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1)ㅡ이병철 질문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1)ㅡ이병철 질문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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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생(緣起生)"

다시 묻는 것이니, 나 홀로 열반, 해탈에 이르렀다는 것과 나와 너와의 관계 즉 머리와 몸의 관계와 같은 "둘이 하나 됨" 또는 "한 몸됨[이 한 몸됨에서는 반드시 머리로서의 조물주의 존재가 필수, 필연이다]"의 이치 중 어느 것이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 나 홀로 세상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먼저 남녀 하나됨에서 시작하여 엄마 품속에서부터 자라나 오늘의 내가 있음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연기생(緣起生)"이 아니랴.

①"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영원한 실제가 없다"는 뜻으로 그들은 "연기(緣起)"라는 말을 쓰고 있다. 모든 현상이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음을 누가 모르랴. 그런데 왜 난데없이 ②"영원한 실제가 없다"는 것으로 결부시키는가. ①과 ②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 마음대로 갖다 붙인다고 연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논리적인 구조가 짜여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①과 ②는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기는 고사하고 전혀 다는 차원의 영역이고 세계가 아닌가. 다시 말해 이 가시적인 자연계와 영원성을 지닌 것과는 엄청난 차이와 괴리가 있다. 어찌 같이 취급될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첫 단추 잘못 끼운'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를 배울 것이니, 만사 만상 만물 만유가 다 양면 구조다. 우리 육체는 자연계에 속해 있고 그래서 아는 것이라고는 자연법칙뿐이다. 이 역시 조금은 안다고 하겠으나, 우리가 전혀 모르는 영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영계에 대해 아는 바는 없으나 존재하는 것은 명백하니, 삼위일체 원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원리는 3운법칙이 증명하고 있다. 자연계의 실제를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영원한 실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과학자가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을 부정하지만, 자연계 하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계를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연계와 대립되는 당연히 우리 오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일진대, 나 홀로 득도하여 열반, 해탈에 이른다 함이 웬 말인가. 이는 마치 남녀 한 몸됨으로 인함도 없이 엄마 품속도 생략하고 나 홀로 세상에 저절로 태어났다고 말함과 같다. 남녀 한 몸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내가 세상에 나온 것이니 이런 '관계'를 바로 연기(緣起)가 아닌가. 바꾸어 말해 나 홀로로는 연기가 안되고 관계 속에서만 '연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득도(得道)"의 '도(道)'에는 나 홀로 깨달아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함"이 "연기"이니 즉 ‘둘이 하나 되어 있는’ 이치가 이 '연기'를 따름이요 이것이 ‘창조와 존립의 법칙’이고 이를 ‘삼위일체 원리’라 하는 것이다. 나 홀로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라면 그러면 내 자신이 모든 진리의 본체라는 말인가. 아니면 무슨 뜻이라는 말인가. 이 '나[自我]'라는 것은 나만 아니라 내 이웃들 역시 그런 무수한 '나'들이니 이 '나'는 그런 무수한 '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식으로 '나'를 중심으로 말하면 진리는 영원히 찾지 못한다. 나 자신이 진리가 아닐진대 나 중심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나 홀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롬 10:17]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이것이 진정한 관계와 관계의 "연기"다. 왜냐면 나와 "관계된" 그 무엇 또는 누구가 있어 내가 그의 말 또는 그와 관계된 말을 '들음'에서 진리는 깨달아지는 것이다.

객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주관적인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이 우주에 '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나'가 있어 그 무수한 '나'가 똑같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깨닫는 바가 똑같다 또는 똑같아야 한다는 말은 그 진리가 이미 객관화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렇게 객관화되어 있는 진리를 누구나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니 무엇을 또 깨닫는다는 말인가.

객관화가 되어 있는 진리일진대 여러 수십 세기를 거쳐 내려와도 매양 그대로 즉 "붓다"가 처음 수도 정진에 들어갔듯이 계속 그 모양 그대로의 입산 수도 정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객관화되어 있는 것은 얼마든지 말로써 나타낼 수 있음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즉 말로써 전달하여 그것이 수용이 되면 되고 거부하면 거부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은 "전달하는" 것이지 각자 스스로 깨달으라고 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그 첫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는" 그 일정한 규칙성이 있어 무릇 결과는 모름지기 원인이 있음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다. 현재 우리기 인식하는 모든 것은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말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다. 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로 연장됨이니, 바로 그 첫째 원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모든 관계가 그 결과로서 나타남이다.

곧 연기(緣起)가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고(人間苦)는 이 ‘둘이 하나 됨’의 이치를 따르지 않은 까닭에 즉 범죄로 야기된 것인데, 이 원인을 젖혀두고 결과만을 두고 씨름하기 때문에 불교의 ‘연기론’이 허구요 헛다리 짚는 것이 되고 여전히 오리무중의 방황이라고 앞에서도 단정한 것이다. 그 소위 "도"라는 진리가 허공에 뜬 것이라 함은 그것이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못믿을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가 전혀 없다. 마치 부모 없이 태어난 것처럼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존재함으로써 해(害)가 있고 손(損)이 되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악(惡)한 자에게나 그럴 것이다. 왜냐면 자기 욕심껏 부리는 악행을 용납하시지 않으니까 그렇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악인이라고 자처하는 꼴이다.

칸트는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도덕적[도덕 빼놓으면 인간은 짐승이다]인 인간 삶에 하나님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역시 헛다리 짚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필요하다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그런 짜임새로 만유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를 간파하지 못했으니 그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예 중의 하나다. 인간의 이성적 논리대로 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주창한 소위 "순수이성"의 제1장 제1절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창조신 조물주 하나님부터 인정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논리가 제대로 성립되는 까닭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마음에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臨)하여 오심이[내게 나 자신의 영혼 격으로 오시는], 영이 아닌 육체로 말하면, ‘엄마’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서의 우리 각자를 품에 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지만, 이 아름다운 관계는 ‘영원한’ 것이기에 새 창조로서의 새 피조물됨이라 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다시 나는[출생하는-요 3:3]" 것으로서 설명하실 리 없다.

다시 났으니 그리고 출생을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출생하였으니 과거의 나와는 전연 다른 것이니 구조 자체가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 방금 설명한 대로 ‘엄마 품속의 아기’ 구조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하나된 체제다. 만유를 지으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도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고 했으니 하물며 우리들이랴.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하나 되어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니[14:9] 아버지 친히 나를 그 품속에 안고 계시는 모습이 또한 나의 "하나님 아들"된 모습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처럼 이상적인 관계는 없다. "엄마 품속의 아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둘이 하나됨의 관계다. 여기서 비로소 모든 행복은 출발한다. 왜냐면 우리 홀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일 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그 존재가 무엇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분간하기나 할 수 있을까. 그 첫 사람 곧 우리 조상이 그렇게 저절로 혼자 생겨났다면 그 사람은 아무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자로서 마치 기계와 같은 무감각 일색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관계 속에서만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생겨났다 가정한다면 자기의 닮은꼴을 생산해 내기도 전에 너무 삶이 무미건조하여 자기 자신을 자살로써 처분해 버렸을 것이다. 왜냐면 삶의 의미든 맛이든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 사랑도 있고 고독도 불식되고 행복도 있는 것이다. 홀로 저절로 생겨났다면 당연히 그는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자기중심에서는 한 몸 체제는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시기[만드시기] 전에는 홀로 계시지 않았던가?" 할 것이다. 이 경우,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왜냐면 그 아들께서 만유와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예를 든 것은 그렇게 홀로 저절로 생겨난 인간이 그 자식을 낳고 또 낳고 해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 왔다는 가설(假說)이다. 지금 우리는 현재의 우리 인간을 기준해서 그런 가상(假想)을 해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상정(想定)하는 그 첫 인간이 낳은 아들이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셨으니 즉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의 기본되시는 하나님으로서 거기서부터 한 몸이 체제가 구축되고 그것이 삼위일체 원리로서의 법질서 곧 생명과 삶의 기본이 세워지고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본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을 떠나 가령 우리 인간 각자가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마당에서 '관계와 관계'라면 그처럼 불행도 없다는 사실을 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행복이냐, 불행이냐 하는 갈림길은 여기 이 기본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또는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행복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들이다. 그런 데에서는 행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낱 환상으로서 자기 마음 속의 '그림 그리기'일 뿐  현실 속에서는 일장춘몽이니 물거품으로 소멸되어 버릴 따름이다. 꿈을 꾸고 꿈에서 무엇을 보았다는 것만은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꿈의 '현실'은 잠에서 깨이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지독하게도 외로운 고독 그 자체일 뿐이다. 사람이 고독해서 자결한다. 한 많은 세상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 찰라 같은 삶마저, 곧 있으면 죽게 되어 있는 그 시간까지도 못참아 주어, 미련 없이 하직한다. 그대들은 헛된 꿈만 붙들고 있다. 그런 식의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는 현실적으로 자살자들만 속출할 뿐이다. 고로 현실이 아니라 꿈만 꾸는 잠꼬대라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 되어 계시는 것은 그 영을 우리가 물려 받아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이 되어 있음이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이 되어 있었음과 대조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로 계시는 영이시다. 따라서 아버지의 성령을 동시에 받아 모심이니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로서의 위치요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시므로 한 아버지 아래의 같은 형제들로서의 동기간이다[롬 8:9/히 1:6].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 위해 사람이 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영원히 내게 선물로 내어 주신 망극하신 은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므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고 나를 위해 살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는데도 죄를 짓게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이는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가 되므로 악령 사단과 같은 위치가 되어 사단에게 용서가 없는 것처럼 용서가 없다[히 6:6/10:26,29]. 고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몸을 따라 선악간에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후 5:10].

개신교에 분파가 많아 남다른 분열상을 보이는 것은,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 또는 천주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 이는 개신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해석을 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하게 전혀 딴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어쨌든 그러하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고 인생 구원의 오직 단 하나뿐인 진리라는 것을 방증함이니, 왜냐면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신인 악마가 다른 세상 종교도 여럿 만들기도 했지만 이와 같이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을 사분오열시켜 적극 방해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개신교만이 이렇게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제각기 자기 주장을 하고 억지 해석을 하도록 부추겨 사람들을 혼란케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앞에도 지적한 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극히 간단 명료하기 때문이다. 난해하다면 혹 해석상의 차이로 그런 난맥상을 보인다고 하겠지만, 전혀 성경 내용이 어렵지 않고 너무나 명백하게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도 사단의 존재 및 활동상이 성경에서 밝히는 그대로 증명이 되어 있고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사단 자신이 이런 점[결과론적으로 오히려 역효과를 빚어낸 것]을 처음부터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 할지 모르나,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적고 오히려 이와 같이 사단이 만들어 놓은 혼란에 빠져 헤매는 이가 절대 다수이니 사단이 잘못 판단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이렇게 함으로서 실보다 득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만 아니라 감성의 존재다. 감성 없는 이성처럼 차디차고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것은 없으니 차라리 한 개의 쇳덩이나 돌덩이를 두고 더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께서 항상 ‘둘이 하나로’ 계신다‘ 함이 바로 이런 사실을 웅변한다. 곧 사랑으로 계시니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이 따로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둘이 하나로서' 계신다. 이 '하나'라는 의미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선물로 받아 그저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사랑으로 하나되어 살아야 사는 것이고 이 하나되는 사랑은 한 몸의 체제로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자기중심이 아닌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죄는 이 하나 체제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 마음대로 하겠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어서 생명이 반대 개념인 죽음의 종말일 뿐이다.

이 하나됨이 불가분성은 실체와 형상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서 아들을 두신 것이다. 고로 현재 그 모습은 오직 아들 즉 ‘사람’[아들께서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 되어 존재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모습뿐이다. 아버지는 모습이 없으시니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형체가 있을 수 없는 ‘완전함’ 그 자체 즉 모든 것의 기본이요 근본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이 "완전하심"은 아들께서 현재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하는 표현이다.

아들께서도 사람만 아니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으로 계시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또 피조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모습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완전한 모습'이다. 그러면 피조물에 대비해서 조물주께서는 어떤 면으로 완전하시냐 하면, 형체가 없으시니까 형체를 이루고 있는 만유 위에[above], 안에[in], 그리고 꿰뚫어[through] 계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형체를 갖추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형체로만 한정되어 존재하는 까닭에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제약을 받고 안받음에 따라 완전성의 여부를 가릴 수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은 피조물에 비할 때의 상대적인 의미인 것이다. 피조물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완전이니 불완전이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으로 계심이 완전한 것이니, 우리 기준으로 하면 우리가 형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불완전하신 듯이 보여 이상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일부러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건이 있으면 그 제작자가 있고 만물 만상(萬象)이 있으면 그 조물주가 계시고, 여자가 있으면 역시 남자가 있다는 뜻의 이 양면성[대칭, 대립]의 원리는 영원불변이다. 양자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으므로 둘이 하나 되어 있어야 완전하고 따로 개별적으로 있으면 불완전하다. 그러면 이제 조물주 하나님도 피조물 없이는 존재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셨으므로 조물주 역시 불완전하시냐 하면 그것은 아니니 왜냐면 피조물 없이도 원래부터 혼자 존재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완전하시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아버지와 아들] 앞에서는 우리는 영원히 아기들이다. 강대하고 막강한 영물(靈物)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또한 조물주와 피조물의 차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독생(獨生)하신 하나님[아들, "the Only begotten Son"]께서도 영원히 아버지 앞에서는 "아기[小子, Child-행 4:27]"이시니까 "품속에 계신다"[요 1:18] 하지 않는가. 이러한 ‘엄마 아기’ 관계로 되어 있는 창조주와 우리 관계를, 그리스도 친히 죽음의 고난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겠다"[요 14:18] 하심으로써 충분히 밝히신 것이다. 성령으로 다시 오심을 그와 같이 표현하신 것이다. "고아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이 얼마나 정겨운 말씀이신가. 일부러 이런 말을 골라서 해 주신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도"라 하면 세상에 계실 때처럼 "남자"라고 생각하는 수가 많은데 "우리가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고후 5:16] 한 것과 같이, 아담처럼 ‘완전한’[여자가 창조되기 전에는 성별(性別)이 없었으므로] 사람, 따라서 모성(母性)과 부성(父性)을 겸비한 사람이시다. 제자들을 "고아"로 표현하심과 같이 ‘아이’에게 ‘엄마’와 같으시고 ‘아빠’와 같으신 그런 의미로 올바른 인식 변화를 하는 것이 옳고 마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리켜 "보라,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자[小子, children]"[히 2:13]들이라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그와 같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우리가 다 하나[한 "아버지"-요 20:17]에서 난지라[出生] 그러므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히 2:11] 함과 동시에 또한 그와 같이 "아이들"이라 하신 사실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사 9:6]라 하심과 같으니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기 쉽게 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셔서 만유의 제일 첫째 원인이신데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고 그 위의 분이 또 계시어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계시는 것이고, 계시되 '둘이 하나'되는 관계로 계시므로 만유를 지으실 때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지으셨고 새 창조[우리의 구원] 때에도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신' 것이다.

또한 처음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아들 친히 이루신' 것이다. 아들께서 이루셨으나 아버지 또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것이니 그래서 "우리"[창 1:26]로 표현되시고 바로 이런 관계가 '둘이 하나 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그리스도와 짝이 되어 있음을 영원한 ‘엄마 품속의 아기’로 인식할 일이다. 이는 또한 아버지 품속에 있는 우리 각자로 당연히 표현된다. 둘이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의 피난 시절에 한 젊은 여인이 아기가 든 포대기 같은 것을 안고 눈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한 미군이 발견했다. 본즉 엄마는 동사(凍死)해 있었고 엄마는 자기 입었던 옷을 벗어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는 아기를 포대기처럼 싸고 있었다. 미군 병사는 아기를 거두어 들이고 엄마는 적당한 곳에 묻어 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 미군의 양자가 된 아이가 청년이 되자 양부(養父)는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청년의 생모 무덤을 찾았다.

청년은 무덤을 부둥켜안듯이 몸부림치며 "어머니,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하고 한없이 울고 울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여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아나셨고 지금 나를 영원히 품속에 품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매섭게 눈보라 치는 강추위는 다름아니라 아담과 우리 자신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나타냄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도 간결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 역시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평범하게 성경이 기록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집필자로서 그리 유식하지도 않고 글줄이나 쓸 수 있는 정도의 요한, 마태 등을 택하셨고 역시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열두 사도로 삼으셨고 결국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비교적 "유식(有識)하다" 할 수 있는 의사(醫師) 누가로 하여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하셨을 정도다. 당시 유식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바울 한 사람 정도다[행 26:24]. 그러나 그런 유식함도 세상 앞에서는 "미치광이"[:24]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 종교의 실태를 보아도 잡신을 위하든 유일신을 위하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절대 다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창조신을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 당연시되고, 부정하는 것은 그 반대의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교는 그런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 즉 방금 지적한 대로의 비논리, 반(反) 논리임을 스스로 노정(露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절대 다수가 무신론자로 자랑해 왔으니 인간의 지식, 지혜가 실로 한심할 정도로 빈약한 것임을 드러내는 사례가 되어 있을 뿐이다. 고로 쥐꼬리만한 지식 자랑을 하거나 그 때문에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 말 것이니 이는 필멸(必滅)의 지름길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지금 사단은 자기가 인간의 사리 판단 능력을 멋대로 조종해서 퍼뜨린 무신론을 서서히 걷어치우고 그 자신 하나님으로서 가장(假裝)하기 위해 유신론을 다시 등장시키려는 정히 그 시점(時點)에 와 있다. 원래 무신론은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무신론이 무슨 근거가 있어 세상에 팽배하게 된 것은 아니다. 사단까지도 이제는 그렇게 자기 변환을 꾀하고 있는 터에 불교만은 거의 유일하게 뒷걸음질치고 개혁의 의지가 없다.

역시 오해하지 말 것은, 사단이 하나님 행세하려는 것이 여기서 목적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인간들이나 생각하지 사단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인간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택하는 속임수로서의 수단 방법일 뿐이다. 구원 받는 사람의 수효가 일정량에 미치지 못해야 이 세상이 그만큼 지속되고 자기에게도 어떤 기회든 주어질 수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에는 이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다.

도교는 인간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오늘날 소위 ufo를 신격화하여 종교화함으로써 사교 집단이 생겨난 것처럼 당시도 악령들이 오늘날의 소위 "외계인" 대신 신선들로 가장하여 속였기 때문에 바로 그런 연유로 생긴 것이다. 을 역시 이생에서의 사람 사는 도리만을 역설하고 있는 유교와 같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불교와도 같다. 그러나 공자는 "하늘의 뜻"을 막연하게나마 인식했으니 그도 역시 이성적인 한 인간이었다.

사람이 제정신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조금이라도 정상대로 작동시킨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음이다. 불교를 모순되다 했지만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종교'는 더 모순되다. 그 모순의 정도에 따라 감점(減點)을 매긴다면 불교는 50일 때 천주교는 70이요 개신교는 80이다. 불교는 ①이 세상 삶의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②인간의 내부 완성을 강조하므로 그 어느 종교보다 건전하다 할 수 있다. 유교는 후자②만을 강조하므로 불교보다는 그런 점에서 못하다.

반면 "기독교"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를 않으니 사회에 끼치는 해독(害毒)까지 합쳐진다. 왜냐면 하나님과 그 말씀인 성경에 대하여 세상에다가 그릇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불경 죄, 모독 죄까지 겸하고 있다. 성경의 가치를 본의 아니게 깎아 내리기로는 개신교가 더하다. 천주교는 그래도 양심의 소리는 무시하지 않는데 반해 마리아에 대한 의존 심리가 병적(病的)이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저 먹으려 드는 공짜 심리가 지배하여 양심마저도 마비시키니 어찌 아니 그러하랴.

때문에 양심까지 짓밟는 말하자면 병이 들어도 중환자요 어찌 보면 불치에 결려 있음과 같다. 회개만 하면[성경대로의 회개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회개의 의미를 지어내어] 무조건 죄 용서가 되니 무슨 걱정이냐 하는 배짱 아닌 무지(無知)가 대판이다. 불교도는 오직 하나님이 살아 계심만 인정하면 되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함으로써 다시 출생하면 되겠는데, 개신교 사람들은 자기네는 벌써 그런 과정을 다 거쳤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므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어 있다.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경을 제대로 읽고 그대로 믿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새로 창조될 수 있으니 지체말고 때 늦기 전에 결단할 일이다. 차일피일은 만사를 영구적으로 그르치는 원흉이다. 세상이 이러한 죽음의 바다이므로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인즉, 죽은 자에게는 3운법칙과 같은 강제력이 동원되어도 정작 생명[영원한 생명]의 일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달리 표현하면 이 3운법칙이 인생들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강제하고 있다는 것은 인생들이 "죽은 자"임을 입증함이라 할 수 있다.

영물들은 범죄의 결과로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었고 아담은 영물 사단의 꾐에 넘어가 역시 범죄하게 되자 신령한 몸을 상실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항구적으로 귀속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인생의 죽음과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다. 죄를 지은 것이 그 원인이요 죽음과 그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불행과 고통이 그 결과다. 삶의 행복은 모름지기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철저히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 지체(肢體)끼리 상호간 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자기중심이 되어 암적(癌的) 역할을 하여 자타 함께 죽음에 빠뜨리는 것이 죄인데 죄가 용납이 되겠는가.

새 창조는 그리스도 친히 그런 머리 역할을 새로이 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한 몸 구조다. 고로 이를 알면서도 짓는 죄는 용납되지 않으니, 알면서도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혹자 말하기를, "그리스도 없이도 그렇게 한 몸으로서 이제부터 살면 되지 않는가" 할지 모르나, 인과론에서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현재의 결과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원인 제거가 선행(先行)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그 대가로서의 죽음이 현재의 결과다. 죽음은 죽음으로 일관하여 죽음으로 종결되어야지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면 법질서 확립이 안된다. 이는 그 질서를 뭉개고 없애는 결과가 됨이다. 따라서 다시는 이전처럼 죄를 짓지 아니하고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해도, 죽음이라는 결과만 붙들고 있는 몸부림일 뿐이지 원인 제거가 안된다. 즉 죄라는 원인이 있어 죽음이라는 결과를 내었은즉, 인과 관계를 따라, 죽을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그 죽은 자에게서 모든 인류가 생겨났으니 그 죽음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미도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이 이제까지 사람으로 나서 범죄하였은즉[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으니] 그 범죄에 대한 대가(代價) 역시 죽음인지라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내 자신이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마음을 완전히 고쳐 먹고 바꾸어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 종결시킨 연후에야 즉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야 비로소 논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엄정한 법질서 확립이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죽을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일단 그렇게 죽었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죽는 것은 쉬우나[누구나 죽게 되어 있으니]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에서 죽는데, 이 자연법칙을 어기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 창조는 종결된[첫 창조의 생명체가 죽음으로 종료되는] 이후에야 하나님의 새 창조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자연법칙마저 무시하고 사람이 극락왕생한다고 가르치니 이 과학시대에 와서까지도 어찌하여 그런 비과학적인 해괴한 소리를 낸다는 말인가. 자연법칙을 도외시하는데 이것이 과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면 무엇인가. 과학은 자연법칙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학문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육체가 한번 죽으면 영원히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과학'이다. 그들의 이런 반(反)과학적 주장에 대한 근거를 댄다는 것이 겨우 환생, 전생, 윤회와 같은 것들이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연법칙에 구애당하지 않는 영계(靈界)에 속한 생물체[네피림]의 영역이다.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다. 환생, 전생, 윤회와 같은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자연계와의 대칭(對稱, 相稱)인 영계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 현상이 이 자연계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극심한 인식 부족이요 무식이 된다. 왜냐면 방금도 지적했듯이 자연계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을 총칭함이다.

환생, 전생, 윤회 등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벗어남이다. 그러므로 별다른 세계로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상식 수준의 판단이다.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영계라 한다. 영계와 자연계가 대립되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반되는 것은 자연법칙을 유일한 기준으로 해서 관찰할 일이 아니고 양 세계를 통할하는 법칙 또는 원리가 있음이 명백해진다. 소위 "상위(上位)" 개념의 법칙이다.

왜냐면 서로 상반된 개념의 세계가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그 통합 법칙이 있기에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위 법칙을 우리는 '삼위일체의 원리'라 하는 것이다. 세계가 단일 세계가 아니라 이와 같이 양면으로 된 세계라면 이미 설명한 대로 영계, 영혼, 영물[환생, 윤회 등의 개념을 포괄하는] 이런 등속(等屬)을 생성시킨 첫째 원인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그 ‘원인’은 역시 영적인 실체 즉 우리와 같은 지, 정, 의를 반드시 지닌 인격적 존재라야 하고, 또한 이 자연법칙의 일사불란함을 볼 때 여럿이 아닌 오직 단 하나["한 분"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의 인격체임을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에게서만 파생된다는 이치를 우리가 확인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짐승을 낳는 일이 있던가. 생물이 무생물을 낳거나 무생물이 생물을 파생시키는 일을 우리는 본 일이 없다. 소는 소를 낳아 퍼뜨리지 개를 낳는 일도 없다. 자연계에 속한 것[결과]은 자연계에 속한 것[원인]이 낳고 영계에 속한 것[결과]은 영계에 속한 것[원인]이 파생시키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이 있으므로 그리고 그것이 자연계에 혼재(混在, 뒤섞여 존재함)해 있으면서도 일사불란함을 과시하고 있은즉 원인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 두 세계의 특징을 따라 두 가지 원인이 별도로 존재하면 서로 상충할 것이므로 혼재할 수도 없거니와 지금까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조화 통일을 이룰 수도 없다. 고로 원인은 하나이다.

이 원인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생성시키는 법이라 그래서 자연계의 생물은 낳고 낳아지는 등의 일로 해서 번식하지만,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로서의 영물들은 그런 생산하는 일이 없으니 그 생물 자체가 영원하여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것은 한시적 생명이므로 계속 낳고 낳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으면서도 어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느냐 하면 앞서의 설명대로 이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어도 그 원 뿌리가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이므로 그 자연계에 속한 특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온 사실로써도 이는 확인된다.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아담이 자식들을 낳되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는 까닭에 신령한 방법[이 경우 거의 무진장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으로 낳을 수 있고 동시에 그렇게 낳아지는 인간들은 아담처럼 영원성을 지니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아담이 범죄하여 그 몸이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어버리면서 시작해보기도 전에 끝나 버리고, 이제는 속절없이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방법대로 자식들을 낳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 그대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이므로 영적 존재로서의 영혼을 생성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친히 영적 존재이시므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에는 변동이 없다.

오직 악령들의 소생인 "네피림"의 경우 악령이 인간[남자]과 같은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킨 후 인간[여자]과 관계하여 그런 짓을 한 것임을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즉 영물["네피림"이 아닌, 악령들이나 거룩한 천사들]은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어 있을 필요도 없고 우리 인간으로 치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 구조 또는 체제인 것이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 우리 영혼을 볼 수 없음과 같이 그들 영물이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영혼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과 그들의 신령한 몸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계에 속했던 아담의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신 것으로써도 다시 확인된다. 또는 영물들이 인간의 몸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환시켜 인간 육체[여자]와 합작으로 네피림과 같은 인간 종류를 생산해낸 것으로도 증명된다.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이 정도이니 이런 한계성을 가지고 더 이상 논급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영물들은 그 영혼이 육체처럼 완전히 형상화가 되어 있는 경우이고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육체와 영혼의 양립[대립] 형태이므로 영혼의 형상화는 육체가 대신하고 있는 터이므로 그런 면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함이다. 그래서 영물들이 인간 육체로서 일시 변환시켜 인간 육체[여자]와 관계할 때에도 그 영물[악령] 자체가 영혼과도 같고 육체와도 같으므로 그 자식[네피림]에게 육체를 물려짐이 곧 영혼을 물려 줌과 같은 것이 되어 그 소생(所生)이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인간의 육체는 여자[인간]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나 영혼은 곧바로 악령의 것이 되는 경우다.

에덴낙원에서의 영물들은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자연계의 동식물의 대칭 개념으로 창조된 것으로서[창 2:19] "뱀"이 있었으니 소, 사자, 개 등등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세계가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로서의 별천지이므로 "뱀"이라고 해서 뱀 그대로가 아니고 "용"인 것처럼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닌 영물들로서,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현재 영구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기어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처럼 당당한 직립보행이다.

그리고 영계의 땅으로 지으심 받았으므로 식물도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나타내는데[선악과 나무, 생명나무 등] 동물로서의 영물[거룩한 천사 및 악령]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영물들은 하나님께서 일일이 하나씩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소생이라 하여[행 17:29]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지금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요 1:3/히 1:10-12].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예언할 때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시라 한 것이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다[히 1:2].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니 곧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나와 함께 하나가 되시고자[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가 되시는 역할로서] 함이 목적이고 이렇게 하나가 되시어 다시 살아나실 때 나 역시 함께 살아나도록 하시고자 함이다.

즉 죽는 자로서는 반드시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출생한" 자로서야 "극락왕생"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날 때는 '죽은 자'[또한 앞으로 죽을 자]로 출생했으나, 다시 날 때는 '영원히 사는 자'로 출생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현이 생소하게 들리면,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 위의 분이 계시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제일원인으로서 최고봉이신데 그 위에 한 분 더 상위(上位)에 누가 존재하신다 하면 우선 느끼기에도 마음 든든하고 무엇인가 꽉 짜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위에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을 "낳으신[to beget]" 또는 만드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낳으셨으니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심이니 그 분도 하나님이실 것이야 당연하니, 낳는다 또는 만든다는 "생성, 파생"의 개념은 자기의 닮은꼴을 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전적으로 영계에 속한 영물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다 '영계의 영혼'이 보완된 영적 존재로서의 성격이므로, 육체에 속한 자녀 생산이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영혼과 육체는 항상 분리된 채로 생성되는 것이다.

즉 육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으나 영혼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다[히 12:9/사 57;16/슥 12:1]. 이 낳고 낳아지는 것이[하나님의 경우] 또 어색하게 들리면 실체와 형체, 실질과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면 된다. 즉 실질로서의 어떤 존재가 형상을 띠게 되는 그런 모양새다. 순서상 실질이 있으니까 형상이 생기는 것이지 형상이 있고 나서 실질이 생기는 법은 없다. 고로 '실질'과 '형상'은 먼저 있고 나중에 있게 되는 차이가 있고 또한 불가분으로서 항상 함께 하는 '하나'로서의 존재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신 것이다[고후 4:4]. 그러나 인간은 육체가 먼저 있고 영혼이 나중 조성되었으니 예외가 아닌가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 인간은 자연계와 영계의 복합체로서의 이중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계 생물체의 종점(終點)이자 영계 생물의 시작(始作)이므로 이 둘을 아울러 조화 통일시킨다는 색다른 별도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이다.
"한 하나님" 즉 하나로서의 모습으로 계시는데 아버지[先在]와 아들[自生이 아닌 아버지로부터 獨生]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이다. 하나로서의 빛인데 그 내용을 뜯어 보면 입자와 파동임과 같다. 짝의 원리이니 이 둘로서 짝을 이룬 것을 둘이라 하지 않고 하나로 보아 "한 벌", "한 켤레" 등으로 단위를 매겨 주는 것과 같다. 대칭에서는 반드시 먼저 있었던 기본형이 있음으로써 그에 따르는 대칭형이 있는 법이다. 기본형 없는 대칭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상과 실체는 항상 불가분이므로 "아들께서 만유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나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시라고 말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에서도 같은 양상이니 아들께서 친히 우리 위해 죽으셨으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어 세상을 자기와 화목(和睦)하게 하시는 일을 하신 것으로서 성경은 설명한다[고후 5:19]. 그러므로 아들께서 당하신 그 죽음의 고통을 아버지께서 똑같이 나누어 참예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내가 불가분이 되어 '영혼'[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 곧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원래부터의 모습]과 '육체'[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나 자신, 물론 영혼도 포함해서]의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새 피조물"로서의 현재의 나 자신이다. 이런 이중성(二重性)은 내가 신령한 몸을 입고 있을 영원 세계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만 그럴 뿐 아니라 모두가 그와 같이 성령을 모시게 되어 있으므로 공동의 머리를 각자 모시고 있는 터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완전한 '한 몸'으로서의 체제다.

처음 창조로서의 한 몸 체제는 인간[아담]의 범죄로 폐기되었고 새 창조에서의 새로 된 한 몸 구조이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고 영혼은 육체를 위하므로 역시 이 점에서도 완연하고 완전한 한 몸 관계다. 그래서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이 자기중심[self-seeking, selfishness]이 죄의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심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나 자신과 우리 전체의]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15]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위하는 관계에서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고 그리고 그 위하심이 한 터럭도 부족하거나 소홀하심이 없다고 믿는 관계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오직 위하여 살게 된다.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이웃을 위하게 되니 이 바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肢體)'로서의 역할이다.

자기 부인이 무슨 굉장하고 엄청난 가히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할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것이고, 이해하여 그대로 따라 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익히 알아 왔던 평범한 생활 철학 즉 공동체 의식의 삶이다. 단지 이 세상은 자기 부인 아닌 자기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있으므로(그래서 죽음과 죄악의 바다[死海, 罪海]라 한다) 자기 부인이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음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난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자기 부인을 무작정 기피하는 것이다.

이 모두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한 오해다. 알고 보면 결코 유별날 것도 없는 일상 생활의 일반 상식의 하나일 뿐이다. 최고도의 삶의 지혜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부인으로 일관되게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중심 일색인 이 세상에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심지(心志)가 견고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부인을 적대시하는 세상인지라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과 적대 관계에 있는데 어찌 세상에서 환영을 받겠는가.

이를 극복하는 것이 승리다. 세상에 동화(同化)함으로써 제 색깔을 선명히 부각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패퇴요 항복(降服)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그것은 지는 것이므로]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는 성경의 경고가 이 뜻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니 오직 어버이 위치에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머리의 역할이요 몫이다. 자기 자신을 모두 내게 선물로 주신[그래서 성령의 선물이요 따라서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영원히 나의 소유(所有)가 되심이다-요이 1:9] 마당에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원하리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랴. 엄마 품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가 그 엄마에게서 그 이상 더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나를 위해 바치시고 주셨는데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으로 "확증된 사랑"[롬 5:8] 이상으로 무엇을 감히 요구하겠는가. 과거에는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알았으니 아는 대로 행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다시 묻거니와, 하나님이 존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해가 되고 독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하는데 사람 삶에는 사랑이 핵심이고 사랑에는 자유가 핵심이므로 그래서 자유 의지를 주시고 자유로이 선택하게 하여 자기의 운명까지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신 터에 그 이상 무엇을 어찌 하시기를 바랄 것인가. 인생들은 지금까지 악마의 압제를 받음으로써 자유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자유도 누리지를 못했다.

자유는 사랑 가운데에서만 누리는 법이기에 그렇다. 자유 해방은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주지 못한다. 그 자체가 악마의 장중(掌中) 안에서 요리되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어버이 사랑이시다. 엄마 품속에 있을 때 이상으로, 인간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 품속으로 돌아가 그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곧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요, 다름아닌 '엄마의 품속'이다. 원 상태로 회복되고 환원됨이다.

자기 몫으로 자기 유산[상속] 분을 미리 앞당겨 다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사는 [그렇게 살다가 필경 거지가 되었지만] 그런 막된 막내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이 필시 그렇게 거지가 되어 돌아올 줄 알고 날마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묘사하셨다. 곧 당신의 마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묘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고"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쁨에다 비유하셨다[눅 15:32]. 또한 그런 어버이 마음으로 우시기도 하셨다[weeping-눅 19:41]. 이것이 하나님 마음이다. "내가 몇 번이나 암탉이 제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로 모으려 함과 같이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하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모습이실진대, 아버지께서 바로 그렇게 눈물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모습이시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사람이면 사람처럼 행동하시지 달리 그 사람되심을 나타내실 리가 없다. 다르게 나타내신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시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되신 아들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라고 하셨다[요 12:45/14:9]. 그 우시는 사랑의 어버이 마음이 나를 위해 죽음의 고난까지 함께 당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마치 어찌할 수 없어 울기만 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약한 모습이신가 하겠지만, 하나님으로서도 하실 수 없는 것이 '강제'와 '간섭'이라 설명하지 않았던가. 악인만은 얼마든지 강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인 또는 악령[영물일 경우]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따름이다. 하물며 사랑이 그 중심이 되어 있는 구원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그런 악인에 대한 재판장으로서의 위치도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의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사랑만이 아니시고 동시에 "소멸(消滅)하시는 불"[히 12:29]로 계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곧 하나님의 양면성이다. 모든 것의 최초 원인이시고 근본이시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고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 ‘용서하시는’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결코 ‘용서하시지 않는’ 심판대의 재판장이신 것이다[고후 5:9-11]. 때문에 죄를 짓는 자는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죄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도 아니니 의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이제까지 없던 의인을 이제부터는 있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 그대로 있으면서 구원되기를 바람은 미신이다. 이런 미신을 믿어 마치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온 그리스도’로 성경과는 반대로 가르치기 때문에 개신교나 천주교가 세상 종교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이다.

"유불선(儒佛仙)"이란 말도 있듯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3대종교가 있었지만, 유교는 엄격히 종교라고는 할 수 없고 할 수 있다면 ‘조상 숭배’교라고나 할까. 선교(仙敎) 또는 도교(道敎)는 오늘날의 UFO를 종교화하는 모(某)집단과 같다. 과거의 "신선(神仙)"을 사단은 지금 과학 시대에 와서는 소위 "외계인"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불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까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종교의 세계 분포를 볼 때[1969년도 백과사전(브리태니커) 기준] 기독교가 9억8천만, 무슬림이 4억 7천만, 힌두[인도] 4억 7천만, 유교[중국] 3억 7천만, 불교 1억 7천만 순인데, 기독교 중에는 천주교 6억, 개신교 2억 3천만, 동방 정교[러시아 및 동구권] 1억 5천만, 그 외 신도(神道, 일본) 7천만, 도교(道敎) 3천만, 유대교 1천만에서 보듯이 기독교가 단연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이를 구성하는 천주교, 개신교 모두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성경과는 전혀 관계 없는 교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니, 이 사실 자체가 마귀[사단]의 '존재' 다시 말해 '악마의 이 세상 지배'를 입증함이라고 이미 지적했다. 성경과 관계 없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 교리[천주교], 성경 로마서 7장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으로 믿는 교리[개신교] 등 공통적인 '무리한 성경 해석'을 말함이다. 명백하게 그 의미를 밝혀 기술하고 있는 성경임에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이 정도로 엄청난 곡해(曲解)를 하고 있으니 이는 인간 자신만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로서 사단의 배후 조종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의 바울 자신의 체험’으로서 성경의 로마서 7장을 해석하는 것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위하는 것만큼이나 의아스럽고도 일면 신비하기까지 한 사단의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막무가내로 죄인을 죄인으로 치부하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단이 지어낸 교리일 수밖에 없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반드시 사단이 그 배경에 있어 둘 중 하나인지라, 사단의 조종으로 그런 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라 함에 아무 하자는 없다.

그런 성경 해석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지 죄인이 어찌 의인이 될 수 있다기에 의인이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따로 있는가.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이니 여기서 '말을 혼탁하게 만들기'는 불교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개신교 교리를 믿는 종교인들을 "위선자"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왜냐면 회개하면 된다 식으로 해서 죄 짓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유일한 종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어 자기 죄를 알므로 그런 상태에서 함부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아니한다. 실상 그들 역시 구원 받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개신교 사람들은 죄를 버젓이 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나를 의롭다 하시지 않았느냐" 하는 식이 되어 성경을 당당히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서야 말문까지 막힐 지경이다. 그리고 죄 짓고는 교회당에 와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기만 하면 된다고 스스로 믿고[성경대로는 믿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리(稅吏, 죄인을 상징)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이 사람이 저['바리새'파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눅 18:13,14] 하신 말씀을 자기를 옹호하고 변명하는데 사용한다. 한나님의 말씀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고리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음"[눅 5:32]을 설명하심이다. 의인은 없는데[롬 3:10,11]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인인 것처럼 자신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적응되기 전의 그림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의인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수가 없음을 앞서 이미 지적했다. 죽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면서도 정작 "죽은 자"[마 8:22]로서의 자기 실상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뜻인데도 자기 입맛대로 다른 의미인 것처럼 별도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런 무지는 그 스스로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바대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은 결과다.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구원의 진리의 문이 열려질 까닭이 없다. 사람들의 말만 듣고[여자가 사단의 말을 듣고 아담이 여자의 말만 들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결과다.

물론 개신교 체제 안에 있으면서도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들이 적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개신교의 일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교회"라고 하여 개신교와는 한 등속(等屬)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별도로 취급하여 분류한다.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접할 때 자기 변명이나 합리화를 꾀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를 정직하고 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함이다. 아담 부부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결코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후라야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다[행 17:30]. 왜냐면 회개하라는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 즉 죄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라는 의미요 그렇게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으로 그리스도 친히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회개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 의인이 될 수 없었다. 즉 죄인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의 자기중심의 성향인 "육신"[롬 7:5-8:13]이 척결되어 있지 않아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요, 과거에 지은 죄는 죽음이 그 대가(代價)인데 죽지 않았으므로 죄가 그대로 있어 의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이상 두 가지가 다 해결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 해서 이런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는 뜻으로 "칭의(稱義)"라는 개념을 멋대로 해석하고 있으니 어찌 사단의 속임수가 아니리요.

그들의 주장은 실제는 의를 행하는 의인이 아니나 "의인이라 불러 주신다"는 의미이다. 개신교의 이러한 치명적인 오류는 천주교보다 더 심각하다 할 수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양심마저 무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 그대로이므로 줄곧 죄를 책망하고 있어 천주교는 이 양심의 소리만은 차마 거역할 수 없어 ‘마리아’라는 최면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나, ‘마리아’ 교리는 그러면 옳은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 자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을 이룬 마당에 그래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는"[요이 1:9] 터에 마리아가 무슨 군더더기라는 말인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모르면서 믿을 수는 없다. 믿지 않으니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이 아니시다. 동시에 사람이시다. 사람이실진대 이보다 더 가까우신 분이 없다. 가장 이상적이게 가깝다는 뜻이니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보다 더 가까우신 분이시고 그 어느 인간보다 가까우시다.

그리스도 오신 후로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라" 하심이다. 즉 "죽은 행실을 버리고"[히 6:1]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행 3:26] 함이다.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행실이라 함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자기중심이라 함은 그러므로 '죽은 자'라는 뜻이다. 그 삶이 진정 삶이 아니니, 영원한 죽음의 고난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마치 지혜가 있어 모든 실상을 잘 아는 듯 자신을 과장하며 그 말씀의 행간의 의미를 깨우쳐 준다는 듯이 그럴 듯하게 둘러댔지만, 실상은 죽음에 이르도록 꾐 곧 속임수 즉 거짓말이었던 것과 같이, 이 로마서 7장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 체험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든 것 역시 사단의 상투 수법이다.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바울은 "육신"[롬 7:5-8:13]에 있는 것과 "성령 안"에 있는 것을 시종일관해서 대조하여 구별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된 후 그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된 것과의 차이 그대로다. 즉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만 있을 때는 이 육신의 지배 아래 있는 몸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즉 본능으로 움직이는 성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 영혼이 조성되고[하나님이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그런 다음 그 후속 조처로 영계를 만드시고 아담을 거기 두신 후로는 아담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신령한 영적인 육체로 변환함과 동시에 이 육신의 지배력은 일단락되어 끝나고 다시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이나 악령[사단을 위시한]들이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육신 아래 있음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은[7:24] 오직 아담의 범죄로 인한[사단이 에덴낙원에서 그렇게 꾐으로 인한] 자청해서 불러들인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은 처음의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육체로만 있던 상태에서 영혼을 받아[영혼이 조성되어] 에덴낙원에 와 있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음과 같은 상황임을 이미 설명했다.

물론 우리가 아담처럼 영계에 들어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써 에덴낙원 자체가 내 안에서 이루어진 형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영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영계가 나를 찾아 와 내 안에서 영계가 전개되어 있는 그런 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눅 17:20,21]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그와 같이 대답하신 것이고 제자들에게는 "때가 올 것이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다" 하시고[:22],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인데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23,24] 하셨으니, 이는 죽음의 고난 받으신 후 다시 살아나 계실 때는 신령한 몸으로서만 나타내시고 활동하신다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보아서도 이제 곧 이어 적(敵)그리스도가 나타나 아무리 엄청난 기적과 그럴 듯한 말로 자칭 "하나님"이라[계시록에서는 이를 가리켜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한다" 하였다-계 13:5] 선전해대어도 그가 영계에 속한 영적 몸이 아닌 자연계에 속한 육체인 만큼 가짜인 것임을 그리스도의 이 미리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해도 못본다" 하신 말씀의 뜻이니 즉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이 다시는 없고 신령한 몸으로서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쩍 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라" 하신 말씀도 같은 뜻이다. 이는 총체적으로 어떤 의미냐 하면 인간[아담으로 대표되는]의 원래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영계에 속한 몸이었음을 가리킴이다.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원래의 상태로 인간은 회복되어 있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된 상태이니 이렇게 회복된 구조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계심 즉 내 안에 이루어진 에덴낙원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요이 1:9] 에덴낙원은 내 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가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대로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나이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성령으로 세상에 임하시어[육체로 임하시는 재림(再臨)의 때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나] 내 안에 임하실 때,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세상에 다시 임하여 내 육체에 도로 들어온 상태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승하여 지속시키기 위함이다.

내 안에 에덴낙원이 임해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그 육체로는 하늘에 계시는 것은 그와 하나된 내 자신이 그렇게 하늘에 그와 함께 앉아 있음이니 둘러치나 메어치나 치기는 마찬가지로서 같은 뜻임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즉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이미 죽었고 함께 무덤에 묻힌 후 부활하여 승천했고 그렇게 함께 승천해 있다가[엡 2:6] 함께 다시 세상에 임한 격이나,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하늘에 계심이다[행 7:56].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니 이 두 특질이 하나로 되어 계심이다. 따라서 사람으로서는 하늘에, 하나님으로서는 지금 내 안에 계신다고 해도 아무 하자는 없다. 그러나 내 안에 임하여 오실 때는 사람으로서 오심이니 사람으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등 모든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셔야 내가 그와 하나되어 그 죽음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내가 지금 새 피조물로 생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 계심도 하나님으로서 계심이니, 왜냐면 그렇게 계심이 바로 내가 그와 같이 함께 있는 의미이므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그 모습이 내 안에 계신 모습과 같은 모습이실 수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인간이시라면 그런 능력이 첫째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시기에 나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마다 다 그와 같이 자기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수 있음이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각자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어 영원히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그런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또 하나의 나, 제2의 나 자신이라 함이니, 왜냐면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말 그대로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성의 체제를 이루어 있음이다. 단 기계적이고 육체적인 하나가 아니라 "영으로 합한 하나"[고전 6:17]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처럼 다시금 "나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범죄하면 이 하나 됨은 와해되어 버리는 그런 특성이다[히 6:6/10:26,29].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라면 나의 자세 여하에 관계 없이 한번 되어진 일인즉 항구적으로 그대로 처음 상태를 유지할 것이나 영과 영의 관계로서 전적으로 인격적 교제, 사귐 곧 '사랑으로 하나됨'이므로 갑은 마땅히 을을 위하고 을은 마땅히 갑을 위하는 상호 교류에서 지속되고 유지되는 것인즉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자기중심이 되면 즉 죄를 짓기 시작하면 이 관계가 유지될 수 없는 까닭이다.

§  사람들이 묻기를, "당신은 기독교도 반대다, 불교도 반대다 하니 그러면 어디 소속인가?" 할 것이다. "황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마 3:3]"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세상에 알릴 때 광야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사람 살 수 없는 황야임을 밝히는 뜻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외치다가 미움을 받아 붙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우리도 그렇게 죽을 것이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의 전투 현장이 이 세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알리는 것뿐이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하는 빈 들판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설면한 대로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불행한 인간을 처음부터 만드실 리가 없다. 아니, 이런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로도 만드실 리 없다. 그렇게 만드셨다면 이런 연약한 육체의 덧없음을 한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영혼이라는 것부터 만드시지 않았으리라. 이런 생각을 못한다는 것은 그가 무신론자이거나, 아니라면 하나님을 몰라도 아주 모르고 오히려 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수준임을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산다는 생각 자체를 깨끗이 단념하고 일체의 욕심을 비워 버리고 [왜냐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것을 한 세상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여기기에는 영원성을 지닌 내 영혼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다] 이 원인부터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과연 사람답지 않으랴. 이 죽음과 불행이라는 '결과'에 대한 그 '원인'에 대해 유일하게 상세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나타내 주는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68)덕에 성경이 줄곧 간행되어 누구나 어디서나 손쉽게 손에 넣어 얼마든지 원도 한도 없아 살표 볼 수 있다. 우리 이전의 사람들은 성경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설혹 있는 줄 알았다 쳐도 구해 읽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만일 공자나 맹자나 석가라도 그들의 시대에 성경이 오늘날처럼 보급되어 있었다면 반드시 읽었을 것이고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 정도의 진리 탐구열이 있었을진대 모두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라고 능히 추단할 수 있는 일이다. 

사단이 앞세우는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무릇 그리스도를 구원자, 인류의 구주로 믿는 자는 무조건 끌어다가 여지없이 몰살당하게 할 것이다[계 13:15]. 그래서 이런 날을 예언하여 바울은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1-40] 하였다. 바울의 편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니 무릇 "성령의 감동"으로 말함에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로서, 그 안에는 여러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당장 오실 것처럼 말한 것도 그 때 당시에 금방 오실 것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니 오늘날 우리를 상대한 예언인 것이다. 그런 편지이기 때문에, 장차 그 편지를 오늘날 우리가 읽게 될 줄 아시므로 지금 오늘을 위해 그런 말씀을 주신 것이라 믿어도 아무 하자는 없다.

§  그리스도 복음(福音, 희소식, 복된 좋은 소식)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나를 찾아 오시어 내 안에 임하여 계시는 데에 있다. "하나님을 찾도록 하심"[행 17:27 ]은 사실이다. 앞서도 누차 강조하여 설명했지만 동시에 쌍방의 움직임이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단지 그 방법이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찾되 나의 찾는 책무를 다하게 되면 하나님 친히 나를 찾아 오시어 나를 당신의 소유로서 차지하시는 데에 있는 것이다.

강제로 나를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드릴 때에야 나를 소유하심이니 이것이 사랑의 특성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나는 찾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찾으시는 것처럼 착각하는가 하면[개신교] 내 스스로 간신히 찾아가 그 자리에 이르는 것으로 오해한다[천주교]. 그래서 전자는 행함을 배제함으로써 죽은 믿음, 헛것으로서의 믿음을[약 2:20,26] 부질없이 붙들고 있고, 후자는 믿기만 하면 되는 일을 기어코 스스로의 노력에 중점을 두어 마리아까지 동원하는 등의 부질없는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교부(敎父)"의 권위가 어디 있는가. 교부가 여러 수천이 된다 한들 사람의 견해일 뿐이다. 오직 ‘인간의 성경 해석’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수천 수만이라 하더라도 사단은 한 사람처럼 취급하여 휩쓸어 버릴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다. "칭의[justification]"의 성경적 의미는, 내가 이제까지 의와 선을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있다고 해도 가치가 전혀 없는데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다시는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고후 5:15] 회개 곧 약속 하나만으로써 그래서 그 약속을 전적으로 믿어 주심으로써 나를 '미리' 의롭다 하시는 것을 뜻함이다.

물론 약속이니 약속은 다 그렇듯이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할 책무를 진다. 만일 약속 이행이 없으면 그 약속은 파기가 된다. 죄인을 무턱대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당연한 약속을 하면 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 주심으로써 나를 "의롭다 하심[to justify]"이다.

단지 약속에 불과하지마는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은혜요 선물이니, 의롭다고 미리부터 인정해 주심이다. 약속을 했으므로 그 약속을 수용해 주심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니 약속을 했으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받아들이셨으니 약속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거짓말하고"[행 5:4]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판정된다. 이런 사람이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다.

물론 말로만 회개[약속]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고로 그런 사람은 아예 ‘칭의’에서 당연히 제외된다. 성실하게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회개하는 사람에게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베푸심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와 같이 시작을 잘한 사람도 중도에 마음을 돌리고 믿음을 떠나는 수가 많음을 성경은 쉬지 않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변하는 것을 경고함이다.

내가 나를 위해 다시는 살지 않기로 회개하는 데에서 그리고 과거의 죄가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한]으로써 청산되었으므로 죄는 용서되니[행 2:38] 나는 깨끗한 것이며, 그리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않을 것이고 보면 거룩함의 제일보는 이미 내디딘 것이다. 끝까지 이러한 거룩함의 상태를 유지 보전하는 것이 "거룩함을 이루는"[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 것이요 구원을 스스로 이룸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나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것일진대 그 죄를 그대로 짓는다는 것은 바른 정신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회개는 당연하고, 이 회개를 뒷받침해 주어 그 약속대로 능히 이룰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내 안의 성령의 능력이시니 모두가 순리적으로 진행되고 무리한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이미 이렇게 모든 것을 충분히 이루어 주신 사실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지, 감히 믿지 못한다 하여 우물쭈물 하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신 것이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세우는’ 데에서는 사단의 교만과 범죄에 비해 아무 차이가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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