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6일 화요일
★천기(天機)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하여 이 시대의 징표는 분별할 수 없는가
천기(天機)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하여 이 시대의 징표는 분별할 수 없는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는 것이니 너희가 천기(天機)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표는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 하셨다. 이 세상은 진리를 몰라 방황하던 불교의 석가도 고해(苦海)라고 버린 것인데 구원을 받았다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자랑하는 당신이 어찌하여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 삶에 취해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연계와 대칭(상칭, 대립)되는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절대로 이 세상으로써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경고해줄 생각은 않고 "하나님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 운운" 하며 세상 술에 취하여 인사 불성이 되어 있음이 웬 말인가. 그리 하고도 당신이 영생에 들어가리라 자신하는가?
다니엘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대로 지금은 신속히 내왕하는 교통 통신 분야의 발달이 날이 다르게 고도화하고 지식이 급증하는 때다(단 12:4). "지식이 더한다"의 "지식'은 과학 지식이다. 그만큼 우주 삼라만상의 제반 법칙들을 더 알아간다는 뜻인데 따라서 이에 대처하는 의미에서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망라하는 법칙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도 우연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 구원의 희소식, 영생에 이르게 하는 재(再)출생, 신(新)창조의 복된 소식 전달도 이런 원리와 법칙 차원에서 설명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이냐 하면 다자간(多者間) 선택이 아니라 오직 양자 택일로 압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순수성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듣게 되고 그 사랑이 그 십자가 고난 받으심으로써 확증되었으니, 나를 사랑하시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내게 선물로 주시는 마당인데 무엇 때문에 그 말씀에 거짓이 있으리요 하는 믿음에서,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준으로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통하는 진리의 정확성이요 진실성이다. 여기서 벗어날 일은 없다.
단지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이니만큼 역시 과학적인 사실로써 이 영광스러운 사람 살리는 희소식을 전달하는 때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서 정확히 이분법, 흑백 논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다. 다양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양성은 지엽적인 것에 속하고, 근본 줄거리는 항상 양면성으로 가름되어져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리 아니면 모두가 거짓이라 판단하는 것이 지혜이다. 절대로 여러 갈래일 수 없다. 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초자연계가 병존한다는 의미요 삼라만상이라는 결과물이 있으니 그 배후에 창조주의 능력이 그 원인이 되어 있음을 대낮같이 이제는 밝히고 있음이다.
하나됨은 둘로서의 짝의 개념이지 그 이상 이하의 의미는 없다. 이런 근원적인 이중 구조를 "하나로서의 둘" 또는 "둘로서의 하나'라고 한다. 셋이나 넷이나 그 이상으로 된 하나로서의 체계는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어 그러한 몸과 머리로서의 '하나' 체제만이 처음부터 있어 온 것이다. 이 하나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요 악이다. 즉 생명과는 반대되는 대립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머리와 몸으로서의 이중 구조와 더불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겹쳐져 있는 것이 과거와 다르니 새 창조, 다시 출생함의 필연성에 따름이다.
양자(兩者) 관계의 이 둘 만의 세계에 제3, 제4가 끼어 들 수 없다. 때문에 "아비나 어미나 자식이나 아내/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 10:36/)고 선언하신 것이다. 따라서 아내/남편을 어떻게 하면 사랑할꼬 하는 것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사랑하여 섬김이 될꼬 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에 옴은 당연하다(고전 7:32-35). 이 자연계 세상에서의 삶과 장차 오는 초자연계에서의 삶을 똑같이 향유할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하나를 버려야 그 다른 하나(대칭이 되어 있는)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엎 스핀"이면 저것은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정쩡하게 '다운'도 아니고 '엎'도 아닌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을 확증함이 "양자 얽힘"의 실험에서 확인된 3위1체의 원리이다. 마지막 아담과 나와의 관계는 "육체"와 "영혼" 관계로서 후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전자가 나이다. 인간에게 영혼과 육체처럼 밀접한 관계는 없다.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최우선이다.
그러므로 장차 전개되는 초자연계에서 영원히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항유(享有)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검지 않으면 흰 것이고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에 없다. 성경이 진실일진대 성경 내용과 어긋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간에 이 세상 곧 온 천하를 속이는 악령 즉 용의 거짓말, 속임수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의 원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만물은 짝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고 짝의 개념은 양자 관계이다.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진실과 거짓만이 있을 뿐이니 그 중간은 없다. 구름이 끼어 햇빛을 가림은 가렸다, 가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누어져 분별되는 것이고, 빛은 어두움과 상대해서만 분류될 성질의 것이다. 성경이 이미 그 자체 증명으로써 그 진실성이 확증되어 있는 이상,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영원 불변의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고도 남는다. 상행과 하행의 두 열차가 동시에 움직일 때는 어느 것이 움직이고 있는지 또는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지 얼른 분별이 안되지만 어느 하나를 기준할 때 그 분별이 쉬워짐과 같은 이치다.
다시 강조하지만 3위1체의 원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요점은 자연계가 있으니만큼 반드시 초자연계의 세상과 그 삶이 있다는 증명에 있으니, 그리고 그 성질은 하나를 기준함으로써 나머지 하나의 "다운 스핀"과 "엎 스핀"이 정해지는 것으로서 명확히 확인된 것인즉, 영원한 세계에서 죽음의 고난, 고통 일변도로 지내기를 원하거든 이 자연계에서의 삶을 즐길 것이요, 그렇지 않고 그 영원한 고난을 한사코 멀리 하려거든 이 자연계에서의 삶(살고자 하는 마음)을 극력 기피할 일이다.
때문에 마지막 아담께서는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태평으로 잘 사는 이들은 오는 세상에서 위로 받을 것이라곤 단 한 방울도 없이 다 소모 고갈 상태에 있다 하신 것이요(눅 6:24,25), 그래서 우는 자는 울게 되고 웃는 자는 울게 된다 하셨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극적인 국면 전환을 꾀하거든 반드시 회개하여 자아중심을 버리고 오직 마지막 아담 중심의 삶으로 급선회하는 일이 시급하다.
바로 앞에 예를 든 "양자 얽힘"의 "다운 스핀"과 "엎 스핀"을 말씀하신 것이다. 정반대다. 정반대가 아니라면 하나로서 통합되지 않는 법. 그래서 둘이면서 하나(통합), 하나이면서 둘(마주 보는 대칭에서의 정반대의 성질)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부모나 처자식이나 나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면, 이제 다니엘의 예언(단 12:4)이 마침내 이루어져 있는 이 시대에 와서 3위1체의 원리(3운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를 숙지하고 있는 오늘에는 그 뜻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 또는 등장은 이러한 마지막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일관하는 고집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철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살후 12:12)
명확한 진리와 진실의 판단 기준을 정하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짓일 수밖에 없는 이런 이분법, 흑백 논리에서는, 죽으면 막연히 하늘 나라로 간다는 등의 낭만적인 생각이나, 나는 불교를 믿으니 극락에 가고 기독교를 믿으니 천국에 간다는 등의 애매 모호한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세파(사탄이 각종 지식으로 현란하게 어지럽히는 때의)를 헤치고 나갈 수가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진실성을 믿는다고 전부가 아니다. 세상이 너무나 무신론에 휩싸이다보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큰 예배나 "하나님이 기뻐하심"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제 시대는 무신론자라면 과거 유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행세 못할 정도였던 세태 그 이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니, 무신론을 앞세우던 악령 용이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으로 가장하기 위해 유신론을 한창 잘 써 먹던 시절을 접고 새로이 유신론의 시대를 시작하는 때이므로 땅 위에 발붙이고 있는 인간으로서 무신론자는 장차 하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되면 오늘날보다 사정은 더욱 악화될 것이니, 느닷없이 하나님으로 가장한 마귀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될 것이므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때 늦기 전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분간할 것을 미리 분간해서 즉각 행동에 임하라는 경고다. 결코 차일피일 할 일이 아니니 오늘 이 시간 크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 새에 저승 사자가 아닌 사탄의 패거리가 독수리 병아리 채듯 낚아채고 갈 것이 명약관화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경고에 세세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이다. 성경 곧 사도들의 서신에 많은 언급이 되어 있다고 그것이 중요하므로 강조해서 한 말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당시 처지를 따라 한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다지 필요 없는 내용일 수도 있음이다.
이런 것은 악인(사랑은 없이 단지 자기 영생에만 욕심이 있는 자아중심의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종의 함정 역할이 된다. 정작 중요한 말은 교회 앞에서 사도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듯 되풀이하여 설명을 해 왔기 때문에, 어떤 특정 사연이 있어 필요에 의해 교회에 편지할 때에는 그렇게 평소 귀가 따갑도록 되풀이해 역설해온 중요 대목에 대해서는 겨우 몇 마디 정도의 언급으로만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편지들로 모아진 것이 오늘의 신약성경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니,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듯이 해야 하는 이유다.
100%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 되어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는(머리가 되시는 주님 친히 내게 그러하시므로 이 양면성의 동시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는 것) 즉 성령 충만이 없이는, 그냥 이전처럼 8,90프로 정도로만 가지고도 하나님을 위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한다면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게 되어 있는" 이 시대의 난관과 위기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 등이 우리를 거칠게 흔들어 깨우며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긴박한 내용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 아니면 저것,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단 1%라도 저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그것은 기필코 저쪽으로 100% 넘어갈 수 있는 아니 벌써 그 쪽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상황임을 알리는 적신호이다. "양자 얽힘"에서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이 이를 실증해주는 것이라고 앞에서 지적했지만 다시 강조하게 된다.
이 사실은 주님 친히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를 따라 올 수 없다"고 선언하심으로써 기정 사실화한 것이다. "때가 단축해졌다"(고전 7:29)는 바울 사도의 경고는 그 편지가 오늘날까지도 우리 가운데에서 읽혀질 수 있도록 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된 예언 성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오늘날이야말로 이 말씀을 받는 그 적절한 시대인 것이다. 물론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핍박과 환난이 있었던 때는 과거 어느 때든지 그러했고 바로 지척에 있는 오늘날 북한 사회가 그러함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시대로 따질 때 이 시대가 특별히 그러함은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북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금 여기가 북한 사회라 여기고 믿음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도 그러했으니 교회 탄압은 특정한 때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전국적인 핍박의 시기에는 복음 전함을 들어내놓고 할 수 없지만 이 땅에서는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는 않으므로 그런 제약이 없다는 차이뿐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탄은 변치 않았고 그 사주를 받는 세상도 변한 것이 없다.
소위 문명 사회이고 개화되었다 하여 그런 야만적인 사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니 악마 용(龍, dragon)의 강온(强穩) 양면 전술의 일환일 뿐이다. 이 세상이 그리고 지역 사회가 초대 교회 당시나 지금이나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들어 있는 이상, 그 통치에 반하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즉각 원수를 맺는 적대 행위가 되는데 방관 좌시할 리가 없다. 그 사회에서 축출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이를 각오하고 믿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거의 짐승처럼 취급 당하는 것은 마지막 아담께서 영광 중에 다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지속되도록 정해져 있으니, 제자들과 대중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따라올 때 몸을 돌이키시고 "너희가 나를 따르는 의미가 정작 무엇인지 아느냐"는 뜻으로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에 나갈 때 먼저 앉아 셈을 따지는 것으로써 충분히 경고하신 바와 같다(눅 14:25-33). "천국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 좁은 길을 택하기를 힘쓰라" 하셨고 심지어는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눅 13:24)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나아가시던 주님께서 도리어 근심 낙망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나의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천국은 육체의 최고의 낙인 "먹고 마심"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기쁨과 의(義-이것이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이유-롬 14:18)가 그 특징이라 한 대로(:17), 바울 사도가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했던 같은 편지 안에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강조하고, 그리고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다(빌 3:1) 했으니 여기서도 양면성과 동시성은 항상 통한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한 대로, 구원 받은 증거 중 하나가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고 기도함(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유일한 목적인즉-요 20:21,22/요 4:34)"이요 "모든 일에 감사함"(살전 5:16-18)인 것이다. 생명의 본질 중 하나가 삶의 향락에서 오는 희열과 평안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은 필요에 의해 쓴 맛과 단 맛 중 그 쓴 맛을 보는 때일 뿐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 해서 "우리 세상"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 세상"이라 착각했지만 그리스도께 속함으로써 "이 세상 임금"(요 14:30)과의 대결 국면을 만들면서(8:23/15:19/18:36) 세상에서의 환영과 이전과 같은 우호적인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그런즉 핍박을 받을 때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아도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고...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광야와 산중과 바위 틈과 토굴에 몸을 의탁해도"(히 11:35-38) 여전히 한결같은 변함이 없는 감사요 평안이요 기쁨이요 노래로서(엡 5:19) 입에서는 찬송이 끊이지 않는 것을 생명의 본질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히 13:15).
반면 그러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않고 실상은 세상과 변함 없는 하나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해도 자의적으로만 믿고 그렇게 자처할 뿐이지 성령을 받은 일도 없고 구원과는 실상 남남이 되어 있음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증언한 결과 그 즉시 증오에 가득 찬 돌팔매질을 당하여 돌 무덤 속에서 숨을 거둔 사실을 상기해야 마땅한 것이다. 최소한 그런 각오 없이는 이 세상에서 "구원"이란 말은 입에 꺼내지도 말아야 하는 것.
이런 성경의 증언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더불어 희희낙락하려는 것 자체가 전연 믿음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스스로 입증함이니 오늘날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경고인즉, 이런 사회적 돌파매질을 염두에 두면서 매사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적대적(최소한 우리를 적대시하는) 분위기나 상황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을 즐기려는 것 자체가 보통 모순이 아니니 모순이라기보다 아예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지를 않은 실상을 입증함이다.
생명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항상 환영 받은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시는 기적에 놀라워하면서 열심히 따르다가 정작 말씀의 내용이 이 세상에서 의인이 어떤 위치에 서는가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뿔뿔이 흩어져 미련없이 주님 곁을 떠난 것이다. 소수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 떨어져 나가니까 12제자에게도 "너희도 가려느냐" 하셨을 정도였지 않았던가.
다시 말하지만 영생에 이르는 문은 좁고 길마저 좁아 찾는 이가 적으니 어찌하든지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두렵고 떨" 만한 말씀을 하셨는데도 많은 사람이 이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쇠 귀에 경 읽기를 자청하고 있다. 힘쓰라 하셨으면 힘쓰면 될 일인데도 꼭 그와 반대되는 말로써 속이는 사탄을 더 믿는 인생들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하셨으니, 죽는 줄로 알아야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마 18:3) 것인데 그것을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기어이 거꾸로 해석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한 고집들이니 그런 이들은 "절대로"(마 18:3)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
그 말씀들이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상식에 반하는 불가사의가 되어 있다. 청개구리 이야기가 옛부터 구전되어 오는 것을 보면 이런 교만도 인간의 숙명적인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만드셨을 리가 없다. 자유 선택이란 것이 이토록 얄궂은 결과도 빚어내는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면 믿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없다.
성경은 누구나 즉 무식한 자나 유식자나 똑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일부러 그런 단어와 어휘와 표현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 만인(萬人)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를 비틀어 달리 해석하고 반대로 알아들으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인간의 실상이 오죽했으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neve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고 하셨을까!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신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 말씀하신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은가. 영생도 좋지만 충분히 각오를 하라는 말씀이시니 결코 만만치 않게 장애와 장벽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즉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세상이 주는 것은 편안한 삶에서 오는 것인데 편안하기는 고사하고 오늘 당장이라도 숨 넘어가는 일을 불시에 당하는 것이 인생의 일반적인 상황인데 이를 막을 수도 없거니와 이 세상 삶의 의기양양함도 사마천이 말하는 희대의 악한(惡漢) 도척 정도의 장수(長壽)가 아니고는 항상 누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을 통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하심을 입기 위해서는 이 세상 임금이요 신(神)인 용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임을 사전에 숙지해야 하는 것이니, 이기고 지는 전쟁 상태에 돌입하므로 "원수"(마 13:28)인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그러나 이 "원수"됨은 내용이 다르니 그들이 나를 원수로 보기 때문이요 내가 그들을 미워함은 아닌 것)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으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4-39) 하셨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위 "축복 받아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기 위해"(빌 1:29)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해"(골 1:24)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거듭 명심해야 하는 것.
한국에 선교사로 나온 어떤 독일 태생 미국인은 과거 6.25전 참전 중에 해군으로 있었는데(당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상습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자가 있기에 참다 못해 한 방 때려 뉘었다는 말을 했지만 자기 부인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었다. 즉 자기 부인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는 말투였다. 악을 악으로 갚아야지 어떻게 선으로 이기겠느냐 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군 수병 이야기로서 미국의 한 청년은 군 생활을 할 때 역시 그렇게 괴롭히는 자가 있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취침 전에 반드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야유하며 조롱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갖은 모욕을 가해 왔는데 심지어는 오물투성이가 된 군화를 기도하는 그 청년의 등판에다 팽개치기도 했다. 그러면 청년은 번번이 그 군화를 깨끗이 닦아 그 임자 자리에 갖다 두기가 여러 번이었다. 조금도 낯 색 한번 붉히는 일 없이 시종 일관했다. 마침내 이 핍박자는 상대가 자기보다 강하다는(정신적으로 또는 인품에서) 것을 깨달음과 동시 도대체 그 강함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무척 궁금증이 생겼다.
결국 청년의 인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이제는 둘이서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함정 안의 동료들을 위한 합심 기도(마 18:19)라 능력이 아니 나타날 수 없어 함정 안의 거의 모든 장졸이 회개하고 믿기에 이르러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는 실화가 있다. 인식 전환이다. 산을 앞에서 보는 것과 측면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그 보고 인식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사는 것에다 관점을 두면 도저히 그 청년처럼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런 구차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육체를 우리가 현재 입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의 사업에 동참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함이라는 전혀 다른 인식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그 청년처럼 하는 것이 낙이요 흥이 되어 찬송이 콧노래되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를 누가 막으리요. 보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 유심조(有心造)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남용하여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자신을 망치는 종교를 많은 사람이 신봉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주라는 말씀이 있음도, 우리가 구원 받은 후에도 천국으로 직행하지 않고 이 세상에 발 붙이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함이다. 살기 위해 즉 삶의 고유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세상에 있다면야 왜 남의 생존권을 침해하느냐 하고 정의 확립 차원에서 한 방 먹여줄 수도 있지만, 차원이 전연 다른 것이다. 구원 받은 즉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20:21,22). 우리의 정의는 사람 살리는 데에 있지 자기 방어에 있지 않으니 자기 방어가 정의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실 수도 없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므로 우리가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이유가 명백하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음의 고난 받으시기 위해 세상에 사람이 되신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의미로서 그 분을 머리로 모신 몸의 일원이 되어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몸된 교회로서의 의미라는 구별만 있을 뿐이지 보내심을 받은 의미와 일의 성격은 같은 종류이지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이다.
전쟁에서 목적 달성이 승리이므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거나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와 정반대로 믿도록 함이 목표이므로 어느 쪽이든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쪽이 승자이다. 사탄은 핍박을 하는 가해자를 만들어 원수를 맺게 하여 이로써 믿음을 버리도록 또는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함이나 우리는 여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 그 양심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믿는 동기를 만들어주면 이로써 승패는 명확히 정해지는 것이다. 곧 나의 승리다.
다시 강조하시만 인식 전환, 보는 관점의 중요성이다. 이것이 만사를 좌우한다. 임의로 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즉 그렇게 돌려 생각하면 그렇게 여겨진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사물을 정확히 제대로 인식한다는 뜻이니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시행 착오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실제로 두 가지 측면으로 항상 대립되어 있는 터이기에 그 진실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미 되어져 있는 사실을 바로 찾아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무엇이든 일방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항상 양면으로 동시에 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제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 미군 수병처럼 유의미한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올바른 방향으로 그런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만으로도 마땅히 할 일을 다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결과야 적절한 시점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로서는 머리와 일치하게 행동함으로써 머리와 몸의 한 지체로서의 우리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고 기도하는 의미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무대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친히 지금까지 일하시고, 우리도 당연히 이에 보조를 맞추어 일하는 때이니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는 때가 아닌 것이다. 우리로서의 할 소임을 다하고 이 세상 떠나면 그 때가 안식하여 쉬는 자리를 찾는 때이다(히 4:1,3).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종으로 있는 자는 차라리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종의 위치를 활용하라, 이용하라는 것이다(고전 7:21). 이 세상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자유인이 되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나,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 살리는 막중한 사업과 임무가 부여되어 있은즉 종들의 세계에 일부러 들어가기는 어렵고 이미 종의 세계에 들어와 있으니 그리고 그런 특수 환경에서 일하도록 나를 믿음으로 구원하셨으니 이 사람 살리는 특정 기회를 살리라는 그 뜻이다.
사는 것이 아니요 일하는 것으로서 목적이 다른 것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사는 것으로만 일방적으로 인식하도록 인생들을 잘도 속여 왔었다. 이 세상 존립의 목적 자체가 인간의 구원 곧 새 창조, 재출생에만 있는 것이니, 이미 그 일이 완료되어 그렇게 새로 창조된 새 생명들이 삶을 향락하는 때가 아닌 것이다. 완료가 아니라 한창 진행중인 때다. 그런 생명의 향락은 모두(구원되어 마땅한 이들)의 구원이 다 완료된 다음에 누리는 '다음 차례'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복음 전파만 끝나면 곧장 막을 내린다고 하셨다(마 24:14). 이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이다. 그 일 마치면 끝나는 판에 무슨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오직 기도와 말씀 전달함으로써 사람이 다시 출생하게 되고 새로 창조되면 그것이 이기는 것이고 현재로서는 유일의 삶의 보람이고 그 외에는 없다. 따라서 이 구원 얻는 기회 놓치면 인생들은 영원 세상을 고통 중에 지내게 된다. 즉 영원 운명을 나 자신이 정하게 되니 그 비중으로 따지면 영원 세계와도 맞먹을 정도로 크다.
어떤 이는 그것이 영원한 형벌이 아니고 그 기간이 끝나면 하나님이 다른 조처를 취하시리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데 성경에 "영원하다" 했으면 우리도 "영원하다"는 말을 해야지 그 이상 이하로 말을 달리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관여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명정대 공평공정하시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설명하려고 말을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오직 우리 할 일(기도하고 말씀 전달함)에 전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 세상은 산다는 의미로서는 일 푼 어치 가치도 없지만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역시 이런 귀중한 "일하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천국에서는 영원히 이런 극적인 기회가 없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 바친다고 생각해보라. 전율(스릴) 만점이 아닌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무조건 병(病)이다. 난데없이 "사는" 세상으로 착각하다보니 이런 막중한 의미의 시간들을 허송하게 되는 것인즉 이 어찌 아니 놀랄 일이랴.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을 사탄이 넣어주어 거기 휘말려 들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을 사도 바울 자신의 믿은 다음의 체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슬픈 실정이다. 성경을 배워도 아주 잘못 배운 것이니 성경을 통해 직접 성령의 계시를 받아 깨달으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르치는 인위적 교리를 여과없이 그대로 들이킨 결과다. 일종의 자업자득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이에 대해 경고를 아니하셨으면 손보아주실 것이나, 성경을 통해 밝혀주셨는데도 성경을 직접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탓에 빚어지는 불찰이니 하나님께서도 속수무책이시다. 이 이상으로 움직이시면 구원이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된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양 착각하여 그 당치도 않는 환영에다 몸을 맡겨 내던지는 꼴이니 허공에 떨어지는 그 몸이 절대로 무사할 리 없다. 허공이요 실체가 없는 것이 사탄의 모든 속임수요 거짓말의 실상이다. 천국은 값진 보물을 발견한 장사아치가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자기 전 재산 다 들여 사들임과 같다 하신 것처럼, 지금은 그 전 재산과 보물과를 바꾸기를 하였으므로 고생이 자심할지라도 실상은 싱글벙글이다. 그래서도 (사랑의 하나됨에서 오는 희락 외에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탄이 용이요 이 세상 신이요 임금이라고 성경에 그렇게 자세하게 밝혀놓아도 사람들(소위 "믿는다"는 이들)은 아예 주의를 두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이 이 정도다. 성경보다 사람들의 말을 더 믿는 것이다. 자칭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의 말을 더 신용하는 것이니 적을 알아야 적을 상대로 전투가 가능하지 적이 어느 쪽에 있는지 그 정체도 모르는데 어찌 전투가 되는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뿐이다.
로마서 7장을 "육신" 생활의 근거 또는 핑계로 삼고 있는 한 그 누구든 구원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자기 위치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성령을 받고서도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아 멸망하는 사례를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구원이란 의미 자체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성령의 세례라고 하면 내처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나 실상 그것이 비로소 구원 얻음이요 첫 시작이다. 이런 것조차 혼동하니 제대로 될 일이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이요 영생이요 천국이므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나타날 초자연계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지금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져 마지막 아담께서 내 안에 그 성령으로 계시는데 로마서 7장과 같은 자중지란, 분란이 있다면 고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런 모순에 가득 찬 것을 가지고 버젓이 교리를 삼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의 시대의 실상이다. 그러나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자신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지식)에 있지 않고 능력(사랑)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4:20/8:1-3).
상대를 모르고서 사랑할 수 없는 것. 사랑은 누구나 이해하는 단어요 언어다. 따라서 순종하는 이들은 구원 얻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 3위1체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무방했다. 에덴낙원이 초자연계가 아닌 자연계라고 알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은 하나(한 분이 아닌, 영역으로는 "One")이시라 하셨으니 한 분으로 믿든 셋이 하나로 계신다고 믿든 어쨌든 사랑하여 순종하면 그 이상 요구되는 바가 없었다. 순종이란, 기도하고(하나님 앞 제사장으로서) 성경 읽음(말씀 들음으로써 그 지시대로 행함)으로써 깨달은 바를 세상에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증인"(행 1:8) 역할을 함에 있는 것이다. 새로 창조된 "새 생명"(롬 6:4)으로 세상에 일하기 위해 왔으니(보내심 받았으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것이다(요 20:21,22/4:34).
그러나 그렇지 않고 3위1체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게 되면 잘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까닭이다. 막연하게 애매 모호하게 구름이나 안개 잡듯이 하는데 어찌 사랑이 생기겠는가. 일정하게 어떤 것을 정해놓고 "이리하면 또는 저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규정해놓으면 그것은 좋다. 그대로 따라 하면 되기 때문이다. 모세 율법의 성격이 그러했다. 그러면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과 실체이신 그리스도와의 특징적 차이는 무엇이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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