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에 대한 답변(끝)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에 대한 답변(끝)
2016.2.15




이로써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끝냅니다



9.  ‘21세기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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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광로

하나님은 타율적으로 의타심으로써 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대신 살아 주시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아마 이런 말에 놀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오도(誤導)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놀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약 성경에서나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미로 말할 때는, 우리가 창조될 때 생명에 관한 일체의 것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냄이니 이것이 그 첫째다.

둘째는 둘이 하나되는 또는 모두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됨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을 우리가 믿는 믿음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히 13:6]이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머리와 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머리께서 그렇게 몸을 위하시니 당연히 몸의 각 지체된 자는 머리를 마땅히 위해야 함 즉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동시에 수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시, 계명, 말씀을 따라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하고 나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런 엄숙한 현실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자기중심의 타락한 현실의 삶에 적응하려 하지 말고 영원한 미래에 대비할 것을 엄숙히 일러 주는 것이 성경의 모든 경고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하라"[요 6:27]는 경고 말씀이 이 뜻이다.

이 세상으로 결코 끝나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현재의 이 세상은, 그런 영원한 세계에서 각자가 장차 처하게 되는 데가 생명이냐, 죽음이냐 그리고 영원한 삶의 낙이냐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의 고통 고난이냐 하는 것을 가름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갈림길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다. 본격적인 삶도 본격적인 죽음[고난]도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본격적인 것을 각자 스스로 정하기 위한 전생(前生) 개념에서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생 개념을 전혀 엉뚱한 것에다 갖다 붙이고 있는 세상 종교로써 자신을 영구적으로 속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이다.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현실 앞에서 그런 종교를 모두 통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가 이제 나타나 장차 모든 종교를 통합할 것인데 바로 그런 경우다. 진리는 하나뿐인데 갖가지 다른 내용으로 스스로를 나타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내용이나 표현이 다를 리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실 절대적 필요성을 성경 외에 그 어느 종교가 그 비슷한 것이라도 말한 적이 있던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표방하면서도 성경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종교[소위 "기독교"라는 이름의]를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렇듯이 그 속임수에서 능수 능란하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구석구석까지 그 덫과 올무를 쳐두었다.

그렇게 통합될 수가 있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음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 된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그런 통합 운동이 일어날 때 진리는 그런 것에 끼이지 않고 독야청청(獨也靑靑, 홀로 푸르고 푸름)할 때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가 된다. 무엇이든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것을 택할 것이니 진리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모순되는 점이 있거나 자가당착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런 진리 아닌 것에다 자기 자신을 내맡기고 더군다나 영원한 미래를 건다는 것은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다. 현재의 인간이 모두 "죽은 자"라는 진상을 성경이 밝히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현재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심판을 앞둔 세상이다. 제대로 된 비유일지 모르나,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세상을 가리킬 때]에서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그리고 엄정하게 구조 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인 것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될 사람은 철저히 반드시 구원해낸다는 것이요 "엄정"하다는 것은 부적격자를 철저히 도태시키면서 오직 적격자만 구원된다는 뜻이다. '부적격자'라 함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자기 부인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중심을 고집하는 이들을 말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이 모든 악의 뿌리요, 자기를 부인함이 선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순전(純全)하다는 것은 인간의 양식(良識)과 양심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터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므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요 3:16-21]이라 하심과 같이 자기중심을 고집함이 빛을 미워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임의로 갈라내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가 자기를 적격 여부로 나타내어 갈라서는 것이다. 각자 자기 자신의 취사선택을 따라 스스로를 나타낸 것을 하나님은 단지 분류하시는 작업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린다"[마 13:47,48] 하심과 같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사람 임의로 가려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므로 혹은 처음부터 나쁜 종류이므로 거기 따라 선별하는 것뿐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에도 이러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용광로(鎔鑛爐, 높은 온도로 금속, 광석을 녹여 제련해 내는 가마, fiery furnace, furnace of fire, 우리말 번역은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49,50] 하셨다. 사람의 용광로는 제련에 쓰이지만 여기서의 용광로는 영원한 격리 장소다.

"악인 중에서 의인을 골라 내는" 것이 아니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낸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표준은 의인이니 창조는 처음부터 의인으로 만드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인으로 만드시지 않았으나 스스로[첫 사람 아담이] 악인[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되기를 자청한 결과다. 새 창조도 마찬가지다. 의인으로 만드셨지만 스스로 죄인됨이니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고후 5:15] 약속하므로[회개] 구원하셨으나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만일 저들이 우리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義)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은 것이다. 과연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들에게 부합한 것이다"[벧후 2:20-22] 함과 같다.

또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로 말하면, 그들을 예외없이 의인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능력으로 모든 장치와 제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거절한 것이니 이는 원천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을 의인으로 만드신 결과처럼 되었으나, 아담이 이를 따르지 않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등 악령들이 하나님의 이 뜻을 따르지 않음과 같이 그 스스로 이를 거부하여 그 자신을 악인으로 만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하여 그 영원한 '용광로'에서 잠잠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셨으니 왜 그런가. 그러한 경고를 믿지 않거나 또는 알기는 알고 듣기는 들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산데 대한 뒤늦은 후회막급(後悔莫及, 잘못된 뒤에 아무리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음)의 통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 증오, 분노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밖에 탓할 데가 없는 것이다. 말 못할 비극이다.

고열로써 금속, 광석 등을 녹여 제련해 내는 "용광로"[furnace]로서의 구실은 이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광물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죽음의 고난의 용도가 이 용광로의 제련 역할을 함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할 것이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다"[사 48:9,10] 하심과 같다.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요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할 것이다"[슥 13:9]는 등의 말씀과 같이 이는 어버이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회초리가 되신다[히 12:3-11]. 우리의 고난이 그런 성격도 동시에 지님이다. 이 용광로를 거부하는 경우 이것이 나중에는 저주의 용광로로 변한다 할까.

나 자신을 제련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기꺼이 일치시키기를 거부할 때 다시는 연단의 용광로가 아니라 곧장 죽음의 용광로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연단의 용광로를 통해 값비싼 가치로 제련해 내시는 것이다.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를 순종하는[그러한 고난을 통해]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8,9] 함과 같다.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나, '산 자'가 되고 나서 움직이라는 것이다. '산 자'라는 것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산 자'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일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밖에 없다. 그것은 '산 자'로서의 움직임이 아니라 '죽은 자'로서의 뒤척임이니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죽은 자'라 하는 것이요, 그리고 '산 자'로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는 필연코 '죽게' 되어 있다. 죽은 자임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방금도 지적했지만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나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이나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가볍게 헤프게 생각하는 것이 치명적인 것이다. 성경의 경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똑똑히 믿고 깨달아 심기일전하여 각성(覺醒)하고 경성(警省)하는 증표도 없고 그저 그렇게 차일피일 또는 심드렁하게 무관심으로 대한 것이 그 날에 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없다고 할 때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자기 욕심을 따라 혹은 어쭙잖은 편견이나 선입견의 포로가 되어 그냥 간단하고 마음 편하게 해석해 치우고 생각해 치워 지내 온 결과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슬피 울며 이를 갈 이유가 없다. 스스로 처음부터 영원한 고난을 취할 자는 인간이든 영물이든 간에 있을 턱이 없다. 오직 한 때의 편한 생각 또는 제 잘난 맛의 넘치는 생각으로 자기를 다루어 옴으로 인한 씻을 수 없는 만고의 한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 상태로 마음을 먹고 있다가도 언제든 정상적인 심리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여유로 말하면 이 세상의 기간이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바로 이런 충분한 여유를 주기 위해서 이 세상의 수십 년 기간이 허락되어 있는데도, 웬걸 이 구차한 자연계의 기약없는 시간들을 삶의 낙을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빙충맞은 생각에 도리어 사로잡혀 있어 이리도 귀중한 '한 세상 세월'을 헛되이 소모하여 날려 보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인류이다.

그러므로 득도(得道,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어 순종하기로 약속하여 죽은 자의 틀을 벗어나 산 자가 됨 즉 생명에 이름) 이후에야 "자기 스스로 이룬다"는 순서가 분명해진다. 이 차례를 지키지 않고 자기 노력부터 앞세우니 진리일 수가 없다. 왜냐면 자기 스스로 득도하려고 하니 득도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연적으로 옆길로 새어 나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 기회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놓칠 리 없는 까닭이다. 그냥 덮쳐 버려 거짓 것을 믿게 만든다.

옆 길이란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결과가 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꼴이 됨을 말한다. 사람이 애쓰고 힘쓰는 것도 순서가 있음이니 반드시 기존 질서대로 그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함이다. 애쓰고 힘쓰는 것도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은 흉하고 남을 위해 해야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다운 것이다.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답듯이 흉한 것을 멀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따르는 것이 인간 본연의 성향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고 버둥거리고 기를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야 더더욱 용납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흉한 일이지 아름다운 것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생존경쟁[본능적인 목숨 부지를 위하여 무작정 뛰는 짐승과 같은]의 겨센 급류에서 억지로라도 천신만고 끝에라도 물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를 바라고 받는 것이 시급하다. 가장 먼저 "다시 출생(出生)하는"[요 3:3] 것부터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나는 것인데 따라서 처음부터 만유를 상속 받은 자로서 출생하는 것이다. 모든 죄와 악이 인간의 욕심[자기중심에 의한]으로부터 나는 것이므로[약 1:15] 미리부터 하나님 지으신 만유를 다 상속 받는 상속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탄생하게 하시는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물론 이는 약속이다. 현재 주신 것임과 동시에 약속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라 할까. 순수한 약속은 아직 내가 누리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미다.

그래서 나의 소유[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므로]가 친히 되어 주셔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는 그 힘으로 나는 현재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음이다[빌 3:12-14]. 내가 달려가고 있는데 불시의 광풍이 불어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도록 나를 단단히 붙잡아 주시는 그런 의미와 같으니 내 달려감에 절대로 아무 지장이 없도록 나를 지켜 주심이다. 그러나 나 대신하여 달려가 주신다거나 내가 달리지도 않았는데도 내게 그 목표한 것을 집어 주신다거나 그런 일은 일절 아니하신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달려가 차지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인 것이다. 즉 나의 구원을 스스로 이룸이다. "몸의 구속이요 양자됨"[롬 8:23]이다. 양자가 되어 있지만[롬 8:15] 내 스스로 취하는 양자됨이다. 역시 양면성이다. 현재 주심으로써 내가 누리고 있음에도 약속이니, 만일 약속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내 몸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하는 판이다. 그리 되면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다. 나의 신령한 몸을 보고서 누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는가.

그리 되면 하나님께서 극력 경계하시는 바 악한 자도 구원에 이르게 된다[눅 8:10/막 4:12/마 13:13/행 28:26,27]. 왜냐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너무나 간명하기 때문에 악인도 이를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음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이러한 악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나 주변의 많은 피조물들은 알 턱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악인]들을 내치시면 "왜 저 사람은 훌륭하게 믿는데도 하나님은 버리시는가"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작 구원에 이를 사람도 의혹이 생겨 불필요한 걸림돌을 스스로 장만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일일이 이런 저런 경우를 따져 설명하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즉 처음부터 약속으로 해 두어 자타가 모두 다 판별이 쉽도록 끝까지 그 행위의 어떠함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심이 최상이다. 그렇게 되면 중간에 탈락하는 자는 탈락하고 완주하는 자는 완주하는 것으로 아주 공정공평하게 판명이 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단독으로 당신 혼자만 아는 것으로 움직이시거나 일하시는 법이 없다. 모든 피조물이 충분히 납득하게 되도록 모든 일을 무한하신 인내로 꾸려 가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다 승복(承服)하게 되도록 하시고 그렇지 않고는 티끌만큼도 움직이시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원리원칙주의요 공평공정성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절대 신뢰를 하고 하나님을 충심으로 사랑하고 복종함이다. 내 스스로 영생을 취하도록[딤전 6:12,19] 하심이다. 이를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기준에 의하여[소위 "신학자"들은 당치도 않게 이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운운"한다] 사람들을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미리 정하신 다음 그렇게 구원 얻을 사람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어 믿게 한다는 황당한[이치에도 맞지 않고 상식과 양식에도 벗어나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 것이다. 각자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셨다는 성경의 자상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그와 같이 억지 해석하는 것인데,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 진리를 찾아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는 이들은 이런 거짓말을 간파하게 되어 있는데도 성경을 건성으로 읽고 성의 없이 대하니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누리게 함으로써 완전히 선물로 안겨 주심과 동시에 약속이 되게 하셨으며 그 보증의 의미로서도 성령을 주셨으니[고후 1:22] 나의 이 새로 창조되고 다시 난 사실은 따라서 영구불변이다. 단 내 스스로 버리면 버려지게 되어 있으니 그래서도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 함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얼마든 버릴 수가 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억지로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고로 내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있어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대상이 되든 그 표적이 되든 상관 없이 이 하나님의 아들됨은 확정적이다. 나의 생명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실 때 이 사실은 현실화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약속이다. "내가 현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데 어째서 약속이냐?" 하고 또 질문한다면, 대답은 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내가 현재 처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육체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렇지 않으니 그래서 약속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도리다. 양자를 들이더라도 그런 약속 아래 취해지는 입양인데 만일 양자가 되고서도 마땅한 도리 즉 양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파양(罷養)의 수속을 밟을 수밖에 없음과 같다. 하나님의 양자[롬 8:15]로서의 파양 수속은 "몸의 구속(救贖)"[:23]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받으면 "양자됨"[:23]이다. 받지 못하면 파양이다. "몸의 구속"을 "양자됨"과 동일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일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15] 양자가 이미 되어 있는데 또 무슨 '양자됨'[:23]이냐?" 하겠으나, "구원을 받았는데 또 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요, "양자가 되어 있는데 왜 또 파양이냐" 하는 것과 같음이니, 그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 아바["아바"는 어린 아기의 아버지에게 대한 첫 발음 "아빠"와 같은 입 놀림이라고 한다]라고 부르게"[:15] 되었지만, 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10:29] 망령된 짓을 하는데 무사할 리 없다.

몇 십년 전에 유명 선교부의 선교사로 한국에 나온 어떤 이는 성경이 이 "끔찍하고도 무서운" 사실은 단지 경고를 위한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역시 말의 희롱이다. 진리가 아닌 증거는 이 말의 희롱을 예사로 한다는데 있다.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 하니까 의당히 그럴 수밖에 없다. 불교도 그런 말의 희롱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임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세상에, 경고를 위한 경고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경고를 위한 경고라면 그것은 숫제 거짓말이 된다. 실제 시행할 의지도 의사도 없으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니, 속이는 거짓이 아니면 무엇인가. 또 그렇게 으르는 으름장만 놓고 있는 줄 안다면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일 인간이 어디 있는가. 그런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나님이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유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대접하니 그 말씀에 제대로 된 권위를 두지 않는 것이야 불문가지다. 그래서 억지 해석[벧후 3:16]이 난무한다.

성령을 욕되게 함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29]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6:6] 것이라고 했다.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을 자행함인데 그러나 무서운 것은 이것이 현실이라는데 있고, 이 현실은 우리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 것으로써 지켜지는 "그리스도의 율법, 하나님의 율법"[고전 9:21]에서 벗어날 때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이 이런 경우에 해당함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데에서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래서 몸의 구속 또는 양자됨이 약속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오늘날의 실상을 파악할 때 거의 모두가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 받은 사람으로 자처하는 이들임을 감안할 때 지금부터라도 성경이 아닌 사람의 교리를 앞세워 믿어 온 것을 깨닫고 그것을 과감히 버리고 성경에서 안내하는 대로 회개하여 복음을 믿음으로써 진정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고의적인 범죄 행위가 해당되지 않으니 왜냐면 처음부터 믿은 적도 회개한 적도 따라서 죄 용서된 적도 없고 성령 받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 구원은 받은 적이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내리는 진단을 거부한다면 그러면 성경의 권위를 따라 말하건대 다시는 죄 용서가 없는 버림 받은 경우다. 왜냐면 고의적으로 그런 죄를 지금까지 거침없이 범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인 사형선고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참으로 성경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일이다.

둘 중 하나다. 만일 둘 다 거부한다면 즉 구원은 받았으나 육신 가운데 있는 것은 불가피하므로 지금까지 [사람이 만든 교리를] 믿어 온 대로 믿겠다고 한다면 그 선택대로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멸망 길임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생의 약속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 합의하에 체결되는 것이 특징임을 다시 강조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오해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 언약의 의미는 이미 모세 율법을 통해 그림자로 나타나져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약속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히 9:19,20/출 24:6-8]. 그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야 아무리 좋은 약속도 의미가 없지만, 그러나 일단 믿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행동이 수반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약속을 받는 쪽이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베푸시는 쪽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한다는 의미에 적합한 행위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바로 이 약속 이행이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 복종인 것이다. 나의 새로 된 창조, 그리고 다시 출생함이 영원불변이라고 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단서가 붙는 것이니 즉 내 스스로 내게 부과된 책무를 다하는 약속 이행이 따를 때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영원불변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런 조건부는 이 세상에서만 통하고 천국에 일단 들어가면 거기서는 다시는 이와 같은 시험무대로서의 성격이 사라진 다음이므로 모든 것은 말 그대로 항구불변이다. 시험하고 다루어보고 어쩌고 하는 일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을 받으실 정도로까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구원하셨는데, 내가 그 뜻과 말씀[그 모든 뜻과 말씀은 실질적으로 나 자신을 위함이고 주님 자신을 위하심이 없으니 이는 엄마가 아기에게 시키는 것이 엄마 자신을 위함이 아님과 같다]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순리다. 이 순리를 따르지 않을 때, 오직 그것은 ‘믿지 않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나를 사랑하셔서 분부하시는 모든 계명이므로 내가 얼마든지 믿고 감사하며 즐거워하고 신바람 내면서 복종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지 않으니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믿지 않거나 믿다가 나중에 그 믿음을 버리거나, 최종적인 결론은 '믿지 않았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복종 여부로 그 실상이 나타나지게 마련이므로, 심판 날에 오직 ‘선을 행했느냐’, ‘악을 행했느냐’가 기준이 되어 영생에 이르기도 하고 멸망에 이르기도 한다[고후 5:10/롬 2:7-10].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든 소위 "선"은 선으로 취급되지 않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선의 개념부터 바로 정의할 필요가 있으니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선이요 옳음[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선을 행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자기를 위하심을 믿어야 자기를 위해 살지 않게 되는 까닭이다. 악은 그 반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전자는 자기 부인이요 후자는 자기중심[self-seeking, selfishness-롬 2:7, 우리말 번역 "당을 지어"는 오역이고 "자기중심이 되어"가 바른 번역]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전적으로 위하심을 믿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자기 부인이 가능하므로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선이 이루어진다 함이다. 그 외에는 아무리 세상이 선하다, 착하다 하고, 정의요 공의(公義)라 소리 높여 외쳐도 하나님 친히 자기를 위하심을 믿지 않으니 결국 모든 것이 자기를 위주하고 본위로 하는 자기중심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선이요 악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시 자기 자신들을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책망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실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셨다. 친히 그 피조물인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서[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 피조물에게 몽땅 내어 주셨다. 그 이상 더 무엇이 요구될 것인가. 그 이상 더 무엇을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그 정당성과 합리성이 보증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서나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가장 마모(磨耗)된 이성적 판단이므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하는 것이다. 원인이 있으매 결과가 있고 따라서 그 원인은 주인[소유주]이요 그 결과는 그 소유물이다. 사람도 무엇을 만들면[제작하면] 그것을 자기 분신처럼 생각한다. 더군다나 자기가 낳은 자식일 때 더욱 그러하다.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이 어버이의 자정(慈情)이시다. 자식의 불행이나 위험을 그 부모가 한탄할 때 "네 대신 내가 죽었더면!"[삼하 18:33] 하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이다.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의 양면성 혹은 동시성이다. 하나님을 사랑 일변도로만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은 사실이나 모세 시대로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것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빌립보 간수가 믿음에 들어온 것도 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자기의 죄인됨과 죽은 자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모세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자와 위엄"[롬 11:22] 두 가지 면에서 먼저 위엄을 알도록 하심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것이다. 고로 이 둘은 항상 병행하는 것으로서 어느 한 쪽도 소홀히 생각해서도 안되고 가볍게 다루어서도 안될 일이다. 오늘날은 "배교"[살후 2:2]의 때로서 하나님의 위엄 즉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심은 묵살되고 사랑만이 강조되는 시대로서 이래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은 힘 주어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행 9:31] 이 두 가지 중 그 어느 하나도 편중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엄마 품속의 아기임은 영원히 불변이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인자(仁慈)의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인자 안에 거해야[롬 11:22],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위치해야 그 인자는 역사된다.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에서 우리가 마땅히 할 몫을 다한다는 전제가 언제나 붙는 것이다. 동시성에 의한 둘의 연속적인 작용 또는 작동에 의해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롬 11:20-22] 함과 같다. "두려워하라,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첫 사람 아담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당신이나 나도 아껴보지 아니하실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인간의 개성을 말하고 자주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백 번도 더 옳은 말이되, 그러나 이 ‘나’라는 것이 파생(派生)된 그 첫째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인간의 개성, 자주성, 독립성은 모든 악(惡)의 화신(化身)이 된다. 따라서 공리공론이 되는 것뿐이라는 결론이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나 혼자만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리 되면 ‘유아독존’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머리로서의 하나님 곧 첫째 원인 그리고 근본으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 말은 더 이상 공론일 수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구조가 성립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나는 그 몸의 지체이므로 불가결의 존재로 대접 받기 때문이다. 몸의 지체로서 그 한 부분의 역할로는 나 하나밖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 단독으로는 ‘악의 화신’만 아니라 악의 진원(震源), 그 발원지가 된다.

왜냐면 첫째되는 머리로서의 ‘유아독존’이 되기 위해 ‘유아독존’끼리 상호 끊임없는 용호상박으로 다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머리 자리에 올라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밀린 자들은 다음 기회에 올라서기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여럿이 존재하니 자연적으로 머리가 있어야 한 몸 구실을 할 것이 아닌가. 머리가 존재하기는 해야 하는데 서로가 머리되려는 욕심이니 그 집은 필연적으로 붕괴되기 마련이다.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 따져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선이 선일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은 그 믿지 않음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즉 "불의를 좋아했기"[살후 2:12] 때문에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 멸망시키는 격이다. 왜냐면 넉넉히 선을 행하고도 남을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해결책이 있음에도 이를 믿지도 않고 찾으려고도 않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그 행위가 앞의 설명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고후 5:15] 악을 행함일 때 믿고 안믿고는 일체 불문에 붙이고 오직 악을 행했다는[마 7:21/25:45] 이유로 멸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7:21]고 엄중 경고하셨다.


외적인 아름다움 즉 물질적인 자연계의 형상을 우리가 보통 아름다움[美]이라 하는데, 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런 외형적 아름다움에서도 이 자연계가 감히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나[창 2:9], 내적인 아름다움이 또한 있으니 곧 사랑이다. 선행은 이 아름다움의 발로이다. 사람 삶의 미학(美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가 예술가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께서 모든 아름다움의 화신이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 그 아름다우심은 필설로 형용 못하리라. 여성적인 아름다움만 아니라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하시니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그 날에 강림[再臨]하시면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하게 여김을 받으실 것이라"[살후 1:10] 하였다. 우리 역시 동일하게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한 몸의 구조에서는 그 모든 아름다움이 그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전체 모두의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나 자신의 것'이 됨과 동시에 전체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개념이다. "나의 것이 아니면서도 나의 것이고 나의 것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런 불교식의 논법이 그리스도 안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고 현실화하는 것인데, 사실에 기초하고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말만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 우롱하는 격이라면 수박 겉 핥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한 몸의 체제에는 시기하고 다투고 불만스럽고 불평스러운 구석이 티끌만큼도 존재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이상향이 된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 한 몸인지라 이는 원천적으로 확대, 확장, 확충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말 그대로 '하나 됨'의 의미다. 자기 부인의 결과 혹은 대가(代價)가 이렇게 무한대요 무진장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된 이제부터는 오로지 내 이웃을 위해 힘쓰고 애쓰고 일체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에는 소아(小我)를 위해 사는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서 죽음의 초라한 행색이었으니 즉 손을 내 쪽으로 뻗어 나 자신을 겨누고 질식사시키려는 시늉밖에 하는 것이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인 삶의 방법으로는 대아(大我)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되어 방향을 나의 상대 쪽으로 무조건 뻗어 전체를 다 아우른 다음에 그 모든 내 이웃을 한꺼번에 휩쓸어 와 내 품에 안아오는 것이므로 원도 한도 없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한 것이다[엡 5:28]. 이웃을 위하면 위할수록 그리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면 위할수록 그 결과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 의식,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의 특성이다. 똑같이 나를 위하는 결과를 내되, 자기중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과의 오직 차이는 내 스스로가 직접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이 모두 나를 위하게 하는 데에 있다보니 그런 엄청나게 확장되고 확대되고 확충된 나 자신 즉 문자 그대로의 큰 나[大我]를 보게 되는 결과다. 그래서 말 그대로 자기 부인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그러하므로 먼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름이 필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요 14:21,23]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고[고후 5:9] 그렇게 하기를 힘쓰고[고후 5:9]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이 때문이다. 따라서 나 자신에 관해서는 일체를 온통 망각의 늪에 빠뜨림이다. 그렇게 해도 얼마든 좋고 오히려 그렇게 할수록 좋은 것이다. 왜나면 그렇게 함으로써 더 큰 나를 향유할 수 있게 됨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자기중심 일색이므로 그런 이상 세계는 구현하지 못하나 부분적으로 적은 규모 내에서 그런 모습은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으니 곧 교회를 이룬 형제들 사이에서다[막 10:29]. 다시 말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고후 5:15] 그 지시를 따르면, 그리스도의 뜻이 "몸 전체 즉 이웃을 위해 살라"는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남을 위하여 애쓰고 힘씀이 된다.

이런 것이 문자 그대로 선을 행함이 아니면 무엇인가[롬 2:8,9]. 모든 구성원이 다 그런 정신으로 사니 이상적인 세계가 따로 없다. 여기에다 영생만 첨가시키면 이 곧 천국이다. 천국의 구조가 바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이 되므로 한 몸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이탈행위가 됨으로써 바로 우리 신체에서의 암세포와 같이 된다.

암(癌)은 자기만 망칠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그 패악(悖惡)을 전이(轉移)시켜 몸 전체를 망치는 것이다. 고로 이런 궤도이탈의 암적 존재는 신속히 처리될 수밖에 없다. 죄, 악, 불의, 불법 등이 모두 이런 암적 존재가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암세포도 원래 정상 세포로 존재하다가 정상 세포로 남아 있기를 거부한 결과로 그렇게 변한 것임과 같이, 내가 처음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출생하는 등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으나 내 스스로 나의 자유 의지를 따라 이전과 같이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고후 5:15] 할 때 이런 암적 존재가 된다.

첫 창조에서도 하나님께서 영물이나 인간[아담]을 지으실 때 정상 세포로 즉 아름다움의 극치로 완벽한 존재로 만드신 것이나 피조물[즉 일부 영물들과 아담] 스스로 암적 존재가 되어 버린 것과 같다. 아담 역시 온전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나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은 죽음을 맞아 죽은 자가 되었음과 같은 이치다. 악령들 역시 애초에는 거룩한 천사들로 창조되었으나 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그 교만한 행위를 따라 악한 자들이 되어 있음이다.

악령이나 악인이나 마지막 심판에 이르면 모두 정리가 되어 동일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행(善行)으로 남 위해 "노력을 들이고 애쓰고 힘쓰는" 것은, 온통 자기만을 위하는 죄의 세상인지라 이 세상에서는 선을 행함이 순류(順流) 가 아니라 역류처럼 되어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인 까닭에 힘들기도 하거니와 핍박의 대상이기도 하다. 악인이 의인에게는 가증스러움이 되는 것처럼 의인 역시 악인의 세계에서는 미움의 대상이 된다고 솔로몬이 그 하나님 주신 지혜로 살펴 갈파한 그대로다[잠 29:27].

그래서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선을 행해도 "참고" 선을 행함이다[롬 2:7/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 이와 같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을 행해도 인내로써 행함이다[히 10:36]. 이 세상에서의 온갖 시련을 거친 후 영원한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면 그 때는 이런 정도의 애씀과 힘씀이 없어도 물 흐르듯 모든 것이 순행(順行)될 것이야 불문가지다.

그래서 이 세상을 시험 무대라 하는 것이요 시험하는 자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악령이 활개를 치는 것도 필요악이다. 무조건 각자는 자기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서만 전심전력을 다함이니 이 얼마나 자유인다운 삶이요 또 지혜인가. 다다익선(多多益善), 선익선((善益善)이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말 그대로 정직하게 이루어지는 상승 효과다. 한 개 먹을 것도 10개, 100개를 먹는 묘책이요 묘안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게으른 것이요 이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없고 따라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폐기된다. 이 자동 폐기는 나 자신이 그 원인이니 내가 스스로 버린 결과다. 고로 개신교에서 이런 남 위한 아름다운 노력, 애씀, 힘씀을 도외시하는 것은, 세상 종교에서처럼 망상에 불과한 자력(自力) 구원은 아니로되, 앞에서 말한 대로 구도자가 득도(得道)하여 구원을 선물로서 받은 다음의 필수적인 자기 노력 자체를 폐기함이니, 이는 방금 설명한 대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함이 되는 것으로서 보통 모순이 아니다.

바울은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것처럼 하라고 했는데[고전 9:24/빌 3:12-14] 이것이 힘쓰고 애씀이 아니고 무엇인가. 힘쓰고 애쓰지 않고 달릴 수 있는가. 항상 강조하는 터이지만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목적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고 말한 바울 사도에게 물어보라. 그 편지에 명쾌히 답해놓았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하였다.

그는 이 목적으로 그렇게 달려갔고 그래서 선한 싸움을 싸웠고 인하여 그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그리하여 "나처럼 달려가라" 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한다"[롬 9:1,2] 했고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한다" 했으니 바울의 이 일편단심은 백 프로 믿어도 좋다. 이 일념으로 그는 우리 앞서 달려간 것이다.

달리는 자세야말로 한눈 팔지 않고 전심전력을 다함이 아닌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되기를 구한다"[엡 3:17] 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이 발견되려 함"[빌 3:8,9]이라 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셨다고 해서 어떤 물질의 변화처럼 항구불변으로 자동으로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를 항상 내 마음에 나의 의지(意志)로써 내 스스로 모시는 행위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힘쓰는 것이[왜냐면 모든 방해가 있으므로]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同行. walking with God)인 것이다.

걷는다["to walk"]는 것은 내 스스로 걷는 것이니 누가 나를 걸리는[걷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걷고자 하는 나의 의지로써 걷는 것이고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to walk with]' 걷는 것이다. 함께 걷는 것은, 내가 원하든 않든 무조건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함께 걸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의 의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로 '작정하고' '선택하고' '스스로 즐기는' 데에서 즉 보조를 맞추는 데에서 되는 일이다.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함께 걸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고후 13:5] 것을 "우리 스스로 아는"[:5]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골 3:17]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시듯이 하는 것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심이 된다[고전 10:31].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 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 된다. 그래서 "내게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빌 1:21]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아니고 믿음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항상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다. 육체는 아무 것도 제 스스로 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되는 위치다. 오직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즉 머리만을 위하여 움직이는 몸의 역할이다.

머리를 위해서만 움직여도 머리가 자기를 전적으로 위하는 위치에 있음을 잘 아는 까닭에[우리의 경우] 결국 그렇게 머리의 지시를 따라 머리를 위해 움직여도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함이 되는 결과로 항상 이어지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는' 이치, '한 몸됨'의 원리다. 그런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오직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이니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증거다.

결론은 내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지는 것이고 따라서 더 완전히 사는 것이요[그리스도 친히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아시므로], 나 자신이 나를 위함으로써 불완전하게 살아짐이 아닌 것이니, 그렇게 살아서도 안되고, 또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길[way]"이 되심이다. 왜냐면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는 방법이 친히 되어 계심이다.

나와 '둘이 하나 되는 짝의 개념'으로 영혼과 육체 관계를 구성하고 계심이다. 이제 비로소 이런 사람 삶의 이치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니,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아니,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바로 이런 이치로 피조물이 살도록 하신 것인데 이 이치를 무시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거꾸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으로 나감으로써 범죄가 처음부터 구성되었고 내처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이런 생명의 구조에서 영구히 이탈해 버린 것이다. 이 항구적으로 이탈해 버려 더 다시는 이러한 생명 체제에 있지 아니함을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알고 나니, 이처럼 "미친 마음"[전 9:3]도 없는 것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자기중심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그 뜻이다.

인간[아담]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더불어 영계의 영역에 속하여 영원성을 지닌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 나중에 영계[자연계와 더불어 역시 이중 구조(대칭 원리)가 되는 에덴낙원]에 속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영혼과 더불어 명실 공히 영적 존재가 되어 있었는데, 범죄하게 되어[이 범죄와 동시에 에덴낙원의 선악과(善惡果)를 먹음으로써, 혹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범죄하게 되어]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직접 영향으로 신령한 몸은 상실하고 현재와 같은 자연계에만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인생 비극이요 모든 인간고의 원인이요 '구원'이 필요하게 된 그 당위성이다. 때문에 우리가 이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니, 이미 이러한 죽음에 위치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일사부재리라 내가 적극적으로 혹은 자의적(恣意的)으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이 되고 의가 되고 영생[구원]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원래부터의 생명의 법칙이 한 몸으로 하나 됨에 있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제는 불가불 나의 구원을 목적하고 무엇이든 하고자 하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질서를 벗어남이 되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다. 내 구원을 목적함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즉 내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한낱 죽은 자로서의 몸부림으로만 그칠 뿐이다. 절대로 산 자가 되지 못한다.

새 창조로써 나를 산 자로 다시 만들어 주셔야 하는 것이다. 불교와 같은 자력(自力) 구원이 불가능하고 의미가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 즉 범죄의 결과로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당연히 죽어야 하고 그렇게 죽음으로 종결된 그 바탕 위에서만 그리고 이를  근거로 "다시 출생해야만"[요 3:3] 즉 세상에 다시 나오는 격식을 반드시 갖추어야 구원[처음 아담의 창조 때처럼 영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다시 출생하여 세상에 다시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나는"[:6,8] 것이라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여 한 영이 되었으니[고전 6:17]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내 안에 즉 나의 영혼이 있는 자리에 위치해 계심으로써 그리 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그 육체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왜냐면 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시므로 훌륭히 하나님의 의미도 되시고 사람의 의미도 되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어 있었던 그 애초의 '하나' 관계, 생명의 관계가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시는 관계로써 원 모습대로 새로 정립이 되어 완전히 복구된 것이다. 이치와 내용은 같으나 구조가 완전히 새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구조가 바뀌었으므로 그래서 이전에 없던 존재[나는 육체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이 되시는]가 새로 생겨난 터이므로 이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또는 새 창조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정착된 "새 생명"[롬 6:4]의 구조다. 이렇게 새 생명의 구조로 보나 아담이 범죄하기 전 옛 생명의 법질서로 보나, 무조건하고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은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게 되어 있고 내 이웃[나와 한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있는]이 나를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유일한 생명의 체제인 까닭이다. 앞에서도 설명한 대로 나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장, 확충, 확대시킨 삶을 영위함인데 누가 이를 마다하리요.

오직 어리석은 자 그리고 스스로 눈이 어두워진 악인만이 이것을 버리려는 자세를 취할 뿐이다. 우선 나타나는 효과로는 '자기 부인'보다 '자기중심'이 이 세상에서는 이해타산에 맞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함정이요 덫이요 올무[범죄에 이르고 죽음 그리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인데 이를 알지 못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초기 단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 단계를 거쳐 모든 것이 완숙해진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의 세계 곧 천국에서는 결코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때는 과거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구분된[이미 그 작업은 완료되었다] 것처럼, 악인과 의인이 구분되어 갈라지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시기다. 이 작업은 곧 완료될 것이고 세상은 그러므로 종막을 고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이회장이 질문한 지구 종말이다. 왜냐면 이런 악한 세상이 더 이상 존속되어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되는 이 목적이 달성되기가 무섭게, 이 세상은 폐기되기가 바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친히 하신 말씀대로[요 14:6] 우리 "생명[영원한]"이시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또한 "방법[way]"이 되신다. 그리고 "진리"이시니 친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는 말이 있듯이 길을 따르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진리는 상대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즉 거짓과 속임수, 진리로 가장(假裝)하는 모든 것에 대한 대칭 위치(對稱位置)에 있다.

또 이는 그만큼 이 세상이 그런 거짓된 것들로 충만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고 합치되지 않는 모두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방법'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진실이냐, 거짓이냐, 어느 것을 따를 것이냐] 기준, 척도가 된다는 의미이다. 고로 명령하시는 대로 충실히 따라야 이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분명히, 그 결국이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종합하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한 몸'을 이루어 사는 체제가 삶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한 몸을 이룬 지체(肢體)로서의 나의 역할이 절대적이고, 따라서 내게 관한 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나의 이러한 충실한 지체 역할 여부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명확한 그림이 그려진다.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 내용이 명백히 밝혀진다.

세상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기 휩쓸려 생활하는 것이 '사는 것[영생에 이르는]'이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 삶의 문화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에 경고하고 훈계하며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고 기도하고 바로 이런 인생 구원의 필요를 따라 선을 행하는 등의 일을 인내로써 참고 이루는 이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렇다[고전 7:31]. 고로 우리의 전도는 불이 났으니 "불이야!" 외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그 이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 신으로서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비참하고 무사할 리가 없다. 고로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의 치열한 전쟁의 전장(戰場)으로 인식하여 한 곬으로 집중하여 생각하면 그 이상 안전한 '길[way]'은 없다. 왜냐면 길은 오직 하나이니 헷갈리게 여러 길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여러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적진(敵陣) 중에서 전투 중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완전 무장한 군인으로 성경은 서슴없이 묘사하고 있다[엡 6:13-18]. "불이야!" 하고 외치는데 이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의 세력이 한사코 막고 있기 때문에 전투는 불가피하다.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세상이라고 경종(警鐘)을 울려야 하는데 이를 무력(武力, 죽음의 고난 등)으로 저지하려는 것이니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치러야 하는 전투다.

불교를 비롯해 세상 종교는 인생을 죽은 자로 보지 않고 산 자로 보고 있으니 이것부터가 첫 단추 잘못 끼움이다. 죽은 자임을 유일하게 가르치는 성경임에도 이 성경을 믿는다는 이른바 기독교까지도 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강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만하다. 인간이 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실상은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그렇게 만들고는 이런 실상을 알지 못하도록 즉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인식하도록 인생들을 속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는 원래부터 속이는 자, 거짓말하는 자이다[계 12:9]. 이 죽은 자로서의 실상을 아는 것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이기 때문에 이를 감추려는 것이다. 죽은 줄 알아야 산 자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께 달려올 것이 아닌가. 이 죽은 자가 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스스로 물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는 따르지 않았었다[요 6:66]. 이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아무나 내게 올 수 없다"[:45,65] 하신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인간과의 전쟁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전국(戰局)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역전, 반전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당하여 모두가 포로되어 있었던 것이나 이제 비로소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속속 자유 해방이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능히 대결하는 국면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전[初戰]은 대개 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리의 상황으로서도 일면 불가피하다. 한국 전쟁이나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밀리던 것과 같다 할까.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인간으로서의]과 악령들과의 대결 구도다. 종국에는 패배하는 쪽이 초전부터도 밀리는 전쟁은 대체적으로 없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싱겁게 되어 처음부터 전쟁이 성립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종국적 승리를 미리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은 적에게 투항(投降)하는 것이다. 자기 색깔의 깃발[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을 최후까지 선명히 유지하는 것이 승리의 밑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구원의 요지는,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밖에 없으므로 '산 자 됨'을 선물로 받고 나서 다시 출생한 연후에야 사람답게 사는 것을 시작하는 데에 있으니,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효다.

우리의 구원이 약속이므로 '구원 받음'과 '순종'[사람답게 사는 삶을 가리킴이니 즉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이다. 이렇게 순종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전사(戰士)가 됨인데, 개신교는 "다시 나는" 것은 주장하면서도 '사람답게 사는' 의미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싸우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빼 버림으로써 기괴한 하나의 세상 종교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은, 그런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라는 그들이 지어낸 인간의 종교 교리를 반박하는 일체의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사실을 지적해 주는 우리 역시 그들에게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있다. 앞서의 설명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의를 행하고 선행을 하도록[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하심인데, 그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선을 행함"을 믿음과 구원에 연결시키지[롬 2:7-10] 않으니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벧후 3:16].

"선[좋은 것]을 행한다"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의[올바른 것]를 행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올바르게 사는 것을 버리고 반대로 비뚤게 나갔기 때문에 이런 죽음이 고난과 불행이 왔음에도, 이 원인을 무시하고서 어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것인가. 불교가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 붙들고 몸부림치는 것과 아무 것도 나을 것이 없다.

그들 역시 성경 따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싸운다"는 말은 하되 사람답게 사는 것 곧 순종[다시 말해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요 5:29]과는 별도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갖다 붙이니, 아담 스스로 사람답게 살지 않음으로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범죄하여[즉 피조물(영물)답게 살지 않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동조함으로써 스스로 추종하여] 죽음에 이르러 오늘의 인생 비극을 만든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러고도 어찌 성경을 믿는다 하리요.

불교가 '하나님이라는 근본 원인'을 무시하는 것처럼, 개신교 역시 인간 범죄로 인한 죽음이라는[롬 5:12] 근본 원인을 무시하니 모두 인과율(因果律)을 떠나 있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데에서 공통이다. 인과율이야말로 과학 지식의 기본이 아닌가. 개신교는 그리스도를 ‘영생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과의 분기점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영생이 아니라 올바르게 삶으로써 즉 거룩함에 이름으로써 그 거두는 열매가 영생인데[6:22] 이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존재하심에도 이를 부정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이를 부정하는 불교나 기타 종교에 비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난데없이 마리아를 추켜세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仲裁者]이신 그리스도의 위치에다 두는 것과도 아무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따르지 않고 부정하는 데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면 간단하지만 이들은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으면서 그러하니 천국으로 말하면 불교 쪽보다 더 멀다. 그리스도께 나아오기가 더 힘들다.

첫 사람 아담은 원래부터 영생하는 자였다. 때문에 죄와 죽음이 그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롬 5:12]. 죄가 아담으로 인해 왔으니, 이는 다시 말해 죄를 지을 경향이 농후한 인간[영물도 마찬가지]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담이 죄를 지어 그 영생을 상실하게 됨으로써[즉 죽음으로써] 이 자연계에 속한 시한부 생명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영생을 주시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 짓도록 인간을 지으시지 않았던 애초의 그 창조 그대로 죄 짓지 않도록[즉 올바르게 살도록,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살도록 미리 작정하신 뜻을 따라] 인간을 새로 창조하심, 여기에 그리스도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생은 '영생하지 못하도록["생명(영생)을 잃도록"-요 12:25] 만든 범죄 행위'만 제거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회복된다고 해서 수월하고 간단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인간으로서는 숫제 불가능하고, 하나님으로서는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는 고난의 가시밭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새로 창조하심에서나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심에서나, "생명을 잃는" 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결과다.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또한 그 생명 자체가 되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소유로서 착각하여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돌린 아담이다. 여기서 논리는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소유[물]인즉, 죽으나 사나 잘 되나 못되나 오직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 이상으로 바랄 것은 없고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설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내게 거짓말을 하셨다고 해도 그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도리다.

왜냐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심으로써 가능해졌지 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가장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으로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 되풀이해서 강조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든지 안믿든지 확실한 정견(定見)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성경이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역시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제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를 스스로 버린[요 6:66]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다는 확고한 결의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68]. 새로 창조된 우리 역시 범죄하는 경우 당연히 이에 포함된다. 자기 생명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고로 모름지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지 자기 것인 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된 그리스도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것을 그리스도께 돌려 드리는 행위가 우리의 순종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써[죽으심으로써] 나를 사들이셨다고 성경은 설명하지 않는가. 이는 나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제로 사들이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바칠 때 한하는 일이다.

아담에게 영생이라는 것은,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던 그대로 당연히 아담과는 불가분이었고 우리 역시 우리를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하셨으니 영생은 당연지사로 분명한 것이지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담은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그 영생을 잃었다. 우리 역시 아담처럼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언제든지 얼마든지[단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한해서] 영생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 또는 주신 것은 영원 불변이라 하여 우리가 일단 구원 받은 이상 이 구원은 영원불변이라 여겨 우리의 범죄로써 영생을 상실한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한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영원불변이다. 그러나 내 편에서는 나 자신이 들어 얼마든 버릴 수 있는 것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그 역사적 실례가 아담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범죄한 영물들이 아닌가.

같은 말을 또 되풀이하지만, 아담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 한번 정하신 것이 아니라서 아담이 죽음에 이르렀던가? 또 말하기를, 처음부터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왜 아담 때문에 죄가 오고 죽음이 왔다 하였는가[롬 5:12].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계에 속한 몸이었다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도록 만들진 이상 아담의 범죄를 두고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아담을 꾀어 범죄케 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다. 그러면 왜 여자와 원수되게 하셨는가. 인간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원수가 아닌가. 그러므로 영생이 중요 목적이 아니라, 그 영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니 즉 다시는 각자가 죄를 짓지 않음[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아담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음이 핵심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영생을 상실하였으니 역시 우리도 범죄하면 영생을 잃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므로 죄 짓지 않도록 함이 새 창조의 요결이요 요체일 것은 말 하나마나다.

이런 간단한 이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소리만 내고 있으니 그들이 어째서 그리스도의 교회요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가 되시겠는가. 세상 종교와 하나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름하는 척도(尺度)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새 창조에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개신교는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을 겉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이상 설명과 같이 왜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까닭에 전혀 터무니없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인위적인 교리를 지어내어 ‘내용 없는 껍질’만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을 말할 때는 차라리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보다 못하고,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함[이것은 소위 환생, 윤회가 아니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을 강조해도 전혀 다른 의미의 것을 새 창조라 하고 다시 나는 것이라 할 바에야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강조하지 않음만 못하다. 새 창조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터이므로 하나님 친히 내 안에 계시는데 마리아가 무슨 소용인가. 마리아를 중시하는 것은 역시 이 새 창조의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역시 하나님의 새 창조를 부정하는 데에는 똑같으니 단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선지자[예언자]로서 보는 까닭에 모하멧이 그리스도 이후에 최후 확정적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따라서 모하멧이 최종 선지자니까 그리스도보다 더 권위가 있다는 주장만 앞세울 뿐이다. 역으로 말하면, 나중에 나왔으니까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 먼저 시작된 것의 모조품[가짜]임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인데 왜 이런 시각으로는 보지 못하는가. 장차 적 그리스도가 이런 수법으로 그리스도를 격하하고 자기를 앞세우게 될 것이다.

인간고(人間苦)는 진노의 심판의 예고(豫告)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노아 홍수도 심판이었다. 소돔 고모라 두 도시의 멸망도 동성끼리의 성행위 등 모든 불의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렇게 볼 때 구약시대의 모든 전쟁[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 상반된다 하여 의아스럽게 여기나]이 설명된다. 즉 심판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 의한 가나안 침공도 그런 심판의 의미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동성끼리의 성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유린하기 때문이다. 악이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두고 말함이라 인식들을 하는데 이런 성행위는 서로가 합의해서 하는 것이므로 어찌 악이 되느냐 하지만, 우리의 상대는 같은 사람으로서의 이웃만을 말하지 않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역시 포함되시는 사실을 망각함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님이다. 우리를 만드심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인데 애초 우리를 창조하실 때의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 이 동성끼리의 부적합하고 불합리한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애초 계획을 완전히 묵살하는 것이 되는데 어찌 무사하리요. 핵심은, 우리의 상대가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래서 일차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 부모믜 마음을 아프게 함이 불효가 되어 죄를 묻게 되는 것이니 첫째가 되는 인간 관계의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 함과 같다.

그러면 첫 사람 아담은 어디서 났던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기쁘시게 해드릴 책무가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 피조물을 위하심이다.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모든 피조물의 정점(頂點)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자연계와 대칭인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을 만드시고 거기서부터 역시 인간을 위해 영물[우리가 말하는 천사]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뜻과 목적이 인간을 위함이고 인간을 머리로 하여 만물이 그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체제이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본분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성 도착을 일으켜 하나님께서 애초 정하시지 않은 것을 자행하는 짓거리가 악이요 죄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롬 1:26,27]. 소돔과 고모라가 그런 짓거리를 함으로써 망하였고 그래서 인간 세상에 경종이 되게 하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유 1:7].

성경이 이 소돔 고모라의 행위를 단죄하면서, 약령들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여자]들과 더불어 역시 합당치 못한 짓을 하여 네피림[창 6:1-4]을 생산한 사실을 들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 1:6] 했는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 악령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7] 한 것이다.

"다른 색"을 따랐다 함이 바로 그런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정하신 정상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은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영물들이 인간과 관계하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또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그런 짓을 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이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해를 입히는 것이요 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리 없고 이로 인하여 진노가 임하시므로 이는 다시 그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니 왜냐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그 이웃으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데에[물론 본인 즉 당사자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경적 사실을 토대로 하면, 네피림을 생성시킨 악령들은 모두 무저갱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그 짓을 했으나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 그 역할을 감안하여 그가 생성시킨 그 씨가 그 아비 대신 무저갱에 들어갔고 그가 오늘날 적 그리스도로 출현하기 위해 무저갱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음을 요한 계시록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당시와 같은 짓을 오늘날 악령들은 저지르지 않으나 당시 그렇게 해서 생성된 네피림의 죽은 넋들이 환생, 윤회와 같은 짓을 통해 지금까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자녀들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가 영적인 것에 대해 워낙 지식이 없으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는 아니다.

네피림의 혈통이라 하여 그 전부가 네피림 족이 되는지 아니면 인간 반(半) 네피림 반으로 그 유전 형질이 이루어지는지 도대체 우리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단지 그들의 절대 다수가 현재의 인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단정할 수 있으니, 우리로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아담의 후손들과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이들 네피림 족은 이 세상에서 대세를 형성하여 아담의 후손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백방으로 방해 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다고 할 것이다.

누가 네피림인지 그런 것은 알도록 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알아서 유익될 것도 없다. 우리로서는 모든 피조물[every creature]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일 따름이다. "모든 사람"이라 하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라 하신 것도 이런 의미라고 판단된다. 우리말 번역은 "만민"이라 되어 있으나 네피림은 원래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악령들의 분신(分身)인 것이다. 고로 이런 이들은 구원에서 제외된다.

"물과 성령"[요 3:5]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실 때의 "물"이 바로 네피림이 아닌 아담의 후손들을 지칭하신 것이라 판단된다. 물과 불로서 반드시 대립 개념으로 나누어서가 아니라 성경에 영물들이나 신령한 몸을 표현할 때 불이 등장함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장차 세상에 다시 임하실 때 불꽃 가운데 임하신다고 되어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용도 움직일 때 불꽃을 뿜으며 나타나는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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