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자연인으로서의 이병철이 남기고 간 질문은 그 평생 최고 가치의 최대 유산 (22)

자연인으로서의 이병철이 남기고 간 질문은 그 평생 최고 가치의 최대 유산 (22)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어 주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 하는데 그 창조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4. 언젠가는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결국 부인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


하나님의 제조표(製造標)


굳이 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라 했듯이 만물이 양면으로 짝을 이루어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갑'과 '을'이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병'인데, 이 갑, 을, 병이 각기 마치 독립된 개체처럼 자신을 표현한다는 데에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은 제각기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항상 나타내기보다 '병'이라는 존재로 줄곧 인식되도록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병'으로 자기들을 나타내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갑'과 '을'로서의 그 특성 그대로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할 때에는 각기 자기 고유의 개성을 얼마든지 나타내기 때문에 '갑'과 '을'을 아예 '병'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병을 갑이라고도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이제는 을도 함께 있기 때문이요 따라서 같은 이치로 을이라고도 못함은 당연하다. 이것이 '삼위(三位)'의 의미이다.


중국의 주역으로 만일 말할 수 있다면, 만물이 양과 음이라는 이원(二元) 체제로만 구성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과 '음' 외에 별도의 '음양조화'라는 이름을 더 둠으로써 삼위를 만드는 것이다. 즉 갑과 을이 처음부터 있어 '이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시(一始)로서 시작하여[즉 처음 존재해 있다가] 그 하나에서 둘이 되니 다시 말해 그 하나가 자기와 같은 다른 하나를 생성시킴으로써 둘이 되어 '갑[a]'과 '을[b]'로 구성하고 있으니 애초 홀로 하나로 있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성질이 "병[c]"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갑과 을 사이는 주종, 대소, 인과(因果) 관계를 이룬다고 지적했거니와, 이 둘이 처음 하나로 있었던 모습으로 계속 하나로서 머물고자 하는 성질을 갖게 되므로 이를 가리켜 일체(一體)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 '병'으로 있다가 그것이 나누어져 '갑'과 '을'로 현재 병립(竝立)해 있되 여전히 이전의 '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음이다. 이 해석은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사실을 토대로 함은 물론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그리고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은 바로 이 원리를 따라 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만유를 이와 같이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드신 것이라고 해서 만물이 구성되어 있는 이 원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제조표(製造表, God's make mark)"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이로써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실상 그대로 판단하여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유추(類推)해서 다른 사실을 파악 또는 입증할 수도 있게 된다.


즉 '육체'가 있으면 '영혼'이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며 '물질'이 있으면 '반(反, anti)물질'이 있게 마련이고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영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이다. 이는 물론 대칭[상칭]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곧 갑이 있으면 을이 있게 마련임을 뜻한다. 즉 모든 사상(事象)은 그 짝이 있음이니 짝의 원리 또는 양면성의 원리다. 하나의 엄연한 원리로 정착해 있음이다. 이상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3운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의 희한한 마치 도식(圖式)과 같이 설정되어 있는 기묘한 구조이다. 이 증명은 과학자들의 실험 도구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3운법칙의 존재가 발견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본체와 형체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도 나타난다. 머리는 몸을 통해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이치다. 즉 몸의 각 지체(肢體)가 움직여 주어야 머리의 생각들이 비로소 표현 가능한 수단을 얻게 됨이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므로[파생되어]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고전 11:3]. 여자가 남자의 형상이라 함은, 아담이 여자를 볼 때 자기 형상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뼈[骨] 중의 뼈요 내 살[肉] 중의 살이라"[창 2:23] 하기만 하고 이름을 짓지 못했고 그냥 ‘남자’와 ‘여자’라는 것으로만 자기와 여자 사이를 구별했을 뿐이다. 영물(靈物)들 즉 천사들의 이름은 다 지어 불렀으나 여자만은 자기의 형상이므로 자기의 이름으로 즉 "아담"으로 통할 뿐이었고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수가 없었음이다. 빛을 예로 들어도 입자가 ‘크고’ 파동이 ‘작은’ 관계라면 명백히 입자는 실[본]체이고 파동은 그 형체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 되어 계신다고 했거니와 창조자의 모습은 아들이시니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는 머리시고 아들께서는 그 몸이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형상"[고후 4:4]이시므로, 때문에 아들은 "말씀"[요 1:1]이시라고도 표현된다. 형상은 다시 말해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상이신 아들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요 또 아버지는 그 실체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셨다"는 표현 또한 정확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조물주와 피조물은 본체[창조주]와 형체[피조물]의 관계가 되어 있다. 바로 이 이유로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음이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偶像)으로 바꾸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시어 저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롬 1:18-24]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그 지으신 만물은 그 몸이 되어 있는 이치를 따라 인간 생활이 정상적으로 영위되게 하신 것이다. 모든 인간 생활을 관장하는 것으로서 주역이 설명되는 것을 보고 보어는 그의 상보성 원리를 말하면서 앞에 이미 소개한 대로 자연 현상만 아니라 "인간사의 양면성"을 논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이해" 관계를 말하고 "자연 현상이나 인간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는 동일하다"고 외친 것은 당연하니, 생각도 옳고 그 말도 아주 적절하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실제 알아야 할 원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과학자들은 꽤 구체적인 것을 아는 것 같아도 근본적인 원리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신랄하게 꼬집은 것은, 모든 과학적 진리의 근본이자 인간 삶의 근원이 되는 이 이치 곧 ‘삼위일체 원리’의 윤곽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적 법칙으로 충만해 있고 그런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이 모르는 이런 가장 기본되는 법질서를 처음부터 성경이 밝히고 있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과학적 사실과 진리와 법칙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인간 삶의 기본 도리 즉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이 한 몸의 구성체로서 각기 그 지체 역할을 하는 것의 핵심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다시 말해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한 몸 구조에서는 자기를 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어가 말한 "개인과 공동체의 이해"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각 개인은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의식 즉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에서 살아야 최고도의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절대적이다. 이 자기 부인을 하지 않음에서 모든 인간 비극이 오게 된다. 왜냐면 행복의 반대 개념은 불행이요 비극이 아닌가. 죄와 악, 불법과 불의가 바로 이 자기 부인을 멸시하는 데에서 오는 자기 중심의 결말이다.


이 진실을 이론적으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론"은 물론 삼위일체 원리다. 즉 ‘짝의 이론’의 실체가 이제 비로소 증명되어 나타난 것이다. 증명되었다는 것은 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3운 법칙의 3가지 유형이라는 상호간의 구조가 바로 이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시험관을 통해 실험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역사적 인물의 생애에다 이 잣대[3운 법칙]를 대어보면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는 까닭에 각자 스스로 증명해볼 수 있는 그런 '실험'이다.
 

짝의 원리

만유는 다 짝으로 되어 있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바로 이 ‘짝의 개념’에서 결론 지어진 것이다. 성경은 육체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자연계가 있으면 그와 상칭(相稱)되는 것으로서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세계가 있는 법이다. 이를 우리는 "영계(靈界)"라 한다. 무릇 진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啓示)로써 알아지는 것이니 하나님을 부정하고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호 보완이라는 말로써 한정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니 만유가 대칭[상칭, 대립]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 그냥 "삼위일체의 원리"라고 이제는 총괄해서 표현해야 마땅한 것이다. 빛을 구성함에서 입자와 파동은 상호 보완이지만, 생명과 죽음이 상호 보완한다는 말은 아주 어색한 것이다. 의와 선이 그 대립 개념으로서의 불의, 불법과 죄와 악이 서로 보완성을 띤다는 것도 얼른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만유를 지으실 때 처음부터 악과 선이,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도록 창조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으셨으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오니 이 두 개념이 비로소 대립된 것이다. 악령들이 범죄를 하니 범죄하지 않고 거룩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거룩한 천사들과 대립된 것이다. 또 이와는 달리 남녀 대칭은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경우다. 또 하나님께서 애초 홀로 계셨으나 당신의 형상으로서의 아들을 낳으시니[파생시키시니, 존재하게 하시니] 독생자[독자, 외아들] 하나님께서 비로소 계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시니 피조물과 조물주라는 대칭 개념이 실질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피조물이 있으니 반드시 이 피조물을 파생시킨 조물주가 계심을 삼위일체 원리는 입증함이다. 눈에 보이는 이 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영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빛을 구성하고 있는 두 대립 개념으로서의 입자와 파동도 이런 필요성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이후 양면성을 이루어 있는 모든 대립[대칭, 상칭] 개념을 삼위일체 원리라 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앎으로써 과연 영계가 있느냐, 영혼이 있느냐, 장차 오는 세계가 있느냐, 그리고 그 영원한 세계가 실제로 천국과 영원한 불 못으로 양립되어 있느냐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근거를 찾게 되어 있다. 양면성의 원리, 짝의 개념이다. 셋 또는 넷이나 그 이상도 없이 오직 짝[둘]으로 하나로서의 개념을 이루어 있는 이치다.


이런 짝의 원리가 종적으로 횡적으로 사면팔방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 만물이다. 그러므로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 있다 할 때는, 특정된 일방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그 대립되는 의미를 함께 아울러 고려해야 그 완전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뜻에 한할 때 "상보성(相補性)"이다.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천주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나 기타 무슨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회의론자든 모든 인생들이여, 아버지를 떠난 탕자(蕩子)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아버지의 품속으로 시각을 다투어 돌아올 일이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입맛에 맞지 않다 하면 그럼 "어머니" 하나님이라 할 것인가. 그러면 더욱 격에 맞지 않다. "어머니"라고 하면 반드시 "아버지"를 연상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어버이'의 의미에서 원조(元祖) 격의 대표성을 띠기에 쓰이는 호칭이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온 까닭이다. 이는 모든 대칭성을 띠는 것은 모두가 예외 없이 처음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의 닮은꼴이 나온[派生]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


대칭각, 대칭선, 대칭형을 작도할 때의 작도법 바로 그대로다. 먼저 원형이 있고 난 다음에야 대칭형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이치를 따라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이 못마땅하다고 생각되면 여자에게서 남자가 났다고 하든지 할 것이지 둘 다 동시에 났다고는 하지 말 것이니 그런 것은 이치상으로도 합당하지 않으므로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왔다고 하면 남자들이 반발할 것이다. 그러면 반발하기는 마찬가지니 어차피 그 중 하나를 대표성으로 정해야 정리가 되지 않겠는가.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서 나왔으나 세상 모든 남자[아들 자식]도 여자[모친]에게서 나오는 것으로[고전 11:12] 마무리를 지어 표현하는 성경대로 하면 무난한 것이다. 방금 지적한 대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다 하든지 여자에게서 남자가 났다 하든지 둘 중 하나이어야 하는데, 세상 모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니 분명 한 쪽으로 쏠림이 되므로, 공정공평하게 첫 여자만은 첫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 형평성이 유지되고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


과연 아담의 신체의 일부[갈빗대 하나]를 소재(素材)로 하여 여자[하와]가 창조된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아버지"로서 대표성을 나타내고 있는 이상, 일관성이 있도록 역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지["하나님의 아들" 등의 표현] 의도적으로 성경을 폄훼하려는 이들의 주장처럼 남존여비 사상이 아닌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자기중심으로 치닫는 악한 인간성에 의하여 남자의 비열한 탐욕이 여자를 완력으로 부당하게 압박하는 데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남조여부(男助女扶)인 것이다. 즉 상보(相補)이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면 아내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엡 5:28].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편을 따르고 복종하게 되어 있는데[:24,25] 이것이 피차간의 사랑으로 되어야지 강압적으로 복종을 요구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만유(萬有)는 먼저 있고 나중 있음의 순서와 질서를 따르고 여기서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먼저 있고 나중 있음의 구별을 이름하여 상칭(相稱, 혹은 대칭) 원리라 하는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相補性) 원리는 이 상칭 원리의 물리학적 명칭이다. 상칭 원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짝의 원리 혹은 양면성의 원리를 말함이다.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아 원리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제는 3운법칙의 발견으로 삼위일체의 원리는 당당히 그 위용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상보성 원리에서도 밝혀졌듯이 이 상칭 원리라는 것은 성질이 상치(相馳)되어 서로 반대가 되면서도 또한 서로 보완적이라는 정도의 결론으로만 그치고 구체적으로 그 관계가 어떠하다는 것은 밝히지 못했다. 음양 이론에서도, 양이 크고 음이 작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었어도 양에서 음이 직접 파생했다는 것은 추정은 할 수 있되 확증하여 말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삼위일체의 원리가 증명됨으로써 이 숙제는 모두 풀어진 것이다. 3운 법칙의 희한한 구조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갑[a]’, ‘을[b]’, ‘병[c]’의 이런 3각(脚) 도식(圖式)은 ‘갑’과 ‘을’이 ‘병’에게서 나왔다 즉 ‘병’이 ‘갑’과 ‘을’로 나누어졌다는 사실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갑’과 ‘을’이 따로 둘로서 독립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때는 항상 ‘하나’로서 즉 원래의 ‘병’의 모습으로서 존재한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3각(脚) 구도"라 하는 것이다. 왜냐면 3발이는 2발만 있어도 안되고 3개의 다리가 모두 함께 갖추어져야 제대로 버틸 수 있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 버리면 쓰러져 세워져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제대로 표현하면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와 그 하나가 이제 둘이 되었으나 둘로 따로 존재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인 하나처럼 존재하는 까닭에 현재의 둘과 함께 별개의 존재처럼 셋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이지만 그 의미는 애초의 하나로서의 의미 또는 본질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도 알기 쉽게 말하면 가령 빛은 파동으로서 관찰되어 실험할 때는 파동으로서의 성질만 나타나고 입자로서의 성질을 배척하는 듯 보이며, 반대로 입자로서 관찰할 때는 입자로서만 나타나고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배제하나 그러나 ‘파동[wave]’으로도 또는 ‘입자[particle]’로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오직 ‘빛’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빛을 두고 파동이라 할 수도 있고 입자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파동이라고만 확정해도 안되고 입자라고만 단정해도 안되는 것이다. 입자임을 단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가 아인슈타인이고, 보어는 동시에 파동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 해 묵은 논쟁은 파동이나 입자 중 하나를 제일의적(第一義的) 존재, 나머지를 제2의적 존재, 빛을 그 모두를 하나로서 조합, 조화시키는 제3의적 존재라 결론 지을 때 비로소 종식된다.

입자와 파동 중 어느 것이 제일의적 존재 즉 ‘갑’이냐 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의 실험 결과에서 밝혀질 것뿐이다. 즉 대칭성 원리에서는 반드시 원형과 대칭형이라는 질서와 순서가 엄존하고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다.      

만유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공기는 같은 물질이지만 불가시적인 것에 속하여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존재함을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우리 눈에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최소한 그 원인이 반드시 가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고집할 근거도 없다. 여기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일치한다.


이것까지도 상식에 속한다. 상식 수준에 속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른바 상보성(相補性)의 원리다. 보어가 이 원리를 가지고 아인슈타인과 세기적인 논쟁을 벌였고, 보어 자신은 이 원리를 확신했기에 덴마크 정부로부터 그의 문화적 공로를 평가 받아 작위(爵位)를 받을 때 그 가문의 휘장으로 이 상보성 원리를 상징한다 하여 태극도(太極圖)의 문양을 넣어 스스로 옷깃에 달고 다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이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어의 이 법칙을 언급하는 것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주역(周易)과 같은 이 짝의 원리가 학문적으로[특별히 물리학에서] 인지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보편화된 상식 수준이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해묵은 논쟁은 그 결론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은 삼위일체의 원리[the principle of trinity, Trinity Law]가 '인간 생애의 법칙[trini homo]'의 구조에 의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원래 성경에서 기인된 것으로서 그러나 성경이 이 이름을 명시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는 세례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생애를 결정 짓는 원리[3운법칙, trini homo]의 3가지 유형의 구조가 '삼위일체의 원리'를 도식으로 그림 그리듯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명칭이다. '삼위일체 원리'라는 것은 보어의 법칙에서 보듯이 가령 평상시에는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빛을 입자의 관점에서 관찰하면 입자로만 나타나고 파동의 관점에서 관찰하면 입자는 전적으로 배제된 파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상반된 두 성질이 서로 보완하여 빛이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 되듯이, 갑과 을이 서로 독립된 개체를 이루고 있으나 이 둘이 제각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빛으로만 즉 마치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독립된 별개의 것[병]처럼 존재하므로 이 갑[甲, A], 을[乙, B], 병[丙, C]을 3개[갑과 을의 양자 구도가 아닌]의 별도의 존재처럼 인식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갑, 을, 병의 정립(鼎立, 솥발처럼 세 발로 서는) 구도이다. 실상은 갑과 을의 양립(兩立)이지만 갑과 을이 제각기 홀로 있기를 싫어하고 반드시 둘이 하나로서의 모습을 취하려 하므로 그러하다. 왜 둘이 서로 독립해 있기를 원치 않고 반드시 하나임을 고집하려는 것일까. 이 성질이 어디서 연유되는 것일까 하면, 갑과 을 양자가[二元]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것에서 시작했기[一始]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원래 하나로 존재했던 향수(鄕愁)를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언제나 이전처럼 하나이기를[一體] 좋아하고 선택하는 고로 부득불 이를 하나처럼 인정해 주어 말하자면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부여함으로써 갑, 을, 병 셋으로 스스로를 나타내도록[三位] 되어 있는 원리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굳이 다툴 필요 없이 ‘빛’으로 존재하나 이 빛을 때로는 ‘파동’으로 인정해 주어 설명되어도 옳은 것이고 ‘입자’로 인정해 주어 설명해도 다 같이 옳은 것이지 틀리지는 않다고 인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할 때는 틀린 것이다. 왜냐면 상보(相補)하되 양립하기를 거부하고 서로 ‘하나로서’ 조화(調和)하여 별개의 존재를 형성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별개라는 의미는, 갑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을이 포함되므로 갑이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둘로서의 성질을 동시에 나타내려 다투지 않고 둘이 어우러진 하나로서의 존재임을 과시함이다.


이를 확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과학 실험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림 그리듯이 나타내고 있는 인간 생애의 법칙[3운(三運) 법칙]의 구조이다. 왜냐면 삼운법칙[trini homo]의 단 3가지밖에 없는 인생 유형(類型, pattern)이 갑과 을과 병을 나타내듯 하는 그림처럼 그 구조가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즉 갑과 을은 병에서 나왔다는[派生] 형상을 하고 있고[그리고 이 형상은 둘로 나누어진 다음에도 여전히 병의 모습으로 건재해 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병으로부터 파생되어 갑과 을로서 현재 병립되어 있으나 둘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전연 다르고 독립된 것임을 희한한 배열로 나타내고 있음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갑이 을을 생성[파생]시켰다는 의미다. 즉 갑이 을을 내었고 을은 갑에게서 나왔으며 본질은 따라서 하나이나 둘로 분리되었으므로 각기 독립되어 있되 본질이 하나이므로 각기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서 존재함은 당연한 사리(事理)다. 그래서 갑과 을의 이 양자간은 결코 대등할 수가 없고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갑에게서 을이 나왔으므로 이는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갑이 원래는 병이었는데 을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자기는 갑이 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자기의 원래 모습인 병에 집착하고 병으로서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이것이 만유 생성의 이치이자 존속의 법질서가 되어 있다. 우리 인간 생활로 말하면, ‘너’와 ‘내’가 있고 이 둘이 합하여 ‘우리’다. 공동체 의식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로서 존재해야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분리해서 살면 실제 살 수도 없거니와[그렇게 되면 상호간 다투게 되어 알력, 투쟁, 살육이 감행된다]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때보다 많은 것 또는 전부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이치가 이 하나로 귀일된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은 여기서 그 말의 진가를 음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근본을 가진다. 하나뿐이지 둘도 아니다.


그 다음에 풀어야 하는 것은 "기일(其一) 하처(何處)"다. 그 하나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만유 생성과 유지 존속의 기본 법칙이 어디서 애초 나왔느냐 하는 것이니 이 만물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 어디에 있느냐, 또는 누구냐 하는 것이다. 과(果)가 있으면 인(因)이 있게 마련이다. 답은, 만유의 창조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인간 생애의 법칙에서도 보듯이 인간 생애는 자[尺]로 잰 듯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꼭 세 가지 유형으로만 분류된다. 수십 억 인류 또는 그 이상이라도 단 3가지로만 구분된다는 것은 '인간 삶에 개입하는 신(神)'의 영역이다. 인간 자신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니 신이란 이름 외에 더 있는가. 또 이렇게 3가지로만 가닥을 잡아 나가니 이지적(理智的)인 존재이지 물건이나 물질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앞의 설명대로 삼위일체 원리를 그림으로 나타내듯 도식(圖式)으로 증명하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성적인 인간을 이와 같이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배분(配分)하고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자연법칙과 같이 철두철미 운용해 나가니, 이 원인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창조신(創造神)의 실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고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업고 안고 있는 모습으로서의 불가분성을 나타내는 것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 됨이다. 역시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심이다. 그러나 강제적이 아니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순수하게 주인 의식으로 내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나님께서는 이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숨기시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숨기시는 뜻은,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안온(安穩)한 둥우리에서 뒤집어 내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림으로써 새끼의 자주 독립성과 활력을 키우는 것과 같다.


그렇게 허공에 동댕이쳐진 새끼가 나 죽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 활개 짓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힘이 부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기진해진 새끼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어버이 독수리가 번개 같이 하강하여 새끼를 자기 몸 위에다 덥석 받아내게 된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 되풀이하면 새끼는 어버이처럼 당당한 날개 짓을 하는 한 마리의 의젓한 독수리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골 3:1-3] 한 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욕이니 탐하는 마음은 우상 숭배"[:4,5]라 하였다.


그리고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6] 했으니,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고후 5:14,15] 것을 믿지 않고 여전히 "육신대로 살고자"[롬 8:13] 하여 땅의 것을 생각함으로써[골 3:3,4]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요 12:25]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니[골 3:6] 구원으로부터는 영구적으로 탈락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죽음이 "성령으로써 우리 몸의 행실을 죽임"[롬 8:13]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몸의 행실 역시 죽일 수 없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되므로"[빌 3:18] 그 결말은 "멸망"[:19]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다. 하나님만 자신을 감추심으로써 '보이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영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물들이 나타나 육체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겁을 주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수호천사처럼 되어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의 자주적 선택과 결정에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 악령들이 소위 UFO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악령의 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변장한 속임수 즉 "외계인' 등으로 속이며 그런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들의 짓거리가 허용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이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지만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는 까닭에 속임수로 작용하게 된다. 천사들의 활약이나 악령들의 활동이나 어느 쪽으로든 쏠림이 없이 형평을 유지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의 결정과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배려하심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대로서 악한 자가 나타나게 되어 있으나 그러나 이 적(敵) 그리스도도 어디까지나 인간으로["네피림"이기는 하나] 나타나지는 것이므로 쏠림 현상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그리스도[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를 앞에 모시고 오직 그의 종이 되어[그리스도 또한 친히 나를 위하시고 섬기시는(눅 22:27) 분으로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로"[요 4:34] 마음을 세운 이상[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 바로 이런 의미다] 모든 일에 이에 부합하게 행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실 뿐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스스로 숨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공'을 앞에다 모시고 섬기는 것이 아니니 다시 말하지만 보이시더라도 보이시지 않도록 '스스로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즉 현재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어 있는" 자의 행세일 것은 당연하다[골 3:3].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보내심 받는다"[요 20:21/17:18] 하셨으니, 이것이 "성령 받음"의 의미임을 명백히 하셨으니[:22] 성령 받음이 바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므로[행 2:38] 즉 그리스도와 실질적으로 하나 됨을 말하는 까닭에 이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부합함이 된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고후 5:15/롬 14:9] 당연히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자세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스스로 죽음에 충실함이니 이런 고난이 없이는 남은 인생들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는 의미가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지속된다는 뜻이니 당연히 그러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부활로 종료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일정 부분 그 교회를 위해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 친히 교회의 머리로서 머리와 몸이 하나 됨을 인한 자연스러운 이치다.


이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24] 했으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현재 믿고 있는 이들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믿어 이 교회 안에 영입될 모든 사람들[현재는 복음을 듣지 못하여 교회 밖에 있는 이들]도 아울러 포함이 된다. 이와 같이 전체 교회를 의미하는 까닭에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너희를 위하여 받는다"[:24]고 한 것이다.


바울이 당한 모든 고난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것이다. 물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중에서 오는 심적(心的)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은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8,29] 하는 데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당하는 일체의 고난, 고통, 죽음을 의미함이다.


그러나 그냥 수동적으로 부득불 당하는 것이라고 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뚜렷하여 여러 사람들을 건진다는[불신자들을 믿게 하는 것만 아니라 이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을 또한 옳은 데로 인도하기 위함에서] 적극적인 목적에 일치하는 것인즉 보람찬 것이고 마땅히 할 일이므로 이를 내 스스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이루는 일로서 "이 괴로움을 내가 기뻐한다"[골 1:24] 하여 그 특성을 명백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한은 이러한 고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이러한 나의 능동적인 자세는 불변이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2-14]고 거듭거듭 힘 주어 강조한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일관성을 띠어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 없음과 같이 산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산 자가 되었으면 시종일관되게 산 자로서의 모습 즉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음이니 이 고난을 기피하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되면 나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상실되고 나의 구원은 결국 도로무공이 됨은 당연하다.


이렇게 믿었다가 즉 "구원 받았다가 어떻게 그 구원이 다시 취소가 되느냐" 할 것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믿다가 시험을 받아 그 믿음을 배반한다"고 명백히 말씀하신 데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눅 8:13]. 뿐 아니라 바울 사도 역시 그래서 "마음이 부패해져 믿음에 관하여는 버려진 자"[딤후 3:8]가 될 수 있고, "믿음을 무너뜨릴"[딤후 2:18] 수 있고, "믿음에서 벗어날"[딤전 6:21] 수 있고,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날"[딤전 6:10] 수 있고, "믿음을 배반할"[딤전 5:8] 수 있고,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딤전 4:1] 수 있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당할"[딤전 1:19] 수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릴"[계 2:13] 수 있음을 끊임없이 엄중 경고하고 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는다"[딤전 5:12] 한 것이니, 얼마든지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계 2:4].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1,22] 함과 같다. 그러나 항상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경고가 있기 때문에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양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자기 구원은 죽어 보아야 알고 이 세상에서 확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로써 속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에 넘어가지 말 것이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와 같이 경고하고 그 스스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룬 다음과 같은 바울의 심회(心懷)로 밝혀진다.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고 한 데에서 유감없이 드러나는 것이니 이상 모든 경고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추호의 착각이나 오해가 있을 수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다시 말해 내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므로 산 자답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죽든지 살든지 복종함이[롬 14:7-9] 우리 구원의 참 모습이기에 사람들 구원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하였지만 중요하기에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3.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나", 그런 억지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임이 이상 법칙 설명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인간이 저절로 진화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 자기 의사 또는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작동되는 양심과 3운법칙 등을 몸에 달고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황당한 무지(無知)의 소산(所産)이 소위 "진화론"이다. 이 ‘진화론’에 대해서 딱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인데, 인간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그 한계[이 인간의 한도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통제에 의하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서든 간에]를 절감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다음 사례로 증명될 수 있다. 즉 진화론의 허구성에서 엿보게 된다.



공중에는 UFO, 지상에는 NSO[Nephilim's Soul Orb]


앞에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간단한 말 하나로써 진화론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드러냈지만, 이제 그 '증거'로서의 영물[靈物]들의 존재에 눈 뜰 시기가 이미 무르익었다. 즉 하늘에는 소위 UFO요 땅에서는 Nauseous Orb[NO]가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 악령들의 가시적 형태로 나타난 악령들인 것이다. 원래 무신론이나 진화론 자체가 인간 구원을 좌절시키기 위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에 의한 것일 뿐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오직 인간의 망상일 뿐이었다.


그런 비과학적, 반과학적 발상이 버젓이 과학으로 대접 받고 있는 현실이니 인간을 의지하지 말 것이요 자랑하지 말 것은 한낱 악령들의 노리개 또는 노예로 현재 전락되어 있는 사실을 성경만이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터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만든 무신론이므로 이제는 그 자신 이 무신론을 서서히 접어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여 전무후무하게 세상을 최후발악적으로 속이게 되어 있음을 성경은 역시 밝히고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계시록에 이미 예언된 짐승의 시대 다시 말해 적[敵] 그리스도의 시기로 지금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것이니 성경의 하나님,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약 당시의 하나님은 인정해도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구약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이 계시하여 주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친히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호칭도 더 다시는 구약시대처럼 "여호와"[이 이름도 아버지의 호칭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을 가리킨 것이니 이제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므로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신지라 사람으로서의 이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통용됨은 당연하다]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로만 통하시는 것이니 여기에는 논리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다.


부활하신 다음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언하시기를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아버지를 "여호와"라 하시지 않고 단지 "아버지"라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들이므로 당연히 그러한 것이다. 고로 신약 시대에 와서는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그 어느 기록[성경]에도 오직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가 아니고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나타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과 관련되어 나타나신 것이지 하나님께 무슨 이름이 있으시랴. 인간과 관련되어 나타나시는 이름이시므로 지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이실 뿐이다. 우리는 성경대로 말하지 달리 그 이상 이하로도 무엇이든 말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이시라고 하여 "여호와"를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무지만을 노정(露呈)시킴이다.


소위 "진화"라는 것은 영적영적(靈的)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창조자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소리다. 자연계만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믿고 자연계의 생물들에만 한정해서 그런 진화가 적용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었을 뿐이고 증거는 없었다. 그 배후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용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진화론자가 내세운 그런 정도의 소위 "증거"라면 이제는 그런 악령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확실히 나타난 것이 공중의 UFO요 동영상으로 찍혀지는 NORB가 또한 바로 그 증거다.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진화할 수 없다. 소위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전제하에서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초자연적 생물들이다.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소위 UFO, NORB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법칙으로는 천하없어도 그런 초자연적인 것으로 "진화할" 수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런 억지 소리를 낼지 모르나 자연법칙으로는 모든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거짓말은 원래 말을 그렇게 만들어 하면 되는 것이고 그 거짓말을 진실로서 위장시켜 그 증거를 보인다 해도 그 증거는 얼마든 조작하면 될 일이다. 그런 조작 행위가 드러나고 않는 것은 별개 문제다. 거짓말도 말이니 말로서 통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당치도 않는 증거 아닌 소위 증거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에게는 훌륭히 증거 구실을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에서는 일정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실성은 그 자체 증명에서 가름된다. 성경 외의 어느 무엇이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바로 그 증거가 됨이다. 거짓말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고 그렇게 기록될 수 없고, 진실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고 그런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런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름지기 거짓과 거짓말의 속성은 자기중심 곧 사사로운 욕심, 집단 이기주의에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거짓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에서 그 '기준'이 된다.


거짓이 먹혀 들지 않을 때에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동원된다. 폭력으로 위협하다가 그 위협이 통하지 않을 때에 자포자기[나중에야 어찌 되든 그런 이성적 판단보다는 당장의 감정에 못이겨 증오심에 휩쓸려] 식으로 나가 그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래서 법망(法網)에도 걸려 드는 것과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식이라 할 수 있다. 미워하는 상대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절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신속하게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는[고후 4:17] 줄 잘 알지만 비참하게 죽이는 것으로써 분을 푸는 것이다.


이제 적 그리스도의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는 순절(殉節)의 시기다. 몇이든지 다 잡아 죽이려 드는 때이다[계 13:15]. 그에 당연히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스스로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기 위해[살후 3:12] 시간을 쓰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한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사리이고 상식이다. 상식대로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언제나 화가 있다. 정신 나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마지막 심판에 의해 영원히 분리되는 양면의 세계


이러한 초자연적 존재[육체는 자연법칙의 관장을 받는 물질에 속하고 이런 물질의 지배 원리인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영(靈)이라, 영적이라 한다]가 있음이 증명되었으니 만물의 대립성[대칭성, 상칭성]을 입증함이요 이는 처음부터 이러한 원리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으로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증거다. 3위1체의 법칙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진실임을 증명함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마지막 심판이 있어 선과 악, 의와 죄를 따라 세계가 영원히 나누어지는 것이 분명하고 생명의 세계와 대립되는 멸망의 세계의 특징을 말씀하실 때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눅 6:25], "이제 주리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웃을 것이다[눅 6:21]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다.


영원토록 생명의 낙을 즐기며 희희낙락 즐거움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영원토록 슬피 울기만 하는 멸망의 세계를 앞두고 있는 모든 인생들이다. 둘 중 하나다. 영원토록 슬피 울기만 할 세계를 앞두고 웃을 수 있는가? 영원토록 슬피 울기만 할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지금 이 세상에서 희희낙락하는 세상 사람들을 앞두고 웃을 수 있는가? 그들은 몰라서 웃는다. 우리는 알면서도 웃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안다는 것은 헛것이요 실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알지 못하고 믿지 않음이다.


세상 사람은 경고를 해주어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구원 받았다", "멸망하지 않는다", "영생의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는' 것 모두 사람이라면 어느 유형의 환상이든 그 환상에 빠질 수 있는 그런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믿으면 그 믿은 대로 언행이 나와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언행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다" 또는 "죽었다"[약 2:20,26] 하는 것이니 증거가 없으므로 빈 껍데기뿐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으므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 즉 믿으면 믿은 대로 언동(言動)이 되어 나오고 따라서 그런 언행(言行)이 없을 때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뿐 아니라 오늘날 악령들의 이상과 같은 두드러진 작태(作態)를 볼 때 적 그리스도의 때가 바로 눈앞에 임하였음 증언함이요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의 시기가[계 13:15] 무르익었다는 증거다. 죽기 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사람 살리기 위한 기도와 말씀 전파의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원래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만 제대로 충분히 세상 골골마다 전파되면 그 즉시로 접게 되어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니 그 때에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하신 그대로다. 고로 세상 존속의 여부는 우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복음 전파 여하에 달린 것이다. 복음만 제대로 전파되면 벌써 끝날 세상이므로 그만큼 지연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 왔다는 증거다. 아니라면, 믿는 이들이 각 시대에 걸쳐 너무나 극소수라는 끔찍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즉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어서 그런 극소수로는 온 세상을 상대하여 말씀을 전함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그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과거이고 우리는 현재에 처해 있다. 그들의 사례를 거울로 삼아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History, the teacher of life"라 했듯이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도 있듯이 역시 이에 해당된다. 당연히 성경이 이를 강조하여,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 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을 "거울로 삼으라"[고전 10:6,11]고 하지 않는가!


그 거울이 되는 사례만을 통해 보면, 믿고 세례를 받은 자의 수효가 "20세 이상 장정 60만"에 달하지만 정작 가나안 땅[천국]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이다. 이 상징성에 우리는 마땅히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전 10:5] 했으니 이는 현재 우리 믿는 사람들 즉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 하셨다. 성경은 구원의 희소식[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 희소식을 받은 자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발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희소식 일변도가 아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진 결과인즉[아담의 범죄]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음으로써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었으나, 여전히 아담처럼 또는 처음에는 거룩한 천사들로 있다가 범죄하여 스스로 몰락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이하 악령들처럼 될 수 있기에, 성경의 그런 엄중한 경고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공정성과 원리원칙 앞에서 예외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no respecter of persons"]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4. 그러므로 "과학의 발달로 무병장수 시대가 온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만유는 상칭(相稱) 관계에 있으니 자연계가 있으면 영계가 있다. 전자에 속한 생명체는 일시적인 시한부 생명이요 후자는 영원하다. 인간은 원래부터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과학은 아무리 발달해도 이 자연계에 속한다. 영생하게는 못하는 것이다. 자연계와 영계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대칭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서 영계로 변천할 수 없고 영계에서 자연계로 옮겨질 수도 없다.

인간이 영계에서 자연계로 환원되어 버린 것은 범죄하여 "죽은 자"[마 8:22]가 되어버린 결과인데 이제 자연계에 속해버린 이상 다시는 영계의 생명으로 그 스스로의 힘으로써 건너뛰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 "다시 출생하는"[요 3:3] 경우에만 해당된다. 물론 인간이 다시 모태(母胎) 속으로 들어가는 재주는 없고[:4] 그럴 필요나 의미도 없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의 악순환일 뿐이기에 그렇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새로 창조되니까 다시 출생하는 의미가 된다[:5,6]. 하나님의 성령으로써 출생해야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초월함으로써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아 영생하는 존재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는 현재 우리 자신을 철저히 속박하고 있는 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벗어날 재주가 없다.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죽어 감히 썩지 않고 영생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 시대에 과학을 무시하는 완전히 인간 망상으로서의 미신일 뿐이다. 불교의 교리가 바로 그런 망상 속에 젖어 있는 일례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고 신령한 육체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령한 몸이 되되 생명의 낙을 누려야 그것이 사는 것이다. 아무리 신령한 육체가 되어보아야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간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신령한 육체의 영물로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과 무엇인 다른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신령한 몸을 입지 않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썩어져 소멸되는 것이 낫지 않으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믿든 안믿든 무릇 모든 인생들은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이다. 왜냐면 이제는 그리스도 오신 후이므로 첫 사람 아담의 시대는 끝나고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된 까닭이다. 첫 사람 아담은 자기의 범죄로 인하여 현재 우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대대손손 물려주어 왔으나,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히 순종하여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처럼 불복종하여 범죄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여 순종함으로써 영원히 신령한 몸이 되어 계시므로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제는 신령한 몸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는 완전한 기틀을 이루어 있음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이 종료될 때 그렇게 된다. 지금은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이들이 구원 받아야 하는 기간이므로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모두가 머물러 있는 때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지금까지 에덴낙원에 살면서 자식들을 낳았다면 많은 악인들과 많은 의인들이 생겨나 현재의 영물들이 선과 악으로 분류되던 것처럼[그래서 지금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 분류되어 있다] 구분되어 있되 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그럴 경우에도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은, 장차 영원한 생명 세계에서의 한 몸을 이루어 살 구성원이 일정 숫자로 정해져 있고 무진장은 아닌 까닭에, 계속 인간으로 생겨나는 이들 중에서 의인과 악인이 가려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심[foreknowledge]을 따라 미리 정하신다[predestination] 함이다. 다시 말해 악인들 중에서 의인[혹은 의인들 중에서 악인]을 가려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가려내시는 기준은 엄정하고 명확하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어떤 기준인지 알지 못하나 장차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지능의 고도화가 이루어지므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고전 13:12]. 그런즉 성급하게 알려고 할 것 없이 우리 앞에 놓인 당면 문제에만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니 지금은 그 어떤 한가한 틈도 있을 수 없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과의 전쟁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은 범죄하기 전 아담 때 그런 영광스러운 영원한 존재로 한 때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범죄로써 죽음에 이른 까닭에 그런 영광의 모습을 영구히 상실하였으므로[롬 3:23] 새로이 창조되어 다시 출생할 때에는 절대로 그와 같이[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겠다는 선약(先約)이 필수요 필연이다. 영원히 상실했다는 것은 범죄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뜻이요, 따라서 일단 죽기 전에는 절대로 새로이 창조되거나 다시 출생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의 노력, 내 순종에 의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써 즉 "율법 행위로 구원될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한 것이다[롬 3:20-22]. 이 말 역시 오해하지 말 것이니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 어떤 순종도 행위도 무의미 무익하다는 뜻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당당히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산 자로서의 복종과 행함이 필수, 필연이라는 사실과 혼동하지 말 일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따라서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심으로써 되는 것인데 이 살리시는 방법이 창조밖에 없고 다시 출생하게 만드시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처음 창조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창조를 하시자니까 "새 창조"[고후 5:17]다. 그런즉 죽을 것은 죽어 이전의 것은 완전 종결되어야 함이다. 바로 이 방법만이 인생의 유일한 구원인 줄 잘 알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 스스로의 자구책(自救策)에 의한 자력(自力) 구원[소위 "깨달음(覺)"을 통해서 또는 각종 종교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등 하나님의 창조와 다시 출생하는 것과 상치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만들어 인생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니 곧 세상 종교의 실체다.


개신교나 천주교로 대표되는 소위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즉 이 하나님의 '새 창조'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죽음으로써의 종결'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간과함에서 비롯되는 혼동과 무지 탓이다. 다시 출생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즉 성령을 내 안에 모심으로 "성령으로 출생하는"[요 3:5,6]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마리아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교리를 만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수용하여 믿지 않고 "대신 죽음"이니 하는 등의 전혀 빗나가는 해석을 함으로써 순종 곧 하나님의 율법[계명, 단 모세의 율법이 아닌] 행하는 것을 폐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망령된 생각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성경이 선언한 것은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그리스도로 말미암은]으로 종결되기 전에 그렇게 행하고 지키는 것부터 먼저 함으로써 구원 얻고자 함이 무익하기 때문에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든가 하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처음 창조가 범죄로 와해된 그대로 죽음으로 말끔하게 청산되고 다시 살아남 즉 다시 출생한 다음부터는, 산 자로서의 당연히 지켜야 하는 생명의 법질서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15:10,12]. 것을 강조함이 이 때문이다. 이 법질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도 악령들도 죄를 짓고 그 상응한 대가로서 죽음 또는 멸망의 운명에 이르지 않았던가.


오해하고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발부리에 걸리는 돌[모세로 나타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걷어찬다는 것이 신고 있던 신발[산 자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까지 왕청스럽게 날려 버리는 격이다. 그러니 구원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멀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죽은 자'가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와 "함께" 죽어 주신 후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과거와는 다른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심이니 곧 다시는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롬 14:7-9]. 죽은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산 자로 만드신 후에는 그 때 비로소 하는 일이요 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니 곧 머리께서 지시하시는 모든 분부를 수행하여 복종함이다. '한 몸'의 구조가 생명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그렇게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몸[의 각 지체]으로서의 마땅한 역할을 하지 않아서 즉 순종하지 않아서 범죄하고 죽음과 패망에 이른 것이다. 앞에서 우리의 구원을 '상태'와 '결과'라는 양면성으로 설명했지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엄정하게 말해 "약속"인 것이다. 아담처럼 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 약속을 수용해 주시는 뜻을 먼저 성령으로 인(印)치심으로써[엡 1:13] 보증해[고후 1:22] 주심이다.


이렇게 성령 받아 모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출생하는 의미이다. 무엇이든 한 곬으로만 고집해서 알아들을 일이 아니라 성경에 밝히고 있는 그대로 다목적으로 종합해서 전체 뜻을 파악할 일이다. 즉 "보증으로 주신"[고후 1:22] 성령이시니 우리는 현재 하나님과의 약정(約定) 관계에 있음이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행 5;32]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 한해서 구원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히 5:9].


순종하겠다는 약속이,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이다[행 2:38]. 이렇게 회개를 하지 않는 경우, 죽은 자를 다시 살려놓아 보아야 아담처럼 범죄하여 또 다시 죽을 것이기에 그래서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도할 때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한다고 하지 않고 "이제는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말부터 한 그 뜻이 여기에 있다[행 17:30]. 그리고 이에 맞추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소개하기에 앞서 심판하시게 될 '재판장'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31].


심판한다는 것은 성경에 명시한 바와 같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고후 5:10] 순간이다. 선이냐, 악이냐 하는 판가름이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포상된다고 했다[롬 2:7,10]. 그 대신 악을 행한 자는 멸망으로 태이는 것이다[:8,9].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기 위함이니 우리를 애초 창조하신 목적대로 순응하여 살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서 그 목적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을 말함이다[고후 5;15/롬 14:9].


이회장의 질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과학'의 영역은 자연과학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답을 했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자연계에 대칭이 되는 영계에 속한 존재로 창조되어 영계에 속한 육체[신령(神靈)한 몸]로 있다가 그래서 자연법칙의 제약(制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지만, 아담의 범죄로 이제는 '죽은 자'가 되어 자연계에 속해 있는 현재의 처지다. 그래서 영계에 속한 것으로 발생되는 모든 현상이 우리의 눈에는 모두 기적처럼 인식되어 나타나질 수밖에 없다.


아니면, 불신자[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신화(神話)와 같은 황당무계로 들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이 바로 그런 영계에서의 법칙대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건만 우리가 자연계에 워낙 속해 있다보니 "기적[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으로 나타나질 수밖에 없음이다. 자연계의 힘으로는 한정이 있고 제약을 받으므로 그런 영계의 영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일은 우리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계에 속한 안목으로 볼 때는 그런 것이야 일상 다반사다. 이것이 영계와 자연계와의 현격한 차이다. 그래서 천사들[악령들을 포함해서]은 "능력이 많다" 하는 것이다. 기적을 못믿는다는 것은 현재의 인간이 자연계에 속박되어 있는 서글픈 현상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영계의 능력에는 못미치는 것이니 과학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학문이기에 그렇다. 자연계에 속해 있는데 어찌 영계의 것을 알 수 있으랴. 영계의 일을 소상히 알아 그 법칙을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은 영계에 속해 있을 때에만 한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자연계에서의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우리가 일단 영계에 들어가게 되어 거기서 사는 날에는 일절 그 모든 과학적 업적이나 결과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 소꿉질의 노리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의 모든 물질 문명에 속하는 과학적 발달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신(神)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이 인간을 가장 효과 있게 지배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활용되기 위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이니. 과연 그런지는 곧 시현(示顯)되어 나타나 입증될 것이므로 오직 시간 문제다.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지금까지는 온 세계를 효과 있게 일시에 통치하고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자연법칙의 시한(時限)성과 제약 때문에] 이제는 각종 과학 기기(器機)의 발달로 손쉽게 한 손에 장악하게 되어 있는 날이 점차 다가가고 있는 실정이기에 그렇다. 그런즉 과학 발달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악령들의 세계 제압(制壓)에 있음이니 결코 긍정적인 면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삶을 축복하시어 베푸신 은덕이라 착각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장차 임할 전무후무의 재앙을 목적하여 꽃피우고 있는 '죽음의 꽃'이다. 그렇다고 과학문명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와는 차원이 다르니 워낙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쪼들리고 찌들어져 있는지라 이 비극적 제약과 한정으로부터 일부로나마 자유 해방이 되니 그야말로 눈이 번쩍 띄고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난 듯하다. 그러나 신령한 육체로서 영계에서 사는 것에 비하면 가히 사람 앞에서의 개미와 같다 할까. 그런 격심한 차이를 우리는 사실상 이런 자연계에 속해 있으면서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현재의 비극적 실상을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실감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간이 단지 영생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만드신 것으로서 제품이 제작자의 의도대로 나오지 않으면 미련 없이 폐기하는 것처럼[왜냐면 제작 의도를 실현시키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영생하게 되는 것 자체에 있지 않고 단 백년을 생존하더라도 올바르게 즉 모두가 다 하나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규범을 따라 살도록 하심에 있다.


행복하게 살도록 함,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니, 영생은 이런 행복한 삶을 위해 조성된 기본 요건 중 하나일 뿐이다. 죽지 않아야 '죽음의 고통'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닌가. 그래서 산 자부터 만들어 놓으심이 우리 구원이다. 행복하게 살게 되는 또다른 요건은 사랑 가운데 하나됨이니 곧 한 몸 체제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이 사랑 하나로만 압축되므로 첫째 계명도 사랑이요 둘째 계명도 사랑 외에는 달리 없으니 말씀하실 때 "둘째도 그와 같으니"[마 22:39]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생명]의 법도(法度), 한 몸으로서의 사람 사는 도리를 지킬 의사가 없고 의지가 없는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음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누구나 믿으면 구원 얻는 것이지만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겸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다[요 6:45,55].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어렵다" 하며 많이 물러갈 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셨으므로,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순종의 결의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정작 70억 인류라 하더라도 그래서 거기서 단 한 사람만이 그런 결의가 되어 있을 때 그 단 한 사람만을 구원하시고 나머지 69억 9,999만 9,999명은 다 제외시키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변함 없는 의지(意志)이시므로 첫 사람 아담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죽을 짓을 했으므로] 죽도록 버려두신 것이다. 다시 말해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심으로써 범죄를 막으시지 않은 것이다.


그런즉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 수명이 연장된다 해도 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 가상(假想)하더라도 그 과학이 이와 같이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도록 해 주지는 못하고 영생하게 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이다. 영생 또는 영원한 것은 영계의 영역이니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자연계의 영역이 아니다. 세계가 엄연히 다르다. 혼동하게 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혼동해서도 아니 될 일이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이 왜 자살하는가. 다른 여러 이유도 있지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앞만 가리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살벌한 사회에서 홀로 지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렇게 찰라 같은 인간 목숨조차도 끊는 판인데, 그런 사람 도리를 지키지 않는 채로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고통이 배가(倍加)되겠는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영원히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영생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런즉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인식부터 바꿀 일이다. 인식 전환이 모든 문제 해결에서 요긴하고 화급한 것인데 여기서도 통한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인간 생활이 편리해졌다는 것과 동시에 똑같은 비중으로 자연 환경 파괴를 들 수 있고 다량 살상 무기의 발달과 범죄의 고도 지능화를 들 수 있다. 개인이 그런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초대 강대국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증명이 201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 사건이다. 이렇게 되면 전세계적인 무질서의 일대 혼돈을 초래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므로 결론으로 말하면 인간은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인간 생활이 한결 나아졌다는 안도감을 갖는 것은 잠시이고 그에 따르는 재앙이 거대한 괴물처럼 옥죄어 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인성(人性)이 변함과 더불어['한 몸' 의식에 의한 자기 부인의 삶을 통해]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하는 것 외에는 일절 방도가 없음이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과학 문명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지지부진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자연 물질계에 속한 인간 삶은 오늘날처럼 변화하는 것은 비정상이기 때문이니 구원 받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면 모든 것이 일시에 해결될 일인데 무엇 때문에 이런 구차한 것으로 이 구차한 자연계에 속한 생명을 연명하려고 하고 편하게 하려는 부질없는 일에 매달릴 것인가.


오직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해서 이와 같이 지식이 발달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은 한도가 있어 이것이 지나치면 꺾어지고 와해되게 마련이다. 오늘날의 사태가 바로 그런 현상이다. 그러므로 오직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이 땅에서 사람 살려내는 일에 몸 바쳐 충성하다가 "몸의 구속"[롬 8:23]을 받는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을 둘 것이 없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 외에 그 무엇에든 광범위하게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이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중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어 그 속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현실이 아닌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롬 5:12]. 우리가 이회장의 이같은 질문을 중시하는 까닭은, 세상에서 자타 공히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인정하고 그렇게 자부할 만한데도 이 정도의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평소 얼마나 구도자적인 자세가 되어 치열하게 생각해 왔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질문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한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지 영생 여부에만 관심이 간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또 이지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질문할 수 있는 내용이라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점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미 소개한 악바르[Akbar]의 구도자적 자세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불가지(不可知)"로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만족할 만한 답을 전달해 줄 자가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건강할 때 던진 물음이 아니고 세상 떠나기 전 병중에 있어 죽음을 눈앞에 둔 다급하고 갈급한 심정에서 마지막 기운을 다 쏟아 붓다시피 하는 절규에 가까운 질문이므로 그 온 심혼의 갈구가 깃들어져 있는 것이 이병철 회장의 24개항 질의다. 대기업가로서 또는 지금까지의 불교 신자로서 그리고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의 모든 인생 체험과 지식과 체면과 위신을 그대로 벗어 던진 채 그렇게 생면부지의 신부를 만나자고 했으니 얼마나 절절한 심경이었을까.


그 진지함을 느낄 수 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심정 앞에서 우리 모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인간고(人間苦)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자취(自取)한 결과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모든 피조물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이미 지적하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은 모두 그 품속의 아기들인 것이다. ‘영원히’ 아기이다.


만유의 창조자이신 아들께서도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 했으니 말 다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조건의 어버이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자정이 넘쳐 흐르는 부모라도 형제간에 서로 싸우기나 하면 엄하게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음과 같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생존하는 사회에서는 법질서로서의 기강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처음부터 자연계의 동식물처럼 기계적인 생명체 같으면야 법질서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그 자체 내에 내장(內藏)된 법칙을 따라 기계적으로 작동되어 움직이면 질서는 저절로 잡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 주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했을 때는 일률적으로 모두 한결같이 행동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중에는 반드시 빗나가는 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으나 우리가 처한 위치가 그렇다는 것뿐이지, 이 세상에서의 엄마와 아기 관계처럼 엄마로서의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이 세상에서의 엄마를 그 아기가 어찌하지를 못하지만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는 얼마든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밟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히 6:6/10:26,29] 수 있는 망동(妄動)을 벌일 수 있음이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하여 "두렵고 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자기 스스로 그 죽음의 과일["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을 씹고 있을 줄이야 애초 상상이라도 했으랴. 아담은 그러했어도 나는 그러하지 아니하리라고 그 누구도 호언장담하지 못한다. 오직 그런 선례를 "거울 삼아"[고전 10:6] "조심할"[:12] 것뿐이다. 이 조심한다는 의미가 "두렵고 떠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 교단의 설교 강단에서 이런 "두렵고 떨라"는 경고가 발해진 역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종교화, 화석화되어 있는지 그 증거다.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도록 만들 수 있는 방편일 뿐이다. 지식이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니, 솔로몬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아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기초적인 지식과 심오한 지혜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으나 생의 말기에 가서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이방 여인들에 빠져 그들을 위해 이방신들을 만들어 주는 등의 심히 두려운 죄악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로 "두렵게 떨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평소에 했던 말[잠언이나 전도서]을 무시할 것은 없다. 그가 말한 지식과 지혜는 그가 듣고 보고 깨달은 것으로서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다. 고로 그 자신의 행동과는 별개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요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 죄악은 그 자신의 마음에서 난 것이다. 이를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모세를 가르치는 위선자들의 말은 모세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들어도 그 행동은 본받지 말라" 하신 것과 같다[마 23:3].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악한 것도 선한 것도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마 12:34-37] 그러므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NIV], "Keep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out of it spring the issues of life."[KJV]-잠 4:23]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데[엡 3:17/고후 1:22], 또한 그리스도를 밟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가공할 끔찍한 사태가 역시 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심(變心)이다.


그런즉 우리가 마땅히 유지해야 할 '마음'은 어떤 것이냐, 쉬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 항상 기뻐하는 마음,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살전 5:16-18],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마음[:15], 항상 주님께 노래하는 마음[엡 5:19] 등등이다. 이런 것은 성령 충만의 비결이다. 한마디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롬 1:28] 하느냐, 아니면 좋아하느냐에 달린 모든 일이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있는 것으로서 말씀을 사랑하여 그대로 따르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좌우된다.


하늘로서 내려온 사람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 6:38] 하셨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4:33-35] 하셨으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12:25-27] 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시면서 "하늘로서 내려오셨고" 우리는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즉 "성령으로 출생함"[3:6-8]으로써 "하늘로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니 이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이루어진 사실로서 사람이 되신 이후로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들은 나와 함께 존재하시고 움직이시는 것 일색(一色)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시는 것 역시 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20:21,22] 세상에 임함 바로 그 의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기 위함이니 곧 사람들을 건져 구원해내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에서 사람 건져내는 일이 어떤 성격임을 그가 당한 많은 환난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행 9: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과 같이 너희를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하였다.
 

산 자이면서도 죽은 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고후 5:15]. 그러나 "죽은 자"[골 3:3]이니, 이유는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다"[:3].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4] 함과 같다.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으니까 죽음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1:24]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일하는 것 그리고 이를 총력을 다해 방해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롬 6:10,11/벧전 2:24] 때문이다. 이는 이 죄악의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니, 세상에 대하여 내가 세상은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현실인 것이다[갈 6:14]. 그러므로 지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항상 내 몸에 짊어지는"[고후 4:10,11] 때문이기도 하지만 죄악의 세상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또한 죽은 것이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중심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말함이기도 하다. 과거 나 자신을 위해 살던 그 '나 자신'에 대하여 죽었으므로[고후 5:14]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2:20].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은[5:24]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25]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갈 2:20].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있으므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롬 6:9].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이므로 "죄로 하여금 우리 죽을 몸을 주장하여 지배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각자에게 달렸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우리 몸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삼아 죄를 짓지 말 것이니, 오직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도구로서 하나님께 드릴" 일이요, 따라서 죄가 우리를 이전처럼 사로잡아 포로로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10-15]. 바울[고전 15:33,34/롬 2:7,10/골 3:5-10]만 아니라 요한[요일 2:1,29/3:6-10/5:18/요삼 1:11]도 베드로[벧전 4:1]도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죄를 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경고하고 있다[히 2:14,15].


그런즉 세상 앞에서는 내가 죽은 것이요 내게 관한 한 세상이 죽은 것이니[갈 6:1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은[5:24] 것이어서 세상 삶에 관한 한 "죽은"[고 3:3] 자인 것이다. 과거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자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는 위의 여러 성경 구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세상 삶에 대한 죽음'인 것이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은 세상 삶을 사랑하여 땅의 것을 생각함이 아니니,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 위의 것을 생각함이 마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골 3:1]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가. 바로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나의 영원하신 짝이시다. 향후 '나'라는 존재의 불가분으로서 한 부분이 되어 계시니 나는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시다. 나는 육체, 그리스도께서는 그 육체의 영혼이신 것이다. 고로 실 가는 데 바늘 가고 바늘 있는 데에 실이 있음과 같이 그리스도 친히 나 자신의 모습으로 하늘에 계시는데 어찌 내가 그 반대인 땅 곧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이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무관하다는 뜻이요 이는 내가 구원 받지 못했음을 입증함이다.


그래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5].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내 스스로 또 그것을 죽일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이 죽음과 죽임은 우리의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지 자동으로 기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이 바로 '죽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한 "행함"[약 2:20,26]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을 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과는 육신이 우호친선 관계에 있어 한번도 원수가 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죽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자였으나 중도에 그 "믿음을 저버림으로써"[딤전 5:12] 그 본색을 드러낸 것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에 이르고[롬 2:7] 자기중심[우리말 번역 "당 짓는 것"이나 흠정역 "contentious"는 오역으로서 바른 의미는 "selfish, self-seeking"]이 되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바울 사도가 명백히 한 것처럼, "음란, 부정(不淨, impurity), 사욕[passion, lust], 악한 정욕[evil passions], 탐심(탐심은 우상 숭배)" 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골 3:5,6] 것이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되고[갈 2:25], "땅의 지체" 곧 "죄의 몸"[롬 6:6] 또는 "육신"[7:14-8:13]대로 살면 육신으로 행하게 마련이다[골 3:7].


"육신대로 살면 죽음"[롬 8:13]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골 3:6].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게 된다.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 등이다[:8,9].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새 피조물,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마땅한 일을 행함이다[:10]. "육신대로 살"[롬 8:13] 때에는 자기중심이니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치고 구원 받은 자가 없고[롬 14:7-9/고후 5:15]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 그리고 장사 지내진 것은 내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선물로 모셔 둘이 하나되어 있으므로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골 3:3]고 한 것이다. 내가 이제 살아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롬 14:7-9/고후 5:15]. 그래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 성경은 정확히 정의한 것이다[갈 2:20].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영원히 내가 살아 있고 이 세상에 관한 한 자기중심에 관한 한 나는 죽어 있는 것이다.


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힘이 역사적 현실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와 같이 자기중심의 나 홀로 살도록[영원히] 하심에 있지 않다. 이전과 같은 그런 자기중심의 삶은 처음부터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정확한 이유가 나와 하나되심에 있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고후 5:14,15] 바로 보지 않는 한 구원은 일절 얺다.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그리스도를 위함은 아버지를 위함임] 살기 위해서 오직 그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구원이라 한 것이다[행 5:32/롬 6:16/16:26/요 3:36/히 4:11/5:8/벧전 1:2/고전 2:9/약 2:5/1:12]. 둘이 하나되는 유일한 비결이 이 사랑에 있으니 곧 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루는 자로서 머리의 지시에 절대 복종함에 있는 까닭이다.


삶이라 하면 이와 같이 몸과 머리 관계에서 머리 및 한 몸의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여겨 사랑하고 특별히 머리에게는 절대 복종함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렇지 않고는 삶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살았다고 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자기 자신처럼 사랑함에서 우러나는 자진자발적인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고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로 몸의 "구속"[롬 8:23]을 입어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든 이 자연계에 속한 심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므로 믿을 때 시작되었던 그 영생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작되는 나의 삶인 것이다. 그런즉 이 세상 살고자 하고 내 뜻대로 살려 하고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죽은 것이다. 내가 살았다고 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다. 고로 이 세상 살고자 하고 자기중심으로 살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죽은 자요 산 자가 아님을 마음에 부디 굳게 새길 일이다.
 

항상 배우나 결국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어

"저들 중에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 3:6,7] 했으니, 특정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니며 여러가지 욕심에 끌려 죄를 짓게 되면 그 아는바 지식이 아무 의미가 없어 결국 구원의 지식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서, 그 지식이 죄를 짓지 않음 즉 행함으로 결실하지 않는 한 그 지식만으로 구원이 되지 않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남모르게 그 여자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니 남들이 보기에는 집회에도 충실히 참석하여 항상 말씀 가르침을 받으나 그래서 누구 못지 않은 일정 지식이 있으나 구원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한 대로 그런 지식이야 있으나 마나 흐지부지 유야무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고 해서 그 지식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라 한 야고보의 말 그대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