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4일 수요일

★돈을 보고 결혼하려 하므로 신문왕 히쓰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돈을 보고 결혼하려 하므로 신문왕 히쓰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미국의 신문왕(新聞王) 히쓰는 부자이므로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고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외롭게 죽었다는 것처럼 영생 하나만 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으나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으면 영생도 구원도 없다는 것......)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두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을 알았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정상적인 생명 곧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해야 제대로 된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비슷한 의미 같으나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자아중심이고 후자는 그 반대인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나의 관심사(생각)가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상대하는 나의 사랑에게 완전히 옮아 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사랑 관계는 둘이 하나됨이므로 서로 마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이 평범한 사실에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항상 나의 상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대에게 가 있지 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것ㅡ 자연히 그렇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으니까. 원래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이렇게 하나님과 그 피조물 개체와 둘이 하나되는 관계로 지으신 것입니다. 왜냐면 피조물은 각각이므로 여럿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여러 피조물과 개별적으로 한꺼번에 일일이 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영이 아닌 피조물은(비록 천사와 같은 영물로서 성경에서 "영"이라 하는 존재일지라도) 이런 일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관계가 '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에게 복원된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정상적인 모습은 혼자 계심이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 즉 애초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 하나하나와 일일이 개별적으로 대하시던 바로 그 모습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육체로 계시던 모습 역시 바로 그런 모습이시되, 육체로 계심을 인하여 육체적인 제약을 받으심으로써(내가 현재 육체의 제약을 받고 있음과 같이 되시려고)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난을 받으시는 일을 이루셨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이시니(비록 육체로 계시지만) 다시 말해 만약 천국에서 A지점에서 갑이라는 사람과 육체로 함께 계셔도 멀리 떨어진 B지점에서 을이라는 사람과 똑같이 육체로 계실 수 있다는(지금은 영으로만 그러하시지만)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아무리 초자연계("신령한"-성경의 표현) 몸이 되어 있어도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로 있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으신 '한 사람', 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앞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되어 항상 서로 마주 보며 나는 그를 보아주고 그는 나를 보아주는 그런 양면성과 동시성의 영원한 관계로 서로 사랑 가운데에서 사는 이것이 구원 받은 확실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몸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늘에만 계심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사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삶, 일상생활이 구원 받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다르게 인식해왔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만 머물고 있어 여전히 생활은 자아중심이요 기껏해야 특정일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 의례대로 종교 행위를 함으로써 "나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나는 구원 받았다, 왜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했으니까ㅡ" 이런 수준에서만 항상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원 받은 것으로 세뇌시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고후 6:17)이 구원임을 간과하였고 배제한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의 모든 기록은 한 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이 사랑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임을 재차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이 초점에서 벗어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랑 곧 생각 즉 생활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마주 보는 것 즉 주님을 의식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물론 주님은 나의 일을 영원히 하고 게시는 것ㅡ자신을 내게 영원불변의 선물로 주셨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을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요 20:21,22)는 말씀으로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 받음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성령 충만하여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행 2:25)라는 다윗의 예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처럼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 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는 함께 아버지의 품 안에ㅡ이것이 "그 날에는(성령이 너희 안에 있게 되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요 14:20) 하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요 17:2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항상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는"(요일 5:12) 것입니다. 즉 구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함과 같습니다.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ㅡ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는지"(롬 14:7,8/고후 5:15) 여부를 스스로 알 수 있고 확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 단언하지 못하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고후 13:5)라고 아주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5) 했으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서, 부단히 부절히 시험하고 확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오늘, 이 시간"의 특성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사랑의 특성을 무시하고 과거(선지자가 되어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었고, 큰 능력을 나타내었고 등)에만 안주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음으로 천국에서 탈락되고 불법을 행하는 자로서 영원히 낙인 찍히게" 됩니다(마 7:21-23).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앚어버리고(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오늘 이 시간)"(빌 3:13,14) 한 것입니다. 










우승하는 자는 하나뿐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달려가라(고전 9:24)
우승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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