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21세기의 바울 사도 (4)ㅡ이병철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4)ㅡ이병철 질문


9. 21세기의 바울 형제 [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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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실체

이런 관점에서 같은 "기독교"라는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동방[그리스] 정교를 논하면, 이들은 성경대로의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방금 말한 대로 자기 스스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천주교가 마리아 동정녀 수태시(受胎時) 원죄(原罪)가 없는 상태였다고 공식으로 발표했고[교황 피우스 9세, 1854] 또한 죽어 장사 지내지는 일이 없이 승천했다고 발표했음[교황 피우스 12세, 1950]과는 달리, 동방 정교는 그렇게 신격화하지는 않았으나, "동정녀 마리아"라 하여 다른 성인(聖人)들에게 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마리아에게 기도를 한다. 이 역시 성경과는 동떨어져 혼미(昏迷) 가운데 사로잡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내 자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상속자"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모신 사람이 되어 있는데, 죽은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기도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감히 "죽은 자"들에게 무엇을 구한다니 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 죄, 불경 죄가 아니면 무엇인가. 조상 숭배로 조상의 위패 앞에 엎드려 그 앞에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뿐 아니라 동방정교회에서는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을 잉태한 이[God-bearer, Theotokos]"라 부르니, 이런 망발(妄發)도 없다. 성경에 대한 무식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는가.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을 뿐이다.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마리아의 태를 통해 세상에 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을 따름이다. "하나님을 낳다"니! 이런 불경과 모독은 천주교와 똑같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교리의 요점이라 하여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주셨다"고 말한다.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다.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갇힌 인간 피조물을 구원하실 방법이 친히 사람되시는 것 외에는 아주 없으므로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심으로 인하여 결과일 뿐이니 처음부터의 목적이 아니므로, 의미는 앞의 주장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케"[벧후 1:4] 하셨고 현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것도 그리스도 친히 이제는 내 안에 영원히 계셔서 나의 한 부분이 되어 존재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볼 수 없다[딤전 6:16]. 그러므로 이로써도 명백히 사람과 하나님은 한계가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말의 재주를 부릴 때가 아니다.

독생자(獨生子) 곧 유일하신 아들께서 영원히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養子)"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일 뿐 하나님이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아들됨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니까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만 드러낼 뿐이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간단히 한 가지만 말해보자.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딤전 6:16]이시라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갑자기 "볼 수 없는 자"들로 변하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는 당연히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심도 사람이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 되어 계심을 인하여 그렇게 되는 이치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영원히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정교회 교인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렇게 되면 너무 그리스도께 치중이 되어 쏠림 현상을 이루어 성령께서 약화되시므로 형평상 균형이 깨어진다는 것인데 이다지도 성경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성령께 대한 전적인 무지가 이런 억지 해석을 낳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기 입맛대로 자기의 편협된 소견으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비틀기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 정도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제각기 독립된 개체로 오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는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짝[양면성]의 원리 정도는 상식적으로나마 염두에 두었어야 옳다. 그리고 성경을 기도 중에 즉 성령의 가르치심[계시]을 바라며 정독하면 진리와 진실의 윤곽이 분명 드러나게 된다. 성경은 분명 아들을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 외아들]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 두 분 하나님 외에는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의미이기에 "아버지[성부], 아들[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 하셨는가.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동시에[행 2:33/요 15:26] 아들에게서 나오신다[행 2:33/요 14:26/16:14,15].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이시기도 하고 아들의 영이시기도 하다[롬 8:9-11]. 따라서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시는[요 14:16,26] 의미가 되기도 하고 아들께서 보내시는[행 2:33/눅 24:49/요 16:7] 의미도 된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심을 가리켜 "우리가 온다"[요 14:23] 하신 것이다. 이쯤만 읽어도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질 수 있는데도 억지 해석을 강행하니, 마땅히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겸손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다.

또한 계시록에는 성령을 "일곱 영[7靈들, seven Spirits]"이라 했는데 아버지의 보좌 앞의 "일곱 등불"로 나타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곱 영"이고[계 4:5]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 "일곱 눈"으로 나타난 것 역시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5:6]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이라는 숫자로 표현되시는 성령이시니, 아버지와 아들처럼 개체로 계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둘이 하나로 계심'으로써 마치 3자(者)처럼 되어 존재하심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터득할 수 있는 일이다.

"3자로 존재하시는 것"과 "3자처럼 되어 존재하시는 것"과는 의미가 아주 다르다. 상보성 원리에서 보어가 예를 든 것과 같이, '빛'과 '파동'과 '입자'로서의 3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동'과 '입자'라는 개체가 존재하나 이 둘이 하나가 되어 '빛'으로 존재한다는 그런 이치와 같다. 삼위일체의 원리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동방정교회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천주교도 물론 마찬가지다. 결국 그 어느 쪽도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 구원을 목표로 [자기 부인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한 채] 교회 일에 충성하려 하고, 교회[제도화함으로써 그 교권을 내세우는]에서 명령하는 것을 수행하려는 것 등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이는 바로 말하면 자기의 율법 행위[종교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성경, 성령과는 본질상 거리가 아주 멀다.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개신교의 교리는 또 어떤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우리의 "새 생명"[롬 6: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골 3:4]이시니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또는 중심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데도, 여전히 자기 위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이라는 점에서는 위의 종교 단체들과 공통이라고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로마서에서 힘들여 설명하고 있는 "육신"[롬 7:5-8:13]이 다름아닌 자기중심 곧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즉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을 가리킴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죄와 사망의 법"[롬 8:2]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칭하는 바 "선"은 자기 부인이요 "악"은 자기중심인 것이다[롬 7:19]. 은혜로써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믿음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만 종교 활동을 하고 종교인의 생활을 하니, 바로 그것이 '구원 얻기 위한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단지 모양만은 바꾸어, 과거처럼 ‘선행’을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믿음’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왜냐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했으니, 그 "믿음"이라는 요건을 채우기 위해 그 "믿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요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육신" 타령이다. 자기중심으로서, 자기 부인이 될 리가 만무한 까닭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육신"이 와해되고 붕괴되고 "멸해진"[to be destroyed] 것을 명백히 하고 있지 않는가[6:6]. 멸해졌으니 고로 분명 번화가 있게 마련이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변화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신 가운에 살고 있는 바울 자신의 개인 체험"이라고 이 "육신" 설명을 한결같이 우기고 있으니 어찌 천주교나 동방정교와 한 등속(等屬)이 아니리요. 바로 우리의 "21바울 형제"가 이런 모든 종교적 미신(迷信)을 단죄(斷罪)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되는 그의 믿음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고후 5:15]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갈 2:20] 모든 일을 기도한 후 결정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리라는 것이다.

②고난 받음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를 기쁨으로 달게 받겠다는[골 1:24/고후 4:10,11] 것이요, ③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함을 의미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갈 6:14]" 함이니, 이 세 마디 모두가 우리 믿음의 사표(師表)가 되고도 남는다. 우리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역설하는 것도 바로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생’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사’를 택한 그 믿음[이런 것이 바로(다름아닌) 믿음이다], 가히 우리의 믿음의 본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늘날에도 이런 믿음의 형제, ‘바울'을 남겨두신 실상을 보이심이니 이 은혜가 크시다 함이다. 사도가 무엇이며 목자(牧者)가 무엇인가, "나를 본받으라"[고전 4:16], 또는 "본이 되라"[벧전 5:3] 하는 데에 의미가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이 현존해 살아 있는 '삶[생애]의 본'이라는 것은, 일개 도서관 분량의 서책이나 오디오의 성경 주석, 설교집보다 더욱 귀중하여 그 가치는 가히 계량할 수조차도 없다. 이야말로 21세기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군대를 통솔 지휘하는 천군만마의 위세로 우렁차게 울려 나오는 호령이 아닌가. "보라! 이와 같이 살라는 것이다! 이 본을 따르라! 이렇게만 나아가면 백전백승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룸'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훌륭한 본보기다!" 하고 외치는 소리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람 사는 마땅한 도리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룬 상태로서의 자기 부인을 강조했는데 그 생생한 윤곽이 너무나 뚜렷한 산 증거와 실례(實例)로서 우리는 이 79세 형제를 통해 발견하고 찾은 것이다. 그 형제는 그 길로 북으로 돌아가 붙잡혀 순절(殉節)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생의 사명은 이와 같이 잠깐 그 고난의 도가니로부터 탈출하여 그 황금 같은 증언을 자유 세계에 남기고는 다시 돌아가 역사의 뒤안길로 유유히 사라지는 데에 있었다.

더 오래 살아야 필요도 없었고, 자유세계에 나와 동네 방네 [복음을 전한답시고] 외칠 필요도 없었고, 더 긴 말 여러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나타나 그 간단한 몇 마디로써 충분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을 위하여 그는 장장 78년 간이나 믿음의 시련 속에 연단을 받아 그렇게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그가 워낙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결착된 지도 어언 59년[2012년 현재]이 되었으니 그 형제는 최소한 20세 전후 이전에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성경에 대한 서책'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고 충분히 결론 지을 수 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신을 것도 아무 것도 변변한 것이 없는 척박한 죽음의 땅에서 그런 믿음의 본이 건재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히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힘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고 있다. 그런 환경 가운데에서도 놀랍고 기이하게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의뢰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실로 든든함과 그득함, 넉넉함, 느긋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실로 우리의 길잡이, 캄캄한 밤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안내자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추리(推理)도 그가 남한에서 북으로 납치되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렇지 않고 북한 태생이었다면 그보다 더 여린 나이에 믿음에 관한 한 외부와의 교류가 두절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그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오로지 성경을 읽고 기타 성경 참고서는 읽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룬 결실이었다는 여기에 중요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을 읽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성명]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동시에 이런 인물을 배출할 정도의 북한 교회야말로 교회로서의 입지(立地) 요건에 아무 손색이 없었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당 건물은 물론이고 신학교, 신학원 하나 없는 땅이요 따라서 목회자니 교역자니 하는 "직급(職級)"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는 그런 면에서는 전적인 불모지(不毛地)가 북한이다. 찬송 하나 제대로 부를 수 없어 오직 찬송 한번 실컷 불러보자고 목숨을 걸고 탈북했으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이런 곳에서 이런 믿음의 큰 ‘동량(棟樑)’이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북한 사정을 가리켜 우리 중 그 누구도 거기는 "교회가 없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이 지구상 현재의 자유 세계를 통틀어 모든 교회를 살펴도 이런 정도의 바울 사도 급(級) 수준의 인물을 찾아 보기 힘들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에는 있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 교회는 살아 있는 것이다. 물론 과시용, 선전용인 어용(御用)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교회당 건물은 없고 신학생도 없고 기타 우리가 "교회"[성경대로가 아닌 우리나름의 인식에 따른]라고 인정할 만한 그 어떤 요소 요건도 갖추지 못했지만 분명 북한 교회는 현재 이 세계에서 가장 생동력 있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21바울 형제"가 아닌가.

교회가 이런 정도의 결실을 낸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교회는 원도 한도 없이 완벽한 것이다. 더 보탤 것도 제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냐, 외형적인 것으로써 다시는 "교회" 적부(適否)를 따지고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19,20]고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교회 구성과 존립의 요건인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 건물 자체의 효용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 그런 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면 마음껏 활용할 가치가 있다. 현재의 교회 체제[이 경우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를 말한다]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그 뜻이다. 새로 교회 일을 시작할 때는 그런 건물 등의 외형적인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사"라는 명칭을 앞세우지 말고 신학교와 교역자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21바울 형제들의 북한 교회를 본으로 삼는다는 것이지 기존 체제를 억지로 허물 필요까지는 없다.

생명의 운동은 그런 외형 바꾸기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 피조물들이 탄생하느냐 여부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단에서 전달한 것이 성경대로의 하나님 말씀이 아니었다면 과감히 버릴 일이다. 오직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만이 완벽하게 가르치실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만들어 드리라는 것이다. 필자도 오직 성경을 읽음으로써 터득한 것뿐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되는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르치시되[특정인만 아닌] 오직 성경을 읽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자에 한해 그렇게 "가르치신다"[요 6:44,45,65/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는 증거가 바로 '21세기 바울' 형제이다.

교회를 말할 때 인위적인 직제, 제도따위를 염두에 두지 말 것이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서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사람인 이상 '사람'이시라는 사실에 비중을 두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사람이신 아들과 '하나 되어' 계신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다"고 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배는 아버지[하나님] 예배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 교류, 사귐에 전적으로 무게를 두는 것이니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상생활이 우리의 예배다. 즉 "살아 있는 제물"[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로서의 삶이 합리적인 이치에 맞는 예배인 것이다[롬 12:1].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니 사람으로서는 그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시지 않고 나와만 그렇게 함께 계시고 사시는 의미 그대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니, 나와만 함께 하시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모든 믿는 이들에게 또한 그렇게 함께 하심이다. 이로써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21세기 바울 형제"는 거의 80평생의 70년 가까운 세월을 우리가 처한 상황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훌륭히 양성된 것이다. 그 정도의 믿음이라면 우리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그 좋은 답이요 그 실질적인 본보기가 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북한 교회다. 북한 교회를 본으로 삼으면 그것은 충분히 "그리스도의 교회"다.

교회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모신 사람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다.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두 셋만이 모여도 거기에는 그리스도 계시고[마 18:20] 따라서 아버지 계신다.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친히 목자장(牧者長)이시고[벧전 5:4], 하나님 계시니 거기가 성전(聖殿)이다. 이미 성전이 되어 있는[그 몸이] 사람들이 모이니 어느 곳이든 그렇게 모일 때 거기가 성전이 아닐 수 없다.

북한 교회는 "토굴(土窟) 교회"라는 별칭도 있다.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는 토굴 속에서 극소수가 모이기 때문이다. 아무 데서나 하룻밤을 새려고 누워 자던 곳이 "하나님 성전"이요 "하늘의 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야고보의 체험은 바로 이런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창 28:12-18].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전적으로 "임마누엘"[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영원히 모시는]의 시대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믿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요 14:1]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초대(初代) 교회는 바로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지금 북한 땅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믿는 데에서 절대 순종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렇게 믿어도 나중에 변절할 때는 얼마든지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믿지 않을 때, 그런 "21바울 형제"와 같은 믿음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는 변함이 없다. 자기 목숨과도 맞바꿀 정도가 되어 있는 '그런 것'이라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진리다.

바꾸어 말해 현재의 상황을 북한 교회 실정과 같은 것으로 인식할 일이니 그렇지 않아도 바로 그러한 때가 이제 전세계적으로 우리 코앞에 다가서고 있음이다[살후 2:3-12]. 무차별의 박해의 철퇴가 임할 것이다[계 13:15].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일할 수 없는 밤"이 바로 우리 눈 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몽골이 징기스칸을 선두로 하여 서방 공략의 길에 나서 유럽 천지를 뒤흔들었으나, 우리는 "빛은 동방에서 난다" 하여 무작정 동으로 내달렸던 기마민족의 혼을 되살려, "하나님의 복음의 빛은 동방의 배달에서 온 세계로"라는 구호[a catch phrase]를 걸고 세계 공략의 길에 들어설 일이다.

한국 교회가 그 주역이 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의 한민족이기에 사람 사는 법을 따라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던 까닭에 처음부터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온 기독교 선교사들까지 놀랄 지경이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빛을 나타내는 흰 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에 부합하고, 인생이 원래부터 영생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 즉 이생만 아니라 오는 세계에 대한 신앙이 공고했기에 어느 민족보다 장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는 고유의 풍습에도 우리의 21세기 대대적인 복음 사업은 걸맞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우리 민족은 문화면에서 세계 지도국가로 창성함이 옳다고 한 대로, 그런 숙명을 지닌 것으로 알고 이 무명(無名)의 ‘한국의 바울 사도’를 본을 삼아 진군(進軍)할 일이다. 징기스칸은 몽골의 지도자였고, 우리의 지도자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사람', 죽었다가 살아나신 유일하신 사람으로서 현재 2012세(歲)가 되시는 영원한 청춘이시요 가인(佳人, 모든 여성을 상징하시는)이시고 호걸(豪傑, 모든 남성을 상징하시는)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니 피조물로서의 최고의 남성미와 여성미를 두루 겸비하심이야 불문가지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무명(無名)’으로 자처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뭉쳐진 군대이기에 그렇다. 사사로운 것은 일절 배격함이요, 개인적인 모든 이해관계 혹은 영달은 초연, 초월함이다. "하늘이 열리는데 보니 보라! 백마를 탄 이가 있어 그 이름은 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이니 그가 공의(公義)로써 심판하고 싸운다.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들을 쓴 것이 있는데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른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칼[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들을 철장(鐵杖)으로 다스리며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다"[계 19:11-16]. 한국 교회가 바로 이 군대라는 말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교회든 바로 이러한 하나님 군대의 모습이다.

"하늘에 있는 군대"는 천군천사들이다.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들도 이러한 대열을 이루자는 것이고 앞 다투어 그 선두에 서자는 뜻이다. 우리 한국 교회도 당연히 그 중 하나다. 우리 모두의 이름은,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고, 개개인의 이름은 없다. 한국의 바울 사도(使徒), 그 79세의 무명인(無名人)을 따라 무명인이 될 따름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일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뜻이 현재 우리가 고난 받음에 있는 것은 올바르게 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모두가 머리를 중심으로 한 몸이 되어 사는 데에 있다. 몸의 단 한 지체라도 고통을 당하면 전체가 그 고통을 [당하면서] 느끼고, 영광을 입으면 모두가 다 함께 나누어 그 영광을 골고루 누림이다[고전 12:26].

그러므로 이 세상이 고해(苦海)라고 하듯이 한 사람이라도 고난 중에 있으면, 고난 중에 있지 않은 나머지가 절대 다수의 일억 명이라 하더라도 그 일억이 똑같이 그 한 사람 위해 고난을 나누어짐이 올바른[義] 것인데 바로 이를 뜻함이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머리를 모시고 한 몸을 이룬 경우에 한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현재 그런 한 몸을 이룬 체제라는 뜻은 아니니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로 하나님[그리스도]을 위해 산다는 것은, 몸의 모든 지체가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듯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모시고 그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에 바로 이런 의미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이상적인 삶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밖에는 없으므로, 이 외에 우리가 자랑하고 선전하고 세상에 알릴 주제가 없다. 그리스도 친히 이제는 영원하신 마지막 아담이 되어 계심이다.

따라서 ‘21바울 형제’의 북한교회를 본보기 또는 모범을 삼아 이를 또한 우리의 휘장(徽章)으로 삼고 침투력, 결속력 그리고 기동성(機動性)을 최대한으로 살려 복음에 의한 세계 정복[특별히 서방(西方, 곧 아시아·아프리까) 공략]의 장도(壯途)에 오를 일이다. 1907년 한국 부흥의 산실(産室)이 된 주한 선교사들의 초교파[장·감] 합동 기도회의 120일[4개월 여] 하루 4,5시간 기도 강행군(强行軍)을 기본 전략전술로 하여 죠지 뮬러, 헛슨 테일러, 찰즈 피니, "시셩모(席勝魔)" 석자직(席子直)의 각종 기치(旗幟)들을 높이 휘날리며 진군(進軍)할 일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증거는 단순히 자기 구원 얻은 사실에만 안주(安住)하여 그 안도감 속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니, ‘구원’은 바로 ‘그리스도를 중심한 '한 몸' 체제에 편입된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to give Himself]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이라고 명확히 우리 믿음에 대해 또는 구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 앞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으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19] 하였으니, 이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즉 복종하여 무슨 선이든지 행함으로써 구원 받으려는 일체의 것’에 대해 죽어 다시 말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고후 5:14]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고 힘쓰던 삶’이 종식되고,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180도 전환된 것을 말함이다.

둘이 하나됨의 새 구조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다시 출생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행함으로써 즉 복종하여 무슨 선이든지 행하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행함으로 즉 복종함으로 무슨 선이든지 행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일체의 것’을 말함이다.

똑같이 ‘율법을 행함으로 즉 복종하여 선을 행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것’은 동일하나, 전자는 ‘나 자신의 구원’이 목적이고 후자는 나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4:34] 목적이니 그 차이는 현격하다. 그래서 전자에 속한 것은 "선을 행함"이라고 대체적으로 이름 붙여주지도 않는 것이 성경이다. 방향 전환과 동기(動機) 부여에서 이 둘은 가히 하늘과 땅 차이다.

힘씀과 애씀, 율법을 행함[하나님의 계명 지킴-고전 7:19] 등의 순종의 의미와 가치는 똑같은 것이다. 똑같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애초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똑같지 않다면 순종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 곧 율법[그 내용의 핵심이 오직 ‘사랑’에 있음이다-마 22:36-40/요 13:34]도 무시하고 "선을 행하지"[롬 2:7,10/요 5:29]도 말고, 대신 "악을 행하라"[:8,9]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악이요 악이 아니라면 반드시 선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요 우주 질서다[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 중간 지대는 없는 흑백 양자 구도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악을 행하여 이 세상과 같은 엉망진창의 삶을 살라는 말이 된다. 강제로 선을 행하게 할 바에야 처음부터 아담을 그렇게 하심으로써 죽지 않게 하시고 영물 중 악령들도 강제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면 되었을 일이다. 강제하고 간섭하여 선을 행하게 하실 바에야 아예 아무 자유도 없는 저 자연계의 동식물처럼 되어 인간 로봇으로 살게 하시면 될 일이다.

아예 인간이란 것을 만드실 필요도 없으니 그런 기계적 생명체야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로써 충분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두가 오늘날 구원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제, 간섭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오해할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는데도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참으로 희한하게 착각하고 있으니 이 ‘희한함’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됨을 앞에서 지적했다.

걷어차 버리라고 하니까 발길질을 한답시고 그 통에 신발까지 날려 보내어 물 속에다 빠뜨리는 격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니까 율법 순종 자체가 무슨 불가능한 것인 양 또는 불필요한 것인 양으로 여기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착란 현상을 보이는 것이 오늘날 전반적인 이른바 기독교의 실상이다.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의 모세 율법을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까 사람 사는 기본 도리로서의 하나님의 율법까지 무용지물로 여기는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인생 구원을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생하는 것으로 창조하시지 이런 죽음의 고통 속에 지내도록 처음부터 만드실 리 없다. 범죄를 해서 이런 결과가 된 것이다[롬 5:12]. 범죄는 불법[lawlessness] 즉 범법(犯法, the transgression of the law) 행위다[요일 3:4]. 즉 법이 있는데도 그 법을 어기는 것이고 법대로 살지 않음이다. 무슨 법이냐, 물론 사람 사는 법이요 그 도리다. 그냥 살면 되는 것이지 무슨 법이 또 있어야 하는 것이냐 하겠지만, 사랑의 법, 하나되는 법이니 이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몰아넣었듯이 가인이 아밸을 죽였듯이 비극적인 결말을 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자연계가 엄정한 자연법칙대로 운영되어 돌아가듯이 사람 사는 것도 그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생명의 법을 첫 사람 아담이 지키지 않음으로써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따르고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벗어났으니 죽음이 온 것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측면에서 보면 창조를 망친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망친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타율[강제, 간섭, 기계적인 것]이 아닌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살도록] 해 놓으시니 엉뚱하게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와 같이 스스로를 망친 것이다. 그러니 원(怨望)도 한(遺恨)도 있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가 저질러놓은 결말이다. 그러므로 첫째, 사람 사는 삶의 법칙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 둘째는 그러면 어떻게 구원되느냐 즉 애초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과 같이 애초의 그 영생하는 존재로 회복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법은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간처럼 자율성을 지녔든 자연계의 생물들처럼 타율적인 것이든 모두 이 기본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삶의 도리의 기본은 둘이면서 하나를 이룸이니 곧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피조물[자율성을 지닌]은 스스로 이 한 몸을 이룬 상태에서 각 지체(肢體)로서의 역할을 함에 있다. 이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이 철칙이다.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또는 몸의 각 지체]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 자기를 위하지 않고 상대[몸에게는 머리, 머리에게는 몸]를 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으로서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범죄는 이렇게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스스로 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는 자세를 가리킴이다. 무릇 인간의 모든 욕심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孕胎, 姙娠)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

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구원되느냐?"이다. 인과(因果) 관계에서, 죽음의 결과를 내어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은즉 이 죽음의 결과를 낸 원인 즉 범죄 행위 다시 말해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으로 다시 돌아와야 돌려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행 17:30]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행실을 잘못 했기 때문에 즉 사는 법칙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죽음의 결과를 빚었으니 이는 당연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만 않는다면 영생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자기 부인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 자기중심을 회개하라 명령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자기 부인이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첫째 무릇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는 것을 앞에서 우리는 확인했다. 내 스스로 나를 구원하려 하면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래서 구원을 목적으로 자기 부인을 해서는 안된다. 구원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산 자가 되고 나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구원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까닭에 삶의 법질서를 이제는 당당히 지켜 나가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목적하는 것과는 자기 부인은 전혀 상관이 없다.

둘째는 첫 사람의 범죄로 인해 인간이 이제는 모두가 예외 없이 죽은 자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영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니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것이든 성공하지 못하는 헛수고, 헛일이기에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미 거두어 들인 결과'이므로, 생명의 법칙이 항구적인 것인 이상, 이 죽음의 결과 역시 항구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법질서가 확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내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로서 장차 산 자가 되어 영생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일단 죽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모든 인간이 죽은 자이므로 죽음으로써 일단 종결되어져야 한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니 곧 나와 함께 죽으심이다. 그렇게 죽으신 다음의 순서로서 다시 살아나심이니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내가 비로소 산 자가 되기 위함이다. 이런 순서와 단계를 밟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공리공론(空理空論)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 종교의 교리가 전혀 진리에 근거하지 않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존재 법칙으로서의 삼위일체 원리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설명하는 것처럼 상호 보완에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상호 보완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니 곧 자기 부인으로서 한 몸을 이룬 쌍방은[상대를 이루어 대칭이 되어 있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구원이 필요하다면 내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나의 상대가 나의 구원을 이루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구원이든 그 무엇이든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설명한 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움직여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나의 몫을 다한다는 뜻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함에서 차질이 없도록 한다는 뜻이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함에서 각자 자기 몫을 다해야지 누가 그것을 대신해 주는 법은 없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갑은 갑이고 을은 을인데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그렇게 서로를 위함으로써 하나를 결성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마땅히 할 몫 즉 그리스도를 위함에서 결단코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 외에 달리 의미가 없는 것이 나의 "구원을 이룸"이다.

내가 이렇게 나의 할 몫을 다하지 않을 때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은 와해, 붕괴됨이니 나의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을 말할진대 결과론적으로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내 스스로 구원을 유지하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는 것이니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루라 함이 논리적이지 허튼 말일 수가 없다. 이는 이 법의 근본이시요 제정자이신 하나님 자신께서도 이 법을 따라서 모든 것을 하시고 이 법을 벗어나서는 일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는 것은 나[한 몸의 지체로서의 위치]의 상대이신 하나님[머리로서의 위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물론 하나님을 위하는 것[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 피조물이 하는 몫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그 피조물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또는 "나 자신을 구원한다"[딤전 4:16]는 것은 이상 설명에서와 같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다하는 필수적인 것으로서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말함이다.

나를 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써 이미 나를 구원해 주신 다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이 둘의 하나 관계를 유지 존속시키는 내 편에서의 몫을 다함이다. 이를 가리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는데, 따라서 이는 '나 자신의 구원을 목표로 하여 이를 이룬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인 것이니, 표현은 같아도 내용은 아주 다른 것이다. 왜냐면 지금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고후 5:15]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하느냐 하면, "구원"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고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등 어쨌든 생명과 관계된 일로서 생명은 생명의 원리대로 하는 것이며 이 생명의 법칙은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있는데, 따라서 이 명령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삶으로써[:15]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끝까지 유지 보전하고 첫 사람 아담처럼 자기 생명을 스스로 상실하는 불상사를 내지 말라는 경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즉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했고 그러므로 하나님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대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우리 각자와 하나 되심으로써] 죽으시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나도 함께 살아남을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됨으로써 나는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로서는 아무 한 일이 없이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기만 하면 구원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구원되어 있는 상태에서 즉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자로서[애초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과 같은] 방금 말한 것처럼 값없이 얻은[선물로 받은-엡 2:8] 생명[영원한]인데, 이를 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율성이다. 내가 생명[영생]을 선물[그리스도 그래서 성령의 선물]로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선물이다. 이렇게 선물로서 생명을 얻어 누리고 있는 것을 "타율'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선물로서 이미 한번 얻은 것을 자율적으로 내 스스로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요 '나 자신을 구원함'이다. 아담은 이를 지키지 못했었다. 내 생명 내 스스로 지킨다고 해서 자기중심으로 또 오해하지 말 것은, 무릇 생명과 관계된 일은 생명의 법칙대로 하는 것이요 생명의 법칙은 자기 부인에 있음이다. 아담은 이 생명의 법칙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반대인 자기중심으로 나간 것이다.

우리가 이를 거울로 삼아 아담과 같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각자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라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라"는 것도 같은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결심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고후 5:15] 하는 이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 해당되는 것이요, 따라서 "회개"가 가장 먼저 오는 선행(先行)요건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이 먼저 오는 순서가 아니라 삶의 법대로 살지 않은 악[또는 악행]을 버리는 회개가 있어야 비로소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는 구원"[행 16:31]인 것이다. 믿는 것 자체가 이 회개를 불가결하게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主) 예수 그리스도"[행 16:31]다. 다시 말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는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 곧 나의 소유주(所有主)로서 섬기고 복종하겠다는 확고한 서약[약속]이 따름이다.

이미 이와 같이 약속을 하고 들어가는 생명이므로 이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는 그에 대한 응분의 결과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니, 곧 아담처럼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다가 도리어 죽음에 이르는 결말이 됨과 같은 동일한 것을 각오함이다. 영물들이 범죄함으로써 멸망에 들어가는 운명에 처해짐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한 몸이 유지되는데 이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 그 결과야 뻔한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모든 인생들이 몸을 구성하는 것일진대[인생들은 다 똑같은 수준이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머리가 되어 계시는 사실은 처음부터 이미 확인되어 오는 터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감추어질 수가 없다. 칸트가 소위 "요청적 유신론"을 말한 것도 이에 기인한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머리와 몸의 관계'가 아니면, 3운법칙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강제력에 의한 통제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 상호간의 살육이 자행되는 대로 방치될 경우 인류 공멸(共滅)은 이미 오래 전에 닥쳤을 것이나 지금까지 수 천년 세월이 지나오도록 인간 사회에 그나마도 질서가 엄연히 존재해 왔으니 이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통제를 증명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것은 이런 '통제'를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창조자로서의 '머리 역할'을 가리킨 것이나, 어쨌든 이는 무시할 수 없는 객관적 현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 의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터에 그런 자유 의지를 구사하면서도 그리고 인간의 욕심도 한이 없는데도 질서 유지가 되고 지금까지 인류 사회가 지탱해 온 것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롬 13:1,2] 하나님의 강권력 발동이기는 하지만, 국가 권력도 인간 개개인의 사욕(私慾)의 집단화일 뿐으로 모든 인간사, 세상사를 우연으로만 돌리면 벌써 오래 전에 인간 세상은 파탄이 났을 것이나 무수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해서 질서가 잡혀간다는 것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그런 통제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가룟 유다에서 보듯이 이미 일을 저지른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들 무슨 소용인가. 사람 생겨나자마자 최초의 살인극을 벌인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아벨이 자기에게 아무런 해도 악도 저지르지 않았었다. 단지 아우가 형인 자기보다 낫다는 판단에 울분을 삭이지 못해 그렇게 증오하기 시작한 것이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가 그렇게 미워한다고[아벨은 가인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가정해보라.

원수지지 않고 배길 것이며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가인 아벨을 처치하듯이 했을 것이 아닌가. 국가 권력이란 것이 생기기도 전에 그런 살상극(殺傷劇)이 벌어졌고 통제 불능이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가룟 유다의 양심을 말했다. 성경이 가인의 살인 행위를 말하면서도 가인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죄가 너를 넘보고 있으니 죄를 다스리라고만 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가인은 그럴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러놓고도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그것만 염려되어 하나님께 호소했을 정도다. 철저히 자기중심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모든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란 것을 장치해 주시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강제력이 없으니 인간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자유 의지가 먼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설정된 것이 당연히 더 세다. 양심으로써의 제재는 어느 정도이지 절대적인 통제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가인 이후 3운법칙을 정하셨을까. 아니면 인간 세계에 악만이 창궐하는 것을 보시고 노아 홍수 이후부터 그렇게 통제하시기 시작했을까. 그러나 우리는 노아 자신부터 3운법칙에 의해 지배 받아 왔음을 그의 SN 생애에 의해 확인하고 있는 터이다. 3운법칙으로 분석되어 있는 인물 중에 노아가 최고(最古)다. 그러므로 가인 이후부터 양심과 더불어 3운법칙의 지배 아래 있게 하셨을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에 대해 애매 모호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하였고,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확실"이 아님]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다"[:14] 하였으니, 같은 뜻이다. 한번 믿으면 된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 이 대목에서도 "끝까지 견고하게 잡으면"이라는 말이 연달아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것은 언제나 "오늘"이다.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으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7,8] 하신 바와 같다. 모세의 이스라엘 광야 교회의 "40년 동안"[:9]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마음이 미혹될 수 있고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10]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항상 시험하고 있다는 그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경의 경고는 단호하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성경에 이르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다"[:12-15] 함과 같다.

그리고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3-28] 한 것이다.

다시 경고는 계속된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민 14:29/고전10:5).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셔서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히 3:16-19].

여기서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처음에는 그들 모두[멸망 당한 이들]가 믿었다'는 데에 있다. 믿었으나 범죄함으로써 즉 복종치 않음으로써 자초한 화요 재앙이라는 사실이다. 결론은 믿었으나 끝까지 믿지 않음 즉 "끝까지 견고히 잡지"[:6,14] 않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하기를, "저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라 했고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4:2] 했으니, "끝까지 견고히 잡지 않음"을 "믿지 않은 것"으로 성경은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은 아무리 믿었어도 중도에 그 믿음을 버렸으니 처음 믿은 의미가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1]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두렵고 떨 정도의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안일하게 아무 뜻도 모르면서 단순히 구원이 믿음으로 얻는다, 선물이다, 은혜다, 거저 얻고 값 없이 받는 것이다 등의 대목에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많은 사람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아담이 넘어간 것처럼 여전히 속아넘어가 자멸에 이르고 있다.

구원 받아 생명[영생]을 받았으면 당연히 그렇게 산 자로서의 활동에 돌입할 일이지, 왜 그 ‘생명’만 붙들고 눌러 앉아 노닥거릴 뿐 일어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치 죽어 있는 자가 말만 ‘살아 있다’는 간판을 내걸고 여전히 죽은 자의 모습과 시늉 그대로임과 같은 것이다. 죽은 자는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생명에 관한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죽음의 뒤척임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 살게 된 자는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 이와 같이 죽은 자의 무활동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자기의 구원 받은 것 하나만 물고 늘어져 이 세상 끝까지 지내겠다는 심리 상태다.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따라서 영생도 아니고 구원과는 백촌(百寸)도 넘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이 없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도 없다. 여전히 죽은 자 그대로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중심 그대로다. 

다시 말해 "죽지"[고후 5:14] 않았기 때문에, ‘다시 출생함으로 인한 산 자’가 되어 있지도 않다. 구원 얻는 믿음은 "자기가 죽은"[:14] 사실을 믿는 데에 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14] 것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나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백번 되뇌어보아야 무의미, 무효과다. 과거 한 때 믿음이 좋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말씀도 전달하여 가르치고 능력도 행하고 귀신의 권세도 깨뜨렸지만 그런 '과거'가 '현재'가 되어 있지 못하면 즉 자기 부인이 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이면 멸망이다[마 7:21-27].

이런 이들이 "많을 것"[:22]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들은 과거의 그런 한 때의 증거[믿었다는]만을 의지하고 당당히 심판대에까지 임하나 청천벽력과 같은 심판의 선고를 듣게 되어 있다[25:45]. 지금도 그와 같은 자기 "믿음"의 증거인 양 교회에 부지런히 나가고 교회 일에 열심하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바로 그러하다. 믿음 또는 구원을 처음부터 잘못 인식한 것이다. 믿음은 한 때 믿음만으로 전부가 아니고, 과거 믿었다는 것으로써 '구원 받은 것으로 영원히 인(印) 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 있고 삶 자체에 있으니 이 모두 시종일관성을 말함이고 변함없는 신념을 말하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 자기 부인의 삶이 아니고 또한 이를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한 자로 분류되어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否認)"은 인지(認知)의 대칭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소속(所屬)’과 ‘소유(所有)’의 대칭 개념이다. 바로 이 소속, 소유가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이신 하나님께 소속되지 않으니 생명이 아닌 죽음이다.

하나님의 소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안에 죽음이 있을 리 없다. 생명만이 하나님의 소유이지 죽음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다. 물론 만유의 제1원인으로서 죽음이든 생명이든 악인이든 의인이든 그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나,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요 1:4]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과거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는 권위를 나타냈고 기타 능력을 행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선지자로 있었어도 현재는 주님의 소유가 아니고 주님께 속하지 않으므로[소유가 되고 거기 소속된 자로서 그 소유주 또는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즉 불복종하는 자는 없는 법이니,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하신 것-마 7:21]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는 부인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고, 시인해야 주님도 우리를 시인하신다는 말씀이 그 뜻이다[딤후 2:12/마 10:32,33/눅 12:8,9]. 내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이 나의 주인, 소유주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니 다시 말해 더 이상 내가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우리의 구원은 이와 같이 나와 주님과의 소유 관계에 있어 주님은 나의 것[따라서 그 생명이 나의 것이므로 내가 영생할 수 있어] 나는 주님의 것[주님께서 그 피로 나를 사신[買入, 收買] 것이 나의 구원이므로]이 되어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알지 못한다 하심은 이런 소유 관계를 가리키심이다. 조물주이신데 어찌 그 만드신 피조물을 모르시랴. 이는 거짓말을 하심도 아니고 농(弄)으로 말씀하심은 더더욱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를 밝히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내게 이렇다 할 지식은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를 하나님께서는 아신다"-고전 8:3] 함이 바로 그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서 나를 인정하심 즉 내가 생명 가운데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그래서 소속되는 근거는 물론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구원은 그러므로 ‘생명의 시작’과 동시에 ‘복종의 시작’을 함께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향하시는 움직임이요 후자는 내가 그리스도께 향하는 움직임이니, 이 양면성이라는 것은 화폐의 양면과 같이 둘 다 겸비되어야 효용 가치가 있다. 즉 주고 받음의 교류이니 곧 사랑이다. 일방적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것은 사랑에는 있을 수 없는 강제, 강압이 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이기주의자들의 자기 변명, 변호의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다. 반드시 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종으로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나의 소유로 삼을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소유하셔도 강제로 나의 동의 없이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내가 나 자신을 드림으로써만 나를 소유하시게 된다.

나 자신을 주님께 종으로 드림이므로 이는 주인께 대한 절대 복종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를 소유하셔야 나도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생명이 있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성령이 임하심은 성령을 내가 소유함인데 그보다 먼저 회개함으로써 죄 용서 받아 깨끗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성령께 오심이니, 즉 회개로써 나 자신을 종으로 드림[절대 복종하겠다는 약속]이 선행(先行)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다.

생명은 사랑이 그 핵심이고 사랑은 자기 부인이 그 요체이므로, 복종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율법 행위[사랑 없이 선을 행한다든가, 계명에 복종하는 등]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된다. 사람이 율법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 함은, 이 사랑이 없이 모든 것을 행한다는 말이요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이 목표로서 거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세상 종교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근본적 차이는, 선행을 함으로써 또는 종교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의 구원을 목적할 때 그것이 종교이고, 이미 자기는 구원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받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에서 그 사랑의 상대만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힘쓰고 애써 그 뜻을 행하려 하고 기쁘시게 해 드리려 하여 선행을 하고 계명을 지키고 복종하는 등의 일체의 것을 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즉 나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인 것이다.

둘은 그 의미로 볼 때 순서가 서로 완전히 뒤바뀌어져 있다. 때문에 확연히 구별이 된다. 복종 없이 생명만 있을 리도 없거니와, 처음 믿을 때 회개함으로써 복종을 약속하고 일정 부분 복종을 하다가 그 순종을 끊고 중단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어 죽은 것이요 헛것이 된다[약 2:20,26].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므로 역시 구원과 무관하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 내 계명을 지키게 된다"[요 14:21,23]는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21,23]이라는 약속이 적용됨이니 곧 성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해 모심이 가능하게 되고 이렇게 되어야 구원이다. 성령을 받지 않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하면 구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고로 이 모든 일 즉 세례 받아 죄 용서되고 성령 받아 새 사람이 되고 "다시 출생함"[요 3:3]이 모두 회개를 전제로 하는 바탕 위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행 2:38].

회개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확증된[롬 5: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반응이니, 하나님의 뜻에 영구적으로 복종하여 살겠다는 충성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이상 그 모든 계명과 율법이 모두 나를 사랑하시어 분부하신 것임을 아는데 어찌하여 그 뜻을 불복하고 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불복종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는 증거다. 불복종은 나를 위하시는 일체의 것을 거부하고 부인함이니 이는 곧 자살행위가 아닌가.

고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측면과 함께,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시는 모든 뜻[계명, 율법, 말씀 등]이므로 내가 기쁨으로 능동적으로 이를 받들고 따르고 순종함에 내 스스로 앞장 선다는 적극적인 측면을 항상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 "나를 위하시는 모든 명령과 계명인 줄 알고[의식하고] 행하는 것이니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냐,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한다면,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삶의 법칙 즉 한 몸 구조 안에서의 "자기 부인"의 깊은 뜻[奧義]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이 머리를 위하는 것은 머리가 몸을 위한다는 믿음이 있어 머리를 신뢰하기 때문이니, 만일 머리가 몸을 위한다는 인식이 없고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결코 머리를 위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생명과 사랑의 법칙의 요결(要訣)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가리켜 처음부터 설명하기를, 자아(自我) 부정(否定)이 아니라 자기의 확대, 확장, 확충이라는 최고도의 삶의 지혜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자아 부정과는 오히려 반대의 의미이다.

따라서 앞서의 설명대로 소속, 소유를 말함이니, 다시 말해 결과론적으로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지 방법론에서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차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위하는 것이요,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 대신 나는 나의 상대를 위함이다.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모든 명령과 계명이 다 나를 위하는 것인 줄 알고 내가 지키더라도, 나로서는 나를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그런 명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인즉 처음부터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과는 같을 수가 없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할 때에는 나의 상대이신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실 수가 없는 것이 갑은 을을, 을은 갑을 동시에 위하는 생명의 법칙이므로, 그가 명령하시는 모든 것 역시 나를 위하는 것일 수가 없게 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신다 하는 것이다[마 10:33/딤후 2:12]. 그러므로 사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스스로 홀로 사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 자기 홀로 존재한다면 응당 자기 자신을 위해 살 것이지만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반드시 한 몸 구조로 서로를 위함으로써 살아야 분쟁, 다툼, 알력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한 몸이 되어야 다시 말해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되어 있어야 삶의 최고도의 행복이 이루어짐이다. 삼위일체의 법칙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여럿이 있고 그리고 피차간 상반되는 성질을 가졌지만 하나로서 자연스럽게 뭉칠 수 있음이다.

그런즉 거의 모든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날과 달과 절기 등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등의 그림자(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한)로서의 의미로 나타난 모세 율법에서는 당연히 벗어났지만], 마땅히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아래 있음이니, "새 생명"[롬 5:8]과 더불어 계명도 당연히 "새 계명"[요 13:34]을 지키게 되어 있는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어 나를 지배하고 관리하신다는 뜻이니 그래서 내가 나의 주인의 소유이고 그 소속[생명에 속한]이고 그래서 복종하는 것이다. 이는 항상 강조하는 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다시 말해 강제가 아닌 것이다. 나의 주인께서 친히 먼저 본을 보여 주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시고 내게 선물로 주심으로써 나를 섬기는 자로 영원히 위치해 계심[눅 22:27/마 20:28]을 내가 보고 확인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나의 주인님께 바치지 않고는 일방적으로 나를 소유하시지 않으며 나의 주인님이 되어 주시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옳다. 왜냐면 나를 소유하심으로써 내가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인데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주님께 드려 나를 소유하시도록 하지 않고는 나를 절대로 소유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린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산다는 뜻이요 그러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고후 5:15]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은 한번 되어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왜냐면 어느 때든지 나의 마음이 변하여 혹은 "조심하지"[고전 10:12]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같이 나 자신을 위해 살 수도 있는 것이어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도 나중에 나 스스로 회수해 오는 것과 같이 되고 내가 여전히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 되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치는 것을 말함이니,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을 말하는 것으로서, 또 그렇게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일단 드려놓고도 나중에 얼마든지 빼내올 수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는 나의 이러한 믿음을 계속 지켜야 하는 것이고 때문에 "나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등]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놓으셨으므로, 나는 단지 아무 한 일도 없고 아무런 공력이나 공덕도 없이 단지 은혜로 선물로서 받기만 하는 되는 즉 믿기만 하는 되는 것이었으니, 이 믿는다는 의미가 바로 나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리는 의미이므로 즉 사랑하여 순종하겠다는 뜻으로 회개함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라도 '나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격이다.

왜냐면 아무리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나를 위해 이루어져 있어도[즉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내게 주셨어도]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지[이것이 '회개'와 '믿음'의 의미다]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소유하시지 않고 따라서 나는 구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나를 그 피 값으로 사들이시는 것을 말함인데 내 스스로 나를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으면 즉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시지 않으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나 자신 나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없고 확고한 결의가 되어 있지 않아 나를 드리지 않고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홀로 움직이시는 것으로 끝나는 구원이 아니라 내 편에서 내 스스로 그와 같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이니 양편에서 동시에 마음이 통하고 뜻이 맞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기에 그러하다. 아무리 한 쪽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더라도 그 상대가 무덤덤하게 나온다면 그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쪽 역시 결국 철회하고 다른 이에게로 떠나버릴 수밖에 없음이다.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성경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사랑이 관건임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일방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결과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 그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했으니 무엇으로써 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안다는 뜻이다.

즉 자기 부인으로 나타내신 사랑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앞에서 누차 설명한 대로 그 상대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의 상대가 있다는 것은 사랑이 결코 일방적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를 부인할 때는 그 부인된 자기로서의 공백을 상대가 대신 메워[to make up, to fill up, to supply]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자기를 부인하신 것은 우리가 그 부인된 빈 자리를 우리 자신으로써 메워 드리도록 하심이다. 즉 우리도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요한은 사랑의 실체 곧 그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다. 갑도 을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따라서 갑의 빈 자리에 을이 들어 있고 을의 빈 자리에 갑이 대신 들어 있는 것이 '둘의 하나됨'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둘의 불가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둘은 나눌래야 나눌 수가 없다. 혼연 일체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남녀의 한 몸되는 이치도 그렇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 되어 있어 그래서 둘은 한 몸이요 불가분이다[고전 7:4].

그것은 육체로서의 하나됨이고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될[고전 6:17] 때는 삶 자체가 그러하다. 즉 내 삶은 다시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살지 않는다[고후 5:15/롬 14:7-9].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러하심을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확증하신 바다. 이 본을 따라 나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믿음일 수도 없고 구원일 수가 없음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불교에서처럼 그냥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한 마디로 얼버무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역시 한 마디로 맹목(盲目)이 된다. 왜냐면 그렇게 된 다음의 후속 조처가 전혀 없는 까닭이다. 밝히지 않으므로 모르고 모르니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유의 법칙인 인과론에서, 원인만 있고 결과가 없으니, 결과 없는 원인이 없듯이, 결과가 없다는 것은 원인 역시 없다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음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부터의 철저한 자기 부인을 가르쳐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므로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일향(一向) 변함없는 사람 삶의 구체적인 방법 그대로이어서 천국에서의 삶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비록 현재에서도 한눈으로 환히 꿰뚫어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소위 "쉬운 불교"라고 하여 부처의 "원력(願力)" 덕에 극락왕생(極樂往生)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를 닮아 있는 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소위 "율법 행위가 없어도 믿기만 하고 은혜로 선물로서만 받으면 되는 구원"이라는 교리다. 간단히 말해 공짜 개념을 구원에다 적용시킨 것이라 영생까지도 거저 먹기로 달려들도록 만든 희한한 종교적 발상이다. 이들의 특징은 성경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자기 부인"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린 데에 있다. 자기 부인을 마땅히 겸하여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에서 일면만을 고집하므로 화폐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니 즉 그들이 목적하는 바 구원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가령 그렇게 해서 모두 구원 받은 다음의 천국 생활은 어떤 것일까 물으면, 그 때는 그 때에 가서 모두 선한 행동, 의로운 삶으로 변하여 평화와 사랑 가운데 살아진다는 설명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극락에서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모두가 선량한 인생들로 변화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하면야 무슨 말인들 못하랴.

이 세상에서 어떠하면 장차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도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보증이 되고 그 증거가 된다. 현재의 삶과 영생의 차이는 전자는 짧고 종결이 있는 반면 후자는 종말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영원성에 반드시 곁들이어야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그것이 현세에는 실시되지 않고 영원한 후세에서는 이상적으로 구현된다는 그 차이다. 다시 말해 한시적인 이 세상과 영원한 오는 세상의 대칭성은 전생(前生)과 후생(後生)의 구별로서, 대칭을 이룬다는 것은 현세는 원인이 되고 내세는 그 결과가 됨이다.

어떤 이는 불교 용어를 쓴다고 빈정대거나 불교의 우수성을 암암리에 인정하는 것이라고 으스댈지 모르나 문화적 차이다. 각종 언어는 이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고는 존립될 수 없으니 우리 역사가 불교 문화를 토대로 대체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이상, 현지(現地) 언어라는 것은 그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의사 전달만 충분히 되면 그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굳이 회피하거나 우회할 필요는 없다. 단 여기서 말하는 전생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 이전 세상은 없었고 오직 오는 세상만 있음을 밝히는 것이니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에 의해 확정되는 과학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원인이 되고 오는 세상이 그 결과가 되는 대칭 개념이 아니라면 이 세상이 존립해 있을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의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람 사는 도리를 지켜 나가면 오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됨이고 그렇지 못하면 배제되고 도태됨이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 친히 밝히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말로만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든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는 반드시 제외된다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마 7:21].

하나님께서 사랑이라고 할 때는 그 "사랑"은 이상 설명과 같이 사랑의 법칙을 말함이다. 사랑에 무슨 법칙이 있느냐 하겠지만 삶의 핵심이 서로 사랑하는 데에 있으므로 삶의 법칙 혹은 인생 사는 도리를 말함이다. 즉 둘이 하나됨으로서의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니, 남녀 '한 몸이 됨'의 예를 들더라도, 남자는 다시는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고 여자 역시 그러함은 엄연한 법인 것이다. 왜냐면 남자나 여자나 이 하나됨을 무시하고 다른 여자 또는 남자를 보면 간음죄가 성립됨이다. 죽음으로 갈라져야 그 법에서 해방되어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가더라도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롬 7:2,3].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이 사랑의 법, 삶의 법칙을 성실히 지키는 자에게 몸의 구속이 뒤따르게 되고 따라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벧후 1:11] 것이다. 자기 부인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절대 다수의 개신교나 불교는 그런 것이 없다. 단지 주먹구구 식으로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면 행복하리라"는 애매 모호한 주장으로만 일관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으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감"[마 7:21]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본을 보이신 대로의 자기 부인이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를 위한 삶이다[고후 5:15,롬 14:7-9].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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