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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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여, 네 자랑할 것 아무 것도 없느니라.
56개, 57개의 마디도 어찌 저리 벌레의 마디를 닮았는고!
사람은 자연계 육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이중구조이기에
마디도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 뿐 이 벌레를 빼닮았다.
보잘 것 없는 자연계 마디 두른 육체의 삶과는 반대로 영원성을 띤 존재가 인간이므로
그 마디는 다시 아래와 같은 훌륭한 식물의 왕중 왕인 대나무의 마디라고 선언되어 있다
올곧은 마음으로 독야청청 푸르른 기개와 절조로 살진대 이 벌레로서의 참경(慘境)을 벗어나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막강한 초능력의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군림하게 된다는 약속을
모든 인생들에게 주셨나니ㅡ그대여, 만사 젖혀놓고 오직 이 일에만 매달릴지어다
콘크리트 양생(養生)
12 사도 중 어느 누가 또는 바울이 마리아를 그런 식으로 들먹인 적이 있던가. 왜 중간에 와서 마리아를 앉혀 놓고 마리아를 가리키는가. 마리아의 도(道)를 새로 만든 것이지 그리스도의 도는 아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개신교나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은 논리성을 벗어났다는 증거다. 논리적이지 않으니 횡설수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결코 어렵지 않고 사람 사는 도리나 하나님이 구원이 "어려울"[요 6:60] 까닭이 없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실에 기초하고 진리에 바탕을 두어 그 근거를 대어야 하는데, 말로만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 해보아야 있는 것은 여전히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여전히 없는 것이니 그 사실이 변할 리 없다. 있으니 있는 것이고 결코 없는 것일 수가 없다. 우주는 우주이고 나는 나다. 부처는 부처이고 나는 나인 것이다. 내가 부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가 무슨 신이던가. 그러면 인간이 신이 된다는 말인가.
신은 또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신이 인간일 수 없고 인간이 신일 수 없다. 인간 구원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강조하여 가르치지만, 내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곧 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다고 가르치지만 내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말은 결코 혼돈스러움이 없어야 하는 것이 그 생명이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는 말이 예로부터 있듯이 미숙한 것이 인간의 말이요 원래 짧고 모자람이 인간의 표현 능력인데 이마저 혼탁하게 한다면 이는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런 궤변을 농한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일이니, 설명하지 못하면 못한다고 정직하게 말할 것이요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여 자기에게만큼은 진실해야 할 일이다. 진리를 알고 있다면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평범한 언어로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진리는 원래 평범한 데에 있으니 일절 고답적인 말은 필요치도 않거니와 원래 쓰지도 않는 법이다. 그런 것은 오직 ‘자기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는 실상을 통역(通譯)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스스롤 먼저 알고 나서 말할 일이다. 그런 어법을 철회하지 않을진대, "나는 아무런 진리도 아는 것이 없노라"는 선언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법이라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들을 모두 알아들으면 된다.
개신교도 불교도 천주교도 그 어느 종교 또는 그 어느 누구[사이비 형태로 나타난]의 말도 믿지 말고, 오직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그 말씀에 나타난 대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어버이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은 너무나 간명하다. 인간 구원은 '새 창조'에 있고 사람 삶의 이치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구조'에 있다. 이것뿐이다.
데레사 수녀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종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는 결론밖에 더 얻지 못함이니 자기 종교를 위했다는 것은 결국 자기 구원을 위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사람 사는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함이 마땅하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가 할 때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바로 사람 사는 도리다. 그 행복하게 사는 도리는 다름아닌 한 몸의 원리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의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삶이다. 한 몸 구조를 요약하면 머리와 몸의 관계 그리고 몸의 각 지체(肢體) 상호 관계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즉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안되는데도 자기를 위하니 그것이 범법(犯法) 행위다. 그래서 불법(不法)이라 하고 사람 삶의 올바른 도리를 따르지 않으니 불의(不義)요 그래서 죄요 악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와 악을 용납하실 리 없다. 왜 자기를 위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자기를 위하면 자기중심이므로 자기 위에 올라서는 것은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결국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처럼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요 서로가 그러하니 공멸(共滅)로서 파국뿐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 이유를 알아야 하든 않든 결판이 날 것이 아닌가.
한 몸의 원리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은 머리가 자기를 위하고 이웃이 자기를 위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나으니, 내 이웃[나와 더불어 한 몸의 조직 내에서 상호간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의 숫자만큼이나 나 자신이 확대, 확충, 확장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야 불문가지다. 삶의 최고 지혜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 삶의 마땅한 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계명이라 하고 율법[모세 율법과 혼동하지 말 것이다]이라 하는 것이니, 그 모든 말씀이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것이 없음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을 강조함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의 지시대로 따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명령을 지키지 않으니 바로 자멸행위가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데레사 수녀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 되니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자기 종교에 충성하는 것으로 일관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보라"는 것이다. 보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슨 단독 행위이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미 이룩되어 있는 나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단독 창조 행위’라는 것은,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 각자를 위해 그와 같이 죽으심,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 등의 일체의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나[행위, 노력]’라는 것이 일절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심을 확증하셨으니[롬 5:8/갈 2:20]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일절 없다'는 것 또한 당연히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서 받아 모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니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나,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죄를 짓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가 확고한 바탕으로 삼고 말하는 그 요지이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는 또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재의 우리 구원이 구원된 ‘상태’를 나타냄이지 ‘결과’를 말함이 아닌데도 ‘결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를 완전히 굳히기 위해서는 얼마간 가마니 같은 것으로 덮거나 물을 뿌리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하여 보호하게 되는데 바로 이 이치와 같다. 만일 그렇게 양생(養生)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와 같이 반죽이 되어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조심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렇게 취급하여 망가뜨리면 그 콘크리트는 망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고 그 반죽 상태를 콘크리트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구원 받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오직 '상태'[콘크리트를 굳혀야 할]와 '결과'[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어 있는]의 차이인데 이를 구별하지 못함이다. 성경의 모든 경고는 이 "굳히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모든 것을 말함이다. 많은 사람이 이 ‘굳히기’ 작업에서 "항상 복종하지"[:12] 않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그르치고 "구원을 이루지"[:12] 못해 자기 구원을 망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전반적으로 이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사이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이것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음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바"[롬 9:1,2,3]라 했던 바울은, 그 자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고"[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있던 표본이었다.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경고했던 사도이니 그 자신 본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다[고전 4:16]. 역시 같은 말로 기도한 모세의 심정이 그러했다[출 32:32].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 경고하고 "나 자신을 구원한다"[딤전 4:16]고 해서 내 구원이 목표인 줄 결코 착각하지 말 것은 위의 바울이 표명에서 보듯이,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 데에 있으므로 복종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가장 핵심되는 것 중 하나이므로 이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인데 그 하나됨이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게 되면 구원도 당연히 없다. 존속하는 방법이 다름아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동시에 위함이다. 이 "동시"라는 말이 여기서 핵심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움직이심과 내가 동시에 함께 움직임이다. 물론 이 움직임의 첫 시작, 첫 출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나 위해 죽으심이다. 나는 이를 "보고" 믿어 구원 받는 것이니 문제는 이를 본 대로 따라 행하는 동작이 또한 나의 구원이라는 사실인데 이를 간과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모든 비극이다.
그 동작은 당연히 회개에서부터 그리고 다음에는 지속적인 복종으로 연이어지니 삶 자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와 하나를 이루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우리 구원 자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우리가 먹을 양식으로 되어 있으므로[4:34]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만물만상이 상칭(相稱) 원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 삼위일체 원리다. 즉 양면성의 원리, 짝의 원리이니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영계가 있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계의 식물이 있으면 영계의 식물, 동물이면 영계의 동물이 있으니 이들이 영물(靈物)들임을 앞서도 지적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영물"은 식물보다 동물 쪽을 가리킨다. 에덴낙원의 "뱀" 곧 오늘날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계 12:9/20:2] 바로 그런 ‘동물들’[창 2:19] 중의 하나다.
사람도 그러면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상칭(相稱)의 구조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한다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어 모든 피조물 중의 어른[首長] 격이어서 피조물을 대표하고 또한 그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정점(頂點)이면서도 영계에 속한 생물체의 시작(始作, 始發)점이어야 하는 그런 특성을 갖춤이 사리에 맞다.
그래서 그 자체 내에 자연계에 속하는 것[육체]과 영적인 것[영혼]을 아울러 겸비한 이중 구조로서의 유일한 존재다. 그리하여 자연계에서 인간은 여러 동식물을 다스림과 동시에 영계에서 또한 영적인 동식물을 지배하는 위치였었다. 그런즉 인간은 이런 영계의 영적 "동물"들과도 불가분인 것이다. 자연계에서 또한 그렇고 영계에서 역시 그러하니 이들 영물들이 바로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아래에 있어 그 다스림을 받는 위치였는데 그 중의 하나였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꾐에 빠져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거꾸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악령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자 자동적으로 이들 악령들은 인간 위에 신(神)들로서 군림하게 됨이니, 자연계에 위치해 있는 인간에게는 영계의 영물들이 가히 신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러므로 이들의 존재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행 26:18] 것으로 나타내셨다. 물론 영물이라고 악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자기 분수를 지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삶의 도리[이는 인간에게나 영물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됨이니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이고 자기중심이 범죄이므로]를 따라 충실히 행한 "거룩한 천사"들은 여전히 자기 임무를 다하여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히 1:14]들로서 건재하다.
이들 영물들간의 전쟁(戰爭)도[계 12:7/단 10:13] 인간을 둘러싼 것이니,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은 인간을 해치려는 자들이고 모든 천사들은 인간들을 위하는 세력들로 대립하여 있음에서 야기되는 힘 겨루기다. 그런데 이 최종적인 결전이 끝났고,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소위 "UFO"니 "외계인 운운" 하는 것은 모두 악령들의 소행이다. 인생들을 장악하고 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랴.
악인들에게는 악령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거룩한 천사들의 막강한 힘은 "구원 얻을 상속자(相續者)들"[히 1:14]을 위함이니 모든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영(靈)"들 또는 신들인 것이다. 이런 "신의 성품"[벧후 1:4]으로 말하면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됨으로써 "몸의 구속"[롬 8:23]을 받게 되면 화려하게 "참예하게"[벧후 1:4]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 역시 "그와 같을 줄을 안다"[요일 3:2]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3].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에는,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컫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만유의 상칭(相稱) 원리가 하나님 계시는 모습에서 확정되고 수립된 것이라고 했거니와,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 이런 영원하신' 짝'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짝으로 계심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버이'와 '자식' 관계로서의 상칭 개념이다.
이는 당연 논리이니 홀로 계시던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만드심으로 해서 상칭 관계가 되셨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은 오직 어버이와 자식 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 되어 계심이다. 인간의 남녀 관계도 애초 '파생(派生)시킨 것'과 '파생되어 나온 것'과의 차이니, 아담[남자]이 전자에 속하고 여자는 후자다. 여자가 아담의 육체로부터 나왔으니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써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친히 여자를 만드시지 않고 아담 자신이 그렇게 해서 여자를 존재하게 했다면 그 때는 "여자"가 아니라 아담의 "자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 친히 만드셨기 때문에 남녀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니 신체적 구조가 다르게 하셨고, 아담 스스로 그렇게 했다면 자기와 똑같은 신체 구조였으리라. 무릇 만물은 다 짝을 이루고 있는데 그 짝을 이룬 것 가운데에서 그러므로 대등(對等)한 것은 없다. 왜냐면 짝의 개념의 본질은 인과(因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즉 대칭이라는 것은, '기본형'을 근거로 해서 그 '대칭형'이 생겨난 것을 말함이기에 그러하다.
이는 역시 똑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를 통틀어도 나 하나뿐이다. 이것은 우주 만물의 다양성을 말하기도 하고 우리 인간의 개성(個性)의 존엄성을 말하기도 한다. 불교 용어를 아전인수 격으로 쓴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의미를 바로잡아 주는 데에서야 할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음부터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짝을 이루어도 반드시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관계다. 그리고 ‘종적(縱的) 인 짝의 개념’, ‘횡적인 짝의 개념’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 이 우주 만물의 ‘관계와 관계’의 속성이다. 예컨대 남녀[부부]는 횡적인 짝이다. 그리고 엄마와 아기는 종적인 짝의 개념이다. 엄마 아빠도 동등관계가 아니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생겨나 창조된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악한 자"-적 그리스도
오늘날의 소위 "양성평등"은 무지의 소치다. 무조건 과거의 것은 낡은 것이고 현재의 것은 진일보, 진화한 것이라는 관념은 건설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것으로서 기피할 일이다. 한정적인 과학 분야에서의 발달을 제외하면 오히려 정신문화 면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소위 "문명"의 현실적 특성이다. 정신 생활에서의 이런 급격한 퇴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이기주의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기주의와 개성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라 별개이다.
이런 상반된 현상은 이 물질적인 풍요라 할까 발전이라 할까 하는 것이 인간 삶을 더 윤택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인류를 기만하기 위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계 통치를 보다 용이하게 하려는 획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함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기만 하면 천사들처럼 되어 모든 능력을 구비하게 되어 이런 문명의 산물(産物)들은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처럼 무용지물이 될 것인데 왜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오직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구차한 자연계에 속한 삶을 그대로 영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삶을 증오하라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다. 마땅히 증오할 것을 증오하지 않으면 마땅히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까닭이다. 세상 삶을 사랑하는 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천사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있는가. 천사들이 인터넷 등에 푹 빠져 마냥 즐기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소위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한정적이고 속박되어 있는지를 오히려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천사들처럼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면 이런 모든 것이 구질구직한 것이 되어 오히려 화려하고 웅장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삶에 누추한 걸레 같은 것이 된다.
유일하게 이상의 모든 진실에 대한 그 내력을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이니 이런 모든 기기적(器機的) 문명 발전에 심취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로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때를 가리켜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사람이 신속히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이라"[단 12:4] 예언한 것이다. 인류의 행복하고도 편리한 삶을 목적하는 것이면 처음부터 이런 예언이 이루어졌어야 마땅하지 왜 세상을 접으실 즈음에 이루어지도록 하시겠는가. 마지막 때 마귀가 최후발악적으로 대대적인 속임수를 펼칠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그런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현상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격하하여 폄훼하려는 배후 조종 세력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획책이라 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장차 마지막 역사의 무대에 출현할 그 자신의 "적(敵) 그리스도"를 미화(美化)할 수 있고 그 권위를 합리화하여 세울 수 있고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면 지금까지 그런 소위 "문명 발달"이 지금까지 지연되어 왔느냐 하면. "막는 자가 있어"[살후 2:7] 악한 자가 자기 때에 출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장애가 걷혀져 바야흐로 그 "악한 자[적 그리스도]"는 자칭 "신(神)"이라 가장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는 시점이다. 여기서 "악하다"는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선이 무엇이냐"에 대한 앞서의 설명을 따르면 된다. 즉 모든 것은 올바르고[義] 좋은[善]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나쁘고[惡] 올바르지 못한[不義]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몸의 원리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의당히 머리를 위하여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악[좋지 않음]이다. 따라서 ‘악’이라 함은 세상에서 인식하듯이 인상도 험하고 흉물스럽고 남에게 포악하고 무례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무자비한 독재자 같은 것을 말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머리로서의 하나님',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일체를 말함이다. 이 차이를 분명히 각인해 둘 일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만 빼놓고는 모든 면에서 성현군자로서 성인(聖人)중의 성인이요 그리고 장중하고 아름답게 고상함의 극치를 이루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과연 넋이라도 빼놓을 그런 출중한 인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인 것이다. 당장은 의인, 선인(善人), 성인(聖人)으로 나타나도 가장(假裝)일 뿐이고 결국은 시간이 흐르면 그 자기중심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음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단지 거짓말 혹은 거짓은 그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공통된 특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누가 감히 거짓말을 하고 속이려 들겠는가.
아름다움이 반드시 선(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악령이라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현란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는 까닭이다. 용의 모습이니 용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독보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악령이니, 악귀니 하고 말할 때 험상궂은 괴물과 요물로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그들 중 몇을 그런 험상궂은 모습으로 변장하여 인간 앞에 나타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자기 스스로를 "광명의 천사"[고후 11:14]처럼 나타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 사람으로서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속 마음이 간악하면 자연스럽게 그 눈빛에 그 사악함이 반영되고 살기가 느껴지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아무리 영물이라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외형적 아름다움은 내면적 아름다움 곧 사랑의 외부적 표현이므로 따라서 아름답게 애초 창조되었음에도 그 스스로 악을 좋아하여 악한 마음으로 일관할 때에는 그 표정 역시 섬뜩한 악기가 반영되지 않을 수 없듯이, 악령들은 아름답기는 해도 그런 아름답지 못한 것을 후천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벌써 그 눈망울에서 그런 아름답지 못한 것이 노정되게 마련이다. 마왕(魔王) 용(龍-계 12:9/20:2)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바로 그러하다.
고로 장차 나타날 적 그리스도는 사악하고 험악한 인상의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소위 대자대비하고 사랑이 풍성한[위에서 지적했듯이 당장에는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구세주로 임할 것이니 경계를 요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성경의 하나님, 성경에서 나타내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세상의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니[자기 스스로 "그리스도"라 자처할 터이므로], 과연 이 비단결 같은 속임수에 아니 넘어갈 자가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각종 현란한 기적으로[살후 2:3-12] 자기를 과시하여 "그리스도보다 더 크고 많은 기적"이라 선전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아직 그런 때가 당장 눈 앞에 다가서기 이전에 지금 지체하지 말고 성경을 파고들 일이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충분한 그 본 뜻을 깨달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일이다. 그리스도의 미리 하신 경고대로 이제는 낮이요 일단 밤이 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요 9:4].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는 때가 이 "밤"이다. 지금은 이 기준대로 하면 한참 무르익은 저녁 무렵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함은, 양성(兩性) 개념에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인간에게 어버이[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되시는 실상을 그렇게 인간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인간적 언어"인가 하면,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로서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이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표성(代表性)으로서 "아버지"일 수밖에 없음이다. 대표성이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이실 때는, 인간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포함됨은 당연하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말씀을 나타내시니 당연히 사람 삶의 모습을 따라서 표현되는 "아버지"이시니, 왜냐면 사람의 일을 표현할 때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여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담은 애초 남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물들처럼 그런 성별이 없는 완전한 몸으로 창조된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만일 남자로 창조되었다면 당연히 여자도 즉각 창조되었을 것이지만 그렇지를 않았던 것이다.
먼저 아담의 영혼이 조성되어 이에 맞추어 에덴낙원이 창설되었고 거기에 아담을 두신 다음에야 "사람이 홀로 있음[獨處]이 좋지 않다" 하셨으니 그 때 비로소 짝[helper]의 필요성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러하시고도 여자를 창조하시지 않았음에 유의할 일이다. 대신 영물들을 지으신 것이다. '그 중에서 짝을 찾지 못하시므로" 그 때 비로소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맨처음 창조된 아담이 이와 같이 여자가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아담을 기준하자니 부득불 남성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나중에 남자가 되는 아담이 맨처음 창조되었고 여자가 아담에게서 났고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 역시 마땅하다[고전 11:3]. 대칭 관계에서 대칭형은 기본형을 근거로 해서 생성됨으로 인해, 기본형이 머리가 되고 그 대칭형은 그 머리의 몸을 이루어 한 몸 즉 둘이 하나 됨을 형성하는 것이니, 이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항상 머리와 몸의 관계이므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근거로 한다.
남자와 여자
성별(性別)이라는 것은 영물(靈物, 천사)들에게는 없다. 영적 존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적 존재로 애초 창조되었기 때문에 성별이 없었음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성별은 오직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생육 번성을 위함이다.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영적인 몸이 되어 있는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므로 상대적인 능력이 있어 주변 영물들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자기 닮은꼴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으로 하면 남성과 여성을 자기 자신 안에 모두 갖춘 일종의 단성생식(單性生殖)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여자를 만드실 때에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생식 목적이 아닌]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에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므로 바로 그런 모양새를 갖추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향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미리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었을 경우 생육과 번성도 가능한 그런 신체 구조를 형성하게 하신 것이다.
과연 인간이 범죄하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리자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처럼 생식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애초의 의미 즉 둘이 서로 화합하여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데에는 처음부터 못미쳐 있었던 것이니, 여자가 남자와 더불어 의논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일을 저지른 다음 오히려 남자더러[앞에서 지적했듯이 남자는 실질적으로 여자에게 어버이뻘인 것이니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 자기를 따르도록 했음이다.
그러니 이와 같이 깨어져버린 균형[창조에 따른 주종, 대소, 인과 관계]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도록"[창 3:16] 되어 있는데 범죄의 결과 저주를 따라서 된 것이므로 이것이 정상일 수도 없고 결국 이런 남녀간의 상호 부조화가 인생 비극의 원천이 되어 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니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즉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하라 했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응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엡 5:24,25]. 이렇게 되면 완전 일치 조화다. "동등"이니 무엇이니 하고 다툴 이유가 없어진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범죄하기 전의 아담 부부 즉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듣지 않게 되면서 즉 종적인 관계가 무너지면서 횡적 관계도 필연적으로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천국에서는 더 다시는 그런 생식 작용이 인간에게 해당되거나 적용되지 않으므로 성별도 없어진다.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복귀함이다. 신령한 몸은 원래 성별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담은 신령한 몸이었지만 원래는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먼저 창조된 까닭에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여자가 창조 가능했던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처음부터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들의 신령한 몸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아담의 신령한 몸은 나중에 에덴낙원에 거처하면서부터 일어난 변화이다. 그래서 양성 관계로 존재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으나, 우리로 말하면 이미 영혼이 있는 영적 존재로 있다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인즉["몸의 구속"] 아담과는 다르다. 그래서 마치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된 영물들과 같은 차원 또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이 우리 각자의 구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래부터 이런 성별에 구애당하실 리가 없다. 단지 사람으로서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자니까 부득불 남자가 되셨다는 것뿐이다. 성별을 갖추지 않은 인간이 있던가. 그러나 이제 인간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대표하여 여자가 생기기 전 애초의 아담의 모습 그대로 신령한 몸이 되어 계신 이상 성별은 의당히 없으신 것이고 우리 역시 그 몸된 각 지체들로서 닮은꼴일 수밖에 없다.
자연계와 영계의 총수(總帥)로서의 인간[아담]이 하급(下級) 세계인 자연계의 육체 구조를 따라 남녀가 되어 있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아담에게 짝[남녀로서의 짝이 아닌 둘이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관계로서의 짝]을 만들어 주려 하셨고, 그래서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드신 "각종 짐승들"[영계인 에덴낙원에 속한-창 2:19]이었으나 그 중에 아무도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물들이 모두 다 아담의 짝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짝을 구해 주신다는 의미 또는 필요에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을 위해 창조된 것은 분명하니 이는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고전 11:9]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그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니 이 빼어난 모습에 비등한 영물이 없었고 아담의 마음에도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아담의 닮은꼴이기 위해서는 남녀 관계 즉 자연계에 속한 동물의 기준으로 암수[雌雄] 구조에 의한 여자 창조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즉 여자가 창조되면서부터 아담은 비로소 남자가 된다. 이 경우 아담[남자이기 전에는 남녀 양성을 다 구비하여 생산의 기능도 가능하니]으로 하여금 자기의 닮은꼴을 낳게 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겠으나, 그렇게 되면 어버이로서의 아담은 자기 자식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측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니까 아무리 아들[獨生子]을 두시더라도 소홀히 여기시거나 경시하시지 않지만 아담은 완숙하지 못한 피조물인지라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음이다. 그런 면에서 완전하지 못하니까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불완전한 것은 없다. 나름대로의 모든 완성미(完成美)를 모두가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아담의 아들은 무조건 아버지에 대한 의타심만 조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정상적인 짝으로서의 개념을 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미 인간이 범죄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가는 불행을 당할 것을 미리 아셨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다. 만일 자연계의 육체로 돌아가 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미 지적한 대로의 생식 증산을 위한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과연 인간은 범죄하게 된다. 그래서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지금까지의 신령한 몸이 도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귀속되어 버리자 그 찬란하던 빛의 옷이 사라지면서 남녀로서의 몸의 구조 즉 포유동물의 암수 구별로 된 육체의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얼른 그 수치를 면하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사귀를 뜯어 그 아랫도리의 앞을 가렸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수치를 느낄 이유는 없다.
그런 성별이 없는 주변의 영물들을 의식해서다. 상대적으로 하급(下級) 세계인 자연계 생물들의 신체 구조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으므로 그런 것이 없는 영물들 앞에서는 창피했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옷을 입게 되는 기원(起源)이다. 애초 빛으로 몸을 가리게 되어 있는[옷을 입는, 여기서는 몸을 단장한다는 의미가 더 적합할 터] 신령한 몸을 목적하셨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지으실 때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털북숭이가 아닌 매끈한 피부로 지으신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이런 인간의 ‘창피스러움’을 감히 하나님께 적용시키고 모독하는 신흥 사이비가 요즘 일어나 "어머니 하나님"이라 하여 교세(敎勢) 자랑을 하고 있다. 기독교문화에 젖어 있다는 구미 제국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니 얼마나 성경에 대해 무지한지 그 실상을 알 만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구미 제국이라 하면 무조건 기독교 문화 내지 기독교 국가쯤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전부이어서 필요 없는 오해로부터 오는 해독이 클 것이기에 이를 미리 바로잡자는 뜻에서다.
하나님의 양면성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 모성(母性)과 부성(父性)에 있다. 아버지께서는 부성, 아들께서는 모성을 나타내심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시라는 종적인 짝의 개념으로만 계시나. 남녀 성별로 되어 있는 인간의 기준[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으로 볼 때 이러한 부성과 모성이라는 짝의 개념으로 계신다는 뜻이니 이런 특성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역시 같으시다. 똑같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리스도를 마치 사랑의 화신(化身)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우리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영락없는 어버이의 모습이심과 동시에 심판 자리의 두려우신[악인들에게는 무자비하신] 재판장이신 엄연한 양면성으로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 없으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는 바울 역시,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고후 5:9-11]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특성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말 그대로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시라는 것뿐이다. 크고 작으심의 차이다[요 14:28]. '실체'와 '형상'으로서의 차이다[고후 4:4]. 그러므로 "아버지‘시라 하고 "아들"이시라 하는 것은[왜냐면 모든 인간은 남녀 어느 한 가지 표현으로만 가능한 터이므로 인간이 알아듣기 쉽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에] 남성 위주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남녀 양성에서의 그 대표성을 따라 표현하는 것인즉 "아버지"시라 했으니 역시 이를 기준하여 "아들"이시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역시 남녀 불문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말은 남녀 성별로 "자녀(子女)라는 말을 쓰나 영역(英譯)으로는 그런 성별을 나타내지 않는 단지 "children"으로 표현한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다"[고전 11:8]는 말 역시 여자가 생기기 전에는 인간[아담]이 성별이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함이다. 태초(太初)의 남자에게서 태초의 여자가 나는 법은 없다. 남자에게서 나는 것은 남자일 뿐이니, 종류가 같은 것끼리의 낳고 낳아짐이다.
'남자[남자로서의 신체적 특징을 지닌]'를 지어놓으시고 '여자'를 안만드실 리가 없다는 뜻이다. 아담이 남자가 아니라 성별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로서 성별로 나누어질 수 있음이다. 그리고 아담은 그 후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는 표현을 쓰는 것뿐이다. 고로 인간은 신령한 몸을 입은 능력자로 창조되어 있었을 때는 생식을 위해 구태여 남녀라는 성별이 필요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막강한 능력으로 아담[이 때는 남녀 어느 쪽도 아니고 단지 영물들처럼 ’완전한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스스로 자기의 닮은꼴[後代]들을 얼마든지 양산(量産)할 수 있는 터였다. 이제는 여자가 생겼으니 둘이 합동하여 훌륭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범죄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감으로써 이 성별(性別)은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후손들을 생육하는 일로 전락해 버렸다.
전에는 오직 교제를 목적함이었는데 이제는 저주 속에서 하극상(下剋上)이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 손위[手上]의 아담을, 여자가 자기 손위의 남자를 넘보는 시대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니 그래서 인간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쟁투(爭鬪)요 남녀 사이가 하나는 다스리기 위해 윽박지르고[창 3:16] 다른 하나는 그 윽박지름을 억울하게 당하거나 아니면 내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각박하고 살벌한 사이로 변해 버린 것이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저주이다. 왜 여자가 남자를 넘보는 것이 되었느냐 하면, 이미 설명한 대로 여자에게는 아담[남자]이 어버이뻘이기 때문에[그래서 자식이 부모에게서 나듯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지 않았던가]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들었을 때에도 자기 스스로 행동할[마치 남자 없이 자기 혼자 생겨난 것처럼] 것이 아니라, 일단 남자를 찾아가 상의했어야 하고 그것이 둘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관계로서의 정상 관계인데도 자기 스스로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것처럼 남자에게 먹도록 권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류 최초의 불행한 월권행위를 한 셈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도록 하신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넘보려 하므로"[창 3:16]가 그 이유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도 넘보는 것도 모두가 비정상이다. 사랑 관계에서는 그런 관계가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범죄 행위로써 남녀 간의 사랑 관계,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관계도 파탄이 난 것이다. 오직 육체 사이의 한 몸되는 것으로만 잔존하게 된 불행이니 곧 저주다.
우리말 번역 "사모한다"[:16]는 것은 오역이다. 왜냐면 가인이 아벨을 증오하기 시작하여 죽이려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기를, 죄가 가인을 사로잡아 그 비참한 결말을 내려 한다는 내용으로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4:7] 하실 때의 성경 표현이 영역(英譯)대로 하면 "sin's desire is for(toward) you"로서, "your desire for(toward) your husband"[3:16]와 똑같다.
죄가 가인을 곱게 보아 사모할 턱이 없다. 이는 "아담이 홀로 있어 짝이 필요하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의 경우에도 이를 "배필"로 번역한 오류와 같은 것으로서 번역자의 선입견이 개입한 결과다. 배필이 아니라 영역으로 하면 단지 "helper[조력자]"이다. 이 "helper"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도 사용되는 같은 단어다[요 15:26/16:7]. 영역[KJV]으로는 "Comforter[Counselor-NIV]"이고 우리말 번역은 이를 보혜사(保惠師)라고 했으나 원래의 뜻은 "helper[Gr. Parakletos]"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일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영혼처럼 계시니 바로 훌륭한 짝으로서의 개념으로서 육체로 말하면 아담의 남녀 짝보다 더 친밀한 불가분의 관계다. 원래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 엄마와 그 품속의 아기 관계이니 이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이 관계를 다시 풀이해서 그런 여러가지 모양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뿐이다. ㅁ리와 몸 관계도 그러하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하셨다.
성령을 선물로 주심 즉 우리를 구원하심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행 1:8] 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 세상 자체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면"[마 24:14] 지체없이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 살기 위한 장소로서는 전연 의미가 없는 세상인지라 이는 당연하다.
극과 극의 양면성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함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강조했으니 우리의 삶은 극과 극의 양면성의 삶이다. 양면성의 원리다. 이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곧 "구원을 이루라"고 한 "구원"의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우리가 현재 구원을 받은 몸이니까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실상이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한 것처럼 멀쩡하게 거룩함과 모든 의로움으로 창조되고서도 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범죄로써 죽음의 운명에 처해졌으니 이를 보고서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두렵고 떨 것은 당연한 얘기다.
"옳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 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한 그대로다.
아담이 범죄하고 악령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강제하심으로써 그들로 범죄 못하도록 하실 수 없었음과 같이 나 역시 그러하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키지 않아 구원을 이루지 않는데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지켜 주실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나를 지킨다고 해도 내 스스로 나를 지킬 수 없는 것은 이제 나의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일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도" 내 힘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시어 나의 구원을 이루어놓으셨어도 내 스스로 이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뜻과 명령에 순종할 의사가 없는 한 그 구원이 단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음과 같이, 내 스스로 움직여 나를 지킴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세로 나가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능력 역시 속수무책이라는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엄정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원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따라 움직이신다. 이 원리를 벗어나시는 일은 일절 하시지 않고 하실 수도 없으시다. 이 원리는 다름아니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나타나는 둘이 하나됨의 사랑의 원리로서 갑은 을 위해 을은 갑 위해 사는 생명과 사랑의 법칙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하고 아담이 범죄한 것도 이 계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아들께서도 이 원리에서 오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시는"[요 15:10] 것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계시거든 하물며 우리들이랴.
아버지께서 먼저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시어 위하심으로써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아들께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5:19].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을 보았으니[우리 위해 자신을 다 바쳐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 위해 죽으시는 자기 부인으로서의] 우리도 그 본을 따라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고후 5:15].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하는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이 "구속(救贖)"이다. 본디부터 "구속"이라는 말의 뜻은 원상태로의 회복이다. 즉 아담의 범죄 전 상태로의 복구인 것이다. 그래서 얽매여 있는 상태이므로 원래의 모습대로 자유인이 되도록 속전(贖錢) 또는 속금(贖金,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을 주고 방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또한 "속량(贖良)"이라고도 한다. 왜 죄와 죽음에 얽매여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있느냐 하면 첫 사람 아담이 범죄를 했기 때문이다[롬 5:12].
그러면 범죄 전 상태로 되돌려놓은 것이 우리 구원이라면 다시는 아담처럼 죄는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왜냐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이 진노가 우리에게 임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신다"[엡 5:6],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골 3:5,6] 함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롬 1:18] 하였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 3:36]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음이니, 이 사실을 무시하여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헛된 말로 속이는"[엡 5:6] 것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성경은 명백히 선언하여 경고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둑이나 탐람하는 자, 술 취하는 자, 욕하는 자, 갈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고전 6:9-11] 함으로써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점치는 것,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하는 것,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것이다"[갈 5:19-21] 하였다.
이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아도 초대 교회 사도들은 모일 때마다 이런 경고를 입 버릇처럼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오늘날은 어떤가. 난데없는 이단의 바람이 불어 그것이 태풍화하여 문자 그대로 온 교회를 초토화하고 있다. 온전한 초대 교회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당하고 심각하기가 이를 데 없다. 완전히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 일색이 되어 있다.
죄는 다름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우리 모두에게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복종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 말씀에 복종하지 않음을 인하여 범죄하였고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롬 5:12].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니 이 경고는 다시 말해 아담의 본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롬 14:7-9/고후 5:15]이라 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능력이니 곧 새 창조의 역사(役事)요 다시 출생함이기 때문에, 출생하는 것과 창조는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시므로 "은혜"요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우리 구원이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죄를 지어도 즉 "육신"[롬 7:5-8:13]대로 살아도 천국 가는 것을 "은혜"라 착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개신교의 교리다. 이는 마리아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중보(中保·仲保) 비슷하게[그들은 물론 "중보자"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마리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다] 설정해놓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에서 소위 "기독교"를 대표한답시고 이상과 같은 내용의 두 거대한 종교 집단이 자리잡고 있는 것 자체가, 아는 이에게는[모르는 이는 여전히 모르고 알 턱이 없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활동을 입증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다시 말해 "범죄하지 말라,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그런 시의적절한[구원 받은 자에게 주는] 경고임에도 이를 무시하니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를 완전히 거꾸로 둘러애어 "먹어도 죽지 않는다" 하는 거짓말을 더 믿고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은 똑같은 전철(前轍)을 절대 다수가 지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모든 것이 무의미, 무효가 되므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말의 조리를 따져서나 내용상으로 아무 하자가 없으니 "왜 구원을 받고 있는데 구원을 또 이루라고 하는가?"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을 내가 범죄함으로써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를 스스로 망가뜨린 것과 같이 왜냐면 하나님은 아담을 죽도록 창조하시지 않았고 죽지 않도록 즉 영생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 스스로 망칠 수가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으나 네 스스로 네 자신을 죽이도록 만들 수 있으니 그런 일이 없도록 즉 네 자신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니, 이 경우 "하나님 주신 생명을 어떻게 피조물 자신이 들어서 죽게 만들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인 것이다. 왜냐면 무엇을 창조하실 때는 그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이 뜻 행함이 곧 그 창조의 법질서가 되는 까닭이다.
이 법과 질서를 지켜야 그 창조된 바를 유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이야 상식적 수준의 판단으로도 불문가지다. 그래서 아담더러 "네 스스로 죽지 말라"는 경고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셨으나 내 스스로 죽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의미 곧 "자유 의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다수가 구원 자체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자기중심에 따른 고집스러운 욕심과 함께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의 합작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의 "구속(救贖)"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에서 오는 불찰이니, 무조건 천국 가는 것으로 착각함이다.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일관성이 없다고 하나님을 감히 비난하는 꼴이 된다. 왜냐면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범죄하면 죽이고 멸망시키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를 마련하시어 그렇지 않게 대우하시는 것이 되므로, 그럴진대 현재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역시 그런 근거를 마련해 주시어 구원하셔야만 될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과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순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상충되지 않는 정확한 이해 또는 해석은 무엇인가.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의지로써 내 스스로 믿고 나의 믿음을 끝까지 유지할 것을 미리 아시고[foreknowledge] 미리 택하셨다[predestination, election]는 바로 그런 의미다.
미리 아셨으면 그대로 될 터이니 또 미리 택하실 필요는 무엇인가 하겠는데, 아무리 그 스스로 믿음을 지킬 의사와 의지가 확고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까닭이다. 은혜는 선물과 같음이니 곧 거저 주시는 것이다. 이 '거저 주시는' 의미는 앞에서 '창조'와 '출생'으로 정의한 바와 같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능히 믿을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심과 내 스스로 믿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는 항상 평행으로 달리는 철로[rail]의 두 가닥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분성을 띠고 있음이다.
외가닥으로는 열차가 달리지 못하니 아무 의미가 없음이다. 하나님의 능력만 있어도 안되고 나의 의지만 있어도 안된다. 나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비로소 역사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내 스스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 근거가 된다. '간섭과 강제'와 '자유'는 반대 개념이다.
다시 말해 믿고 끝까지 순종할 줄을 미리 아시므로 그렇게 순종함에 일절 지장이 없도록 사전(事前)에 완벽하게 조정해 주실 목적으로 미리 택하심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게 될 때는 이미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 받은 상태여서 추가적으로 그런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나님 쪽에서의 그런 판단이 어째서 가능해지느냐 하면 미리 아심을 근거함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마지막 사람이 능히 구원 얻을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앞으로 태어날 사람이 만일 구원 얻는 믿음 즉 복종하려는 의지가 충만해도 주님이 세상에 오시면 그런 기회를 놓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즉 그 사람이 태어난 후 믿게 될 기회를 주시지 않고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수가 없다. 바로 이런 것이 미리 정하시고 택하심의 의미요 그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그 중에 오직 믿기로 작정하는 자 즉 회개하여 다시는 불복종의 일을 않고 그런 길을 걷지 않기로 작정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 용서 자체부터가 불가능하다[행 2:38]. 아담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 불복종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처럼 순종은 언제나 우리의 몫이다. 이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실 수 없으니 만일 그렇다면 아담부터 간섭, 강제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하셨을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믿고 순종하는 길로 나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미리 택하심으로써 이를 뒷받침해 주시지 않고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왜 범죄하게 되느냐 하는 이유로서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변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약하다"[마 26:41]고 말씀하신 것은 범죄와는 상관이 없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무기력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당시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범죄와 관계된 육신은 성경이 이를 "죄의 몸"[롬 6:6]이라 표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멸해진"[파괴된] 것을 명백히 하고 있어 구원 받은 자에게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바울 자신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는 말로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새 창조요 다시 출생에 속한다. 말 그대로 이전의 범죄 그리고 그 대가인 죽음의 결과로서의 그 어떤 것[육신도 포함해서]에도 얽매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새로워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이전 창조의 잔재(殘滓, 더군다나 죄와 죽음이라는 결과의-롬 5:12]임이 분명한 "육신"의 그 어떤 작용과도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여전히 "육신 운운"하게 되면 하나님의 새 창조와 다시 출생의 사실조차 완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담이 자기 "육신" 타령을 하며 그 첫 범죄를 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이 "육신"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면서 얻은 결과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나게[출생] 하셨는데 완전한 자로 창조하시지 불완전한 자로 창조하실 리도 없다. 강한 자로 만드시지 약한 자로 만드실 리 없다. 아담을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능력의 작동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 불의를 이기고 죽음을 무릅써서라도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결의가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 사랑 없음과 믿음 없음을 오직 "육신"으로 호도(糊塗)하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강한 자로 만드셨는데 그 강함이 어디서 입증될 것인가. 순탄한 환경 가운데에서야 아무리 약한 자라도 강한 자와 똑같이 승승장구하는 법이다. 고로 강함의 색깔은 약한 자가 무너지는 데에서 홀로 무너지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약한 자가 자기 육신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것이라면, 강함은 육신을 쳐 이기고 복종시킴으로써 그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위의 바울의 명백한 언급인 것이다[고전 9:27].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 해방되어 있는 까닭이다[롬 8:2]. 사랑이 모든 것의 요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화답하여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로 한 것이 우리 구원 얻는 믿음의 실체인 것이다. 믿음의 뿌리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 사랑을 입증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에 있으니[요 14:15,23] 곧 "항상 복종함"[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에 있다. 즉 자기 부인이 사랑의 핵심인 것이니 다시 말해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고후 5:15] 그를 사랑하고 그 지시를 따라 순종함으로써 나와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나의 이웃들[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여 섬김이다.
현재로는 일견 보기에 아무리 이웃을 해치지 않았더라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아 나 자신을 위하는 언행심사라면 필경 그것은 이웃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터전한 지식이요 성경의 가르침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관계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 즉 몸[의 각 지체]이 머리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 하는 것이다.
죄 짓지 말라는 엄명은 성경에서 시종일관하는 경고로서 요한이나 바울이나 베드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다[요일 2:1/3:6-10/5:18/롬 6:1-23/고전 15: 34/벧전 4:1 등:15.0pt;">]. "죄의 대가는 죽음"[롬 6:23]이라는 사실은 영원토록 불변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회개하면 용서가 되는 것이 있고, 회개가 불가능한 것이 있으니 요한이 말한 바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다.
즉 짐짓 범하는 죄[히 10:26]와 그렇지 않은 죄로 구분되는데 후자에 속한 것이 요한이 강력히 지적한 형제 사랑의 결여다[요일 1:6-2:2]. 다시 말해 고의적으로 즉 "불의를 좋아해서"[살후 2:12] 짓는 죄는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할 충분한 의사 표시, 의지 표명이 되어 있는 경우이므로 용서가 없음은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고 몰라서 지은 죄 즉 고의성이 없는 범죄는 회개하면 용서가 되나, 마땅히 회개해야 함에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 이는 고의성으로 나타나지므로 죽음이 그 결말이라는 점에서 역시 전자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무한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은 회개를 기다리심에서 그러하다는 뜻이지, 일절 회개의 기미가 없는데도 그러하시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죄라는 것은 그리고 "죄의 값[대가]이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도리에서 그 법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니, 그 명백한 증거가 아담 부부에 대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살인행위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이유 없이 죽인 데에서 드러나 있음이다.
하나님이 살도록 창조하신 피조물을 자기 스스로 죽여 없애는 행위가 죄인데 이 죄가 생명의 세계에서 용납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용납되지 못하고 같은 피조물 앞에서도 용인되지 못하니 생명의 세계에서 스스로 이탈한 것인즉 그 이탈의 의미가 생명과 대립 개념인 죽음이 아니면 무엇인가. 영원하신 하나님 지으신 세계는 영원하고 그 만드신 것 역시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아이들이 단순히 놀이하는 것처럼 해서 그렇게 힘들여 만드실 리가 없다.
창조가 단숨에 된 것이 아니라 "6일"에 걸쳤으니 힘들이신 증거가 아닌가. 더구나 우리 구원으로서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을 친히 겪으시면서까지 이룩하신 사업이다. 따라서 생명도 죽음도 영원하다. 진정한 죽음은 영원한 고난이니, 즉 생명의 낙과는 반대되는 일체의 모든 것을 통틀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인간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일시적인 목숨의 단절이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영혼이 있는 이중구조이므로 육체로서 끝나지 않고 악령['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들처럼 영원한 고난의 세계인 불 못이 그 종착점이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할 때의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죽음이지만 그 죽음으로써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심판을 받게 되어 있으니 심판은 형벌을 받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되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산 자로 만드실 때 삶의 낙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신 것이므로 바로 그와 같이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죽은 자로서 취급되는 대립[대칭, 상칭] 개념이다.
고로 우리는 죽음이라 하면 이 세상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 생각하여 이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죽음'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는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존재이므로 어디까지나 자연계를 기준하여 말함이다. 즉 자연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음이다. 그래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자연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칭으로서의 영원한 영계가 있음이니, 자연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나 영계가 있어 거기서는 한결같이 존재하되 생명의 낙 즉 행복한 곳에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한 행복과는 대칭 개념인 불행 즉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양견명조;font-size:15.0pt;">영원한 불 못은 그 후자를 말한다. 영물들은 영계에서 창조된 영계에 속한 존재이므로 한번 범죄하면 그 대가로서의 죽음이 그런 영원한 고난, 고통을 의미하지만 인간은 자연계에도 속하고 영계에도 속해 있다.
그러므로 범죄 후 그 대가로서의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하여 자연계에 속한 생명의 세계에서 끊어짐과 동시에, 영계에도 역시 속하므로 영계에서의 죽음 즉 영원한 고난 고통을 연이어 당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는 바, 우리의 구원은 그런 영계에 속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를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부여되는 의미다.구원되지 못하면 그 영원한 고난의 세계로 직행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구원 받아 영원한 고난을 면하는 기회를 잡았다 하더라도 아담처럼 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그 스스로 범죄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불의를 좋아함으로써] 아담의 죽음의 전철을 밟을 때 당연히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죽음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영원한 멸망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불의를 좋아하지"[살후 2:12] 않는 경우에 한한다. 불의를 좋아하지 않으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인한 "육신"[롬 7:5-8:13] 때문에 부득불 범죄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은 죄 즉 불가항력으로 지었고 스스로 불의가 좋아서 지은 죄가 아니라고 해서 그 죄를 눈감아 주시는 일은 없으시다. 죄는 죄이고 죄 값은 오직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경우에만 죄 용서가 되고[행 2:38], 역시 같은 의미로서, 죄 용서가 되어도 또 다시 범죄하게 되면[부지중 짓는 것 즉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짐짓 짓는 다시 말해 고의적으로 짓는 죄를 말함-히 6:6/10:26,29] 이 경우 다시는 용서가 되지 못하고 멸망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일관성 있게 일을 처리하시지 이랬다 저랬다 하시지 않는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이는 필연이다. 한번 선례(先例)는 영원한 본보기다.
세상 종교와의 차이
초대 교회 당시부터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리스도 복음의 종교화를 시도(試圖)한 것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받는"[고후 11:4]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복음, 성경, 하나님, 성령 등 이름은 같고 그 표방하는 바는 같으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 "다른 복음, "다른 영"의 "기독교"를 "세상 종교"로 분류하여 구분하는 것이다.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츠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당시의 자기 지역 내 천주교 세력이 자기가 주장하는 "개혁 신앙"을 적대시한다고 해서 직접 무력을 동원하여 싸우다가 죽었고, 칼뱅 역시 자기와 성경 해석을 달리 하는 사람을 정치 권력을 동원해서 처형시킨 것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하면 형제를 죽인 것인 악마적 소행이다(롬 14:3-16). 그럴 바에야 초대 교회가 왜 그런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 권력부터 장악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을 생각해보려고도 않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겠다는 겸허한 생각은 없이 순전히 인간의 판단으로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려 한 불상사다. 오늘날 소위 "훼불(毁佛)" 사건에 "기독교인"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받는 것도, 미국에서 코란[회교 경전]을 불 태우는 개신교 목사가 생겨나는 것도 다 같은 행티다. 이런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신이 없어야 인간 삶이 행복해진다"는 말을 거침없이 토해내기도 하고 그런 책이 잘도 팔려 나가는 실정이다.
바로 이런 효과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노리고 그렇게 인생들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가 이런 무식한 언동을 낳는다. 그리스도 구원의 올바른 이해가 절실하다. 세상 종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세상 종교'에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세상에서 "기독교"로 알려져 있는 집단들도 포함된다. 그러면 무엇이 '종교'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그리스도의 구원'인가.
종교는 사후의 세계가 존재함을 가르치고 영생만 목표하는 것이다. "영생만을" 목표한다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야 영생하는 법인데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전혀 무시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철저히 강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교리[도그마]를 내세워 그 교리에 스스로를 맞추면 영생이 보장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교를 종교라고 한다면[중국에서는 "유교(儒敎)"라 하지 않고 대신 "유학(儒學)"이라는 말을 굳이 쓰므로], 조상신에게 제사하는 조상 숭배를 그들의 막연한 내세관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자나 맹자나 "하늘(天)"을 말하기는 했어도 그 하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은 것은 그 실체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단지 "불가지(不可知)"라는 딱지만 붙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인간다운 올바른 삶을 현세에서 살아야 세상이 이상 세계가 된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은 인간 양심이 가르치는 대로의 최고의 "도(道)"의 주체를 가리킨 것이나, 그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막연히 그렇게만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올바른 길을 따라 덕을 세우는 삶을 사는 이들이 지도급에 자리잡으면 그것으로 세상은 바로잡히고 그 결과가 드디어는 그 무언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그런 "불가지"의 "하늘"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변(思辨)으로만 그칠 따름이지 현실적이 아니니 왜냐면 세상이 그런 이상(理想)대로만 따라 주지는 않는 까닭이다.
여기서 각종 종교를 비교하려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구원의 복된 소식]이 실제 무엇인지만 밝혀두면 모든 것은 절로 비교가 되고 그 옳고 그름이 드러나게 마련이요 그리고 각자의 판단으로 모든 것은 좌우되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도, 멸망에 들어가는 것도 각자의 자기 책임이다. 그 누구도 간섭하거나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의 인간 지배는 인간이 자초한 결과물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영생은 철저히 인과율을 따른다. 즉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영생에 들어가는 데에 하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물론 각자 스스로가 이를 입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자주 독립성이 말하는 자유 의지의 의미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자유인으로 창조된 것이다. 자유는 말 그대로 자유일 뿐 여기에 그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다.
이 세상에서 모름지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유교의 가르침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가 있으니, 이 세상은 현실적으로 마귀 곧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주관하는 세계로서 인생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무지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냐 하는 것도 먼저 제대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살아야 영생한다고 전제했는데 그 올바르게 사는 또는 살 수 있는 원동력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 자신이 그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니 방향 설정부터가 완전히 어긋난다.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런 인간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불교에 비하면 정반대로 인간의 무기력과 피동성만을 역설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여(施與)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고집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두 종교의 상반된 차이가 드러난다. 이 둘을 하나로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양편이 모두 공동으로 나타내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냐.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한 몸을 이룬 각 지체(肢體)로서의 역할을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해서만 움직이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하는 바로 이것이 의(義)이요 선(善)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이다. 바로 영생에 들어가는 과(果)를 낳는 인(因)인 것이다. 대체적으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이 여기에 모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말하면서도 그 실체를 모르고 있으니 어찌 완벽한 한 몸으로서의 이치대로 사는 것이 되랴. 유교로서는 역부족인 것이다.
유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피동성만 강조하는 기독교도, 역시 일방적으로 인간의 주인[주체] 의식만 내세우는 불교도 이런 점에서 역부족이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것이나 더 나은 것이 없다. 피장파장이다. 모두가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 중 일면만 새겨져 있어 화폐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 이런 것이 세상 종교의 주된 특징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져 있느냐.
이 세상에서 철두철미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은 한 몸 의식으로 살되 이 세상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니 절대로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은 없이 진리로써 사람들을 올바르게 살도록 즉 자기 부인[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하나됨에서는 어느 편도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이 없다]의 삶을 살도록 하는 데에만 이 세상 삶의 유일한 목표를 세우니, 모든 것은 그야말로 일사천리가 되어 막히는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낸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성경은 이 세상이 인간의 원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모든 실상을 먼저 밝혀놓고 있다. 따라서 "일사천리"로 나가되 전쟁하는 전투원[군인]의 자세라야 함을 성경은 다시 경고하는 것이다. 발꿈치를 물리고[초전(初戰, 開戰)에서 우리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머리가 짓밟히고[종전(終戰)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에게] 하는[창 3:15] 열전(熱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치열한 전쟁 마당에서 양 진영의 깃발은 너무나 선명하여 헷갈릴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악령이니 누구든지 악을 행하고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은 모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진영 소속이다. 그와는 반대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이는 그리스도의 군대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는지 안믿는지 그것은 따져지지 않는다[마 7:21/25:45].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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