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의 24개항 질문 (12)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2)



3. 삶의 구조------------------------------------------------------------------------------------------------------------------


공동체 의식

머리와 몸 관계도 짝을 말함이요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짝의 개념이니 각자가 머리에 속해 있어 '머리와 몸'의 관계가 기본 바탕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웃을 대할 때마다 그 이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상대함이 되는 것이어서 그러하다. 이런 생명의 법칙, 삶의 법질서는 처음 세상을 만드시어 "범죄(犯罪)라는 것이 없을 때부터 아니, 창조 전부터 확정되어 있어 오는 삶의 원리이니 하나님 친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원리를 어김으로써 범죄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짝으로서의 삶의 원리가 범죄로써 와해된 것이 인간의 현재의 "죽은 자"[마 8:22]로서의 상태인데, 이를 복구하심이 그리스도의 구원 곧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고전 6:17] 곧 '짝을 이룸'이다. 처음 창조로서의 생명체 아담이 범죄하여 죽게 되니, 부득불 인생들을 새로 창조하시게 됨에 이르러 그 짝을 이루어 사는 양상도 새로운 형태와 모습일 수밖에 없다. 즉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됨이다.


고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와 나를 별개로 보지 말고 이 둘은 하나라고 인식할 것이며, 나 혼자일 때 나 혼자뿐이라고 이전처럼 인식하지 말고 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된 둘이라고 하는 인식전환이 긴요하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다. 그러나 원리는 처음 것이나 새 것이나 동일한 것이니 곧 둘이 하나됨으로서,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과 말씀의 일관성이다. 일관성이 없으면 질서가 확립되지 못함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성경이 명백히 한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명량해전에서의 이공 순신의 자세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중과부족이고 모든 면으로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딱지가 붙어 있던 당시 상황이었지만, 이공은 그런 것은 일절 상관 않고 자기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이런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곧 주인 의식이다.


다른 뜻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의 핵심은 주인 의식에 있는데 그와 같이 자진 자발적으로 나타낸 감투 정신은 이 주인 의식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으로서 주인 의식은 공동체 의식의 정화(精華)이기에 이를 강조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은 이 '한 몸' 의식으로 살라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그 체제 안에서의 각자의 지체(肢體) 역할을 말씀하심이다.


구원의 본질


우리 구원의 본질도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를 이룸으로써 머리와 몸의 관계를 이룩함에 있음이다. 그리하여 한 머리를 모시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지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천국이요 그 예행 연습이 바로 교회라 생각할 때 무리는 없다. 죄가 무엇이며 그 대립 개념으로서의 의가 무엇이냐 할 때 이기주의, 개인주의 또는 자기 중심이 죄요, 공동체 의식으로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 나가는 것이 '의'요 '선'이기 때문에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삶을 예로 드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의식의 혁혁하고도 아름다운 결과로서 바로 임진왜란을 무대로 하여 전개된 그와 같은 역사적 사례 이외에는 그렇게 두드러진 예를 찾아보기 어렵기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당시의 교훈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편안하게 덜 열심을 내고 적당하게 지내도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니 모든 일을 잘 이루실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면 이것은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이 또한 양면성이다.


일방적으로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서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시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능하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들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감히 어떻게 나태를 부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건성으로 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하니,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일방적인 생각만 하기 쉬워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타심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능력이야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정한 일을 이루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항상 주동 역할을 하는 것이니 반드시 우리의 사랑의 의지, 믿음의 의지를 따라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함께 일하는" 의미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우리가 의도하고 작정하는 바를 이루게 해 주시는 것뿐이니, 그래서 열매 맺는 것도 "30, 60, 100배"라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렇게 일하는 것 자체를 자기 구원과 연결시키는 경우 그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한다.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목적을 삼으면 역설이 아니라 그 사람은 구원과는 절대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앞의 설명대로,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 받은 자답게 살라는 것이다.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 산 자처럼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구원을 위하든 무엇을 어떻게 하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고후 5:15] 안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여기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사는 것은 사는 법대로 삶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사는 법이 무엇이냐 하면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대로 사는 것이니, 그 법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 있으므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곧 자기 부인이다.


'사는 것'이 그렇다면, 그러면 '죽는 것'은 그 반대다.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15].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사는 법대로 살지 않음이 된다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아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실로써,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사람 생기자마자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 데에서 드러난 것이다. 자기보다 아우가 낫다고 하는 그 시기심과 미움으로 인해 죽인 것이니 아무 이유가 없다. 즉 정당성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죽음의 결과는 고통이다. 아벨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가. 인간의 죄와 죽음의 결과가 이런 고통 즉 인간고가 아닌가. 영원한 죽음은 따라서 영원한 고통이다. 그래서 산 자로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불 못에서는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가 피어 오른다"[계 14:11]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두 자기만을 위해 사는 '죽은 자'들의 근성인지라 서로를 해치고 고통을 주는 것 외에 각자에게 돌아오는 몫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일 죽이는 세상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대신 죽음의 고통만이 안겨지게 된다. 세상 종교에서 나타내는 그림에는 지옥이라 하면 험상궂은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양으로 그려놓고 있으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 "불 못"에서는 영물이든 인간이든 똑같이 고난 받기는 일반이다. 성경에서 나타내는 '죽은 자'와 '산 자'와의 구별을 항상 유념할 일이다. 이 자연계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첫째 사망[죽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갈 영원한 불 못은 둘째 사망[죽음]이다.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않고 벌레도 불 속에서 죽지 않는 영적인 세계다. 말하자면 사람이나 벌레나 이 자연계에서처럼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육체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단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뿐이다. 산 자는 산 자의 세계에 들어가 삶의 낙을 누리지만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세계[불 못]에서 죽음의 고통을 받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삶의 낙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니 세계가 완전히 대칭 관계로 나누어져 있음이다.


마지막 심판 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방금 설명한 대로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산 자'는 산 자대로 가는 데가 있다.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자[여기서 거지 나사로는 구원 받았으나 세상에서 어렵게 사는 이들을 대표하여 상징함이다]는 '산 자'로서의 아브라함과 함께 있게 되고, '죽은 자'로서의 부자[믿기는 하였지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한 결과-마 25:45]는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기 전에도 벌써 화염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눅 16:22]


재출생(再出生, 다시 남, 거듭 남-요 3:3)의 이치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마 15:18-20]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이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인다면,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홍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홍수가 나 부딪힐 때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다"[눅 6:45-49] 하심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모든 좋은 것, 올바른 것만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버리라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제자로 자처하는 이들은 무릇 누구든지 이와 같이 실천하는 자라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어 자신을 속이는 것뿐이고 나중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미, 믿는 의미가 일체 무효가 되는 것임을 지적하여 경고하심이다.


우리가 과거에는 그런 고상한 단어들이 나열될 때 죽어도 그런 일을 실천하지 못할 것 같이 생각하였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사람 사람의 진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진상을 알았으니 "새 사람"[골 3:10/엡 2:15/4:24] 이지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이 아니다. 죄인으로서 죽은 자이었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다는 것 이상으로 경천동지할 인간 개벽[천지개벽이 아닌]이 어디 또 있겠는가.  


우리가 "다시 출생하는"[요 3:3] 의미에서도 그리스도 친히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되신 그대로 내 안에 영원히 계시므로 내가 직접 모태(母胎)에 다시 들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4], 이를 그리스도 친히 나 위해 하신 셈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나와 그리스도는 이제는 불가분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다시 나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아 마땅히 죽을 것을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고 다시 살아난 것이 된 의미도 당연히 되는 것이다.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난 것이 "다시 출생하는"[요 3:3] 의미가 되어 있지만, 위의 그런 측면에서도 온전히 이치에 합한다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여자의 태(胎)에서 나오실 때] 죄가 없으셨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때는 죄인으로 태어났었다. 썩어질 수밖에 없는 자연계에 속한 같은 육체로 태어나셨으므로,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나 죄 있는 나 자신이나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태어나실 때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나신 것이고, 내가 다시 날[출생할] 때에는 죄 없는 자로 다시 났으니 죄를 짓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이 창조될 때 죄 짓도록 창조된 것이 아님과 같다. 중도에 그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의를 위하여 핍박 받아 고난 받아 고통 중에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함"[빌 3:10,11]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 순서다[롬 8:17].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엡 2:6] 밝힘과 동시에, 우리 각자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러야 함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양면성을 보지 않고 일면만을 보는 함정에 빠지는데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살리셨지만 우리 자신의 삶은 우리 스스로가 사는 것이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써 이제는 영원히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 됨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되어 있다[요 14:23/요이 1:9].


함께 하나가 되어 사는 데에는 이 하나됨을 유지하는 일정 방법 또는 철칙이 있으니, 갑과 을 둘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구조로서 갑은 항상 을을 대면하여 보고 을 역시 갑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고로 항상 의식하는 것은 보이는 자기 상대이지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갑은 을을 위하게 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된다. 즉 영원히 그런 식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됨이므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이것이 생명과 사랑과 삶의 영원한 법질서다. 즉 그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그런즉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이와 같은 삶의 정상적인 모습대로 되돌려 놓으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 즉 구원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했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하였다.


1년 365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가 아니시고 성령으로 계심이니 그러면 갑이 을을 보고 을은 갑을 보는 모양새는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의 '생각' 즉 '마음' 위주일 수밖에 없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나를 생각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생각함이다. 사랑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랑하는 상대를 생각함이 아닌가. 때문에 "하나님, 제게 대하신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시 139:17,18] 하는 것이며, "여호와 나의 하나님, 주님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저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도 많기도 하시니 제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습니다"[40:5] 함과 같은 것임을 앞에서도 밝혔다.


'생각'의 진지(陣地)


그러므로 나 역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기를 부지런히 하여[시 1:2] "생각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법만을 사랑하는"[시 119:113] 것이다. 영역[KJV]으로는 "I hate vain thoughts"라 되어 있는데 이 '생각'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원어는 단시 "나누어진, 분열됨[divided]"이라는 의미로만 나타나 있어 이 "vain"이라는 단어도 따라서 번역자가 갖다 붙인 것이다. 정확한 해석은, "하나님의 법"과 대칭시켜 놓았으니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것[생각]'이 그 확실한 풀이가 된다.


그것을 위의 설명처럼 "생각"이라 해도 좋고 "두 마음 품는 것"이라 해도 상관은 없다. 명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도외시하고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고함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렇게 하여 범죄를 하고 악령이 되어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모든 죄가 바로 여기서 발단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살피기 전에 자기 생각부터 먼저 하고 그 생각 따라 행동함이니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위함이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서[고후 5:15] 이 곧 자기중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함과 같이, "우리가 육체로서 움직이고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敵陣)을 파(破)하는 막강한 힘으로서, 곧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척결하려는 만반 태세를 갖춤에 있음"[고후 10:3-6]이다.


세 가지 가닥의 무기라 할 것이니, ①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 어떤 것이든 좌우 돌아볼 것 없이[좌고우면(左顧右眄) 없이] 단번에 일도 양단(一刀兩斷)해 물리치는 것이요, ②는 뇌리에 떠 오르는 일체의 상념[무익한, 긴급하지 않은]들을 마음에 떠오르는 족족 역시 앞뒤 잴 것 없이 단번에 지워 버리고 무시해 버리고 일고의 여지도 없이 깨뜨려 버리는 것이요, ③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작정하며 긴급하다고 느껴지는 생각이 떠오를 때 반드시 기도로써 주님께 먼저 여쭌 다음에 [그 지시를 받아-왜냐면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좌, 우 간에 행동하는 것이다. 즉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자세다.



모두 우리의 '생각'과 관련된 것이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요 13:2] 한 대로,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計數)하게 한"[대상 21:1] 사실에서도 보듯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침투로(浸透路)는 이 '생각'을 통해서다. 따라서 "마귀의 견고한 진(敵陣)을 파(破)하고" "모든 생각["imagination"-흠정영역]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한다"[고후 10:3-6] 할 때의 "파한다"[깨뜨려 부순다]는 뜻이 바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집어 넣어 주는 모든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다윗의 마음에 그런 생각을 넣어 주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다시 달리 표현하고 있으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저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시어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셨다"[삼하 24:1]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느냐 하면 둘 다 맞다. 이는 "악한 자의 임함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나", 다른 표현으로는 "저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살후 2:9-11]이라 했으니 이와 똑같다. 양면성인 것이다.


'3각 구도'


여기서 주체(主體)가 하나님이시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냐 할 때, 똑같이 주동적으로 움직임이므로 이를 '동시성'이라고 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대로 인간을 해치기 위해 생각을 넣어 주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이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인간 또한 주체이니 다윗의 경우 그 스스로 그런 생각을 물리치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생각에 스스로 동조하여 말려들어간 것이다.


고로 다윗으로서는 그 스스로 그런 믿지 않는 악심을 품어 인간의 힘에 의존하려는[군사력이 얼마쯤 되는지 알아보려는] 그런 망동을 저지른 것이다. 아담의 범죄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담 부부 스스로의 생각대로 한 것이다. 아니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무리 꾀었어도 단호히 그런 생각을 거절했을 것이었다. 물론 이 장면에서 하나님으로서는 아담을 시험해보시고자[창 22:1/대하 32:31]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통하셨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나 이렇게 형성되는 '3각 구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주재하심은 엄연한 진리다. 그러나 각자[시험하는 자나 시험 받는 자나] 자유 의지를 따라 충분히 시행되도록 하시지 결코 간섭, 강제하시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는 일이다. '3각 구도'를 좀더 풀이하면 ①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 ②생명의 법질서를 따르는 거룩한 천사들, 그리고 ③나 자신이 된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은 ②에 속하신다. 천사들을 통해서 역사(役事)하시고 천사들의 배경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①, ②, ③ 전체를 총괄하신다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①은 죄로 흐르는 것, ②는 거룩함을 따르는 것, ③이 나의 자유 선택인데 내가 스스로 선택한 대로 ②천사든 ①'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내게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가③ 자기 중심으로 나가기를 선택하면 ①로 모든 것이 조성되고, 반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면 ②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항상 좌, 우 간의 결정은 나 자신③에게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본으로 보이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처럼 살아서는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죽음밖에 거둘 것이 없다. 아담이 어떻게 살았던가 하면 자기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어 범죄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롬 5:12].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삶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었다[요 4:34].


어떤 경우에서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즉 몸으로서 머리를 위함이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의 삶의 본질이다. 이 한 몸의 원리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런 사리(事理)를 따라 믿음이다. 따라서 지금은 여러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야 하고, 그렇게 구원 얻어야 할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고난을 우리 몸에 채움으로써 즉 한 몸이 되어 있으니 머리께서 하신 대로 그 몸의 각 지체 로서 머리를 따라 행하고 동일한 보조를 취함에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내 스스로 고난에 임함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내 몸에서 채워지는"[골 1:24]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자진해서 채워야 하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 한 것이다. 이 인간 구원의 사업만 완료되면 우리가 더 이상 고난 받고 죽음에 매일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은 따라서 삶의 낙을 누리는 곳이 아니요 죽음의 고난을 통해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사업이 진행되는 장소요 때이다.


우리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는 의미가,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생명 아닌 죽음에 놓여 있다는 즉 죽은 자라는 표시요, 믿어 구원 받아 의인으로서 순종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건져 내는 땀 흘리는 수고를 하고 해산하는 고통 중에 있다는 증거다[창 3:16,17/계 1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롬 8:22]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말 번역 "탄식"은 진통(陣痛) 중의 신음을 말한다.


자식에 대한 이런 어버이 사랑은 친히 사람이 되시어 그 만드신 인간을 위해 해산하시는 고통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증된 것이다. 당신께서 고난 받으심을 비유하여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 맺는 것이라 하셨지만[요 12:24] 또한 동시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않는다"[16:21]고도 하신 그대로다.


그리고 이런 고통 후의 기쁨을 가리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 하셨고,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요 16:20,22] 하셨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숙청한 다음 세상은 앓던 이를 빼낸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이 그러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요 애통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미리 하셨던 그리스도의 경고는 분명한 것이니, 즉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2:25,26] 하심과 같다. 이 세상에서만[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는 이유


왜냐면 지금은 죽음의 고통에 스스로[즉 사랑 가운데-이는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을 말한다] 동참하는 때로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죽는 것이 목적이고 그리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유일한 이 세상 생존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우리 각자의 몸에 채우는 것을 뜻함이다[고후 4:10,11/골 1:24]. 우리가 이런 육체를 여전히 입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니 이를 반드시 명심할 일이다.


현재의 육체는 살라고 주신 육체가 아니니 신령한 몸이라야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는 육체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실 목적으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워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을 하기 위한 그래서 고난 받고 죽기 위한 육체다. 신령한 육체가 원래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본 바탕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살려고 하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움만 된다. 왜냐면 고난 받기를 무리하게 억지로 거부함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스스로 이런 육체[자연계에 속한]로 살기를 원하여 세상에서의 삶이 낙을 선택하는 경우, 이는 영원한 선택이 되어 신령한 몸으로는 절대로 삶을 누리지 못함 다시 말해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함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구원 받은 우리에게 이런 육체는 말하자면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선악과" 격이 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고 이제 우리에게는 "이런 육체를 따라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하심이다. 성경적 표현은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이다. 같은 뜻이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영원히 잃는"[요 12:25] 것이다. 까닭에 이런 육체 가운데에서의 생명은 미워함이 마땅하다[:25].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고통, 죽음을 자취하고 기피하지 않는 것이니 '믿는 것'과 '함께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빌 1:29]. 고난을 취하고 생명을 기피함이 결코 산 자로서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이런 심경은 그리스도 역시 친히 자연스럽게 토로하신 것이다. 십자가 죽으심에 임하여,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 저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습니다"[:27] 하셨다.


제자들에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시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3] 하셨다. 이 상황을 성경은 기록하기를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33]고도 했다.한편 생각할 때, 이상과 같은 경고를 친히 제자들에게 주셨으니 그 자리에서는 그런 기도 즉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어야 옳지 않은가 할 것이다.


이런 심경은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제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제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눅 22:42] 하심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흠이 되랴. '한 사람'으로서의 자연인 그대로의 솔직한 심정인데, 오히려 이런 말씀이 있으심으로써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않는가. 즉 우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나 의지력이라도 있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으셨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임이다.


"그러나,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습니다", "그러나, 제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자신 큰 위로를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는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하고 크게 부르짖으신 반면, "영혼이 돌아가시기"[요 19:30] 전 "다 이루었다"[:30] 하신 데에서도 재차 확인되는 것이요 똑같은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와는 다른 사실, 즉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양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론 이렇게 하지도 않으며 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는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라 오직 그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루어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몸[의 각 지체]의 역할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이니, 친히 나를 위해 죄인처럼 되시어 나와 함께 죄인으로서 받는 즉 '한 인간'으로서의 받는 고난, 저주, 죽음을 맛보신 것임을 그대로 반영하여 드러내심과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을 극명하게 표출하신 적나라한 심경이 이상 말씀들을 통해 유감없이 나타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이러한 죽으심을 바탕으로 한 구원의 기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롬 8:17] 고난 즉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증거로서의 현재의 고난인즉, 의기양양한 자랑 가운데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승리의 개가(凱歌)의 찬송으로 죽음의 고난을 기쁨으로 맞게 된다. 이전의 인간고(人間苦)와는 전연 의미가 다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그렇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우리도 이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결코 통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나 나 자신이나 똑같은 사람이지만, 역풍을 뚫고 헤치며 함께 나아가되 그리스도께서 앞장 서시어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 내어 완화시켜 주신 그 덕택에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하나 유념할 것은 이 때 기도하시기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 12:28]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내가 영광스럽게 하였고 다시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요 12:28]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다. 곁에 선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그래서 천둥이 울렸다는 둥 해석을 했지만 그 말씀은 들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우레 소리라고 했지만, 그 날의 날씨가 천둥이 울 정도의 기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천사가 말한 것이라" 하기도 했다. [그 소리가 무슨 말씀이었는지는 그 후에 그리스도 친히 제자들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 하셨다. 친히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그 대답으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인데 왜 "나를 위함이 아니라 너희를 위함이라" 하셨을까. 그냥 그리스도께서만 알아들으시는 "소리"이면 충분한데도 내용은 알아 듣지 못해도 소리는 분명히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셨기 때문이다. 즉 친히 그 죽으심에 대한 중대한 말씀을 하시고 또한 이 내용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즉각 응답이 나오실 정도로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이 명백히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셨다는 그 뜻이다.


또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기 원합니다" 하셨을 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하셨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영광을 위하신다고 했는데, 아버지 친히 "내가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하셨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때 대답이, "아니다, 나는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너의 이름만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하시겠는가.


이 때 그리스도의 기도는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의지 표명이시다. 그냥 말뿐인 소원에 그치시는 것이라면, 그런 절박한 시간에는 무의미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기도 또는 말씀이 된다. 그러면 또 아버지의 응답은 무엇인가. "내가 이미 그렇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하시지 않고 "네가 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네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요 17:4,5/13:31,32 참고] 하신다면, 마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실 줄 알고 아들께서 또한 그렇게 하심이 되니 이 경우 또 다른 형태의 이기주의,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장면은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고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는 그런 양상으로 나타나져야 합당하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 가지 편견을 지녔는데, 이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인간을 조종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인간 스스로 잘못 판단하여 된 것도 있으나 어찌 하든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그런 모든 그릇된 관념을 불식시키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필수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이런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으니 더욱 힘쓸 일이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이지, 나는 가만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어 주시지는 않으니 그렇게 하시면 사랑의 원리의 동시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도 부득이 해서 일시적으로 모시는 것도 아니고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자신을 주신 결과요 그래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요, 내가 영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어서도 아니고 오직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되 동시에 함께 움직인다는 이치에서,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에게 선물로서 자신을 주셔서[이것이 나의 구원이다] 내 안에 임하여 계심이다.


그러나 나 또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내 몫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내가 원해서 내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되어 있음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 누추하기 짝이 없는 내 안에 계신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사람은 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왜 인생은 누추한지 그 까닭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이나 영물이 범죄했기 때문에 생겨난 상대적인[대립, 대칭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또한 일부 피조물[영물들 중의 악령 및 인간 아담]이 범죄하면서 스스로를 깨끗하지 못하고 추악하고 흉물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룩함"이라는 것은 범죄하지 않는, 범죄와는 전적으로 담을 쌓은 상태를 가리킴이다. 범법, 범죄와는 대칭 개념인 것이니, 범죄가 무엇이냐 하면 한 몸 의식을 따르지 않고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그와는 반대가 되게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일체를 말함이다.


그런즉 아무리 추악한 인생이라도 그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진 이후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할 때 그는 깨끗하고 거룩해진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졌다"[요 15:3] 하셨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어 거룩하게 하신다"[엡 5:26] 함과 같으니 그래서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다"[요 17:17] 하셨다.


"중생[regeneration]의 씻음"[딛 3:5]이라 하였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계 7:14] 했으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완전하여 깨끗하지 누추하거나 흉악한 모양새가 아니다. 때가 묻어 흉측스럽게 된 것은 피조물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고로 때 묻은 것을 씻어 빨래하여 희게 했다는 것은 원상태로 회복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하여 우리가 구원 받아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졌다 하심은 무슨 뜻인가[요 15:3]. 이는 우리 구원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니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함과 같다. 이미 이루어놓으신 우리의 구원[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을 통해 믿는 것이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인[소유주]으로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9,10]고 한 그대로다.


우리의 구원은 그와 같이 이미 우리 위해 이루신 사실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의(義)로 정하신 것과 같으니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의로 정해진 것[롬 4:3]과 같은 이치다. 의롭다 하심이 곧 깨끗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당시도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지만 장차 아브라함도 장차 그리스도를 볼 것이니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인즉 그 때에 즉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믿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믿는 것이나 믿음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과거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모든 죄 용서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근거로 하여 용서되는 의미였음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되니 이 둘의 기본 자세는 서로의 '눈맞춤'이요 '마주 대하기'다. 항상 눈은 상대에게 가 있고 따라서 상대를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와 하나같이 되어 함께 살고 함께 움직인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나는 항상 그를 의식하게 마련이다. 하나님과의 차이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와 같이 우리 육체의 오관(五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신다는 의미는 불변이고 분명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정확한 이해는, 영이시기 때문에 이 너르고 큰 광대한 우주를 품에 품으실 수 있고 동시에 그 만유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시고 보살피실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겠다. 공기를 예로 들어도 진공 상태가 아니면 그 어느 곳 침투하지 않는 데가 없어 그야말로 자유자재다. 그러나 영으로 계시니 영이신 만큼 공기와 같은 물질이 아니시므로 공기처럼 진공이라는 제약 같은 것도 없이 그야말로 무소부재(無所不在)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 없이는 절대로 떨어져 죽는 일이 없다" 하심과 같이 우리 개개인에게 마치 내가 잘 알고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잘 알고 사랑해 주는 어떤 사람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보살피시고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는 표현이신 것이다. 최대(最大)와 최소(最小)를 똑같은 비중으로 한번에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의 형태가 다름아닌 바로 이 "영(靈)이시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신(神)이라 할 때의 그 '신'의 의미인데, 물론 영물들을 "영"[히 1:14]이라 또는 "신"[고후 4:4]이라 함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이 경우 '신 또는 영'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대칭 개념으로서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의 의미를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소원한 느낌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친숙한 것으로 알아들을 일이니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창 2:7/히 12:9/사 57;16/슥 12:1].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이시므로 이 사실을 믿는 자답게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시는 나의 주인님[주님]을 의식하게 되어 있다. 유의할 것은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의한 것이므로 보이는 것이 믿음이 아님이다[롬 8:25/히 11:1]. 보이지 않으신다고 나와 함께 사시는[거(居)하시는] 성령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살면서도 대화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우리의 기도이다. 그리고 대화가 없다는 것은 동거(同居, 함께 사는 것)함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이는 심각한 위험 신호가 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석자직(席子直, 중국) 목사의 증언이다. 매사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하였는데 기도하기를 잊고 행동했더니 귀신[네피림(창 6:4)의 죽은 영]이 이를 즉각 알아채고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이 귀신은 석 목사가 쫓아내려던 대상이었던 것이다.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의 기도


'의식한다'는 것을 논한다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하나님 미워하시는 일만을 골고루 행하고 있는 인생들이니, 하나님의 진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노커녕 존재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 이 세상 신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생을 어두움의 장막으로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면 이런 정상적인 의식 상태로 당장 돌아오게 되는데 그 예가 빌립보 간수의 경우다[행 16:29].


그러나 사람마다 이런 의식을 되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간수 외에도 당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간수처럼 무서워 떨지는 않았고 간수처럼 바울과 실라에게 와서 구원의 길을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특별히 죄수들은 더욱 그러한 의식 속에서 떨어야 할 일이지만 그들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사장(祭司長)으로서의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식[하나님을 의식하고 자기의 죄인됨을 자각하는]을 되찾고 정상적인 반응[구원을 열망하는]을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함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막에 갇혀 있는 인생들인데 유독 구원 얻은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신[요 16:33]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관계로 세상[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배경]이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의 것이라면 자기의 것인즉 사랑할 것이므로[15:19] 미워할 리가 없다. 세상이 미워하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한다면[요일 2:15] 세상 편이 되어 세상과 보조를 맞춘다는 뜻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멸망할 운명을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막 속인 이 세상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만지지도 못하는"[5:18] 것은 그리스도 친히 자기를[혹은 자기의 것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사람이신]께서는 이미 세상[그 배후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므로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김이기도 하다]을 이기셨으므로 패자는 승자를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믿음과 관계되고 따라서 한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어서 믿음이 있는 나 자신에 관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세상은 여전히 불신(不信,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운데 있으므로 그냥 그대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역임에는 변함이 없다.


믿음,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 여부가 모든 것의 열쇠[관건]인 것이다. 따라서 어찌 하든지 주님[나의 소유주, 주인, 머리되시는]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것이 목적으로서 오직 그 뜻을 알고자 하고 그 뜻을 행하려 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적극성, 능동성, 주인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것으로써 항상 마음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히 12:28/고전 7:32,33/고후 5:10,11/롬 12:2].


이는 하나님 친히 우리 각자를 생각하심이 바로 그러하시기 때문이니[시 40:5/139:17,18], 이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 즉 둘이 하나되는 원리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해 사는 이치를 따라 되는 쌍방이 함께 움직이는 동시성인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약 4:8]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신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5] 한 다음의 경고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요이 1:9] 사실을 근거로 한 "가까이 함"이다. 따라서 이는 상호간의 사랑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용어(用語)다. 흔히 부르는 찬송가 [기독교 교회라 자처하면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Nearer my God to Thee]으로 시작되는 의미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쳐 침몰해 갈 때 선상(船上)에서 그 배의 전용 기악대가 이 찬송 곡을 연주하였다는데 이는 사람이 그 임종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심판"[2:12,13/5:9]으로 나아간다는 장송곡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평소 하나님을 모시고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고후 5:15]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죽을 때에 가서 회개하려는[실제는 회개일 수도 없는] 그런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장송곡이 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거나 하지 않고 살아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그 순간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어야[경력-고후 5:10]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운명했던 회개한 강도처럼 영원히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오직 순종의 길로만 가겠다는[이것이 회개다] 확고한 결심을 한 경우에만 한한다. 그리고 그 결심대로 그 죽음의 순간까지 변하지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마 24:13/히 3:6,12-15/6:10-12/계 2:26]. 창졸간에 당한 죽음과의 직면에서는 그렇게 할 경황은 없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그래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한다"[잠 29:1] 함과 같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to draw nigh, to come near to God-약 4:8] 것과 "가까이하려 하는"["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even though it be a cross"]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의미가 있다. 전자는 사랑하고 있는 둘이서 서로 그 사랑을 확인하며 상대를 기쁘게 해 주려고 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하지만, 후자는 둘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사랑은 하나됨을 말하는데, '더욱' 가까이한다니까 아직 하나되지 못한 현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상태에서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가까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니지 않은가.


구원은 그런 노력이 아니라 이미 얻은 가운데에서 얻으려 하고[빌 3:8] 구원 받은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2:12] 것을 말함이다. 다시 말해 이미 구원 받아 그 구원 받은 능력으로써[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이므로] 스스로 얻고 이루려는 의지 작용의 '동시성'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 받음으로써 내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면 나는 절대로 "얻지도" 스스로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면 그 어느 누구도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나아간다는 그 뜻이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려 하지 않고 그 스스로 또한 '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주인의식이다. '받음'과 동시에 '주는' 동시성이다. 섬기는 종이면서 동시에 섬김을 받으니 또한 주인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이런 사랑이 그 본질이므로 항시 이 원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단히 '자라 간다' 즉 그리스도를 점차 닮아간다는 말과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말 역시 동의어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자기 노력으로 점점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사상은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 그 자체이다. "선물"로 받으면 되는 것이 구원인데 왜 자기스스로 조금씩 노력하여 조금씩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감히 품어진다는 말인가. 이는 다름아닌 마리아를 중재[중보]로 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발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찬송을 부르는 그들 스스로는 은혜로 얻는 구원을 믿는다지만 그들 스스로 자기 색깔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할 것이니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신다"[약 5:9] 함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 믿음의 형제들 간에 서로 원망하게 되면 이를 회개하지 않을 때 멸망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렇게 범죄할 때는[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는] 단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그 어떤 경우에도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구원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이루어진 것이므로 범죄하게 되면 그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꼴이 되어 구원 역시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엄중한 경고에서 요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 즉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한 것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3:15] 한 그대로다.


"형제"라 하였으니 믿음의 형제를 말하고 자기도 지금 믿음 가운데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즉 구원 받은 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미워하는 행위로 인해 [이를 회개하지 않을 경우] 살인하는 자가 되어 그 구원이 취소됨이니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 함으로써 이를 명시한 것이다. 요한일서 초두에 요한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自白)하면 저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1:8-10] 한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경고인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5:16,17] 즉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히 10:26]가 아닌 다음에는 회개하면 용서가 되는 것이나 회개하지 않으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요한은 여기서 형제 사랑이 없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형제 사랑이 없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이로 만드는 일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 하면서 그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되었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음에도 서로 미워하므로 반드시 죽을 것인데도 자기는 범죄가 아니라 하고[계명을 어겼음에도] 구원은 그대로 받는다고 하니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결과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고 단정한 대로 사도 요한 역시 같은 논조일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안다"[요일 2:3-5] 함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함"[:6]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행하느냐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새 계명"[:34] 그대로 행함이니 요한이 이를 정확히 풀이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즉 자기 부인["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을 토대로 한 모든 행함이요 사랑이다. 가령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한 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지"[:18] 않을 때 "우리는 진리에 속하지 않는"[:19]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을 둘로 나누어 생각했으니 하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23] 다른 하나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23]이다. 이 둘은 하나로 통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둘로서 따로 분리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후자는 전자와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이는 자살행위이다. 야고보나 바울의 경고와 같이 요한 역시 분명하게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안에 거하시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안다"[:24] 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이와 같이 순종하기로 결단하지 않는 마음 자리에는 성령 또한 계실 수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임하여 오시지 않는다. 자기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모셨다" 하나 성령 받음이 그리스도를 모심인데 그리스도께서 오실 리가 없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된다고 가르치는 사이비, 이단 종교는 요한의 복음도 아니요 바울의 복음도 아니고 베드로가 가르친 복음도 아니다. 사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양심의 가책도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단지 그것]을 시인함으로써 구원된다는 미신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은 무시하기 일쑤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0-22]는 엄중한 경고를 내리고 있다.


위의 말씀대로 하면 이런 사람은 기도 응답도 되지 않는다. 만일 그럼에도 기도가 응답되면 이는 필시 악령으로 인한 것일 수 있으니 엄중한 주의를 요한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그 빛 가운데 행하고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하심이다. 모든 죄와 불법은 어두움이지 빛일 수가 없다. 하나님과 사귄다[교제, 교류, 소통]는 자는 마땅히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아야 즉 범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2:1] 함과 같다. 그러나 동시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 변호하는 이, Advocate, th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하였으니 모순된 말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모순된 말을 할 리 없다.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범하는 죄에 대한 용서다. 짐짓[고의적으로 즉 알면서도] 범하는 죄[히 10:26]는 해당되지 않으니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다[요일 5:16]. 요한은 용서가 되고 되지 않는 것을 분명히 갈라놓고 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그런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따라서 죄를 지음에 대한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보응을 뜻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떨지"[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않을 수 없는 것이다[행 5:11/9:31]. 고의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지 죄인 줄 알고 짓는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으시게 만들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아는 자로서 다시 죄를 지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지식만으로는 구원되지 못한다. 그러한 죄를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가 없는 한 그는 영원토록 성령을 받아 모실 수가 없음에 유의할 일이다. 오늘날 그렇게 하여 스스로를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 예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은 "고의적인 범죄"에 대해 괘념할 필요가 없다. 오직 이제부터는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회개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회개를 차일피일 미룰 때 이는 고의성으로 인정되어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일 내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인생이 아닌가. 따라서 현재의 자기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일이니 즉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했을 경우 고의성을 띤 범죄에 해당되지 않으니, 오직 지금까지 잘못 믿은 다시 말해 인간의 종교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해하여 믿은 잘못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구원의 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급선무다.


그런즉 이런 사람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두 가지로 진단을 내리게 된다. 즉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끝까지 고집할 때는 다시는 용서되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 되어 영영 구원의 기회는 없다. 아니라면 현재의 자기 구원 받았다는 것을 속은 줄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으로 진실로 회개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는 일이다.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 혼탁에서 거의 전부가 후자에 해당된다.



"우리가 그[그리스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5-7]이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몰라서 지은 죄 즉 형제 사랑의 결여와 같은 것에 해당되지만, 앞에서 말한 그런 경우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는 다시는 어두움[범죄를 예사로 생각하고 철저히 죄를 끊겠다는 결의가 없는] 가운데 행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요한의 이 편지는 물론 교회에 준 것이므로 전자를 지목하여 요한이 경고를 한 것이나,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이들이 많기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것이므로 자기를 위해 살 아무 근거가 없으니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 다음이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 홀로 죽으셨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의 권위로서 다시 천명한다. 그것은 성경대로의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교리로서 그 배경에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도사려 조종하고 있음을 너무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 긴급하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 관계


그래서 사람이 자라나 그 부모를 떠나 남녀 짝을 이루어 한 몸이 되는 그런 남편/아내 관계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일차적(一次的)이도록 가까운 사이가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임을 밝혀,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어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주의(注意) 산만함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2-35] 한 것이다.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내게 행복을 주고 생기를 주고 원기를 주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론으로 그렇다기보다 실상이 그러함을 우리 각자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 없이 나 홀로 있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라는 존재가 없음이니, '나 홀로'로서 인식하는 결과는, 내처 그런 영원한 고독 가운데서 "세세토록 올라가는 고난의 연기"[계 14:11] 속에 과거만을 "슬피 울며"[마 22:13] 되씹는 결말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자기중심이란 달리 표현하자면 바로 이런 '고독'인 것이다.


고독하다고 인식하지 않아야 그래서 하나님과 불가분의 사이로서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니 자연스럽게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야 그러한 영원한 고독을 면하게 된다. 사람마다 고독은 두려워하면서도,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괴이하게도 자기중심을 선호한다. 코앞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자기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자기중심인데 그렇게 억지로 정상(頂上)에 오르면 철저히 고독밖에 없거늘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미련함이라 할까.


하나님께서 으뜸이 되어 계시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피조물을 위하신다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증거다]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는 까닭이다. 자기도 웬만큼 지혜롭다 스스로 생각하여 교만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고도 얼마든지 고독하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한 결과다. 한편 자기 부인은 상대가 있어 상대와 서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다.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는 까닭이다. 따라서 둘 또는 여럿이 아무리 숫자가 많을지라도 한 몸 즉 하나를 이루고 있으므로 영원히 고독하지가 않다.


피조물과 창조주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홀로 계시기에 고독하셔서 아들을 낳으신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신의 형상으로서 아들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을 만드시면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생겨나진 적이 없건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기막힌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다. 즉 하나님만이 머리가 아니시고 자기도 얼마든지 머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허영심, 욕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대표적 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영이시고 나는 육체라고 하여 그런 식으로 거리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당연한 차이일 뿐이다. 창조는 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의미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아들을 창조하심[낳으심]이니 이로써 외아들[독자, 獨生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게 된다. 이 관계는 '실체'와 '형체'라는 양면성으로서, 이 때부터 비로소 양면성의 원리 또는 삼위일체의 법칙이 확립되고 가동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 아닌 것 곧 육체가 창조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으로서의 이 부자(父子) 관계는 다 같은 본질로서의 영(靈)이시다. 그래서 아들도 물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는 이런 '아들' 창조가 반복될 수 없으니 왜냐면 양면성을 이루심으로써 충분히 작업이 마쳐졌기 때문이다. 본체는 형체로서 하나이만 족한 것이다. 이렇게 종결 지우심으로써 삼위일체의 원리가 수립되고 정착된 것이다. 즉 최고의 기준이 정해진 것이다. 이런 '실체'와 '형체' 관계는 전에는 없었다가 이제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이같은 창조는 필요가 없게 됨이다.


이제는 새롭고 다른 차원에서 이 아들을 통해 '전에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는' 창조가 시작되니, "하나님께서 영"이시라 할 때의 그런 영이 아닌 즉 그런 '영'의 상칭(相稱, 대칭, 대립) 관계를 이루는 '육체'가 마땅히 창조되는 차례다. 앞에서 지적한 '최고의 기준'을 이제부터는 일제히 따르기 시작하는 창조이다. 여기서부터 '실체'로서의 하나님과 대칭되는 '형체' 다시 말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화가 이루어지니 곧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피조물" 세계 곧 만유(萬有)인 것이다.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그룹'과 '스랍'들이다. 이 모두 그 고유의 형체가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동일하다. 같은 영들이라도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 때의 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간단히 표현하면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형체를 지님이다. 하나님의 성령도 "비둘기" 형상이니, "불의 혀"와 같은 형상이 있지 않으냐 하겠지만 일정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에 성령을 때로는 "일곱 영"[계 1:4]으로 표현되시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 말 그대로 모든 피조물의 그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영계(靈界) 곧 에덴낙원에서 그 영계의 땅["ground(英譯)"-창 2:19]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됨으로써 인간[아담]보다 월등한 지식[지식은 능력으로 통한다]이 있는 영물(靈物, 곧 "거룩한 천사"나 악령)도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아담]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창조된 서열로 보나 신분과 지위로나 아담이 단연 우위이지만 지식 면으로는 주변 영물들의 보좌를 받게 됨으로써 상호 의존 관계에 있어 일방적으로 어느 쪽도 자기 우월성을 과시함이 없도록 즉 교만해지지 않고 피차간 겸손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하심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창조의 최고 작품으로서 인간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자연계를 만드셨고 그 안의 모든 생물체를 지으셨는데 그 정상을 이루는 최고 걸작이 인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6일 창조"에서의 모든 피조물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 이 인간[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영계[에덴낙원]가 창설되는 시발점을 삼으신 것이다. 그래서 영계에서의 각종 동식물이 창조되었으니 영계의 동물들이 영물(靈物)들이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중의 하나다.


영계가 자연계와 대칭이 되어 있으므로 성질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고 할까. 그래서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의 "땅[ground]"으로써 창조된 영물들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도 스스로를 변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으로 변신하여 나타나는 것도 그런 예이다. 첫 사람 아담이 애초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이 자연계에 속한 "흙[dust]"으로 지으심 받았으나 영혼이 조성됨으로서 신령한 몸으로 있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영물들이 오늘날 인간들에게 신[또는 영]의 행세를 하며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인간이 애초의 신령한 몸을 상실하고 '죽은 자'가 되어 이 자연계에 예속된 육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령들이 소위 "외계인(外界人) 운운"[과거에는 동양 일원에서 "신선(神仙)"이라는 것으로 속여 왔지만]하는 것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한낱 속임수일 뿐이다. 인간 외에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피조물은 영계의 영물들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피조물로서 육체라는 점 외에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계시고 우리는 나중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먼저 계시어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능력 면에서 우리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으심은 당연하다] '지, 정, 의'의 인격성에서는 하나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류하시겠는가. 인간 아브라함을 "친구"라 하심이 그 증거다. 더군다나 이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는 이상, 이 점에서는 더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영물들이 아담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영물들이 범죄하여 악령이 되어 있을 경우 이들을 처벌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담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를 처벌할 수 있는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는 계교를 씀으로 인하여, 또한 자기 말을 듣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지배력 아래 두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세상이 현재 그 악령[악신]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이 결과로 인한 것이다.


아담이 죽음에 함몰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려 아무 능력이 없게 되었으면 하나님 친히 악령들을 처치하시지 못하느냐 하겠지만, 아무리 악령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무기력한 피조물일 따름으로, 이런 악령들이나 악인들을 처치하는 업무는 첫 사람 아담 자신이 하게 되어 있는 역할이다. 이것이 인간 및 영물 등을 창조하신 원 의도를 따르는 것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이를 번복하실 수는 없다. 물론 처음 창조를 말끔하게 지워 버리시면 될 일이다. 지워 버리시지 않는 한, 비록 한 가닥 흔적만 남겨 두신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철저하신 원리원칙주의[공명정대, 공정공평, 일사부재리 등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를 의미한다. 이 원리원칙 고수가 실제 모든 일의 근본이요 기본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법질서 확립을 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의 원 의도라는 것은, 하나님 친히 인간이나 악령들을 다스리려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아담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일을 관장하게 하시고자 하셨음을 의미한다[창 1:26].


피조물이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말이 성경에 있으나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그런 "원수지간(怨讐之間)"의 의미는 아니니 즉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친다는 의미일 수 없는 것은 피조물이 조물주께 도대체 무슨 해를 끼치겠는가. 피조물이 아무리 잘못 해도 동료 피조물에게 잘못 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피조물 인간을 지으셨는데 이 뜻을 무시하고 피차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해치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일이다.


잘못 했건 잘했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피조물들을 어여삐[귀엽게] 보심에는 한결같으나,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세우신 대의명분에 어긋나 같은 동료 피조물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되니 이런 행위를 용납을 하실 리 없다. 사랑의 특성은 하나됨에 있으므로 그 지으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는 그렇게 해를 당하는 피조물을 조물주이신 하나님 자신과 일치시켜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악행 즉 범죄행위는 일절 용납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피조물[특별히 이 경우에는 인간을 가리킴]에 대한 한량 없으신 사랑을 확증하심과 더불어 이런 원리원칙을 따르심을 또한 영구적인 본으로 보이셨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은 이와 같이 시종일관하고 중간에 변함이 없으시다. 이 일관성은 질서 확립 차원에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가 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니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그리하여 모든 인간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요 5:27] 악령들을 영원한 형벌의 처소로 보내시게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악령들을 형벌하는 것은 사람[아담]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오히려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에 들게 되자 인간이나 영물을 막론하고 심판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심으로써 이 지위는 회복된 것이다.


인간이 현재 비록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악령과 대등하게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교회]과 악령과의 대등한 전쟁 양상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계 12:17]. 따라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세상 앞에 소개할 때 '구원자'로서만 아니라 '심판하시는 재판장'으로 함께 명백하게 알린 것이니 곧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고 손에 키[a winnowing fan, 곡식 따위를 까불러 껍질은 날려 보내고 알곡만 모아들여 고르는 농기구]를 들고 자기의 타작(打作, 곡식의 알을 떨어서 거두는 일, threshing) 마당을 정비하시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마 3:11,12] 하였다.



악령들이 아직도 영원한 불 못[火湖, lake of fire]에 들어가지 않고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은 인생들 가운데 모든 악인들이 최종적으로 추려지고 걸러지고 솎아내진 다음에 그 악인들과 함께 영벌(永罰)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꾀어 죽음에 빠뜨렸고 오늘날도 한사코 인간 구원을 막기 위해 기를 쓰고 덤비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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