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10. 기타 몇 가지 고찰점 11. 퉁구스카, 나즈카, 스톤헨지 기타 12. 용[龍]의 정체 - 악령(惡靈)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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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프란시스
"아씨시의 프란시스 같은 자기 부인에 철저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속임수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말하지만, 우리는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을 설명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면 그리스도로써만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지 그리스도 외에 다시 마리아를 덧붙여 신격화할 리 없음을 명심하라는 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그런 무소유[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부인"과는 전연 거리가 멀다]는 불교 관계자들도 얼마든지 예로부터 실천해 왔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자기 부인이 아니다. 힌두교의 성자들이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그리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 이 두 가지요건을 갖추어야 자기 부인이다. 다른 것은 다 접어 두고라도 프란시스는 마리아를 미화하는 데에 대해 아무 항의[protest]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수용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으로 복음을 이해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 복된 좋은 소식]과는 정반대다. 그리스도께 스스로 나아갔다는 것은 자기 구원을 위한 움직였다는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앞으로 나아가기커녕 나 자신을 위해 일절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그저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뿐이다. 모세 시대에 죽음의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는 일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눈을 들어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높이 치켜 세운 불 뱀의 형상을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누구나 살았다.
"모세가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이다[요 3:14]. 그리스도께 나아가되 마리아를 통해서 그를 힘 입어 겨우 나간다는 의미이니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구원을 나아가는 자기중심의 움직임이다. 말이 났으니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것은, 프란시스는 피조물을 모두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해도 "형제", 달도 "자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자매["sister Death"]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마음에 뿌림을[그리스도의 피로]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히 10:22] 때에 한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산 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먼저 구원되지 않고[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없이]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 나아가니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전 인류]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후 5:14]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 함과 같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유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믿게 되는 고로 그렇게 믿는 경우 즉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라도 다 구원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사람을 지으시고 악인도 지으신 것이나, 악인들로서 지으신 것은 아니니 악인은 하나님을 한 몸 체제에서의 '머리'로서 마음에 두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자들이므로 형제일 수가 없다. 덮어놓고 "형제"라 하는 것은 인생의 최초[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암암리에 부정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결과밖에 낳음이 없는 아주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났다"[요일 3:9] 하여 그들만 하나님 피조물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그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born of God-요일 3:9]"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맏아들"[롬 8:29/히 1:6]로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제자매"가 됨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성령으로 나는"[요 3:5,6]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누구나 프란시스 식으로 말하게 되면 사람이 영생하려면 다시 출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본 진리마저 희석시키고 유야무야로 돌리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했으므로, 악인이나 죄인도 하나님에게서 난 형제자매라 하면 이상의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과는 반대로 말함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세상이 "현대의 성녀"라 인정하는 데레사 수녀가 한 일을 악행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관점이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는 아씨시의 프란시스 이상이고 데레사 수녀 이상의 "선한" 인물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성현(聖賢)이 태어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각광을 받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성경이 말하는 선인(善人)과 의인이 무엇이냐 하는 데에 그 답이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세상에 그 누구도 의인이나 선인이 없다 한 것이다[롬 3:10,1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비로소 선을 행하는 의인이 될 수 있음이다.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머리되시는]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고후 5:15]. 그러므로 적 그리스도의 소위 "선"과의 차이는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아무리 "선"으로 위장해도 그 한가지 사실로써 "악"임이 드러난다. 위선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함밖에 없다. 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일체의 악이요 죄, 불의, 불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에서 떠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기주의요 개인주의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의롭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가장(假裝)했기 때문이라고 지체없이 단정할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은 실체에 대한 그림자이니, 실체는 오직 하나님을 머리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류에게는[첫 사람 아담은 그렇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지 않는 한 그 누구도[비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내세워도] 머리될 수 없음을 반드시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의미로서는 완전히 격하시키고 축출하려고 딴에는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다. 이제는 아담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구원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범죄로 폐기되고 대신 지금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시대인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실존조차 확신이 가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런 바탕에서 어찌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가능하겠는가. 데레사 수녀는 그래도 솔직해서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경우다. 그런 자기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거나, 가끔 느껴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경우, 문제가 보통으로 크지 않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그렇다. 주변 사람을 본의 아니게 속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속 사정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 고뇌 속에서 늦게나마 하나님을 찾고 복음을 믿을 수도 있다. 그런 좋은 결과를 낳아 이 세상 떠났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핵심은 "머리"의 존재를 부정하고서 공동체 의식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머리를 부정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이 머리가 되려 하거나 이미 그런 머리로서 자기 자신을 착각하게 되어 있음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이제는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을 인정하지 않는 일체가 모두 악이요 죄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이 무엇이고 의[올바름]가 무엇이냐, 말 그대로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 선이고 의이다. 사람 삶에 행복을 기할 수 있는 것이 선이요 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불의요 악이다. 그러므로 머리[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셔야 삶의 행복을 기할 수 있음이다.
여럿이 함께 아니, 단 둘이만 살아도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으로 마련되어 있는 최대한의 지혜가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다. 이 체제에서는 구성원 숫자만큼이나 자기를 확대, 확장시켜 살 수 있는 것으로서 더 이상 최고의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선]이요 옳은 것[의]이고 그렇지 않고 어긋나게 자기 고집대로 나가는 것이 악이요 불의요 불법, 죄악이다. 그래서 머리를 누구로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달렸다 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머리는 우리 모두를 지으신 하나님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런 불의가 없고 그럼에도 선인 양 의인인 체 하니 그런 속임수가 없고 가증스러운 거짓이 없다. 앞에서 삶에는 반드시 법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했으니 혼자라면 물론 그런 것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단 둘이 있어도 법, 도리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약속이다. "나는 이렇게 하고 너는 그렇게 하는" 등으로 서로 다짐을 두는 것이 약속이고 법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아들을 만드시니 바로 이 사실로써 모든 법의 기초가 세워진 것이다. 즉 삼위일체의 원리다. 둘이 하나됨이다. 이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만물의 기본과 처음이 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서 사랑을 논할 때 이를 위선이라 하는 것이다. 선일 수가 없음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존재조차도 의혹을 품는 심경에서는 그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데에서는 당연히 선이 있을 수가 업다. 적 그리스도의 선이 장차 그런 위선이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선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머리로서 위하지 않는 한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라는 것으로 어김없이 귀결된다. 믿어도 오늘날처럼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믿으면 자기 부인이 될 수 없으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 겉모양을 두고 판단하지만 이와 같이 내면, 이면(裏面, 裡面-롬 2:29)을 두고 성경은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10]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후자는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10]고 단정하고 있다. 프란시스대로 하면 마귀의 자녀들까지도 하나님께 속한다고 말하는 식이 된다. 그러면 결국은 다 천국에 들어가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것이 마귀의 거짓말의 속성이다. 이런 식으로 속여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려 넣은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시스의 자기 부인이 자기 부인이 아니며 선행일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성경으로 판단할 일이요 미숙하고 편향된 어쭙잖은 인간의 판단으로 단정 짓지 말 것이다. 당시 유대인이 하늘 같이 위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저들의 신앙의 핵심을 건드린다 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심과 같다"[행 7:48-50/사 66:1]고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스데반을 무참하게 돌로써 쳐 죽인 것처럼, 오늘날 이 사람들은 자기네 신앙의 꽃이라고 할 만한 프란시스를 비판한다고 우리를 "돌로 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나 우리는 스데반과 같이 죽는 것을 오히려 바라고 영예로 생각하므로 개의치 않는다.
스데반이 말한 것을 바울 역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17:24]는 말로 똑같이 천명하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고 있다"[행 7:51]는 말에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사(一死) 각오로 임해 있는 사람들이다.
스데반이 죽을 때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탄원한 것처럼[행 7:60] 그래서 스데반을 죽게 한 무리들 중에 훗일 바울 사도가 될 사울이 끼어 있었던 것처럼 얼마든지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니,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천주교를 위시하여 모든 기독교를 박멸할 것이므로 더 이상 "우리 종교"라 하여 연연하지 말고 때 늦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올 일이다.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관련된 것은 모조리 청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마 10:9] 너희 전대(纏帶,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 곳으로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는 자루, a money belt)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다"[마 10:10]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여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거지 행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을 사람들은 높이 평가한다.
사람이 사람의 말이나 글을 대할 때 문자 그대로 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서 어떻게 의사 소통이 된다던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을 두 가지 면으로 고찰할 수 있으니, 첫째 우리 인생은 모두 죽은 자이다.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현재의 사람들을 모두 죽은 자라 하신 것, 새나 여우나 모두 자기 집이 있지만 현재의 인생은 머리 둘 곧 즉 자기 집[영계 곧 영원한 세계에서의 거처를 잃어 버린 인생들이니]이 없다 하신 말씀과 맞물린다[마 9:58,60].
둘째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서[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지만 죽은 자의 모습으로 죽은 자를 자처하는-골 3:3] 오직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전파요 이 외에 달리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이 말씀 전파가 완료되자마자 세상은 끝나는[마 24:14] 터라 이 밖에 세상에 머무는 의미가 없음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밖에 없는 의미 있는 일에 전심전력으로 전력 투구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이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하신 말씀에 해당된다[9:61,62].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해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십시오 하라"[눅 10:2] 하셨고,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눅 10:3/마 10:16] 하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눅 10:4]는 등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전도 여행을 떠날 때 금전을 노리는 도둑을 만나 변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 살상이라도 당하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일절 그런 잡된 강도들이 노리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무일푼 빈 털털이라는 것으로 처음부터 인식되면 아예 도둑들이 관심을 두지 않게 되니 이것이 일하는 자로서의 "지혜"다.
우리가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는 전국 방방곡곡 아무리 오지(奧地)라도 샅샅이 뒤져가며 말씀을 전달하게 되므로 자연 그런 위험이 아니 따를 수가 없다. 옛날에는 반드시 그러했던 것이다[고후 11:26]. 그리고 그 외의 몫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것으로서 먹고 마실 것, 잠자리를 청하게 될 장소 등은 친히 마련하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믿음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웃는 자는 장차 울게 될 것이요 지금 우는 자는 장차 웃게 될 것이라"[눅 6:21,25] 하신 대로 이 세상은 삶의 낙을 즐길 즉 웃을 때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웃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희희낙락하는 때가 아니고 장소가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이 "죽은 자"[마 8:22]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외압(外壓)에 짓눌리면 어느 순간에도 빠개질 수 있고 수명을 채운다 해도 결국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은 자로서의 인간의 세계이므로 이 세상을 죽음의 세계라 하는 것이고 이런 세상을 지배하여 다스리고 있는 사단이므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가 인간의 원수[첫 사람 아담을 거짓말로 꾀어 죽게 만들었으므로] 사단이라 하는 것이다[히 2:14].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일[사람 살리는]을 함에는 뱀 같이 지혜로우라 하신 것처럼 사단의 방해 공작에 휘말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강압적으로 사단을 제어하셔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지는 않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항상 선결과제가 되어 있어 이것이 충실히 되어야 우리를 보호하여 지키시는[이 모두 천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게 되어 있는 역할이요 몫이다]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할 때에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시는 법이다.
따라서 강제하시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거나 하는 일이 없이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기꺼이 즐겁게 순종하기를 바라심이다. 때문에 아담이 범죄를 해도 이를 강제로 막지 아니하신 것이니 아담 스스로 알아서 자기 판단에 의한 자유 선택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셔서 처음부터 아담[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뱀 같이 지혜롭게 머리[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시키시는 대로 따를 일이다.
그리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여 절대로 죄를 짓지 말 일이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약하게 보이는 것이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강한 것으로 보이나 실인즉 이는 사단에게 종 노릇하는 것이므로 약한 것이요, 도리어 세상에서 죄 짓지 않는 약함[악을 악으로 갚아 상대를 우선은 굴복시키지 못하므로]으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곧 강함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의 강하고 약함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 이하 악령들을 상대하는 것이므로[엡 6:12] 그러하다. 사단을 이김이 곧 강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인간을 굴복시킴으로 해서 인간 앞에서는 강하게 나타날지 모르나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에게 지고 사단 앞에 절하는 것이라면[눅 4:7] 그것은 한도 없이 약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고전 8:11]는 분명히 회개하여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린"[행 3:26] 사람들이니 죄인이 아닌 것이다. 다 자기 의지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면야 모든 인류가 다 구원 얻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성경은 동시에 밝히고 있음이다[살후 3:2/행 28:26,27]. 그러므로 모든 인생들을 형제라고 하는 등 한 면만을 함부로 집중해서 말할 것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악인들도 결국은 다 구원이 되며 결코 멸망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되어버림이다.
그리고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 즉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 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즉 아버지로서 모시는 경우에 한하는 아주 소중한 언어이다.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4:2] 하는 것은 구원의 도리를 유야무야로 돌릴 수 있는 사단의 간악한 수단 중의 하나다. 고로 그런 식의 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법 경건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말씀에 훼방을 놓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사단의 이와 같은 활동은 그 클라이맥스가 성경에서 말하는 바 "멸망의 아들", "악한 자"의 출현이다. 자존(自尊)하여 "신(神)"이라 하고 "하나님"처럼 여겨져 경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3-12]. 이런 짓을 사단이 감행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의를 사랑하지 않는[불법을 좋아하는] 자들을 모두 걸러내어 청소(淸掃)하시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사단의 목적은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아 보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런 어마어마한 쇼[show]를 벌이는 것도 인간을 속여["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마 24:24]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원래 사단은 거짓말하고 속이고 모방하는 데에 이력이 나 있는 자라 참 것을 뺨칠 정도로 거짓 것을 만들어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할 것이라" 하셨으니, 어떤 점에서 우리가 이를 식별할 수 있는지 미리 챙겨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성경대로 두 가지[①, ②]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①하나는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니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4] 하심과 같이 적[敵] 그리스도는 당연히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자기중심으로 나가기를 좋아하므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다.
②다른 하나는 적 그리스도의 유혹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으로서 이는 저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0-12]이라 함과 같이. 이와 같이 자기중심으로 나가기를 좋아하는 것이 "불의를 좋아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모두 적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심인가. 이 경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 위해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 위해 죽으셨지 뜻이 아니라면 우리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니, 아들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 스스로 그와 같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무릇 하나님께로서 난 자[아들께서도 아버지께로부터 나셨으니까-히 2:11]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씀하심이다.
범죄한 사단 등 악령들이나 아담이나 자기를 위함으로써 범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속한 적 그리스도야 당연히 자기를 위함이 그 특징이다. 그러면 자기를 위하는 특징은 무엇이냐 할 때 자기 스스로 고난 받는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고난 받는다는 것은 그 고난으로써 일단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자기 부인으로서의 일관된 자세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다.
그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요 20:21]. 그러나 적 그리스도는 그런 모방을 할 수가 없다. 고난 받는다는 모양새를 낸다고 즉 그런 모방의 일환으로 어떤 이유로 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흉내를 낼지는 모르나[계 13:3] 그 당대에 죽음으로 끝내지는 않는 것이니 바로 이 차이다. 죽음으로 끝내지 않으니 그 속내는 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나타나셔도[그리스도의 재림(再臨)], 일단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후 이천 년이라는 상당 세월을 격한 다음의 영광이신 것이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는 당대(當代)다. 당대에 영광을 취한다. 이 차이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고난으로 일단 그 생애가 끝난 경우다. 따라서 그 영광이라는 것은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 받아 구원 사업이 종료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나시게 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는가"[요 5: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신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서 제자들 역시 그 스승을 따라 영광에 앞서 먼저 고난부터 받아야 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낌새를 알고 많은 제자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다[요 6:66]. 그러므로 이상 두 가지의 마지막 단계로② 이어지는 것이니 즉 적 그리스도 역시 자기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상태를 버리지 못함이야 물론이지만, 그 적 그리스도에게 현혹되어 그에게 넘어가는 사람들 역시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이들만이 그렇게 따르게 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충실히 자기 부인을 힘써 온 이들은 그에게 속해질 수 없어 그에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대로 그렇게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살후 2:10] "불의를 좋아하는"[:12] 것으로 표현된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어서[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자처하든 않든] 멸망의 당연한 순서를 밟아가는 것뿐이다[요 3:18].
이미 정해진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니 실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 할 것이다[히 10:31].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희망이 없으며 이런 경고를 해도 먹혀 들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비탄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가운데에 있어 그리스도의 뜻을 순종하고 있음을 자기 스스로 아는 이들 외에는, 모두가 그 때가 되면 예외없이 적 그리스도에게 휩쓸려 빨려 들어가게 되고 이 위험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지금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는 해도 절대적인 자기 부인으로서의 복종의 길을 걷지 않고 있는 이들은, 이런 차이를 설명해도 쇠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않으니 무섭고도 슬픈 현실이 아닐 수없다.
지금 이 시간 경성(警省)하고 경고를 받아 때 늦지 않게 믿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러므로 ②에 해당되어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를 경계하라는 ①의 경고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부인의 자세로 확고하게 서서 ②의 위치에 있어야 자기 이름으로 나타나는 적 그리스도를 간파해내고 ①에 물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고 그리스도의 구원도 믿는다고 큰 소리 쳐도 ②불의를 좋아하여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은 그 때 가서는 다 적 그리스도를 믿도록 되어 있다. 주님의 경고대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의 대열에서 낙오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제자됨이 구원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됨으로써야 우리에게 영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릇 제자된 자는 모름지기 그 스승과 같아야 함이다.
또한 우리의 구원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심[자유케 하심, 해방하심]"[히 2:15]이니,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고난 받는 것 기타 거기에 속한 일체를 기피한다는 뜻으로서 생명에는 원래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한다"는 것은 그 결과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고난을 면하자는 구차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면하려는 생각에만 그칠 뿐이지 실제 면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죄의 결과 다시 말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신이 되어 이런 육신에 매여 있음을 의미함이다. 즉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음이다[롬 8:2]. 부득불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주의자로 만들게 하는 요인이 되어 있으니 이런 것이 자기중심 곧 죄요 악이다. 아담은 우리와 같은 이런 "육신"[롬 7:5-8:13]에 처해 있지 않았어도 범죄한 것을 보라. 사단 등 악령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런 죄 짓는 일에 더욱 부채질한다는 의미일 뿐이고 "육신" 자체가 죄의 근원이 아니니 죄는 "육신"에 있든 없든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에서는 그런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용납될 리 없다. 왜냐면 고통도 영광도 일절 함께 나누는 구조요 체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이 사람 사는 도리임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는 반드시 머리와 몸의 관계이므로 하나님을 머리로 하지 않고서는 그림의 떡만 될 뿐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다고 또 영생에 이르는 것은 아니니 이미 그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옛 시대에 속한 것이고, 이미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인류에게는 오직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이런 공동체 의식만 있고 이대로 행하기만 하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따라서 죽기를 무서워하게 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또 이미 이렇게 죽음에 처해진[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어 있는] 이상 그래서 인간 스스로 이렇게 하나님의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죽음을 자초한 이상 오직 죽을 따름이요 따라서 다시는 영계에 속한 몸이 될 수 없음이다.
곧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아담 스스로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거기 에덴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었던 것과 동일한 이치다. 따라서 원칙상 반드시 이 육체는 썩어 없어져야 하므로 신령한 육체로 변환시킬 수 있는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결과는 반드시 죽음밖에 달리 더 있을 수 없으므로 이렇게 죽었다고 다시 살아남에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의 죽음에 합류하셔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 되심으로써, 다시 살아나실 때 나 역시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나와 하나 되어 주심'을 따라 다시 살아나 '산 자'로서 다시 말해 영생하는 자로서 새로 창조되는 방법밖에는 합당한 구원의 길이 없음이다.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구원이든 영생이든 그 무엇이든 비로소 논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고로 공동체 의식대로 살아 자기중심이 아니라고 해서[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기중심이 안될 수가 없는 불가항력이기에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라 하는 것] 영생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와 같이 친히 우리 위해 사람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반드시 하나됨을 통해야만 구원되는 이치다.
왜냐면 그렇지 않고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의 공동체 의식으로는 본질적인 자기 부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형태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런 본질 아닌 형태만으로도 그 효과가 크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써 증명한 실례가 임진왜란 당시 이공(李公) 순신과 '나'원균의 대조된 삶이다. 이런 사실(史實)을 우리가 강조하는 이유는, 의와 선을 행함이 이런 공동체 의식을 실천함을 말하는 것이요 죄가 다름아닌 이런 이기주의, 자기중심에서 오는 폐해임을 명백히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다. 이기주의가 나쁘고 지탄을 받아 마땅하고 침 뱉어 마땅한 대상이라는 것이야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 영생 또는 구원 문제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못되고 다만 형태상의 의미만 되느냐 하면, 예를 들어 그렇게 세상에서 칭송하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산다고 해도 그렇게 사는 목적이 자기 영생을 위함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하는[자기 구원을 스스로 목적하는 것이므로]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가 바로 이런 범주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에 구원이 없는 인간 망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면 다 영생하기를 원하지 이대로 죽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새 창조로 다시 나게 하시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다. 왜냐면 무조건 자기 영생 혹은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는 형국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리원칙상 그리고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죽고 또 그런 육신으로 인하여 나 자신이 범한 모든 죄 역시 죄는 죄니까[그것이 고의적으로 지은 것이든 아니든 간에] 죄의 보응은 죽음인즉 마땅히 죽는 단계부터 치르고 그 과정부터 마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세상 종교는 죽었다가 다시 나도 모방할 수 없다. 적 그리스도가 이런 것을 혹 모방하고 흉내 내려 할지 모르나 이미 우리는 위에서 그가 악한 자 즉 자기중심의 화신임을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설명한 대로 이와 같이 자기중심을 척결하고 자기 부인의 새 생명의 질서를 확립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많은 설명을했지만 어떤 하자라도 있던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던가.
이 이치는 실은 간단하기가 이를 데 없고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워낙 지금까지의 선입견과 편견에 물들어 있었기에 이를 털어내기 위한 반복 학습 효과를 바라서 되풀이하여 설명했기에 이렇게 장문의 글이 되었다. 이렇게 충분히 설명이 되어 더 이상 손볼 데가 없는데도 그리스도를 말살하고 자기가 진짜 그리스도[인류의 구속자]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이 모방이고 따라서 가짜이고 악한 것임을 그 스스로 노정(露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맹점(盲點)을 덮고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각종 기적들을 능가하는 각종 기적의 현란함과 규모의 방대함으로써 나타날 것이기에 성경도 이를 미리 경고하여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라"[살후 2:9,10] 한 것이니 이 사실에 역점을 두고 표현한 낱말들 자체가 얼마나 요란한가를 보라.
즉 "모든 능력", "[모든] 표적", "[모든] 거짓 기적", "불의(不義)의 모든 속임" 등등이다. 사단의 '젖 먹은 힘'을 다해 총동원하는 모양새다. 얼마나 지독할 것이기에 이렇게 야단스럽게 성경이 표현하여 미리 경고를 하겠는가. 여기에 마땅히 주목할 일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영역은 우리말 "유혹"[:11]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지독한 유혹[strong delusion(KJV), a powerful delusion(NIV)]"이라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때 가서 [그런 것이 나타날 때] 넋 나간 모양으로 휘둘리지 말고 오늘 이 시간부터 자기 부인의 자세로 일관해 나갈 일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기중심의 자세가 조금이라도 있는 한 거기에 맥도 못추고 빨려들 것이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경우에만 한해서 그 거센 대형 태풍을 '가까스로' 견뎌낼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자"로서의 모든 인생들은 말 그대로 "죽고 나서야" 그래서 "무덤에 완전히 장사 지내진" 다음에야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을 성경이 누차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이러한 확고한 논리에다 원리원칙이 분명한 것에 비하면, 세상 종교는 실로 얼마나 엉성하고 허술하고 유치하고 주먹구구식이고 어린 아이 소꿉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가!
이렇게 죽을 때에는 그래서 다시 살아나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할 때에는 향후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마땅히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이 외에는 그 어떤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해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일단 죽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완전히 장사 지내졌으니까[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지내지심에 함께 함으로써] 완벽한 이상적인 원래의 의미[처음 인간이 창조되던 당시] 그대로의 자기 부인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이미 이루어진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가능해진다[고후 5:15]. 하나님께서 머리이시니까 머리는 당연히 그 몸[의 각 지체]을 위하시게 되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나와 함께 된 다른 지체들이 나를 위하게 되니까 나는 자연적으로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자기 부인이다.
이와 같이 이중적인 완벽한 의미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자기 부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죽음을 기피하려 하고 그래서 고난 받는 것을 꺼린다 해도 이미 나는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보장되어 있는 산 자[영원히 사는]가 되어 있으므로 머리의 지시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는 것이 옳고 좋은 것이다 하면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니, 따라서 과거처럼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에 얽매여 종 노릇하는" 것이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면 나의 유익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이 되는 줄을 "믿기" 때문이다[롬 8:28/고후 4:17]. 그래서 사단 이하 온 세상이 나를 죽게 하고 온갖 고난의 핍박을 가해도 내가 요동할 아무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이상적인 사람 삶의 자세인가. 모두가 그러하니 여기에는 그 어떤 죄도 악도 비극도 눈물도 고통도 해를 입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일절 발붙일 틈이 없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완벽한 장치다. 이 이상 더 바랄 것도 없고 연구할 것도 없다.
§ 원래 영물[천사]들은 인간을 위해 조성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옹위하여 하나님을 직접 모시는 영물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룹"이나 "스랍"들이다. 이들 존재는 계시록에 "네 짐승"이나 "24 장로"들로 호칭되고 있다. 천사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니 왜냐면 천사들은 별도로 "그 수가 많아 천천 만만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계 5:11]. 그리고 이들 천사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히 1:14]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는 존재로 명시되어 있다.
"그룹[cherub]"이나 "스랍[seraph]"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의 '6일 창조' 이전에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아들[所生]들"이다. 생육하고 번성한 결과로 생기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피조물인 고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이런 표현은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던 영물들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창 6:2/욥 1:6]. 다시 말해 독생자(獨生子, 외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으심 받은 모든 피조물들이다.
이들 "그룹"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자가 있었음을 성경은 암시하는데 "그룹"과 "스랍"의 숫자가 적기도 하지만, 단 하나가 그렇게 타락했었다. 숫자가 적어도 기어이 그런 이탈자가 생기는 모양이다. 그러면 그 타락한 "그룹"이 지금 어디 있는가 할 때, 에스겔 예언서의 그 "무저갱ㅡ밑이 없는 구덩이[bottomless pit]"가 바로 그곳이고 이는 계시록에도 나온다. 그래서 "아불리온"이 바로 그 타락한 '그룹'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룹"은 인간 세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여 아내를 삼아 자식들을 낳았다" 할 때의 하나님 아들들은 이미 설명한 대로 '낳고 낳아 생겨난 존재'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생명체'라는 의미이니 곧 악령들이다. 친히 만드신 "소생(所生-행 17:29)"이라는 그런 뜻이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생이지만 에덴낙원에서 친히 만든 "소생"은 이 영물들뿐이다.
여자는 에덴낙원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이미 자연계에서 창조된 남자[아담]를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담이 자기 갈빗대 하나로 자기의 닮은꼴을 '낳은' 것과 같은 의미이나, 아담 자신이 아닌 하나님 친히 그와 같이 하셨기 때문에 "자식"이 아닌 "여자"가 된 것이다. 고로 이들 영물들을 가리켜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창조된 "각종 짐승"[창 2:19]으로 성경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다.
이는 이들 영물들이 자연계에 대한 대칭[상칭, 대립]으로 창조된 영계에서 역시 자연계의 동물과 대립되는 개념에서 창조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현재 우리가 지닌 바와 같은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육체인 인간과 그런 접촉을 할 수 있었음을 이미 지적했다. 물론 이들 악령들은 육체로써 그런 접촉을 한 다음에는 다시 그 본래의 영적인 몸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단지 참고 정도로 할 일이지 믿어도 좋고 안믿어도 좋으니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우리의 구원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서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악령들이 극성스럽게 준동하는 오늘날의 사태 파악에서 적지 않은 지혜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과 그 악령들의 실체를 전세계를 통해 직접 목도하고 있는 미증유의 시대에 처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앞에서 사단이 세상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의 마음에다 평안과 기쁨을 넣어 줄 수 있다고 했거니와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마음의 평안과 희열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할 때, 진리와 비진리와의 차이, 거짓과 진실의 차이, 선과 악의 차이, 의(義, 올바른 것)와 불의한 것과의 차이다. 다시 말해 현세적으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이니, 영생하지 않으면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인생인데 오늘의 평안과 희열이 무슨 소용에 닿는가 하는 것이다.
인생은 육체인지라 이 자연계에 속한 법칙에 철저히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 즉 과학적 원리원칙을 무시하고서 하는 얘기는 무엇이든 미신이요 따라서 진리가 아니며 거기에 따른 어떤 기적이든 형성될 때 그것은 악령 사단의 속임수라고 주저없이 단정하기에 이른다. 자연법칙대로 하면 인간은 다시 말해 그 어느 육체든 썩어 흙으로 돌아갈 뿐이지 그 육체가 저절로 다시 살아나 새로운 육체를 얻어 영원히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진리를 따라 말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의 공상에서나 나오는 결과물일 뿐이다. 현실이 아니라 신기루의 환상뿐이므로 그런 허망할 데가 없다. 그래서 미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슨 말을 하든지 우선 논리에 맞지 않고 상식에서 벗어나니 허황된 것뿐인데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이 역시 사단의 조종으로 지배당하여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이 손아귀에서[행 26:18]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이니 얼마나 비극인가.
인간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혹설(惑說)에도 동요되지 말 일이다. 이 사실 하나에만 못을 박아두어도 대략 미신에 빠지는 일은 면할 수 있다.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모든 종교가 이 혹세무민혹세무민(惑世誣民)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신을 인정해도 새 창조를 강조하지 않는 한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고후 5:17/엡 2:10/갈 6:15]에 의해 이런 철칙으로서의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창조로써 이 자연법칙이 확립되어 있으니 새로운 창조라면 이런 자연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음이요 이는 우선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의 하나님의 새 창조인가. 곧 나타날 적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새 창조를 흉내 낼는지 모르나 그러나 아무리 거창하게 나와도[기적 즉 초자연적인 면에서 그러할 터] 성경대로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보다는 완벽하지 못하거나, 또는 아무리 비등하다 해도 둘 중의 하나는 진품이고 다른 하나는 모방일 것이니 항상 먼저 있는 것이 진짜이고 나중에 오는 것이 가짜인즉 식별하기가 어렵지도 않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벽한가 할 때 이하 간추려보면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극진하신 사랑으로 사랑스럽게 만드셨다. 이 사랑은 항상 '하나임'을 상징하고 의미하므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하나를 형성할 때는 한 몸의 구조가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만물을 만드실 때 그 모든 피조물을 "몸"으로 하는 "머리"로서의 위치에서 창조하셨던 것이다.
머리와 몸[의 각 지체]의 관계는 극명(克明)하다.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한 몸된 하나됨을 유지 보전함이다. 다시 말해 몸은 자기 스스로를 위하지 않고 자기[몸]를 위해 주는 머리를 위함으로써 자기가 위해지는 방법 일변도로만 나간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진정한 행복한 삶은 이렇게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자기 부인이 아닌 시종일관 자기중심인데, 이런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살고자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세상 삶의 낙을 누리려고도 않고 백안시(白眼視)하고 금기시하는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미워하는 자라야 영원토록 자기 생명을 보전한다고 경고하신 그대로다[요 12:25].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역시 자기 피조물을 사랑하심으로써만 자기를 위하시는 존재 형식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180도로 전환해 계시는 터이다.
그런데 그 중에 소위 영리하다는 축에 드는 사단[뱀과 같이 지혜로우라 하신 대로-마 10:16]이 공연히 우쭐해지는 마음이 되어 자기의 생각을 앞세워 고집하는 짓을 하게 되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범죄하는"[요일 3:8] 자가 된 것이다. 이 사단의 영향을 받아 즉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아담 부부 역시 범죄하게 되었는데 속았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스스로의 생각을 따랐다는 점은 확실하여 아담 자신이 범죄한 것이므로 누구를 탓할 것이 없다.
그래서 말씀을 거역한 결과로[그 직접적 원인은 선악과를 먹은 결말] 죽은 자가 되니[마 8:22] 오늘날과 같은 모든 인생 비극이 있게 되고 현재와 같은 구원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창조의 생명에서는 완전히 제외되어 영생하는 길이 영구적으로 단절된 것이다. 오직 새 창조밖에는 없다. 새 창조의 방법은 무엇인가 하면, 현재의 죽음에 처해진 인간의 상태를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기 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음 창조된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새로이 영혼을 조성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아 있는 상태는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죽음"으로서 그래서 우리가 "죽은 자"이지만 따라서 죄의 대가인 죽음의 결말에 떨어져 다시는 영생하는 것이 없는 비극이지만, '육체' 면으로 보면 아담의 창조 당시 아담이 육체로만 창조되어 있던[영혼 없이] 바로 그런 상태와 같이 때문이다. 물론 아담도 그런 상태에서는 우리처럼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아 썩은 육체이지 영생하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됨으로써[하나님 친히 그 코에 생기 즉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내쉬심으로 인해] 영적 존재가 되고, 그로 인하여 에덴낙원이 창설되어 영계[자연계와 대립 또는 대칭이 되는]가 시작되고 그 영계에 인간을 두심으로써 아담의 몸이 신령한 육체가 되어 영생하게 된 것처럼,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아담 자신으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롬 5:12] 우리의 현재 상태를 그와 같은 아담의 '육체'로 간주하시어, 이 '육체'와 대칭이 되는 '영혼'을 아담의 영혼을 조성해 주셨던 것처럼 조성해 주시게 되면, 이로써 우리는 아담처럼 영계에 들어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
아담이 영생하게 되었던 그 동일한 과정과 순서를 밟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영혼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로 주신 성령이신 것이니 곧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어 그러한 영혼 역할을 영원히 하시게 되는 것이 우리 구원의 정확한 윤곽이다. 그래서도 나는 그리스도와 둘이 영원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은 둘이 하나로서 영원히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담의 범죄로써 이 불가분성이 깨어져 버렸으니 즉 그 '육체'가 썩어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려짐으로 인하여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가 된다. 물론 이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내가 '영혼'과 '육체' 관계와 같아 영원히 불가분이나, 아담이 범죄한 것처럼 나 역시 범죄하면 성령과 나는 더 다시는 불가분이 아니라 분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나와의 분리다.
이 역시 새 창조의 원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지만 현실이 그러한즉 어쩔 도리가 없게 될 것인즉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이다. 아담에게 영혼이 처음 조성됨으로써 아담의 몸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이 되는 기틀을 잡게 된 것처럼, '육체'로서의 나 자신도 그리스도 친히 영원한 나[육체]의 영혼 격으로서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임하여 오시게 되면 내 육체는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의 육체처럼 깨끗한[범죄도 하지 않고 범죄한 경력도 없는] 육체가 되어 신령한 몸이 될 수 있는 모든 채비가 되어 있는 완전무결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직 신령한 몸이 되기만을 대기하는 상태가 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함이다. 즉 나와 함께 내 이름으로 그와 같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므로 죽은 자로서 죽을[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육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과거의 모든 죄가 청산되고[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까], 또 과거 죄가 청산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죽은 자가 죄를 지을 수가 없음이다.
죄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인데 그 '나'라는 것이 죽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즉 새 창조의 "새 생명"[롬 6:4] 가운데 사는 삶은 반드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삶을 말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다. 보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계 1:18] 하심과 같다. 그리스도와 내가 '불가분의 한 몸'[영혼과 육체]으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나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렇게 자기 부인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 아니라 즉 그리스도 혼자만의 죽으심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현실화하기 위한 의미로서의 나 위한 죽으심이니 곧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기' 위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이상 나의 죽음 역시 엄연히 현실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뜻과 계명[율법]이 임해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느냐 여부에 있음이니, 다시 말해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짓기로 예상하는 가운데에서는 구원의 믿음이 있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헛되이 믿는"[고전 15:2] 것이 된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죽게 되는 대가가 따른다면 당연히 아무 스스럼없이 죽는 것이다. 고난으로 일관하는 이 세상 나그네 길이라면 그 고난 그대로를 감수하는 것이 생명이다. 그 이상으로 어찌 해보려고 할수록 그것은 사망으로만 치닫게 된다. 이 세상이 삶의 고장이요 터전인데도 일부러 죽음의 고난의 길을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상이요 죽음의 현실이므로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즉[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골 1:24] 이 질서를 따르라는 것이다.
11. 퉁구스카, 나즈카, 스톤헨지 기타
퉁구스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의 주위 환경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미확인 비행물체"라고 세상이 궁금해 하는 UF0를 숭배하고 종교화하고 있는 소위 '라엘리안'들이 복제 인간을 만들었다는 등의 말로 세상을 소연하게 만들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존재가 요즈음 크게 부각되고 많은 사람이 이 속임수에 미혹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 "UFO" 존재들은 악령들의 무리이고 달리 아무 의미가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외계인" 어쩌니 하는 짓거리들은 모두 속이고 있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들의 정체와 본색을 밝히고 또 이러한 때에 처하여 우리의 사명과 각오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악령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영계의 존재이므로, 수시로 우리와 같은 자연 물질계의 몸으로 변환할 수 있고 그리고는 본디의 그 영적 몸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가끔 쇼처럼 인간들에게 우주선으로 위장하는 등 벌이고 있는 각종 형태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니 에덴낙원의 식물에 불과한 것이라도 "생명나무"라는 엄청난 것이 있음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뿐 아니라 그 형체를 얼마든지 수축 신장할 수 있는 등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국 로즈웰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지상에 추락하여 송장이 된" 외계인은 순전한 속임수다.
지금 세상이 말하는 "복제인간"과도 같은 것이니 인간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으로서, 악령들에게는 말하자면 허수아비나 인형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마치 "외계인의 송장"처럼 꾸며 온 세계를 속이고 있는 극히 간단한 예에 불과하다. 인간은 물질로 그런 인형을 만들지만 영물들은 고등 지식으로 고등(高等) 인형 즉 생물체 같은 것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외계인"으로 나타난 것도 악령들이 만든 허수아비[생명이 있는 생명체가 아닌]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그런 존재로 분장[변환]하여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들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하나님 창조의 질서를 따라 생겨난 인격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적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오만한 인간에게는 너무 늦게 이 모든 것들이 엄연한 사실 또는 현실로 나타날 것이지만,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UFO"에 대한 모든 증언과 현상들은 대개 다 진실이라 믿으면 틀림없다. 그것들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나타내는 의미나 내용’은 거짓 일색인 것이다.
그런 형태의 새로운 양상으로 사단은 새 단계에서 인간을 속이기 시작하는 것이고 이것이 전세계로 현재 확산 일로에 있다. 이른바 "과학적"이라는 것은, 현존의 인간 지식과 지능의 한계 내에서만 통하는 얘기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체가 처한 이 자연계에 한한다. 이른바 "UFO"가 지금 한창 자랑하고 있는 그런 <비(非)물질> 또는 <반(反)물질>적인 것은 인간의 한계 밖이므로, 스스로 구명(究明)해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할 일이다.
그러므로 사단과 관계되는 영계(靈界)의 분야에서는 인간의 '과학'이라는 것이 전혀 통하지도 않고 먹혀 들지도 않는다. 그러면 이대로를 솔직히 인정하면 되는 것인데, 고집을 부리고 그런 영적 존재나 현상을 무조건 부정해 버리고 그런 것의 가능성을 아예 제외시켜 버리니 그것 자체가 비과학적이 되어버린다. 비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의 "영혼"마저 부인해 버리려고 하는 것이 "과학자"이니 그들에게서 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오직 사단에게만 놀아날 것뿐이다. 바로 이런 거짓을 드러낼 수 있는 확증적인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인데 이마저 부정한다면 희망은 없다. 지금은 이들 과학자들이 ufo식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지만, 때가 오면 한 사람 예외없이 태풍에 휩쓸리듯 일방적으로 마치 꼭두각시처럼 시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될 것이다. 즉 사단의 지휘봉 하나에 모든 인생이 미친 듯이 놀아나게 되어 있다. 빨간 구두를 신고 미쳐서 춤 추며 돌아가는 그런 모양새가 될 것이다.
누가 감히 이에 불복하리요. 불복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과 고난 고통만이 있을 따름이다[계 13:15,17]. 동전의 일면[양면이 아닌]과도 같은 이런 불완전 자연법칙[영계가 존재해 있음에도 이런 양면성의 이치는 무시하고]에 관한 쥐꼬리만한 지식을 그럼에도 자랑하고 숭상하고 의지하고 그런 것으로써 만사를 풀어 치우려 하는 모든 오만한 인생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UFO"나 페루 나즈카 평원에서 과시해 놓은 그런 인간 이상의 지력[智力]과 능력을 두루 갖춘 악령들 앞에서, 실로 '과학' 이상의 '과학 지식'을 자랑하는 그 영물들 앞에서, 그런 얄팍한 인간의 지식에 기대는 것은 벼랑 끝에 앉아 썩은 고목 나무에 등을 기댐과 같은 위험천만의 일이다. 왜냐면 그렇게 지식 위주로 나가면, 지식으로는 어느 인간도 당하지 못하는 악령의 "지식"으로 위장한 속임수 앞에 맥도 못추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운명이기에 그렇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이 "때를 분변(分辨)할 줄 알아야"[눅 12:56] 하고 또 이것은 절대로 중요한 일이다. 과거에는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어 일어난 일이렴 세계적으로는 알려지지 않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온 세계 구석구석에 알려질 뿐더러 금방 전파되어지는 시대다. 따라서 적 그리스도가 획책하는 세계 단일화의 작업은 그만큼 손쉽게 되어가되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다는 증거다.
퉁구스 사건이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방증하는 물증이 오늘날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남미 페루 나즈카 평원에 그려진 대형 도안들이나 오늘날 주로 영국 스톤헨지 인근 밀 또는 옥수수 밭에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그 곡식 포기들로써 조성되는 괴상한 도형들 소위 "crop circle"이 그런 따위의 것이다. 단 하룻밤 사이에 초자연적인 도형들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기괴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른바 UFO의 소행이라고 믿는 데에까지는 사람에 따라 어느 정도 이르고 있으나, 그렇게 믿는 이들도 그 UFO 자체를 어느 우주[외계]에서 온 외계인 정도로 그들의 속임수를 따라 착각하여 놀아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요한 계시록에도 적 그리스도가 각종 거짓 기적을 행하여 세계를 미혹한다고 되어 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우상이 말을 한다"고도 했는데 그것이 실제 어떤 의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오늘날 각종 현상들을 보면 악령들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거
오늘날 개신교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허무맹랑한 '미신'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휴거(rapture)"라는 것이다. 여기에 혹한 사람들이 언젠가 한 때 소란을 피워 세상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로서 이런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완벽한 것이어서 이런 따위 어색한 틈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런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어색한 틈이 보이면 그것은 양의 털옷을 걸친 이리의 속임수라 일단 진단해 두면 대개 정확하다.
이상과 같은 교리는 고난 받는 것을 꺼리는 얄팍한 인간 심리의 속 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정해진 은혜다[빌 1:29].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고난 받으심을 믿는 우리로서 우리도 당연히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그런 최소한의 보은(報恩)도 꺼린다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남은 사람들 구원 얻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우리의 고난 받음인데, 이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필칭 하나님의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으로서 자격을 가리시지 않고 찾지 않으신다 하며 "자격 운운"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들이 얼마나 믿음 혹은 구원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되어 있는지 알 만하다. 다시 말해 영생 얻는 구원을 공짜로 거저 얻는 것으로만 일방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자는 결국 쫓겨난다는 그리스도의 엄중한 경고를 "예복"[마 22:12] 비유를 통해 듣고 있으면서도 이에 유념하지를 않는다. 우리가 마땅히 하게 되어 있는 순종 기타 그 무엇이든 이 '최소한의 예의 갖춤' 즉 '상대를 마땅히 생각해 주어야 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코 과한 것도 아니고 우리 힘에 지나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의 성격이 그러하므로 그것을 "면한다, 못면한다"는 것과는 그리스도인과 아무 상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다.
자격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나도 사랑하는 것 즉 나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그 유일한 "자격'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곧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왕의 이야기이니[마 18:23-35], 거액의 빚을 탕감 받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조금 빚진 사람은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그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탕감해 준 왕의 뜻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네 이웃을 불쌍히 여기라는 뜻이다. 즉 목적을 두고 탕감해 준 것이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목적을 두고 구원해 주심과 같은 것이다. 우리 구원의 목적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우리 머리가 되시는]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이다[롬 4:7-9/고후 5:15]. 왜냐면 이렇게 해야 살도록 해 주신 의미를 살릴 수 있음이니 곧 행복한 삶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기만 한 삶이라면 살려 주어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랑이라고 해서 간단히 생각할 것이 아니니 즉 지금까지 인식해온 대로의 사랑이 아니므로 요한은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 한 것이다. 이제 비로소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해야 마땅한지를 배웠다는 그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명령하신 그대로다. 즉 "새 계명"이다.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사랑이다. 한 몸 구조에서 마땅히 나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자기 부인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인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이같은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는 데에서 오는 무지무식의 발상들인 것이다. 그런 따위를 믿다가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대적인 박해가 갑자기 임한다면 그 때는 어찌할 것인가. 대책없이 당황하고 방황하다가 맥없이 휩쓸릴 것뿐이다. 그런 고난을 예상하면서 믿음 중에 평소 단단히 준비하며 주님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 '성경적 상식'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전무후무한 그같은 환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실을 밝혀두고 있는데, 그런 환란을 면제 받고 공중으로 갑자기 들려진다는 것이니 어린 아이의 환상도 아니고 무슨 그런 망상이 있다던가. 사단의 인간 우롱이 이 정도까지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실로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고난을 면한다는 생각부터 먼저 하니 과연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12. 용[龍]의 정체 - 악령(惡靈) 사단
그리스도 오시기 전후 해서 사람들은 용을 호랑이나 사자 같이 실존하는 존재로 믿어 왔음이 오늘날 각종 자료에 의해 밝혀지고 있음은 앞에서도 소개했다. 왜냐면 누구나 웬만큼 바다 사람이 되면 그런 기괴한 바다의 초자연적 현상들을 도무지 부정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육지의 왕인데 비해 전자는 바다의 왕으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요한 사도의 계시록에서 "큰 용 즉 옛 뱀 곧 사단"이라 하여 용이 바로 사단인 것을 두 번 씩이나 명시하게 되자[계 12:9/20:2], 사단은 과거처럼 자기 모습을 인간에게 어떤 수로든 나타내지 않으려고 더욱 사력(死力)을 다한 결과 이전처럼 용을 목격하는 수가 거의 없다시피 될 정도로 썩 드물었기 때문에 지금은 용을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로 인정하게쯤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 용을 바다와 연관시켜 나타내어 용궁(龍宮), 용왕(龍王) 등의 명칭이 그래서 등장하게 되었다. 사단이 왜 주장 바다를 선호하게 된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니 그 행동 속도가 그만큼 더디어 인간의 눈에 쉽사리 띄게 될 것이므로 자기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목적임을 이미 설명했다. 공중에서 움직일 때는 아주 고공이면 그렇지 않으나[그렇게 되면 인간들을 지배하는 일에 차질이 있는 듯], 적당한 높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자면[욥 1:7] 인간의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그렇게 띄지 않게 하려면 전속력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그만큼 그로서는 고통이다.
영물은 원래 의도적이 아닌 이상 사람 눈에 띌 수가 없는데[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용만은 아담 부부를 꾀어 죽음에 빠뜨린 결과로 저주를 받아[이미 그 전에 그는 범죄하여 장차 영원한 멸망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것이 그의 최초의 범죄는 아닌 것이다-창 3:1] "배로 기어 다니고[그 전에는 사람처럼 직립 보행이었으나]" "흙을 먹게" 된 결과로 그런 '불가시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즉 그만큼 빨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게다가 자기 형체를 하늘이나 육지에서나 드러내놓을 수도 없고 해서 항상 바다 속에 몸을 감추고 있게 된 연유이다. 심해(深海) 속은 사람이 들여다볼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사단이 바다를 선호하므로, 당시 아직 바다를 잘 몰라 해도(海道)로 나타내지 않은 바다를 표시할 때는 옛 사람들[여기서는 유럽인들]은 온통 용들로써 표시해 놓았다고 한다. 처음부터 배[腹]로 다니도록 창조된 자연계의 뱀은 배로 움직여도 웬만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몸을 놀릴 수 있지만, 처음부터 직립 보행으로 창조된 영물로서의 사단인지라 저주 받아 배로 다닐 때는 사람의 눈에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기에 말 그대로 보통 고역이 아니다.
"저주"의 성격이 그런 것이다. 배로써 행동하니 그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 원래 영물들은 "영(靈)"인지라 그 움직임이 전광석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장차 번개 같이 임하신다 하심과 같다[눅 17:24].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우리 육안으로는 그 움직이는 모양을 포착하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도 신령한 몸이었으므로 금방 나타나시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셨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가도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은 신령한 몸이 번개처럼 움직일 뿐 아니라 몸의 확대 수축 변형도 자유자재이기 때문이고 기타 능력 때문이라고도 생각되니, 어쨌든 우리 인간은 영계의 신령한 몸에 대해 너무나 아는 바가 없어 이런 말도 실상 부질없는 소리다.
영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니 무릇 피조물은 신령한 것이든 자연계에 속한 것이든 그 육체가 있음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을 때의 영은 피조물로서의 영과는 다르니 말하자면 순수하게 영이시라 할까 혹은 태초로부터의 완전한 모습 또는 상태라 할지 일절 형체가 없으시다. 형체가 있다는 것은 그 형체가 점거하고 있을 만큼의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에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장 완전한 존재 형태이시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신령한 육체[영물이나 과거 범죄 전의 아담이나]는 변형[색채, 형태, 규모 등]을 자기 임의로 할 수 있고 빛과 같이 움직이므로[마 24:27] 우리 육안의 가시권(可視圈)을 벗어나 있고 그리고 수축 확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우리는 현재 알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배로 다니게" 되어 있으므로 그 속도가 느려 자연히 인간의 눈에 띄게 되어 있다. 단순히 속도가 느리다는 것만 아니라, 동일한 저주의 결과로 "흙을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기준할 때 거의 그런 속성의 육체로 되어버렸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면서도
외형상으로는[인간의 눈에 여지없이 보인다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할까. '준(準)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버렸다
할까. 사단의 인간 기만에는 자기 정체를 감추는 것이 필수인데
인간의 눈에 드러나게 되니 자연 눈에 띄지 않으려고 움직여도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쓰면서 움직이려 하다보니 그만큼 고통은
가중된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 비교적 잘 띄지 않는 바다를
택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당시의 인간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은
못하고 저 너머 바다 쪽은 큰 벼랑처럼 되어 있다고 여겨
바다 밖으로 잘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근거
없는 공포 역시 사단이 넣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앞에서도
지적했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에서 만난 용을
뱃사람들이 목격하여 전한 내용이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는
터이다. 실제로 목도한 사람들의 증언이니 육지의 사람들도
그 말을 안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는 그런 괴물이
살고 있다고 알아 왔고 단 그 코에서[혹은 입이라고도 하고]
불을 뿜고 있었으므로 보통 동물이 아니라 신(神)이라 여겨
인생들은 경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령이고 첫 사람 아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원수 바로 그 사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명시해놓아도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 믿지 않는 판이니 다른 이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사단 자신이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이 역시 그가 인간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결과 또는 그 명백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으로서 온 지상을 두루 다니며[욥 2:2] 인간을 장악하여 지배하는[임금 노릇하는-요 14:30] 까닭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6:12]로서 공중에 두루 돌아다녀야 하나, 육지에서는 인간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주로 육지 가까운 바다를 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도 배를 타는 사람들은 비록 용의 형체는 보지 못하나 신비하고도 강렬한 빛이 괴이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가끔 목격하고 증언하는 수가 있다. 이른바 "버뮤다 삼각 지대"에서의 각종 선박, 비행기의 실종 사고도 이런 사유로 해서 일어나는 변고이다. 옛날에도 사단은 이렇게 바다 가운데에서 그 형태를 드러내다가 자신의 정체를 목격하게 된 배나 사람들을 덮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용이 나아가는 길목에 걸려 드는 것은 배든 사람이든 모조리 삼켜 버린다고 무서워했었다.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지축을 흔들 만큼 굉장했다고도 전한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이 예외없이 이런 공포의 대상을 직접 알고 있거나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까닭에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지라 까닭 없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는 우리가 이 사단의 정체와 활동 환경을 고려할 때 그들이 공연한 공포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용이 하나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믿었으니 특정된 한 가지 모습이 아니고 사단이 그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꾸어 용이라는 괴물이 여럿이 바다에 서식하고 있는 듯이 믿도록 유도하여 자기 정체를 감추려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했을 만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용은 하나뿐이고 사단인 것이다. 형태와 색깔과 크고 작음을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사람들은 용이 마치 여럿이 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적룡, 청룡, 황룡 등 갖가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두 눈이 퉁방울처럼 몹시 크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앞서 소개한 퉁구스카 대충돌의 그 증언자도 그 눈이 유난히 컸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몸집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에서도 일치한다. 성경은 "큰 용"이라 했다. 크고 작은 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용 자체가 크다는 의미다. 사단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형체를 마음대로 확대 축소하는 것이 가능하여 그래서 "네피림"[창 6:4]도 생산해내었으나, 지금은 그런 행위가 금지되고 또 앞에서 지적한 대로 거의 자연계의 물질에 가까운 육체가 되어 있어 그 몸의 크기를 다시는 마음대로 조절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인간으로 자신을 변환시켜 자식을 낳는 일을 할 때만은 그런 제약을 받지 않은 모양이나 지금은 그런 행위가 불가능하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악령들은 모두 처벌된 상태에 있음이다[유 1:6,7]. 사단도 그런 자식을 두게 될 것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있다[창 3:15]. 그러나 그 벌로 무저갱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그의 특수 위치 때문에 그 자식이 대신 들어갔고 그동안 거기서 오랜 세월 고통 중에 있다가 장차 "적 그리스도"[살후 2:3-12]로 출현하겠기에,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 책에 녹명(錄名)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하게 여길 것이라"[계 17:8] 한 것이다.
인간들이 점차 바다로 진출함에 따라 바다도 사단으로서는 안전한 은신처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지금은 천사들에게 패하여 하늘에서도 영구적으로 거처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그만큼 사단에게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 중에 활동을 아니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소위 "외계인의 우주선[UFO]"이라는 것으로 변장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 결론 내려도 무방하다. 길다란 시거[cigar] 형의 우주선이라는 것이 그런 사단의 변형된 형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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