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9)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9)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9)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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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나님 창조의 중심


참고로, "에덴의 동편"이라는 말은 살인자 가인이 거처하던 땅 이름을 말할 때에도 나온다[창 4:16]. 그러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이 영계[에덴낙원]로부터 쫓겨나[혹은 범죄의 결과 죽음으로 인한 자연적인 결말로] 자연계에 이르자 영광스러웠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하여 자기 살고 있는 특정 장소를 "에덴"이라 이름 지어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경우 "에덴의 동편"이라 함은 아담 부부가 살고 있던 땅의 동쪽이라는 말이 된다.


그 외에도 아담은 에덴낙원을 적시면서 흐르던 강 이름도 따서 작명해 놓은 것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유브라데[Euphrates]"라 말할 수 있다. 에덴낙원의 강은 에덴으로부터 발원한 것이었고 에덴동산으로 들어온 후로는 넷으로 갈라진다. 그 마지막째의 이름을 아담은 자연계인 이 지상으로 추방된 후 자기가 살게 된 땅 주변을 흐르는 강에다 붙여 준 것이다. 그리고 노아 홍수가 나면서부터는 홍수가 걷혀져도 산과 땅은 대부분 그대로 있었겠으나 강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혹은 새로운 강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홍수 후 지구 상에 남은 인간은 노아 일가족뿐이므로 이제는 노아 자신이 아담 식으로 이름을 지어 붙여 주는 판이 된다. 그래서 아담이 에덴이라 불렀던 땅은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고, 또 노아 자신으로서도 그런 아담만이 알고 있던 에덴낙원의 영광을 추억하여 기어이 그런 과거의 이름을 붙여 줄 이유도 없다. 그래서 에덴이라는 지명은 없고, 다만 유프라테스 강만은 기억했으므로 그 강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강에다 그 이름을 붙여 주었을 수 있다.


"6일 창조" 이전의 창조에서도 역시 자연계와 영계로 나누어져 있었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당시 세계가 그렇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의 "6일 창조"가 그렇게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창조된 그룹들 중 하나가 범죄 타락함에 따라 그 여파로 그 세계가 와해된 잔재(殘滓, 殘在)가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혼돈과 흑암"이요 "물"과 그 속에 풀어져 있던 "땅[뭍]"의 정체(正體) 또는 전신(前身)인 것이다[창 1:2,9].


자연계만 그렇게 와해되었지 영계는 그대로 있는 것이니 그 영계를 일컬어 앞의 지적대로 "에덴"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6일 창조"의 세계와② 이전 창조의 세계가① 또한 양면을 이룬다. 그런데 ②"6일 창조"의 세계는 인간[아담]과 영물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①이전 세계와 같이 다시 와해 국면에 이른다. 단지 인생들의 구원 사업[혹은 악인과 의인의 선별 작업]이 아직 진행 중이어서 지금까지 잠정적으로 계속 명맥이 연이어져 올 따름이다.


①은 "물의 넘침"[벧후 3:6/창 1:2]으로 망했다. ②는 불로써 망하게 되어 있다[벧후 3:7]. ①과 ②가 합해서 ③을 형성한다. ①과 ②는 공통점이 있으니 피조물들의 범죄로 인해 와해되었다는 것으로서 ①은 물로 망했고 ②는 불로 그렇게 망하게 되어 있다. 즉 망하고 없어지는 세계로서의 ③을 형성함이다. 그렇다면 망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본격적인 세계④가 형성되어 양면을 이룰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③과 대칭이 되는 ④의 세계가 곧 장차 나타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다[벧후 3:13/계 21:1]. 즉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러 간다"[요 14:2,3]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함과 같다. 즉 그 때가 되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창조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6일 창조에서 우리가 아는 대로의 4계절 그리고 낮과 밤, 일자(日字), 연한(年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창 1:14]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다" 하여 하루 이틀 세어 나가 "6일"로 산정하고 있으므로 이 "6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날 수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과연 그것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일자대로 하면 얼마가 되는지는 논외다. 또 "두 큰 광명" 그리고 "별들"이라 했으니[:16] "해"와 "달"이라고 아니한 이상, 그 넷째 날에 해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해가 빛을 내기 시작하였고 달도 마찬가지며 별들도 그러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6일 창조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일주 여섯째 날 끝의 제7일 곧 토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냐" 할 것이나,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곧 이어 하게 되겠지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이니, 즉 창조 후 쉬신 날을 기념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것[소유, 속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철저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도록 초보적으로 가르치심에 그 뜻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나의 것이 되시고 나의 일체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관계를 조금씩이나마 미리부터 맛보고 길들여져 있도록 하심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6일이 현실적으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니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막 2:27] 하신 것이다. 즉 이상과 같은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라는 한 몸됨의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시는 수단으로서의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엿새만에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만드실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문맥상(文脈上) 그렇게 판단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은 준비하는 시기요 장소다.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거할 즉 살게 될 처소를 준비하시고 우리는 거기 들어 가 살 인원을 확보하는 즉 천국을 구성하게 될 구성원을 "준비하는" 일을 하나님과 합동으로 하게[고후 6:1] 되어 있다.


말하자면 지금은 일하는 때이지 일을 끝내고 쉬는 때가 아니니, 식사를 하기 전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장만할 때는 아무리 시장해도 그 음식 장만하는 재료를 먹지는 않는 법이다. 또 이는 애초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되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 다음에 영혼의 순서로 지으신 다음 에덴낙원을 창설하신 그 과정 그대로를 밟으심이다. 곧 친히 우리 각자[아담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해당]에게 성령[당시의 아담에게 영혼을 지어 주신 것에 해당하니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된 것처럼 "성령을 받으라" 하실 때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신 것이 이를 나타내신 것-요 20:22]을 선물로 주신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아담 창조 당시의 에덴낙원 창설에 해당]을 창조하시는 작업에 착수하시고 지금 진행 중이시다.


성령으로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람들 구원하시는 일을 진행 중이시고 하늘에서는 이 새 땅과 새 하늘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심이다. 그리고 아들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되심은 영원 불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원 받은 우리 각자가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 마치 당시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나 영계에 속한 영혼을 갖춘 영적 존재로서 에덴낙원에 들어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그런 모양새가 되어 있다.


모양은 비록 그러하나 내용만은 전혀 다르니 우리 각 사람에게 영혼 격으로 계시는 성령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는 당시의 아담처럼 가만히 있어 에덴낙원[영계]에 들어가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자연계]에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일을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골 1:24]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져야 함이다.


바울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전 15:44] 하고,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45] 함이 바로 이상 사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에게 아담 창조 당시 아담의 영혼에 해당되심을 가리킴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과 신령한 몸의 차이는,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42,43]으로 나타남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자연계에 속한 육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46]라 한 것은 아담이 처음부터 끝까지 육 있는 자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먼저는 육체에 속했다가[아담이나 우리의 새 창조에 있어서나]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그 영혼을 힘입어 [영혼이 영계에 속한 까닭에] 육체도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이 되는 순서와 과정을 따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악과 나무


그래서 앞서의 설명에 이어 아담의 에덴낙원 당시로 돌아가면, 오늘날 악령들이 막강한 능력을 과시하는 것처럼[소위 UFO 등을 통해] 에덴낙원의 식물 역시 그런 능력이 있음은 당연하니, 성경의 기록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고 영생하게 할 수도 있는 생명나무도 있는 것이 그런 예다. 그래서 그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의 식물을 먹고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 아담이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이들 부부는 이전 처음 창조되었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영계[에덴낙원]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먹을 만하여[동산 곧 과수원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아담이 이것들을 먹음으로써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지만, 생명나무만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있어 대칭을 이루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잘못 실수로 먹어 혹은 기타 이유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렸을 때 생명과를 먹으면 도로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다른 나무 열매를 먹으면 그렇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니 그 다른 나무들은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 한해서 단지 먹는 낙을 충족시켜 주는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른 나무들 역시 먹으면 신령한 능력이 작용하는 영적 식물이므로 아담이 그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다 한 것이다. 이 경우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몸이 그렇게 변화할 수 있다 하겠으나, 아담으로서는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쳤으므로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버린 까닭에 생명나무가 아니면 아담에게 아무 효능이 없다 하겠다.


아담의 경우 잘못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먹은 경우이므로 생명과 나무 과일을 먹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왜냐면 범죄의 결과이므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죽게 되어 있음이다. 죽게 되어 있는 자가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자기중심이 되어] 손을 들어 생명과 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니다. 그 길로 곧장 자연계에 속한 육체 즉 죽은 자로 전락하게 되어 있음이다.


이 생명과 나무는 바로 그런 고유의 역할로서 건재해 있으므로 이기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 과일을 주시어 먹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계 2:7]. 이 "하나님의 낙원"[:7]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행악자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눅 23:43] 하신 그 낙원 곧 왕년의 에덴 낙원["에덴 동산", the garden of Eden]인 것이다. 만에 일이라도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석하고 일단 덮어두는 것이 현명하다.


자연계와 영계는 아주 다르다. 대칭(對稱)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이 다른 것이므로, 영계의 속성이나 본질 또는 사건들을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써 판단하고 재단(裁斷)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6일 창조"에서 "6일"이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대로의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사계절이 생기기 전부터 세어져 나간 시간 단위다[창 1:14,17]. 그러므로 그 이전 세계에서의 시간 단위로 "하루, 이틀" 하고 센 6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셨고 제7일에 쉬셨으니 제 7일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한 것도 이미 설명한 대로 그와 같이 "하루, 이틀" 하고 세어갔던 그 '사실'만 상징하는 것일 뿐이지, 그때의 시간 단위가 실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현재 우리가 영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상 그 내용이 무엇인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이 자연계의 속박을 벗어나는 날 알게 되어 있으니 알고자 조바심 칠 이유도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성경 해석"을 들출 것도 없다. "그런 전통으로써 고작 마리아를 우상화하기나 하고 아니면 "죄와 사망의 법"[롬 7:24]을 그리스도를 믿은 바울 사도 자신의 체험이라 믿었던가?"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되었던 이들 영물들[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룹'과 '스랍'들은 있으나 우리 인간[또는 세상]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 "외계 우주선" 같은 것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이 지어낸 허구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에 있다. 악령 스스로 그렇게 가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필요[인생들을 속이기 위한]에 따라 그런 것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피조물의 중심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오직 인간이다. 따라서 외계가 존재하지도 않고 인간 이상으로 최고 작품으로서의 피조물이 없다.


오늘날의 악령들이나 천사들은 애초 인간[아담]을 보좌하기 위해 창조되었던 영물들임을[창 2:18,19] 거듭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름으로써 범죄에 이른 까닭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령들이 지금 당분간 인생들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인생이 '무상(無常)' 가운데 처해 있고 '여상(如常)'의 위치에 있지 않게 된 원인이다. 애초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영물을 지으실 때는 죽음도 멸망도 죄도 형벌도 없었던 것이나 피조물 스스로가 그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자유’라는 것 자체가 어느 방향으로 가든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는 양면성을 의미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므로 이미 그런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피조물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라 하더라도, 반드시 비뚠 쪽으로도 가게 되어 있는 것으로 피조물 각자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피조물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 해서 결코 하자는 없다.


그렇게 하여 세상 열리면서부터 즉 첫 사람 아담 부부가 자식이라고 낳고 보니 하나[가인]가 다른 하나[아벨]를 "육체의 생명"[레 17:11]인 피를 흘리게 하며 자기 아닌 이웃의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빼앗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죽이라고 하나님이 인간 생명을 만드신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천하에 자기네 부모 빼고는 단 둘이만 있어도 이같은 불행한 참사가 벌어졌으니 왜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3운법칙[trini homo]'이 작동되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둘이기에 하나는 죽이고 다른 하나는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서 그렇지, 만일 여럿이면 서로 죽이고 말 것이기에 공멸(共滅)로 끝날 일이다. 3운법칙이 인간을 그같이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드러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그 증거다. 바로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맨 시초에 보이신 셈이다. 물론 그렇게 보이시기 위해 일부러 가인을 죽이도록 하셨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인간의 자유는 절대로 하나님도 손대지 못하신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이다. 왜냐면 그렇게 인간을 자유 행동의 주체로 만드셨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창조의 의도는 변동이 있을 수 없어 강제하거나 간섭하실 수가 없다. 하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모순되고 자가 당착의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자승자박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의 죽음의 이유와 근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죽음의 의미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에는 신령한 몸으로 있어 영생하게 되어 있다가 이 자연계에 속한 애초의 몸으로 환원되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시한부 목숨인지라 영락없는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인간을 만드셨다면 즉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이런 육체를 하고 있었다면 인간이 죽음을 슬퍼할 리도 없고 영생하지 못함에 대한 불평불만을 품을 이유도 없다.


그리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되 이런 슬픔과 아쉬움과 불평불만으로 속을 끓이도록 만드셨다는 의미가 되니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런 간단한 사실 하나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 소위 "기독교" 교리다. 초대(初代) 교회에서 가르친 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오고 그 결과 죽음이 왔다"[:12]는 이 간단한 사실을 까맣게 까먹은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정확하게 가르쳤으나 3백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의 본질에서 차츰 벗어나면서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기록에 제대로 없는 것을 보아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을 법하다.


자기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손 썼을 수도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를 방치하셨느냐" 하지 못하는 것은 이 모든 사실에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데 이 이상 하나님께서 나서시면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 알아질 수 있는데도[마 11:27] 인간의 학문처럼 여겨 특정된 사람들의 해석에만 공을 들였으니 자승자박(自繩自縛)일 수밖에 없다.


천 몇 백년 세월에 걸쳐 신학자도 많고 신학교도 많았지만 이런 심각한 근본적인 무지(無知) 하나도 타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교역자에게 성경 해석을 의존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이제 충분히 내려진 것이다.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여 각자 스스로 성경을 읽어 베뢰아 사람들의 본을 따를 일이니 왜냐면 성경이 이를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17:11,12].


교역자를 본받을 경우 그가 진정 그리스도를 본받는 경우에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본이 되어 있을 때 한할 일이다[고전 11:1/벧전 5:3]. 교역자라는 것 자체에는 아무 권위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만 권위를 둘 것이다[행 17:11,12]. 신학(神學)으로 진리가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시지 않고는 즉 계시(啓示)로 말미암지 않고는 가장 간단한 이치 하나마저도 인간은 접근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음이 이상 사실로써도 증명되지 않았는가.


왜냐면 이 세상 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철통 같이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런 오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마 11:25] 하셨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그리스도]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구원의 하나님]를 아는 자가 없다"[:27] 하셨다.


왜 어린 아이에 한하여 진리가 나타나느냐 즉 "계시되느냐"[ 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고[눅 18:16],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17/마 18:3] 때문이다. 왜 "어린 아이"냐 하면 어린 아이야말로 사랑을 최고도로 가장 잘 이해하는 연령이기 때문이다. 바로 엄마와의 관계에서 그렇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랑부터 먼저 배운다. '사랑'이 삶의 근본 핵심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드신 까닭이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다. 이 사랑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그 어떤 삶도 행복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고로 사람 사는 도리가 이 사랑에 있다 함이니, 왜 "어린 아이"를 강조하셨는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 사람 사는 법을 말씀하심이다. 사람 사는 법은 사랑에 있고 사랑의 기본은 '한 몸됨'에 있다. 즉 한 몸 체제의 이치대로 사는 것이니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몸의 각 지체(肢體)가 되어 자기 역할에 충실함을 가리킨다.


이 '한 몸' 의식을 ‘우리’ 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아기와 엄마' 역시 이 '한 몸'됨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니 인간의 선악을 따라 보답하시고 보응하시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완전한 세계로 만드셨는데 그래서 완전한 자유 의지로 사랑 가운데서 다 같이 한 몸처럼 행복하게 살도록 해놓으셨는데, 이 복스러운 자유 의지가 복만 짓는 것이 아니라 화(禍)도 만들 수 있는 양면성이 있어 인간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결과로 오늘의 세상 비극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를 없앨 수는 없다.  


이리하여 죽음의 고통과 불행이 왔고 그 원인이 죄 곧 삶의 법질서를 어김에 있었음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도 자연법칙을 따라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지 자연 순리를 파괴하는 등 환경을 어지럽게 하면 그에 상당한 환경 재난(災難)을 불러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리하여 인간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인[롬 5:12] 결과가 바로 오늘의 인간고(人間苦)다. 인간만 아니라 땅도 저주를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 피조물의 정점(頂点)이었는데 인간이라는 이 완결점이 범죄로 인한 죽음으로 무너지고 와해되어 버렸으니 나머지도 덩달아 똑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하나 됨의 구조적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죽음의 인간이 생명으로 완전 회복될 때까지는 이 인간의 고통에 모든 피조물이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상이다[롬 8:19-22]. 이 생명 세계의 삶의 구조는 한 몸의 이치로 움직임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사고가 생기면 전체가 모두 함께 그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다. 고통을 함께 받는다. 한 신경 계통, 한 혈관으로 통일 조화되어 있어 움직이는 육체적 기능의 이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삶의 법질서 또는 원리라는 것은 바로 이런 한 몸 체제의 성격을 띠어 이를 유지함에 있는 것이고 이에 역행하는 것이 불법, 불의, 죄, 악이다. 죄의 개념을 항상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고로 인간이 죽었으니 나머지 모든 피조물도 함께 죽은 꼴이다.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가 완전히 망쳐진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살려 내기 위한 새 창조가 시작된 것이니 그래서 "만유를 회복하심"행 3:21]이라 한 것이다.


당연히 새 창조에서도 엄연한 양면성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행위와 피조물의 동조(同調) 또는 동역(同役)의 양면성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람되심과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 완료되었고, 남은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결단과 약속이니 곧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다. 믿으면 되는 구원이지만, 각자 스스로가 믿지 않으면[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망상을 배격할 일이다]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왜냐면 ‘처음 창조’의 불행이 새 창조에서도 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담처럼 불복종하지 않겠다는 선약(先約)과 그에 따른 실천 의지가 뒷받침되어 그것이 입증되어야 함이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하고 믿음 중에 있어도 항상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처음 창조에서도 역시 양면성이었다.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와 동시에 피조물의 협력, 합력 또는 동조, 동역이다.


아담은 여기서 그 자유 선택에 의해 생명 아닌 죽음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 몸의 체제이므로 머리[창조주]는 몸[각 피조물로 이루어진]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게 되어 있어[우리의 신체(身體)가 바로 이와 같이 움직이는 것] 이를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니 자기를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어기고 즉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스스로 움직인 것이니 곧 자기중심으로 나간 것이다.


몸[의 각 지체]이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 몸을 이루는데 자기 멋대로 나간다면 한 몸으로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곧 생명으로부터의 이탈이니 죽음밖에 없다.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과 같은 기계적인 생명체는 이런 요구로부터 제외된다. 일사불란하게 바로 이 이치를 따라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도록 처음부터 장치되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인간 그리고 영물로서의 천사들은 영원한 존재이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의지를 따라 선택하여 움직일 수 있는 완전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 자유를 오용한 것이다. 그래서 천사[영물]들 중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생기고 나머지는 "거룩한 천사"들로서 남게 된 현재의 실상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아담]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셨는데 인간 스스로 이에 비협조적이어서 도리어 스스로 죽은 자가 되어버렸으니 하나님의 창조는 이 때문에 전적으로 허사가 되어 버린 셈이다.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창조하셨건만 ‘죽는 인간’이 되어버렸으니 허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산 자’로 창조하셨는데 오히려 ‘죽은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양면성이라 한다. 이 ‘양면성’은 자유 의지를 지닌 피조물에게만 해당되고 따라서 이 양면성은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됨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거의 전철(前轍, 앞에 가는 수레바퀴 자국이란 뜻으로, 이전 사람의 그릇된 일이나 행동의 자취를 따라가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아담과 같은 그런 불복종의 기미가 있거나 그런 성향을 보이는 경우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시킴은 당연하다.


제외시키지 않으면 이미 죽은 아담이나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과의 평형이 되지 못하고 불공평함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 이렇게 제외시키는 기준이 바로 "회개" 여부다. 또다시 불복종하여 범죄하면 또다시 죽을 것이니 살려[구원해] 놓아보아야 도로무공이다. 그런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여전히 범죄를 해도 구원이 적용될 바에야, 아담부터 죽지 않게 하시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아담은 이미 죽었다. 그 죽음의 현실이 오늘날의 인간 비극이고 따라서 이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비록 죄를 짓는 죄인이라도 영생하게 하신다고 엉뚱하게 자기 세뇌를 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그런 ‘대신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담도 죽어야 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억지 주장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학(神學)’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대로 나가면 앞서 지적한 대로 형평상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피조물은 똑같은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영물들이 그렇다면 억울하다고 아우성을 칠 것이 아닌가. 아담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아담만 억울하게 된다. 이런 억울한 불공평한 일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니하신다. 그들 악령들은 말 그대로 악령이기 때문에 즉 악을 행했기 때문에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데, 우리는 악을 행해도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공정 불평등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멸망을 자취할 사람들이 생겨날 줄을 알고[야고보서에서도 보듯이 초대(初代)교회 당시부터 이미 그런 억지 주장들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부추겼었다] 성경은 미리부터 성령으로 분명히 못박아두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심"[롬 2:6]으로써 심판하신다고 전제한 다음, 이 "행함"을 설명하기를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오직 자기중심이 되어[selfish, self-seeking, "당을 지어"의 우리말 번역은 오역]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라 행하는 자에게는 노(怒)와 분(忿)으로 하신다"[:7,8] 했다.


이를 다시 강조하여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9,10] 하였다.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함은 이상 의미를 아주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음이다. 즉 어떤 경우에든 모든 인간에게 철칙으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이미 죽어 있음이 확인된 것이니[고후 5:14] 모든 사람이 죽은 터이므로 이 세상 역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갈 6:14]. 이렇게 단죄된 세상이 존속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얻을 사람이면 다 구원 얻도록 하시기 위한 배려 차원, 오직 이 이유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다[마 24:14].


이런 세상에 매달려 일우일희(一憂一喜)하는 어리석음이여, 구도(求道), 득도(得道), 전도(傳道)에만 쓰도록 정하신 금 쪽 같은 시간을 허송세월하는 이 무지몽매함이여. 당장이라도 와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오직 인간 구원을 위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형국인데도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사람 살리는 일에는 무관심이고 세상 일에 머리를 박고 있는가. 그러나 이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모든 일의 종막(終幕)이 내려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처음 구원 받을 때 "믿음"이 필수가 되는 것은, 아담처럼 불복종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다짐을 의미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이 약속을 지켜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음은 당연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처음부터 없는 약속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다.


영생이 여기서 "약속[요일 2:25-"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이 됨은 당연하다. 여기서의 약속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이 생명의 약속은 "새 언약"[new testament-고전 11:25]으로서 "첫 언약"[히 9:15]의 기초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 믿음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은 순종을 반드시 수반하는 까닭이다.


첫 언약이 새 언약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림으로써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할 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할 것입니다" 하고 백성들이 약속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했기 때문이니, 이 모세 율법에서의 첫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그림자였던 것이다[히 9:19,20/출 24:6-8].


최초로 죽음을 불러 온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이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요 영물들 중에 일부가 악령들이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람 사는 도리를 따르지 않으니 이는 자기는 물론 이웃까지 파멸에 몰아넣는 한없이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몰아놓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그 예다. 자기를 중심하고, 위주하고, 본위로 삼는 데에서 빚어지는 우맹(愚氓)이다. 이런 자기중심을 한 마디로 교만, 오만, 시건방진 것으로 정리하여 요약할 수 있다.


자기중심이니까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한 몸 구조에서 머리든 몸의 각 지체든 자기를 위하게 되면 그 한 몸이 유지될 수 없음이 상식이다. 상호 관계에서 조합되어 조화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가 '한 몸' 됨이기에 그렇다. 여럿이 서로 한 몸 같이 즉 자기 자신처럼 위하며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고도의 지혜가 바로 이 공동체 의식에서의 자기 부인(否認)이다. 즉 자기중심과 대치되는 의미이다.


자유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제각기 자기중심이면 이 자유가 방종이 되고 제각기 뿔뿔이 개체가 되어 흩어져 모래알 같이 된다. 풍수(風水)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뭉쳐야 콘크리트도 되는 등 가치가 있다. 자기 부인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유의 ‘양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명의 도리를 사랑하여 지키는 자는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주로 나가면 생명이 아닌 그와 상칭(相稱)되는 상태[죽음]로 분류되는 것을 누가 막으리요.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누가 이를 거역하랴.


"하느님 믿는다는 사람도 저런 식이니"


이병철 회장은 천주교 신부에게 구도자로서의 질문을 했는데 그가 아는 기독교는 천주교가 대표적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데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 노벨 평화상 수상자(1979), 50년간 인도의 빈민 퇴치에 주력함]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연히 지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보라, 하느님 믿는다는 사람도 저런 식이니 과연 하느님이 어디 있는가!".


즉 데레사 수녀는 그의 고해(告解) 신부[confessor]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온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편지의 일단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내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내 심령 깊숙이 공허감과 어두움뿐입니다-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말이지요[죄송합니다]. 천국(天國)을 마음에 떠올리려 해도 너무 공허감만 비수처럼 엄습해 와 내 심령을 난도질하니 이 알 수 없는 고뇌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버림 받음 같고 허전하고 사랑도 열정도 사라진...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지요. 영혼이 없다면 그러면 예수시여, 당신 역시 진실이 아닙니다".


[Where is my faith? Even deep down...there is nothing but emptiness and darkness...if there be God-please forgive me. When I try to raise my thoughts to Heaven, there is such convicting emptiness that those very thoughts return like sharp knives and hurt my very soul...how painful is this unknown pain...I have no Faith. Repulsed, empty, no faith, no love, no zeal...What do I labor for? If there be no God, there can be no soul. If there be no soul then, Jesus, You also are not true].


이 편지를 소개하는 평자(評者)는 단정하여 말했다. "종교 신념상의 회의(懷疑)와 고투(苦鬪)에 부닥친 것이다. 성체 성사(성찬식) 때에도 그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전혀 감득(感得)할 수 없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그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고뇌이었다"[She experienced doubts and struggles over her religious beliefs. She felt no presence of God whatsoever, neither in her heart or in the eucharist. She expressed grave doubts about God's existence and pain over her lack of faith].


창조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데에서 시작한 천주교 수녀, 더욱이 남다른 선행으로 성녀(聖女)로 받들어졌던 본이 되어야 마땅할 인물이 신적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불신에 시달려 왔으니, 이회장이 만일 이 사실을 알았다면 천주교 신부에게 그런 질문서를 보냈던 일을 당장 취소해 버렸을까? "그러면 이런 사례는 어떤가?" 하고 필자는 그럴 경우 이회장에게 물어봄 직하다고 생각한다.


즉 당대의 대표적 학승(學僧)으로 인정되던 모 박사[1914-1996]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강점 때 민족 시인으로 추앙되던 모 시인의 종반(從班)간이 되는 모 유명 가수 Y씨의 전도를 받고 타계하기 3일 전에 그 Y씨에게 기도를 요청했던 사실이 그 가수의 순방(巡訪) 교회 간증으로 밝혀졌다. 전도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런 청을 해왔다는 것이다.


18세에 출가, 미국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명 사찰 주지를 역임했으며 수백종의 저술 활동을 하면서 미국 등지에서 포교에 전념했다. 비교종교학을 연구했으니 기독교 교리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가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여부는 알 필요가 없고 우리의 관심사도 아니다. 오직 그가 이회장처럼 죽음을 앞두고 최소한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학승(學僧)이 자기가 몸 바친 60년 세월의 행적에서 그 총결산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그런 "성녀(聖女)"가 자기가 몸 바친 50개 성상(星霜)에서의 헌신과 그 결산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으니 그리고 똑같이 창조신의 실존에 대해 고민했으니, 이는 그런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깊은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신에 대한 본성적 갈망 때문이라고 마땅히 각도를 달리 해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성"이라고 할 때는 인간의 근원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과는 불가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비교 종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무갈 제국의 영걸 악바르[Akbar, 1542-1605]가 남달리 영민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전통적인 국가 종교로서의 이슬람교 교리에 쏠리지 않고 어느 종교든 가장 합리적인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한 후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기독교[천주교] 등 각 종교의 대표적 이론가들을 초청하여 그 자세한 강의를 듣고 난 다음 따로 천주교 관계자를 불러 말하기를, "기독교가 가장 합리적이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재림론에 대한 납득이 잘 안된다"고 했다 한다.


삼위일체론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왜 다시 세상에 와야 하느냐 하는지 이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는 것으로도 그가 보통 명석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베풂으로써 사후(死後) 천국에 들어가게 하면 그것으로 일은 모두 끝나는 것임에도, 왜 굳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이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회[Jesuit] 소속 천주교 신부들은 그들 자신도 평소 아리송했던 터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악바르는 신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며 임신을 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온다.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천주교 신부들이 대답을 못하니 악바르 역시 그 문제를 더 이상 풀어 보려는 의지나 의기가 없었음을 탓할 수도 없다.


자칭 전문가들이라 하면서도 답변을 못하니 문외한인 자기로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악바르의 사고 방식대로 하면, 신이므로 인간처럼 임신시켜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마리아의 태(胎)를 통하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던 분이다. 단지 사람이 되시는 것만 마리아를 통해서다. 그러면 답은 얼른 나오지 않는가. 사람이 되시기는 마리아를 통해서 되셨지만[마리아의 태로부터 세상에 나셨으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던 그대로이시다.


마리아가 임신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아닌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항상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는 말씀으로 사람이심을 강조하셨다.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성경은 이와 같이 구분하고 있는데도, 천주교에서도 가장 정수[엘리트]라고 할 '예수회' 신부들이 이 질문 앞에 만족할 만한 답을 악바르에게 내놓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인간 여자의 태에 영으로[성령으로, 하나님은 인간처럼 "육체"가 아니라 "영"이시니까] 들어오셔서 사람이 태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을 그대로 거쳐 마리아의 태 밖으로 나오시니 그래서 그 태의 주인공인 여자[인간 곧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 창조된]의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사람 곧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사람[아담]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므로 이 새 인간 기원(紀元)에서의 "첫 사람"이 되신 것이다.


성령과 직접 관련된 인간 즉 임마누엘[Immanuel]로서는 첫 사람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이다. 이 첫 사람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조되는 까닭이다. 즉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20]가 되신 것이니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아들들은 '육체를 물려받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을 각자가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의 아들"[人子]이라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 사람도 성령[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그리스도 곧 사람, 또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 곧 하나님]을 물려받으니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음'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이해하기 아무 것도 어려운 것이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성경이 상식대로 말하고 있으니 상식대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퍽 간단한 것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성령의 계시(啓示)로 성경을 알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학문처럼 착각하여 인위적인 해석에 더 의존하였으므로 그 선택대로 된 것뿐이다.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계시]을 통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므로,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이들이라 해서 그들에게 권위가 있을 리 없고 우리는 그보다 늦게 세상에 태어난 인생들이라 해서 권위가 없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현재의 하나님이시므로, 과거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지 않았던[믿음이 없거나 기타 이유로] 것을 현재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계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데레사 수녀나 그 학승의 예를 든 것은, 개신교에는 그런 데레사 수녀 같은 이들이 없고 기독교 신자가 종교를 바꾸어 불교를 신봉하는 예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얼마든지 있고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예 그런 예를 들 필요가 무엇이냐 하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종교의 비교 우월성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경우에도 그럴 수가 있다는 실례를 든 것이고, 또 반대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경우에도 인생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는 하나님께 대한 향수(鄕愁)를 예를 들어 지적함이다.


다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써 우리도 덩달아 부활하는 것이 인생의 구원이라 결론 내리면 간단히 끝내는 일이 되는데도, 구태여 그 부활한 몸으로 세상에 다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악바르에게는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가 일찍이 배우지 못하여 일자 무식자이기는 해도 영특하고 현명한 군주였기에, "이 삼위일체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다면 제국 전체를 희생하더라도 개종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다. 이지적인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알고자 할 때는 반드시 알아야 믿을 수 있는데, 모르니 어찌 믿음이 생기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무턱대고 "믿기만 하라' 하시지 않았다. 이성적인 인간이 어떻게 덮어놓고 믿기만 할 수 있는가. 이지적인 판단으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지적으로 판단하고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눅 10:22] 하셨다.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니 계시해 주시지 않고는 어느 인생도 아버지를 또는 아들을 알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도 모르고 그러니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기뻐하시면서" 기도하시기를,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21] 하셨다.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바꾸어 말하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은"[마 18:3] 소위 지혜 있다 하고 슬기로운 자로 자처하는 이들은 절대로 구원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밝히심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by no means"] 구원되지 못한다"고 강조하신 사실에 우리가 혼신의 힘으로 주의를 기울임이 마땅하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역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어중이떠중이로 몰려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거짓말을 지어내어 성경을 기록했다면 어중이떠중이를 한데 긁어모아 다수로써 세력화를 도모하려 함이 목적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내로라하여 지혜 있는 자, 슬기로운 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절대로 마다할 리 없으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모을수록 더 힘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서 미련한 자, 무식한 자들을 외려 내치시고 그들이 깔보고 업신여기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자들만 골라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닌가! 약한 자, 없는 자, 천한 자들을 맞아 들이신다는 것이 아닌가[고전 1:25-31].


때문에 최대의 복음 전파자라 할 수 있는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증명, 입증; 또는 비밀]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전 2:1,4/1:17]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이라는 말도 있듯이 거짓말은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기 때문"[:2-6]이라 함과 같다,


이렇게 천명하는 데에는 그 어떤 거짓말, 속임수, 꾸미고 지어내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믿고 깨닫고 그래서 회개함으로써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이들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으니 전부가 아닌 것이며 '아무나, 누구나"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엄선(嚴選)하고 정선(精選)하는 데에서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인위적인 말은 아예부터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가려내시고 골라내신다는 것은, 어떤 자격 유무를 찾으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스스로 행동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저울질하심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지혜니 슬기니 하는 것은 애초 창조되던 당시의 그 어린 아이 같음을 벗어나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한 데에서 비롯된 교만이요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으로 흘러 범죄의 결말을 거두었던 예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닌가.


그러므로 구원은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고전 2:9] 그렇게 하지 않은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고 그런 본을 따르려던 아담은 죽음의 보응을 받았던 것이므로, 이 이상 이런 어리석음을 용납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 외의 나머지 사람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하였다"[:9] 함과 같이 완전히 제외된다.


아담의 죽음과 악령들의 멸망에 처한 운명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선지자의 글에 저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것이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는 것이지 아무라도 내게 올 수는 없다"[요 6:44,45] 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하신 그대로다.


믿지 않은 이들 즉 "육에 속한 사람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니 저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여 깨달을 수 있음이다"[고전 2:14]. 따라서 성경을 소설 읽듯이 줄줄 읽으면 자연스럽게 알아질 것이라 생각함은 큰 착각이니 반드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간절한 마음의 자세로 읽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친히 인간들을 가르치시는 것이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음이다[:13].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친히 가르치셔도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하고 써놓은 글을 통해서지만, 반드시 성령께서 개입하셔야 그런 것을 통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음이다. 베드로[시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아보고 이를 믿는다고 했을 때도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사람]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마 16:17]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2] 하셨으니, 지금도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상 모든 말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지 않는 한 아무도 그리스도께 관한 정확한 진리를 알 길이 없도록 되어 있다. 알아도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진리는 닫혀 있어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한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니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이다.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에로 돌아올 일이다. 결국 악바르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변을 당시 천주교 신부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었기에 전래되어 오는 이슬람교에 그냥 머물렀다는 것인데, 의문이 풀리지 않는 마당에서는 달리 새로운 조처를 취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시원한 해답을 성경적으로 풀어 주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이나 재림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만일 그리스도께 관한 일체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 거짓말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런 거짓말쟁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중 하나임을 강조해 둔다. 만일 그런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이게 된다면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 되어 무모한 짓임을 모든 거짓말을 하는 자로서는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감히 그런 짓을 못하는 것이다.


88세의 당시 데레사 수녀나 82세의 그 학승이나 웬 만큼의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순간에 보인 그런 상반된 자세였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람들이 대개 하나님을 믿어도 실체(實體)는 외면하고 모두 자기 머리 속에 자기 스스로 그린[圖畵] 것을 두고 그것을 신앙하는 까닭이다. 무신론자도 자기 마음 속에 자기 딴의 그림을 그려놓고 "보라, 아무 것도 없지 않으냐, 신이 어디 있느냐"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없어야 인간 삶이 행복해진다"는 말을 하는 것도 그런 종류의 '신의 그림'을 스스로 그려놓고 하는 자평(自評)임에는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그림을 그리도록 무진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해야 자기 시도(試圖)대로 인생들이 구원 얻는 숫자가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각자 개인의 인식과 삶에 관계되는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불교 신자가 "내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 하고 내가 부처"라고 하여 자기 자신을 그려놓고 "이것이 진리"라 하고 자기 세뇌를 하는 것과 같다. 천주교에서 성경을 근거 또는 권위로 삼지 않고 교회를 그려 놓고 "창조주의 대리자다" 하는 것과 같다. 개신교 역시 자기 머리 속의 인간의 해석을 따라 일정 형상을 그려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라 하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 유일하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시는데 성경을 외면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데레사 수녀도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 실상(實像)을 보려 하지는 않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님"이라는 그림의 허상(虛像)만을 지금까지 들여다 보며 하나님이라 믿었으니 이는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하나님"이라 부르고 경배했던 것과 같아 이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고, 학승의 경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빈 종이 하나를 놓고 "보라! 하나님이 없지 않으냐!" 하다가 임종시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별 좋은 수가 없으니 자연 하나님 있는 쪽으로 선회해본 것뿐이다. 둘 다 하나님이라는 실체(實體)를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


동질성(同質性)과 이질성(異質性)의 차이다. 동질감(感)이 없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와 하나님이 별개의 존재일 수 없다. 이는 나의 부모와 내가 남남이 아님과 같다.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갑과 을이 양분, 양립되어 있으면서도 일체(一體)를 고집하니 부득불 이를 삼위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이 제각기 자기 특성을 나타내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의 성질 즉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갑과 을이 하나로 녹아 있는 특유의 성질만을 과시하려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이 '일체'를 가리켜 원래의 '일시(一始)' 성질의 복원(復元)이라고도 한다.


하나님 친히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동질'이지 '이질'일 수가 없다. 자주(自主) 독립성을 구가하게 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도 겉으로는 '이질'인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 친히 그 숨을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써[흡기(吸氣)가 아닌 호기(呼氣)] 조성하셨으니 하나님의 생명[인체(人體)로 치면 호흡(呼吸)이 상징하는]을 부분적으로['부분'은 또한 '전체', '전부'에 딸려 있다는 의미다] 옮겨 놓으신 셈이어서 '이질'일 수 없고 '동질'이다.


불행히 뜻 아니한 사고로 외톨로 자라 부모를 모르고 지내던 고아가 자기 부모를 우연히 접하여 대면하고 있는데도 남처럼 여겨 동질감 아닌 이질감으로 그 부모를 인식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성질이나 특성이 같은 바탕임을 동질이라 하는데, 말하자면 데레사 수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질감을 느꼈고, 그 불교의 유명 학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겉으로는 표방하면서도 동질감을 느낀 경우라 하리라.


위에 예를 든 고아의 경우 자기 부모로는 인식 못하면서도 그 태성(胎性) 또는 본성 혹은 본질이 부모와 같은지라 무언지도 모르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이회장이나 그 학승의 "동질감"이다. "그러면 데레사 수녀는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아났기에 '이질감'이라 말하는가" 하겠지만, 이 경우는 다르니 '강제', '강압'에 대한 '자유'의 반발 작용이 이질감으로 나타나 동질감보다 기형적으로 더 컸기 때문이다.


"기형적"이라 함은, 비정상적으로 즉 억지로 다시 말해 사랑에 의한 자진 자발적이 아닌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으로 윽박지르듯이 몰아세우듯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뜻이다. 창조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지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을 소위 "믿는다"고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다. 이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 자식이 자기 친부모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랑이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정상이 아니고 기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현실이니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러면 데레사 수녀는 무엇이 문제였던가. 천주교의 교리 자체가 하나님 사랑을 막고 있는 것이라 답할 수 있다. 왜냐면 "동정녀 마리아"가 그 이유다. 성경은 '어버이 품속의 아기로 복원되는 것'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여 부모가 그 아이를 찾아 오듯 우리 안에 친히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엄마 품속의 아기가 바로 '하나 됨'의 완벽한 표현이 아닌가]가 되어 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 반해, 마리아를 중간에 두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식으로 생각하니 이는 엄마와 아기 사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갈라놓는 일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마리아'가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더 가깝도록 인위적으로 설정해 놓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은 불문가지다. 실로 엄청난 비극이다. 반면에 그 학승은 그런 인위적인 장애만큼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은 없다 하고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상반된 교리에 젖어 왔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갈망은 살아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리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 하는 것이고 "내게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빌 1:21]라 하는 것이다. 왜냐면 동질성으로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해하기 좋도록 그리스도를 '또 다른 나", '제2의 나 자신"이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계를 범죄하기 전 인간[아담]이 하나님 사이에서 유지했는데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 인해 어버이 품으로부터 격리되고 유리(遊離)해 있는 상태에 이른 것이 오늘날의 우리[구원 받기 전의] 현실인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위치해 있던 상태로 복구되는 것이요, 이 복구된 상태를 그렇게 표현['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등]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원리[삼위일체의 법칙에서 짝의 원리 또는 양면성의 원리]에서 남녀가 한 몸되는 이치로도 분명히 나타난다. 즉 남녀가 부부되어 한 몸이 되면 남자의 육체는 더 다시는 자기 것이 아니 되고 여자의 소유가 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불이익을 당하고 불편해서 불만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전 자기 육체를 자기 소유라 해서 홀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의 낙으로 배가(倍加)시켜 누리는 것이다.


육체로써 둘이 하나됨이 그런 경우이고, 그리스도와 나는 영으로 그렇게 둘이 하나 됨이므로[고전 6:17] 매일의 생활 즉 삶 자체가 그런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나의 삶은 주님의 소유이고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주님의 삶은 나의 소유가 되니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해[주님 자신을 위하심이 없이] 모든 것을 하시고 이루시는 둘의 하나됨이다.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적으로 상대의 삶을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생명의 법질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의미다. 그러므로 남녀 한 몸됨에서 보듯이 둘이 하나됨은 홀로일 때보다 더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니, 이전보다 위축되거나 더 못하거나 불리하거나 불평불만을 품을 하등 이유가 없고 오히려 감사하고 신바람이 나서 노래[찬송, 찬미, 찬양-엡 5:19]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모든 일[凡事]에 감사하라[살전 5:18],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한 대로 감사가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다. 이는 자유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무엇이든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자유의 핵심이다. 충만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므로 자연스레 지칠 줄 모르는 신바람이 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유 속에서 모든 것을 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이와 같이 완전히 보장해 주셨겠는가. 순종도 사랑도 믿는 것도 모두 자기가 원해서 하기를 바라시므로,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치 않으시고 일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심이다. 너무나 완벽한 자유이기에 영원한 각자의 운명도 우리 스스로가 정하게 하신 것이다.


일하는 것 자체에 낙[재미]을 느낌이다. 그러니 누가 하지 말라고 압박해도 하는 판이다. 그만 하면 충분하다고 해도 자기는 더 하려 하고 한도 없이 하려고 용을 쓰게 된다. 왜냐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므로 이것이 자기에게는 삶의 낙이어서 누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대개 보면 어서 하루바삐 이 고달픈 세상 떠나 천국 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적인 심정으로는 천국 가기가 부자가 천국 가기[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려 하는]만큼이나 어렵다.


왜냐면 자기중심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겠다는 일편단심으로 가능한 한 세상에 오래 남아 [아무리 고난에 넘치는 삶일지라도] 아버지의 일에 헌신하겠다는 동질감이 충만해 있어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인 것이다. 이는 한 몸 체제에서의 몸의 각 지체를 이룬 위치이므로 아무쪼록 머리의 지시를 따라 머리의 일을 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니 이런 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1-3] 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그 자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이기에 그렇다. 모세의 심정과 기도 역시 같은 차원이다[출 32:32].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고전 9:16]이라 했다 해서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한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이 말은 일반적인 원칙론을 피력한 것일 뿐이다. 즉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당연히 미칠 일반적인 사실을 말함이다.



우리가 이렇게 일반 원칙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나의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바쳐도 아깝지 않게 여기는 이런 주인 의식에서 나오는 열성은 하나님의 일에서까지도 그리스도를 닮기 때문이니,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서로를 닮게 마련이다. 이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것이 동질감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모하면서 우리가 띠게 되는 '그리스도다움'이다[빌 1:8].


세계가 다르다.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다르다. 세계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르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다. 바울이나 모세의 그런 표현은 어른의 세계의 언어다. 믿음과 믿지 않음의 차이에서도 현격하게 드러나는 것이니 생명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같을 수 없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믿음에 들어온 이들의 언어를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로 이적(移籍)하는 것부터가 급선무다. 아이의 세계를 탈피하여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면 발육부진아로 남게 되어 장래는 극히 불투명하고 어둡다. 천주교는 성경에 분명 마리아가 아들 딸들을 두고 있었다고 함에도[마 13:55] 불구하고 이를 전적으로 무시해버리고 평생 동정녀로 지냈다고 하니 거짓말을 하고[성경의 기준에서 보면] 속이는[성경에 대하여 사람들을]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스럽게 마리아더러 "어머니"라는 호칭도 쓰시지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를 대하는 것과 같이 "여인"[요 2:4/19:26]이라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와 같이 의식적으로 차별화를 나타내셨는데도, 이 뜻을 따르지 않으니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개신교는 성경에 "육신대로 살면"[롬 8:13] 즉 죄를 지으면 "죽는다"[:13] 다시 말해 멸망한다고 했는데 그 말씀을 구원과는 무관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니 역시 거짓말이요 속임이다.


이미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 친히 내게 오시어 내 안에 계시는데 난데없이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간다고 하여 성경은 전혀 믿지 않으니 누가 보아도[그가 성경대로 믿는다면] 황당한 거짓말이다. 또 죄를 회개하여[행 2:38]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라고[롬 14:9/고후 5:15] 성경이 천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 "죄와 사망의 법"[롬 8:2]에 매여 있어도 구원은 받는다고 하여 로마서 7장 24절을 사도 바울 자신의 신앙의 체험이라 하니 마리아를 높여 의존하고 기대는 것만큼이나 반(反)성경적이다.


천주교의 교리를 마리아 중심이라고 한다면, 개신교의 교리는 대강 간추리면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육신으로 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번 구원 받았으면 영원히 이 구원은 변할 수 없어 일단 구원 받은 자로서 멸망하는 수는 없는데[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성경의 경고를 엉뚱한 해석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러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나 육신에 사로잡혀 죄 짓기는 일반인데 왜 그들은 구원되지 못하고 이런 이들은 구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이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 한다] 미리 택하셨기 때문이라 둘러대는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성경대로 믿지 않는 데에서는 둘 다 공통이고 세상 모든 종교와도 차이가 없다. 진리인 성경을 멋대로 각색(脚色)하여 별개로 만들어놓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가 아닌 오직 세상 종교의 하나이다. 이런 개신교 사람들은 언필칭 "인간은 약하다"고 한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찌 그 같은 말을 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약한 자로 만드셨는가. 새 창조인데도 약한 자로 만드셨던가.


결국, 그들이 믿는다는 성경대로 말하면,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고 그들을 단죄(斷罪)하고 있으니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니 창조의 수준이고 차원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인간을 "약한 자" 그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처음부터 창조[새 창조]하시겠는가?


약하게 만드실 일이 없는데도 또는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밝히신 적도 없는데 그런 말을 지어내고 있으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도 유분수다. 그래서 그들 중의 지도자급이라 하는 어떤 이는, 소위 "세계 종교 상(賞)"이라고 하는 "템플 상"을 받는 자리에서 "내가 과거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한 것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어 신사 참배를 하게 되어 있는 우리 교인들을 홀로 둘 수 없어 그들과 함께 하느라 부득이 한 일이었다"는 회개 아닌 변명의 궤변에만 능했다.


교회의 목자(牧者)가 됨은 죄를 짓지 않도록 "양 무리들"을 인도함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그런 반역 행위에 스스로 가담하고서 어찌 그 자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구원 받았다-요 20:21,22/17:18] 하리요. 목숨을 버리더라도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 것이 "양 무리의 본이 됨"[벧전 5:3]이라는 그런 상식도 통하지 않았던가. 이런 사람이 소위 "지도자"가 되어 있었던 한국 교회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성을 말하리요.


불교에서는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워 '내가 곧 우주'라는 것으로 논리의 비약을 하니 말로 하면야 무슨 말을 못하리. "‘마음이 부처다’ 하는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이 몸이 그대로 부처다’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까지 한다. "‘도(道)는 말을 떠나 있다’의 시대가 끝나고 ‘언어가 즉 도다’, 심지어 ‘탐욕이 즉 도다’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가 완전무결한 부처다. 지금 이 순간 부처가 아니면 어느 세월에 어디에 가서 부처가 되겠는가. 언제까지 ‘아승지겁을 닦아야 한다’는 방편만 얘기하다가 말겠는가?" 한다.


믿는 즉각 구원이라는[행 8:35-39/16:30-34] 하나님의 말씀을 모방하려 했던가. 그런 식으로 결론 내릴진대, 영원한 극락 같은 것은 없는 것이고 있다고 해도 이 세상과 똑같은 곳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부처가 필요 없고 부처가 될 필요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불(佛)"이라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일도 없다. 실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으로 말의 희롱으로만 그친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믿는" 즉시에 이루어짐은, 첫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이루어져 완성된 하나님의 창조[창조자의 단독 행위이므로]를 말함이고, 둘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삶이라는 것은[인간이든 영물이든 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피조물에 한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한 몸의 체제에서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르고 함께 각 지체(肢體)된 자기 이웃을 위함에 있으므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 곧 자기중심이어서[자기중심이 모든 악의 근본이다] 이런 일체의 노력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to be born again-요 3:3]" 연후에야 그 생명력을 가지고서 스스로 움치고 뛰고 날고 기든 다 하라는 것이다. 단 방금 지적한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이웃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과(因果) 관계가 더 없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러니 논리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논리적 사고(思考)의 결과로 행동하는 존재다. 하다못해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자기 악행에 대한 합리성을 구축해놓고 저지르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출생하는 일이기에 믿고 회개하는 즉시 즉각적으로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가 바로 그런 예다. 출생하면 되고 만드시면[창조하시면] 되는 것이니 거기에 무슨 장기간 뜸을 들이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마리아 없이도 너끈하게 구원 얻는다는 증거로서는 바로 그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간 강도의 사례 한 가지만 들어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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