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 주는 경고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 주는 경고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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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苦海)/사해(死海)

"고해(苦海)"라는 말은 불교 용어라고 한다. 괴로움이 끝이 없는 이 세상을 가리킴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에 호감이 간다고 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임에도 불구하고]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형통하고 잘 산다"는 넋이 나간 일부 기독교보다는 몇 갑절이나 나은 것이다. 우리는 "고해"보다 한 술 더 떠 사해(死海)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고해"나 "사해"나 죽음이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이다. "고(苦)" 자체가 원래 죽음의 영역이지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에도 한시적으로만[이 세상에서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 이후 그렇게 된 것이다. 왜냐면 친히 산 자로서 우리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신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이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이다[골 1:24].

그래서 우리만 아니라 인간의 범죄와 저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피조물 역시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는"[롬 8:22] 현실이다. 여기서 "탄식"은 여인이 해산할 때 내는 신음 소리를 말한다. 우리말 번역은 단순히 탄식이라 했으니 오역(誤譯)이다. 인간의 고통 중에 손가락으로 꼽아 주는 고통 중 하나가 진통(陣痛, the pains of childbirth)이다. 바로 이 최고도의 고통에 모든 피조물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는 인간이 했는데 범죄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피조물들이 함께 이 인간의 죽음의 고통 중에 있거늘[한 몸으로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치로] 우리가 어찌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생명의 낙을 누리며 감히 살 마음이나 먹을 수 있다던가. 왜 다른 피조물 역시 인간의 범죄의 저주 속에 갇혀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바 삶의 도리, 생명의 법질서가 '한 몸'됨으로써의 삶의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한 몸의 구조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고전 12:26]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27]이라 함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는 새 창조에서 그러하고 이 새 창조에 들지 않는 다른 여러 피조물 역시 한 몸의 체제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머리로 계시는데 하나님 친히 우리 위해 고난 중에 계시니 다른 피조물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심이 바로 이 한 몸을 이룬 모든 생명체의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꼭 그렇게 하나님 친히 고난 받으셔야 되는 것도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니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터에 이런 일에 구애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냥 인간만 제외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굳이 우리 위해 친히 사람까지 되시어 인간의 모든 죽음의 고난 속에 들어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그 한량 없으신 어버이 사랑 때문인 것이다. 차마 버리시지 못하고 차마 홀로 당하는 고난을 못보아 주시는 부모 심정이 그렇게 스스로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무한하신 사랑이시라 하고 망극하신 은혜라 하는 등의 찬송과 찬미를 드려도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어 사는 법을 일깨워 주시는 차원에서도 그렇게 하심이었다.

즉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방법을 우리 모두에게 그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통해 가르치시고 실제 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아들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요 5:19] 하심과 같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본으로 보이심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다"[:20] 하심과 같다.

이미 설명한 대로 삼위일체의 대칭[상칭, 대립] 원리에서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되 서로 동등하지 않고 반드시 대소, 주종, 인과(因果) 관계를 이루어 갑이 을을 낳은[파생시킨] 결과로서 갑은 을에게 본을 보이고 을은 갑의 본을 따른다고 함과 같다. 이것이 기본형과 그 대칭형의 관계이다. 대칭형이 기본형을 닮기[따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닮지 않고는 하나일 수가 없다. 같지 않은데 어찌 억지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어버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니 우리 또한 우리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스스로 채우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사람을 살리는 비결이, 그와 하나 되어 한 몸을 이룸으로써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다른 지체도 같은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이치를 따름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방법밖에는 죽은 자로서의 인생을 구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길이 없는 까닭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구조에서는 그 어떤 범죄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은 자가 큰 자의 본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기 때문에 구성되는 범죄 행위이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듣는 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롭다"[요 5:30] 하심과 같고,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7:18] 하신 그대로다.

따라서 우리 구원의 의미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데에 있으므로[20:21]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고후 5:15/롬 14:7-9].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고 있다. 절대로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히 3:13]-이것이 성경의 경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르시는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를 따름이셨다. 왜냐면 인간은 범죄로 죽은 자가 되었으니 죽으면 영원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음이다.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 죽게 되어 있다는 법질서가 더 다시 확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살 길이 있다 해도 일단 죽은 다음이라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설명한 대로 죽으면 다시 살아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죽음은 확실히 죽음으로써 처리하고 생명은 새로 창조하는 것으로 가닥을 푸는 것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 죽을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 각자와 하나를 이루시고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있는 위치에서 아버지의 다시 살려 주심으로 인해 살아나실 때 나 역시 그와 하나되어 있는 상태에서 죽음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런 이치는 그렇게 내 이름으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계신 그대로 내 안에 성령으로[내 영혼 격으로-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임하시어 내 안에 영원히 나와 불가분으로 함께 사심으로써 구체화하고 현실화, 실제화하는 것이다. 만일 성령으로 이와 같이 오시어 문자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시지 않으면 그 하나되심으로써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는 까닭이다. 왜냐면 이론이 실제가 아니니, 그 이치대로 사실화가 되어야 그 이론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심이니 이는 이미 누차 설명한 대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경우에만 오직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구원 받을 만한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하에는 없다 함이다[행 4:12].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죽음이 현실화하였으므로 비로소 죄 용서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관계를 이루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고후 5:15/롬 14:7-9]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내게 주신 선물이 되시어 나를 위해 사시는 복된 생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이 우리의 구원이니 것이다.

즉 동시에 움직이게 되어 있는 양면성의 진리다. 절대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은 하나님 일방적인 처사로만 끝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이비 교리라 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데에서 나의 구원 즉 새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므로 죄를 짓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음이다.

이러한 상황[새 창조, 다시 남]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경우에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니 즉 영물들이 애초 죄를 범하고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은 양상을 이루는 것이다. 즉 고의적인 것이 되어 이 경우 생명에서 영원히 탈락된다[히 6:6/10:26,29].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이다. 앞에서 우리 구원이 동시성의 양면성이라 했지만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이 동시에 작용하고 작동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가 부인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고 내가 시인해야 나를 시인하시는 관계가 되어 있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된다. 그러니 이 동시성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살고 움직이되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그렇게 함이다. 이런 두드러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즉 음식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거나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방탕하게 지내면 나의 건강을 해치고 결국 목숨을 잃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 되므로 그와 같은 결과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산 것처럼, 이제는 같은 일을 하되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쳐 죽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마찬가지나 의미가 사뭇 다른 것이니, 과거에는 나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는 것으로 그치나 이제는 영원한 멸망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음을 인하여 그 종국은 멸망이나 최소한 그렇게 멸망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영생하는 자로 자처하고 있으므로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생할 줄로 착각할 수 있기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이런 비유를 든 것이다. 말하는 요점은, 우리의 구원은 영생을 받아 챙겼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생명이시므로 그리스도와의 원활한 관계 그 자체에 있음을 정확히 주지시키려 함이다.

원활한 관계라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 둘이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함이니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므로 어느 한 쪽이[항상 우리 자신을 가리킴이다] 그 상대를 위함이 그치거나 원활하지 못하면 그 상대편[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므로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의 반응도 그와 상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다룰 문제가 아님을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즉 건강을 해쳤다는 것은, 현재의 구원 받은 상태를 따르지 않고 즉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새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중심으로 나간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다루므로 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결코 건강을 해치는 방탕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렵고 떪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 항상 복종함에 있으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는 것을 말함이다. 더 다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전적으로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위해 산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시는 길이 막힘이다. 즉 행위[일상생활 즉 삶 자체]로써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니[딛 1:6] 그리스도 역시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둘이 하나된 구조로 사는 삶의 특징인 것이다.

이 경우 말로는 내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하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 그리고 교회 집회에 충실히 나가고 겉모양은 멀쩡하나 실상인즉 즉 삶 자체는 자기를 위함이니 심판의 대상이 됨을 면하지 못한다[마 7:21/25:45]. 그래서 교회 중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많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종말이 "멸망"[:19]인 줄 내다보는 바울 사도는 "눈물"[:18]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눈물로 여러 번 경고했으나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현저히 특별한 죄를 범하면 교회에서 축출할 수도 있으나[고전 5:2] 그렇지 않고 그 삶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라 교회 내에서 항상 그들을 대하는 처지에서 비감스러움은 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니 그리스도 역시 내게 생명[영생]으로 작용하시지 않으므로 멸망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그래서 동시성과 양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요 14:23]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이 우리의 새 창조, 다시 출생함, 성령으로 남의 기이한 새 생명력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신 것이다. 엄마 품속에 있는 아기와 같은 모습이 우리이니, 아기에게 엄마 품속처럼 더한 생명력의 원동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생명력으로써 끝까지 충실하게 충성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산다는 데에 있다[롬 14:7-9/고후 5:15]. 그러므로 어느 때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될 때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고 하는 몸짓이고 그 순간이 되는 것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두렵고 떠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긴장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위의 설명과 같이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은 생명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함"[빌 4:4]이니 이 역시 현재 구원의 양면성이다.

그러나 이 두렵고 떠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한한다. 천국에서는 이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원 받은 상태는 이런 측면으로도 양면성을 이룸이니 왜냐면 이 세상은 영원한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것을 놓고 내 스스로 가름하는 때요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면성을 이룬다는 것은 비록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영원 세상에 비해 한 순간만도 못한 찰라 같은 것이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의 그 막중한 가치로 따져서는 능히 그 영원 세월과도 맞먹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구원 받아 영생하는 자가 이미 되어 있는데 또 무슨 영생이냐, 죽음[멸망]이냐 하고 가름한다는 말이냐 하겠지만, 사단과 같은 영물들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지는 않았었다. 멸망으로 들어갈 자로 창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죽은 자가 된 아담 역시 죽을 자로 처음부터 지으심 받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늘날과 같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당연히 나의 영생이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만은 그렇지를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 받음의 특징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앞으로 영생하느냐 아니면 탈락하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가름하는 시험 무대가 세상이니 우리의 영생이 목적이 될 듯싶은데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로 구원받은 자답게 제대로 처신하느냐를 두고 저울질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증거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함이니 바로 그렇게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끝까지 충성되게 사느냐 여부가 따져지기 때문이다.

아담이나 사단 등 악령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룩한 천사들과의 차이다. 전자는 그 생명의 법칙대로 살지 못했던 반면에 후자는 그렇게 충실히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도 분명한 것이다. 전자처럼 되느냐, 아니면 후자처럼 되느냐 스스로 결정할 차례다. 거룩한 천사들은 넉넉히 그렇게 했다. 우리 역시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선례다. 또 사단 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그들과 같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들 역시 우리의 선례가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은 아담보다 더 월등하고 탁월한 능력이 되시어 아담처럼은 되지 못하게 하시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오직 아담처럼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시는 즉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만드심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라면 그럴 경우 아담과의 불평등이 되고 형평(衡平)상의 문제가 되고 편애(偏愛)가 되니 공명정대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 하나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아담만 아니라 영물들과도 똑같은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니와, 이미 거룩한 천사들이 악령들과는 다르게 그렇게 현재 영원히 정착되어 있음으로서 우리 역시 그런 본을 충분히 따를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 있는 마당이니 그런 아담과의 차별 또는 악령들과는 다른 특별 대우 또는 취급은 더 이상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의 예가 없이 일률적으로 모든 영물들이 다 사단처럼 타락해 있다면 혹여 하나님께 잘못이 있어 우리의 새 창조만은 달리 해서 그에 대처하심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거룩한 천사들이라는 엄연한 실체적 본보기가 있는 이상 그런 것은 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되돌리심으로써 아담과 똑같은 상태에 우리가 놓이게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임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역설하고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이 우리 구원임을 나타내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확실하게 아담의 범죄 전 상태임을 드러내어 그 사실 자체에 대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새 창조 차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므로 그러한 것이다. 다시 출생하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성령으로 나게 하심이므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곡해하여 이상과 같이 여러 해괴한 주장을 내세우고 가설을 설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이른바 "신학(神學)의 병폐이다. 왜 병폐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인한 친히 가르치심을 통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학문처럼 흘러간 옛 시절의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을 자료로 삼고 근거로 내세우고 권위를 두니 당연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겉돌기만 일삼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나무 가지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말과 같이, 나를 사랑하시어 그렇게 나 위해 십자가 죽음의 고초를 당하셨으니 살아나셔도 당연히 나를 떠나실 수 없어 나와 떨어질 수 없어 나와 함께 하시고 함께 사시지 않겠는가. 왜냐면 이미 나를 위해 자신을 다 바쳐 내게 몽땅 주셨으니까 나를 떠나 어디로 가시겠는가. 영원히 나와는 불가분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나와 하나되시어 죽으시고 그리고 다시 나 위해서 살아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계시는 의미다. 이미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고 내게 자기 생명을 주셨으니 내가 바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생명’이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심은 영으로 계심이므로 육체로 비유하자면 ‘아기’로서의 나를 품에 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시다. "불가분"이라고 해서 또 오해하지 말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동시성과 양면성의 지배를 받는 원리원칙을 따르는 불가분성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하나'가 아님이다.

엄마 품속의 아기를 엄마에게 강제로 매여 있는 속박이고 구금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기에게는 그야말로 완전 자유요 해방이다. 그리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순종하게 되어 있는 아기의 처지를 부자유하다, 독립되어 있지 못해 자주성이 없다 하여 "안쓰럽다, 가엾다, 딱하다"고 말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남녀가 부부되어 남자는 여자에게 매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매인 것을 두고 부자유하다, 속박되었다고 동정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좋아서 그 스스로 원해서 매일 때에는 그것이 속박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누차 설명했지만 자유, 자주, 독립의 개념이,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이를 가리킴에 있는 까닭이다. 사랑하므로 그 사랑을 마음대로 베풀 수 있는 것이 자유다. 사랑이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요 삶을 위한 자유요 자주 독립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기의 불가분성, 아내와 남편의 불가분성은 상호 속박이 아니라 자유요 사랑이다. 그런 속박은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마지못해 하는 억지라고 여기면 속박이고, 사랑이라고 여기면 자유다.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여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지도록 외부적으로 사실 관계가 이루어지고 여건이 조성되는 등 외적(外的)인 요소가 구성되어 있어야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 외인(外因)을 쏙 빼버려 부정(否定)하고 내인(內因)만을 거론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런 소위 해탈, 열반에 들려고 해도 난감하기만 하고 앞이 창창하기만[far off [away], remote, dim, uncertain] 하다. 왜냐면 양면이 다 갖추어져야 온전한 물건인데 한 면만을 강조하니 그런 것이 실존하지도 않거니와 없는 것을 억지로 있는 것처럼 인식하려 하니 이성적인 인간인데 도대체 제대로 먹혀 들 리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대로 율곡 선생도 하산해 버린 것이다. 실체(實體)가 없는 뜬 구름 잡는 식임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교에 심취한 사람이 지금까지 한둘이 아닌데 그들은 모두 율곡처럼 이성적이지 못해서 그런가?" 할 것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사단은 인간의 이성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자기로서는 얼마든지 인간을 이성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명백한 예가 아담 부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강제했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로써 그럴싸하게 감아 넘기는 재주가 있었다는 그 뜻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아담 부부가 그 선악과를 먹는 일을 저지를 리 없다. 그럴 듯하게 말하니 그 거짓말을 역시 그럴 듯하게 들은 것이다. 불교의 교리도,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도, 개신교의 소위 "대신 죽음에 의한 구원"도 사단이 가리키는 방향대로만 생각하게 되면 일견 그럴 듯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면 율곡은 왜 그런 불교 교리를 그럴 듯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모순점을 간파하고 불교를 버릴 수 있었는가 하면, 인생을 몰아가는 일에 사단이 불교 하나만을 활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인생 구원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기타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활용하는 것이니 천주교를 활용하고 개신교를 활용한다. 불교를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사람은 그 대신 천주교나 개신교에 속아 넘어가도록 만들면 되고 무신론자, 무종교자로 만들면 된다. 율곡 당시에는 아직 천주교도 개신교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나 가령 지금이라도 악령이 구원 얻지 못하게 할 목적이라면 굳이 불교에다 사람들을 붙들어 매려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불교 교리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악령(惡靈) 사단은 이성적으로 흐리게 만드는 것만 아니라 일종의 환상, 환각 상태로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한다. 환각, 환상이라는 것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을 두고 말함이다. 악령 마귀가 작동할 때에는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미치게도 만들고 귀신 들리게도 만드는 판인데 그런 의식 전환, 인식 전환시키기야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반드시 신비 현상, 기적, 소위 "기도 응답"이 있게 마련인데 그 배경에는 악령 사단의 능력이 작용하는 것이니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니 즉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떼어놓으려는 목적이다.

오늘날 말세는 소위 ufo식의 그런 ‘사단의 기적’ 시대다. 성경에 이미 그런 예언을 해두고 있으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役事)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니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 바와 같다[살후 2:3-12].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너무나 약하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연약함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것을 따르게 하고 거기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위 "영험(靈驗, 영검)이 나타나면 그것을 마치 진리인 양 여겨 그것을 위해 죽는 시늉도 불사하는 충성심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다고 같은 기적을 말하는 성경의 기록은 믿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무신론자들의 무책임한 말 그대로, "거짓된 지어낸 이야기"라 믿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태도다. 그 때는 거짓말로 지어낸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나, 현재 현실적으로 각종 기적이 두 눈 앞에 나타나고 있는 이상 현실의 것에 무게가 있고 그래서 더 믿지 과거의 것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들을 하는 것이다. 또는 과거의 그 기적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으니 현재의 것도 진실되다는 증명이 되므로 현재의 것을 더 신뢰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단은 과거 성경상으로 기록된 것 이상으로 더 큰 규모로 기적을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런 초자연적인 것에다 함부로 신적(神的) 권위를 두지 말 것은 그런 "능력"이라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이 세상 신(神)인 악령이 바로 그 배후이니 신뢰하지 말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세상 종교에서의 악령의 기적과는 어떤 차별화가 가능하냐 할 때, 세상 종교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앞서 설명한 대로 논리가 명백하고 정연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없다. 이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나타나지는 모든 것이 악령들의 작업인 것이다. 위의 대목에서도 밝혀지듯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 받도록 하시기 위해 그런 악령들의 거짓과 속임수를 묵과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서서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아무리 악령들의 거짓 기적과 능력이 현란하게 과시되어 나타나더라도 거기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진리인지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앞에서 하나님의 실존이 분명하면 반드시 그 메시지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대로다. 즉 성경을 기준하면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성경에 밝힌 사실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숭상하는 것이니 진리가 아니다. 이슬람교도 성경에서 밝히는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엉뚱한 다른 인물인 마호메트를 내세우니 진리가 아니다.

기타 종교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지 않는 데에서는 일치한다. 불교는 하나님조차 부정하니 말할 것도 없다. 개신교 역시 오늘날 "병 고치는 기적 운운" 하며 소란스럽게 하나 그들 역시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성경과는 다르게 가르치니 역시 마찬가지로서 악령들의 작용이다. 오늘날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는 다음에 소개할 "21바울 형제"를 배출한 북한 교회다. 중국 땅에도 역시 그런 교회가 형성되어 있다고 하겠다.

개신교의 그런 배도적(背道的-살후 2:3) 특징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형통하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부인"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그 어디서나 들을 수 없다는 것 등이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비극적 현실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적의 진위를 구별함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기적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을 근거로 한다는 데에 있다. 사단이 나타내는 기적은 그런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낸다는 기적이라도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사이비라고 단정하면 틀림이 없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과 동시에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대로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이 두 가지를 항상 겸비해야 그것이 진실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첫 사람이 어디서 생겼는가. 저절로 생겨났다면 계속 저절로 생겨날 일이니, 첫 사람과 우리가 이렇게 차별화가 되어 있으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없다는 데에 왜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첫 사람은 저절로 생겨났다면, 우리는 부모에게서 났으니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그 첫 사람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지 못하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세상의 무신론자들이여.

그 뿐 아니라, 첫 사람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오늘날도 인간은 쉴 새 없이 저절로 생겨나야 하는데 어디 단 하나라도 그런 사례가 있었던가. 저절로 생겨난 사람은 오직 그 첫 사람 하나뿐이라고 설정해 놓는 것 자체가 지극히 반(反) 과학적 결론이 아닌가.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특정 논리의 합리화를 위해 일부러 꿰어 맞추고 다듬고 하느라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왜 자각하지 못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단 한 가지 사실을 들어 만천하에 폭로시킨 바 있다. 즉 인간으로 진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특정 동물[유인원이든 그 무엇이든]은 암수 양성으로 동시에 생겨나야 하는 것이니 벌써 이 자체가 사전(事前) 고안, 기획 등의 결과물임을 입증함이다. 이미 우리보다 더 완벽한 지성(知性)이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었음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증명되고 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저절로 생겨났든 진화를 했든 오직 그 첫 사람 하나에만 국한시키니 그런 비이성적인 논리가 어디 있는가. 다시 말해 그 첫 사람[성경은 그 첫 사람을 아담이라고 한다]도 마땅히 부모가 있어야 우리와 같은 속성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그 뜻이다. 그 부모가 누구인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어버이'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족보를 설명하여 "낳고 낳았다" 식으로 말하지 않고 "그 이상(以上)은, 그 이상은"[눅 3:23-38] 하는 식으로 나가고 있다.

"낳았다"[마 1:1-16]는 식으로 서술해갈 때는 아브라함까지만 한정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했음을 밝힘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누가가 밝히고 있는 계보(系譜, 世譜)와 부분적으로 다르다. 이유는 마태의 경우 직접 부모가 낳은 것을 말하는 것이나 누가의 경우 양자(養子)로 맞아들인 사실까지 포함시켜 거슬러 올라 감이다. 다시 말해 "아담의 이상은 하나님이시라"[눅 3:38]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아담을 낳으시지 않으셨으나 엄연히 아담에게 어버이가 되심을 천명함이다.

그러므로 부모 없이 인간이 태어난 적이 없는데 첫 사람 곧 인류의 조상만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 하니 이런 어리석은 백성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현실로는 이 세상이 그런 우민(愚民)으로 충만하다. 우리 사람이 처음부터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즉 어리석은 인간으로 창조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단이 이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는 실증(實證)이다. 인간을 조종하여 어리석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 탓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버이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존재이시다. 어버이와 그 소생[자식]은 닮은꼴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시니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드신 영물들이 모두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체로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아담]이 영원히 존재하므로 거기 맞추어 창조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버이 같으신 하나님께서 왜 사단에게 지배 당하도록 만드셨느냐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환경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 스스로가 만들어 이루어진 것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이라는 선입견을 버릴 일이다. 이것이 인간이나 영물이나 다 같이 행사하는 '자유 의지'의 결과이다. 그 자유 의지로 영물인 사단은 범죄하여 영원 멸망에 처해 있고 그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아담은 죽음에 이른 것이다[롬 5:12]. 이런 사실만 보아도 피조물 스스로 만든 결과에 의한 것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것과 둘이 한데 섞여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장차 전개될 본격적인 생명의 세계와 죽음[멸망]의 세계 그 어느 쪽에 들어가 영원한 세월을 보내게 되느냐 하는 그 판가름을 하고 있는 때 그리고 그 장소에 위치해 있으니 곧 이 세상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 사람에 따라 놀랄 사람이 적잖아 있을 것이다. 아마 모든 사람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고 놀랄 것이다. 구원을 받아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선물로서 얻는 구원이라 거의 모두가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인데 이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담 스스로 자살 행위를 했기 때문에 오늘의 인간고(人間苦)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시면 완전한 말 그대로의 자유이지 부분적인 자유는 있을 수도 없고 그런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능력과는 별개이다.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의미의 자유인 것이다.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것이다. 스스로 능력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몫이 있고 우리 인생들이 마땅히 하게 되어 있는 역할 또는 몫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구분을 제대로 못함으로써 혼란이 오는 것이니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이니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느니 하는 어쭙잖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셨고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행복의 요건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하나됨에 있고 이는 다시 말해 어버이되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한 몸의 각 지체로 기능(機能)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절대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생명과 행복한 삶의 철칙인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이 철칙을 시건방지게 벗어날 생각을 품고 무시하여 심드렁하게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보려는 빗나간 개인적 욕심 곧 이기주의가 범죄요 악[선과 대립]이요 불의, 불법[의와 대립]이다. 죽음과 죄가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데에서 유발된 것이다[롬 5: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구원하신다면 과거처럼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롬 14:9/고후 5:15] 하심에 있다는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알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 바울 사도가 복음을 설명하면서 "선을 행한 자에게 영생으로 보답하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 진노의 심판으로 보응하신다"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다[롬 2:7,10/요 5:29]. 여기에는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것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 왜냐면 선을 행하기를 요구하실 때는 그리스도를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악령 사단이나 아담이나 범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인간에게만 구원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느냐 하면 아담은 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고 다음 단계로 영계에 속한 영혼이 조성되어 단계별로 창조되어 이중 구조인 반면, 영물로서의 사단은 처음부터 영계인 에덴 낙원에서 창조되어 영이므로 한번 범죄로써 모든 것은 죽음 곧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단지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 멸망이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영계에서 창조되었으므로 자연계의 육체로서 처음 창조된 인간보다 순서상으로는 인간보다 늦게 지으심 받았지만 지식면에서는 인간보다 출중하기 때문에 이 지식은 능력으로도 통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꿰뚫고 행복한 삶의 근간이 되는 이 한 몸 체제로 인한 자기 부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하고 자기중심으로 행동했으니, 이렇게 알면서도 진리대로 행치 않을 때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같은 일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개연성이 충분하기에 별도로 격리시키는 차원에서 영원한 불 못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아담]은 같은 범죄를 저질러 그 대가로서 죽기는 해도 단계별로 죽는[단계별로 창조되었음과 같이] 것이 되어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감으로써 모든 인간이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이다. 우리 인간을 "죽은 자"[마 8:22]라 하신 것이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령한 몸으로 있어야 산 자인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구원의 기회를 맞게 되는 것이다.

아담 역시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굳이 먹었으므로 악령들처럼 고의적인 범죄에 해당되어 죽음에 이르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믿지 않고 거역함으로써 된 결과이고,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야 하는지 그 자세한 이유[한 몸의 구조이므로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는 등]는 모른 채 엉겹결에 지은 죄이므로 죄질이 악령들보다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두고 생각해도, 멋모르고 아담의 범죄의 결말[죽음]에 함께 휩쓸려 있는 터이므로, 우리 역시 공평공정하게 아담과 같은 또는 영물[악령과 거룩한 천사로 분류되기 전의]들과 같은 기회가 부여되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악령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비록 죄인이고 죄의 결과로 죽은 자가 되어 있기는 하나] 구원 받을 기회가 오늘날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 받을 기회가 있어도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심판을 자초하는 것으로서 규정되어 있고[원칙상 그렇다는 것이고 그런 중에도 얼마든지 회개하면 구원이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요 3:18]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 죄 용서 받아 성령을 받아 모신 사람들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의 범죄 전 아담의 위치에 복귀되어 "공평공정한 기회"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아담처럼 혹은 영물들처럼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여 영원한 자기 운명을 가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가 천국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영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께서 생명[영생]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생을 소유하였으므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고 죽은 강도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상태에서 그렇게 목숨이 끊어진 다음에는 하나님의 낙원으로 직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즉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 받음에 어떤 하자가 있거나 불완전하다거나 하는 것이 일절 없이 완벽한 구원임이, 이 회개한 강도의 예로써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회개한 강도의 사례는, 우리 구원에 하등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담이 범죄하기 전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던 그와 동일한 위치에 현재가 우리가 위치해 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버렸지만 아담을 창조하신 그 자체에 어떤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아담 자신의 선택에 의해 범죄하고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역시 아담의 그런 위치에 산 자로서 그리고 영원히 사는 자로서 자리잡아 있는 것이 현재의 우리 구원 받은 의미인 것이다. 고로 구원을 논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이 실상부터 알아야 함이다. 그래야 제대로 순서를 밟아가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된다. 제대로 순서를 밟지 않으면 정답과는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인생들은 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단계에서 기사회생하지 못하면 곧장 다음 단계 즉 사단을 위시한 악령들처럼 똑같이 영원한 불 못이 그 종착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악령들과 같은 "죽음"의 대가를 받았지만 단계별 과정을 거쳐야 함이 옳은 것은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아담 때문에 덩달아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아담 외의 모든 인생들이 당하고 있는 그 불공정, 불공평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담 홀로 창조된 것으로써 인간 창조가 끝났다면 별 문제이나, 범죄하기 전에 이미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창 1:28]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하실 때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 등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으므로[:28] 신령한 몸이 되어 있어야 공중의 새들이나 바다 속의 생물들을 관장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아담이 되어 있다면, 땅 위에서만 움직이는 들짐승이나 가축과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다스릴 수 있어도 바다 속의 생물들은 돌볼 수 없게 된다. 신령한 몸이 아니라면 물고기와 같은 육체 그리고 새와 같은 육체의 구조를 함께 지녀야 할 것인데 사람의 육체 그 어느 모를 보아도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고로 처음부터 인간은 신령한 몸을 입도록 창조되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리고 영계에 속한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에서도 보듯이 인간은 자연계만 아니라 그 대칭형인 영계도 아울러 다스려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자면 인간 스스로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어야 주변의 영물들을 관할함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많은 생명체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신령한 몸을 상실한 상태에 놓여 다시는 영생할 수 없게 되었으니 명실 상부한 죽음의 선고를 받은 "죽은 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모든 인류는 아담 때문에 덩달아 죽은 자가 되고 그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범죄 전의 아담처럼 당당히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기 의지로써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는 기로(岐路)에 위치하게 된 것이 현재 이 세상의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런 상황으로 온전히 정착되어 있음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믿지 않음에 따라 양상은 죽음과 생명으로 완전히 갈라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아담의 전철(前轍)을 각자 스스로 밟아가는 것이 된다. 믿어도 중도에 그 믿음을 버리면[눅 8:13] 역시 같은 과정을 따름이 된다.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의 결정으로 좌우된다. 그러니 이 결과[아담이 위치해 있던 영원한 세계로부터 추방당해 있는 현재의 모든 인류의 위치]에 대해 인생 중 그 어느 누구도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미는 단순히 인생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베푼다는 차원을 넘어서,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모든 인생들을 예외없이 공정공평하게 되돌려놓는 데에 있음이다. 그래서 새 창조다. 다시 출생함이다. 따라서 죄없이 아담의 죄를 뒤집어쓰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창조되지 않고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니냐 하는 불평불만은 이제는 있을 수 없다. 각자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 여하로 나타나는 영원한 운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해서 아담과 같은 에덴낙원이라는 좋은 환경까지 조성될 필요는 없으니, 스스로 범죄를 하느냐 않느냐로 좌우될 문제고 환경이 좋고 나쁨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은 일절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환경이 좋았어도 아담이나 악령들이나 범죄는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 비하면 우리와 같은 이런 자연계라는 열악한 환경이 우리를 분발하게 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차라리 더 나은 환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자극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믿는 경우,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여부로써 또한 그 순종이 가려지게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아담이 다름아닌 불복종함으로써 범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상황은 1,2단계로 나누어져 전개된다.

제1단계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느냐 여부로써 1차적으로 걸러지고 솎아지는 단계다.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써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 1차 단계를 거쳐 믿음에 들어온 이들은 2차 단계로 그와 같이 복종 여부가 저울질되는 것이다. 즉 선을 행하느냐 아니면 악을 행하느냐 하는 것으로 가름된다. 선을 행함이 무엇이냐, 좋은 것을 버리지 않음이다.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한 몸으로서의 생명 체제이니 여기서 이탈하지 않음이 선을 행함이요 죄를 짓지 않음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비로소 선과 의를 행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니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 등의 일은 일절 각자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에 달렸으므로 처음에는 믿고 잘 나갔으나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그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에서 떠나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고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다" 하신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가 많다는 것은 처음에는 누구든지 회개하여 순종하겠다고 하는 이들은 일절 차별을 두지 않고[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장래를 미리 내다보시어 장차 그 믿음을 버릴 줄을 아시더라도] 일단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선물을 주심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심이다. 그러나 이 구원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의미도 물론 포함하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여 죄를 짓지 않아 아담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는지 여부가 저울질되어야 함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롬 14:9/고후 5:15].

따라서 중도에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때는 약속 위반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감히 거짓말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죄가 되는 것이니 이를 회개 않으면 멸망뿐이다[히 6:6/10:26,29]. 또 처음부터 믿지 않은 사람은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길이 만천하에 열려져 있음에도 그 스스로 악을 선호하고[요 3:19] "불의를 좋아하기"[살후 2:12] 때문에 역시 같은 선고에 해당된다. 즉 "참고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했다"[롬 2:7-10] 함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는 '믿고 안믿고" 하는 언급이 빠져 있다[:7-10].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오직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것으로만 '심판이냐 생명이냐'의 기준을 삼는다고 스스로 풀이하여, 성경대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해석, 인간의 해석을 무단으로 개입시켜 이로 말미암아 자멸에 이르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기에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떻게 되어 그렇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느냐 하면, 이미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에 되는 일이다[고후 5:15]. 요점은 항상 이 자기 자신을 위하느냐 아니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느냐 하는 데에 있다. 생명은 무조건 살았다고 해서 사는[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몸의 체제에서 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한 몸의 구조에서 살아야 전체의 행복한 삶을 기약할 수 있고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한 몸 체제를 이루어야 하고 그 가장 기본되는 요건으로서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하는 것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한 몸의 원리로서 그 핵심이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여기서 삶[생명]의 법질서가 확립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함"으로써 구원되지 못하고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가 설명할 때 "죄와 사망의 법"[롬 8:2]에 매여 있다[7:14,24] 한 것은, ①내가 '먼저[미리]' 구원 받은 바가 되지 못하면 모든 나의 노력이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 되므로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되는 까닭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삶의 법질서에 대한 정면 위배가 된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죽음에서는 더더욱 벗어날 길이 없게 됨을 밝힌 것이다.

②또 이미 모든 인생이 죄인으로서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어긴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 첫 사람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생은 무조건 죽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현재의 죽은 상태에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의를 행하는 등 복종을 해도 그것이 내게 아무 효험이 없는 까닭이다. 죽은 자가 제 스스로 무엇을 할 수도 없고, 가령 한다 하더라도 죽으면 끝인데 그 자체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행한다고 해도 죽음이요 선을 행하지 않아도 죽음이요 죄뿐이다. 그래서 "오호라, 이 비참한 인생이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리요!" 장탄식을 하게 된다[롬 7:24]. 그러므로 첫째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며 죽지 않고는 그 어떤 문제 해결도 불가능하고, 둘째로는 이제 영원히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었음이 현실화해야 한다.

이제 함께 살아나 현재 생존해 있는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에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장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짜여져 있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영접해 모심으로써 완성된 것이기에, 이와 같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 함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버렸는데 무슨 또 나 자신이 있다기에 나를 위해 산다는 말인가[고후 5:14].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몸이 멸해졌다"[롬 6:6], 파괴되어졌다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계셨으나 죄를 짓지 아니하신 것과 같이 됨이다. 또는 바울 사도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 함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넉넉하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골 3:5/롬 6:12-14/고후 12:20]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내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룬다 함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다. 현재 [이 세상에거] 가장 시급한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함이다. 이 제사장 직무는 내 스스로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 중에서 수행된다[롬 12:1]. 그러나,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있지만 다시 죽은 자의 일을 하면 즉 나 자신을 위하고 나를 위해 산다면 아담처럼 죽음뿐이다. 그래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세상 삶을 백안시(白眼視)하게 되는 이유

①이와 같이 사람들의 구원이 시급한데도 나 하나의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며, ②그리고 신령한 몸이 아닌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써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미친 마음"[전 9:3]이다. ③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아래에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생각부터가 철부지이다. ④정식으로 사는 삶은 한 몸 의식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그리고 삶의 낙을 극대화하여 다시 말해 내 이웃의 숫자가 일 억이면 그 일 억 곱절만큼 확대, 확장, 확충시켜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이다. 고로 이런 데에서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옹졸하고 구차하기가 짝이 없다.

뿐만 아니다. 이미 우리는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 trini homo]으로 인간 삶이 완전히 옥죄어져 3가지 틀 안에서만 갇혀져 옴쭉달싹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밝혀져 있다. 이런 꼭두각시와 같은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여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을 것인가. 원래의 인간 삶은 사랑 가운데에서 명실상부하게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이런 3운법칙과 같은 족쇄에 채워진 삶이 아닌 것이다.

물론 족쇄에 채워져 있어도 이미 설명한 것처럼 개개인의 자유 의지 곧 영원한 운명에 대한 자결권(自決權)은 변함이 없다. 말 그대로 영원한 것에 대해서다. 이런 한시적이고 일시적임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예외고 제외된다. 이렇듯이 이 사실만 보아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3운법치과 같은 이런 것이 이 세상 생애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확연히 '증명'이 되어 있는데도 이런 데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그 이지(理智)에도 문제가 있음이 아닐런가.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는데 왜 3운법칙이 있는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강제, 간섭하시지 않는데도 이렇게 강제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 삶이 실제로는 인간이 누려야 할 본격적인 삶이 아님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증명하고 있음에도 굳이 고집스럽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까. 사단의 지배 아래 있다는 실상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 외에 달리 더 설명이 있을 수가 없다.

⑤이 세상은 모두가 자기중심인데다 자연계에 속한 것이어서, 영생하도록 되어 있는 원래의 인생 삶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빈약하기도 하지만, 주변이 모두 고난 중에 있는데[나중에야 어떻게 역전되든 현재의 실상대로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형통하여 부유하게 살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악한 것이요 절대로 선이 아니다.

⑥또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이 그 무지(無知)함과 악함으로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인데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더불어 한 세상 즐겁게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 역시 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맹목적인 자기 욕심이요, ⑦우리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한 몸 구조인데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핍박 받아 험한 세월을 보내고 지금도 코 앞의 북한 형제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지내는데 나는 여기서 소위 자유의 세계라 하여 삶의 낙을 누린다면 그 고난 받는 형제들과는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의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다.

⑧바울 사도는 교회에 충성된 자가 되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는데", 그는 말씀 전파에 심혈을 기울여 세상에서의 모든 핍박을 자진해서 받음으로써 우리의 본이 되었다. 만일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그가 보일 수 있는 "본"이라면 그는 당시의 그 어느 누구보다 호화롭게 살았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⑨부유해야 그래서 풍부하고 풍족해야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세상 잘 사는 것과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세상 사람은 잘 살기만 하는데 그렇게 잘 사는 것과, 마치 잘 사는 것을 두고 경쟁이라도 하는 것과 같이 된다. 하나님의 뜻으로 잘 산다면 하나님 믿지 않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최고로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 못하니 어리석음의 극치다.

⑩바울만 아니라 우리 주님 친히 우리의 삶의 표본이시요 대표이신데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잘 사시고 삶의 낙을 누리셔야 했었다. 왜냐면 머리와 몸으로서 하나로 통해 있고 같은 본질이지 서로 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히 "하나님의 희생 제물"이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임을 성경은 밝히고 경고하고 있다.

⑪사람 살리는 일에는 이와 같이 고난이 필수 요건이 됨을 주님 친히 그리고 바울 등 여러 사도들이 본으로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사신(使臣-고후 5:20)이 되어 그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제사장의 임무를 다하며 단 몇이라고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 시간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인데 어느 여가에 딴 생각을 하여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리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6:1] 자들이다.

⑫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해 두셨다. 이렇게 핍박을 받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자들이 감히 어떻게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살기를 꿈꾼다는 것인가. 사단과 한 패거리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인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곱게 봐주어 잘 살고 형통하게 방치해 두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니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는 말에 미혹되지 말 것이다. 이런 소위 "기복(祈福) 신앙"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⑬인간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동일한 피조물됨을 인하여 즉 한 몸 체제가 되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이는 진통(陣痛) 중의 신음(呻吟)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영역(英譯)은 통일되어 있으니, 우리말 번역 "탄식"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롬 8:22]고 했는데, 인간의 범죄로 그렇게 다른 피조물들도 고통 중에 있거늘 감히 인간이 되어 안일하게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다니, 사단의 속임수에 완전히 넘어가 멸망 길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⑭인간 양심에도 세상은 고해(苦海)인 줄 아는데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부자가 되어 떵떵 울리며 산다고 할 때 동질감(同質感)은커녕 이질(異質)감만 증폭시키게 되면 전도를 해도 전도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십일조 내면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고 형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 공경의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도 구원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 탓이다. 그런 세상 종교에서 "귀신이 굴복한다든가" 각종 "기적이 일어나는" 것 등이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속임수 차원에서 서로 짜고 하는 짓거리들이다.

⑮장차 영원토록 삶의 낙을 누릴 것인데도, 오늘 이러한 비극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들을 구원하고자 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우리 주님께 대한 충성을 입증해 보이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놓친다는 것은 세상에 그런 이기주의도 없다.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신다고 생각함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경, 모독이 되는 줄 왜 알지 못하는가. 이런 기회에 그런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이 안일하게 축복 속에 지내려 하니 양심마저 마비된 탓이다.

끝으로, 삶의 낙을 누리는 가운데 식욕이 으뜸이고 성욕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평생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했다[고전 8:13]. 이는 교회의 본으로서 자기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고전 7:1-40].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천국을 위해 고자(鼓子, eunuch)되는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하셨다. 신령한 몸도 아닌 오직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면서 그런 먹는 낙, 짝 짓는 낙도 없이 무슨 낙으로 삶의 재미를 누린다기에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현실

우리의 구원 얻음이 그냥 하나님 은혜로 영생하게 되어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神子]"이 되어 있다는 현실을 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아니라 실제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엄정한 현실 그대로인 것이다. 이 현실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음미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 아들이 죄를 짓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의 모든 영광 가운데 번쩍번쩍 하게 사는 것인데 이러한 과거와 똑같은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의 행색으로 이전 때와 같이 살아보려고 잘 살아보려고 덤비던 때처럼 하나님이 아들이 되어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을 믿지 않거나 숫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면 이 세상 사람[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과 분명히 차별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차별화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보이신 바로 그 모습 그대로다. 세상 사람은 다 살고자 하는데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것이다. 스스로 저주 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자처하시어 죽음밖에 태인 것이 없는 바로 그 모습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차별화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 세상 인간 중에 스스로 "나는 죄인이니까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위하여 그렇게 하신 단 한 사람이셨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유일하게 나타내신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러하다. 죄인으로서 저주 받은 자가 감히 이 세상에서 죄인이 아니고 저주 받지 않은 이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세상 사람은 다 죄인이고 저주 받아 있는 상태이고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들이요 하나님이 축복 속에 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므로 우리 구원 받은 의미가 바로 그와 같이 보내심을 받은 것임을 나타내고 이는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죄인으로서의 저주 받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있음을 이와 같이 명백히 밝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늘에서 모든 영광을 누리는 대신 그런 것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니 곧 스스로 죄인 되어 저주 받아 있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며[골 1:24] 바로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서 일하시던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4:34]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먹을 양식"[:34]이 되어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리요.
즉 목적이 고난 받음이다. 이 세상에서 고난 받음이다. 이전 믿지 않을 때처럼 죄인이요 죽은 자들로서 어찌 하든지 인간고 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어 왔던 그런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죽음의 고난 받기 위해 세상에 이런 구차한 몸[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신령한 몸 즉 영광의 몸을 유보한 채] 그대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면 당연히 천사와 같은 몸, 마지막 아담이신 현재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신령한 몸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런 목적이 분명하므로 이런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이전 구원 받지 못해 사단에게 억눌려 있던 당시처럼 이 세상 살고자 하고 편안한 삶의 낙을 누리면서 살고자 감히 생각이나 품을 것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천지 개벽이 아니라 인간 개벽을 이루었으니 즉 현재 내가 하나님이 아들이 되어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는 말을 무슨 잠꼬대처럼 여기는가? 그런 식으로 믿어 어찌 영생에 들어가려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커녕 구원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이들이여, 이 세상에서 그래도 웬만큼 살아가면서 소위 "믿음 생활" 하여 영생에 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가려 하는 모든 꿈에서 깨어날 일이다. 세상 삶의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모든 것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와서 나[무소유로 지내는]를 따르라" 하신 것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눅 18:22].

이 말씀을 듣고 그 청년은 마음에 기뻐서 "예, 그렇게 하고말고요" 했던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깊은 근심만 얻어 가지고 낙담 속에 물러간 것이다. "내 살과 피를 너희 모두에게 제공한다"는 자기 부인의 말씀을 듣자 많은 제자들이 놀란 가슴 진정하지 못한 채 썰물처럼 빠져간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요 6:66]. 이런 사람들은 물러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물러가는 이들을 막지 아니하셨다. 왜냐면 막을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 세상에서 너희 생명을 미워하라"[요 12:25]는 말씀에 적잖이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당신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다. 시급히 그들 중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당신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도 가려느냐?"이다. 가면 가는 것이다. 막지 않으시는 것이다. 좌로든 우로든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하나님은 일절 간섭하지 않으신다.

더더군다나 영생하도록 강제하신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자기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 들어가게 하신다고 꿈 속의 잠꼬대를 하고 있으니 거의 전부가 이런 실상이다. 사악(邪惡)한 사단의 일관된 거짓말과 속임수에 과연 혀를 내두를 지경이 아닌가. 이다지도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당신 앞에 죽음과 생명의 갈래길이 놓여 있다.

어느 쪽이든 택할 일이다. 생명을 원하거든 이 세상 사랑과 삶을 버릴 일이다. 이 영생 얻는 것과 세상 사랑은 물과 기름 사이이니 결코 조화될 수 없다. 이것을 취하면 저것을 버려야 한다. 둘 다 모두 취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부자 청년이 물러가면 가는 대로 버려 두셨고, 그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물러갈 때 막지 않으셨다. 당신도 막지 않고 버려두실 것이다.

50억 인구 중에 가령 단 한 사람만이 이 자기 부인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수용한다면 그 한 사람만 남기시고 다른 나머지 50억의 절대 다수는 버리실 것이다. 성경은 60만 장정 중에 단 두 사람 여호수와와 갈렙만이 가나안 복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사실로써 "거울로 삼으라"[고전 10:11]고 경고하고 있다. 자진해서 저주 받은 몸으로 죽기로 작정하여 세상에 뛰어 드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 구원의 유일한 색깔임을 명심할 일이다. 이것이 싫으면 아예 구원이나 영생이나 천국은 꿈도 꾸지 말 것이다.

'공짜'로 영생 얻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렇게 '공짜'라면 모든 인류를 다 자동적으로 구원하실 일이지 왜 사람을 차별하시는가. 인간을 차별하시는 하나님으로 악선전하는 꼴이니 이는 어차피 멸망당할 운명에 놓여 막가는 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설혹 모든 인류를 다 자동적으로 구원하신다 해도 이미 영물들 중에서 선한 영물 곧 거룩한 천사들과 악한 영물 곧 사단 일당과 같은 부류로 자연스럽게 분류되게 되어 있다.

이왕 그렇게 분류될 바에야 지금 이 세상에서 그런 분류 작업을 하는 것이 다름아닌 "믿어야 구원됨"이다. 즉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로 분류되고 사단이 악행함으로써 장차 멸망할 자로 분류되어 나온 것처럼 어차피 분류될 바에야 이 세상에 그 분류 작업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구원 얻는 믿음은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회개를 해야 그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신 것이다. 회개한 후 복음을 믿을 수 있음이다.

바로 이 원리원칙 아래에서 중도에 그 약속을 버리고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때 가차없이 그런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다. 그래서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구원이 "보내심을 받는"[요 20:21] 의미이므로 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뜻을 얼마나 수행하느냐 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지 여부가 정해지는 것이다[마 7:21]. 왜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이라는 의미이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므로[롬 14:9/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살 때는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아들이 되므로 그런 아들을 어느 아버지가 원하랴.

"육(肉, flesh)으로 난"[요 3:6] 사람의 아버지 아들 관계는 육으로 난 것이어서 그 관계는 변함이 없으나[왜냐면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오는 아버지의 육체를 물려받아 자식이 생긴 것은 역사적 현실이므로] 우리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치는 그런 것과는 전적으로 판이하게 달라 약속으로 된 것이다. 이렇게 약속임을 강조하여 성경은 첫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누어 역설해 온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물들은 이미 애초 그들이 창조된 뜻에 충실히 따르는 것과 따르지 않는 것을 따라 선과 악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기정 사실 앞에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인간들 역시 그와 같은 선과 악으로 분류되는 일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물들이 그렇게 영원히 분류됨으로써 현재 정착해 있으니 인간들 역시 예외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애초의 창조된 뜻 다시 말해 우리 피조물을 창조하신 뜻에 부합해야 그런 뜻으로 해서 생명을 선물하시어 살게 하신 목적과 일치함이다. 우리 역시 새 창조로서 목적이 있으니 곧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롬 14:9/고후 5:15].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또는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시되 최대한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날 죄인된 인간들처럼 무슨 이기적인 데가 있어 목적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확립되어 있는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심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 둘이 하나됨이니 따라서 우리를 위하시고 향하시는 모든 뜻과 목적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심으로써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심이니 곧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말씀하심이다. 이 조건을 어기고 벗어나는 것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 반대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곧 불행의 고통을 야기시키는 것으로써 끝남이다. 사단이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그 증명이다. 이러한데,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즉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도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 뜻을 이행하지 않고 즉 그리스도를 위하고 인생들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할 때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마 7:21]. 자기중심은 나의 상대가 되시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고 이는 곧 그리스도를 부인함이다. 그래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 경고하신 것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거듭 강조하지만, 절대로 "은혜", "거저 주시는 선물",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말을 절대로 곡해하지 말고 오해하지 말고 제대로 바르게 성경대로 알아들을 일이다. 우리의 행동 여하를 보시기 전에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는 일부터 먼저 하시어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신 것을 가리켜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엉뚱하게 공짜로 얻는 것 즉 죄인인데도[육신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마귀가 에덴낙원에서처럼 거짓말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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