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후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이와 같이 구원도 받지 못하여 여전히 죽은 자가 되어 있고 여전히 죄인으로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위치에서 제아무리 영웅적인 순종의 행위를 하고 세상이 놀랄 만하게 율법을 지키는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목적이 오직 그것뿐이므로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행하는 선행이 원천적으로 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행함으로는 절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 한 것이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순종을 해도 여전히 자기를 위해 즉 자기의 구원을 위해 한 것이므로 자기중심 일변도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출생하여 의인이 되고 산 자가 되어 있으면서부터는 철저히 선을 행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니 왜냐면 선[좋은 것]과 의[올바른 것]는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을 지으실 때 그렇게 행하여 살도록 지으신 애당초의 창조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담 때의 창조도 그러하고 우리의 새 창조도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없음이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이 무엇이냐 하면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한 몸의 각 지체된 이웃을 위함이 아닌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자기중심이라는 뜻이나 이 바로 아담이 범죄한 이유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명망에 처해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성경대로 무엇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고 은혜이며 거저 주시는 선물의 구원인 지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한 것은 죄뿐이고 벌어들인 것은 죽음뿐인데도 살려 주시고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니 이를 은혜라 하지 무엇을 은혜라 하는가. 이보다 더 한 은혜가 있는가.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시기까지 해서 이루신 새 창조이다. 성경을 100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300년간 핍박을 받아도 믿음을 지켜오더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교회와의 전쟁에서 전술(戰術)을 한번 바꾸어 유화 정책을 쓰니 완전히 거기 넘어가 천 육칠 백년간 "신학(神學)을 해도" 헛다리만 짚은 것이다. 성경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고 적어놓은 인간의 글만을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누구나 죽은 자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순종 다시 말해 머리의 지시를 따라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죽은 자는 불가능하고 오직 산 자들이 한 몸을 이루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머리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니 그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이는 모두가 산 자인 것이다. 고로 산 자가 할 수 있는 순종 또는 "선을 행함"[롬 2:7]인데 죽은 자가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니 언어도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산 자가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단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죽을 것이라 선언하셨으면 죽지 않고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비록 다시 살아나는 일이 가능하더라도 일단 죽은 다음에야 오는 순서다. 그래서 내가 죽은 자로서 죽음을 거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지는 일이 필수다. 바로 이렇게 하여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으로써야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된다.
그리고 나의 죽었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있는 몸이 되는 것이다. 이 모두 그리스도 친히 다시 살아나셔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 명실상부하게 나와 하나가 되는 순간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성령 받아 모심이 바로 새 창조, 다시 출생함이요[요 3:3],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출생하는"[:6] 것이라고도 한다. 하나됨은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둘이 하나됨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그 성령으로 내게 오시어 [사람은 육체인데 육체로는 오시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내 안에 계시지 못해도] 나와 얼마든지 하나되실 수 있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과 사람되심의 의미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내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육으로 출생하여[:6] 현재의 이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육체는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될 때의 그 육체에 해당된다. 아담의 그 육체에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에서 바로 그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오심이기도 한 것이다. 즉 아담의 육체에 영혼이 생김으로써 아담이 영적 존재가 되고 결국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거기서 신령한 몸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이 새 창조에서도 육체[현재의 나 자신]에 영혼[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이중 구조를 훌륭히 이루게 됨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육으로 나는 것에 대비되는 영[성령]으로 출생함이다[:6]. 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심으로써 당시 첫 창조에서 아담의 육체가 영혼을 수용하게 되는 것과 같은 과정을 밟음이다. 때문에 이를 가리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라 하실 때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는 형용을 하셨으니 이는 당시 아담을 지으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다시 말해 숨을 내쉬시는 바로 그 형용이신 것이다.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이제는 우리 위해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다 마치신 다음인 고로 오직 하늘에 오르셔서 다시 이 땅에 임하시는[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써] 일만 남은 까닭이다.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은 나를 새로 창조하실 때 영혼 없는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으시는 바로 그 작업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내 영혼이 있기는 하나 이미 자연계에 속해 버려 영계에 들어가 영생하도록 신령한 몸이 될 수 있기는 이제는 영영 글러 버린 탓이다.
왜냐면 죽은 자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됨으로써만 즉 육체와 영혼이라는 새로운 이중 구조를 이루어야만 신령한 몸으로 돌아가는 "몸의 구속"[롬 8:23]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물려받아' 마지막 아담과 관계되어 영[성령]으로 출생함이다. 아담은 신령한 몸이 된 다음에 시험을 받아 그 부적격(不適格)을 스스로 만들어 죽은 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런 시험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격이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처럼 온전한 순종을 드러내게 되면 몸의 구속에 이를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아담의 불순종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의 불복종처럼 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영원한 불"[마 25:41]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양면성의 원리에서 이 새 창조의 기회밖에 없다. 첫 창조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새 창조가 진행 중인 때이다. 이 이상 더 이와 같은 창조는 되풀이될 리가 없다.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물이 없고 영영 끝이다[히 10:26]. 바로 그런 영원 운명을 각자가 스스로 정하는 때가 이 세상이요 오직 여기에만 의미가 있다.
천국은 사람마다 쳐들어가[압박해 들어 가] 강탈하는 것이라 하심은 사랑의 주인 의식에서 오는 적극성, 능동성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실상을 밝히심이다. 즉 구원 얻자마자 이 세상의 신(神)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니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요 7:7] 마침내 사형을 시킨 것처럼 세상이 미워하는 까닭이다. 제자는 그 스승 이상일 수 없다.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핍박했으면 그 제자들 역시 당연히 핍박의 대상이 된다[15:20].
구원 받은 사람을 미워해서도 그렇지만 그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핍박을 가하는 것이다[눅 18:3/막 4:17/마 13:21]. 그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경고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아담의 범죄 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차지가 되어 있음이다. 그가 세상의 왕 곧 지배자이다[요 14:30]. 이 세상과 함께 그도 망하게 되어 있지만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러한 것이다.
갑이 을을 위하나 동시에 을이 갑을 위함이므로 사랑에서 양쪽이 모두 주인 의식, 주체 의식으로 움직이듯이 하는 것을 가리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심으로써 명백히 하신 것이다.
이 계명이라 하신 것은 '내가 너를 오로지 위하니 너는 오로지 나를 위하라'는 말씀이 곧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계명, 뜻, 명령, 율법, 머리로서의 지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서의 주인 의식이다. 바로 이러한 주인 의식으로 모든 일에 임하게 되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 되는 일임과 동시에 아들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 사랑으로 하나됨이므로 죽어도 아버지를 위해 다시 살아나셔도 아버지를 위해 다시 살아나심이 됨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도 죽어도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사랑으로 하나됨을 나타냄과 똑같은 이치다[롬 14:7-9].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살리심이지만[고후 4:14/고전 6:14/롬 8:11] 동시에 내 스스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스스로 부활에 이르는 의미가 됨이다[빌 3:11]. 이런 것이 사랑의 능동성, 적극성이요 주인 의식이다. 우리가 천국에 압박해 들어가는 것도[눅 16:16/마 11:12] 우리 자신을 위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일이므로 그런 표현을 하신 것이다.
불의와 의가 한데 엉기고 조화될 수 없다. 의를 사랑하면 불법을 미워하는 것이고[히 1:9], 불의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니 불법 곧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우 반드시 자기 부인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양자간의 원수 관계에 있고 타협점은 없는 것이며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서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미워하여 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양자 선택이다. 이 양자 선택에서 영물[천사]들의 일부는 자기중심을 택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되었고 일부는 자기 부인을 사랑하여 거룩한 천사들로 남아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그 주제가 죄, 의, 심판이다[요 16:8].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이요[롬 2:8,9] "자기중심[selfish, self-seeking: "당을 짓는다(contentious)"는 우리말 번역과 흠정영역은 오역이다]으로 나가면 멸망"[:7,10]이다. 따라서 성경은 의를 행할 것을 명령한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의를 행함으로써 의인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2:13]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많은 사람이 이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오해와 착각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에 이르고"[빌 3:18,19] 있다. 자기중심을 끝내 회개하지 않는 까닭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의미는 새 창조가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아담을 지으실 때]에서나 우리의 새 창조에서나 죄인으로 창조하시지 않고 의인이고 거룩한 자, 깨끗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으로 난"[요 3:6] 처음 창조는 범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영구적으로 처단된 바로서 이제는 의인으로 거룩한 자로 새로이 창조된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나이니,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 순종'이 요구된 것처럼 우리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 역시 "항상 복종"[빌 2:12]이다. 아담과 우리를 차별하실 리도 없고 이유도 없다. 또는 이미 범죄한 영물[악령]들과도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된다. 똑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복종하여 범죄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시 말해 차별하지 않고 멸망하게[죽게-계 2:11] 되어 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대로 움직이신다. 이는 시종일관 공평공정하시다는 의미다. 악령들은 악을 행함으로써 멸망하도록 버려두시고 우리는 "악함을 버리지"[행 3:26] 않아도 영생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위하신다. 인간이라고 더 여기시지도 않고 우리라고 해서 특별히 더 사랑하시지도 않는다. 똑같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시다. 단지 우리 위해 사람이 되시고 우리가 당할 죄의 저주를 혹독하게 당하신 것은 그들 영물들과 같은 혹은 범죄 전의 아담과 같은 '자유 선택에 의한 스스로의 운명 결정하는 기회'를 공평하게 베푸시기 위함이다.
그리 하시기 위해서는 부득불 사람이 되셔야 했고 그 모진 죽음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시지 않으면 안된 것이다. 영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은 처음부터 신령한 존재로 창조됨을 인하여 인간[아담]보다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특혜를 입었으므로 그들이 범죄할 때에는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가 되어 다시는 회개할 수가 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히 10:26]. 아담은 그 대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가장 먼저 창조된 까닭에 그런 영물들 위에 다스리는 자로서 군림해 있음으로써 평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조화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기심에 의한 인간 살해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살인자가 인간 세상 위에 도리어 군림해 온 것이다. 이런 철천지원수가 공중에서 권세를 잡고[엡 2:2] 인간을 부리고[행 26:18] 있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라. 강제노동 수용소가 아닌가. 구원은 이런 속박과 억압에서의 자유 해방인 것이다. 이런 거대한 수용소에서의 생활 곧 세상 삶을 사랑한다면 영락없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영원 멸망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생명의 법이란 것은 사람 사는 법, 그리고 사랑하는 법이다. 사는 법이 곧 사랑하는 법인 것이다.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사랑하는 데에도 무슨 법이 있느냐 하겠지만 사랑이 생명이 핵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도리인 것이니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사랑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 법인 것이다. 이를 누가 사랑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겠는가. 비록 죽음으로 위협하더라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버렸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 악령들은 이 법을 무시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한 것이다.
머리를 무시하고서 몸이 보전될 리 없다. 머리의 지시에 불응하는 경우 그것은 암세포 전락한다. 생명의 법질서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알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랑의 원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사랑을 법제도화한 것이므로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사랑 관계는 '칙칙' '푹푹'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평안과 즐거움과 최대 만족의 풍성, 풍만, 풍족함이니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여 만유의 상속자[heir]라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버지께서도 나의 소유 곧 "나의 아버지"시다. 즉 머리조차도 '나의 머리'가 되어 계시므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의 효과가 모든 것이 바로 나의 것, 나의 소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가 나를 섬기고 위하는 존재들이니 내가 나를 높이지 않아도 위하지 않아도 항상 이웃을 섬기는 종의 위치에 있어도 내 이웃들이 나를 마치 머리처럼 주인[소유주]처럼 위해 주는 것이 둘이 사랑으로 한 몸이 되는 영원한 삶의 이치요 지혜이다.
그 대신 자기를 위하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은 조만간에 필연적인 끝을 보게 되어 자기 파멸이니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만고에 그런 어리석음도 없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결과임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의요 그와 반대로 나가는 것이 죄요 이 세상에서 이 둘의 갈래진 길에서 각자 좌든 우든 선택함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도록 되어 있으니 이것이 심판의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신 것이다[요 16:8].
이 세상의 우선 보기에 좋고 평안하고 즐겁고 마치 영원한 복과 낙을 줄 것 같은 일체의 것이 말하자면 이 세상의 지배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들로 하여금 어찌 하든지 죄 짓게 만들고 "선을 행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멸망에 들어가도록"[롬 2:7-10] 만드려는 가식(假飾), 가장(假裝), 가면(假面)에 불과한 것이다. 즉 속임수이니 그래서 성경은 그를 가리켜 천하를 꾀는 자라 한 것이다[계 12:9]. 생명이 사랑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저주를 받으라"[갈 1:9]고 바울의 입에서 "저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저주"의 말은 눈물의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눈물의 사람이었다[빌 3:18/행 20:31]. 이는 사랑의 사도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넘치는 사랑 가운데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한 그대로다. 다시 말해 자기는 저주 받지 않고 남들만 저주가 해당된다 하여 저주를 입에 올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즉 모르면 저주밖에 없는 현실을 두고 눈물 어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의 전쟁을 교회가 하는 것도 사랑과 사랑 없음과의 전쟁인 것이다. 이런 전쟁은 그들이 악령들이기 때문에 즉 처음부터 멸망 받을 존재로 스스로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생들로 하여금 멸망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므로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과는 절대로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언제든지 얼마든지 회개하면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체제 안으로 들어와 바로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울 것인가!
그래서 바로 이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눅 6:35]고 머리로서 지시하시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되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은 악을 미워함이니 곧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의 원수로서 우리가 그를 미워함은 그의 속임수나 원하는 바나 목적하는 대로 따르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그를 이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으로써 위협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음이요[계 12:11] 그가 갖가지 고난으로 공격해오면 그 고난을 자진해서 당해내는 것이 곧 그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싫어하고 미워하면 한사코 말씀 전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우리 힘의 우세(優勢)를 과시함이 되는 것이다[:11]. 영생하는 몸인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롬 8:39]. 그리스도 자신께서 나를 위하시는 분으로서 영원히 정착해 계시는데 내가 누구를 무엇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떨리요[히 13:6].
성경에 아름다운 말씀이 넘치도록 많은 중에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한다[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는 대목도 그 중의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노래, 한 때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가락이니 항상 사랑의 노래를 하는 주님과 나 사이다. 하나님은 노래하지지 않는가? 노래하신다는 대목이 바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이다.
노래하시는 것을 "즐거이 부르신다"고 한 것이다.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품에 안은 잠든 아기를 그윽이[in one’s heart; inwardly; quietly]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엄마의 무한한 인자의 영상(影像, 映像)을 떠올리게 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그 엄마의 입에서는 사랑의 자장가가 부지중 흘러나옴을 듣게 된다.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함이 그것이다. 사랑을 하는 자만이 사랑을 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5-37]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다.
"칙칙 푹푹", 왼발 오른발의 행보가 사랑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일방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짝 사랑이라고 하지만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을 절대로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양면성이요 동시성을 특징으로 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다시 말해 이런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 저주를 받는 것이다[고전 16:22].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the commander
of the army of God]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아브라함에게도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 것처럼-창 18:22/19:1]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하실 때의 의미도
앞서 설명한 3위1체 원리에서 갑과 을의 관계를 나타내심이니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딛는 바로 양자 관계 곧 둘이 사랑으로
하나됨의 이치를 말씀하심이다. 한 발은 내게 속하여
내가 내딛는 것이요 다른 한 발은 하나님께서 함께 걸으심으로써
하나님 친히 내디디시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 신발을 다 벗으라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그 한 발이 되어 계시니 그 곳이 하나님 계신 데라
거룩하니 그 쪽 신발 즉 한 쪽 신발을 벗으라 하신 것이다.
모세 앞에서 불 타는 가시떨기 속에서 천사로 말미암아 나타내실
때는 양쪽 신발을 다 벗으라 하셨던 것과 대조적이다. 영역도
흠정역에서는 "Take your sandal off your foot"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번역에서는 "Take off your sandals"로 임의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아닐뿐더러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원문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을 간과한 탓에 단지 그 애초의
말씀을 받아 적었던 기록자의 실수 또는 착오라고 여겨
이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모세의 가시나무 떨기 위의
불과 같은 것이라 오해하고 "양쪽 신발을 벗으라"
하신 말씀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BibleGateway.com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경우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은 흠정역[KJV, NKJV, AKJV, 21st Century K.J.V.포함] 외에도
4개처가 있으니 대조(對照) 대비(對比) 용으로 수록한
유력 번역본 45개[중에는 4가지의 흠정역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중에 그러하다. 즉 American Standard Version, Darby Translations,
1599 Geneva Bible, Young's Literal Translation 등이다. 이들은 이상 설명과
같은 뜻을 몰랐어도 원문에 충실한다 하여 그렇게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로서 인생들을 속이실 필요도 이유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각종 기적이 나열되어
있고 더군다나 그런 기적을 본 사람들이 모두 다 믿었다고도
않고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고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하게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 없다 할 것이니 왜냐면 그런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낸다고 할 각종 기적이 단순히 사람들로 이런
기적 때문에 믿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너희는 기적과 놀랄 만한 일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요 4:48] 하시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으나, "이렇게 많은 가적을 저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아니하였다"[12:37]고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성경이다. 기적을 보고 믿을 사람들이 따로 있고, 보고도 여전히 믿지 않을 사람 역시 있어 그런 이들은 아무리 대단한 기적 앞에서도 믿지 않을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성경이므로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것은 원래의 의도가 아님이 드러난다. 단지 사실 그대로 기록하다보니 그런 기적의 사실 역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성경이 사람들은 무조건 믿게 하려고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도 여러 기적들을 나열함으로써 거짓을 지어내고 만들어 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다시 말하거니와 생긴 사실 그대로를 가감없이 소개함에만 목적이 있으므로 그 모든 기적들은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른다. 만일 그런 기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꾸며댄 것이라면 성경 내용 중에 "이렇게 많은 가적을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더욱이 그런 기적을 행하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심을 사람들이 보고도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셨다"[막 6:6]고 했을 때는 더 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5]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부러 그런 성경의 기적을 꾸며댈 이유가 없다. 성경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기적들을 허황하다고 하여 믿지 않는 것인데, 이렇듯이 그런 악평은 아무 근거가 없음이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역설하지만 그 모든 성경 기록은
진실뿐임이 입증되는 것이니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언하는 책이고 그리고 그 증거가
되어 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있다면 이 결론을 반박해보라는
것이다. 반드시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기적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라면, 위의 지적에서처럼 그것은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비판은
아주 설 땅이 없어진다.
3. 삶의 기본 구조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적 의미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구원 얻는 믿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연히 사는[고후 5:15] 데에 있음이다. 왜냐면 이것이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이기 때문이다[롬 14:7-9/고후 5:14,15].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 계명, 율법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다.
따라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경고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이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흔히 말하는 바 "상 타는 것"을 의미함은 더더욱 아니니, 상 타는 것은 개인의 영예에 관한 것이므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상 타려고 두렵고 떨리기까지" 하면서 노력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아담처럼 혹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처럼 되지 말라는 뜻임이 명백해진다.
즉 "범죄하지 말라",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는 또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일의 핵심이니 항상 이 점을 명심할 일이다. 그냥 단순히 '영생을 준다' 또는 '영생을 얻는다'는 데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지 않다. "예수 사랑", "예수 구원"과 같은 구호가 격에 맞지 않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 사랑을 몰라서 범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하여 자가 되었으니 범죄한 것을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구원의 관건이 되는 까닭이다.
죽은 자를 벗어나 산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의 의미이니, 산 자이니까 당연히 영생하는 자다. 영생하지 못하니까 죽은 자다. 산 자가 아니니 죽은 자요 죽게 되어 있는 죽는 자이니까 "죽은 자"[마 8:22]로 분류된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태어나는 자마다 모두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닌 것이다. 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니까 필경 썩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애초 인간을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셨지만 인간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인간은 죄도 없었고 죄인도 아니고 죽음을 온전히 몰랐었다[롬 5:12].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었으니까 산 자와 죽은 자의 성격이 논해진다. 즉 산 자는 범죄하지 않는 자, 범죄하지 않은 자다. 죄를 짓는 죄인은 결단코 산 자로 또는 의인으로 분류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그릇된 안내와 인도로 그와는 반대로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범죄는 생명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죄는 불법"["the transgression of the law", "lawlessness"-요일 3:4]이라 한 그대로다. 범법, 불법, 위법, 탈법이니, 무슨 법을 어겼느냐 하면 생명의 법, 삶의 법질서를 어긴 것이다. 생명의 법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공동체 의식을 찬양하는 것과 같이, 여럿이 뿔뿔이 흩어져 혼자 살지 않고 한데 모여 공동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이 삶이니 이렇게 살 때는 반드시 한 몸을 이룬 체제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것이다.
'한 몸'의 구조
이렇게 되어야 원활한 삶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혼자 사는 것만 못하다. 혼자 살 수 없으니까[창 2:18] 여럿이 한데 모여 사는 것이 아닌가.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와 몸의 양면성으로 짝을 이룬다. 이 체제에서는 머리 없이 몸 없고 몸 없이 머리 없으므로 반드시 머리든 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하는 구조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 상대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라 가르침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이 "자기 부인"이라는 말은 자기 중심, 본위, 위주에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기 중심이 없었다면 영구적으로 생겨나지 않았을 말이다. 애초에 생명을 창조하셨을 때는 생명만 있었지 죽음의 개념이 없었음과 같다. 죄가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인데 생명의 원리대로 따르지 않아 생명에 반대되니까 그 상대적 개념으로 생명과는 정반대인 죽음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생명이 한 몸 체제에 있어, 그 누구도[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시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데도 이 방법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가 되니까 그 상대적인 말로 "자기 부인"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명백해지듯이 산 자는 생명의 법대로 따르는 자이고, 죽은 자는 이미 그 생명의 법을 벗어나 있는 자이거나 현재 그 법을 어기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따라 죽은 자와 산 자를 식별할 때는, 산 자는 그냥 살아 움직인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따라 사는 자를 말하고, 죽은 자는 아무리 네 활개를 펴서 움직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만드실 때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이 삶[영생의] 기준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산다'와 '죽는다'는 것은 모순 개념이다. 따라서 사는 자로 만드시면서 장차 죽는 자로 만드실 까닭이 없다. '사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사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애초의 그 창조 때의 순수성이 피조물들의 범죄 행위로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결과다. 조물주[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런 훼손 상태를 그냥 묵과하실 리 없다.
그래서 "만유(萬有) 회복(回復)"[행 3:21]의 기틀을 잡아 놓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생 구원을 통해서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시어 아들들을 새로 창조하심이다. 애초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시어 아들을 만드셨다. 이 아들께서 만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자기 형상으로서 아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형상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 형상의 실체께서 하시는 일이 되므로, 그래서 성경은 다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셨다"고 표현한다.
이제 이 아들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각자를 다시 출생하게 하시니 곧 우리의 구원 즉 산 자가 됨이다. 다시 출생하게[나게] 하신다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이니, 살아 있는데도 다시 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이 우리의 죽음에 하나님의 아들 친히 함께 하심으로써 먼저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 각자와 하나가 되시는 방법을 통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하늘에 오르심[昇天] 등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여 우리를 새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심이 된다.
이 새 창조에서도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실체이시고 아들께서는 그 형상 곧 형체이시다. 따라서 아버지 친히 이 모든 창조의 일에 실질적으로 본체(本體)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소재로 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심이다. 애초 아버지께서 외아들 하나님을 낳으심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각자를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시어 산 자로 만드시는 것이 우리 구원의 본질이다.
당연히 이제 산 자로서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이웃[이제 구원 받아 한 아버지를 모신 아들들이므로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이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우리와 함께 되신 아들로서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이 되어 계심이다] 상호간 서로를 위해 사는 것이 되니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머리는 몸의 것, 몸의 머리의 것이므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소유이니, 오직 소유주[주인]를 위해서만 살아[롬 14:7-9/고후 5:15]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요 3:34] 산 자의 삶 자체가 되어 있다.
왜냐면 그렇게 하는 것이 '산 자'의 "양식(糧食, 먹을거리, 식량, food)"[:34]이 되어 있음이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다. 다시 말해 나의 주인[소유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라고 보내신[20:21] 일에 대하여 이를 수행하지 않을 때는 나는 더 이상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이다. 아담이 처음 산 자로 창조하심을 입었으나 스스로 택하여 죽은 자가 되니 마침내는 죽음에 이른 것과 같다.
나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 출발했으나 아담과 같이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와 같이 죽은 자이기를 스스로 선택하여 오직 그리스도[머리로서의]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고후 5:15] 때에는 나 스스로를 이 생명의 영원한 체제에서 분리시키는 결과가 되니 어찌 '죽은 자'가 되지 않고 '산 자'로 남을소냐. 그리고 머리가 일방적으로 머리만 위하는 것도 아니다.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먼저 머리께서 본을 보이시어 몸을 위해 자신을 전부 선물로 주신 결과이다.
"형제"들이라는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한 몸으로 결속되어 위의 설명대로 산 자가 되어 있을 경우에 한한다. 덮어놓고 쓰는 문자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 "이웃"은 이런 한 몸 체제 속의 같은 지체들을 말함이다.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는 물음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눅 10:29].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무조건 형제요 나와 함께 지체들이니 한 머리로서의 한 몸에 속해 있으므로 영락없이 나 자신이요, '확대, 확장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as yourself] 사랑하라" 하심은 당연하다. 외부에 있는 이들 즉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도 않다. 한 몸과는 다른 의미의 이웃이다. 같은 인간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상대로서의 의미이니,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전달해 주는 것이요 이 일로 인한 각종 고난 받음과 필요한 경우의 각종 선행이 수반된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한 몸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므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룸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성경적 관점에서 구원의 의미가 밝혀진 이상,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룬다는 뜻이니, 몸은 머리와 동질(同質)인 것처럼 종은 주인의 수족(手足)이 되는 것이니 주인의 마음을 닮아야 주인의 뜻을 행하고 주인의 일을 할 것이 아닌가. 이미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종으로서의 역할을 하시어 본을 보이셨고 여전히 그 위치에 계심이다[눅 22:27].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이상과 같은 솔직한 심정을 그 초지일관했던 신념을 따라 바울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이며[롬 9:1-3], 역시 그와 같은 말을 한 모세와 같은 심정이니[출 32:32] 이는 곧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고후 2:12] "나 자신을 구원한다"[딤전 4:16]고 해서 절대로 나의 구원이 목표인 줄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음이 더 다시는 아담처럼 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머리의 지시를 받아 그 뜻대로 사는 것 즉 순종하기 위함인 것이다.
위의 바울이나 모세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으므로 구원은 받아놓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구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효험이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음이니 이 점 명심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음이 진리를 앎으로써 된 것이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모두[각자]를 위하심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된다.
그렇다면 나를 구원하셨고 영생을 주셨고[나를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이루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알았을진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종이 되고 그 수족이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친히 그같이 되어 주시어 우리 수족이 되심으로 인해 우리 위해 죽기까지 하셨으니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요 15:13].
반드시 우리에게 친히 본을 보이신 다음에 따르라고 하는 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요, 삼위일체 원리에서와 같이 갑과 을의 대등성이 아니고 대소, 주종, 인과(因果) 관계인 것이다[삼위일체의 원리에 대해서는 곧 이어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요 5:19] 하신 것이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선언하신 것처럼 종과 주인,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이렇게 되면 완전 평등이다. 가장 이상적인 자유 평등이다. 왜냐면 몸과 머리, 종과 주인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유감없이 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녀 평등이니, 양성 평등이니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평등이라야 하는 것이다. 즉 상호 조화로서의 하나됨을 지향해야만 명목상의 형태론적 평등만을 고집하는 혼돈을 면할 수 있다.
죄는 불의(不義)다. 즉 옳지 않음이다. 옳음[義]이 무엇이냐.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이 바로 올바른 것이다. 즉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한 몸 구조에서 자기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삶의 자세가 가장 이상적이어서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으므로 옳은 것이요 선한[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 5:30] 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롭다"[:30] 하셨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7:18] 하심도 같은 뜻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둘이 하나됨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20:21,22] 하신 말씀의 뜻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불의(不義)가 되고 죄가 되고 따라서 죽은 자가 되는 이유다.
사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는 것이 한 몸 구조에서 사는 것일진대 이렇게 하나되는 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둘이 하나되든 여럿이 하나가 되든 하나 의식이 곧 사랑이다. 한 몸 의식이니까 나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갑과 을 사이의 사랑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하나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생명의 법을 사랑의 원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통틀어 '생명과 사랑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다름아닌 사랑하여 상대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자기 부인] 자연스럽게 결론이 도출된다. 여기서 인식 전환이 절대 필요하다. 다른 방향으로 엉뚱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먼저 구원해놓으시고 순종하나 여부를 살피신 다음에 순종하면 구원이 그대로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철회하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사는 자가 됨'에 있고, 사는 자라면 사는 자답게 살아야 하고, 사는 자답게 살지 못하면 그 스스로 죽는 자가 됨이니 곧 자살행위일 따름이다. 아담의 범죄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도 무릇 모든 범죄가 바로 이 자멸행위 이상의 의미가 없다.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짓이니 아담이 그러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말 안듣는다고 처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그 응분의 조처가 "하나님의 형벌"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왜냐면 하나님 지으신 이 피조물 세계에서 하나님의 주관, 주재(主宰)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까닭이다.
'산 자'와 '죽은 자'
결국 하나님 말씀 순종하지 않고 그 삶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는 결과가 어떻게 되어 나타났는지는 그와 같은 이미 지나간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살해하여 처음부터 살인자가 되었고 가인은 이 세상에서 그 아우 아벨을 죄없이 까닭없이 죽임으로써 인간 세계의 첫 살인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살인자가 그냥 방치되겠는가. 천국에서는 모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세계라 해서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와해시키는 작용을 여전히 할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가인의 예나 기타 숱한 역사적 사실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목숨이 없어지는 것만이 살인이 아닌 것이다. 한 몸의 원리에서 모두 자기를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고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데, 만일 그렇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면 그 사회의 질서가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은 완벽한 것을 원하신다. 왜냐면 완벽하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완벽한 삶의 뿌리가 앞의 설명처럼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 그래서 이 '자기 부인'을 따르는 것을 두고 영물이든 사람이든 그 '사는 법'이라 하는 것이다.
살아도 '사는 법'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연계가 자연법칙을 따라 존립해 가는 이치 꼭 그대로다. 영원한 삶은 당연히 그 삶의 원리를 따라야 유지됨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거니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다시 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요 3:5-7] 하신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위치는 육체를 물려받아 육으로 난 상태요, 성령을 "물려받은" 경우에는 성령으로 출생하는 상태가 됨이니 이치대로 이루어진 합리성과 논리성이 완연하고 엄연하므로 "이상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성령만을 우리가 받아 모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령"의 의미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고 뿐 아니라 각자의 모양과 형상이 되시어 현재 우리가 죄인과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옛 창조를 우리 각자와 함게 하신 '죽음'으로써 완전 종결시키신 후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새 창조가 시작되는 등의 모든 일을 완료하신 다음 그리스도 친히 성령[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으로 우리 각자 안에 임하시어 영원히 우리 각 사람과 하나가 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을 말함이다.
실질적인 내용은 이러하지만 '창조' 자체의 외곽 형태는 처음 창조나 새 창조가 모두 같음이니 다시 말해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이중 구조'로서의 시종 일관성이다. 아담이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창조된 다음 영혼이 조성됨으로써[창 2:7]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인 것과 같이,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나 자신을 아담 당시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간주하시고 성령께서 당시의 '아담의 영혼'에 해당되시는 의미로 내 안에 임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새 창조로서의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다.
이것이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함"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중 구조에서 '육체'된 나로서는 '영혼' 격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성령으로 계시므로]께 대한 절대 복종이 이 하나됨에서의 핵심 요소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몸을 가히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복종은 기계적인 것이어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해 매일 매시 진행되는 것이므로 어느 때든 내 스스로 마음을 바꾸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됨이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해 내 스스로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리라는 다짐과 약속 아래 되어진 것이므로 내 스스로 이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면 즉 주님을 위하지 않고 내 스스로를 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와해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약속 불이행 또는 변절은 영원 세월을 두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충분히 그 결말이 좌우지간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든 악인은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지므로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런 시험의 때도 없고 악인, 선인으로 구분되는 작업도 필요치 않게 된다. 이 세상 한 때만으로 모든 것은 충분하고 다 드러나져 있기 때문이다. 천사[영물]들이 애초에는 모두가 다 거룩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이내 그 선과 악의 향방이 정해져[스스로의 자유 선택에 의해] 오늘날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양분되어 있음과 같은 이치가 된다.
바로 이와 같이 철저하게 원리원칙을 따르심으로써 죄 지어 죽게 된 인생을 그냥 원칙 없이 살려내시는 일을 아주 불가능한 것으로 정하시고, 오직 친히 우리 위해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죽으심을 통함으로써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결코 그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스스로 원리원칙대로 나가시는 것을 그 친히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면서까지 확증하신 바가 되었기에,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시리라는 보증이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피조물 세계가 영원히 확고부동하게 존재하게 될 것을 우리 모든 피조물들이 100%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기분 내키시는 대로 또는 형편과 환경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시고 마치 영원한 원리원칙에 스스로 매여 움직이시는 것처럼 하신다는 사실을 그 친히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확정해 주신 의미이니 이는 우리의 구원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된다. 친히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신 결과로 오늘에 이르고 있으므로 장래에 대한 영원무궁한 보장이 되어 있음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심으로써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들을 위하심으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이렇게 확립되어 있는 생명의 법 질서를 따라 행하심이다. 즉 아버지께서 오로지 아들을 위하심으로써 아버지 스스로 자기를 위해 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아들 역시 아버지께 그러하시니, 아버지께서도 아들께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 어느 피조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생명의 법칙의 기본과 근간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영구적으로 자리잡아 계시는 이상, 내게 관한 한 그 어떤 변화도 영원토록 없을 것임을 내 스스로 100분 확신할 수 있음이다.
이 세상은 바로 이런 선[의인]과 악[죄인 또는 악인]의 구분 작업이 인생들을 상대로 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시적이고도[그러나 영원을 통해 단 한 번밖에 없는] 독보적인 아주 중요한 의미의 무대이다. 비록 지극히 짧은 찰라 같은 기간으로서의 이 세상이나 그 중요성과 비중으로 말하면 가히 영원 세계와 맞먹는다 할 것이니 그 영원 세계의 운명을 각자 스스로가 결정하는 말하자면 그 영원 세계의 전생(前生)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 역시 양면으로서의 특성 곧 둘이 하나되는 대칭[상칭, 대립]을 이룸이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및 전생[이 세상]과 그 전생을 토대로 하여 이룩되어 있는 영원한 세상의 죽음 또는 생명이다. "전생"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가 아닌 그 때 그 영원한 세계에 가서야 제대로 쓰일 수 있게 되는 용어이다. 즉 "전생에 내가 어떠하고 어떠했던 그 결과로 내가 현재 이런 영원한 죽음에 처해 있다[또는 생명의 환락을 누리고 있다]"는 등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은 오늘날의 소위 "전생"이니, "윤회"니, "환생"이니 하는 따위는 "내가 과거의 세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이렇게 잘 산다, 못산다, 복이 있다, 없다" 등의 말을 대중없이 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모든 진상[과거의]을 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덮어놓고 그런 줄로 안다는 것뿐이므로 진실일 수가 없고 악령들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내가 과거에 무슨 악을 저질러서 이렇게 고난을 받는다든지 혹은 내가 전생에 무슨 선한 업보로 이런 복을 누리고 있는다든지 누구나 손쉽게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의미[권선징악]가 있을 것인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또 실상대로 말하면, 이렇게 악을 행하면 벌이 오고 선을 행하면 포상이 따르니까 그래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 하게 된다면 그것은 간섭이 되고 일종의 강제가 되므로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된다.
스스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 선택에 의해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양단간의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렇다. 물론 전혀 그런 양단간의 결과를 몰라서는 안되고 그 구체적인 증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일벌백계 식으로 한두 사건으로써 나타내어지면 그것으로 충분한 법이다. 악과 선에 대하여 포상이든 형벌이든 그런 행위를 나타내는 족족 나타내어지면 그것은 강제요 간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덴낙원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살인 행위[거짓말로 속임으로써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나 초대교회에서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나[행 5:1] 그 정도의 사례만으로써도 충분한 것이다.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산 자가 되었으므로 산 자답게 산다는 뜻이다. 산 자로서 죽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앞에서 우리는 이미 '산 자'가 무엇이며 '죽은 자'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산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이고 '죽은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이다. 이것이 삶과 죽음의 올바른 정의이다. 왜냐면 그 본질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형체에 해당되는 것이 있으니, 그 '형체'가 산 자의 경우에는 천국이요 죽은 자의 경우에는 심판으로서 영원한 불 못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절대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고로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어서 항상 "죽은 자"[마 8:22]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생명의 세계 곧 산 자가 삶의 낙을 누리는 천국'에 들어갈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산 자로서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 것은 산 자가 되는 것을 말함이니, 구원은 무조건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이다.
생명 있는 자가 사는 것이지 죽은 자가 산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을 이룬다는 말 뜻도 사는 자답게 산 자답게 산다는 뜻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삶의 원리 또는 법칙대로 살아 생명의 법질서를 지킨다는 의미이니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에 있는 것이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애초에 회개하던 마음이 변하여 과거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 이를 다시 회개하지 않는 경우 그는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그것은 무조건 죽음이다. 죽은 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나에게 자신의 전부를 선물로 주셨다는[갈 2:20] 의미다. 이는 영원히 나를 위해서만 사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이 사실을 안 나는 그 사랑에 감복하여 나도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부 바쳐 나의 주인[소유주]으로 삼고[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른다-마 7:21] 오직 나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나를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할 때 이렇게 회개함으로써 나는 산 자가 된다.
이렇게 산 자가 되었음에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나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경고를 무시한 결과 그 경고대로 죽음에 돌아간다면, 결국 구원은 미리 해놓으시고 순종[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사는 것] 여부를 살펴 불순종[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고후 5:15]하는 경우 멸망하게 하신다면, 결국 "우리의 의를 행함에 따른 구원이지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 값없이 주시는 영생이 아니지 않으냐"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수차 설명한 대로 천만의 말씀이다. 처음부터 순종할 의사가 없는 이는 구원부터가 불가능하지만 중도에 가서라도 순종하지 않는 경우 누가 그런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한다던가[마 7:21]. "믿음"이라는 것 자체를 '영생을 공짜로 얻는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알고 있는 것부터 청산할 일이다. 믿는다는 것,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는 것은, 내가 순종하겠다는 약속[이것이 회개의 속성이다]을 하면, 그 약속을 액면대로 수용해 주셔서, 앞으로 내가 순종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 친히 나를 믿어 주심으로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행 5:32]이라 한다. 아직 구체적인 순종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순종하기로 약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신뢰, 신용해 주심이다. 이 경우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시는 격이다. 과거 내가 무슨 의로운 행동을 했든지 간에 그런 행동을 보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상호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인 것이다[요일 2:25/약 1:12/2:5/5.0pt;">히 10:36:15].
로마군 장교 고넬료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도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고"[행 10:2] 베드로도 그를 평하여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35]는 말도 했다. 이런 "의를 행함"은 "진리를 따르는"[요 3:21] 것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20] 것과 대조된다.
그가 "의를 행했기" 때문에 구원된 것은 아니니 그런 "의를 행하고도" 그는 사도 베드로를 청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의를 행하는 이들을 "받으신다"고 했지 "구원하신다"고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할 것을 인지하셨기 때문에 고넬료를 "받으셨다" 한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선물로서의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고로 이 경우 의를 행했다는 것은 "진리를 따르고 빛을 미워하지 않음"을 입증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또 고넬료와는 반대되는 경우도 있으니 십자가의 강도로서 회개한 경우다. 악행을 했다는 죄목으로 그렇게 처형된 것이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인정한 것이다[눅 23:41].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경우다. 왜냐면 그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함께 처형되는 그 동료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했으니 이는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회개]이 없다는 증거다. 이런 마음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요 3:20] 것에 해당되고, 회개한 강도는 "오호라, 이 비참한 인생이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에 해당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장치해 두신 양심이 작동하고 있으므로[롬 2:14,15], 모세 율법 아래에서 그와 같이 "사망의 몸"이 되어 있음을 절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양심상으로 "사망의 몸"이 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이들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역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선행, 의를 행함, 순종의 의미이다. 순종하게 되면 자연 그것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나타나는데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을 머리로 인식하는 '한 몸' 의식에서의 지체(肢體) 역할에 우리 각자가 충실함이다. 그 핵심이 자기 부인이라고 했거니와,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구조로써만 실현되고 구체화하는 까닭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인데 이 하나됨의 체제에서는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구조로서, 되풀이되는 설명이지만 자기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위하지 않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라는 존재'[처음 창조의 결과물]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혀[장사 지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영역으로 그렇게 인식할 때에만 한해서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이렇게 믿고 믿음 생활을 하다가 이 믿음을 버리고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면 이 경우 더 다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상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같은 여전히 세상에서의 "죽은 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할 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로 하여 회개할 때[즉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을 이룰 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장사 지내지심이 바로 나의 장사 지내짐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둘이 하나됨을 인하여 내가 죽었음을 믿을진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데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사니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부인하는 것이요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반대되는 의미가 되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요 그 결말은 "멸망"[:19]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부인함이다. 따라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
내가 마음으로 믿는다는 그 믿음 자체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의 것으로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을 통해 내가 회개하여 죄 용서를 받게 되면[행 2:38]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서 내게 임하시어 그리스도와 내가 문자 그대로 하나되어 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믿음을 버림으로써 그와 같이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발로 밟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히 6:6/10:26,29] 하는데도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등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래서 앞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은 '믿음의 영역'이라 한 것이다. 즉 믿음이 있을 때에만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믿음이 없을 때는 온전히 그림의 떡일 뿐이다. 고로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살기로 결심하는 회개에서 죄 용서 받고 성령을 받아 모실 때[행 2:38] 그것이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무엇인가. 내 죄가 그리스도를 죽인 즉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이 아닌가. 따라서 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을 말하니까 "자기 자신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을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임은 불문가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는 그렇게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한 마디 선고에 당장 그 혼이 떠나갔지만 그 전에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으나 결국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즉결처분을 받아 "일벌백계"가 된 경우라 할 것이다.
사람마다 성령을 받기만 하면 구원되는 것이 아니니 모세 시대에도 성령 충만하여 예언자들이 활동했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이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내게 임하시는 경우에 한하는 성령의 의미이시다. 나 자신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 위하여 살겠다는[순종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할 때 그것이 "회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가 용서되고 이 죄 용서되어 깨끗하게 된 바탕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심이다. 죄를 다시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 없으면 과거의 죄가 용서될 리가 없다. 죄 용서되지 않은 깨끗하지 못한 불결한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여 오실 수 없다. "죄 용서"를 확대해석하여 오늘까지 지은 과거 죄만 아니라 오늘부터 지을 죄까지도 포함한다는 해석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요 지어낸 말이지 일반 상식으로 판단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 삶의 법과 질서를 알리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 사랑으로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영생하지 못한다. 인간고는 끊이지 않는다. 엄정한 법과 질서를 선포하되 무한하신 사랑을 동시에 알리는 것이니 이 역시 3위1체 원리의 양면성이다. 사랑-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이 나를 위해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 주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심으로써 죽은 자가 된 나를 다시 살리려 하심이었으니 이보다 더 평안하고 기쁜 일이 있는가. 얼마나 흡족한가. 법과 질서의 엄정함을 전하되 동시에 그리고 양면성의 원리로 우리에 대한 극진하신 사랑을 알리는 우리의 발걸음은 기쁨으로 가볍다.
보람찬 일로 양 날개를 단 듯하여 지칠 줄을 몰라 독수리의 날개 침과 같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困憊, 힘이 없고 지쳐 몹시 고단함)치 아니하시며 명철(明哲, intelligence)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것이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28-31].
여유만만 천하 태평의 느긋하고 넉넉하고 그득하고 든든하고 푸짐하고 푸근한 삶을 누리라.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초 의도하신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고로 얼마든 당신의 것일 수가 있다. 누구에게든 선물로 주신다. 그러나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하신 이 양면성을 마음에 둘 일이다. 기회는 오직 이 세상 한 때뿐이다. 이 세상은 인간이 절대로 살지 못할 못쓸 땅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기회의 땅이요 때이다.
실로 절호의 기회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용할 때 당신은 그 기회를 일단 잡게 된다. 잡은 다음에는 그대로 돌진하라. 뒤로 돌아다 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라[눅 9:62]. 그런 사람들은 롯의 아내처럼[눅 17:32] 영원히 생명으로부터 탈락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때는 굉장한 때이다. 그 의미로 말할진대 영원 세계와도 맞먹는 비중을 지니는 것이니 이 현장에서의 각자의 자유 선택으로 자신의 영원 운명이 가름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어찌 소홀히 보낼 시간들이랴. 일러 주어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대로 모르게 되어 있으니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을 어둡게 한 결과다[고후 4:4]. 그러나 한번 말했다고 전부가 아니니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기를 힘쓸 일이다. 내 방식대로 할 일이 아니니 고로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함이 필수이다. 우리 자신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막 11:17]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본분을 다하기를 힘쓰고 애쓰고 전력을 다하여[with all perseverance-엡 6:18] 노력할 일이다.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몸이니[요 20:21] 그 보내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4:34] 반드시 주님의 지혜를 따라 행하지 않으면 이 시험 많은 세상에서 결단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일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할 것이다("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Be not wise in thine own eyes: fear the Lord, and depart from evil. It shall be health to thy navel, and marrow to thy bones")"[잠 3:6,7]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지혜의 신"[신 34:9/사 11:2/행 6:3/눅 21:15]이시심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을 때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해 경고하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사(謀士, Counsellor)이심을 분명히 했고[사 9:6] 우리에게 "지혜"[고전 1:30]가 되심을 밝히고 있음도 같은 뜻이다. 즉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그 뜻을 이루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께 그 인도하심을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그렇게 한 것이다. 앤[Ann Preston, Holy Ann], 헬렌[Helen Ewan],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북한 교회의 당시 79세였던 형제가 모두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이마다 반드시 이 사실을 명심하게 하여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임을 그래서 철저를 기하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 보내신 뜻을 행할 수 없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을 깊이 마음에 아로새기도록 해야 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내신 뜻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됨으로써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마 7:21] 경고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은 이런 경고를 지키기 위해서만 그렇게 행할 때 '율법 행위로 구원 받으려는' 세상 종교로 전락함을 알고, 항상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요 21:15]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것이라는 올바른 마음 자세로 일관해야 함이다. 왜냐면 그렇지 못할 때 "저주 받으라"는 선고밖에 바울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없었던 것처럼 실상이 분명 그러하기 때문이다[고전 16:22].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분 없다"[시 73:25] 하였으니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으로서 진실을 밝히심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심이니 이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정상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는 것인즉, 바로 이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날이면 날마다 주님과 사랑 가운데 "함께 사는"[살전 5:10] 일상생활이어야 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교가 아니고 삶 곧 일상생활이라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 처소부터 먼저 세우라는 일체의 언급이 없음도 이 때문이다.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구원이요 방금 설명한 대로 그 구원 받은 시간부터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곧 이 세상에 남겨진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처럼 낙원에 직행하지 않은] 유일한 의미요 목적이므로 전도하기 시작하여 같은 믿는 형제들을 만들면 그 형제들끼리 합심으로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애초 아담이 에덴낙원에 있게 되면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지으신 것이 여자가 아닌 영계의 "각종 짐승들"[창 2:19] 영물[우리가 "천사"들이라 부르는]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아담과 짝을 이루어 줄곧 같이 지내며 모든 지혜로 아담을 보필할 보좌역["helper"]으로 만드심이 목적이었으니 그 많은 보좌역들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대표적인 자를 선정하여 그 짝[영역은 이를 "helper"라고 번역하고 있다]이 되도록 하심이었다.
왜냐면 아담은 먼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심 받은 후에 영계에 속하는 영혼을 조성하셨고 그래서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그 몸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영물들은 이 자연계에 속한 흙["dust"]이 아닌 영계의 땅["ground"로 영역은 되어 있음]을 소개로 하여 처음부터 만드신 까닭에 인간처럼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가 아니라 그 육체가 영혼이요 영혼이 곧 육체가 되어 있는 그런 형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처럼 영은 영이로되[히 1:14] 육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육체가 있는지라 그 영혼은 이 육체를 집으로 하는 무형의 형태가 할까 육체를 형체라 하면 그 본체 또는 실체로서의 모양새를 띠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런 영물들의 지식과 지혜에는 사람이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지식과 지혜로써 인간[아담]을 보좌할 존재를 아담 스스로 찾도록 하심이었는데, 그런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으므로 부득불 여자를 창조하신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와 영원히 함께 사시게 되는 성령은[요 16:7] 영역으로는 "Comforter"[KJV], "Counselor"[NIV], "Helper"[N(ew)KJV]등으로 되어 있으니 "helper"라는 번역이 위의 창세기 기록에 부합한 의미라 하겠다. 즉 영원하신 나의 짝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는 우리의 '돕는 이'시나 [왜냐면 육체로 계시기 때문에 여러 제자와 함께 계시므로] 이제 성령으로 각 사람에게 함께 계실 때는 말 그대로의 '나의 짝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갈 2:20]. 모든[믿는] 사람에게 그와 같이 개별적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홀로 독생자 하나님[독생하신 하나님, 외아들이신 하나님]이시므로 평소 "나의 아버지"라 하신 것처럼 이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 영을 우리 각자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령으로 출생 즉 다시 출생하게 하심으로써[요 3:3,6] 새로이 창조하시는 것이므로[고후 5:17] 우리 각 사람도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됨을 가리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이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일러 주라"[:17]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셨다.
아버지의 자식들은 모두 자기 아버지를 가리켜 "내 아버지"라 하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우리 아버지"로 시작됨이 바로 그런 예이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심이니[요이 1:9] 그래서 "성령"이시라는 "이름"[마 28:19]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성경이 밝히고 있으니 나는 이와 같이 가장 가까운 [심지어는 부모 처자 같은 어느 인간보다도] 사이로 친히 내 안에 계시니 중간에 "마리아"를 통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다.
마리아의 모성(母性)을 통하는 의미라 무리하게 강변(强辯)하나,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라는 의미가 바로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의 의미이신 줄 왜 생각이 못미치는가. 하나님은 피조물 그것도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성별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같은 피조물이라도 영계에 속한 생물로서의 천사들조차도 [영계는 자연계보다 고차원의 세계인 까닭에] 성별이 없다는 사실이 왜 머리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들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에는 우리와 똑같이 되시느라 남성을 지니셨으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처럼 성별로 구분된 옛 육체에 종속되실 리가 없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렇게 성별을 초월한 육체로 계시는데 우리 역시 성별을 그대로 지닌 육체로 영원히 살 필요가 없다. 왜냐면 그리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남자로서의 그리스도, 여자로서의 그리스도 양면으로 수시로 변환되어야 하실 것이니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변환되어야 할 것인즉, 따라서 구태여 그리 될 바에야 애당초 아담의 육체처럼 성별이 없는 것이 훨씬 편하고 합리적일 것이 아니랴. 성별로 나누어져 있을 이유가 없으니 더 이상 생산, 생식(生殖)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그러하시듯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이신데, 비유도 못할 정도로 훨씬 못한 인간의 모성을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을 앞세워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어디 답해보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상 설명과 같이 원래 성별이 없는 육체로 지으심 받은 아담을 기준해서 하는 말로서 아담이 나중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육체는 같은 자연계의 흙으로써 창조된 몸이지만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기 위할 목적이 분명하게 창조되었으니 인간의 피부가 털북숭이가 아닌 매끈한 표면으로 되어 있는 등의 자연계의 동물과는 다른 육체 구조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성경에서 굳이 "아버지"시라 함은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밝힘이요 허울 좋게 이름만으로 간판을 내거는 따위의 일은 인간들만이 하는 짓일 뿐이다. 인간의 모든 부모 자식 관계의 근본이시고 그런 것을 그림자로 치면 실질,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자신을 낳은 엄마 품만 한 낙원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하신 것이다. 음식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고 사랑은 사랑을 해 본만큼만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일단 믿음에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 18:3] 하신 것이다. 아담도 악령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 결과가 맺은 결말인 것이다. 인식 전환, 의식 전환이다. 자기중심의 삶은 아예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 지금 온 세상이 자기중심이 되어 있음은 때가 되면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그 증거인 것이다.
더 이상 그런 삶은 상상하여 염두에 두지 말 일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목숨은 반드시 자연계를 따라야 한다. 영생은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따름이 아니라 영계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데 우리는 그 법칙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통할하는 다시 말해 양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법칙이 3위1체 원리인즉 바로 이 법칙이 자연계에서나 영계에서나 인간 삶이든 영물들의 삶이든 관장하는 생명과 사랑의 법칙인 것이다.
즉 한 몸을 이루어 머리와 몸[의 각 지체로서]으로서의 역할 분담을 하는 자기 부인의 삶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과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상대를 위한 삶의 법질서이다. 지금은 영생하는 때와 장소가 아니므로 [다시 출생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존재하기는 하나] 여기 이 세상[인간의 원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오로지 영원한 생명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결사각오로 임해야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상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려면 온갖 핍박과 종국적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죽음과 같은 것도 반드시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요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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