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논어를 즐겨 읽었던 이회장,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던가! (27)


논어를 즐겨 읽었던 이회장,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던가! (27)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 버려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


인과율

이와 같이 하나님을 충분히[만물로 나타나 있는 증거가 충분하니까-롬 1:20]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므로"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한 것으로 치달아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만 우둔하게 되었다"[:21] 한 대로, 그와 같이 자기 욕심[자기중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각(知覺)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니[부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 그 지각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고 오히려 무디어져, 무신론이 정당시되고 합리화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 신(神) 사단의 "눈 어둡게 하는" 조이고 켕기는 작전(作戰)이 마음대로 자행(恣行)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후 4:4/행 26:18]. 그래서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한다" 한 대로, 무신론자야말로 제법 사리를 제대로 판단하는 학식 있고 명석한 자의 전유(專有)물이나 되는 양 으스대게 된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가.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었다" 한 그대로다.

모든 현상과 사태를 정확히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즉 분명한 인과(因果, cause and result) 관계다. 성경이 이 실상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충분히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므로"[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한 것으로 치달아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만 우둔하게 된다"[果]. 그렇게 하여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니"[롬 1:23][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시어 저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신다"[:24][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니"[:25][因],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시어 동성끼리의 성행위와 같은 망측하고도 망할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한다"[果]. 즉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것"[:26]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28][因] "또한 하나님께서 저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시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심이라 했다[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신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롬 1:29-31] 등의 결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죽음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양심상으로]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32].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은 다 있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는[2:3] 일은 곧잘 한다. 그래서 "어찌하여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롬 2:3] 것이 인생이다. 자기중심이라는 단적 증거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함이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연애"라는 말과 같다. 양심이 있어 그 척도로써 능히 남의 비위(非違)는 캘 줄 알고 식별해낸다.

그러나 자기 욕심 때문에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므로, 그 스스로는 그 비행을 버리지 못함에 문제는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 현재의 인생이 당하는 불행, 고통, 죽음이 '결과'임이 분명한즉 그 '원인'을 찾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회장이 애초의 유교적 생육 환경에서 떠나 불교에 안주하기로 작정하였으나, 불교에서는 '원인' 없는 '결과' 즉 '제행무상(諸行無常)'만을 놓고 씨름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므로, 이런 데에서는 답답함을 금치 못하여 마침내 만물의 최초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당연한 질문을 던지며 구도자(求道者)로서의 길에 다시 들어선 것이었으나, 때가 너무 늦었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우주 만물이 항상 유전(流轉)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아니하는 것"은 자연계의 현상으로서 이 자연계는 영계와 짝을 이룬 그 한 부분 즉 일면에 불과하다. 인간은 이 두 세계를 아울러 지닌 양면의 세계에 속해 있었는데 범죄함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자 이 자연계에만 예속되어 버린 결말이 현재의 이 비극적 양상 곧 죽음과 고통과 불행인 것이다. 인간 자체가, '영혼'과 '육체'라는 이 양면 세계를 겸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인식 못하는 결과다.

고로 이런 모든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야 마땅함이다. 결과만을 붙들고 맴돌다가, 결론이라고 얻는 것 역시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처음 시작했던 그 출발점에 도로 돌아오는 꼴이다.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쳐 열반, 해탈이라고 하여 자유를 표방하나 내적 인식의 변화일 따름이다.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여 자기 세뇌를 하니 태평스럽게 여겨지고 평안하기는 하나, 외적 변화 곧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일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은 여전히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은 여전히 백년 가도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일 리 없고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둔갑할 일도 없다. 그것이 엄정, 엄밀한 자연법칙이다. 객관적인 자연법칙이 아닌 순수하게 자기 개인의 주관적 상념(想念) 속에서야 수백 번 둔갑을 하고 재주 넘기를 해도 매양 그 자리 그 모습일 뿐이다. 고로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 박고 안온한 기분에 젖어 만족해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시간이 지나면 꿈은 깨어진다. 꿈 깨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다.

결과만 헛되이 붙들고 원인을 무시하기로는 개신교도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첫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왔고 죽음이 왔으니[롬 5:12] 이제 이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라면 의당히 죄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되어져야 함이 원인과 결과의 조화를 이루는 온전함이다. 그런데 무조건 "믿음으로써 은혜로 영생 얻는" 데에만 몰두하고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둥대는 "육신"[롬 7:24]의 불가항력적인 것에 포로된 채 그대로 머무는 것만을 고집한다. 이것이 무슨 구원이고 하나님의 말씀인가. 불교가 진실과는 동떨어진 채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신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진 채 제멋대로 놀아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둘이 하나' 되심에서야 비로소 나의 생명이 되신다[골 3:4]. "생명"만 아니시고 또한 "길[way]"이요 "진리"이시니[요 14:6] 앞에서 말한 대로 삶[생명]의 확고한 원리원칙이시다. 그리고 그 원리원칙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시다. 이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요 죽음인 것이다. 이 원리원칙에서 가리키는 방향은 처음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으니, 즉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다.

머리와 몸으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공동 운명체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고, 고통을 당하면 함께 고통을 받고 영광을 받으면 함께 영광을 받음이다[고전 12:26/롬 8:22]. 그런데도 아담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 하신 지시, 주의(注意) 말씀, 경고]을 무시한 것이니 이것이 죄요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다. 생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니 그 대립 개념으로서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사단 등 영물[악령]들도 그렇게 머리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어김으로써 범죄하여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음이다.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성경의 경고[좁은 문, 좁은 길로 통하기를 힘쓰라-눅 13:24]를 지금도 무시하고 그릇된 길로 접어들어 행동하니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그릇되게 자기 식으로 억지 해석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 쪽의 ‘일방적인’ 구원으로 착각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고 믿는 미신(迷信)에 빠져 있다. 회개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이므로 이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 주셔서 죄 용서와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심이 허락되는 것이다[행 2:38]. 그래서 과거 죄는 청산이 되었고 앞으로 죄를 안짓기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하고 약조했으니까, 이 상태를 여전히 "죄인"이라 할 것인가. 당연히 의인이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의롭다 하심[稱義]"이다.

이 "칭의"의 의미를 성경대로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짓고 있고 그 죄를 회개할 마음이 없는데도 즉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 죄인인데도 의롭다 하신다는 기상천외의 억지 해석을 내려 자기도 망하고[벧후 3:16] 자기의 그런 억지 해석을 퍼뜨려 남도 망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실태다. ‘죄인’을 ‘의인’으로 여기신다니, 될 말인가.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처사임에도 이 실상을 정작 깨닫지 못한다. 이런 억지 해석이 들어 성경을 온통 사리에도 조리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통하지 않는 괴상한 책으로 온갖 먹칠을 다해 놓고 세상에다 선전해대는 꼴이 되어 있다. 그리하고도 감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려는가.

그러므로 두 번 다시는 나 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 일이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겹[重複, 複合]으로 된 인생이다. 이중(二重)으로 된 구조다. 이중으로 된 구조라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원래 인간은 이중 구조이니 ‘영혼’과 ‘육체’다. 바로 이 근거를 따라 나를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심으로써 나를 구원하심이다. 그리스도 친히 이제 나의 ‘영혼’이시고 나는 그 ‘육체’로서 자리를 굳힌 이 사실을 말함이다.

나와 이렇게 불가분의 하나가 되심도 ‘육체’에 ‘영혼’ 격이신 성령을 내가 받아 모심으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그래서 이와 같은 "다시 출생함"[요 3:3]을 "성령으로 출생하는 것"[:5,6]이라고도 하셨다. 그런즉 그렇게 인식하고 그런 구조라고 의식하고 인지하면 되는 것이니 그 이상으로 무슨 특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영[성령]으로 된 구조요 체제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게 되어 있다[갈 5:25]. 이는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행하게 되어 있음과 같은 의미다.

성령 따로 그리스도 따로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되 성령으로 임하여 오시어 가장 이상적으로 내 안에 계실 수 있음[하나님이시자 사랑이시므로]을 가리킨 것이다.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가 되심인데 육체로는 이런 완벽한 하나 관계가 될 수 없다. 내 육체 안의 내 영혼처럼 되어 계시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계시는 방법이 없다. 바로 이 방법을 통하여 나와 현재 하나되어 계심이 나의 성령 받음이요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심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으로 계실 때 반드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 하나뿐인 것처럼 여길 경우 그것은 곧바로 자기 부정으로 통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否認)"과 자기 부정(否定)은 다르다. 자기 부인은 앞서의 여러 설명과 같이 자기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은 말 그대로 자기의 멸절(滅絶)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점에서도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써 오해한다. 즉 자기 부인을 거꾸로 자기 멸절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기피하고 기겁을 해서 도망 가는 형국을 취한다. 성경에 대한 너무나 암담한 무지(無知)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고 영혼은 육체를 위하는 것처럼 나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신다.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 이보다 더 확실한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 어디 있는가.

몸의 각 지체 중 하나가 되어 있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 않음은 즉 내가 자기 부인하는 것은 머리께서 나를 위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내 이웃[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이 나를 위하도록 되어 있음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천국이 아닌] 그런 이웃이 많건 적건 있건 없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하시는 머리를 위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제 내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도 나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을 때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나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망동(妄動)이 되니 곧 자멸, 자살 행위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목숨[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끊어 버림이다. 만고에 이런 어리석음이 있는가. 내 생명이 지금은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시다[골 3:3]. 그래서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히 6:6/10:26,29]이라 하지 않는가.

"자기 부인이 어째서 그러면 세상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고난의 연속으로만 이어지나?"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상이 아니라 죽음과 죄악의 세계, "패역한 세대"[행 2:40]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써 내 이웃이 모두 다 나를 위하니 나는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나 자신을 덤으로 여분으로 가지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것이 한 몸으로 사는 이치다. 이 이상 가는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지혜가 없다.

자기 부인은 영원한 가치의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그렇게 대접해 주지 않으니, 이 세상이 워낙 거꾸로 된 모습인지라 이 지혜가 널리 통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요 오히려 당연한 일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동조하여 따라 간다면, 의인커녕 하나님의 아들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이 생명으로 비쳐질 리 없다. 오히려 거꾸로 죽음처럼 인식되어져야 차별화가 된다.

그렇지 않고 죽음이 생명처럼 착각되는 세상에서 역시 생명으로 나타난다면 그 생명이라는 것 역시 죽음과 똑같다는 판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고 똑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이 그 증명이다. 즉 유일하게 선하시고 의로우신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죄인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인으로서의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의 사형 처분(處分)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일시적일 뿐 항구적인 것이 아님이 다시 증명되어 보여져야 하겠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모든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시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재림(再臨, 다시 오심)의 의미 중 하나다. 과거 한번 세상에 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재차 오시게 되어 있음이다. 다시 오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명백히 가려지는 것이다. 역시 양면성의 원리라 할까. 아크바르[Akbar]가 몹시 알고 싶어 했던 것이 여기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되시는 분께 그 ‘육체’ 된 우리는 무조건 순종할 일이다. 죽어야 하면 죽음으로, 살면 삶으로써, 그 어떤 경우에서든 어쭙잖게 내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머리'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 거기가 생명의 길이다. 죽을 길이 아니고 사지(死地)가 아닌즉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복종하여 따를 일이다. 단 기쁨으로 따르지 않으면 그 따르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마치 바람을 잡는 결과가 됨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자주 독립성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억지로 하는 그 무엇이든 '강제'로서, 자주 독립성의 박탈이다. 자기 스스로 기뻐서 행할 때는 그 무엇이든 주인 의식으로서의 완전 자유인이다. 이 차이에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이든 이렇게 자유인으로 자주 독립성으로 모든 것을 행하도록 만드심에 있다. 따라서 거듭 강조하거니와, 억지로 행할 때는 나의 구원은 전적으로 무의미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구원"이라는 일정 공식(公式) 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자체가 바로 그 '공식'이라 해야 거짓 없는 표현일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주라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그런 자주는 저주 받은 것이니 자기에게 앙화(殃禍)가 될 것도 모르고 덤비는 부나비 불 속으로 날아 듦과 같은 것이다. 죽음도 기쁨으로 맞을 때 그것이 자유다. 죽음이라고 해서 무조건 기피하는 그런 식의 "내 마음대로"는 "죽기 위하여 태어난 이성(理性) 없는 짐승"[벧후 2:12]의 본능에 불과하다.

죄 짓지 않는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게 되느냐 다시 말해 올바르게 사람답게 사느냐 할 때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된다"[고후 5:15]고 간단히 답할 수 있으나, 어째서 죄 짓지 않던 인간[아담 부부]이 처음 범죄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살피면 죄를 안짓게 되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오게 된다. 먼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니 육체 자체로 말하면 부모에게서 자식이 육체를 물려받아 세상에 나오는 것과 같아 부모 자식 관계다.

그러나 아담 스스로 여자를 만든[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남자의 육체[갈빗대 한 개]를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셨기 때문에 남녀 관계가 된 것뿐이다. 고로 아이가 그 부모를 따를 수밖에 없듯이 항상 남자를 따르고 남자를 돕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도 남자의 위함을 받는 등 말 그대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함이 정상인데, 마치 아담[남자]처럼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인 양 선악과를 따먹는 등 독자 행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남자에게서 떨어져 있는 그 공간과 시간을 틈 타 사단은 여자에게 접근 자기 말을 따르도록 유도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한 것인데, 바로 여기서 즉 독자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죄를 짓지 않는 방법론'에서의 첫째 지혜를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나의 영혼 격으로 받아 모셔 그리스도와 '육체와 영혼 관계'가 되어 있는 나는, 당시의 비극적인 결말을 거울로 삼아 절대로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여자로서 남자를 떠나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항상 의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도록 함이다.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않고 잊어 버리는[렘 2:32] 것이 그 곁을 떠남이 된다. 둘째로는,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전에 여자는 반드시 남자와 먼저 상의하여 의견 조율을 함으로써 남자와 일치하게 행동 통일을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여자의 잘못된 처신을 경계와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주인님[나의 소유주]으로 모시고 있는 종으로서 반드시 그와 같이 해야 함이니 '주인'과 행동 통일을 하는 것이 '종'이다. 즉 주인의 뜻을 반드시 따라야[순종] 함은 물론이거니와, 일에나 말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함이다[고전 10:31]. 이상이 여자가 범죄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적하여 우리가 그 재판(再版)이 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 즉 죄 짓지 않게 되는 방법이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당시 여자와 아담 관계인 것이다. 이 '나'라는 여러 지체가 모여 '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 '한 몸'의 구성이므로, 이는 교회[그리스도의 몸]와 그리스도[교회의 머리]와의 관계다. 범죄하기 전에는 여자가 이름이 없었다. 아담의 이름으로 통한 것이다. 오직 아담과 하나되어 있어 단지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되어 있었을 뿐이다. 범죄 후 저주 받아 자연계로 영구 추방되었을 때 아담은 자조(自嘲) 섞인 이름으로 "하와"라 지어 준 것이다.

왜냐면 이름을 지어 주었을 때는 애초 영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이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영물들 중 그 어느 누구와도 자기 짝이 될 만한 것이 없음을 확인한 결과였다. 그래서 여자가 비로소 창조되었던 것인데, 이 여자마저 이제는 자기에게 득이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사단이 여자를 유인했듯이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를 유인하는 연쇄작용을 한 것이다.

죄는 이와 같이 자기 하나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암 세포와 같은 것이어서 전이(轉移)하는 특성을 지니므로 몸 전체로부터 격리하는 차원에서 절단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즉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이니 곧 죽음이다. 사단은 손위인 아담에게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여자는 자기네 영물보다 나중에 창조되었으므로 보다 지혜 있는 선임자 또는 선배 연(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만일 사단이 그런 말을 걸어 왔다면[실제로 할 수도 없지만] 사단이 여자에게 대하듯 아담 역시 사단을 그렇게 대했을 것이므로, 후배의 말을 선배가 선뜻 받아들일 리 없다.

아담보다 나중에 창조된 영물들이므로 아담보다는 훨씬 아래의 후배들이다. 비록 여러 가지 지식에는[우리로 치면 첨단 과학 지식에 비유할까] 뒤지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아담의 위치상 상식과 양식(良識)과 논리와 건전한 판단력에서는 아담이 단연 우위였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여자가 권했기 때문이다. 이미 운명적으로 둘은 한 몸이니 여자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담이 직접 범죄하게 되는 요인을 여자가 제공한 것만은 사실이다.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당장 "죽음"의 변화가 나타나면야 당연히 먹지 않았을 것이나 여자가 이미 직접 먹은 후이고 그래도 당장 아무 변화[죽음에 관한 한]가 없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어서 이런 강력한 증거[당장 어떤 변화가 즉석에서는 일어나지 않은]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터에 사랑하는 사이에는 상대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것이 정상이므로 차마 여자의 애교 넘치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약점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셋째와 넷째를 배우게 된다. 하나는 피조물의 그 어떤 말이든지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말씀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아담이 사단의 말에는 넘어가지 않았을지라도 여자의 말에는 넘어갔듯이,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뜻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증거"[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것을 입증하는 듯싶은]에도 넘어가지 말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런 것은 조만간 봄눈 녹듯 사라져 없어질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현실을 우리는 이 아담의 예에서 확인하고[믿음의 눈으로 확인함이니, 믿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음이다] 있는 것이다. 장차 적(敵) 그리스도는 그런 따위의 많은 "증거"들을 진열하고 나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미혹할 것이라" 경고하셨다.

상대를 서로 의식하게 되어 있는 '둘이 하나됨'

여자가 남자와 일차 의논도 없이 먼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남자에게도 자기와 같이 하라고 한 이런 권유는 위의 설명처럼 남자가 하게 되어 있지 여자가 이런 중대한 일에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는 자기 선배요 연장자인 남자와 의논하게 되어 있는데도 그 스스로 먼저 일을 저지른 후에 남자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한 것이 되어 결국 "남자를 넘보는" 사태 발전으로 낙착되는 불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자기를 일치시켜야 마땅한 것이니, 왜냐면 남자보다 나중에 존재했기 때문에 먼저 난 자가 부모 맞잡이라 모든 판단력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낫고 대표성을 띠기 때문이다. 여자가 얼마든지 자기 의견은 개진할 수 있어도 남자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때는 남자의 결정을 따름이 원칙이고 정상이다. 원천적으로 한 몸이므로 행동 통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몸됨 즉 둘이 하나 됨의 기본이요 또한 운명이다.

때문에 공동체 '운명'이라 하는 것이니 망하면 함께 망하고 흥해도 함께 흥함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 따라서 여자의 범죄는 숙명적으로 남자의 범죄를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범죄와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고난을 강요한 것이 되어 있음과 같다]. 아담의 경우, 여자와는 달라 누구와 행동 통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 같은 것도 없으니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완연한 허물이 있음이다.

고로 여자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남자[아담] 역시 직접 하나님께 일단 여쭈워보고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든지 말든지 했어야 할 일이었다. 여자가, "죽는다"는 경고의 말씀과는 다른 상황을 연출해 보이고[당장은 죽지 않았으니까] 사단에게서 들은 바[죽지 않을 뿐 아니라 선악을 알게 된다는 내용]를 말하면서 먹으라고 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사고 방식대로 했다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다면 먹어도 될까요?" 하여 하나님께 여쭈워보고 나서 나중에 먹더라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야 옳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둘 다 허물이 완연하니 이는 자기 손위에게 일단 알려 상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을 '아내 남편이 육체로 하나 됨'보다 우위에 두고 훨씬 더 중시하는 데에서도 이상의 중요성은 드러난다[고전 7장].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한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어진다"[고전 7:32-34] 함과 같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최(最)우선시하는 것은, "천국을 위하여 고자되는"[마 19:12] 것과 같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실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 되어 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롬 6:8/고후 5:14] 즉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20] 결과를 토대로 함이다. 과거 나 홀로 행동하고 말하고 하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이 현재의 이와 같은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의 "새 생명"[롬 6:4]을 탄생시켰으므로, 이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된 나는 범죄하기 전 아담 곧 위에 설명한 대로의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하나되어 있던 모습의 상태로 완전 회복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 때에는 육체로서 남자와 여자 둘이 하나 되어 있는 상태로서 아담의 육체를 여자가 물려받는 모양새였다. 이제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으로서 하나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써 된 것이다. 구조상으로는 "육으로 난"[요 3:6] 것과 "영으로 난"[:6] 것으로서의 확실한 차이가 두드러지나, 본질적인 내용 면으로는 같으니 즉 나 역시 그리스도를 의식 않고 독자 행동을 취할 때 여자처럼 범죄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아담이 남자와 여자로 있을 당시 육체로 둘이 하나되어 서로 상대를 의식하고 있었듯이 현재 우리 각자는 영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음만 다르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은 똑같으니 상대를 서로 의식함이다. 주님께서 나를 "의식하심"이야 물론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항상 문제는 내가 주님을 의식하는가 여부에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내 앞에 계시는 주님을"[행 2:25] 육체로 계시는 것과 같이 의식함이 마땅한 것은 다만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뿐이지 당시 아담과 여자가 에덴낙원에서 지내던 것과 똑같은 위치임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에덴낙원에서의 남자와 여자로 아담이 있던 것을 예로 드는 것은 당시 범죄하기 전의 아름다웠던 둘의 관계를 강조함이요, 그 후의 이 자연계에 있었던 때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 때는 이미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던 불행한 상태였으므로 우리의 본이 되기에 부적합한 까닭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범죄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현재의 구원 받은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에 이는 당연하다.

때문에 현재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갈 2:20]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20]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함이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主)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것이다. 왜 감사하느냐 하면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처음 창조 때부터 정해진 '정상적인 생명의 법질서' 따르기 그리고 지키기로서 아담의 범죄 이전과 같은 완전한 상태로 원상 복구가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우리 인간은 정상으로 복구되어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된다[고전 10:31] 하였고,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는"[벧전 4:11] 것이니, "하나님이 힘을 공급하시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라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행하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각각 은사(恩賜, gift, 성령의 선물로서 한 몸 구조에서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가리킴)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steward] 같이 서로 봉사하라"[:10] 함이다.

다시 요약하면 죄를 짓지 않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상과 같이 에덴낙원에서 여자 그리고 남자가 저지른 대로 하지 않는 데에 있다. 우리 각자의 경우 항상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을 의식하여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있으니, 이는 다름아니라 나와 그리스도와의 불가분성을 인식하여 주님을 항상 의식함으로써 주님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는 사랑의 의지(意志)가 요체(要諦)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좋아서 내 스스로 하는 것이므로 완전한 자유인의 위치에 있어 조금도 이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먹고 마실 때 이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먹고 마시는 것도 나의 생존을 위한 책무[책임과 의무] 이행이기는 하나 이것을 그렇게 책임이다, 의무다 하고 이를 의식하면서 먹고 마시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무', '책임' 이전에 '욕구 충족' 즉 '쾌락' 자체인 것이니 생명에 관한 일이 모두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3/요 14:6]. 생명은 자유인으로서의 사랑이 그 특징이다. 사랑 없는 생명은 죽음과 같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다. 때문에 인간이나 영물 등 인격적 피조물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이다. 고로 말에나 일에나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에 대하여 만일 일종의 강제성을 느끼고 그것을 속박으로 여기게 될 때는 문제가 보통으로 크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구원의 초입(初入) 에도 들어오지 못한 상태로 진단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결코 사랑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는 것,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라 삼가 행하는 것, 항상 기뻐하는 것, 범사[매사]에 감사하는 것,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즉각 따르기를 힘쓰는 것,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살전 5:14-22] 등 성경에서 경고하고 강조하고 있는 바를 버겁게 생각하고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여길 경우, 내가 과연 믿음에 있는지 정히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할"[고후 13:5] 때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 5:18] 했으니, "누구든지 "주님, 주님" 하며 부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 하심과 같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음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을 바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먹고 마시는 일 곧 양식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요 20:21,22/4:34].

왜냐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마 18:3/막 10:15]. "어린 아이"의 유일한 특징은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점에 있음이다. 어린 아이를 관찰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점 명심하여 유념할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엄마와 아기 관계이므로 아기로서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무슨 능력이 있기에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겠지만, 아기는 엄마 없이는 못살아 엄마가 잠시라도 자리를 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지는 것도 그렇지만, 엄마 시키는 대로 할 때도 무조건 즉각 순종이지 "요 정도로만 순종해도 될 것이다, 이런 점은 엄마가 눈감아 주겠지" 하는 등등으로 계산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아이가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아이의 경계를 벗어나 성인(成人)의 문턱에 와 있는 상태다. 악령 사단의 범죄도 첫 사람 아담의 범죄도 이런 식이 됨으로써 첫 범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식의 마음으로는 성경에 엄중히 경고하신 것처럼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살전 5:23] 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측면으로서, 마땅히 그 대칭적인 면을 수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무엇이든 일방적인 것은 없다. 그 대칭적인 역할은 내게 있으니 내 스스로 거룩하게 되려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의 의지에 있고 상호 작용에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랑이 상호 작용이지 일방 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 모든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가리킴이니 이 둘이 하나됨의 관계 그리고 내가 마땅히 이 위치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님께서는 아버지와의 하나 관계에서 충분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하심과 같고, 바로 이런 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10]이라 말씀하심과 같은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요 14:20/15:5] 상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5:19] 하신 대로 우리고 바로 그러하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즉 우리를 지으신 그 뜻을 따라 행하지 않음으로써 그 결과로 생명 아닌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는 모든 불합리한 행동을 말함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즉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마 7:21] 위해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 필수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룬다 함이 더 적절할 것이다. 두렵고 떨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의식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범죄가 이루어지고 죽음이 결정 나 버리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가 그 좋은 예가 아니었던가. 아담이 그렇게 죽음의 선악과를 먹게 될 줄 평소 같으면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현실로 나타나 버리지 않았는가.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 것"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 6:54-57] 하신 말씀은, 단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심으로써 친히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그 뜻도 포함하여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의 특성이 과연 무엇인가 그 실상을 밝혀 주심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친히 생명이 되심을[요 1:4/5:26/11:25/요일 1:2/5:12/골 3:4] 나타내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생명이 한 인격체(人格體)가 되시어 그리스도로 계시는데 내가 그리스도를 떠나 어디에 있을 것이며 하나가 되어 둘이 함께 생활하지 않고서 어찌 하랴. 단순히 의인화(擬人化, 人格化)가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심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이신 것이다.

즉 인간이든 영물이든 바로 이 진실을 똑바로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냥 살아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니 멀쩡하게 있다가 아담이 죽은 자가 되고 거룩한 천사로 있더니 졸지에 악령 사단이 된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에덴낙원에서 여자 혹은 남자가 그러했듯이, 그들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로 그런 의미가 되어 계시는 것이다.

그 참된 양식을 "내 살이라" 하시고 그 참된 음료를 "내 피라"고 하신 것은 물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롬 14:15/고후 5:14]의 의미이시다. 떡을 떼실 때 "이것이 내 몸이다"[마 26:26/막 14:22] 하셨고 잔을 나누실 때 "이것은 죄 용서함 받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막 14:24]라 하심과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 되시고 음료가 되시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히 그러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뜻으로 당시 제자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요 6:35]이라 하셨고,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57]이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라고 우리의 구원을 분명히 정의(定義)해 주신 것이다[요 20:21,22]. 성령 받음이 우리의 구원 즉 그리스도와 하나됨인데, 이 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이다[:21].

말씀과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은 한 때만 아니고 때마다 취하는 동작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우리 육체에 제일 가는 낙이다. 삶의 쾌락을 향유함이다. 버겁다고 여기거나 억지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병들어 입맛이 싹 가신 상태에서나 병 낫고자 하는 일편단심으로 억지로라도 먹고 마시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그 경우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 상태에서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건강 상태다.

이런 정상 상태에서는 당연히 먹고 마시는 것이 낙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으려 하고[왜냐면 생명의 희열 그 자체이므로] 무엇이든지 기도로써 여쭈어 오직 그 뜻대로 행하려 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변치 않는 마음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의식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비정상 상태에 있거나 그럴 위험이 직면해 있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진단하면[고후 13:5] 정확하다.

이런 정상 상태에 있으면 죄를 지으라고 해도 지을 수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런 정상 위치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강조해온 대로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니 항상 우리의 자유 선택에 의한 의지력이 작동되는 상태에서다. 그래서 '자유' '의지'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발판 또는 토대 위에서의 우리의 자유 의지가 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배우요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대 또는 배경을 이룬 모든 장치다.

정상대로 관객을 받아들이는 극장이 되려면 그 두 가지는 항상 불가분으로 겸비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완전히 일방적인 의미로 곡해하여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한"[:66] 것은, 일방적인 편견에 불과한 자기 고집대로 나가려는 교만의 정체(正體)일 수밖에 없다. "저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다"[:45] 한 대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45]마다 자기의 죽은 자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라 그런 오만한 마음이 깃들 구석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만이 다시 말해 듣고 배운 이들만이[왜냐면 하나님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그 가르치심이 개방되어 있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3:16]이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면 이 말씀을 하실 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4] 하셨기 때문이다.

즉 당시 모세가 인도해 가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죽음의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모세가 만들어 장대 높이 세워 둔 놋으로 만든 그 뱀의 형상을 보게 된 즉시 그 물린 상처가 나았기 때문이다[민 21:9]. 독사에게 물리지 않은 이들은 그렇게 만들어 놓은 놋 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었으니 왜냐면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요행히 그렇게 물리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모든 인류가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 처지에서, 이 죽음의 실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해당되지를 않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다.

어떤 이는 성령 받아 모시면[성령의 세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강력히 보호함을 받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핵심은 나의 사랑의 자유 의지에 따르는 선택이다. 이로 인하여 나의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어 결정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할 때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위하신다. 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시지 않는다기보다 위하실 수가 없다. 비록 원하셔도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렇게 하실 수가 없다. 

앞서 말한 바 사랑의 상호 작용이다.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할 것이요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이라"[딤후 2:12/마 10:32,33/눅 12:8,9]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왜냐면 우리가 구원된 것이 '둘이 하나 됨'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둘이 하나 됨에는 반드시 쌍방[둘]이 동시에 함께 움직이는 데에 그 특성이 있음이다. 그래서 '하나'라 한다. 둘이면 아무리 함께 있어도 둘로서의 복수(複數)로 존재해야 마땅하지만 하나로서 즉 단수(單數)로 존재할 때는 바로 이런 이치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와서도 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는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는 한 나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보호막 역시 결단코 작동되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의 너무나 망극하신 은혜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지라도 그래서 용서하시고 참으시고 인내로 나의 자발적인 순종을 기다리시더라도 그 몇몇 경우로 한정되지 영구적으로 그렇게 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광야 교회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때 열 번 정도까지는 참아 주셨으나 어느 한계점에 와서는 더 다시는 용서하시지 않고 60만명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일제히 광야 길 도중에서 망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멸망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아담은 단 한번 그렇게 범죄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범죄 직후 급전직하로 죽음에 굴러 떨어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생명의 법칙에서 반드시 함께 움직여야 하는 동시성을 무시하고 어느 일방적인 위함만 있으면 그 하나로서의 조직은 당장 와해 붕괴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를 직감하고 곧장 회개해야지 이를 지체하면 비극적 파탄은 필지이다. 사단은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자신을 가지고 시험하는 일에 임하는 것이요 그래서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다. 구원 받음도 한 순간이지만[그리스도의 이미 이루신 일을 '보고 믿음'으로 되는 일이기에] 멸망도 한 순간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가 그러한 예다[행 5:1]. 그래서 이 비극적인 결말을 대해서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다".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그런 점을 하나님은 명시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에 왕도(王道)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과거의 자세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거짓말한 그 한 행동으로 즉결 심판에 이르고 다시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했다는 데에서 당시 초대 교회는 크게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역시 "너희가 나그네로[세상에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했듯이, 구원 받은 기쁨과[빌 4:4] 동시에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는[2:12]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정(正)자세다.

대체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만 쏠리는 경향이 있는데 형평과 균형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심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것과 같다. 믿음 좋은 바울도 교만해질 위험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그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하였다[고후 12:7]. 이 경우 앞서 지적한 대로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편단심을 그대로 지속시켰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육체의 가시와 같은 은혜의 조처가 취해질 수 없음은 명약관화다.

왜냐면 일방적으로 그런 은혜의 조처가 취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니, 반드시 나의 의사와 의지가 따라 주어 작동되도록 되어 있는[또는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둘이 하나됨'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에 왕도 없음'을 가리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reward, 결과]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2-14] 하였다.

그래서 우승하기 위해 달려가는 경주장의 선수처럼 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다[고전 9:23-10:5/빌 3:7-19]. 막상 달려가는 선수는 다른 데에 한눈 팔지도 않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고 그 마음은 오직 외곬으로 우승만 생각하지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다. 바로 이런 점을 바울은 지적한 것이다. 물론 한번 마음 잘못 먹는 결과에 금방 하늘로부터 철퇴가 내려지는 법은 없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한다"[잠 29:1] 함과 같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는 것이 그런 뜻이기도 하니 즉 자주 책망하시는 것이나 그 책망을 소홀히 생각하고 심각하게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번 경고를 하셨지만 그들 각자 마음에 똑같이 이를 가볍게 생각하여 "등한히 여긴"[히 2:3] 결과다. 모세 인도하에 가나안으로 가던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번번이 책망하시며 경고하시는 등 오래 참으셨으나 하나님의 인내도 한도가 있어 결국 믿지 않는 나머지[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만을 제외한] 60만명의 장정들이 중도에서 멸망당한 것과 같다[고전 10:5].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바로 인식하여 그리스도를 한사코 떠나려 하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를 의식하여 그 지시에 따라 행하기로 작정함으로써, 과거 여자가 에덴낙원에서와 같이 하지 않고 아담이 여자의 말만 듣고 선뜻 응해 버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경우, 아무리 사단이 불시에 나타나 선악과를 먹으라 해도 그리고 선악과를 손에 쥐고 씹으면서 먹으라고 유인해도 여유를 두어 전후를 살펴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언행에서도 그렇고nt-size:15.0pt;">[골 3:17] "먹고 마시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도[고전 10:31] 그렇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의 성격이 우리에게는 전장(戰場)이요 전시(戰時)다. 이 경우 방심(放心)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왜냐면 적(敵)은 항상 이러한 방심을 노리기 때문이다[벧전 5:8]. 일대일의 백병전에서나 집단 대 집단간의 총력전에서나 어느 편이든 방심하면 치명적이 되고 그 전투는 끝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위 구원 받았다고 하여 태평무사로 일관하는 개신교의 교리는 이와 같은 절절하고도 심각한 성경의 경고를 정면으로 부정(否定)하는 관계로 진리에 머물 수가 없다.

진리 면에서는 세상 종교와 똑같은 사이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영생을 받고 안받는 '상태'를 말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한 영"[고전 6:17] 됨의 '구조'를 말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때문에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본보기가 되는 초대교회는 성령의 위로만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the fear of the Lord] 두 레일 위로 충실히 달리는 열차였다[행 9:31]. 오늘날은 어느 외가닥 레일 위에 박혀 있어 꼼짝도 못하는 비극적 상황의 실상에 놓여 있음을 가장 먼저 자각하는 것부터가 시급하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시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함"[빌 1:20,21]이라 한 대로, 위와 같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사실대로 내 스스로 나의 삶에 적용시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리요. 말 그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어야 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어야 함이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고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20].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약 1:18] 한 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하도록"[요 3:3] 하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창조하시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6:1]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일함"이다. 곧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심과 같다. 우리가 전달할 하나님의 말씀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행 17:30].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시게 되어 있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이다[:30]. 회개하라 하시는 것은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고"[행 3:26,19/2:38]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기 시작라는 것이다[롬 2:7-10].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의 "선악" 개념은 피상적인 것이라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직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자기 부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골 3:3] 자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해내려는 일념뿐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며"[골 1:24] 사람 건져내어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음이다[막 1:17].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고[빌 3:10,11] 영원히 죽지 않게 됨이니 이 곧 "우리 몸의 구속 즉 하나님의 양자(養子) 됨"[롬 8:23]이다. 그러므로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시대[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첫 사람 아담의 시대]가 아니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시대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속박당하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을 말한다.

다시 살아나되 진정한 삶의 낙을 누리는 생명의 부활이냐 아니면 그와 반대로 고난의 영원한 연속인[계 14:11] 심판의 부활이냐 하는 것으로써[요 5:29] 양 갈래로 가름되어져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이제는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부인으로써 따르는"[눅 9:23] 이들은 생명의 부활로,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은 심판의 부활로 분류된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 없는 생명 혹은 삶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이 세상이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이 이런 모양새로 당분간 머물러 있는 것은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 모두 구원 받도록 하는 그 의미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패역한 세대[crooked, perverse generation]"라 하는 것이니 따라서 곧 멸망하여 없어질 것으로 낙인 찍혀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는 것이니 곧 "회개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난다. 회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악을 행하며 누리는 영생은 있을 수 없음과 같다. 반드시 선을 행하는 즉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에서만 삶의 향락이 있음이다. 때문에 바울이 전도할 때, 회개하여 악을 버리라는 말로써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주 즉 재판장으로 그리스도를 먼저 소개하였고,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하는 길을 틔어 주셨다는 말로 하나님을 구원자로서 먼저 소개하지 않았다.

회개하면 심판을 면하게 되므로 자연적으로 구원자로서의 모습이 드러나지시는 것이다. 왜냐면 회개한다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과 나와의 하나되심을 믿음으로 영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비결이 서로 사랑함에 있으므로 그리고 모든 사랑은 하나됨의 특성을 지니는 것이니 '한 몸' 체제로서의 자기 부인이 핵심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랑의 특성을 외면한 채 말로만 사랑, 자비, 인애를 아무리 외쳐 보아야 허공에 뜨는 메아리일 뿐이다.

한 몸에서는 필연, 필수적으로 머리의 존재가 부각되고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위치가 당연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머리로서의 하나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그 어떤 세상 종교도 구원의 진리일 수가 없다. 머리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한 몸 공동체로서의 삶의 정체를 파악한다면, "자기 부인"을 강조하지 않는 그 어떤 구원론(救援論)도 사이비로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임이 절로 판명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 종교의 교리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들어가는 가장 기본되는 요건은 회개이니 돌이켜 악함을 버림이다[행 3:26]. 영생만 공짜로 덜렁 안겨 주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신을 벗어야 하는 것과 같다. 영생을 방이라 하면 회개는 신을 벗는 일이다. 신을 벗지 않으면 잔치 자리에 잔치 음식 먹을 욕심만 있고 예복을 입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 무례한 사람은 결국 쫓겨나게 되어 있다[마 22:11-13].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이 "악을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낙인이 찍혀져 결국 영생에는 들어가지 못함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말씀으로써 분명히 경고하셨다[눅 13:27/마 7:23].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위하지 않음으로써도 넉넉히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이다[마 25:45].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는 요건을 가리켜 "참고 선을 행하는 자"[롬 2:7,10]라 하였고,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을 "악을 행하고 자기중심[selfishness, 우리말 "당을 짓는 것"(:8)은 오역]으로 나가는"[:8,9] 허물로써 규정한 것이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미달이 자기중심 곧 자기 부인을 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식 수준이지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해하기에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와 같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능력 부여이다.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서 그 능력이 되심이다. 고로 회개하여 순종하기로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악을 행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시종일관하여 이 약속대로 행하여 "참고 선을 행하는"[:7,10] 이들에게 영생 곧 "몸의 구속, 양자됨"[8:23]이 하나님의 약속대로[히 10:36]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생은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약속이다[요일 2:25/약 1:12/2:5].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이들이다[롬 14:7-9/고후 5:15]. 다시 말해 이것이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로 식별되는 방법인 것이다[요 13:35].

사랑은 자기 부인이 없으면 거짓이요 가식이다. 즉 자기 부인['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34)-십자가 죽으심으로 자신을 완전히 내게 주신 그대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의 믿음의 형제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웃에게 도무지 악을 행하지 않으니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 곧 성인(聖人, saint)이다. 성경이 이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그대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 한 그대로다.

고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철저히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 이는 성경의 표현이니 놀랄 것이 아니다. 놀란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성경에 무식하고 사단에게 농락당해 왔는지 그 실상을 이제야 깨닫고 놀라게 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이들 즉 사랑이 없는 이들은 나의 형제가 아닌 것이다.

사랑이 있고 없음은 자기부인을 하느냐 여부로써 판단할 수 있음이다[롬 14:7-9/고후 5:15]. 아무리 사랑을 외쳐도 자기 부인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데레사 수녀는 이 자기 부인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심각한 혼란과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에서 즉 하나님 친히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시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충실히 주인 의식으로 이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모든 일에 그를 인정하라[to acknowledge],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실[to show the right way] 것이다"[잠 3:5,6] 한 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살전 5:17] 것이 기본이다. 그렇게 기도하라 한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된’ 삶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기쁨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됨이니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이 세상 있는 것이 살기 위함이 아니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함이니 곧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달하기 위함이다[행 1:8].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반드시 구하면서 그 인도를 따라 일하는 것이다. 목적이 다름에 따라 희비(喜悲)도 달라진다.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 상태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도 못하여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마 7:21] 세상 염려, 재리의 유혹["돈, 돈" 하며], 기타 쾌락[삶의 낙을 추구하는 혹은 즐기는-한 때이든 연속적이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해 세상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눅 8:14/막 4:19/마 13:22].

그러나 사람 살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목적이 되어 있으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거칠 것이 없는 일사천리가 된다. 왜냐면 "죽어도 유익"[빌 1:21]이요 아무리 고난을 받아도 그 모든 것은 내게 영광으로 작용될 것뿐이요[고후 4:17] 나의 육체적인 고난을 받아 하나님 사업이 지체되는 것 같아도 결코 지체되지 않고 방해 받지 않는다는 신념에 차 있으니 그야말로 천하가 태평이다[딤후 1:9]. 이와 같이 가히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이기는 자로서의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것이다">[요 14:27/15:11/16:33 ].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나를 위한 영원한 영광을 쌓게 된다고 이를 나 자신을 위함 곧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다는 말씀과 듯이 같다. 즉 한 몸으로서의 전체 영광과 즐거움이다. 항상 '나'라고 하면 '우리'와 연계되어 있으니, 오해하지 말 일이다.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기 중심 일색이므로 '나'는 '나'일 뿐 '우리'는 아닌 것이다.

정글과 같은 이 세상의 나그네 길

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잡풀과 수목이 무성한 정글지대와 같은 이 세상이므로 이런 데에서는 안내자가 필수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께 기도함으로 안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시 73:24-"to lead me with thy counsel"]. 그리고 이것은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렇게 함이 마땅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간섭하고 강제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내가 시장하면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찾는 것과 같음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남자와 상의하지 않고 독단하여 행동한 것이라든가 아담이 하나님과 먼저 상의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두고두고 그들에게는 후회가 되었고 우리에게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삶의 비결은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터득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독단함으로써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불상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하고 닦달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고전 9:27]의 한가지 의미이기도 하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고 이병철 회장은 여덟번째로 질문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거니와, 성경의 큰 강점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한다는 데에 있음을 역시 지적했다. 이것이 성경만 아니라 모든 진실된 기록이나 구변(口辯)의 특징이다. 성경은 여러 저자가 쓴 기록을 한데 모은 것으로서 엉성하다면 이렇게까지 엉성한 것도 없다.

신약성경을 예로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행적을 알리기 위해 중요한 것만 추려 수록한 간략한 일대기로서 네 가지가 있어 그 저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정도이고 나머지는 바울,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등 각양 각색의 사람들의 편지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 편지라도 다 일일이 챙겨 모은 것도 아니고 그 중에는 빠진 것도 있다. 그럼에도 일관성 있는 내용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워낙 구원의 말씀 곧 진리가 간명한 데에도 있지만, 세밀한 부분에 가서는 당연히 차이가 있기도 하나[그리스도의 일대기인 네 복음서에서 보듯이] 그 외에는 놀라운[놀랍기보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고 해야] 일관성으로 시종(始終)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감수하시고 검열하신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견해나 오류나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약간의 차이 또는 어긋난 기술은 오히려 이런 진실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니, 만일 네 복음서[그리스도의 일대기]가 하나도 틀림없이 일치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서로 꾸며서 지어내었다고 말하기 십상일 것이므로 오히려 그런 말을 하게 하는 구실만 될 것뿐이다.

구약성경도 역시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서 역사서(歷史書), 율법(律法)서, 예언, 시가(詩歌) 등으로 한데 모여져 있어도 신약 성경과 같은 완벽한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에는 공통이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과의 상호간의 일치 조화는 당연한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거듭 역설하지만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아주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여러 말이 필요 없는 터이지만, 그러나 그 진실성을 위하여 이런 여러 증거들이 그 내용 중에 산재(散在)되어 있어 한 목소리 곧 하나님의 음성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이 역시 생각해보면 범상한 일이 아니다.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것은, 거짓말로 인간이 꾸며낸 것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하고 있고, 진실이 아니고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을 말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신구약(新舊約)을 통틀어 처처에 널려져 있기 때문이다. 양심이 인간 내부에 장치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다면 기록되어 문자화한 하나님의 말씀임에 이의의 여지가 없다.

성경이 최초로 번역되어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한 유학자(儒學者)가 창세기를 읽고 있던 중 아브라함의 조카 의인(義人) 롯이 소돔 고모라 두 도시의 멸망을 피하여 산 속에 있을 때 인간들이 멸종하리라는 두려움에 떨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권하여 인사불성의 곤드레만드레로 만든 다음 철딱서니 없이 차례로 들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대(代)를 잇는다는 기록이 그대로 여과 없이 나오는 것을 읽게 된다.

소돔 고모라의 심각한 타락상이 이 두 딸에게까지 영향이 미쳐 죄의식 없이 그런 정신적 황폐화를 드러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 예의 그 학자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공맹(孔孟)의 도(道)를 말하는 책 같으면 교육 차원에서 어찌 하든 좋은 말, 좋은 뜻만 나타내기 위해 이 경우 이런 추잡한 내용은 반드시 손질하여 빼어 버리거나 했을 터인데 의인(義人)이라 해놓고는 이런 창피한 일까지 있는 그대로 발겨놓고 있으니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여 대대로 밝히고 있는 성경이 다윗의 행상(行狀, 한 짓)을 일부러 까발려놓듯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예다. 다윗왕이 성(城) 위에서 어정거리던 중 왕궁 아래 쪽으로 눈이 가기에 보니, 전쟁 중 최전선에 나가 있는 충신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를 훔쳐보고는 욕심이 발동하여 불러다가 관계를 했다.

일을 저질러놓은 뒤에는 뒷일이 마음에 켕겨 전투 중의 우리야를 일부러 불러다가 집에 들어가 쉬게 하는 야비한 술책까지 부렸다. 이런 것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야는 올바른 사람이라 "동료는 전투 중인데 나 혼자만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말하고 끝내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공동체 의식이 뚜렷했던 사람 우리야는 이 올바른 말과 행동을 인하여 도리어 참사를 당한다.

왜냐면 다윗이 자기의 술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기어이 우리야를 없애고자 최전선으로 밀지(密旨)를 보내 가장 위험한 전투 지역에다 우리야를 배치시켜 죽게 만들라고 사령관에게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야는 자기 때문에 함께 희생당한 병졸들과 더불어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의 비열하고 사악한 짓 그대로를 성경[구약]은 소상하게 밝혀두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 와서도 그리스도의 족보를 말할 때 다윗을 소개하면서 마치 일부러 이 사실을 폭로나 하듯이 "이새[다윗의 부친]는 다윗왕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마 1:6]고 대서특필하듯이 적어놓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아내가 아닌 남의 아내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마치 적대 관계에 있는 자가 일부러 까발려 놓기나 하는 것처럼 인정사정도 없이 드러내고 있다. 과연 이런 데에 거짓이나 속임수 혹은 인간의 손질이 가해져 지어내고 꾸며대고 하는 등의 수작이 감행되어질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다윗왕은 이 범죄로 인해 보응을 받는다. 그러나 한 생명을 억울하게 죽인 죄가 어찌 그로써 제대로 보응된다 할 수 있으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크고 작은 죄를 따지지 않고 일괄적으로 죽음이요 죽은 자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구원 얻어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의 마땅한 삶의 도리를 따라 사는 데에만 의미가 있다. 오늘날 독재자들이 자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기 선조들을 각종 지어낸 거짓말로 미화(美化)하기를 서슴지 않는데, 하물며 만인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여 그 정통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런 다윗의 모든 창피스럽고 수치스러운 소행을 낱낱이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낼 정도라면 다른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일체의 지어낸 거짓이 끼어 들 틈이 없다. 말을 꾸며 거짓말을 하기 전에, 이런 대목부터 먼저 손질했을 것이다.

다윗 자신도 그 죄 값으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았으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살인죄를 용납하셨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놓고 자기가 행한 짓을 인한 불이익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했을 때, 의인(義人) 아벨을 죽인 그 살인자의 소청을 그대로 들어 주셨음과 같다.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으니, 앞에서 "천인공노"라고도 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이와 같이 할 길 없는 죄인이었던 관계로 가인도 다윗도 "허물하시지 않았지만"[행 17:30-여기서는, 그 죄 값으로 인한 멸망을 말한다]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철저히 죄는 그 지은 대로 반드시 여지 없이 다스리게 되어 있다는 명백한 차이가 그 ‘이유’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율법 아래에 있던 구약시대에는, 각종 죄[그 대표적인 것으로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까지 죽게 한 것을 들 수 있어]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고의성이 없는 한 엄격히 심판[멸망에 처하시는]으로 다스리시지 않음으로써 "허물하시지" 않은 것이다.

고의성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은 연약"[롬 8:3]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이 "육신"[7:5-8:13] 곧 "죄의 몸"[6:6]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파괴되고 와해된 이상 모든 것이 일변(一變)한 것이다. 더 다시는 그런 죄가 용납되지 않는다[요일 2:1/3:6-10/5:18/고전 15:34/벧전 4:1]. 그러므로 이러한 구차한 삶을 살고자 하여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에 매여 종 노릇하는"[히 2:15] 것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살고자 함'을 뜻한다. 억지로 살려고 하는 데에서 동물적 본능 근성 곧 자기중심이 되는 것이다. 무리로 억지로 한다는 것은, 원래 생명은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만 즉 머리는 오직 몸을 위하고 몸은 자기를 위하는 머리를 위해 사는 데에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확대, 확장, 확충시켜 풍성하게 사는 데에 있어, 그렇게 살아야 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을 파괴할 뿐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빼앗는 것임은 에덴낙원에서의 사단의 행위[아담을 죽게 만든] 그리고 세상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이런 자기중심적인 세상의 생리(生理)에서는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고 불가한 것으로서 영원히 낙인 찍힌 것이다. 때문에 사람이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 한 것이다[고전 7:1-40].

이 자연계에 속한 동물적 삶으로써 남녀 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 다음 가는 삶의 낙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형제가 실족하는 일이 되면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고전 8:13] 것이 옳다 했으니[] 그러면 혼자 살고 고기도 먹는 맛을 누리지 못하며 무슨 사람 삶의 낙을 향유한다는 말인가. 세상을 살 만해도 일부러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살 만한 곳이 아니므로 즉 그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여 그리 하는 것이니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인하여 멸망에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마 25:45/요일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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