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삶의 구조----------------------------------------------------------------------------------------------------------------------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
하나님께서는 인간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 외에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야 상식적 판단이라는 것을 아예 인간에게 허락하실 리도 없다. 말이라고 하면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말'도 종교라는 미명(美名) 아래 구사할 수 있고 통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시키고 있음은, 그의 거짓의 속성상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짓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실 때는 반드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겠다는 결심이 서있을 때 한하는 것이므로, 이런 것이 없는 자 즉 자기 부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성령을 절대로 받을 수 없다. 성령 받지 못하면 당연히 구원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미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태를 추인(追認)하는 그런 모습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소유하셔야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됨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다. 내게 구원이 되는 의미로서의 "나를 소유하신다"는 것은 그 피 값으로 나를 사들이신 때문이니 생명은 피에 있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나 위해 죽으심을 뜻하고 내가 함께 죽은 것을 입증함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줄 알아 자기 부인으로 나가게 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 한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확언한 그대로다.
이런 이치를 몰라도 단지 어린 아이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다 바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심을 내가 알았으니 나도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선 사람은 그것으로써 충분한 "자기 부인"이 된다. 그 스스로는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들은 바도 없고 그래서 말로는 자기 부인이 안되어 있다고 해도 실제는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면 그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계시는 까닭이다.
사랑의 요체가 바로 이 자기 부인에 있으므로 따라서 그의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은 이미 자기 부인으로 역사(役事)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육신대로 살"[롬 8:13] 수밖에 없다 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자기 중심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은 절대로 성령을 받을 수 없고,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 몸은 너희가 먹을 양식이요 내 피는 너희가 마실 음료로서 나를 먹지 않는 이는 생명이 없다"[요 6:53,57]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그리스도를 떠나 버렸는데, 갑과 을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구조에서 갑은 전적으로 을을 위하여 존재하고 을 역시 그러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과 피를 다시 말해 그 자신 전부를 우리 위해 바치심으로써 이를 입증하시고 이를 기념하여 지키도록 하신 것이 성찬예식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는 어느 쪽도 일방적인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그렇게 하신 그대로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히 포함하는 의미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살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사는] 것이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산다"[요 6:56,57]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상대를 위해 사는 사람은 그것이 죽음이든 고난이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오직 상대를 기쁘게 해 주려고만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자기 자신의 호불호를 따지고 가려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기쁘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그 때문이다[골 1:24]. 이 경우 "기꺼이 하지"[:24] 않으면 그 고난 받음이 아무 소용이 없는 종교 행위가 되어 버리니 조심할 것이다.
왜냐면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드려야 비로소 나를 그리스도께서 그 소유로서 삼으시는 것이요 강제로는 나를 소유하시지 않는 것이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채움이 아니면 내게는 실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채우기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당시는 그런 많은 제자가 "그리스도를 떠난" 것으로 끝났지만, 초대교회 이후 오늘날까지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지 않고, 가짜와 사이비와 모방으로서의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단체가 대신 생겨나 그런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번창 일로에 있으니, 이런 것이 성경에 말하는 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다. 혼동하여 속지 말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고 내가 그렇게 믿는다고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친히 성령으로 오시어 나와 하나되실 때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내가 그렇게 원수 사이가 되어 "십자가의 원수"[빌 3:18]가 되어 있는 데에서야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심이 현실이고 사실일진대 나의 죽음, 부활, 승천도[엡 2:5,6] 역시 사실이고 현실이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와 내가 이제는 분리가 되니 더 다시는 그것이 현실이고 사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기 전 과거의 소위 "순종"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순종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실질적으로 자기 부인이 없었으므로 순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브라함 등 역대 믿음의 순종들은 오직 믿음의 결과[열매]라는 데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에녹이나 기타 모든 사람들의 사정이 그러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적인 순종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과거에는 자기 부인이 밑 뿌리가 되는 순종이 불가능했으나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의미가 명료해진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행위도 순종도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당시의 순종은 오직 '믿음의 표현'으로서만 의미가 있었고, 지금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여전하고 순종이 믿음의 표현인 것도 변함이 없다.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9]는 것 즉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5] 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당시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믿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능히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행 15:1]. 그래서 각 교회에 보냈던 당시의 바울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상 모세 율법을 언급할 이유가 없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논점들이다. 오늘날 같으면 바울이 이런 식으로 거듭 강조해서 설명할 필요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당시도 그렇고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폐기된 것처럼 착각한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당시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이런 논조로 많은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려 온 것이다. 바울 자신이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고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새 계명"[요 13:34]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하라 하셨으므로 종전의 그 어떤 계명보다 엄격, 엄정한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요구하심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기를 부인하시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갈 2:20] 이루셨기 때문이다[요일 3:16].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롬 7:10]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2:13]이라 선언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율법, 계명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7:12] 하고 "신령하다"[:14] 한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이니까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해석하게 하여 전혀 엉뚱한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내어 퍼드린 것이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갈 3:21]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한 것이고 나의 죄 짓는 실상을 가리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13] 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이 말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구원을 주고 의롭다 하실 계명은 없으니 왜냐면 나의 죄 값 청산을 위한 죽음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장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내가 죽는 데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고 신령한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그러면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에 있다. 당시의 믿음이나 오늘 우리의 믿음이나 믿음만으로 보면 속성이 같으나 그 내용은 엄청난 차이다. 당시에는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실체이신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운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계속 내 마음에 주님['주인'이고 '소유주'라는 뜻이니 나는 이에 대해 '종'으로서의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으로 모시지[엡 3:17/벧전 3:15] 않는 경우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는 필연코 그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못박고 발로 밟는 끔찍한 사태로 조만간 이어지게 마련이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신 사실을 강조한 배경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갓 태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과거 모세 율법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이 "할례도 받는 등 모세 율법도 지켜야 구원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등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喜消息), 복된 좋은 소식]이 훼손되는 위험에 직면하여 이 여파가 온 교회에 퍼지자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당시의 현안을 따라 거의 모든 편지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별로 비중을 둘 만한 의미가 없는 대목들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 중에 아무도 모세 율법 때문에 혼돈을 느끼는 이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환경과 사정에 따른 편지들이기 때문에 그 내용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것뿐인데[우리에게는 불필요한 내용이라 하여 그 대목만 삭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치 바울이 말한 내용이 대대로 전승되어야 마땅한 무슨 영원한 진리처럼 강조하고 있듯이 오늘날 오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믿음에 따른 당연한 순종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오직 영생만을 탐하는 이들에게 함정, 덫, 올가미 역할을 하여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 28:26,27] 하신 대로의 말씀을 이루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올무에 걸려 들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다시 말해 위의 지적처럼 오늘날은 별 의미가 없는 대목임에도 불구하고[물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님의 일로 권하게 되므로"(행 28:24) 전혀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는 곡해를 경계함이다] 이를 강조하는 편향성은, 사랑은 없이 영생만을 욕구하는 악인들을 걸려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구실을 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오해하게 만들어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로 하여금 영생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손 안에 빠져 들어가게"[히 10:31] 하는 조처라는 그 뜻이다.
바울이 강조한 뜻은, 아브라함이 모세 율법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이 옴으로써 지키도록 강조되고 있는 바 할례[이 할례는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것] 받는 등의 율법은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왜냐면 그런 것이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기 위한 그림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에 불과했으므로] 더 이상 지키라고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줌에 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된다는 뜻은 아니고[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 것이나 아브라함이 당시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지만] 믿음의 속성만은 같다는 뜻에 있음을 강조함인 것이다.
믿음의 속성
무슨 속성이냐 하면, 신뢰하여 사랑함으로써[하나님을] 그 말씀대로 이의없이 기꺼이 복종하는 여기에 있다.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약 2:21]이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누구를 믿는다 할 때, 말로만 믿는다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참으로 신용할 때는 그 말을 따라 행동에 옮기게 되는 바로 그런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그 아들을 주셨으니 이를[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구원된다 하시지 않고 "그[아들]를 믿는"[요 3:16] 자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명백히 하신 것과 같다.
사람을 믿을 때는 그 사람의 하는 모든 말을 따르게 되어 있다. 즉 믿음은 신뢰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현존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 말하지 않는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나타날 줄로 확신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의 핵심은 '행동이 수반되는 신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믿음으로 말하면 범죄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첫 사람 아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다. 우리 역시 핵심은 바로 이 "말씀을 믿고" 혹은 "믿지 않음"인 것이다. 하나님 계신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으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소위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도 위의 설명대로 말씀을 믿지 않아 순종하지 않는 사례가 거의 전부이기에, 이런 경고는 생사를 가름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유의할 일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을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 하고 그래서 이 사실 하나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줄 착각하니 이런 지독한 미신도 없다. 왜냐면 인간 이성(理性)에 너무나 반(反)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과 결부시켜 자기를 세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그런 "대신 죽음"을 마련하지 않으신 채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께 잘못이 있으니 아담에게 죄를 물어 죽게 하셔도 안되는 일이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진실인 양 속이고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과 속임수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기보다, 오히려 올바르게 살겠다는 결의는 없이 영원히 살고만 보겠다는 인간의 욕심이 실로 가당찮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영적인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피조물로서는 영물이나 인간이나 다 똑같은데 그러면 영물의 범죄가 색다르고 인간의 범죄가 다르다는 말인가. 그렇지도 않고 그럴 리도 없다. 범죄의 결과로 죽음이 옴으로써 멸망에 접어드는 것이지 대신 죽어 주는 일이 없어서 멸망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성경 어디에 영물도 우리 인간과 같이 그런 대신 죽음을 통해 구원이 된다고 했던가. 아니면 그런 '대신 죽음의 담보'가 없기 때문에 멸망한다고 했던가.
영물이나 인간이나 범죄하고서 살 길은 없기 때문이다. 영물과 인간의 범죄에 차이가 있다면 똑같은 형벌의 영원한 "불 못[火湖, lake of fire]"을 공유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명백히 차별화하여 말하기를, 우리 구원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히 2:16]이라 하였다. 모든 인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곧 아브라함과 같은 '실천하는 믿음'[약 2:21]의 소유자들을 가리킴이다.
똑같은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니 범죄의 본질은 영물이나 인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신 죽음을 통해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원리는 하나님 지으신 이 우주에는 통하지 않는다. 회개하여 죄를 버릴 때에만 한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을 성경은 선명히 밝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 하여 그 이유를 헷갈리지 않도록 설명했다[롬 14:9].
자기를 위해 살아 모든 욕심을 행하는 것이[약 1:15] 바로 "죄"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죄를 짓지 않는 근거'를 낳은 요인으로서의 우리의 죽음을 지목하여 "한 사람(그리스도)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것이다.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우리말 번역은 번역자[번역을 지도한 선교사]의 신학적 선입견의 결과다. 이 정도로 거의 전체가 성경 아닌 인간의 해석으로만 오염되어 있는 경악할 만한 상태로서의 현실이다.
죄를 짓지 않는 이유로서의 나머지 하나를 역시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산다"[:15]는 이것이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동시에 내가 살았기 때문에 살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의 삶을 살아 주신다는 의미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죄요 악이요 불의요 불법인데 나를 대신하여 살아 주시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해 살지 않으니 그래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완벽한 구조적 장치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삶을 살아 주시는" 그리스도시다. 이 둘의 의미상 차이는 하늘과 땅과 같이 벌어져 있다. 나를 대신하여 살아 주시면 나는 의당히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삶이다.
서로가 서로를 대신하는 것이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이어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체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살아 주신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믿음과 순종이 내 것으로 치부된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고로 당연히 나는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난 복종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보내신[요 20:21]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4:34]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삶의 본질이 아닌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대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삶이 되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가 되어 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 되어 있으면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복종뿐이고 불순종 다시 말해 죄는 그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 죄가 죽어 무덤에 있기 때문에라도 죄를 지을 수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그 뜻이다.
물론 이 "장치"라는 것은, 양심을 우리 인간 각자에게 장치해 두신 것과 같은 것이어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에 좌우된다. 양심을 그래서 우리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음과 같이 이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하고 확고한 가장 이상적인 구원의 방책도 우리 스스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로 작정하면 실제가 아닌 일종의 환상으로서 그림의 떡으로 화(化)하게 되어 있다.
성경의 진실성
벌써 이런 사실로써도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성 그 진리됨은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성경이 어려워서도 아니고 애매 모호하게 표현해서도 아니고 대낮 같이 밝고 또렷하게 우리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데도, 여기 걸치면 귀고리 저기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얽어맨 그대로 여과없이 들이키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는 것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으니 바로 이것이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농락이 아니라면 이다지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래서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몽매무지할 이유가 없는데도[왜냐면 구원의 말씀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도 능히 깨달을 수 있는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전연 그렇지 않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기를 쓰고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4:2] 만들고 있는 현장을 우리가 목도함과 같은 것이기에, 이런 확증 앞에서 더 어떤 증명을 또 요구할 것인가 하는 그 얘기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경이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와 같이 그와 반대되는 거짓말을 만들어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만일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이 믿으면 믿고 말면 말 일이므로, 이와 같이 전혀 상반되는 내용으로 그것도 절대 다수가 수용하고 있을 정도로 속이려 들고 거짓말을 지어내려고 안간[깐]힘을 쓸 필요가 없는 법이다.
'세상 사랑'의 함정
왜 이처럼 사람들이 반(反)이성적인 판단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즉 올바르게 살려는 생각은 없이 영생에만 욕심 내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가 하면 다른 그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성경 그 어디에 누가 이 세상 살라고 하던가. 살자면 잘 살아야 즉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야 사는 것이 아닌가. 어디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을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성경 어디에,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구차한 육체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라고 했던가.
심지어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 했고 형제를 잘못되게 하는 일이라면 평생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가장 시급한 일 곧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종의 신분으로 있는 처지에서 자유인이 될 기회가 와도 이를 반납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이다[고전 7:21]. 사람이 짝을 이루어 살지 않고 식욕 성욕 모두 버리고 남의 종 살이 하면서 무슨 낙으로 살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감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미친 마음"[전 9:3]이 아닌가. 그것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마치 구걸하듯이 절하면서[죽 4:7] 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경우 명백한 것은 그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 구원 얻는 것이라면 그들은 구원 받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왜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냐 하는 것은 이 글에서 충분히 그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이 아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로 그 모습밖에 있을 수 없다. 우리 역시 당연히 그런 모습이라야 세상[마귀가 그 배경이 되어 있는]을 이기는[요 16:33] 의젓하고 당당한 하나님 아들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 아닌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인데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같이 되어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면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아들들과 경쟁하는 것 같이 되어 볼썽 사납게 모양을 구기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는 하나님까지 욕되게 함이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대한 순종 자체가 우리가 지키기에 버겁고 힘들고 불가능해서 "사람이 행위로는 구원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자이므로 산 자가 되지 못한 까닭에 산 자답게 살 수가 없어서 즉 자기 부인을 밑 바탕으로 하는 순종이 불가능하기에 여전히 죽은 자로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고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는다" 한 것이다.
자기 힘으로 즉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에 해당되므로 구원커녕 죄만 짓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세상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것도 같은 이치에서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오직 산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로서 삶의 법칙을 지키는 차원으로만 복종하게 된 것이다.
생명[삶]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가리킴이다. 그러면 지키지 않을 때는 어찌 되는가. 아담의 재판(再版)이 될 수밖에 없다. 산 자로 창조되었지만 그 스스로 죽은 자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 사는 자들로 창조된 영물들이나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악령들로서 영원 멸망의 대상이 되어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재판이 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회개를 명하신 것이다. 즉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구원이 해당됨이다. 회개를 명령하시는 것이[행 17:30]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하고 전제하는 것이다[2:38]. 죄를 회개하는 것이므로 회개의 의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왔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한 거꾸로 된 삶을 뉘우치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고후 5:15] 작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으로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 주심으로써 죄 용서를 해 주시고 그 바탕 위에서 성령의 선물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어찌 되는가. 약속을 처음처럼 지키지 않으니 해약이 될 수밖에 없다.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건만 내 스스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니 다시는 속제 제물이 없으므로[히 6:6/10:26,29] 이로써 모든 것은 파국으로 끝난다.
그래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t;">고전 15:20/빌 3:8,9/딤후 3:15/t;">벧전 2:2/]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고의적인 범죄"[히 10:26]를 뜻한다.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몰라서 범하는 경우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나 종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이 고집은 고의성으로 판정되므로 "짐짓 범하는 죄"[:26]와 같이 취급되어 버린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것과 같이 된다.
약속으로서의 구원
우리 구원이 약속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첫 언약에 대한 새 언약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눅 22:20]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가 되어 있음이다. 새 언약은 그림자로서의 첫 언약의 실체이므로 내용은 같으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고 복종의 약속이 없이는 피 뿌림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효한 것이니 왜냐면 첫 언약 때에도 언약의 책을 먼저 백성들에게 읽어 들려 준 다음에 복종의 약속을 받고 피를 뿌렸기 때문이다[출 24:6,7].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약속하는 것이 회개이니 이 회개의 바탕 위에서 죄 용서 받고 성령 받아 모셔 그리스도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됨이다. 이렇게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산 자로서의 일을 함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움직여 그 뜻에 절대 복종하여 이웃[믿는 형제들]을 함께 지체(肢體)가 된 자기 자신으로 여겨[왜냐면 한 몸의 구조 속에 있어 바로 또 다른 자기 자신이 되어 있으므로] 위하게 된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룬 믿음의 형제들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달하여 그들 역시 한 몸의 생명 체제 속으로 들어오도록 함이 최 우선 과제이므로, 그들을 위하여 제자상으로서의 기도와 말씀 전달과 병행하여 제물로서의 고난 받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진력하는 것이니, 실상 이 세상에서 이외에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없음이다.
왜냐면 이 세상은 복음 전파가 끝나기가 바쁘게 언제든지 종막을 내리도록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유일무이의 존립 목적이,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고 듣는 데에만 있음이다. 먹고 마심도 바로 이 일을 위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행 1:8]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곧 선이요 의를 행함이 됨은 자연적 귀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요 5:29] 것이라 하셨고,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포상하신다"[롬 2:7,10] 하였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므로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후 5:9-11] 한 것이다.
여기에 "믿는 자는 어찌 되고 안믿는 자는 어찌 된다"는 의미의 말은 일절 없다.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하는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믿음을 선으로 보고 믿지 않음을 악이라 보는 억지 해석을 시도하지 말 일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확연히 설명을 하셨으니 즉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마 7:21] 경고하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 주님 하는 이들은 믿음이 있어 귀신도 쫓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도 되었고 많은 권능을 행할 만큼 믿음이 한 때 좋았던 것이다. "저희가 언제 주님을 대접해드리지 않았던가요?" 하고 심판대에 와서까지 큰 소리를 할 만큼 모두 믿는 일에는 나름대로의 관록이 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마 25:45] 단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고로 처음부터 순종할 의사가 없이 그냥 "제가 죄인입니다. 잘못 했습니다"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 율법[고전 9:21], 계명[고전 7:19]을 앞으로는 틀림없이 지키겠다는 결의, 결단, 다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약속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다.
이 약속이 바로 영생이다[요일 2:25약 1:12/2:5].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고후 5:15]. 이 점을 그리스도 친히 명백히 하셨으니 즉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 또는 "내 계명을 지킨다"고 단정하셨고[요 14:21,23]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23].
다시 말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함 그대로다[행 5:32]. 같은 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고전 2:9/약 2:5/1:12]. 때문에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부인할 것이요 나를 시인하는 자라야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 하셨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이상 경고의 그 어느 것에도 "믿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왜냐면 이상과 같은 경고가 바로 믿음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원토록 보존한다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요 12:25]. "보존한다"는 의미는 생명을 이미 소유함을 뜻한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인생들은 죽은 자라고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마 8:22/엡 2:1,5/골 2:13]. 죽은 자에게 무슨 생명이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받은 영생의 선물은 내 스스로 지켜야 보존됨을 밝히셨으니 그 방법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결코 사랑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엄마의 젖을 먹는 아기도 그 스스로 입을 갖다 대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가 직접 그 젖을 빨아서 머금고 아기의 입에 넣어 주지는 않는다. 엄마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아기의 할 일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음이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 있고 아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즉 영생을 값없는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최대한'의 일이고 그 생명을 직접 보전하는 것은 내가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이상 모든 경고는 구원 받은 내가 '최소한'으로 하는 일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의 '최대한'으로 하시는 일은 그 이상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뜻이니 다시 말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그 '생명 지키고 보존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시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실상대로 말하면, 그렇게 하셔서는 안되는 것이다. 엄마가 만일 아기가 할 수 있는 몫까지 도맡아 해 준다고 가상해보라.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이 아닌가. 왜냐면 아이의 인생을 그 부모가 들어 망치는 어리석음이 되는 까닭이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다. 즉 스스로 움직여 하도록 그래서 그 최종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심이다.
권리와 의무를 함께 주신 것이니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이다. 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하여 의무 없는 권리만 생각하여 구원과는 상관 없는 오히려 구원에 장애가 되고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드는 종교 교리를 만들어 이를 더 믿고 있으니 한심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 최소한의 의무를 가리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인데 이를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무시하는 결과야 자멸밖에 더 있는가.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 및 계명 또는 율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밖에 없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총 강령을 간략히 간추리면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한 몸되어 있어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실상 머리나 몸이나 하나로서 붙어 있으므로, 머리로서 보아도 몸이 자기 자신이고, 몸으로서 보아도 머리 및 함께 지체된 모든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위해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최대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본으로 보여 주신 까닭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심으로써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신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고후 5:15]. 이 세상이 자기 중심, 본위, 위주의 삶 일색(一色)인데, "자기 부인"이라 하면 이는 이 세상에서 살지 말라는 뜻과 똑같다.
이 세상 그럭저럭 한정적이기는 하나 삶의 낙도 누리고 연약한 육신을 끌고 살다가 확실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라,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착각하는데 이는 마귀의 속임수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을 속인 것과 똑같은 속임수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과 지배자[王-요 14:30/12:31]로서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의 육체에 속하여 영생하지도 못하는 이런 누추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또 이런 삶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없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처음부터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써 우리가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우리의 원수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와 압제 아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며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앞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기를 자기중심으로 살면 죽은 자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 때 산 자라고 했는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것 자체가 죽은 자로서의 행색임을 항상 유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영생하도록 창조된 인간에게는 오직 죽음이라는 의미밖에는 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죽었다"[골 3:3] 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하는 것이다. 즉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야 그 때 비로소 우리로서는 삶이 시작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와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이요, 그리고 현재의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어 그가 신이요 왕[지배자]인 이상 당연히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이 정상 상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권위와 권세로써 한참 아래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을 능히 제압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친히 우리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신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본보기로서의 삶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구원된 사실을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명백히 하셨으니, 성령을 받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기도 함을 설명하신 것이다[요 20:21,22/행 1:8].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골 1:24] 것으로써 일차적인 의무를 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계속 구원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계속 고난을 받아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고 여쭈었을 때,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니, 억울하니 어떠니 말할 게재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눅 13:3-5]이라 하신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대로 하면 멸망당하게 되어 있는 인생이므로 이 세상은 고난 일변도, 저주 받음 일변도의 색깔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현실이 그렇다. 세상에서 형통하는 자들은 전체에 비하면 극소수에 속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 한 것이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라면 사해(死海)라 해야 맞을 것이다. "죽은 자"[마 8:22]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는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처럼 "회개하려"[눅 13:3] 하지는 않고, 그런 극소수의 부류에 포함되려 하고 그 언저리에나마 끼이려 발버둥치기 때문에 즉 "죽기를 무서워하기"[히 2:15] 때문에 죄에게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명백히 하고 있지만[합 1:13-115.7/전 7:15/8:12/욥 21:6-15] 이 세상에서는 악한 자가 형통하고 도리어 의인은 고난을 당한다. 이는 악한 자 곧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한[요일 3:12]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확인된 사실이다. 세상 시작부터 이러했으니 이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러하리라는 확증이 된다. 죄를 미워하시고 악인에 대하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7:11-13].
그런데 도리어 죄인이 형통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삶의 낙을 누리고 형통한다면 의인과 악인이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에서 경쟁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명백한 것은 악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만들어 그들을 걸러내고 솎아내는 함정, 덫, 올무에 걸려 들게 함이 '세상에서의 형통'이라는 것으로 나타남이니, 악인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일정 과정을 밟아가는 무서운 작업을 하는 곳이 이 세상의 현재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로서 시험하는 자가 되어 있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호기를 부리고 내노라 의젓하게 살고자 한다면 "내게 절하라"고 시험하는 것이다[눅 4:5-7].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이 과연 의인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일 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상식 차원에서 답이 나올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미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는 자이다. 인생을 시험하는 것은 인생들까지 걸고 넘어지려는 혹은 [가능하면] 볼모로 잡을 수도 있다는 망상에서 오는 발악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이 강제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져 있다는 뜻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야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한 자인데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올 리도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 친히 그 전지전능하신 절대 권능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철두철미 원리원칙과 법질서 아래에서 모든 일을 하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에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이 원리원칙으로서의 법과 질서라는 것은, 강자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약자라고 해서 거동이 일절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니, 피조물 역시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로써 자유롭게 행동함으로써 그 어떤 속박에든 일절 구애당하지 않고 오직 사리에 옳고 그름을 따져 일을 진행하도록 하심이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의미인 것이다. 이런 데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있게 된다. 공평과 공정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그 자신이 피조물이라 해서 주눅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능력껏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영적 존재[인간과 영물]들에게 주신 "자유" 또는 자유 의지의 의미임을 재차 강조한다. 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의 가증스러운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아담 부부에 대한 살인행위를 저지른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비록 한시적이나마 당당히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로 군림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이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의 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철저히 공평 공정하게 원리원칙으로 나가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 신뢰하는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느 피조물이 단 한 시인들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하나님의 가장 기본되시는 특성이라 해도 좋다. 다시 말해 어느 면으로는 하나님 친히 피조물의 위치로 물러나 우리와 동등인 것처럼 움직이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기에서의 정정당당한 승부 겨루기와 같은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과 내기를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하시는 모든 일이 모든 피조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정당하게 하신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무소불위로 군림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무릇 누구든지 정의를 사랑하는 이라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정의의 근본이시요 화신(化身)이 되어 계심을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이 그 가장 확실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는 까닭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을 가리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하셨다[요 20:21,22/17: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니 보내셔서 무엇을 하게 하심인가.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게"[4:34] 하심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그와 같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를 그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바로 우리의 "먹을 양식"[:34]이라 하셨다. 양식의 성격이 무엇이냐,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데에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 나는 죽은 자이다. 이와 같이 죽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요 얼마든지 그렇게 마음이 변하여[사랑은 마음의 영역이므로] 죽은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라"[:12]는 것이다.
그렇게 구원을 이루는 즉 산 자답게 사는 것이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이루라"[:12]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을 먹지 않으면 속절없이 죽게 되어 있는 먹을 "양식"이라고 선포하신 이상 답은 분명하고 확정적이다. 즉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어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에서 벗어나면 아담이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짐짓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결국 우리도 죽음[이번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과 같은 영원과 멸망]뿐임은 당연하다.
이렇게 순종하기로 작정하지 않는 이는 처음부터 구원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 했다[행 17:30].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경이 아닌 인간의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착각하고 속아 온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선언하시기를 천국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밀고[압박해, to press-마 11:12/눅 16:16] 들어가 빼앗아 힘으로 차지하는 것[마 11:12]이라 하신 것이다.
천국은 빼앗아 차지하는 것
살아 움직여 산 자답게 행동하니 즉 산 자답게 사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국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제는 산 자로 만드셨으니 살아 움직이는[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의 움직임] 자답게 산 자의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걸어 들어가되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 일당과의 대판 싸움이 불가피하니 밀고 들어가[침노해서, 침입해서] 정당하게 힘으로써 낚아채어 차지하는[taking it by force] 것이다[마 11:12/눅 16:16].
힘이라는 것은 여기서 나의 확고한 의지를 말함이다.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다. 산 자답게 살고자 하는[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나의 시종일관하는 의지가 그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는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양면으로 동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으니 왜냐면 하나님 친히 거저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기 것, 자기의 힘으로 처음부터 창조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 즉 구원 받음도 마찬가지다. 단지 자유를 주셨으니 이것이 곧 우리에게는 의지(意志)로 작용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바나바와 바울]이 외국에 나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많은 제자들을 얻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행 14:22]는 사실에서도 이미 이상의 의미는 드러나는 것이다. "많은 환난"을 돌파하려는 "굳은 마음"이 바로 "천국은 사람마다 치고 들어가 힘으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신 바로 그 뜻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 했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3,24] 하심도 같은 뜻이다. 생명으로 통하는 문은 "좁으므로" "힘써야" 들어가는 것이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했으니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 세상 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일당]이 그 모든 영적 힘을 동원하여 그리고 세상 인간들을 규합하여 구원 얻는 것을 결사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터에 이는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믿지 않는 자는 믿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고 믿음에 있는 이들은 그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자이니 그런 경고를 미리 하신 것이다[눅 8:5/마 13:18/막 4:3]. 즉 핍박으로써 그리고 세상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도록 하는[요 12:25] 회유책으로 양면 작전을 쓰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쟁터요 구원 받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의 전투에 돌입하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그런 전쟁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의 검(칼)"[엡 6:17]이라는 표현에서 또는 "하나님께서 갖추어 주신 완전무장[the whole armor]"[:13]이라 한 데에서 보듯이, 성경은 절대로 호전적인 내용이 아니면서도 전투, 무기(武器), 승리 등 전쟁 용어가 이렇게 중요 대목에서 등장하게 된다. 우리의 현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과의 원수 사이가 되어 있어 전쟁 양상이기 때문이다[창 3:15]. 그러니 "침입한다"든가, "빼앗는다"는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먹을 양식이므로[요 4:34]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군인이 그 무기를 잘 다룰 줄 알아 명검객(名劍客)이 되거나 명사수(名射手)가 되면 자기 생명을 그만큼 더 잘 보호하는 수단이 됨과 같이, 말씀이 "성령의 검(劍)"일진대 아주 날카로운 일도양단의 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두어 말씀 충만이 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의 내용을 거의 다 안다는 것과 말씀으로 충만하여 적시적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격에 대응한다는 것은 별개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하나님 말씀을 가리켜 "성령의 칼"이라고 표현할 리가 없다. 남을 가르쳐도 말씀을 충분히 활용하면 그만큼 설득력이 있게 된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해내는 데에 있을진대 이런 최대한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일하는 자세
우리가 일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즉 ①"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고, ②"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고, ③"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 9:58-62] 하신 것이다.
①에서는 어디든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누가 자청해오자 그렇게 말씀하셨고, ②에서는 어떤 이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지금 부친 상중에 있으니 먼저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할 때 그 말씀을 하셨고, ③에서는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먼저 가서 제 가족을 작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①은 이 세상의 실상을 밝히심이니 이를 제대로 파악해야 모든 제대로 된 판단과 사고방식의 토대가 갖추어짐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라 죽음의 세계이다. 원래 인간이 거처하게 되어 있는 영계가 아니라 자연계의 동물들의 서식처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생들이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에 ②죽음의 세계인 것이다. 고로 산 자가 되어 사람 살리는 일 곧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할 때는 이런 죽은 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질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전심전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일에만 몰두함이 사람[죽은 자가 아닌 산 자]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람 양심 또는 상식적 판단의 차원에서라도, 옆에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그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이 나는 먹을 것이 있다고 하여 더 맛있고 배부르게 먹기 위해 궁리하느라 여기에만 정신이 팔려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볼 겨를이 없다면,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볼 때 그들이 만일 나라고 하면 그렇게 잘 먹고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여 온통 열중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내가 그런 사람을 볼 때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짐승'이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러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셨으니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이 죽은 자들을 산 자로 만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 뜻 외의 다른 일을 내가 한다면 나는 마땅히 짐승이라 규탄 받아 옳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남에게 그와 같이 해 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마 7:12] 하신 것이다.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22:37-40] 하심과 똑같은 것이다.
바로 이것, 오직 이것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느니 안지키느니, 율법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등등이 복잡하고 헷갈리는 듯 싶으면 그런 것 다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 오직 이 한 가지 말씀대로만 복종하여 나가기로 하면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머리되신 하나님께서 몸의 각 지체들을 위하라는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보이는 특정 건물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극진히 위하고 특정인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떠받들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해서 교회 일에 충성하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믿음의 형제라도 예수님을 모시듯이 극진히 받들고 섬겨 사랑하는 것이 곧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섬김이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렇지 못할 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최후 선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마 25:41-46].
내가 멸망의 죽음 가운데 있는데도 아무도 내게 생명의 전도를 해 주는 일이 없어 어떻게 하면 구원될지를 몰라 방황하며 방탕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함으로 인해 그 결과 멸망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미련함이 있어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은 나 자신의 탓으로 여겨 내게 생명의 말씀을 전달해 주지 않은 이들을 원망할 여지가 없겠지만 이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묵과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 9:16] 한 것이다.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을 것이다'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을 것이다"[겔 33:8]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한 대로, 이상 경고 말씀을 따르기 위해 평생 전력을 다한 것이다. "화가 있고" "악인의 피가 내게 돌아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의 나의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해" 있지도 않고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에게서 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까닭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
이상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기 위한 목적이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셨던 것으로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0] 한 꼭 그대로다. 이런 선행과 의를 행하게 되는 행위의 결과는, 믿음으로써 된 것이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9] 했는데 이를 혼동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 2:8]이기 때문에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한 것이고, 그렇게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결과로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산 자로서의 마땅한 행위가 선이고 의이니 곧 선행이요 의를 행함인 것이다. 죽은 자는 움직이지 못하고 움직여보아야 송장의 뒤척임밖에 없으나 산 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그 특징이 아닌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행위인데 그 행위가 악한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선하고 의로운 것이어야 하는지, 자명해지는 일이 아닌가.
악한 행위 즉 불복종의 범죄 행위는 죽은 자 그리고 죽게 되어 있는 자의 행위일 뿐이다. 그 행위의 대가로서 반드시 죽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니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모으지 않으면 헤치는 것이라 하심과 같다[눅 11:23]. 양단간의 결정이니, 제3지대,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흑 아니면 백인 흑백 논리만 지배한다. 많은 사람이 이 중간 지대에서 구원 얻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는 영락없는 자살행위다.
이것이 어디까지나 상식 차원임을 성경은 다음 사실로써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이 적에게 포위당하여 성중이 굶주려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성문 밖의 나환자 네 사람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성내에 들어가도 굶어죽을 것이요 성밖에 있어도 외적에게 잡혀 죽을 것이니 어차피 죽을 바에야 먹을 것이나 먹고 죽자" 하고 적진으로 나아갔더니 웬걸 군인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들이 황급히 버리고 도망 간 먹을 것, 입을 것 등 물자만 고스란히 남겨진 채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실컷 먹고 마시고 감추고 하다가 서로 말하기를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잠하고 있어 밝은 아침까지 지체하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王宮)에 가서 고하자" 하고 달려가 그 복된 좋은 소식 곧 복음(福音)을 굶주린 모든 성내 백성들에게 알렸다는 한 역사의 단편 기록이 있는 것이다[왕하 6:24-7:9].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잠하고 있어 밝은 아침까지 지체하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성내에 가서 고하자",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천지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삶의 낙을 누리려 하는 행위는, 성내로 달려가 알릴 생각은 없이 먹고 마시고 욕심껏 감추는 데에만 정신이 없는 악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악인"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 천국에 들어갈 리 없다.
이렇게 이 세상을 사람 살리는 일만을 유일한 목표로 정하여 가치로 삼고 의미로 삼을 때 모든 것은 그야말로 이치 조화가 된다. 아무리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더라도 사람 살리는 것이 목적인 이상 나는 한도 원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최고의 성공자(成功者)가 되는 것이다. 완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여기서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등등하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전도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9:22].
그리고 세상 혹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자로 남게 된다. 왜냐면 싸움에서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자가 승자(勝者)가 되는 터이므로 그런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사람들로 아무쪼록 구원되지 못하도록 사력(死力) 을 다하는 싸움이기에 누가 이기는 것인지 명백해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영적 싸움이 특질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않고 무릇 구하는 자에게 주며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않아도[눅 6:27-30]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면 나는 내 생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는 것 혹은 잘 사는 것으로 목적하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잘 살면 한껏 잘 살아야 하는데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들이 많을진대 나는 잘 살면서도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유인도 아니고 성공인(成功人)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자일 수가 없고 세상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과 한 편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살려면 왕창 잘 살아 하나님의 아들 같이 최고도로 잘 살고, 그렇지 않으려면 두 손 다 털어 버리고 빈털터리로 오직 일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함이 화끈하고도 절도 있는 인생 삶이다. "All or nothing."이다. 구차하게 곁다리 붙들고 늘어져 목숨이나 연명하며 살겠다고 구걸하듯이 매달리는 처량한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잠꼬대로 자신을 속이지 말 것이다.
③이렇게 사람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로 작정한 이상 소소하고 사사로운 세상 일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는 경고이신 것이다. 절대 순종, 두려워하고 떪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다. 그렇다고 주인 앞에서의 종의 자세라고 착각할 것은 없다. '아버지 앞에서의 아들' 관계이지만 부모가 자상스러울 때는 한없이 인자스러우나 엄할 때는 아주 엄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부모자식 인연을 끊는다고 해도 즉 이래도 저래도 부모요 자식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으니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른다"[마 7:23]로써 부인해 버리시면 끝나는 일이다. 살도록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피조물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을 때 그대로 죽음에 들어가도록 버려 두신 선례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음에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잡아떼는 거짓말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라 하는 선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피조물인데 어찌 하나님께서 모르시랴. 그러나 애초 창조하셨던 목적을 벗어났으므로 그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은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행악(行惡)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할 것이다"[눅 13:26,27] 하심과 같다.
닭이 달걀들을 품고 부화시키는데 행악함으로써 즉 악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오리 알이 되어 있는 경우다. 그러므로 병아리로서 인식하였지만 나중에 보니 오리 새끼가 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수록하고 있는 신약성경[구약 성경은 이에 비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것을 미리 말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5:39]에서의 그 말씀을 종합하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자기를 부인하여 자기를 위하여 삶을 도모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핍박과 환난을 당한다"는 내용으로만 일관하는 것이니 '세상 생각'과는 완전 상극(相剋)이다.
구약성경은 그렇지 않은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고(豫告)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진실을 밝히시는 마당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 위주다. 그리고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하나님]의 친히 하시는 말씀"이심을 확인해 주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진실과 진리가 죄다 드러나고 밝혀진 것이다. 그렇게 드러난 말씀의 내용이 바로 이상 설명과 같이 현세에 관한 일체의 것을 부정함에 있는 것이니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심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서야 무슨 문제 해결이 있겠는가.
그러니 여기에 무슨 거짓, 어떤 속임수가 발붙일 수 있는가. 시종일관해서 이 현세의 것을 일절 부정하는 마당에 어느 누가 선뜻 믿겠다고 달려든다기에 이런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면서도 거기에다 거짓말을 끼워 넣겠느냐 하는 그 얘기다. 거짓말을 하든 않든 흔쾌히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오직 선(善, 이 ‘선’에는 당연히 거짓말이 끼일 수 없다)을 사랑하고 올바른 것[義, 이 ‘의’에 역시 거짓말은 통할 수가 없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믿는 그런 진실된 자들만이[이런 진실된 자는 거짓말이라면 더더욱 가증스럽게 여긴다] 믿으려고 할 것인데 만일 여기에 거짓말이라도 끼어 있음이 드러날 양이면 믿으려고 하다가도 믿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다. 그러므로 필요가 없어서도 거짓말이든 속임수든 일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니, 그래서 바로 이와 같은 내용들이 성경의 진실성을 단 한 번으로 끝내 주는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한 때 장기간 세상[유럽]을 지배했고 지금도 정치 세력으로 군림해 있는 만큼 그런 천주교가 세상을 적대시한다 말할 수 없으니, 그래서 우리는 천주교를 세상 종교의 하나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교회'로는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세상 종교의 측면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유수(有數)한 종교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면 사이비요 따라서 가짜임을 이 성경적 기준에서 서슴없이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니 단지 그렇게 표방만 할 뿐이다. 그 증거가 이상 지적한 것 외에도 마리아에 대한 의존성이다.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로서 여러 자녀들을 두었다고 성경에 명시했지만 천주교는 "동정녀" 곧 평생 처녀라고 우기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도발이자 적대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세상의 성인(聖人)들
이미 설명했지만 성경에서 강조하는 선(善)이 무엇이고 의(義)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모든 좋은 것이 '선'이고 올바른 것이 '의'이다. 성경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했다. 즉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선], 모든 올바른 것[의], 이런 것만 머리에 가득히 넣고 이런 것만 생각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말하는 충신, 열사, 의사, 열녀, 효자, 효녀, 정의, 충절, 충성, 의리, 지조, 절개, 신의, 고결한 것, 고상한 것, 순결, 절의, 정절, 등등 그런 것만 추구하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와 선이다. 이상 나열한 것과 반대되는 것은 아예 마음에 품지도 입에 담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고후 5:15]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공동체 의식이 이상의 설명과 같은 한 몸 의식을 가리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으로서의 체제는 그 완벽한 실체를 말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나 또는 '우리' 의식은 그 그림자를 훑고 음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공(公共) 의식은 그 아름다움과 장려함으로 인하여 뜻 있는 모든 이들의 칭송이 되고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이공(李公) 순신(舜臣)과 '나'원균(元均)으로 나타나진 극명한 두 가지의 결과 등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인간 이지(理智)로 깨달아 알기에는 충분한 증거들이다.
이 '나'원균으로 대표되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지만 특별히 2013년 봄 여름에 걸쳐 불거진 원전(原電) 비리의 사고가 그러하다. 애초 사소한 일이라고 취급되어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부정 부패가 엄청난 국가적 손실과 재앙으로 나타난 것이다[2013. 6. 6 현재]. 만일 이 경우 사건 관련자들이 이공 순신과 같은 원리원칙주의로 나갔다면 이런 파국을 미연에 방지했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도 우리는 현저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교훈의 재판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차이는 이공 순신과 '나'원균에서는 이공과 같은 인물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번 원전 사고의 경우 없었다는 그 차이다. 전자는 전란이었고 후자는 국민 생활과 국가 산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차이다.
"나 하나쯤이야" 혹은 "이것 하나쯤으로 나라가 망하냐, 내 신제를 망치느냐"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겠지만 그 사소한 불법적인 행위 하나가 국가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교훈에서는 '나'원균의 그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잘못된 짧은 생각이 온 나라를 파멸에 놓던 직전에 이공 순신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건져내었지만. 이런 경우는 몇 개인의 대수롭지 않게 여기 자기중심의 평소 해이했던 인생관이 전 국가와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장본이 된 것이다.
이 나라 교육 정책이 바람직한 인간성 함양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를 소홀히 한 결과는 상상 외의 비극적 참화를 예상할 수 있음을 이로써도 넉넉히 미루어 예견할 수 있다. 다른 것 다 그만 두고라도 "이순신 정신"을 각급 학교에서 배우게 할 일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것도 유교 도덕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삶의 기본 요강(要綱)을 비록 '그림자[그 실체는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와 같은 형태이기는 하지만 압축하여 정리한 것일 뿐이다. 곧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니 사람 삶은 반드시 사회를 이루고 거기에 머리가 있어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부위자강(父爲子綱)'은 우리가 어디서 났는가 하는 그 근본을 밝힘이니 이 역시 머리와 몸의 엄연한 구별이다. '부위부강(夫爲婦綱)'은 만물이 짝으로 하나되어 있고 사람도 역시 그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함이니 역시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만 온전한 인간 삶이 이루어짐을 가르치는 것이다.
오륜(五倫) 역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로서 방금 설명한 군신의 의(義), 부자의 친(親), 부부의 별(別)에다가 장유(長幼)의 서(序), 붕우(朋友)의 신(信)을 덧붙인 것이다. 나중에 나서 삶의 미숙을 드러내는 자들을 먼저 난 자가 잘 지도하여 이끌어 줌으로써 함께 인간 완성을 기해 가는 도리가 '어른 아이의 질서'이고, 또 동류들끼리는 상호간 신뢰함으로써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삶의 마땅한 기본 질서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랑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신 그대로,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와 같이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상호간의 사랑[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드러내는]과 선지자의 가르침[선지자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의 강령이라 하신 데에서[마 22:40] 드러나듯이 바로 이것이 그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모세 율법이 그 그림자 역할을 한 것과 같은 유형이다. 모세 율법은, 유교의 가르침에서 보는 바와 같은 대충적인 양심의 소리를 따라 일반적으로 말한 것을[롬 2:14,15]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문화(成文化)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진실과 진상은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니, 곧 각자는 하나님[그리스도로 나타나신]을 머리로 모시고 이웃을 각자의 함께 된 지체로 여겨 짝으로 삼고 사는 것이 삶의 뼈대임이 밝혀진 것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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