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만 탐하는 경우 필연코 영멸에 들어간다
자유인(고전 9:1)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서의 구원이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할 이심이다"(마 1:21). 우리의 구원이 영생
얻는 데에 있지 않으니 즉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함과 같다.
"회개하여 영생을 얻으라"가 아니다. "영생"에만
집중시키고 있으니, 이는 아주 잘못된 접근법이다. 순서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죄를 씻고(22:16) 즉 죄 용서가
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즉 "순종하기로"(행
5:32) 하는 전제하에서(약속에서) (우리의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어주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거룩함을
이루니 그 열매가 영생(롬 6:22)이다.
이와 같은 죄의 척결은 없이 영생부터 얻는
것으로 가르쳐 온 것이 사탄의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고후 11:4) 중의 하나이다. 죄가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을 총칭함이다. 거룩함이 곧
자기 부인이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는 근거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이시니(갈 2:20)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신다는 토대가
확고하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위해 살거나 죽거나 하지 않는(고후 5:15/롬 14:7)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 새로 이루어진
새 생명의 기반으로서 성령께서 오심으로 즉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내 안에 사심으로써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상태>(히 10:10/요 17:19)에서 나는 스스로 이 상태를
유지해 가는 것이니 유지하는 것이야 내 책임이요 내가
할 일이요 또 할 수 있는 일이지 그 어느 누구도 해주는 성격의 일이
아니다. 이것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이다. 즉 계속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을 하라는 것이니(눅 9:23)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히 12:14/고후 7:1)고 명령하심과 같다.
즉 구원받음은 죽은 자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산 자의 영역으로 진입함이니 때문에 다시 출생함이요 새로
창조됨이다. 산 자가 되었으니 영생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생명의 성경적 의미는 영생인 것이니 원래 영생하는 자로
아담이 창조되었기 때문. 그래서 이 기본 사실부터 바로 알아야
하는 것. 영생하는 자가 영생을 못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이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자연계의 생물이 자기 종족 보전을 위해 기계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본능적인 좋고 나쁨의 식별력인 것. 즉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계 생물체가 된다는 경고이신
것이다.
고로 믿을 때 회개가 먼저 오는 것처럼 즉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영생 얻음(성령 받음과 동의어)이
가능한 것처럼 산 자(구원받음으로써 된)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당히 순종. 머리에게 몸(의 각 지체로서의)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순종"이라 하는 것. 고로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몸과 머리 관계에서 오는 "둘이 하나됨"일진대, 이
순종 곧 몸이 머리를 위함은 생명의 필수 요건. 몸으로서
머리만 위하지 않도록 사탄이 부채질한 것이 동물적 본능적인
지연계 생물체에만 정상적인 것으로 통하는 자아중심이었던
것. 그러나 이성과 지성이 있어 자유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인생에게는 통하지 않는, 곧바로 죽음에의 지름길인 것이다.
생존(영원히 사니까)에 필요한 모든 지혜,
지식은 아담(인간)에게는 그를 보좌하는 영물(미가엘, 가브리엘,
사탄[본명이 아닌 "인간에게 적대자"란 뜻의 별명]
등)들의 임무였던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6일 창조물(스랍과 그룹은 6일 창조 이전의 피조물들이므로
여기서 제외)을 다스리는 머리로서의 아담을 위해 창조된
것인데, 이는 일방적으로 쏠리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 되어
평등하도록 평균되도록 하시는 배려에서였던 것.
그래서 사탄은 여러 보좌역들에게 좋은 것(선)과
나쁜 것(악)을 일일이 물어서(지식 면에서는 아담보다 한
수 위니까) 다스리는 구차한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처럼(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영물들보다 높은 "그들의 머리"로서의
아담의 위상답게) 선과 악을 스스로 알아 처리하는 것이 과연
통치자다운 면모가 아니겠느냐 하고 자아중심의 허영심을
부채질한 것이다. 자아중심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연계
생물의 본능적인 것과 사탄, 아담 또는 그룹 중 하나의 범죄처럼
스스로 자유 의지에 따라 자기 부인의 생명의 지혜를 버림이다.
자기 부인을 어리석게 보는 교만 때문에 그렇게 된다.
전자를 가리켜 성경에서는 설명상 "육신"이라
하는 것이며 로마서 7장에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나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영(아버지와 하나되시어
성령으로)께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가 되심으로써 그
죽으심으로 문자 그대로 죽음을 맞아 파괴되었지만(롬 6:6),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므로(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이 나와 하나되시어 나를 위해 내 이름으로
하시는 의미인즉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실 때 그리스도와
하나된 나 역시 세상에 임하되 자연계 몸으로 세상에 다시
오는 격이 되는 것) 자연계 몸은 그대로 있는 상태.
그러나 과거 육신에 매여 "오호라 이 죽을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내랴"(롬 7:24) 하던 그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니 그 육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죽었고
다시 육신을 새로 받은 의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인간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태어나 오신 것과 같은 양상이
된다(요 20:21,22). 고로 이 경우 내가 만일 자아중심이 되어
후자에 해당된다면 즉 아담이나 영물인 사탄이 범죄한 것처럼
된다면, 전자로 물론 분류될 수는 없고 단지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몸 가운데 있는 이상 이 <자연계 몸의 본능을 통한
자아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한 육신의
파괴(멸해짐, to be destroyedㅡ롬 6:6)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이
끈덕지게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특색인 자연계 육체에 있기 때문에(이러한 구차하기
짝이 없는 육체는 당연히 살라는, 삶을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 살리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주님 위해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기 위함이 유일한 의미요 목적일
수밖에) 자아중심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도 이러한
육신을 따름이기 때문에 일어나므로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믿기 전의 과거처럼 육신의 지배를
받아 자아중심이 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여전히 육신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이제는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 육체의 고유한 본질이 되어 있는 자아중심에
동조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육신에게 져서
그 지배를 받아 죄와 사망의 법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니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 이미 거기로부터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함께 사시는
"둘의 하나됨"으로써 자유 해방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롬 8:2).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에 계셨지만
죄가 없으신 이치와 똑같은 것. 죄를 짓는 것은 내 스스로
선택하여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되는 것으로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고의적인 즉 짐짓 짓는 범죄는 영원히 용서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히 6:6/10:26).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아주 잘못 배워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고 생각해온 사람은 지금 이 성경의 가르침 앞에서
"내가 혹 "고의적 범죄"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직 한번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구원 받았노라고 우길
경우 그리고 여차여차한 범죄를 했을 경우 그렇다면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하는 고범죄에 해당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구원 받았노라 공언하고 스스로도 믿어온 것을
말끔 걷어치우고 다시 새로 시작할 일이다. 이렇게 간단히
구분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저돌적으로(무작정 일직선으로 고집하며
나가는 멧돼지 성격으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고집 때문인 것이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죄에게서 구원됨은 죄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말함이니(롬 8:2).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눅 4:18)는
이 말씀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몸된 가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바로 이러한 자유이니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요
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다"(요 8:36)하신 것이며, "주님께서는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한 것이고,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한 것이다.
생명의 핵심은 사랑이요 사랑이 핵심은 자유
의지에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할 수 있는 자유다. 그래서 이 생명과 사랑의
법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 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는다"(약
2:12)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이고 자아중심으로
나가면 멸망이다(롬 2:7-10). 때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씀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하였다.
얼마나 성경에 대한 몰이해가 극도에 달했으면
"힘씀"이라 하면 무조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배척하게
되었던가! 주님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요 5:29)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건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놓았으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잘못 채워진 단추를
풀고 새로 시작할 때이다. 이 기회 놓치고 차일피일하면 반드시
때가 이르고 곧 들이닥칠 것이니 그 때는 정신 차릴 경황도
없이 거대한 태풍 앞에 휩쓸리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경고를 들으시라. 때(시간)는 사람들 기다리지 않는다. 때(기회)를
잡지 않는 자에게 때는 없다.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다"(롬
14:7/갈 2;20/고후 5:15)라는 것은 성경이다. 어느 개인의 소견도
해석도 아니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면, 과연 내가 그러한가
아닌가 하고 잡스러운 생각을 할 필요도 이유도 겨를도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 면에서 즉 실천 면에서 어느 정도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오직 성경의 기준(거울)에다 대고 나
자신을 부지런히 비추어보려는 힘씀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일이다. 성경에 관한 주석서 따위는 "이 점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로 참고
정도로만 보고(필자는 한번도 주석서를 뒤적인 일이 없다) 항상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것이니 성경을 읽을 것을 재삼 재사 당부드리는 것이다.
나 자신을 기준하고 거울로 하여 성경을 해석하려 하니 엉뚱한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또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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