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16)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6)



4. 만물의 생성[창조]과 존립의 원리   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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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정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은 삶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 구원해내려는 작업장이요 이를 방해하는 악령 일당과의 전장(戰場)일 뿐이다. 저주 받은 땅에서 저주 받은[창 3:16-19] "죽은 자"[마 8:22]로서의 인간이 어찌 감히 이 하나님의 질서[저주 받음]를 무시하고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겠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잘 있다가 내일 또는 다음 순간에 죽음을 당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는 것을 두고 질문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죄가 더 있어 그렇게 불우하게 또는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하셨다"[눅 13:1-5]. 현재의 상태를 사람 사는 것으로 인정하셨으면 그렇게 말씀하실 리가 없다. 그렇게 죽는 이유를 말씀하실 것이지만 그런 식의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이 있으니 그것은 저주받은 인간으로서 죽은 자로서의 인생이므로 망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천지를 분간 못한 채 이 세상에서 남 만큼은 살고자 하는 일심에서만 정신없이 날과 달과 세월을 지새는 세상 사람들의 거센 파도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말고 덩달아 끼어 들어 뛰지 말고 물러서라는 것이다. "군대"라는 이름의 귀신 떼거리에 사로잡힌 수많은 돼지들이 비탈길로 내리달아 호수에 몰사하는 것과[눅 8:33] 같은 광경이 바로 이 세상이다. 거기 섞여 있다보면 성한 돼지라도 딸려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릴 지경이다.


돼지 떼 안에 귀신들이 들어간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고후 4:4]으로서 인생들을 철통 같이 휘어잡고 조종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멸망의 비탈길로 떼 거리로 내리닫게 하는 바로 그 형국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이 세상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그리고 "너희는 저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될 것이다"[고후 6:17]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한번 구원 얻었다고 태평으로 지내며 내 마음대로 즉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죄 가운데 즉 "육신으로 살아도"[롬 8:13] 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경고한 바와 같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빌 3:12], 우승하기 위해 일념으로 달려가는 경주장과 같은 것이다[고전 9:24].


이를 재차 강조하여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보답, reward]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3,14] 하였다. 이것이 "온전히 이룬 자들"[:15]의 마땅한 자세라고 했다. 이것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 종교에서처럼 자기 노력과 공덕으로 구원을 얻자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니, 전자는 마땅히 사람 사는 방법을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산 자'로서의 모습이지만, 후자는 '죽은 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을 목표함이니, 마땅히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 몸으로서의 생명 체제에서 벗어남으로써 망상으로 끝날 뿐이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표현은 같을지 모르나 그 의미만은 전혀 별개인 것이다.


전자는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요[딤전 5:16] 그래서 죄를 지음으로 죽음에 이르렀던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음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이나, 후자는 죄를 지으면서[죄는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므로] 자기 구원을 이루자는 것이니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뿐이요 절대로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것이 자기 구원을 목적한 것이므로 오직 위선(僞善)으로 그칠 따름이다. 이렇게 차이가 분명하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자기가 자기를 위할 경우 절대로 한 몸으로 하나일 수가 없음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 상대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니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의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시다. 무릇 먼저 존재하는 자가 머리의 구실을 하는 것이요 거기서 파생된 자가 몸의 역할이다.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생겨날 수가 없다. 먼저 있던 자에게서 그 나머지가 파생(僞善)된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법칙에서 그 기본 원리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든 둘 중 하나다. 성경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남자가 된 아담을 기준으로 인간적인 표현으로 어버이 자식 관계를 말하다보니까 하나님도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남녀로서의 성(性) 개념은 영원한 세계에 가서는 천사[영물]들처럼 됨으로써 없어지게 되어 있다[눅 20:35,36].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살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자들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기 때문"[:10]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11] 하였다. 우리가 몸을 따라 움직이도록 창조된 것이니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게 되어 있고, 두 가지 방향뿐이니 하나는 생명이고 그 반대 쪽은 죽음이다.


생명 쪽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사는 것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 그 반대 방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 전자는 선이요 후자는 악이다. 바로 이 선, 악을 행함에 따라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도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을 통해서라 한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행이다[빌 3:9].


우리는 자율성을 따라 움직이기에 기계처럼 사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좌우되는 것인즉 죽음의 길을 한사코 취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노력하고 힘쓰고 애씀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판에 박힌 듯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방법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는 것이다[고후 5:15].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시니[골 3:4]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 생명을 위해 살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바라고 살 것인가. 머리는 몸을 위해 살고 몸은 당연히 머리를 위해 사는 한 몸의 구조다. 이렇게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 선택의 기로에 항상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상의 모든 경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기계적인 것이 되어 반드시 죄를 짓지 않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나가도록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유가 속박된다. 또 자유는 있어 자기 욕심대로 할 수 있어 죄를 짓는 경우가 대부분일지라도, 그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거나 죄 짓는 즉시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자동적으로 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기계적인 것이니 일방적으로 결과가 나오도록 장치해 둠으로써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했는데 이는 다윗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시 16:7] 하고 말한 것을 성령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양면성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으니 그것이 곧 성경인 것이다. 즉 항상 양면성으로 나타나는 진리를 성령 친히 설명하심이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좌, 우 어느 쪽으로든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하도록 하신 것은 이런 양면성의 이치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이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와 같이 한 말씀을 두고도 이런 양면성의 원리로써 해석 가능한 것임을 성령으로 보이신 것과 같이, 내가 직접 하나님을 나의 머리로 모시고 그 지시[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삶을 스스로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만 착각하여 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그 갈래가 지어지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자연적으로 때로는 나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내 자신의 의지로써 스스로 좋아서 선택하여 행하는 것이므로 나 자신을 위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완전 자유로써 죄를 짓든가 의를 사랑하여 행하든가 양단간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후자의 경우 죄를 짓는 쪽으로 나가게 마련이고 전자의 경우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히 1:9]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반드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신다는 즉 내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는 모든 지식이 있어 이 양면성의 진리를 알면서도 그 스스로 하나님 위해 살기를 원치 않은 경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은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단지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전부라는 생각은 위험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은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심이 사실이나 나 역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므로[고후 5:15] 반드시 나로서는 일방적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는 삶이니 곧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우리만을 위하신다는 의미에서의 일방적인 흐름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쌍방이 즉 몸과 머리가 서로를 향해 일방적으로 흘러가니 결과론적으로는 쌍방 교류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항상 이런 양면성의 이치를 따라 판단하고 해석하여 원만한 이해에 이르도록 힘쓸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편에서 보면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시어 내게 일방적으로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나, 내 편에서 보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심을 확증해"[롬 5:8] 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으로써 마지막 날 부활에 이르겠다"[빌 3:10,11]는 결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모순도 아니고 자가당착의 표현도 아니고 엄연히 진리로서의 삼위일체의 법칙을 따라서 하는 말이다. 양면성을 이룬 양쪽이 동시에 움직이게 되어 있는 동시성(同時性)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양면성이요 동시성의 구현인 것이다. 그래서 일방적인 사랑은 없고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한 쪽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상대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 내가 즐겨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고 있는데 어찌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겠으며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으리요. 항상 힘쓰고 애써[히 12:28/고전 7:32,33/고후 5:9-11/롬 12:2]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려 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랑의 현상이요 그 증거가 아니랴.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 스스로 주님을 내 앞에 모시지 않고 있다는 결론이 되고 그리 되면 주님도 나를 위하시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내가 과연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고 필히 확증하여[고후 13:5] 점검할 일이다.


자유라는 말은 좌, 우 어느 방향으로든지 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의지가 작동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고 따라서 자유는 책임을 지는 것이 반드시 수반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를 지어도 대가가 따르지 않으니 죽음이라는 결과가 애초부터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죽을 필요도 없고 악령들이 멸망의 운명에 처해질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아담이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전에 한번 되어져 나타나 있는 일은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확증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영생하는 자이지마는, 항상 이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원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는 것이기에 각자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아닌가. 아담 역시, 죽은 자일 것이냐 산 자로 남을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경우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로에서의 선택은 이 세상에서만 한하고 천국에서는 더 다시 이런 시험이 없고 시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결정 나 버리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영원을 통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이 세상에서 여지없이 죄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서는 재차 시험해보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이 세상에서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 시험만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라는 시험 무대가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중요하고 무서운 현실인가.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12]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인가. 앞서도 누차 지적했지만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런 경고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 종교로서 분류되는 것이다. 그냥 한번 구원 받으면 내처 구원이고 시험과는 관계 없이 자동적으로 구원된다는 주장을 하니 성경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생명 아닌 죽음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까닭이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인식면에서 그만큼 뒷전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 둘이 하나 됨은 서로 자기의 상대를 보고 의식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만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의식함이다[히 11:1].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다 함은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항상 대면하고 그래서 나 자신을 의식함이 없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오직 의식하여 그를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골 3:4]. 이를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은 삼위일체 원리의 이 양면성의 진실에서 확인되고 있음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 과학'으로서, 말 그대로 양면성에서의 반(反)자연계 즉 영계는 젖혀두고 그 일면에 불과한 자연계만 살펴 그 일면만의 진실을 밝힘에 한정되어 있으니, 인생들 자체가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제한되어 있는 '죽은 자'로서의 현실인 까닭이다.


실험 관찰을 통한 확인 작업은 자연계에 속한 물질에 한해서다. 영혼과 같은 자연계에 속하지 않고 영계에 속한 것은 자연계의 영역 밖이므로 그 실체가 자연계에만 속한 것에 의해 잡혀질 리가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이 원리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이상 설명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를 인간에게 나타내 주시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열린 마음, 겸손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라면 능히 파악하고도 남을 일이건만, 공연히 시답잖게 잘 난 척 다 아는 것처럼 우쭐거리고 으스대는 오만한 자세가 스스로를 눈멀게 만든다.


그래서 성경에 교만(驕慢)은 멸망의 앞잡이라고 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멸망의 운명에 들어간 것은 스스로의 그런 교만 때문이다[딤전 3:6]. 시건방지게 저 잘난 듯이 으스댄 것이다. 지금도 그런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즉 보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그 이유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그래서 '삼위일체의 원리'가 원리로서 존립해 있음이다]가 되어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그리고 이 양면성은 '잠깐 즉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과의 양면성으로 겹쳐져 있다[고후 4:18]. 일면만을 보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무지(無知) 가운데에서의 해방이 시급하다. 가장 비근한 예로 공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존재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다고 그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린 아이만도 못한 미숙함이요 무지일 수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솔함이다. 사물을 신중히 제대로 관찰하는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네피림"에 대해 비중을 두는 것은, 성경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다"[마 7:13,14] 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25] 하셨으며, "적은 무리[little flock]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12:32] 등의 말씀을 들어, "결국 구원 얻지 못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이고 그에 비하면 영생에 들어가는 자들이 소수이니 하나님이 이를 미리 아셨을 것이므로 차라리 그럴 바에야 고통 받을 그 다수를 위해 처음부터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 아니냐" 할 경우 그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되기에 그러하다.


사람들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 친히 이미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6]고 되어 있으니 미리 아신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다는 것도 진실이다. 이렇게 후회하심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라"[삼상 15:11]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적으로 이렇다저렇다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속성을 벗어나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모든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니[고전 13:12] 그 때 다 알아지는 것이요 그 때 알아도 충분하다. 


둘째로 생각하는 것이 네피림에 관한 것인데, 우리가 실상 네피림이 어느 정도의 분포로 인간 세상에 깔려 있는지 알지 못한다. 거의 90%에 가까운 것인지 그 절반 정도인지 어떤 지도 알지 못한다. 이 역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어야 알 수 있게 되는 영역이다. 또한 우리로서는 누가 네피림인지도 알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 인구의 네피림의 분포를 90%라 하면[실상 이를 부정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구원 얻는 사람 역시 다수일지 소수일지도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모른다. 절대 다수라고 해도 하자는 없다. 그렇게 되면 네피림은 구원 얻지 못하므로, "절대 다수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씀에 우리가 어떤 토도 달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는 그 뜻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알려고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성경이 정해 준 지침을 따르면 되는 것뿐이니 그 지침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이다. 하나님께도 슬기롭지 못하신 면이 있고 약하신 데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보다는 나으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관계할 소관사는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가룟 유다를 그리스도께서 "마귀[a devil]"[요 6:70]라고 하셨다 하여 그가 "네피림"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그러나 확실하지는 않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런 네피림도 중도에 변절해서 그렇지 애초에는 스스로 믿음에 들어 온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네피림을 우리 스스로 식별할 수 없고 모든 인간 피조물["to every creature"]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으니까[막 16:15] 오직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이들은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아시니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3운법칙에 대해서는 다른 데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함.


'그리스도 구원'의 정확한 의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즉 구원을 '영생 얻는 것' 한 가지만으로 착각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생을 주심으로 즉 산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여 "참고 선을 행하게" 하심이 목적이다. 참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한정되는 것으로서 현 세상이 악하여 선을 방해하는 까닭이다. 영생을 주실 때는 그 영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 방법을 함께 가리키심이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 하더라도 그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거저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방법대로 살아야 최대한의 삶의 낙을 누릴 수 있음이니 그 방법이 곧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생명은 얻었으나 그 방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죄를 지은 것이요 그 결과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 방법을 가리켜 선(善)과 의(義)라고 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 모두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니, 바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다[롬 14:9/고후 5:15]. 모든 불의, 죄와 악, 불법이 이 자기 부인을 거부하는 자기중심에서 오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는 마지막 심판에서 "자기의 행위를 따라", "자기 행위대로"[계 20:12,13/딤전 4:16] 영원한 자기 명운(命運)이 결정되는 것이다.


"참는다"[롬 2:7]는 것은 이 세상이 악하므로 선을 행하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악한 세상이므로 악을 행하기는 쉽고 따라서 인내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악한 세상에서 악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을 행하자니까 "참고 선을 행함"이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주시어 산 자가 되게 하시고 새로 창조되게 하시고 "다시 출생하게"[요 3:3] 하시는 즉 제2의 인생 탄생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도록 모든 힘과 여건과 환경[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새로 창조된 구조 자체를 말함이니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을 가리킴]을 완벽하게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구비해 주심이다.


비유하자면 ‘짐승’처럼 되어 있는 것을 ‘사람’으로 만드심이다. 그래서 깨끗하게 씻겨놓았더니 도로 더러운 구덩이에 들어가 누워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짐승이라"는 자체 증명밖에 안된다. 때문에 성경의 모든 경고 말씀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대상이지 아직 믿지 않아 구원되지 못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곳이지 짐승들이 가는 곳이 아니다.


사람으로 만드셨으나 짐승 노릇을 하니 부득이 짐승들로 분류되어 처분될 수밖에 없다. 구원을 오직 '영생 주시는 것'으로만 착각하여 사람답게 사는 데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것이 그런 '짐승으로 분류됨'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을 올바르고 좋은 것을 사랑함으로써 이에 따라 자기의 의지력을 동원하여 여하한 일이 있어도 그 신념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냥 일방적으로 기계처럼 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기계로서 움직이는 짐승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사람이면 무얼 하는가. 사람의 마음이라야 그래서 사람으로 행동해야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가 아니 믿는가'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 것이 마지막 심판대다. 왜냐면 믿는다고는 해도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저버리고 짐승처럼 사는 일이 허다하고 그래서 그런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마 7:21/25:45]. 믿지 않는 이들은 의와 선을 행하지 않기로 즉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더 선호하기로 작심한 이들이니 벌써 심판을 받은 상태임을 명백히 하셨다[요 3:18/요일 1:5-7].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고 선행(善行)만 하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외에는 현재의 인간으로서 "선한 자가 아무도 없다"[롬 3:12/막 10:18]고 성경은 선언해놓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의나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면 아담의 범죄로 이미 죽은 자이므로 죽음만 벌어놓은 까닭에 일편단심 살고자 하는 욕구뿐이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즉 의와 선 자체를 사랑하여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일절 없는 까닭이다.


그런 상태에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도 모두가 이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행하는 수단 방편 정도로 여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사사로운 개인적인 욕심 없이 오직 선과 의를 사랑하여 우리가 선과 의를 행하는 것이다. 즉 자기중심의 그 어떤 선이든 악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인간 상태에서는 반드시 구원을 먼저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선과 의를 행하게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이미 죽은 자로서 선고를 받고 현재 죽은 자로서의 위치에 처해져 있는 것이 인간이다. 죽은 자가 도대체 자기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 구원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애당초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기 전에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죽지 않도록 스스로 조처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불합리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용납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두 가지 명백한 이유에서 구원 받지 않은 다음에야 그 누구든지 그 어떤 선도 의도 행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구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부터 먼저 받도록 조처하신 것이다. 그래서 새 창조요 다시 남이니 은혜로서 선물로 값없이 받는 구원이다. 아무런 선도 의도 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시는 조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 주시는 목적이 분명히 있으니 방금 설명한 대로 선과 의를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즉 사는 올바른 방법[이 방법이 한 몸 구조에서는 필수적이 되는 자기 부인이다]대로 살아야 '산다'는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닌가. 살려놓아도 또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다면 부질없는 일을 한 것이 아닌가. 누가 그런 무의미한 일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리라고 상상하는 것부터가 아주 잘못된 무엇에 홀린 생각일 것이다. 실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홀린 것이다. 에덴낙원에서부터 거짓말로써 인간을 홀리던 그 수법을 여전히 그는 애호하는 것이다. 왜냐면 여전히 잘도 먹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인간이면 전체적으로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이상 구절을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영생을 선물로 받아 누리면 되는 것으로 여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당치도 않은[합리적이지 않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모순된 말로 충만하다고 온 세상에 대놓고 선전하는 꼴이 된다. 왜냐면 성경은 그런 의미와는 정반대의 경고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위로의 말씀보다 오히려 경고가 더 많은 실정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행 10:35]고 했고, 성경은 요한의 부모인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을 가리켜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눅 1:5]고 했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롬 3:10,12]고 했는데 그러면 이는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의인"은 아브라함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을 믿어 순종할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에 따른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어 순종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믿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관건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부활을 나의 것으로 하는 기본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부인 속에서의 순종이 정작 중요한데, 어차피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우리 위해 죽으심의 내용을 세세히 파악은 할 수 없었지만 믿으면 의인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시에 이미 세상에 오셔서 우리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 같은 믿음으로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온전한 순종을 나타내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foreknowledge]을 통한 "의롭다 하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의 행함'은 일절 없이 무조건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의미로서의 믿음 하나로만 얻는 구원의 뜻이 아닌 것이다. 왜냐면 "새 창조"[고후 5:17], "새 생명"[롬 6:4], "새 사람"[골 3:10/엡 2:15/4:24] 등의 표현에서도 확인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새 계명"[요 13:34]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 함과 같다.


이렇게 "새로운" 것이라 함은, 처음 창조가 인간 범죄로 인하여 폐하여지고 부득불 새 창조로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에서 오는 것이다. 처음 창조에서도 명확한 구분이 있으니 '범죄하기 전'과 '범죄 이후'로서, 전자가 아닌 후자에 해당되는 것이 "새 것"이다. 다시 말해 새 것과 대립이 되는 "옛 것"[고후 5:17]은 범죄 이후 인간이 죽은 자가 된 다음에 내려진 율법 시대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새 것"이라 할 때는 아담의 범죄 이전부터 내려오는 영원한 삶의 법질서를 말함이기도 하다.


왜냐면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이후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설명해온 바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때로부터 확립된 생명의 영원한 원리원칙이기 때문이다. 즉 한 몸으로서의 머리와 몸 관계 곧 하나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있던 때의 옛 시대의 것[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의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은 폐해졌으나, 이러한 '자기 부인'이 핵심이 되는[왜냐면 하나됨의 사랑의 요체가 자기 부인에 있으므로] '실체'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영구 불변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7-19]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모세의 율법 즉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그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폐하여지는[실체가 나타나셨으므로 그림자는 당연히 소멸해야 하는 것] 상황에서, 그 그림자가 나타낸 '실체'마저 실종이 되는 혼동을 미리 경계하심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생만 얻어 챙기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인 것으로 선전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종교 교리가 판을 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두고 말하기를, "각 나라 중에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의'의 연장선상에서 한 말이니, 당시는 초대 교회가 갓 시작하던 때라 베드로 자신 그런 의식(意識)[아브라함의 "믿음의 의"가 말하는 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지금도 "진리를 따르는 자가 빛으로 오는" 것은 변함이 없음이다[요 3:2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행하는" 사람만 구원하신다는 뜻은 아니니 그 좋은 예가 십자가에 달린 채 회개한 강도["robbers-"막 15:27]다. 그리고 "도둑질하던 자는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선한 직업을 가지라"[엡 4:28] 함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진리를 따르는(행하는, "to do the truth{KJV}, to live by the truth{NIV}")"[요 3:21] 것은, 특정적으로 어떤 선행을 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왜냐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선행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리 또는 참된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따르는 마음을 말함이니, 이와 대조해서 말씀하신 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19,20] 것이 아닌 모든 것이다.


즉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 하나 악한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감추는 것 그래서 악을 감추면서까지 악을 그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고, 악을 행해도 불가항력으로 행하는 줄 스스로 알아 숨기고 감출 의사가 없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그대로 자기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여 죄로부터 자유 해방을 갈망하는[롬 7:24] 것이 "빛을 좇는[따르는-요 3:21]"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믿어 구원 얻음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수는 없다. 그 구원 얻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한다는 그 뜻이다. 애초 첫 사람 아담을 죽은 자로 또는 죄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산 자로 그리고 의인으로 즉 거룩한 자로 창조하신 이치 그대로다. 우리의 '새 창조'도 마찬가지다. 아담을 죽는 자로 만드시지 않았고 죄인으로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 아니, 거의 전부가 '믿어 구원 얻음' 자체가 선이라 또는 의라고 여기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이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앞서 설명한 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의함이다. 왜냐면 악을 행하는 자 즉 선을 행하지 않는 자[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누구든 죽지 결코 살지 못함을 악령 자신도 잘 아는 까닭이다. 자기도 그렇게 해서 영원 멸망에 처해졌고 아담 역시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선이 무엇이냐. 단순히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선행 또는 선이 아니다. 선은 말 그대로 좋은 것[善]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義]이다. 다시 말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선[좋은 것]이요 의[옳은 것]이다. 사람이 또는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려고 피조물을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의 그 행복하게 사는 방법대로 따름이다.


사는 방법을 두고 말하면, 자연계의 생물들은 기계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고 지, 정, 의를 갖추어 인격성을 지닌 것으로 창조된 피조물은 자기 의지로써 자유 선택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바로 그 '방법'이 좋은 것[善]이고 옳음[義]이니 그 방법대로 행함이 곧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그러면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한 몸됨'으로써 사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의 원리’가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킨다. 즉 a[갑]는 머리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b[을]는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다. c[병]는 이 양자가 '한 몸을 이룸'과 같은 체제가 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즉 한 몸 구조와 체제로서 사는 삶의 이치다. 이 한 몸이 이치에서는 우리의 신체 구조를 통해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법이 없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한 몸 즉 하나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 홀로 존재하셨기 때문에 그 애초의 하나를 [지금 많은 피조물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 유지하려는 함이다. 바로 이 목적으로 많은 피조물들을 지으신 것이다. 이 의도가 아니시라면 피조물들을 지으실 리 만무하다. 왜냐면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서 서로 아옹다옹 다투게 될 것인데 이런 것을 만드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로 싸우는 꼴이 재미가 있어 만드시겠는가.


여럿이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삶이 풍족, 풍성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 한 몸의 구성원은 자기 색깔은 파랑이지만 여러 이웃의 여러 색깔의 기기묘묘한 색깔을 다 자기 것으로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하나이므로 말 그대로 '하나'에서는 남과 나라는 둘 또는 셋, 넷 등이 불가능해지는 까닭이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하나'로서, 하나이니까 곧 나 자신이다. 이는 이론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이기에 현실적으로 그렇다.


즉 머리 없이 몸이 없고 몸 없이 머리가 존재하지 못한다. 철저히 상호 의존이면서도 철저한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는 것이 한 몸 구조로 나타나는 삶의 최고도의 지혜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주 평등이다. '양면성'의 삶의 완벽함이니 곧 머리와 몸의 구조로서, 하나님 지으신 모든 사물(事物)은 이 양면성으로서의 짝으로 된 체제에서 그 완벽함을 구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친히 계시는 그 모습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으니, 왜냐면 그런 구조 다시 말해 삼위일체의 원리대로 따름이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어 그 이상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삼위일체의 원리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만물만상이 없는 까닭에 만물은 저마다 하나님의 제조표(製造標, make mark)가 찍혀 있다고 말하게 된다[롬 1:19,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 피조물들을 만드심으로써 이 '한 몸'의 체제와 원리 안으로 들어오신 셈이다. 그리하여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이 오직 그 만드신 피조물들을 위하신다. 이는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피조물 없이는 조물주 하나님도 존재하실 수 없는 모양새로 만드셨기 때문에 한번 만드시고 정하신 것은 번복함이 없는 까닭이다. 이런 시종일관성은 모든 법질서 확립의 요체가 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를 구원하신 바탕 위에서 이를 근거로 하여 우리 자신을 구원함이다. 나를 이미 구원하신 그 사랑과 능력과 일체의 모든 의미를 내 스스로 기쁨으로써 수용한다는 뜻이다. 내 스스로 수용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때 거의 빠짐 없이 강조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사실과도 일치한다. 믿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구원이 손 가까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나음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병이 나은 사람에게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고 경고하신 사실에 우리는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내가 믿음이 있어 병이 나았다고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그 후에 얼마든지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음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병이 나았으면 그 능력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자세가 정상이요 그 믿음에 부합하다는 그 뜻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병 나음은 그 병이 나은 그 단 한 때뿐이다.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병도 죽음도 모두 죄로 인하여 온 결과이다. 이로써 분명히 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음'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병이 일단 고쳐졌고 하나님 친히 고쳐 주셨으니, 그 병 나음은 그 사람의 향후 자세가 어떠했든지 즉 죄를 짓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변함이 없을 줄로 우리는 알기 쉬운데 분명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죄를 짓고 안짓고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 오직 달린 문제다. 병고로부터 해방해 주신 그 은혜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즉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말라 하시니 죄를 짓지 않게 될 때 이는 그 사람의 의지(意志)에 좌우되는 것이다. 곧 자유 선택의 자유 의지를 말함이니 따라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실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앞에서 이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기를,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딤전 4:6]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성격을 처음부터 지니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실 리가 만무하다. 믿음을 주심으로써 사람이 믿게 된다면, 사람들이 "믿지 않음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셨을"[막 6:5,6] 리도 없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게 하셔서 즉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데도 이를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이 되므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병 낫는 경우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나 우리의 구원이 되는 믿음이나 모두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그렇게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내가 애초 믿음으로써 병이 나았지만 내가 범죄하게 되면 그 병 나음이 유야무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음으로써 나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죄를 범할 때는 나의 구원 역시 유야무야가 되는 것이다. 이 현실을 가리켜 베드로도 "옛 죄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다"[벧후 1:9] 한 것이다.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에 자기의 구원이 근거하고 있는데 잊을 정도가 되었으니 비참한 과거 회귀가 아니면 무엇인가. 즉 구원 받지 못한 이전 상태로 도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고서도 "더 심한 것이 생기는" 불행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죄를 안지을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를 굳게 믿었을 것이요 그래서 그 돈독한 믿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도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을 것이지만, 예수님 승천하실 당시 그렇게 함께 모였던 인원 수는 바울에 따르면 불과 500여 정도라고 했으니[고전 14:6] 하는 말인 것이다.


아마 상당수가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 그 각종 병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헤맸을 공산이 크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 또는 실패가 아니라 본인들의 믿음의 한계 또는 자기 인생의 실패인 것이다. 물론 애초 그 나음을 입은 병자들이 다시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성경 기록은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물론 그들이 당장에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이 되심을 믿지 않았어도 나중에는 믿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또 "더 심한 것이 생기는" 것이 반드시 병 나음이 무효가 되어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멸망을 의미한 것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진리를 일반 대중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만 자세하게 풀이해서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고 이상 설명과 같이 병 나음이 무효가 되든 아니면 그것이 멸망을 의미하든 그런 불행이 죄를 지은 결과임에는 분명하고 따라서 죄를 여전히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명백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세상에 고지(告知)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고 회개의 열매를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회개의 열매를 내는 자 즉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자에게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내려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단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믿으라"고만 할 뿐이지 회개를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개하지는 않고 단지 세례만 받으려고 나오는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 개인을 보고 "독사의 후예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할 리가 없다. 그리고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다"[:9] 함으로써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뜻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나무'를 처치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와 같이 회개의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10] 하였다.


회개를 주는 목적은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함"[:11]이라고 분명히 한 것이다. 세례를 명하신[마 28:19] 것도 바로 이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시기 때문이다[행 17:30].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망상은 당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니까 세례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망상인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죄를 여전히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한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세례 받는 것은, 구원에 들어가 구원 받았다는 표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벧전 3:21]이라 한 대로, 회개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는"[:21] 것이 아니니 그 일은 내가 회개함으로 스스로 죄를 버림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베드로가 이를 역설한 까닭은, 회개의 세례를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써 죄를 다시는 짓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회개임을 가르친 것이었다.


과거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내 마음이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있었던지라 나는 여기서 절대로 헤어날 수 없었으므로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 7:24] 하고 탄식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신 것이다[8:2]. 해방되었으면 당연히 나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지를 지으면 여전히 "죄의 종"[롬 6:16,17,20/요 8:34]이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과는 원수"다[롬 8:7]. 하나님의 원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가 구원되는 일은 없다. 오직 "멸망"[:19]이다.


앞으로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 각종 기적을 행할 때면 그런 죄 짓고 않고 하는 것을 따지지도 않을뿐더러 그리스도처럼 믿지 않으면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는 그런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거짓 기적", "불의의 모든 속임"[살후 2:9,10]이라 한 대로, 무조건 병자라면 다 고치는 것으로 과시해 보일 것이며 따라서 이를 부각시켜 "그리스도보다 더 큰 능력"이라고 과장하고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능력 면에서 견주어보아도 자기가 "진짜 그리스도"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할지도 모른다. 거짓 기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정도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영물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생 구원이 목적이시므로 그와 같이 차별화하심으로써 구원되는 요건을 밝히고자 하심인데 반하여 적 그리스도는 오직 속이기 위한 것이므로 능력 과시가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려 하나 인파로 인해 불가능하자 지붕을 뜯어 침상 채 달아 내렸을 때[눅 5:18] 그들이 믿음을 보시고 병도 고치시기 전에 "네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씀부터 먼저 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믿음과 그런 결심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 다 수행할 수 있는 것이요 이는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 되는 까닭이다. 죄 용서 받기 위한 첫째 요건인 회개가[행 2:38]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단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있는 때임에도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는 등의 사례가 다 이를 가리킴이다[10:47]. 상황은 다르지만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을 때 "네 죄가 용서함을 얻었다"[눅 7:48] 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회개합니다" 하지 않았어도 이미 그는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인데도 어째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결과로서의 죄 씻음이 가능해지느냐" 할지 몰라도, 이미 우리의 구원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셨고 우리 위해 죽으시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단지 그 실제 죽으심만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죄 용서는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서의 죽음으로만 그 기반과 토대를 삼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회개하는 모든 자에게 그 회개한 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친히 되어 계신다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그리스도만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불경스럽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눅 5:23] 하신 것이 바로 그 뜻이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24] 하심이 그 때문이다. 아무도 못한 일을 하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입증함이다.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 자가 죄를 넉넉히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죄 또는 육신에게 매여 있을 수 없으니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 됨은 필연이다[요 8:32,36/고후 3:17/롬 8:2].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구원이다. 상속자는 주인인 것이며 주인은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이므로 당연히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아버지의 일이라고 해서 제3자적인 위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상속자는 부모가 연로해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됨을 인하여 자식들에게 이어 주고 이어 받는 의미를 가지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는데 어떻게 상속의 의미가 성립되느냐 하겠지만,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갑은 을의 것이요 을은 갑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당당히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그리고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선물로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의 것이라는 놀랍고도 엄청난 이 사실과 더불어 또한 우리 자신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서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이 사실만 제외하고는 상속이 주인됨을 의미하기는 똑같다. 다시 말해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내 일처럼 주인의식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의 소유주라 해서 주인 행세를 발휘한답시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자연법칙 같은 것을 관장하거나 하는 그런 일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오직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일에 주인 의식을 드러내라는 것뿐이다. 마땅히 우리의 할 몫을 다하라는 것뿐이지만, 과거처럼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말고 철저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라는 것이다.


이것만은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서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힘든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힘든다는 것은 이 불의하고 죄로 뭉쳐진 세상에서 의롭게 행동하자니 밉게 보이고 따돌림을 당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충동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 되니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전쟁 마당에 적진(敵陣) 속에 있으면서 어찌 무사하기를 바랄 것인가. 이 세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통치하에 있어 말하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진영(陣營)이다[계 2:13]. 우리는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특공대원들의 위치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먹을 양식"[요 4:34]이라 하셨다. 하나님이시든 사람이든 영물이든 자기가 자기 일을 하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삶[생명]의 영원한 법질서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 살리시는 아버지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다하심이니 그와 같이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완성하시니까, 아버지께서는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발로 밟게 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눅 20:43]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이루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엡 2:6].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니 아버지께서 살리셨기 때문에 살아나신 것이다[롬 8:11/고전 6:14]. 다시 말해 위에 지적한 대로 누구든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영원한 법질서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으므로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그리스도 친히 스스로 살아나실 수 없는 것이다.


아들 스스로 살아나시는 것이 아니니 즉 아들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없고 오직 아들을 위하시는 것은 아버지시고 아버지를 위하시는 것은 아들이시니까 그 법대로 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새 생명 가운데 있어 구원 받은 상태에 있을진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니 이는 영원히 그러하다.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도 나를 위함이 아니니, 왜냐면 그 방법으로서의 항상 복종함이 다름아닌 '나는 하나님 위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둘이 하나됨을 이루는 당연한 몫을 내가 하는 것을 의미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달리 이름하여 "복종"이라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다. 이러한 본을 '사람이신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어느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쌍방의 동시성(同時性)에 의한 움직임이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마음 속에 각인시킬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악령과의 전쟁 중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쳐서 이겨 우리 스스로 원수를 갚는다는 말을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써만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양면에서 일면만 고려하는 것이 됨이니,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발로 밟는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이는 하나님 친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우리 발 아래 두시어 상하게 하시기[롬 16:20] 때문임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심이 금방 나타나는 그런 구조다. 그래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하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한다" 하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위하나 결과론적으로 내가 위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심이 동시에 나타나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결과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엡 5:28]이라 한 것이다. 결과론적인 '자기 사랑'이다. 왜냐면 아내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까닭이다. 자기 자신이 위해지는 몫을 아내가 담당해 주는 그런 한 몸됨의 구조다.


그러면 말하기를, "자기 개인에 관한 문제가 생기면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니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할 것이다. 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나 자신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나의 문제"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관한 문제"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구원 얻은 믿음의 "자기 부인"[마 16:24]의 결과다.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는 것이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것이다.



"자기 개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일과 그 영광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일을 이루는 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면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니 차원이 다르다. 더 다시는 나에게 관한 나의 일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연후의 나의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롬 6:4]이기 때문이다. 나의 일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지만 내게 맡겨진 나의 몫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러므로 티끌만큼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고로 '하나님의 문제'로서 인식할 수 없는 그런 '나의 문제'는 과감히 버리고 재고의 여지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매사 임하여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아주 단정적으로 확언하지 않았는가[롬 14:7-9]. 그래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도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우리' 위주로 시작하는 것이니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6:9]께 기도함이다. '나'는 그 '우리' 안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해 줌으로써 '내'가 역시 위해지는 이치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 눈을 바로 뜨고 있으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는 천사들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서 죽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될 리도 없는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을 하고 있었는데도,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惡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인해[아담은 여자의 말대로 하고 여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른 결과로] 현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시한부 생명 그리고 나약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전락해 있는 상황을 항상 우리 뇌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 밝힌 대로의 진상을 알 리가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 자연계에 처해 있는 현재의 실태를 절대로 정상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법과 질서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조화(調和)의 미(美)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제가 있어야 할 위치에 제각기 정상적으로 자리잡아 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아름답다 하는 이유도 같은 이치에서다. 다시 말해 한 몸으로서 이루어진 구조에서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구실을 다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넬슨이 한 말이다. 조국은 각자가 자기 임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이공 순신은 그러한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몫에 대한 충실을 그 생애를 통해 구현한 인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


갑과 을이 하나되어 병을 이루어 병으로서 행동한다. 갑이 하는 일은 을이 하는 것이 되고 을이 하는 것은 갑이 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와 나는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그렇게 된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심은 내가 죽는 죽음이기 위해서고 그 다시 살아나심은 내가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영생하는 것이 되기 위하심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영원히 죽지 않으시고 사시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 곧 을이 하는 일은 갑이 하는 일이 되므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곧 나의 하는 일이요 할 일이요 영원히 하게 될 일이다. 즉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된다[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된다[갈 2:20]. 왜냐면 그리스도[머리]께서 우리[몸(의 각 지체)]를 섬기는 위치에 계시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곧 몸의 사는 것은 머리요 머리의 삶은 몸을 위함이다.


이와 같이 갑, 을 양자(兩者) 관계를 이루어 병이라는 하나로서의 조화 통일을 형성하고 있는 한 몸 체제에서의 각자의 역할이 바로 삶의 법이요 이 법을 지키는 것이 질서이다. 무질서는 이 법대로 하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음이다. 생명 체제가 한 몸의 구조에서의 하나됨에서 오는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것인데 이 법대로 하지 않으니 생명일 수가 없고 생명 아닌 죽음일 뿐이다. 바로 오늘의 결과 곧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고가 이를 웅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법과 질서 차원에서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갑과 을 혹은 머리와 몸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관계에서도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부모[엄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식은 장성하면 연로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부모를 위한 모든 것을 떠맡게 됨이니 이는 당연하다. 남자는 여자를 위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함이니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것이고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고전 7:4].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질서 확립 차원에서 죽음과 같은 오늘날의 인간고가 있는 것이다. 즉 몸의 각 지체로서 머리를 위하지 않으면 머리 역시 그 몸[의 각 지체]을 위할 수 없게 되니 생명의 체제에서 벗어남이다. 그러므로 자연만물에 법칙이 있듯이 인간 삶에도 당연히 법이 있어 그 생명의 법을 따라 행동해야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이다. 그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못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여기서 구원을 얻으려면 법을 지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모를 섬기지 않는 자 즉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딤전 5:8] 자로서 당연히 영생에서 제외된다. 이런 사실을 전적으로 외면하고 덮어놓고 공짜로 영생에 들어가는 줄로 알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과 지배에 말려들어 구원도 복음도 영생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구원 받았답시고 네 활개 치는 오늘날 세상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도 이와 같이 갑과 을과 병의 관계에서 우리에게[내게] 갑을(甲乙) 관계가 되시어 둘이 하나되시기 위함이다.


공동체 의식이 사람 삶의 기본 질서가 되어 있음은 바로 이 '법'과 '질서' 차원에서다. 이공 순신은 전쟁 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러한 사람 삶의 도리를 따라야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병조판서니 이조판서니 하는 이들의 연줄로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당당히 자기 실력으로 나가야 전체 조화가 이루어지고 모두가 이러한 정도(正道)를 걸어야 원만한 인생 삶이 이루어진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따랐다.


때문에 어렵사라 관직에 나아가 있어도 상사의 부당한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전란이 나기 전까지는 볕 볼 날이 없이 불우하게 지낸 것이었으나 이공은 그러한 자신의 신념에 찬 생활 자체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공명심에 들떠 부화뇌동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공의 이같은 고상한 생활 자세를 이해할 사람은 실로 가뭄에 콩 나기처럼 희소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사람'은 그를 외면했어도 '하늘'이 그를 버리지 않아 '때'가 그를 불러준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바로 이러한 자기 부인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함이다.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 보듯이 그런 모든 공명정대한 처사는 모두 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자기부인의 그림자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을 명령하시는 것이니[고후 5:15] 이런 자기 부인은 갑과 을의 대칭 관계에서 오는 것이어서 상대가 있어 자기를 위해 주어야 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바로 그렇게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나간다면야 세상이 모두 이상향을 이룰 것이지만, 그렇게 대차게 나가는 이들이 워낙 소수인지라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은 자기중심 일변도의 세상에서 그런 대세에 밀려 장외로 쫓겨나 불이익을 당하고 소외되고 볕 볼 날이 없게 되는 것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를 버린다면야 어찌 이성과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 하리요. 이공 순신은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즉 죽는 한이 나더라도 그런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매사 임했기 때문에 우리의 본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어 우리가 할 일 즉 '을'이 하는 일을 '갑'으로서 하셨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니 곧 을은 모름지기 갑의 일을 함이다. 이 생명의 법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지만, 단지 오늘날은 우리에게 이러한 3위1체 의 원리[3운법칙으로써 확증되어 있는]가 밝혀짐으로써 우리의 이 믿음에 보다 확고한 토대를 깔아놓게 되었다는 이 사실만 새로울 뿐이다.


성경은 이 생명의 도리를 가리켜, 다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 아주 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다[고후 5:15].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다. 갑은 을을 위함으로써 병['둘'이 '하나'된 '우리']을 이루고 을 역시 병을 이룸으로써 역시 갑을 위함이 된다. 그래서 몸[의 각 지체]이 사는 것은 머리요, 머리가 사는 것은 몸[의 각 지체]이다.


이를 표현하여 성경은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빌 1:21]라 하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 2:20]이라 하여 이 삶의 이치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앞서 지적했다. 머리는 몸의 삶을 살고 몸은 머리를 위해서 산다.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우리 각자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다.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 다시는 우리 산 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사랑하시어 자기 자신을 주신 즉 그 영원한 삶을 나를 위해 사시는 그리스도[머리되시는]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작되는 삶의 방식 아니라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의 영원한 삶의 법과 질서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어져 버린 유리 그릇'과 같이 되어 전혀 못쓰게 된 처지에서, 새로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하시니 이리하여 원 위치대로 돌아온 것이 바로 현재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영원한 법과 질서다. 고로 이를 다시 어길 때는 영물들 중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령들이 그 범죄로써 '멸망으로서의 스스로의 운명'을 정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죽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생명으로 반전되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의 핵심은 자연계에서는 '갑과 을과 병의 구도(構圖)'로 나타나고 인간[인간만 아니라 인격성을 갖춘 영물(靈物)들도 이에 해당된다] 생활에서는 '공동체 의식의 삶'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입자성과 파동성이 함께 어울려야만 빛을 구현해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룬 '너'와 '내'가 '우리'를 이루어 전체에 두루두루 골고루 미치는 평등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행복을 공동으로 꾀하게 되는 이상향적 삶인 것이다.


3위1체 원리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무릇 존재하는 것은 양면성을 이루어 그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하나의 개체 또는 개념을 이룬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양면성은 대칭성을 띠므로 극과 극의 대립이라 할까 성질이 전연 별개로서 반대가 되는 내용이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남자[갑]와 여자[을]는 사람[병]이라는 데에서는 공통점을 이루나 성질은 별개다. 그러나 이렇게 상반되는 성질로서 짝을 이루고 있을 때는 반드시 인과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파생(派生)되었다는 것을 3위1체 원리는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한 것이 아니라 인과(因果)를 이루므로 대소, 주종 관계임이 명백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3위1체의 원리는 모든 사물이 선후(先後)의 차례가 분명하여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계를 관장하는 제반법칙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할 뿐 아니라, 사람 삶의 가장 근본이 되는 도리를 밝힘으로써 창조자를 머리로 모시고 모든 이웃들을 그 한 몸의 각 지체들로서 인식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공동체 의식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 자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나의 상대이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성경을 통해 명확히 밝혀진 이상, 그 방법에 대해서는 온전히 우리 각자에게 일임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실 이유가 없다. 단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와중에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이 경우 기도하면 그 소청을 들어주시어 할 일을 친히 가르쳐 주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모를 때 주님께 기도하여 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 그 외에는 이리저리 하라고 강압하시지 않는다. 이는 당연한 것이니 왜냐면 그렇게 하지를 않을 때 그것은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 강압하시지 않고 우리 스스로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젖 먹은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데에 30배, 60배, 100배의 차등이 생기는 것이 그러한 우리 각자의 열심과 "지혜"[막 12:33]를 다하여 스스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그 결과가 좌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행복론


엔터테인먼트[오락, 연예 등] 기획 전문가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감은 고향과 관련되어져 있을 때, 환상을 느끼고 거기 젖어 있을 때, 모험, 탐험 등에 빠져 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라고 말한다. 행복론(幸福論)에서 그 본질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그 극치를 맛보고 있다 하리라. 아버지가 계시는 곳 우리 인간의 본향은 에덴낙원 곧 영계이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중(路中)에 있는 나그네 길이요, 우리는 환상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있는 실제 상황이요,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접전에서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실천함에 따르는 넘치는 보람이다. 그래서 창창한 미래와 화려한 장래를 내다보기로는 우리의 경우처럼 알찬 것도 없다.


사람은 모쪼록 행복하게 즉 사는 맛을 즐기며 살고자 함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살 맛을 잃었을 때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므로 무슨 맛으로 사느냐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순종 자체가 좋아서 함인 것처럼 자기 부인이 좋아서 할 때는 그 자체가 행복이다. 고로 믿음은 관점 차이, 인식 차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는 다르다. 그들은 말하기를, "마음은 만물의 본체로서 오직 단 하나의 실재(實在)이고, 모든 존재는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마음밖에는 딴 세상이 없으므로 극락정토란 것도 결국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경지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심정토(唯心淨土)"라는 말도 쓴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므로 부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도 홀로 깨달아 자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聖者)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일반 동물에게 '마음'이 있는가?" 하고 묻게 된다. 그들도 영생하기를 희구하는가? 그들도 죄와 의(義)를 아는가? 그러면 어째서 인간의 마음이 "만물의 본체(本體)"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물의 본체가 아니라 마음은 영혼의 영역으로서 영혼은 오직 영계에 소속된 것이다. 자연계와 영계를 구분 못하는 혼동과 무지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일체유심조"다. 자연계의 짐승들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없다.


자연계의 동물들과의 상칭(相稱, 대칭, 대립) 관계에서 영계의 짐승들이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들만이 영적 작용으로서의 '마음'을 작동시킨다. 성경이 하나님 창조 당시의 이 영계의 짐승들을 표현할 때 천사(天使)들 또는 영물(靈物)들이라 하지 않고 그냥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 "모든 육축"[창 2:19,20]이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대칭성[형]으로서의 생물이라는 뜻이다.


그냥 영물이니 천사니 하면 그런 상칭성으로서의 의미가 없이 별도의 피조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 앞서 설명한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도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성경의 기술(記述) 능력이 돋보인다.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록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그런 상칭 관계로 되어 있지 않으냐 하겠는데, 바로 그 대칭형을 이룬 모습이 영혼과 육체로서 영혼은 영계에 속하고 육체는 자연계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별도로 만드신 사실을 성경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으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첫 단계로서의 육체 창조이고, 다시 "하나님이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써 "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 spirit)이 되어" 영계에 속한 영혼으로서 마지막 단계로 창조된 것이다[창 2:7]. 즉 인간 자체가 그런 상칭 구조로 되어 있음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므로 자연계와 영계 양쪽 모두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 필연성에서다.


이렇게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사람이 영계에 속한 존재이므로 그 영혼[영원한]에 부합하게 몸 역시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부터 영계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변환될 필요가 있어, "에덴의 동방에 한 동산을 창설하시니'[:8] 이것이 자연계와 상칭되는 영계(靈界)이다. 사람[인간]을 이 에덴낙원에 두시니 여기서 나는 영적 식물을 먹음으로써 아담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으니, 변환되었다는 것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다시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뜻한다, 범죄로써 죽은 자가 되니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영계에서 다시 아담을 위해 영적인 동물[靈物]들을 지으신 것이다[:9]. 이렇게 인간이 그 자체로서 이중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은 자연계와 영계를 아울러 다스리는 자이므로 양 세계에 다 속해 있어야 하는 까닭임을 앞에서 설명했다. 또 자연계 생물의 정점(頂點)이자 영계에 속한 생물의 시발점(始發點)으로서의 의미를 함께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명백히 과학적인[합리적인 즉 이치에 맞는] 그러나 극히 간명한 기술(記述)로써 양면성의 원리 즉 삼위일체 법칙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이루어져 있음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원리와 법칙을 따라 합리성 있게 기술하고 있으니 과학적이라 하는 것이지, "과학적"이라는 말 자체를 무슨 권위인 양 여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계에 한정되는 것으로서 그와 대칭[대립]되는 영계는 손도 못대는 것이므로 온전한 것일 수도 없다. 자연법칙에 한정된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지식일 수도 없다. 자연계에 속한 자연법칙만 알고 있으니 이것이 전부인 줄 알아 영계나 영적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고로 그러하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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