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삶의 기본 구조-------------------------------------------------------------------------------------------------------------
찰즈 피니의 성령 세례
혹자는 가령 미국의 부흥 전도자 찰즈 피니(Charles Finney)와 같은 경우를 두고,
"믿었으나 완전한 순종에는 이르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경우" 또는 그래서 "성결한
상태로 들어간 것"이라고 피니의 체험에 대해 억지 설명을
시도하는 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장로교인 변호사로서
그런 남다른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을
받음이요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 성령 세례도 받는 것이 아니다. 혼동을 하지 말 것이다.
피니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처럼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도
알고 성경의 말씀이 옳다는 것도 안다. 지금 죽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도 다 잘 안다.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려진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부인하지 않고
다 시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는 것은 아닌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구원 받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런 정도의 시인
가지고 구원 얻는 역사 곧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행동에까지 옮겨져야 그것이 진정
믿는 것인데 알기는 알지만 행동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아니한
것이다. 행동은 믿기 때문이고 믿으면 그것이 행동을
표출되게 마련이다. 행동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과는
달리 마음은 아직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따라야 영생 얻고 구원되는 것은 알지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하시니[눅 14:33] 망설이고 다시 한번 더
수지타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그것은 아직 믿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수지타산은 이 경우 부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자기 중심일 수도 없다. 어느 쪽이
합리적이냐 그 타당성을 저울질하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당연한
추리 과정이다. 그런 심령 상태가 믿지 않는 상태라는 사실은
그 영혼이 더 잘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의 죄됨과 악의
흉악함과 부끄러움 이런 모든 것을 미처 실감하지 못한데서
빚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제자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다가 미련없이 떠나 버렸다[요 6:66].
빌립보 간수는 바울과 실라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엄에 그런 '주저'는 일고의 가치도 의미도
없었다. 오직 나는 죽을 죄인이니 어찌하면 구원 받겠느냐
하는 오직 그 한가지 염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기
전의 피니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의 경우는 그 죄와 멸망의
상태를 참으로 실감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주저와 망설임이다.
다시 말해 반신반의다. 이는 믿지 않음에 대한 증거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그 즉시 직감적으로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저는 죄인입니다"
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그렇게 고기가 잡힐
수 없다는 것을 고기잡이로서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자기의 죄인됨을 자각하게
되든 오랜 시간 영혼의 번민과 고뇌 끝에 알게 되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서의 자기 실상을 깨닫는 순간 피니처럼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이런 주저와 망설임을 그 영혼의 고집
때문이라 보고 그래서 그렇게 굽혀 들지 않다가 주님께 돌아옴을
"순복"(submission)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나 어쨌든
그것은 비로소 이제 <믿음에 들어 선> 단계인 것이다.
순복이라고 해서 인간으로부터 무슨 항복을 받으려 하시는
것도 아니나, 지금까지 양심의 가책에도 아랑곳없이 내 뜻대로
하는 인간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의도적 반역이라는
측면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상의 기도처럼
"모르고서 저지르는 행위"가 그 본질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책망"[요 16:8]을 듣기 시작하면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버티는 자세를 버리고 죄인으로서 죽음에
처한 비극적 현실, 그리고 그에 반사하여 나타나는 형용 못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음에 들어오는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이 점 하나만 유념해도 혼동스럽게
보이거나 복잡할 것은 하나도 없다. 피니 역시 그러한 상태('성령의
세례' 받기 이전)에서 자기가 한번 믿음에 들어온다면(피니의
소견으로는 자신만 아니라 누구든지) 여생을 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에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법률가로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던 그로서는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속 시원히 단절하지
못한 데에서 치열하게 겪었던 내면적 전쟁이었고 심적 고민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두고서 엉뚱하게도 "믿고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복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으면 화끈하게
믿고 안믿으면 아주 안믿고 그렇게 양단간의 결정을 내리는
자세로 임하면 될 일이다. 성경을 직접 읽어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눅
16:16/마 11:12]이라 하심이 이 때문이기도 하다.
피니는 그 체험이 있기 전에는 성경을
틈틈이 읽었으나 사무실에 읽다가도 남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리면 얼른 성경 책을 덮어 버리고 시치미를 떼곤 했다.
당시 법률가는 성경이 법 해석에 참고가 된다 하여 자기 책상에
성경 한 권쯤 올려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점차
죄의식이 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감을 받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피니는
그와 같이 최종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주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라 경어를
쓰지 않고 그냥 "예수, 예수" 하는 말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살아 계시고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시는
상전을 그런 경칭 없이 모실 수 있는가["주님"의 뜻이
"나의 주인, 소유주"라는 의미]. 관념적으로 거저 알고만
있는 상태를 '믿는 것'으로 착각하여 소위 크리스천 행세를
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구원
받았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께 관한 일로서
아무 것도 <신비한> 것은 없다. '신비하다'는 것은 베일에
싸여 우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그런 신비 유형의 것은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의 특질상 지금은
규명하지 못하는 그런 차이는 있다. 그런 것은 곧 영원한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다 알아질 것이다. 신비하니까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은 적어도 우리의 구원에 관한 일에만은 통하지
않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다.
아기가 어떤 위험에 직면해 있을 때
그 엄마의 불타는 심경 또는 자신을 삼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의 열정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우리 위해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그런 어버이의 심정인 것이다. 그런 마음은 엄마로서의
당자밖에는 모르는 것일까. 바로 그런 사랑의 파동이 피니
앞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 것이다. 그 자식 위해 물불이라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어버이의 마음이 그와 같이 표현되고
반영된 것이다. 목숨을 바쳐 구출해낸 그 아기를 엄마가 힘껏
껴안는 바로 그런 순간인 것이다.
D. L.무디의 유사한 성령 세례의
체험
(다음 글은 다른 데에 한번 올렸던 것을 옮겨와 문장을 재차 손보지 않고 그대로 올림)
D.L.무디는 널리 알려진 대로 유명한
대중 전도자입니다. 그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체험 중 하나로,
파도처럼 몰려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물결을 감당치 못해
"주님! 손을, 손을, 제발 손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 죽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카나다의 유명한 '피플즈처치'(People's Church)의 오즈왈드 스미스(Oswald
J.Smith) 목사가 교회사를 연구해본 결과 사도 바울에 가장
가까운 부흥 전도자가 찰즈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라고
했는데 피리 역시 무디와 동일한 체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공통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치 액체와 같은 느낌으로(liquid love) 물결처럼(wave
after wave) 계속 엄습해 밀려오는데 그 환희라 할까 희열이라
할까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라, "주님이 이 손길을
거두어주시지 않으면 전 죽습니다!" 하고 외칠 정도였다고
피니 역시 그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강렬한 애정의 분화구와도 같은 것을 우리 인생들도 가끔
목도하는 바이지만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인 것입니다.
피니는 교회에도 잘 나가고 찬양대
지휘자로 활동했던 변호사였으나 내심 깊이 자기는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늘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죄의식이 마침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정점에 달하자 피니는 어느 가을 날
아침 직장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인근 숲 속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려는데 가을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내도 피니는 화들짝 눈을 뜨곤 했습니다. 이런 그 자신을
책망하여,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죄인이 무릎 꿇고
기도한다면서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다니 이런 건방진 자가
어디 있나!" 하고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게 됩니다.
그 때 "네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를 들을 것이요 네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렘 29:12] 하는 말씀이
방금 읽은 것처럼 머리에 떠올랐는데, 이 구절은 자기가 기억하는
한 단 하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그런 구절이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YOU'라고 하면 단수[너], 복수[너희] 다 통하기 때문에
연설로 'YOU'라고 하면 연설자는 '여러분'이란 뜻이지만 청중들
개개인에겐 꼭 자기를 지적하여 '당신'이라 지적하는 것처럼
들리므로 그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위의 성경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외에도 몇 구절이 더 기억 나면서
피니는 "주님, 분명히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제가 그대로
믿습니다. 제가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하며 그 약속을 되뇌며 한동안 기도하는데
어느 새 마음이 가벼워지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던 길로
다시 접어드니 해는 벌써 정오께가 되었습니다. "내가
거듭나게 된다면 평생을 복음 전하는 길로 나서리라"고
혼잣말을 하며 자기 사무실로 가는데 이전에 느끼던 죄책감은
말끔 달아나버린 상태여서 '내가 기도 중에 너무 당돌한 말씀을
드려 용서가 안되는 죄를 짓지나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그 때가 1821년 10월 9일 화요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날 자기 사무실 잔무를 끝내고
피니는 집엘 가지 않고 홀로 좀 있고 싶어 난로에 장작을
잔뜩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귀가하는 동료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고는 문을 닫는 순간 그 마음 깊숙이 전달해오는
느낌이 있어 이를 주체하지 못한 피니는 급히 사무실 뒷방으로
기도하러 가는데 그 순간 꼭 주님을 대면해 보는 것과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실제로 일반 사람을 만나는 것과
꼭 같은 그런 주님과의 마주 대함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정신적 현상이라는
것은 그 순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그 후로도 한동안은
그랬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니는 마치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기라도 하는 듯이 어린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울부짖으며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죄를 낱낱이 주님 앞에 자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무디가 경험한 것과 같은 사랑의 물결(波動)이
그의 전신을 휘덮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피니 역시
소리쳤습니다. "이 파도가 계속되면 전 죽습니다! 주님,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그간 상당 시간이 흘러간 모양으로
나중에 보니 난로의 불은 다 꺼진 채였습니다. 그 시간 늦게,
피니가 나가는 교회의 찬양대원 중 아무개가 피니의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가 흐느끼고 있는 피니를 보고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피니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너무나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이오." 놀란 방문자는 황급히
나가 그 교회 장로를 불러왔습니다. 그 장로에게 피니는 처음부터의
일을 자세히 얘기했습니다. 말하는 도증에 대학 진학 공부를
하고 있던 이웃의 한 젊은이가 우연찮게 그 사무실로 들어와
얘길 듣다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기도해 주시기를
꼭 부탁드립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청년이 회개하고
거듭난 것은 그 후 얼마 안가서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또 피니는 그런 동일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때쯤 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죄 용서와 은혜의 구원을 완연히 깨달았고,
바로 그 날 아침 자기에게 사건 의뢰를 해왔던 모 집사가
피니의 사무실로 와서 개정(開廷) 시각이 정각 10시임을 다시
일깨워주자 피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변호하기로 작정했으니 다른 변호인을
찾아보셔야 하겠소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물러난
그 집사는 나가서 당장 사건을 종결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신 기도에 들어가 곧 이어 깊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신앙생활에 들어가도 피니만은 예외이리라고
한결같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지라 난데없는 피니의 그런
소식에 인근 사방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습니다. 피니는
그 직후부터 반세기 동안 밤낮 없이 정력적인 복음 전도 활동을
수행하게 됩니다.
피니는 그를 대해본 이면 누구라도
동의한 것처럼 아주 우락부락한 남성적인 성격이라 일반적으로
그런 유(類)의 체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피니 같은 사람이 그런 체험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모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서부개척자 정신으로 단단히 뭉쳐진 조상들의
혈통을 물려받아 숲과 흙 속에서 태어난 피니는 20세쯤 되면서부터는
그와 마주치는 자기 또래든 그 이상이든 피니를 당해낼 장정은
하늘 아래 없는 듯 했고, 일을 해도 그를 앞지르는 이가 없었고
또 그는 만능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시골인지라
당시의 나이로도 임시 교사로서 한 4년 일하기도 했는데 피니는
그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학교 학생들의 우상이었고 아무리
난폭한 학생들도 그가 한 번 눈망울을 부라리면 금방 분위기가
제압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생활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환경 덕분에 피니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미개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으나', 20살이 지나서야
법률 공부를 하려고 아담즈란 도회지에 나가서야 비로소
교회 맛을 들였는데 그래도 목사의 지나친 칼빈주의적 신학
사상이 도저히 구미에 맞지 않았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온
피니는 담임 목사인 게일 박사를 붙들고 젊은 법률가다운
예리한 질문을 퍼부어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한 설교마저 믿으시질 않아요. 제가
만일 목사님이라 치고 목사님처럼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교회 종대에 매달려 만날 종을 쳐대며 길거리에 나가 '불이야!
불이야!' 하고 고함을 질러댈 겁니다." 본디 화끈했었던
그의 사람 됨됨이대로, 신앙심에 일단 젖어들면 그 사람의
밑 뿌리부터 송두리째 휘잡아야 함을 토로한 것이고 그의
회개 이후의 활동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피니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변호사라는 직업상 사교계나 종교계에 안면을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니의 이런 기질을 잘 아는 게일 목사라 피니의 회개를 좀처럼
실제라고 믿으려 하지 않아 맨 나중에야 인정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피니가 장난을 치는 줄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회개하였다는 것 자체가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잊혀질 수 없는 큰 뉴스거리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대 유대인의 율법적 기준에서
보면 흠이 없었다고 한 것처럼, 교회 물을 먹은 적도 없는
피니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이상적인 삶을 살았음을 설명하는
다음 일화가 있습니다. 피니가 20세 무렵에 해군에 입대하려고
집을 떠나 인근 항구 도시에 갔었는데 당시는 카나다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위협에 모두 민병대에 들어가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피니가 목격한 것은 극도에 달한 무질서와
혼돈이었습니다. 듣기에도 민망한 음담패설과 욕설과 싸움질에다,
술이 취해 골목을 누비는 민병대의 광란 등은 피니의 머리에
털 나고는 처음 보고 듣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윤락녀가 그를 따라온 것도 바로
그 날의 일이었습니다. 군대를 따라다니는 그런 여자였는데,
젊고, 예쁘고, 늘씬한 미녀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미모에
놀라 아가씨를 한참 보다가 정작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피니는 그처럼 타락해버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그 태도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의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오름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옴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으로 변했습니다.
이 난데없는 뜻 밖의 광경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 아가씨 역시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둘은 그렇게 우느라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그대로 헤어져 버렸습니다.
55년이 지난 뒤 피니는 그 이야기를 손자에게 전해주면서,
"아아 그 때 내가 믿는 사람이었다면 말이야, 그 젊은
아가씨는 꼭 구원되었을 건데! 아마 하나님은 그 여자를 눈
뜨게 하시려고 뜻이 있어 내게 오도록 하셨겠지. 그 여자
구원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했다고 합니다.
윤락녀를 보고 측은히 여긴 나머지
대성통곡할 정도의 그러한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그 날 성령의
세례를 받던 날 저녁 성령[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모습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육체로 나타나신 것처럼 "어린 아이
같은"[마 18:3] 심경의 피니에게 그토록 선명하게 자신을
나타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로 주는 회개의 세례와
성령 세례와의 차이는 죽음과 생명의 양극(陽極) 사이라 하겠습니다.
세례 의식에서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골 2:12/갈 2:20].
물이 이와 같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노아 홍수의 심판으로 당시의 인류가 멸망했기 때문입니다[벧전
3:20,21]. 당시 인류가 물에 잠겨 수장(水葬)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창조는 죽어 일단 종료된다는 뜻이니 그런 연후에야
"새 창조"[고후 5:17] 즉 "다시 출생함"[요 3:3]이
가능하여 이 "새 생명"[롬 6:4]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출생하는"[요 3:6] 것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의 세례인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을 의미하므로 다시는 그런 죽음의 결과를
낳는 일을 할 수가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이므로
다시는 그 죽은 나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이 발붙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모든 사유와 근거가 사라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2/4:17] 하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는[행 17:30]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더욱 죄는 지을 수 없게 되어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왜냐면 둘이 하나되는 갑과 을을 이루게
됨에서[3위1체의 원리]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므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성령"이라는 이름의 생명 가운데 완전히 잠기게 되는
것을 뜻하여, 이는 마치 아기가 엄마의 품속에 싸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심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위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가리켜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올 것"[요 14:18]이라 하신 것입니다.
엄마를 떠나 있는 아기를 엄마가 다시 와서 그 품에 거두어
들이는 모양새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기에게 엄마의 품처럼 천국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엄마 품 그 밖에서는 죽음의 아수라장이 되어
있더라도 엄마 품속의 아기는 마냥 안온安穩)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사
9:6]시라 함도 아들 친히 우리를 창조하신 어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호칭은 홀로 아버지께 드리고
당신께서는 우리와 함께 형제되시기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시고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요
15:13-15] 하신 대로, 진실로 이보다 더 한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이 이상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멸하시는 불"[히
12:29]로서 심판주(審判主)가 되시고 악인들과 악령들을 영원한
불로 처단하시더라도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라는
하나님의 양면성에서[롬 11:22] 이와 같이 최고도의 사랑을
나타내신 이상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신
이상 우리로서는 원도 한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경고한
대로 우리는 오직 그 사랑 가운데 살면[롬 11:22] 만사형통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셔서
우리 각자와 함께 사시는 것은 이 사랑의 측면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우리가 그를 밟을 수도 있고
그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더라도 그냥 죽임을 당하시는
그대로가 됩니다[히 6:6/10:26,29]. 그 당시 골고다에서 죄인들의
손에 잠자코 죽음을 당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해서만은
죽으신 까닭입니다.
생명에서 완전히 이탈하였으므로
여기에는 멸망의 죽음 곧 하나님의 "엄위"[롬 11:22]
곧 진노밖에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떠나 "엄위"를 대할 이유가 세상 천지에 없습니다.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취할 이유가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않다는데 있고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무시하기가 일쑤이고 당치도 않은 교만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율성의 피조물[인격성이 있는
경우]을 만드셨는데도 타율적인 성향을 선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위엄을 나타내면 당장 그 위엄
앞에서는 꼼짝 못하나 풀어놓으면 기고만장하여 제 마음대로
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시키나 안시키나 스스로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따라 주인 의식으로
행동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않으니 하나님은 그 선택한
대로 되도록 그들을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롬 1:24,26,28]. 사랑은
절대로 강제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법질서가 없는 사랑은
방종에 그치고 아무 의미가 없어 혼란과 혼돈의 고토만 가중되므로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게 됩니다. 사랑 없이
법질서만 강조해도 그 삶은 무미건조하여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합니다.
시편 139:5를 보아도 미가서 6:8을 보아도
스바냐 3:17을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그 품에 안고
계시는 무한히 인자한 엄마의 모습이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우리 각자와 함께 계시고 사시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모두
3위1체의 원리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법칙을 떠나서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하시지 않으니 이 법칙으로 만유 자체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무시하면 그것은 마치
집의 기둥을 모두 뽑아버리는 것과 같이 되는 까닭입니다.
이 원리는 창조의 법칙이요 만유 존립의
이치이기도 하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질서대로
충실하면 아무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이 세상은
시험의 무대요 과거 아담이 범죄했던 전례를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지"[빌 2:12]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성경은 억지로 믿으라고 하거나 혹은 믿도록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고후 4:4/요 6:45-65].
오직 믿을 만한 사람 그래서 사랑으로
충성할 사람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매여
있어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거나 힘들어 할 때 오직 기도함과
말씀 전달함으로써 "어두움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력으로부터"[행 26:18] 자유 해방을 얻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다른 데에 한눈팔지 않고[눅
9:62] 모든 힘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자유 의지를 갖춘 우리 인간이
너나없이 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철학자가 말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움직이는 인간의 노력"인 것입니다.
피니는 그 날 듣고 본 모든 일에 대한
혐오감에서 입대를 포기하고 돌아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법률 공부를 하기에 이릅니다. 교회에 나간 것은 직업상
필요해서였고, 찬양대를 맡은 것은 음악에 조예가 있어 교회에서
초빙해 주어서였고 성경을 읽은 것은 법 연구에 모세의 율법이
참고가 되고 기준 삼을 것이 많았고 당시 관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을 읽은 결과 내린 결론은 분명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도 알았고 지금 만일 죽는다면 영원 멸망밖에는
갈 데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좇아 여생을 보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냐를
두고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해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죄인으로 자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면
완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데 자기는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고 싶었던 것이므로 자기가 자신의 임자 노릇하려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목사는 그를 도저히 하나님 믿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 찍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소용 없는
일이라 하여 만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 중에는 젊은 남녀 그룹이
있어 계속 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는 피니가 교회에 있는 동안은 인근 젊은이들의 신앙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피니가 어디서나
젊은이들에게 대인기였고 항상 앞장 서서 이끄는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젊은이들의 끊임 없는 믿음의
기도의 능력은 이미 피니의 심령을 흔들어놓고 있었던 것이고
그 결과는 그런 놀라운 회개의 역사로 마침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의 구원관과는
판이한 것을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런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인다고 말을 하면 무조건 세례를
주니, 교인이 되는 규격에 맞춰 제품을 다량 생산하는 식의
안일한 '교인 속성 제조(速成製造)'와는 근본부터 다른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의
인간의 범죄의 특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구원
얻는 회개는 하나님의 주(主) 되심(lordship)에 귀순(歸順)함(submission)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물론 하나님도 알고 성경도
알고 자기의 죄도 다 알지마는 이 순복(順服)이 없는 고로
오늘날까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남고 또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야 악한 귀신들도 믿고
떠는 판이지만[약 2:19] 단지 이 순복이 없음으로써 귀신이
되어 있는 것인즉,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시인하는 게 대수가 아니고 야고보에서 강조하는
대로 "행함"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이 순복, 순종인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인데
생명에 불복하면 당연히 그것은 죽음이요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봄으로써 나의 지금까지의
반역 즉 불복 행위가 파탄을 맞아 종말을 고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로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주(主,
나를 소유한 주인, 임자)로서의 절대권(絶對權)만을 영입하고
인정하는 자세로 회귀함으로써, 파국을 맞은 내 생명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으로 대체(對替)됨을 보는 것이 구원입니다.
법을 배원 법리적인 두뇌 회전이 민첩한
피니에게 당연한 논리로서의 이같은 결말을 선뜻 수용을
못해 그는 처음에는 번뇌한 것이나, 만물보다 사악하고 부패한
인간 심성[렘 17:9]의 단말마적 몸부림이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이 피니의 회심(回心)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집요해야 하는지를 또한 성찰해
보게도 됩니다. 이런 심령상의 반전(反轉)이라는 거듭 남의
대역전극이 없이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의 명부에 얹히지니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담배, 술 다 하고 각종 해로운 '정과
욕심'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이 되질 못합니다.
세계 교회가 오늘날 타락으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 교역자의 1/3 이상이 자기 교회 여자
집사들과의 온당치 못한 관계에 얽혀 있다고 자탄한 글에
접하고 틴식한 것이 이미 7,80년 대의 일입니다. 지금이야
형편이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더 나아져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기독교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여 아프리까 미개인들이 행하던 주술(呪術) 행위 같은
것에 심취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오히려 강압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던 과거 역사를 참회하는 정도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의 소위 "기독교"는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배척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진리는 이 세상에서 대체적으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정상이기에
그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자처해온 "기독교"도 비정상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 시대를 두고 성경은 예언하기를 한마디로
"배도(背道)"[살후 2:3]로 규정 짓고 있습니다.
피니의 경우에서 우리는 조금 더 세밀히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에 즐기던 산책길을 따라
피니가 처음 숲 속에 들어가 기도하려 할 즈음 '하나님 앞에
부복한 죄인으로서 사람의 이목에 신경이 쓰일 만큼 내가
이다지도 교만한가' 하고 새삼스럽게 놀라면서 자기 영혼의
실상 곧 하나님 앞에 여지없이 드러나는 그 영적 교만 즉
죄성(罪性)을 깨치면서 영혼의 심한 고통 속에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벌거벗은 자기 영혼이 가식없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갈구하는
찰나였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제까지
하나님 믿는다 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고 한 것이 모두
관념상의 '믿음'이요 '지식'이지 그 영혼의 밑 뿌리에서 우러나는
혼신의 '믿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그 숲 속에서
기도하기를 시도할 때 드러나진 것입니다. 이런 가식과 변명의
모든 허울이 벗겨지자 비로소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자기 영혼의 멸망의 위기를 실감하면서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하나님께 긍휼과 구원을 갈망하며 부르짖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아니 들어주실 리 없는 것은
우리의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영혼이 귀의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데에 피니의 번뇌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
그 영혼이 좀체로 순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고 이 사실을
그 자신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고뇌가 컸으며 그런 견딜
수 없는 절박감에서 그렇게 그 날을 택하여 기도를 시도한
것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즉 자기 영혼에
대한 위기감이 현실적으로 그 심령 깊이 와 닿아 뿌리째 뒤집어
놓아야 하는데 좀체로 그렇게 안된다는 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죄의식이 없으니 자연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왜냐면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6:44,65].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우리 영혼은 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위기의식은 말하자면 장차 전개될
멸망의 고통을 앞당겨 맛 봄이라기보다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있는 내 영혼의 상태가 실제 얼마나 가증스러운가를 스스로
실감하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
나의 심성이 얼마나 죄스러운가를 절실히 통감하는 가책인
것입니다. 이 양심의 가책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것과 끝까지
듣지 않는 그 차이입니다. 그런 가책이 없는 사람은 왜 없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내가 그 가책을 받을 때 즉각
회개하여 응분의 결단을 내리는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단
이 가책은 가룟 유다가 느낀 유형과는 다릅니다.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가책은 내가 저지르는 일로 인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멸망에 이르는 유다 형의
가책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느끼는 자기 자신의 고통밖에
모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대수가 아니고 자기중심의
죄와 악을 깨닫고 그 "악함을 버리겠다는"[행 3:26]
의지가 중요하니,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이라도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입니다. 양심적이라고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 먼저 회개하여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할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내
죄가 하나님을 그와 같이 찌름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다시 자기중심으로 나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할 때는 "하나님
아들을 밟는"[히 10:29]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6:6]이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지금까지의
나의 불순종과 반역의 결과가 바로 그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바가 그런 광경이므로 그 사실이
내 영혼을 찔러 거꾸러뜨리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진정 곧이 곧대로 보는 것이 내 앞에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내 죄가 용서되었나보다 하는 식으로 수긍만
해보아야 그 사실이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영혼이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피니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날이 갈수록 그의 죄책감은 더해간 것입니다. 엄마의 매를
피하려고 앙탈 부리다가 울면서 엄마 앞으로 나아오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께 대한 무서운
반역아의 길로 영구히 뻗나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양단간의
기로에 서 있음을 그 영혼은 간파한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순복의 길을 최종적으로 택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결단이요 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분기점에서,
그대로 지금까지의 내 주장, 내 기호, 내 의사를 앞세워 내처
달리느냐 아니면 완전히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영원히 모시느냐 하는 단 한 번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우리의 자진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기다리시므로 어떤 이에게는 그 과정과
행로(行路)가 뼈아프게 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상대적으로
짧기도 하나 거쳐야 하는 그 순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내용입니다.
일련의 지식이 있는 것은 좋습니다.
필요합니다. 피니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
정도로만 끝내서는 안되고 그 지식으로 영혼의 일대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으로써만 머물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데에서 오늘의 각종 비극이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믿고' 또는 '마음으로 믿고' 따위의 조어(造語)가 생기지만
"믿음"이란 오직 단 하나뿐입니다. '믿지 않음'과 '믿음',
이 두 가지 갈래뿐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믿음", 아니
성경이 아니더라도 상식적 측면에서도 '믿음'은 '행동'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므로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는 무조건의 순종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성품을
기초로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이란 것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그래서 100% 믿을 수 있으니까
100%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시화하고 입증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100% 순종에서 단 0.01%라도 유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불순종이지 순종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닌 것이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요 구원의 기쁨도
물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순종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여긴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요 인간
상식으로써도 전혀 통할 수 없는 "말의 혼잡"만 됩니다[고후
2:17]. '머리로 믿는...운운' 따위의 말 장난입니다. 100%의 순종이라는
말에 적이 놀라는 이가 있다면 그의 지금까지의 경력이 어떠했건
간에 (즉 수십 년 믿고 신학박사라는 학위가 있고 교역자라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순종에서 그 보조 역할
또는 배경이 되어 있는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세상이 그렇게 심판 받은
것을 보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인생이 사는 이
세상이라 내가 저렇게 십자가에 처단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 곧 세상 자체가 송두리째 저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결딴 남을 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의 삶만 아니라 세상 자체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질이 바로 나의 죄의 삶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 생명"[롬 6:4]으로 살게 된 마당에
세상은 이미 나의 정과 욕심과 더불어 십자가에 영원히 못박혀버린
것입니다[갈 2:20/5:24]. 고로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연고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즉 과거에 세상을 사랑했던 사랑이 지금은
내가 다시 이 십자가의 의미를 부인하여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된 죽음을 허투로 돌리지 않는 한, 마치
서로 죽은 자를 대하듯 하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 둘은 서로 양립하거나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가 살면 다른 하나는 죽음입니다.
내가 살면 세상은 죽었고 내게 대하여 세상이 여전히
매력적이고 살 만한 것으로 나타나면 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세상을 사랑함은 과거의 나의 죄의 삶을 다시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보는 눈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보지 않고는
그 십자가를 봄으로써 얻어지는 당연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수박 겉 핥기로 보고 "나는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서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니 곧 성령의
선물을 받는 순간 이 세상에 보내심이 되어 임무/사명 완수에
돌입하는 것입니다[요 20:21]. 다름 아닌 이웃을 과거 나와
똑같은 그 위험에서 건지고 현재의 나와 똑같은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 동역(同役)함입니다[고후 6:1].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유요 목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그제야 세상 끝이 오리라 하신
대로, 복음이 아직 땅 끝까지 전파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잖으면
벌써 끝났을 이 세상입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도록
기다리시느라고 세상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이지. 이 세상
잘 먹고 잘 살아보라고 지금까지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방치해두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세상 사람은 몰라서 이 세상이 몇 백 천 년은 갈 줄 아는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이 이런 세상사람들의
부질없는 망상에 맞장구치며 더불어 살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피니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두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니가 처음 몸담고 있던 교회가 장로교였는데 뒷날 피니는
장로교의 지나친 칼빈주의 사상을 경계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중심으로 주로 비평하는
내용들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써 복음활동에 서광을
비쳐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역시 그 내용에는 성경상으로
비판할 여지가 더러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당시의 그릇된 인식과 관념을 깨뜨리고 성경에 입각하여
새 생명운동을 함에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인 갖가지 선입견이나 잘못된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는 있다 할지 모르나,
성경적으로 완벽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이미 그런 판단 기준을 설정해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얼마만큼 주님을 사랑하느냐, 즉
살아도 주님을 위해 죽어도 주님을 위하는 일념으로 사는
새 피조물이 되어 있느냐의 여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
사실만이 확실하면 나머지는 절로 풀려지고 문제 삼을 일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형제로서 굳은 악수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순종을 강조하다보면 은혜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고 우려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의할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사물에 접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분 부분으로만 뜯어 보면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필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붙들고 다른
측면에서의 관점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 '옳음'도 '그름'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비판하기 앞서 스스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는 성경 애독자가
되어 있는 바탕을 갖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기본조건이 됩니다.
그런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남은
물론 자기도 진리에 머물 수 없고 언제든 오류에 함몰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성경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섣불리 마음 놓고 읽으려고 달려들어서는 안되는 그런 어려운
책인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오해입니다. 제각기
자기 욕심을 따라 읽게 되면 빗나가기 쉬우나 참으로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접근하면 절대로 읽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말씀이 아님을 단정하고 단언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부지런히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심정이어야 한다는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는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진리를 밝혀주시는데[눅
10:21] 스스로 어린 아이가 되지 못한 탓에서 각종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마 18: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것으로 그 뜻을 전달하시지 않으며 그렇게 하실 필요도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 항상 걸림이
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교만 때문이요 에덴낙원에서의 인간[아담] 범죄도 결국 따지고
보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취급하는 그런 자세요 마음입니다. 사랑에는 그런
마음은 그야말로 암적 존재입니다. 치명적입니다. 이 말은
그 본질이 사랑으로서 사랑에 관한 일일 때 참으로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그런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엄중한 경고로 직결됩니다. 이 경우 항상 양면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한 격려면 격려이고 경고로
여기면 경고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으로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함이[벧전 1:8,9] '원인'이 되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바탕 위에서 그 기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된 자에게만 주시는 경고가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니,
구원을 모르는 이들에게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써 마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이기라고 하는 무의미한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찰즈 피니의 남다른 점은 논리를 중시하는
법학도로서 처음부터 성경을 직접 읽고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린 데에 있으니, 그 결론이 기존
교회 교리에 상반될 때 이를 과감히 버리고 성경 말씀에 최종
권위를 두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혹
외곬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고착화시킬 위험이 있는 그런
인간적 편견에 우리 역시 사로잡히기 쉬운데, 이에 물들지
않고 그런 선입견 없이 오직 성경에 의거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확신하고 다른 각도로 또는 모든 각도로 문제를 살펴 그 온전한
의미를 알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높이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능력으로
가르쳤으나 그런 능력에다 일체의 권위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직접 찾고자 했던 베뢰아 사람들의 지혜를
성경이 칭찬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지혜가 시급히 요망되는
오늘날 찰즈 피니는 실로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우리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위엄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조심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게
되는데, 사랑이라고 하면 그런 마음이 풀리고 느슨해지는
그런 좋지 못한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일수록 그런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스스로 가다듬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무엇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사랑을
업신여기고 마음의 고삐를
풀어놓는 우리 자신이 문제로서 이 스스로의 마음을 채찍질하고
다스리고 조종하고 제대로 운전하는 노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 분명히 아로새겨 두어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도
그런 흐트러진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해서 결코 지나친
말일 수가 없습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에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하며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첫째도 대한독립이요,
둘째도 대한독립이요, 셋째도 대한독립이라고 하던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첫째도 기도와 전도요, 둘째도 그렇고
셋째도 기도와 전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아웃에게
또 깨우쳐주고, 또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자나깨나
우리의 할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마 7:21]이요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구원은 사랑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랑이 그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고 기도한다면서 그 와중에
혹시라도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멸시하고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기 모순이 되어버려 비록 그런
모든 전도와 기도의 수고라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나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바로 세우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22].
주님의 일이 내 일이요, 아버지의
사업이 내 사업인데, 가령 내가 그토록 십자가 상에서 죽는
고통을 당하며 세상을 위해 죽어주었다 친다면 내가 그런
다음 부활하여 지금 살아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대관절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사람 구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 유일무이한 나의 여생 사업이 아니겠습니까.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요,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항상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한 몸의 구조에서 이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없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머리로서
우리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뜻을 알아 주님의 그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각 '지체'로 남아 있는 우리 각 사람의
임무는 '머리'가 지시하시는 일을 받아 수행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것임은 재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지체된 위치에서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그 몸으로서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이므로 우리가 이 사람 살리고 건져 올리는
(당시 주님이 비유하신 것은 하나씩 낚시질하는 게 아니라
그물을 던져 건져 올리는 고기잡이)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몸(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우리 모두는 그 몸을 이룬)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필요불가결한 그야말로 필수적인 사업인
것입니다.
완전무결한 아름다운 몸의 영광 그런
훌륭한 작품을 장차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인의 피땀어리는
혼신의 작품 활동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건져내는 또는
그 일에 일익을 담당한 그 모든 영혼, 영혼들이 다 나와 같은
지체가 될진대 그들 모두가 이 아름다운 몸을 조성하는 하나하나의
불가결한 요소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체제에서는 거짓
없는 진실 그대로입니다. 영원을 두고도 그 가치가 빛날 일,
과업, 임무를 지금 우리는 머리되시는 주님과 더불어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를 위하여 성령의
인도로 본을 보여 천막 치는 업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처럼,
"선한 직업"을 가져 일을 하되 그 목적이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빈궁한 이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엡 4:28)입니다. 여기서 '도둑질'은
'선하지 못한' 일의 표본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로서 의미가 불명료한데
영역으로는 'working with his hands what is good'으로서 도둑질 같은
나쁜 일에 종사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종사하여' 돈을
번 후에 그러한 목적에 그 돈을 쓰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물론 부양해야 하지마는 언제나
그 궁극적 목표는 남을 위해 쓰는 것으로서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불선(不善)한 일에 종사하더라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벌어 일부를 교회에만 갖다 바치면 그 모든 죄와 악이 상쇄된다는
그런 종교인이 품는 생각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구제'가
구극적 목표가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대로 첫째도 기도와
전도, 둘째도 기도와 전도, 셋째도 그러한 삶의 일환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즉 영혼들 건져 올리는 사람 어부(漁夫)의
일입니다.
앞에서 무디와 피니의 체험을 소개하는
것은 사람마다 그런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자리잡아 계시는지 실상대로 그 모습을 우리가 뵐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과연 지금처럼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말한 것입니다.
피니가 그 때(무디나 피니 역시 그 때 외에는 그런 체험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그 때 당시 한 번 그렇게
영적으로 주님을 '뵌' 일이 있는 것으로 믿어짐) 주님을 대면하여
뵙고 그 희열의 황홀경을 감당치 못했던(미쳐 숨 넘어 갈
정도로 견딜 수 없었던) 바로 그 모습, 그 사랑으로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그리스도인]와 함께 성령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요 20:29)"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 피니와 무디는 이미 그렇게 주님을 "뵙기"
전에 그 영혼은 완전히 "주께 붙어 있는" 영적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뵐 수 있다면 더 강한 믿음이 절로
생겨날 수 있을텐데' 하는 것은 억지요 무리입니다. '보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그렇게 주님을 늘 뵙는 것처럼 신앙생활하는
것이 더 '복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주님을 뵌
것처럼 이들 두 믿음의 선배들이 '뵙고' 소개한 그들의 간증을
바로 내 것으로 내가 그렇게 친히 뵌 것처럼 소화시키는 바로
그런 믿음이 우리에겐 더 필요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요 14:21]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각도로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욥은 그 고난 중에서
주님을 "이제까지 귀로만 듣다가 지금은 직접 뵙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시므로 혹자 억지 해석으로 무리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해서 덧붙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기에 남자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는 세상에서의 부활된 신령한 몸은 이같은 남녀가 구별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서 따로 만드시지 않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아담을 지으신 후 그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드심으로써 아담의 몸을 재조정해 주신 것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나의 몸'으로서 즉 '내 이름으로 계시는
몸'으로서 신령한 몸으로 하늘에 앉히셨으므로, 성령으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선물'로서의 주님의 모습
역시 그런 '신령한 몸'으로서의 위치에 계시는 모습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남자라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여자라
할 것도 없이 그냥 애초 창조 당시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따라서
여자다운-육신의 인간으로 말하자면) 그러나 남자다운 모습이었던
아담과 같으십니다.
더군다나 "신령한 몸"으로
계시니 그 모습이 또 그렇게 아름다워 시편에 "모든 인간보다도
더 아름다우시다"라고 성령으로 말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중성(中性)이 아니라 무성(無性)입니다.
남성은 여성의 보완이 필요하고 여성은 또 남성의 보완이
필요하여 자연 한 몸이 되는 과정을 따른다면 '신령한 몸'은
그런 보완이 필요 없는 완전무결성(完全無缺性)이라고 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일언이폐지하여 우리는 주님께 '어버이
품속에 있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몇 가지 칭호를 나열하면서 "영원하신 아버지"시라
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황송하게도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시게 됨을 인하여 우리가 주님의
아우들이 되고 친구가 되고 전체적인 교회로서의 집합체로서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를 전체적으로 이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똑똑히 이해
못하여 어떤 이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그리스도도 되시고
아버지도 되시고 성령도 되시고 하는 등의 해석으로 중구난방이요
갈팡질팡 했으나 지금은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몰이해 속에서 심지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닌 그냥
사람이지 않았나 의심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음력
사월 초파일에 불교도들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이름
지어 부르므로 불신자들까지 "부처님"이라고 최대의
경어로 불러주어 언론매체에서의 선전이 여간 아닙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거저 밋밋하게
멋없는 외래어로 "크리스마스", 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 도대체 어느 누구에게서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
그 어감과 의미와 선전효과가 하늘 땅 차이입니다. 이 땅의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놓은 자업자득입니다.
하나는 인도에서, 하나는 팔레스틴에서 둘 다 국외에서 전파되어
왔건만 하나는 토속종교처럼, 한국의 고유종교처럼 인식되고
하나는 언제나 외래종교로만 인식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역사가 길고 짧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의 질(質) 문제입니다. 불교는
그 가르침을 공손히 정성을 다해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위하는
이들이 많은데 비해 성경을 믿고 따르는 이는 양(量)은 많아
숫자는 자랑할지라도 질적인 면으로는 상대적으로 극소수인
까닭입니다. 성경 기록에 "예수께서..운운" 했다고,
교역자란 이들이 평소 일상 대화에서도 "예수가..운운"
합니다.
성경은 역사서의 형태를 취하므로 그렇게 기록되었다
해서 흠 될 것은 없다 치더라도, 또 그런 공대어가 우리처럼
엄격하지 않아 그렇게 기록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가 그냥
그대로 직역해 놓은 것을, 우리말처럼 경어, 비어, 존칭어
등 말의 구별이 엄격한 나라도 드문데, '예수님'이라고 "님"자
하나 제대로 붙이지 않는 소위 교역자들이 많은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교역자가 그러니 일반 교인들은 그대로 따라
합니다.
"예수님"이란 말이 싫거든
아예 "주님"이란 말로 통일하고 "예수, 운운"은
입밖에도 내지 말 일입니다.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이름 석자를
함부로 부를 수 있습니까. 대관절 한국 교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만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까마득히 하늘에만 계셔서 우리의 주절거리는 말버릇은 모르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우리 앞에 항상 함께 계시는
만유의 주, 만왕의 왕으로 믿는 것입니까.
우리의 언어행사가 우리 마음을 나타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롬
10:10]. 대체적으로 우리는 마음으로도 입으로도 믿지 않는
것만을 골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는 마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우리가 고백하는 말로써 구원을 얻을진대
우리가 쓰는 제대로 된 말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일이
아닙니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영적 상태기 이로써 여실히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바꿀 것이 아니라 마음부터 바꿀
일입니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내 마음 가운데 좌정해 계심을 의식하면서
도저히 그런 말버릇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
"영생", "구원"이란 잔치 집 음식만 욕심 내어
입만 가지고 달려들어 의당히 "배부르게 먹을 줄 믿고"
태평으로 앉았다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허물로 "천국"이란
대궐 집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심령들입니다.
"예수! 천당!" 하면서 전도를
하던 김익두 목사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위한 구호이니만큼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끼리의 또는 일반인과의 대화에서는
전혀 문제가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칭호일지라도 '예수'는
엄연히 이름인 것입니다. 한국어와 같은 엄격한 '말의 뉘앙스'가
없는 구미인이 쓰는 "Jesus"는 그들 나름대로의 각별한
의미와 존경과 사랑을 담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문자를
쓰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다 할지언정 엄연히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언어생활하는 한국인입니다.
구미인 역시 그렇게 자기네 나름대로의
'애칭'으로만 부를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의 표현 방식인 "Lord
Jesus"라든가 "Jesus our Lord"이라 해야 옳습니다. 마치
자기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 중 하나인 양 하는 것은 비성경적임은
고사하고 말에도 뼈가 있듯이 그런 태도가 미구에는 자기
영혼에게도 보이지 않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홀로 외롭게 사는 과부된 이들에게 "예수님을
신랑 삼고..운운"하는 말도 아예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음 말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피니가 체험한 성령의 세례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후 피니의 자서전에 의하면 피니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하여
별도의 체험을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누누이
강조하며 기록하고 있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대한 재인식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위엄 앞에서 피니의
마음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마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궤계(詭計,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사악한
시대입니다. 무신론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무슨 못믿을 만한 근거라도 있어서 세상이
무신론이라는 미신(迷信)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들어낸 속임수인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가장 먼저 맛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위로와 주님의 두려우심"[행
9:31]이라는 두 레일 위를 달려나간 열차였기에 왕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랑의 레일만 있고
주의 두려우심이 없는 외가닥 철길인 고로 교회는 타락하고
침체하고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피니의 체험이 진실로 성령으로
난 체험일진대 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산 체험이 없을 수
없는 것이었음은 당연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의 경고가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실종되어 버린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끝으로 피니의 회개에는 그가 다니던
교회에 한 젊은이들 그룹이 있어(그 중에는 장차 피니의 아내가
될 사람도 끼어 있었음) 피니의 회개를 위하여 일심으로 합심
기도한 결과였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피니의 강력한
전도 활동 배후에는 다니엘 내쉬[Daniel Nash 혹은 "Father"
Nash")같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피니가 집회를 시작하기 전 또는 집회
도중에 다니엘 내쉬(그는 교회를 담임한 바도 있는 목회자였으나
심각한 안질을 앓고 있던 중 자기의 영적 상태에 대해 회개하고
크게 깨달은바 있어 피니의 전반기 활동기 몇 년간 오로지
피니의 집회를 위한 기도에만 전념하다가 기도 중에 숨을
거둔 50대의 영적 거인이었음)는 피니의 집회를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하여 피니의 집회에 나타난 능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피니의 강력한 능력의 집회에는
빼놓을 수 없는 성령의 역사의 원천이었던 것이니 이 또한
피니의 모든 집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피니의 부흥 역사의
영향력은 150년이 지나도 그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서부개척시대 환락의 도가니였던 뉴욕주
로체스터시(市)는 반세기간 두 번씩이나 "박애주의의
천국"이라는 명칭을 얻어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미국도시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고 있다. 뉴욕주 로체스터시는 인구 23만여의
소도시지만 피니의 강력한 부흥역사가 일어났던 당시의 복음
역사의 중심지였다. 그 감화가 그대로 있어 연속해서 미국의
가장 친절한 도시, 사랑이 많은 도시로 남아 있음은 결코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어디 도시뿐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사람 삶의 개혁이야말로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세계를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됨을 이로써 웅변으로
증명함이 아닌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 (1994년 9월호)에 실린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실으면 다음과 같다. 제목은 "미국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 로체스터"이다. 그 부제로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뉴욕주 로체스터시는 반세기동안
두 번씩이나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미국 도시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서부개척시대에 환락에 물들었던 로체스터시가
박애주의의 천국으로 부활하게 된 내력을 소개한 것".
존 S 톰킨스가 쓰고 한국판 다이제스트사가
번역한 내용인데 유의할 것은 이 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소양이 없는 순수하게 제삼자로서의 객관적 입장에서 쓴
불신자의 글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내가 뉴욕주 로체스터의 오래된 우아한 시청
건물에서 막 나오는데 한 젊은 여자가 다가오더니 버스요금을
내려고 그러니 10달러를 잔돈으로 바꿔 줄 수 없겠느냐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뉴욕시에서는 젊은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잔돈 바꿔 달라고 접근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요구를 받은
사람 역시 미심쩍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로체스터시에서는 다르다.
흔히 일어난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잔돈을 바꿔주었다. 미국의
여러 유명기업 본사들이 있고 인구가 23만 1000명의 이 온타리오
호반의 도시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점잖았던 과거 시절의
미국을 상징하는 도시다. 은행예금용 봉투를 우체통에 실수로
집어 넣은 얼빠진 한 시민에게 그 봉투를 되찾아준 우체국
직원이 있는가 하면, 폐허가 된 집을 고치려고 수년간 노력해온
이웃주민에게 불 타 부서진 지붕을 보수도 받지 않고 새로
덮어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한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인형을 떨어뜨리고
슬퍼하는 세 살 박이 아기에게 인형을 찾아다 준 트럭 운전사도
있었다. 로체스터시는 50년 간격으로 행해진 두 차례의 이색적인
연구에서 미국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로 꼽혔다. 최근의 연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프레스도에 있는] 심리학과의 로버트
러빈 교수에 의해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행해졌다. 러빈과
그 학생들은 미국 36개 도시를 대상으로 어디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인지를 조사한 것이다.
"조사의 일환으로 학생들은 우연히
길에 무엇을 떨어뜨린 것처럼 꾸미기도 하고, 잔돈이 필요한
체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맹인 또는 절름발이 행세를 하기도
했다. 자기 일을 멈추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로체스터시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미시건주 이스트랜싱과 테네시주
내슈빌이 두번째와 세번째였고 36개 도시 중 제일 불친절한
도시는 뉴욕시였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1940년의 조사 자료에서도
이번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 43개도시의
특징을 조사한 것인데 로체스터 시민들은 애타주의(愛他主義)
부문에서 1위로 기록되었다.
"나는 로체스터시에 직접 가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로체스터시가
세워진 초창기의 사건들에서 그 당시의 한 용기 있고 단호한
인물이 로체스터를 그렇게 인심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네시강이 몇 개의 폭포를 이루어 흐르는
지역 근처에 로체스터시를 세운 사람은 나다니엘 로체스터였다.
첫 이주자가 도착한 것은 1812년이었고 이로부터 10년 조금
지나면서부터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25년에 이이리 운하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이제 서부로 통하는
관문이 된 로체스터시는 선술집과 단기간 머물다 가는 여행자들로
소란한 도시가 된다. 1829년11월 13일 금요일, 샘 패치라는 한
무모한 곡예사가 자신도 모르게 로체스터시를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는 촉매가 된다.
당시 나이애가라 폭포에 늘어뜨린 밧줄 사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극적인 묘기로 유명해진 패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체스터시에
들르게 되었다. 로체스터시에서 그는 높이 36.5미터의 제네시강
폭포에서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겠다고 호언한
것이다.
"패치가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날, 강가에는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패치는
이번 점프에서는 몸의 균형을 잃고 미친 듯이 팔을 내저으며
추락하여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강물 속에 처박히는
죽음의 길이었다. 몇 분이 지나도 그는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패치는 이듬해 봄 얼음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음).
제정신으로 돌아온 군중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없이 그 날
비극의 현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 후, 로체스터시의
지도적인 기업인 중의 한 사람인 조시아 비슬은 제3장로교회에서
예배 중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
자리에 참석함으로써 패치가 생명을 잃도록 간접적으로 교사(敎唆)한
셈이 되는 많은 이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그 마땅한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순간 교회는 침묵 속에 잠겼고 어떤
사람들은 흐느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고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경각심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확신한 비슬은 로체스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부흥전도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찰즈 피니 목사를 로체스터로 초빙해 정기
부흥전도회를 열기로 했다.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뜨리는
듯한 눈매와 위압적인 목소리에다 키 크고 잘 생긴 피니 목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무신론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성난
폭도들을 침묵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체스터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걸을 수 있는 사람이면 거의 모두 피니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로 몰려드는 판이었다. 피니 목사는 거의 매일 설교를
하거나 기도회를 열었다. 로체스터에 있는 대부분의 상점들은
휴업했고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선술집도 손님이 거의 없어
문을 닫았다. 피니는 로체스터에 6개월간 머물면서 수백 명의
주민들-법률가, 의사, 판사, 상인, 은행가, 선원, 노동자 등을
회개시켜 기독교도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피니 목사는 그들의 마비된 양심을
꾸짖었으며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 생활방식을 따르지 말라고
촉구했다. 피니는 이기심의 죄악을 성난 목소리로 비난하고,
이러한 설교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들을 노골적으로 질타했다.
피니 목사는 로체스터의 상류사회 여성들을 도시 곳곳에
보내 그의 설교를 듣도록 설득하여 집회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부자들을 회개시킨 피니 목사의 마지막 목표는 부자들의
에너지와 재산을 유익한 자선사업에 쓰게 하는 것이었다.
"피니 목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로체스터에는 교회 설립 붐이 일어났고 로체스터시민들은
대학을 설립하고, 자선 및 자립 갱생 단체를 조직했으며,
공립학교 제도를 만들었고, 노예제도와 싸웠으며, 로체스터는
노예를 캐나다로 탈출시키는 비밀조직인 '지하철도'의 '중간역'이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수형(受刑) 제도를 개혁했다. 로체스터는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도시로
변모했다.
"'찰즈 피니의 부흥회는 로체스터를
변화시키는 분수령이 되었지요' 하고 '열린 문 전도단'의
케네스 S. 폭스 목사는 말한다. 피니 목사의 강력한 가르침은
아주 다양한 경로로 후손에게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에 아직도
로체스터에서는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고 폭스 목사는
믿고 있다. 피니의 설교를 들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목사와 주일학교 선생들은 다른 신도와 어린이들에게 피니의
가르침을 전달했다. 로체스터 시민들은 대를 이어 가며 그
고장에 눌러 살면서 피니 목사의 가르침을 전했던 것이다.
"이스트먼 코닥사(社)의 설립자
조지 이스트먼은 피니가 1856년에 로체스터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두 살이었다. 그러나 이스트먼이 성장해서 사진
관련 사업을 시작할 당시 로체스터에는 찰즈 피니의 사회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중요 지도자들이 아직 많이 생존해 있었다.
이스트먼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부자들의 책임 중 하나이며,
기업의 성공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의 다른
기업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시의 여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육, 문화 및 사회봉사 프로그램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로체스터는 "조지 이스터먼의 도시"라고까지
불리었다. 이스트먼은 1919년에는 자선사업을 위한 공동모금
운동단체인 '커뮤니티 체스트'[Community Chest]-지금은 '유나이티드
웨이 오브 그레이터 로체스터'[United Way of Greater Rochester]라고
불린다-를 이끌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찰즈 피니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의 가르침과 다른 사람을 돕는 로체스터의
전통은 계속 남아 있다. 1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볼 때 로체스터
서민들은 같은 규모의 '유나이티드 웨이'가 있는 어떤 다른
도시 주민들보다 '유나이티드 웨이'에 더 많은 기부금을 낸다.
이 기록은 적어도 최근 2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로체스터에는
250개 이상의 비영리 자선단체가 있어서 여러 가지 불우 이웃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시각장애자들에게 봉사하는 조직이
13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조직이 36개에 이른다.
무료 변론을 지원하는 변호사도 뉴욕주의 어떤 군(郡, county)보다
로체스터시가 속해 있는 먼로 군에 더 많다. '로체스터시에는
서로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폭스 목사의 말이다. 로체스터시는 작은 문제에서나
큰 문제에서나 서로 돕는다는 황금률을 지키고 있다.
"로체스터시는 기업가, 의사 및
병원 측이 협력해서 독자적인 의료보험체계를 확립했으며,
미국 전체 평균보다 훨씬 낮은 근로자 1인당 비용 부담으로
미국 전체 평균보다 훨씬 많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많은 공립학교들이 "가치 중립적" 교육을
수용했을 때도 로체스터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친절과
이타심, 공익을 추구할 의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심"을
강조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19가지 다른 덕목을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해리 라이스는 '이곳 사람들은 가족의 중요성을 이야기해도
비웃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로체스터를 떠나려고 할 때
나는 이스트먼 코닥사의 최고 경영책임자가 회사의 핵심사업본부를
워싱턴으로 옮기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결정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이 미국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겠는가."
그렇다. 이런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복음 운동이요 활동의 결실이다. 죽고 나서 천국에만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그런 자기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생하는
자로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올바른 삶, 창조 당시부터 설정되어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일상 생활인 것이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
아닌가. 이 로체스터시와 같은 그런 결과를 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전에 도둑질하던 이도
이제는 구제를 목적으로 선한 직업을 가지라 했으니 배운
것이 도둑질인데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데도 성경이 이런
명령을 하니 말 다한 것 아닌가[엡 4:28].
지금까지 우리는 찰즈 피니의 전도자적
활동만을 소개해 왔다. 실상 그 외에는 소개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세상에 알리고
있는 이야기는 참으로 보물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활동이 인간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파급 효과를
내는지 살펴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 기사의 필자가 그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사를 낸 리더스
다이제스토 사에도 감사할 일이다.
이런 맥락으로 우리가 벌이는 운동이
있으니 삼환(三環) 법칙에 근거하는 '삼(森) 사회복지 사업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재물을 붙들고 아등바등 애쓰며 이 세상에서도 잘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탐욕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세상 삶은
깨끗이 양보하고 고해(苦海), 사해(死海), 누해(淚海)인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육체적 고통이라도 좀 덜어주어 영생하는
사람 사는 법도를 힘써 가르치며 몸소 실천해 보이려는
그 노력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어느 겨를에 이 세상에 연연하여 자기
한 몸 보신하기에 정신이 팔려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는가. 그렇게 하시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판단력 어느 곳에 구멍이 뚫려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무슨 대단한 가르침도 아니고 색다른 교훈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식, 양식, 양심 차원에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당신의 이성과 지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과는 달리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제로는 전연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설명은
이 하나뿐임을 명심하시라.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지 말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중심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살 때에는 자기를 중심하여 살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 한국 사람은 미국에 가도 러시아, 중국에 가도 한국
말을 하는 한국인인 것과 같이 생명이 법질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곳은 자기중심으로 나대야 밑지지
않게 보란 듯이 살 수 있는[그것도 극소소이지만] 그런 죽음과
죄악의 단지 시험하는 곳을 뿐이다. 시험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지 그 여부를 다루어본다는 의미도 포함된다[눅
4:5-7].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면 기필코 멸망인 것이다[요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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