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별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18)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9)




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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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한 것인데 그리고 이 하나됨은 엄정하게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시고[이미 이 사실은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증하신 바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게 됨으로써[이이 회개의 본질적 내용인 것이다] 이루어진 것인데,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게 될 때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될 때[고후 5:15]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은 필연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분명 이 시간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를 유지하는 관계에서 내 할 몫을 다하는 일에 내가 충실하지 아니할 때 나의 구원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를 회개하여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는 경우에만 이전처럼 확고히 다져지고 그렇지 않고 회개 없이 나갈 때는 필연적으로 이 하나 관계는 붕괴되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 하나 관계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 관계로서 인격적인 사귐[교제, 교류-요일 1:3]에 있고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됨에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기로 약속하신 터이므로, 이 '하나됨'의 해체는 내 자신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즉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써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다[히 6:6/10:26,29]. 참으로 참혹한 비극적 현상임을 성경은 이와 같이 절실히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은 바람직한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 관계에 있음을 내가 충성으로 성실하게 지켰으니 그 원래 하나되어 있는 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성경이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극적이라기보다 실상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다. 즉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영생의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왜냐면 내가 애초의 믿음을 지켰으니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회개 당시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시켰으니 즉 을['을'을 나 자신이라 하고 '갑'을 그리스도라 하면]이 갑을 위했으니 이제는 갑이 을을 위하는 차례인 것이다. 갑이신 그리스도께서 을인 나에게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울이 갑을 위하니 갑은 을을 위함이 아닌가. 바로 그 '갑이 을을 위함'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영생을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등의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끊임없는 부단한 동작을 말하는 것이지 한번 해 버리고 마는 그 한번 동작으로 종결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인 것이다. 우리 육체의 생명을 보아도 부단히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동작을 되풀이함과 같은 것이다. 한번 먹어 두면 평생 그 먹은 것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먹는 동작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에 속한 생명이 그러하고 원리상으로는 영생[영계에 속한] 역시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갑과 을의 교제 즉 주고 받는 영원한 연동 작용인 것이다. 이는 매일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동작의 연속이 나의 영생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둘의 하나됨이다. 왜냐면 더 다시는 과거처럼 나 혼자[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머리와 몸과의 영원한 '한 몸'으로서의 동작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비로소 이런 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이런 삶이 정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원래부터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 각자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둘이 하나됨의 삶을 살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 범죄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이전 상태는 범죄로써 죽음을 통해 훼멸(毁滅)되었으므로 새 창조로서의 새로운 상태를 구성하고 있음이다. 이 새로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이 창조하시는 방법으로서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이처럼 나와 하나되시는 길 외에는 없으므로 부수적 결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망극하신 은혜를 입은 것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방법 외에는 우리 인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어버이로서의 자정(慈情)을 만족시킬 만한 요건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까지도 불사하시고 즉 하나님 친히 우리 인가 피조물처럼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일념으로 이런 방법까지 채택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서 당하시는 모든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신 것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마는 그럼에도 성경이 우리가 마땅히 "그리스도를 얻어야"[빌 3:8] 하는 것으로 경고하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9] 목표해야 한다 함이 모두 이런 이치를 따라 말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이미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당당히 '산 자'가 되어 있지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11] 함이다. 이것이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다.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습니다"[사 64:10] 하는 비극적 사태가 얼마든지 어느 때든지 나의 경우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라는 것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의미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의 경계로 되어졌다 한 대로[고전 10:11] 만약 예루살렘의 황폐화와 멸망이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런 기록이 없었으리라 생각해야 옳다. 아담이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았으나 썩어짐의 누추한 죽음을 만났고 거룩한 영물들로 애초 창조되었으나 악령들이 되어 멸망의 운명에 처해졌고 타락한 그룹[cherub]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즉 이 세사에 있는 동안은 우리 인생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한에는 항상 아담 같이 될 위험이 있고 악령들의 운명처럼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니 두렵고 떨리지 않으리요. 절대로 나만은 천국 가는 것이 틀림 없으리라 생각해서는 자살, 자멸 행위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지켜 주심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다. 내 힘이 아니다. 항상 은혜다. 그러나 이 은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면성의 원리를 따른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벽한 것이지만 내 스스로 믿어야 그래서 "악함을 떠나기로"[행 3:26] 작정하여 "항상 복종할"[빌 2:12]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회개가 있어야[행 2:38] 그 구원이 비로소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것이 양면성, 동시성의 3위1체 원리다. 어느 일방적으로 작동되는 것은 이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성경도 이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가 사랑해야 하는 것이요, 내가 이렇게 사랑하여 그 말씀과 계명을 지켜야 아버지께서도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자신을 내게 나타내심이다[요 14:21].


우리가 열매를 스스로 맺어야 더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 하신 것이다[요 15:2]. 그 대신 맺지 않을 때는 이를 제거해 버리시는 것이다[:2].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반응 여부를 따라 나머지 일을 마무리 지으시는 것이니 어찌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 아니리요. 즉 우리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부를 따라 생(生)과 사(死)가 왔다갔다 하는 판이다.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남이 아니리요. 어찌 하나님의 은혜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랴.



또 어찌 우리 자신의 의지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역사(役事)하셔야 내가 구원을 스스로 이루는[:12] 대로 이루어짐이다. 이 점을 항상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함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의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를 미리 택하심의 뜻이기도 하다. 양면성이다. 3위1체 원리에서 갑이면 갑, 을이면 을로서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바가 없다. 반드시 동시에 움직여야 병이라는 하나로서의 역할이 가능해짐이다.


하나님께서 영물[천사]들을 영원히 사는 자들로서 만드셨다고 해서 그 영원성이 일방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증거가 그들 스스로 악령들로서 풀림이다. 같은 영물들이건만 이들과는 반대로 나간 "거룩한 천사"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담 역시 처음부터 죽기로 작정되고 예정된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로서의 죽음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죽는 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결과론적으로 자청한 죽음이다.


내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을 미리 아셨으므로 내 스스로 그렇게 됨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모든 가능한 장애를 미리 제거해 주셨다는 의미가 미리 아심[foreknowledge]과 택하심 또는 미리 택하심[election, predestination]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오직 나의 자유 의지로써 모든 것을 정하고 요리(料理)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이요 일사부재리다. 왜냐면 한번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 주신 이상, 이 자유에 반(反)하는 일은 하실 수 없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제나 간섭이 일절 없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리 택하심"이 이런 강제나 간섭의 의미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미리 아심"을 토대로 한 미리 택하심이라는 성경의 설명이 그것이다. 그래서 내가 믿어야 나는 구원된다. 앞의 말씀대로 내가 열매를 맺어야 더 맺도록 나에게 은혜를 계속 베푸시는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기대해도 그 열매가 내게 없을 때 나를 제거해 버리신다.


이런 명백한 말씀으로 경고를 하셨는데도 어찌하여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내가 천국에 간다고 감히 생각하려는가.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여 천국으로 직행한 강도의 경우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어떤 결격 사유가 있어 또는 미완성이어서 우리의 "스스로 구원을 이룸"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강도의 경우 역시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신 결과다. 다시 말해 그가 만일 그런 죽음의 문턱에 있지 않고 바울처럼 왕성한 기운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그렇게 믿어 회개하였다면 바울처럼 얼마든지 일할 수 있음을 미리 보셨다는 의미다.


어째서 그렇게 미리 아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영원 세상에 우리가 들어가면 우리의 능력으로 능히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됨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고전 13:12]. 그 때 알아도 늦지 않다. 우리의 구원의 핵심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니 사랑은 절대로 그리고 항구적으로 일방적일 수가 없다. 이를 '동시성'이라 하고 '양면성'이라 한다. 자기 부인은 사랑이 그 핵심이다.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함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을 수 있다[고후 5:15].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 위해 영원히 존재하심을 그 십자가 고난으로써 확증하신 것이다. 이 토대 위에서 즉 믿음의 반석 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의 건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영원히 위하신다는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다. 나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믿음의 내용인 것이다. 엉뚱한 다른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나를 위하시는 이가 내가 아닌 그리스도시다. 과거 죽은 자로 있을 때는 나 자신을 위했었다. 그것은 '거꾸로'였다. 지금은 바로 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일편단심 우승을 목표로 달리는 사람처럼 하라고[고전 9:24] 경고하고 있으니 때문에 "우리의 본"[11:1]으로서의 바울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 하였다. 다시 거듭 강조하기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reward, '상급'이 아닌 '결과물']을 위하여 달려간다"[:13] 하였으니, 오늘날 구원 받았노라고 태평으로 지내는 종교인들과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 친히 경고하신 것처럼 과거 "한 일을 잊어 버리지 않고" 오히려 과거에만 매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마 7:22] 것에 자기 구원을 의존한다. 그런 사람이 "많다"[:22]고 하셨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즉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여부에 달려 있으니 너무 늦기 전에 이 경고를 받을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람[구원 받은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으므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위치다. 단지 그 영원한 생명도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해야 옳고 재대로의 설명이 된다.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 가운데의 생명과 영원한 신령한 몸 가운데의 삶으로 양분되는 것으로서, 이 양쪽 측면은 또한 영원한 것과 시한부라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영원한 육체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삶은 영원하고 그 나머지는 시한부다. 지금 우리는 그 시한부 생명으로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자연계의 육체 가운데 영위되는 현재의 삶이 그 시한부에 속하는 것이다. 시한부라는 것은 가변적(可變的)인 성질도 함께 지닌다고 보는 것이니 따라서 항구불변한 것과 상칭(相稱)된다. 다시 말해 이 시한부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써 제대로 된 삶[자기 부인을 통해 나타나지는]을 이룬 것이 없으면,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원한 삶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려 유야무야 흐지부지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실체가 아닌 허상만이 되어 영원히 남게 된다. 다시 말해 영생이 아닌 멸망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 면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으면 나머지 역시 가치를 상실하여 화폐로서의 효용성이 없음과 같은 이치다.


영원한 삶은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 일이다. 이는 엄연히 자유 선택에 따름이다. 세상 살기를 바할 때 그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는 것이 되고 이상 설명과 같은 현재의 죽음[자연계에 속한 몸을 입은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더불어 정당화하는 것밖에 안된다. 정당화한다는 것은 정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므로 그러면 그렇게 믿는 그대로 영생과는 남남이다.


이런 결과가 절대로 무사할 리 없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거둘 것이 없다. 소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럴 듯하게 살 수 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현혹되지 말 것이다. 그런 것이 필연적으로 멸망인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쓰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이 전쟁 마당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것 외에도, 이 세상이 아담 범죄 후 악신(惡神)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의 왕이므로 그를 추종해야 영화든 권력이든 향유할 수 있다[눅 4:6,7].


다시 말해 자기중심으로 나가야 이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치고 나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스스로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그리스도 구원'의 사람 사는 도리는 "이방인[믿지 않는 이들을 가리킴]"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고전 2:14] 것이라 하여 배척을 당한다고 성경은 명시함은 당연하다. 따라서 세상에서 내로라하며 으스대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여 그와 함께 멸망하는 지름길이다.


때문에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성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육신대로 살아도[즉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은 여전히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에 연연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무리한 주장을 할 리가 없다. 죄는 지어서는 안되는 것이면 지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짓지 말라 했으면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 차원에서, 모순 또는 앞뒤가 다른 말이나 표현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법질서 확립에서 가장 기본되는 첫째 요소다. 나라 법령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면 그 법이 어찌 시행되겠는가.


악마의 전략 전술


악령(惡靈)의 시험 곧 우리에게 도발해 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략 전술은 그리스도의 "광야 시험"[눅 4:1-13]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육체적으로 주려 있을 때 시장하다고 '내 마음대로'[:2,3] 떡을 만들어 먹을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생명의 법이 아니므로, 당연히 답은 "아니다"로 나온다.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15],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는 성경 말씀으로써 이 시험을 물리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마 4:4]. 이것이 첫째 시험이었다. 삶의 기본 질서를 깨뜨리도록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유도했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대로 독단으로 해버리도록 유도하는 것은 어찌 먹는 것으로 한하랴. 이성(異性)에 관한 욕구도 있을 것이요 이 세상 명예와 권세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운 각종 각양 유혹과 시험의 형태로 다가온다.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이는 드러난다[마 13:3,18/막 4:2/눅 8: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우는[포효하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두 헤매고 덤비는 것이니[벧전 5:8] 이를 대적하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둘째는 "마귀[惡靈]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고 부추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使者)들을 명하실 것이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는 대목이었다[마 4:5,6]. 이 대목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믿음과 직결된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하나됨에서 첫째 시험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도록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게 되어 있는 나의 몫[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에서]을 하지 못하도록 즉 나 자신을 위해 이전처럼 살도록[고후 5:15] 충동하는 것이다. 둘째 시험은 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하나님께 나 위하시는 것을 의심하도록 하는 술책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결과인 것이다. 자기 부인이 바로 여기에 터전한다. 그리스도 친히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 계시어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시므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이 두 가지 가장 기본되는 사실을 와해시키려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 말씀의 순수성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거짓이나 속임수가 개입될 여지가 없음을 그 스스로 확인해 준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스스로 인용한 것이 그런 의미다. 거짓말하는 자의 약속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불신, 불복종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 신실성을 의문시해서가 아니라,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나가시므로 즉 공정공평성이 완전히 담보되어 있는 터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사실만 아니라 그 자신의 계획도 얼마든지 그렇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과신, 과욕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교만이다.


그런데 이 시험의 장면에서 누가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이 순서가 틀리게 나와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이므로 그가 기억해낸 순서가 옳다. 왜냐면 이 둘째와 첫째는 방금 설명한 대로 하나의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응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또 기록되었으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다"[마 4:7] 하심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 되는 이치는 갑과 을 상호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는 까닭에 상대의 말씀 또는 약속이 절대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왜 이 둘이 밀접한 연관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또는 그 뜻]대로 하여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 말씀에 나타난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요 따라서 그 말씀을 의심하고서는 즉 그 말씀을 백 프로 믿어 신용하지 않고는 이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거짓이 있거나 속임수가 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이 지어낸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난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을 뿐이지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상대를 의심하고서는 둘이 하나를 이룰 수가 없음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하나 관계에서는 반드시 갑은 을을 신뢰하고 을은 갑을 신뢰해야 가능하여, 갑은 갑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을을 위해서만 살며 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나를 위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이 둘은 불가분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는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하시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믿기 때문이다.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그 말씀으로 나타난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니 그런 말씀이 순수하지 않고 거짓이나 속임수가 있다면 누가 그 말씀을 믿을[신뢰, 의존]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삶의 법도(法度)를 가르치는 성경인즉 성경은 아예 처음부터 거짓이나 속임수가 개입될 여지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를 지칭할 때 누가는 예루살렘이라 구체적으로 명시하였고 마태는 그냥 "거룩한 성"이라 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그리스도 친히 그 시험 받으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처음 알려진 사실이므로 역시 마태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누가는 단지 "거룩한 성"은 필연 예루살렘일 것이리라 판단하여 그렇게 알고 서술해 나간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꼭대기까지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영(幻影) 가운데서가 아니라면 상상 속에서의 일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다음 시험에서 마태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다"[마 4:8]고 했는데 이 역시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가는 역시 그냥 "올라갔다"[눅 4:5]고만 적어놓고 "지극히 높은 산 운운"의 말은 생략해 버렸다.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한 대목이 너무 황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의사(醫師)인 누가의 생각에, 지극히 높은 산에 올랐다고 해서 천하 만국이 보일 리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고 마태는 그대로 기술(記述)한 것이다. 마태가 정확히 기억한 대로[누가와는 다른 순서로] 이상 둘은 삶의 기본 법질서에 관한 것이다. 즉 한 몸 이치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 부인을 버리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도록 유도하는 데에 그의 시험의 목적이 있다. 누가는 단지 제3자에게서 들은 바를 기록하였으므로 이런 순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야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상념(想念)을 통해 도전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간단없이 "모든 이론을 파[破]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고후 10:5] 일을 쉴 새 없이 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대처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 즉석에서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게 되면 사대문 다 열어놓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다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셋째 시험을 했다. 셋째는, "마귀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준다. 내게 절하면[꿇어 엎드리면] 그렇게 해 준다"[눅 4:6]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는 세상 영광과 권세가 마귀에게 넘겨진 것이므로 마귀가 원하는 대로 주는 것이라는 내용은 생략했다. 그 대신 이 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4:10].


마태는 단지 마귀에게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준다는 데에 스스로 역점을 두고 기록하였거나 처음부터 들을 때 그런 인상[느낌]으로 알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베드로 등 다른 제자[들]에게서 들은 바를 기록하였고, 그렇게 일러 준 그 다른 제자는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준다"고 했었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 6:13/10:20] 하셨다"고 대응하셨다[눅 4:8].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영역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죽음에 속한 자로서 죽음에는 당연히 생명이 그 대치 세력이다. 고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공략에 대한 유일한 초강력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술전략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이 모두 마귀(魔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이 점이 중요하다. "넘겨 준 것이라" 함은 첫 사람 아담이 어리석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라 그 말대로 행하여 그를 따른[追從] 결과임을 말한다. 그러니 인간을 속여 인간을 망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이 속임수에 넘어간 줄 뒤늦게 깨달은 인간[아담과 아담 이하 인생들을 대표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두 지휘 아래]과의 생사를 건 오늘날의 맹렬한 대판 전쟁이 아니 될 수 없다.


우리 인생들을 이와 같은 불행의 참극에 빠뜨린 장본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일시적이며 신령한 것도 아니고 자연계에 속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쩔렁쩔렁 흔들어 과시해 보이며 무참하고 참혹하게 되어버린 몰골의 인생들 앞에서 "내게 꿇어 엎드려 온전히 복종을 하라, 그러면 이것을 주겠다"고 함으로써 그 잔혹성과 교활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다.


참되고 영구적인 실체를 잃게 만들고는 그 그림자 같은 모조품을 가지고 인생들의 눈앞에 얼른거리게 하며 즉 "천하 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순식간에 보여 주며", "탐 나지? 내게 절하라, 그러면 주겠다" 하는 것이니 실로 가증스럽고 사악한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은 죄에 대한 것으로 나타나게 마련이고 또 그리 되어야 정상이다. "처음부터 범죄한"[요일 3:8] 자이므로 죄 곧 자기중심의 화신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 대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요 6:27] 대비 태세가 항상 되어야 하고 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평소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현재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살지 않고 적진에 침투하여 공작원으로 일하고 있는 양상으로서의 전투하는 자세를 항상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골 1:9,10] 기도한다 함과 같다.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해야 하는 것이다[시 139:22-"with perfect hatred"]. 앞에서 와신상담의 고사를 예화로 든 것도 그 때문이다. 


한사코 미워해야 마땅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 사랑'[요일 2:15]이다. 영원한 것에 비하면 이 세상은 일시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사막의 신기루다.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다. 없는데도 있는 줄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상과 같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과시이다. 이 신기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생이 자멸(自滅)에 이르렀던가!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눈 뜨는"[행 26:18] 것이다.


우리의 복음[희소식,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전파가 이 "눈 뜨게" 하는 일이다. 눈을 떠야 그리스도이신 빛을 찾아 오게 된다. 찾을 것도 없다. 그리스도 친히 "세상에서의 빛"[요 8:12]으로 비치시는 것을 보게 된다[요 3:19-21]. 그리스도께서 친히 생명이시니 이 경우 영락없는 구원이요 영생이다. 바로 이런 영생 가운데에서, 즉 나 자신을 위해서는 원도 한도 없도록 하나님 친히 다 이루어 주신 바탕 위에서, 산 자로서의 일에 전념하니 곧 머리에 대한 지체(肢體) 로서의 순종이다.


이제는 명실 상부하게 순종이 가능해졌는데도 첫 사람 아담처럼 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고의적으로 머리의 지시를 어기는 자유 역시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다. 그러므로 철석 같이 마음을 다져 먹고 자기 신념에 충실하지 않는 한 나 역시 아담처럼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야 시간문제다. 그러면 영구적으로 회귀(回歸) 불능이 된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한번 들었다고 그래서 알았다고 남들에게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 읽고 묵상하는 것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시 1:1].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둘이 하나 됨의 구조, 한 몸이 되는 이치의 골자는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항상 상대를 위한다. 고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고 자기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것이고,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경고한 것도 같은 뜻이다. 힘쓰지 않고 어찌 사랑할 수 있는가. 자기를 위한 힘씀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를 위한 힘씀이요 노력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얼마나 힘쓰며 노력하는가.


내 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씀이 아니다.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또 무슨 구원을 위해 힘쓴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셨지만 내 스스로가 들어 나 자신의 구원을 망칠 수가 있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는 것뿐이다. 어떻게 해서 망치게 되느냐,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어기고 거기서 벗어날 때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롬 14:9/고후 5:15].


다시 말해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니 이것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하였고,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은 것이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5-9] 한 것이다.


모든 경고가, 사랑하기를 힘쓰고 애쓰라는 것이다. 왜냐면 끊임없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처음 사랑을 버리도록"[계 2:4] 공격해 오는 까닭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이런 특별한 힘씀이 필요치 않다. 거기에는 이런 시험하는 자도 없고 시험의 무대도 아니며 시험하는 때는 이미 지나갔고 오히려 모든 이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의 일에서만 상호간 상승(相乘, 相昇)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몸의 각 지체가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지시를 따라 이웃[같은 믿음의 형제들] 사랑을 힘쓰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하여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에 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은 이웃 사랑의 기반을 닦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한 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지체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니 이것이 순서상 당연히 먼저 오게 된다. 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한 몸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교회로서 모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죽음의 현실을 인식해야


사랑은 자연스럽게 마음에 우러나 끌려서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부터 먼저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요 선물이요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요 믿기만 하면 된다 함이다. 그러므로 무릇 산 자로서의 모든 행동의 목표와 동기가 모두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니 중간에 얼마든지 마음을 돌리면 돌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이고 마음을 돌릴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무효가 되는 까닭에 스스로 구원을 이루되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이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구원이 무효가 되기는 하나, '구원이 무효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목표는 '처음 사람을 버리지 않기'[계 2:4,5] 위함이니, 차이가 분명하다. 천국에서는 물론 이런 일이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오직 이 세상에서만은 시험하는 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밤낮없이 설치는 곳이므로[벧전 5:8] 이와 같이 함은 마땅하다. 시험 무대요, 또한 이기느냐 아니면 지느냐 하는 전쟁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 내가 이 장막(帳幕, 육체의 장막 곧 우리 몸)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니 ...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죽은]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2-15] 하였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한번 구원 받았으니 이 구원은 영원한 것이라 착각하고 태무심으로 지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 것은 혹 흘러 빠져나갈까[새어 나갈까] 염려하는 것이니,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하물며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1-3] 한 그대로다. 그럴 경우, 우리도 그들처럼 멸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대가는 "멸망"[:19]인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등한히 여기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씀을 뿌리는 것인데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마귀]이 즉시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라고 하셨다[마 13:19/막 4:14/눅 8:11].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무엇인데, 사람이 구원 얻는 말씀을 감히 빼앗아 간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말씀을 들은 사람의 탓이요 허물이다.


즉 단단히 움켜쥐면 빼앗길 리 만무한데 느슨하게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쥐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취해 간다는 뜻이다.달란트[마 25:24]나 므나[눅 19:20] 비유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즉 달란트나 므나를 하나만 받은 이는 공통적으로 땅 속에 끌어 묻거나 수건에 싸 둔 것이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은 그 받은 달란트 혹은 므나를 불리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자는 완전히 손놓고 잊어 버린 것이고, 후자의 경우 항상 움켜 쥐고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런 차이다. 들은 말씀에 대해서 바로 그런 자세로 임했을 때 빼앗길 리가 없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는 경고가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해 "등한히 여긴다"는 것은 그렇게 있는 둥 마는 둥 느슨하게 잡고 있는 것, 마음에 착 달라붙게 애지중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즉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는"[요 8:37/15:7] 상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이니[엡 3:17/벧전 3:15] 곧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것으로[고후 1:22] 성경은 표현한다. 죄인 혹은 악인의 특징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롬 1:28/요 15:7] 데에 있다. 마음은 생각의 총본산이요 의식의 영역이다. 마음에 있다는 것은 항상 의식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하니까, "과거 나도 분명 믿은 것이 확실하니 구원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여 그래서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태평이고 여전히 세상 속에 묻혀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김"이다.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은 경우가 이를 나타낸다. 그래서 아무 열매가 없다. 다른 이들은 자기 역량대로 그 갑절 혹은 그 이상을 증식했는데도 자기는 처음 받은 것 그대로다. 이 세상이 죽음이고 모든 인생이 죽은 자인 줄 알아야 세상에 전연 뜻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의 일에만 전신전력하고 거기서만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있는데, 오히려 세상 일에 코를 박고 지내면서 영적인 일에는 자기가 일단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안주하여 무관심으로 시종일관하는 자세이니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도 오래 머물 수도 없다.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고[요 6:44,65] 선언하신 그대로다.


이 세상이 죽음인 줄 알고 인생이 모두 죽은 자인 줄을 알아야[아버지께로부터 배워야-요 6:45]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법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병든 자가 병 낫기를 바라 의사와 약을 찾듯이, 죽어 가는 자가 살기를 열망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까지는 그럭저럭 이 세상 살다가 영생까지 얻어보겠다는 생각뿐이면 성경대로 하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불의가 가득 차 "죄 많고 음란한 세상"[막 8:38]인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면서"[히 1:9] 어찌 세상과 어깨동무하여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상과 더불어 삶의 낙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는 것이다[눅 4:7].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한다고 세상이 제일로 쳐주면야 문제가 없지만, 그런 것을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취급하고 약하다고 천대하니까 세상 사람들 같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게"[:38] 되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달리 오늘날 소위 "기독교"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믿고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그 가짜와 모조품이 되어 행세하고 있는 까닭에 세상이 미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가 되어버렸는데.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하지"[요 15:19] 않을 이유가 없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처해도 그들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이시든 진실이 아닌 것을 말씀하실 리 없다. 하나님은 오직 강한 자이시므로 약한 자처럼 거짓말을 하실 리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악한 자인데 거짓말을 하니 그러면 약한 자인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람 앞에서는 강한 자이나 사람의 배후에는 막강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속임수로 꾈 수는 있어도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욥의 시험 때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하겠지만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힘을 썼다는 사실을 마땅히 기억할 일이다[욥 1:12/2:6]. 그리스도 친히 "몸은 죽여도 그 이상은 못하는 자를 무서워하지 말라"[마 10:28] 하셨지만, 이렇게 죽일 수 있어 위협을 하는 것도 시험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렇게 시험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만 만들면 그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모세의 인도하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면서 모압 땅을 지날 때 모압 땅의 발락이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나 두려워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잘 알므로] 오직 선지자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모압의 발락이 손을 대지 않아도 제물에 붕괴되어 상당수가 멸해졌던[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음-민 25:4] 것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민 22:21/계 2:1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현재 위치가 바로 이 발락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온 재산을 처분하여 그 값으로 진주를 산 것과 같다고 하신 대로[마 13:44,45], 자기의 전 재산과 그 진주를 맞바꾸었기 때문에 당장은 무일푼 거지 같이 되어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그 진주가 자리를 잡아 있으므로 천하 태평의 부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진주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 진주와 같다.


이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고 경고하신 그대로다. 스스로 된 그 가난한 자는 이제 자기 소유가 되어 있는 그 진주 생각을 않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렵고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한 대로, 피하지 못하니 그것은 생명이 아닌 멸망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값진 가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영생 얻기 위한 수단쯤으로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멀다.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막 12:34]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명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생명인 줄 알면 그것을 지키는 것만 남았기 때문이다. 단 스스로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선물을 받음으로써 성령의 "권능"[행 1:8]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우리[cage]


따라서 남이 나를 죽이더라도 자기 때가 안되면 절대로 그 살의(殺意)가 성사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 3운법칙의 효용(效用)이다. 고로 3운법칙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시기 위함이 아니니, 지금까지 설명한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등의 3운법칙의 모든 의미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으로서, 다시 간추리면 ①하나님의 실존 증명, ②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증거로서의 삼위일체 원리의 증명, ③성경의 진실성, ④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나타냄, ⑤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적시, ⑥이 세상 삶이 허망한 것임을 깨우쳐 이런 헛것에 대한 애착을 경고, ⑦인간은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이요, 죽음[멸망]을 눈앞에 둔 ‘죽은 자’임을 자각시킴이다.


말하자면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드러난 야수성(野獸性)을 강권으로 통제하기 위해 우리[cage] 속에 가두어 놓은 것과 같은 형국이 인간 생애의 법칙이라 할까. 비참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3운법칙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는 "천국이 가까웠다[to be at hand]"였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이 완성된 오늘날이므로 이미 "천국이 이르렀다[to have come]"는 것이 우리의 메시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셨는데 어째서 이와 같이 철권(鐵拳) 제압을 하시느냐 하겠지만, 이미  설명한 대로 인간의 본격적인 삶은 영원성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가름하는 데에서만 의미가 있고 그래서 이를 위해 작용하는 것이지 그리하여 철저히 각자 자기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고, 단지 이 세상에 속한 인간 삶은 원래의 인간 삶이 아니므로 제약이 되든 안되든 한 마디로 무의미하다는 그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의 전파가 종결되고 완수되기가 바쁘게 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다. 즉 이 세상의 존립은 복음 전파와 결부된 조건부요 시한부다. 따라서 이 세상 삶 자체의 의미를 성경은 부정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전한다"[요 12:25] 하신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이다. 이것은 전투 현장에서 반드시 쓰이는 말이다.


전투 현장을 삶의 현장으로 착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은 정직히 말해 전장(戰場)임을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 일당과 우리 인간들의 대결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렇게 선언해 두었다[창 3:15]. 악한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부터 그렇게 인간[아담]에게 도발해 온 것이다. 계교를 부려 인간[아담]을 자기 발 아래 복속(服屬)시킨 것이다. 인간을 죽은 자, 완전히 망쳐진 자로서 그렇게 자기 지배 아래 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니 그래서 그는 현재 인간 세상에서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신(神)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런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우리의 현 위치를 죽음으로서의 실상 그대로 드러내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행 17:30]만을 담고 오직 그것만이 의미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삶은 처음부터 이런 속박된 양상일 수 없음은 백 번 옳은 말이다. 3운법칙에 의해 관리되는 이런 모습이 비정상이라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지금 정상이 아닌 비정상 상태에 있음이 이로써도 확인되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은 완전 자유를 누리는 존재로 만드셨으므로 통제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범죄하여 비정상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니 자승자박한 꼴이다. 살도록 만드셨는데 그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주실 때는 그 자유를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활용하도록 하심이 그렇게 창조하신 의도였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니 여기서 비로소 죄가 온 것이고 죽음이 온 것이다[롬 5:12]. 말하자면 범죄로써 인간 스스로 짐승 같이 되어 버렸으므로 3운법칙이라는 우리[cage] 안에 가둔 맹수(猛獸)로서의 인생 삶이 표현되는 현실로서, 실로 이런 참극도 없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하심을 받아 의인이 된다. 행함으로써 의인이 되지 못한다 하신 것은 행함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 복종의 행함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까닭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 의인이다. 그러나 의인이 된 다음에는 의인답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그 의를 유지 보전할 수 있게 된다. 아담이 그와 같이 그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이니, 이는 다시 말해 사랑에서 우러나는 계명 지키기, 말씀 지키기를 통해 역사되는 믿음이 된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킨다, 내 말을 지킨다"[요 14:15,23] 하심으로써 사랑과 순종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계명을 지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15:10/계 12:17/요 14:21/15:10,12/13:34]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과 통하고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왜냐면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올바르게 즉 사랑 가운데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정상적으로 사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것이 선하고[좋은 것이고] 의로운[올바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므로 답은 간단하다. 무릇 살고자 하는 자는 '사는 방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요 사는 방법이라는 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함이요 그 방법은 한 몸 체제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해 살고 따라서 그 머리의 지시를 ㄸ라 자기 이웃[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을 위해 사는 자기 부인에 있다.


나는 네 것이요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이[따라서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사는] 한 몸 의식 곧 공동체 의식 가운데 사는 한 몸 구조로서의 삶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 육체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부터 그리고 영계와는 분리되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이 생명의 법질서로부터 이탈한 까닭에 자기 자신도 자기 것, 자기의 소유도 자기 것,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기초부터 가르쳐 그리스도의 말씀[생명의 말씀이니 곧 자기 부인을 중심하는 생명의 법칙]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유치원 교육'을 시키신 것이 모세 율법이다. 그래서 일주 중 하루만이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안식일 개념] 가르치셨고 또 그런 일환으로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게[십일조] 하신 것이다. 물론 이는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잠정적인 조처였으니 왜냐면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네 것, 너는 내 것'이라는 자기 부인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 즉 구원의 목적이 산 자이면[죽은 자가 아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고후 5:15/롬 14:7-9]. 그러므로 영생을 받아도 그 영생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하는데 받으면 무엇하는가. 무조건 살기만 하면 즉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하는 주먹구구식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담이 왜 죽었던가. 그런 식의 구원이라면 아담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영원 멸망의 종결 처분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원리원칙을 따른 생활의 과학화다. 과학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만물의 원리원칙을 따라 만사가 진행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을 말함이 아닌가. 덮어놓고 살면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영생커녕 이 잠시 동안의 삶마저 지겨워 무의미하다고 느껴 자살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현실이 아닌가.


그러므로 삶의 법대로 다시 말해 자기부인을 핵심으로 삼는 사랑 가운데 살아야 자기의 최대한의 충만과 충족을 느낄 수 있어 그 때 비로소 사는 맛이 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스스로로는 오로지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고 자기 이웃들을 위하는 것뿐이지만, 머리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나와 함께 지체된 내 이웃들이 모두가 다 나를 자기 자신처럼 여겨 최고로 마치 정상(頂上)인 양 쳐주고 받들어 주니 내 스스로 나를 위하지 않건만 나 자신이 나를 위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위해지니 이것이 곧 진정 삶인 것이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눅 14:11/18:14]고 항상 경고하신 말씀의 의미 그 뿌리가 여기에 있다. 불 못의 밑바닥까지 낮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단순히 영생을 공짜로 준다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사는 법대로 제대로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는 방향으로 거꾸로 나갔기 때문에 아담이 생명에서 제외된 것이다. 생명의 세계에서 축출되는 결과를 그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거꾸로 나가도록 속여 오고 있는 것이다. 수렵 총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 총 쏘는 법을 가르치지도 않고 준다면 그 총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 하면 큰 불상사가 야기될 수 있다. 천하 없는 기계라도 그 기계를 다룰 줄 모른다면 그림의 떡이요 한낱 쇠붙이일 뿐이다. 그런즉 영생과 동시에 그 영생을 누리는 다시 말해 사람 사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인 것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한 몸으로서의 삶의 체제라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머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자기 이웃에게 지체로서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상호 봉사하는 것이 이웃 사람이다. 자기 부인이 그 방법이다.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오직 이상적인 무슨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명령하신다[행 17:30]. 믿으라고 명하시지 않고 회개하라 즉 이제는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기를 준비하라 하심이다.



오직 패망뿐인 자기중심으로부터 돌이켜, 사는 법대로 정식으로 올바르게 살라고 하심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드러나졌고 그 능력이 충분하고 충만하게 넘치도록 꾸려져 있어 각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세상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그렇게 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충돌은 불가피다.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서]들이 분류된 것처럼 영원 세계를 위해[지금은 그 영원 세계를 위한 준비기이다] 악인과 의인이 갈라져 가름되어지는 방법도, 바로 이런 의를 행하느냐 즉 "참고 선을 행하느냐[롬 2:7-10] 여부로써 결정된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으로 보답하시고 "자기중심이 되어"[selfish, self-willed: 우리말 번역 "당을 짓는다"는 것은 오역-롬 2:8] 악을 행하면 영원한 멸망으로 보응하신다고 바울은 명백히 하고 있다. 말씀하시기를, 천하와 맞바꿀 수 없는 것이 자기 생명이라 하셨다[마 16:26].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의 생명이시니[골 3:4] 그리스도와 그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 그 진주를 사들였다는 비유 말씀을 예로 들었다.


내 육체의 질그릇에 지닌 '그리스도'라는 진주


그리스도를 이와 같은 "진주"로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최대의 보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이 시험 많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니,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했으니 즉 모든 것을 분토(糞土)로 여긴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으로서 바울이 행한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의를 행함뿐이요 선을 행함뿐이었다. 그러나 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 즉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8]임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행한 의로써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은 의로써 그와 일치하게 "행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한 것이다t-size:15.0pt;">[약 2:20,26].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대낮 같이 밝고 환하여 조금도 어두움이 없으니 즉 알쏭달쏭 긴가민가 하는 것이 없다. 애매 모호하지 않고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없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고 여기는 여기고 저기는 저기라고 하듯이 헝클어진 데가 없다. 어렵게 보이는 것은 세상 욕심,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욕심 즉 자기 부인을 의식적으로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인해 '눈을 뜨지"[행 26:18] 못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대낮 같이 밝게 보아 진상을 터득하고 진실을 알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설혹 누가 죽인다 해도 진리를 버릴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각오가 충분히 넘치게 되어 있다. 때문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 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5-37] 한 것이다.


바울은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경고의 의미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는 말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골 1:24]으로써 "죽으심을 본받음"[3:10]이니 이는 "항상 복종함"[2:12]에 해당됨이요 "부활에 이른다"[3:11]는 것은 "구원을 이룸"[2:12]에 해당된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고로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빌 3:12-14] 하였다.


고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서 이 "부활"은 우리 "몸의 구속(救贖)"[롬 8:23]이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 "먹지 말라" 경고하신 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이는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른 복종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아담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렀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 역시 "거룩한 천사"[막 8:38]들과는 달리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영원 멸망에 처해진 것이다.


범죄한 아담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경우, 받은 바 영생을 제대로 지키는 데에 복종이 필수였는데 이 필수 요건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우지를 아니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는 "몸의 구속'에 해당되는 의미이니, 일단 몸의 구속을 받으면 더 다시는 시험을 당하는 일이나,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생명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는 거룩한 천사들처럼 모든 선별(選別) 작업[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을 구별해내듯이 영원 멸망에 들어갈 악인과 천국에 들어갈 의인들을 구별하는]이 영원히 종료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마땅히 두렵고 떨어야 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라는 경고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상 이유와 같으므로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첫 사람 아담이 에덴낙원에 있을 때가 바로 그런 기간이었고 영물(靈物) 들 역시 그러했으니 그들 역시 두렵고 떨림으로 임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 그 선별 작업이 끝난 것이나 지금 우리는 진행 중이어서 우리의 자율성을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단계다.


영물들은 선별 작업이 끝났으므로 지금은 거룩한 천사들은 두렵고 떨 이유가 없다. 지금 우리 인생들은 새 창조의 과정에 있다. 그리고 구원 받아 새 창조를 입은 사람은 즉각 과거 아담이나 영물들이 거쳤던 그런 선별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선별 기준은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종 여부다. 아담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까닭이다. 즉 먹지 말라 하셨으면 당연히 복종하여 먹지 않아야 하는데 이에 불복하고 자기 뜻대로 하여 다시 말해 자기가 자기를 위함으로써 자기중심이 되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죽음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먹으면 죽게 되어 있는 선악과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 하셨는데도 먹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죽음은 당시 아담의 경우 신령한 몸[영생하게 되어 있는]을 잃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죽게 되어 있는 시한부 생명]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함이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아담 부부를 거짓말로 속여 죽음에 빠뜨리던 그 당시 비로소 범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교만한 마음이 되어 범죄 중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창 3:1].


우리 구원이 처음부터 무작정 하나님의 미리 정해진데 따라 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選民)이 되어 있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누구든 무조건 멸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각자의 자율적인 복종 여하로 결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 10:5] 한 것이다. 비율로 따지면 60만 장정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각자의 자유 의지로 복종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래서 그 의지대로 될 수 있도록 조처하시는 것이 "미리 택(擇)하심"의 정확한 의미이다. 각자 자기 의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면 미리 정하실 리가 없다. 미리 아시는 대상으로서의 우리의 이 의지(意志)는, 처음과는 달리 중도에 변경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시종일관 믿음의 순종을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아담의 신령한 몸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경우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은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신령한 몸을 입게 됨으로써 창조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영혼 격이신[육체 창조 후 영혼이 조성되었던 아담의 그 동일한 과정을 밟으신 것이 우리의 새 창조인즉]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새 창조가 완료된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창조를 받았기 때문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모습 곧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사람이 되심으로써 자연계에 속하셨던 육체의 모습]이 현재 우리의 위치인 까닭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는 아무 하자가 없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창조로서의 완료'라 한 것이다.


그런즉 남은 것은 오직 선별 작업이다. 우리의 의지에 의해 끝까지 순종하느냐의 여부가 다루어지는 것이다. 아담이 그 선별 작업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에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된 까닭에 즉 신령한 몸을 상실하였으므로, 우리 역시 이 선별 작업에서 의인이 아닌 악인으로 판명되어 구별될 경우 다시 말해 아담처럼 탈락될 경우 당연히 그런 신령한 몸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경우 "몸의 구속"[롬 8:23]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일단락됨은 마땅하다.


다시 말해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인 "심판의 부활"[요 5:29]로 들어가게 된다. 심판의 부활이란 것은 자연계에 속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하기는 하되 생명과는 상대적인 멸망의 영역으로서의 영원한 고난의 대상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멸망의 고난이 한 때만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므로 신령한 몸이 되어야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썩는 일 없이 영원히 고난이 지속될 것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선별의 기준이 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으며[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골 1:24] 과연 순종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가 이런 육체로 남아 있음이다. 반드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어야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새 창조가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신령한 몸에 있으면서 그런 판별[선으로 나가느냐 아니면 악으로 나가느냐, 죄를 짓느냐 아니면 거룩함을 유지하느냐 여부를 가르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나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나 처한 위치의 의미는 같은 것이다.


고로 지금 이 기간[천국에 들어가기 전의]은 새 창조와 시험[선별]이 진행되는 때일 뿐이고 모든 것이 확정되어 정착해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니, 지금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는 양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본격적으로 살든 그래서 삶의 낙을 누리든 아니면 본격적인 죽음이 고난을 받든지 하는 것은 반드시 영원성을 띠는 것이므로, 이런 시한부의 기간[이 세상]은 바로 그런 선별 작업의 의미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기간이 다르고 엄연히 때가 있으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런 현실을 따라 현재의 세상 질서는 죽음이요 고난이다. 생명의 질서 체제가 아니다. 이는 더 이상 가미(加味)될 필요도 없는 현실 그대로다. 여기에 색깔을 입힌다고 해서 다르게 보여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다. 모양을 억지로 바꾼다고 해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단지 구원 얻을 사람은 다 빠짐없이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한 오직 그 목적 하나로 지금까지 지탱해 가고 있을 뿐이다.


생명이 나타나기 전에는 죽음 그대로이니, 이를 제대로 인식할 때 복이 있다. 왜냐면 생명의 날을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무한성과 상칭되는 유한성,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것과 대칭되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자연계에 속한 물질로서의 육체적인 것과의 대비(對比)다. 불가(佛家)에서는 일방적으로 한 쪽의 측면만을 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여, 우주 만물은 항상 유전(流轉)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 만물에 한해서다.


자연계와 짝을 이룬 영계를 고려에 넣지 않는 일방적인 소견이라, 한 면만의 동전은 화폐 가치가 없는 것처럼 진리로서의 면모는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만물이 현존하는 실상인 것처럼, 영계(靈界)에 속한 항구 여일(如一)한 것 역시 현존의 실체임을 간과함에서 오는 만법(萬法) 제행(諸行)의 가장 기본율이 되는 대칭 원리에 대한 무지 탓이다. 어린 아이라도 간파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이치이건만 부질없는 고집이 이런 어리석음을 낳는다.


사람의 육체가 썩어 죽고 나서야 그런 대칭 개념으로서의 영원성이 보장되는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상칭 원리를 적용하면 이현령비현령의 종잡을 수 없는 궤변만 된다. 지금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바로 그런 대립[대칭] 원리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먼저 눈뜨는  것이 지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부터 그런 원리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항상 유전[無常]하는 것이 있으면 그와 반대되는 것[如常] 곧 상주불멸(常住不滅)이 있음을 아는 것이 정확한 정보에 기초함이다. 무상한 것과 여상한 것과의 양면성은 현존하는 실체다. 실체는 "눈을 떠서 보고 알면" 되는 것이지 내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타개한답시고 입산 수도하고 득도에 정진한다고 해서 알아지는[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무상'을 안다는 것은 그 반대 개념의 실체인 '여상'함의 실존을 증명함이 된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말하는 양면성의 이치다.


여상함이 없으면 무상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기 못하게 되어 있다. 높음이라는 개념은 낮음이라는 말을 실체의 모습으로 떠올리지 않는 한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생 무상'이라는 의미는 '무상하지 않고 여상하고 상주하는' 실체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인생 무상이 현실이라면 상주하는 것 역시 엄연한 실체인 줄을 알 만한데도 이를 모르니 그것을 어찌 혜안(慧眼)이라 하리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면 되는 것이니 수도(修道, 도를 닦음), 정진해야 하는 차원은 아닌 것이다. '높은 것'이 있다면 '낮은 것'이 또한 공존한다는 증거다. 그러면 그 '낮은 것' 아니면 '높은 것'을 단지 인정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현재 '무상'에 처해 있음을 알지만 내 스스로가 이 '무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스스로 이 '무상'의 비애를 택해서가 아니라는 이치와 같다. 나의 자유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내게 태인 것일 뿐이다.


내 스스로 택해서 '무상'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마찬가지 이치로 내 스스로 택해서[깨달음 등으로 해서] 이 '무상'에서 벗어나 '여상'으로 돌입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엄연한 진실이요 현실이다. 왜 이런 불가능[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내 스스로 자유의 경지 곧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으로 착각하고 끙끙거린다는 말인가. 따라서 인간은 '여상'한 것의 가치를 알아 '무상'함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여상을 의식 않고서야 무상의 허무를 어찌 알리요], 왜 인생이 '여상(如常)'에 위치하지 않고 '무상'에 처해 있는지 그 원인을 알고자 해야 정도(正道)가 된다.


내가 처해 있는 이 객관적 현실을 내 스스로의 주관적인 깨달음[득도]으로써 완전히 그 반대되는 쪽으로 옮겨 갈 권한이나 능력이 애당초부터 내게 부여된 바가 없다고 하는 인식이 상식이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지 서로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대칭성의 원리에서 확인되는 바다. 상식을 떠나서 무슨 진리가 있다던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니, 자연계에만 국한해서 보는 편협된 안목의 원인은 조물주를 젖혀놓고 피조물 자체만을 두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시행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결론이 도출될 리가 만무하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문제가 어디 있는고 하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원래 정상적인 인간 육체 그대로인 줄 착각하는 데 있다.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문제냐 하면 말과 달리 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사람은 원래 영생하는 존재이며 이런 자연계가 아닌 영계[에덴낙원]에 살도록 되어 있고 따라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UFO로 입증되듯이 만능(萬能)의 신령한 육체인 것이다.


범죄함으로써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썩는 육체로 전락한 것이다. 신령한 "영광의 몸"[빌 3:21]으로 있다가 이렇게 된 것이니 그런 영광의 몸에 비하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그야말로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왜냐면 성경에 이르심과 같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벧전 1:24/사 40:6-8]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풀과 같고 기껏 해봐야 꽃과 같은 인생을 만드실 리 없지 않은가. 이 사실만 알아도 당연히 이 세상 삶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오직 성경에 이르신 대로 행하고 온전히 180도 전환된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 아닌가.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하는 이른바 믿는 이들은 또 어떤가.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 증거가, 이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살겠다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의 경우 즉 세상 불신자들은 조상의 음덕으로[조상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잘 살겠다는 것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살겠다는 그 차이뿐이다. 생각해보면 뻔하지 않은가. 지금 이 모든 인생들은 저러다가 내일이라도 죽으면 영원한 "고난의 연기"[계 14:11]가 오르는 곳에서 지내며 항상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뿐인 환경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이라면 또 상식적이라면 그리고 양심적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건져내기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이 세상을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영생을 얻는다며 영원한 축복으로 살 미래를 그 영원한 세월을 두고서도 이 세상에서조차 축복 받아 잘 살고자 하니,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러나 양심의 소리만은 밤낮없이 듣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서조차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을 정도다.


의와 선, 그리고 죄와 악의 구별은, 자기네는 즉 나만은 특수하다 하여 주변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삶의 낙을 즐기는 그런 삶이냐, 아니면 고통 받으면 함께 고통 받고 즐거우면 함께 즐거워하는가[롬 12:15/고전 12:26,27] 그래서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하나' 의식 속에 살아가느냐 하는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즉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를 위해 죽으신"[갈 2:20] 것은 바로 나와의 하나됨, 모든 피조물과의 한 몸 체제로서의 머리 역할을 하신 것임이다. "선한 목자는 양떼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 하심이 모두 같은 뜻이다.


생명의 한 몸 체제에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피조물을 따르게 되어 있고 이것은 반드시 멸망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된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같은 피조물의 말을 더 따랐고 그렇게 따른 여자의 말을 아담은 하나님 따르기보다 더 한 것이다. 나 자신도 이런 의미에서 "피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눅 4:5-7] "이것을 얻으려면 내게 절하여 경배하라" 한 것이니 곧 자기 말을 따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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