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15
9. ‘21 세기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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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명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전체 인류를
위하심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그 중의 하나가 ‘나[我]’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셨다[갈 2:20].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나’라는 것이 모이어 이룬 것이
'우리'다. 전체 인류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고후 5:14].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따라서 그렇게 각자를 사랑하시어 위해 죽으신 사실을
각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 당연하고 또 사람의 도리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구원 얻는 실상을 가리켜 선지자[prophet]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밝히고 있다. 즉 ①가장 먼저 하나님이 살아 계심 즉 그 영광을 뵙게 된다[사 6:1-4]. ②다음에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연히 이는 회개로 이어진다[:5]. "화로구나,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不淨)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면서 만군(萬軍, 萬有)의 주(主, 주인, 소유주) 하나님이신 왕(王)을 뵈었음이다" 하고 내 심령 깊이 부르짖게 된다[눅 5:8].
앞에서 언급한 빌립보 간수[jailor]와 같은 경우다. 이렇게 회개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은 임하시는 것이다. 즉 죄 용서가 되면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게 된다[사 6:6,7]. 죄를 지어 죽게 된 것을 알고서 죄를 지을 사람은 없다. 왜냐면 그것은 곧바로 자살행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③이와 동시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제가 여기 대령해 있으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8]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뵙는 순간 본성적으로 그런 말부터 먼저 나왔음과 같다. "주님,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무엇을 분부하시겠습니까]"[행 22:10] 한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 사실은 구원의 말씀을 전하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 함으로써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한다"[사 6:9,10].
참으로 비극적 현실이 아닌가. 말씀을 전하라고 보내시기는 하되 말씀을 달게 듣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쇠귀에 경 읽기가 된다는 실정을 미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야 오죽 하시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요 1:9-12] 함과 같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 하심과 같다. "너 바로 네가 이 너의 날을 당하여 네 평안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다"[19:42] 하시며 "우시는"[:41]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인생들이여, 하나님의 "우심[weeping]", 이것이 오늘 이 인간 세계의 진상(眞相)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 어느 종교에서 그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초월적 존재가 이 인생들을 위해 하염없이 눈물 지었다고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눈물"은 하나님께서도 친히 어찌하실 수 없는 완전한 무기력 또는 속수무책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도 어찌하실 도리를 찾지 못하시는 것이다. 차이는, 그런 세상 종교는 단지 피조물들이 일으킨 종교요 생각이요 피조물들에게서 났기[인간이든 영물이든] 때문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솔로몬의 판결에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각기 자기 자식이라 다툴 때 "칼을 가지고 오라" 하여 "둘로 쪼개어 나누어 주라" 할 때 진짜 엄마는 울면서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함으로써 아이가 자기 자식임을 증명하였다 함과 같다[왕상 3:26]. 즉 이 모든 인생들을 만드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종교가 제각기 다 자기가 진리라고 하니, 이는 마치 두 여자가 와서 한 여인이 말하기를 "나와 이 여자가 한 집에서 사는데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제가 해산한지 3일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어쩌다 잘못해 그 아들 위에 눕다가 그 아들이 깔려 죽으니 그가 밤중에 일어나 제가 잠든 사이에 저의 아들을 제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 품에 뉘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제 품에 뉘었습니다. 새벽에 제가 저의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제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함과 같다.
그래서 다른 여자는 "아니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이 네 아들이다" 하고 이 여자는 "아니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다" 하고 서로 다투는 양상과 같다[:17-22].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모든 종교가 자기가 진리라고 똑같이 말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이 때 정확하게 판별하는 기준이 바로 이 "우심",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이신 것이다.
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시는 눈물, 통곡이 그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26] 그런 말을 한 것과 같이,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들에 대한 "불붙는 마음"을 주체하실 수 없어 그렇게 거침없는 눈물을 흘리심이다. 그러나 피조물들이 세운 종교는 조물주의 심정과 심경일 수가 없으므로, 인간고를 말하면서도 그냥 맨송맨송한 마른 눈으로 이리저리 하면 열반, 해탈에 이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뿐이요 젖은 눈일 수가 없다.
마침내 솔로몬 왕이 "산 아들을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그가 그 어미다"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부인은 "하나님이라 하면서도 우셨다는 기록을 보고 친근감을 느껴 성경을 믿게 되었다"는 증언을 한 적이 있지만, 그가 느낀 대로의 '인간에 대한 그런 연민' 정도의 눈물이 아니라 친히 자기 목숨을 바쳐 인생들을 살려내시는 일을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는 것을 당신 자신께서도 어찌하실 도리를 찾지 못해 심한 안타까움에서 우심이니 인생들이여, 이 앞에서 명백한 답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엄마 잃은 아이가 그 엄마를 보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은" 느낌이 없는가, 있는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함께 고통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까지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러하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신 것은 너무나 친근함을 느끼기에 이 역시 이해할 수 있다[히 5:7/요 11:35]. 그러나 이 경우의 "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을 읽는 우리로서도 너무나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가.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가 없어' 우시는 것이 바로 위의 내용인 것이다. 실로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아닌가. 이미 이런 눈물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니 너희를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한 바울에게서 확인되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울은 닮은 것이니 즉 그리스도를 "본받은" 결과다. '눈물의 사람'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그대로다[빌 3:18/행 20:31,19/고후 2:4]. 모세의 기도에서도 [그 대목에 눈물이라는 말이 없어 그렇지만] 그 절절한 심경은 이미 대성통곡하는 눈물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 "우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성경에는 일말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의미요, 눈물지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실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 그 둘째의 의미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운명을 영원히 망치는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도 더 이상 어찌하실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흘리시는 눈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우리 스스로만이 좌우하도록 되어 있다는 이 너무나 엄숙하고도 냉엄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실로 두려워하고 떨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랴.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과 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육체다. 피조물은 영물들과 같은 영이든 우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든 일정한 형태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태가 없으시다. 그래서 영이시다. 영물들도 영이지만[히 1:14]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의 영이므로 형태를 지님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정 형태가 없으시므로 이 우주 천하에 충만해 계시는 까닭에, 우리 인간을 상대하시되 전체를 한꺼번에 대하심과 동시에 똑같이 세밀하게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도 대하심이 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신령한 몸이든 아니든 일정 형태를 지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이지만, 하나님은 가능하신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 말하면 육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상대할 때는 일일이 개별적으로 공평하게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은 전체를 한 사람 같이 대하심은 물론이고 마치 우리가 몇몇 사람[또는, 한 사람]에 한해 가장 가까운 사이를 맺는 것과 같이 그렇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가까이 하실 수 있음이다. 이것이 우리 육체와 다른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특성이시다.
이제 사람이 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기는 하나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이 세상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보다, 부모 처자보다 더 가까우신 유일하신 명실상부한 '나의 짝'으로 계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셨다"[갈 2:20]. 이는 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죽은 자"[마 8:22]가 아니라면 나 위해 죽으실 것도 없고 나를 다시 살리실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인생으로서의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세상에 알릴 책무가 있다. 하나님께 배운다는 것이 이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요 6:45]. 모두 이 세상을 사는 곳인 양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산 자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기 부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곧 "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하시는 말씀에 반발하고 그리스도를 떠나 버린 것인데[:66] 사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롬 5:12]. 구원은 이와 같이 '죽은 자'가 '산 자'로 "다시 출생하는"[요 3:3] 것인데, 여전히 이전처럼 이런 죽음을 초래한 장본으로서의 죄 가운데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볼 일이다[롬 6:1-23].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와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성경 처처에서 발견되지만, 로마서의 이 대목[:1-23] 역시 그 선명한 설명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의 죄 지음 즉 "육신대로 사는"[8:13] 것에 대한 합리화를 꾀하여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이들에게는 베드로의 경고처럼 멸망밖에 없다[벧후 3:16].
유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현실이다. 그래서 앞의 사실과는 색다른 의미로 "죽었다"[골 3:3] 함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산 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그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된" "새 생명"[롬 6:4]이 아직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골 3:3] 있기 때문이다. 고로 생명은 아니니 죽음일 수밖에 없다. 그 중간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쾌락, 환락이 아니니 죽음의 고통만이 있음이다. 왜 죽음의 고통이냐 하면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죽음의 영역]에 동참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골 1:24]. 즉 우리 구원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세상에 보내심 받은[4:34] 의미가 되어 있음이니, '죽은 사람' 살리기 위해서는 산 자가 그 죽은 자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필수로서, 이는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살리기[구원해내기] 위한 단 한가지 목적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따라서 이 죽음의 육체 가운데 그대로 당분간 머물러 있는 것이 필연이요 필수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한 몸의 이치로써 우리의 생명이 운영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처럼 직접 죄를 짓지 않아도 오직 이와 같이 하나되는 이치를 따라 거룩한 천사들 역시 우리와 함께 '죽음의 고난' 가운데 있음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롬 8:22].
'죽은 자' 살리는 생명의 일은 생명에 속해 있는 자 즉 '산 자'가 하는 것이지 '죽은 자'가 하는 일은 아니니, 죽은 자에게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죽은 자는 자기 자신부터 먼저 사는 일만이 시급하다. 산 자로서 죽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예가 되시니, 산 자로서 우리 죽은 자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골 3:4]이 되시는 구원의 사업을 이루신 것이다. 죽은 자와 함께 하여 죽은 자의 그 죽음에 동참(同參)함으로써 그 죽은 자를 산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생명의 법칙 즉 '한 몸'으로 하나 됨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그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즉 그 '죽은 자'와 하나 되는 이치로 인하여 그 '죽은 자'를 '산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니 이는 만고불역의 진리다. 지금은 이런 이치를 따라 죽은 자를 산 자로 살리는 때이다. 그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이 일이 끝나자마자 이 세상은 종결되기 때문이다[마 24: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우리가 '죽은 자'로 있었던 것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 있으면서 '죽은 자'로 있는 것과는 같은 '죽음'이기는 하나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와 같은 거룩한 목적을 지니고 세상에 남아 있는 자로서 어찌 죄를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단 한 시인들 품을 수 있으리요 하는 것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셨으니 곧 당신 자신을 내게 몽땅 주신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요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함이다. 이는 나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나 자신을 드려 바치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신을 내게 주시는 선물이라 하시니[요 4:10] 이 때문에 성령을 선물이시라 한다[행 2:38]. 그리고 나도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렸으니 이를 가리켜 나를 그 피[血, 죽으심으로써 흘리신 피] 값으로써 "사셨다[買入-행 20:28]" 함이다. 강제로 나를 사시는 것이 아니니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기꺼이 드려야 ‘그 피로써 나를 사들이시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자진해서 나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나 역시 자진해서 나를 드림이 마땅하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억지라든가 마지못해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사시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심으로 영원한 성령의 선물이 되어 계시니까 당연히 그러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본을 보여 주셨고 나는 그 본을 따르는 관계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됨’ 즉 삼위일체 원리에서의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다.
물론 이를 강제하시지 않는다. 나를 강제로 사들이시는 일도 없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니, 나를 사들여 자기 소유로 삼으심은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경우에만 한한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 얻음이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않음이요 따라서 구원에서 제외된다. 순수하게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에 달렸다. 나는 이를 거절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게 주시는 법이 없다. 이 점을 깊이 음미할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 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변함없이 나에게 자신을 주시는 법이 없다. 이미 이 사실을 밝히셨으니, 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씩 씻기기 시작하셨는데, 스승이 제자 즉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여 베드로가 "절대로 제 발은 씻기시지 못합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나와 너는 상관이 없다" 하신 것이다[요 13:8].
다시 말해 베드로의 거절은 자기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가르치심, 명령, 계명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니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 선생[어른이니 곧 종에 대한 주인]으로서 이렇게 하였으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였다"[:12-15] 하셨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려면 다시 말해 구원 받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그대로 따라야 즉 복종해야 함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의 요체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주셨으면[이는 방금 말한 사실에서 보듯이 사랑의 원리에서 ‘주인’으로서 ‘종’에게 종 노릇하심이다] 나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되어 나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 절대 복종함이 마땅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기본이다. 따라서 이제는 완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다[갈 2:20].
따라서 구원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를 위해 살거나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모두 그리스도의 종[그리스도의 소유(所有)]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죽도록 되어 있음이다[롬 14:7-9]. 우리 구원 또는 성령의 선물 받아 모심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다"[요 20:21,22] 하는 이유가 계속 강조하지만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순서를 따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영생만을 욕심 내어, 내가 그리스도를 "주님[主人, 所有主]"이라 '부르는' 데에만 그치고 나 자신을 바친 일도 없고 복종하는 일도 없고 따라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무릇 사랑할 때는 그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요구를 들어 주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복종"의 의미다] 그래서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중심으로 언행(言行) 심사(心思) 일체를 하고는, 말로는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소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실상이 되어 있다.
이런 내용으로 즉 인간이 가르치는 것으로써 교리를 삼아 가르치니[막 7:7] 오직 세상 종교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사이비(似而非)일 수밖에 없다. 바로 말해서 진리에 비해 "이단(異端)"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으로 구원되어 있는 사람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 되는 생명과 사랑의 법칙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위하시는 본을 따라 나도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지 절대로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누차 강조하신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결코 내 제자가 될 수 없고 나를 따를 수 없다" 하심이 이 뜻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둘이 하나 되어 있어 한 뭉치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각자가 자기를 위하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만 그렇게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상식 수준의 판단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은 불변이시나 나 역시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야만 하는 것이니, '일방적인 위함'은 존재하지 않고 짝사랑은 사랑이 아님과 같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다"[딤후 2:12/마 10:32,33/눅 12:8,9] 하심이 바로 이 원리를 말씀하심인데, 마치 그리스도께서도 이기주의로 나가는 인생들처럼 자기를 사랑하면 사랑하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식으로 착각을 하니 구원의 진리와는 항상 남남일 수밖에 없다.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위한 십자가 고난 받으심으로 "확증"[롬 5:8]되어 있는 터이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무릇 모든 판단과 해석은 일정 기준을 정해놓고 착실히 순서를 따라 밟아 나가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이러한 확고하신 사랑’이 바로 그런 기준의 하나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기준이 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는 기준이 있다. 이런 기준부터 세워놓고 무엇이든 시작할 일이다. 이 기준이 확고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뒤흔들리게 된다. 고로 이들 기준이 과연 정확무오한지 그것부터 확정할 일이다. 이회장이 "창조주가 과연 존재하느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등을 먼저 질문한 것이 그 때문이다.
나 혼자라면 당연히 나는 나 자신을 위하게 되어 있고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일진대 마땅히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지 않다. 또 내가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되는 이치가 아니라면 구원되는 것부터가 물론 불가능하다. 이를 부인하면 자기의 구원 받은 것 역시 부인함이니 인생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는 까닭이다. 영원히 살려거든 자기를 위해서는 영원히 살지 않을 일이다. 이것이 싫으면, 그러면 구원은 더 다시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모든 인생이 "육신"[롬 7:5-8:13]이라는 마물(魔物)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황임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자기중심을 가리킴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것이 모든 악의 종결점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한다는 데에 진퇴양난의 딜레마가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어찌해 보려는 것 자체가 한갓 자기중심의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또 다른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모든 불행의 씨앗은 자기 집착에 있음을 말한다. 비단 불교만 아니라 누구나 생각하는 이라면 쉽게 이르는 결론이다. 인간고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 집착을 탈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 집착이니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함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고 고양이 목에 방울 달자는 쥐들의 토론일 뿐이다. 때문에 창조주의 새 창조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출생함"[요 3:3]이다. 이 길밖에 없는 까닭이다. 도대체 여기에 어떤 하자라도 있는가.
때문에 여기서 분명히 하는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를 믿기 전 즉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일체의 선행은 선(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선을 행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선이라 함은 자기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것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악의 본질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에 있음이다. 선은 그 대칭적인 의미로 자기 부인이다.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체의 선행이 위선(僞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자기를 위함이 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애당초 처음부터 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없도록 창조부터[새로운-고전 5:17] 먼저 하시고 "다시 나게"[요 3:3] 하는 일부터 먼저 하심이 우리 구원이다. 일단 '산 자'로 만드신[창조하신] 다음에 그리고 모든 욕심을 버리도록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 곧 만유의 상속자부터 만들어 놓으신 후에, 과연 자기를 위하지 않고 즉 자기 부인을 하여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모든 노력과 힘씀과 애씀과 수고를 기울이느냐 즉 산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느냐 그 여부를 살피시는 것이 당연 순서요 도리가 아닌가.
아담을 그렇게 완전한 자로 만드신 다음에 이 산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지 여부를 살피심과 같은 의미다. 영물들을 완전한 산 자로 만드신 다음에 이 삶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는지 여부를 살피신 결과 그렇게 자기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거룩한 천사들로 남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그 나머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악령들이 되어 하나님 창조를 망가뜨려 놓은 일을 자행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인간 농락이 그 증거다.
농사를 짓게 해도[자작농이 아닌 걍으] 농사 짓기에 힘을 쓸 수 있는 먹을 양식부터 먼저 공급한 다음에 일을 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임과 같다. 그냥 무턱대고 일하라고 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할 힘이 있어야 일할 것이 아닌가. 그런즉 "한번 구원을 해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삼으셨으면 영원히 그 아들됨이 변하지 말아야지 우리의 자세와 행동 여하로 그 아들됨이 무효화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냐" 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원칙적으로는 우리의 순종 여부를 살피신 다음에야[아담의 불순종으로 인간이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우리의 구원됨[하나님의 아들됨]을 정하셔야 하나, 인생들이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어 "육신"[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본능으로 생존하게 되어 있는 자기중심의 성향이 되어 있는]에게 포로되어 비정상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원래 인간 즉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신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나] 도무지 순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충분히 순종할 수 있도록 구원[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 '산 자'가 되는 것]부터 먼저 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무 행함[순종하여 선을 행하는]이 없어도 은혜로 즉 믿기만 하면 구원되는 것으로 즉 구원을 선물로서 정하신 이유다. 앞에서 이 "믿는" 것을 설명할 때, '순종하기로 약속하는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으로 역설함과 같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으므로[롬 14:9/고후 5:15] 그 목적에 부합한지 여부를 각자는 스스로 입증하게 되어 있다. 선행을 해야[사는 법을 지켜야] 구원[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있지만, 구원부터 먼저 해놓으시고[산 자부터 먼저 만즈시고] 순종[선행, 사는 법대로 따르는]은 나중에 다루어 보시는 것으로 되어 있음이다.
이는 당연하니, 나를 먼저 구원해 놓으셔야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을 행하는 그런 악[자기 구원을 목적함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이므로, 선이 될 수 없어]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선을 행한다면서 도리어 악을 저지르는 모순이 없게 됨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우리가 받는 구원을 가설무대쯤으로 평가 절하하면 다시금 무지에 무지를 더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구원은 더 이상 손댈 필요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 자체가 무슨 물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 자체가 변하기는 해도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그리스도]과 인격[나]의 결합이요, 또 이렇게 육체와 영혼 관계와 같은 불가분이기는 해도 '나의 영과 성령의 하나 됨' 즉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는 구조이므로 인격간의 사귐, 교류, 교제인즉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살게 되어 있는 체제로서는 더 이상 완벽함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불변이시나 내가 만일 이를 지속시키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하여 "나 자신을 위해 살게"[고후 5:15] 될 경우 이 '둘의 하나 되는' 관계는 자동적으로 해체되는 그런 구조다. 아주 완벽한 빈 틈 없는 '하나됨'이지마는 우리 구원의 특성이 그러한 이상, 이렇게 나 자신 이를 유지시키지 않고 보전하지 않을 때 자동적으로 와해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도 아니고 미완성의 구원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나 '원리원칙'에 저촉[충돌, 모순, 위반]되는 것도 아니다. 먼저 구원부터 해 주신 다음 차후에 그 자격 여부를 따지시는 것이다.
그런즉 엄연히 약속인 까닭에 내가 이 약속 이행을 파기하는 경우 약속은 자동으로 폐기된다. 그러나 무슨 기계처럼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人格) 대 인격 간의 관계[하나 됨]이므로 성경은 이런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10:26,29] 등 감히 형용 못할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것으로 실상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니 가히 "두렵고 떨리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누구의 간섭이나 강제나 영향력도 아니고 오직 내 자신이 들어 그런 망동(妄動)을 함으로써 자멸에 이르게 되니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는 당연하다. 이런 비극적인 결말을 낳게 하는 주된 원인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올바로 성경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의미로 억지로 해석해[성경에 대한] 치움이다.
'개인적인 육신의 욕심을 따라'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교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다른 복음", '다른 예수"[고후 11:4]라 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이미 구원 받은 것은 어디 가고 다시 자력(自力) 구원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인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성경은 모순되는 말을 할 까닭이 없으니 정직하게 성경 따라 생각하면 될 일을 가지고 억지로 자기 고집을 피우니 마치 참으로 그런 것인 양 여겨지는 것뿐이다.
믿음으로 은혜로써 구원 얻음을 재삼 재사 강조한 바울 자신이 "구원을 이루라" 했고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했으니, 즉 성경에서 가르치고 명령하는[:11] 모든 것을 위해 "수고하고 진력하고"[:10]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貞節)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고"[:12]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着念)하고"[:13]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기의 진보(進步)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15] 등 자기 자신에 대하여 "조심하고"[갈 5:15/고전 10:12] 성경의 가르침에 전념하는 일을 계속하여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할 것"[:16]이라 했으니, 그 자신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여기에 그 답이 있다. 즉 "내가 확신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해놓고도,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것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하고 바란다"[9:1-3]고 한 것이니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큰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면 원컨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생명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버려 주십시오"[출 32:32] 하고 하나님께 일심으로 매달린 바로 그 모세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매불망 바란 것이 자기 이웃의 구원인데 어찌 자기 구원을 목적한다고 말하리요. 즉 자기 구원과 자기 이웃의 구원을 맞바꾸겠다는 그런 애끓는 심경에서 어찌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자기중심이 언감생심 일어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로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 받은 자답게 처신하여 마땅히 할 일을 다함으로써 아담처럼 되지 않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처럼 되지 않도록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의 뜻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남으신 일을 온전히 이룸이니 따라서 그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이다[골 1:24].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처럼 순종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담이 어떻게 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어떻게 되었던가. 온전한 피조물로 모든 은혜를 받아 창조되었음에도 스스로 잘못된 처신을 하여 즉 자기를 창조하신 뜻을 거역하고 배신함으로써 아담은 죽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현재 처해 있지 않은가.
거룩한 천사들은 또 어떻게 하였던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뜻을 처음부터 충실히 받들어 사랑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처럼 되지 않고 아담처럼 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건지고 지켜 보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현재 "거룩한 천사"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아담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처럼 될 수 있고 아니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으므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고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하고 "너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라"[:16]는 것인데, 그 말이 알아듣기 어려워 갖가지 억지 해석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데 있으므로 복종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여기에서, 믿음이 있고 없음이 하늘과 땅 차이로 드러나게 된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을 때는 바로 그대로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아무 거침이 없이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반면에 이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하여 죽었다고만 믿을 때는 자기 부인이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가 된다. 성경 표현대로 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무 것도 부정(不淨)한 것이 없어도 어떤 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 그 사람에게만은 부정한 것이 됨과 같은 이치다[롬 14:14]. 그래서 믿음으로 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다[:2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이 막강한 능력의 구원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이 말은 우리의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 행함, 행동이 따른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한 그대로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 역시 똑같은 주장이지 달리 말할 리가 없다.
요한 사도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이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3]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 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23]이라 함이다. 그래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 안에 거하시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안다"[:24]고 하였다. 그런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마 7:21] 즉 서로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지켜야 들어가는 것으로 바르게 이해할 것이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냥 "계명을 지키는 것"[모세 시대에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또는 현재도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고 계명만 지키는 경우]과 "그리스도를 믿고 동시에 계명을 지키는 것"과의 하늘과 땅의 차이니, 그 차이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으로써 드러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이는 순종 곧 계명 지킴이 불가능한 것이다.
또 이를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다시는 네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뜻임을 거듭 강조한다. 이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으로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37,38]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 계명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똑같은 내용이요 영원 불변의 삶의 법질서다. 단지 그리스도 오신 후로부터는 "죽은 자"[마 8:22/골 2:13]로서는 죽었고 '산 자'[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다음에 다시 출생하여 살아 있으므로]로서 이제는 살아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 죽은 자로 있을 때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함이다. 그렇지 않고야 "다시 출생할"[요 3:3] 이유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가 이와 같이 달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즉 그리스도 이전의 죽은 자로 있을 때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 있으면서 [이 세상에서만]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이 확연히 다르다. 우선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이니, 전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때이나 지금 후자에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 것이다. 정반대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경고 측면에서도, 전자의 경우에는 경고가 될 수 없으니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나, 후자의 경우에는 엄중한 경고 그대로이니 이제는 그런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 자가 되어 있어도 죽은 자가 되어 있다는 것은[골 3:3] 두 가지 측면이니, 하나는 자기 자신 곧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므로 죄에 대하여 죽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고후 5:15] 뜻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의미이니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것으로서 그리스도와는 우리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로 불가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과거 믿지 않을 때와는 달라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으로서의 죽음이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이어서 사람들을 살려내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고난 받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은 것도 유익함"[빌 1:21]이라 하였다. 왜냐면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으로서의 죽음인지라 이 죽음의 고난은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그리스도 죽으심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이웃을 구원함이 되기 때문이요 이는 다시 제2의 나 자신을 만드는 작업이므로 내게 무척이나 기쁜 일이 되는 건설적인 의미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들이 구원되면, 내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 몸에서 그들 자신이 요긴한 그 중의 한 지체가 되어 줌이니 한 몸의 내용으로서는 더욱 풍성해짐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동참, 교제, 사귐, 함께 나눔, fellowship]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했으니, 바로 그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는" 의미를 말함이다.
이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이 아니라 위의 설명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이므로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한 죽음이요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서의 필연적인 부활이다. 의인의 죽음은 당연히 부활로 끝나지 그냥 죽음으로 묻혀 버리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표현은 같으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현재 내가 산 자가 되어 있지마는,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아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게 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바로 "계명 지키기"로 나타나 있음이니, 왜냐면 이 계명이 다름아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고후 5:15] 것이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의 내용이 바로 이 뜻인 것이다.
즉 자기 부인으로써 일관되게 임함이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에게 나 자신을 모두 바친[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간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계명을 지켜야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 계심이다[요일 3:24]. 즉 믿는 것이요 구원 얻음이다. 이는 다시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3:10,11] 함과 같다.
즉 내 스스로 기꺼이["기꺼이"-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특성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게 나타나지지 않는다[고후 4:10,11]. 그리하여 내가 "죽어 있음"[골 3:3]의 모습이 지속되어야 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음이 유지되어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나의 생명도 나타나게" 되어 있다[:3,4]. 지금까지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잘못 이해한 까닭에 이런 설명을 들으면 색다른 것으로 받아 들이겠지만, 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과는 동떨어진 전혀 색다른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한다고 해서,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모든 순종을 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도 '구원을 이루라' 하니 이는 말 그대로의 '구원'을 말함이 아니고 구원 받은 후의 '상급(賞給) 타는 것'을 의미함이라"[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등의 기상천외(奇想天外)한 해석을 내려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니,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꺼둘리고[움켜쥐어져 휘둘리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구원에서 그 의미 또는 목적을 말할 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 이는 산 자로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4,15]이라 했으니, 단 이 한 대목으로써도 이상의 부질없는 혼돈과 혼동은 깨끗이 정리된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정의(定義)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살" 때 혹은 나 자신의 구원을 의식하여 그것을 목표할 때 그것은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요,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면" '구원을 이룸'이 되는 것이다. '사는 것'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므로, 시험을 받아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상황은 완전히 뒤집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내 구원을 목표로 할 때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의미이니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요, 내 구원을 목적함이 아니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계명을 지켜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요 4:34] 전심전력할 때 바로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구원을 이룸"이다.
즉 위에서 말한 "상급 운운"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듣고서도 웃긴다고 핀잔을 줄'[세상에, 상 타기 위해 "두렵고 떠는" 수가 어디 있는가!] 그런 억지 해석으로써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믿는 자로 자처하여도 "육신대로 살"[롬 8:13] 때는 그는 반드시 "죽는"[:13] 것이니, 왜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6:6/고후 5:14] 그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기 때문에 "멸망"[:19]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죄의 몸이 멸해졌다"[롬 6:6]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니,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데"[10:17] 듣지 않고 믿지 않으니 무슨 믿음이 나고 구원이 되겠는가. "죄의 몸" 곧 "육신"[7:5-8:13] 즉 나의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무덤에 묻혀져 장사 지내졌다는 것을[고후 5:14] 믿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인데, 번연히 아직도 살아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니 무슨 믿음이 있는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데도, 믿음이 전연 없는 것이다.
현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새 사람"으로서 살아 있음이니 곧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새 생명"[롬 6:4] 가운데에서의 완연하게 판이한 삶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옛 사람"은 죽은 것이다. 이 구별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구별하기 쉽도록 "새 사람"[골 3:10/엡 2:15/4:24]과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으로 정해놓고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새 창조", "새 계명", "새 언약"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이상 모든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 중의 하나가 "내가 앞만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계속 달려간다"[빌 3:14/고전 9:24]고 전제한 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고 한 바로 그것이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께 단단히 붙잡혀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붙잡아 주시는 그 힘[권능, 권세-행 1:8/요 1:12]으로 그렇게 달려간다는 그 뜻이다.
그러니, 내가 '이미 얻고 있는 구원'의 능력으로 그렇게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니[이미 설명한 대로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는가. 그 누구도 아닌 바울 자신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붙잡혀져 있는 것도 엄연히 현실이고, 내가 이미 얻었다 또는 온전히 이루었다 말 못하고 오직 그렇게 얻기 위해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것 역시 현실이다.
구원 즉 영생 얻는 것을 선물이라고 하여 천국에 "공짜"로 들어간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양면 중의 일면만 보는 편견인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요 "믿기만 하면 받게 되는 선물"이니까 물론 구원은 공짜다. 새 '창조'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창조될 때 즉 이 우주에 생겨날 때 자기 힘이나 노력이 개입된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 때문이다. 고로 공짜로 얻은 생명이요 육체요 기타 등등 전부다. 즉 선물이다. 우리도 공짜로 얻었으니까 "새 창조"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공짜"는 맞다. 선물임에는 똑같다.
그러나, 이 공짜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줄로 안다면 그런 의미의 "공짜"는 아닌 것이다. 왜냐면 아담이 그렇게 공짜로 생명을 얻었으면 그 생명을 영원히 그대로 공짜로 누렸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 스스로 버린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꾐에 넘어가 그렇게 했다.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버린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짜로 얻은 것을 제 스스로 내다 버린 것이다. 죽는다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사(生死)가 달린 경고를 무시하고 죽음을 스스로 취하는 불복종의 길을 택했으니까 당연히 그러하다.
우리도 바로 그런 명령, 경고 즉 생명의 계명을 받고 있음이다. 이 생명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 당연히 그것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 아담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다. 여기에 아무 하자가 있을 수 없다. 아담이 밟았고 악령들이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이 일찍이 모두 밟았던 과정을 우리라고 해서[똑같은 "창조"라는 차원에서] 아니 밟고 넘어갈 리가 없다.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창조의 과정이므로, 예외가 되거나 제외되는 그런 특혜라 할까 불공정, 불평등은 하나님 지으신 이 우주에서 통하지 않는다.
똑같이 평등하게 같은 과정과 순서를 밟는 것이다. 만일 우리만이 그런 특혜를 받는다면 먼저 죽은 아담은 어떻게 되고 이미 영원 멸망에 처해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불평등, 불공정하다고 아우성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 그런 식으로 되는 일이라면 악령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아야 마땅하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구원이 그들 악령들을 상대하거나 또는 포함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히 2:16].
왜냐면 방금 설명한 대로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기 때문이다. 고의적(故意的)인 불복종에 대한 당연한 응보다. 아담 역시 고의성이 있기는 했으나 영원 멸망에는 처해지지 않은 것은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 그 죽음이 우리가 현재 아는 바와 같은 이런 죽음[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영생하지 못하는]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남을 믿음으로써 다시 출생하는 기회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제는 범죄하면 과거의 모든 선례[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를 보고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되므로 악령들처럼 고범죄(故犯罪)가 되어 다시는 용서가 없음은 마땅하다[히 6:6/10:26,29]. 아담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된 결과다. 당시의 계명은 무엇이었던가, 앞서의 설명대로 영원한 삶의 법질서인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함"이다.
곧 한 몸 체제에서 머리의 지시를 준수하고 그 지시를 따라 지체(肢體) 상호간의 위함 곧 사랑으로 섬길 것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어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부인을 외면했고 그 반대 방향인 자기중심으로 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 생명의 계명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단지 우리의 경우,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생명체이고
사람이므로 무엇을 목표로 하여 움직이든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목표를 자기 스스로 이룸이니 이는 결국
자기를 위한 자기중심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항상 양면성이 있다. 왜냐면 사람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저절로 생겨났을
경우 삼위일체의 원리가 작동[적용]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지적한 대로 삼위일체 원리는 만유(萬有)의 창조와
존립의 원리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聖)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도록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20,21]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회장은 "하나님이 계시면 왜 똑똑하게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시느냐" 했지만, 지금 이 글에서 지적하는 내용과 같은 것으로써 영원한 심판대에 가서도 지적 받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알 만하도록 모든 가시적(可視的)인 것들이 충분히 드러내어져 있는데 그래도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것이냐?"로 추궁되는 것이다[행 17:26,27].
그러므로 무엇이든 세상에 저절로 생긴 것은 없고 따라서 상대적이고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자기중심은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간단히 말해 무신론은 허무 맹랑한 반이성적 사고(思考)의 극치인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에 이름과 같이 "미친 마음"[전 9:3]이요 "바보["The fool hath said in his heart, There is no God."-시 14:1]"들의 행각(行脚)이다. 그럼에도 이회장처럼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좀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잡아 구도의 길에 나서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27].
만일 현재의 인간 처지가 과연 역부족(力不足)이어서 도저히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환경이었다면, 노아 홍수 당시 회개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조처를 취하셨듯이[벧전 3:19] 얼마든지 조처를 취하셨을 하나님이시다. 이회장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갔는지 여부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거나 말할 수 있는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니, 왜냐면 노아 홍수 당시의 사람들에 대하여 적절한 조처가 취해졌음을 우리가 아는 까닭이다[:19].
즉 사자(死者)들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해져 있다는 결론이 되므로 그에 따라 공명정대한 조치가 진행될 것이나, 단지 우리로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이 세상에서 믿지 않았을 경우 내세에 가서 믿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자체가 사람 살도록 정하신 곳이 아니요 오직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의미뿐인데, 이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세상 한 평생을 다른 목적에 허비했으니 그 허물이 큰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의 양면성으로 따지면 조물주가 증명되고 이 삼위일체의 진실성과 확실성은 3운법칙의 기묘한 구조로써 확증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원리가 나타내는 이 양면성의 이치[짝의 원리]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 움직임)하며 있는[存在]" 것이다[행 17:28].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니 우리를 창조하신 이의 뜻을 따라 움직여야 하고 우리를 만드신 이께서 주신 힘을 활용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생겨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시니[:25]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어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인데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26,27/신 32:8]
한 것과 같이, 각 민족과 국가의 연대를 정하신 것은 각 개인의
연대를 정하신 것으로써 비롯된 것이니 곧 인간 생애의 법칙
즉 3운 법칙[trini homo]인 것이다.
인과론(因果論)은 양면성의 원리인
것이다. 기본형으로서의 원인이요 대칭형으로서의 결과이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 세상
만사, 만물, 만상으로 인과론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왜 최초의 원인이 되시는 조물주 하나님의 존재는
일부러 부정하는가. 가장 간단한 기본적인 이런 논리에도
왕창 벗어나 있으니 거기에 무슨 지혜가 있다던가. 스스로
지혜 있는 척 기고만장해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제 3운 법칙으로
인하여 삼위일체의 원리가 증명되었고 이 양면성의 원리[짝의
원리]는 확고부동하다.
고로 이 세상에 있는 목적은 한시 바삐 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부터 되고 보는데 있으니 시급하게 산 자부터 되고 나서 무엇이든 논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렇지 않은 세상 종교와의 근본 차이는, 오늘날의 이 인생을 ‘죽은 자’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 하는 데에 있다. 죽은 자로 인식하는 이면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음에 그 바탕을 둔다.
왜냐면 성경만이 우리가 죽은 자라는 실상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치심, 하나님께로부터 배움이다[요 6:45].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는 자기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그 특징이다. 자기중심으로 움직여보아야 고작 이 '하루살이 같은' 자기 목숨에 관해서 뿐이다. 이 목숨 다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대기하고 있다. 이 세상 고난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영원한 멸망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고난다운 고난 그리고 죽음의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이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이든 생명의 환락이든 단지 영원성으로 닥칠 것에 대한 맛이나 보라는 정도다. 그래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에 참작하라는 뜻이다. 왜냐면 그렇게 맛보기를 해야 생명이 어떤 것이고 죽음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 알아 영원한 미래에 대처할 마음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부나비 같은 생을 위해 영원한 삶의 낙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어리석음이요 미친 마음이 되니 대오각성할 일이다.
원래의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죽음처럼 '존재가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번 존재하게 된 것은 영원히 지속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든 영물(靈物, 천사)이든 영적 존재의 특징이다. 창조주께서 영원히 계시므로 그 하시는 모든 일, 정하시는 모든 것이 영원하여 영속성을 띠며, 또한 그 만드신 것은 영원한 것이지 일시적인 것을 만드실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음의 의미는 삼위일체 원리에서의 양면성, 짝의 원리로 설명이 된다.
다시 말해 생명의 낙과는 반대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죽음이다. 생명과 죽음이 대칭[상칭,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영원하면[영생] 죽음 또한 영원한 고난임을 가리키니 곧 영원한 멸망이다. 죽음과 멸망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모든 것을 만드실 때 좋기만 한 것[善]을 만드셨으나 그래서 그것이 생명으로서 영원한 생명체를 만드셨지만,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라 이 사랑에는 반드시 자유 의지가 불가결이므로 그래서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셨더니 일부 피조물[악령 같은 영물들이 그러하고 첫 사람 아담도 여기에 속한다]이 이 자유로써 생명의 법질서를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면서 생긴 것이 바로 이러한 대칭성으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좋지 못한 것 즉 악(惡)이 이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으니,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동시에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령 높은 것이 만들어지고 보니 그 반대의 의미 곧 낮은 것이 자생(自生)하게 마련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칭을 이루는 것으로서 동시에 똑같이 생긴 것은 없는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선후 구별이 있어 기본형과 대칭형의 구분이 있음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동등하지 않고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의 구분이 되어 둘이 하나 됨으로서의 '머리'와 '몸'을 이룸이다. 때문에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니[고전 11:3] 남자가 먼저 생기고 여자가 그 대칭형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에 생겨난 듯이 "동등"이라 주장하는 것은 무지(無知)의 극치인 것이다. 왜 '극치'까지 되느냐 하면, 무지하기도 하려니와 그 무지함을 오직 고집으로 밀어 부치는 이기주의까지 겹쳐져 있어 스스로 바로잡으려는 의사가 전혀 없어 구제 불능처럼 되어 있기에 하는 소리다.
하나님께서 사람[피조물]을 지으실 때 스스로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지 그 지으신 피조물[인간]의 삶을 살아 주시려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스스로 살도록 하신 것이지 대신 살아 주시는 법은 없으니, 만일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영물들의 범죄로 인한 죽음[또는 멸망]의 결과도 처음부터 없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므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신 것이며 이는 따라서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나 천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영물들을 만드실 때나 똑같은 것이다.
영원히 살도록 지으셨건만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으니 이는 실수가 아니라 자의(自意)로 즉 자기 선택으로 된 것이어서 그대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지 다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을 것은 완전히 죽게 하신 다음에 다시 창조하시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육신"[롬 7:5-8:13]도 "죄의 사망의 법"[8:2]도 일절 이제부터는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 과거와 관련된 일체의 것이 죽음으로 척결되고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단 이렇게 새로 창조되었지만 아담처럼 신령한 영계에서 신령한 [영적] 몸으로 있지 않고 여전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사정이 아담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새 사람"으로서 이제는 아담의 것을 물려받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것을 물려받는 것이 되어 있음이다. 즉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려고 우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자면 "물려받음"이다.
순서가 중요하니 순서를 따라 모든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먼저"와 "나중"이라는 선후(先後)의 차례를 중시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역시 먼저가 죽음이요 그 다음이 부활이다. 그래서 이 순서를 따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죽음 다음의 생명'의 특징이 있어 '처음부터의 생명'이 아닌 것이다.
바울이 말한 이 "참예"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한 바로 그 "참예"이다. 이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7,18] 함과 같은 뜻이다.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이는 미완성이라는 뜻과는 다르니 완성을 유지 보전한다는 차원이다. 이미 설명한 바 있듯이 "콘크리트 양생(養生)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콘크리트를 양생하기 위해서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우승하려는 듯이 이와 같이 달려 가라"[:24] 한 대로, 남다른 각오와 결의가 필수이다.
또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26] 하여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음에 우리는 마땅히 세심하게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리기를 방향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27] 함도 같은 뜻이다.
이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2-14] 함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이기는 것", "부르심의 상"은 위의 바울의 지적처럼 세상에서 말하는 목적 달성, 성공, 성취와 같은 의미이지 난데없는 '상 타기'가 아닌 것이다.
즉 "복음에 참예함"이니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한 데에서 이 의미는 잘 드러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됨"[히 3:14]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음으로써 가능해짐을 분명히 하고 있다[:14]. 왜냐면 이 말을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12,13]는 경고 다음에 했기 때문이다.
"우승하기를 위해 달리는 자처럼 하라"는 경고 다음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0:1-6/민 26:65/히 3:17] 함과 같은 맥락이다.
즉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과 같은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우리에게 경계가 됨을 "저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 함으로써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음과 같다.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이 시험 무대요 시험자가 있어 시험하기 때문임을 밝혀, 그래서 아무리 시험이 극악하더라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信實)하셔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13] 한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작정하는 자처럼 힘과 성심과 노력을 다하라는 의미이니,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함 이 일념에 있는 것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산 자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산 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또한 무조건 죽은 자의 특징이 된다. 산 자로서 죽은 자의 이런 특징을 따를 때는 이는 그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택한 결과가 되니 그 선택한 대로 될 것뿐이다.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구원을 마치 하나님께서 그 미리 택하신 이들만 선정하시어 베푸시는 선물로서의 '공짜'로만 착각하게 만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소행은, 아담을 죽이려 했던 살인마로서의 근성이 여지없이 여기서도 드러남이니,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작심한 결과로서의 거짓말이요 속임수다. "미리 택하심", "선물", "값없이 거저 주심", 다 옳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새로우신 창조 행위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 후로부터는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그 막강하신 능력을 우리 스스로 활용하는 것으로써 모든 것이 좌우됨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애써 감추고 속이려 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받고 "물려받는" 차원에서의 "일편단심(一片丹心)", "진충 보은(盡忠報恩)"의 마땅한 힘씀과 애씀이 있어야 함을 이렇게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것으로 정확하게 설명한 것인데, 이 정작 중요한 것을 빼 버리고 빈 껍질만 움켜쥐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만든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그토록 크신 사랑을 나타내신 주님[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런 마음 하나 없이 무엇을 하랴. 그렇게 나를 위해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을진대 이 마음은 모든 인생들을 향한 마음이시니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그 마음을 닮아 그 마음을 물려받아 그런 인생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래서 그들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주야로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없이 내 어찌 구원 받았다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리요.
만 가지로 재어보아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영생만을 욕심 내는 것이니 이런 욕심만 있는 자 즉 왕의 잔치음식이나 먹으려고 덤비는 자는 무자비하게 가차없이 내쫓는다 하신 경고를 어찌 기억하지 못하는가[마 22:11,12]. 영생에 대한 욕심이야 세상 모든 악한 자가 다 품는 것이니,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믿는 자에 한한다. 즉 회개하여 그 악함을 버리고[행 3:26] 선을 행하기로 작정하여 실제 그 의지(意志)대로 끝까지 행동하는 자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롬 2:7-10].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 우리의 구원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요 20:21,22].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자기를 위해 사는 데에 있지 않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날 때는 아담의 형상으로서 아담과 같이 죽음에 처한 죽은 자이었으나, 이제는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어 마지막 아담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살도록[대신 살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드셨어도 삶의 법칙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이니 그래서 삶의 법칙을 명백히 일러 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죄를 물으시고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마지막 심판대에서의 심판이 가능하시겠는가. 정녕 죽는 길과 사는 길을 명백히 보이시고 일러 주신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양자 택일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이런 양자 택일 차원이다.
아담의 경우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으로 그런 경고를 하셨다. 영물들은 모든 지식이 있는 영적 존재이니까 우리보다 월등하게 모든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데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은 그 생명의 길을 무시했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인데 우리 역시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고후 5:15] 않으면 생명에서 끊어진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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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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