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5일 목요일

★★★ 오늘날 세상은 저주의 질서 아래 있어ㅡ생명의 질서 아래 있다고 착각하는 모든 이에게 화가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해 왔음이니, 거짓말은 그 속성상 듣기에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는 것이지 절대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로 가까이하는 법이 없는데 성경은 쓴 말부터 먼저 하고 쓴 소리로 끝난다.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경우는 특별히 적대 감정이 있거나 그런 관계에 있을 때 한하는데 그런 것 전혀 없이 사랑으로 말하고 좋은 감정으로 이야기하면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때, 거기에는 한 톨의 거짓말도 개입할 여지가 없음은 몇 번이나 강조해도 좋다.

너는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악인이다, 죄를 회개하라 등의 소리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뿐인가, 죄를 회개하여 의인이 되면 이 악한 세상에서 당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세월이 갈수록 정도는 더 심해지고 결코 완화되지 않는다고 미리 경고하시면서 마음을 다잡으라 하셨다. 사탄은 성경의 이 진실된 색깔을 흐리게 하려고 가짜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참된 성경 해석인 양 속여 왔다.

즉 세상에 군림하는 종교를 만들지 않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고 속이지를 않나,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 최고 유수의 종교가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니, 성경에 그런 쓴 내용이 있지만 괜히 헛소리라고 믿게끔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난해하다 해서 성경 자체를 읽으려 하는 마음을 효과 있게 지금까지 차단시켜 오는 데에 성공했었다. 사탄이 간악하기보다 인생이 너무 어리석다고 해야 바른 해석일까, 둘의 합작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해석이라 할 것도 없다. 어렵거나 소견이 분분할 때 해석이라 하는 것이지 그대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한 가지 사실 즉 쓴 소리로 일관하는 성경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기만 해도 사탄의 온갖 공격을 물리치는 데에 100% 효능을 발휘할 것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양약(良藥)은 쓰다고 했었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달콤한 말로 시작하는 것이 특색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거짓말이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 당장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든가 죽지 않는 초자연계 육체가 된다든가 등등의 너스레를 떨 것이다.

왜 성경 즉 진실과 진리에 속한 것이 쓴 소리를 하고 달콤한 것을 앞세우지 않느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인간(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죽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축복하셨다. 그러나 그 후 범죄함으로써 저주가 임한 것이다. 고로 축복과 저주가 함께 병존하는 것 같게 보일지라도 나중에 온 죽음의 저주가 앞서 있던 축복을 번복시켜버린 형상이라 저주가 주류를 이룸이다.

그러므로 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는 저주를 무시하는 그 어떤 것이든 거짓이요 속임수이지 진리 진실일 수 없다. 힌두교의 고행(苦行), 불교의 고해(苦海-세상을 보는 관점), 무상(덧없음) 등의 강조는 그 원인을 무시하고 다시 말해 원인이 있는 결과로는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이런 것이 있어 온 양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에 속한다. 아니라면 이 세상 신의 책동으로 만들어진 미신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인과 관계라고 말은 하면서도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이 사실을 부정하니 수박 겉 핥기 또는 아전인수 격의 둘러대기, 같다 붙이기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것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에 있다는 3위1체 원리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억지로 부인하니(현재의 세상 모든 것 즉 죽음과 고난 고통 등이 '원인'이 있는 한 커다란 '결과'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진실과 거짓의 분기점이 드러난다.

고로 이상의 사실로써 성경이 진실 진리의 기록임이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이니, 3위1체 원리니 3운법칙이니 하는 것 모두 이 기본 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방증(傍證)에 그칠 따름이다. 사실상 성경은 이런 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 다만 "과학, 과학" 하면서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그런 어리석은 교만을 버리고 진리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이런 것까지도 밝히시고 알려주심으로 회개하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전달하시는 것뿐이다.
 

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생명)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해야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 하셨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니 무슨 토를 다느냐 할 것이 아니라, 이유 없는 말씀을 하실 리 없으니, 시험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그렇게 말씀하실 리도 없다. 다시 말해 저주 받아 생명이 아닌 죽음에 속한 세상이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니 생명을 사랑해야지 죽음을 왜 사랑하겠는가.

죽음의 세상이라면 그냥 폐기되면 그뿐이지 왜 지금까지 존속하고(존속하기 때문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위와 같은 이유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지만) 있는가 할 때 생명 누림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음이다. 그 다른 목적이 다름아닌 죽은 사람 다시 살려내는 생명의 일, 하나님의 사업에 진력하라 하심이다. 이 사람 살리는 제사장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기도가 있어야 하고 이 기도를 뒷받침하는 것이 제물로서의 고난 받음인 것이다(롬 12:1).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처럼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 고통 죽음이다.

모세 율법의 희생 제물에 관한 제도(그리스도를 상징하는)가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연계에 속한 양을 죽여 그 피 묻은 가죽으로 아담 부부의 벌거벗은(초자연계 육체의 영광이 사라지고 자연계 육체로만 남는) 몸을 가려주시는 옷으로 해 입히신 것이다. 비록 자연계 생물이지만 일부러 그 생명을 강제로 끊으셨다는 데에 크나큰 중요 의미가 있는 것이니 자기 때문이 아닌 남(인간)을 위해 희생된 첫 사례 곧 제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향유할 생명인데도 강제로 끊기는 비극은 범죄로 죽음(영원히 살고 결코 죽지 않게 창조된 생명이 끊기는)에 이른 인간의 비극에 한 몸 체제(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기능인 것)를 기반으로 하는 동참함 즉 하나로 함께 합류(合流)함인 것.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인식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들은 대로 양의 희생 제물적 성격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깊어 양치기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러한 의미에서 가인의 예물(첫 농사의 첫 수확)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물(인간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그 첫 희생 양의 선례를 따른)을 받으신 것. 그러면 가인으로서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든 처음부터 알았든 간에 하나님께서 양을 바치는 예물을 기뻐하심을 보았으니 자기도 그 다음부터는 양으로 예물(제물)로 드리면 되는 것뿐인데 쓸데없는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인간의 범죄의 대가로서의 저주와 죽음과 결부된 제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물론 이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인간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생에게 구원(영생에로의 복귀)이 가능해지는 뜻을 명백히 나타내심이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즉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드는 살인극의 비극도 비극이지만 이와 같이 죽을 필요가 없는 생명체까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저주(죄로 인한)의 소용돌이 속에 신음하는 세상의 참극이 비롯된 것이다. 이 비극적 저주의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 자연계 생물도 처음에는 썩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이렇게 된 것일까. 왜냐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들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하셨기 때문이다(막 9:48).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가 되면 구더기도 불멸이 된다. 이 점 마음에 간직해둘 만하다. 이 정도로써 이 세상이 저주 받은 것이 명백할진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싹 가셔버린다 해도 좋은 것이다. 저주 받은 세상 사랑하여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전연 이유가 없다. 

이 모두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이 한 몸 체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지체라도 고통 당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여 강조해놓고 있다(고전 12:26). 피조물과 하나되신 하나님 친히 고통 받으시는 사실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하나이시므로 친히 그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심은 물론이다.

다시 역설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렇게 저주 받은 세상이요 그래서 고통 고난 죽음의 세상인 것이다. 이런데도 이 원인을 알려고는 않고 처음부터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얼마나 황당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런 종교는 사탄에게 눈이 감겨져(고후 4:4) 보지 못해서 그러하지만, 성경도 알고 하나님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살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일진대 더욱 가증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사탄에 꺼둘리기는 똑같은 것이다.

고난 받음은 죽음에 속하여 저주 받은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런 것은 애당초 없었다. 아담의 범죄가 유발시킨 자업자득형의 결과물 즉 대칭 관계로서의 비생명(생명과 대립되는 개념) 현상이다. 또 저주이면 저주요 죽음이니까 죽음 일색이지 거기에 생명이 섞일 이유는 없다. 고로 지금 이 세상은 저주, 죽음, 고난 일색이지 원천적으로 생명의 낙이 끼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때는 죽음의 심판의 때가 아니라 비록 죽음이지만 은혜와 구원의 때로서 생명이 역사하는 때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환락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음의 때이지만 생명의 은혜가 있다는 뜻이지 생명의 때로 접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새 창조(다시 출생케 함)에 의하여 탄생시키는 때이므로 현재 "저주 받아"(창 3:16) 있는 상태를 기준하여 이 구원의 역사를 산통(産痛), 산고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 낳은 기쁨은 차후의 일이고 지금은 그런 고통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 낳는 고통은 강제가 아니고, 고통인 줄 알면서도 부부가 서로 교합하여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원(自願)"이라는 원칙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 스스로 택하여 얻는 결과이기 위해서는 즉 강제가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당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의미가 된다.

고로 자원해서 받는 저주의 고통이기 위해서는 역시 자유 선택으로 고난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상 설명과 같은 한 몸 체제로서의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는, 악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역할로서의)라는 여백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 세상이 생명과 죽음, 고통과 쾌락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까닭이 된다.

때문에 전적으로 고난, 고통, 저주, 죽음으로서의 원칙뿐이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함께 병존하여 이상의 취지가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정상적으로 원칙을 따르는 것이 고난과 저주,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을 거부하는 악인들이 빠져드는 함정이라 할까 그런 것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이다. 이 "위로"(눅 6:24/16:25)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이 세상이 그런 위로가 있을 수 없는 고난과 죽음만이 있다는 뜻을 웅변함이다.

그러므로 이 산고, 산통이 정상적인 모습을 띠고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자원 자진해서 받는다는 취지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자면 고통 아닌 위로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을 양자 택일하는 양상이어야 하기에 생명 아닌 생명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불복종의 악인들이 스스로 빠지는 함정, 덫, 올가미 역할을 한다고 한 것이다. 즉 한 때의 일시적인 찰나와 같은 생의 쾌락일 뿐이다.

생명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찰나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임데도 악인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이다. 분간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일종의 말하자면 자기 꾀에 걸려 든 셈이다. 그래서 함정이라 하는 것. 악인을 걸러내기 위한 이런 함정에 걸려 드는 것은 실로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 된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고, 낙이 양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저주 일색이지만 새 창조라는 시기의 특성상 생의 낙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현상일 뿐이니, 이런 신기루(사막의)에 걸려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죽음의 사막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오아시스 같은 것이 보이더라도 신기루일 뿐이다. 이런 사막 위에서 이런 신기루에 취해 있는 이들에게 진실로 화가 있다. 재앙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니 극력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사람 살리는 일의 의인들의 고난은 자발적으로 받는 것이므로 이 양자 택일의 성격상 위로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루처럼 비쳐지고 있는 세상인즉 고난 받는 이들은 기쁨으로 당할 것이요 억지로 당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멋모르고 웃는 것처럼, 이런 현실 속의 세상인즉 참으로 웃을 일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울 일밖에 없는 것이니 이런 비참한 실상을 아는 자로서 어찌 그렇지 않다 하리요. 실상을 제대로 눈 뜨고 보는 일이 중요하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 있는 다음에야 과거 모르고 지내던 일이 반복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죽음과 저주의 세상이 단 하루도 지탱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직 이것이 산고, 산통 즉 새 생명 탄생의 시기인 고로 그래서 잠시 지체하는 것뿐이니 이 해산의 시기가 끝나면 세상도 즉시 끝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 탄생한 생명은 그 생명을 누리는 때로 영원히 이어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취사 선택한 경우이면 그 반대의 것을 스스로 택한 그대로 영속되어져 나가는 것뿐이다. 이로 보건대 어찌 아니 두려워하리요. 어찌 떨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시대를 정확히 알라는 것이 우리가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유일한 메시지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이 되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막 10:25).

오직 그 부를 나누어주기 위한 잠시 맡은 것으로 여길 때 즉 실상을 바로 보았을 때 그런 위험에서 벗어난다(딤전 6:17). 잠시 맡은 것일 뿐이니 마치 자기 것인 양 축내서도 안된다. 이렇게 남의 것을 잠깐 맡아 있음을 자각할 경우에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막 10:27)라는 말씀이 적용될 뿐이다. 이 세상은 죄인이 된 인간의 세상, 죄인으로서 형벌 받는 형벌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선언이 된 세계다(창 3:15-19). 이것이 말씀을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정상적인 자세다.

주님께서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눅 6:25)이라 하신 것은 "위로"(:24)나 "부유함"(:24)과 같은 맥락으로서, 이 세상을 이상 설명과 같은 저주 받은 상태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창조 당시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여 경고하심이다. 무조건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니, 바울 사도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7) 한 그대로다. 사람이 웃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라" 하고 저울질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다는 일이 많으니, 형식이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같이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속은 외면하고 그 대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자아중심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인즉 주의를 요한다. 교회에만 무조건 충성되게 나가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런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고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즉시 지어버렸다. 전에는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으니 자기의 닮은꼴이므로 그냥 아담으로만 통했던 것이니 둘이지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 인격적으로 대하여 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사라지고, 마치 단순히 사람 제조기처럼 인식되어 전에 영물들 이름 짓던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어 있는 저주대로 된 것이다.

이는 여자가 당연히 먼저 남자와 의논하고 선악과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함에도 독단적으로 행동을 취한 후 남자에게는 자기 의사를 따르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 화근이 되어 빚어진 결말이므로 여자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 친히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전자는 후자의 자식 벌로서  위계 질서가 분명했고 따라서 여자의 행동은 손아래가 손위를 넘보는 식이 되었은즉 남자가 여자를 강압으로 다스림은 불가피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 모두 죄의 결과이니 죄는 질서의 유린, 파괴 행위인 것. 여자의 그런 행동은 선례를 남기는 것인즉 지속적으로 행해질 개연성이 충분하여 남자는 또한 이를 제지함의 악순환이다. 남자(아담)는 남자대로 머리이신 하나님의 뜻, 명령,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어겼으니 질서 유린 행위라는 의미에서는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성경에서 남자를 주로 하는 것은 이러한 여자를 비하해서가 아니라 (남자도 똑같은 범죄를 한 마당에) 남녀 한 몸 즉 둘이 하나됨에서 남자의 대표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왜냐면 아담이 맨 처음 창조되었고 그 아담을 소재(즉 아담의 갈빗대)로 하여 여자가 지으심 받아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처음부터 '하나'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이므로 머리가 그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우리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과 같은 이치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이런 성별이 사라짐은 당연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만약 부활하게 된다면 이런 구분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의 짝으로서 마치 육체에 대한 영혼처럼 각 사람과 이중 구조로 되어 존재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남자시라면 그러면 내가 남자라야 하는가, 여자라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남자로 세상에 오신 것도 위에서 말한 그런 대표성을 따라 되신 것뿐이다.

여전히 남자로 계시면 남자 선호 또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의미일 것인즉 여자가 원망하게 될 것이요 여자이시라면 여자 우대 또는 편애가 되어 남자가 원망할 것이니 수시로 성을 바꾸시겠는가 어쩌겠는가. 고로 그런 성별은 다시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애당초 인간(아담)이 창조될 때 성별이 없었다.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될 것이기에 이는 당연했다. 처음부터 남자였다면 의당히 그 짝으로서 여자부터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낙원을 창설하신 다음에야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여자 창조가 아니라 영물(靈物)들 곧 천사 즉 초자연계 존재 창조였고 그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므로 그제서야 여자가 생긴 것이다. 영원 생명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여자처럼 아름답고 남자처럼 늠름하여 양쪽이 조화된 절묘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평등하게 모두가 그런 훌륭한 모습들로서 절세 미인, 절세 가인으로서 미와 추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럼 모두가 거의 똑같으니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서로 식별이 되어 알아보느냐 하겠는데 그야 초자연계 몸이 초능력이니까 지금 우리가 아는 컴퓨터 이상으로 뛰어난 식별력이 있을 것이야 불문가지. 자꾸만 현재의 이 자연계 몸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를 불식시켜야(고후 5:16,17).

말을 맺으면, 오늘의 이 세상은 오직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데에만 소용되는 것으로서 삶을 향락하는 즉 사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니 저주 받은 주제에 무슨 삶의 누림과 즐김을 감히 상상할 수 있으리요. 무리요 억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불을 보듯 훤하게 알았으니 불나방인 양 불 속으로 뛰어드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 일이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영원 멸망 속으로 영문도 모르는 채 쾅쾅 넘어가고 있는 현실인데도 이를 외면하여 이 위급함을 경고해줄 마음은 없이 안일 속에 묻혀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상 술에 취해 있다면 그 결말은 불문가지이다. 똑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해보시기 위한 단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설혹 그런 의미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그 말씀에 응할 것이 아닌가. 하물며 이와 같이 이치가 맞아 명약관화의 사실임을 성경을 통해 알면서도 이를 거역한다면 이 경우 이미 희망은 거의 끊어진 것이다. 이런 것이 고범죄 즉 알면서도 짓는 죄에 속함이다. 모든 인간에게 양식(良識)을 주신 하나님이 상식을 벗어난 것을 지시하시거나 명령하시는 일은 없으니 안심할 일이다.

따라서 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느냐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냐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핑계로 대는 이가 많은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까닭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라 한 대로 이미 하나님의 저주는 꽉 차게 내려져 있는 터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판단과 달라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모르는 까닭이다. 죄의 경중이 없이 자아중심은 본질적으로 모두가 다 살인자로(롬 3:15)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즉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요 3:35) 것이다. 이 진노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으로서 화급하지 달리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실상을 몰라서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런 실상을 설혹 안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으니 피하려 해도 피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물치 않으셨다 했는데 즉 심판 자체가 불가능했음이니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이므로 심판을 하나마나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만인 중에 개방됨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행 17:30). 그런즉 이 하나님의 저주, 진노의 사실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곧 모세 율법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전(事前) 교육을 시킨 기본 내용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구원이 발동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눅 5:32) 하셨다.

때문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그냥 믿기만 하면 영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일절 무의미한 시간 낭비만 된다. 빌립보 간수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내가 어찌 할꼬 하는 비명이 나와야(행 16:30/2:37) 그리스도께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참담한 현실을 자각하여 떨고 있는 자에 한해서 복음(희소식)이지 그렇지 않고는 병 없는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율법이 충분히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다.


"하나님의 저주 내리심"에 대해 반문하기를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이 복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대목이 있지 않으냐 한다면, "그렇다고 이미 내려진 저주가 철회되었던가, 여전히 남자는 이마에 땀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저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단지 홍수 때처럼 멸종하다시피 하는 것은 없이 말 그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만 그치도록 제한된 범위 내의 "축복"인 것이다. 즉 이 축복은 앞선 저주(대홍수에 의한 멸절)에 상대되는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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