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상식으로 읽지 않으니 성경을 난해하다 하는 것
① 자식은 부모에게서 나서 결과가 있으니 원인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은 결과이니 그 원인이 필시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다.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 아니냐 한다. 요즘 천문학이 발달하여 이 우주만 해도 이렇게 너른 것을 아는데 이 모든 세계를 지은 하나님은 하물며 얼마나 크시겠는가. 그런데 어찌 이 먼지만도 못한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려 드는가. 조물주가 이런 미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눈에 확인될 정도의 작은 모습이라면 그런 조물주가 어떻게 이런 광대한 우주를 만드셨는가 하고 더더욱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보이면 보인다고 못믿겠다, 안보이면 안보인다고 못믿겠다, 참 범의 장단에 춤 추기도 어렵다.
조물주는 영[靈]이라고 해야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다. 영은 당연히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그리고 이 자연계의 지배를 받을 리 없으니 이 자연계를 지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우주 만물을 보라, 그 능력을 알 만하지 않은가. 자연계의 지배를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적 가지고는 논하지 말라.
② 인간을 만든 조물주이므로 우리 이상의 지성과 이성과 그리고 인격성을 지닌 것 역시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인간을 만들지 않았거나 만들지 못할 것이 아닌가. 고로 이런 인간에게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말씀 또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그런 말씀으로 자처하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합리성을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 한다.
왜냐면 이 성경이 과연 진실 그대로의 조물주의 말씀이요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인가를 알려면 이 성경이 과연 진실인가 여부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먼저 읽어보아야 한다. 읽지도 않는데 그런 확실한 자체 증명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비판하려면 그 자신 그 방면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 각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널리 보급되어 있는 성경이라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읽어보면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자체 증명의 대목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읽는 것만 못하다.
성경을 직접 읽은 한 사람으로서 여기 밝힐 수 있는 것은,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가정할 때 거짓말로 지어내었다면 성경을 그런 식으로 절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거짓말로 꾸며 쓴 이야기라면 절대로 그렇게 성경을 기록할 리가 없다는 점만은 대목대목에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언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반 세기 넘게 읽어온 사람으로서 증언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 못한 데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내용 가운데는 예언도 있는데 그런 예언으로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으므로 물론 예외다.
그런 예언은 그 때가 되어 그 예언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서책 중에 이렇게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내용을 얼마든지 안심하고 최대 관심을 기울여 살펴볼 만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오늘도 보장 받지 못하는 무상한 인생 목숨이라 죽어도 다시 사는 방법이 있는가, 다시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인데, 이 중대한 일에 관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런 조물주의 메시지로 자처하는 것이 있으니 당연히 관심을 기울이고도 남을 일. 그럼에도 관심을 기울일 시간 여유가 없다는 등 변명한다면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탓이지 남 탓이 아닐 것이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
③ 성경의 중심 내용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역사상의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하는데 이 점 특이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구약은 그를 상징하고 또 그에 대한 예언과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조물주의 모든 계획이 미리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신약은 이미 역사상의 인물로 나타난 그 인물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조물주의 메시지라 하면서 왜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내용이 되어 있는가 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영으로서의 조물주의 형상화 즉 사람으로 형상화하여 나타나신 모습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보이시지 않는 조물주의 형상화,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아주 이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공통된 욕구가 조물주가 계시면 그 조물주를 몸 가까이 확인할 수 있기를 원하는데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니 여간 흥미 있는 일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원래 조물주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신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의 형상화는 당연히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른 모습으로는 조물주의 형상화가 이루어질 수 없음이다. 이렇게 사람으로서의 조물주의 형상화의 직접적인 목적은 우리의 '구원'에 있다. 즉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따라서 흥미 정도가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비상한 관심으로 대해야 하는 내용이 성경이다.
④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구원의 길이 있는지를 성경이 설명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형상화한 하나님으로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조물주는 오직 한 분으로 즉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계신다는 사실에 먼저 눈 떠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형상화하신 것은 아들이시다. 만일 홀로 계시고 이렇게 둘이 하나로 계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되실 수도 없고 인간의 구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풍성함이라 할까 여유라 할까 이 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사실로 적응시켜 볼 때 얼마나 은혜스럽고 든든한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이 주제다. 세상에서 누구나 사랑의 좋은 점은 말하는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 성경만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의하면,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고 강조하여 내거는 모든 자비, 인애, 사랑 등은 모두 위선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나를 위하는 일체의 것은 자아중심(selfishness)으로서 이것이 악(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목표하는 바 구원만 성취되면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랑, 자비, 인애는 모두 헌신짝처럼 여겨져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일절 그런 구원 얻기 위한 선행으로서의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직 순수하게 그 사랑이 생명의 법질서니까 그 원리를 사랑하여 지키고 행하는 그런 사랑이다. 이것이 위선 없는 진정한 사랑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자기 힘으로 자기가 노력하여 얻는 구원이 아니라 이미 조물주의 새 창조에 의해 이루어져 있는 구원을 믿으면 누구나 얻게 되는 것이기에 자기 구원을 위하는 그런 자아중심이 티끌만큼도 개재될 소지가 없음이다. 그래서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하는 것으로서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 불행의 씨앗이다. 선악 개념도 이에 따른다. 조물주 하나님께 순종하고 않고 하는 것도 이에 준한다.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이 법질서 준수가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악이요 불법이다. 로마서 첫머리에, "참고 선을 행하면 영광과 영생을 얻게 되고 악을 행하면 멸망"(롬 2:7-10)뿐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로 이런 관점에서 악과 선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
가령 세상 종교에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선을 행하되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더라도 그래서 철들면서부터 죽기까지 선행만을 하고 악은 조금이라도 행한 역사가 없더라도, 종국적으로는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이상 그 모든 선행은 불법이요 악이다. 무조건 세상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또 더욱 적극적으로는 남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해를 끼치는 것을 악이라 하는데, 가령 어려서부터 산 속에 가만히 앉아 수도나 하고 평생에 남에게 나쁜 행동은 물론 싫은 소리 한 마디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이상 그 모든 것이 다 악이요 죄이며 불의, 불법인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선행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아 구원 얻어 영생하고 악을 행하면 저주 받아 멸망한다고 말해도 바로 그런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울도 예의 로마서 첫머리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할 것이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고 내용도 미처 알기 전에 판단부터 먼저 하는 섣부르고 서투르고 성급한 판단이다. 성경은 "의인 즉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 모순되게 말할 리가 없다.
의인이 없는데 무슨 선을 행한단 말인가. 그럼 로마서 내용은 결국 인간은 아무도 구원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편견을 따라 읽고 선입견에 치우쳐 공평하게 부지런히 읽지 않는 것이 성경을 읽을 줄 모름이다. 그래서 조급하게 결론 내려 성경은 일견 모순된 말이 많고 그래서 난해하다 한다. 천만의 말씀. 성경처럼 단순명료한 내용도 또 그렇게 기술한 책도 없다. 단지 예언만 예외다.
예언이야 그 속성상 일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어 있음이다. 성경이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아 그렇다고 할 필요도 없다. 체계를 갖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너무나 간결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니 "자기 중심"이니 하는 것도 그렇게 간결한 내용을 다시 요약해주고 있는 단어일 뿐이다. 사람은 아무도 의인이 없고 다 죄인들뿐이니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해 분발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서두에 그렇게 선을 행하면 영생한다 했으니, 이는 이미 죄인의 영역을 벗어나 의인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의인이 악을 행하면 멸망이고 당연히 의를 행하면 자연스럽게 영생한다는 그 뜻이다.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인밖에 없는 인생으로서 의인이 된다는 말인가. 인간 스스로 된 것은 분명 아니니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로 창조하신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무조건 오늘부터 의인이다 해서 만들어진 의인인가. 말씀 한마디로 급조된 의인인가. 아니다. 새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된 의인이다. 의인으로 새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인으로 만드셨으니 그 만드신 뜻을 따라 의의 행동 즉 선을 행하면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따라 그것을 준수하면 당연히 영생을 보전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 짓는 것은 죄요 악이요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이니 자기 스스로를 다시 죄인, 불법자로 만드는 것이요 이런 못된 행동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당연히 멸망밖에 더 있는가. 로마서가 모두에서 밝히고 있는 총론적인 설명이 바로 이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이 악인으로 심판 받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선행[세상에서 말하는 세상 기준의 '선']을 하고 그 최고봉에 달했다고 자타 공인하더라도 여전히 죄인이요 그 모든 선행이라고 하는 하나하나가 모두 죄요 악이다. 왜냐면 그 선행의 동기가 자기 구원 즉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에서 발단된 것이기에 그렇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한 거기에 선은 없다. 악뿐이다. 선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중심인 한에는 영원토록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무조건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면 선이요 사랑인 줄 알지만 그 마음, 그 동기가 항상 문제이니 반대 급부를 기대하고 행하는 모든 "선"은 위선으로서, 즉 선으로 가장한 악인 것이다. 자기 중심 즉 이기심이 그 뿌리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모든 선은 그 동기,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즉 새 창조는 현재 죽어 있는 인생을 산 자로 만드심이다. 원래 창조하실 때는 산 자 즉 영원히 사는 자로 만드셨으나(따라서 육체도 이런 자연계 몸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인 영물 즉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었으나) 먹으면 원래의 자연계 몸으로 변화되어버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도 경고를 무시하고 먹은 결과 이런 본능 위주의 "죄의 몸"(롬 6:6) 속에 갇혀 원천적으로 자아중심이 된 데다가 육체도 자연법칙을 따라 썩음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니 산 자일 수 없고 죽은 자이다.
썩는 육체인데다 죄인이므로 죄의 결과는 또한 죽음인 것이다. 애초 아담에게 경고하실 때 "죽을 것이다(이 죽음은 초자연계 몸의 영원한 생명에서 벗어나 자연계 몸이 되어 한정된 목숨으로 끝남을 의미)" 하신 대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니, 자연계 몸은 죽는다면 당장 쓰러져 숨 넘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영원히 살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아담 시대 인물들이 비록 천년 가까이 살았어도 죽은 자임에는 변함 없는 사실이었으니 정확히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런 자연계 몸의 죽음을 벗어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 환원됨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하나됨은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령 받음을 구원이라 하기도 한다.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내가 지금은 자연계 몸이 되어 있지만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께서 초자연계 몸으로 계시니(초자연계 몸으로서 부활하신 의미가 여기에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몸으로서 나의 머리로서 계시니, 자연스럽게 주종 대소 관계를 이루어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는 법이요 그래서 이미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의미이다.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와 주종, 대소, 인과 관계를 이루어 있다는 사실이 핵심. 다시 말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을 위하는 관계로써만 이 둘이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는 것인즉 내가 만일 이 사랑의 마음이 변하여 자아중심이 되어 당시 아담이나 또는 악령들처럼 이 한 몸 관계에서 이탈해 나간다면 '자유 의지'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도 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시다. 이 속수 무책은 방관, 방치가 아니라 불가능을 말하니 이유는 한 번 정하신 것을 번복하실 수 없음에 있다. 만일 사정과 경우에 따라 번복하신다면 어찌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법칙으로 만유가 존재하는데 만유가 유지되겠는가. 피조물을 모두 없애치우시지 않는 한에는.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셨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왜냐면 생명에는 사랑이 핵심이요 사랑에는 자유 의지가 핵심인데 이 자유는 변함이 없을 것인즉 이 자유 선택으로 나는 과거 아담처럼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자아중심으로 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그런 시험대(우리 각자가 과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를 다루어보고 저울질해보는-히 1:9)로서의 의미도 엄연히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의미인지라 악령 사탄도 그렇지 않으면 벌써 무저갱으로 들어가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시험하는 자로서(즉 이 세상의 왕이요 신으로서) 버젓이 지금까지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분간 필요악인 것.
그러나 이 시험은 이 세상에 한한다. 다루어볼 것은 다 다루어본 다음이니까 되풀이할 필요가 없음이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우리를 다루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하나님과 피조물이 둘이 하나된 이중 구조이므로 무엇이든 하나님 일방적으로 하시는 것이 없고 피조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으로서야 미리 내다보시는 터라 다루어보고 말고 하실 것도 없으나 피조물은 그렇지 않으므로 피조물 모두가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에 100% 수긍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이런 시험하는 일도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
고로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가 부인된, 자기 중심이 아닌, 자기를 위하지 않는 즉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 (참된) 선이다. 단지 선이 좋기 때문에, 사랑의 법칙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준수하는 이런 사랑의 법칙에 의한 선이 진정한 선이요, 로마서에서 밝히는 "영생에 이르는 선"인 것이다. 그런 선을 하려면 자기 구원에 대한 일체를 의식하지 말아야 함이니 이를 위해서는 이미 자기의 구원이 이루어져 있어, 자기로서는 눈곱만큼이라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상태라야 하는 것.
그러므로 자기 노력이나 수양이나 공덕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이어야 함은 필연. 성경이 바로 이와 같은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새롭게 의인으로 만드심이다. 의인으로 만드셨으니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다. 죄인일 수가 없다. 죄인이 아니니, 죄의 뿌리인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일체의 것이 아예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그리고 죄의 온상으로서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하여 내("옛 사람")가 죽어 있는 상태다. 의인이므로 당연히 자기 부인 일색으로 시종일관해야 하는 것이며, 자기 중심으로 나가면 의인의 위치를 상실하고 다시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위의 설명으로 충분히 밝혀진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이 의인으로 만드셨다고 기계적으로 언제나 의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겔 18:24]. 인격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주제로 삼아야 사랑을 논할 수 있지 않는가ㅡ이미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다. 고로 사랑을 논할 수 있는 반면 타락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 의지 때문이니, 그래서 아담은 처음부터 죄인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건마는 죄인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의인이 죄인되기란 간단하다.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유일한 방비책, 해결책은 "처음 사랑을 잃지"(계 2:4) 않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편달하는 것이다.
구원[salvation]은 구속[救贖-redemption]이라고도 하듯이 원상태대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인 현재의 위치를 범죄하기 전 의인으로 있던 첫 사람 아담의 상태로, 죽음의 상태에 놓인 현재 위치를 생명 가운데 있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심이다.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건져지는 것은 그렇게 되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함에서 오는 필연적이면서도 또한 부수적인 것이다. 왜냐면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 멸망으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그런 멸망의 순간적 고통까지 담당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 그런 멸망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졌다 하여 멸망 자체를 면제받는 것은 아닌 것. 멸망으로부터 면제 받으려면 우리의 자유 의지까지도 그 작용이 정지되어야 하는데, 자유 의지가 보장되는 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 가능성이 이 세상에서는 남아 있는 것이다. 십자가 상의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심을 따라 되는 한 사례로서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고 해서(빌 2:12) 하나님의 구원 자체에 미비점이 있거나 우리 스스로가 보충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소지를 완전히 불식시키시는 차원에서 우리 구원의 완결성을 입증하신 것 뿐이다.
더구나 우리 몸이 구원 받았다 하여 하늘에 있지 않고 여전히 이 땅에 있는 다음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가능성을 두고 시험하는 것이지 그라고 하여 헛발질만 하라는 법이 없다. 그 역시 자기 자유의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시킨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기회를 노리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계속 믿지 못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우리 각 사람을 범죄로 유도, 멸망에 이르게 함인 것이다.
자유 의지의 절대적인 보장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항상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기정사실화하시면서도 정작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때가 지나가게 해주시기"를 원하여 구하신 것이다. 땀을 피 방울처럼 흘리시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된 것은,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 없이 주님 스스로 한번 자기 뜻대로 하겠다 마음만 먹으면 지체없이 즉각 그대로 될 것이므로 그만큼 유혹과 시험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달리 그 결정 여하에 따라 즉각적 반응이 나타날 것인즉, "저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십시오" 하시기까지의 싸움이 치열한 것이었고 이런 기도를 세 번이나 거푸 하실 정도였었다. 매시간 우리의 자유의지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새로 창조되지 않고 재차 출생하지 않는 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의인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 하고 불렀을 때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시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죄인된 나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이는 내 대신이 아니라 나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다. 즉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신 것"[사 53:12]이므로, 비록 그리스도시더라도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죄와 관련되어 있지 초월해 있지는 않다는 말씀이 된다. 의인은 죄 가운데 있지는 않지만 죄인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무슨 이유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심은 주니 자신이 선이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나를 하나님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으로 보느냐 사람으로 볼진대 네 물음 자체가 틀린 것이다"라는 지적이 되신다.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보고 자기도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자 청년은 자기도 잘만 하면 그 "선한 선생님"처럼 될 수 있다고 즉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렇게 찾아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결국 자기 중심을 버린 자기 부인에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 있다는 말씀으로서,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자기 중심,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것과 대응되는 것은 자기 부인이니, 자기 자신이건 자기의 소유이건 막론하고 자기에 관한 일체의 것을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만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 인식이다. 그리스도 인식은 아버지 인식인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도 과거처럼 나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서 인식하니 하늘과 땅 차이다. 과거 나 자신의 것으로서 인식할 때에는 내가 주인이니 내가 나를 위함에서 좀 덜하고 미흡해도 여유가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나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님의 소유이니 이전보다 더 꼼꼼하게 나를 보살피게 됨은 당연하다. 그런즉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전에 비해 방만하게 하고 신경을 덜 쓴다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이는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나의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이니 곡해할 필요는 없다.
선과 악, 구원과 멸망, 생명과 죽음의 줄거리가 자기 부인과 자기 중심에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과 그리스도 부인에 있다. 조물주 하나님 중심과 조물주 하나님의 부인, 그 여하에 달린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여 미워하면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을 버겁게 생각하고 달가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중심이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고 끝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나중 곧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해왔다. 이천 년의 관록이 있는 자다. 그러나, 그렇게 혼잡하게 만든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의 해석"이라 한다는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더럽혀질 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언제나 맑고 밝은 빛 그 자체이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辨-辨別]할"[딤후 2:15]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설명에서 분명히 해야 할 요점은 성경에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라[롬 2:6-13]는 것은, 자기 구원을 의식하면서 영원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은혜로 받아놓고 있는 상태에서 그 구원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악을 행하면 이에서 벗어나는 상태요 선을 행하면 자기 구원을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어 있으므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언뜻 보기는 엇비슷해 보이나 실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요 산 자와 죽은 자와의 간격이다.
자기 영원한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식하여 그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려는 일념에서(고전 7:34) 우러나는 모든 것으로써 미래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되는 결과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해간다는 뜻이다. 처음부터의 동기도 목적도 될 수 없으니 이미 구원은 은혜로 받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나 악령들의 범죄를 염두에 두면 되는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되었지만 거룩한 천사들은 정반대되는 결과이지 않은가. 우리도 천사들처럼 하고 악령들처럼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죽은 자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라, 죄 짓지 말라 일러도 그것이 통할 수가 없다. 이미 죽은 터에 그런 말이 소용에 닿을 턱이 없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죄 짓지 말라는 경고가 경고 그대로의 효력을 지닌다. 선을 행하라는 명령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를 함축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왜냐면 이미 그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당연히 그런 선을 행할 능력과 동기와 명분을 원도 한도 없이 당당히 충분히 갖추어 있는 다음이기 때문이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선임을 다시 강조한다.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준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지키는 것이 생명의 법질서 준수 곧 하나님의 계명 지킴이다. "계명"이라 하면 무슨 비상이라도 대하듯 질겁을 하지만 성경을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 육신에 있는 자에게는 모세의 윱법 정도는 따라 오지도 못할 정도로 더 엄격한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고 자기 부인을 역설하심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외형적인 것으로 따지지 않고 가장 근본인 마음 자세를 다룸이기 때문.
그러나 이 "계명을 지킴"(요 14:15/21/15:10/고전 7:19/요일 2:3,4/3:22,24/5:2,3/요이 1:6/계 12:17/14:12)에서 여기에 그 어떤 사사로운 동기도 목적도 개입되지 않아야 하는 것. 즉 나 자신의 구원이라든가 내가 받을 상급이라든가 하는 것 등이다.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벌써 불순한 것이 되어버려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을 상급받음을 두고 말함이라는 당치도 않은 해석을 소위 신학자들은 하고 있으나 세상 천지 상급을 두렵고 떨면서 받으려 한다는 이런 해괴망측한 말이 어디 있으며 이런 내용이 담긴 성경이라고 세상에다 선전하는 꼴이니 어찌 무사하리요. "두렵고 떤다"고 할 때는 생사문제가 결부되어 있을 때에만 사용하는 언어다.
의인으로 만드시는 이러한 새 창조의 방법 외에는 인간 구원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니, 구원의 의미는 그냥 살려주는 데에만 있지 않고 또다시 이전과 같은 범죄행위를 고집함으로써 계속 이런 비극적 현실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함에도 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과 같이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벗나갈 때는 그 어떤 구원도 무효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이 되어 있으면 순종을 할 수가 없다(롬 8:4-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복종은 생명의 법질서에 대한 이탈이다. 정상 궤도를 달려야 모든 것이 조화롭게 정상 가동되는데 그 중에 하나라도 부조화를 일으키면 전체가 망가지고 정지된다. 모두가 하나로 망라되어 움직이는 조직이요 체제가 한 몸됨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죄와 악은 암세포와 같은 존재다.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든 피조물들 자신을 위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조처와 배려를 우리 스스로 배척하게 되면 그것은 도리 없는 자살행위이다[롬 8:7,8]. 남이 아무리 자기에게 생명을 퍼부어주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구멍을 내어 "새어 나가게"(히 2:1) 하는 데에서야 도리 없지 않은가.
그러면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보답된다고 했는데(롬 2:7-10) 그 선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사회를 혁파하는 것인가. 아니다. 악마 사탄이 이 세상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는데 그런 지엽적인 것에 매달림은 주님의 것인 나의 시간 낭비이다. 근본적인 것을 다룸이니 즉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하는 길을 전파하고 이를 위해 먼저 제사장의 기도를 쉬지 않으며 구제를 해도 이 구원 사업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이 된 형제 사랑은 당연하고 필연이다. 성경에 그 방법을 예시한 대로다(약 2:16요일 3:17). 내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됨은 주님 친히 주님 자신을 나의 소유로 선물로서 영원히 안겨 주신 때문이다. 하나됨으로 인한 결과이니 이 하나됨을 내 스스로 깨는 경우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이 됨은(히 6:6) 더 설명이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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