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6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폴란드 등 동구제국과 니카라과 등] 왜 공산국이 되었는가?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
하나님을 두려워함
오늘날 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그런 "배도"의 한 증거가 되어 있다. 우리가 과연 올바른 위치에 있는지 없는지는 성경을 통해서만 살펴볼 수 있다. 다음 몇몇 대목을 통해 우리의 실상을 점검해볼 수 있다. 신약성경을 통해 대강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명조;">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행 5:5].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11].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ily:한양견명조;">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롬 11:20-22].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10] [고후 5:11]. ";mso-hansi-font-family:한양견명조;">그런즉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the fear of God]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니[to fear]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다"[히 4:1].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아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reverence]과 두려움[godly fear/awe]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다"[히 12:28].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밷전 2:17].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꾼들이나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을 대해서도 그 태도가 진지했으니 왜냐면 평소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하여 그와 같은 합당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다"[고후 7:15] 함과 같다. 주인을 섬기는 종의 마땅한 자세이니 "종들이여,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함과 같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9:31].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in fear] 지내라"[벧전 1:17].
"차별하시지 않는다"[no partiality/no favoritism]는 것은 안면 보아 주기 없이 똑같이 균등하게 그 행한 대로만 철저히 일절 에누리 없이 보응하신다는 뜻이다. 즉 불의를 행하면 그 불의를 행한 그대로 되갚으신다는 것이니 모세 율법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말이 연상될 정도다. 다시 말해 남에게 그 어떤 해나 악을 가했던지 그대로 그 해나 악이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회개하여 그런 소행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경우 그래서 계속하여 반복해서 같은 소행을 할 경우 그렇다는 말임은 물론이다.
상습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그 자신은 입으로는 회개한다고 해도 그것은 회개가 아니므로 그런 처벌을 받게 됨은 당연하다. 상습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부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 일관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없으므로[고후 5;15]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결과다. 그리고 그렇게 불의를 행한 대로 즉 남에게 해와 악을 입힌 그대로 내가 동일한 해와 악을 입을 때면 나는 분명 영생의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왜냐면 생명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는 천국에서는 일절 그런 해와 악이 없고 그런 것을 받는 일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있다고 했으니 그 곳은 생명의 나라가 아님이 분명하다. 생명의 나라가 아니라면 거기는 어디인가. "영원한 형벌"[마 25:46]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바로 그 행위 때문에[:45] 거기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회개하지 않았을 경우 그렇다. 회개하여 일절 그런 행동을 단절하면 그 이상 그 불의한 행위가 추궁되지 않는다.
평생 그렇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을 행하지 않는"[롬 2:8,9] 일은 없다. 어쩌다 우연한 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성령의 책망을 받는[듣는]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회개하지 않음은 '영원토록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영원토록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으로 판정된다. 이는 당연하니 그 자기중심은 그대로 있고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더 다시는 일절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말함이다. 한번 작정했으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달리 행동한다면 그는 중환자로서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회개이다[행 2:38]. 말만 가지고 회개한다고 해서 회개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의 요점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롬 14:7-9] 작정하는 것이 회개요 믿음이라는 것이다.
곧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경고하신 바 "자기 부인"이다[마 16:24/막 8:34/눅 9:23]. 인간이 지어낸 교리나 종교의 틀 속에 갇혀 있던 일체의 편견과 선입관을 버릴 일이다. 그런 것은 성경과는 상극이다. 사단의 속성이 그러하다. "죽을 것이라" 하시면 "죽지 않는다" 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 곧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이 생명의 길을 가리키는 것일진대 그는 당연히 그 반대 방향인 죽음으로 유도하는 것이 명백하므로 성경과는 항상 반대로 나간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선물로 주신 이성적 판단, 합리적인 논리, 인간 양식에 입각한 상식적인 판단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으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것이다"[요 7:17] 하심과 같다. 즉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그리스도에게 관하여 헷갈린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나님 뜻을 알면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를 알 자도 아들을 알 자도 천하에 아무도 없지만 오직 아들께서[성령으로] 계시해 주시는[마 11:27] 사람은 안다고 하심과 같다[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그러나 두드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이에게는 닫힌 문일 뿐이니 왜냐면 그렇게 두드리라 하시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약속을 하신 때문이다[눅 11:10].
그런즉 여전히 죄를 짓고 "육신" 타령이나 하며 "연약하므로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핑계를 일삼는 이는 위의 모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로 구원이 해당되지 않음을 명심할 일이다. "나 위해 대신 죽으심"의 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가르치는 성경의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수용하여 제대로 된 믿음을 통해 명실상부한 '구원 받은 자'로 다시 출생할 일이다.
19. 이회장은 천주교를 믿는 동구권이 어째서 공산국이 되었는지 의아해한 것과 같다.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 ‘동방[그리스] 정교’가 그 국교였다. 힘으로 좌우되는 세상 일이니 힘의 논리다.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삼은 제정 러시아]가 러시아 공산당에게 힘으로 밀린 것이다. 동구권의 천주교도 공산권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세상 나라들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그런 현상일 뿐이다.
이회장의 질문과 같은 것은, 이 세상의 구조에서 악령 사단이 그 신(神)이 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도 정치 세력도 이 세상의 그 무엇이든 모두 악령 사단의 수중에 있어 주물럭거려지는 것이 대체적인 결과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는 한, 기독교도 똑같이 그 장중(掌中)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왕(魔王), 마귀魔鬼), 악마 사단에게 적대 세력이 되어 있는 것은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느 무엇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교회뿐이다.
온 세계를 통틀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만한 것은, 북한 땅에서와 같이 혹독한 핍박의 대상이 되어 그 존재 여부조차도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흔적만을 겨우 남기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런 지하(地下) 또는 그와 비슷한 형태의 교회다. 겉으로는 미약하게 보이나 그런 교회가 사단에 대한 당당한 그리고 막강한 대치 세력으로 있는 것이니 왜냐면 그 머리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보란 듯이 장중하게 지어 올린 건물 속에는 그런 교회가 있기 힘들다.
그래서도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고 한다. 원래 사단은 아담 아래에 있던 자다. 모든 영물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아담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첫 사람 아담이 범죄로써 완전히 사단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아담의 원래의 지존(至尊)의 자리를 '사람'으로서 친히 회복하신 것이다.
수십 억 인구 중에 북한처럼 구원 받은 이들이 단 몇 백, 몇 천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실질적으로 사단에게는 막강한 대치 세력인 것은, 그런 이들로써 구성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만유(萬有)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교회는 교인들의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써 같은 한 몸을 이룸이니, 다시 말해 성령께서 계시는 사람이 단 몇이라도 있을 때 그들로써도 넉넉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형성되어 있음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심으로써 명백히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모였을 때는 합심 기도하는 것이 그 핵심임을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19]는 말씀으로 확인해 주셨다[행 2:42].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의 특징은 절대로 폭력으로 신앙을 강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이단이라고 처벌하지도 않고 구원 받도록 또한 절대로 강요하는 법이 없다.
단 이단 사상이 있는 이들을 알은 체하지 않는 것은[요이 1:10] 제삼자가 볼 때 같은 패거리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요, 함께 형제로 있다가 타락하여 이단이 되어 있는 경우 단교(斷交)하여 함께 식사 자리에 앉지도 않는 것은 그들은 암적 존재이므로 전염성이 있기에 격리 차단시킴이 마땅하다는 판단에서다[고전 5:9-11]. 마찬가지 이유로서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듣지 않는 경우 멀리 하는"[딛 3:10] 상책이다.
교회가 세상에서는 항상 약한 자로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는[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 그러하신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에 반발하여 성경과 반대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천주교나 이슬람교가 득세(得勢)한 것이다. 믿기를 강요하니까 교인 숫자가 많을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이슬람교를 언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성경의 유일신을 인정한다고 하고 구약의 여러 인물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선지자"라 하면서도 신약성경은 수용하지 않고 마호메트를 앞세우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전연 무관한 것으로 자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미리 이런 사실들을 예언하시면서 경고하시고 있으니 곧 "그들이 너희를 핍박하면서 생각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禮 혹은 예법, 예배)라’고 할 것이다"[요 16:2] 하신 것이다. 처음은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었다. 이후에는 천주교인들이 마리아를 받들지 않는 이들에게 그렇게 했고, 이슬람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믿는다는 "창조주"의 이름으로 그런 짓거리를 자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약하다는 것 그래서 고난의 표적이 되어 있는 것은, 죽음과 죄 가운데 갇혀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살리는 측면에서도 필수적인 것이지만[생명의 체제가 한 몸됨에 있으므로 죄인들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철저히 원리원칙대로만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의(義)로우심과도 직결되어 있으니 왜냐면 사단이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 까닭이다.
즉 사단이 이 세상에서 왕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담 자신이 사단의 말을 추종함으로써 자진해서[비록 속아서 그렇지만] 그를 따름으로 그 수하(手下) 즉 지배 아래 들어간 때문이니 이를 그대로 수용해 주심이다. 이런 것이 여기서 말하는 ‘원리원칙’이다. 즉 한번 되어진 일은 그 정당한 사유 없이는 절대로 번복할 수 없음이다. 법질서 확립에서의 요체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때문에 그리스도 친히 명백히 하시기를, "내 나라["내가 왕(王)이지마는"-요 18:37]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나 현재 내 나라는 여기에[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상 나라가 다르므로 그 다른 나라의 왕 아래에서는 약하고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 세상의 실상이 아담이 사단에게 나라를 넘겨 준[눅 4:6] 그대로 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원칙에서 어긋나게는 움직이시지 않는 하나님이 이 사실을 인정해 주시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원리원칙주의에 의한 공명정대함과 공정공평성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는 절대 불가결한 요소다.
종교는 왜 있는가. 이 세상 삶이 인간고[죽음, 고통, 불행]로 얼룩지지 않았다면 종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답도 분명하니 즉 고통, 죽음, 불행의 삶의 한을 풀어볼까 함이요 이를 탈피해보고자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세상 종교가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되지만, 사단이 이를 한사코 방해하므로 그래서 그 수단 방법의 하나로 이러한 종교를 만들어 인간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이런 종교 행위에는 반드시 곁들여[약방의 감초처럼] 양심대로 살 것 즉 선하게 사는 것을 권장한다. 양심의 존재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삶의 법질서를 본성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므로[롬 2:14,15], 악행하라고 하면서 그 대가로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는 즉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종교는 감히 사단이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 종교[불교와 같이 창조신을 부정하는]도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깔아놓으신 양심이므로 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행하는 것을 선[좋은 것]으로서 인식하는 데에는 일치하는 까닭에 감히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권장할 뿐이지 이를 강력히 요구하지는 못한다. 요구해서는 아무도 그런 종교에 심취할 자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종교는, 양심대로 이 세상에서 살지는 못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영생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결같이 둘러대는 데에는 일치하게 공통점을 드러낸다. 그래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살라고 요구하시어 회개를 명령하시는데[행 17:30], 거기에는 부합하지 않도록 해야 즉 하나님의 이 뜻을 막아야 인생들을 멸망의 죽음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과 세상 종교의 차이가 여기서 선명하게 부각된다. 성경은 모든 믿는 사람이 올바르게 살 것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고후 5:15]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명령한다기보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롬 14:7-9]. 그래서 믿으라고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회개를 명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이 동반되지 않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의 "믿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종교의 일종이라고 확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양심'이라는 '하나님 실존의 증거'를 결코 외면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하고 있으니, 창조신을 부정하는 불교는 이런 모순과 자가당착의 우스꽝스러운 자화상(自畵像)을 어찌하여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면 영생에 대한 욕구도 없었을 것이요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다면 현재의 인간 삶에 아무런 비애도 느끼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종교도 있을 까닭이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명백한데도, 사람들은 어째서 하나님께는 나올 생각은 않고 이들 세상 종교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는가 할 때, 이미 설명한 대로 천주교나 개신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종교 중 하나가 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밝혀진다. 즉 "다른 예수", "다른 복음", " 다른 영"을 따르도록 충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주교든 불교든 개신교든 자기 종교라고 하여 고집할 것이 아니라 편견이나 사심(私心)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어느 것이든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 타당성이 있는 쪽을 택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타당성도 없다는 것을 세상 앞에 명백히 증언한다. 하나님의 구원과 세상 종교와의 차이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지만, 전자는 이미 구원된 자로서 자기 부인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생활인 반면, 후자의 경우 오직 영생에만 목적을 두는 까닭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고 죽은 후에나 보자는 식이어서, 자기중심으로 일관하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함에 있다.
죄와 악령 사단에게 속박되어 사는 노예로서의 구차한 생활이니 여기서 그 차이가 완연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시므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요 7:7]고 단언하신 것처럼 우리도 지금 같은 증언을 하므로 세상은 우리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미워하게 되어 있다. 모든 세상이 악마 아래 있다고[요일 5:19/요 16:11/14:30] 증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상반되는 모든 세상 종교를 마귀의 속임수라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런 악한 세상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과연 믿는 사람이 생겨날까 의구심을 품을 제자들이 간혹 있을 줄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들었으니 너희 말도 들을 것이라 즉 듣고 "지킬 것이라"[요 15:20]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들을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우리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세상을 악하다고 성령의 감동으로 증언하던 스데반 집사는 그 때문에 불 같은 세상의 증오를 받아 현장에서 돌팔매에 즉사했다[행 7:58]. 다시 말해 우리도 그렇게 죽을 각오만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 영광도 구하지 않는다[요 5:44]. 우리는 어차피 죽기 위해 세상에 난 것이다. 이왕 죽으려면 떳떳이 값어치 있게 죽을 일이다. 우리의 증언을 위하여 단 몇이라도 스스로 깨닫고 진리에 이른다면 우리는 크나큰 보람으로 여길 것이다.
때문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요 15:18-20] 하셨다. 때문에 이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로 굳게 작정함으로써 매를 맞는 등 치욕을 당했을 당시 12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행 5:41].
그리스도의 양면성
우리를 심판하시는 재판장으로서의 "소멸하시는 불"의 측면에서는 당연히 악인들의 구원을 막으신다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랑"의 측면에서는 하염없는 눈물밖에 더 흘리시는 것이 없다. 눈물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이 그러면 약하심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강단(剛斷), 결단(決斷)을 보라. 그것은 강함이다. 생명의 힘이다. 그러므로 약함도 강함도 아니신 오직 하나님의 풍성의 한 측면이시다. 양면성에서의 그 한 면모이신 것이다. 아들의 양면성은 아버지의 양면성이시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성경이 결코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이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 이런 "눈물"의 거짓말을 지어낼 것인가. 거짓 눈물은 있어도 우시지 않았는데도 우셨다는 그런 눈물에 대한 거짓말은 없는 법이다. 우셨기 때문에 우셨다고 했을 뿐이다. 더구나 강함을 자랑하고 약함을 죽기만큼이나 싫어하는 이기주의적인 자기중심 일변도의 이 세상에서 남을 속이려는 목적으로 이런 거짓말을 지어낸다면, 당연히 강함으로써 그런 '예배의 대상'을 치장하고 꾸며야지 연약하게 울고 눈물 흘리는 인물로 그려놓을 이유가 없다.
거짓말도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할 아무 목적이 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눈물"을 지어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고 강함은 강함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었다고 그리스도를 설정해놓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이제는 오로지 강한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해야 할 필요성에서 "눈물"이니 "운다"느니 하는 그런 쩨쩨한 것으로 나타낼 이유가 만천하에 없다.
어떤 젊은 부인은 성경에 이런 "우셨다"는 기록을 보고 너무 마음에 와 닿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세상 종교의 교조 중 어느 누가 "약하게" 눈물을 흘렸다고 그려놓았던가. 만일 그런 기록이 지금이라도 발견된다면 필자 자신이라도 그 종교를 새삼스럽게 다시 살펴볼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왜냐면 거기에는 분명코 진실의 일단(一端)이 반드시 스며 있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이에 대한 답변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설명한 가운데 이미 충분히 되어졌다고 생각한다. 이회장은 두 가지로 나누어 물은 셈이다. 하나는 "사회 범죄"요 다른 하나는 "시련"이다. 전자가 언급된 것은 종교인이라면 그 종교가 표방하는 대로 사랑, 자비에 기초한 의로운 생활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왜 현사회에서 향도 역할을 못하느냐 하는 것이고, 후자가 언급된 것은 그만큼 종교인의 수가 많다는 것은 소위 기독교 국가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뜻이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되어졌다고 생각한다.
21, 22. "로마 교황의 결정에는 잘못이 없다지만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질문했고, 또 다른 질문[22]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어떤 사람들인가, 왜 독신인가?" 했는데, 불교에도 비구승과 비구니가 있지만 이에 대해 궁금증이 있는 것은 인간은 식욕 다음에는 성욕이라 할 정도로 이를 무시 못하는데도 굳이 이를 고집하니 대단한 금욕(禁慾)이라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야 누구나 나타낼 수 있는 궁금증이다.
이회장의 모든 질문은 단순히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저변에는 "하나님이 만일 참으로 존재하신다고 하면", "성경의 내용이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다면" 하는 토를 달고 나오는 것이니, 다시 말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이요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못하고 또는 성경을 믿을 수가 없다는 딴에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대답은, 모든 실상을 있는 그대로 여러 방면에 걸쳐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에 관해서나 또는 신부, 수녀의 독신에 대해서는 그 종교 나름대로의 일정한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단지 여기서는 성경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 7:1]고 말한 것과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鼓子, 거세된 남자, a eunuch)"[마 19:12]가 있어 "이를 받을 만하거든 받으라" 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나 여자가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나 의미는 마찬가지니 곧 반드시 남녀 짝 지어 사는 것이 이제는 사람으로서의 책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 마지막 때에 오신 것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이회장이 질문한 "지구 종말"은 이미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후로도 2천년이나 세월이 흘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식하고 번성한다"는 그런 옛 개념들이 마감되는 바로 그 뜻을 가리키는 "마지막 때"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기타 의미로는 주제별로 적절한 설명이 추가로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 오셨다는 것은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의 "마지막 때"[단 12:4]와는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마지막 때"의 그 종결 구간(區間)을 다니엘이 가리킨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아담 이후 노아 홍수 때까지가 초기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 오시기까지가 중기이고 그리스도 오신 때가 말기 초두(初頭)이다. 한 기간의 세월이 어느 정도냐 또는 평균되게 나타나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시대별로 나타나져 있는 그 의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분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는 노아 홍수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는 버려진 것임을 '초기'가 드러내는 내용이고, 따라서 오직 인간이 '구원 받는 것' 외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을 입증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그 구원을 위한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의 의미가 모세 율법 시대로서 분명히 드러났으니 이것이 '중기'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 구원자의 임하시는 '때'와 그리고 그 구원의 '의미'를 대충 알려 교육시키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시대가 바로 '말기'인데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새 창조]이 한창 진행 중인지라 그 기간이 사정과 형편 따라 자연스럽게 연장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통, 통신 분야의 신속한 왕래를 상징하고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각종 기술의 진보를 족집게 집어 내듯이 밝힌[단 12:4] 다니엘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마지막 때를 다시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그 하반기의 최종 말기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모세 율법 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형통하는" 그런 한 때였다. 왜냐면 사전 교육 차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서 손해 볼 일이 없음을 주지시키는 말하자면 유치원 시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리스도라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이 폐기됨과 동시에 그 시대는 종료되고,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오직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 있는 그런 '완전히 성장한 어른'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천국 복음[福音, 희소식]이 제대로 온 천하에 전파되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끝나게 하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그 때부터가 세상 끝 날에 해당되는 것이요, 그 때는 그런 끝 날의 '시작'이었으므로 이제 오늘날은 그 끝 날의 '종료'를 고하게 되어 있는 때다. 그러므로 세상이 지금까지 지탱해 온 뜻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아직도 구원 받을 사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속되고 있다는 데에 결론이 모아진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이 인류 구원이라는 주제 외에는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이니 위의 지적대로 노아 홍수로써 이미 증명된 것이다. 때가 되면 한 줌 바람처럼 날아갈 그런 성격의 의미밖에 없다는 그 뜻이다. 가뜩이나 시한부인데다 지금은 그 종결점에 와 있다. 이 외에는 이 세상의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 끝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완전히 망각 속에 파묻히게 된다. 기억함으로써 득이 될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노아 당시의 문명이, 오늘날 그 어디서나 찾아볼 수 없이 완전한 망각의 늪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몇 줄의 기록이 전부다. 한 때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만 우리가 알고 있을 뿐인데 이 세상도 그와 같이 된다는 그런 의미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분석하면 기껏해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영속성이 없고 무가치하고 공허한 것들로서 죽음의 세상임을 특징 짓는 것일 뿐이다[요일 2:15,16].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부터 오는 욕구 정도, 그리고 보기 좋은 옷, 보기 좋은 물건, 보기 좋게 으리으리하게 지은 집, 그리고 이웃과의 비교 우위에서 오는 만족감 등등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요약했다. 만개한 꽃보다 반개(半開)한 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 것은 전자는 쇠락만 남았을 뿐이나 후자는 미래의 희망이 있기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기까지는 성공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에 그 맛으로 지내왔으나 일단 성공하고 난 뒤면 오직 추억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이 자기중심 곧 일개인의 단독적인 삶, 절해고도의 외로움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몸으로 뭉쳐 모두가 나의 지체가 되어 있으면 상승(相乘, 두 가지 이상의 요소가 합하여 곱절의 효력을 내는 일)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승(相昇, 서로 끌어 올림) 작용을 하여 무한대로 영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된다.
3운 법칙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인생 흥망성쇠의 높낮이는 오직 자기중심대로 사는 이 세상에 한정된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흥성(興盛)뿐이다. 쇠망(衰亡)은 죽음의 세계인 영원한 불 못의 영역일 뿐이다. 인생이 모두 자기중심으로 화해 버렸으니까 그 꾸려가게 되어 있는 삶 역시 강제일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는 그리고 영적인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에서 강제, 간섭이 없다는 사실은 시종 변화가 없으나 이 세상에서의 한 평생 되어지는 일만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강제력에 의함이다.
남녀 창조
따라서 이제 끝 날이 와 있는 오늘날 생육하고 번성할 필요성은 사라진 것이다. 필요는 사라졌지만 다시 말해 인간의 생육 번성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졌지만, 사람 삶이 계속되고 있는 한 새로운 사람들은 태어나고 있는 것이고 또 이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으니,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 얻을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예정된 순서를 따라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애초 이렇게 남녀로 창조하신 뜻은 사랑 가운데서 둘이 하나됨을 이루도록 하심이었고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에덴낙원에서의 영적인[신령한 몸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생식 방법이 있어 자녀 생산은 거기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버림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자 이 지상(地上)의 자연법칙에 따라 자녀 생산을 위한 목적 역시 양성으로 존재하게 되는 필수불가결의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 의미는, 바울이 남녀 불문하고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개인적인 판단으로 경고하고 있고[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고전 7:40] 그리스도 친히 "천국을 위해 평생 혼자 지낼 수도 있으니 이를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처럼[마 19:12] 이제는 더 이상 남녀 한 몸으로 부부 관계를 맺어 사는 것이 사람 삶의 정상 궤도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이제 멀지 않아 전개될 영원 세계에서는 남녀 성별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 분명히 예시(豫示)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금욕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의미다. 성경 그 어디에도 금욕하라는 뜻을 내비친 데가 없다. 오히려 정욕을 참기 어려우면 억지로 혼자 지내려 할 것 없이 결혼할 것은 권고하고 있다[고전 7:9]. 혼자 지내는 것이 낫기는 하나 '억지로' 결혼하지 않는 것보다는 못한 것이다.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 하고 바람직하다 하는 것은 결혼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믿음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의 주님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천국을 위함"임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분명히 하셨다. 요컨대, 사람이면 의당히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는 그런 고정 관념에는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또 이 세상 삶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된다. 물론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독신으로 있어도 성생활을 아니하는 것은 아니나 이는 범죄가 된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동정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영원 세상에서는 남녀 한 몸되는 일이 필요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하지 않는 일을 더 좋은 영원한 천국에서 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남녀 성별이 사라진다고 했지만 그 때 가서는 이 자연계에서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옷을 입고 있는가 그 연원부터 살펴보면, 에덴낙원에서 범죄함으로써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인간[아담 부부]은 신령한 몸을 박탈당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죽는 의미는 신령한 몸을 잃고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가는 상태를 말함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몸을 감쌌던 광채는[신령한 몸으로서의] 사라지고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당장 수치를 느껴 무화과 나무 잎사귀를 뜯어 아랫도리를 가린 것으로부터 옷의 역사는 시작되었음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누구 앞이라 생각했기에 창피스러웠던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다. 주변 영물들을 의식해서다. 영물은 그런 성별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몸이기 때문이다. 영계는 자연계의 상위(上位) 개념의 세계다. 따라서 하위 세계의 생물들이나 드러내고 있을 암수 구별의 신체 구조이니 그런 것이 없는 영물들에 비할 때 수치를 느끼게 되어 있음은 자연스럽다.
그 때까지는 빛으로 가려져 있어 그 수치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뜻이다. 즉 현재의 인간[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을 기준하여 표현함이다. 다시 말해 현재는 인간이면 누구나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기준하면 분명 그들은 벗고 있는 것이다. 몸에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령한 몸이었을 때는, 영롱하고 찬란한 광채가 직접 몸으로부터 발산하여 몸을 휩싸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옷과는 비교도 안되는 영광스러운 단장 또는 치장이었던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현재의 인간 옷은 왕년의 에덴낙원에서의 영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부끄럽고 빈약한 잔재(殘滓)일 뿐이다. 그래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함"[마 6:28,29] 밝히신 것이다. 인간의 옷은 사람이 지은 것이고, 백합화의 옷은 하나님 창조 그대로의 옷이다.
하나님 창조하신 대로의 애초의 인간의 옷은 범죄로써 영구적으로 벗겨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신령한 몸으로서의 빛의 옷을 다시는 입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본성은 그대로 있어 옷을 지어 입는다. 또 실상 엄동설한의 철을 당하면 짐승은 끄떡도 않는데도 인간은 동사(凍死)하기 때문에 짐승들의 털을 대신해서라도 옷은 필수이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빛으로 온 몸이 휩싸여 가려져 있으므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애초 인간이 남녀로 창조될 때처럼 혼자로서의 아담[부부] 하나만 달랑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처음 때와 달라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고[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의 세상에서 그러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웃하는 영물들도 무수하므로 "독처(獨處, 혼자 지냄)하는"[창 2:18] 상황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 역시 영물들과 같은 완전한 몸이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리스도 역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실 때 더 이상 그런 성별로 된 육체가 아니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가장 여성적인 아름다우심과 가장 남성적인 늠름하심을 겸비한 모습이시다. 이는 애초 첫 사람 아담이 모습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렇게 되신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한 후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니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한다"[고후 5:16]고 했다.
이 뜻은, 그 다음 구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17] 한 대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둘이서 하나 된' 이중(二重) 구조가 되어 있음이다. 남녀 성별로서의 짝을 이룸이 아니라 각자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짝을 이룸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영혼'과 '육체'로서의 짝이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와 이런 이중 구조를 이루어 계시므로 이러한 불가분의 위치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인식되심은 당연하다.
즉 더 이상 남자로 계시지 않고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최초의 아담의 모습으로 계심이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니, 그리스도께서 이전과 같이 여전히 남자로 계시고 우리 역시 현재와 같은 성별(性別)로 천국에 가서도 나누어져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남성만을 편드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공평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성별을 수시로 바꾸실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니 그리 되면 우리 역시 형편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수시로 바꾼다는 의미가 된다. 고로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으니 그냥 과거 여자가 있기 전의 아담처럼 완전한 몸이면 깨끗하고 산뜻하게 된다. 남녀 성별이 없는 것이 완전한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성별이 없는 천사들이 "불완전하다" 하겠는가. 성별이 있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남녀가 서로 보충 보완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그 자체적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그 뜻이다.
말하자면 아담의 ‘한 사람’으로서의 완전함이 남녀로 양분되니 남자는 여자가 있어야 완전하고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완전해진다는 의미다. 이제는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친히 각자에게 아내/남편보다 더 가까우신[고전 7:1-40] 짝으로 위치해 계시니 즉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동시에 '머리와 몸'의 관계]이시니, 천국에서는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 일도 없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이익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라는 측면과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라는 측면으로 양면성을 이룬다. 영물들 역시 그런 품성 면에서의 양면성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인간의 경우,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이 하나님의 그런 양면성과 대응된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원리원칙으로서의 진리를 따라 한 치 오차 없이 집행해 나가시는 "소멸하시는 불"로서의 품성은 인간으로 치면 엄부(嚴父)에 해당되고, 그런 원칙을 살리면서도 살신성인 식으로 우리 위해 친히 희생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이시니 이는 자모(慈母)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될 당시의 아담 역시 영혼으로는 이런 품성의 양면성으로 되어 있었고 육체 면으로는 이미 창조되어 있는 자연계의 여러 생명체[특별히 동물]의 암수[雌雄]와 같은 기능적 양면성으로 조화 통일되어 있었는데, 여자가 창조되면서 그래서 아담의 그러한 육체를 여자가 물려받음으로써 이 양면성이 이제는 육체의 형태를 따라 양분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모성에는 여자로서의 기능, 남성에는 남자로서의 기능으로 분류되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하나로 있던 것이 둘이서 역할 분담이 되었으니 둘이 합쳐져야 완전하지 그 하나로 있으면 불완전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천국에서는 그런 나누어져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양면으로 각자가 구성되어 있게 됨으로써 성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을 그런 완전성[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즉 남녀 성별과 대칭되는]으로 표현하셔서 아브라함 "품속"에 있는 나사로라 하신 것이다[눅 16:22].
우리가 생각할 때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래이므로 사래의 품속에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하겠지만, 주님은 이와 같은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애초 창조 직후의 아담이 처해 있던 것과 동일한 상태를 나타내어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라 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의 위치를 말씀하심이기도 하다[롬 4:11].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의 행적(行蹟)이 바로 오늘날 세상 중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처음부터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단지 앞서의 설명대로 '대표성'["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을 띠시는 의미로 그렇게 불러 그렇지, 인간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즉 어버이로서의 의미다. 남녀 사랑도 그렇다. 애초 아담 홀로 있다가 남녀로 양분되면서 현재 둘이 되어 있으므로 비록 둘이기는 하나 원래의 그 하나로 존재하던 것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일종의 귀소성(歸巢性)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남녀 사랑에 무슨 대단한 신비가 깃들여져 있는 것도 아니다. 고로 남녀 성별 자체가 없어지면 즉 천사들처럼 성별이 없어지면 서로에 대한 육체적 욕구 또한 말끔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런 욕구를 제거하시면 그런 욕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런 아기자기한 애욕은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는가" 하고 탄식하려는가.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소리다. 이런 ‘귀소성’ 사랑이라는 것은 앞서의 설명대로 하나로 존재하던 것이 여럿으로 갈라져 나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가 성령으로 출생하는[요 3:5,6,8] 것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즉 여자는 남자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존재하게 되었음과 같이 새 피조물로서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으로 "물려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인즉, 남자와 여자가 육체로 "한 몸이 되는"[창 2:24] 것이나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이치는 같다. 그래서 육체와 관련된 사랑은 그림자이고 시한부적인 것이나 영으로서의 사랑은 실체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것이라 둘은 서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니 아버지와 내가 또한 그러하다. 또한 이 사랑은, 그리스도[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와의 종적 관계만 아니라 나와 이웃들과의 횡적 관계로도 연결되니 나의 이웃 곧 형제들도 똑같이 각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호간의 사랑은 이전 자연계에 있을 때의 남녀 사랑보다 훨씬 더하고 강도가 높은 것으로서 그래서 모든 것이 영계에서는 이 자연계보다 완전하다 하는 것이다.
아담의 남녀 한 몸 관계는 말 그대로 육체적인 것이라 육체적 접촉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으로 된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한 영 관계는, 우리가 영적인 것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실상 당장은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하나[우리의 현재의 이 신체적 제약이 상상 외로 심각한 것이지만 영적인 몸으로 변환되면 고유의 제 기능이 100% 발휘된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즉 그런 신령한 몸으로서의 환락, 쾌락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영역으로는 감히 감도 잡지 못할 그런 환상적인 것이 된다.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에 있는 식물만 보아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든지 "생명나무"라든지 하는 모두가 어마어마한 능력의 그야말로 신령한 것들이요, 그리고 동물들 즉 영물들도 악령 사단이라든가 성경에 나타나는 "거룩한 천사들"의 능력으로써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는 감히 비교도 안되는 것이다[롬 8:18]. 그래서 베드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벧전 3:10] 했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속해 있을 때의 "한 몸" 관계에서의 일은 천국에서는 완전히 잊어버려지는 망각 속에 묻혀 있음과 동시에 영으로서 하나 되는 "새 생명"[롬 6:4]의 새 질서와 체제가 영광스럽게 확립된다. 천국에서는 이 자연계에서 우리가 알던 그런 모든 그림자와 같은 것이 실체에 비하면 전혀 가치가 없어 영구적으로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서는 오히려 이런 육체에 있을 때보다 더 가혹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져 있을 것이니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까닭이다.
때문에 성경은 그런 화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먹고 사는 우리들로서 혼자 지내는 것이 좋고 지혜롭고 복이 있다 하였다[고전 7:1-40]. 애초 아담 창조 때에는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좋다" 하니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왜냐면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짝의 개념에서 오늘날의 우리는 그 최고봉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이다.
따라서 아내/남편이 있는 자는 있다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바랄 것도 아니고 없는 자는 없다고 해서 거기 괘념하여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경고한 것이다[:27]. 한 마디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녀 딸"[:36]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은 남녀 공통으로 그 동정(童貞)을 말하는 것임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는 "마지막 때"[행 2:17/히 9:26/요일 2:18/벧전 1:20]로서 때가 마지막인데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의미가 지속될 리 없다.
물론 한번 명령하시고 정하셨으니 그 일이 계속되는 것이야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이기는 하나, 이제는 이전과 같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으니 이를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하셨으니 과연 새 피조물 시대에 처한 새 선언(宣言)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이신 것이다[요 14:24].
물론 바울이 지적한 그대로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것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는 것이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에서도 "결혼하는 것이 죄 짓는 것은 아니라"[고전 7:28] 한 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억지가 아닌 범위 내에서는 혼자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강력한 권유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혼자 지내는 이들이 "더욱 복이 있다"[:40]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할 것이요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않을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은 사랑으로 주인 의식에서 하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간섭을 받아 부득이 해서 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기독교는 향후 완전 말살된다. 모두에서도 밝혔지만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의 종교만이 이제 곧 유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폐해지지 않는다. 이회장은 교황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천주교의 교리를 가지고 따지자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성경이 진실이라고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양식(良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저변에 깔고 이회장은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천주교도 개신교도 불교도 그 어떤 종교도 그 교리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핵심이 됨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논의의 기준이 되어야 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세상 종교를 비하, 격하, 폄훼함이 목적이 아닌 만큼 그런 것보다도 다음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아주 멀지 않은 장래에[실상을 말하면 바로 코앞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교황을 위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된 일체의 것이 이 지상에서 아주 말살될 정도로 그런 급박한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사실인데 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예언 그대로다. 다름아니라 말 그대로의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므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은 깨끗이 청소하려고 나설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천주교가 개신교와 교리상으로 서로 같지 않으나 성경과는 다른 내용으로 교리를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신교나 천주교나 똑같다고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러나 개신교나 천주교나 한 가지 공통점은 표방하기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유일의 구원자시라는 점에서 일치하므로,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비록 한 때이지만[적 그리스도의 시대는 영구적이 아니라 잠시 지탱되므로] 그런 일시적인 말살 정책을 당한다는 의미다.
자칭해서 인류 구원자로 나서게 되어 있는 "악한 자"가 출현하여 그리스도께 관한 일체의 의미를 아주 쓸어 없애 버릴 것을 성경이 예고하고 있는 까닭이다[살후 2:3-12]. 따라서 어쨌든 '그리스도'를 표방하고 있는 두 종교인만큼 그 악한 자의 철퇴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하지 못할 운명이다. 때문에 교황이 폐지됨은 물론 천주교든 개신교든 그 "악한 자"가 주도하는 종교에 모두 흡수될 것이다.
즉 단 하나의 통일 종교의 깃발 아래 몰리는 것이다. 종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는 통일된 체제를 나타내 보이게 되고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분열과 전쟁으로 인한 폐해, 그 모든 알력과 분쟁의 불합리성을 신물 나도록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와 사랑 가운데에서의 한 몸의 이치로 된 통일과 조화를 바라야지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새 창조로서의 새 생명과 새 사람으로서의 하나를 목표해야지, 이를 떠나서 인위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하나를 이루자는 무리한 욕심이니 자연적으로 이런 적 그리스도의 흉계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때가 오면[지금 바로 코앞에 다달았다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다시는 인류의 구원자로 부각되지 않고 단지 일개의 선지자 정도로만 인식되어져 격하될 것이다. 이미 밝힌 대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 사단이므로 이런 일을 벌써 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자기 때에 맞추어 하도록 "막는 자가 있어"[:7] 지금까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자기 시대가 되었으니 거침없이 진행시킬 것이다.
과학 문명의 갑작스러운 발달도 이 실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한 양으로 기뻐하지만, 실상은 그와는 반대로 이런 악령 사단의 세계 통치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꿈에 젖어 있는 것과 같이 이회장도 과학의 발달로 종국에 가서는 무병장수 시대가 올 터이니 신의 존재도 필요 없게 되지 않는가 했지만 그것은 오해다. 앞서의 설명대로 오직 우리 인류의 유일한 희망과 의미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리고 신령한 몸으로 되돌아가는 '몸의 구속 곧 양자됨"[롬 8:23]밖에 없고 그것만이 시급하다.
사람이 신령한 몸이 되면 이런 과학적인 지식이나 응용 기기(器機)가 무용지물이 된다.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이다보니 과학이 만능인 것처럼 비쳐질 따름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보조 수단으로서의 과학 이기(利器)이므로 그렇다. 완전한 몸 즉 신령한 몸이 되면 천부적으로 그런 과학적 기능을 자동적으로 수행하고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물들[천사들이나 악령들]의 능력이 바로 그런 힘의 과시인 것이다.
그만큼 범죄로 인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 버린 우리 인간의 실상이 부각되어 진실로 목불인견의 참상(慘狀)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진실을 말해 주는 성경을 믿지 않기에 이런 사실을 알 리도 없다. 예컨대 우리는 밤중에 밤을 밝히기 위해서는 발전(發電) 기기(器機)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그 몸 자체가 광채를 발산하므로 발전기 그 자체가 되어 있다는 그런 식이다.
악령들이 스스로를 가장하여 나타내는 오늘날의 소위 외계에서 왔다고 속이는 ufo 현상들이 바로 그 증거다. 밤중에 나타나는 그들 영물로서의 광채는 현란함 그대로다. 악령들이 영물로서의 이미 지적한 대로의 능력으로 그런 빛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으로든 또는 우주선 등의 물질로든 무엇으로든 변형이 가능하다. 이것이 신령한 몸의 능력이다.
예로부터 많은 풀들 중에 약초가 있고 독초가 있는데 이런 분류가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하겠지만, 천사들이 아니면 악령들이 그런 지식을 인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악령들이 그런 일을 할 때는 인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 신 노릇을 해서 '우리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혼동과 혼돈을 일으키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이 이방 신, 우상 신을 어지러이 위했고 지금도 그러한 것은 모두 그런 차원에서의 사단의 책동이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경배를 받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찌하든 인간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함이 그들의 궁극적 목표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악령들의 존재를 얼마든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물론 악령들은 이를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 등으로 속이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들 스스로 왕년의 에덴낙원에서의 그 영물들임을 드러낼 리 없다. 그리고 이를 소위 "증명하기 위한" 갖가지 이론과 증거들을 들이대어 설득시키려 하고 그리하여 온 세계를 완전히 장악할 것이다.
육체[인간]는 영물들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 날고 뛰어도 영물들의 지능은 당하지 못하므로 불가항력으로 설복당하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이 악령들의 먹이가 되느냐 하면, [성경에서 경고하신 대로]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지 않을 때 모두 그 대상이다. 아무리 치밀한 어른들의 ‘기교와 계략’도 어린 아이의 ‘단순함’ 앞에서는 원래 맥을 못추는 것처럼, 사단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과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한 법이다.
그러나 세상 따라 덩달아 지혜롭게 되어보고자 하는 그 순간 이미 그 단순함의 난공불락의 아성(牙城)은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니 조심할 일이다. 아담 부부의 범죄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전례(前例)임을 망각하지 말 것이다. 사단의 말을 따라 "지혜롭게"[창 3:5,6] 되고자 하다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악령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시대라고 한 것은 오늘날 소위 "UFO"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소행들이기 때문이다.
영물들은 능력이 있는지라 인간의 형태로도 자신을 변환시킬 수 있고 각종 물질, 생명체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육체로서의 우리들 인간에게는 가히 신(神-고후 4:4)들이다. 신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이런 방자한 짓을 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성경은 밝히기를 이들의 출현은 심판의 전주곡으로서 하나님 친히 그 배후에 계심을 명백히 하고 있다[살후 2:3-12]. 모든 일은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예정하심을 따라 되는 일이다.
단 이들 악령들은 로봇은 아니니 그런 예언[요한 계시록과 같은]이 있음에도 그들은 이를 믿지 않고 잘만 하면 그런 하나님의 뜻도 뒤집을 수 있거나 실현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과신에 사로잡혀 있을 따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르심이고 일절 창조주의 능력이라 하여 전단(專斷), 전횡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함이니 악령들은 이를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네도 잘만 하면 자기 복안(腹案)대로 해볼 만하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foreknowledge] 미리 정하시는[predestination] 것을 당할 수가 없는데도, 이 원리원칙을 따라 만사를 진행시키신다는 이 하나에만 명줄을 걸고 그와 같이 덤비는 꼴이다. 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 바탕이 이 공평공정성, 원리원칙주의 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기초한 것임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소위 "외계인"으로 속이기 이전 시대에는 "신선(神仙)" 따위로 속여 왔으니 동북아 지역[중국 일원]이 그 무대였다. 그러나 오늘은 과학시대라 하여 인간들의 어설픈 천문 지식을 활용[악용]함으로써 외계 문명[과거에는 선계(仙界)], 외계인[과거에는 선인(仙人) 선녀(仙女)] 소동을 부리고 있는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령들은 그런 소위 "외계 우주선", "외계인"으로 스스로를 변환시킬 뿐 아니라 만들 수도 있는 것이야 우리 상식으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간도 로봇을 만들고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어 조종하지 않는가. 소위 "외계 우주선"이 추락하여 파괴되는 모습을 보이고 "외계인"의 사체(死體)라고 하여 남겨두는 짓거리들이 모두 그런 악령들의 제품인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 때를 만난 영물들이니 무슨 일을 못하랴. 나중에 악령들은 말하기를, 이 "지구상에 악인들이 있고 선인(善人)들이 있음과 같이 우주 외계에도 그런 ‘돌팔이’ 악한 외계인들이 있어 오늘날의 ‘외계인 시대’를 틈 타 출몰한 것"이라고 그럴 듯하게 둘러댈 것이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 상식과 양식으로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요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4,15] 함이 그런 예다.
논리적이라 이론이 정연하다. 이는 모든 진리의 특성이다. 왜냐면 정확한 논리를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코 주먹구구식이 아니다. 사람을 논리의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은, 우리가 간단한 논리로도 모든 사물을 충분히 살피고 깨달아 믿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가장 기본되는 논리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고단수(高段數)의 속임수도 발붙일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이 "어린 아이 같음"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나 영물이나 자기 스스로 그릇된 길로 잡아들기를 작정하면서부터 그 논리를 따르는 천부적[하나님 주신] 능력은 말하자면 오[誤] 작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인[因]과 과[果]의 관계로써 인간 스스로가 자기 눈을 스스로 찌르며 변천해 가는 과정을 설명했거니와[롬 1:21-31] 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히 10:31] 일이라 할 것이다.
이미 이 시대는 다니엘의 예언[단 12:4]대로 이루어진 때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이라 했는데, 오늘날 통신, 교통망의 급속한 진전을 보라. 이런 것이 완만하게 규칙적으로 상승선을 그려 왔으면 정작 어느 시점인지 집어내기가 불가능하겠지만, 갑자기 이 20세기 전후로 해서 용수철 튀듯이 화산 폭발처럼 용솟음쳐 오르는 상승선을 그린 후 연이어 그 수준의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정확히 이 시점(時點)이라고 간단히 집어낼 수 있는 터이다. 곧 20세기 전후의 시점이니 곧 우리가 처해 있는 오늘날이다[그림 14]. 그리고 이를 강조라도 하듯이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지방에서 어마어마한 대충돌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상태라고 세상은 말하나 이미 우리는 이것이 다름아닌 다음 예언의 성취로 단언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天使長]과 그의 사자(使者, 그 휘하 천사들)들이 용(龍, 악령 사단)으로 더불어 싸울 때 용과 그의 사자들[그 아래 악령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들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다.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 쫓겼다"[계 12:7-9]는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하늘에 큰 음성이 들리기를,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다’"[:10]고 했다. 그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證言)하는 말을 인하여 사단을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가 있을 것이니,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11,12]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성경에 이미 예고된 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오늘날이다. 그런 적 그리스도 출현 차원에서, 현 로마교황 베네딕도 직후의 교황 대에 이르러 천주교는 실질적으로 와해된다고 하는 예언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이 예언자는 역대의 모든 로마 교황에 대하여 정확하게 총체적인 예언을 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로마 교황에 대한 예언도 겸하면서[현 교황이 "베네딕도"라 함은 그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했던 예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예언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이미 모든 상황은 그런 쪽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런 예언은 결과론적으로 볼 때 적 그리스도의 편에서 하는 예언이지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이회장이 마지막 질문으로 삼은 "지구 종말"[질문·24]은 이미 그 순서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대로 당장 지구가 어찌 되는 것은 아니고 악령 사단이 통치하는 시대는 일단 마감하고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천년간 지탱하게 된다.
그것이 종결되면서 지구는 붕괴되고 마지막 대심판이 있은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된다. 이런 시대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더욱 복이 있다"고 단정한 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지혜'가 "혼자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하신 바로 그러한 지혜이다.
성경 어디에,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살라고 하던가. 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사는 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는 데가 아니고 싸우고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오직 일하라고 세상에 보내신[요 20:21/4:34] 것이다. 진정 자유인으로서 살라 하심이다. '자유인'부터 되고 나서 자유인답게 일을 하다보면 나중에 진정으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세계가 오기 때문이다. 자유인이란, 양심에 부합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함이다.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면 살면 되지 구원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 매여 있기 때문에 구원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실 때 영생하지 못하는 존재로 지으셨다가 이제는 영생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구원"일 수가 없다.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도 없다. 처음부터 두 번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하게 창조하시지 재차 손을 보실 정도로 불완전하게 일하시지 않는다.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인간을 만드셨기 것이다.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나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러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생하게 되는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영생으로서의 정상적인 삶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굳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할 것인가. 온전한 정신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원한 고통을 받느냐 아니면 영원한 삶의 행복을 누리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결정 나는데, 어느 여가에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할 틈이 있으리요.
만일 인간이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즉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면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 자체가 이미 모순투성이가 된다. 그 무엇보다도, 아담이 범죄하기를 아주 잘했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그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영생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죽음에 이르는 범죄"를 두고도 "잘 했다"는 판단이 나올 정도로 엉성하고 엉망이라면, 여기에는 아무런 논리도 합리적인 것도 없게 된다.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하라고 이 세상에 우리를 남겨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갖추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족한 것이다[히 13:5/딤전 6:8].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바울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최상이다[7:1-40]. 남의 종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믿게 되었으면 그 이후에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애초 부르심을 받은 그 위치에 그냥 눌러 지내는 것이 합당하다[:21].
이 "합당하다"는 것은 사는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경우 그러하다는 의미다. 만일 이 세상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자유인이 되어야 하고 종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야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일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같은 종의 신분에 있는 이들을 상대로 하여 복음 전도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종으로서 머물러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인이 되어서 일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 나은 쪽을 따름을 말하는 것이다.
목적이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데에 있지 사는 낙을 누리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선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우리가 제창하는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회]'도 같은 맥락에서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사람은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선하고 바르게 사는 삶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잃는다"[:25]고 하셨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왜냐면 회개하는 자에게만 죄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인데[행 2:38], 회개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아 삶의 원리인 한 몸 체제를 지키지 못했음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와 같이 살지 않기로 작정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의 기독교를 '세상 종교'로 분류하여 그 중 하나로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아무쪼록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려 구차히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부정 비리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는 "약한 자"로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다는, 순전히 인간 탐욕에 의한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승패를 결하는 전장으로서의 '이 세상'
악신(惡神)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 설명했지만 인간과의 전쟁 차원에서 그러하다. 에덴낙원에서부터 이미 여자와 '사단'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이다[창 3:15].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악령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15]을 따라 "평강(平康)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이라"[롬 16:20] 한 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보조를 취하여 인류의 원수인 악령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발뒤꿈치가 상하게 되어 있고 이것이 우리의 고난 받음이요[골 1:24] 이 실상은 지금까지 그러하다. "마지막 아담"이신 '사람 그리스도'께서 악령 '사단'을 발로 밟으시니 우리도 따라서 그를 발 아래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마귀 '사단'의 일을 멸(滅, to destroy)하셨으니"[요일 3:8] 비로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어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시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원래의 삶의 법질서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원한 관계 곧 '둘이 하나를 이룸'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 되는 관계 곧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할 때는 반드시 능동적으로 적극적인 주인 의식으로 임하는 것이지 결코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강조했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는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분부하시고 명령하시니까 하는 것이라기보다, 내 스스로 즐겨서 좋아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하는 것이다. 비록 대소, 주종, 인과 관계이기는 하나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의식으로 행동함이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일 수가 없다. 사랑 관계이므로 사랑은 서로에게 종 노릇함인즉[갈 5:13] 상대는 따라서 주인의 위치이다. 또 스스로 자진해서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이므로 나 자신 완전 자유인으로서의 주인의 위치다.
다시 말해 종이요 동시에 주인이다. 삼위일체 원리에서의 양면성과 동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고로 이런 관계에서는 육신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법"[롬 8:2] 아래 있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하는 내면적인 극심한 갈등이 있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이 점을 간과하고 오해하여 여전히 죄에게 포로되어 지내는데, 한시 바삐 이에서 탈출할 일이다. "육신으로 살면 죽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육신]을 죽여야 살기[영생하기]"[8:13]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새 생명"[롬 6:4]으로 들어섰으므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 斷罪]함이 없다"는 것이지[:1,2], 여전히 "육신"[7:5-8:13]에게 포로되어 죄를 짓고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즉 죄 없다 하시는 일은 한마디로 잘라 말해서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일이 된다. 왜냐면 죄인은 죄인이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며 따라서 죄인이라 불러야지 의인이라 할 수는 없음이다. 죄인을 의롭다 하실 리가 만무하다. 고로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죄인을 의인이라 하고 죄인이면서도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 종교의 교리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사단'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사단'에게 조종당했을 경우에만 꺼낼 수 있는 주장이다.
그래서 죄 용서 받는 전제 조건으로 회개하라 명령하신 것이다[행 17:30/2:38].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명하실 때는 반드시 그 스스로 좋아서 기쁨으로 자진해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순종하라]는 것이지 절대로 마지못해 피동적으로 움직이라는 뜻이 아니다. 육신 가운데에서의 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순종이 피동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자연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순종이 감사에서 나는 자발적인 것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구원부터 하신 것이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이니 이 뜻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영생]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그에 부합하고 합당하게 의인으로서 살아야 하고[의인으로 새로 창조해 주셨으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첫 사람 아담이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처럼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