 막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과의 차이라 할까. 이를 혼동하기 때문에 비극을 아직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어느 모로나 결코 태평세월일 수 없고 안식처일 수가 없는 현실임을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는 재앙이 있으니 장차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라 하셨다[눅 6:25]. "바깥 어두움에서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마 25:30] 되는 차후의 세계가 모든 인생을 잔뜩 노리고 대기하고 있는 터에 어느 여가에 그런 한가한 마음이 되어 있으리요.
진실과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사단이 눈을 가리워 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딴에는 사력을 다함이다. 한 때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으나[마 7:21/25:45] 무익한 일을 하게 되면 "무익한 종"[25:30]으로서, 애초부터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이 악행을 한 이들과 같은 운명이 됨을 분명히 하셨다. 바로 그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심각한 사태이므로 심각한 안목으로 직시해야 함이다. 이 세상 자체가 비정상으로서 비상 사태에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것은 피동적인 측면이요 구원을 이루어야 함은 능동적인 측면이다. 양면을 아울러 갖추어야 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솔로몬 왕은 젊을 때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가. 그러나 그 믿음을 말년에 가서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채 비극으로 끝난 것이니 자기가 총애하던 이방 여인[후궁]들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상 신을 만들어 주는 흉악한 범죄를 자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잠언과 전도서 등의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 믿음에서 한창 잘 나가던 이들도 얼마든지 황폐화할 수 있다는 엄중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이로써 멸망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했다는 기록도 없으니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닌가. 성경의 모든 내용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에 따르면 범죄하고서 무사한 예는 없다. 회개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와 같은 조처가 취해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는 없다.
과거 믿음이 좋아 큰 일을 했다 해도 현재 내가 믿음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최대 현안이요 관건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영원한 실패다. 하나님의 용서도 내가 회개할 때에 한해서다. 그리고 한 때 회개했다고 만사가 태평이라는 뜻은 아니니 왜냐면 시험하는 자는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고 또한 회개할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하는 일도 있음이다[히 6:6]. 솔로몬 왕은 이런 색다른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 경고가 되고 있다.
바울 역시 예외가 아니니 그도 범죄하면 멸망이었다. 그가 과거 얼마나 주님 위해 고난 받고 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쳤는가. 그러나 이런 공적은 그가 스스로 범죄할 때는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겔 33:12]. 그래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6,27]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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