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6일 토요일

★인간을 "양자 얽힘"이라 하면 영혼은 "엎 스핀", 육체는 "다운 스핀" (29)

인간을 "양자 얽힘"이라 하면 영혼은 "엎 스핀", 육체는 "다운 스핀" (29)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10. 영혼이란 있는가?   11. 종교의 종류와 그 특징은 무엇인가? -----------------------------------------------------------------------


영혼이란 있는가?

10.  간단히 생각해서, 영혼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영원히 살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인간]과 전혀 그런 내색이 없는 것[자연계의 짐승들]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혼은 이 자연계 소속이 아니라 영계에 속한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역으로 증명함이 된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음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창 2:7]. 즉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지으시고 다음 단계로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다. 육체 따로 영혼 따로다. 따로따로 지으신 것이다. 이는 만물의 양면성의 이치에 부합한 것이니,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맞상대로서의 영계가 있음이다. 인간[아담]만 그렇게 따로 단계별로 순서를 따라 지으신 것은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생물 창조의 정점(頂點)이요 영계 생물의 창조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양 세계의 접점(接點)에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기'라는 것을 만들어 인간[아담]의 코를 통해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숨[呼氣]을 불어 넣으신 것이니 하나님은 생명이시므로 그 숨 역시 생명의 숨 그래서 "생기"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는 모습을 취하시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심으로써 이를 확인하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우리 각 사람 안에 임하여 오시는데 우리 자신을 아담 당시의 '육체'로 보시고, 우리에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그 '영혼' 격으로 하여 우리 각자를 "새로 창조하심[아담을 영적 존재로 만드신 것처럼]"을 나타내신 것이다.

인간[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 생물체 창조의 정점[climax]이자 영계(靈界)의 생물체 창조의 시작점[starting]으로서 이와 같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은 합리적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까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영계의 생물들[동물과 식물] 역시 영원한 존재이니, 그 중의 동물을 우리가 통상 영물(靈物)이라 하는데 거룩한 천사들이나 사단 등 악령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자연계에 속한 것은 시한부다.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제행무상'이라 한다. 영계는 간과하고 자연계만을 두고 말하는 결정적인 흠이요 오류다. 창조주 하나님부터 시인하지 않으니 영계를 논증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영적인 존재나 실상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그것을 부정하고는 종교로서의 자체적인 존립부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사후(死後)의 세계를 말해야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모순투성이라 하는 것이다. 모순이 발견될 때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자체 증명이 된다.

자연계와 영계의 차이는 시한부와 영원성의 상칭(相稱, 對稱)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시한부 육체와는 달리 영혼은 영원하므로 당시 아담의 육체 안에 조성된 이 영원한 영혼에 부합되도록 이미 존재해 있던 영계(靈界)인 에덴의 동편에다가 역시 영계의 속성을 지닌 한 동산[a garden]을 창설하시게 된다[:8]. 그래서 그 영계 즉 에덴낙원에 인간[아담]을 두시니 거기서 나는 신령(神靈)한 식물들을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아담의 육체는 영원한 영적 존재로서의 영혼에 걸맞는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즉 신령한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버리게 하는] 나무도 있고 먹으면 영생하게 하는[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신령한 몸이 되게 하는] 생명나무도 있으니 가히 신령한 식물들로서 막강한 능력이 있으므로, 이 자연계에 소속된 생물일 수가 없고 영계에 속한 식물들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그 "생명나무"나 당시 아담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전체에 널려 있는 실과 나무들이나 신령한 몸이 되게 하는 능력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는 "생명나무"의 경우,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어쩌다"[즉 범죄의 경우를 제외한]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버렸을 때 혹은 그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나무의 과일을 먹으면 도로 신령한 몸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그것이다. 다른 실과 나무는 그런 기능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미리부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그 말씀을 어김으로써 범죄까지 겹쳐진 경우이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효험을 기대할 자격이 없었으므로 에덴낙원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추방당하지 않아도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버렸은즉 어차피 영계에는 있을 수 없는 몸이다.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 친히 주재하시고 관장하신다는 의미에서 성경은 "추방하셨다[쫓아내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막강한 능력의 나무를 나게 한 신령한 땅이니, 그 땅[우리말 번역 "흙"과는 달리, 영역(英譯)은 "ground"-자연계의 "흙(dust)"과 대비됨]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신 여러 "동물"들 역시 막강한 능력의 영물(靈物)들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새 창조[우리의 구원]에서도, 당시 아담 창조 때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영혼 없는]’로서 우리 각자를 간주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임하실 때 ‘그 영혼’ 격으로 내 안에 오시는 것임을 역시 이미 설명한 대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철저히 원리원칙에 따르는 합리주의요 시종일관함이요 일사부재리요 공명정대, 공정공평이다. 하시는 모든 일의 처음과 나중이 균일하고 규격에 맞고 통일성이 있고 어긋남이 없으시다.

영혼은 영계에 속한 것이어서 불멸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그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으로 말하면 '육체 없는 영혼' 격이니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는 전혀 어긋난다. 그런 비정상이고 기형적이어서 흉물스러운 것은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이므로, 육체의 죽음으로만 방치할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아주 멸절시키시든가, 아니면 인간 피조물에 대한 지극하신 애정으로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죽음에 합류 또는 동참하심으로써 그 결과로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시든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님께서는 후자를 택하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 그 말씀으로서의 신구약 성경을 믿을 수밖에 없고,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안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뜻임은 지금까지 설명한 그대로다. 그렇게 필연적인 연결 고리로 이어져 나가도록 되어 있는 ‘한 꾸러미’의 내용이다. 따라서 말씀을 못믿으면 하나님 자체를 믿지 않음이 되고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실존 여부부터 먼저 구명(究明)해야 하는 작업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슬림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經典)은 코란이다. 신구약 성경 훨씬 이후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성경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권위도 겸하여 인정하게 된다. "겸한다"는 것은, 그런 오랜 전통의 독보적 특징만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해 온 대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실질적인 자체 증명이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는 역시 동일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 점에 대해 언급하기를,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장하여 인류를 우롱하는 일이 있을까 해서 ‘기록된 말씀’으로 전해 내려 온 사실을 설명했지만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가짜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될 일을 전망할 때, 사단[마귀, 큰 용, 옛 뱀-계 12:8,9]은 역시 그런 식으로 "하나님"으로 자처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장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지금 바로 우리 코앞에 박두해 있다.

그런즉 나중에 오는 것은 반드시 먼저 있던 것의 모조품이라고 여기면 된다. 그것이 그 어떤 장대한 규모로 또는 엄청난 경이로 나타나든 상관 없이 이 잣대(尺度)에 맞추어 가면 틀림이 없다. 장대하다, 경이롭다 하는 것은 속임수이기 때문에 그 특징으로서 당연한 것이니, 빈 깡통일수록 요란한 것과 같이, 실체가 아니므로 이 약점을 보완 보강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더 요란스럽게 외양을 치장하기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음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타날 악한 영물들의 소행은 가히 신적(神的)이고 그리고 기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나중 오는 것이 완성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로써 이미 끝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성경은 강조한다. "마지막 때"라는 것은 그 이상 더 계속될 여지가 없다는 확증이다. 고로 사단은 단지 이를 모방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마지막 때라고 명시하시지 않았다면 혹 나중에 나타나는 것이 완성품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이미 그렇게 밝혀놓으신 터이므로 꼼짝없이 나중에 오는 것으로서 "완성품"이라 자처할 때는 영락없는 가짜임을 자체 증명함이 된다. 따라서 사단이 아무리 움치고 뛰어도 사또 행차 후의 나팔 불기에 불과함을 명심할 일이다. 이와 같이 모방인 줄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하리요.

거짓은 원래 한계를 모르는 법이다. 오직 그 진위는 시간이 해결해 줄 뿐이요 당장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속성이다. 그러기에 거짓말이 통하는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않고 당장 들통이 난다면 누가 감히 속이려 들겠는가. 그래서 처음부터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 서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기준 삼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실존부터 확정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방금 말한 대로 이 세상은 악령 사단의 세계로서 그 철통 같은 지배 아래 있다. 그가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 prince-요 14:30]요 신(神-고후 4:4)이다. 인생들이 그 장악 아래 있으니 이 세상에 되어지는 일들이 그를 떠나서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그가 하는 일로서, 하나님의 통제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좌우지 되는 일도 물론 없다. 오직 그는 인간[아담]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거짓말로써 압복(壓服·壓伏)하였으므로 현재와 같이 인간 세계를 장악하고 있음이다.

또 인간의 자유 의지는 영원히 작동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도 좌지우지 못하심이니 즉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니 한번 정하신 것을 번복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장차 사단이 하나님으로 가장하고 적 그리스도가 "최종적인" 또는 "유일한" 그리스도로 자처하고 나서더라도 이는 모두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지는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했다[살후 2:3-12]. 왜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느냐 하면, 믿지 않고, 진리를 알기는 알아도 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싹쓸이로 심판하려 하심이라고 했다[:12].

3운법칙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인간 생애의 그런 철저한 제재는 이 세상에서의 소위 ‘삶’이란 것이 인간의 본격적인 삶이 아닌 까닭에 그와 같이 인간 생애의 법칙으로써 철두철미 인간을 우리[cage] 안에 가두어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으나, 정작 인간의 삶[또는 죽음]인 영원 세계에 관해서만은 절대로 이와 같은 강제가 없으니 이를 구분해서 인식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영원한 형벌이 있는데도 강제가 없다 하느냐, 영벌(永罰)을 자원해서 받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겠지만, 머리되신 하나님께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즉 의인이 되어 있는데도 강제로 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니, "악을 행했기"[롬2:8,9]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다시 말해 이는 자기의 자유 선택의 결과다. 단지 형벌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오판했거나 형벌 자체를 심드렁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 악을 선택한 것이니 이런 것이 "믿지 않음"이다. 자기 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다.

믿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는데도 자기는 믿지 않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형벌도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바로 판단해야지 이것을 강제라고 여기면 착각이다. 다시 말해 그런 자유를 행사하여 마구잡이로 해치고 죽이고 하는 것을 막고 세상의 질서를 강권으로나마 바로잡기 위한 것이 이 3운법칙[trini homo, 트리니 호모]의 역할이다. 마지막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은 다 구원되어야 하므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부득불 세상이 존립하나 그 존립하는 동안만이라도 질서를 잡아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악령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인간 생애를 강제하는 법칙[3운법칙, trini homo]에서 보듯이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을 일개 피조물로서 대행하는 역할이요 그 스스로 인간사라든가 세상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의 일이니 이는 욥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욥 1:12/2:6]. 거룩한 천사들의 하는 일이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지(意志)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데에 그들의 존재 의미가 있듯이, 악령들 역시 현재와 같이 아직은 불 못에 처해지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이상 형식상으로나마[마지못해서라도]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마지못해 한다"는 의미는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기꺼이 자진자발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그 뜻이다. 악령이나 악인이나 무릇 악한 피조물의 특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스스로 악한 습성이기를 택한 터인지라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어쨌든 하나님의 주재(主宰) 아래 사단 등 악령들이 이 세상에서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면 족하니, 그 사실은 다음 다니엘서에 나타난 대로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이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성경은 일괄적으로 윗대를 "아버지"로 표현한다-눅 16:24]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각종 국어와 언어]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가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어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단 5:18-21] 한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다"[:23] 하였다.

악령등은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지는 않는 까닭에 그들의 멸망은 정해져 있는 터이고, 따라서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일[시험하여 넘어지게 함으로써 멸망을 유발시키는]은 그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기는 하나, 겉으로 나타나기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한다는 점에서는 거룩한 천사들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욥기에 보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이는 자리에 사단도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욥 1:6,7/2:1]. 이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수행한다는 그런 뜻이다.

사단이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이런 시험 영역에서의 자기 역할 수행을 겸하는 것을 말함이다. 시험의 목적은 의인들 중에서 악을 행하는 자 즉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을 걸러내는 데에 있다. 의인이 아닌 처음부터 악을 선호하는 악인들이야 시험의 대상도 되지 않는 것은 내처 일관되게 사단의 장악 아래 있기 때문이다. 적 그리스도가 곧 나타나 온 인류를 속이게 되어 있는 것도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11] 뜻이므로 되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사단의 속내는[이런 의도는 당연히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일을 함으로써 의인들이라도 잘만 하면 아담부부처럼 옭아내어 멸망에 빠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는 데에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순수하게 자기 자유 의지를 따라 선택하는 선과 악의 결정이기 때문이다[롬 2:7-10/고후 5:10]. 하나님께서는 단지 미리 아신다는 것뿐이므로, 사단은 "그렇다면 나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일"이라 자신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사단을 역으로 이용하시는 격이 되는데,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원리원칙대로 움직이시는 것만은 천하 없어도 진실이기에 그런 원리원칙대로라면 자기도 얼마든지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사단 딴에는 믿고 있는 것이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미리 정하시는 것이므로 사단이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이지, 만일 미리 아시는 것을 토대로 하지 않고 미리 정하시는 일부터 먼저 하신다면 사단이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허사라는 것을 잘 알 것이기에 그와 같이 선뜻 [인간을] 시험하는 일에 나설 리가 없다.

하나님은 또 그럴 줄을 아시기 때문에, 사단에게 결과론적으로 인생들을 시험하는 역할을 맡기셔도 '미리 아시는 바탕 위에서만 미리 정하시는'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미리 아시고 정하시는 바탕이므로 그 최종 결과는 나중에 드러나지는 것이기에 사단도 딴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덤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왜 사단이 예수님은 시험하였느냐 할 것이다.

의인들 중에서 악인을 걸러낸다는 것은 의인 중에 악인이 위장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의 자유 의지가 과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히 1:9] 그 여부를 다루어본다는 의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똑같이 ‘자유 의지’의 주체이시므로 즉 복종할 수도 또는 아니할 수도 있는지라 시험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야 필연이 아닌가. ‘자유’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다. 또 순종하시게 될 줄을 몰라서 시험하는 것이라기보다 ‘공명정대 공정공평’ 차원에서도 차별없이 행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대표하신다는 차원에서도 시험 받으심은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그래서 하나도 다름없는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이런 저런 일을 할 권한이 없다.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료 피조물인 인간을 에덴낙원에서 거짓말로 속여 죽음에 빠뜨린 선례가 있고 그것이 자기 의도대로 이루어진 데에서 앞으로의 일도 그 스스로 자신하고 있듯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우리 각자의 자유 선택으로 얼마든지 아담처럼 좌로든 우로든 나갈 수 있으므로 이 자유 행위를 어찌 하든 유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3운법칙이 가리키는 의미대로 하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탐낼 이유도 명분도 없다. 왜냐면 세 가지 유형이라는 규격에 맞추어 철저히 통제되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인지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배우가 무대에서 각본대로 연출하는 것밖에 더 있는가. 사단은 "내게 절하면" 즉 자기처럼 자기중심으로 나가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영광을 준다고 모든 인생들에게 호령하고 있으나, 내일 일도 약속 못하는 주제에 겨우 오늘 이 시간만 확실히 담보할 수 있는 처지에 그것이 무슨 객쩍은 소리라는 말인가.

세상 부귀 영화커녕 남 보기에는 비명횡사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 모두 본인이 헐복(歇福)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한다"[눅 13:1-5]는 데에다 역점을 두시고 이 세상의 의미를 밝혀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알리시는 사실인데 뉘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고 혀를 놀리리요. 고로 3운법칙은 철저히 인생 삶의 헛됨과 무의미함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음이다. 위의 그림처럼 우리[cage] 안 창살에 가두어놓은 호랑이[자기중심의 야성(野性) 또는 마성(魔性)을 상징]가 우리의 평생이 아닌가.

"영원한 형벌에 일단 들어가면 누구나 거기서 나오기를 바랄 것인데 그러면 자유에 대한 간섭이 없으면 그런 자유로운 바람을 그 바라는 소망대로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이거늘 거기서는 다시는 못나오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속박이 아니고 강제가 아니냐" 하겠지만,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일사부재리에 해당되는 사안이다. 일단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들어온 것이므로 그 선택한 대로의 결정 그대로 불변이라야 하는 것이지 중도에 변경이 있다면 어찌 법이라는 것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어찌 "자유 의지", "자유 선택"이라는 말이 존재하리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자신께서도 나중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고 한탄하셨지만[창 6:6] 인간 자체를 말소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노아 홍수 당시에도 지상에서 인간을 쓸어 버리기는 하셨지만 인간 존재 자체를 어찌하실 수 없었음과 같다. 역시 일사부재리 차원이다. 악령들의 경우 이미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 있는 상태로서 그와 같은 결정이 난 것은,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이 아니라 아무리 회개할 기회가 부여되어도 그들 자신 회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이미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 악인들이 걸러내지는 과정에 있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므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인들과 '함께' 그런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걸러내지는 작업에서는 앞에서의 설명대로 사단에 의한 시험이 불가피하기에 그러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악령들을 역으로 이용하시는 셈이나 그렇게 역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원할 리도 없는 것이 피조물 고유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부리시지도 않는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들 스스로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달려들어 하는 일을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용하신다는 의미일 뿐이다. 천사들을 하나님이 부리시는 것도 억지로 마지못해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행하게 하심이다. 따라서 악령들에 대해서도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거룩한 천사들과는 반대로 악한 의도이기는 하나] 시키시는 일이니 곧 '시험하는 자로서의 역할'이다.

악령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험의 역할을 통해 얼마든지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그 목적을 위해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역으로 활용하신다는 그 뜻이다. 악령 편에서 보면 자기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요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악령들을 그렇게 "부리시는" 것이다. 사단은 사단대로 자기 일을 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또 허용하셨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간을 걸러내시는[영물들이 그와 같이 걸러져 악령과 거룩한 천사로 나누어진 것처럼] 측면에서 사단을 역으로 활용하신다는 사실을 사단 자신도 아는 터이다.

사단 스스로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단지 하나님을 단순한 능력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처럼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능력으로만 행하신다면 어찌 감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어길 엄두를 내리요. 능력이 아니라 마치 피조물이나 되신 것처럼 오로지 합당하고 사리에 옳은 일만 하시고 무리한 일은 절대로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어느 정도 기댈만한 구석이 있고 승산이 있다고 믿는 고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들을 철저히 그 자유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 인간이 그 스스로 결정하여 믿지 않는 쪽으로 유도하여 자멸의 길을 걷도록 만들면 된다는 그의 판단이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로 하여금 눈멀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스스로 사랑이 없는 까닭에 사랑의 위력이라 할까 혹은 지혜라 할까 그런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깨달으려 하지도 않는 고집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네 힘껏 해보려무나. 너는 처음부터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네 생각대로 결국 해보면 알게 될 것이 아니냐" 하시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나중에 가서 "과연 하나님의 결정이 필경은 모두 옳았습니다" 하게 된다고 해서 자기 운명이 호전되는 것은 아니니,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기고 지는 힘 겨루기 식으로 되는 것은 애초부터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오늘날과 같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나중 영원한 멸망에 들어갔을 때 순수히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음을 이 세상 일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시는 배려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조물을 사랑하시기는 거룩한 천사들이나 악령들이나[물론 범죄하기 전 즉 악령이 되기 전의 이야기나] 인간이나 한결같고 차별이 없다. 누구는 더 여기고 덜 여기는 것이 있으실 수 없다. 모두 스스로가 벌어들인 결과다.

다시 말해 영물들의 경우는 모든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안 다음에 그 자유 의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이는 실례(實例)'이고, 인간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범죄함으로써 야기된 죽음'이라는 비극적 실상을 직접 체험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깨닫고 악을 버리게 하심으로써 스스로의 자세를 잡아 나가도록 하심인데, 이마저 거절하고 주의를 하지 않으니 어찌하랴.

앞서의 지적대로, 한 마디로 이 세상은 인간에게 작업장(作業場)이요 전장(戰場)이라는 의미 외에 또 한 가지 시험장(試驗場)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학생들이 시험과 검정을 치르듯이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가름하는 그런 성질의 의미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목적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생[본격적 삶]에 들어가느냐 그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만 의의가 있으므로, 이 점에 관한 한 아무리 악령이라도 인생의 자유 선택을 손도 댈 수 없음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직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핵심되는 유일무이의 일이고, 믿는 자들은 제대로의 순종 여부를 가름하는 것이 그러하다. 오로지 인생 스스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는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에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의 완전 보장’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킴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라 하면 무조건 인간에 대한 제약, 속박, 부자유 등만 연상하는데 이는 얼마나 부정확한 정보에서 야기되는 그릇된 판단인가.

이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악령 사단이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관심 둘 것은 이 세상에서의 소위 화복(禍福)이 아니다. 영원 세계에서의 화, 복이다. 영원 세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미리 스스로 정하는 때가 이 세상이요 그 기회가 지금 이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생에 들어가느냐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 했지만, 오해하지 말 것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고 나 자신을 구원하기는 하나[빌 2:12/딤전 4:16], 구원은 이미 받은 상태에서 그 받은 상태를 토대 혹은 바탕으로 해서 당연히 지어 올릴 건물을 제대로 지어 올리느냐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받았으므로 그 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된 도리를 제대로 수행하느냐 여부를 묻는 것이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을 그렇게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만드시지를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그것은 육체를 물려주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것이다. 내 영혼이 내 자식에게 물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뿐이다. 따라서 그 '육체'를 두고서 부모자식의 연(緣)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새 창조에서 다시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요 3:3] 하나님과의 부모자식 관계는 육체를 따른 물질 관계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 관계다.

육체의 닮은꼴이 아니라 영(靈)의 닮은꼴 즉 영과 영의 교제 다시 말해 성령과 나의 영혼, 이 둘이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합한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선언한 것이다. 이는 같은 '사람[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니까]'으로서의 횡적인 하나 됨이다. 또한 성령은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니 이는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종적인 하나됨이다[요이 1:9].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하기를 이 둘이 하나 됨에서는 반드시 양쪽이 동시에 움직임이 필수라고 했다. 인간이 육체로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일방적인 내리받이가 아니다. 아들되고 아버지되신다 하니까,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육체로 말미암는 부모 자식 관계로 착각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인간은 아무리 망나니 자식이라 해도 그래서 부모 자식간의 연(緣)을 끊는다 해도 육체적으로는 엄연히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서 상호간의 교류로 '동시에' 움직인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움직임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계속하시고 영원히 그렇게 하실 것은 명백하다. 고로 오직 관건은 내가 그렇게 '따라서 움직이느냐'[요 5:19] 하는 것으로 좌우된다. 다시 말해 나도 주님께서 움직이시는[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하시는] 그대로[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움직이지 않으면 부모 자식의 연은 영원히 끊어지는 그런 특질이다. 그래서 나의 영원한 운명을 내가 결정 짓는다는 것에 아무 하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사랑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일방적일 수 있다. 그런 것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에서 나타나는 본능 작용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미리 장치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엄격히 사랑의 특성에 의해 지배를 받는 까닭에 반드시 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움직임, 즉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그리스도'라는 토대 위에 '나 역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는'[고후 5:15/롬 14:7-9] 건축물을 내 스스로 세워간다는 뜻이 '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나 자신을 구원함'[딤전 4:16]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특성인 것이다. 바로 이 '둘이 하나됨'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처 또는 역사(役事)는 이미 완료된 것이다. 즉 나를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신 그것이다. 이는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몫이 되어 이를 이루셨으니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행 17:30]대로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오직 나를 위하시고 자신을 위하시지 않았던]를 위해서만 살려고 작정할 때 이 새 창조와 다시 남의 은택(恩澤)은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이 최대 관심사다. 모든 것은 나의 태도 여하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성이다. 내가 믿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무리 은혜 일색의 구원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는 죄 용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행 2:38]. 내가 끝까지 순종하지 않고는 내 스스로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자행함이 된다. 이러고서 어찌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랄 수 있겠는가.

악령 사단의 정체를 밝힘에서, 모든 세상 종교의 배후에 이 악령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다보니 다시 종교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신(神)으로서의 악령 사단이 그리스도 구원의 희소식을 희석시키고 혼란시키고 혼잡하게 만들 요량으로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만든 것이 세상의 여러 종교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귀신들이 만드는[딤전 4:1] 사이비(似而非)는 부지기수다.

이런 종교들을 굳이 분류하자면, 유신론[유일신교]에 입각한 것과 무신론에 입각한 것이 있다. 전자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 그리고 유대인들의 고유 종교로서의 유대교 등이 포함되고 후자에 불교와 유교[‘조상 숭배’교(敎)로서 그 특징을 감안한다면]가 있고 그 중간에 잡신들을 어지러이 위하는 힌두교 등이 있다. 유일신교, 다신교, 무신론 등 골고루 빈 틈 없이 다양하게 사단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말 그대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모양새다.

거짓말 또는 속임수는 한계를 모른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유일신을 인정하든 않든 모든 종교의 특색은 의타적이라 했거니와, 그러면 ‘복된 좋은 소식’[喜消息, 福音]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의타적이 아닌가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존하니 더욱 더하지 않은가" 할 것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구가(謳歌)하고 발휘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인간[첫 사람 아담] 범죄하여 스스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 즉 자유 의사대로 결정하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처음부터 죽지 않게 하셨을 것이요 아예 범죄부터 하지 않도록 하셨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말하는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확립되어 있는 창조의 이런 원의도가 변할 리 없다. 하나님의 특성으로서, 거짓말하시지 않고 그 뜻이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시는 두 가지를 지적한 그대로다[히 6;17,18]. 즉 처음 창조와 새 창조의 차이가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은 불변이다. 따라서 아담이 자기 범죄로 스스로 죽은 자가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아담처럼 행동하면 죽음[이제는 악령들처럼 멸망]밖에 없다. 개신교를 세상 종교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이와 같은 명백한 가르침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하나님의 역사로서 은혜[믿기만 하면 되는]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처음 창조와 새 창조를 별개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영물들은 이미 선악간에 구분이 지어진 것이니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과 사단과 같은 악령들로 분류되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정한 것이다. 다음에는 인간이 그렇게 악인들과 의인들로 구분되는 분류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이 이 세상의 의미다. 이 세상의 의미는 모든 인생들을 그와 같이 구분하는 데에 있다. 영물들은 하나님께서 일시에 그런 영적 존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창 2:19] 일시에 그 작업이 완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하나씩 낳고 낳아지는 터이므로 그런 동일한 작업이라도 시간이 걸린다는 그 차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구분된 다음에 각자가 정한 대로 자기 갈 곳, 영원히 항구적으로 처하게 될 곳을 스스로 정한데 따라서 가게 되어 있다. "선을 행하는 자"[롬 2:7,10/요 5:29]는 영생의 나라로, "악을 행하는 자"[:8,9]는 악령들과 함께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다. 영원한 멸망의 경우 그 스스로 정한 것이니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을 원망할 뿐이다. "바깥 어두움에 내쫓겨 이를 갈며 슬피 운다"는 말씀이 그 뜻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없는 회한(悔恨)이요 증오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다. 첫 사람 아담이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죽음에 이른 것을 보았으면 그것으로 우리 모든 인생에게 충분한 경고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그 후로는 어떤 경우에서든 절대로 변경됨이 있을 수 없다.

인생들이여, 다시 말하거니와 지금은 사람 사는 곳도 때도 아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자기 처소를 스스로 자기의 직접 선택에 의해 정하는 때요 그 기회로서의 막중하기가 태산 같은 그런 의미가 이 세상이다. 진실로 "두렵고 떨"[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이 아닌가. 바로 이 선별 또는 분류의 목적 때문에 이 세상이 '잠시' 존재하는 것이다. 영원 세상에 비하면 찰라 같은 한 순간이지 달리 무엇인가. 그러나 그 의미의 막중함을 따지자면 오히려 영원 세상과 가히 맞먹는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고로 이 세상에서 살아 삶의 낙을 누리다가 영생까지 덤으로 얻자는 생각이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믿어보아야 헛믿는 것이니 이 경고를 명심할 일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단독 창조이므로 말 그대로 ‘받고’ ‘얻는’ 것이기에 피동적이요 소극적이지만, 일단 창조되어 "다시 출생한"[요 3:3] 다음에는 당연히 싱싱하게 살아 움직여야 함이니, 하나님께서 '산 자'로 만드신 것이지 '죽은 자'로 만드신 것은 아닌 것이다. 움직여도 "산 자"[고후 5:15]로서 움직이는 것이니, 과거 "죽은 자"[마 8:22]로 지낼 때와 같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 [눅 16:16/마 11:12].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 하셨으므로 그런 적극성과 능동성을 띠지 않는 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에는 예외가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보듯이[눅 8:5/마 13:18/막 4:3], 핍박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이생의 염려, 쾌락, 돈[재리(財利)]의 유혹 등이 있어도 이를 과감히 물리치고, 보내심을 받은[요 20:21/17:18] 바 사명 완수에만 매진하고 정진함이 산 자로서의 마땅한 움직임이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지금까지 사람이 구원을 열망하고 천국 가지 못함 즉 영원히 생명의 낙을 누리지 못함을 슬퍼한 것은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죽은 자요 자기 자신이 벌어들인 죄과로 인해 죽은 자다. 그것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 요한의 때까지다. 분명히 그 경계를 정하셨다. 요한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오셨음을 알린 장본인이다. 따라서 요한 이후로는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기가 펄펄 살아 생명력이 넘쳐 나 밀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사단의 방해 작업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사람마다 그리로 밀고["to press into"] 들어간다"[눅 16:16 ] 하셨겠는가.

불교는 기독교를 인간적 노력이 결여된 전적으로 피동적이고 의타적인 종교라 여겨 자기네의 이른바 "자기 완성을 위한" 힘씀과 애씀을 인간 고유의 자주 독립성에 부합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앞에서 밝힌 대로 세상 종교화한 개신교나 천주교 등의 '성경에 대한 인위적 해석'만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비평하는 것이니, 성경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에서 어찌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오리요. 세상 종교로 타락해 있는 '인위적인 성경 해석으로 만들어진 기독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일이다.

이 세상 끝나면 이 전쟁[사단과의]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인생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고난과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불문가지이니 내 편이 아니면 저 편으로서 중립은 없기 때문이다. 사단과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단 편이 되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전투에 나설 때 소극적, 피동적으로 임하는 군대는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 이루어진 우리 구원이니 악령 사단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명예가 걸려 있는 대판 싸움이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닌가.

성경은 구원 받은 우리가 힘쓰고 더욱 힘쓰라는 경고를 되풀이하고 있다[고후 5:9/벧후 1:10]. "거룩함을 이루는"[고후 7:1] 것이 바로 ‘자기 완성’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은 스스로 자기 완성을 기하라는 경고이다. 이 자기 완성에 이르는 ‘의지(意志)’는 나의 것이지만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전적으로 영역이 다르다. 혼동하지 말 일이다.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서의 능력 구사(驅使)이다.

불교에서는 어디까지나 그 "자기 완성"이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구원에 있고 그리고 자기 능력을 말함이지만, 악신(惡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데 자기 능력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던가.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조종당하는 것뿐이다. 또한 자기가 자기를 위하니 즉 자기중심이어서 자기 구원을 목적하므로 전혀 희망이 없다. 이기주의 즉 자기중심이 모든 죄의 근본임을 모르는 자는 없다. 따라서 죄는 죽음과 불행이요, 그러므로 항구적으로 고뇌와 번민의 늪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본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쓰니 그래서 자기를 위하니 자가당착이 아닌가. 이런 모순도 제대로 분별하는 못하는 터에 무슨 지혜가 있다고 소위 "진리 운운" 하는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일체의 악의 뿌리라고 일단 결론을 내렸으면 일체의 능력을 포기하고 그냥 잠자코 있을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가장 합당하고 논리적인 것은 그냥 열 손 놓고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해 죽으신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 이것 외에는 할 일도 하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다. 이것이 믿고 구원 얻는 것,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얻는 구원의 의미다. 그렇게 마음으로 회개하고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주인, 소유주]으로 시인하여 절대 복종하겠다는 확실하고 굳은 의지 표명을 했을 때 지난 죄의 용서가 되고 생명의 성령을 받아 비로소 산 자로서 움직이게 된다.

그 이전에는 죽은 자로서 일절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터이지만 이제는 산 자로서 삶의 영원한 원리원칙을 따라 즉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따라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되니, 그대들이 힘써 부르짖는 바 "자기가 자기를 위하게 되는" 일체의 악에서부터 완전 자유다. 어느 쪽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무엇이든 바로 알고 판단할 일이지 겉으로만 갉작거리다가 다 아는 양으로 말하지 말 것이다.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득도한 후 자기를 망각하고 철저한 이타주의로 설령 나간다고 해도 첫 시작이 자기를 위함 즉 자기의 구원 다시 말해 성불한다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첫 시작이 그러하니, 그 무엇으로 위장하고 도장(塗裝)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결말로 남게 마련이다. 뿌리가 그러므로 나무도 그러하고 열매도 당연히 그러하다. 처음부터의 시작이 자기를 위함이지 않아야 결실도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상식 수준의 결론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이 아주 말살되도록 미리 구원부터 먼저 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특성이다. 산 자가 무엇이든 하는 것이지 죽은 자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위하든 남을 위하는 일이든 일절 무의미하다. 성경에서 명령하는 '자기 완성'은 따라서 구원 받은 이후의 일이므로 철저히 이기(利己)가 아닌 이타(利他)에 있어 자기 부인에 있다. 성경에 말하는 산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다. 죽은 자의 특징은 자기 중심이다.

구원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시도하는 일이 없었다.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대관절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첫 시작이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었다는 그 뜻이다. 단지 우리가 죽은 자로서 멸망밖에 없는 자로서 일절 우리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 홀로 우리 위해 이룩해 놓으신 구원 즉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희소식에 접하고 이를 큰 기쁨과 감사함으로 "선물"[요 4:10/행 2:38/엡 2:8]로 받은 것이었다.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친히 나를 사랑하심으로 사람되시어 나 위해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이니 이 얼마나 큰 충격적인 사실인가.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바짝 열릴 기문(奇聞)이다. 얼마나 굉장한 희소식이냐. 그래서 믿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한 것이 나의 회개였다. 그리고 받은 바 세례도 회개의 세례다. 즉 회개는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심"[행 3:26]이다.

고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도록"[고후 5:15] 처음부터 그렇게 출발하였으니 불교의 자기 완성과는 뿌리부터 다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고후 5:15/롬 14:9] 곧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자로서, 오로지 머리[하나님]를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써만 완전 무장한 바탕 위에서 '스스로를 가꾸고 다듬는 것'이 자기 완성이다.

이는 당연하니 이보다 더 온전하고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되었을 때 받은 바 '힘과 능력'[곧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그 생명력과 활력을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제대로 올바르게 활용함을 뜻함이다. 내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는데 무슨 내 자신의 것이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 주신 것이 아닌가.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임은 당연하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기본 바탕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타고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단지 먹고 마시고 운동하면 자연적으로 그 원래 태인 힘[능력]으로써 성인으로 성장하는 터이다. 그 능력이 아기 자신의 힘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다시 출생할'[요 3:3] 때 모든 필요한 능력을 다 받아 난 것이니 어찌 내 힘이고 능력이던가.

그러나 아기가 스스로 먹고 마시고 뛰고 굴려 운동하듯이 내 스스로 움직여야 함이다. 이 움직임이 바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이다. 육체로 태어난 아기는 물질에 속한 육체이므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며 성장하지만, 우리의 '다시 남"[요 3:3]의 경우 내 스스로 나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마 7:21]으로써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오직 유일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자력(自力) 구원 또는 갱생(更生)은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인과론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까닭이다. 분명한 논리가 서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오직 횡설수설일 뿐이다. 이 글에서 개신교보다 불교에 대해 더 비판적인 것은 불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好感) 때문이다. 자신의 미망을 깨닫고 하루 빨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기대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들은 상식을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주 비상시적이기는 하나] 양심의 판단을 억지로 억누르려는 일은 최소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상식대로 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양심까지도 헛된 인위적인 교리를 내세워 마비시키고 있으니 그 심각함이 보통이 아니다. 스스로 하나님도 알고 그 말씀에 통달해 있다고 자부하므로 쇠귀에 경 읽기로 무관심과 냉담으로 일관하지만, 불교도들은 새롭게 대두되는 하나님의 실존과 이와 관련된 경각심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기에 그렇다. 개신교는 완전히 비뚤게 나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형통한다는 따위의 정신 나간 미신에 젖어 있지만 불교는 적어도 그런 미망 속에는 있지 않음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에 인간고와 무상 곧 모든 것이 덧없음을 말하지 않는가. 세상이 고해임에도 이를 아랑곳 않고 자기만은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개신교일진대 그런 지독한 이기주의도 없다. 기독교[특별히 개신교] 외의 세상 종교는 최소한 그런 말은 할 수 없는 양식(良識)은 있는 까닭이다. 기독교도들보다 더 양심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개신교도들은 무턱대고 용서만 받으면 되는 일이라고 양심의 가책마저 무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십일조 내면 축복 받아 형통한다고 믿으니 그런 미신이 없다. 그런 십일조 등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대한 예습(豫習) 정도로 미리 맛보기로 나타내신 모세 시대의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대로 하면 1/10만 하나님 것이 아니라 10/10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이니 내 것은 없다[롬 14:7-9]. 내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 속한 일체의 것'이다. '결국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할 것인가. 천만에, 하늘과 땅 차이다.

나와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 내 것으로 여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누가 나 위해 살아 주느냐 하면 바로 나와 하나 되신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다. 나를 지으셨으므로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시고 나 자신보다 더 잘 아시니 그 아시는 것을 토대로 나를 위하시니 얼마나 완벽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하시랴. 하나님의 모든 능력으로 나를 위해 주신다. 어느 쪽이 비중이 큰가. 어느 쪽이 막강한 가치인가. 어린 애라도 답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라는 뜻이니,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존재하시고 그리하여 내게 필요한데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내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갖다 쓰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기는 그 자신을 위할 줄 모르나 엄마가 아기를 위함에서 아기 자신보다 더 잘 알아 아기를 위해 주는 바로 그런 이치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엽총을 아이가 마음대로 가져다가 장난감으로 여기듯 갖고 놀 수 없음과 같다.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위해서 꿩과 같은 것을 엽총으로 쏘아 고기를 장만하여 아이를 먹이도록 되어 있는 그런 이치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라고 설명한 대로, 아기 스스로로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엄마가 알아서 다 챙겨 주고 처리해 주는 그런 관계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마왕(魔王)으로서의 사단을 인정하지 않기는 천주교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 사단을 부정하고 있으니 이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불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불교는 마신(魔神)을 설정해 두고 있기는 하나 그 마왕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니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라고 진상을 밝혀 주는 성경적 사실에 대해 무식하기는 일반 기독교와 똑같다.

말로만 하나님을 인정하면 무슨 소용인가. 저쪽은 몰라서 그렇다지만, 오히려 이쪽[기독교]은 하나님을 안다면서도 그러하니 해독은 이쪽이 더 크다 할 것이다. 사단이 이 세상 신이요 왕이라는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증거 중의 하나가 교회 건물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 올리는 추태다. 그리고 잡다한 교인 수를 자랑한다. 추태라기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고 사단에게 속해 있다"고 자랑하는 정도가 되어 있다.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데 그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진실된 것이라면 사단이 그렇게 방치해 둘 리 있겠는가 생각해볼 그런 양식(良識)조차도 없다. 양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믿음이 없다. 자기 목적에 전혀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창성하도록 사단은 버려 두는 것이다. 천주교가 한동안 과거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해 있었던 것도 사단을 이 세상 지배자로 믿지 않았다는 의미다.

바로 그런 것이 그 "증거"다. 내용이 없을수록 겉은 언제나 번지르르한 법이니 고금을 막론하고 이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개신교라 할 때는 전체의 개신교를 말하지는 않는다. 개신교라 분류되는 것으로서 극소수지만 개중에는 그래도 온전한 진리를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고난 받는 북한 교회가 그 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 교리 자체가 마리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에, 전체가 예외 없이 그러하다.

왜냐면 마리아를 의식하고서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실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절대로 그런 자리에 임하실 까닭이 없다. 마리아와 그리스도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 천주교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다고 해도 마리아를 버리지 않는 한 그 구원은 실상이 아니라 오직 허상일 뿐이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으로서, 인간의 양식(良識)과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선과 악을 분별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인간은 예외없이 그 양심이 작동(作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로서 그 양심대로 얼마든지 행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자기 부인이 한 몸으로서의 삶의 구조에 필요불가결함을 알고, 이를 사랑하여 자진 자발적으로 양심을 따라 살고 행하도록 함에 있는 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짝

그리스도와 짝이 되어 있는 "새 사람"[골 3:10], 새 인간으로 다시 출생하면, ‘나’라는 한 짝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짓눌리고 빠개지고 찌그러져도 불에 타고 물에서 썩고 별의별 짓을 다 당해도, 그 상대인 ‘또 하나의 남은 짝’이 계시니 하늘에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이 되어 건재하는 까닭에 ‘나’라는 존재는 절대로 멸해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그 '나머지의 내'[그리스도]가 뿌리되어 결국 다시 소생하고 영영 창성 형통하는 것이다. 죽어도 당연히 부활이다.

하늘의 또 하나의 나 자신 곧 짝이 완전무결하게 보전되어 있는 까닭에 불사(不死), 불멸(不滅), 불패(不敗), 불퇴(不退), 그 무슨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유감없이 다 들어맞고도 남는다. 신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둘이 하나 됨’의 조화, 합력, 둘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 최고도의 지혜, 최고조의 원기(元氣), 그 이상 무엇으로 표현해도 좋다. 그 ‘나머지 다른 한 짝’이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경에도 이 ‘둘이 하나 됨’에는 미치지 못해도 '둘이 함께 함'의 지혜를 솔로몬의 지혜[이 지혜는 하나님 주신 것이다-왕상 4:29]를 통해 높이 기리고 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들의 [함께 한] 수고가 좋은 보상을 얻을 것임이다. 혹시 저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는 것이니 3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전 4:9-
12] 함과 같다.

솔로몬왕의 결론이니, 하나님 주신 지혜로 모든 것을 통찰함으로써 내린 진리다. 그러나 이것은 둘이 함께 함이지 둘이 하나 됨이 아니니 '둘의 하나 됨'이야 더 기막히게 좋은 것은 물론이나 반면에 또한 엄정한 법칙 가운데 운용됨을 알아야 함이니 곧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 즉 '동시에 함께 움직임'이다. 일방적으로 움직여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내 스스로 움직여야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게 되어 있음을 부디 명심할 일이다.

바로 이런 ‘둘의 하나 됨’을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하사(下賜)하신 하나님의 사랑인데 어찌하여 이 사랑을 마다하고 손사래 치고 영원 멸망을 자취하려는가. 굴러 들어오는 복을 내 스스로 발로 차 버리려 하는가. 이 복된 ‘둘의 하나 되는’ 관계로 만유(萬有)가 구성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인간 생애의 법칙[삼운(三運)법칙, trini homo]이 그 원리를 직접 증명하고 있음을 앞에서 밝혔다. 이 둘이 하나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골자이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살고 영원히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다.

만사가 인식 변화 하나에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
로 된 정확한 정보에 목말라 해야 그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 그 정확한 정보 하나면 온 천하를 얻음과 같이 된다. 여기서 옛 것에 연연하여 미련을 두고 과감히 새 정보에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하는 나태(懶怠)와 관성(慣性)은 치명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고질적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고 악령(惡靈)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라는 새로운 정보에 접했으면 그 진실성과 확실성 여부를 철저히 분석 검토한 후 결정적인 하자가 없으면 곧 이 지식을 따라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옳다.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정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노력 없이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 하는 것은 감나무 아래 누워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림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름아니라 나와 불가분의 ‘또 하나의 나 자신’이신 것이다. 곧 ‘둘이 하나 됨’의 의미다. 먼발치에 두고 감상하는 것도 아니고 액자에 걸어두고 보는 영상도 아니다. 나 자신의 생명이시고[골 3:4], 동시에 그 방법[the way]이시고 따라서 진리[the truth-요 14:6]시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라도 관심을 가짐이 마땅하다.

그러면 멀찍이 액자에 걸어 두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로 내 안에 계셔 나와 하나 되어 내 '영혼'처럼 계시고 그리고 나의 '주인[소유주]님'으로 계심이니, 주인은 종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므로 항상 곁에 놓아두는 법이다[시 123:2]. 또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나를 섬기시고 위하시는 위치에 계신다[눅 22:27]. 즉 나를 주인처럼 대하심이다. 엄마와 아기의 관계가 그 증명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소유'의 개념이다[아가서 6:3/2:16/7:10].

그래서 주님 친히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고[요 4:10/행 2:38] 그리고 동시에 나를 자기 피로 사들이신 것이다[행 20:28/게 5:9/고전 7:23]. 그러나 이 사실은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그렇게 주님[주인, 소유주, 상전(上典)]께 드려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강제가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된다 함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과 직결되는 것을 성경은 강조한다.

엄마와 아기

이렇게 항상 내 눈은 주님께 향하여 있고 주님의 눈은 내게 향해 있으시니 이는 엄마와 아기 관계다. 바로 이런 관계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 품속에 있음을 가리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하였다.

품속에 든 아기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이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표현이다.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번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히브리 말을 영어로 하면 "be silent"라고 하니 우리말 번역이 원 뜻에 가깝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젖을 먹든가 잠이 들었든가 그렇게 자기 품속에 있는 아기를 사랑에 겨운 눈길로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노래하신다"는 대목이다.

"노래한다"는 것과 "잠잠하다"는 것은 서로 맞지 않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조화시키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는 광경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만물을 지으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신 아들께서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 했으니, 하나님의 품성으로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이신 것이다. 즉 주님 역시 아기를 품속에 안고 계시는 엄마의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심이다.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의 눈을, 엄마의 눈은 자연스럽게 아기의 눈을 서로 맞추게 되어 있다. 이를 가리켜 말한 대목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데 즉 베드로는 "다윗이 그[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 하였다"[행 2:25] 했으니, 이는 다윗의 시편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시 16:8]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나, 성령 충만한 가운데 이렇게 인용했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그 정확한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의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 갑이 을을 위할 때는 갑이 주체(主體)이고 을이 갑을 위할 때는 을이 주체라는 사실을 밝히심이다. 즉 갑이 을을 위할 때는 갑이 종으로서 을을 주인으로 섬김이요 을이 갑을 위할 때는 을이 종이고 갑이 주인됨이다. 따라서 다윗은 성령으로 '내가 주님을 위하고 섬김'을 나타낸 것이고, 베드로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고 섬기시는' 사실을 역시 성령으로 적시한 것이다.

이 둘은 상반되는 것 같으나 '짝의 원리'에서는 완전 조화 통일되는 하나의 의미이니 곧 삼위일체의 이치 그대로다. 삼위일체 원리라는 것은, '서로 상반된 둘'이 '하나'로서 통일 조화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 지으신 만물 만상에 적용되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주님을 내 앞에 모심이니 주님을 위해 살고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다. 내가 이렇게 함과 동시에 주님은 주님대로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일체의 것을 행하시고 내게 관련된 일체의 것을 이루시는 만반 태세로 임하여 계심이다.

이 비결, 이 비밀을 알고 이 이치를 따라 존재하여 생활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으로 인한 나의 일상 삶인 것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이는 다시,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내 속에 생명이 없다[요 6:53]는 사실로 이어진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54,55] 하신 그대로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자체가 무한한 생명의 낙이다. 이 양면의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즉 내가 기꺼이 다시 말해 생명의 낙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섬기지 않으면 나는 구원 받지 못한 증거가 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 없이 그래서 그 사랑의 평안과 기쁨에서 우러나는 것이 없이 그 어떤 순종도 순종일 수 없고, 따라서 "율법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함"이 되는 까닭이다.

사랑 없이 둘이 하나 될 수 없는 까닭이니 나의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을진대 이는 당연하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 그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아담이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였다면 그 말씀을 무시할 리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이 나를 사랑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을 경우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 지경으로 죽음에 처했으니 여기서 구원될 때는 아담처럼 하지 않아야 함이 당연 사리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엄마와 아기 관계라고 했거니와 엄마가 일방적으로 아기를 안고 있으니 일방적이지 않으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 울어 버림으로써 엄마의 존재가 자기에게 절대적임을 충분히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즉 '먹을 양식, 마실 음료'로서 절대 불가분이고 항상 찾고 구하는 것이고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함이 엄마에 대한 아기의 인식이요 사랑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경에 "사슴이 시냇물을 갈구하는 것처럼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였다[시 42:1]. 물로 된 육체[70%가 물이다]가 물을 찾듯이 "성령으로 난[출생한]"[요 3:5,6]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아기의 그런 본능은 말 그대로 본능으로서 이기주의적 성향인데 거기에다 강조해서 비유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하겠으나,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고 경고하신 것처럼, 이기주의의 특성은 자기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데에 있다. 아기는 자기 선택이고 말고 할 그런 처지가 아니다.

이해 타산이 아닌 무조건의 '하나' 의식이다. 엄마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동일체로 간주함이다. 엄마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절대적 신뢰다. 이 신뢰, 믿음에서 자기 부인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줄 믿기에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물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명분도 이유도 없기는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기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엄마를 그와 같이 대한 그 마음으로 다른 이들도 엄마처럼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엄마처럼은 생각하지 않으나 엄마를 대하던 그런 신뢰로 대한다는 데에 있다. 즉 '우리' 의식이다. 모두를 엄마와 같은 사람으로서 여기는 감정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 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자기가 선택한 그 한 대상자에게만 한하지 '우리' 의식이 없다. 다시 말하면 아기는 엄마에게서 사랑을 배웠고 그 배운 사랑 그대로 엄마 외의 다른 사람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대로 따르고 의심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상대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자기중심의 이해 관계 없이 사랑하라는 것이다[요 13:34]

어떤 왕이 그 신하 중 일만 '달란트'[당시의 화폐 단위]라는 거액의 빚을 진" 자 하나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더니 그가 나가서 역시 자기에게 빚지고는 갚지 않고 있는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는 등 행패를 부리다가 사정을 봐 달라고 애걸하는 것도 무시하고 옥에 집어 넣어 버렸다. 이 일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노하여 그 신하에게 탕감해 준 것을 당장 취소해 버리고 그 신하를 그 스스로 한 것과 똑같이 역시 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경고하신 것이다[마 18:28].

왕의 일거수 일투족이 중요한 것은, 그가 한번 결정한 것은 그대로 법이 되어 변경되거나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인데[단 6:8], 그렇게 결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공공성을 띠고 있어 그 권위가 인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왕이 그 신하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그 신하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 국태민안을 꾀하자는 것인데 이 목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렇게 탕감 받은 것은 취소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기를, 한번 정하시어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구원은 영원 불변이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그리스도께서는 이상 비유 말씀으로 명백히 하신 것이다. 죄 용서[구원과 직결되는]가 취소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도록 하심인데[고후 5:15/롬 14:7-9] 그렇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아"[고후 5:15] "육신 가운데 사니"[고후 5:15] 자기 부인이 없으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 되어 자연 "멸망"[:19]밖에 없는 것이다.

한 하나님"(이는 '한 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둘로서 하나로 계시는')이 지으신 세계의 세상사인즉 모두가 그렇듯이 공짜는 없다. 거저 먹기로 달려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진리를 그리스도께서는 "예복(禮服)"[마 22:11,12]의 비유(譬喩)로 말씀하셨다. 일반적인 개신교의 폐단은 이 '거저 먹어 주자'는 데에 있다. 임금의 잔치 음식만 먹겠다는 욕심에, 왕궁에서 마련해 놓은 예복을 입는 것도 우습게 여긴 탓에 결국 잔치 집 진수성찬도 맛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서 무슨 대가(代價)를 바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영원한’ 엄마와 아기 관계다. 만유를 지으신 아들까지도 "아버지 품속에 계심"[요 1:18]으로 묘사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누구나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신 말씀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아기를 위해 전적으로 모든 것을 다해 주는 엄마의 마음은, 아기가 엄마 시키는 대로 따라 주기를 바라는 오직 그것밖에 없다. 엄마가 아기에게 시키는 것은 모두 아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명과 분부가 그러하시다. 단지 아기가 약을 먹어야 할 때 그 약이 쓰다는 이유 때문에 안먹겠다고 앙탈부리는 때가 있는데, 그러나 엄마의 사랑을 알고 엄마를 신뢰하고 꿀꺽 삼켜버렸을 때 그 쓴 맛으로 인한 그런 고통과 같은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바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고난이다. 사랑에 의한 우리의 무조건적인 순종이, 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을 경우 이를 우리가 기쁨으로 견디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끝난 다음에는 엄마가 아이의 눈물을[쓴 약을 삼킨 고통으로 인한] 닦아 주듯이, "보좌(寶座, 옥좌, throne)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들의 목자(牧者)가 되시어 생명수(生命水) 샘[泉]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계 7:17]. 이 위로는 영원무궁하다. "위로"를 논하건대, 이 세상에서 모쪼록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기를 도모하여 고난을 기피하려는 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은 터이므로 더 다시 영원 세계에서는 받을 위로가 없다고[눅 16:25/6:24]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셨음을 우리 모두 명심할 일이다.

이는 굉장히 무서운 내용일 수밖에 없다. 사단과의 전쟁에 임하는 군인으로서 전투 현장에서의 안락을 생각하는 것은 군인으로서는 한마디로 무자격자다. 그럴 경우 패배뿐이다. 사단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는 우는 사자 같이 기회만을 엿보는[벧전 5:8] 자인즉 이미 그는 사단의 표적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안락을 꾀하는 것부터 완전한 자살 행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인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과 ‘죄된 이 세상’의 형벌의 모습이다. 이를 미리 보여 주신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는 장차 임할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길을 찾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부활을 '나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으로 수용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믿음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렇게 우리 위해 죽어 주셨으니까 나는 그 대신 거기서 모면하고 면제되고 제외된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살리시는 방법을 우리는 여기서 터득함이니 곧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죽은 자로서의 죄인을 산 자로 만듦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밝히심과 더불어, 그 고난 받으심 자체가 우리의 구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우리가 이로써 보는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세상에 남아 사람 구원하는 일을 주님과 더불어 수행할 때, 반드시 이런 고난을 통해 이 사람 살리시는 하나님 일을 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이러한 고난 받음 자체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이 고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내 죄를 위한 형벌로서의 고난 받음은 물론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치러졌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 죽으심이 나와 함께 죽으심의 의미이기에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의 고난을 이미 거친 것이다. 고로 이제부터 내가 받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어 머리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수행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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