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21세기의 바울 사도 (1)ㅡ이병철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2)ㅡ이병철 질문



9. 한국 더군다나 북한 교회에서 배출된 21세기의 사도 바울
--------------------------------------------------------------------------------------------------------------------------


얼마 전 당시 79세의 북한의 한 "장로"(행 20:17,28/14:23/빌 1:1/딛 1:5,7/벧전 5:1)가 찬송 한번 자유로 목청 높여 실컷 부르고 싶어 탈북, 중국 국경을 넘어 온 적이 있었다. 북한 선교 관계자가 소식을 듣고 직접 만나 도움을 자청, 남한으로 보내 드리겠다고 하니 먼저 기도한 후에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10분 기도 후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능력이 없어 북한에서 너희를 고생하게 만들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며 주님의 뜻이 그러하니 그냥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탈북 사실이 이미 탄로가 나 수색조가 그들의 체포를 목적으로 샅샅이 뒤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사지(死地)로 들어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는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혀 청년 6명은 반항한다 하여 즉석에서 참혹하게 숨을 거두고 나머지는 강제 수용소로 모두 끌려갔다가 그 후 소식에 따르면 65명 중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인데, 현대의 사도 바울이 바로 북한 땅에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 것과 같이, 모든 세계 교회는 북한의 이 현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성함을 물으니 “내 이름 알아 무엇 하려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소이다”(갈 5:14) 하였다고 한다. 선교 관계자와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낡아 발가락이 다 내다보이는 신발을 보고 털썩 무릎 꿇어 엎드리며 그 신발을 붙들고 목사가 대성통곡을 하는데 역시 그 목사의 목 언저리에도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가 왜 그러오. '천국에서 만납시다'고 그러시오.""
"예, 천국에서 만나십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작별하는데, 등을 돌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 "장로"의 등 뒤로는 그가 낭송하는 성경 구절(롬 8:34-36)이 목사의 귓전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다"...

우리 중 누구든지 그 정도로 역시 바울을 "본받는" 것이라면 성경의 모든 경고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보아도 좋다. 다시 말해 그가 바로 21세기의 바울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바울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지식이 대수가 아니라 그 지식을 따라 사는 것이 요체이므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지식이 있는 것이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또는 모르더라도 어린 아이 같이 믿어 그렇게 살면 그가 곧 '바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십자가의 도’가 성경의 가르침인 줄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그렇게 실제 살아 본이 되어 있는 대표적 표본(인물)을 보기를 원했기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난데없이 북한 땅으로부터 그 살아 있는 본을 보내어 나타내어 주신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 없기를 바란 이 교회 "장로(또는 "감독"ㅡ벧전 5:1/딛 1:7)를 우리는 기꺼이 "21세기 바울 형제"라 부르는 것이다.

유사 이래 북한처럼 야만적인 핍박이 오래도록 감행된 적이 없다고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터에 그런 환난 중에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표본이 있었으니, "찬송을 실컷 불러보기 위해" 일시 탈북했었던, 다시 말해 그렇게 찬송을 목청껏 부른 다음에는 다시 북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79세(우리 나이)의 한 믿음의 형제가 이끈 65명의 북한 교회를 보내시며, "여기에 너희들의 본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들 모든 지구촌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ecce homo!(에케 호모, 엑시 호모)". 로마 총독 빌라도가, 머리에 가시를 관(冠)처럼 엮어 억지로 눌러 씌움으로 피투성이가 되신 얼굴로 대중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소리 친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요 19:5)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북한 형제를 가리켜 선의(善意)로 이와 같이 온 세계에 외치는 것이다. 얼마나 찬송을 불러보고 싶었으면, 아니, 넘치는 기쁨(빌 4:4/살전 5:16-18)과 감사를 평소 주체할 길이 없었기에 그런 결단을 내려 월경까지 했으랴.

환난 중에서의 감사와 기쁨, 이 모두 우리의 본이 되고도 남는다. 탈북 사실이 들키면 무자비하게 처형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으니 이는 목숨을 걸고 감행한 일이다. 또 그들의 월경 사실이 벌써 새어 나가 그들에 대한 수색 명령이 내려져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도 주님의 뜻이라고 하여 그대로 돌아갔으니, 성령께서 이상과 같이 인도하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이 와 닿는다. 마침 당시 북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던 이가 그를 만나 남쪽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제의를 하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고 "먼저 기도한 다음에 결정하겠다" 했으니 우리에게 두번째로 주는 교훈이다.

두 말 없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먼저 기도하여 여쭙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뜻대로 행함"의 실천적인 삶의 본을 보인 것이 이 형제의 '바울다움' 제2호다. 죽어도 살아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편단심에서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롬 14:7-9/고후 5:15). 보통 사람 같으면 사지(死地)를 벗어나 삶의 땅으로 가는 것이므로 두 말 없이 동의했을 것인데도, 오직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롬 14:7) 비록 그것이 사는 것이더라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살기를 거부하고, 죽는 것이더라도 주님의 뜻이면 감연히 죽기를 택하는 그런 자세였다.

그리고 기도 후에 대답하기를 "응답을 받았는데, ‘내가 능력이 없어 이 북한에서 너희를 고난 받게 하겠느냐’는 말씀의 의미로 확신이 왔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북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것이요 그런즉 북한이라는 사지(死地)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어도 살아도 오직 주님 위하는 일념이 아닌가. 가족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없었고 자기가 고령(79세)이라는 이유도 붙이지 않았고 일절 다른 이유는 없이 오직 그 한 마디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누차 강조하신 "자기 부인"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부인"이라 하면 거의 전부가 무조건 위축되고 발뺌부터 먼저 하려 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이로써 재차 확인해 주시고 실지로 증명해 주신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종의 신분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그 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차라리 그런 기회를 반납하고 그대로 종으로 지내면서 종으로서의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을 믿음 가운데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함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전 7:20-22).

생명과 죽음 양 갈래의 기로에 서서 생명을 박차 버리고 죽음을 택한 그 65명의 북한 교회 그리고 이 양 떼들을 인도한 21세기의 바울 사도. 우리 각자 이 귀중한 교훈, 하나님이 주신 오늘날에 대처하는 메시지를 우리 심비(心碑)에 아로새기고 온 세상에 널리 알릴 일이다. 구원 받았노라 자처하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듯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알려야 할 사명이 이로써 지워진 것이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위하여 죽으면 산다.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자 하여' 이런 육체로 이런 육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있는(4:34)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부인의 일관된 정신으로 죽음의 땅에서도 삶의 기회가 왔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그 기회도 버리는 것을 무슨 대단한 것처럼 또는 비상한 능력인 것처럼 착각할 필요는 없다. 믿음이 있으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낼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고 인생이 죽은 자들이기에 그러하니 그래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 이 세상이 아닌가. "사람을 차별하심이 없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한 대로, 이 나그네 길에서 첫 사람 아담처럼 어리석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걸려 들지 않도록 오직 이 점에 유의하고 극력 "조심하는"(고전 10:12)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말해 온통 색깔이 죽음인 이 세상에서 죽음이냐, 생명이냐 하는 양자 선택이라는 말까지도 실은 무의미한 것이다. 아예 세상은 생명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는 생명인 줄 너무나 잘 아는 터이기에 생명이든(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이든(세상에서 말하는) 가릴 것 없이 오직 "우리 생명"(골 3:3,4)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그 여부만 가릴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21바울 형제"의 지혜로운 선택은, 이 세상이 죽음 일색인 줄 몰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지 못한"(요 6:45) 이들에게만 놀라움으로 비쳐질 따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구원하고자 하는 이가 있어 그가 이 세상에서 일등 가는 부자로 산다고 할 때,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당면해 있는 '죽음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이치가 우리의 고난 받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마침내 나를 구원해 주셨음과 같은 원리다.

그 부자가 지금까지 가난하게 산 적이 없고 보통 사람의 평균보다 더 잘 살아 고난 없이 지냈는데 어째서 그가 죽음의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하느냐 하겠지만, 그가 그렇게 산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해서고 실제 그를 비롯해 모든 인간의 현주소가 죽은 자로서의 죽음의 고난이기 때문이니, 그래서 이 한 몸된 이치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도 다 우리 인간과 "함께"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이다(롬 8:22).

따라서 우리의 그와 같은 노력에 의해 그 부자가 만일 눈을 뜨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를 알아 구원 받아 '산 자'가 되면 그는 즉각 이전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당연히 고난 받기를 택하게 되는(히 11:25) 것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도 구원 얻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범죄와는 무관한 모든 피조물이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실상을 웅변하는 것이다.

즉 '현재'는 하나님의 그 어떤 피조물도 정상적으로는 절대로 삶의 낙을 누리는 때가 아니라 함께 죽음의 고통 중에 있어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이 모두 구원 얻을 때까지 지속되는 터이므로, 오직 지금은 이 인간 구원의 일에만 매달리는 때로서 달리로는 의미가 없음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에 의한 고난 받음이 당연한 것일 뿐 부자유스러운 면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이야말로 사람 사는 방법의 핵심인 것이다.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이 나를 위하니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이 자기 부인이 세상 앞에서 생명의 길로 비쳐지지 않는 것은, 현재 이 세상의 실상이 삶이 아니라 그 대립적인 의미로서의 죽음이요 이를 대변하는 것이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죽음임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는 것처럼 여겨 살고자 하는 데에서 오는 모든 무리요 억지까지 겹쳐져 인간 삶이 이토록 고되다.

고로 자기 부인이 머리를 위함이고 내 이웃을 위함이어서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닐진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그 남으신 고난을 우리 스스로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에 있다면 이 뜻을 우리가 어찌 아니 받들고 따르지 않을 것인가.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가 다 머리의 뜻을 받들어 일제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중에 있거나 동참하고 있는데 나 혼자 그런 고난을 외면하고 기피하여 그 고난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는 절대로 머리를 위함도 아니고 내 이웃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생명의 체제에서 이탈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아니리요.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여겨 자기 부인을 기피하던 지금까지의 생각을 버리고, 사는 곳이 아니라 오직 고난 받음을 통해 사람들 살리는 일을 하는 데로서 이 세상을 바로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나 영원 세계에서나 변함없는 사람 삶의 핵심으로서의 자기 부인이 절대로 필수임을 알아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눅 9:23) 일상생활이 되어야 함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부인으로서의 자세는 입을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 현재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니(딤전 6:8/히 13:5/고전 7:31/엡 4:28/고전 8:13), 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니, 지금은 결코 '이 세상 살기 위한' 최대한의 방편을 구하는 때가 아님이다.

때문에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전 7:1-40)고도 한 것이다. 이는 결코 죽음(의 고난)의 찬가(讚歌)가 아니니, 불 속에 있는 이를 구출하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들고 물 속에 있는 이를 건지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드는 바로 그 이치를 따름이다. 불 밖에 또는 물 밖에 있어 아무리 저 불 안에 또는 물 안에 있는 사람 살리자 외쳐보아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 아닌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자기 부인을 자기 부정과 혼동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은 자기 말살을 의미함이다.

자기 부인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의 무한대의 확대요 확장, 확충의 방법인 것이다. 왜냐면 내가 나를 위하면 나 자신이 하나뿐이니 그 하나로 그치지만 내가 한 몸의 체제에 속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의 대가로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머리(대하 13:12/골 2:19/1:18/엡 1:22/4:15,16/5:23/계 1:5/고전 11:3)께서 나를 위하시는 이 뜻을 따라 모든 지체 각 부분이 일제히 하나도 예외없이 나를 위하니 내가 나를 위하는 그 '하나'의 '여러 수억 곱절'로 내가 위해짐다. 내 이웃의 숫자가 가령 '여러 수억'이라 가정할 때 그렇다는 뜻이다. 

내 이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 또한 그만큼 더 위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이웃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이니 나는 그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내 이웃 숫자만큼 똑같은 숫자로 얻게 됨이 바로 자기 부인의 영광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최고도의 지혜라 하는 것이다. 이 이상 가는 삶의 최대 행복의 비결이 없다. 왜 이 좋은 방법을 스스로 버릴 것인가. 한 때 고난을 못이겨 이를 배반하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한 사람을 회개하여 믿게 하고 하나님께 돌이키게 한다면 그 결과는 다름아닌 또 하나의 영원한 나 자신을 하나 더 얻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니 왜냐면 반드시 아이 낳는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더 얻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이 고통만 면해지면 차라리 낫겠다" 할 것이 뻔한즉, "또 하나의 나 자신을 얻기 위함"이라 말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사랑해서 그 사랑 때문에 이 해산의 고통도 불사한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사랑에서 오는 즉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부인을 따름이지 여하한 경우에도 내가 나를 위하는 자기중심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2,3)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왜냐면 사랑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임이다(고후 5:15).

애초부터 자기중심이라는 말도 없었고 자기 부인이라는 말도 없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불법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자기중심이 되었고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자기 이웃을 위하는 것이 강조됨으로써 자기를 부인한다는 표현이 비로소 생긴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자기 부인"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말씀을 비로소 처음으로 하시게 된 것이다(눅 9:23).
이는 다시 말해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각자의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사전(事前,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교육 차원에서 모세 율법이 있었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인간이 되어 있다보니 삶(생명)의 원리가 정작 어떤 것인지도 인간은 정확히 모르게 되어 버려 모세 율법으로써 겨우 그 초보 학습(初步 學習)을 할 절대적 필요성에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 자기 부인이 가리키는 내용이 원래부터의 생명의 법질서의 핵심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 이치가 심오하고 어려워서가 아니고, 그런 환경과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음이니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실상을 밝힌 바울의 설명과 같이 "육신"(롬 7:5-8:13) 아래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구속(拘束)과 속박으로부터 자유 해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얼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음을 인하여 "자기를 부인하라"는 명령이 가능해지신 것이다.

자기 부인이 이전처럼 불가능한 것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 될 수가 없음이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니 지금은 영원히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시지 않고 친히 오직 우리를 위하심을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음으로 확인되고 확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새 계명"을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즉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여 준 것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하심이다.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곧 자기를 위해 사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이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그렇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그가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만 사는 것을 가리킴이다(고후 5:15).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하시기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요 6:53) 즉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54) 하신 것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이런 말씀은 어렵다기보다(하나라도 어려울 이유가 없음이다) 너무나 생소한 것이기에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하고 많은 제자가 물러갔으나 '어렵다'는 것과 '생소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니, '생소하다'는 것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므로 관심만 가지면 얼마든지 이해하게 되는 삶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어렵다' 하는 것은 겸허하게 알아보려는 마음은 없이 반발부터 먼저 하는 한없는 교만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만(딤전 3:6)과도 같은 것이어서 회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47)고 하셨다. 그리스도 친히 "생명의 떡"(:48)이시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으니까 생명을 내가 가진 것이다. 사람이 먹으면 사니까 그래서 먹는 떡으로 계시니 당연히 영생을 가진 것이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이다. 육체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는 자이다. 그래서 영생을 가졌다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는 것이요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육체'와 '영혼'과의 관계가 되어 둘(그리스도와 나)이 하나되어 있음이다. 둘이 하나됨은 기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어짐이다.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자유로 얼마든지 그 후에 믿음을 배반하고 사랑을 버릴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구원이 이미 시작되어 현재 진행 중이나 나의 마음 여하에 따라 그 구원이 뒤집어질 수도 있음이다. 그 구원을 처음 시작한 대로 고이 차질없이 마무리 짓는 것은 나의 사랑의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좌우되니, 그 끝 마무리는 나 자신에게 이와 같이 달려 있는 고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종결하라)"는 경고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 하신 것은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둘이 하나되는' 원리를 말씀하심이다.

즉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의 생명(목숨)을 아낌없이 다 쏟아 부으심과 동시에. 이와 같이 영원히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를 말씀하심이니 내가 나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도 이는 어디까지나 나 홀로의 힘이 아니라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힘(능력)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연료가 없으면 아무리 차만 덩그렇게 있어도 소용이 없으니 차가 앞으로 달리지를 못함이다. 바로 그런 관계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56,57).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는다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를 설명하심이다. 형상과 실체의 관계, 머리와 몸의 관계를 말씀하심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니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은 어느 쪽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 관계다.

아버지는 절대적으로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역시 그렇게 아버지를 위하심을 가리켜 아버지 안에 아들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 계신다 함이니,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관계가 우리의 구원의 구조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나는 그리스도를 인(因)하여 사는 것이다. 위하여 사는 것이 곧 인하여(말미암아) 사는 것이 되어 있음이니 즉 그리스도(:58)로 말미암아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내게 생명력이 되시고 원동력이 되시어 그 힘으로 내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리스도의 대리자처럼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뜻을 전하고 그의 일을 함으로써(4:34) 그리스도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자신이 드러나지시는 것이 되므로 나로 인하여 존재하심과 같은 격이다. 충분히 그런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갑은 을을 드러내고 을은 갑을 드러낸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둘은 하나가 되어 있음이다.


먼저 기도하여 여쭌 다음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자세는 백번 강조해도 좋다. 중국의 "승마(勝魔)"로 통하던 석자직(席子直) 목사가 그러했고, 14살 때 회개하고 구원 받은 후로 온전히 주님을 따름으로써 대학에 들어가서도 성령 충만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어 어떤 기도회에든 그가 참석하기만 하면 분위기가 대번에 달라지게 만들었고, 학교 안에서도 끼리끼리 모여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또래 대학생들도 그가 우연히 지나가면 '쉿" 하고 상소리를 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여대생 Helen Ewan 역시 22세에 요절할 때까지 그런 생활을 한 것이다.

옷을 맞추려고 의상실에 갈 때도 반드시 이에 대하여 주님께 기도하고 행동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성녀(聖女, "Holy Ann")"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캐나다의 앤 프레스턴(Ann Preston)도 그러했다. 철저히 기도 응답으로 고아 사업 겸 복음 사업을 한 죠지 뮬러(George Muller)나 죠지 뮬러를 본받아 역시 기도 응답을 통해서만 거대한 중국 인구를 상대로 선교 사업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헛슨 테일러(J. Hudson Taylor)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서 이와 같이 먼저 하나님께 여쭙는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주님께 먼저 기도로 여쭙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을 저지른 것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수 9:14). 다윗은 전쟁 중에는 반드시 주님께 여쭙고 행동에 옮김으로써 연전연승하였으나, 정작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할 때는 먼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지울 수 없는 일생의 오점을 남겼다(삼하 11:3).

물론 기도하게 되면 그런 범죄를 할 수가 없다. 야고보도 아들 요셉의 일에 대하여 그 형들의 거짓말만 믿고 맹수에게 찢겨 죽었다 해서 장장 13년 세월을 슬픔 속에 지냈지만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면 반드시 그 사실을 알려주셨을 터이지만 기도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도 일절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이다. 이를 보아서도, 이런 야곱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 왕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철저히 살지 않은 탓에 범죄하였으므로 중대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므로 이 경우 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 회개할 생각은 않고 신접(神接) 여인(무당)을 찾아가 물은 결과 그 길로 패멸한 것을 지적하여, 성경은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니,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다"(대상 10:13,14)는 추상 같은 선고를 내리고 있음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사(謀士, 策士, Counselor)시라고 한 것이다(사 9:6).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우리가 번번이 모든 일에 기도로써 여쭙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에덴낙원에서부터 여자가 남자와 의논하지 않고 아담은 아담대로 하나님께 먼저 여쭙지 않음으로써 둘 다 범죄에 이르렀다고 했거니와,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서 재차 확인되는 것이니 "보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양(羊, sheep)을 이리(늑대, wolves) 가운데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라"(마 10:16) 하신 것이다.

늑대들 속의 양이라 하셨으니 이 세상은 맹수가 우글거리고 독초가 무성히 자라는 정글(열대림)과 같고 바닷길로 치면 암초가 많은 항해 길과 같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함정, 올무, 덫이 온 천하에 가득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실상을 밝히시면서 그저 막연하기만 한 추상적인 말씀으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라" 하실 리가 없다.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께 여쭙고 행함으로써 그렇게 지혜 있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신다"(고전 1:30) 한 것과 같이 우리가 매사 매건 주님께 기도하여 먼저 여쭙고 행동하면 그와 같이 우리에게 책사가 되시는 것이다. 즉 지혜를 얻게 된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그런 지혜가 베풀어질 리 없으니 이 사실은 위의 야곱의 경우에서 확인되고 있다. 반드시 우리가 기도해야 움직이시는 것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하는 함께 움직이는 동시성(同時性)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데에는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your paths.-잠 3:5,6) 함과 같다.

비둘기 같이 순진하다는 것은 도무지 남의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을 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해를 입힐 줄을 모르는 것이다. 곧 자기중심이 아니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그 무엇이든 움직일 줄을 모르는 것이다. 오직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그래서 상대방 중심의 삶이다. 선을 행함 또는 지혜에는 어른이 되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는 경고와 같다(고전 14:20). 내가 나를 위하면 그 자체가 죄가 되지만 지혜 또한 없는 것이니, 내 스스로 해결하려 하여 주님께 기도로 여쭙게 되지 않는 까닭이다.

에덴낙원에서의 범죄는 여자나 아담이나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 한 탓이다. 없는 지혜를 내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는 나와 항상 함께 계시어 내게 모사의 역할을 하시는 주님께 기도하여 여쭈라는 뜻이다. 주님 친히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처럼 계시는데 내 자신 일부러 지혜를 갖추거나 특별히 익히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물건이 있으면 그 때 그 때마다 갖다 쓰면 되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혜를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주님께 매사 먼저 기도로 여쭙고 난 다음에 행동에 이름이 바로 이런 경우다. 오(吳)의 부차(夫差)와 월(越)의 구천(句踐) 이야기를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로 여쭙는 것이 절대로 속박일 수 없는 것이 그렇다면 아내 남편이 왜 하나로 스스로를 속박하고 아기 엄마 관계가 왜 하나로서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는가. 왜 국가가 생기고 단체가 결성되어 있는가. 사랑은 하나 됨이니 사랑 없는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하나'라는 말 그대로 항상 서로를 서로에게 "속박시키는" 것이다. 이런 속박은 영원할수록 좋다. 머리와 지체(몸)가 분리될 수 없고 종과 주인이 따로일 수 없으니 사랑은 서로를 섬기고 종 노릇함에(갈 5:13) 있음이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살기만 잘 살아왔지 않으냐 하지 말 것이니,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꿰어 맞추어져 온 것뿐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절 간섭, 강제하시지 않는다면서도 어째서 이와 같이 통제하느냐 하지 말 것은, 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진정한 사람 삶이 아니라 구원 얻을 사람은 구원되고 악인들은 걸러지는 시험의 때로서의 의미만이 있는 까닭이다.

악인을 속박한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나 선인을 보호하는 역할도 함이나 다시 말해 내가 의인이라면 아무리 악인이 나를 죽이려 해도 내가 죽는 '때'가 되지 않는 한 내게 일절 손도 대지 못하기 때문이다. 3운법칙은 바로 인간 생애에 이 때를 3가지 유형으로만 한정하여 그 틀 속에서 흥왕하든 쇠퇴하든 하도록 철통 같이 가두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가 반드시 미리 정해져 있음이다.

방금 말한 대로 죄인이 그 악을 마음대로 자행하지 못하도록 또는 의인 주위로 튼튼한 울타리를 쳐놓아 맹수 같은 악인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함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에게 이 때가 적용되고 있음을 자주 밝히신 것이다. 즉 때가 되지 않으니 아무리 유대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나 포박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죽으시기 전에는 "이제는 너희 때다", "어두움의 권세다" 하고 분명히 이러한 "때"가 정해져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때문에 강제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생들이 이와 같은 철칙 아래 통제되도록 하심이니 이는 필연적이고 불가결이다. 원래 삶이라는 것은 사랑 가운데에서의 삶이지 그 외로는 그 어떤 삶도 존재할 수조차 없음을 상기할 일이다. 고로 이 세상과 같은 사랑 없는 세계는 삶 자체의 의미가 없다. 이 죽음과 죄악의 세상이 사랑으로 하나되지 않고 제각기 자기중심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이는 확인된다.

이런 자기중심에서는 통제 외에는 방법이 없음이니, 자기중심임에도 절대 자유는 한결같이 그대로 보장되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가름하는 일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 그렇게 자기 스스로 그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지장이 없도록 이와 같은 이 세상 생애의 통제는 불가피한 것임이다. 3은법칙이 실시되는 분명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 각자의 자유는 따라서 충분히 발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자유로써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하게 된다면, 아벨과 같은 위치에 처해지는 각자는 그런 자유를 충분히 작동시키기도 전에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될 판이 나는 것이다. 온 세상이 얼마 가기 전에도 붕괴될 것이 아닌가. 방금 지적한 대로의 인생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는 세상은 당분간은 지탱되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억지로라도 꿰어 맞추어져 있어야 즉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가 보장됨은 인생들을 단지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악인들을 추려내고 걸러내기 위한 목적도 있음이다. 이런 모든 일이 인간의 자유 의지 아래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시험하는 자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할도 필수적이니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생들을 철권으로 통치하는 지배자요 신이 되어 있어 조종 아닌(왜냐면 인간 고유의 자유 의지는 건드리지 못하므로) 조종을(인간 스스로의 동조 아래에서 그와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악 곧 자멸 행위로 몰고 가므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시고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인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범죄요 죽음에 이름이었다. 스스로 이미 그런 짓을 했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하도록 인간을 충동한 것이다. 이 충동 질에 넘어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결과로 이 같은 죽음의 세계로 전락한 것이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로 복귀함이다. 그러나 회복은 되었지만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복귀이니 새 창조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 당시는 낙원이 인간의 무대였으나 마지막 아담 시대에는 죽음의 세상이 인간(새로 출생하고 새로이 창조된)의 무대다.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이제 영생하는 자로 애초 아담이 창조되었던 그 상태로 복귀할 때는 이런 비극의 재판(再版)을 막기 위해 반드시 범죄하지 않는 자에 한해서 구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부터 각자의 범죄 여부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하여 자연계로 전락해 버린 인생들로서는 무엇이 범죄인지 죄의 본질을 처음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애초 정하신 삶의 법질서대로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교육시키는 일이 그렇게도 힘든 일이 되어 버려, 노아의 홍수 심판을 겪으면서도 인생들은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모르고 홍수 이전 상태로 곧장 되돌아간 것이 그 증거다.

때문에 그 중에서도 이전의 에녹과 같고 노아와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대표적으로(욥과 같은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뽑아 그 자손들을 택하셔서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그와 같은 사전(事前)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 모세 율법이다. 자기 아우 아벨을 아무 까닭없이 오직 자기보다 좀 낫다고 하여 시기심에서 죽인 형 가인의 소행에서 보듯이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인간을 지배하는 "육신"(롬 7:5-8:13)의 형태가 되어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은 확실히 비극이다.

이런 비극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해소된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인생들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니,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질서 앞에서 인생들 모두가 죄인으로서 죽은 자임을 자각해야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 역할을 한 것이 모세 율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위하시는 분인 줄 알아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노아 홍수 전 인간 세계가 그러했음에서도 보듯이 인생들은 금시 금방 이 생명의 도리에서 떠나 자기중심 일변도로 빗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전 교육의 차원에서 택하신 민족(아브라함의 후손)이었건만 그래서 각종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알리는 등의 집중 교육을 시키셨건만 어떠했던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아담이 자기의 뼈아픈 범죄의 사실을 후대들에게 절절한 심정으로 가르쳤으나 모두들 귀 담아 듣지 않고 겨우 에녹 정도가 그런 하나님 믿는(신뢰하는) 삶을 보였고, 그 후에는 노아 홀로 이 가르침을 마음에 두는 정도이어서 노아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니 이제는 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알까 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니, 아브라함의 후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아가 홍수 후에도 생존하여 그토록 열심히 인간 세상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벌써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아 하나님을 급속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의 충동(부추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인간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자기 스스로 그런 자기중심의 삶을 더 선호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부득불 아브람(아브라함이 되기 전의 이름)이라는 믿음 좋은 사람을 택하시어 그 후손들을 통해 집중적으로 인간들을 교육시키는 방도를 취하셨건만 역시 한 여름 더위에 금시금방 상해 버리는 음식과 같이 부패해 간 것이다.

사람들이 금시금방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장차 인생들을 구원하시러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해도 그리스도조차 알아볼 수나 있을지 그런 정도의 암담한 상태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그 후손들을 여러 모로 인도하시며 집중적으로 그런 예비 교육 차원에서  열과 성을 다 기울이셨으나 이 이스라엘 백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심지어는 "남은 자(the remnant, 나머지, 잔존인-롬 9:27)"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었다.

왜냐면 거의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고 그 중에 극소수만이 남아 마치 찌꺼기만 남겨져 있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할 수 있는 인생들은 겨우 들판에 양떼를 치던 목자들 정도였고 사람으로 태어나신 지 8일만에 모세 율법에 정해진 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마리아의 품에 안겨져 오셨을 때 시몬, 안나 두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알아 볼 정도였다. 이런 모든 일은 그러한 참담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세례 요한의 양친 제사장 사가랴 부부 정도였다.

심지어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알렸던 세례 요한조차도 말년(30년 정도가 그의 생애의 전부였다)에 가서는 "당신께서 참으로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하고 물을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이신 줄 믿지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전(事前) 교육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할 그런 정도였으므로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까지에 이른다(고전 2:8).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이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 모든 사실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모든 계획에서는 차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다는 설명인 것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도 능히 믿음이 있어 그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열두 제자들을 위시해서 겨우 500을 헤아릴 뿐이었음을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던 제자들 중에 역시 많은 이들이 그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는 물러갔으니(요 6:60,66) 바로 여기에 그 비극적 상황의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즉 "어렵다"(:60)는 것이다. 진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부인"을 수용하지 못함이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거부함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는 것이다. 원인은 사랑이 없다는 데에 있다. 자기 부인이 사랑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유무가 관건이라고 했으면 오직 사랑에 힘쓸 일이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자연 우러나야 하는 것이니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만큼 문은 열려지게 마련이므로 사랑을 구하는 만큼 사랑 속에 들어가 향유하게 될 것임이다.

우리가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한 몸으로서의 지체된 이웃을 위함이 삶의 법질서인즉, 여하한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부인을 하면 생명에서 벗어나지 않는(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롬 5:8) 되어 밝혀져 있음이니, 머리로서 몸을 위하는 이치를 따라 전적으로 그 피조물된 우리를 위하심이다. 이제 그 충분한 증거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로서 우리를 위하시니까 그런 줄 알고 이를 믿어 그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또는 하나님을 사랑함)이었던 것이니, 아브라함의 경우 그 믿음을 의(하나님 앞에서 옳다 여기심을 받음, 즉 생명에서 벗어난 범죄자로 여기시지 않음)로 정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없어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반드시 오시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누구든지 그를 믿는 경우 자기 부인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런 자기 부인의 전제가 되는 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하심' 곧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기 때문에 바로 그 점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여 의로 정하신 것이니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실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으니 만일 그 때라도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가정한다면 그리스도께 그가 절대 복종을 했을 것이요, 또 그리스도 오신 후에 만일 아브라함이 태어났다고 가정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부인을 하게 될 것을 하나님은 미리 아신 것이다.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여 의심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게 되는 시험을 받을 때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어 그를 의롭다(올바르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자기 부인은 의당히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구원은 반드시 자기 부인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자기 부인 자체가 구원은 아닌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시니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믿기 전에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부인이 불가능했었다. 모세 율법으로써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다. 자기 부인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함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차원에서 다 이루셨고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일체의 내용 즉 진리를 다 말씀하셨으므로 믿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함에 일체의 지장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다는 말은 옳다. 그리스도를 믿음의 필연적 결과물이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기 부인이 경시되거나 무시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립되어 있는 생명의 법질서 준수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줄을 알아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해도, 내가 구원 받지 못한 상태라면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 그 자기 부인 자체를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리 되면 그것은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이다. 자기 부인은 일절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 구원도 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구원과 결부시키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행함으로 구원된다"는 세상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고 그런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다 함이니, 그것은 내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부인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그 자기 부인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나의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롬 14:7-9). 즉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다"고 단정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나를 구원하신 다음에야 자기 부인이 그 진가(眞價)를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이렇게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선결 과제였으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타심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의미 같으나 아브라함의 그런 시험(이삭을 이의없이 바쳤던)의 측면을 보면 전연 그렇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시험이라는 것은, 자식 없는 아브라함에게 독자(獨子)를 안겨 주셔서 "이 아들로 말미암아 네 자손이 창성하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그런데도 그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 즉 죽이라 하셨으니, 이 경우 그런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믿음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시험일 수밖에 없다. 죽이라고 하셨으니 약속을 어기시고 이랬다 저랬다 기분 내키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닌가 곡해할만도 한데도, 아브라함은 비록 자기가 그 외아들을 죽이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히 11:19). 왜냐면 하나님이 한번 내신 약속은 영원불변하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믿음은 항상 적극성과 능동성을 띠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하면서 야고보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든 것이다(약 2:21).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니, 사랑은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성을 띠어 소극적이거나 피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허황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우리가 어느 정도 죄를 지어도 즉 자기 부인이 없어도 선을 행하지 않아도 구원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인간 상식에도 벗어남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는 것도 그 목적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히 10:24,25) 위함인 것이다. "믿음"을 격려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믿어 구원되어 있는 목적이 바로 사랑과 선행인 것이니 곧 "산 자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행"은 자기 부인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을 남이 대신한(했)다는 것이므로, 이는 그 '죽음'의 실상과 의미를 모르는 소치이다. 죽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왜 죄를 지으면 죽음이냐 하면, 죽음은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요, 왜 살지 못하게 되었느냐 하면, 사는 법을 어기고 사는 방법을 그르쳐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고 이웃에게도 해가 됨으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초래하는 장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대신 죽음"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되었다면 나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뜻이니(죄를 지어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되어), 여전한 범죄행위로 남을 해치고 해도 나는 여전히 용서된다는 그런 자가당착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알 수 있다. "대신 죽음"의 덕분에 나는 이전과 같이 사는 법대로 살지 않아도 즉 죄를 지어도 살게 한다는 뜻이니, 아담을 죄를 지어 죽었지만 나는 죄를 지어도 죽지 않게 되었다 함이니 그런 모순된 말이 어디에 있다던가.

이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감히 선전하고 있으니 일반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게 알겠는가. 모순투성이의 신을 누가 안심하고 믿으려 하겠는가. 그래서 세상이 하는 말이 "창조신은 인간이 지어낸 작품"이라 하지 않는가. 이런 '대신 죽음의 구원'을 선전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이와 같이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 mother of god)"라고 선전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똑같은 불경죄, 신성 모독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 받는다니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후안무치(厚顔無恥,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름)이며 가증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대신 죽음의 구원"이 실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즉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죄를 지었다 해도 "대신 죽으심"이 다시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므로 그 죄 또는 죄인을 처벌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대신 죽음"으로써 답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죄를 짓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죄를 지으나 천국에서는 전혀 그렇게 않게 하신다면 그러면 그것은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된다. 우리에게 전적인 자유를 허락하신 것과 위배되니 그런 자가당착의 일은 하나님께는 존재하지 않는다. 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기 때문이요 이는 자기를 부인함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시어 나를 위해 사시는 것만 아니라, 내 자신 그리스도와 함께 문자 그대로(왜냐면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으심이 실제 나의 죽음이므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 역사적 죽으심을 나를 "대신하신 죽음"에다 엉뚱하게 갖다 붙이니, "대신 죽으심"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은 상태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면, 천국에서 아무리 가인의 짓을 하고 에덴낙원에서의 "뱀"의 짓거리를 해도 천국에서도 완전히 속수무책이 될 것은 뻔하다. 천국의 분위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된다 할 것인가? 그런 "분위기"로 말할진대, 애초 모든 것을 창조하셨던 당시 (즉 악령들도 아담도 범죄를 모르던)의 "분위기"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영물들이 범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담 역시 범죄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아무 설득력이 없다. 이는 마치 불교 교리가 사람이 열반, 해탈에 들어가는 것만 주장하고 강조할 뿐, 그렇게 열반에 들어간 이후의 상황은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무조건 천국에서는 아무도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그런 "얼렁뚱땅 식의 얼버무림"과 같다는 것이다. 역시 평범한 상식에 속한다.

그렇게 "대신 죽음을 통한 구원"일진대 천국에서는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은 죄를 지어도 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은 죄인을 어찌하지 못하는 꼴이 나니,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재판(再版)이 될 터이므로 그런 천국에 들어간들 무엇하리. 이 세상에 미련 없어 찰라 같은 이 세상 삶도 스스로 끊어 버리는 자살자가 많은데, 그런 삶이라면 영생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자살할 수 있다면 자살자만 속출할 것이요 자살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고통도 없다. 고통은 본시부터 죽음의 영역이지 생명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으심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현재 하나되어 있는 나의 죽음의 역사적 현실성을 위함이요 따라서 그 부활 역시 나의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생명"이 단지 이론이 아니고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실제임을 확증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로 구성되어 있음이다. 그렇게 성령으로 오심이 없다면 성경이 절대로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완벽한 조처와 장치를 마련해 주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새 창조"라 할 리가 없다. 창조는 모든 것이 새롭고 완벽하고 더 이상 손볼 것이 없는 상태로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창 1:31)것을 말한다. "심히 좋은" 창조 곧 새 "창조"("새롭다"는 것은 "이전과 똑같은 창조"이기는 하나 단지 차이는 시작을 새로 했다는 의미)인데 이전 죄 짓게 만들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는가 생각을 해볼 일이다.

스스로 죄 짓지 않는 한 그 어떤 타력(他力)의 개입에 의해서도 죄를 지을 수 없도록 만드신 것이 처음 창조였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하고 기타 영물들이 죄를 짓고 인간(아담)이 불복종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도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를 발동시켜 자유 선택으로 된 일이다. 우리 역시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고는 죄를 짓지 않게 되어 있다. 물론 몰라서 짓는 죄, 심각한 죄인 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범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혹은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다)이 요한일서의 초두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형제 사랑의 결여 정도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를 지을 수 없으니, 그럼에도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의로 짓는 죄가 되어 용서가 없다(히 6:10:26,29). 그러므로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기로 하고(이것이 "회개"다-행 2:38) 믿음에 들어왔으니 그래서 죄를 지으면 구원이 무효가 되고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는 전제를 하고 믿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인 것이다.

죄를 짓지 않게 되어 있음 즉 자기 부인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설명한 대로 ①새 창조의 의미가 그러하고, ②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곧 "옛 사람", 현재는 그 "옛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새 사람"이므로)이 죽어(고후 5:14) 무덤에 있기 때문에 그렇고, ③이전에 내가 나 자신을 위했던 일을 이제는 그리스도 친히 완전히 떠맡아 담당하시어 '나를 위해 사시기 위해' 살아 계심으로써 그 모든 하시는 일이 나를 위하시는 것이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거나 무엇이든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

④천국에서는 모든 나의 이웃들이 나를 위해 주기 때문에 역시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어 그렇고(현재의 교회가 그 그림자의 모양을 띠고 있어-막 10:30), ⑤이제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것은 처음 창조 때부터의 하나님의 율법 곧 계명 그대로이나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계명 곧 삶의 법질서를 아담이 지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재 우리들이므로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을 따르는 새 질서 속에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새 계명"요 13:34이라 하신 것이다. "새 계명"이라 할 때는. 모세 율법 시대에 있을 때는 그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겨지는 것과 같이 당시 이스라엘이 상징하고 있던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단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고 모시고 있는 한 몸으로서의 구성체가 교회이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끊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단절인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가입되어 있어 이 한 몸 체제에서는 머리도 몸도 그 누구도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경우든 예외든 일절 허용됨이 없으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만 살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서로를 위해(사랑하여) 살라는 것이 "새 계명"(요 13:34)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위할 수 없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으로서, 죄는 자기중심으로 살아 자기를 위하는 일체의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말로 이를 엄중 경계하고 있다. 즉 "속지 말라, 악한 동무(형제로 가장하며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어도 구원은 받는다"고 선전하는)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이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한다(고전 15:33,34) 한 것이다.

⑥이상과 같은 이유 외에도 더욱 내가 범죄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장본이었으므로, 다시 내가 범죄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어서 다시는 회개케 할 수 없는 짐짓 범하는 죄가 됨"이기에 도저히 이런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히 6:6/10:26,29).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어찌 그와 같이 배반하여 버리고 감히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느냐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후 5:15) 때 그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 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내가 할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상황은 그런 사람이 많다는 데에 있으니(:18) 이 경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임이 옳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였거니와 내게 비록 죽음이 되고 아무리 심한 고난 고생일지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고 생각하시는 사랑에서 허락하신 일임을 확신할진대, 그 때문에 불복종하여 죄를 짓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육신 타령을 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둥 말이 많은 것도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죽음의 고난을 무서워하여(히 2:15) 기피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임을 누가 부인하리요. 이런 경우 어찌 믿음이 있다 하겠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는"(:15)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꺼리지 않고"(20:27) 모든 면에서 정확히 밝히는 것을 목적하였고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고는 있으나, 과연 오늘날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하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던 차에, 이러한 가르침과 삶의 실제 표본을 이 북한 형제("21세기 바울 형제")로부터 찾은 기쁨과 안도감은 이루 형용할 길 없이 크다.

더군다나 고난 중의 북한 교회에서 그 산 증거를 보여 주신 무한하신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디. 고로 이제 모두 일체의 의구심은 떨쳐 버리고 이 마지막 때 주님의 일에 과감히 매진할 일이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역시 홀연히 사라진 그가 바로 이런 자기 부인의 전형(典型)이요 또한 방금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보이신 증거가 아닌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고후 5:15) '죽음'의 북한 땅에 처해 있으면서도 '사는' 기회 곧 자유의 땅 고난당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즉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래서 목청껏 찬송도 부를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기회가 왔어도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자기 부인의 대표적 실례(實例), 사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믿음의 본에서 가히 최고봉(最高峰)인 것이다. 열매 맺는 것이야 30배든 60배든 100배든 상관 없이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이런 정도이면 실로 하나님 앞에서 흠결(欠缺)이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난 받는 생활을 하고 자기 부인을 하게 되면 부득이 당하는 불가항력이라 인식하고 참고 견디는 데에만 마음을 쏟지만, 이 형제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어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러"(골 1:11) 있음을 실증(實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 이상 더 어떤 믿음의 이상적인 표본을 얻을 것인가.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를 주체치 못하여 목숨을 걸다시피 해서 "찬송 실컷 불러보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정작 그 지긋지긋한(우리의 판단으로 하면) 고난의 도가니를 벗어날 기회가 현실적으로 이르러도 감연히 이를 뿌리치고 도로 그 마굴(魔窟)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뻐하고 만족스러워 했던 것이니 오직 하나님의 뜻을 사랑한 결과이므로 과연 우리의 본이요 사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골 1:24/계 1:9).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각자의 몸을 통해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게 해드림이다. 왜냐면 그 남은 고난을 채우시려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그 뜻에 제공해드려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과정에서 우리도 한 몸된 위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것이니 이는 왕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신하된 도리로서만 아니라 몸과 머리가 공고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증거로서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명예가 아닐런가.

그 형제의 기도 응답을 통해 이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리신 것이다. 우리는 방방곡곡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 스스로 원해서 주인 의식으로 받아들여 수용하는 오늘날의 우리 고난이요 죽음이다. 이 '21바울 형제'가 우리의 진군(進軍) 나팔이 되어 있고 노도(怒濤)처럼 적진으로 밀고 들어가는 사기 충천의 깃발이 되어 주고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사망의 권세를 쥔 마귀가 이런 죽음의 고난을 주무기(主武器)로 삼을 때는 이에 순순히 응하여 감수하고 감내하는 것이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최고의 방책이요 승리의 지름길이다.

이를 기피하려 할 때 적에게 등을 돌리는 영락없는 패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의 본이 되셨다(골 2:15/요 16:33). 이전에도 이 땅에 그런 믿음의 본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일제 강점기 소위 신사 참배로 교회가 수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당시 그런 주님의 "종"이 있었다고 한다. 수십 년 전의 인물로서, 신학생들이 바둑이나 장기판을 벌이고 거기 열중해 있는 것을 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경고하여 책망했다는 목사(牧師)가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 그런 눈물이 나올 것인가. 그들의 앞날이 눈 앞에 훤하게 드러나고 있었기에 바울처럼 억제할 수 없는 비통함을 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참한 운명에 처한 주인공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으랴. 과연 "바울의 눈물"(빌 3:18/행 20:31,19/고후 2:4)이 아닌가. 이 설교자는 강단에서는 항상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인물들을 한국에 남겨 두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들"(롬 9:27)이다. 고난 받음으로써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 것이니(히 5:8) 즉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것이었으므로 이는 바울됨의 제4호다.

"21세기 바울 형제"의 이 말을 들은 그 관계자는 발이 삐죽이 튀어 나올 정도로 다 헤어진 그의 신발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했다. 헤어질 때 성함을 물으니 "내 이름을 알아 무엇하려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오"(갈 6:14-"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바울됨을 다섯번째로 증명한 것이다.

이 형제가 79세의 노령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간단히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답할 수 있다. 남한으로 탈출시킬 수 있다는 제의에 무조건하고 먼저 기도했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고, 그의 성명을 알고자 했을 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그의 기탄 없이 나온 대답이 그 둘째다. 이미 그런 마음의 자세라면 아무리 그가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젊은이였다고 해도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고 그러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북한과 같은 죽음의 동토(凍土)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지극히 행복한 사람임을 증명함이다. 죽음의 동토에서는, 춘풍에 생동하는 땅을 향유하지 못하는 "불우함"과 "박복(薄福)"을 한탄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마련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자랑할 수 있으니 이는 최고도의 행복이요 만족이다. 유튜브(youtube) 검색창에서 "북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치면 그 간증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이미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초보적인 기쁨을 졸업하여 한 단계 더 상승하고 도약하고 성숙해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위치함이다(빌 3:1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단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남(出生)"(요 3:3) 즉 "성령으로 출생함"(:5,6)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 창조됨"(고후 5:17)으로써 이루어진 "새 생명"(롬 6:4)의 구조는 둘이 하나 됨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된 것이므로 주님은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나 또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의 영원한 체제요 최고봉의 지혜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8-11) 것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함이니, 그리스도 친히 내 육체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소원을 들어드리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도 다름아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서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생명의 구조 안에 계속 머물러 있고자 하는 나의 의지(意志)인 것이다. 내가 을로서 갑이신 그리스도를 연속적으로 위해야 갑이 을을 위하는 연속적인 움직임이 가능해지는 이치다. 때문에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해야 나도 그를 시인한다" 하신 것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이것이 바로 갑과 을의 사귐이요 교제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교제)을 알려 하여"(빌 3:10)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그런 연속적인 교제가 생명의 특성이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 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기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3,14)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율법(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한 것이다.

이를 다시 역설하여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2-27) 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일어난 모든 비극적인 사례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 경고하기를 잊지 않은 것이다(고전 10:1). 그러므로 달려가는 것에 비유하였은즉 중도에 그치면 처음 스타트 라인을 힘차게 밟고 뛰어 온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이 중도에 그침이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내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관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하나됨의 특성상 갑과 을을 서로를 위하는 동시성과 양면성을 연속적으로 작동시키는 데에 생명이 있는지라 중도에 달리기를 멈추면 그것은 을이 갑을 더 다시는 위하지 않음이 되어 갑 역시 더 다시는 을을 위할 수 없는 파국적인 결말로 유도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시험자가 호시탐탐 시험하는 기회만을 노리는 시험 무대인 이 세상에서 이상과 같은 바울의 경고는 당연한 것이다.

자기중심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요 원흉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한 몸 구조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정하신 것이야 우리의 신체 구조를 미루어 보아도 비록 삼척동자인들 모를 리 없는 아주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간단한 이치다. 이 자기중심을 척결하기 위함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이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최고의 방법으로서 이 이상 간단명료한 것이 없다.

인간 불행이 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를 그냥 두고 보시겠는가. 더군다나 이 자기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오만한 불복종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한시라도 이를 좌시하시거나 유보하시겠는가. 더구나 새로이 창조하시는 마당인데 그런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무얼로 보기에, "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육신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런 말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 자기중심의 화신처럼 되어 있어 이 인간 세상의 지배자, 신(神)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이 소위 "믿는다"는 이들 중에 거의 전부를 자치하고 있다는 것은 "과연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곳이요 이 세상의 신임에는 틀림없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에덴낙원에서 그는 첫 사람을 거짓말로 파멸시킨 것이다) 꺼둘리지 말고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한 것도 이 상식 수준의 판단을 그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또는 '구원 받는 일'에 왕도(王道)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담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고 "나는 절대로 아담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조심하는"(고전 10:12)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 외에 즉 "항상 복종하도록"(:12) 조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길이 여러 갈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외길 단 한 길뿐인 것이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고 하셨고 좁은 길을 통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고 심지어는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이들이 "많다"(:24)고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이 경고 앞에서 누가 두려워 않고 떨지 않으리요.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놓고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여 심취해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의 천하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모름지기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한 대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 일이다. 달려가면서 한눈을 팔면 결코 그 경주에서 우승할 수 없다.

한눈파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니, 오직 사람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 세상의 의미를 한정시켜 이에 몰두하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한눈팔지 않고 우승하기 위해 달려감인 것이다. 자기중심을 한사코 미워하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미워하는 것처럼 미워하라. 자기 부인을 생명 줄처럼 붙들고 있을 일이다(시 139:19-24). 자기중심을 미워하되 100% 미워할("with perfect hatred"/"I have nothing but hatred"-:22) 일이다.

자기 중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망쳐진 것이다. 그래도 이 불구대천의 원수인 자기중심을 따르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려는가. 그럴 경우 자기가 좋아한 대로, 자기중심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들어가는 영원한 불 못을 자기의 최종 종착지로 정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을 목숨을 걸고 미워해야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미워해야 그렇게 미워하는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빌 2:8)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다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드시 따르도록 되어 있음이다.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아담과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한신학/한과학 (2)ㅡ3운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