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얽힘"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ㅡ만사의 결정은 둘 중 하나
명량해전은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혼자서
이루어낸 승리요 역사의 대업적이다. 당시 조정도 그 누구도
우리가 일본 수군을 상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은 차라리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상황이 그랬다. 패잔 병력을 끌어 모아도 전선 12척에 병사는
채 200도 되지 않았다. 부하들도 이전과는 달리 이공을
신뢰할 당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공의 "나
하나라도"의 정신이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켜 놓은 것이다.
일본군은 우리 수군이 아니었다면 개전 초의 전략대로 다시
서해안을 돌아 중국 산동반도의 허리를 찌를 참이었다. 한반도라는 든든한 보급기지를 확보한 터라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 되면 명군은 황망히 퇴각하기에 바쁠
것은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전략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 독 안에 든 쥐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더 이상 한반도에
머물지 못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한반도는 완전히 적의 수중에 함몰되는 것이요 그 이상으로
더 이야기는 없게 된다. 두 번째로 이공은 한반도만 아니라
중원 천지를 전쟁의 도탄으로부터 건져냈으니 당시 명나라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모르나 오늘날 추세를 보아서도 당시의
세계 인구 중 그 절반 가까이를 직간접적인 전화(戰禍)의
재앙으로부터 구하였다 해도 허튼 말은 아닐 것이다.
이로 보건대 세계사적으로 보아서도 이공
이상 가는 영웅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이들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데에서 대개 공을 세웠지만 그런 침략의
참화로부터 숱한 인명을 구해낸 공덕으로 말하면 단연
독보적인 것이다. 이공은 명량해전에 대비하여 조금도 허튼
구석이 없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니 마치 백만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이를 배경으로 하는 것처럼 여유 만만하게
임했던 것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한국인 정신"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여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일방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부터 배워
뼈 속 깊이 아로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 양면이
있으며, 그리고 그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순수하게 우리
각자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낭패를 본다. 부정적이면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외곬으로
생각하고 낙관적이면 그 이면의 부정적인 면을 헤아리지
않고 대비를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면 반드시 그와 반대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하고 단정해주는 것이 "양자
얽힘"에서 주는 교훈이다. 왜냐면 이 양자 현상은 신비한
것도 아니고 불가사의도 아니고 양면성과 동시성을 가리키는
3위1체 원리에 따른 물리학적 측면에서의 적응일 뿐이기에
그러하다. 때문에 이런 것을 말 그대로의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하고 "과학적" 생활 양식이라 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전혀 부족함이 없을뿐더러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유인즉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아우르고
통할하는 3위1체 원리의 등장으로 인하여 과학적 법칙이 일상생활화하고
우리의 삶이 이 법칙을 따라 운용됨을 점차 자각하기에 이른
때문이다. 과학은 학문이라는 상아탑에 눌러 박혀 있는 전문가들의
일이고 생활은 어디까지나 생활이라는 선입견 속에 지금까지
갇혀 누구나 자유롭지 못했으나 최고 최상위의 과학적 법칙이
인간 삶을 주재하고 있다는 신지식에 이르러서는 그런 고정
관념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삶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이상향의 뼈대인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공동체
의식이 그 뿌리냐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인 자아중심이냐
하는 양자 택일이라는 기로에서 좌우된다는 사실이, "양자
얽힘"에서 나타나는 두 소립자의 정반대의 성질이 동시에
작동되는 그 "하나로서의 둘(duality as unity) 또는 "둘로서의
하나(unity as duality)"로서 주로 표현되는 3위1체 원리에서
일절 이탈함이 없음과 똑같은 표현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즉 두 입자 간의 정보 교환이거나 의사 소통에서
비롯되는 "양자 얽힘"이 아니라, 처음부터 x입자나
y입자나 둘이 하나였으므로 그런 양면성과 동일성(동시성)을
나타내는 것이 필연이었던 점에 이제 과학자들도 눈을 떠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모든 사물은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압축된다.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하나로서의 일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양자간 관계다.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 그
둘 사이에서 요리(料理)되는 것이다.
사고의 단순화라 할까, 체계적 합리화라 할까,
어쨌든 그런 방향으로 오늘날 진행되고 정리되는 추세의
실정이다. 부정적 의미의 사태가 있으면 반드시 긍정적 내용의
또 하나의 실상이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이니, 반드시 그 반대쪽
측면이 실재하는 것을 백 번 강조해도 좋은 것이다. 이런
믿음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법칙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계가 있다는 사실은
그 반대인 초자연계가 존립해 있다는 확실한 근거, 증거가
되어 있음이다.
과연 그러한가 하여 실험하고 검증하려고
지지고 볶고 자시고 말고 할 것이 일절 없다는 얘기다. 이미
그 자체가 그 증명이 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가르치고 알려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자연계의 것을 가지고 초자연계를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니 진작부터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 그런 것은 건너뛰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렇게
건너뛸 수 있는 그 확실한 토대가 되어 주는 것이 3위1체 원리인
것이다.
이공 순신은 이 양자 택일의 기로에서 그
반대되는 쪽에 착실하고 확실하게 발을 내디딘 경우다. 막연하게
요행수를 바라는 도박 심리 같은 것도 아니고 오직 그
반대쪽에 서서 자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확실한 선례(사례)를
우리 앞에 역사적 현실로 남겨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실로 막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우리의 평범한
일상적인 삶에도 용해시켜 쓰자는 것이다.
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의 비보에 접하자,
어리석은 무리들의 농간과 오판 등 각종 잡스러운 비열한
인간 심리의 작동에 얽혀 잡혀 들어가 모진 문초를 받느라
망가져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이공 순신은 원래 장사급의
체력이었다 하지만) 백의 종군의 신분 그대로 그 스스로의
결단으로 남쪽으로 말 달려(도원수 권율의 허락은 물론 받고)
간 것이다.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고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3도수군 통제사로 다시 제수된 것은 그 훨씬 이후의 일이다.
어리석은 조정으로서 당황해서 얼떨결에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다.
필마단기로 남도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던
그 말발굽 소리야말로 역사에 오래 새겨두어야 할 구국의
백만대군의 함성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그럴 듯한 동상이라도 하나 그 장쾌한
행로를 대표하는 초계 어디에든 세워 둘 법하지만 아직 우리의
의식 수준은 거기에도 덜 미치고 있다. "나 하나만이라도"의
말발굽 소리. 그 위대한 정신이 역사의 회랑을 굽이돌며 울려댄
호쾌(豪快) 무비(無比)의 박자(拍子) 맞춤이요 경쾌한 화음이었다.
3운법칙은 운명적이니 우리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세계의 지배자가 이 세상 신인 용이라는 사실이
이를 상징하고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자초한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계 삶은 우리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반면에, 초자연계에서의 생과
사는 완전히 우리 수중에 매여 있어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 역시 인간생활에 미쳐지는 "양자 얽힘"의
'엎 스핀(UP spin)'과 '다운 스핀(DOWN spin)이라 할 수 있다.
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 영생이요 그 반대쪽인
자아중심으로 나가면 필멸이니 영원한 "둘째 사망"(계
2:11)으로서의 고난 고통을 자취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뒤집어서 거꾸로만 생각한다. 즉 이 세상 삶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되 영원한 생사는 하나님이 정해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상은 완전히 전도(顚倒)된
것이다. 물론 덮어놓고 선과 의를 사랑하면 그것이 영생과
직결된다는 말은 아니다. 은혜로 얻는 구원의 의미가 과거의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선과 의의
의미를 먼저 알라는 것이다. 행복한 삶의 최대 그리고 유일의
요건이 한 몸(머리와 몸) 체제에 있고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에서 오는 쌍방의 자기 부인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이 다름아닌 자기부인인
것이다. 이는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께서 그 몸의 지체되기를
바라고 그 앞으로 복속(服屬)해
오는 모든 이에게 이미 확증해 보여주신 터이다.
그런즉 머리의 본을 따라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하여 살 때 그것이 선이요 의이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와 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요약하면, 마지막 아담을 떠나서는 선과 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머리와 몸의 관계인데 머리 없이 눈이면
눈, 입이면 입, 팔과 다리가 아무리 혼자 큰 소리쳐도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자기 혼자 있는데 선이든 의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만 통하는 덕목이다.
여럿이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머리의 존재가 그 필요성을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즉 머리와 몸(의 많은 지체)으로 귀일(歸一)하는 것이다. 모든 선과 의는 그 기반이 자기
부인이요 이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그
관계를 말함인데 머리가 없이는 각 개체는 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하나됨에서 오는 즉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아무 이름도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선언한 그 근본 뜻이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 아담은 폐기되었다. 육체만 물려주는 역할밖에 한 것이
없다. 폐기되었으므로 마지막으로 은혜로 주신 것, 아니 하나님
친히 그 위치에 들어서셔서 우리를 친히 구원하시는 방편으로
삼으심이니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라는 이름이시다.
몸은 항상 머리가 대표한다. 몸의 지체가 많은데 그 많은
지체의 이름으로는 대표성을 띠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런즉 무슨 말이든 무슨 일이든 모든
것을 마지막 아담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골 3:17).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 의식에서
사는 것이 영생이요 이 하나됨에는 자기 부인이 그 기본 골격이라는
사실을 백 번 강조해도 좋다. 우리는 너무나 이 진실과 진리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무조건 예수님 나를 위해 희생되셨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곧장 영생에로 진입하는
것인 양 사탄은 속여 온 것이다. 사랑만 수반된다면야 그
말이 옳은 것이지 그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의 본질을 외면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도리어 그 말이 해독이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한다는(약
2:14,17,20) 평범한 상식 수준의 사실을 억지로 비틀어 왜곡시켜
우리가 구원 얻음과 관련된 사랑은 별개의 의미인 것처럼
오도하여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와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악마는
이런 상식 수준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엉뚱한 별개의 의미라고
가르쳐 온 것이다. 사탄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인간 자신의 자아중심의 욕심이 야합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니 사탄만을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양자 얽힘"의 사고방식(a
"quantum entanglement" way of thinking), "양자 얽힘"의
생활 양식(a "quantum entanglement" way of living)이라고 새로운
명칭을 부어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생명의 영원한 진리가
물리학에서도 응용되고 있음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닐스 보어로 말미암았으나 이제는 "양자 얽힘"의 실험
결과로 구체적으로 그 베일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할 수
있으므로, 정작 알았어야 하는 생명의 진리에 눈 뜨기 시작하여 의식
혁명을 일으키는 신선한 분위기 조성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양자의 국면에서 선택은 각자에게 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양자 택일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주 독립성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일절 불간섭주의로
일관하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번 정하신 것은
불변이고 이를 만일 번복하신다면 모든 피조물을 부정하심이
되고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시는"(딤후 2:13)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불가능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신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 "너 바로
네가 이 너의 날("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ㅡ고후 6:2 )을 당하여 네 평안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다. 네게 날들이 이르면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니 이는 권고 받는 때를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다"
하셨다(눅 19:42-44).
이 마지막 구절은 다음으로 이미 바뀌어져
있다. "네게 때가(날들이) 이르면...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다.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계
14:10). 이러한 중차대한 때를 당하여 세상 사는 것으로써 허송세월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 때 가서 아무리 슬피 통곡하며
자기 자신이 증오스러워 또는 고통에 이를 갈아도(마 25:30)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인즉 어찌하랴.
아들의 우심은 아버지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이다. 왜냐면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 그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 우시기까지 하셨다는
말처럼 두렵고 떨릴 일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은
오직 두렵고 떨 때이다. 내 스스로의 결정과 자유 선택에
따라 영원한 생사가 결정 나는 판인데 아니 두렵고 떨 수가
없다. 영원한 생명의 쾌락 아니면 영원한 고통, 슬픔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게 될 것을 오직 내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결정한다고
생각해보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그렇다고
하겠거니와 믿는다는 사람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당치도
않는 생각에 사로잡혀 온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망상에 쐐기를
박아주는 것이 3위1체 원리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사랑의 특질이다.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짝사랑은
적어도 생명의 법칙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으니
생명이 있고 영원한 삶의 낙이 있은즉 그 반대인 영원한 괴로움이
있는 것을 가감없이 드러내어주고 있는 것이 "양자 얽힘"에서
입증된 이른바 "엎 스핀"이요 "다운 스핀"이다.
둘밖에 없다. 그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외 달리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의 여지가 없다.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이 마지막 아담께서 성령으로 계시는 성전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이 오늘은 영원한 오늘이 되어주지 않는다.
내일이면 영원히 단절, 종결될 수 있다. 이 심각한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 이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요
다음에는 동네 방네 다니며 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 제사장의 위치에서
제사장 본연의 임무를 다하여 끊임 없이 기도해주는 일이다.
구원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격상되고
이로써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직무가 맡겨지는 것이다.
이외에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양심과 양식이 명령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당연하기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너희가 구원을 받으면)
너희가 권능(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마지막 아담 자신께서
그 능력이 되시므로)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눅 9:25,26).
계시록에 멸망에 들어가게 되는 요건 중에 "두려워함"(계
21:8)이 있다. 이는 겁약(怯弱)하다(timid, cowardly)는 뜻이다. 겁약하다고
어찌 멸망에까지 들어가겠느냐 하겠지만 이는 불신자를
상대로 함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킴이기에
막중한 무게가 실린다. 즉 위의 말씀과 같은 뜻이다.
원인은 사랑이 없이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는 까닭이다(요 12:25). 생명의 법칙을 기준할
때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지 않는 탓도 탓이지만 이 세상이
악령 사탄의 지배 아래 있어 그와 항상 전생 상황에 있음을
망각함에서 오는 자기 불찰에 기인한다. 전투하는 자가 방심
상태에 있으면 그 결과는 자살 행위와도 같은 것임을 누가
모르랴.
용(계 12:9/20:2)이 자기 영역에 들어 와 있는
자기 원수들을 그냥 방관하고 있으리라 착각함은 철부지라기보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이다. "당장 맛 좀 보겠니?"
하고 벼른 협박이 예수님 앞에서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줄 것이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준다 만일 내게 절하면(나처럼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나를 따르는 결과가 되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눅
4:5,6)이었다.
"순식간에 천하 만국의 영광을 가리키며"(마
4:9) 한 말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으로 나가면 세상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다가 비참하게(세상 보기에는) 끝날 것이니
각오하라는 뜻이다. 과연 주님 친히 그렇게 죽으셨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스데반과 사도 야곱이 그렇게 죽었고 역대 믿음의
선배들이 바로 그 길을 따라 나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성인(거룩한
사람들, saints)들이 핍박과 탄압 속에 그렇게 고난 받으며
죽어 갔던가.
인간 대접을 받을 리 없다. 짐승처럼 죽어간 것이다.
멀리 보려 할 것도 없이 지금 코 앞의 북한 땅에서 그런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한 몸이 되어 있는 그런 한 식구로서의 믿음의
형제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 살기를 좋아하는 "겁약자들"은 역시 이 세상
따라 멸망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다(빌 1:29). 그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이니, 아직도 우리의 머리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는 고난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26:14) 하심으로써 이 점을 명백히 하셨다. 이 세상에서도
사는 것같이 잘 살고 영생도 아울러 받겠다는 망상은 아예
버릴 일이다. 서울 한 복판에 그런 거대한 종교 건물을 지어놓고 축복받아
잘 산다고 가르치는 사이비가 인기를 얻고 있고 현재 성업
중에 있음이 현실이나, 바울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으므로 그렇다면
"죽을 지경에 이르는 고난"(고후 1:8)을 팽개치고 당시
갑부들보다 더 잘 살고 편안히 살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잘 사는 일에 마귀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세상 자녀들이
잘되고 형통한다면 하나님의 성인들은 그 반대 즉 거꾸로가
되어야 "엎 스핀"과 "다운 스핀"으로서의 제격에
들어맞는 현상이 아닌가. 다시 말해 바울 사도는 자기의
고난 받음을 본받고 함께 고난 받자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음의 의미를 정리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천국에 들어가는 문과 길은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신
것이다.
오히려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미리 경고하셨을 정도다. 세상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 받은 이들을 아담 이후 지금까지 한데 모은다면 엄청난
숫자가 되겠지만 그러나 당대에서는 언제나 예외 없이 소수의
무리들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일부러 "적은 무리여"(little
flock-눅 12:32)하고 제자들을 지칭하셨다. 성경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이런 낙담할 수 있는 내용을 삽입해 넣을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러하리라고
못박으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고도 하셨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인기를
얻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이다. 그래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 하신 것이니, 이러한 내용의 성경을
기준할 때 세상에서 인기 있는 큰 교회당을 짓고 성황리에
영업하는 종교 단체(명칭은 "기독교"이나)는 그 진실성을
일단 의심하는 것이 사이비에 말려들지 않는 지혜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도록(요 12:25)
가르치지 않는 경우 다른 면으로는 아무리 정통 보수라 하더라도
사이비이다. 말씀은 인정해도 그것을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해치우는
것이 사이비들의 특징이다. 오늘날까지 그런 식으로 사이비들은
변명을 해왔고 또 일단은 성공했다. 아무도 감히 여기에 이의를
다는 자들이 없었기에. 결국은 한 통속이었으므로 말을 못한
것이다. 전쟁에 임한 자가 어찌 자기 안락을 꾀할 수 있는가.
이미 그 자체가 적에게 항복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세상은 비록 불법적으로 탈취한 것이기는
하나 악령들의 영지(領地)인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 세상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도 일전(一戰)을
치르지 않고는 될 수 없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는가(단
10:13). 1908년(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을 기하여 천사들과 악령들과의
전쟁은 종결되었으나(계 12:7-9) 그러나 악마 용은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 아래 모든 악령들과 더불어 지상에 몰려 내려 와
서성이고 있는 판이니 성경은 그래서 지상에 화가 있다고
하였다(계 12:12).
그 후로부터 생겨난 지상의 이변이 1,2차 세계
대전을 비롯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혁명의
소용돌이요 스페인 독감으로 수천만이 목숨을 잃은 것도
괄목할 만한 사건이다. 그 후로 각종 전쟁이 부단히 일어나고
있다. 이 무렵부터 소위 UFO 출몰이 빈번했다고 한다. 하늘에도
땅에도 널리 퍼져 있던 악령들이 천사들에게 패하여 이제는
좁은 땅덩이 지구를 주변으로만 나돌게 되었으니 그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런 것으로 가장하여 나타나므로
그런 현상이 부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외계 문명이 있다는
속임수와 적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떤 것으로 형성될지는
모르나 어쨌든 모두 악령들의 변신술이다.
"양자 얽힘"에서 짝을 이룬 두 소립자의
정반대되는 성질을 보았거니와, 3위1체 원리에서의 양자 관계는
상반(相反)됨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자연계의 생사가 있다는 것은
초자연계의 생사가 있다는 증명이 됨과 동시, 이 자연계 삶에서
부유함을 누렸을 경우 초자연계 삶에서는 반드시 그 정반대되는
것이 자기 몫에 태인다는 사실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음이다.
여기에는 부유하고 편안한 삶의 정도를 계량(計量)하는 양과 질이 전혀 문제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남 못지 않게 살고자 하는 그 마음
유무(有無)로써 정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때문에 젊은 부자와의 문답 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하셨을 때 부자가 아닌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함과 같다.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기에 이런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이 모두 멸망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자아중심이냐, 자기 부인이냐 하는 선악 개념으로써도
해석이 되지만 이러한 만유의 법칙 측면에서도 그 갈래는
명백히 드러나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로써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자연스러우니
만유 창조, 그리고 만유 존속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자연계 삶에 비하면 먼지만큼의 향락도 누리지 못하는
이러한 자연계 삶에 고집스럽게 연연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정작 본격적인 초자연계에서의
삶을 영구적으로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을 성경이
누누이 경고하고 있으니 그 절박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이 세상의 구조와 맞물려 그
확실성을 확신하게 한다. 즉 내가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의 생명의 영광을 얻었을진대 이 소식에
접하지 못하여 여전히 실의 상태에 놓여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복된 소식을 알릴 책무가 부여되어 있음이니 이와 같이
백난(百難)을 무릅쓰고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證人)"이
되어 있을진대 어느 여가에 이 세상 삶을 즐길 틈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는 내 양심이 명령하는 바요 성경상으로도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영광스러운 초자연계에
속한 몸이 있어 그 몸으로 사는 것이 정상이고 그에 비하면
이 자연계 삶의 낙을 취함은 그림자만도 못할뿐더러 시간
낭비만 될 수밖에 없다. 절대로 이런 자연계 몸으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진대는, 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마 7:21) 천국에 들어가 초자연계 몸의 삶의 영화를
누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구조를 여기서 말하는 이유는 이런
인생 구원을 한사코 막는 방해자가 이 세상 신(神) 용이기
때문이다. 용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데 어찌 이 세계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나이 매우 늙었지만(출가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살고는 과부된 지가 84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결과(눅
2:36-38)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를 영접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닌가.
"기도와 말씀 전파"(행 6:4)에 전적으로
매달리느라 일상 잡무 그리고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선한 직업"(엡 4:28)에 종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혀
짬을 낼 수 없는 것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들의 일상(日常)인
것이다. 이 사실이 명백한 것은, 말씀이 세상에 다 전파되면
그 때에 세상은 미련 없이 끝나리라 확언하셨기 때문이다(마
24:14). 그런즉 용이 이 세상 신으로 지배하는 이 세상은 오직
단 한 가지 목적만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 전파인 것이다.
이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음을
이상 말씀으로써 명시하신 것이다. 그런즉 이런 세상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남들처럼(아무 실상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삶을 살고자 한다면(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면ㅡ요
12:25), 이는 그 스스로 세상과 함께 망해도 좋다는 자체 선언이
되는 것이니 정신을 차릴 일이다. 구원은 이제 갓 시작일
뿐이니 종결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은 구원이
미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자유 의지는 그대로
작동되어 내 스스로 얼마든지 나 자신을 파멸시키는 원흉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과정을 자타 공히 지켜보게 되는 과정에서의
시작인 것이다. 사탄을 파멸시킨 것은 사탄 자신의 자유 선택이요
아담을 죽음에 내몬 것은 아담 자신의 자유 의지이다. 우리의
구원받음 즉 새 창조는 아담이나 악령들이 애초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게 창조됨과 같은 의미로 그칠 뿐이다. 그들은
범죄함으로써 멸망에 처해지고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우리만은 무슨 특혜를 받아 예외가 되어 범죄해도(범죄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무조건 자아중심이므로 회개 않는 한
살 길은 없다) 눈 감아주시고 용납해주시어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사탄은 속여 왔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다루시지 더 봐주고 덜 봐주시는 것이
없다.
원리원칙주의는 공평공정하시다는 의미다.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는다" 즉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단 한 피조물이라도
스스로 억울하다는 생각을 품도록 방치하실 리 없다. 차별하시면
혜택을 덜 받는 쪽은 억울하다 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긴요하다.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벧후
3:16)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그런 부분은 성령께서
현재의 성경에서 누락되게 하시지 않았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이 모두 채택된 것이 아니고 그 중에는 빠진
것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게 된다 "(마
13:49) 하셨으니 악인 중에서 의인을 갈라내시는 것과 의미가
같을 수 없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7,18/히 10:30) 함과 같다. 믿는 자가 구원 얻는다 하지
않고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10) 자가 영생에 들어간다 함과
같은 뜻이다.
의인이 구원 얻어도 겨우(간신히) 얻는 것이니
성경에 무수한 경고(믿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눅 13:24)고 경고하실 리도 없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24)는 말씀을 하실 리도 없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일이 아니라면 주님 친히 우리를 천국에 그냥 집어 넣으시면
될 간단한 일이 아닌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이다.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여 위함이
필수이다. 때문에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하고 부인하면
나도 부인한다 하셨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필연성을 강조하심이다(마 10:33/딤후 2:12).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 의지(자유 선택권)가 부여된 것이니 이 또한 양면성으로서
자유가 있음으로 사랑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반면 자유가
있음으로써 나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기도 하는 까닭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24:12,13)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부인은 상대의 여하함에
관계 없이 나로서의 선과 의를 끝까지 유지함이다. 상대의
반응 따라 움직이면 즉 악함을 악으로 갚는다든지 하면 결국은
나 역시 자아중심이 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자아중심을
자기 부인으로써 이긴다는 뜻이 "선으로써 악을 이김"이다.
결국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것은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전연 차원이 다르니, 이러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삶의 방법과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잘못된 마음을 먹어 얼마든지 자아중심으로
흐를 수 있으므로 바울 사도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함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는 것을 얻고자 함이요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않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고전 9:25-27)
했듯이 사랑 없는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 가운데에서
견뎌야 구원 얻는"(마 24:13)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말이지만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구원이 된다는
뜻이니, 어디까지나 나의 동기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고전 16:14)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산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것이 결국은 "나의 구원을
이룸"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중도에 얼마든지 변심하여
"처음 사랑을 떨어뜨린"(계 2:4) 채 모르고 지낼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까닭에 나오는 경고임이다.
때문에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처럼
달려가는" 것이 구원 얻은 자의 기본 자세임을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고전 9:24). 바로 이 이유에서 매일처럼 모이기를
힘쓰라고 성경은 독려하고 있다(히 10:24-27/행 2:46). 1주 하루만의
형식적인 모임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매일"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확실"은
오역)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다"(히 3:12-14) 함과 같다.
구원 받은 자들 중에서 그와 같이 믿지 않는
악심을 얼마든지 품을 수 있고 자멸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경고를 위한 경고이지 실제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하나 그렇다면 성경을 거짓말하는 것으로 치부함이 아닌가.
자기의 선입견, 편견을 지독하게도 버리기를 싫어하는 자아중심의
고집 이상의 의미가 없는 생각이다. 이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임을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의 예를 들고
확증하고 있는 바울 사도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간
누구에게 노하셨는가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닌가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시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는가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닌가"(히 3:15-18). 구구절절이 교회에게 빗발처럼
쏟아지는 경구이다.
"이로 보건대 저들이 믿지 않음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했은즉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다. 저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다"(히 3:19-4:2). 이러한 시의적절한
경고를 담고 있는 히브리서를 야고보 서신과 함께 성경에서
빼어 버리려고 애초 시도했던 것이니 이미 그 때 당시부터
"말씀의 혼잡"(고후 4:2)은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랴. 바울이 지적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고후
11:4)이 극성을 부려 거의 전체를 휩쓸고 있음은 실상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방관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
일하시는 기조를 성경은 이미 상세히 밝혀두고 있다. 즉 적그리스도가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참칭(僭稱)하며 하나님 행세를 하는
무법자의 행위를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1,12)이라 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시 경고하기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지 않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라는 그리고 사람의 교훈에 끌리지 말고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라는 그래서 지혜 있는 자들을 외면하시고 어린
아이에게만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말씀을 심중에 새기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멸시한 대가로 나오는 결과인즉 이런
이들을 심판하는 방편으로 삼으신다는 무서운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보아도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행적처럼 너무 고집을 부리고 "목이 곧은"
우리 인생들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떨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자신 그들보다 아무 것도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거기
적절히 적응하라는 뜻일 뿐이다. 악령 사탄은 그 스스로 자아중심이
되어버린 결과물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처음 그룹(cherub) 중의 하나가 그와 같이 자아중심으로
스스로를 변질시킨 것이다. 사탄이나 그 그룹 중 하나나 교만
즉 남보다 약간 장점이 있다는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첫째이고, 둘째는 아담이 그렇게 먼저
범죄한 자 사탄의 충동을 받아 범죄한 것인데 우리로 말하면
시험받음(눅 4:2)이다. 이 시험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는 우리이니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환경에
제대로 대응하고 이런 모든 것을 거뜬히 극복한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사탄 이외의 악령들(계 12:7)은 그 자신의
자유 선택도 있지만 사탄의 충동 질에 의해 그 휘하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암세포가 자기 혼자만 자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변 이웃도 갉아먹는 현상과 같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이라 한 대로,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몸이 되어 각기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충성(신실,
faithfulness)이다(갈 5:22). 때문에 어린 아이라도 또는 일자 무식자라도
구원을 얻는 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지식도 이 사랑을
일으킨다는 목적 외에는 달리 없으니 쥐꼬리만한 지식 가지고
남보다 (많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교만에(고전 8:1-3) 이른다면,
그 지식 자체가 (덕이 되지 못하고) 멸망의 원흉이 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인생 삶에서 "엎 스핀(UP spin)"과 "다운
스핀(DOWN spin)" 단 두 가지뿐이라 했고 그리고 반드시 둘이
평행으로 병립한다고 했거니와, 그리고 그 가장 적절한 예로서
이공 순신의 명량 해전을 들었거니와, 실제로 인간으로서
완전히 제로 점의 "다운 스핀"에 있다고 할 때 그 때에도
"엎 스핀"이 있는가. 물론이다. 하나님의 아들되는
길이 있으니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일이다. 그 이상 가는 가장 이상적인 "엎 스핀"은
없다.
그러면 그렇게 된 경우에도 다시 다른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항상 양 갈래로 둘은 병존한다.
다시 말해 "다운 스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이다. 그리고 일단 모든 인생이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러
선(좋은 세상, 영생)의 세계와 악(그 반대 현상의 세상, 영원한
멸망)의 세계로 분리되어 거기 소속되면 그 자체가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이 되어 나타나지므로 개인별로
나누어지는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은 영원히
사라진다.
이공(李公)의 공동체 의식과 항상 대조되는 것이 '나'원균의 자아중심이다. 말하자면 '다운 스핀'과 '엎 스핀'의 양자 상극 관계다. 성경에 말하는 의와 선 그리고 죄와 악이 무엇이냐 할 때 우리는 이 두 인물의 대립 구도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공과 같이 공(公)의식에 철저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가 원균과 다를 바 없고 내가 바로 원균이라는 자각에서 '나'원균이라는 별칭을 붙여두었지만, 죄와 악의 밑 뿌리가 되는 자아중심의 폐해는 원균의 행상(行狀)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처음 일본군이 침략해 올 때 원균은 일만 병력과 일백척의 병선을 자침시키고 해산시켜버렸다. 승전이 예상될 때는 남다른 용맹을 발휘할 수 있지만 승산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미련 없이 전의(戰意)를 스스로 꺾어버리는 것이 자아중심의 행각이다. 사(私) 의식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경우 모든 것을 자기 개인의 유불리(有不利)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공이 상황을 역전시켜놓아도 번번이 따라다니면서 패멸(敗滅)을 초래시킨 것이니 이공이 그동안 키워놓은 일만 병력과 일백 척의 병선을 또 다시 결딴 내어버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도원수 권율이 불러다가 매질을 가했겠는가. 난중잡록에서 의병장 조경남이 원균을 두둔할 만큼 개인적으로는 비대한 대식가로서 호남아라는 일면도 있었던 모양이나 아무리 겉으로는 사람이 좋아도 자아중심의 욕심을 놓고 논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한 사람의 자아중심이 들어 한반도는 물론 중원 천지까지도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을 뻔했고 한 사람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한바도는 물론 중원 천지까지도 구출된 것이다. 이렇게 명암을 분명히 보여 준 역사적 사례는 세계를 통틀어도 없다.
자아중심이 이와 같이 백해무익이요 자타를 막론하고 파멸로 몰아넣는 원흉임을 증명해준 것이다. 반면 공동체 의식(자기 부인이 그 완전한 형태의 핵심되는 부분으로서)은 이와 같이 선하고 의로운 업적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어 있음을 만천하에 증명해준 것이다. 무공(武功) 자체가 이공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니, 이성계는 왜구를 대파시킨 국민적 여망을 이용하여 개인적 야욕을 채운 실례이나, 이공은 허심탄회하게 "나라에서 부르면 몸이 부서지도록 위하여 충성할 것이나 부르지 않으면 그뿐이라" 하여 "전쟁이 끝나면 향리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리라"는 회포를 시로써 풀 정도로 사리사욕을 몰랐다.
때문에 올곧고 당찬 소신에 찬 처사에 앙심을 품은 소인배의 시기와 농간에 휘둘려 미관말직으로만 전전했으나 마음의 평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 이공은 나라의 제삿날이 오면 반드시 임금이 있는 쪽으로 북향재배했다. 잘 나든 못나든 임금은 머리로서 떠받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효심이 지극했고 형제간 우의가 돈독했으니 아버지 없는 조카들을 친자식 같이 보살펴 거두었다. 어버이에게 대하는 효성으로 대개 그 사람의 인품 즉 공동체 의식이 저울질되는 것은, 성경의 십계명 중 인간 관계를 가리키는 대목에서 첫째로 오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공의 항명죄를 거론하는 이들이 있으나 2차 대전에서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전쟁 중임을 감안하여 롬멜이 그런 항명을 해도 무사하게 넘어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임금과 조정은 이성계의 재판(再版)이 날까에만 전전긍긍하여 이 기회에 아주 없애버리려고 덤벼들었으니 나라가 작아 사람 마음들이 옹졸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이런 실상은 오늘에도 별로 변함이 없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역사 과목을 교육 과정에서 쑥 빼버렸던 무지몽매함을 반성하자는 소리마저 없다.
이렇듯이 의와 선이 어떤 것이며 죄와 악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크나큰 가르치심을 주셨건만 이에 귀기울여 듣는 이가 과연 몇일런가. 그러나 때 늦지는 않으니 모두 이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아로새겨 영원히 살 길을 찾을 일이다. 우리의 표본이신 마지막 아담을 가리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하였으니 그의 몸된 우리 각자로서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이미 성경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죄는 불법이니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 것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함이다. 자녀들이여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헛소리를 듣지 말라는 의미)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죄 짓고 죄 짓게 하는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것이다"(요일 3:4-10).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