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始)2원(元)3위(位)1체(體)의 하나님
또 하나 우리의 마지막 아담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것은, 육체로는 우리가 볼 수 없게 되시어 하늘에 계시지만("하늘이 그를 받아 두고" 있지만ㅡ행 3:21) 영으로는 현재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믿는)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있으니 사람만이시라면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하나되신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오심을 가리켜 "보혜사(保惠師, Comforter)"가 오신다 하신 것이다.
왜 당분간(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에 계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면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영광 중에 초자연계 몸으로 오실 터인즉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하나된 나 자신도 금방 즉시로 초자연계에 속한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런즉 지금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여지는 육체로 계실 수가 없는 것.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하신 "고난 후의 영광"이라는 순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주님이시므로 그 영을 "물려받은"(우리가 첫 사람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영광의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하나로서 오심이므로 "내가 온다" 하실 수도 없고 "아버지께서 오신다" 하실 수도 없고 오직 이 경우에는 제3인칭으로 해서 "성령께서 오신다" 하심이 적합한 것이다.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가리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요 14:16) 하셨으니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버지의 영 곧 아들과 하나되신 아버지를 가리키심이다.
그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6) 하셨고, 동시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15:26)이라 하셨으니 이 경우 아버지가 아니신 아들이신 것이다. 아들께서 보내심이니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아들께서 오심을 가리키심인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시니 그(아들)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행 2:33) 함과 같다. 고로 더 명확히 밝히셔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8) 하신 것. 그리고 이렇게 성령으로 오심을 가리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는 것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17) 하셨으니 역시 3인칭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으니 지금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서 함께 제자들과 계시기(사시기) 때문이다. "보혜사"(Helper)라는 말을 아마 당시 12 제자들은 처음 듣는 말이었겠지만 "너희가 그를 안다"고 하셨으니 다름아닌 당시에도(당시만 아니라 마리아의 태에서 사람이 되신 순간부터 우리 위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시고 성령 받으시던 그 시간까지만 아버지와 분리되어[하나로서가 아닌] 계셨을 뿐이지 변함없이 하나로 계셨고 영원히 하나로 계시며, 십자가 고난 중에 계실 때도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로 계셨으니 따라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하나되심으로써 아들과 함께 나 위해 고난 당하신 것)아버지와 함께 하나로서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고 듣고 익숙히 아니까 "그를 너희가 안다" 하신 것. 다만 차이는 보혜사가 오시게 되면 즉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오시게 되면(요일 3:24) 육체로 계심이 아니라 제자들 각 사람의 속에 계심이므로 "너희 속에 계시겠다" 하신 것이니 곧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런즉 육체로 계시면 A라는 제자와 함께 계시면 멀리 있는 B제자와는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이나 성령으로 오시면 A와 B가 설혹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더라도 한 날 한 시 동시에 계시고 그 각자와 24시 365일 그렇게 계실 수가 있는 것.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으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거니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니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지만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16:6,7) 하신 것이다. 자기의 영이 오시는 것(하나님은 영이시다ㅡ요 4:24) 곧 자신께서 오심이기 때문에 "내가 보낸다" 하신 것이요 그러나 "내가 영으로 온다" 하시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이시므로 그렇게는 말씀하실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3위1체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제자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시며 사시던 예수님,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선물로 몽땅 주신 예수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그 모신 십자가 상에서 나 위해 고난 받으시던 그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신 모습으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이다. 이렇게 밝혀놓으니까 얼마나 간단한 이치인가! 또 얼마나 은혜스러운 사실인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그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자기 자신을 내게 선물로 안겨다 주신 예수님, 십자가 상에서 나를 위하여 고통의 신음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던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심이니 아 나는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고 있지 않는가.
동네 주먹으로 원근 각처에까지 악명을 날리던 김 아무개는 "나 위해 십자가 고난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는 며칠 째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후 그는 결심하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기로 작정하고 일자 무식꾼이지만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간도 지방으로 나아가 많은 교회를 세웠으니, 이 하나님 사랑의 소식을 아니 전하고 배기리. 그가 김 익두 목사다. 필자 역시 성경의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 상념에 잠기면서 부지런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산책을 하며 먼 산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기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을진대 그 후 살아나셨은즉 그렇게 살아 계시면 나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신 나를 내 곁을 결코 떠나시지 못할 것이 아닌가. 자나 깨나 나와 함께 사실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겨우, 마침내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큰 깨달음도 아니고 엄청난 진리의 대발견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의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보는 그런 것이니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계시"인 것이다.
계시라고 해서 이상한 무엇을 본다든가 음성을 듣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니,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다가 지금까지 있던 바로 코 앞의 낫이 다름아닌 기역자를 가리키고 있음을 눈여겨 보게 되는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 하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말이 지니는 올바른 개념이다. 이런 것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마 18:3)이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논리는 순수하면서도 또한 그 단순성, 순진성 때문에 최대로 강력한 것이다. 때 묻은 이기적인 오만한 어른의 사고방식이 따라오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지만 그 사실을 믿어야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또는 바치신) 하나님"(갈 2:20)의 사랑이 되는 것이니 이 사실을 어찌 아니 전파하리요. 어찌 아니 기도(하나님 앞 제사장의)가 나오지 않으랴.
때문에 한 몸이 되어 있는 아내/남편 간의 사랑보다도 최 우선 순위의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고전 7:33,34) 나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기와 엄마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오마"(요 14:18) 하신 그대로다. "고아"ㅡ이처럼 마음을 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이니, 영적 존재 중에 인간만이 성별이 있으므로 그 성별을 따라 이 어버이되심을 설명해야 하겠기에 부득불 대표성을 띤 호칭으로 "아버지"라 하는 것이요 또한 일관되게 표현해야 하므로 "아들"이라 하는 것뿐이다.
남성 상위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에 생성 순위를 따라 그리고 모자(母子) 관계로써 남자가 머리요 여자가 그 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모자"라 함은 파생한 자와 파생된 자의 양자 관계를 총칭하는 것이다. 파생자가 "모'가 되고 파생된 자가 "자"이다. 이것이 질서의 아름다움이다.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요 화평의 절대 조건이다. 질서를 파괴하면 안되는 것. 질서가 파괴되면 조화미가 깨어지고 거기는 오로지 살풍경만이 남게 된다. 오늘날은 악마 시탄의 최후 발악적인 난동으로 살풍경의 시대가 되어 있다.
우리가 아들의 품안에 있는 아기라면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요 1:18) 것으로 묘사된다. 이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나와 같은 사람이 되셨은즉 친히 한 아버지 슬하에 있는 아들들로서 우리와의 한 형제간을 이루어 맏아들이 되어 계신다는 것뿐이다(롬 8:29). 사랑 하나 때문에 얼마나 자기를 낮추심인가!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이다. 우리도 이 마음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29). 원수를 사랑함도 '아기에 대한 이 엄마'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이면 날마다 내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사랑의 일상생활이 구원 얻는 구원 얻은 믿음의 생활이니 이 점에 항상 유의할 일이다. 아기와 엄마와의 밀착 관계처럼 이러한 밀착 관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마치 엄마 품을 떠난 것처럼 온갖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니, 여자가 남자를 떠나 있는 사이에 용이 그 틈새를 노려 에덴낙원의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에 더 이상 붙들려 살지 말고 당당한 자유인으로서 고린도전서 7장에 살라는 것이다. 그 차이는 현격하여 하늘과 땅과 같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라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이 곧 삶의 법칙, 사람의 원리인 것이다. 즉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관계에서 오는 둘이 하나됨이니 영혼과 육체 관계를 위시해 모두 양자 관계 즉 3위1체의 원리 그대로이다. 이 3위1체 원리의 '하나로서의 둘', '둘로서의 하나'가 미립자 세계에서는 "양자 얽힘"으로 나타나는 "엎 스핀"이요 "다운 스핀'이기에 우리는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빛의 성질에서 각기 상반된(3위1체의 원리에서 말하는 전도성[顚倒性]) 특성을 나타내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또한 항상 상기함으로써 이 3위1체 원리의 확실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에 대한 보다 확실한 검증은 3운법칙의 구조에서 오는 것이므로 3운법칙 역시 항상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 3운법칙 자체가 ① 하나님의 만유(萬有) 주재(主宰), ②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진실성, ③ 성경이 유일한 주제로 삼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Jesus Christ our Lord")의 메시아 되심을 또한 증명하니 더 이상 증거가 필요가 없는 이 21세기다.
3운법칙은 또한 이렇게 우리 인생이 마디마디로 나누어지다시피 되어 그 절(節) 또는 결(結)을 이룬 곳에서 중대 사건이 시작 또는 종료됨으로 한 치 빈 틈 없이 짜여진 구조로 흥망성쇠와 죽음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기계가 아니면서도 세밀한 톱니바퀴 양상을 띠어 서로 간에 맞물려 돌아감이 입증된 마당이니 간단히 말해 기계가 아닌 기계의 삶이 이 세상 인생 삶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 나의 주체적 의지가 관여될 여지가 없으니 성경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제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으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합니다"(렘 10:23) 함과 같다.
다시 말해 ④ 여기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자유 의지로 세워져 창조된 인간 본연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함이니, 이러한 삶에 미련을 가짐으로써 자멸의 길을 택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본격적인 영원한 초자연계의 삶을 택하고 이 세상 삶을 버리라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에 의한 도치성(정반대되는 것끼리 짝을 이루어 그 실재[實在]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명확해지는 사실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오는 영원 세계에서는 기필코 살지 못하는(요 12:25) 즉 "둘째 사망"(계 2:11)의 재앙을 자초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인즉 이 경고를 받고서도 어찌 세상을 사랑하리요.
기계적 삶이 되어 있는 것은 인성(人性)이 수성(獸性)이 되어 자아중심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이를 통제, 간섭, 강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유 의지를 속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직 자아중심의 삶만이 제약을 받는다는 뜻이니 자아중심 자체를 억누름이 아니라(그리 되면 창조 당시 자유 의지를 주신 취지에 어긋나는 간섭, 강제가 되는 것) 그 정도를 조절함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차원일 뿐이다.
삶(이 세상에서의)은 기계적 삶이로되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삶 둘 중 취사 선택은 순전히 나의 자유 의지로 말미암는 이 엄중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 3운법치과 3위1체 원리가 담고 있는 경고이다. 자연계 삶을 선호하면 초자연계 삶을 상실하는 것이 필지이고, 자연계 삶을 백안시하고 초자연계 삶을 동경하여 그 나라를 위해 준비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여하한 고난 역경이 있어도 사람들을 이 미망(迷妄)에서 구출하는 인간 고유의 사명에 충실하는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 천국이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 침노하여 빼앗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선언하신 것이다(마 11:12/눅 16:16).
왜냐면 사람 구원하는 작업은 주체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필수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는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러하다. 지금까지 무턱대고 "은혜"라고 하여(실상은 은혜가 아닌데도, 그런 것을 은혜라고 할 수가 없는데도) 편안하게 요람에 누운 채로 천국 간다는 환상에 젖어 자멸의 길을 걸어 왔으나 이제는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어나듯 그 모든 허상을 깨뜨리고 현실에 눈을 떠야 하는 때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구별하여 가르쳐 온 것이니 3운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가 다 성경에서 나온 사실과 일치한다.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이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고전 15:46-49).
이상 구절에서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 하여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둘째 아담"이라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라고 성경이 못박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우리자신을 가리켜 첫 사람 곧 옛 사람 그리고 둘째 사람 곧 새 사람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는 아담이라는 한정된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 고로 그냥 둘째 즉 다음으로 오는 순서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은 까닭이다.
이상 언급은 아담이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하여 한번도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두고 하는 즉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 있는 상태인 우리들을 기준하는 설명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사건을 설명함에서도 우리를 기준하는 것이지 지금은 있지도 않은 아담을 기준해서 설명할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 그래서 아담 부부가 "벗은 몸으로 있었으나 부끄러운 줄 몰랐다"고 우회적으로 그들의 몸이 초자연계 몸으로서 빛으로 둘러싸였음을 설명했을 뿐이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 그들이 벗었음을 알았다는 것도 자연계 몸으로 금시금방 전환해버려 초자연계 몸의 광채가 벗겨짐으로 인해 맨 몸뚱이 나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묘사한 것뿐이다. 우리말 번역은 "눈이 밝아졌다"로 되어 있으니 영역은 "to be opened" 즉 열렸다, 보았다는 뜻이니 눈이 감겨져 있다가 본다는 뜻이 아니라 갑자기 초자연계 몸의 광채가 사라지면서 눈 앞에 불쑥 나타난 나체화된 자기 몸을 비로소 보고 인지하게 되었다는 그 뜻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처음 신령한 몸이 되기 전에 즉 에덴낙원에 있기 전에는 자연계 몸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새 창조(다시 출생함)도 같은 순서를 따름이니, 즉 우리 자신을 그 "육체"로 간주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 상대로서의 "영혼"처럼 우리 각자 안예 계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이중 구조 즉 영혼과 육체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으로써(요 20:22)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영혼을 조성하시던(창 2:7)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보이신 것이다.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짝의 개념으로 항상 병립해 있음을 아는 것이 참 과학이다. 지금까지는 동전의 한 면만을 보고 전부인 줄 착각했으니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한 절름발이 과학인즉 과학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제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과학이라 여기고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과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시대 양상이 달라졌으므로 보는 관점도 달라져야 마땅한데도 아직도 고집을 피우고 그 황당한 오만함으로써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들 것인가. 그 경우 그야말로 구제불능이다.
겸허함이 없는 교만이 멸망의 지름길이라고 경고하는 성경을 언제까지나 되뇌어주어야 하겠는가. 인생은 고집으로 망한다. 고집은 방금 지적한 대로 일종의 교만이다. 자기가 옳다고 끝까지 우기는 저돌성이다. 이런 저돌성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비탈을 내리 굴러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수밖에 없다. 급격한 제동을 걸어주어야 간신히 멸망을 막을 수 있는데 이 제동 걸기에는 우리의 제사장 기도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외에는 없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받아 항상 기도하는 것이 그 특징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항상 지적하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부는 기도하기 위해 부부간의 잠자리를 중단하는 일도 예사였음을 바울 사도는 명시하고 있지 않는가(고전 7:5)! 얼마나 기도하는 시간을 당시 교회가 중히 여겼으면 그리고 실천했으면 이런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 단 한 구절로써 당시 교회 실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 실로 중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오늘날과는 너무나 큰 괴리를 우리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라고 백 번, 천 번이고 강조하는 것이니, 단 한 구절에서도 이런 크나큰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전에는 간과하고 놓쳤던 것이지만 오늘 읽을 때에는 그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성령께서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주시지 않는 한 알 도리가 없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도 아니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지 않으면 아무 효력이 없을 뿐 아니라 사이비 이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성령께서 지도 교사가 되어 주시지 않는 한 해득할 수 없는 교과서가 성경이다.
그리고 성경에 많이 강조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런 많은 강조가 바울의 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값없이 구원 얻는다"는 대목이다. 이 구절은 당시의 교회 사정을 반영한 것뿐으로 오늘날의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말들의 나열이다. 오늘날에도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처럼 모세 율법을 중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바울의 서신들이 효험을 나타내겠지만 오늘은 전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마치 중요해서 그렇게 바울이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으니 그 독해(讀解) 수준이라 할까 아니면 지적 수준 자체의 미달이라 할까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오늘날까지 소위 전통 기독교의 한계다. 이 모두 앞서 지적한 고집 때문이다. 물론 바울의 서신이나 기타 어느 다른 사도의 서신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착각이 도를 넘어 마치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불가능한 것처럼 부정하는 듯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에는 이것은 다름아닌 악령의 "궤계"(고후 2:11)다. 이 모두 우리가 성경 읽기의 문을 부지런히 두드리지 않은 불찰이다.
https://www.biblegateway.com/verse/en/Joel%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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