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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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만사가 기한이 있고"
우리의 국적(國籍)은 하늘에 있으니[:20] 곧 이런 자연계가 아닌 신령한 세계 곧 영계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현재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하심과 같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가 나타나시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이의 역사(役事)로" 우리의 이 초라하기 짝이 없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낮은[자연계에 속한] 몸을 자기 영광의 신령한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빌 3:21].
그제서야 우리는 병아리가 알을 터뜨리고 나오듯이 한낱 달걀로서의 신세를 면하게 된다. 의젓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다 갖춘 닭이 된다. 그제서야 볼품없는 애벌레로서의 해충이라 하여 구박 받던 신세를 면하고 화려한 나비로서의 변신을 하는 것이다. 고치 속에 죽은 것처럼 들어 있던 몸으로서의 번데기 신세를 벗어나 완전 자유의 삶으로 비상(飛翔)하는 것이다.
"천하의 만사(萬事)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할 때가 있고 화친할 때가 있다"[전 3:1-9] 함과 같다.
일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다. 죽음에 처해 있어야 할 때가 있고 네 활개를 펴고 활기를 되찾아 삶을 구가하는 때가 있다. 지금은 울 때요 웃을 때가 아니며 삶의 안락을 도모할 때가 아니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부유(富裕)를 누려 안락한 삶을 향유하면 오는 세계에서 모든 위로(慰勞)를 상실한다고 엄중 경고하셨다[눅 6:24]. 이는 양심으로 판단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니, 세상이 모두 고해(苦海) 속에 허덕이고 있는 판에 나 혼자 호의호식하려 하다니 이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양심에 켕기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혹자에게 부(富)와 권세를 주신 것은 그 사람이 이뻐서 주신 축복이 아니라 한 몸의 원리에서 각 지체(肢體)로서의 소임(所任)이 각기 다르므로 그런 분야에서 청지기 역할을 충실히 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써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뜻이다. 잘 믿어 하나님의 축복 받아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산다는 망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받기에 앞서, 인류 양심의 이름으로도 마땅히 규탄되어야 하는 악인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그런 미신에 전반적으로 물들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가 아니라 그렇고 그런 세상 종교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 수밖에 없다.
때 맞추어 만사는 진행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때는 사는 때가 아니라 일하며 수고하여 사람들을 먼저 살려내는 것부터 하는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던[일하셔야 했던] 때에는, 그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가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으니[요 7:30] 그의 때[죽으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30]. 그러나 돌아가실 때가 이르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聖殿)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다"[눅 22:53] 하셨다. 3운법칙은 바로 이 "때"를 말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혹자 말하기를, "항상 기뻐하는 것과 두렵고 떨라는 것이 어찌 조화가 되느냐? 두렵고 떨면 기뻐함이 없는 것이고 기쁘면 두렵고 떪이 없는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범죄한 첫 사람 아담이나 영물들 중 범죄한 사단 일당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에 처해진 상태를 벗어나 산 자가 되어 구원을 받았으니 당연하다. 그러면 두렵고 떨림은 무엇인가. 아담처럼 범죄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사단 등 악령들처럼 범죄함으로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마땅히 경계해야 하므로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물론 이런 일이 없다. 이 세상에서만 그러하니 이 세상은 아담처럼 범죄할 수 있고 사단 등 악령들처럼 멸망할 수 있는 시험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대로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는 격려가 동시에 필요한 측면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다는] "기쁨과 평안"[요 14:27/15:11/16:33]이라는 원동력이 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근본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자유로이 소통하신다고 해서 인간과 같은 피조물처럼 착각함에 있다. 볼 수 있는 사람처럼 하나님도 보기를 원한다는 것도 그 하나다[요 14:7,8]. 인간이 이기주의로서 자기중심인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 하는 것도 그렇다. 이런 착각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인간도 얼마든지 선할 수 있다는 망상으로까지 발전한다.
때문에 부자 청년이 영생하게 되는 방법을 여쭈면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불렀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홀로 하나님 외에는["except God alone(NIV)"] 선한 이가 없다"[눅 18:19] 하신 것이다. "네가 왜[무슨 이유로] 나를 선하다 하느냐?"[Why do you call me good?] 하신 것은 두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하나는 "내가 선하지 않은데도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한다"는 의미와 또 하나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선하다 하니 그것은 사람이 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므로 사람은 선하지 않고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영생하게 되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내가 사람이지만[네가 알고 있는 대로] 동시에 하나님이니[네가 나를 다시금 새로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서] 나를 믿으면 그 때 비로소 사람이 선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후자가 바르고 전자가 옳지 않은 것은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하신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죄가 없는 것은, 의인으로서 "선을 행하므로"[롬 2:7,10/요 5:29] 선한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게[좋은 것이 아니도록] 즉 나쁘게[조악(粗惡)하게] 만물을 만드실 리가 없다. 그래서 인생에게 영혼을 지으셨고 따라서 자율성 있는 이지적인 존재로 만드신 이상, 영원토록 못살아 불만이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기에 덧없는 삶을 불평 원망하도록 창조하실 리 없는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도록 인간을 만드셨는데도 인간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자초한 결과가 오늘날의 현실이다[롬 5:12].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게 지으신 다음에 선을 했다고 영생하게 하시고 악을 행했다고[범죄했다고] 멸망에 처하시고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그렇게 창조하심을 받은 피조물 스스로가 그 자유로써 악을 택한 결과로 범죄가 되고 그 악[범죄]의 결말이 죽음[멸망]이 되어 있음이다.
범죄하지 않은 천사들을 "거룩한 천사들"이라 하셨으니 아담이나 영물이나 처음에는 모두 거룩한 피조물들로 만드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니 모두가 거룩한 것일 수밖에 없다. "거룩하다"는 것은 범죄가 생겨남으로써 그 상대적인 의미로 생긴 단어다. 삼위일체의 원리에서의 대칭[대립] 개념이다. 따라서 범죄하기 전에는 거룩하다는 말 자체가 없었다. 거룩한 상태는 먼저 존재했지만 그런 표현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룩한 상태에서 벗어나니 거룩함과 짝을 이루는 거룩하지 않음 즉 온갖 불법, 불의, 죄, 추악, 불복종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그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대로 따르는 것이 당연 사리요 이것이 "복종"이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사랑이시라는 것은 ①양심[양심은 말 그대로 선하고 옳은 것을 가리키므로]을 우리 인간 안에 장치하신 것으로써 증명되어 있고 ②사람이나 동물이나 자기가 낳은 자식이나 새끼를 사랑하는 것을 보아서도 입증되고 있으니 하물며 그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야 그보다 못하실 리가 없다.
그리고 ③성경이 하나님의 이러한 품성을 설명함으로써 밝히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수행함에 즉 그 모든 말씀에 복종함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하나님 나라를 공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일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밝히신 그대로다.
하나님 나라를 새삼스럽게 말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이 인간 세상이 '범죄로 죽음에 이른 인간'의 세계 곧 생명의 하나님의 곁을 떠나 죽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있으니 이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다. 뿐 아니라 처음부터 범죄한 악령 사단이 그와 같이 속임수로 인간을 이 죽음에 빠뜨린 후 "이 세상 신(神)"[고후 4:4]으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관계로 본디부터 거짓말하는 자가 인생들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온갖 거짓말로 인생들을 속이고 있기에[계 12:9] 우리가 진실대로 깨우쳐 줄 필요가 있으니, 진실 그대로를 세상이 믿지 못하고 있는 지극히 한심한 일이기는 하나 속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므로 ①, ②, ③의 근거를 들어 하나님 계심과 하나님의 나라 곧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야 할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함을 목숨을 걸고 홍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자니까 상대적으로 죽음의 세계일 뿐인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로 집약되어 있으니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니,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않고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는 사람이 일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죽음의 멸망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는 간단 명료한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일절 생략함이 없어도 한 손아귀에 한 줌 쥘 수 있는 정도의 한 움큼밖에 되지 않는다. 사단이 워낙 온갖 거짓으로 그동안 사이비를 많이 만들어놓고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했으므로 이를 하나씩 걷어 내자니까 그리고 너무나 깊이 거짓말의 쐐기를 박아놓았으므로 이를 되풀이하여 쓸고 닦고 하자니 이렇게 장황할 정도로 많은 말을 지금 하고 있을 따름이다.
영물과 달리 인간[아담]은 같은 범죄를 했어도 그 즉시 멸망에 이르지 않는 것은, 악령[영물]은 영뿐인데 반해 인간[아담]은 육체와 더불어 영으로서의 이중 구조이므로 육체의 영적인 측면을 잃는 것이[영혼은 그대로 있음에도] 아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신령한 몸을 잃고 영존하지 못하니 인간의 이중 구조의 특성상 그 생명 자체가 영원하지 못하므로 죽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육체 이후에 영혼의 순서로 창조되었고 그 후에 영계가 생겨 거기서 아담의 육체가 영적인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영원히 사는 존재로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적인 육체로서의 복합 체제였는데, 그 영적인 것이 박탈된 것이니 곧 선악과를 먹은 결과다. 그렇다고 악령들과 달리 영원 멸망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함께 들어가되, 영원한 죽음 직전에 잠정적으로 머무는 단계 또는 위치가 이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의 기간[육체로 태어나 죽어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인 것이다.
바로 이 '잠깐 머무는 동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이 세상에 있는 동안] 구원을 받으면 그야말로 인생은 기사회생하는 것이고, 악령들[사단을 위시한]처럼 스스로 악이 좋아서 순종치 않는 이들은 애초 작정된[아담의 범죄로] 죽음을 따라 악령들과 함께 멸망밖에 태이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런즉 사단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러한 죽음의 사유(事由)'를 무시하게 하고, 무조건 이 세상 기간을 '사는 한 때'로만 착각하게 만들어 인생들을 멸망에 빠뜨리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사력을 다하고 있는 터이다.
인간들이 구원 받는 일정량의 숫자가 채워지지 않으면, 이러한 상태로 이 세상이 기약도 없이 계속 반복되어 흘러갈 공산이 크기 때문에 이를 노림이다. 늘 하는 설명이지만 하나님은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따라 공평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줄 사단 자신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자기도 최선껏 하면 자기 계획대로 상당수 인생이 구원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나, 단지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하시는 말씀을 처음부터 믿지 않는 고로 그렇게 고집대로 나가는 것이다.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사랑하지 않고 믿지[신뢰하지]를 않는 결과는 항상 이와 같이 파멸과 죽음으로 낙착하는 것이지만, 사단은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존하는 오만함'이 끝까지 '자멸로 이르게 하는' 경우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만드셨으니 당연히 피조물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것이 옳고[義] 좋은[善] 것이다. 처음부터 선과 악 또는 의와 불의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처음부터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시작이자 근본이시므로 선과 의의 기본이고 기준이실 수밖에 없다. 모든 원칙이나 모든 상식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리고 피조물을 만드실 때는 일정 의도를 가지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피조물은 마땅히 그 의도를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이를 어긴다는 것 자체가 자기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죽어야 마땅하지 살 수는 없음이니 하나님 자신께서 바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생명을 떠나니 죽음밖에 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결국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 그리고 뜻과 그 모든 말씀은 피조물 자신들을 위하심이지 하나님 당신을 위하심은 없다. 왜냐면 이미 홀로 계시던 하나님이시니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하셨던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일 부족하신 무엇이 있으셨다면 이전에[피조물을 창조하시기 전] 홀로 사시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이 존재하든 않든 하나님 자신에게는 전혀 무관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다. 단지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 자체가 그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엄마가 아기를 위할 때의 기쁨과 같다. 아기는 직접 아무 것도 엄마를 위하는 것이 없지만 아기를 위하고 아기가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 엄마에게는 더 없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육체의 엄마 아기' 관계는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을 엄마는 희망하고 목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은 '영원한 엄마요 영원한 아기'와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처음부터 아기로 만드시고 그것이 자라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말하면 '완전히 자란 어른'을 만드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직 피조물들 자신을 위해 그 행복한 삶을 위하여 뜻을 두시고 행하시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피조물도 이러한 뜻을 받들어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피조물 상호간의 원활한 관계를 이루도록 하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머리되시고 피조물들은 그 한 몸을 이루는 지체(肢體) 역할인 것이니 한 몸의 이치대로 사는 삶이 생명의 요체다. 그런즉 나 자신을 위해 나더러 하라고 시키시는 일을 내가 아니한다면 이야말로 나로서는 자살행위가 아닌가. 엄마가 아기를 위해 시키는 일을 아기가 따르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불복종이 죄가 되고 그 결말이 죽음이라는 것은 이로써도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에서도 피조물[인격성을 갖춘 영원한 존재]들을 만드실 때는 이런 사항을 주지시켜 이 뜻을 받들도록 하심이었고, 따라서 이는 일종의 분명한 약조(約條) 관계인 것이다. 처음 창조에서 사단 등 영물들 중에 일부가 범죄하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도 말하자면 그들 나름의 이런 약속 위반 또는 폐기, 무시(無視)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새 창조에서도 당연히 그런 약속일 것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복종하기로 작정하여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베푸시는 은혜로서의 구원이니 즉 믿어야 구원이 되도록 조처하신 것이다. 고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고[롬 5:12] 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므로, 이제 그 실질적인 혜택 즉 몸의 구속이라든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기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빌 4:4]이다. 그러나 아담처럼 약속을 어기고 "복종하지"[2:12] 않음으로써 얼마든지 범죄하여 죽음[이제는 악령들과 같은 멸망]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역시 현실이다. 아담의 범죄와 죽음이 그 증거이니, 그래서 당연히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여"[고전 10:12] "두렵고 떨게"[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되는 것 역시 마땅하고 이상하거나 어색한 일이 될 수가 없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고로 ‘죽음의 번데기’ 역할에 충실할 일이다. 결코 살려고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 위의 모든 성경 구절에서 경고하는 내용이다. 번데기 시절에는 모든 것이 보기에 부자유스럽다. 날개를 활짝 펴고 사방을 마음껏 두루 날아다닐 때가 있다. 그 때는 차후에 즉 다음의 순서로 오는 것이다. 살 때는 장차 온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일하는 때다. 꽃봉오리가 활짝 열리는 것을 어서 보고 싶다 하여 억지로 잡아 벌리면 그 꽃봉오리는 영구히 피지 못하고 도리어 죽는 것과 같다.
제대로 놓아 두면 때가 되자마자 피지 말라고 해도 피게 되어 있다. 인내심이 없어 억지로 살고자 하고 죽음에서 탈피하려고 용을 쓰는 것이 바로 이런 ‘꽃봉오리 손으로 벌리는 어리석음’과 같은 짓이다. 사단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딴에는 사력을 다해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다. 그래서 세상 만사, 인식 전환에 있다 함이다.
쉽게 말해 마음 먹기에 달렸다. 생각을 고쳐 하면 어려운 것도 두려운 것도 황당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물 흐르듯 하는 순리뿐이다. 순리를 버리고 역류하려고만 잡아드니 어렵게만 보이고 고생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것에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적용시키려 하니 모래 위에 세운 성(城)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과 유사한 것을 말하고 가르치더라도 수박 겉 핥기뿐이지 실속이 없다.
실제가 아닌 인간 망상 속에서야 무슨 말인들 못하리. 이는 거짓말은 원래 한계가 없고 한도를 모른다는 말과도 통한다. 죽음을 죽음으로서 바로 보라. "생명"이라는 환상을 보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들어갈 틈이 없고 먹혀 들지 않는다. 죽음으로 직시(直視)해야 생명이 보이게 된다. 어두움 속에 있음을 인식해야 진정한 빛을 찾게 된다. 악령 사단의 굴레에 씌어져 있는 인생 비극의 현실을 직시(直視)해야[행 26:18] 자유인[고후 3:17/요 8:32/사 61:1/갈 5:1]이 될 수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빌 4:7,8].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그것이 생사(生死)를 가른다.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야 할 것은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하다"[:24]고 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생각들이 "잠언(箴言)서"나 "전도(傳道)서"의 이름으로 성경에 끼어 있는 것은 그 생각들의 결론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혜를 한량 없이 주신 까닭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기도 하다. 기준이라고 해서 무슨 크고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이 솔로몬 잠언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예다. 따라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는"[빌 4:8]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로써 행동하나 악령들과의 전쟁은 육체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론[arguments(NIV, NKJV), imaginations(KJV), reasonings; 마음으로 이리저리 따져 생각하는 것]을 깨뜨리는 데에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모든 것을 깨뜨림에 있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써[고후 10:3-5] 수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령들과 맞서는 우리의 무기(武器)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4] "성령의 검(劍, sword)인 하나님의 말씀"[엡 6:17]으로서, 이로써 적의 모든 견고한 진영(陣營, 본거지)을 깨뜨리는 것이니 생각, 마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통제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고 한 그대로다.
이런 모든 힘의 근원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에 있다[고후 10:6].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그렇게 시키시는 대로 따르지를 않는데 무슨 이득이 되리요. 그렇다고 강제로 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왜냐면 이에 대한 모든 판단의 능력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선택만이 만사를 좌우하는 까닭이다. 이런 자유 선택에서는 '실수(失手) '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오직 자기 '성향(性向) '나름이다. 실수라면 사정 참작이 가능하나 성향일 때는 문제가 다르다. 마음의 영역인 이 성향 자체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실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차지하는 것이다[마 19:14].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천국임을 명심할 일이다[18:3/막 10:15].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에 대하여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체 인류를 위하심이요 동시에 속속들이 나 개인을 위하심이다. ‘전체’와 동시에 ‘개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특징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참새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눅 12:6]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가 되었다"[: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사실은 '나 개인'과 동시에 직결된 것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주신, to giv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이라 함과 같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행 20:28].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시다. 당신 자신을 나를 위해 바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나를 창조하셨던 하나님, 이제는 나를 살리시려고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나에게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 어버이로서의 한없는 자정(慈情)이시다. 그렇게 나와 함께 죽어 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면 지금 어디에 계시겠는가. 당연히 나를 떠나실 수 없어 나와 함께 계시지 않겠는가.
바로 이 의미가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는 모습이시다[요 14:16]. 이것이 바로 나와 영원히 둘이 하나 되어 계심이다. 이와 같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양식(良識)과 상식(常識)을 통해 능히 이 사실을 소화(消化)할 수 있으니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고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피조물은 항상 어린 아기다. 고로 '나와 둘이 하나 되어 계심'도 엄마 품속의 아기 모습인 것이다.
아기와 엄마 관계는 아무리 그 엄마가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무식하다는 말을 듣고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정되어도 아기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엄마이어서, 엄마가 그런 모자라는 사람 축에 든다고 엄마 말을 무시하여 듣지 않거나 하는 일이 없는 법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인 것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심이 이 이유에서다.
이렇게 성령으로 오심을 가리켜서도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18] 하신 것이다. 어디까지나 아기[아이]를 못잊어 하는 엄마의 심정이시요 표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음 즉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음은 엄마 품속의 아기의 모습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 '엄마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의 모습이신 것이다[요 14:9].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서 계시므로 '둘'의 모습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모습이 곧 아들의 모습,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그러나 한 분이 아닌 두 분 곧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아들께서는 사람이시요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다. 하나님으로 계신다. 아들께서도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으로도 계시는 그 차이다. 그리고 엄연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차이다.
앞에서 "엄마"라는 표현을 썼지만 인간 피조물에게만 있는 성별(性別)이고 이런 것은 영물들에게도 없는 것이니 엄마 같고 아빠 같은 그 어느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보다 알뜰살뜰 보살피시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는가. 그렇다고 어머니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대표성을 따라 "아버지"라 하고 "아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대표성이라는 것은 아담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아담이 처음에는 천사들처럼 성별이 없다가 "독처(獨處, 혼자 지내는 것)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역시 성별이 없는 동물[영계인 에덴낙원에 속했으므로 영물(靈物)들이다]들을 창조하시니 오늘날의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사람의 형상일 수가 없다. 사람은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자연계의 동물과 상칭(相稱)으로서 그 원래의 형상과 모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낙원의 "뱀"은 자연계에서 말하는 뱀의 대칭적인 존재였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고 실제의 모습은 '영계에서의 뱀'이므로 그 형상이 "용(龍)"이다[계 12:9/20:2]. 비슷하지만 자연계와 영계의 구별이 엄연하다. 인간만은 자연계와 영계의 복합적인 이중(二重) 구조다. 자연계 생명체의 정점(頂点)이자 종점(終點)이요 영계의 시발점이요 영계의 생명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양 세계를 아울러 다스리고 통할하는 존재로서의 위상(位相)이기 때문에 이런 이중성을 띤다.
그러나 이런 아담도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니, 결국 이런 ‘시한부 생명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 와버린 현재의 비극이다. 따라서 "대표성"이라 할 때는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성별이 없던 아담을 기준함이니, 이 아담이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되었으므로 부득불 이 남자로서의 아담을 따라 "아버지"시라 하고 "아들"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표현은 되어 있으나 제대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의 어버이'로서의 의미이시다.
우리에게 아버지되심도, 그리스도께 아버지되심과 똑같기 때문이다[요 20:17].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그 "맏아들"[롬 8:29]이시라 함이다. 남녀 구별이 없어지는[눅 20:35] 영원 세계에서는 물론 이런 호칭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이치를 밝히는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만(傲慢)으로 인해 오늘날 하나님을 난데없이 "어머니"라 하는 사이비(似而非)가 생겨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이 일어남을 보아서도 부디 성경을 읽을 일이다. 읽되 반드시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며 겸손한 심정으로 임할 일이다. 교만한 마음에는 성경은 그 진리의 문을 굳게 닫아 버림이니 그 때는 악령밖에 기회를 노려 작용하는 것이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리의 문을 그런 이들에게는 닫아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동하는 것은 악령이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 있는’ 유일한 책이다.
다른 책은 그 책의 저자가 죽었거나 혹은 살아도 친근하게 가까이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단 오만한 자에게는 예외다. 그런 이들에게는 요동도 하지 않는 '무감각의 바위'로서 일관하는 것이 성경이다. 진리에는 접근하지 못하니 사단이 지어낸 거짓말을 통해서만 성경을 읽게 되니 사이비가 이런 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에서, 아기는 항상 엄마와, 엄마는 아기와 불가분이다. 왜냐면 엄마로서는 아기 혼자 버려 둘 수 없고 아기로서는 엄마를 떠나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 하나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관계가 이런 엄마 아기 관계라고 했거니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사 65:24] 하심과 같다. 엄마 ‘품속’의 아기이기 때문에 바로 지척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가 알아서 아기 마음을 척척 맞추어 준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면 엄마 아기 관계는 가시(可視)적인 이 자연계에 속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경우 보이지 않는 영(靈)의 일이므로 반드시 기도로 아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이 세상에서의 아이들처럼 철부지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라는 것은 그 불가분성을 상징해서 하는 말일 뿐,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의 법질서 아래에서 모든 일은 철두철미 이루어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도[살전 5:17], 모든 일에 감사하고[:18] 항상 기뻐함도[:16]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온 천지가 엄마 품이니 그렇게 즐겁고 기쁘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마냥 끼득끼득 웃는 아기와 같다. 모든 주변 상황이 비록 고통스럽고 역경이더라도 그것이 변함없는 품속인 줄 알기에 그래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모든 일에 감사 일색(一色)이다.
엄마 품속이니 엄마 품을 거치지 않고 내게 일어나는 일은 없는 까닭이요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엄마가 허용할 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함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그럴만한, 그렇게 해야 마땅한 충분한 이유가 이와 같이 있기 때문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일향(一向) 신실(信實)하심 그대로이니[이를 믿지 못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마 4:5/고전 10:9] 오직 내가 쉼 없이 나 자신을 닦달하여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것뿐이다. "힘써야 하는" 것이지 힘쓰지 않고 무엇이든 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잘못 알아 공짜라고만 곡해하는 이가 거의 전부인데 이는 '철부지'가 아니라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성경을 "읽지 않는" 불복종[딤전 4:13-"읽는 것에 착념(着念) 하라"]의 당연한 응보다. ‘거저 먹는 것’으로 ‘구원’을 잘못 배워 온통 사람들이 힘쓰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무서운 "배도(背道-살후 2:3)"의 현상이다. 영생을 거저 먹기로 달려들어 "예복(禮服)"[마 22:11-12]을 입지 않은 이들마다 종국에는 추방당할 것이다.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추방당했던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힘쓴다"는 말만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율법행위로 얻는 구원[그들은 이 ‘율법행위로 얻는 구원’이 실상 무엇인지도 모른다]"으로서 매도한다. 얼마나 철저히 성경 아닌 인간의 교리로 세뇌당했는지 알 만하다. ‘저주 받아 마땅할’[갈 1:9] 그 "나 대신 죽으심"의 교리가 그 장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와 함께 죽으심"이다. 그것이 성경이고 그것이 아니면 모두 심판의 대상인 사이비 교리이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아내/남편으로 짝지어 사는 것이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인식했지만, 천국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됨의 영원한 관계만이 유일한 것이므로 "주님[주인(머리)과 종(몸)은 불가분]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됨만이 가장 근본이 되고 기본이 되는 관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행 2:17/히 9:26/요일 2:18/벧전 1:20] 세상에 오신 사실을 성경을 강조하고 있음과 같이. '마지막'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의 종결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 수행도 역시 종결이므로, "천국을 위해 고자된 자도 있으니 이를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하셨다. 바로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바울 사도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고, 오히려 결혼 생활이 여러 모로 장애가 될 수 있기에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교회에 충성된 자로서 의견을 고한 것이다[고전 7:1-40, 여기서 "처녀 딸"은 남녀 불문 각자의 동정(童貞, virginity)을 가리킨 것으로서 "처녀 딸"이란 의미의 우리말 번역 혹은 영역(英譯)은 오역(誤譯)이다].
그리고 이 소견(所見)이 자기 개인의 견해가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40].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 관심사다. 어떻게 하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해 줄꼬 하는 것은 이런 기본이 되는 것에 이제는 장애가 된다. 아내/남편을 기쁘게 하려는 것은 얼마든지 상찬 받아 마땅한 덕목(德目)이나,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보다 더한 덕목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곧 "한 영"[고전 6:17] 관계의 원활한 유지인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다. 주변은 모두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인생들뿐인데 어느 여가에 또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 한가하게 이 세상 살고자 하여 노닥거릴 것인가. 이를 바울 사도 역시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즉 "때가 단축해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고전 7:29-31] 한 것이다.
"때가 단축해졌다" 함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대로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바울 사도가 착각해서 한 말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이 성령 안에서 착각이나 하고 잘못 판단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얼마나 성령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식한지를 스스로 드러냄뿐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기 때문에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는 줄은 왜 미처 생각이 안돌아가는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도 그런 예언의 말씀이 들어 있음을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경계를 구분 못해 사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을 혼동하여 적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읽는 자로서는 그렇게 알고 들으면 되는 것이어서, 혼동 같아도 실제 그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는 것이기에 성령께서도 그런 점을 그냥 간과하신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서도 "임박한 환난"[:26]이라든가 "때가 단축해졌다"라든가 하는 것은 예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성령에 의한 감동 또는 영감(靈感)은 기록된 말씀의 특성상 어느 시대에든 그 지목하고 있는 시대에는 반드시 해당되는 것이고, 또 그런 특정된 시대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본 자세는 처음이나 끝이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는 그 절박함이 변할 수가 없고 개개인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내일이라도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이 세상은 종료되는 것이다[마 24:14].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이런 권고도 하는 것이니. 종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된 경우에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이를 사양하고, 종으로 그대로 있으면서 주변의 같은 환경에 놓인 이들[종의 신분]을 구원해내기 위한 목적으로 차라리 그대로 지내라 한 것이다[:21,22]. 그러나 세상에서 삶의 낙을 그대로 누리며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이들은 "원, 이럴 수가 있나, 분명 그런 뜻은 아닐 테지" 하고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그렇지 않은 다른 뜻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나, 전후 문맥을 살피면 금방 알아질 수 있는 것인데도 세상 사랑하는 욕심이 눈을 가리고 있으니 어찌 그 진실을 파악하리요.
세상 사랑[성경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함에도 불구하고-요일 2:15/딤후 4:10]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헛된 인간이 만든 교리가 미치는 해독이다. 그런 교리에 빠지게 되면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좀 살든지["육신이 연약하다"는 핑계를 대고] 또는 죄를 좀 짓든지 관계 없이 구원은 받는다는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에 대한 적당한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근거라고 오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주 받을"[갈 1:8,9] 사단의 교리라 한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함과 같은 저주의 선고다. 그런 교리에 물든 이들은 특정한 날에 특정한 장소에 나와 특정한 의식을 따라 하루 정도 "교회 일"[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 하셨다[마 25:45].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바울이 선언대로 충분히 "저주 받아"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들어가는"[:46] 것이다.
올바른 정보
다시 정리하건대, 삼위일체 원리에 의해, 눈에 보이는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립[대칭, 상칭]되는 '자연계에 속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계가 있다. 자연계에 생물이 있듯이 영계에 생물이 있으니 거기도 동물과 식물이 있어 그 동물들이 우리가 말하는 천사들이다. 그 중 일부가 스스로 범죄하여 악령들이 되니 그 가운데 하나가 사단으로서 현재 이 세상 신(神-고후 4:4) 곧 지배자가 되어 있어 인간을 압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중요한 정보다. 우리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세계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영생하게 되는 경우 "천국"이라는 곳 또는 영원한 형벌로서의 "불 못[火湖]"은 이 자연계가 끝나고 난 다음에나 비로소 생기는 양으로 착각해 왔다. 그리고 사단이나 거룩한 천사들은 우주 창조 이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시점에 창조된 정도로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잘못된 정보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세상인 줄 착각하여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단이 철통 같이 옥죄고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은 마음에 담아 두기도 싫어했다. 왜냐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라고 아주 그릇되게 인식하여 하나님의 대리자랍시고 이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사단이 "이 세상 임금"[요 16:11/14:30]이라 밝히신 대로 성경의 경고를 한 귀퉁이나마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단의 주구 노릇임을 알아챌 수 있는데도 눈을 뜨지 못하니 진상이 보일 리가 없다.
사단이 왕 노릇하는 세상임을 알지 못하니 이 세상에서 무조건 살고자 한 것이다. 마왕, 악마, 마귀 사단이 관장하고 주름 잡는 세상인 줄 진작 알았다면 어찌 악마 아래에서 살려는 마음을 감히 품겠는가. "마귀가 또 예수[인간의 대표로서 마지막 아담이시다]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줄 것이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니,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눅 4:5-8] 하고 호언장담한 사실이 성경에 대서특필하듯이 기록되어 있건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을 감추신 것도 아니고 말씀하지 아니하신 것도 아니고 성경에 밝혀두셨으나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이해할 마음은 없이[그리스도 친히 성경을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임을 경고하셨음에도-마 11:27/고전 2:14] 사단이 조종하는 대로 인간에게다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의존한 결과다. 모두가 인간의 해석에만 의지하는 터에, 여기에 성령께서 개입하실 수 없다. 간섭과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두시고 더 이상 어찌하시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신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고 해서 구원 받는 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버려 두신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미리 엄중 경고하신 대로 "천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마 19:14]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6:65]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마 18:3] 자만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음이다. 그러나 지금은 "택하신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는"[24:24] 적 그리스도의 세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고 마땅히 알아야 할 만한 것은 죄다 알게 하시는 시대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살후 2:9,10] 하신 대로, 지금은 영계에 속한 영물들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는 때이므로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이에 대비하도록 하실 필요성에서다.
'삼위일체의 원리'나 이를 입증하는 '3운법칙'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게 됨도 바로 그런 일환이다. 성도들의 믿음에 힘을 실어 주고 믿음의 확실성을 입증해 주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은혜도 값비싼 대가로 오는 것이니 곧 북한 교회의 극심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들의 해산(解産)의 수고와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창 3:16,17] 없이 생명에 속한 일로서 되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세상 종교의 기적들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시대다. 선이 아니면 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 반대로 거짓말이라는 이분법의 의해 이 세상이 관장된다고 했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세상 종교는 사단에게 속한 것이므로 앞서 지적한 대로의 악한 자의 출현에 발맞추어 각종 기적들이 발호하고 있음이다. 언제나 부디 명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삶은 본격적인 인간 삶의 무대가 결단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죽음을 가리켜 그것을 억울하다 하시지 않았고 또는 누구의 허물(죄) 탓 때문이라고도 않으시고 오직 망하는 자 즉 죽은 자들의 멸망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신 것이다[눅 13:3,4], 저주 받아 망하는 자 즉 죽은 자에게는 억울한 죽음이 있을 수 없고 더더군다나 이생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함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고통은 이생에 대한 일체의 희망을 접고 영생을 바라 회개에 이르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족한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런 현세적인 고난 고통을 외면하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교훈이 있었고 그래서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반드시 해 주신 것이니, 이는 우리의 구원 받음에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반드시 우리의 믿음의 의지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함을 밝히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철로의 두 레일과 같이 양면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믿음이 없는 자는 절대로 그런 병 고침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막 6:5,6].
그러므로 내일도 기약 못하는 이런 현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함은 무의미한 일로서 이런 무의미한 일에 매달리는 것은 정작 의미 심장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데에는 무관심으로 시종하는 비극적 결말을 내기가 십상이다. 사단은 이 점을 노리는 것이다. 그래서 현세적 평안과 안녕을 도모해 주면서 영생도 아울러 약속하는 거짓말로 일관한다. 그런 약속을 이루어 줄 능력도 없거니와 의도는 더더욱 없는 것이 사단이지만 그런 종교 교리를 지금까지 양산(量産)해 왔다는 그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 믿는 사람들 즉 구원 받은 이들이 무조건 이 세상에서의 고난만을 능사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다"[약 5:14,15] 함과 같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하고 유복한 삶을 보장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다.
기적을 본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요삼 1:2] 한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구절을 소위 "믿음 좋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형통하여 보란 듯이 잘 사는" 순수한 자기중심의 삶을 위한 변명으로 삼게 만들었으니 마귀의 조종이 아니고는 세상에 과연 이럴 수가 없다. 이런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에 속절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읽어도 자기 욕심을 따라 읽기 때문이다.
병 고침에 대해서는, 동시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권면했던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믿는 사람마다 병을 고치게 되어 있다든가 병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기도로 또는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아 성한 몸이 되라고 할 일이지 "자주 나는 병을 인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처방을 할 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주님 친히 말씀하실 때에도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돌아보지 않았다"[막 25:43] 하실 리도 없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은 병 같은 것은 결코 들리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병든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병자가 된 형제를 찾아보지 않은 것이 멸망에 이르는 원인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라고 해서 기적을 만능(萬能)이라 여기도록 가르치지 않은 사실에 유의할 일이다.
성경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어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 17:26,27]이라 했다. 하나님을 찾게 하려 하심이라면 그러면 기적을 베푸시면 되지 않는가 할 것이나, 성경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즉 역대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기적을 베푸셨으나 그런 기적을 본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을 알아보고 이상적으로 하나님을 따랐던가 하면 절대로 그것이 아니었었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그 경고요 그 실례이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얼마나 경천동지할 기적을 베푸셨던가. 그러면 그 기적을 보고 구름 떼 같이 몰려 들었던 사람들이 다 믿음에 들어왔더냐 하면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타내 보이실 정도의 믿음이 있는 이들은 겨우 합쳐야 5백여명에 불과했다[고전 15:6]. 그럼에도, 세상 사람은 각종 기적에다 신적(神的)인 권위를 둔다. 기적을 베풀면 그것을 신으로 경배하고 무조건 따르려고 한다.
그러면 오늘날도 변함없이 기적만 나타나면 절대자로 경배하는 것과, 이스라엘처럼 많은 기적에 접해도 그와 같이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던 그 차이는 무엇에 있는가. 기적을 보든 보지 못하든 상관 없이 오직 이지적으로 하나님을 인지하고 그 모든 말씀을 옳다고 인정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즉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답이다.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많은 기적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충성하지 않아 자기 마음의 욕심대로 나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하나님은 결코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니, 각종 기적[그것이 거짓이든 진실된 것이든 즉 마귀 사단으로 난 것이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든]을 보고 신적인 권위를 둔다고 해서 자기중심의 성향을 버리고 자기 부인을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기 부인은 참 삶의 도리를 말함이다. 마귀는 그런 참 삶의 도리를 가르칠 리도 없고 관심도 없다. 오직 자기의 말을 추종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인생들의 멸망을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삶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방법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니 그냥 무조건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에덴낙원에서 사단이 속임수로써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아 파멸시킨 것이라든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이유 없이 단지 시기심에서 죽인 사례에서 이는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즉 목숨이 붙어 있다고 그냥 그것이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으로 그 목숨을 끊어 버릴 수가 있는 까닭이다. 자기 목숨을 그렇게 어리석게 끊고 남의 목숨을 그렇게 끊는다. 전자는 사단의 경우이고[스스로의 범죄로써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사단이 아담을 죽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경우다.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고는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고의적으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그것이 선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양심은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그에는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 안에다 장치해 두신 것인데 어느 인간이 그것을 감히 막는다고 그것을 제지하겠는가. 단지 양심의 소리 즉 경고음(警告音) 또는 경종을 번번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선하다는 의미는 자기 부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로] 가미될 때 구원을 얻는 "선을 행함"[롬 2:7,10]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담이 이성적 판단력이 미약하여 혹은 지적 결함으로 그래서 단지 사단의 속임수 때문에 범죄하여 죽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아담을 죽지 않게 하셨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미숙하게 인간을 창조하실 리도 없거니와, 아담 역시[남자든 여자든] 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이니 변명의 여지도 없고 동정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단이 부추겨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멸시하고 무시한 결과인 것이다.
그 자신만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았다면 사단 아니라 사단 위의 사단이 거짓말로 유혹해 왔어도 단연코 거절하고 물리쳤을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애초 사단의 범죄처럼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결과가 된 것이 아담의 범죄다. 즉 하나님 정하신 삶의 법질서 그 법도를 어긴 것이다. 도대체 삶의 법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肢體)로서 각자가 움직이는 그런 체계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이지(理智)에 관한 것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하는 것으로서 평소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찾고자 하고 자기 양심에 심어진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진리를 사모하는 것이 성경에 말하는 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 17:27]인 것이다. 단지 기적 하나만을 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님이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은 기적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9,20].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는 것임을 이상 말씀과 함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들 가운데에서 보임이니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음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롬 1:19,20] 함으로써 성경은 다시 확인하고 있다.
만드신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인가 병적인 데가 있어 즉 자기중심의 성향이 강하여 자기 욕심대로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짓누르고 있는 까닭에 올바름 곧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바로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미약한 양심의 소리는 나중에 일이 모두 결정되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는 정상대로 작용하여 "슬피 울고 이를 갈게" 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왜냐면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그보다도 자기가 자기를 속인 것에 대하여 천추의 한을 품는 후회가 있을 것이지만 자기의 어리석음만 탓할 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단이 자기를 속였다 하나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속인 허물이 워낙 크고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람이 무슨 증거가 없어 하나님을 못믿는 것이 아니니 속지 말고 스스로를 또한 속이지 말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하늘로서 오는 표적" 즉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이를 묵살하시고 응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면 이미 나타내신[각종 기적을 통해]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또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증거가 설혹 보여진다고 해서 인간이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적(敵) 그리스도가 현란하게 각종 기적을 나타내 보여 스스로를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로 가장하더라도 냉소에 부칠 뿐 결코 거기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이미 성경은 그런 성격으로서의 기적은 오래 전에 부정(否定)하고 무의미하여 필요 없는 것으로 낙인 찍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부인의 올바른 삶으로 인도해내는 데에는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으로는 역부족(力不足)이니, 자유 의지, 사랑, 생명 이런 것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사랑의 의지 곧 자유 의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제약을 가하기도 함으로써 웬만한 사람은 다 천국에 들어가 살도록 하심이 좋지 않으랴 하겠지만, 스스로 올바름[이 의(義)는 앞에서 설명한 바 한 몸 체제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을 사랑해서 머리의 지시에 기쁨으로 순응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그렇게 제약해서 간섭해서 또는 강제해서 겨우 복종시킬 정도라면 실제로 그 당사자는 영원을 두고도 그런 성향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미 그런 성향은 이 세상에서 단박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 정체가 드러나기에는 그리 긴 세월을 요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다시는 그런 시험하는 일이 없다. 천국은 완전히 자유뿐이다. 그 스스로 의를 사랑하여 의를 행하는 이들뿐이므로 그러한 것이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옳으니 그 올바른 것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뿐이다. 어린 아이라도 구원 얻기에 충분하다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에 아무 제약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에 자기 사랑으로 화답하는 것으로써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게 되어 있음이니 이것이 곧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쉽고도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비결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단순히 마음에 들면 사랑하는 것이요 억지로로는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에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선행을 해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머리 없이 몸만 챙기려는 무지요 어리석음으로서 자기중심의 한가지 표현만 될 뿐이다.
선이 무엇인가, 자기중심이 아니고 이웃을 위함이요 이웃을 위하는 것은 머리를 중심하는 한 몸 구조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 이기주의가 아니면 집단 이기주의가 되어 자기중심의 테두리를 평생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머리가 그리고 그 머리의 지시를 받아 모든 지체가 자기를 위한다는 사실을 믿음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이런 한 몸 구조를 이루지 않은 그 어떤 것이든 인간 망상에만 그칠 뿐 실제 상황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찾음
그리고 자기 부인을 하게 되면, 자기중심의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부터 첫째로 없애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첫 사람 아담의 범죄[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중심]로 인해 이런 인간 비극의 죽음의 참상이 왔기 때문이다. 고로 죽은 자의 모습이므로, 삶의 낙을 누리는 것부터가 완전히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는 결과인즉 올바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되어 있다. 사단이 생명 길로 인도할 리 만무하다.
사단은 우리 인간으로서의 육체에 비하면 영물(靈物)이니 영물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신(神)이다. 신으로서의 능력은 막강한 것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얼마든지 기적을 베풀 수 있고 그리고 향후 나타날 기적은 거짓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으니 거짓의 속성상 거의 무한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기적 이상의 것이라고 하여 앞서 지적한 대로 기적의 크기로써 그리스도보다 우세하고 그래서 자기가 진정 그리스도라고 속일 것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기적을 봄으로써 사람들이 회개하고[회개하여 올바르게 살기로 즉 복종하기로 결단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믿음도 무의미한 무용지물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므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표적[기적]을 요구했어도 단연코 잘라 말씀하시기를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마 16:4]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들의 다과(多寡)로 어리석게 저울질하지 말고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전처럼 더 다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지는 것으로써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물들이 반드시 그 배경이 되어 배후에 활동하고 있음이다. 즉 자연계와 영계가 대립해 있고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인간을 포함해]와 영계에 속한 생명체가 뒤섞여 있는 것이 이 세상임을 한시라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바로 그 의미이다. 모르는 자들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성경적 사실을 성령으로 배우지 않는 한 알 까닭이 없다. 사단 등 악령들이 철통 같이 눈을 감겨 놓고 있는 까닭이다[행 26:18].
물론 이 세상만 끝나고 영원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누가 말하건 않건 자동적으로 모든 진실을 대낮 같이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 때 아무리 알아야 그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때는 악인이든 의인이든 모두가 신령한 몸이 되는 까닭이다[요 5:29].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몸이 이렇듯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몸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영계의 것을 인식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큰 불이익인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이런 참혹한 결말을 낳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땅히 어찌해야 하는가. 이 기막힌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인생으로서는 급선무가 없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알았으니 어찌 하든지 나머지 사람들도 이 사실에 "눈 뜨게 하여 어두움을 벗어나 빛으로 나가고 사단의 권세를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행 26:18] 일 이상으로 유일하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각종 종교를 믿어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재주도 사단은 있다.
그래서 이 함정에 빠져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데에 쓰게 되어 있는 금 쪽 같은 귀한 시간을 헛된 세상 삶[자연계에 속한 목숨 부지뿐인]에 다 낭비해 버리고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이요 충격적인 무지몽매인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 경고하신 것이다[요 12:25]. 이 세상 삶의 낙을 누리기를 거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함이다[:25].
이런 실상 앞에서야 눈물밖에 더 있으랴. 그리스도께 관한 네 가지 복음서의 짧은 기록에서나 각종 편지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우셨다는 사실을 연거푸 적어놓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우셨고, 마리아 세 남매 중 하나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사로를 친히 다시 살리실 줄 아시면서도 그 이웃들이 슬피 울 때 함께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고 또 그들이 믿지 않음에 대하여 더욱 통분(痛憤)히 여기시고 슬퍼하셨다[11:38].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했다[히 5:8].
그리고 사도 중의 사도라 할 수 있는 바울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다[빌 3:18/고후 2:4/행 20:19,31]. 바울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정이었기 때문이다[롬 9:4]. 모세의 기도 역시 이 그리스도의 심정,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기에 그런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출 32:32]. 앞에서 호손의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관정에서 이 "그리스도의 심장"[빌 1:8],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을 닮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 아니,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눈물. 이 눈물은 강함의 표시인가. 약함의 표현인가. 하나님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으니 약하심인가. 어떤 경우에 약하심인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35] 하신 데에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4]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나"[벧후 3:9], ㅣ실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하고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대로 하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해져서[성질이 억세게 사납고 고집스러워]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 28:26,27] 하심과 같다. 그러면 일부러 그런 사람은 믿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냐, 아니면 강제, 간섭을 해서는 믿도록 하시지 못해서이냐, 어느 쪽이냐 하면 양쪽 다 그대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요일 4:8]이심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라는 사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진실이다. 하나님의 엄위(嚴威)와 인자(仁慈)의 양면성이다[롬 11:22]. 항상 이 양면성의 원리를 기억할 일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피동/소극적인 측면]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능동/적극적인 측면] 것과 같은 이치다. 왜 구원을 내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가. 내가 아직 구원을 아직 받지 못했음인가? 아니다. 나의 삶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를 위함이라면 나의 구원이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이니 곧 주님 즉 나를 소유하고 계시는 나의 임자[主人]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골 3:24] 종의 삶이다. 따라서 주인의 종이 되어 종의 임무에 충실을 기하고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 즉 머리와 몸,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그런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내게 생명[영생]이 됨이다.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으면 그와는 반대로 생명이 아닌 죽음일 따름이다. 우리의 구원이 무슨 기계적인 작용처럼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핵심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요체이므로 이는 마음의 영역이라 내 마음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마음을 변하면 얼마든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됨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의식하면서도 두렵고 떠는[생명 아닌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개연성 또는 가능성을 상상하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온 '동시성'과 '양면성'에서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에서 서로의 대립되는 의미이다. 높고 낮음이라는 개념 차이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높음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낮음을 동시에 인식해야 가능해지는 그런 이치다.
삼위일체 원리의 3각[tripod] 구도에서, 이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 바로 c[병]의 역할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질"[고전 10:12] 수도 있어 그런 경우의 죽음을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떠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이 일테면 a[갑]의 위치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생명으로서의 나의 현재의 위치에 감사하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이 나머지 b[을]의 위치인 것이다.
"항상 복종함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두렵고 떠는"[2:12] 것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은 도저히 화합할 수 없고 함께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대립 관계임에도 그러나 얼마든지 말이 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치에서다. 물론 이런 현실은 이 세상에서만 한하고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시험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빛의성질을 두고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종결이 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보어는 양면성을 주장하는데 반해 아인슈타인은 일면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고집하는 이유가, 파동[wave]이라는 것과 입자[particle]라는 양면이 상호 상충되어 상합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음이다. 일리가 있고 무리한 주장은 아니니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만이 아니고 실제 그 둘이 상호 화합하여 빛이라는 하나로서의 존재로 건재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현실임에는 똑같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이 현실을 그냥 무조건 하고 수용하는 것밖에 없다.
이치를 따져서 될 일은 아니다. 이치를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와 아들과의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 "성령"이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드을 낳으셨다는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로 따지면 된다. 즉 입자가 파동을 파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학적 실험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일이지만[입자에서 파동이 나왔는지 아니면 파동에서 입자가 나왔는지를 가려내기 위해] 어쨌든 갑에서 을이 파생(派生)되어 나왔다는 현실만은 불변의 진리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신 사실로부터 이 삼위일체의 법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닮은꼴을 파생시키는 것이지, 그 자체를 생성시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는 이미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므로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 생겨나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닮은꼴 즉 대칭형이니 기본형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렇다. 상호 대칭을 이루므로 같은 모양 또는 성질일 수가 없다. 즉 파동은 입자가 아니며 입자는 파동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본질이 같기 때문에, 빛으로서 즉 그 둘이 하나로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자가 그 대칭형을 파생시킬 때에는 같은 입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드시 다른 모양새로 나타나도록 해야 함이니, '높음'이라면 높은 것 그대로이면 안되고 다른 모양새 즉 '낮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높음이 존재함과 동시에 낮음이 덩달아 함께 존재하게 됨이다. 그러므로 '입자'가 자기의 닮은꼴을 생성시킬 때 '입자'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일까. 답은 '파동'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기준 또는 일상생활의 기본 자세는 다음에서 드러난다. 즉 "종들이여,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上典, 주인,고용주)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두려워하여[fearing God/reverence for the Lord]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일관함이다. 왜냐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는 삶이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사랑의 주님"이라고 해서, 절대 다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은 그 어디서나 통하지 않는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fear]으로 하라"[벧전 3:15] 함도 같은 맥락이다. 항상 주님을 앞에 모시고 섬기는 자의 자세로서[엡 6:5],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되는 경우이든 항상 주인 앞에서 하는 것이므로 주인을 두려워하는 일체의 언행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주님[주인]을 섬김으로써 항상 주인 앞에서 언행을 하는 우리의 기본적 자세를 이해하지 못한 관계로, 마치 말하는 상대를 존중하는["respect"] 의미로 말하라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영역[NIV]도 있으나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다. 원문 그대로 "두려움"["fear"-KJV, NKJV]인 것이다. 왜냐면 아래의 바울의 경고가 이를 강력히 뒷받침함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니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25] 하신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에 바울 사도가 떨었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 하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4] 하여 그 이유를 밝힌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바울이 허튼 말을 할 리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차원에서는 위의 베드로의 경고와 같은 뜻이다[벧전 3:15].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초대 교회 당시의 바울이나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구원의 기쁨을 말한다" 하여 설교 강단에서 우스개를 하고 웃기는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이들도 없잖아 있는 현실에서 오늘날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는 "배도(背道)"[살후 2:3]의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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