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4)
3. 삶의 기본 구조 4. 만물의 생성[창조]과 존립의 원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입증
우리는 범죄하여 죽음밖에 없는데도 살려 주셨으니 은혜가 아니면 무엇인가. 일단 살려 주시기만 하셨고 나머지는 아담이나 또는 영물들처럼 스스로가 하게 되어 있으니 다시 말해 완전 자유는 그대로 보장되어 있고 작용하고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사리(事理)를 제대로 분간 못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매여 지내다니 우리 역시 핑계 댈 수 없다. 오직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엄히 경고하신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 자인데[눅 4:5-8]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유혹에 넘어가고 아니 넘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지 하나님의 소관사가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결과로 죽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께 올 수 있다 즉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요 6:44,65]. 그런 사람에게만 골라서 교육시키시는 그런 편파적인 하나님이 아니시다.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죽어 나가는 현상 역시 그런 가르치심 가운데 하나다. 그런 사실들을 보면 당연히 왜 인생이 죽는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하여 이유를 찾게 되어 있다. 그렇게 진심으로 찾는 자를 하나님께서 몰라보실 리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에게서 배운 자라야 그리스도께 나오게 된다"[:45] 하심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스스로 수용하여 따르는 것을 가리키심이다.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스스로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가르친다고 다 기계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자기가 죽은 자이고 따라서 전체 세상이 죽음의 세계라고 인지하는 자는 이 가르치심을 수용하여 배운 자이고 따라서 세상 삶에 애착이 갈 리 없다. 세상 삶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영원한 가치를 찾아 방향을 틀게 되고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다. 인도의 싯다르다 곧 석가는 그런 인간의 비극적 현상과 결과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러나 당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다.
따라서 그런 수박 겉 핥기의 가르침도 용납되었으니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인간의 모든 허물을 눈감아 주셨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행 17:30]. 그러나 이제 빛이 세상에 나타나셨고 진리의 말씀이 광포된 지금에도 그런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에 대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다시 그 속임수를 동원할 것은 물론이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억지 해석을 갖다 붙이는 것이 그 하나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으로 그 죽으심을 풀이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롬 6:3-8/갈 2:20/5:24,25/6:14/골 2:12,13,20/엡 2:5-7/딤후 2:11,12] 성경의 의미가 완전히 무시될 뿐더러 세례 받는 의미도 무의미하게 됨이니 세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짐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렇다pt;">[롬 6:4/골 2:12]. 그리 되면 당연히 죄 용서도 없다[행 2:38].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경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내가 나 자신의 죄를 대신하고 나 자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 되어 버리므로, 성경을 아주 몰상식한 말을 하는 몰상식한 내용을 담은 몰상식한 책, 비상식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와 하나되심에 있다[고전 6:17]. 이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심과 같은 원리를 따름이다[요 10:30].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은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원리 또는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의 원칙을 따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아니, 근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실 때부터 즉 아들을 지으실[골 1:15/계 3:14/히 2:11]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리를 따라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말해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만유 창조의 원리요 만유 보전의 원리이니 우리의 새 창조 즉 구원 역시 이 원리를 따라 하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래서 이 원리 곧 나와 하나되시는 이치를 따르신 것이니, 나와 하나되심이므로 내가 "죽은 자"[마 8:24]인즉 친히 나와 같이 죽은 자가 되어 죽으시되 우리가 죄인으로 죽는 것이어서 "형벌로서의 죽음"[사 53:8]이므로 바로 그 의미대로 당시 시대 상황을 따라 형벌의 죽음 즉 십자가에 달리시는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되시어 죽은 자가 되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되시어 다시 살아나시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어서, 죽음이 없이는 다시 살아남이 없고 다시 살아남은 죽음을 전제한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밝히기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고전 15:14-18]고 한마디로 단언한 것이다.
만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면 그 죽으심 하나만으로 족한 것이요 그 죽으심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므로 이상과 같은 내용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단지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나의 구원일진대, 우리 구원 즉 나의 다시 살아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제대로 완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고후 5:14] 다시 살아난 "산 자로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사는"[:15] 삶을 영원히 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대목은 영역대로 해도 "for"이지, 대신한다는 의미의 "on behalf of, instead of"가 아닌 것이다. 영어 "for"는 "위하여"라는 의미이므로 때로는 "대신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당연히 "때문에"라는 의미도 동시에 되는 것이다. 이 경우 "때문에, 위하여"이지 "대신하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대신한다는 것은 "위하여"의 의미를 자기 취향대로 해석한 자의적 번역인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우리를 대신한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곡해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와 같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똑바로 깨달아 믿든가 아니면 사람들이[사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를 받아] 가르치는 대로 소위 "대신 죽음"으로 믿든가 그것은 자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어긋나는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의한 종교 교리가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손보시거나 손대시는 일은 결코 없다. 왜냐면 그런 그릇된 해석은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을 걸러내는 작업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 친히 세상에서 대중들을 가르치실 때에 오직 비유로써 빗대어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심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되어 모든 것을 비유로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마 13:10-13/막 4:10-12/눅 8:10]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되지만[요 3:16] 그래서 만인에게 구원의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만 명백히 차별화가 되어 있음이다.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는 없다"[6:44,65] 하심과 같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되는 것이니 이 믿음은 반드시 회개하여[행 2:38]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눅 22:20]을 따름이다. "새 언약"이라 함은, "첫 언약"이 그것을 그림자로 나타낸 것이라면 그 실체임을 말한다.
"언약"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첫 언약이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라면"[히 9:18] 역시 복종의 약속 없이 세워진 것이 아니니 그 피를 뿌리기 전에 모세가 언약 책을 백성들에게 읽어 들리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다음에 피 뿌림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출 24:7]. 새 언약 역시 그 그림자가 나타낸 실체로서 내용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 대신 짐승의 피를 사용했다는 점만 다르고 피는 엄연히 피이고 복종의 약속은 엄연히 복종의 약속 그대로인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런 약속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애당초 해당되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 그와 같은 "비유로 말씀하심"이다. 명백한 차별화다. 이는 하나님 친히 인생들을 차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 그 스스로의 자유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거듭 강조하지만 이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항상 유동적이니, 얼마든지 처음과는 다르게 중도에 그 마음을 바꾸어 '자유 선택'을 달리하여 처음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중간에 그 마음을 바꿈으로 아담이 범죄한 것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 일당이 그렇게 하여 스스로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거나 영물[천사]들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범죄하도록 지으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중간에 그 마음이 변한 경우다. 바로 이 중간에 마음 변할 수 있는 사실을 가리켜 이를 경계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아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의 마땅한 일을 하라는 것이니 산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아니한다면 그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되는 일은 없음이다. 아담과 여러 천사[영물]들을 만드셨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창조로써 그 애초 창조하실 때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었는가 하면 그게 아니었다. 아담을 죽은 자로 만드시지 않았는데도 아담은 죽은 자가 된 것이며 영물들을 모두 거룩한 자로 만드셨건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생기지 않았던가.
이는 결코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아니었으나 피조물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일방적이 아니고 동시성과 양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에 의한 구원 역시 마찬가지다. 달리 나올 수가 없고 설명될 수가 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관성, 일사부재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법질서 확립과 연계되는 것이어서 이런 일관성이 없으면 법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가 없게 됨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시험은 이 세상에 한정된다. 천국에서는 이런 시험이 없으니 더 이상 저울질하여 다루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변할 자는 쉬이 곧 변하고 변하지 않을 자는 영원을 통해 변하지 않는 법이다. 아담도 창조되기가 무섭게 그 마음이 변하여 범죄하였고, 그보다 더 빨리 영물들 중 일부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 악령들은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런즉 이런 시험 또는 마음 변함은 이 세상에만 한정되고 영원 세계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태를 경고하시어 그런 비유 말씀을 하신 이유를 밝히시면서 "무릇 있는 이는 받아 넉넉하게 되나 없는 이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누구든지 있는 이는 받겠고 없는 이는 그 있는 것까지(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막 4:25/마 13:12] 하셨다. 즉 처음에는 믿었고 받았으므로 있는 것이나 처음 약속을 저 버리므로 그 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박탈당함이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지만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심과 같은 뜻이다[마 7:21/25:45].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보고 회개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한 대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으니 회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온[고후 5:15] 것을 후회하고 이제는 나 자신을 전부 바쳐[갈 2:20] 나의 사랑하는 상대이신 주님을 위해서만 살아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을 명실 상부하게 스스로 이루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스스로 하는' 주체 의식으로 서로 작용하는 데에 있다.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우리의 구원에도 이 특징이 그대로 적용됨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주장하여 우리로서는 단지 받기만 하여 감사하게 누리는 것으로만 구원을 해석하는 것은, 사랑의 의미부터 모르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밖에 안된다. 사랑을 모르는 자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하리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그대로다.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바로 이 뜻을 가리켜 그리스도 친히 "새 계명"을 주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것이다.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오직 사는" 것이다[고후 5:15].
그러므로 아무리 회개했다고 해도 그래서 그 "회개한" 특정 범죄는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그것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항상 복종한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가 그 말씀을 지키지 않고 그 뜻을 행하지 않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지 않을 리가 없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처음 믿을 때 회개한 것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함으로서 세례를 받고 죄 용서 받아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어 있다가 중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3:18]이요 그 결말은 "멸망"[:19]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고 그래서 여전히 교회 구성원으로 있고 교회 활동도 하고 있을지라도, 바울이 탄식한 바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2:21]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이다.
하나를 이룬 둘
둘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여 활동할 때에는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로써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서에 그 점이 명시되어 있다. 마치 이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를 또한 명확히 한 데가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한다"[고전 7:4]는 것으로서 남녀 한 몸됨에서도 확증되어 있다.
즉 한 몸으로써 하나됨이므로 서로의 육체가 상대의 것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한 영으로서의 하나됨은 그 삶 자체가 그렇게 된다. 즉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산다. 한 몸에서 남자나 여자는 자기 몸을 다시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한 영으로 하나됨에서는 자기 자신을 상대의 것으로 인정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이는 무릇 산 자 곧 피조물로서의 마땅한 삶의 법칙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한 것이니, "산 자들로 하여금"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산 자라고 자처한다면 그 산 자의 삶의 특징이 바로 그러한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강조했으니, 이는 갑이 전적으로 을을 위함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오로지 나를 위하시는 '나와 하나되어 계신' 위치를 밝힌 것이다.
나를 위해 살지 않으니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 자기 부인을 강조하시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경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마 16:24/막 8:34/눅 9:23] 강조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은 나와 하나를 이루신 상대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사랑은 처음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를 위함이다. 그래야 둘이 하나되는 사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 또는 생명[영생]의 법질서이다.
우리[그리스도와 나]의 하나됨은 한 영으로 하나됨[고전 6:17]이니 말 그대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의 육체를 나의 영혼과 공유하심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게 되어 있는 구조다[고후 5:15].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심을 그 자신을 나를 위해 "선물"[요 4:10/갈 2:20]로 주심으로써[그래서 성령을 역시 "선물"이시라 한다-행 2:38] 이미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한 몸 체제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이 되어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육신"[롬 7:24] 타령을 하고 이것을 난데없이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이라고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경우[고후 5:15],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완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머리가 되려는 교만이요 머리 없이 즉 한 몸의 구조 없이 삶을 꿈꾸는 어리석음이요 망상이 된다.
한 몸 체제로서의 삶은 머리와 몸 그리고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두루 구비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자를 위시해서 모두가 자유 평등을 누리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인 것이다. 머리와 꼬리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데도 어찌 평등이라 하느냐 하면, 여기에 진정 평등의 의미가 있음이니 즉 아무리 꼬리의 위치에 있어도 머리가 자기를 위하는 위치에 자리잡아 있기 때문이다[눅 22:27/마 23:11]. 머리 자체가 그러하니 그 아래 몸의 각 지체가 모두 자기 곧 꼬리되어 있는 자를 섬김이다. 이것이 대등(對等)이 아닌 평등(平等)이다.
성경대로 표현하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할 것이니,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1-27] 하게 된다.
그런즉 머리를 위시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여기에 인생으로서의 최대 이상적인 이상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자기중심이면 파멸뿐이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인생고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극에 달한 것은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이미 오래 전에 파멸로 치달아 세상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강권 통치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 목적은 남은 사람들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 얻을 기회를 제공하시고자 함이다. 그런 강권 통치의 증거 중 하나가 '3운법칙'이다.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마지막 남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이 완료될 때 이 세상은 미련없이 즉각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인데도 여기에 코를 박고 살고자 한다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것인가.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알고 보면 질서 정연하게 한 치 오차 없이 철두철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엉망진창이거나 뒤죽박죽일 수가 없다. 악인이 세상에서 흥청거림도 그들을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과정의 일환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마치 제 세상인 양 여기는 악인들의 창궐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고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정년 퇴직한 지인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 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 위해 죽었다면 왜 또 살아났는가, 그것이 납득이 안간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을 대신한 죽음"이라는 사이비 성경 해석이 온 천하에 만연되어 있어 이를 귀동냥해서 듣고 묻고 묻는 말이다. 왜냐면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 따라서 이런 한마디에 천만금의 무게가 실려 있으니, 사이비들이여, 모름지기 각성할 일이다.
대신 죽음일 때는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하더라도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 "우리 대신한 죽음"이라는 의미가 그 부활 때로부터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 상식이기 때문이다. '대신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나가 되심으로써 나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심'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면 안되므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다시 살아나심도 스스로 살아나심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살리신 것이다.
그러나 그냥 아들이시라고 해서 살리시면 역시 우리의 구원을 유야무야로 돌리심이 된다. 왜냐면 우리의 다시 살아남으로 인한 다시 출생함으로써의 구원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냥 다시 살리시면 죽으셨다는 시늉만 해 보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심으로 인해, 하나를 이루신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므로 아들이 죽어 있으실 수 없는 이치를 따라 아버지께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심은 아버지 또한 아들의 죽음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아버지는 살아 계셨다고 아들의 죽음과는 남남이 되어 계신 것이 아니다. 아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당하셨으니 왜냐면 말 그대로 아들과 하나로서 아들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이시면서도 아들은 죽음, 아버지께서는 생명 가운데 계시니, 아들의 죽으심은 죽음 그대로 그 의미가 엄연히 살아 있으면서도 [결코 죽는 시늉을 해 보이신 것이 아닌] 또한 얼마든지 살아나실 수 있음이다.
그리고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은 원리원칙을 따라 이루신 것이니,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서로 대립[대칭]되는 둘의 관계[하나를 이룬]는 반드시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임이다. 즉 큰 자는 작은 자를 인도하고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게 되어 있는 이치다. 작은 자가 큰 자를 따르는 법이 없다. 따라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시는 역할을 하신 것은 아들이시지 아버지이실 수 없음이니, 만일 아버지께서 그렇게 죽으신 것이라면 아들께서 결코 아버지를 다시 살리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빈 틈 없이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큰 자로서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 아들께서는 비록 죽으셨지만 아버지를 따라 당연히 다시 살아나시게 되어 있는 그런 이치다. 작은 자가 큰 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작은 자는 큰 자에게서 파생(派生)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들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의 원리 즉 상호 대립되는 별개의 성질을 가진 것이 하나로서 조화되어 존재하는 법칙이 확립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원리 역시 곧 설명을 하게 된다.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인하여 우리를 살리시게 되는데 아버지 친히 우리를 살리심은 아들과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이요 그리고 아들께서는 나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인즉 아버지 친히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양새로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는 아버지[하나님]와 하나됨이 아니라 아들[사람]과 하나되어 있음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아들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것이다.
또 내가 비록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살리심도 사실이나[요 5:21] 나와 하나되어 나와 함께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는 모양새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나를 살리시는 것임과 동시에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거하시는 그 영으로써 나를 살리심이다[롬 8:11]. 이와 같이 함께 죽는 것이나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원리원칙을 따라 철저하게 이치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다. 이런 것이 '질서의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구원을 이룸'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을 나타냄이 우리 구원의 논리적 특성이 된다. 피동성과 능동성의 공존이다. 오늘날 거의 전부가 우리 구원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처사 곧 우리로 치면 피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활한 거짓말의 음모가 있다. 아담이 범죄한 것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한 것도 자기의 교만으로 인해 이 능동성을 잘못 활용한 탓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룩한 천사"들은 그 능동성의 측면을 올바로 제대로 활용하여 결단코 곁길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기에 그들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능동성을 제거하면 또는 활용하지 않도록 만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필연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하여 하나님의 존재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백 번 부르짖어도 구원은 불가능한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생명[영생]을 주셨지만 그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역할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인간 자신에게 있으니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켜 죄 짓지 않겠다는 주인 의식으로 임해야 하는데, 그러한 자기 몫을 외면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또는 여자의 충동에 피동적으로 움직인 결과로 죽음에 이른 것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심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되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여야지 그릇된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자유 의지의 또다른 측면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고 대수가 아니다. 양자 선택이므로 옳은 길을 택해야 즉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야 함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은 자기 몫을 제대로 못한 결과다. 즉 스스로 교만해져 엉뚱한 방향을 잡아 나간 결과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 말씀대로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새 피조물이 되어 있으므로 아담이나 영물들이나 처음 창조되던 바로 그런 참신한 첫 시작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옛 창조에서의 죄와 죽음으로 지리멸렬 마멸(磨滅)되어 있던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힘차게 능동성을 발휘하는 그런 시점(時點)이다. 그러나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그릇된 방향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천사들처럼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밖에 모르게 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개입하여 그 시험에 넘어가게 마련이다. 왜냐면 피동적이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과는 무관하다는 뜻으로서 [사랑은 항상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인 의식이 그 요결이므로] 이기적인[자기중심] 성향을 띠는 까닭에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한 통속이 되어 있는지라 그런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천국은 밀고 들어가 침입하는 자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눅 16:16/마 11:12].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우리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니 착각하지 말 것이다.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체의 것이다. 단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따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로 작정하는 것만이 우리 몫이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지으실 때는 영구적으로 존재하도록 지으셨으므로, 그렇게 영구적으로 보전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이 피조물들을 지으신 조물주로부터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도 모든 능력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죽은 자[아무 능력도 생명력도 없는]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써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생명력을 얻었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권능"-행 1:8]이요 그래서 "나의 생명"[골 3:3]이 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도"[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나님의 능력이지 내 힘이 아니니 나의 공로가 될 수 없고 나의 행위로 얻는 구원일 수가 없다. 혼동하지 말 일이다. "믿음 아닌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과는 180도 다르고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고 차원부터 다른 것이다.
우리 구원의 능동성과 피동성의 양면에서 피동적이라 함은 내 스스로 나를 산 자로 만들 수 없으므로 하나님 친히 은혜로 개입하셔서 나를 새로 만드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킴이며,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내진 이 진리의 모든 사실을 알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영원토록 살기로 결단하면 그래서 회개하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루어 주심이다. 이것이 구원 받음이다. 받는 것이므로 피동적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전부이냐 하면 그렇지 않으니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룬 그리스도와 나와의 불가분의 하나 관계이므로, 몸[의 지체]된 나는 반드시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이 하나됨을 유지 보전하는 데에 필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원의 능동성이 작동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즉 갑과 을의 둘이 하나 됨에서 갑[그리스도]이 을[나 자신]을 위하여 이룩하신 구원을 받아들여 이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을[나 자신이니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로서 갑을 위하는[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차례요 몫인 것이다.
이렇게 을이 갑을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 함이니 갑은 머리이시고 을은 그 몸으로서 몸의 지체 역할이기 때문이다. 고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구원을 받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구원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구원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나의 복종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당연히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다[벧전 1:8]. 그러나 아담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훌륭한 존재로 자기들을 만들어 주셨으나 스스로의 관리 소홀로 즉 불복종의 교만한 마음으로 범죄하여 자멸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어느 때든지 얼마든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오직 안전한 길은 스스로 "조심하는"[고전 10:12]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사람을 죽이시든가 살리시든가 할 수가 없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요 세우신 법질서인데 친히 이를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실 수 없음이다. 인간 피조물 스스로가 범죄하여 스스로 죽는 상태가 되지 아니고는 하나님 친히 그를 죽도록 버려두시는 법이 없으며 또 그렇게 죽게 된 것을 친히 살리실 수도 없는 일이다. 인간 스스로 원해서 그런 죽음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이 우주 질서의 확고함을 확인하게 된다.
아담의 죽음의 의미
그래서 인간에게 현재와 같은 죽음이 온 것인데[롬 5:12]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악령들의 죽음[영원 멸망에 처해짐]과는 다르다. 인간이 원래 이중 구조라 영물[靈物,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과 같지 않고[그들은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창조되었으므로-창 2:19] 자연계에 속한 몸과 영계에 속한 영혼으로 이중 구조가 되어 있어[창 2:7]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영계인 에덴낙원에 거처하게 된 결과로] 그 신령한 몸의 상태가 도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아주 복귀해 버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물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모든 악령들]과는 달리 구원의 기회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구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나 아담의 범죄나 다 같은 고의성을 띤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여 용서되지 못하고[히 10:26] 가차없이 죽음에 이르렀으나, 인간[아담]의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돌아감을 의미하므로 그 죽음만을 해결하면[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가능해지는 성질의 것이다.
인간[아담]은 원래부터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인데 신령한 몸을 잃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 일정 시한(時限)만 지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으므로, 영생하도록 창조되어 있고 영생의 삶을 살고 있던 인간으로서는 "죽음" 바로 그것이지 더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한 것이다[롬 5:12]. 범죄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살고 있을 수 있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생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로 직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은 영적인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에서 창조되어 모든 지식이 충분히 있어 모든 사리 판단을 정확히 할 수 있음에도 범죄하였으므로 그들은 원천적으로 용서가 없고[히 10:26], 더군다나 그들은 아담과 같은 이중 구조가 아니라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영물들은 우리 인간처럼 영혼과 육체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말하자면 영이 형상화[육체화]되어 있는 경우다.
아담의 범죄 역시 고의적인 것이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한 점에서는 같으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계에 속한 영혼과의 혼합 구조[이중 구조]이므로 애초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아담 이후의 인간은 한결같이 아담과 같은 직접적인 시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괄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터라[죽은 자로서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아담과 대비할 때 확실히 불공평 불공정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렇게 범죄했으나 다시 살아날[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역시 공평공정하게 그런 기회가 부여됨이니 따라서 우리 중 누구도 "나는 아담처럼 시험을 받지 않았고 그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왜 아담의 죄와 죽음에 연루되어 이 죽음을 당해야 하나? 억울하다" 하고 불평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단지 차이는 아담은 극락(極樂)으로서의 에덴낙원에 있었고 우리는 이 죽음의 자연계에 위치해 있어 고난 중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여 곧장 죽음의 세계인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왔으니 당시의 그 영화가 한낱 꿈이다. 우리로서는 당장은 이 지경으로 이 고생이나 천국에 들어가면 오늘날의 이 고통이 한낱 꿈과 같은 아련한 추억이 된다. 오직 문제는 영원한 거처가 어디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입에 올릴 만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시험 받기는 그런 에덴낙원에 있으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듣게 되거나 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받게 되고 필요하면 스데반처럼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나 따지고 보면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당시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상태에 이른 경우에도, 그 때의 아담과 똑같은 위치에 있어 아담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하게 하신 바로 그 위치에 자리잡아 있음이 마땅한 것이다. 아담 역시 다시 살아날[그리스도 안에서] 기회가 부여되어 다시 살아나더라도 다시는 이전과 같이 범죄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지 만일 이전처럼 또 범죄하게 되면 영원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야 불문가지다.
이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영물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 일당]처럼 영원 멸망이다. 아담이 과연 어떠했을지 그런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고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이렇게 아담과 똑같은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 즉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위치하게 하심이 우리의 구원이다. 범죄하기 전의 상태라 하더라도 아담과 우리의 차이는 아담은 영계에서 온갖 극락(極樂)을 누리는 중에 범죄하였고 우리는 여전히 이 자연계에 있어 모든 인간고(人間苦) 가운데 있으면서 아담처럼 그런 시험 대상이 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는 것뿐임을 앞에서 지적했다.
아담은 그렇게 시험의 대상이 되어 있는 중에서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지 못하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어 버려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도 아담이 거쳤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구원 받은 상태 그리고 현실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그런 기회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노아 당시 순종하지 않아 홍수로 인해 죽음에 휩쓸렸던 이들에게 그런 기회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벧전 3:19].
아담 및 악령들과 우리[구원 받은]의 차이는 또 있다. 즉 아담은 에덴낙원이라는 영계의 극락 중에서 범죄하였고 우리는 이 자연계에 속한 인간고가 충만한 세상에서 과거 범죄했으니, 전자는 삶의 낙의 호강에 받쳐 범죄했고 후자의 경우 죽음에 놓인 처지에서 살고자 하는 욕심으로 범죄하였다[히 2:1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에덴낙원이라는 극락 속에서도 자기 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위치해 있는 인간[아담]이 시샘이 나서 그리하여 자기보다 지식 면에서 열등한 아담을 깔보는 마음이 일어나 교만으로 범죄했다[딤전 3:6].
아담은 하나님처럼 된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꼬드김에 넘어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처럼 되어볼까 하다가 범죄하여 죽음에 몰락한 것이다. 에덴낙원의 극락 속에서 지내다가 그런 허영심을 품은 아담이나, 인간고의 이 죽음의 세상에 처해 있어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나, 어느 쪽이 더 유리하고 불리한지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범죄하기는 마찬가지고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영물[악령]들이나 우리나 아담이나 다 똑같은 까닭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나 우리나 그리고 이미 그렇게 선악간의 영원한 구별이 지어진[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악령 또는 거룩한 천사로] 영물들이나, 영원한 생명체로 창조된 것은 공통점이고 선악간에 구별 지어지는 것도[우리의 경우 악인이 되느냐 아니면 의인이 되느냐] 동일하다. 영물들은 그 분류 작업이 이미 끝났고 지금은 우리 인생들의 차례로서 이 세상은 바로 그 시험 무대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시험하는 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영원한 생명체로 '새로 창조된 것'을 가리켜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시험의 대상이 되어 선악간에 구분되어져 영원한 생명의 세계 아니면 죽음[멸망]의 세계로 각자 스스로의 선택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도 동일하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예외라면 불공정 불공평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우리만을 특별히 보아 주실 이유도 없으니 피조물은 다 똑같고 평등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믿는 이들이 그렇게 선악간의 분류 작업이 진행되어[고후 5:10,11] 의인과 악인으로 갈라서는 경우라면, 지금도 믿지 않는 이들은 어떤 설명이 가능한가 할 때, 그들 역시 똑같은 상황에 있어 이 분류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60%[반반인 50%를 기준할 때]의 비율로 부정적인 의미로 보다 더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주 100%가 아니고 나머지 40%의 여유가 있다는 것은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얼마든지 생명의 세례로 들어올 기회가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창조로써 모든 인생들을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되돌려놓으시는 목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데, 구원하셔도 즉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생명체로 만드셔도 어차피 모든 인간은 과거 영물들의 경우와 같이 시험의 대상이 되어야 함이다. 이런 선악간의 선별이 필요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혹자는 악인으로 혹자는 의인으로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장시간에 걸친 저울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이라는 좋은 세계에서 시험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처럼은 되지 못하고[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스스로 범죄하였으므로] 멸망으로 들어갈 악령들처럼 범죄의 결과로 떨어졌지만 멸망은 면하고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 덕분에 겨우 턱걸이를 하게 되어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우리도 이 세상에서 동일한 시험의 대상이 되어 있는 고로 여기에 차이가 있다고 했지만, 실상 우리 역시 아담과 똑같은 상황에서 좋은 환경이니 나쁜 환경이니 하고 유, 불리[有不利]를 따질 근거는 없음을 이미 지적했다.
왜냐면 우리[구원 받은]가 그런 좋은 환경에 처해 있다 해도 아담처럼 스스로 범죄하게 되면 악령들처럼 이제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이 자연계에서 그런 시험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더 손해가 날 것은 없으니 그런 좋은 에덴낙원에 있었어도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범죄하여 거기서부터 추방되지 않았던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천사들과의 전쟁으로 이제 거기로부터 완전히 축출되어 있는 상태다[계 12:7]. 이에 대해서는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영원한 세계[그것이 영생이든 영원한 멸망이든]에 비하면 이 찰나와 같은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모든 상황은 감히 수(數)에 칠 가치도 없다. 소소하고 미미한 일에까지 신경 쓸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담처럼 에덴낙원에 들어가서 거기서 시험의 대상이 된다면 일은 더 복잡해진다. 역시 거기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범죄자가 생길 것이요[처음 믿을 때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기게 되어 있다.
그런 오점이 남겨지고 상처가 남게 될 바에야 차라리 여기 현재 위치한 자연계에서 모든 시험을 끝내고 산뜻하게 영원한 생명의 세계든 멸망의 세계든 들어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이런 시험의 때요 장소로서의 의미가 이 세상인즉, 처음부터 아예 믿지 않는 이들은 이 시험에서 이미 걸러 내어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셨다[요 3:18].
그렇게 되는 이유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이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함이다[:19,20]. 이는 물론 일반론이고 한번 그렇게 믿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확정되어 고착화하는 것은 아니니, 언제든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그런 사람들도 얼마든지 아직은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들 믿지 않는 이들은 성령을 받을 필요도 없이 즉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날 짬도 없이 처음부터 악령들의 행세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심판을 이미 받은 상태이다. 반면에, 아담이나 영물들이 처음은 산 자로서 창조하심을 입었어도 그 후 범죄하여 결국은 생명에서 떠나게 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새 창조를 입어 일단 그들처럼 산 자가 되어 있어도 범죄하면 역시 그들과 같이 생명에서 스스로 떠나 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는 것이다.
새 창조를 받은 대로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사랑하여 확고부동하면 일사천리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나 스스로 그 반대 방향으로 행동하여 멸망을 자취하는 꼴을 빚어낼 수 있으니 어찌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함"[딤전 4:16]이 아닌가. 이렇게 나 자신을 구원하고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빌 2:12/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내가 이미 구원 받아 있으니 이제는 구원 받은 자답게 처신하여 이 생명으로부터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어리석게 벗어나는 일을 스스로 벌어들이지 말라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인생 사는 법칙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한 몸' 의식에서 공공성(公共性)을 지향하고 개인주의[이기주의]로 나가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철저히 나가려면 이상 설명과 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일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선언한 의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기 부인이 한 마디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우리 구원의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여 철저히 자기를 위함이 없도록 함이 원래부터의 하나님 정하신 삶의 법질서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골자이다. 철저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처럼 그냥 형식적으로 할 바에야 그것이 과연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되랴. 완전을 기하는 철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를 부인함"이라 하신 것이다. 어떻게 철저를 기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함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를 대신하시는 죽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죽음"이므로 우리의 죄 용서와 관계됨[죄인으로서의 나의 죽음의 죄 값을 치렀으므로]과 동시에 우리가 다시는 죄 짓지 않게 되는[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라는 것이 죽었으므로] 근거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니 그것이 대신 죽으심이 아니냐 하겠지만, 내가 앞으로 죽게 되어 있는 '죽을 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마 8:22]인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불찰이다.
죽은 자로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죽은 자로서의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자로서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태어나셨다가 마침내 십자가 상에서 죄인으로서의 형벌 받는 죽음의 모양새를 띠시고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갈 3:13]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함은, 그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어 죽음의 상태에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 보이심이라는 뜻이지,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친히 우리 인간을 "죽은 자"[마 8:22]라 말씀하실 리가 없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범죄함으로써 죽었으니 죽은 자가 아닌가. 죽은 자가 낳은 우리들이니 당연히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때에는 과거의 옛 삶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도록 그런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말하자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모세 인도하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벗어남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인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런 영광스러운 구원을 망각하고 도로 이집트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고집하는 자세를 취했던가! 이 "광야 교회"[행 7:38]를 오늘날 우리 교회의 "거울"[고전 10:6]이라고 했다. 즉 우리 역시 얼마든지 그들의 악한 본을 따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들이 직접 이집트로 돌아간 것은 아니나 그런 마음 자세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킨 것이다.
그래서 광야 길에 60만이라는 숫자가 매몰된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상태를 하고 있지만 천국[가나안 땅으로 상징되는]에는 들어가지 못함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믿음의 행동을 할 때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경우 그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논리적 근거가 된다 함이다.
엄연한 사실로서의 토대가 받쳐 주지 않는 한 논리만으로 무슨 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니,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이기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된다. 성경은 이와 같이 '죽은 것'과 '다시 살아나 있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여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과 "새 사람"[골 3:10/엡 2:154:24]으로 표현한다. 내가 죽었는데 무슨 과거와 같은 자기 집착이 있을 것인가. 앞에서 내가 죄를 짓지 않는 근거가 이 죽음 외에 더 있다 했는데 다름 아니라 나와 하나가 되시어 영원히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제2의 나, 또 하나의 나, 나의 영원하신 짝이라는 위치에 계셔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움직일 일체의 근거도 필요성도 이유도 논리도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전체의 머리로서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천국에서 또는 이 세상에서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나를 위해 주게 되어 있는 구조이기에 그렇다.
초대 교회에서의 공유, 공용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8,29] 하셨다. 그런 관계로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유, 공용(共用)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행 2:44,45]고 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므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었다"[4:32,34,35]. 소유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젊을 때 신학교에 다니면서 성경 중에 이 대목을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이야말로 사람 사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냐 하고 손뼉을 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핵심을 놓친 것이다.
인간의 '현재 죽은 자로서의 실태'를 무시하였으니, 이런 삶은 자진 자발적으로 사랑 가운데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외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뜻이 좋으니까 강제로라도 이런 방법을 실시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하고 그래서 이상향을 건설하는 지름길이라 착각하고 정치 권력으로써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강제하다보니까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어 자유 애호의 수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고 결국 개인적인 야욕밖에 모르는 특정 개인에게 농락되기만 하다가 결국 거창하게 실시된 시도가 무의미한 실패 작품으로서 공산주의는 마침내 끝난 것이다.
완전 평등의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면서 철저히 한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자기 부인을 핵심으로 하는 한 몸으로서의 사랑의 공동체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이런 이상(理想) 국가의 헌법으로서는 머리를 사랑하고 각 지체된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조화된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뿐인 것이고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마 22:36-40]. 이런 일은 개개인이 이상과 같은 이상적 삶을 목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방법 외에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우리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완벽하게 이루셨던 것이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이런 인간고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정작 핵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여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그리고 결정적인 흠이지만] 세상 그 어느 종교보다 합리성을 지니고 있음이니, "대신 죽으심"을 내세우거나 얼토당토않게 마리아에게 기대는 소위 "기독교"보다는 월등히 나은 것이다. 인간고에 찌들려 있는 현실에 집착하지 말라든가 자기중심[이기주의]의 폐해를 설파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이러한 실상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들 세상 종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의 내용쯤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종교를 떠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이런 여러 쓴 소리를 아니할 수 없다. 정사(正邪), 진위(眞僞)를 구분해 주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하셨을 때 세상은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매단 것이다.
"세상이 악하다" 하는 것은,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을 것이다'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을 것"[겔 33:8]이라 경고하셨으므로, 복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그들로 하여금 "악인으로서의 죽음"을 면하도록 돌이키게 해 줄 것이 아닌가. 돌이키든 않든 그 자유이나 여하간 일차적으로 경고는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한 선인은 없고 악인은 없으니[롬 3:10,11] 모두가 악인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 하고 또는 멸망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왕생극락한다 하니 우리더러 적이라 하고 원수라 하든, "악인아, 어는 정녕 죽을 것이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스데반처럼 참혹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역시 "세상을 악하다 하므로 세상의 미움을 받아"[요 7:7] 스데반 집사처럼 돌 무더기 속에서 숨질 각오가 되어 있다[행 7:58]. 우리가 이와 같이 천주교도 옳지 않다, 개신교도 옳지 않다 하게 될 줄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선수(先手)를 쳐서 요즘 색다른 이단들을 일으켜 천주교도 예수교[개신교]도 마귀의 짓이라고 선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마귀는 항상 이런 식으로 혼란, 혼돈을 조성시켜 내부적인 교란작전을 시도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다.
초대(初代) 교회 당시도 교회가 시작하자 말자 악령은 곧장 여러 사이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을 요한이나 바울 서신(書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핍박 받는 것까지도 모방하려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각종 사이비를 만들어놓고는 주변으로부터 의당히 탄압을 받게 되면 옳거니 하고 "보라! 이렇듯이 박해를 받고 있으니 초대 교회와 같은 순수한 진리가 아닌가!" 하는 말도 예사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는 재주가 있다.
고로 항상 진위(眞僞)를 가려내고 정사(正邪)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여 명확한 기준을 잡아 세워두는 일이 긴급하고 긴요한 일이니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 일이다. 바울 사도와 같은 능력 있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을 때도 오히려 그대로를 수용하지 않고 성경을 살펴 과연 그 말이 옳은가 하고 판단하려 했던 베뢰아 사람들의 자세를 성경은 칭찬하고 있음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행 17:11].
스데반은 그런 구분을 해 준 대가(代價)로 무참히 돌에 맞아 죽었다. 비싼 대가다. 이런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 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는 그와 같은 순절(殉節) 또는 절사(節死)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악인(惡人) 가인이 의인(義人) 아벨을 죽임에서부터 이 세상은 그 첫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정체를 명확히 밝혀 주신 것이다.
앞에서 '의'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냐를 설명했지만 간단히, '사람 사는 방법'을 말함이다. 살라고 창조하셨지 죽으라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사는 법대로 살아야지 죽는 길을 따라 살 것인가. 바로 그 '사는' 법이 선[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니까]이고 의[올바른 것이니까]이다. 이런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과 선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천국은 산 자의 세상이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전에는 의인도 선인(善人)도 세상에 일절 없었지만[롬 3:10,12]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고후 5:15] 됨으로써 의인이 되고 착한 사람[선인]이 된 것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데 즉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는데 어찌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의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어찌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인데 어찌 "선을 행함"이 아닌가. 선을 행하는 자가 어찌 죄인인가. 선과 악, 의와 죄의 개념부터 먼저 정리할 일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몸' 체제에서의 공동체 의식이 바로 의요 선이다. 공동체 의식을 마다하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양심이 사람마다 있고 이 양심의 소리가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을 말함이기에 그렇다. 단지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핑계를 댈 뿐이어서 죄인이요 악인 그대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런 공동체 의식을 철저히 가능하게 하는 '뿌리로부터의 혁신'이니 곧 "새 창조"[:17]요 "다시 출생함"[요 3:3]이다. 자기 부인이 아니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의 원리로서 확립시켜 준 것이다. 일반적인 개신교의 성경 이탈이 대체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전혀 어려운 것도 없고 또 아니건만 오직 자기 욕심 즉 세상에 살고자 하는 미련이 그런 기상천외의 세상 교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소위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식의 교리다. 의인이기에 의롭다 하심이지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하신다니 세상에 그런 해괴한 말이 어디 있는가. 이는 일종의 거짓이다. 하나님을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다 알리는 막심한 불경죄이다. 의인이 되고 선인(善人)이 되고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무슨 큰 일이나 되는 듯이 여기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워낙 죄에 찌들고 ‘자기중심’을 정상인 양 착각하여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 반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의인되고 성인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고 불가능한 것인 양 생각해 온 것이다. 제대로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함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라"는 말씀은 병서(兵書)의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와도 같은 너무나 평범한 이치이지만 단지 색다르게 들리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특수 환경, 상황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중인 전장(戰場)이건만 마치 태평성대인 것처럼 세상을 착각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전쟁이라면 어떻게 적을 이길 것인가 하는 것이 최대 과제다. 이 세상을 전쟁 상황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승전(勝戰)의 기본 자세가 무엇인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한 그대로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하면 보존한다는[요 12:25] 말씀이 그것이다. 전쟁에 임하여 전투원이 승리를 기약한다는 이 말은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성경의 진리 그대로의 삶과 죽음의 이치대로 따름이니 이 세상에서 말 그대로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 사는" 진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임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와 하나되시기 위해 그래서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시기 위하여 굳이 고난 받으셔야 했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세상이 아직도 존립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나머지 사람들도 구원 받기 위함이므로 이는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 승전(勝戰)의 비결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육체로서 움직이고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敵陣)을 파(破)하는 막강한 힘으로서, 곧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함에 있으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척결하려는 만반 태세를 갖춤에 있는 것이다"[고후 10:3-6] 함과 같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대처하여 일관되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우리의 본이 되시는]의 자세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고 대응하심이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기준과 표준으로 삼으심이다[눅 4:4,8,12]. 항상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승리'이셨던 것이다[요 16:33].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이기는" 것으로 표현하셨는데[계 2:7,11,17,26/3:5,12,21/21:7], 누구든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은 본을 따를 일이다.
천국 즉 본격적인 생명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런 "죽음[사형수의 형구(刑具)로서의 "십자가"라는 단어가 함유하듯-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눅 9:23)고 하셨으니까]"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자기중심"의 개념과 대칭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만 사용되어지는 단어다. 천국[정상적인 삶의 세계]에서는 따라서 그런 용어조차 있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성경을 읽으라고 권유하는 마당에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구원 얻는 믿음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는다는 개신교에서 성경을 고어(古語) 투 그대로 그리고 사어(死語, 현재는 별로 통용되지 않는 골동품화한 단어)들을 오랜 세월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당히 사람들로 애독(愛讀)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도 젊은이는 물론이고 나이 든 이들까지도 이런 생소한 단어들 앞에서 끝까지 읽어보려는 의욕마저 꺾이게 한다.
이런 모순된 개신교의 처사는 그들의 교회가 종교화되었고 화석화(化石化)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 중 하나다. 그런즉 구도자들은 이런 난관이 있음을 미리 알고 인내심 있게 끈기 있게 성경을 읽을 것을 권한다.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가름하는 기로에 서 있으면서 그만한 열성도 없이 어찌 진리를 터득하고자 한다 하리요.
오늘날은 컴퓨터 시대이니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 신구약 전권을 자기 컴퓨터에 전부 옮겨놓고 여러 편을 복사해서 스스로 자기 취향에 맞는 성구(聖句)사전을 만들 듯이 편집해 가며 분야별로 하든 어떻게 하든 해서 성경에 통달해 있는 전문가 되어야 마땅하다. 고어체를 읽기 쉬운 현대어로 바꾼다든가 하는 작업은 아주 수월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개인 사이트에 소개하여 만인이 읽게 한다면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라는 키 워드를 정하여 성경에서 '찾기'를 시작하면 평소 성경 책장을 넘기며 드문드문 읽는 것보다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보다 정확한 의미로 깨닫게 될 수 있다.
나이 많은 이들도 컴퓨터에서는 얼마든지 돋보기를 활용해서 글자 체를 확대해서 읽을 수 있으니 여러 모로 활용할 수 있다.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는 성경이시므로 단계별로 가르치실 수가 있다. 따라서 같은 구절이지만 과거에 알았던 의미가 있고 오늘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진리가 전혀 다를 수 있다. 이미 아는 성경 구절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말고 마치 새로이 대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을 일단 읽으신 다음에 대하는 성경이라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하셨고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 하셨는데, 갑이 을 안에 을이 갑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안이라는 뜻이기도 하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롬 1:28]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위해 사신다는 의미로서 나를 품에 품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은 내가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셔[엡 3:17]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를 힘쓰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는지 여부를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3:5,6].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은 강제로 내 안에 계심이 아니라 내 스스로 기꺼이 영접해 모심으로써 되는 일이니[계 3:20], 항상 내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는지 여부는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내가 살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될 때 그러하다.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의지력으로 마음에 모시는 것이기에 의식적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순간순간마다의 결단의 행보(行步)다.
그래서 이렇게 의식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믿음에 있는 줄을 알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버려진"[고후 13:5,6] 자가 되는 것이다. 계시고 않고 하는 확정적인 증거는 내 영혼이 그리스도[또는 아버지]를 사랑하면 자연 나타나지는 것이니, 내 스스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내 아무리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강변해도 내 스스로 판단할 때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고후 5:15/롬 14:7-9] 여겨질 때는 그것은 거짓이 되어 실제로는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 얼굴을 뵘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저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마 18:10] 하신 바와 같이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항상 뵙는 위치였었다. "그러면 항상 뵙는 위치였다면 하나님을 뵙는데 죄를 어떻게 지을 수 있는가?" 할 것인데, 일부러 하나님께서 여자와 아담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잠시 자리를 피하셨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 시험을 당하실 때도 정작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는 천사들이 자기를 비켜 주어 떠나 있다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물러간 다음에야 다시 돌아온 것과 같다. 마지막 시험에 이르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물러가라!" 하셨기 때문이다[마 4:10].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하면 물러간다[피한다]"[약 4:7]고 한 그 뜻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 줄 알고 즉시 이를 간파하는 데에서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더 이상 머무를 명분이나 이유를 찾지 못함이다.
장차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무슨 그런 약한 말씀을 다 하고 계십니까?" 하는 투로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고난 중에 나아가심을 알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마치 마지못해 당하시는 고난처럼 여겨]나무람 비슷하게 예수님을 간할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그 말에 조금이라도 동조를 하셨더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은 성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런 시험이 아니라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은 영물들인 천사들이나 인간이 아담이나 항상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그 의미다. 그런 영계를 범죄함으로써 인간[아담]이 박탈당한 것이 오늘날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인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심 받고 그리고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었고 그래서 사람을 위해 에덴낙원을 창설하셨고 그래서 아담은 신령한 몸을 입음으로 인하여 죽지 않고[자연계에 속하여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었기에 그 몸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일 리가 없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영생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과학적 발상으로 영원히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의 교리는 얼마나 허망한가. 일단 육체가 썩어 죽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환생, 윤회, 전생 이런 것은 처음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고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악령들의 분신으로서의 네피림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악령들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스스로를 변신시켜 인간 여자들을 통해 태어나게 한[낳은] 소생들이 네피림이기 때문에 반 사람, 반 영이므로[육체는 사람, 영은 악령(혹은 영물)의 속성이므로] 육체로는 일단 죽기는 하였으나 나중에 저들 나름의 어떤 조건에 맞아지면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명령을 따라 사람의 태에 들어가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것이 환생이요 윤회, 전생 등의 현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적 그리스도 즉 "짐승"이다[계 17:8]. 그는 이전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했던 자임을 이 대목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는 일절 배제되어 있다. 그들의 죽은 넋이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들로서 그 본령이 악령과 같기 때문이다.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소위 환생, 윤회가 해당되지를 않는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생들을 이같이 속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렇게 죽음이 왔은즉[롬 5:12] 그 변화가 엄청난다. 즉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영계인 에덴낙원에서처럼 뵙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항상 뵙는 길이 열려진 것을 가리켜 당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한 것이니,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이다. 우리 인생은 결코 두 번 다시 에덴낙원 곧 영계로 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을 [따라서 신령한 몸이 되지도 못하고 영생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 일이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나님 친히 사람으로서 우리와 하나되어 주시니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얼마든지 영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주님은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서 죽음의 결말을 우리 위해 당하신 후에는 부활하실 때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원래의 모습인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시어 완전히 이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행동하시게 된 것이다. 즉 문을 닫아 안으로 잠가놓아도 들어오시고 갑자기 사라지시기도 나타나시기도 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처럼 그런 신령한 몸이 아직 되지는 않았으나 내 안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으로서 그 성령으로 임하여 계심으로써 이미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는 관계로 얼마든지 주님[사람이신]을 뵐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로 계시니 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뵘으로써 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뵈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신 그대로다.
4. 만물의 생성[창조]과 존립의
원리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