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나처럼 막차 떠난 다음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소용 없네" (24)

"나처럼 막차 떠난 다음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소용 없네" (24)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예를 들면 히틀러, 스탈린, 갖가지 흉악범 등]을 만들었는가? 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


이회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찌하여 인간에게 고통, 불행, 죽음이 있는가" 하였다. 현재 인간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양심대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눅 18:19] 하신 대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뜻이다. 죄인이므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형벌밖에 더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하게 되어야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요일 2:29/요삼 1:11]. 그렇지 않고는 모두가 다 죄인들이므로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뿐이다[요 3:36/롬 1:18/골 3:6].


이회장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면"이라고 전제했는데, "그러니까 즉 불행, 고통, 죽음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가 있느냐", 또는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등의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과 ‘인간고(人間苦)’와는 아무 유기적 관계라고는 없다. 오히려 이 ‘인간고’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확증된 것이다[롬 5:8]. 즉 인간은 자기 잘못[생명의 법질서를 어긴 결과]으로 죽음을 자초하였기에 당연한 보응을 받지만 하나님은 이 일에 아무 관계가 없으심에도[하나님의 실수도 잘못도 아니므로] ‘인간고’에 함께 뛰어드신 것이니 이는 오직 피조물 인간을 사랑하시어 그 죽음의 고통 고난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사랑은 하나 됨이다. 하나로 통해 있으므로 인간의 고통이 인간만의 고통일 수 없고 끝날 수가 없다는 의미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우리를 몸으로 간주하시니 머리되신 위치에서 몸의 고통을 외면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은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하시고자 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한 몸의 이치를 따라 만드셨고 모두 이 한 몸의 이치를 따라 살도록 하셨다.


따라서 이 한 몸의 이치대로 살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용납될 리 없다. 범죄(犯罪)는 이 한 몸의 이치대로 살지 않고 행하지 않음을 가리킴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함,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함이요, 범죄의 대가가 죽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생명은 한 몸의 체제에서만 가능한데 이를 부정하니 그 결말은 당연히 죽음이다. 모름지기 생명은 한 몸의 이치대로 사는 것으로 정하신 까닭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필 때 인간이 자기 허물로 죽음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이 이를 도외시하실 수 없어 하나님 친히 이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신 것은 일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사랑은 어디까지나 자유 선택의 영역이므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시지 않으면 않을 수도 있음이니 그 어떤 무엇이 억지로 강제하지는 않는 것이기에 그렇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시어 인간의 고통에 동참해 주신 것이다.


피조물이 피조물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조물주 하나님으로서 친히 그 피조물 중 하나같이 되심으로써[인간이 되심으로] 당하시는 고통이라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신다"[to compel-고후 5:14] 하였다. 이래서 하나님의 한량 없으신 은혜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이상 가는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그대로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의 결과가 되어 있느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우리 산 자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사는"[고후 5:15]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불가항력으로 강요, 강박해 오지 않을 때[그리스도께서 나를 강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사랑이 나 자신을 그렇게 강제하는 것을 말함이다] 나는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을 입증함이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나를 강박한다는 의미이니, 누가 나를 억지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그와 같이 항거 못하도록 이끌리는 것을 말함이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그 사랑을 온 몸으로 느껴야 나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사랑해도 내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그의 사랑은 영원히 불발로 그치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것이 사랑으로 우러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니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자진 자발적인 절대 복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제 더 다시는 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나 순종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면 내가 이미 구원 받은 위치에서 나타내는 나의 사랑이요 순종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화답하고 반응하는 것이니 아무리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박해와도 내 스스로 그 사랑을 수용하지 않으면 즉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강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억지로 '네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해서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스스로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야 '구원 얻는 믿음'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될 일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기뻐서, 하지 않을 수 없어 하는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 것이다.


먼저, 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지 그 자초지종부터 생각할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절대로 자기 부인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역대 믿음의 거장(巨匠)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스스로 자기 부인을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끝까지 그 충절을 지킨 이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이제는 순교(殉敎)라 할 것이 아니라 순절(殉節)이라 함이 온당할 것이다. 종교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상대는 종교나 어떤 교리나 우리 자신의 신념도 아니고, 오직 살아 계시는 나의 사랑이시요 생명이신 '사람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니 곧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라"[행 3:26]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을 얻어 산 자가 되는 것이니 죄 용서 받고 성령을 받아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죽은 자"[골 3:3]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죽은 자"[마 8:22]로 있었던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의미다. 그러면 이 차이는 무엇인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라 할 때는, 첫째 이런 한시적(限時的)인 목숨의 자연계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신령한 세계에서 살아야 하고, 둘째는 모든 이웃들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구조와 체제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다시 말해 자기 부인 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인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지 못한 처지이므로 죽음의 세계요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 사단이 "죽음의 권세를 잡고'[히 2:14]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세상에 있어도 '산 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왜 그런가.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이 세상에 처해 있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조화되는가. 간단히 답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산 자'이고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죽은 자'다.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으니 '죽은 자'요, 영원히 '산 자'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으니 당연히 '산 자'이다.


이것도 양면성의 이치로 설명해야 할까. '죽은 자'이므로, 이 세상에서 산다는 착각을 하지 말 일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 곧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생명을 잃게 되어 있다[요 12:25]. 또 '산 자'이므로, 죽은 자의 행세를 하면서 죽은 자의 자리에 있지 말 것이다. "죽은 자의 행세"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이다. 그리고, 산 자이지만 죽은 자로서의 모습을 갖춤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 세상에서는,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산 자'가 되는 것에만 의의가 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도 이 세상이라는 죽음의 환경에 처해 있는 만큼 여전히 죽은 자이므로, '산 자'로서의 삶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 자로서 죽음의 고난에 위치하여'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참예(參預, 參與)"[골 1:24/히 3:14]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부활에 이를"[빌 3:10,11] 수 있음이다. 이는 당연하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으므로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양을 이루기 위함이요 같은 본질이 되어져야 함이다. 같은 모양, 같은 본질이 되어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일 곧 남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하는 것이다[골 3:3].


그런즉 내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다른 사람 역시 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구원되도록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산 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의미이다.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이다.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니[이 실상을 알지 못하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처럼]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엄한 경고를 내리시고 있다[요 12:25]. 그리고 이렇게 구원의 희소식을 세상 끝까지 다 전파하게 되면 세상은 더 지체할 필요도 없이 곧장 끝나게 되어 있다[마 24:14]. 

다가오고 있는 적 그리스도의 한 때

그리고 무릇 구원을 받은 자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이 세상의 핍박의 표적이 되어 있다.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가 되어 있는 까닭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모든 가능한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는 때로서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적 그리스도의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니"[계 13:16,17]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굶어서라도 죽게 되어 있는 터이다.


인체[오른손이나 이마]에 '바코드(bar code)' 같은 칩을 저장하게 만들면 얼마든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사단이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물론 때가 아니어서도 그렇지만[살후 2:7], 지금까지 세상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이 구원과는 상관 없는 인간이 만든 교리를 믿어 사단이 굳이 그런 수단을 부리지 않아도 인간 구원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마 18:3] 않는 한은 전반적으로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인간의 가르침을 더 믿으니 어찌 구원이 되겠는가. 그래서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으니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그렇게 된다. 고로 지금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로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전파되는 때다[계 14:7]. 적 그리스도가 임할 때쯤이면 지금과는 달라서 성경을 찬찬히 읽어봄으로써 진리에 깊숙이 들어가기가 엄청나게 힘들 정도로 모든 환경이 조성될지도 모를 일이다.


기회는 지금 이 때뿐이라고 단정해도 하자는 없다. 절대로 어영부영 시간을 허비하는 일들을 하지 말 것이다. 생각하건대 적 그리스도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악령 사단에게 속한 "네피림"[창 6:4]이 구원의 가망이 없는 것처럼 앞으로 자식들을 낳아도 구원될 수 없는 "네피림"처럼 되는 그 어떤 특질을 받아 타고나는[아담의 씨(seed)라도 악령들의 씨(후손)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이후 믿고 구원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고 완전히 단종(斷種)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대로, 최후까지 구원 받을 사람은 다 구원이 끝나고 오직 세계는 그 끝 날만을 기다리게 된다. 적 그리스도 치하에서 믿는 사람은 다 희생되었고[계 13:5] 오직 그리스도의 천년 간의 통치 기간에 인간의 씨를 퍼뜨리기 위한 극소수만이 적 그리스도의 핍박을 피하여 살아남아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살전 4:17]. 이사야의 예언에 그 때쯤 되면 인간이 극히 희귀한 보석만큼이나 될 것이라고 한 그대로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 살아남은 자들"[살전 4:15]이라 했다 해서 바울이 그 때까지 살 것으로 또는 바울 생전에 그런 일이 있을 것으로 잘못 인식했다 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앞으로의 일을 그렇게 예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다 하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이다. 실상 그 때의 "천년"이라는 것은 아담 이후 인생들이 노아 홍수까지는 거의 천년 가까이 모두 살았으므로 현재의 우리에게는 긴 세월이지만 당시의 수명(壽命)으로 친다면 불과 한 세대[약 30년] 남짓한 것에 지나지 않을 그런 햇수이다.


"만유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일련의 비정상 상태로서의 역사적 진행이므로,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결국 정상 상태[영원한 생명체로서의 범죄 전 아담의 모습]로 복구되는 과정으로서의 단계를 밟아감이라 할까. 이 "천년" 기간에는 "네피림"은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때는 적 그리스도와 함께 빠짐없이 다 영원한 불 못에 영원히 유폐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인간 삶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삶의 낙을 누리는 사람은, 내일도 기약 못하는 하루살이 같은 이 세상 삶 다음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고 오직 이로써 모든 것은 끝나게 되어 있다[눅 6:24]. 이 세상에서도 살고 영생도 누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 삶을 미워하고 영생을 얻든지 아니면 이 세상 삶을 사랑하고 세상과 함께 멸망하든지 양자 택일이다.


 세상 삶을 미워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정상적인 인생 삶인 것처럼 인생들을 기만하는 사단과 그 소행을 미워함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악령 사단을 따름이 되는 까닭이다.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셨다[요 12:25]. 오직 이 세상의 의미는 "회개하는" 데에만 있을 뿐이라고 확신하는 데에서는 일절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요 미워하는 사이에서는 전쟁만 있고 이기는 것에만 의미가 있다. 사단과의 전쟁이요 그래서 구원 얻는 사람을 이기는 자로 표현하고 있고[계 2:7,11,17,26/3:5,12,21/21:7]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군인[soldier]"으로 묘사하는 것이 성경이다[몬 1:2/딤후 2:3/딤후 2:4/엡 6:11-13].


이 세상은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다. 자기 중심으로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는 왜 그러면 자기 중심이 되어도 살기만 잘 사느냐 하면 특정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강제력이 발동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중심으로 살아도 형통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여 악인들을 걸러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모든 이들을 추려내고 솎아내기 위한 목적이다.


함정이고 덫이고 올무이다.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서만 강제하시지 않을 뿐이니 왜냐면 이것이 정작 모든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의미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한 자를 걸러내는 목적만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은 빠짐없이 다 구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상은 이런 모든 죄악상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상인 양 굴러가고 있는 것을 한 시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삶이란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체제에서 머리를 위하고[머리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주시니까]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된 이웃을 위하는[그 이웃이 같은 이치에서 자기를 위해 주니까] 따라서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그것이 사람이 "산다"고 말하게 되는 "삶"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 아닌 자기 중심은 하나님 지으신 이 세계에서 처음부터 발붙일 수 없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사단에게 "넘겨진[delivered]"[눅 4:6] 것이므로 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터이다. 고로 사단을 미워하면서 이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살려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런 것 없이 무슨 맛으로 살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는 사단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구적이어야 가치가 있는 '진짜'인데 내일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만 통하는 것이므로 '가짜'다. 신기루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게 된다. 사막의 신기루는 실제가 아니면서도 실제처럼 눈에 비쳐지는 것을 말함이다.


우리의 이 인간고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고난[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 받으심은 그 특성상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된다. 왜냐면 인생들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죽음의 고난 한 때뿐만이 아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여 믿는 이들을 죽이기도 하고 괴롭히려고 설칠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다. "왜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말씀만 그렇게 하심이 아니라 실제 자기 교회와 하나 되어 계시므로 현실 그대로의 실상을 말씀하심이다.


우리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골 1:24]에 즐겁게 동참함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억지로 고난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이는 억지로 자기 부인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다. 이는 믿지 않음을 여실히 나타내는 증거다. 자기 딴에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을 속임이다. 그래서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골 1:11] 되기를 기도한다 함이다.


왜 믿음이 없는지 그것부터 만사 젖혀두고 정리할 일이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지 생명은 아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고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했으므로 아직도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 몸된 교회가 그러한 고난 가운데 있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와 불가분으로 하나 되어 계심으로써 동참하시는 까닭이다.


살으셨으나 죽음의 고난 가운데 계심이니 이는 당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실 때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으므로 산 자이셨다. 그러나 인간의 죽은 자로서의 육체를 입으시고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므로 완연한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셨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요 20:21,22/17:18].


그래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가운데 있지만, "죽었고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골 3:3]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고후 4:12]고 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한다"[고후 13:9] 함과 같다. 다시 말해 '산 자[구원 받은 자]'로서 현재 죽음에 처해 있는 우리의 고난 받는 실상은 죽은 자를 살리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는 등의 생명의 역사(役事)를 위함이니,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구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영역인 고난 받음 곧 약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그렇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나, 물론 우리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산 자로서 그와 같이 일부러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니, 생명의 일은 반드시 산 자의 역할이지 죽은 자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 죽은 자는 자기 자신 사는 것부터가 시급한 일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산 자'로서 세상에 보내심 받는 의미가 되는 것이니, '산 자'가 생명의 일을 하는 것이지 '죽은 자'가 생명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스스로 [죽은 자로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즉 산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냐면 구원은 나 자신 구원 얻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다른 생명 역시 구하는 일로 연쇄 작용을 하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심에 들어오신 이치와 같다.


산 자로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산 자로서 죽음을 자취함이니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에 참예함이다. 모든 인생들은 다 죽은 자인데 그리스도 홀로 산 자이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는 산 자로서의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십자가에 나아가실 때도 "나의 평안과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산 자로서의 한량없는 기쁨과 평안이셨다.


이는 아버지와 하나 되심으로 인한 결과이니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 산 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한 산 자로서의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는 것은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임과 동시에 우리는 '죽은 자'의 모습을 하고 있음이니, '죽은 자'가 되어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할 것인가.


따라서 무릇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모습을 띠는 것이므로 필연코 죽게 되어 있다[요 12:25]. 살고자 하는 자는 믿음에 있지도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형통하고 잘 산다고 가르치는 것은 '죽은 자'들의 교리(敎理)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 삶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이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결코 개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고 모두는 같은 형제들로서의 대가족이다. 이러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한 이름을 주신 아버지"[엡 3:14,15]시라 하는 것이다. 한 아버지시니 자식 사랑은 똑같으므로 모든 면에서 누구는 낫고 누구는 못함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똑같은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북한에서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평생토록 고난 중에서 지내는데 남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믿는 이들이 유복하게 산다", 이런 형평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론은, 남쪽이 그런 "복을 타고난" 이들은 실제는 복이 아니라 저주이니[눅 6:24,25/16:25] 왜냐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체제에 들지 못하여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이 아니라는 증거이기에, 따라서 같은 믿음의 식구일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됨이다.


이 사정은 시공간으로 두루 통한다. 즉 바울 사도가 당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편단심으로 믿은 후의 여생을 고난 받음으로 시종했으니, 내가 만일 바울과 같은 고난의 삶이 아니라면 바울과 나는 아무 연대도 없고 같은 소속이 아니다. 바울이 믿음이 좋았다면 나는 그 반대로 믿음이 없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바울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바울 사도야말로 당시 세상에서 일등부자로 살았을 것이지만 오히려 정반대로서 시종일관한 생애였다. 바울은 우리의 지체된 이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되시니 한 몸의 이치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내가 핍박을 받았으니 너희도 핍박을 받으리라"고 이미 선언해 놓으신 것이다[요 15:20]. 반드시 바울과 같은 분량으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고난 받는 본질이 같다는 것이니, 은혜 주신 분량을 따라 바울보다 더 심하게 받을 수도 있고 보다 못하게 받을 수도 있으나 전적으로 머리되시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바다.


이 하나 됨을 인한 한 몸으로서의 삶의 구조는 우리 각 사람 개인별로 보면 당연히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지체(肢體)로서의 모습이니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와 그리스도 관계는 머리와 몸[의 지체]의 관계다. 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으므로 전제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있는 교회의 한 구성원이다. 따라서 나 개별로 보아서도 한 몸이요 전체로 보아서도 한 몸 관계다.


때문에 교회라는 개념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여럿이[둘이든 셋이든 또는 여럿이든] 한 몸으로 구성되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외에는 달리 필요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인식하는]이 두 셋만 모여도 교회가 된다[마 18:20]. "내 이름으로 모인다"[:20]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교회로서 모이는"["to come together as a church"-고전 11:18] 것이 합심 기도가 주장 그 목적임을 밝히셨을진대[마 18:19]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항상 머리[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된 삶임과 동시에 이를 확대하면 머리를 모신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한 몸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은 나 개인으로 보면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즉 나 혼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상태의 모습이다.

이러한 나의 상태에서 바라보는 현재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나와 불가분의 상태로 계시는 모습이시다. 그러므로 나도 영원히 혼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도 영원히 혼자가 아니시다. 나와 하나되어서만 계시는 까닭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의 의미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시고 바로 현재의 나[믿음에 들어 온 그래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고 새 사람으로서 새 생명 가운데 있는 나의 전혀 새로운 모습]를 구성해 계시는 '또 하나의 나'로서 계시는 것이다.

내 이웃 즉 믿는 형제의 모습도 나와 똑같은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이래서 나와 내 이웃, 전체 교회가 바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거대한 나 자신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 이 때문이다. 또 사람 구원하는 일도 이러한 나의 모습을 영원한 것으로 하나 더 만드는 작업이니 내가 좋아서 하는 신바람 나는 일이 아니랴. 이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고[이 세상에서], 평생의 고생과도 맞바꿀 가치 있는 일이 아니랴. 

그러한 의미가 여섯번째 그림인데, 우리가 아직 이런 연약하고 초라하고 종이 곽과 같은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이 죽음의 고난 받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오직 이 한 목적이다. 삶[생명]의 낙은 신령한 몸으로서 누리게 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항상 기쁨과 평안이 충먄하셨다[요 14:27/15:11/16:33]. 그리고 항상 세상을 이기는 자로서의 어엿하고 당당한 자세이셨다[요 16:33].


우리 역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세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기심을 내 것으로 누리면서 이 모든 고난에 임함은 물론이다.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 됨, 이것이 고난에 임하는 우리의 원동력인 것이다[딤후 4:16,17/요 16:32].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함과 같다[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다[벧전 1:8,9] 함과 같고, "그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으로써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신다"[골 1:11] 함과 같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름으로써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0,11],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다"[눅 6:23].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놀라는 말씀이시다.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5:16,45/6:9]시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이 1:9]. 이는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특징인 것이다. 말 그대로 둘이 하나가 됨이므로 갑이 있는 곳에 을이 있고 을이 있는 곳에 갑이 있음이니,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와 내가 또한 둘이 하나로 즉 한 영으로 합하여 있음이다[고전 6:17].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나 나는 현재 이 땅에 그대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음이다. 그런즉 나 있는 곳에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면 바로 거기에 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하나로 계시니,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아버지 또한 내 안에 계시고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선물로 성령[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행 2:38] 나에게 주심이다.


따라서 비록 아들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사람이 되셨으나 아버지 역시 아들 계시는 곳에 위치하시므로 아들께서 하시는 일이 모두 아버지 친히 하신 일이요 그 하신 모든 말씀이 아버지 친히 하신 말씀이라 명백히 하셨다. 또한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에 아들 역시 계시는 것이므로 비록 사람이 되셨으나 변함 없으신 하나님이셨으니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 안에 계시는 아버지시지만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다. 나 역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 하늘에 계시니 나도 현재 하늘에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서 내 생명이 하늘에 감추어져 있음이다[골 3:3]. "감추어져 있다" 함은 현재 엄연히 존재하되 단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이런 사실을 항상 두루 갖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 받는 것이 껑충껑충 뛸 그런 큰 상[보답]이 있다고 해서 그 상을 바라보고 고난 받는다고 할 때는 바로 그 상을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자기 중심이 아니니 다시 말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현실을 한 시도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전 자기 중심으로 살던 때와 같은 말이나 표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런 뜻으로는 더 다시는 해석하지 않는 현실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신 홀로 받는 상급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한 몸을 구성한 전체가 받는 상급이요 영광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앞에서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함도 같은 뜻이다[히 12:2]. "내 아버지"이심과 동시에 항상 "우리 아버지"시다. 머리 없는 몸, 몸 없는 머리가 없음과 같으니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머리 없는 삶, 머리를 떠난 삶은 상상도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한다. 이상 그림에서 보듯이 둘이 하나가 되었다 하여 이를 속박이라 부자유라 생각하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떠나갔던 그 "많은 제자들"[요 6:65]은 속박이라 본 것이다. 둘이 하나 되는 것이 속박이라면, 엄마 품속의 아기는 왜 있고 남녀가 사랑으로 하나됨은 왜 있는가. 가족과 가정은 왜 있는가.


몸[의 지체]이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은 몸에게는 "양식"과 같은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확언하신 바로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요 4:34] 하신 그대로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머리이신 것이다[고전 11:3]. 우리가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사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음과 같이 머리의 지시를 버겁게 생각하는 것은 곧바로 자살 행위로 통하는 것이다.


위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삶을 살아 주시는 "나의 생명"[골 3:4]이 친히 되어 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어 단지 우리를 감찰(監察)하시는 정도로만 여겼는데[실상은 그렇지 않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실 정도로 그 어느 피조물[인간]과의 관계보다 가장 밀접한 관계이시나],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내가 육체라면 나의 영혼으로서 불가분성의 하나로 되어 계심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그 영(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인한] 구원인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자연계에 속한 생물과 대칭이 되는 것은 에덴낙원[영계]의 동식물로서 전자는 자연계, 후자는 영계에 속한 것으로, 자연계에 속한 것은 자연계에 속한 단일 구조로서의 '홑' 생명체, 영계에 속한 것은 영계에 속한 구조로서 '홑' 생명체[靈物]로 존재하나, 인간만은 복합 구조로서의 '겹[이중 체제]' 생물체로서 영혼과 육체의 복수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동물은 기계적이고 시한부 생명이므로 아무 범죄도 성립되지 아니하나 영계에 속한 동물[영물]은 자유 의지를 구사하므로 범죄가 구성되고 때문에 범죄한 영물들은 영원 멸망[그들로서의 "죽음"]에 처해 있는 현실이다. 죽음의 정확한 정의는, "생명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모든 것"이다. 여기에 "존재한다"는 개념만은 별도다. 왜냐면 '존재함'의 대립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인데, 하나님의 창조가 전에 없던 것[존재하지 않던 것]을 있게 함 즉 존재하게 함에 있으므로, 그래서 영역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즉 죽음은 이제까지 존재하던 것이 더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누리는 낙과 대립되는 바 존재하기 때문에 실감하게 되는 모든 고통 고난을 말하는 것이다. 피조물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의미로도 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죽음도 육체와 함께 영혼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속성은 원래부터 영원성에 있으므로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어서 육체는 썩어 없어져도 영혼은 건재하는 것이다.


자연계든 영계든 동물과 또한 대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식물이다. 동물은 식물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실체라 할까. 마찬가지로 자연계가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영계이다. 따라서 영물이라도 식물은 그런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없어 범죄 성립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나 영물[천사]들은 그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함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적인 존재로서의 영물들과 인간은 스스로 범죄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나 영물들은 영계에 속한 단일 구조로서 범죄의 결과 그냥 곧바로 죽음[멸망]에로 직행이나 인간만은 이중 구조 덕분에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죽음의 의미가 일단 끝나고 기사회생할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이런 기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범죄할 경우 그 때는 악령들처럼 인간도 영원 멸망에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인간에게 그렇게 기회를 주셔도 완벽을 기하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철저히 원리원칙 가운데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시므로 그렇기 위해서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고난 고통[범죄의 결과인 죽음으로서의]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고 이를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으로 마침내 이루셨으니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이전 창조에 이은 새 창조이므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나중 창조는 한 단계 보다 나은 것으로 일반적인 모양새를 띠는지라 식물이 먼저 창조된 후 동물이 나중 창조되고 자연계가 먼저 창조된 다음에 영계가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지만 이런 인간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시는 것도 처음은 그냥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으나 새 창조에서는 그 위에 더 나아간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양자]들"의 신분으로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더 나은 단계로서의 필연적인 과정이라기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즉 하나님이 아들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나의 영혼', '제2의 나 자신'으로서의 모습, "나의 생명"[골 3:4]이 되시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니 이렇게 하나님이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그리스도"시다. 또 아담 혼자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나는 모든 인생들이 예외 없이 "죽은 자"[눅 9:60]들이므로 최소한 아담과 같은 공정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어 아담과 같이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죽음이든 생명이든 자기 운명을 결정하게 함이 합당한 것이다.


즉 아담이 처음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으나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 후 인생들은 그런 기회도 없이 일제히 모두가 죽은 자들이 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공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의미에서도 "마지막 아담"이 되시니,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면 나 자신이 직접 마지막 아담과 같은 모양새가 되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하면 첫 사람 아담의 경우와 같이 되는 의미가 된다.


바꾸어 말해 나 자신이 바로 아담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됨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담의 죄와는 상관 없이 오직 내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따라 나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그리스도 시대의 의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할 경우 곧장 아담의 전철[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는]을 밟게 되는 것이 됨은 당연하다.


그리고 믿어 회개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고 성령을 받은 경우는 아담처럼 새 창조로서의 산 자가 되어 있는 까닭에 이 위치가 바로 아담이 산 자로 창조되어 에덴낙원에 있던 바로 그 모습인 것이다. 물론 아담은 영계이고 우리는 자연계로서 환경 자체가 생명과 죽음이라는 격차가 있으나 그러나 같은 산 자로서 새로이 창조된 우리인 만큼 큰 차이는 없다. 아담도 범죄함으로써 그러한 에덴낙원에서 살던 영광을 곧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시험 받을 때 어떤 결과로 나오느냐 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로 나와서 죽음에 이르렀다. 우리 역시 둘 중 하나이니, 거룩한 천사들처럼 거룩함과 의로움을 그대로 지키느냐 아니면 사단 등 악령들처럼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음이다.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이 다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인하여 아담처럼 얼마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스도를 "두째 아담"이라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 함은 이후로는 이와 같은 아담 창조는 더 다시 없기 때문이다.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대칭성[양면성]에서도 부합하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의 의미는 바로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아담이 복귀해 있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아담처럼 범죄하여 죽음[이번에는 멸망]에 이르는 것을 가리켜 "구원을 이루지 못함"[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나 그 스스로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과 같이, 나를 영생하는 자로 새로 만드심으로 구원하셨으나 내 스스로 아담처럼 범죄하면 구원 받지 못한 자로 나 자신을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됨이다. 하나님의 한번 이루시고 만드신 일을 감히 누가 어찌하랴마는 내 스스로 나의 운명을 이렇게 망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절대로 간섭이나 강제하시어 막으실 수 없음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아담에게 이런 자유[자유는 완전한 자유이지 부분적인 자유나 불완전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주셨으므로 이를 변경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리는 존재로 영물들을 만드셨지만 영물들 스스로 범죄하여 그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도리어 영원한 고통의 죽음을 자취하였으므로 이는 더 다시 수정하거나 번복할 수 없다는 데에 하나님의 철두철미하신 원리원칙주의가 있다.


이런 원리원칙주의가 실상 모든 피조물에게 확고한 믿음성[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을 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담도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망쳤고 우리 역시 새 피조물됨에서 우리 자신을 망칠 수 있음이니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하셨는데 어찌 그 구원이 취소되고 번복될 수 있느냐 말하는 것은 이상과 같이 성경을 바로 읽지 않고 허투로 자기의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읽는 결과다.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처음 의도가 번복되고 취소될 수 있다는 선례가 엄정하게 확립되어 있음이다. 고로 설명의 핵심은 우리가 이와 같이 새 피조물로서 범죄하지 않고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되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는 바탕이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삶을 사시고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드리는 그런 이중 체제 또는 구조가 우리의 구원이라는 데에 있다. 이렇게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수 있는 바탕이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사실로써 훌륭히 짜여져 있는 것이다.


아담이 만일 거룩한 천사들처럼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와 같은 이런 구조에서가 아니라 처음 창조 때의 그 고유한 장치 또는 설정을 따라 얼마든지 그런 한 몸으로서의 생명 체제에서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 당시의 그 '고유한 것'이 일단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못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와 함께 아담이 죽음으로써 역시 함께 영구적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담이 영구적으로 죽은 자이지 다시는 산 자가 될 수 없게 되었음이다. 다시는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영구적이라 하는 것이다. 오직 방법은 그리스도와 하나됨 곧 "임마누엘"밖에 없으니 그리하여 우리 개개인에게 그리스도 친히 하나되심으로써 영원히 나만을 위하시고 사시는 그리스도로 정착되어 계심이다. 동시에 믿는 모든 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관계 즉 개인적인 관계를 이루어 계심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어 계시니 완전한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하신 '또 하나의 나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로 나는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이 '또 하나의 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만을 위해 사는 것이니[고후 5:15] '나 자신'이시므로 당연히 그러하다. 아담이 처음에 여자를 보고 기막힐 정도로 감탄하며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니, 그래서 달리 이름 짓지 못하고 자기는 "남자"이고 그 상대는 "여자"라고만 했던 그 때와 같은 것이다[창 2:23].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다.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에 예언하기를 "이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높아 내가 능히 미치지[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시 139:6]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로 모든 일을 전화위복되게 하신 것이다. 아담은 여자를 보고 그렇게 느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보니 그리스도[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니 또한 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아기가 되어 있어 엄마를 대하는 바로 그 느낌인 것이다.

아기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린 아이는 그 어느 연령대(年齡帶)보다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하므로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눅 18:17]고 경고하신 것이다. 

믿음 하나로 그래서 기도 응답만으로써 거대한 고아원을 세우고 운영하였던 죠지 물러는 길을 걸을 때나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 마음은 항상 주님과의 대화(對話)였다고 한다. 그런 "쉬지 않고 기도하는"[살전 5:16] 것을 그는 '즐긴' 것이다. 삶의 낙으로 여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부부가 합심해서 교회로부터 생활비[사례비]를 일절 받지 않고 순전히 기도로써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응답으로 생활하기로 작정하여 그 후로 70여년을 한결같이 그런 식으로 살아 그와 같은 대대적인 고아원 사업과 동일한 규모의 복음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 죠지 뮬러 역시 한 경건한 믿음이 있는 교수(敎授)가 그렇게 믿음으로써만 고아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그 본을 따른 결과였고, 거대한 인구의 중국을 상대로 오직 기도 응답으로써 대대적인 선교 사업에 착수했던 헛슨 테일러도 죠지 물러를 본 받은 것이며, 그 열매로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의 아편(阿片, opium) 퇴치 복음 전도 사업 역시 일정한 고정 수입 없는 믿음으로 생활하고 믿음으로 사업 자금을 조달하여 벌였던 영원한 가치의 아름다운 역사(役事)였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둘이 하나 됨을 인한 동참, 교제, 사귐]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0-12] 하였다. 한눈 팔지 않고 일로 매진하여 달려가는 이런 자세는 우리가 "부활할" 때까지 변함이 없는 일편단심이어야 하는 것이다[고전 9:24].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생명과 죽음의 양면적인 자세를 취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었다고 하여 생명 일변도로만 스스로를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사는 따위의 일은 추호라도 염두에 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까지는 또는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까지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가운데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됨이 바로 이런 뜻이기도 하다.


나의 구원 곧 새 생명을 얻어 산 자가 됨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보내심 받음 곧 사람 살리는 일을 동시에 하는 의미이니, 사람 살리는 일에는 필수, 필연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 몸에 채우기다. 이런 양면성은 또한 우리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4:4]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 살리는 주님의 일은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받아 일함으로써 되는 일이니 항상 복종이다.


그러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즉 항상 복종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이루어 있지 못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므로 우리 구원과 직결되어 나타나 결국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모순되는' 일이 아니라 '양면성'의 영원한 진리다. '삼위일체 원리'에서 양면성이라는 것은 원래 개별적으로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서로가 다른 성질이니 일견 모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둘의 상반된 점을 모순으로 두지 않고 일치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둘의 하나 됨의 구조이니 곧 삼위일체의 법칙에서 병(丙, c)의 역할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요일 4:8]이심과 더불어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도 이런 양면성의 이치다. 모순으로 보고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원리의 변함없는 이치로 풀어가는 성격의 일이니 혼동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식할 때 이 원리는 크게 유용하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이시니 둘로만 인식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또는 나와 함께 계실 때, "이 분이 아버지이시냐 또는 아들이시냐", "아버지께 기도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기도해야 하느냐" 등으로 약간 헷갈리기 쉬우나, 둘이 하나로 계시고 하나이면서도 둘로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진대 그리스도께 기도해도 아버지께 기도함이 되고 그리스도를 뵙고 있어도 이는 아버지를 뵙는 사실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내 이웃 즉 믿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내 형제를 대할 때 이는 그리스도를 대함이 된다. 그리고 영원히 나는 이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언제나 함께 존재함을 알게 된다. 즉 결코 외롭지 않은 둘로서의 완전한 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시므로 나는 불멸(不滅), 불사(不死), 불패(不敗)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만 당하시는 고난이 아니다. 아들과 더불어 아버지 친히 똑같이 당하시는 고난이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와 아들께서 계시기 때문에[요이 1:9] 내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다. 우리 인생들만 고난 받고 하나님은 멀찍이 떨어져 계셔 우리의 인간고를 관망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임마누엘[God with Us]"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런 함께 당하는 고난이 있을 리 없다. 고난을 통하여 사랑을 배울 일이다. 개인적인 종교적 열심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 일이다. 종교적 열정과 사랑은 별개다. 우리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 복음의 종교화가 아니라 생활화다. 죽은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니 이는 곧 '생활'을 의미한다.


생활이 없다는 것은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리스도 복음은 삶의 원리, 생활 원리인 것이다.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니[고후 5:15/롬 14:7-9] 곧 "자기 부인"으로서 한 몸의 체제에서 이는 핵심이 된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구조에서의 각 지체 역할이 바로 이 생활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 없이 아무리 교회에 충실하게 나가고 교회 일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어도 그 삶은 하나님과 유리(流離)되어 결렬(決裂)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동시 작용으로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므로 항상 교제, 교류, 사귐의 사랑 관계인 것이다.

 
6.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악인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 피조물들 자신이 자기에게 부여되고 완전 보장이 되어 있는 자유를 남용 또는 오용한 결과다.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으므로 그리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죄를 짓지 않게 강제하고 간섭하게 된다면야 악인이 생길 여지는 없게 되겠지만 그 대신 인간의 자유는 영원히 박탈된다. 반드시 만유(萬有)는 상칭(相稱) 관계가 되어 있어 명암(明暗)이 있는 법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까.

자연계 동물이나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고정시켜 두지 않으시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방향을 스스로 정해서 행동하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니, 한 몸 체제로 사는 생명에는 사랑이 필수이고 사랑은 자유의 향유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유로 인하여 선에서 악이 나온 것이고 생명에서 죽음이 파생된 것이다. 하나로서의 둘은 동시에 생기는 법이 없다. 반드시 먼저 있고 나중 있는 순서가 있게 마련이다. 

7. "예수께서는 우리 죄 대신 속죄(贖罪)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는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죄는 이미 설명한 대로 사람 사는 도리, 생활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중심이 되어 이웃도 해치고 자기 자신도 망쳐 공멸(共滅)로 통하는 지름길이기에 그 결과가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죽음으로 처벌하신다기보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도록 자연적으로 결과가 맺어지게 되어 있다. 이미 결과가 맺어져 있는 것을 최후 확정적으로 "하나님께서 형벌하신다"는 형식을 취하게 됨이다.

죄를 짓지 않도록 간섭하시고 강제하신다면 이미 지적한 대로 우리의 자유가 침해되니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로봇과 같은 기계적 생명체는 이 자연계에 넘쳐 나고 있다. 특출하게 인간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다. 영원한 존재는 자유 의지가 있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되어 있음이다. 자기 중심이 되어 악을 행하든, 자기를 부인하여 선을 행하든 완전 자유다.


방임(放任, 죄를 짓게 내버려둠)이 아니라 전적인 위임(委任, 스스로 알아서 자기 책임하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심)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임(一任)되어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배임(背任)을 하는 것이 '죄'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고 우리 죄 값을 벗어나게 해 주어 영생하게 하려고 죽었다"는 정도로 아주 잘못 알고 있다. 이런 것을 "예수 믿음"이라고 크게 오해하고 있는데 교회 자체가 그렇게 잘못 알고 가르친 결과다.


그래서 "죄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죽으실 필요 없이 처음부터 우리가 죄 짓지 않도록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도 자연 나오게 된다. 왜냐면 그렇게 오해하는 대로라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죄'와 '죄 값'의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죄 짓지 않도록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나 그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는 것이나 같은 의미이니,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시어 자유 의지를 행사하게 주셨다는 사실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까닭이다.


즉 죄 값은 죄를 지은 자가 응당 받게 되어 있음이니 이것이 옳은 말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값을 받음은 당연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이니 곧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지 남이 대신해 주는 법은 없다. 또 설혹 대신해서 죽으신다 하더라도 그 대신해서 죽으심은 반드시 향후 내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되어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대신 죽었다고 해서 나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뜻일 수는 없으니 이는 상식과 양식(良識)에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미신적인 요소는 심지어는 내가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더듬어 제각기 자기 주장을 하도록 애초부터 되어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 욕심에 끌려 영생만을 탐하는 이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자기 함정에 스스로 빠지도록 하는 그런 짜임새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혼돈 아닌 혼동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극히 간명하여 혼돈과는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린 저작자(著作者)의 유품(遺品) 유물(遺物) 정도가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므로 사람에 따라 분명히 차별하셔서 능히 눈을 어둡게 하심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반드시 유의할 일이다[행 28:26-2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나는 그 대신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죄로 인한 나의 죽음에 그리스도 친히 함께 참예해[동참해] 주셨다는 뜻이다. 동참(同參)해 주신 이유가 있으니, 나와 함께 살아나심으로 해서[이미 죽으심으로써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시는 고로] 그 때문에 나 역시 나의 죄로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려 하심인 것이다.


이렇게 내가 다시 살아날 때에는 더 이상 과거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회귀됨을 말한다. 범죄 이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니 여기에는 죄도 없고 범죄할 아무 근거도 없다. 아담처럼 스스로 범죄하지 않는 다음에야 이 상태는 항구적으로 지속된다. 오직 문제는 아담처럼 내 스스로 범죄하게 되는 경우다. 바로 이 때문에 성경은 항상 복종함으로써[지체된 자가 머리에 순복]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고 경고하는 것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간단히 말해 아담처럼 범죄하지 말라, 아담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고로 나는 당연히 나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죽었을 때는 죄인으로 죽은 것이니 곧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살아서는 안되는데도 불구하고-고후 5:15]" "옛 사람"[골 3:9]으로서의 죽음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 있는 현재의 내 위치는 그런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에 있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새 피조물'[:17]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니 새 사람이 아니라 옛 사람 그대로이고 새 생명 가운데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함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믿음이 없다기보다 믿음을 배반한 상태이므로 이 경우 다시는 희망이 없고 죄 용서도 불가능하다. 회개 자체가 불가능하다[히 6:6]. 그러므로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롬 8:13] 삶이 안될 수가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나를 대신한다" 또는 "내 죄를 대신한다"는 억지 말을 하는데, 이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번역자가 성경을 자기 선입견을 따라 해석해서 지어낸 말이다. 우리말 성경은 일괄적으로 이런 의미로 번역되어 있으니 벌써 시정했어야 옳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ambassador)이 되었다"[고후 5:20]고 하는 그 경우만은 말 그대로 대신(代身)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해서[instead of, on one's behalf]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for], 즉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죄를 짊어지고[담당하여] 죽으셨다’가 성경의 표현이다.


인간의 죄 때문에 그리고 그 죄를 짊어졌다는 것이 바로 대신함이라는 뜻이 아닌가 하겠지만, 성경은 그 의미를 분명히 한정하고 있다. 내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그 대신 나는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그 나의 죽음에 동참하셔서 '나와 함께' 죽어 주셨다는 뜻을 명백히 함이다. 나와 함께 죽으시니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되어 죽으신 것이므로 나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내 모습이 되셨으므로 내가 나 자신의 죄를 지고 죽는 모습을 나타내신 것으로서, '내가 나 자신의 죄를 지는' 것이니 누구 다른 이의 죄를 내가 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내가 볼 때는 내 모습이이요 독자가 볼 때는 바로 독자 당신의 모습이시다. 이것이 사람만이 아니시고 동시에 하나님이 되어 계심의 의미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니 이는 나 개인에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이시다[행 2:38]. 당신이 그렇게 하면 역시 똑같은 의미에서 당신 개인에게 주신 개별적인 선물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 되어 계시는 핵심 의미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으므로" 이 사실을 믿으면 자동적으로 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각자 개개인의 모습이 되시어 [즉 나 또는 당신의 이름으로] 죽으시고 그렇게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다음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오심으로써 나와 '육체[나 자신]와 영혼[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관계'의 불가분성을 이루어 나와 둘이 하나 되어 영원히 계시기 위함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또는 "내 죄를 짊어지셨다[담당하셨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신해서 죽으셨다" 할 때는 이와 같이 개개인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영접하여 모시는 의미가 선명히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끝나면 성령을 받아 모시는 것도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된다는 것도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없어지는 까닭이다.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말에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죽으시게 내버려두고 그 덕에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여전히 삶의 낙을 누리면서도 죄 의식을 느끼지 않고 덤으로 영생까지 보겠다는 한없는 욕심에 대한 변명, 핑계를 위한 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인생을 멸망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악령 사단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의 아비"[요 8:44] 곧 원조(元祖)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소자(小子, children, 하나님의 아들들)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 1:12] 했는데, 이 "영접하는"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친히 내 모습이 되시어[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되신 것] 나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나와 함께 하셨으므로 이는 나와 ‘둘이 하나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말 그대로 하나이시기 위해서는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영혼처럼 계셔야 하는 것이다.


이 하나 됨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함께 살아나게 되는 것이요 그리하여 비로소 내가 '산 자'가 되니 이것이 ‘구원’이다. 즉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받아 모셔야만 되는 구원이지 단순히 나 위해 죽으셨다고 되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과 같은 ‘대신 죽음’과의 차이다. 대신 죽을 때는 그 죽음 자체 하나만으로도 우리 구원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일 죽으시기만 하고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고전 15:14,17,18]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을 구원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성경이 명백히 밝혀 주고 있음에도 이를 완전 무시하니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인가. 사단이 완전히 눈을 멀게 했다고 단정할 일이 아닌가[고후 4:4-"to blind the minds"].


그러면 그 다시 살아나심이 어떤 의미이냐 하면 앞의 지적과 같이 ‘나와 함께’ 살아남이니, 곧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이 되어[이것이 "다시 출생함", "새로 창조됨"이다] 비로소 내가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탈피하여 '산 자'로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죽음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야 우리의 속죄(贖罪, 물건을 주거나 공을 세우는 따위의 대가 지불로써 지은 죄를 비겨 없애는 것)가 가능해짐이다. 비로소 구원됨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속(贖)해짐으로써 우리가 '산 자'가 되었지만, '산 자'의 죄가 속해지는 것이지 '죽은 자'의 죄가 속해지는 법은 없으니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어 목숨이 끝났으니 그는 이미 죄 값을 치른 터라 그 죄를 속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런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산 자가 되어 있어야 나의 죄가 속해졌다는 의미가 살아난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은 자로 여전히 있고 그리스도만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해서 그 죽으심이 나의 생명으로 역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니 그 죽으심의 죽음만 내게 전가되어 오는 것이지, 어찌 그 생명이 내게 옮겨오겠는가. 대신 죽으심이 나의 구원이라는 등식(等式)으로써 강변하는데 "그것이 옳다면" 하는 그 말이다. 결국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신다고 할 때는, 더 다시는 그 죽음이 나의 구원을 위한 대신 죽으심이라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전연 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행티인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죽은 자'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도 영원히 사는 생명에 대비하면 확실히 '죽은 자'다. 이렇게 죽어 있는 자에게는 속죄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니 아무리 속죄가 되어 죄를 없이 한다 가정(假定)해도 여전히 죽은 자의 짓거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는 죽은 자의 일밖에는 아닌 까닭이다.


나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여 문자 그대로 와해되어 버려야[롬 6:6] 죽은 자의 행색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그리고 장사 지냄"인 것이다. 고로 "속죄했다"(救贖)는 사실 자체가 나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함께 살아남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이다. 이렇게 되어야 즉 이를 토대로 해야 비로소 속죄의 의미가 영광스럽게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됨은 머리와 몸과 같이 하나 되어 있는 구조(構造)를 말함인지라 이런 구조에서는 절대로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법이다. 남녀 두 육체가 한 몸으로 하나 됨에서도 나타나는 원리다. 즉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이 되어 더 이상 남자 마음대로 몸을 돌리지 못함이니 다른 여자와 상관할 수가 없다[고전 7:4].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몸[물질]으로 하나됨이고 우리는 영으로 하나됨이니[6:17] 그래서 삶, 생활에서 그러한지라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빌 1:21]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바로 홍길동인[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내'가 되는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 구원의 성격이 명명백백하게 확인된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 곧 일상생활이 구원이다[고후 5:15/롬 14:7-9].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기 부인'이니,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 2:20] 것이니 하는 등의 의미를 나의 일방적인 행위인 줄로만 인식해 왔으나, 이제는 바로 깨달아 항상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으로 인한 상대적인 동시성(同時性) 의 영광스럽고도 풍성한 삶의 기본 원칙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있게 됨이 넉넉히 가능해지는 것이다. "너는 나 위해 살고 나는 너 위해 살고,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이건 완전히 '아름다운 시적(詩的)인 표현'이 아닌가. 그러나 완전히 현실 그대로의 아름다운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전적인 무지(無知) 탓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을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타기(唾棄, 침 뱉어 버릴)할 무조건적인 의타심으로 배격해왔다. 얼마나 어리석은 교만인가. 제대로 알고 보면 오히려 한 점도 구김 없는 완전한 자주 독립성의 정화(精華)다. 이런 완전미(完全美)는 아무리 고상하고 이상적인 사상에다 고답적인 상상력을 동원해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 걸작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대속물(代贖物-마 20:28)이 되신 것이니, 곧 자기 몸[자기 자신]을 우리 위해 "속전(贖錢, 贖金, 몸값, 배상금, ransom-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으로 주신"[딤전 2:6]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로서 우리 각자는 그 피 "값으로 사신"[고전 7:23] 바된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이다[롬 14:8]. 우리가 '주(主)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나를 소유하신 임자로서의 그리스도, 나의 주인이시라는 뜻이다.


나는 따라서 절대적으로 그 종으로서 "오직 주인을 위해 살 따름이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종과 주인의 관계'다. 이런 면에서도 절대 복종이다. 즉 내가 죽었기 때문에라도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지만 동시에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라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피차간의 사랑은 피차간의 종이 됨을 뜻한다는 것은[갈 5:13] 상식으로도 판단될 수 있는 일이다. 


사랑하는 남녀 간의 언어로 "나는 당신의 종"이라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한 가지 의미만 있지 않고 다각도로 적용되어 빈 틈 없이 충실한 의미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주인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수행함"[요 4:34]이 종의 책무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4:34/20:21]. 그래서도 '머리와 몸'의 관계다. 몸은 머리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법질서[엄정한 삶의 도리, 일상생활의 기본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과 을이라는 '둘이 하나 됨'의 '한 몸' 이치를 말함이다. 사랑은 항상 '둘이 하나 됨'을 가리킴이다. 따라서 이 사랑의 관계[한 몸으로서의 삶의 이치]에서는 어느 쪽이든 일방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쌍방 교류[교제, 동참(同參), fellowship]의 동시성(同時性)이 그 특징이다.


갑은 을을 위함으로써 무조건 을 쪽으로 흐르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영구적으로 갑 쪽으로만 흐른다. 그러나 한 쪽으로만 흘러서는 안되는 것이니, 동시에 양쪽이 흘러야 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형이 유지되지 않고 균형이 잡혀지지 않아 치우치고 쏠리게 되어 정상적인 형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작동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를 이루는 둘이서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한 삶의 법질서다. 즉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그리고 나를] 먼저 그렇게 위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친히 우리에게 종이 되시어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시는 것이 사랑이다. 이는 엄마가 아기에게 종 노릇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눅 22:27]고 선포하셨다. 먼저 시동을 거시고 계속 그렇게 일관성을 지니시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그렇게 본을 보이신 대로 따라 행하는 것이 스스로 종이 되어 주님으로 모시고 섬김이다[요 5:19].


스스로 하는 일이니 사랑은 자진, 자발적인 행위인 것이다. 억지로 강제로 되어지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사랑과 순종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억지로 믿게 하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다. 무릇 "거짓"이나 "속임수"란 것은 억지로 무리하게 거짓말하는 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이 성경에 일점의 거짓도 속임수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이유 중의 하나다. 성경은 절대로 억지로 믿게 하거나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이 다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된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성경의 진실성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고 헛되이 애쓰지 말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이와 같은 자체증명이다. 이는 만세 반석이요 난공불락이 된다. 다른 것에 의존하게 되면 상대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사정과 경우에 따라 그 권위가 얼마든지 퇴색될 수 있다. 그리고 사단이 이런 것을 좌시하고만 있지 않는다. 무슨 수로든 이를 뒤집어 엎을 궁리를 다하는 법이다. 그러나 자체 증명일 때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와 같이 그 무슨 수로도 감히 손댈 엄두도 못내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각자를 주인처럼 섬기고 우리의 뜻을 절대적으로 행하셨는가 하면,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 각자에게 "선물"[요 4:10]로 주심이다[갈 2:20/요 3:16].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 증거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그렇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한 때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시니 하나님 앞에서는 한 때로만 그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이루신 것은 영원한 원리 또는 법칙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주신 그 의미 그대로 성령으로 우리 각 사람 안에 임하여 계시므로 성령을 그래서 영원하신 "선물"[행 2:38]이시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전부 우리에게 주신 것이 우리로 말하면 절대 복종인 것이다. 사랑 안에서 내가 주인이요 임자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 누가 간섭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것,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사람들은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무시하거나 덜 강조한다. 이는 형평상의 문제이니 심각하다.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똑같아야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기울면 그 자체가 바로 설 수 없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므로 그 생명과 그 영광이 모두 나의 것이나, 동시에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나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그리스도를 섬김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생명도 영광도 내가 누릴 나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즉 내게는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동시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단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영구히 주셨다는 것이니 따라서 영구적으로 나를 섬기시는 즉 위하시는 위치에 계심을 말한다.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니 선물은 주인에게 대하여 종의 위치가 아닌가.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한 대로 사랑은 상대에게 종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다만 특징은 억지로 되는 종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진 자발적으로 스스로 종이 되어 있다는 그 차이다. 다시 말해 자유인으로서의 종 노릇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삼위일체 원리에서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은 위치에 계심이다. 내게 자신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심[피 흘려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나를 그 피 값으로 사들이셨으니 나는 또 하나님께 영원히 종이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써 "주님"이라 부르는 것임을 이미 설명했다. "주(主)님"이라는 명칭은 이와 같이 절대 복종하는 상대로서의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라는 의미가 없으면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되기에 그렇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회개할 기회까지도 박탈당한 채 즉결처분된 것이 그 예다[행 5:1-4]. 이를 목도한 당시 모든 초대 교회가 심히 두려워했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에는 나가고 사람들의 말을 따라 구원 얻었다고 말은 하였으나] "주님, 주님" 했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짓말로 단죄된다는 것은 아니다.


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믿고 있었으나 나중에 그 믿음을 배반한 경우다. 자기 말로는 아무리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믿지 않는 예가 오늘날 거의 전부다. 그만큼 오늘날의 사태가 바로 바울이 예언한 "배도(背道)"[살후 2:3]의 상태라는 의미다. 이런 허실(虛實) 하나 제대로 분별 못하실 하나님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뒤늦게나마 이제라도 실상을 알았으니 지체 없이 회개하고 믿음에 들어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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