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인간에게 종교는 필요 없다ㅡ오직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받들어 올바르게 사는 게 전부다 (28)

인간에게 종교는 필요 없다ㅡ오직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받들어 올바르게 사는 게 전부다 (28)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


구원이심과 동시에 재판장

그리스도는 ‘구원’만이 아니시고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없도록"[고후 5:15]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심이다. 따라서 충분히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장치를 베푸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느냐"[:15] 여부로써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게 된다. 여기서 "참고 선을 행함"과 "악을 행함"이 가려진다[롬 2:7-10/계 20:12,13/고후 5:9-11].

자기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머리되시니]를 위해 살지 않았으면,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든 않든 과거 그런 일이 있었든 없었든 상관 없이 영원한 멸망의 대상이다[마 7:21/25:45]. 현재를 기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 일변도로 나가는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불이익, 핍박, 환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참고" 선을 행하는 이에게만 영생으로 보답하심이다[롬 2:7,10/요 5:29/계 20:12,13/고후 5:9-11].

따라서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는다"고 하였다[히 10:36]. 오늘날 믿는다고 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고후 5:9-11] 그런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가인, 다윗 등이 저지른 그런 따위의 죄는 이 그리스도의 시대에서는 더 이상 추호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런 범죄의 경우,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적대행위를[하나님께] 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게"[히 10:27/12:29] 된다.

①과거의 죄가 청산됨과 동시에 ②앞으로 지을 죄에 대한 퇴각로[변명, 핑계] 일체를 파괴시켜 버린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루비콘[Rubicon,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고 건넜던 이탈리아 북부의 강]을 건넘과 같다. 죄를 짓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되어 뒤로 돌이키거나 물러갈[히 10:39] 때 그 어떤 퇴각로도 탈출구도 없이 오직 파멸뿐이라는 이 엄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리스도의 구원에 일절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건성으로만 사랑한다고 하니 죄를 짓게 된다. 앞에서 자기 부인이 사랑의 핵심이라고 못을 박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기가 부인되어 욕심이 없는데 무슨 죄를 짓는다는 말인가[약 1:15]. 죄를 지어 죽음이 왔는데[롬 5:12] 이제 그 죽음에서 벗어난[그리스도 안에 있어] 마당인데 죄가 또다시 용납이 되겠는가. 용납되어 죄를 지으면 또 다시 죽을 것이니 살려 주는 보람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이에게는 구원이 적용되지 않는다 함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믿을 때의 "회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즉 시종일관 복종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그래서 믿을 때 받게 되는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짐을 상징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롬 6:3,4/골 2:12].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없어진 ‘나’인데 또 무슨 ‘나’가 있다기에 죄를 지을 욕심이 나온다던가.

"내가 어째서 죽었다는 말인가, 지금 쟁쟁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한다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의 살아 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의 결과이니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밑바탕으로 하여 이를 전제하고 있는 "새 생명" 곧 "다시 출생해" 있는 상태이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게 적용되는가 한다면 이미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심으로써 [말하자면, 나와 겹쳐짐으로 인하여] ‘둘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다. 상식과 양식을 따라 풀어 나가면 아무 것도 혼란스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시각 차이에서 오는 혼돈이다. 한 면만을 고집해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동서남북 그리고 조감(鳥瞰)까지 포함해서 다각도로 살펴야 사물의 대체적인 윤곽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음과 같다. 이런 설명을 하면 대번에 튀어나오는 말이 소위 "완벽주의자[perfectionist]"라는 비판이다.

이 말은, "그런 완벽주의는 이 세상에서는 이론에만 불과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완벽주의"라는 것은 그런 이들이 지어낸 소리이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대로 말하고 그대로 따라 일하며 행동하는 것뿐이다. 완벽주의라는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창조 행위나 기타 하시는 모든 일이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부터 먼저 할 일이다.

누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평하겠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완벽하다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구원 역시 새 창조이니 당연히 완전하고 완벽한 것으로 우리를 만드신 사실을 인정할 일이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흔적이나 영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새 것"[고후 5:17]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다시 말하기를 "성경을 축자((逐字) 해석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성경의 "자기 부인"을 수용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 성경은 "자기 부인"을 구원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180도로 달라지고 갈라진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세상을 사랑함에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요 12:25] 때문이다. 왜 우리가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님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들추어 설명할 것도 없이 단지 바울의 본을 따르면 족하다.

왜냐면 그가 강조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어떻게 했고 어떻게 가르쳤는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 얻기를] 원하는 바라"[롬 9:3] 하였다. 이 한 마디에 모든 대답이 거의 모두 압축되어 있다. 이는 모세가 "그러나 합의(合意)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려면 원컨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생명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버려 주십시오"[출 32:32] 한 기도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사람들 구원시켜야 한다는 그 일편단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그 나머지 생애를 보낸 것이다. 이 기준과 표준을 따르면 되는 것이니, 딱 잘라 이 한 마디뿐이다. 그런 의지(意志)와 의기(意氣)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바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모든 이에게 적응되어 마땅한 하나님의 뜻이 되어 있기에, "나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 하였고[고전 7:9,40],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으리라 하였다[8:13].

종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었으면 그 후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종 그대로 지내어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구원해내기에만 전념하라고 가르친 것이다[7:21]. 왜냐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20:21/17:18].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라고 보내신 것이다[4:34]. 이 세상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살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 모든 세상 사람처럼 실상과 진리를 알지 못해서 그러했지만 이제는 눈을 떠서[행 26:18] 모든 진실과 진상을 알고 있는 터에 그 때의 과거와 현재가 같을 수가 없다.

"죄 짓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완전주의자"니 뭐니 왈가왈부할 것도 없고, "정말 당신은 죄를 단 한번도 지은 일이 없느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않는 것도 죄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죄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하고 있으며 해서는 안될 일을 어김없이 아니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 하고 다그칠 것도 없고, 오직 성경대로 이 한 가지만 분명히 하면 그가 바로 죄를 짓지 않는 자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느냐"[고후 5:15/롬 14:7-9], 이 하나만 자기 자신에게 자문자답하여 양심대로 판단해서 "그렇다"라고 할 수 있을 때다. 하나님께서 이 이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없다. 이 기본 바탕만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열심히 주님[나의 주인(소유주)이 되시는 그리스도]을 섬기면[롬 12:11] 나머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친히 다 하시게 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니 지엽적인 것을 두고 다툴 필요가 없다[롬 13:14-14:13].

혹자는 또 엉뚱하게 생각하여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라 착각할지 모르나 그렇다면 "사도(使徒)"들이라는 직분이 오늘날도 교회에 잔존해 있어야 하고 당연히 그 "열 둘"이라는 숫자도 엄수되어야 할 것인데, 요한과 형제간인 야고보가 헤롯왕에게 무고하게 살해당했지만[행 12:2] 야고보 대신 누구 다른 이를 다시 선출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도 전혀 그런 의미는 없다는 것이 재확인되고 있다.

가룟 유다는 범죄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신 채워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하심으로써 결코 그런 차별을 두시지 않고 있음을 확인해 주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는 이들이 한결같이 함께 행해야 하는 것을 남다른 열심으로써 본으로 보여 주었다는 그 사실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가장 먼저 만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부터 인식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을 것은 당연하니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마땅히 역사와 전통이 오랜 것이어야 하므로 성경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이나 옛날이나 영원히 생존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 또한 생동(生動)하는 것이어야 함이니, 이미 지적한 대로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이 아직도 역사의 무대에서 건재하여 세계의 톱 뉴스거리를 장식하고 아직도 구약성경을 토대로 하는 유대교를 철석 같이 신봉하고 있는 것 등이 바로 그런 '증거'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기록된’ 말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랜 역사를 통해 별의별 사람들이 생겨나 자칭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 인생들을 혼란에 빠뜨릴 개연성은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이 구약성경에 연이어 연동(聯動.連動) 되어 나온 것으로서, 합하여 한 말씀이다.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주신 말씀이 구약이고 그리스도 이후에 그리스도 친히 나타내신 말씀이 신약이다.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그 성령으로 친히 가르치신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전부다. 사도들 이후에도 성령의 가르치심이라고 하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없으니, 그런 것이 없어도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만으로도 우리가 회개하여 구원 얻음에는 충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고집스럽게 믿지 않는 오늘날 다수의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그 이후의 말씀인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믿는 유대인도 많지마는 전반적으로 그렇다. 그들 대다수가 믿지 않는다고 신약 성경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니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실존(實存)이 입증되지 않는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 외에 하나님이라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자처하는 것은 모두가 가짜임을 성경은 이와 같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기록된 말씀의 내용으로도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로서의 모든 사실은 충분히 다 설명되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라 하여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게 되어 있음이다. 이 점에서는, '전통적인 것'의 권위는 중요하니, 이를 인정하여 마땅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에다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으로 충분하니, 무조건 오래 된 것이라 해서 거기에 권위를 두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에 빨려들어가는 지름길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세워져 있으면 그것으로서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니 이 말씀의 잣대[尺度]에 어긋나면 무조건 비진리, 사이비로 진단하면 된다. 이것이 상식이고 양식(良識)이다. 진위(眞僞)를 가려내어 분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함이 불가결인데 성경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감히 거기에 불순물이 끼이도록 허용하시지를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누가 감히 거기에 잡스러운 것을 덧붙여 말씀을 더럽히도록 묵과하실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부터 계시냐, 계시지 않느냐 하는 것부터 확정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계시면 그 말씀[인간에게 나타내시는 자기의 의사 전달]이 있으시게 마련이고 또 그럴진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가리키시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러면 다른 것 다 필요 없이 오직 그것만 지목하여 그 자체의 내용이 그 진실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지 여부만 살피면 모든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넉넉히 그렇게 자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 수록된 내용은 정확무오하다고 우리는 얼마든지 믿을 수 있고 이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물론 기록된 내용을 손으로 베낄 때 있을 수 있는 약간의 실수나 흠집은 있을지 모르나 대체적으로 그 내용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다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런 중대한 결함을 그냥 두고 보실 리가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켜 ①그 뜻이 변하지 않는다 즉 한번 정하시고 사람에게 알리신 말씀을 중도에 변경하심이 없다 하였고, ②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는다 즉 식언(食言)하시지 않는다 하였다[히 6:17,18]. 그러기에 그 때 그 때마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말씀해 두신 것으로서 영원불변하여 그래서 ‘기록된’ 말씀의 절대적 가치이다. "내가 말한 것이 처음 밝힌 대로 이루어지지 않나 두고 보라" 하시는 의미도 되는 것이 이런 ‘기록[문서화하고 증서(證書)화한]’의 의미이다.

이회장은 처음에는 40가지로 질문 항목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24개로 줄였다고 했으니 평소 알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진솔한 구도자적 자세를 우리는 아주 높이 평가한다. 어떤 이는 그 나이에 아직도 종교에 대한 정견이 없을 정도로 갈팡질팡 했느냐 하는 핀잔으로 오만한 말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비록 백수(白壽)가 되어도 어린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지혜자의 면모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이라 하고, "모름지기 네 자신을 알라"고 했다. 수박 겉 핥기로만 알고 다 아는 양 잘난 체하는 태도를 우리는 경멸한다. 백세에 들어서도 젊은이에게 물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요 어른과 스승으로서의 풍도(風度)다. 겸허한 구도자로서의 자세를 본으로 보여 주니 이회장은 그런 점에서 사표(師表)다. 사람마다 만물박사로 태어나는 법은 없다.

자기 아는 분야에서만 전문가다. 그러므로 다른 분야에서는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자라 만인이 그에게 물어오더라도 자기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서슴지 않고 그 스스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회장은 기업 경영면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위치이지만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인 영적(靈的) 인 일에 관해서는 그동안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에서 그 예가 너무나 많지마는 기억 나는 대로 다음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야 할 세례 요한은 이미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마리아가 오는 소리[음성]를 듣고도 태아로서 기뻐 뛰놀기까지 했다. 요한의 모친과 마리아는 가까운 인척간이었고 요한과 그리스도는 불과 몇 달 차이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성령[아버지의 영]의 인도를 받던 그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30세 가량 되신 후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지시를 받아[이 세례 받으심은 우리의 대표성을 나타내시는 본으로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각자가 하나 되시는 뜻을 나타내심이다] "보라,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하고 외친 것이다. 그리 했던 그가 헤롯왕의 부정한 짓[자기 제수를 아내로 삼은]을 책망하자 이에 그 여자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된다.

요한으로서는 이렇게 자기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도 자기를 구출하시지 않는데 대하여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과연 이 사람이 그리스도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으므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과연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분이 그리스도로 오시게 되어 있습니까?" 하는 솔직한 질문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 사실마저 가감없이 그대로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눅 7:19].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답을 주셨다. 그 답을 듣고 요한이 납득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그런 의심을 풀지 못했는지 그 여부를 성경은 말하지 않았다. 우리도 가부간 확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대목을 접하여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고 되어 있고 마침내 때가 와서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그리스도를 세상에게 확인시켜 주었다고 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스스로도 못믿은 것이니 자가당착이 아니냐. 세례 요한도 확신을 못하는 처지에 우리야 더더욱 그렇지 않으냐. 이런 상황인데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목숨을 걸고 믿겠느냐?" 할 것이 아닌가.

따라서 앞서 소개한 우리나라 그 유학자의 말대로 당장 그런 내용은 빼 버렸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 득이 되지 않을 내용이라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이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사실 그대로이기에 성경은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즉 일체의 인위적인 손질이[거짓이든 아니든 간에] 가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하신 것이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의인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세상에서 고난당하시게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모든 사람 역시 이와 같은 동일한 핍박과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사실대로 밝히심이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이렇게 낙담하기에 꼭 좋은 내용도 가감없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인데 여기에 어떤 거짓말과 속임수가 감히 끼어 들 것인가.

설혹 실제로는 고난을 받더라도 겉으로는 고난 받지 않는 것처럼 해두어야 거짓말이 되고 속임수가 된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처럼 고난 받는다고 처음부터 미리 경계하는 마당이니 몇몇 소수만이 이를 환영하여 믿을 것이고 그 외에는 믿으려고 하다가도 믿을 마음이 사라질 판인데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꾸며댄다고 해서 믿을 것이라 하여 거짓말을 하겠는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런 대목부터 먼저 빼어 버리거나 과감히 생략하는 일부터 시급한 것이 아니랴.

과연 그렇게 해서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고 그리스도와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던 사실까지도 성경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요 6:66]. 솔직히 말해 절대 다수가 낙담해서 물러갈 만큼 그런 정도의 내용으로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극소수라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광야 교회"[행 7:38] 즉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의 강압을 벗어났던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 장정들 60만 가운데 믿음을 지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둘뿐이었음을 성경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확인해 주고 있다.

그 사실대로만 하면, 60만 대 2의 비율이다. 그러니 이와 같이 믿는 이들이 처음부터 극소수임을 천명하고 있는 성경이 무슨 변덕이 나서 거짓말로 꾸며대고 속이면서까지 사람을 억지로 긁어 모으려 하겠는가. 처음부터 수효가 적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이 원래부터 '사랑의 한 몸'이 되는 이치보다 자기중심으로 지향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심성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심성의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뜻은 아니니, 그럴진대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겠지만 많은[전체로 따지면] 사람이 지금까지 훌륭하게 믿어 온 것이다. 스스로 그런 심성이 되기를 선택하는 이들에게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악 중에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이 가장 으뜸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악령 사단이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인간을 속여 죽음에 빠뜨렸던 것이다. 자기중심 지향에서는 인간만 아니라 영물들 또한 그러하기에 사단과 같은 악령들이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딤전 2:4/벧후 3:9] 인간의 뜻을 강제하실 수는 없다.

만일 성경이 거짓말이고 지어낸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실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의 강제, 간섭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래서도 성경은 진실 그대로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 간섭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강제와 간섭의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인간의 자유 의지가 바로 그런 증거가 되기도 한다. 자유를 주시고는 이를 다시 강제하거나 간섭하신다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실성을 부인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성경의 진실성도 시인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일이다. 그리고 강제나 간섭이 먹힐 리가 없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4,65]는 말씀으로 확언하신 바다. 즉 제한하시고 선별하시고 추려내고 솎아내고 걸러내신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더더욱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9. 이회장은 그래서 종교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갈래가 되어져 있는 인간 생활에서 종교를 문화의 한 지류(支流)로 인식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각이다. 종교를 "신 또는 초인간적,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 존숭, 신앙하는 일의 총체적 체계"라고 알쏭달쏭 알 듯 모를 듯하게 뜻 풀이를 해놓고 있는데, 그래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또 하게 된다.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라고 해놓았는데 역시 생각이 헛갈리어 얼른 분간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믿고 받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가? 그래서 우리 스스로 답하기를,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으려는" 속내라 하게 된다. 무슨 "미래"인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냥 끝나는 것으로 알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무종교인이 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일제히 일정 수명을 누리고 생을 "끝낸다면"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기고 앳된 청춘에 죽어 나가기도 하니 그냥 "끝나는" 모양새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현실이 벅차다. 왜냐면 그들은 해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편성이 없으므로 그냥 끝난다는 답이 막연하기 짝이 없어 정답이 아님이 드러난다. 이미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살펴보았고 종교의 무익함을 진단했으므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앞서 내린 결론을 다시 강조하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단언하거니와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가 있고 그래서 나름대로 사회 기둥으로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소양만은 누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함이니 그것은 사람다움 즉 올바른 인간성이다. "인간부터 되라"는 말을 많이 하듯이 오늘날 공리(功利) 공명(功名)주의에 빠진 나머지 인간성 배양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데, 나라는 정치가들이 망치는 것이라기보다 실제는 타락한 교육자들이 망치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정치가는 현실을 망치고 있지만 교육자는 미래를 망치기에 과실(過失)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애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모두의 평균된 즉 평형을 이룬 행복을 누리게 함에 있으니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데에 있음이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否認, self-denial)이 필수 요건임을 이미 설명했다.

교육자가 미래를 잘못 향도(鄕導)함으로써 허물이 더 크다고 할진대 보다 근본적인 미래 지향성이 되어야 할 종교인의 과오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종교는 마땅히 현실에서의 옳은 삶을 강조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수박 겉 핥기고 내세에서의 행복만 추구하게 만드니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뿐으로서, 그래서 한마디로 무용지물이라 하는 것이다. '한 몸'의 체제가 아니면 여럿이 행복하게 되는 삶을 도모함이 불가능이고, '한 몸' 구조에서는 모두가 자기 부인이어야 하는데 원천적으로 종교로써는 자기 부인의 언저리에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조물주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한 몸 구조는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도 몸도 자기 부인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런 한 몸 체제를 강조하지 않는 한 행복한 삶도 영생도 불가능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부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안되니 내처 자기중심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데에서는 모든 방도와 방법이 허사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이런 헛일만 하는 것이다.

천주교도 개신교도 이런 점에서 그 어느 종교와도 마찬가지임을 이미 설명했다. 자기중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되는 선물로서의 거저 얻는 구원임을 역설해도 공염불(空念佛)임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영생에 들어갈 수 없기는 불교나 세상 그 어느 종교와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심도 이 자기 부인을 하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 자기 부인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자기중심(中心) 일변도였다. 그러니 인간 사회가 지금까지 비리, 부정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오늘까지의 인류 역사가 바로 이런 내용으로 대체적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종교가 생기고 뿌리 내리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사악하고 살벌한 인간 세상으로부터 탈피하고 이상 세계에서 살고 싶어 하는 염원을 토양(土壤)으로 하는 것이다.

내세에서나 그것을 기대하자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중심의 세상을 혐오하면서도 그 스스로 그런 자기중심으로 나가니 자가당착 속에서 헤매다 일생을 끝내는 것뿐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영생하는 자로 만들고자 하니 자기중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하나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니 그 "구원 받음"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상적인 세계를 염원하는 것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 등이 작용하여 종교를 찾는 것이나 자기중심이기는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삶에서의 기복(祈福)도 있다.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소위 복을 타고났다 하여] 이들은 ‘내세’에 대한 그런 기복 심리가 또 작용한다. 한마디로 종교는 의타적(依他的)이다. 무엇인가에 기대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사제(司祭, priest)들이 인도하는 대로 피동적으로 충실히 따르기에만 열심이다.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강조한다는 불교는 의타적이 아닌가?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이끌어 가지 않는 것은 무조건 모두 의타적이다. 자주 독립성은 입에 발린 빈 말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자기 양심을 따라 올바르다고 여기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지 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구하는가? 그냥 당당히 살면 그뿐인데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으니 명백히 '다른 힘에 의존함'이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근본부터 다르다. 우리가 성경에서 경고하는 대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자기 자신을 구원해도[딤전 4:16] 차원부터가 다르다.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자기중심에서가 아닌 자기 부인에서부터 모든 언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증거요 그 실질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종교와의 구별되는 점이 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자기 부인은 이미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됨이다. 내가 나를 부정(否定)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모든 인간 쾌락을 멀리하고 고행(苦行)을 일삼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다. 그런 것 평생을 해도 여전히 자기중심이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 위해 자기 몸을 버린다고[고전 13:3] 해도 마찬가지다. 자기중심이다. 왜냐면 그 스스로 취한 행동이기에 그렇다. 쉽게 말해 자기 상대가 있어 그 상대를 위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내가 몸 바쳐 구해낸 그 사람이 나의 상대가 아니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를 이룬 나의 한 부분, 분신(分身)이거나 해서 나와 '한 몸'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위기에 있음을 보고 내가 개입하여 그를 위해 죽어 주었다는 것뿐이다. 그를 위해 내가 죽었으니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면 그를 사랑하여 된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요 15:13], 여기에는 "친구를 위하여"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고 하셨다[:15]. 또 "친구"를 정의하여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함"[:14]이라 하셨다. 즉 우리 각자와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관계인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죽었어도 그와 나와는 그런 하나 관계가 되어 있지 않고 단지 나는 나의 임의로 판단해서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하고 단행한 것뿐이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나의 자유이기 때문에 누가 나를 제지하거나 강제할 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그 설명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반드시 자기의 상대가 있음이니 한 몸에서의 머리가 그 첫째요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내가 내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내 이웃이 그 둘째 상대다[마 22:37-40].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드실 때의 경우도 의미는 마찬가지다. 그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는 유대인들[대개 이들을 서로 상종하지 않았듯이]에게도 선을 베풀었다 즉 이웃으로 여겨 사랑의 행동을 베풀었다는 데에 말씀하신 취지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었던가.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머리이시라고 믿어 그 머리의 지시를 따른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일견 남이라 해도 그런 사랑을 베푼 것이다.

여기서 그 가르치시는 말씀의 핵심은 일단 내 이웃이라고 생각하면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없이 무조건 사랑을 베푼다는 데에 있으므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지 아니 믿는지 그런 것을 구별하여 말씀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 빈사지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라고 인식하여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전제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핵심은 이러한 자기 부인에서 우러나는 것이 "이웃 사랑"이요 이는 '한 몸' 의식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이 한 몸 관계가 이루어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세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교회"[행 7:38]로 표현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의 당시 유대인들은 교회로 여전히 상징되는 의미였다. 그래서 전도 차 제자들을 보내실 때도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7] 하신 것이다.

상징되었다는 것뿐이니 교회로 간주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하신 후 초대 교회가 시작되면서부터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도 완전히 사라짐은 당연하다. 교회로 상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던 이들이 "나는 어찌 할꼬?"[행 2:37] 하고, 다급했던 빌립보 간수가 "구원 받으려면 내가 어찌하면 됩니까?"[16:30] 했던 그런 죽음의 죄인임을 자각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의미인 것이다.

고로 상대가 있어 그 상대와 더불어 하나 즉 한 몸을 이룬 상태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된 이웃을 전적으로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자기부인"의 정확한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도 을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위하던 것을 방향을 바꾸어 자기 대신 자기 상대를 위함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의 자주 독립성이다. 타의 간섭, 강제를 받지 않는 것이 자주 독립인데 과거 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던 것이 자주 독립이었다면 이제는 내 스스로 자진해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도 똑같이 자주 독립이다. 왜냐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을 불법, 불의인 줄 알고 미워하므로 더 다시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나의 완전한 자유로써 그렇게 함이다.

반드시 나 자신을 위해야만 그것이 자주 독립이라는 선입관부터 버릴 일이다. 이렇게 둘이서 하나를 이루면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형성하여 더 크고 풍성하고 완벽한 전체 '우리'를 '나'로서 삼음이니 하기야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은 내용상으로는 옳은 말이다. 이는 다음 사실로도 확인된다. 즉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육체의 측면에서 자기 상대를 만드는 행위다. 그래서 자기 몸은 더 다시는 자기 것이 아니고 상대의 것이다[고전 7:4]. 즉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자기 부인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상대인 자기 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엡 5:28]. 자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됨은 자기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미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됨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절대로 살지 않지만 그 대신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시고 그 지시를 받들어 나의 모든 이웃이 나를 위해 살아 주니까, 나는 나를 부인함으로써 오히려 더 여러 배로[혹은 무한대로] 나 자신을 위함이 결과론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종교는 아무리 자주 독립성을 부르짖어도 의타적이고 동시에 배타적이나[왜냐면 자기중심이므로 자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믿음의 형제들을 이웃으로 두는 한 몸 체제에서는 문자 그대로 완벽한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게 되어 있다는 이 차이를 명심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계시지만 '사랑' 안에서 온전히 그런 자주 독립성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 자유 평등이 있음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랑 안에서다.

의타심을 타파한다고 하여 불교는 "인간적 노력", "자기완성을 위한 신념에서 우러나는 노력", "인간이 인간 되려는 안으로부터의[內心] 움직임" 등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려 하지만, "부처의 이름을 열 번 염(念)하는 것만으로도 청정한 부처 나라[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는 등의 소위 "쉬운 불교"가 있음에서도 드러나듯이, "부처의 원력(願力)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마당이므로 의타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장로[감독]"나 "집사"는 "양(羊) 무리에게 본이 된다"[벧전 5:3/살후 3:9]는 데에 핵심이 있다. 그리고 교회로서 모이는 것은 "피차 권면하여"[살전 5:11/히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함으로써"[히 10:24]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는"[3:13] 데에 있고, 목자(牧者)로서의 임무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함이니[행 6:4], 특별히 말씀 봉사인 경우 "이미 진리에 섰으나 항상 일깨워 생각하게 함"[벧후 1:12,13]에 있다.

"피차간 그렇게 한다" 했으니 피동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인 의식에서 오는 능동적인 역할 수행을 말한다. 또 일상생활로서 그렇게 함이니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히 3:13] 그렇게 함을 강조하고 있는 까닭이다. 고로 특정일을 정하여 특정 의식과 전례를 행하는 종교적 행사에 의미를 두지 않고 매일의 삶에서 오는 필요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완연한 차이가 있다. 즉 죄를 짓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함에 있으므로 올바르게 사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서 인간에게 전적인 자유 의지를 주심으로써 그 스스로의 운명[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영원한]을 결정하게 하신다는 사실에서도 선명히 그 뜻이 드러난다. 단지 현재의 우리 모든 인류의 상황은 다르다. 이미 자기 운명을 그 스스로 결정해 버린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여파(餘波)로 모두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 스스로 그렇게 정했지만, 멋모르고 세상에 태어나는 그 후대로서의 우리 모든 인류의 사정은 다른 것이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있었던 아담과 같은 위치가 아닌 것이다. 아담이나 에덴낙원의 영물[역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들과 균등하게 형평을 이루도록 우리 각자도 스스로의 생사(生死)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베푸심 즉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 하신 조처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인 것이다.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던 때나 에덴낙원에서 천사[영물]들을 창조하시던 때나 우리의 "새 창조"[고후 5:17/갈 6:15]나 다 같은 창조이기 때문이다.

"새 창조"에서의 첫 번째 자유 선택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데에서 가장 먼저 가름되어진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요 3:16] 구원이다. '한 사람 그리스도'를 믿음이니 이는 신뢰를 말함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특정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요,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 즉 종교 의식에 참예한다고 이를 믿음이라 하시지 않았다. 오직 "그를 믿으면"[:16]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게 되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된다[고후 5:15]. 여기서 여전히 변함없이 자기 자신을 살기로 작정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를 유보하는 경우, 이는 빛이신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것이 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음"[요 3:18]이 되어 영원한 죽음[멸망]으로 판정 나게 된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그런 자유 선택을 했고 영물들 역시 에덴낙원에서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영원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기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기회가 있어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므로 이미 그렇게 영원한 멸망으로 확정이 되어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야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니까 우리 스스로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할 일만을 충실히 할 것이니 즉 믿느냐 아니 믿느냐 양자 택일이다.

그리고 이 양자 택일에서 믿음에 들어왔다고 전부가 아니다. 왜냐면 믿음과 사랑은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마음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즉 한번 사랑한다고 해서 기계적인 것처럼 그대로 영속성을 띠는 것도 아니고 항시 변할 수가 있는 것이 마음이다. 아담의 범죄도 영물들의 범죄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 의지요 자유 선택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 중에서도 다시 자유 선택에 의해 여전히 생사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니 이것이 두번째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율에 있지 않고 자율에 있다. 왜냐면 모든 것이 사랑이 그 핵심이니 삶 자체가 사랑 없이 제대로 누려질 수가 없는 까닭이다. 영물이나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이 사랑이 기계적이 아닌 모든 삶의 핵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은, 여태까지 인류가 '죽은 자'였으므로 아담처럼 '산 자'로 만들어 주시는 데에 있지, "옛다, 받아라" 하고 영생을 덜커덩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난데 없이 이런 생각들을 하여 오직 영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만 구원을 인식하여 자신을 속이고 자기 구원을 크게 그르치고 있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사단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앞에서 인과론을 말했거니와, 인(因)은 무시하고 과(果)만을 말하는 것이 종교다. 대칭 원리에서 벗어나니 동전의 한 면만 주장하는 것이므로 진실일 수가 없는 거짓이요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인간이 영생하지도 않으며 내세에서 행복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도 없다. 한낱 망상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인간에게는 '필멸(必滅)'이라는 단 한 마디만 적절할 뿐이니, 모든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자연법칙의 굴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법칙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논할 수 없는 것을 말함이다. 과학이 아니면 미신이다.

과학은 인(因), 과(果)의 법칙에서 한 치도 이탈할 수 없다. 현재의 인간 불행은 '과'요 아담의 범죄는 그 '인'이다. 따라서 '과'는 '인'을 무시하고는 해결할 수가 없다. 고로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이 '인'을 먼저 척결한 다음, 그 척결한 결과로서의 새로운 '인'을 만드심이니 곧 그리스도시다. 그런즉 영생은 이 새 '인'의 '과'인 것이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자가 되었으니, 죽은 자로서의 속박을 벗어나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삶 자체가 처음부터 의타적이라면 이런 불행이 일어날 리도 없다. 왜냐면 인간이 이런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간섭하고 강제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자주 독립성에 의한 자율에 맡겨졌던 까닭에 아담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자주 독립성을 발휘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여 순종함으로써 영생에 이르고 그와 반대로 나감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영원 멸망[악령들의 운명처럼]을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복도 짓고 화도 지으니 어찌 의타적이랴. 하나님은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으니 어찌 자주 독립적이 아니라 하리요. 그렇다고 우리가 저절로 세상에 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거저 주신 선물로서의 생명이 그리스도시다. 이 그리스도의 능력[생명력]으로 지금 우리가 자주 독립성을 발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말하기를 능력은 하나님 몫이요 선택과 의지는 우리 고유의 몫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선택하는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나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한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힘의 원천이시자 근본이 되어 계시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간섭이나 강제를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열매 맺는 것도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 차등이 있다[마 13:8]

우리는 지금 엄연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각간의 승패(勝敗)를 눈앞에 두고 있던 나폴레옹이 그 부하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달라! 오직 정확한 정보!" 하고 외친 것과 같으니, 어떤 듣기 좋은 인간 망상이나 환상도 꿈 이야기도 아닌 오직 정확한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 영원한 생사에 관한 것이니 밤잠을 걸러서라도 진상을 파악하려고 노심초사해야 할 일이 아니랴.

혹자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가?" 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를 동일시함으로써 혼동한다. 앞에서 기독교와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를 어느 정도 그 개략을 짚어보았거니와, 그 차이라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현재 기독교로 표방하는 종교가 많지만[전통적인 것이든 신흥 사이비든]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있다는 현실에 있다.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은,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王, 임금-요 14:30]는 악령 사단이므로 필연적으로 그의 조종 아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교"는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악령 사단이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만든 것임을 이미 설명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은 무조건 "기독교"라 하여 한 범주에 집어 넣는다.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세상 사람이야 무엇이라 하든 명칭이야 무엇이 되든 상관할 바 아니다. 오직 이성껏 판단하여 그 옳고 그름을 스스로 식별해낼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차별없이 주신 바이니 우리는 단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성령의 계시로 배운 것을 세상 앞에 증언하는 것뿐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증인"[행 1:8]으로서의 역할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곧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요 1:1].

간단히 말해 희소식[福音]이다. 마라톤 평야를 내처 쉬지 않고 달려 사람들에게 "이겼다!" 하는 단 한 마디로써 길길이 기뻐 뛸 승전보(勝戰報)를 전하고는 기진맥진해 그 자리에서 숨진 것과 같은 그런 희소식(喜消息)이요 그리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의 우리의 임무다. 소식, 곧 정확한 정보 전달이 하나님의 말씀 전파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하나님도 여럿이 아니다. 여럿이라면 우리를 지배하는 이 자연법칙과 같은 일사불란한 통일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말처럼 모든 것은 하나로서의 초점에 모아짐이다. 종교가 여러 종류라는 것은 진리가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 되니 그런 일은 없다. 그 중 하나만이 진리이거나 전부가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이 우주 만물의 통일성을 보고서 우리는 창조주께서 "한 하나님"[One God, 이는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말과는 다르다]이심을 아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미련한 생각들을 하는 인생들인데[롬 1:21,22], 하나님께서 헷갈리게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실 리도 그럴 이유도 없다.

오직 한 갈래, 한 가지 내용의 구원뿐이다. 진리는 하나다. 간단명료하게 오직 한 가지 말씀, 한 통로(通路)로 그 뜻을 나타내심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 상식과 양식에 부합하는 판단이 된다. 고로 그 나머지는 모두 진리가 아니다. "왜 그러면 이런 잡다한 것이 생겨 혼란을 야기하는가?" 하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인간과는 불행히도 불가분의 존재가 되어 있는 악령의 소행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3운법칙[trini homo]이 증명하는 것 중의 네 번째로서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는 생애"로서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함이라 했는데, 이와 같이 각자가 이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성령으로 모심으로 인하여 그 "끊어진"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잇게 됨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니, 즉 참감람나무[그리스도]에 돌감람나무 가지[우리 각자]가 접붙여지게 됨이다. 그리고 이렇게 접붙여진 이들이 공동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게 됨으로써 자연적으로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체(肢體)를 이룸이니 이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교회다.

교회

이 교회가 완성됨으로써 나중에 천국을 구성하게 된다. "완성된다"는 것은 이 구성원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다시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내지는 까닭이다. 앞에서 설명한 '두번째의 자유 선택'에서 스스로를 탈락시키는 이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 숫자가 부지기수임을 성경은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 10:5] 함으로써 분명히 하고 있다.

왜 솎아지는가. 올바르게 살지 못함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그 결과대로 되어지는 자연스러운 결말일 따름이다[마 7:21/25:45]. 그래서 종교와의 차별을 두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의 마땅한 삶의 도리를 따라 사는 것으로써[어떤 종교 교리를 따르고 그 종교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써가 아닌]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마땅한 삶의 도리가 무엇이냐 하면 한 몸을 이룬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부인인 것이다.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옳고 바르게 삶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 하신 것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고전 10:6]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들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7], "저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8], "저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9], "저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10] 한 그대로다.

"저들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 사도가 경고한 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다가 멸망하게"[빌 3:18,19] 되는 꼭 그대로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있음을 거듭 강조하여 "저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 10:11] 하였고,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셔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13]는 말로써, 우리가 능히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살 수 있음을 재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얼마든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후 5:15/롬 14:7-9]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고로 성경의 이 표준에서 벗어나고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 경고에서 벗어날 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구원을 받은 자로 자처할 때 그것이 바로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고 신앙하는 종교인일 따름이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인 곧 천국에 들어가는 이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어떤 규범을 정하여 이를 지키면 혹은 그대로 따르면 또는 깨달으면 그래서 그 깨달은[불교에서 말하는 "대각(大覺)"과 같은] 결과로 무욕(無慾), 무소유(無所有)가 되면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님이다.

왜냐면 올바르게 사는 것은 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스스로 선하게 살고자 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는 상대가 있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는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해야만 완벽한 올바른 삶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를 지으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바로 그런 한 몸을 이룬 가운데에서 서로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옳고 바르게 사는 삶이요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약 1:15] 하는 것은 그 욕구가 자기 자신을 위함인 경우 그것을 단죄(斷罪)함이다. 이웃을 위한 욕구일 때 그것은 올바른 것이다. 무욕(無慾)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욕(所欲)이 분명한 것이다. 무소유(無所有)가 아니니, 오히려 모든 것, 전부를 소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나의 향락을 위함이냐? 아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자기중심과는 반대 개념인 자기 부인으로써 그러하다는 뜻이다. 즉 내 이웃이 나의 것이니까 그래서 그 가진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만 사용해 주니까[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함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내 스스로 향락을 취함이 아니라 내 이웃이 나로 하여금 모든 낙을 누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를 섬기는 나의 종들을[사랑 안에서의] 천국 인구가 1억이라면 1억을 두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나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일체의 낙을 그들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퍼부어 주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소유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소요한 자다. 영원히 그러하다. 나 역시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나도 그들만을 위한다. 나 자신이 그들의 소유로서 그들 각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한 몸'의 체제에서 사는 복된 넘치도록 "풍성한 삶"[요 10:10]의 의미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은 그 1억의 1억분의 1만 내가 누림이다. 너무나 빈궁하다. 그래서 이웃의 것을 탐을 낸다. 마음대로 안되니까 상대를 살상(殺傷)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서로가 그러니까 원수요 항상 전쟁이요 비극이다. 그래서 그런 1억분의 1이나마 제대로 챙겨 누릴 수 있느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므로[왜냐면 항상 서로를 경계해야 하니] 그것도 채 못다 맛보고 멸망하기가 바쁘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아닌 일체의 것이 아무리 화려한 말을 하고 그럴 듯하게 논리를 펴도 한낱 망상이요 꿈이요 잠꼬대일 뿐이라는 결론이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한 몸의 구조가 생명의 체제가 되어 있는 것은 한 머리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영광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무욕", "무소유"가 무슨 큰 자랑이나 되고 최고 목표에 이른 성취의 경지인 양 착각하지만 바람 움켜쥐는 것일 뿐이다. 욕심이 없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욕심 낼 만한 것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소유를 말하는 것도 나 아닌 남은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남은 있는데도 나는 없으니[아무에게도 없는 것을 욕심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필요하고 아쉬워서 욕심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소유한다고 하는 것이지 아무 짝에도 소용 없는 것이라면 나 먼저 그것을 버리기에 바쁠 것이다. 버리고 말 것이라면 '소유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갖추어야 하고 아쉽다고 여기는 것은 그 모자람을 채워야 하고 불만인 것은 만족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삶의 낙을 느끼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살고자 할 필요도 없으니 무욕이니 무소유니 말하는 것도 아주 무의미한 일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에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은 없다. 이와 같이 모순 덩어리다. 아무 것도 해결하는 것이 없다. 고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할 것은 다 소유하여 누리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모든 욕구를 채우되, 미련스러운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모두가 다 함께 누리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할 때, 철저히 도덕 생활만 하는 것으로 전부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니까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다[고후 5:15].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셨다.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그 속박에서 놓여 나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셨으니 그 하시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듣고 순종하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권위를 세우려 할 것은 없다. 오직 사람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의미에서 또 사람은 모름지기 그 뜻대로 살아야 함을 본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선을 행하는 것뿐이다[갈 6:10]. 그러므로 이런 일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면 기본적인 것 즉 사람이 올바르게 사는 양상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명령하심과 같이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자체가 복음 전달만 완료되면 끝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마 24:14].

다시 말해 내일이라도 복음 전파의 일이 끝나면 세상 역시 즉각 끝날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요 12:25] 경고하심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은 이 세상이 현재 사단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감안된다. 어쨌든 인간의 본격적인 삶은 영계에 속한 영혼이 입증하고 있듯이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사는 데에 있으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불완전한[인생에게만은] 육체를 가지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랑도 이런 현재의 세상에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치유가 구원 받음에 있으니 이 구원의 도리를 수용하고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더한 "선을 행함"은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 사랑"은 없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거나 외면한 채 만일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빈민 구제니 하는 것등으로 선행을 오해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뜻을 행함도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도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마 7:21] 하신 경고를 따라 그런 사람은 당연히 천국에서 제외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한 대로 그리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 한 대로, 나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공동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막연하게 인식하지 말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한 사람' 따라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가인(佳人), 미인으로서 그러나 여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남성과 여성을 가장 조화롭게 두루 겸비한 한 사람으로서 인식함이다.

바로 '사람'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아버지"라 할 때는 "어머니"이시기도 한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대표성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칭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어 버리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될 때는 더 이상 성별이 없다. 천사[영물]들처럼 완전한 몸이 되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현재의 인간 육체처럼 양성으로 가름하지 않는 그 둘을 겸비한 것을 말함이다.

원래 아담이 그러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고로 그 때[여자가 창조되기 전]의 아담을 기준해서 말하다보니 현재 아담이 남자가 되어 있으므로[여자가 존재하게 됨을 따라] 그 남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뿐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다. 사람 그리스도께서 아내/남편보다 형용할 수도 없이 더 가까운 사이임을 가리켜 성경은, "장가 가지 않은 자와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마음에 두어 어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남편/아내가 있는 이는 세상 일을 마음에 두어 어찌 하여야 아내/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어진다"[고전 7:32,34]고 한 것이다.

아내 남편 관계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 가까운 사이가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임을 설명하시며 그리스도 친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38]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시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혹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런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자기 판단을 신뢰하기보다 더 믿는 것이 성경에 말하는 구원에 관계된 믿음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마 18:3]이다.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 5:5]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우리 각자는 더 이상 과거처럼 혼자가 아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존재하는 겹[홑이 아닌] 사람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어 존재함이다.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나이니 육체로 말한다면 에덴낙원에서 남자와 여자 둘이서 함께 있던 바로 그대로의 모양새다. 앞에서 사단이 거짓말로 충동할 때 여자가 남자와 더불어 의논하지 않은 것을 두고 범죄의 첫 단계라고 했지만, 이와 같이 우리 각자는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항상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항상 이 점을 마음 깊이 우리는 아로새겨야 필요가 있다. 나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둘이라는 것을 아래 그림으로 나타내는 바와 같다. 바늘 가는 데에 실이 가고 실 뭉치 있는 곳에 바늘이 있다 함과 같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 무엇이든 여쭙고[에덴낙원에서의 여자가 아담과 의논하고 했어야 했듯이] 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함"[살전 5:17]으로써 이와 같이 주님을 의식하고 인지할 수 있다. 그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16] 매사에 감사하는[:18] 것 역시 그렇다.

2차 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노동수용소에 있던 이들이 집에 남아 있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매일 아내와 대화하는 것으로써[아내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그 모든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나라 외과 전문의 장기려 박사는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여 남쪽에 와서도 홀로 지냈는데 그 부인 역시 북에 홀로 남아 대소사 간에 그 부군인 장박사와 반드시 의논하듯이 해서 결정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남편인 장박사에게 알려졌다.

그러므로 사랑만 있으면 보고 보이지 않고 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금 내 옆에 그리스도께서 실제 계심을 아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그 어느 생존 인물 못지 않는 확실성으로 내 옆에 계시는 주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사람은 나와 함께 있을 경우 다른 이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믿는 이들에게 나와 함께 계시는 똑같은 상태로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신 것이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 하신 것이니 내가 온다고 하시지 않고 보낸다 하신 것은 성령은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계심을 가리키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 사실을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14:26]이라 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아들께서도 보내신다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19,20] 하신 대로, 교회는 이렇게 겹 사람이 함께 모이면 구성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하셨던 것이다[:17,18].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그것은 교회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 구원의 매체(媒體)가 되는 것은 종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 창조되고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이다[약 1:18]. 개개인이 다 그러하다.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內侍) 간다게에게 집사 빌립이 전도하여 구원시켰다. 즉석 구원인 것이다. 빌립보의 교도소장은 바울과 실라가 전도하여 즉석에서 구원을 시켰다. 두 경우 다 그 전도 현장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다.

다시 말해 빌립이나 바울 및 실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롬 10:17] 빌립보 간수(看守)나 여왕의 내시가 구원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이 똑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심으로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있으니 함께 모이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모이는 것을 가리켜 "교회"라 한다.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 모이는"[고전 11:18-"to come together as a church"]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교회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 일상생활임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해서 각 사람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성령으로 계시는]와 함께 꾸준히 사람 구원하는 활동을 하여 사람들이 모이고 그 수가 많아지면 초대교회처럼 감독[장로]도 있게 되고 집사도 있게 된다. 모이는 특정 건물을 가리켜 "성전(聖殿)"이라고는 입 밖에도 내지 말 일이다. 성령 계시는 각 사람 곧 항상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그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각 사람의 육체가 '성전[holy temple]'이다. 따라서 각자가 제사장[司祭, priest-벧전 2:9]이요 "제물"[롬 12:1]이다.

교회가 들어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하는 그런 무슨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하고 우리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자 곧 증인(證人, a witness)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구원의 희소식[복음]일 따름이지 종교가 아니다. 세상 종교 가운데 이렇게 순수하게 ‘개인’이 나서서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있어 그 들은 바 말씀을 믿으면 되는 것이기에 그리고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그 전도자와 함께 하시어 "함께 일하시는"[고후 6:1] 고로, 얼마든지 빌립처럼 되어 또는 바울이나 실라처럼 되어 즉석에서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이 중요하고 세상 종교와의 이런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성령]께서 친히 역사(役事)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자기의 말씀을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전도자(傳道者)는 자기 안에 직접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요이 1:9] 까닭에 그 전도자에게 직위상의 무슨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세례를 베풀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그 전도자를 통해 세례를 베푸시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國庫)를 맡은 중요 인물로서 그 나라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내시(內侍)라 하더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使徒)들의 손을 빌릴 것 없이 "집사(執事)"[그리스도를 직접 모시고 모든 것을 보고 말씀을 듣고 배운 "사도"에 비하면] 빌립이지만, 그 즉석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다. 이 일에 하나님[성령] 친히 함께 하셨음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행 8:29,39].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인데 누가 막을 것이며 설왕설래할 것인가. "이방인(異邦人)의 사도(使徒)"라고 하는 바울에게 세례 줄 때도 예루살렘의 사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동원되지 않았고 오직 현지의 한 이름 없는 '믿음의 형제'인 아나니아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와서 세례식을 집전(執典)한 것이다[9:17]. 사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증인(證人)'들로서의 의미만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고 대물림을 해서 그 전통을 이어가는 따위의 일은 성경에서 가르친 바도 설정한 바도 없다. 그 베드로 한 사람의 '직위'를 특별히 규정해서 대물림을 하려면 12사도라는 '직제'까지도 만들어 대물림을 해야 사리에 맞다. 그러나 12사도 중 하나인 야곱이 헤롯 왕의 칼에 목 벰을 당했을 때 만일 사도라는 직책이 반드시 고수되어야 할 교회 직제라면 당장 그 결원을 보충했을 것인데도 당시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더러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는 성경 기록은 믿고,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러니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5,56]고 말했다는 성경 기록은 믿지 않아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우기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 속에서는 그 어떤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 전자는 교회가 이런 믿음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인물이심을 입증하는 증언이다. 후자나 전자나 똑같이 중요한 대목인데 어째서 인위적으로 차별을 두는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자에게 증언하거니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계 22:18,19] 하신 것은 계시록에만 적응되는 말씀이 아니라,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임을 확증하시는 의미이다. 즉 모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렇게 임의로 가감(加減)을 할 때 그렇게 조처하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천명하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상 종교와 엄격히 차별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세상 종교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는다. 차별화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어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시작하자마자 교회 전당(殿堂) 같은 것을 세워 올리지 않았다. 왜냐면 아무리 믿는 이들이 ‘한 몸’의 구성원이 되어 함께 모일 필요가 있어도 가정 집에서[행 2:48/고전 16:19/골 4:15/몬 1:2] 얼마든지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현실적으로 무의미함은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어 그런 건물이 하시라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따라서 그런 형체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북한 교회와 같다.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핍박 받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다. 왜냐면 사단이 핍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음이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종교화하여 "자기에게 속해"[요 15:19] 있는데 세상이 자기의 것을 미워할 수 있는가.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그 배후에 악령 사단이 있음을 뜻함이니 사단을 가리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과거 소련 등 동구권처럼 현재의 북한이 모든 종교를 압박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분법으로 가르면 같이 핍박 받고 있는 천주교 등도 진리라는 증명이 아닌가" 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 간의 해묵은 종교 전쟁과 오늘날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전쟁 등과 같이 소위 공산주의와 종교간의 충돌일 뿐이다. 그런 충돌에서는 어느 쪽이든 무력과 권력을 쥐면 우선은 이기는 것으로서 그저 그런 일반 세상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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