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 (3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ㅡ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 마지막째ㅡ"지구 종말은 언제 오는가?"


(3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ㅡ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 마지막째ㅡ"지구 종말은 언제 오는가?"




지구의 종말은 마지막 심판을 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는 때를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적 그리스도의 등장이 먼저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적 그리스도의 표지를 이마나 손에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재림하시는 모습은 모두 보게 되나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맞는 이들인데 어떤 이들이 살아남아 그 통치 기간 중에 들어가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오직 이 시대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희소식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되 땅 끝까지라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지고 있는 사명입니다. 
  
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10. 기타 몇 가지 고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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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몇 가지 고찰점

§  그렇다면 퉁구스카[Tunguska] 사건 때 보인 것처럼 그 정도의 "뱀[용]"의 형체와 부피가 실제 에덴낙원에서 애초 아담을 대하던 그런 몸인가 하겠는데, 우리가 영계라는 실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고 이렇다 할 정보나 자료가 없는 만큼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추단할 수 있는 범위도 넓고 자유롭다 하겠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밝히지 않는 것을 억지로 추단한다는 것은 별로 이득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일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런 범위 한도 내에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단이 저주 받아 그렇게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음"으로써 그 몸이 병적으로 비대해져 정상이 아닌 이상(異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함이다. 우리로 치면 몸이 부어 오른 것과 같다 할까. 이미 우리는 사단이 인간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흙"[비록 에덴낙원이 이 자연계는 아니지만]을 먹고 배로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은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실상 우리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단지 추단(推斷)할 뿐이다.

그렇게 추단해서, 사단의 자신의 저주 받은 결과로 우리 인간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영물이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관인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앞서 소개한 그 퉁구스 폭발의 증인처럼[두 눈 달린 것이 "트루우, 트루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상공을 가로질러 갔다고 하듯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진 우리의 육체와 다름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바다에서 용과 같은 것을 목격하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가히 천지를 진동하는 것과 같은 우렁찬 것이었다고 하니 우리는 그들의 그런 증언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은 영물이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아니면서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본질을 반분(半分)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무리하게 여차여차하게 되면 부종이 생겨 퉁퉁 부어 오른 것과 같은 그런 현상도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영계에 속한 몸의 특성상 그것이 더욱 비대해지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닐까.

왜냐면 성경에서도 "용이 크다[계 12:9/20:2]고 했으므로 여기서 느끼는 어감(語感)은 정상이 아니게 비대해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음이다. 용은 천사장들 중의 하나였다. 사단만 특별히 "크게" 만드실 리는 없다. 이는 영계인 에덴낙원과 대립이 되는 이 자연계에서 뱀이 유난히 다른 동물들보다 특별히 더 크지는 않다는 사실로써도 판단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의 뱀은 영계에서는 용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대립적인 관계인 것이다.

대립[대칭, 상칭] 관계는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본질을 공유하는 관계다. 따라서 영물들은 얼마든지 인간의 육체로 자신을 변환시켜 인간의 딸들과 교합하여 자식들을 생산한 것이 "네피림"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하고는 본디의 자기 형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경우 저주를 받아 강제적으로 항상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변환되어 항구적으로 그런 모양새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 단정해도 아무 하자는 없다.

영물들[영계에서의 식물이 아닌 동물들을 여기서 지칭하여 "영물"이라 하는 것임]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특별히 동물]를 지닌 생명체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동물은 자기와 대칭되는 영계의 영물로 스스로를 전환시킬 수 없어도 영물들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그래서 성경도 천사들을 가리켜 "능력이 많다"[벧후 2:11]고 하는 것이다. 영물들의 능력이야 그 식물만 보아도 생명나무가 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데에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사단은 거짓과 속임으로써 인간 구원을 저지하려는 자이므로 자기 정체를 감추려 하는데 그런 비대해진 모습을 인간에게서 감춘다는 것은 당사자로서 여간 고역이 아니지만 그러나 저주가 저주되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같은 저주를 받아 인간은 땀흘려야 겨우 먹을 것이 생기고 그리고 죽을 변을 치르면서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 고통에 견주어서도 사단이라고 절대로 예외일 수가 없다.

이런 이상(異常) 상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단의 ‘반(半) 영(靈) 반(半)육체 상태’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단은 원래는 영[영물]으로서 인간의 눈에 뜨일 수 없지만 흙을 먹음으로써[실상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비슷한 상태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인데 따라서 사단은 전력을 다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인간의 눈에 그 모습이 발각되고 그 정체가 폭로될 것이므로 필사적으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부담을 안아야 하는 저주라 할 것이다.

그래서 움직일 때마다 전력을 다하는 괴로움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의 눈에 띄게 된 것이 이른바 "용"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비정상 상태에서 용을 쓰고 기를 쓰고 움직여야 할 판이 되어 비정상적으로 그동안 그렇게 비대(肥大)해졌지 않았나 말하자면 몸이 부어 오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사단은 영물인데 어찌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이야기하느냐 하겠지만,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저주 받아 "흙을 먹고 배로 기어 다닌다"는 것이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의미를 우리가 모른다고 했지만 실상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의 원래 실상이 신령한 몸에 속하여 영생하는 것이었는데 범죄함으로 죽음에 이르는 이와 같은 흙에 속한 몸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었은즉[롬 5:12]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정상 상태에 있는 영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지능 역시 정상 가동이 아니라 할 수 있어, 모든 지식을 수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봄이 옳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정상 복구되기 전에는 그런 불가항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성경이 이와 같이 설명을 현재는 유보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할 것이다. 그 때 가서야 정상적으로 기능이 작동되어 죄다 알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는 양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 일이다. 마치 이런 상세한 설명이 성경에 없는 것을 가리켜, 진실이 아니므로 얼버무리려 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그 정반대임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또는 자기 지혜의 역부족을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우리 인간의 육체인지라, 인지의 발달도 다니엘의 예언[단 12:4]처럼 [꾸준히 증가하여 나가지 않고] 갑자기 때 맞추어 급상승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최소한 오늘날 정도의 지식이 발달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써 모든 것을 설명했다 가정하더라도, 그러면 당시 사람들 중 누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런 설명을 시도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설명이 없다고 해서 부질없이 의혹을 품는 등의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아담)도 에덴낙원에 있을 때와는 달리 그 몸이 이 지상으로 추방되면서 자연 물질계에 알맞게 그 몸이 축소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다. 이미 신령한 몸의 형태를 박탈당한 몸이므로 애초 지상의 흙으로 창조된 그 모습 다시 말해 지상에 널려 있는 각종 짐승 정도의 그런 몸집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 물질계의 조건에 맞추려면 여러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예컨대 우리의 몸집도 이 이상 커도 안되고 작아도 안되는 등] 이에 반하여 영계는 완전 자유의 세계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임의로 몸을 확대 수축도[물론 그 한계는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즘 발굴되는 거인들[네피림]의 유골을 보면 실로 엄청나지만 그런 정도의 크기는 제한된 숫자이고 인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소수에 한해서 그렇게 끼어 있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인류 전부가 그렇게 거인이 된다면 인류 생존에 부적합한 양상이 되어 멸절은 시간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담은 처음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었으나 영혼이 조성되면서부터는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살아 신령한 몸이 되면서 그 몸이 확대 수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부부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에덴낙원에서 현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금방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서서히 그렇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면 여자가 선악과를 먹었지만 금방 그 몸이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담 역시 여자의 말대로 하여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먼저 먹은 여자의 몸이 금방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해 버렸다면 아담이 먹었을 리 만무하다.

고로 서서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기 시작했으니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그 몸을 감싸고 있던 광채가 사라진 것이다. 사라지면서 아담 부부는 비로소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몸의 부피라 할까 형태만은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축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그런 축소 기운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시고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추방당함과 때를 같이 하여 인간의 몸은 이 지구[자연계]에 적합한 몸집의 형태로 위축 또는 축소되었다고 보면 될까.

무화과 잎사귀는 이 자연계에 속한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영계에 있는 무화과나무 잎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실 무렵에는 인간의 몸은 거의 완전히 현재의 규격대로 작아졌고 따라서 무화과나무 잎은 맞지도 않을뿐더러 "피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는 새로 생긴[인간 범죄로써 죄의 대가인 죽음이 왔으므로] 철칙을 따라 양[자연계에 속한 동물로서 영물은 아니다]을 잡아[희생 제물 곧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그 벗긴 피 묻은 가죽 옷을 입히시게 된다.

가죽 옷을 입을 때는 인간의 몸은 완전히 현재의 형태로 되어 버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성경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자세한 설명을 유보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상상의 나래라도 펼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성경이 당시 사정으로[지식이 지금처럼 "더하지 않았으므로"-단 12:4] 인하여 자세히는 설명하여 기록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로 어린 아이처럼 믿으면 되는 것을, 공연히 긁어 부스럼 내는 식으로 당치도 않는 설명을 가하려 하거나 아예 신화나 전설처럼 여겨 무시해 버린다면 이는 절대로 온당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추방과 동시에 가죽 옷을 입히심이니 털북숭이가 아닌 인간의 피부를 자연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이제는 급하기 때문이다. 방금 지적한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니까 그냥 덮어두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만 그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범죄 전에는 살아 영생하는 몸이었다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이 자연계에 속한 죽음이 아담의 범죄 때문에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롬 5:12]. 자연계의 육체로서 어찌 영생하는 몸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단의 거대한 몸집은 이상 생각해본 둘 중 어느 하나이거나 아니면 둘 모두가 해당되거나 그런 정도일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에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 역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원래부터 영계에서 창조되었으므로 그 형태 그대로이니 이 자연계에서도 마찬가지이나, 단지 앞서 지적한 대로 이상(異狀) 비대증 다시 말해 인간이 저주 받아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자 병듦이 생기는 것처럼 사단의 영적인 몸도 우리를 기준해서 말하면 부어 오른 것[부종(浮腫), 부증(浮症)]과 같은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저주 받아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결과라 하겠다.

그런 거대한 몸집을 끌고 더구나 배로 다니면서 인간의 눈에 발각되지 않고 자기 정체가 폭로되지 않으려 하니, 바로 그런 고통스러움이 저주이다. 어쨌든 이런 거대함은 저주의 결과라 단정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가 이제 거침없이 출현하게 되어 있는 오늘날까지도, 사단은 자기 자신을 용이 아닌 영적인 거물로 부각시키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비해 능력 면으로 숫자 하나만 모자란다는 따위의 말까지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사단 자신이다.

저주로 인한 결과로서의 그의 고통은 사단만은 아니니 그가 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그가 고통스럽게 만든 인간이 모두 그러하다. 인간이 범죄로써 죽음의 고통을 당하니, 범죄하지 않은 피조물들까지 한 몸[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이므로]의 이치에서 함께 고통을 당한다[롬 8:22]. 인간을 구원하실 요량이 아니시라면 다른 피조물이나 범죄하지 않은 거룩한 천사들까지 고통으로 함께 신음(呻吟, groan)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신음은[우리말 번역은 "탄식"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아이 낳을 때의 극심한 진통을 의미하는 것] 인간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장차 한 몸으로 복귀되어 있을 인간[구원 받을 자]과 어차피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그 때문에 즉 한 몸된 이치로 받는 고통이다[고전 12:26]. 하나님께서도 이 거대한 우주를 한 몸의 체제로 만드시고 친히 그 머리[대하 13:12/골 2:19/1:18/엡 1:22/4:15,16/5:23/계 1:5/고전 11:3]로 계시니 그 머리되신 특성상 당연히 인간과 함께 고통 받으심이요 그리스도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요 그 사랑의 확증이다.

왜 우리가 사람 살리는 고상한 일을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고난 받게 되어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채움이다[골 1:24]. 또 그와 같은 근본 이치와 더불어 인간의 비극적 현실을 또한 말함이니, 곧 사단에게 압제당하여 사단이 인간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함으로써 우리가 이에 맞서는 전쟁 마당인지라 여기서 받는 전상(戰傷), 전화(戰禍)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서 각종 고난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미 완성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한 몸으로서의 함께 당하는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고난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신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사람 살리시는 고난 중에 지속하시는 그 위치에 계심이다. 이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따라 우리가 지금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심과 같다. 아버지 친히 아들과 더불어 우리 구원을 목적으로 고난 중에 계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악령들은 한 몸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로 인해 받는 당연한 고난이다. 고로 차이는 생명 있는 자들은 이 한 때 고난이 그치면 그 다음부터는 영원히 고난이 없고 사라지는 반면 범죄자들은 영원토록 그 고난을 면할 수가 없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지금은 모름지기 고난, 고통의 때이니 이 세상에서 위로 받는 것을 한사코 결사적으로 멀리 할 일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위로[고통을 면하는 의미만 아니라 억지로 환락으로 바꾸려는]는 [장차 나타날] 저주로 역전되기 때문이다[눅 6:24,25/16:25]. 그래서 웃는 자가 화가 있으니 장차 울 것이라 하셨고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게 되리라 하셨다. 모름지기 남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울면서 호소하는 제사장의 기도 그리고 전도 책무를 다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면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울며 기도하면서 이렇게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되어 있으니 참으로 삭막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서도 성경의 안위[위로-롬 15:4]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의 지혜"[딤후 3:15]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벧후 1:21]. 즉 십자가로 향하시던 주님께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마음에서 우러나 하신 말씀 곧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 16:33 ]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더불어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히려 낙심천만이 되어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 하셨으니 우리 역시 능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터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하는 같은 편지에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는 말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생명 있는 자, 다시 말해 생명은 누리되 생명의 한 부분 또는 한 측면으로서의 고난을 이 세상에서 거쳐가고 있는 우리들의 특징이다. 생명력 약동의 증거이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이 세상에서만 한정된다. 영원 세계에서는 다시는 구경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먹고 산다"는 아주 매혹적이고 긍정적인 말이 있지만, 과연 우리는 넘치는 희망 가운데[롬 8:24,25] 힘이 넘쳐 나고[사 40:31] 노래하고[엡 5:19] 춤추는[눅 6:23] 그야말로 신바람 나는 삶인 것이다. 고난 고통 중에서 그러하다.

생명의 낙을 누려서 나타내는 '삶'이 아니라 고난 받는 중에 맛보는 또 하나의 색다른 별미(別味)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이런 생명이 없으므로 잠시 한 때뿐인 이 세상 위로[이 세상 지나면 영원히 다시는 이런 생명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게 되므로]에 허겁지겁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믿는다는 사람이 이런 세상 사람의 일을 따른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다는 증거다.

본디로 돌아가, 사단의 육체는 저주로 그러하다 하더라도 사단의 능력은 이전과 같아 아무 제한이 없다. 왜냐면 능력 면에서 저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영물로서 처음부터 지으심 받은 그대로다. 사람이나 기타 형상으로 자신을 변환시킬 수 있는 능력도 물론 포함된다. 그렇다면 사단 역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축소 확대할 수 있다면[신령한 몸의 특성으로] 그리고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할 의도라면 항상 자기 몸을 축소시키면 될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영물들이 그렇게 축소할 때는 짧은 순간에 특정 목적을 위한 것일 뿐, 평상시에도 그렇게 축소한 채 활동해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 정도로 외에는] 제대로 능력을 작동시키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을 때는 그 세계에 걸맞게 풍부한 체격의 정상적인 형태 즉 사람을 위해 그 조력자로 창조하심 받은 "짐승들[영물들]"과 같은 즉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체형(體形)을 유지했었다. (신령한 몸은 또한 그 확대 수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한 몸집은 이런 자연계에는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미관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에 부적합하다.

성경은 악령 사단을 공포의 대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부단히 경고하고 있다. 실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요 사단은 영물이라 신(神)으로 그리고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이 세상 임금", the prince of this world]로 군림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아담 아래 있던 영물이요, 상대적으로 현재 인간이 미약하기는 하나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이다[요일 4:4]. 

원래부터 즉 창세기 기록에서부터 에덴낙원의 땅
["ground"-땅 자체가 영계에 속한 영적인 것]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되어 있는 영물들이지만 마치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처럼 창세기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영물들이 스스로 자신을 변형 또는 변환시켜 인간의 육체로 전환시킴으로써 자식들을 낳은 것이 곧 "네피림"[창 6:1-4]인 것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대칭형으로서 자연계와 전혀 별개의 세계 또는 존재가 아니라 관련이 분명 있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적 존재가 되어 있는 인간[아담]을 위해 에덴낙원[영계]이 창조되었으므로 거기의 동식물 역시 이에 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 위주(爲主)다. 따라서 영물인 사단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무리하거나 억지의 해석은 아니다. 천사들을 "영"[히 1:14]이라 하는 것은 고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대한 대칭[상칭, 대립]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이시라[요 4:24] 할 때는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즉 모든 피조물과 상칭(相稱)되는 가장 완전한 존재 형태를 가리키므로 이와는 또 별개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반드시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로 되어 있다. 천사들이 "영"일 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영계에 속한 육체 즉 영적 육체를 말함이다. 악령 일당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아직도 당연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엡 2:2]이다.

그들의 그 "공중"이라는 영역이 이 지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달까지 포함해서 아니면 태양계까지 망라하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은 이런 공중을 말함이 아니라 에덴낙원이 존재하는 그 영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에덴낙원의 위치도, 애초 아담이 처음 에덴낙원에 들어갈 때와는 현재가 다르다고 해야 옳다. 왜냐면 그동안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까지 저주 받는 등 크나큰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계와 자연계가 대칭 개념으로 존재하는데 어째서 영계가 마치 별개의 자연계인 것처럼 그와 같이 사단이 하늘 저 멀리로부터 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오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영계를 "하늘"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라 함은 최소한 땅 위의 일정 공간 즉 공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우리의 기도를 시작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이로 보아도 온통 이 우주가 자연계이지만 자연계 중에서도 일정 거리를 두고 하늘이라는 영계가 위치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분부를 받들고 천사가 당도하는 데에도 "빨리 움직였다"[단 9:21]고 했으니 상당한 거리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지상으로 오다가 이 지상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엡 2:2]로서의 악령들의 저지를 받는 광경까지 묘사하고 있다[단 10:13].

영계가 자연계와 대칭인 만큼 영계와 자연계는 서로 맞붙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고 영계가 이 우주만큼이나 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계라도 구분이 지어져 있을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에덴낙원이 영계라고 해도 창세기 기록에 에덴의 동쪽에 동산을 창설한 것이 에덴낙원이라 하고 있으므로 이미 에덴낙원이 존재하기 전에도 영계는 있는 것이다. 에덴이라는 이름까지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다.

구분하기가 애매 모호하기는 하나 워낙 우리가 영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단지 삼위일체 원리에 의해 자연계에 대비되는 별도의 닮은꼴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므로 무어라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점은 있다. 그러나 설명을 못한다고 해서 그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 삼위일체의 원리가 엄연히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삼위일체의 원리에 대한 증명은 3운법칙이라는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첨단 과학시대라 해도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파고 들기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지능인지라 역부족이라는 한 마디로써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원래의 우리 육체는 이런 나약하고 한정적인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 한 대로 우리 자신의 이러한 실상부터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첫 걸음이 아니랴.

§  오직 기기묘묘한 것은 이미 지적했지만 지구상에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龍)"이란 존재를 인생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특이한 의미에서는 유일한 '짐승'이다. "용꿈을 꾼다"는 말도 있듯이 동양에서는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만들어 주는 장본인으로 여겨 길하고 상서로운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 임금이 입는 옷에 용의 무늬를 그려 "곤룡포"라 하지 않는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는 내게 넘겨진 것"이라 한 그대로다. 세상 사람은 무조건 이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바라니까 길한 것이지,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바로 불구대천의 인류 원수인 것이다. 자기 손위였던 아담[인간]을 자기 밑에 깔고 앉아, 멸망하기로 되어 있는 자기 운명을 만회해보고자 하는 가증스러운 자다. 아담을 넘어뜨린 데에는 아담에 대한 시기심도 작동된 것은 물론이다.

동양에서 "무슨 띠"니 하는 그 12지도 다른 짐승은 다 우리가 아는 짐승들인데 유독 거기에 '용'이 당당히 끼어 있는 것도 유의할 만하다. '해태' 같은 것도 영물이라는데 "용"만이 일상화된 개념이다. 각종 종교에서 그 권위를 상징하는 모양새로도 용의 그림이나 조각이 안들어간 데가 거의 없다. 서력 기원 전후 또는 그 이전에도 역사의 기록에 보면 "길다란" 발광체 모양을 한 불덩이가 천공[天空]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장관(壯觀)이 간혹 인간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앞에 언급한 대로 인간의 눈에 발각되고 폭로된 사단인 것이다. "몸 사면에서 광채와 불이 나며 특별히 앞 부분에서 불을 뿜는" 형상이었다 하니, 코[어떤 목격자는, "입"]에서도 불을 뿜고 있는 형상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고로 용의 거동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실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사단이 당황할 리는 없다. 성경이 그렇게 거듭거듭 용이 바로 사단이라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이 성경보다 사단의 말을 더 믿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 그러하니 세상 사람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면 오늘날까지도 용을 사단이라고 곧바로 지칭하는 이는 거의 아무도 없는 형편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힐 정도로까지 '신비한' 것이다. 이 신비의 정체와 실체는 다름아니라 사단이 모든 인생들의 마음을 조종하여 자기의 정체를 능히 감출 수 있었다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용의 정체가 드러나도 여러 가지로 미화하고 혹은 별도의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고 하는 등의 용 사단의 능력은 실로 엄청나다.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한낱 육체이니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고로 우리와 사단과의 전쟁은 같은 피조물끼리의 싸움이지 상대가 안되는 것끼리의 아웅다웅이 아닌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힘은 상대가 안된다. 악령들은 영이고 그래서 신(神)이고 우리는 육체다. 그러나 정작 싸움의 본령[本領]은 육체적인 힘에 있지 않고 정신력, 영적인 힘, 사랑과 믿음에 따라 나타나는 우리의 의지력(意志力)에 있는 것이다[엡 6:12]. 그러니까 싸움이 제대로 되는 것이다.

물론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 편이고 성경은 우리 각자에게 천사가 할당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마 18:10][행 12:15]. 그러나 하늘에 전쟁이 있어 대판 싸움으로 사단이 이와 같이 지상으로 쫓겨 내려온 경우 외에는, 사람과 사단[ 및 악령들]의 전쟁이니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는 까닭이다[히 1:14]. 그러나 주동(主動)은 우리이지 천사들이 아니니 천사들은 오직 우리가 움직이는 정도에 따라 함께 움직임이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 하심도 같은 뜻이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시어 계시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님께서 나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기만 하고 내가 직접 영접해 모시기만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는 한번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위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항상 나의 삶 그 자체로써 나의 의지력이 주동이 되어 그리스도께 문을 열어 드리는 행위인 것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움직임이 계속 연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산 자로서의 활동 곧 움직임이다. 그러면 즉각 주님의 반응이 임하시는 것이다. 즉 "나도 네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시다. 이미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 시동(始動)을 거셨으므로 나로서는 항상 그에 대한 연속적인 반응을 나타냄이다. 마치 쉬지 않고 맥박이 뛰는 것과 같음이다. 죽은 자의 정체 또는 무활동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삶이다[고후 5:15].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시고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신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눅 12:8,9/딤후 2:12].

때문에 바울도 경고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2] 한 것이다. 왜냐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모든 것을 이루시고 오직 나의 사랑의 반응만을 기다리시는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대응이 다름아닌 나의 순종 곧 자기 부인,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居)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심도 같은 뜻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어떤 계명을 주셨던가.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이니 둘이 하나되는 원리다. 즉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신다. 우리로 말하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위하시고 나를 위해 사시는 증거로서 영원히 자신을 내게 선물로 즉 나의 소유(所有)로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을 선물로 주심이 그 뜻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소유가 되는 것은 사랑의 본질로서 따라서 한번 그렇게 되었다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니니 사랑은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 주고 받음이니 섬기고 동시에 섬김을 받음이다.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은 없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나를 위하심으로써 시종(始終)하심과 같이 나도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이 "그의 인자에 거하는"[롬 11:22] 것이 된다.

§  성경은 분명히 우리와 사단과의 전쟁이라 했으니,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일방적이므로 그것을 싸움이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이다[창 3:15]. 따라서 우리의 "선한 싸움"[딤후 4:7]은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 대 불의의 전쟁이니 하나는 불의이고 하나는 정의다. 그러므로 신바람 나는 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 영적(靈的) 전쟁에서의 우리 승리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를 한사코 유지해 나가는 때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은 사단과 세상을 이기고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의 승리자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하신 그대로다. 왜냐면 사단의 시험[그리스도의 광야 시험-눅 4:2-12]에서 보듯이 사단은 이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이기고, 우리의 이김은 지킴에 있는 까닭에, 한결같이 아버지를 위하시고 끝까지 아버지를 위하기로 결의가 되어 계신 이상 항상 이기심이었던 까닭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리 몸이 자연계에 속한즉 현재 겉으로 보기에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새가 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승패 여부는 위의 지적처럼 이런 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부득불 정의 쪽이 "약하다"[고후 13:4]. 먼저 우리 발꿈치가 상한 다음에 상대의 머리를 짓밟게 되는 순서이기 때문이다[창 3:15]. 따라서 현재는 오직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데에서 자기의 강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내 능력[전지전능, 무소불위, 천하무적]이 약한 데에서 온전하게 된다"[고후 12;9] 하신 그대로다. 거듭 강조하지만 물리력이 아닌 정신력 또는 어떤 악조건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의지력 이런 것이 진정 승리요 최강자의 기품[氣品]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전쟁을 하고 있고 그런 의미의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위치가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당연히 그러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누구도 힘으로는 당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 의기(意氣), 기력(氣力), 신념, 의지력이 진정 강한지 여부가 저울질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함과 같이 의를 사랑하고 불의, 불법을 미워하는지 어떤지 그것만이 가름되는 한판 싸움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다시 출생하고 그런 사람으로 새로 창조됨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 아들됨'의 의미이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면 이런 식, 이런 의미로 사단과 전쟁을 벌일 수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다. 죄인들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 그래서 자진 그 약함에 함께 함으로써만 그 죄인을 구원해 내어 의인되게 할 수 있음이다. 따라서 부득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약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고난의 대상이 되고 표적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고후 13:4]으로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대로다. 그 본을 따름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모든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강함'이다. 왜냐면 우리의 싸움의 목적은 '사람들 구원'에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음이다. 또 사단 역시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함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역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맞수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묵인 아래 되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 세상의 전쟁처럼 땅[領土] 따먹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느냐 못하느냐 또는 이를 막느냐 못하느냐에서 서로 합치가 되기 때문에 제대로 싸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이러한 특유의 "약함"이 도리어 ‘강함’으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강하여 이기기 위해서 도리어 약해지는 전략전술이다. 약해야 이기는 전투이다.

약해서 죽음의 고난을 당해야 사람들이 구원되는 까닭이니 "그리스도의 약하심"[고후 13:4]으로 우리가 구원된 그대로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12:10] 함과 같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본분 즉 사람 살리는 아버지 일을 끝까지 이 세상에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다하는 것이니, 세상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이상 이런 사람 살리는 우리의 일을 좌시하고 있을 리도 없다. 고난을 뒤집어 쓰게 하는 등 갖은 방해를 다하고 발악을 하고 핍박과 죽음을 가한다. 물론 사단도 우리의 약함이 강함인 줄 잘 알고 있다. 고로 그로서는 고난을 가하고 죽음에 몰아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런 고난을 통하여 위협함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을 중단하게 만들고 또는 믿는 일을 버리도록 유도함 즉 위협을 가함에 있다.

사단이 그리스도를 죽으시게 함이[이것은 도리어 사단에게 일대 패배를 안기는 것이므로]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을 맛보신 후 모든 것을 취소하시고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도록" 만들자는 것이 그가 진정 바라는 바였던 것과 같다. 그런 모든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가 믿음을 지켜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어떤 고난이든 감수하게 될 때 최소한 우리에게 관한 한 사단의 당혹감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나는 나의 신념대로 내가 마땅히 할 일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하는 자가 스스로 쳐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셨다[눅 16:16/마 11:12]. 이런 식으로 천국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사람마다"["every man, everyone"-눅 16:16] 그렇게 한다 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하는 것이[요 4:34/20:21,22]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함"[마 7:21]이고, 이 뜻을 행함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21]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지 않았으면' 혹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침입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로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는 필요 불가결이다. 따라서 오직 양자 택일뿐이다. 즉 고난을 통해 순종함으로써[빌 2:12/히 5:8,9] 구원을 이루느냐[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아니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들로서 순종하여 아버지 일을 하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반드시 사단의 훼방을 받고 필연적으로 고난을 무릅써야 하는 '사단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들을 원하신다. 순종하지 않는 아들을 어느 아버지가 원하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순종하지 않을 바에야 "이 돌들로도" 능히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마 3:9].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그래서 모든 올바른 것[의(義) 곧 하나님께서 애초 피조물을 만드신 목적]을 사랑하고 그렇지 못한 것[불법-히 1:9]을 미워하는 마음은 각자 스스로가 결단하고 선택하고 끝까지 유지 보전해야 하는 문제다. 핵심이 사랑이므로 이 사랑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이지 남이 대신해 주는 법이 없다. 그리고 사랑하면 반드시 미워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중심'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중심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미워하게 되면 자기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스스로 미워한다는 말이니, 다시 말해 억지로 자기 부인을 하려는 것은 자기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므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15].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악인이고 죄인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의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 즉 죄인으로 있어 자기를 위해 살아도 구원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이들을 구원하심이다.  

그러면 혹자 말하기를, "결국 우리의 구원도 죽어 보아야 알 수 있지 않으냐. 자기가 구원 받은 줄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태산 같이 믿고 있다가 결국은 그런 자기의 "믿음"이 어긋났으니[마 7:21/25:45]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의 구원 받음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차이는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대로 "죽어보아야 구원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자기의 구원에만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고, 우리의 순종은 나의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는 데에 있음이니, 이것으로도 충분한 답이 된다.

심판대에 가기까지는 자기 구원을 확신하다가 심판대에 이르러서는 전혀 뜻밖에 멸망을 당하는 사형 선고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오직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함이다. 모든 죄, 불법, 불의를 행함이 이 자기중심에 있음이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고하는 뜻은 이 자기중심으로 흐르지 않도록 "자기 몸을 쳐서 항상 복종하게 하는"[고전 9:27]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데에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지 않는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이다.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자기 육체와 타협하고 자기 육체에 엄격하게 하지 않는 일반적인 자세인 것이다. 성경의 엄정한 가르침과 경고에 유의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위적인 교리나 가르침에 더 치중하는 버릇 아닌 버릇은 이미 아담에 의해 드러난 그대로다. 그래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것이다.

악인을 구원하려 오시지 않고 "죄인을 구원하시려"[딤전 1:15] 오셨으며,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8] 한 것이다. "죄인"이 겨우 구원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죄 짓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의인도 "겨우[scarcely]" 구원 얻는다 함이다. 특정 사실을 단지 사실로 인정하는 것만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면 "겨우 구원 얻는다"는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선을 행하고"[요삼 1:11] "의를 행한다"[요일 2:29]는 뜻이니 곧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해야 영생으로 보답하신다"고 천명하였으니[롬2:7,10]. 다시 말해 믿음은 순종을 의미함이므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을 가리킴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약함'을 '강함'으로 여겨 세상에 대처하니 필연적으로 "참고"[:7]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

보통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 하신 그대로다. 선을 행했느냐, 악을 행했느냐 하는 것으로 가름된다. 이 경우, "나를 믿는 자는 생명,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라 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하셔도[요 3:16] 그 다음 말씀으로 믿지 않음의 특성을 밝히셨으니 곧 이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18]으로서, 이유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19]고 설명하신 것이다.

곧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 것이다[:20]. 다시 말해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미리 택하심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악을 좋아하여 악을 행하기 때문이니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단 등 악령들이 범죄하여 악령이 되고 영원 멸망의 심판에 이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행함"으로 결과론적으로 직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약 2:20,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런 "의인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한 바로 그 "하나도 없는 의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탄생함이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면"[고후 5:15] 그것이 의인이다. 그럴 경우 자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 자기를 위해 살면 그것이 죄요 악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살면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없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으로서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으니,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다" 하였고[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얻었다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으로서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뜻임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고후 5:15]. 이것은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니고 믿는 즉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지적한 그 "우리 중"에는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온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이다. 그러니 이 말은, 현재도 죄를 짓고 있는 여전히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너는 의인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억지로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미워하신다[행 5:4].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죄인이 의인일 수 없다. 의인은 바울이 천명한 대로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 사람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선을 행함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왜냐면 모든 악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 발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오직 한 가지 의미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에서 몇 차례나 강조하셨다. '한 몸'의 이치를 따라 머리로서 몸을 위하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분이니 나는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뜻을 따라 순종을 하는 것이니 어찌 악(惡)이 있을 수 있으며 선(善)이 아니 될 수 있으랴.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는 당연히 몸을 위하게 되어 있고 몸의 각 지체된 자는 당연히 머리를 뮈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는 한 몸을 이룰 수 없으니 생명에서 이탈됨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이 그 뜻이다. 솔로몬이 바로 그렇게 했을 때[왕상3:5-13]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한정 없이 주셨으니, 바로 그와 같은 사례다. 사랑을 사랑으로 화답하시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호응함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그 어디서나 언제나 통하는 삶의 철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그렇게 화답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솔로몬처럼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함이니, 곧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새 생명"[롬 6:4]의 새 삶이 시작됨이다.

사랑은 반드시 사랑으로 화답되기 때문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 했고, 따라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다"[고전 8:2,3] 하는 것이다. 또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요 14:15] 하셨고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게 될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그와 함께 살 것이라][:23] 하신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게 될 것이라"[:21]고 거듭거듭 같은 말씀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든 변할 수도 있는 완전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사랑했어도 오늘 그 마음이 변하면 그만이요 끝장이 되니 즉각 회개할 일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유 의지, 자유 선택이다.

그러나 회개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히 6:6] "두렵고 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되느냐, 여러 번 책망을 받아도 즉각 회개하기를 미룰 때 그렇게 된다. 그리고 "조심하지"[고전 10:12] 않을 때 그렇게 된다. 조심하라고 성경이 경고하면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나는 이제까지 조심하지 않았는데 나는 어찌 되는가?"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지 않았으므로 구원 역시 받은 적이 없으므로 지금부터 믿고 구원 받으면 되는 일이다.

결코 나는 이미 구원 받았다고 하지 말 것이니 그렇게 되면 조심하라는 경고를 지금까지 뱓지 못했으므로 "넘어진" 자로서 다시는 회개할 기회도 없는 경우다. 그런 상태로서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지금까지 구원 받은 역사가 없는 줄 자각하고 시인하여, 성경대로 믿고 회개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죄 용서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일이다[행 2:38]. 지금까지 죄 용서를 받은 적이 없는 죄인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보장된 마음은 영원한 영적 존재만의 특성이다.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은 지각은 있어도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마음은 영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절대 자유를 행사하고 구가하기 때문에 "마음에 하나님 두는 것을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시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롬 1:29]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즉 자유가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감히 피조물로서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마음은 능히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고 사랑은 마음의 영역이고 사랑이 떠나면 순종이 없으므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가 있음이다. 이 '마음'을 닦달하라는 것이다. 솔로몬이 그 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더니 그 마음이 말년에 가서는 이전 같지 아니하여 사랑이 떠난 것이다. 그래서 망령이 들어, 자기가 좋아하는 이방인 출신 처첩을 위해 우상을 만들기까지에 이른다. 엄중한 경고가 되어 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으므로[눅 5:32] 그렇게 해서 의인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악 곧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지어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을 버리신다고 앞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물론 죄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니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하니 이제부터는 의인이 아니 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의인 아닌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만드시고자 오신 것이다. 의인으로 만들어 그 의인을 구원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다.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의인으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인을 구원하신다 한 것은 최종적으로 의인으로 남는 자, 선을 행하는 자를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과 "의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구별하여 설명함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대로의 믿음은, 그 믿는 순간 하나님의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함 즉 그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대로 행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상대이신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고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음이요 따라서 믿지 않음이다. 나중에 솔로몬은 이 사랑을 버리게 되니 이는 우리에게 큰 경계가 된다. 중도에서 그 사랑, 그 좋은 믿음을 스스로 버린 예이다. 그래서 항상 '믿음'을 '사랑'과 '순종'의 동의어(同意語)로 성경은 사용한다.


§  단이 신(神-고후 4:4)이고 우리가 육체라는 것은 오직 상대적인 의미일 뿐이다. 인간[아담] 역시 사단과 똑같은 신령한 몸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물들은["스랍"과 "그룹"들도 영물이기는 하나 이들은 여기서 제외] 이러한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인간처럼 되도록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서의 인간을 기준하여 만드신 것이다. 인간을 위해 창설하신 에덴낙원 곧 영계의 땅을 소재로 하여 창조하셨음이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은 본디의 신령한 몸을 잃고 원래의 그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 왔고 사단은 그 신령한 몸 그대로 있다는 이 차이뿐이다. 그래서 "신(神)"과 "육체"의 격차로 벌어진 지금의 현실이다.

참고로, 처음부터 신령한 몸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경우와 신령한 몸으로 정착되어 있다가 나중에 다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경우가 같을 수가 없다. 말하자면 후자의 경우 처음 창조가 구조적으로 손상(損傷)을 입은 격이 되므로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영물들이나 영적인 현상[예컨대 영물들이 스스로를 변신하여 나타내는 ufo 등]을 카메라의 눈이나 개나 말의 눈은 포착을 해도 인간의 눈에는 나타나지[보이지] 않는다. 영물들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눈을 띄어 주어야 비로소 눈이 열려져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ufo를 본다거나 성경에 나오는 대로 천사들을 볼 때는 그 영물들이 이미 우리의 눈이 열리도록 작용했을 경우다. 그들은 능력이 있으므로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바울 앞에 신령한 몸[부활하심으로]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음과 같다(행 9:7).

즉 사울[바울]의 눈에는 분명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채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으나 동행들은 그 광채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소리만 듣는다는 것뿐이지 그 소리가 나타내는 말은 듣지 못함도 마찬가지 결과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의 종이 눈이 열려져 보게 되었을 때에야 불 말과 불 병거(兵車, chariot)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왕하 6:17].

이 때 "불[fire]"이라고 하는 것은 영물 그리고 영적인 것 즉 신령한 세계에 속한 실체를 말한다. 신령한 세계에도 말이 있고 수레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영물 즉 천사들이 그런 형상으로 인간[엘리사의 종]의 눈에 보여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불의한 욕심에 사로잡힌 발람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의 눈에는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이 보여 이를 피해 길을 떠나 밭으로 들어가는 소동을 벌였으나 이 천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발람은 애꿎게 나귀만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결국 하나님께서 눈을 밝히시자[이는 그 천사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비로소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 것이다[민 22:31]. 여기서의 초점은 천사가 동물[나귀]의 눈을 띄워 준 것이 아니라 사람[발람]의 눈을 밝혀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는 인간이 원래 신령한 세계에 있어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의 대가로 죽음에 이름으로써[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어긴 결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ufo와 그에 수반되는 현상을 생물의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도 잡을 수 있는 영상이건만 유독 인간의 동공(瞳孔)만이 놓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 여겨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단 즉 용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사단이 저주를 받은 것은 "배로 기어 다니고"[그 전에는 직립 보행이었으므로] "흙을 먹는" 것일 뿐 신령한 몸으로서의 그 기능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범죄로써 신령한 몸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경우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새 창조로써 아담의 원 위치 즉 영물들 위에 군림하던 바로 그 위치에 복귀된 것이다. 당장 원수 사단을 짓밟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너무 싱거운 싸움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 겨룰 싸움이라면 하나는 육체적인[물리적인] 힘 하나는 정신적인[영적인, 성령에 의한] 힘으로 서로 상이한 힘으로 대치하여 어느 쪽이든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자가 이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여전히 지니고 있으니 모든 기능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의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단의 목적은 자기의 그런 위압으로 나를 굴복시키는 것에 있으니 즉 하는 수 없어 사단에게 절하도록 나를 만듦으로써 승리하는 것이고, 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사람들을 살려 냄으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단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분쇄시킴에 나의 승리가 있음이니 이야말로 진정한 전쟁 양상이 아닌가.

상대의 목적을 좌절시키고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부에 전쟁의 승패가 달린 것이다. 고로 전쟁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든 이 세상에 속한 것이든 동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단과 색깔을 달리하여 차별화함으로써 이기는 것이다. 아담 부부는 당시 이 차별화를 하지 않았다. 사단에게 동조함으로써 사단을 오히려 추종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인간 비극이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경고도 이 때문이다. 사단은 악인데 사단처럼 나도 악으로 나가면 사단을 추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father] 사단"이라 하신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처음부터 범죄한 사단을 덩달아 추종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살리느냐 아니면 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느냐,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여기에 달렸다.


§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고 실제가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필자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용이 아닌 다른 영물] 확인하기도 했지만[그런 영물들의 각종 흔적] 그래서 세상에 알려 경각심을 고취하려 해도, 아예 처음부터 믿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아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말 그대로 두 손 놓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편, 하나님도 구원도 없는 영원한 고난의 세계가 지금 모든 인생들을 상대로 하여 기다리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이 엄청나고 무서운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으니 어이 하리요. 노아가 당시 세상의 멸망을 아무리 외쳤으나 듣지 않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방주(方舟, 네모 난 모양의 배)를 짓기까지 했으나 대홍수가 닥치는 순간까지도 믿지를 않았으니 어찌 하랴.

홍수가 정녕 임하는 줄 믿고 알았다면 당장 모든 것, 모든 일 집어 치우고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자기 생명 건지는 일 곧 배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을 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를 믿으려고 하지를 않으니 어찌 하랴. 주님 오실 때도 세상의 멸망이 임하는 것을 믿지 않고 여전히 장가 시집 잘 가고 집 짓고 그래서 이제까지 해오던 일을 그대로 계속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셨다[마 24:37-39].

소돔 고모라가 갑자기 망할 때에도, 롯은 밤중에 천사들의 말을 듣고는 그 사위될 세 사람을 모두 찾아 가 그 시급한 상황을 알려 주었으나 그들은 장인이 농담하는 줄로 알았다고 성경은 적고 있다. 장인인지라 평소에 그들은 롯을 잘 알고 있었던 관계로 "갑자기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롯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면 틀림없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모르면 그 모르는 것을 일깨워 줄 때 고맙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 모르고 있는 대로의 바로 그 '현실'을 '믿고' 있는 관계로 '그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새로 나타날 때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둘은 서로 화합하여 모르는 것은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리를 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를 배척하여 갈라 서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갈라 서니, 어느 쪽이든 자기를 정상이라고 '믿을' 때는 상대를 비정상이라 단정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미쳤다"[행 26:24] 하고 더 심한 언행도 불사하게 된다.

바울에게 대한 것처럼 "이런 놈은 세상에 살려 둘 자가 아니라"[22:22] 하기까지에 이른다. 노아는 당시 세상에 홍수가 나기 직전까지는 완전히 돈 사람으로 취급되어 "세상에는 저런 미친 인간도 다 있다" 하고 '세상의 최고 웃음거리'의 대표적 표본으로 삼아 재미있어 하고,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구경하며 배를 걷어 쥐고 웃는 등 즐거워했던 것이다.
노아가 당시 그렇게 배까지 만들면서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 들은 바 경고 말씀을 전달하여 증언을 하고 있었건만 아무도 노아를 믿는 자가 없고 단지 노아뿐이었기에 그렇게 조롱하는 것으로만 그쳤지, 만일 믿는 이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더라면 세상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는 자라 하여 잡아 가두고 매질을 하고 추방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을 것이 틀림없다.

노아만 아니라 그렇게 노아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 역시 세상을 나쁘게 물들인다 하여 똑같이 핍박함으로써 더 이상 그런 "사회의 이단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하려 들었을 것이다. 열두 사도들이나 바울 사도에게 세상은 그런 이유로 핍박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역시 돌에 맞아 죽기 전 그렇게 죽고 말 것을 예견이나 하듯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행 7:51,52] 하고 성령으로 책망하였고 그 성령의 책망을 대언(代言)한 대가로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이렇게 천지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그 위험을 알리고 경고를 하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요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고 절대로 세상의 영합(迎合)을 받지 못하고 인기를 누릴 수 없는 일임이 명백해진다.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한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부터 "너희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다[마 10:36-39].

믿는 자는 자기에게 경고를 해 주어 자기의 목숨을 건져 준 큰 은인으로 생각하지만, 반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경고하신 바와 같이 오히려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왜냐면 당장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는 판이니 이 세상에서 아무쪼록 편하게 잘 살고자 하는 자기에게는 장애와 걸림 돌이 되고 "위협"이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단잠"을 자고 있는데 잠을 깨우니 밉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알리면 원수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지금까지 잘 지내 온 것처럼 정다운 친구요 살뜰한 가족이요 이웃이다. 그러면 그런 불이익을 고려해서 그런 당장 눈앞의[인생의 목숨이 오늘 이 시간 이후의 일도 모를 뿐 아니라 죽고 나면 속절 없이 영원한 고통과 불행의 연속만이 기다리고 있어] 위험을 제 때 알리는 일을 아니하고 장차 오는 심판을 일러 주는 경고를 아니하고, 자기 혼자만 구원의 지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과연 그것이 용납될까? 그런 경우, 주님께 전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위에서와 같이 이미 선언하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양심으로 판단해도 당장 그런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과 적대 관계가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이 아니면 조만간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살전 3;4/2:14]. 바울도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런 숱한 고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는"[고후 1:8]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인데 어찌 하랴[고전 9:16]. 왜냐면 그것은 그 스스로 자기의 믿음을 버림이다. 믿지 않는데 어찌 구원이 되리요.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아 이 세상에서 핍박도 겸하여 받든지[막 10:30], 아니면 핍박도 아니 받고 구원도 아니 받고 그리스도도 믿지 않아 멸망하든지 오직 둘 중 하나로서 자유 선택일 뿐 그 중간은 없다.

바울이 화가 있다고 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론, 원칙을 말한 것이다. 불에 들어가면 불에 타 죽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이다. 따라서 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여 조처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듯이,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재앙을 만나므로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위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위험을 알려 주는 것이 당연 과제이기에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한 몸의 원리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함으로써 그 상대가 자기를 보아 주도록 함으로써 피차간 더 잘 위하게 되는 것처럼, 오직 머리를 위하고 머리와 함께 한 몸을 구성하여 나와 함께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이웃들을 위함이기에, 복음을 전하여 사람 살리는 일을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어도 주위로부터 핍박이 없을 때는 내가 실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 않거나 여하튼 어디에 반드시 비정상인 데가 있을 것이라 스스로 판단여 자기 자신을 진단해보아 과연 믿음에 있는가 확증하는 것이[고후 13:5] 최고의 지혜다.

복음을 잘못 믿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믿고 "다른 영"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부지런히 살펴 볼 일이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믿으니 성경대로 참으로 믿는 이들과 같은 표현, 같은 언어는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기는 믿어도 주님께 "합당치 아니하여" 이미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 있으므로 조만간 틀림없이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니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는 무자비한 선고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왜냐면 세상과 사이 좋게 잘 지내려고 하는 이마다 세상 영광을 사랑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악이 되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없는 법이다[요일 2:15]. 천지를 모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여 장차 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위험을 미리 알리는[눅 3:7] 일이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음을 위에서 말했거니와, 이 세상을 지배하여 신으로 군림하여 인간의 마음을 완전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는 사단에게 첫째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놓아 둘 리가 만무하다. 극렬한 미움의 대상이 된다. 당연히 핍박의 손은 뻗쳐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항상 이 세상에서는 약(弱)한 존재임을 다시 강조한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믿는 사람은 믿음과 구원의 특성상 항상 소수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기본 요인으로 지목되는 바 세상에서 강하고, 지혜 있다는 세평(世評)을 듣고,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존귀하다고 세상이 일컬어 주는 사람들은 믿는 자가 드물다는 것을 성경도 증언하고 있다[고전 1:26]. 왜냐면 세상을 사랑하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세상 종교의 교인이 되어 있을 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집단에 가입하여 자기를 구원 받은 자로 여겨 태평스럽게 스스로를 속이는 이들이 거의 전부다. 그리고 믿는 이들 중에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친히 미리 경고를 하셨는데[마 7:21,25:45], 처음부터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야 부지기수다. 그래서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히 4:11] 하셨다. 그냥 믿는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힘쓰라"는 경고를 마땅히 되새길 일이다.

이 힘씀은 구원을 받으려고 힘쓰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라나, 결국에는 그렇게 힘씀으로써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니 그 차이만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힘씀은 앞에서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돌파해 나가기를 힘씀이다. 그 역경과 고난을 기피하려 한다든가 그 때문에 좌절할 때 이는 자기 구원을 내다 버리는 결과가 되니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함에서 오는 차이다.

우리의 구원이 기계적인 것 즉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율에 근거하는 까닭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기정 사실화되어 있는 터라 내 스스로 그 선물을 받으면 받는 것이고 순종하기를 싫어하여 받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임과 같이, 처음에는 순종하기로 하여 회개하였지만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내 스스로 받아 챙겼던 그 구원을 도로 내다 버리면 또 얼마든지 버려지게 되어 있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택하셨다고 하여 강제적으로 나를 구원하시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속지 말 일이다. 사단이 그것이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인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속이고 있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택하심은 나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심이니 "미리 아신다"는 것은 내 스스로 나의 자율에 의해 믿을 줄을 아셨다는 것이므로 따라서 나는 당연히 내 스스로 믿지 않는 한 나는 구원되지 못하고 따라서 내가 택하심 받지 않았다는 것이 자체적으로 증명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믿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고 임박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믿지 않는 것이 무슨 근거가 있어 믿지 않는 것이 아님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온 세상이 지금도 태평연월을 구가하며 희희낙락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이유 없이 그렇게 할 뿐이다.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것이니[전 9:3] 사단에게 속아서[계 12:9] 그런 것이다. 사단의 거짓 말을 당시 아담처럼 믿고 있는 무서운 현실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아담은 어찌 되었는가. 말씀대로 죽은 것이다.

따라서 이 자체가 사실상 얼마나 공포스러운 현실인가! 다시 말해 사단의 완전 장악 아래 꼼짝도 못하는 인간 실상이 아닌가! 악령 사단의 장악 아래 놓인 인간 세상의 비절참절한 비극 그것이다. 악령 사단을 인정하지 않거든 이 세상 일을 논하지 말 일이다. 성경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거든 인간 세상을 아예 입에 담을 생각조차 말아야 하는 것이다. 탁상공론,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임을 미리 알린다. 사단의 이러한 장악은 나의 자율성과 결코 대치되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동조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동조하지 않는데도 나를 강제로 노예로 삼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유, 자유!" 한다.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자유가 속박되고 억압당하기 때문이라는 구실을 붙인다. 그러나 현실인즉 악령 사단의 완전한 노예가 되어 있는 실상은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부정하려 드니 거기에 무슨 지혜가 있으리요.

삶이 사랑이고 사랑은 자율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영원한 운명도 각자 스스로가 정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 자율성은 사단 등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 있고 아담이 죽음에 이르러 현재의 인간고(人間苦)가 되어 있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어 증명되고 있건만 이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자승자박, 자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경적인 바른 안목으로 세상과 세상사를 대할 일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의 진리도 모르는 일반 세상 사람들처럼 하다가는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악과를 입에 씹고 있게 된다. 그렇게 될 줄이야 아담 자신도 꿈에나 생각했으랴.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 아닌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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