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천상천하 유아독존
깃발이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이다. 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법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눅 13:27] 이들이 많으므로[마 7:22] 그런 것으로는 어느 쪽인지 식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오직 "참고 선을 행하느냐"[롬 2:7-10] 아니면 "악을 행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별된다[고후 5:10]. 물론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 역시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 죄목으로 영원 멸망에 들어간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리스도를 믿으면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믿지 않았으니 이는 "불의가 좋아서"[살후 2:12] 즉 악을 행하는 것을 선호해서 그 스스로 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 역시 당연히 선을 행했어야 하는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삶"[고후 5:15]으로써 악을 행했으니 영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마 7:21/25:45]. 믿음과 행함, 이 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하도록 창조된 아담이 왜 죽게 되었는지, 역시 영생하면서 삶의 환락 속에 살도록 처음 창조되었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서 악령들이 왜 그와는 정반대로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입증되어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므로, 친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스스로 침입해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고 확언해 주신 것이다[마 11:12/눅 16:16].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렇게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인간[아담]의 범죄의 결과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온 것만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인간이 놓이게 된 것이니 그래서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죽음의 권세를 쥔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히 2:14]. 죄의 결과가 이와 같이 비참하고 엄청난데 죄를 여전히 짓도록 허용하시겠는가. 그 참혹한 결과를 눈앞에 확인하면서도 감히 인간이 죄를 짓겠는가. 올바르게 사는 삶의 방법대로 살기를 소홀히 할 것인가. 그럼에도 천국 가기를 감히 바랄 것인가.
범죄하는 자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름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가리켜 "악한 자에게 속했다"[요일 3:12]고 정의했다. 세상이 악한 것은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5:19]. 이런 차이를 스스로 구별하지 못하면서 어찌 영생에 들어가기를 바라리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래서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해져[to be destroyed]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롬 6:6]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 짓는 혹은 짓게 만드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성경이 가르쳐도 못알아들으면 한마디로 구제불능이다.
성경에,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우리가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 저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고후 10:12] 하였으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다"[잠 26:12] 하였다.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며 비교하고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이 다름아닌 무신론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절대신(絶對神)을 인정하지 않으니 바로 이런 무신론이다. 그러니 천상천하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나밖에 없는 그런 '나'라는 존재들이 몇 몇도 아니고 부지기수로 있으니 어떤 상태가 되겠는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즉 어떤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치 조화되어 한 몸처럼 작용되어 극락(極樂), 지복(至福)의 삶을 살든가 아니면 그 정반대의 것이다. 이 경우, 현재 곧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그 답이다. 전자가 아닌 후자일 뿐이니, 인재(人災), 인화(人禍)에 의한 원성이 하늘에 사무쳐 있다. 그리고 답은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수 천년의 인류 역사가 말해 주듯이 이런 비극적 양상은 오늘까지 내처 그대로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더 나아질 줄로 알았지만 오늘날은 더더욱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리 수도(修道)와 수양(修養)을 많이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대각(大覺)에 대각을 거듭하더라도 저승도 이승과 똑같을 뿐이니 이 세상에서 이상적인 인간 삶을 이루지 못했으니 저 세상에서도 역시 희망은 없다.
이 세상 삶도 한(恨)이 맺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속출하는 판이니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이러할 것이라는 확증밖에 안된다. 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는 기대는 한낱 인간의 몽상에 그칠 뿐이다. 천상천하 오직 나밖에 없어 내 스스로 나를 이끌어가야 할 판인데다 그런 '나'가 한정도 없이 많고 그리고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지내 왔어도 여전히 이 모양에 이 꼴이니 당연히 그런 결론일 수밖에 없다.
오직 나 혼자만이 있어 이런 모든 것을 내 스스로 만든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혜다. 즉 내가 하나님인 것이다. 그러나 나 외에도 누가 있어 단 둘만이 있다 해도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 수도 없고 자기를 칭찬할 수도 없고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거나 비교할 수도 없다. 왜냐면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신론을 '불합리성의 극치'라 하는 것이다.
앞에서 결론을 내린 인간의 절망 상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래서 자유를 주심으로써 자율적으로 만사에 임하도록 정해놓으신 결과다. 자유를 주셨어도 당연히 특정된 기본 질서의 기준을 내세워 좌로든 우로든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도 질서[통제가 아닌] 속의 자유다. 그래서 그 질서 유지를 위한 일정량의 통제는 불가피하므로, 인간이 나타내는 의지(意志)는 절대적인 자유이나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통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 통제의 수단이 3운법칙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이웃을 살해할 목적으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겼으나, 그 내 이웃은 자기의 죽을 때가 되어야 죽는 것이지 그 때가 되지 못하면 절대로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미리 정하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자유와 동시에 통제'의 의미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의 인간사(人間事)이건만 인재(人災)와, 인화(人禍)가 이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간 심판은 우리 각자가 빚어낸 그 결과를 놓고 시행되는 '타율'의 결과라기보다 각자의 자유 의지로써 선택하는 방향 여하로 결정되는 '자율'의 결말이라 해야 옳다. 따라서 미워하거나 살의만 품어도 그는 이미 살인자로 분류되고 음욕을 품어도 실제 간음한 자와 똑같이 취급된다[마 5:28/22]. 그러므로 죄인과 의인(義人)을 성경은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죄(罪)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하나님]를 중심으로 살아 자기중심이 아닐 때 즉 자기를 부인할 때 의(義)와 선(善)으로 가름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그럼 누구를 위해 사느냐 할 때 당연히 그것은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이웃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므로 이웃을 위하되 반드시 머리의 지시를 따라 적기적소(適期適所)에 임하여 이웃을 위하는 것이므로 우리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을 위해 사는 것이니 머리의 지시를 따를 때에야 공명정대 공정공평을 기할 수 있다. 우리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는 몸, 몸은 머리를 위하므로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다. 당연히 하나님도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오직 피조물을 위하심이니 그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이다. 당신 자신을 온통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갈 2:20/행 8:20/2:38/요 4:10].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은 맞상대가 있어 둘이 서로 상대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일방적인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이다. 또 자기를 부인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상대를 위하는 것으로써[상대를 위하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또 이것은 필연적이다] 반드시 연결되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15]고 함이다.
왜 그리스도만을 위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친히 먼저 우리를 그렇게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 친히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 4:19] 함 그대로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된 것이다[롬 5:8]. 그러므로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자기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할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되어 자기 부인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의미로 자기 부인을 강조하신 것이다[마 16:24/막 8:34/눅 9:23/14:25-35]. 그리스도 이전에 자기 부인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순종이 불가능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왜냐면 사랑의 핵심이 자기 부인에 있고 순종은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기에 그렇다. 둘이 하나됨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둘이 하나된다는 것은 갑과 을로서 둘일 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서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영원 불변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적극성이 동시에 발휘되어야 그것이 자기부인이다. 내 스스로 기뻐서 즐거움으로 바꾸어 말해 내가 먹을 양식으로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것이니 산 사람치고 양식을 먹는 것을 마지못해 억지로 먹는 이가 누가 있는가.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 능동성, 적극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요체는 자기 부인에 있다고 단정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니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죄요 죽음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놓인 오늘과 같은 비극이기 때문이다[롬 5:12]. 그렇지 않았다면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금까지 행복하게 영원히 살아 오고 있을 것이었다.
성경에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강조되고 있는 이유가 이렇게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이므로]이자 결과[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이기도 하다. 자기 부인이 사랑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사랑이 바로 모든 삶의 요체로서 모든 정상적인 삶의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든 인생들이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죽음이라 하고 인생을 죽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왜냐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랑이 모든 삶의 축이고 핵인데 사랑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서로 상대를 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법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사랑을 생명의 법칙으로 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법칙 차원에서 사랑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인식부터 180도 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 사는 것답게 살아 그 자연적인 결과로서의 영생을 누리게 함이다.
즉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야 영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올바르게 살지 않아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현재와 같이 죽음에 이르고 불행에 이른 것인즉 이는 당연 귀결이다. 그러므로 이생에서도 어떤 전문가가 되어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인간부터 되라, 인간성부터 기르라는 요구를 젊은이들에게 주문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중심, 위주, 본위로 나가는 일체를 말함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한 몸 의식에서 머리를 중심하여 모든 지체가 그 지시를 따라 서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리킴이다. 달리 표현하여 '우리' 의식, '하나' 의식이다. 우리가 이공 순신의 그 공동체 의식에서 우러난 모든 동기와 업적[결과]을 항상 높이 기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 부인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므로 '실체'가 아닌 형체로서의 '그림자'로서의 의미이기는 하나, 비록 그런 그림자일지라도 그런 위대한 구국의 결실을 훌륭히 맺었으니 하물며 실체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이야 얼마나 더 아름다울 것이랴 하는 그 뜻이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그러면 그런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베풀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구원에 들어갔는가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과는 상관 없이 영생 얻는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쪽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미 그는 회개할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행하리라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그렇게 행하리라 할 때 그 진실성은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 인간은 그런 것까지는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신다고 하는 것이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미리 정하고 택하심이다.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는 그 미리 아신 경우다. 반면에 우리로 말하면 [우리 역시 미리 아시기는 마찬가지나] 처음에는 믿기로 작정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하나 중도에 변할 수 있는 경우다. 그 중도에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정을 우리 스스로 입증하게 되어 있는 그런 경우다.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경우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할 책무가 부여된다. 살아남아서 복음을 전해야지 모두가 그 회개한 강도처럼 이 세상에 살아 남지 않는다면 복음은 누가 전하겠다는 것인가. 역시 일률적이지 않고 이런 겨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으니 그 조절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관여하나 관심을 둘 바가 아니다. 오직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성을 다할 일이요 그 외 나머지 일들은 우리가 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다 알아지도록 되어 있다.
유교는 그러면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하면 인정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불교처럼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이 세상 사는 일도 다 궁구(窮究)하지 못하는데 어찌 인간 사후(死後)의 일을 헤아리겠느냐" 하는 말로써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을 뿐이다. 유교의 가르침은 인륜(人倫) 사상에 기초하는 것뿐이다. 즉 인간 양심에 따라 인(仁)을 기초로 하는 사람 사는 도리를 강조한 것에 불과하여 종교의 범주에 넣기도 실상 어렵다.
죽은 조상을 위하기 때문에 조상 숭배교라고나 할까.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명백히 종교 교리다. 더군다나 석가(釋迦)는 "스스로 깨닫기로" 결심하여 다시 말해 그 누구의 어떤 말이든 사상이든 경청할 것이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단독으로 내린 결론인 것이다. 이 바로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며 비교하고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것"이니 여기에 지혜가 있을 리 없다.
인간이 아닌 신(神)이라면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기에 그 아는 지식을 따라 판단하므로 거의 오류에 빠질 리가 없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 되어 그런 오류 없는 신과 같은 것으로 자처했으니 거기에 지혜가 있을 수 없고 지혜가 아니니 진리일 까닭이 없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의 판단, 그런 판단을 위한 개인적 지혜에 전적으로 의존함이니 고타마 싯다르다가 신이 아닌 이상 '일개 개인'이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 너무나 절감하고 있듯이 한 개인의 역량이라는 것은 본디부터가 제한적일 뿐 아니라 편향적이기도 하니 한 마디로 실수와 오류와 착각이 너무나 많아 그 누구도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리고 행동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요 그래서 여러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려 애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예로부터 "잘못은 인간 상사(常事)"[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개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으나 절대로 과대평가하지도 않는 것이니 그처럼 어리석은 패망의 지름길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까닭이다. 고타마 싯다르다는 자신을 신(神)이라 여기지 않고 인간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지혜 있다고 과신함이 대단하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다"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그대로다.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처럼 스스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야 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말의 타당성은 있다. 왜냐면 '스스로 깨달았다' 하여 현자(賢者), '각자(覺者)'로 자처하지는 않았기에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하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바로 '안다'고 하는 지자(知者)임을 말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지자(知者)요 지자(智者)임을 가르친 소크라테스일진대, 그가 만일 고타마 싯다르다를 보면 무엇이라 평할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기준으로 말하면 고타마 싯다르다는 무지자(無知者)요 무지자(無智者)다. 무엇을 알아야 남에게도 가르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르친다", "깨우친다" 했으니 그야말로 속이는 일만 부지런히 한 것이다. 차라리 그가 "나는 신(神)이라" 했다면 최소한의 이성은 갖추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 자처하면서도 그런 엄청난 모순을 저질렀으니,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비유컨대 포대(布袋, 베로 만든 자루)는 요란하게 부풀어 놓았으나 무엇이 있는가 하여 그 자루를 거꾸로 들고 내용이 빠져 나오도록 아무리 흔들어대어도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무상(無常)과 상주(常住)
율곡 선생은 이 점을 간파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두고 존재하므로 반드시 이 양면성[대칭(상칭) 원리에 의한]을 아울러 살펴야 하는 것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으니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있는 바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결과'인 것이므로 반드시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은 무상(人生無常)한 것만 아니다. 양면성에서 반드시 '무상하지 않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무상하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음이 아니라, '생'도 '멸'도 '전변'도 일절 없는 '상주'함이 있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여 이 둘이 현재 항시 병존하는 것이 진실인데도, 한 쪽만을 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 한 개인'의 불가항력적인 판단 오류이니, 예로부터 이를 가리켜 경계하는 우화로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있지 않는가.
불교는 관찰점을 자연계의 것에만 한정시켜 일면만을 보고 마치 양면을 다 보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치명적인 결코 만회할 수 없는 결함을 숙명적으로 지니고서 시작된 것이다. 만회할 때에는, 일면만 보던 관찰을 멈추고 나머지 면까지 비로소 보고 "아하, 내가 완전히 틀렸구나!" 할 때에 한해서다. 다시 말해 '인생 무상'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여상(如常, 늘 같아서 보통 때와 다름이 없는 것)'하고 '상주(常住, 생멸[生滅]의 변화가 없이 늘 그대로 있는 것)함'이 함께 존재하여 그것이 바로 영계를 말함인 줄 충분히 납득할 때다.
과학자들이 생명체의 모든 구조를 분석하여 본 후에 "이제 우리도 이 방식대로만 따르면 생명체를 합성할 수 있으니 신의 영역에 도전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자연계만 말하고 영계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동전의 양면에서 한 면만 말하는 허풍만 떠는 결과가 된 것처럼[왜냐면 영혼 조성은 창조주 하나님만의 영역이요 영혼 없는 육체만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갖춘 짐승이기 때문], 불교의 교리가 바로 그런 헛소리가 처음부터 되어 왔음을 여기서 지적함이다.
여러 장님의 개인적 소견이나 판단을 종합해야 진실에 가까운 것을 일정량 취합(聚合)할 수 있게 되나, 그 장님 저마다의 독단적인 견해를 고집하면 절대로 진리에 이를 수가 없음을 말함이다. 석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여럿 중의 한 개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가 만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자처했거나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면, 논리 자체는 틀려도 그런 논리를 고집할 수 있는 정당성이나마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도 없고 저것도 아니다. 아니라면 그가 모든 판단과 통찰력이 정확하여 거의 신에 가까운 초인(超人)이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답은 다시 명확해진다. 우리는 범인들이므로 그런 초인은 초인의 세계에서나 관여할 일이니 우리 범인들의 세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다. 우리 범인들은 그런 초인 앞에서 몹시 불안하기 때문이니 이는 당연하다.
그의 머리가 비상하여 초인인지라, 지금은 자비를 말하나 미구(未久)에는 압제자로서의 공포의 대상이 될지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지 누가 장담하리요. 차라리 '초인'보다는 이 경우 우리 모두를 창조해낸 '조물주'라면 그나마 안심하리라. 왜냐면 그 모성(母性)이나 부성(父性)에 기대할 여지나마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자식을, 짐승이 그 새끼를 위하는 양상을 보면 우리를 창조해낸 조물주의 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기에 그렇다.
다시 정리해서 묻노니, 고타마 싯다르다여, 그대는 초인인가, 범인인가, 신(神)인가. 우리의 모범이 되어 우리가 따를 만한 범인이라면, 그렇게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고 믿은 35세의 젊은 나이의 일천(日淺)한 인생 역정(歷程)에서 우러난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가지고 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여러 연장자를 가급적으로 많이 찾아가 그들의 의견이나 비평을 들어보고 그들과 상의해보고 물어보기도 하여 종합해서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려보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어야 정상이다.
그런 것은 일절 없이, 다른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조건 주입시키려고만 한평생 노력했으니 그대야말로 보통으로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위인이 아니다. 비정상의 화신이다. 따라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 자세요 사고방식이다. 지혜로우려면 먼저 겸손해야 한다는 제일의적(第一義的) 덕목조차 구경할 수 없으니 인간부터 되지 않았고, 인간성부터 신뢰하지 못할 위치에서 그대는 감히 자비를 말하였던가.
자비, 사랑, 인애는 나 자신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 양심상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양심 없이 선을 말하면 위선이 되어 버린다. 왜냐면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 내가 상대에게 종이 되는 것을 말하기에 그렇다. 내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할 때에는 겸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최소한, 자기 사상을 일방적으로 남에게 주입시키려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면 말하기를, "지금까지 수천, 수만, 수억, 그 여러 갑절이나 되는 선남선녀들이 그 가르침에 심취하여 왔으니 그것이 진리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냐, 바로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가 아니냐?" 할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인간 세상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 곧 악신(惡神, 惡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두고 이 세상을 속이며 지배해 왔노라"고.
이런 가장 기본적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 사람 같이 그 많은 대중이 무조건하고 따랐다는 것은 절대로 인생들 자신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보통 신비가 아니고 경이(驚異)가 아니니, 경이와 신비는 '기적'과도 같은 의미인지라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반드시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왜냐면 고타마 싯다르다 스스로 자기를 초인이라 또는 신이라 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리 범인들도 자기처럼 될 수 있다 해서 각자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겠는가. 그가 초인이라면, 죽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범인은 초인을 따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할 때 그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또 그가 우리처럼 범인일진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는 너무 오만할뿐더러 또한 너무나 위험한 사람이기에 우리는 평상시의 이성(理性)으로는 그를 따를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하수인인가? 범인으로서 그런 신비스러움이 있는데다 자기 스스로로는 신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라 했으므로 유일한 결론은 외부적인 악령의 조종이라는 것밖에 더 있는가. 이런 것을 많은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무소유(無所有)를 주장하여 욕심이 없다고 해서 그가 믿고 가르치는 것이 참이요 진실, 진리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삶이야 아무리 청빈하고 또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죽는 것만치 미워하더라도, 그 자신이 속아 넘어가 거짓을 진리라고 말하는 데에서야 어찌 하리요. 고로 그것과는 완전 별개이다.
신의 존재 여부를 묻는데, 미리부터 악신이라는 말부터 꺼내니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위의 지적과 같이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이 현저히 나타나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인간 외적인 작용을 신이라고 하지 달리 무슨 표현을 쓰리요. 인간이 아니니 신일 수밖에 없음이다. 신이기는 하되 그것을 굳이 악신,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신에게 조종당하여 그렇게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의 직접 주인공이 되어 있는 싯다르다 자신이 창조신(創造神)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신이 아닌 선한 신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신을 부정하도록 만들 리는 없다. 왜냐면 신이라면 인간을 창조해낸 신이든가 아니면 그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한데도 굳이 부인하도록 만들 때는 악신의 짓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자식이 자기를 낳은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 불효가 되고 패역이 되듯이, 자기의 조물주로서 모든 것의 근본이 되어 있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이로울 것이 없는데도 그 존재를 부정하도록 하니, 절대로 심상치 않은 일로서 악[나쁜 것]이지 선[좋은 것]일 수는 없다.
그래서 "석가(釋迦)"가 이런 식으로 해서 결론이라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이런 내용을 대중들에게 말해서 과연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고 처음에는 망설였다 하지 않는가. 당연한 일이다. 그도 이성이 있는 사람인지라 본성으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도대체 이성적이지 못한[다시 말해 양면 중 한 면만을 편향적으로 즉 한 곬으로만 쏠리는 편에서 고집스럽게 말해야 도는 것을 그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기에] 말을 함으로써, 태어날 때부터의 이성적인 사고방식의 인생들이 과연 수긍할 수 있을까 하는 당연한 의구심이었던 것이다.
다 같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생은 너나 없이 평등한데, 석가 혼자만 납득이 되었고 대중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보통 오만이 아니며 보통의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중심'이 아닌 것이다. 진리는 원래부터가 평범한 데에 있다. 석가가 소위 "깨달았다[覺]"고 하는 것이 그런 보편타당성을 지닌 진리라고 한다면 누구나 듣고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 개인적인 편견이기 때문에 그런 망설임이 있는 것이니, 결국 방금 지적한 대로 석가는 결과론적으로[자기 자신은 물론 그렇지 않다 하겠으나] 보통 교만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가 참으로 겸손하여 오만한 데가 전혀 없다면, 그렇다면 또 다른 결론은 그가 바보라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까닭이다. ‘바보 아니면 천재’가 아니라, ‘바보 아니면 천하에 그런 오만이 없다’, 이 경우에는, 이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율곡은 그의 명석한 판단력으로 불교의 이런 현저한 맹점을 파악하고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여 미련없이 산을 내려 온 것이다. 이성철 조계종 종정은 불기 2531년에, 성경에서 밝혀 주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의 소위 "불탄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 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과 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 악이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十方)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운운".
여기서 우리는 극도의 모순을 읽게 된다. 선과 악의 대립을 부정한다 하면서도 지옥과 부처로 충만한 세계, 물과 불, 뻘 밭과 아름다운 연꽃 등의 대립 개념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유독 선과 악의 대칭적인 의미는 부정하려 한다. 선과 악은 엄연한 대립 개념의 일종일 뿐이다.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를 시인하면 그 대립 개념으로서의 불행과 불안도 현실이니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생각에 있을 뿐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생각뿐이어야 하니 추구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거룩한 부처로 바로 보라"고 주문할 필요가 없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하지 말라"고 권고할 이유도 없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이고 지옥 불은 지옥 불이고 부처의 세계는 부처의 세계이니 곧 선과 악이다.
선과 악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의미부터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다. 선은 모든 좋은 것, 악은 그 반대되는 모든 것이다. 즉 좋지 못한 것이 악이다. 이러한데 어찌하여 선과 악의 존재를 부정하려는가. 그럴진대 지옥 불의 나쁜 것도 논하지 말아야 하고 부처의 세계도 논하지 말아야 한다. 전자는 악한 것이고 후자는 선한 것이기에 언급했으니 당연히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좋은 것"[선]과 "나쁜 것"[악]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지으신 다음에 보시니 "심히 좋은 것이었다"고 했다. 즉 나쁜 것은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인간이나 영물들에게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권을 부여하심으로써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 결과로써 이들 피조물에 의해 좋은 것의 반대 개념이 비로소 생기게 된 것이다.
생명만 창조하셨는데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지켜야 할 생명의 법칙[한 몸을 구성하였으므로 마땅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는]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생명의 안락 대신 죽음의 고통이 존재하게 되어, 인간에게 소속되어 있던 땅마저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 죽음과 고통의 저주를 초래한 결과이니 역시 인간은 머리["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요 그 아래 모든 것[만물]은 몸과 같은 체제라 함께 저주를 받고 고난, 불행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나님께서도 원래 사랑이셨으나 생명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소멸하시는 불이 되신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말해 피조물이 생기기 전에는 아들과 아버지 관계이므로 사랑뿐이시지 소멸하시는 불이실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이런 대립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따라서 본시에는 모두가 부처["부처"를 악이 아닌 선의 대명사로 간주한다면]요 부처의 세계였다는 말은 옳다. 위의 설명대로 선만이 존재했었고 악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위의 지적과 같이 현실적으로 양면성의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즉 생명과 죽음, 생명의 낙과 죽음의 고통, 행복과 저주 등 이런 것이 모두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해놓고서는 무슨 "거룩한 진리"라고 하는가. 형상(形狀, 形相) 또는 형체(形體)가 존재하면 반드시 그 실체(實體), 실질(實質)도 함께 더불어 엄존한다는 증거다. 형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그렇다고 믿는다고 마음 밖의 현실이 추호라도 변할 리 없다. 마음은 육체 안에 담긴 영혼의 지, 정, 의의 의식 작용일 뿐이다. 기껏해야 사람의 육체 안에서의 심적(心的)인 변화 또는 영혼의 의식 전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다. 악을 선으로 여긴다고 악이 선이 되는 것도 아니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그런 무법한 일은 하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존재할 피조물을 만드시지 않았다. 반드시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만드신 피조물의 성격이다. 따라서 선과 악 등 대립 개념도 영구적이다. 앞의 설명대로 선[좋은 것]과 악[나쁜 것]의 대립 개념이 모든 대립되는 것들의 기본이요 근본이다. 모든 것은 이 선[좋은 것]과 악[그 반대되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대칭적인 인식에서 인간의 선과 악도 생긴 것이니 앞에서 말한 대로 생명의 법칙을 준수하면 선이요 그렇지 않으면 악이다.
사랑이 애초의 선[좋은 것]이었으므로 사랑하지 않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은 악[나쁜 것]이다. 말하자면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정상적인 것이 선이요 거기서 벗어난 모든 비정상이 악이다. 성철 종정도 생전에 말하기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했다는데 옳은 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악령이요 선한 자가 될 수는 없다. 악인은 악인이니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된 것인즉 누구를 탓할 이유도 전혀 없다.
오직 악인은 회개함으로써 의인 곧 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이 현재까지 존립해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으로써 그 메시지의 핵심을 삼는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 중에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음을 고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마음을 고침으로써 삶 자체를 고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심리학자들도 공통으로 인정하는 바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생을 주지는 못한다. 한 때뿐인[더군다나 내일도 기약할 수 없고 오직 오늘의 이 시간만이 확실하고 확신할 수 있는 현실인즉] 이 세상 생애를 끝나는 날, 그것으로 삶은 끝나고 영원한 고난과 비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영역이고 영혼은 육체와 불가분이다. 불가분이므로 바늘에 실 가듯이 육체가 없어지면 마음의 변화 역시 무의미, 무용지물일 뿐이다.
마음이 아무리 변해도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니 그러면 그 변하여 새롭게 된 마음의 작용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마련. 그러므로 마음만 아니라 육체도 함께 동시에 변화되어야 하는데, 마음의 변화만을 중점으로 삼으니 앞에서 예로 든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 일방적이 되어, 내일도 기약 못하는 현세에만 국한되므로 아무 미래도 없다. 고로 일절 무가치하다.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영원한 존재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니까 무엇이든 닥치는 결과는 그 스스로 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명체이나, 나중에는 생명 아니면 죽음의 고통이라는 양 갈래로 필연적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생명이 애초의 창조하신 의도대로 환락이라면 죽음은 항상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일체의 것 즉 고통, 고난이다.
우선 그 윤곽만 말하면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현재가 죽음의 상태이니 왜냐면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어 정함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죄의 결과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그리고 나 자신의 범죄다. 이 현재의 죽음 상태가 끝나면 곧 영원한 고통의 죽음이 기다린다["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계 14:11]. 이 역시 범죄의 결과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나 자신의 범죄 즉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후자의 경우 하나님의 "임박(臨迫)한 진노(震怒, wrath, rage, fury)"[마 3:7]가 된다. 성경은 이를 "둘째 죽음[사망]"[계 2:11]이라고도 한다. 즉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데 이 심판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동시에 확정된 것이다[행 17:30,31]. 그런즉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데 범죄는 '한 몸'으로서의 구조 즉 공동체 의식으로 살지 않고 이기주의[개인주의]로 나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런 악의 뿌리는 머리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자기 혼자 사는 것인 양 행세함에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도 머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게 모든 인간을 낱낱이 챙기실 수 있는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몫이다. 고로 이런 기본 사실부터 알고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이 세상은 그런 악인을 걸러내고 솎아내기 위한 무대 장치 구실을 하고 있다. 악인을 걸러내면 남는 것은 의인(義人) 혹은 선인(善人)이다.
이 세상이 아무쪼록 살 맛난다고 착각할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져 가는 듯 보여지는 제반 현상들이 이와 같이 악인을 걸러내기 위한 방편으로서는 필수이기 때문이니 의인은 여기에 미혹되거나 동요되지 말 일이다. 반면에 의인(義人, 善人)은 고난이 태산 같고 죽음만이 앞에 가로놓여도 이 세상이 본질상 사람 사는 데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이를 정상으로 받아들여, 오직 의를 사랑함으로써 불의 불법과는 타협하지 않고 이를 미워하는 것으로 일관할 일이다.
그야말로 한사코 죄와 악을 짓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을 입증하기에 "힘쓸"[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일이다. 이로써 영생에 들어갈 의인과 영원한 멸망으로 종결 지을 악인들의 구분이 드러나게 됨은 필지이다. 이 세상은 오직 이런 것을 가름하는 곳이요 또 이 목적을 위해서는 최상의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 스스로 움직여 가는 방향을 따라 그와 같이 정착된 것이나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판단하시고 움직이시는 관계로 빈 틈이 없으시다는 것뿐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악인과 의인을 미리 정하시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될 줄 미리 아셨다는 것이요 이는 오로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율성을 따라 움직임으로써 나타날 결과를 미리 아셨다는 것이므로 우리의 자율성에 대한 티끌만큼의 간섭도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완전한 자율이 나라이니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자율성에 적합한지 여부를 이 세상에서 가름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의 삶을 이 세상에서 예행(豫行) 연습하는 격이다. 의와 선을 사랑해서 그렇게 올바르게 사는지 여부를 살핌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세우지 말라고 엄명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방 신들을 많이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며 섬기게 하는 것 역시 그 원인이 여기에 있으니 즉 올바르게 사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 까닭이다.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일정 형상을 신으로 위하여 섬김으로서 내세의 안전을 보장 받는다는 식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 섬김은 일절 그런 외형적인 것으로써 올바른 삶을 대체하는 그 어떤 것이든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아무 것도 나타내어진 것이 없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섬김은 따라서 오로지 그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자연적으로 그런 점에서 낙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일한 증거가 그 계명[율법] 따라 올바르게 사는 일상생활에서 나타남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과 세상 종교와의 유일한 차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기독교[지금까지 지적한 대로의 반(反) 성경적인 천주교나 대다수의 개신교]를 포함하여 세상 종교는 이런 올바른 일상생활에 역점을 두지는 않고 일정한 종교 형태를 따라 거기 충성하기만 하면 영생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해서 가시적으로 특정 건물을 높이 올려 세우는 개신교의 일반적인 행티가 바로 그런 가시적인 우상 숭배의 성격을 지닌다. 마리아 상(像)을 세우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이 탐욕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은[골 3:5] 이와 같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외의 그 어떤 것 즉 피조물이든 이를 위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탐욕은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탐하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욕구함은 아닌 것이다. 개신교 중 "다수"가 그러하다는 것은 개신교는 천주교처럼 집단화한 것이 아니라 개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개중에는 극소수이기는 하나 올바른 길로 나가는 데도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세상 종교가 그런 우상들로써 특징 지어지는 이유가 이상 설명과 같은 이유에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올바른 삶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을 강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이 빛을 낸다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왜냐면 완전한 자기 부인이라야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살지 않고 오직 목표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섬기는 데에 두어야[고후 5:15] 올바른 인생 삶의 터전이 제대로 잡혀지는 까닭이다.
선과 의는 갑과 을의 하나됨에 있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모두가 선으로 가장함 곧 위선(僞善) 일색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일체의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 또는 하나님의 계명 지킴 즉 행위로써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의인은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성경의 선언이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만 비로소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다시 손보아 거짓말을 지어냈으니 즉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뜻은 일체의 선행이나 의를 행함이 없어도 특정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라 선전하고 이런 교리를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독배(毒盃)를 아무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 들이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세상 종교로 말하면 불교가 으뜸이라 하겠다. "으뜸이니까 진리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종교의 무의미함을 설명했다. 으뜸이라는 이유는,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제대로 간파하고① 현실 세계의 덧없음[無常]을 제대로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②.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창조신을 인정한다면서도③ 성경과는 전혀 판이한 인위적인 해석을 내리니 더 큰 해독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①도 없고 ②도 없다. 말하자면 종교로서의 기본 소양마저도 갖추지 못한 셈이라 할까. 창조신에 종속해 있음을 대수로 알 뿐, 이 세상에 탐닉해 지냄을 부끄러워 여기지 않는다. '사랑'이야말로[그들이 말로만 외치는], 종속이 아니라 자주 독립성의 주인의식을 말함인데도 이를 전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의 미신에 완전히 사로잡혀 포로되어 그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아쉽다는 것은 ③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가 무신론으로 치우친 것은 당시 인도의 잡신 숭배 사상에 젖은 사람들의 지나친 종속[무수(無數)한 신에 대한] 관념의 해악(害惡)을 누구보다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을 피한 결과가 범을 만난 결말이 되어 버렸으니, 사악한 마왕(魔王)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매인 몸은 한 치도 빼내올 수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운동으로만 그친 것이다. 신발에 묻힌 것을 털어내려고 신발을 치켜 들어 흔들다가 신발까지 깊은 물에 빠뜨리고 만 격이다.
유교가 중점으로 삼아 온 조상 숭배[죽은 조상 앞에 제사 지내는 것]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볼 때 대체로 아프리까 토족들[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개했던]이나 조상전래의 미풍양속으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나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강조하는 "인(仁)"이라는 현세적 삶의 이상적 기준도 "조상 숭배"라는 허울 하나만 붙들고 지금까지 지탱해 오는 것으로 그쳐 실속이 없어진 지 오래다.
이와 같이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현세적인 삶에 함몰해 있어 성경의 구원과는 전혀 상반되게 가르치는 풍조는 성경이 이미 경고한 대로 "때가 올 것이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私慾, "their own desires")을 따를 스승(teachers)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myths]를 따를 것이다"[딤후 4:3,4] 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말함이다. "사욕을 따름"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은 필멸(必滅)인 것이다.
현실에 대한 몰이해로 빚어진 결과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 구조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점점으로 해서 구축된 피라밋 구조인즉 그런 주장은 단지 고답적인 것으로만 비쳐지고 실생활에 반영될 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가 자기 주장을 아무도 들어 주는 자가 없어 실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사실상 미리 예고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처음부터 무리하게 강행하려 든 것이니 헛다리 짚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인간 양심의 소리에 준한 것이므로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이상향에의 동경,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인간 범죄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간 인간 고유의 향수 바로 그것이기에 쓰레기 취급을 당하여 버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이상 구현의 기념비적인 사상으로서 그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실천이 불가능한 즉 구체적인 방법을 결한 것이므로 한낱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일 뿐이다. 공자의 그런 생각이야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니 하나님 정하신 양심이 사람마다 장치되어 있기에 그 모든 것을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사람마다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모세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으니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는 단지 그림자로서의 역할밖에 없었음과 같은 이치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 방법이 모든 풍성함과 충만함 가운데 나타나진 것이다. 인간의 양심의 소리를 백 프로 수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람 삶의 방법이 구현된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써만 이를 수용할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모든 일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터전이 잡혀지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어 오늘날 인류가 이런 불행의 도탄에서 헤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설명을 듣고 지금까지 "자기의 사욕을 합리화시켜 준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랐던" 이들은 "어려운 소리만 한다. 누가 이를 들을 것인가"[요 6:60] 할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을 어둡다 하지 밝다고 할 것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실상 그대로를 말할 뿐이다. 이런 내용은 전혀 생소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이미 처음부터 밝혀온 사실들이다. 단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변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쳐 놓고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 자기 기만을 했을 뿐이다.
에데낙원에서 "죽을 것이다" 하셨으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죽을 줄로 알았더라면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죽는다"는 경고를 "죽지 않는다"로 억지 해석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육신대로 살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죽는다" 했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산다"[롬 8:13,14/고후 5:15] 했으면 그대로 하면 되는데, 억지로 "육신으로 살아도 구원은 된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더 믿기 때문에 멸망이다.
어차피 전쟁이 났으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기기 위해서만 전력을 다할 일이지 싸울 생각은 없이 공연히 "전쟁이 왜 일어났나, 정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나" 하는 식으로 애써 전쟁의 현실을 부인한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기필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 때로부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인 것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왜 이 세상에서 악이 창궐하고 성행하는 대신 의인은 밤낮없는 고난 속에서만 날을 지새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 데에서 연유된다[1:9-2:4]. 다시 말해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그 행한 의와 선행에 대해 포상이 당장 내려지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그 선과 의를 행함을 충실히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특정 사실을 시인하고만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이다. 왜냐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어느 방향으로든 불가불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장승처럼 일정한 곳에 서 있어야 하는 물체가 아닌 것이다. 생명체이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 움직이는 힘이 이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밝힘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바 소위 믿음은 그런 올바른 삶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특정 사실을 시인하는 것으로만 자기세뇌를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조종당했으면 이다지도 사리 판단에 둔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고까지 하는 기만책(欺瞞策)에 놀아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자니 의당히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논리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지어낸 교리가 소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미리 택정(擇定)하심"이다. 그래서 이에 따라 처음부터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 그렇지 못한 자로 분류되어 나타남으로 인해 믿음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까지 착각하는 완전히 피동적인 인간 구원의 "다른 예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생은 본질상 원천적으로 구도자(求道者)이다. 구도자로 태어났다가 득도(得道)하지도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죽어가는 인생들이 많다. 이회장도 그런 구도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그냥 세상을 떠났다.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래서 때 늦기 전에 준비하라는 것이, 이회장의 무언의 충고이니 이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간섭, 강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그들의 범죄 즉시 영원 멸망에 처해진 까닭은, 그들은 지식이 있어[이 경우 지식은 능력과 통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즉 하나님 정하신 머리와 몸의 구조로 된 생명 체제가 유일한 삶의 도리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도 능히 자기네 뜻대로 되리라고 딴에는 자신했던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알고도 범죄한 것이 되어 고의성으로 판정되었기 때문이다. 짐짓 범하는 모든 죄 즉 고의적인 것은 영원히 용서될 수가 없음이다[히 10:26].
만일 그들을 일정 기간 형벌 속에 가두고 그 뒤에 풀어놓았다 할 때 다시 말해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기회를 주었다 할 때 이는 강제, 간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간섭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올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그 좋은 쪽을 스스로 택하도록 하셨고 오직 그 자유 선택으로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강제하거나 간섭하시게 되면 영원히 그처럼 강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스스로 알아서 올바른 대로 그리고 좋은 것을 따라 처리해 나가면 그런 강제라든가 간섭하는 일이 필요없게 될 뿐 아니라 최고 경지의 행복스러움과 아름다움의 경지로 상승작용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강제하게 되는 등 억지로 끌고 가야 할 이들이 하나라도 있으면 원활이 진행되어야 할 일에 차질이 반드시 따르게 된다. 원래 생명의 체제가 한 몸 구조에 있으므로 이런 강제로 끌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암적 존재들은 주변을 그와 같이 물들게 할 수도 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 부부를 죽게 만든 것처럼 여러 가지로 불상사를 야기시키고 심지는 그런 강조로 해야 의와 선을 따르게 되는 이들은 여차하면 즉 세력이라도 얻으면 전쟁까지 불사하게 될 것이니 현재의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더 이상 이런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런 사태는 이번 한 때뿐으로 종결시키시려는 것이다. 어떤 종교의 교리를 보면 연옥(煉獄, Purgatory)이라는 것이 있어 거기서 일정 기간을 지난 다음에 천국에 들어간다 하나 그것은 위의 설명처럼 간섭, 강제일 수밖에 없다. 비록 억만년을 거기서 보내다가 풀어준다 해도 결국 그것은 강제한 것밖에 안된다. 왜냐면 그런 형벌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6] 때문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살아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좋아 의를 사랑하게 되는 것 역시 간섭, 강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극락을 누린 것은 간섭이 아니니 일찍 불행한 일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간고에서 허덕이다가 만일 천국에 간다면 이것은 "연옥"과 같은 형벌에 처했다가 방면하여 주는 것과 같은 무의미일 뿐이다. 그러니 말의 요점은 원리원칙대로 행하기를 원하심이니 즉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와 선을 행하고 불법, 불의를 한사코 미워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은 이제는 학습 효과를 충분히 거두고 있는 것이다. 즉 범죄의 결과가 어떤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느냐 하는 것을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현실에서 똑똑히 목도하는 것이다. 아담은 이런 학습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주변의 영물들이 아담에게 보좌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던 만큼 상대적으로 지식면에서 영물들보다는 뒤처졌다고 봄이 옳다. 물론 자기 자유 의지로 범죄한 것은 사실이나 지식면에서 그러하니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죽은 자가 된 것은 사실이나 멸망은 아니니, 만일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멸망 처분을 받았다면 그 "허리에서 나오는"[창 35:11] 모든 인간이 다 멸망하는 것이지 결코 구원될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모든 가능성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비롯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혜롭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즉 말하는 요점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어떠한 고난이든 환난이든 개의치 말고 오직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확고한 신념 가운데에서 우리를 보내신바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나아가기를 힘쓸 일이다.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포상하시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아니한다고 당장 벌을 주시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되면 간섭, 강제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절 그렇게 아니하시는 것이다.
오직 때가 되어 모든 것이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그 날까지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은 것처럼 아니면 침묵만 지키시는 것처럼 될 수밖에 없다. 이미 모든 뜻은 성경을 통해 그 말씀이 나타나진 그대로이므로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음이다. 새로 증거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흉내 내는 그 어떠한 것이든 완전히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자만을 찾으신다. 이것이 온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라"[행 17:30]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의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주시는 은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구원이라는 뜻이다[행 5:32/롬 6:16/16:26/요 3:36/히 4:11/5:8/벧전 1:2/고전 2:9/약 2:5/1:12]. 회개의 의미 또는 목적이 몸과 머리의 하나되는 관계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시인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 모든 지시를 따름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세례 요한이 외치지 않았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하셨고 요한 역시 그렇게 세상에 전달했던 것이다[마 3:2/4:17]. 바울 역시 그렇게 외쳤으니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심을 알리고 전도한 것이며 그래서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심판하시는 이가 계신다고 경고한 것이다[행 17:31]. 그리스도를 구원자라기보다 심판장[재판장]으로 소개한 것이다.
성령께서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실 때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요 16:8]임을 분명히 하셨다. 로마 총독 벨릭스가 바울 사도의 말을 듣고자 자청해 왔을 때 바울이 강론한 요지도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행 24:25]이었다. 의와 절제를 따르지 않을 때 죄요 그 죄는 반드시 심판을 불어들이게 되어 있음이다. 회개의 의미는 "악함을 버리고"[3:26]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와 절제를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의미와 목적이 여기에 있음이다.
이상의 경우 모두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단순한 그 사실을 강조함에 있지 않고, 의 아니면 죄의 양단간의 결정으로 심판을 면하느냐 자취하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음에 마땅히 주목할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 부합하는 일이요 인간 양식(良識)에도 어긋나지 않음을 우리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특정 사실을 수긍, 시인하기만 하면 영생한다는 일반화된 소위 "기독교"의 잘못된 교리를 두고 불교도들은 비방하고 비판했었다.
당연하다. 그 점에서는 불교도들이 훨씬 이성적인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평범한 상식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의 모순에 못지 않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죄 용서와 영생의 조건이 특정 사실을 시인하는 것에 그 근거를 찾을 것같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왜 그런 특정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되지 못하는가. 같은 피조물이 아닌가. 이는 형평의 원리에서도 어긋나는데 이런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니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모독행위다. 하나님을 그렇게 모순된 존재로 폄훼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중심이 되어 회개하지 않은 까닭에 멸망하는 것이니 우리 역시 같은 처지에 있고 같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구원되든 멸망하든 양자 택일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본이 되시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신"[히 1:9] 것이다. 고로 영생에 들어가는 자격이 있으니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이다. 자기중심으로 나가면 멸망이다[:8,9]. 이 근본 토대 즉 참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저 얻은 은혜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먼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부터 먼저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인해 새 생명의 능력을 구사할 수 있어 참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
영혼과 육체가 이와 같이 불가분의 하나의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실체인 영혼에 대하여 형체인 육체는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이 '실질'과 '형상'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기에 그러하다.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는 그 육체가 자동적[기계적]으로 작동하여 순종하게 되어 있으나 새 창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영혼 역할이시고 우리 자신은 그 육체 역할이므로 우리가 자진해서 우리의 의지로써 순종을 이룸이니, 그래서 우리의 "힘씀"[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이 필요한 것이다. 곧 부단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니 곧 "항상 복종함"[:12]으로써 이룸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 없으면 몸이, 몸이 없으면 머리가 아무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따라서 우리 영혼은 영계에 속하여 아무리 불멸이라 하더라도 이 육체가 썩어져 없어지는 날에는 그 영혼 단독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은 자로 분류되지 결코 산 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육체가 말 그대로의 '영혼의 형상'이 되어 영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가 없으면 영혼은 자기를 나타낼 수단이 없으므로 존재가 있으나 마나이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실 때 생명체로 즉 산 자로 만드셨지 죽은 자로 만드시지 않았다. 따라서 생명의 세계가 아니면 거론되지 않는 것이니, 영혼이 자기 존재를 나타낸다는 것은 생명에 관련되어 그러하므로 존재 가치가 부정된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함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대한 육체'로서의 나 자신이 '육체에 대한 영혼'으로서의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또는 그리스도의 구원]는 '있으나 마나'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로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부활은 다시 말하면 "생명의 부활"[요 5:29]을 가리킴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러면 "심판의 부활"[:29]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미완성품은 없다. 온전한 완성품뿐이다. 따라서 사람이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불변이다. 왜냐면 첫 사람 아담으로서 인간의 구조가 그렇게 이중으로 되어 있음이 이미 기정 사실화한 까닭이다.
그런즉 죽은 자라고 부활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니 장차 "심판의 부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은 당연히 말 그대로의 "생명의 부활"을 가리킴이다. 악한 일을 행한 자는[:29/롬 2:7-10] 여전히 죽은 자로 있어 '영원한 죽음의 고난'[멸망]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모든 인생들이 이제는 첫 사람 아담으로 연결되지 않고 마지막 아담으로 새로 연결 짓는 것이어서["마지막 아담"에서의 "아담"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의미 그대로], 마지막 아담께서 신령한 몸을 입으셨으므로 이에 따라 모든 인류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있는 근거를 이제는 지님이다.
이 사실은 아담이 만일 범죄하지 않고 에덴낙원에 있어 인생들 즉 자기의 닮은꼴들을 출생시켰다면 거기서도 영물들처럼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모든 인간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을 것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일정 수효가 차게 되면 아담의 인간 생산[생식]은 종료되고 악과 선에 따라 영물들이 이미 영원한 구별이 지어진 것처럼 인간들 역시 그렇게 영원히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부터 범죄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위치하시게 되었으므로 그 첫 사람 아담의 역할을 차질없이 수행하게 되심이니 곧 정상적으로 다시 출생하는 일이 시작된 의미가 바로 우리의 구원 받음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을 경우, 에데낙원에서 먼저 사람들이 출생한 후 그 후의 거동을 보아 선과 악이 판별 났을 것이지만, 이제 그리스도 시대에서는 처음부터 믿느냐 믿지 않느냐[회개하느냐 않느냐]로써 가름되고 믿지 않으면 악한 자로 제물에 도태되어 심판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것이다[요 3:18].
그리고 처음에는 믿고 회개하여 아담의 본을 따르지 않고 그를 경계 삼아 복종하기로 작정했어도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시험을 받아 이 약속을 어기고 "처음 사랑을 버렸을"[계 2:4] 때 역시 악으로 분류되어 도태되기는 마찬가지다. 고의적인 범죄가 아닐 경우 회개하면 복구될 수 있으나 끝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렇게 됨은 필연적이다. 그런즉 항상 강조하는 대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우리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하나님 지시[모든 말씀, 그 뜻, 계명, 율법 등]를 받들어 올바르게 삶으로써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 그 핵심인 것이다.
왜냐면 아담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영생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혹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 타당할 수도 있다 하겠으나[그러나 전적인 것은 아니니 왜냐면 아담의 범죄로 기인한 것이므로] 아담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죽음이 왔다 했으니[롬 5:12] 하나님의 애초 인간 창조는 영원히 사는 인간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영생하자면 이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는 아니 되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든 않든 자유다. 그러나 이 3운법칙으로 인해 최소한 50대 50의 비율로 팽팽히 맞서 있는 형국이 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선택은 자유다. 강요하지 않고 강제될 수도 없다.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 의지에 의한 양자택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기(珍奇)한 것이 출현했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는 충분한 증인(證人) 역할이 되고 있다.
무엇에 대한 증언(證言)이냐 하면 이상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에 대해 단 한 가지라도 당신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세상사, 인간사라는 것은 워낙 신비한 것으로 처음부터 나타나 있고 따라서 인간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데 이 알 수 있는 '끄나풀'을 드디어 잡았다 싶으면 이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만 해도 허물이 완연하다.
이는 당신이 게을러 그렇던가 아니면 마음이 너무 오만해서 이런 것에 관심을 두기에는 당신 자신이 너무 고상하다고 생각했든가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으므로 이런 오만함은 패망의 지름길이 된다. 그리고 자기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 일인데도 태만해서 그리 되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 당신을 위해 확보되어 있는 영생에 대하여 숫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당신이 마지막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경우 당신을 능히 단죄하게 되는 근거는 이 삼위일체의 법칙을 모태로 하는 이 인간 생애의 법칙[3운법칙]이 그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이회장의 24개항 질문에 대하여 조목별로 답변을 하면서 한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내려 가게 되는데 다시 한번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회장이 남긴 24개 조목의 질문이야말로 그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온 세상을 위해 평생에 못다 한 큰 일을 해놓고 간 셈이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명백하니까ㅡ즉 세상에서 "돈, 돈" 하고 유행어처럼 되어 있는 "부자 되세요" 하는 슬로건이 최대 덕담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그러한 부를 이미 이룬 장본인으로서 "부(富)도 아무 것도 소용 없더라, 오직 영생 하나만 물고 늘어져야 할 것인데 이제 와서 철저히 후회하고 가노라"이기 때문이다.
1. 창조신[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고 있다. 창조신은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2. 창조신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심이 이상 삼위일체 원리를 비롯해 3운 법칙에 의해서도 한결같이 증명되고 있다. 이것만이 그 증거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이미 그 증거는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모든 인생들에게 분명히 나타나져 있는 상태다. 이 삼위일체 원리나 3운법칙은 그 "만드신 것" 중 단지 하나일 뿐이다.
스스로를 숨기시는 하나님
오히려 성경에, "진실로 주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15] 하였다.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행 17:27] 하면서도, 이와 같이 상반된 내용을 가르치는 성경의 진실은 무엇이냐 할 때 그 의미는 명백히 드러난다. 즉 우리 인간이 지적으로나 이성적으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고 믿도록 하시되 그런 것이 일절 간섭, 강제가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가령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계심으로써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나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어 계시는데 그렇게 계심으로써 그렇지 않았던 과거와 다른 어떤 느낌이거나 일종의 특이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강제와 간섭이 된다. 즉 내 스스로 그런 것에 의존해서 그것만이 좋아서 그런 것을 찾게 될 뿐 하나님이 좋아서 혹은 그 말씀을 사랑해서 하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기뻐하지 아니시고 원하시지 않는다. 위협이든 회유든 간섭이고 강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해서 황홀경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고 엄습해 오는 두려움으로 떠는 일이 있어도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숨기시는 의미이니 즉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도록 즉 의식하려 하고 인지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이렇지 아니하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시험의 '무대'요 '때'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숨으시고 우리는 찾아야 하는 것이니 이는 필수적이 된다. 이는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러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회장의 질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똑똑히 나타내시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지만 또한 동시에 똑똑히 나타내면 안되는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간섭에 의하고 강제로써는 절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심이다. 이는 다시 말해 의를 사랑하고 선이 좋아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려 하도록 만드심이다.
바로 이런 점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말씀이 진실이기에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울타리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그런 말을 했고 역시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그런 시험을 용납하신 것이다[욥 1:9-12].
"주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시기 때문이 아닙니까"[욥 1:10]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해서 기뻐 어쩔 줄을 모르도록 어떤 황홀한 경지에 빠지는 일은 없다. 아니, 없도록 일부러 조처하심이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느낌의 경고를 발하시는 것도 없다. 오로지 나의 이성적 판단으로 스스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움직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믿는 사람에게든 아직 믿음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에게든 똑같이 적용되는 아주 중대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단히 내 스스로 하나님을 의식하려 하고 인지(認知)하려는 노력, 힘씀이[고후 5:9/벧후 1:10/3:14] 필요하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잠 3:6] 함과 같다. 물론 일부 사람에 한해서 그런 황홀한 경지를 맛보게 하심은 사실이나[그런 체험을 한 당사자들은 이를 물밀 듯이 밀려 오는 "사랑의 파도(waves of love)"라고 표현단는 점에서 공통이다] 표본으로 맛보기로 그렇게 하실 뿐이요 그런 사람도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즉 극히 일부로서의 몇몇 사람에 한해서 그렇게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이를 통해 천국에서의 황홀경을 미리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정도의 의미로만 끝나게 하심이다. 죽기 전에 천국을 볼 자들도 있다 하시고 그 영광을 오직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에게만 대표적으로 나타내신 것과 같은 이치다[눅 9:27,28]. 그러므로 주의할 것은 아무 감흥이나 그런 것이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도 된다.
또 그들에게만 그런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내게는 하시지 않는다고 사람을 차별하시는 듯이 오해하지 말 것이다. 내 편에서의 끊임없는 의지적인 노력이 항상 필요하고 필수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렇게 하면 나도 그런 체험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씀"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엄마가 항상 아기와 함께 하고 결코 떨어지지 아니하나 가끔 아기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몸을 숨기고 그 반응이 어떠한지를 보려고 하는 엄마의 마음과 같으시다고 할까.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그런 의미에 하자는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치라"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과연 아무 불평 없이 그대로 이삭을 제단에 묶어놓고 칼을 집어 들려고 할 때 "내가 이제야 네가 진심으로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창 22:2,12] 하신 것이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믿음으로 구원 얻을 우리들을 위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고 했다.
이런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니, 그래서 아브라함을 이와 같이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성경은 명명하고 있다. 욥도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의 측면에서 볼 때 역시 우리 믿음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교훈이 되어 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시기보다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 하시는 하나님. 이 주제(主題)는 깊이 음미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이지 않는데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없지 않으냐"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숨으셨는데" 보일 리가 있는가.
엄마가 슬쩍 몸을 숨기니 토닥거리고 놀던 아기가 엄마를 찾으나 없다. "이런 변이 있나, 엄마 없이 내 어찌 살꺼나" 하며 대성통곡을 한다. 엄마가 없기[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숨었는데, "있을" 리가 없고 보일 리가 없다. 그러나 엄마가 없는 것이 아니다. 좀 전까지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지적으로 판단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 실존의 증거들뿐이다. 오늘날은 삼위일체의 기본 원리를 증명하는 3운법칙까지 드러나져 이 '증거' 군(群)에 합세, 합류하고 있다.
단지 우리 오관(五官)으로 잡혀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일부러 일체의 종적을 감추시듯 숨어 계시는데 잡힐 리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강제, 간섭이 되시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개인적인 이해 관계를 떠나 순수한 객관적인 판단으로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결론을 내리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믿는 사람의 경우, 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내 앞에 모셔 두고 있으니 그렇게 내가 자진해서 모시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언행을 하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를 두고도, 하나는 내가 주동이 되어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다[시 18:8] 했고 또 하나는 하나님 친히[그리스도 친히] 내 앞에 위치해 주신다는 의미로서 양면으로 명백히 성경은 나타내고 있다[행 2:25]. 후자의 경우 베드로가 당시 성령 충만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도 없거니와 베드로가 말씀을 잘못 인용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값진 진리를 그대로 하나님 친히 드러내신 것이다.
즉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니 갑 쪽으로 보면 을을 안은 모습이요 을 쪽에서 보면 갑을 업은 모습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양면성'의 진리다. 우리 구원의 참 모습이기도 하다. 어느 쪽도 일방적이지 않고 동시에 움직이는 주인 의식이니 곧 사랑의 관계,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됨이 항상 이러하다. 이 명확한 이치는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다"[계 3:20] 하신 말씀으로 다시 확인된다.
일방적으로 즉 아기의 방이라고 해서 엄마가 거침없이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당연히 문을 두드리시고 나는 또 당연히 내 스스로 주님을 모셔들여야 하는 것이며, 또한 "먹는 것" 역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주객(主客) 관계를 바꾸어 가며 하는 것임을 "너는 나로 더불어, 나는 너로 더불어"라는 말씀으로 정확히 표현하신 것이다. 이것이 항상 강조하는 삼위일체의 원리 아니, 사랑의 양명성과 동시성의 원리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요
20:21/17:18]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시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할 것"[계 3:21]이라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그 모든 행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본으로 보여 주심이니 이로써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을 "따라가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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